작가의 의식 저변에 짙게 깔려 있는 전공투 체험은 그의 작품 속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그려진 '전공투'는 어떤 것인가? 초기의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등에서는 '전공투'적인 것이 긍정도 부정도 안된채, 지나간 사실로서 그대로 등장한다. 나는 내 나름대로 버텼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 혼자만 남겨져 있었다는 '쥐'의 이야기나, 기동대에게 맞아 부러진 앞니를 보고 복수하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 여자 친구에게 "나는 나고,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야"하고 무심히 대답하는 '나'의 이야기에서 전공투 체험이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에 반해서 <상실의 시대>에서는 전공투에 관한 내용이 매우 왜소하게 다루어지고 있고, <댄스 댄스 댄스>에 이르러서는 '전공투'의 형사를 연상케 하는, 연신 담배를 입에 물고 서성거리는 꼴사나운 왜소화의 정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한때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전공투를 왜소화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전공투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정신적인 활로가 열릴 수 없다는 점에서 과거의 청산과 허무, 공허의 세계 속에서도 미래 지향적인 삶을 누리자는 하루키로서는 당연한 사리의 귀결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작품 속에 배어 있는 깊은 상실감과 허무, 그리고 아픔은 '전공투'가 몰아온 인간 관계의 상실과, 관념의 왕국이 무너져 버린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감성이 가장 예민한 20대에 너무도 충격적인 '전공투' 체험을 겪으면서 형성된 하루키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댄스 댄스 댄스>까지의 초, 중기의 거의 모든 작품 속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전공투'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는 전공투 세대다. 1967년 일본의 대학가는 정부에 항거하는 대학생들의 공동 투쟁의 전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67년 10월, 사토 총리의 베트남 방문을 저지하려는 실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한 교토 대학생이 피살되자, 전공투의 투쟁 대열은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확대되고 격화되어 갔다. 그 후 72년 2월, 아사마 산장에서 벌어진 경찰과 연합적군파와의 총격전에서, 마지막 전공투 세력의 전원이 체포될 때까지 5년 간에 걸친 이른바 '전공투 투쟁'은 막을 내렸다. 그러니까 하루키는 입학에서 졸업까지 대학 생활을 전공투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낸 셈이다. 하루키는 이 대학생들의 투쟁 대열에서 그 선두에 서지는 않았지만, 결코 그 대열 밖에 서서 방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대학생들의 이상주의적 관념에 입각하는 투쟁은 엄청남 상처와 상실의 아픔을 남기고, 하루키의 인격 형성과 세계관, 그리고 인생관 정립에 영향을 미치며 사라지고 말았다. 하루키 초기의 문학은 그 전공투 시절에 얻은 것과 잃은 것, 그리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돌아보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장식됐다. 그리고 그 후의 하루키 문학에 있어서도 하루키 문학의 출발점이요, 고향이라고 할 전공투 체험은 직접, 간접으로 하루키의 문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하루키 문학을 보다 깊이 그리고 보다 넓게 이해하는 데 참고 자료가 되고, 또 한국의 '운동권' 투쟁과의 비교를 위한 사색의 자료로 삼기 위해, 일본의 '전공투' 운동의 전모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자.
◈ '대학의 반란'이라는 전공투 운동 전공투 운동은 1960년대 후반에 일본에서 일어난 학생 운동을 지칭하는 것으로, 60년대 중반부터 여러 대학이나 학원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어 온 대학 분쟁이, 이미 단순한 개량 투쟁이나 반대 투쟁만으로는 밀고 나갈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70년 안보 상황에의 투쟁과 결부되는 가운데, 전국적인 대학 반란의 양상을 띄고, 급진적인 투쟁으로 변모되어 갔다. 전공투란 '전국 학생 공동 투쟁 회의'의 약칭으로, 직접 민주주의에 의거한 조직의 운영을 그 원칙으로 하고, 개개의 주체가 각기 주체적으로 결의하고, 책임을 유지하면서 결집된 대중적 전투 조직이며, 투쟁하는 주체의 결집체였다. 이러한 전공투 운동의 배경에는 60년대의 고도 경계 성장 정책에 의한 인플레 기조와 노동력 부족이라는 배경이 있었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정부에 의한 대학의 '노동력 생산 공장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생산 공장'으로의 재편 등이 있었다. 이러한 공격적인 재편은, 60년대 중반부터 학비 인상, 기숙사, 학원에 대한 관리 강화, 커리큘럼 개편 등으로 잇따라 구체화되었고, 60년대 말에 이르러 목적별 대학과 대학원만 둔 대학의 구상, 쓰쿠바 대학 설치 등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러한 교육의 제국주의적 재편과 관리 체제 강화에 대한 반발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학원 투쟁의 배경이었다. 동시에 세계 각지의 스튜던트 파워, 즉 프랑스의 5월 혁명, 서독, 미국 등에서의 세계적인 학생 반란과도 공통된 구조를 갖고 있었다. 즉 정보화 사회의 진행과 고도로 발달한 그 정보화 사회 속에서의 관리조작 체제의 강화에 대한 반역이었다. 따라서 이 무렵에 있어서의 학생 반란(대학의 투쟁)은, 학원이나 대학의 개별적인 영역을 넘어 '대학 혁명'의 슬로건을 등장시키고, '권력 투쟁'으로까지 치달았던 것이다. 또 전공투 운동은, 이른바 '대학 해체론', '자기 부정론'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권력 투쟁인 동시에 사상적인 운동이기도 했다.
◈ 전투적 행동대로서의 전공투의 조직 형태 전공투의 조직 형태는, 간접 민주주의 대신 직접 민주주의 방식을 채택하는 동시에 행동대적 요소를 가진 조직으로 형성되었고, '반대학', '자주 강좌'를 통한 학문, 사상의 재구축을 지향하면서, 좌익사상에 물들어 앞 뒤 돌보지 않고, 저돌적인 행동으로 치닫는 대원들을 끌어 모아 갔다. 이 전공투의 조직 형태와 운영 방법은 다음과 같다. 전공투는 섹트와 논섹트, 학생과 연구자, 개인 가맹 조직과 집단 가맹 조직이, 아무런 서열도 매겨지지 않은 채로 모인 조직이다. 대체로 도쿄 대학 투쟁의 경우는, 기존의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운동에 참가하는 개개인이 자유 분방하게 조직을 만들어 갔다. 이 조직에는 개인의 주체적 결의에 의해서만 참가하고 지도부는 만들지 않았으며, 시시때때로 제시되는 문제들은 전원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토의하게 되어 있었다. 반란은 요원의 불길처럼 확대되었다.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 공방전을 거쳐, 전공투 운동(학원 투쟁)의 물결은 순식간에 전국의 대학, 고교 및 전문 학교에까지 파급되었다. 바리케이드 스트라이크에 돌입하는 대학, 고교가 잇따라 발생했다. 1969년 2월에 도쿄 대학, 도쿄 수산 대학, 교토 시립 의대, 히로시마 대학 등이 바리케이드 스트라이크에 돌입했고, 3월에는 야마카타 대학, 도야마 대학, 간사이 카쿠인 대학, 4월엔 오키나와 대학, 오카야마 대학, 시마네 대학......등 한없이 계속되었다. 1년 동안에 국립 대학 75개 중 68개 교가, 공립대학 34개 중 18개 교가, 그리고 사립 대학 270개 중 79개 교가 각각 투쟁의 전열에 가담한 것이다. 이는 일본의 대학수의 거의 절반 가까이 되는 숫자이다. 그리고 투쟁의 스타일은 더욱 더 격렬해져 갔다. 쇠파이프나 화염병은 일상적인 무기가 되었고, 수제 폭탄이 개발되었다. 또 바리케이드 사수, 철저한 항전의 전술이 일상적인 일로 되어 갔다. 투쟁의 불길은 사방에서 불타 올랐다. 그리고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갔다. 그렇게 퍼져 나가는 가운데 불꽃은 하나가 되었다. 투쟁은 이미 개별적인 대학 투쟁의 영역을 넘어 '대학 해체', '교육 분쇄'의 위상에까지 치달았다. 그리고 이때 하나의 역설이 생겨났다. 여러 대학의 개별적인 전공투 운동은, 전공투 운동이라는 하나의 운동 자체가 된 것이다. 전국 대학의 투쟁 지도는, 반드시 하나 하나의 대학(및 고교)의 투쟁의 소재를 나타내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종합적인 단 하나의 투쟁이기도 했던 것이다.
◈ 전국 전공투 연합의 결성 학생 반란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그때가지 각 대학의 개별적인 투쟁 조직이었던 전공투들 사이에 횡적인 연락 조직이 생겨났다. 그것이 전국 전공투 연합이다. 1969년 9월 5일에 히비야 야외 음악당에서 개최된 결성 대회는, 전국 178개 대학의 2만 6천 명에 이르는 전공투 학샏들이 결집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대회는 의장에 도쿄 대학 전공투의 야마모토 요시다카, 부의장에 니치다이 대학 전공투의 아키다 에이다이를 선출하고,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채택되었다.
70년 안보 분쇄! 오키나와 투쟁 승리 10,10,10,21 투쟁 승리! 파방법(파괴 활동 방지법), 소란죄 공격 분쇄! 대학 입법 발동 분쇄, 전국 대학 투쟁 승리! 베트남 인민의 해방 투쟁 승리, 온 아시아 인민과 연대하여 투쟁하자! 반전파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싸우자! 전국 대학을 바리케이드로 점령하라!
히비야 야외 음악당은 아침 일찍부터 헬멧 모습의 학생들로 가득 메워지고, 슈프레흐코르 (Sprechchor:슬로건 등을 일제히 외치는 일)와 떠나갈 듯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전란의 시대 상징하는 미니스커트 여자들의 다리가 기묘하게 눈부셔 보였다. 계속 달려가고 있던 시대였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은 달렸다.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계속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들도 달렸다. 쫓겨서 달려가기도 하고, 쫓아가느라 달려가기도 했다. 남자도 여자도 달렸다. 기동 대원들과 샐러리맨도 계속 달리고 있었다. 그것이 60년대 라는 시대였던 것 같다. 시대는 뜨거운 꿈을 꾸고 있었다. 계속 꿈을 꾸고 있었다. 일종의 풍속이 범람했다. 모든 게 '풍속'이었다. 실수를 하면 투쟁마저 '풍속'이 되어 버릴 지경이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투쟁이라는 것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두들 기묘한 패션을 따르고 있었다. 그것이 시대의 패션이었다. 그리고 여자들이 예쁜 다리를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했다. 문화 인류학자인 앨프레드 크로버의 말에 의하면, 미니스커트의 유행은 전란의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핫팬츠와 미니스커트 차림의 아가씨들이 시대 속을 헤엄치고 다녔다. 회색의 압송 차량의 쇠창살 사이로 내다보이는, 긴자의 거리를 거니는 여자들의 다리가, 기묘하게 눈부셔 보였던 일이 생각난다. 아무튼 '풍속'이 시대의 '열쇠'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 전공투의 적은 민청과 경찰 기동대 그리고 매스컴 우익, 민청, 기동대 등이 당장 눈앞에 있는 적이라면, 매스컴 또한 거대한 적이었다. "도쿄 대학 투쟁은 매스컴에 의해 포위된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 그 무렵의 도쿄대학 전공투 기관지인 <신케키>에 실려 있었다. 이 말은 전공투 운동이 놓여 있던 좌표 같은 것을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캐스컴은 투쟁을 왜곡하여 선동적인 중상 모략이나 유언비어만을 보도하고 있었고, 과격파 캠페인을 펴, 활동가들을 폭도라고 부르고 있었다. 매스컴은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적의 하나였다. 그리고 눈앞에서 직접 대결하게 되는 적은 역시 민청과 우익, 기동대 등이었다. 니치다이 투쟁에서는, 실제로 투쟁 파괴자로서 투입된 우익과의 대결 없이는 운동이 진척되지 않았드며, 민청은 더욱 지독하게 굴었다. 민청은 '일반 학생'이라는 그 묘한 가면을 쓰고 투쟁 파괴자로서 활동한 것이다. 운동이 고양되어 갈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면, 언제나 전면에 나타난 것이 기동대의 벽이었다. 기동대는 데모를 규제하며 가두를 제압하고, 나중에는 아예 교내에 상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가스총을 난사하고, 두랄루민 방패로 테러와 린치를 가했으며, 온갖 포학한 짓을 다하는 정치 권력자들의 폭력 장치였다. 투쟁은, 이 권력의 폭력 장치로서의 벽을 돌파하며 무너뜨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전쟁터로 변한 도심 70년 안보 투쟁은, 11월의 사토 총리의 방미를 앞두고 최대의 고양기를 맞았다. 국제 반전 데이인 10월 21일에는,도쿄 시 공안 위원회가 모든 집회와 데모를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주쿠, 간다, 긴자 등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이 전개되어 도심부는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11월 16일과 17일에는 사회당 계열의 반안보 실행 위원회가 주최한 항의 집회(사토 방미 저지 투쟁)가 요요기 공원에서 개최되어 7만 명에 이르는 참가자들이 모였다. 전공투 반전 청년 위원회의 부대는 그 후 속속 가마다 역 주변에 결집하고, 격렬한 시가전을 펼쳤다. 그러나 기동대의 저지선에 막혀, 하네다 공항에는 돌입하지 못했으며, 새벽녘에는 투쟁이 끝나 버렸다. 이 날 체포된 사람은 모두 2천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날의 투쟁을 계기로 하여, 운동은 이윽고 무장 투쟁 및 게릴라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 레몬과 헬멧 - '자기 방어'와 '자기 주장' 최루탄을 터뜨리면 모두들 울었다. 울고 싶지도 않은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중에는 분해서 정말로 울고 싶어졌다. 개중에는 생각이 세심한 데까지 미치는 학생도 있어, 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레몬 한개를 갖고 다녔다. 레몬을 짜낸 즙을 눈에 넣으면, 이상하게 아픔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커다란 투쟁이 벌어지게 되면, 모두들 미리 다투어 레몬을 가지고 다녔다. 레몬은 점퍼나 코트의 포켓에 몰래 숨겨져 투쟁의 현장으로 나간 것이다. 투쟁이 있는 곳에서 역시 발견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헬멧이었다. 헬멧은 학생들의 자기 주장이었다. 학생들은 가지각색의 헬멧을 쓰고 있었다. 헬멧은 원래 게발트(gewalt, 폭력)나 투석에 대항하여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학생들에게 있어선 '자기 주장'의 상징이기도 했다. 특정한 섹트(당파)의 헬멧 이외에 각 대학의 전공투마다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색깔의 헬멧을 썼다. 은빛 헬멧, 금빛 헬멧, 여러 색깔이 칠해진 헬멧 등이 나타났다. 전면에는 '전공투'라고 커다랗게 씌어져 있거나 당파의 이름이 적혀 있고, 옆이나 뒤쪽에는 여러 가지 슬로건이 씌어져 있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캠퍼스에 새로운 헬멧을 사가지고 오면, 학생들은 스프레이식 페인트로 색깔을 칠했다. 이 헬멧의 끈을 타월을 끼워 넣어 마스크처럼 복면을 하는 게 투쟁할 때의 일반적인 스타일이었다
◈ 전공투 일지-학생반란의 궤적 다음은 전공투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다. 중요한 사건을 뽑아 연대순으로 기술한 것으로, 전공투 운동의 생생한 발자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67년 10월 8일에는 수상 사토의 베트남 방문 저지를 위한 투쟁이 하네다에서 벌어졌다. 이 날 교토 대학생인 야마자키 히로아키가 경찰과의 공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서 학살당했다. 68년 1월 5일에는 사세보에 엔터프라이즈가 기항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졌다. 전학련 1,500명이 히라세바시 위에서 기동대와 충돌하였고 이후 일주일 동안 현지에서 격투를 벌였다. 같은 해인 10월 21일은 국제 반전 데이로 신주쿠, 방위청 국회 등에서 격렬한 데모를 벌였고, 기동대와 충돌, 소란죄가 적용되었다. 해가 바뀌어도 전공투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69년 1월 18일에는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에서 공방전이 벌어져, 2일 동안에 걸친 격투를 벌였고, 간다에서는 해방구 투쟁이 있었다. 69년 4월 28일에는 긴자, 오차노미즈, 신바시 등에서 기동대와 충돌한, 일명 오키나와 투쟁이 벌어졌다. 같은 해 9월 5일, 드디어 전국 전공투 연합이 결성되었다. 전국의 학생 3만 4천 명이 결집한, 전공투 사상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11월 16일에는 사토 방미를 저지하려는 투쟁이 벌어져, 가마다 역 주변에서 기동대와 격돌, 약 2,000명이 체포된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듬해인 1970년 3월 31일에는 적군파 9명이 일본 항공기 요도호를 공중 납치한 사건이 있었고, 71년 1월 25일에는 적군파와 일공 혁명 좌파의 공동 정치 집회(지요다 공회당)가 벌어졌다. 72년 2월 19일에는 연합적군 사카구치 히로시 등 5명이 아사마산장에서 농성, 총격전을 전개하다가 28일에 모두 체포되었다.
◈ 야스다 강당 낙성 이후 20년, 1989년의 풍경 1989년 쇼와 시대가 끝나고, 풍경은 바뀌었다. 1969년 겨울, 야스다 강당의 낙성이 있은 이후로, 2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이 해에 우리가 본 광경은, 기묘한 허무주의와 그로케스크해 보일 정도로 애국적인 것으로의 회귀였다. 신주쿠 거리의 양쪽 연변에는 작은 일장기들이 여러 겹으로 이어져 있고, 그 한가운데를 검은색의 거대한 투구 풍뎅이와도 같은 영구차가 천천히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릿느릿 달려가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1989년 2월에도 우리가 계속 지켜 봐야 했던 광경은 어떤 광경이었는가. 눈을 감으면, 언제나 그 느릿느릿 앞으로 나가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슬로 모션 비디오의 풍경이 떠오른다. 1969년에는 사방에 '해방구'가 출현했었다. 신주쿠, 시부야, 오차노미즈 등지에.....그리고 그 후 '보행자 천국'이라 는게 출현했다. 권력은 그 '해방구'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하나 배웠던 것이다. 우리가 돌멩이와 화염병과 책상, 의자의 부서진 조각 따위로 '해방구'를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권력은 단 한 장의 시달서로 신주쿠의 대로에 '보행자 천국'을 출현시켜 버렸다. 그러나 그 풍경은, 우리의 '해방구'와 너무도 흡사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사이비한 것이었다. 20년 동안에 사람이 변하고 풍경도 바뀌었다. 풍경의 변모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들의 의식의 변모를 말해 주는 것이다. 거리의 광경을 보면, 사람들마저도 균일화되어 버렸다. 모두들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