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문학 저변에 흐르고 있는 공간 감각은 자국을 떠나 자유롭게 부유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과 중국이다.
◈로스트 제너레이션 미국 무라키미의소설이 미국 현대 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는 것은 무라키미 자신도 주저없이 자인한다.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군조 신인상을 수상했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자주 거돈되어 왔던, 미국 문학과 무라카미에 대한 예를 들면, 군조 신인상의 심사 위원 중 한 사람인 마루타니 사이이치는 선후평 <새로운 미국 소설의 영향>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무라카미 씨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현대 미국 소설의 강한 영향 밑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커느 보네거트라든가, 브로우티건이라든가, 그런 작품을 매우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연구 태도는 대단히 진지한 것으로, 뛰어는 재능의 소유자가 아니면 이 정도로 깊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옛날식의 리얼리즘 소설에서 빠져 나오려고 해도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 현재 일본 소설의 일반적인 경향인데, 설사 외국의 본보기가 있다고는 하나, 이처럼 자유자재로, 그리고 교묘하게 리얼리즘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주목해야 할 성과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중략) 그리고 이런 점을 잘 살려 나간다면, 이 일본적 사정에 의해서 되장된 미국풍의 소설이라는 성격은 마침내는 이 작가의 독창성이 될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평론가 구로코 가즈오는 "무라카미의 소설은 옛날 식의 리얼리즘 소설(사소설)의 전통이 끊어진 곳에 성립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라카미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한 직후, <나의 문학을 이야기한다>라는 인터뷰에서, "일본의 순수 문학은 외면하고, 당신의 소설 속에 나오는 피츠제럴드로 대표되는 미국의 소설 쪽을 읽었겠군요?" 하는 질문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피츠제럴드와 카포티와 보네것트, 이 세 작가를 제일 좋아합니다. 그야 물론 모두 유명한 작가들이니까, 그다지 직접 본보기는 될 수 없지만, 그들에게서 글을 쓰는 자세 같은 것을 배웠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후 하루키는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말이나 글로 되풀이해왔다. 그렇다면, 무라카미는 미국 문학의 어떤 면에 끌린 것일까? 무라카미는 저서, <더 스콧 피츠제럴드>(1988년) 속의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코멘트>에서, 그 이유의 일단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미국 문학사 가운데서 가장 미국적인 소설은 멜 빌의 <백경>과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 작품은 미국이라는 국가와 그 문화의 특수성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는, 가장 전형적이며 미국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세 편의 작품은 모두 각 소설의 주인공들이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1) 뜻은 고귀하며, (2) 행동 스타일은 희극적이며, (3) 결말은 비극적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특성을 좀 더 단순화해서 말하면, 아메리카 신대륙에 계승된 돈키호테성=기사성(騎士性)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문학에서 프런티어 시대의 멜 빌, '일어버린 세대'의 피츠제럴드, 1950년대의 샐린저와 현대 문학의 보네거트, 어빙을 더한다면, 무라카미의 미국 문학과의 인연이 어떤 것인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는 일반적으로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로 알려진 헤밍웨이나 포크너, 혹은 미국의 전후 문학이라고 불리우는 긴즈버그나 케리워크 등의 비트 세대의 문학을 무시하고 있다. 무라카미는 왜 피츠제럴드를 좋아하느냐, 라는 물음에, "구체적으로 설명을 할 수는 없고, 다만 서로 기분이 통하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무라카미를 매료케 한 피츠제럴드의 문학은 1920년대의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이 물질 문명의 붐을 이룬 끝에 경제 대공황에 이르기까지의 물질적 목적 추구의 시대에 살았던 청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가 그린 주인공은 자동차, 토키(유성영화), 라디오가 발달하고, 기사, 증권 중매인, 세일즈맨, 영화 배우가 각광을 받았던 시대에 청춘을 보낸, 중산 계급의 인텔리였다. 물질적 추구에 여념이 없는 청년, 그러나 많은 것을 잃어버린 상실의 아픔을 가슴 깊이 지닌 청년의 모습이 피츠제럴드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그것은 동시에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난숙한 물질 문명 속에서, 자신을 상실하지 않으려고--또는 이미 상실된 자신을 애써 찾으려고 하는 무라카미 문학의 주인공의 모습이기도 하다. 무라카미의 소설도 항상 '잃어버린 것=로스트'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도, 그가 미국 문학사에서 로스트 제너레이션에 강한 흥미를 갓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미국 작가들이 제 1차 대전이라는 미증유의 대량 참사가 낳은 비인간적 소행의 체험을 근거로, 전후의 니힐리즘을 뒤에 감춘 퇴폐와 필사적으로 싸우며 자기파괴적인 고독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과, 무라카미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의 학생 반란 = 전공투 운동을 통과하여, 외면상의 '평화'와 풍요로움 속에서 '정신의 상처'를 모티프로 한 작품을 쓰고 있는 것은 거의 같은 맥락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무라카미와 미국 문학과의 관계를 말할 때, 유의해야할 점은 그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일본의 구세대가 지녀왔던 '종속'의식이나 열등 의식, 또는 '동경'의 마음은 거의 갖고 있지 않고, 오히려 선진 공업국으로서의, 그리고 파트너로서의 공통 부분에 커다란 공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키 문학 속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 무라카미의 어린 시절의 환경은 그의 문학에 줄곧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고향이 상업 무역 지역인 간사이(關西) 지방이었고, 자라난 곳이 국제 무역항을 갖는 도시의 주택가였다는 것이, 그가 미국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요인이라고 한다면, '중국'에 대한 관심도 역시 그의 성장 과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본시 간사이 지방에는 재일 한국인이나 재일 중국인(화교)이 비교적 많이 살고 있어 일상 생활에서 '중국'과 만나는 일은 극히 평범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라카미의 '중국'에 대한 관심의 대상은 중국의 역사나 혁명 또는 문화 같은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기 주변에 있던 '중국인'에 대한 것이다.
단편집 <중국행 화물선> 중에 나오는 다음고 같은 중국인에 대한 관심이랄까, 인연의 범위가 바로 그것이다. 고교가 항구 도시에 있었던 탓으로, 내 주위에는 꽤 많은 중국인이 있었다. 중국인이라고 해도 특별히 우리들과 어딘가가 다른 점이 있는 건 아니었다. 또 그들에게 공통된 뚜렷한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중략) 우리 반에도 몇 명의 중국인이 있었다. 성적이 좋은 학생도 있었고, 좋지 않은 학생도 있었으며, 명랑한 사람도 말수가 적은 사람도 있었다. 굉장한 저택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햇빛이 들지 않는 방 한 칸에 부엌만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가지각색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와도 특별히 친해지지는 않았다. 애당초 나는 아무나하고 쉽게 친해지는 성격이 아니다. 상대가 일본인이건 중국인이건 누구이건 간에, 그것은 마찬가지다. --<중국행 화물선> 중에서
'나'는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회의를 갖고 '죽음'을 생각했을 때, 왠지 세 사람의 중국인을 생각해 냈다. 한 사람은 초등학교 때 치룬 모의 고사의 감독관, 또 한 사람은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 하던 곳에서 만났던 여대생, 마지막 한 사람은 28세가 되어 재회한, 백과 사전 외판을 하고 있는 고교시절의 동창생이다. 이 세 사람과의 우연과 우연이 겹친 것 같은 만남과 헤어짐이 '나'에게 '나 자신의 지구'나, '나 자신의 우주'를 느끼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이란 '지구의(地球儀) 상의 황색 중국'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흔히 발길에 닿는 그런 생활 주변이다. '나'는 그곳에 가는 것을 '모험'이라고 말한다. 그곳은 가령 "치과 의사의 대합실"이나 "은행 창구" 등, 극히 일상적인 장소이다. 다만 '나'는 갈 수 있을지 없을지 조차 알 수 없는 '중국'을 향해서 "언젠가 모습을 나타낼주도 모르는 중국행 화물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단편 소설에 나타나 있는 것은, 민족이나 인종이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고 하는 철저한 개인주의 사상이다. 무라카미의 사고 방식 밑바닥에는 '평등'과 '개인주의'를 기치로 삼고 있던 '전후 민주주의 교육'의 성과가 존재한다는 것이, 그런 인간관에 잘 나타나 있다. '차별'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추하고 증오해야 할 만한 것이라는 사고 방식이 근저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상대가 일본인이건 중국인이건 누구이건 간에 마찬가지다"라고 하는 생각을 무라카미는 굳은 신념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무라카미는 자진해서 소리 높이 반차별 사상의 소유자라고는 말하지 않지만, 미국 '문학'에 대해서 아무런 외화감도 갖지 않는 감성과 '중국인'을 하나의 인간으로서 평등하게 대응하는 자세에는 상통하는 것이 있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세계'에 대하여 등거리를 유지하는 생활 태도는, 무라카미의 내부에 확실한 '민주주의=개인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무라카미의 경우, 이 '민주주의=개인주의' 사상은 이 '풍요'롭고 '평화'로운 사회 속에서 '니힐리즘'으로 전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행 화물선>은 이 글의 머리 부분에서 말한 세 사람의 중국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그 마무리는 이렇게 당돌하게 끝낸다.
지구의 상의 황색 중국. 앞으로 내가 그 장소를 찾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나를 위한 중국이 아니다. 뉴욕에도 레닌그라드에도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나를 위한 장소가 아니다. 나의 방랑은 지하철의 차 안이나 택시 뒷좌석에서 행해진다. 나의 모험은 치과 병원의 대합실이나 은행 창구에서 행히진다. 우리들은 어디에도 갈 수가 있고, 어디에도 갈 수가 없다.
마무리의 전반부에는 '중국'이라는 메타포어에 위탁한 무라카미의 상황 인식의 표백이 있다. 물론 이 인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은 '미국'이라고 하거나 '소련'이라고 해도 전혀 상관이 없는 메타포어이다. 그리고 "나의 방랑은 지하철의 차 안이나 택시 뒷좌석에서", "나의 모험은 치과 병원의 대합실이나 은행 창구에서"라고 말함으로써, 일상 생활이나 내면=관념에서 '방랑'이나 '모험'의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 그것은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으며, 동시에 무라카미가 작가로서 '관념의 왕국'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이 아닌가, 라고 구로코 가즈오 씨는 지적했다. 무라카미의 장편 제2작, <1973년의 핀볼>이 '정신의 상처'를 입은 채 타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핀볼 머신을 찾아 헤매는 청년의 '헛된 정열'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면, <중국행 화물선>은 그런 정열의 뒤쪽에 깊은 어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는 단편 소설이다.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그리고 <1973년의 핀볼>과 함께 <중국행 화물선>을 읽을 때, 거기에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멘탈리티의 원형이 떠올라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