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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마네킹>, 원제 <러브 옵젝트>로 기억해야 할 영화 2005-07-11
[오마이뉴스 박형준 기자] 모 포털사이트 영화코너에는 007시리즈 2편 <위기일발>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1960년대 중반 당시, <위기일발>은 27만의 관객을 동원한 공전의 히트작이었다고 한다. 그런 <위기일발>이 1973년에 재수입되어 <소련에서의 탈출>이라는 제목으로 재개봉되었는데, 이 영화를 새로운 007시리즈로 알고 이 영화를 관람했던 관객들의 항의소동이 빗발쳤다고 한다. 영화코너의 DB매니저를 맡고 있는 평론가의 말처럼 관객 수준 알기를 개풀만도 못하게 여기던 일부 수입업자의 오만에서 비롯된 소동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다가오는 7월 15일에 개봉되는 <섹스 마네킹>이란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전문가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영화 마니아들도 다수 존재하는 가운데, 1970년대에나 보던 이런 촌극을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섹스 마네킹>의 원제는 <러브 옵젝트>(Love object), 국내개봉 제목은 물론이고, 포스터부터 삼류 에로영화 뺨치는 수준을 자랑하는데 있어서 벌써부터 이 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파격적인 의상과 함께 느끼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포스터 속의 여인은 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도대체 수입업체는 무슨 생각으로 이 좋은 영화를 개봉도 하기 전에 망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섹스 마네킹>은 이미 각종 영화제에서 많은 수상실적과 함께 신인감독 로버트 파라기의 역량을 입증한 바 있으며, 배우 역시 데스몬드 해링턴과 멜리사 세이지밀러 등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배우들이다. 겉보기에는 마치 '에로영화'를 연상시키는 이 <섹스 마네킹>의 장르는 ‘서스펜스 스릴러’라고 봐야 옳은 듯하다.

이 영화의 기본적인 테마는 식욕과 함께 인간에게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본능인 성욕에 대한 고찰이다. 유능한 샐러리맨이지만,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으로 인해 매사에 적극적이지 못한 주인공 '케네스'가 자신의 업무보조인 '리사'를 보고 첫눈에 반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 영화포스터가 수입업자의 수준을 딱 보여준다. 오른쪽 사진이 원작 포스터다.
ⓒ2005 베이스 12 프로덕션즈
 
<섹스 마네킹>, 에로영화 아닌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를 보면 <섹스 마네킹>의 '케네스'는 여러모로 <파이트 클럽>의 '잭'(에드워드 노튼)과 비슷한 캐릭터임을 알 수 있다. <파이트 클럽>에서의 '잭'은 지루하고 무료한 일상 속에서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우연히 자신에게 없는 모든 장점을 갖추고 있는 '타일러'(브래드 피트)를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지하격투클럽을 조직하면서 일상 속의 스트레스를 폭력으로 해소한다.

하지만 '케네스'는 다르다. 본래 우리는 상식적으로 남성의 성향은 대단히 공격적이며, 소유욕이 강한 것으로 알고 있다. '케네스'는 성격상의 결함으로 '리사'에게 접근하지 못하면서 솟구치는 자신의 욕망을 '마네킹'을 구입하면서 성(性)적으로 해소하기 시작한다.

철학도 출신의 로버트 파라기 감독은 '케네스'가 '리사'를 바라보는 시선이라던가, 집주인이 비밀이 많은 '케네스'에 대한 호기심을 표출하는 장면 등에 있어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원한 수수께끼인 '관음증'을 등장시킨다. '훔쳐보기'에 대한 고찰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역시 <이창>이나 <싸이코> 등의 영화에서 시도했지만,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은 어떠한 학문이나 이론으로도 완벽하게 해석하기 힘든 만큼, 영원한 수수께끼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른 한편으로 히치콕의 기법이 등장했다는 것은 그가 타계한지 25년이 지났음에도 많은 분야에서 연구의 화두를 제공하는 히치콕 감독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케네스'는 '리사'와 가까워지면서 자신이 마네킹에게 붙인 이름, '니키'에 대한 애정에서 곧 편집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니키'에 대한 애정은 케네스로 하여금 '니키'가 마네킹이 아니라 살아있는 실존인물로 느끼게 하면서 마네킹을 만들어 남모르는 욕망을 해소해왔다는 '리사'에 대한 죄책감과 '니키'에 대한 책임감 속에서 혼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나는 너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등의 충분히 당당히 해도 될 말을 끝내 하지 못하면서 쌓인 내면의 어긋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 듯하다.이 과정에서 데스몬드 해링턴의 탁월한 연기가 '케네스'라는 소화하기 힘든 캐릭터를 빛나게 한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리사'로 등장하는 멜리사 세이지밀러의 풋풋하면서도 관능적인 매력 또한 영화를 빛내는 또 한가지 요소다.

▲ 멜리사 세이지밀러(좌), 데스몬드 해링턴(우)
ⓒ2005 베이스 12 프로덕션즈
로버트 파라기 감독의 성욕에 대한 '철학적' 고찰

또한 로버트 파라기 감독의 연출력도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다. 다소 간의 피는 튀지만, 이유없는 잔혹함을 최대한 절제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것이 엿보이며, 오히려 왈츠풍 음악이 깔리면서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을 드러낸 집주인 살해 장면은 신인답지 않은 깔끔한 연출력을 과시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필자 같은 서스펜스 스릴러 마니아 입장에서는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처럼 윙윙 소리와 함께 미친 듯이 푸닥거리 쇼를 벌이는 것보다 이렇듯 우아한 음악과 절제된 침묵 속에서 음산하게 울리는 전기톱 소리가 더 무서운 법이다. 이것은 히치콕 감독이 즐겨 쓰던 기법이며, <블레어 위치>가 수많은 마니아를 열광시킨 원동력이었던 '생활 속의 공포'가 무엇인지 실로 오랜만에 느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막판에 예상치 못했던 반전은 <식스 센스> 이후로 처음으로 감탄한 진정한 반전의 표본이다.

히치콕의 영화와 <파이트 클럽> <아메리칸 싸이코> 등 우리가 한번 이상은 꼭 본 명작들 속에서 우리에게 낯설지 않으면서도 신선한 스토리를 창조해냈다는데서 <섹스 마네킹>은 '온고지신'의 정신이 무엇인지 새로운 길을 제시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정신적인 소외를 느끼는 현대인의 숨가쁜 일상 속에서 할말은 꼭 하고 사는 당당한 모습을 잃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장의 말 한마디에 '해고'라는 단어가 왔다갔다 하는 주인공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비밀을 홀로 지키고 있다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대나무숲에서 크게 고함지르고 시원함을 느낀 복두 장인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상대방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이유로 상대방이 날 해칠리는 없다. 사랑은 순수한 감정 그 자체로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든 당당한 목소리로 분명하게 감정을 전달하자. 불합리한 일을 당하거든 논리정연하게 불합리하다는 근거를 제시해보자. '케네스'의 일그러진 자화상, 영화 속의 이야기로만 바라보기에는 너무 현실적이다. /박형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