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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블란쳇 Cate Blanchett, 헤븐

아/여우女優 2011. 6. 24. 20:45 Posted by 로드365


비운의 엘리자베스, 케이트
개인 사정으로 핸드폰을 아예 꺼놓고 살았으므로, 어떤 항의 전화도 받지 못했고 후배들과 인생 상담도 즐길 수가 없었다. 그러니 아주 흔해빠진 속담으로 시작해보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했던가? 의무적으로 영화를 미친 듯이 섭취하는 나의 나태한 삶 속에서, 최고의 낙은 무엇보다도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인 여배우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게 아니면 뭐 그리 기쁜 일이 있겠는가? 최근 10년, 나를 가장 만족시키며 환호를 지르게 만든 여배우는 <엘리자베스>에 등장한 케이트 블란쳇이었다. 더들리로 나온 조셉 파인즈와 사랑을 속삭이며 껄껄 웃는 그녀가 30살을 앞둔 초짜 배우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난 잉글랜드와 결혼했다!”고 선언하는 그녀는 놀랍도록 창백한 피부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휘어잡고 있었다. 그리고 10년 후, 숙명적으로 케이트는 다시 엘리자베스 여왕 역(<엘리자베스: 황금시대>)을 맡게 되었다. 와! 나는 거듭되는 탄식으로 비운의 카리스마를 진정으로 축복했다.
1969년 호주 멜버른 출신의 케이트는 호주 국립드라마예술학교(NIDA)를 졸업하고, 데이비드 마멧의 연극 <올레나>에서 캐롤 역을 맡으면서 시드니 시어터 컴퍼니에서 활동했다. TV미니시리즈 <하트랜드>의 엘리자베스로 주목을 받은 그녀는 브루스 브레스포드의 <파라다이스 로드>를 통해 할리우드에 본격 진출했다. 그 후 <엘리자베스>의 명연기로 각광을 받은 그녀는 거칠 것 없이 맹렬한 기세로 승승장구했다. <밴디츠>에서 은행털이에 나선 그녀는 영혼까지 썩어빠진 창녀처럼 남자들을 흔들어 놓았고, <베로니카 게린>에서 마약 밀매 현실을 폭로하는 정의롭고 열정적인 기자 역을 맡았다. 게다가 <반지의 제왕>에서 눈부신 갈라드리엘로 나와 프로도를 얼어붙게 만드는 강력한 마력을 선보였다. 물론 자타가 공인하는 놀라운 연기는 <에비에이터>에서 미국인들의 어머니 캐서린 헵번으로 둔갑한 모습이었다. 각 잡힌 얼굴에 삐쩍 마른 몸매로 캐서린을 흉내 내는 그녀는 왈가닥한 필라델피아 악센트는 물론이고 심지어 여유로운 발걸음까지, 딱 캐서린과 똑같다. 그녀의 무한한 변신 능력을 더 확인하고 싶다면 소더버그의 <굿 저먼>도 놓쳐서는 안 된다. 포츠담 선언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살인극에서 레나로 등장한 그녀는 오손 웰즈의 필름누아르 속 헤로인 리타 헤이워드를 그대로 재연한다. ‘팜므 파탈의 원형은 이런 거다’라고 폼 나게 주장하고 싶은 게 분명하다. 허스키하고 두터운 목소리에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그늘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그녀의 라인을 보노라면 진정 감동이 몰려온다. 194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서 바로 뛰쳐나온 것처럼 클래식한 ‘핀업 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의 선택은 오로지 키에슬로프스키다. 길고 가는 노란머리를 잘라내고 하얀 피부 화장을 하던 <엘리자베스>보다, 혹은 브래드 피트 품에서 애처롭게 죽어가는 <바벨>보다 나의 심금을 울린 것은 케이트가 폭탄 테러를 저지르는 <헤븐>이었다. <향수>의 팀 티크베어는 고인이 된 키에슬로프스키의 유작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3부작의 첫 편인 <헤븐>을 완성시켰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과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작업이자, 키에슬로프스키의 세계에 대한 심도 있는 재해석이다. 여기서 케이트는 마치 <십계>의 테마를 하나로 아우르는 듯한 말을 한다.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이성과 정의 그리고 생명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사랑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케이트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난 여기서 너무나 무기력하면서도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이제까지 그라지나 자폴로브스카를 능가하는 배우가 나올 것이라 기대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 케이트, 그녀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