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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황석영씨가 지난 1월 22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새 정치질서 만들기에 나라도 총대를 멜 생각이 있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왜 작가로서 얼룩이 튀는 것을 감수하고서까지 이런 선언을 했을까요? 현재 프랑스 파리에 체류중인 황석영씨가 그 배경을 밝히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왔습니다. 그는 다섯 번의 변화를 겪은 자신의 사상 편력에 대해 말하면서, 현재 우리 상황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 논란이 된 '민족문학 작가회의'의 명칭 변경 논란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습니다. <편집자 주> |
1. 나는 뭐냐 나의 글쓰기와 사상적 편력의 길을 세밀히 밝히는 일은 독자들에게도 지루한 것이 될 테지만 방향 전환의 모퉁이를 몇 대목 회상해보는 것은 어떨지. 나는 청소년 시절에 문단에 어정쩡하게 나오고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발표하게 될 때까지 그야말로 '문예반'으로서 내면을 파고드는 탐미적인 습작을 했다. |
전태일의 죽음이 <객지>라는 나의 체험으로 각색되었고, 평자들은 여기서 민중문학이라는 개념을 발견해냈다. 내가 공장 취업과 농촌 하방을 하면서 유신시대를 향하여 격문을 쓰듯이 <장길산>을 썼던 것은 일제시대에 벽초가 <임꺽정>을 쓰던 경우와 비슷했다. 이 기간에 나는 뒤늦게 기층민중이라는 당시의 사회과학적 단어가 아닌 살고 먹고 허덕이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전위냐, 현장이냐' 하는 논쟁이 있었을 때에 당시의 많은 벗들은 각자의 길을 택하여 시대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작가였으므로 당연히 가장 문제가 많다던 전라도로 하방했다. 그리고 김지하가 투옥되면서 나에게 떠넘겨준 현장 민중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피의 광주를 겪는다. 이것이 두 번째 변화였던 셈이다. 당연히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들은 급진화했다. 우편향이 강요되었으므로 좌편향이 시작되었다. 문예 각 장르의 헌신적인 선전 활동은 광주를 알리겠다는 뜨거운 전제가 있었지만 예술성은 스스로 포기해야만 되었다. 우리는 기꺼이 각자의 재능을 반납하고 한때의 시사적 문제들을 다루는 마당극 대본이나 노래 만들기나 성명서 작성이나 다큐멘터리, 사진, 필름, 판화 등을 제작해냈다.
광주항쟁을 알리는 보고서를 편집·기록한 뒤에 구속되고 당국의 종용에 의하여 베를린에서 초청받은 '제3세계 문화제'에 참석했다가 유럽과 미주, 일본을 1년여 동안 유랑하게 된다. 이것이 세 번째 변화의 계기였다. 바깥에서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또 다른 '자아'를 발견했던 것이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며 오랫동안 반한 인사로 해외에 망명 중인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만났다. 그리고 북은 수만리 타국에서 오히려 지척이었다.
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간신히 얻게 된 직접선거의 기회였지만 양김씨의 분열로 쓰라린 좌절을 겪은 뒤에 기력을 회복한 민주화 운동 진영인 노동자, 농민, 빈민, 교사, 학생, 재야 운동권은 드디어 '전국'이라는 이름을 앞에 걸만큼 성장했고, 이들 '전씨5형제'의 연합적 집행부는 물밑에서 논의했다. 그동안 군사정부는 민중의 민주화 열기가 고조될 때마다 북을 빌미로 삼아 각종 간첩단 조직을 조작하여 탄압했다.
노태우의 7·7선언을 계기로 '자주적 민간교류'가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문익환 목사와 나의 방북이 결정되었고 나는 순순히 긍정했다. 순진하기도 하여라! 나는 그 길이 십여 년이나 걸릴 고행의 길이었다면 솔직히 스스로 조직했던 민예총을 탈퇴하고 입산수도의 길이라도 떠났을 것이다. 그저 귀싸대기 몇 대 맞고 끝날 줄 알았다고나 할까.
내가 북에 가서 경험한 것은 몇 번 밝혔지만 '감동과 절망'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일구어낸 우리 백성의 '생활력'에 감동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그 물샐 틈 없는 '통제'에 절망했다.
베를린에 거처를 정하고 있던 무렵에 국내에서는 나의 방북을 결정하고 지지해주었던 벗들이 뒤늦게 제도 정치권에의 입문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나는 마치 헹가래를 받다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 경기장에 불이 꺼지고, 선수와 관객들도 모두 사라진 어둠 속에 홀로 누워있는 듯한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곧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날 장벽에서 쏟아져 나오던 동베를린 시민들과 환호하던 서베를린 시민들이 뒤섞인 축제의 광장에서 혼자 울었다. 뼈저린 외로움 속에서 나는 빛나는 개인을 발견한다. 그것이 나의 네 번째 변화였다.
그리고 뉴욕을 떠돌다가 들어와 투옥되어 5년을 보내면서 나는 감옥의 독방 속에서 뒤늦게 일상을 배운다. 그것이 다섯 번째 변화다. 나는 출옥 이후 지금까지 형식으로서의 '자아'와 현실과 내용으로서의 '세계'를 연결하는 작업을 일관되게 추구해 오고 있다. 나는 저 떠들썩한 우여곡절 속에서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많이 잃어버리기는 했다. 나는 이미 노인이지만 상상력은 아직도 푸르게 젊다고 자부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직업작가'라는 프로 의식을 더욱 강력하게 유지하고자 한다.
2. '총대를 메겠다'는 뜻에 대하여
지난 1월, 3주 동안 서울에 체류하다가 31일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하루도 안 되는 동안에 획기적인 공간 이동이 가능한 세상이다. 나는 세계체제 전환기의 작가로서 현재의 해외 체류가 나에게 주는 여러 가지 유익한 점들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나 자신과 한반도로부터의 거리는 더 냉정하게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게 했으며, 세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성찰하게 해준 기간이었다.
파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떤 때에는 서울보다도 더 번거로운 사교장으로 변하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만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십여 년 만에 연락을 해오는 때도 종종 있다. 런던에 체류할 적부터 옛 벗들이 찾아와 많은 걱정거리를 쏟아 놓았다. 지난 삶을 돌아보는 회한과 시대에 대한 우울한 전망이며 무력감 따위들이었을 것이다. 작년부터는 주위의 후배들도 여러 가지 걱정들을 주고받더니 드디어 뭔가 해보자는 데로 결론이 났다.
늘 하던 얘기지만 84년인가 광주에 살던 무렵이었는데, 홍남순 변호사가 고희를 맞았고 양김씨도 가신들과 더불어 일제히 내려왔으며 전국 각지에 흩어져 와신상담하던 재야 각계 인사들도 모여들었다. 사실 고희 기념은 구실이요, 광주압살 이후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복원을 위한 모임이 되었다. 그때에 모두 가난하던 시절이라 내가 그래도 <장길산> 연재로 밥술깨나 먹는다고 삼사십대는 모두 운암동의 우리 집으로 몰려왔는데 160여 명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아마 맥주를 팔십짝 가까이 마셨을 것이다. 마당에, 거실에, 계단에, 이층에 방마다 꼬부리고 삼삼오오 앉아서 밤을 꼬박 새웠다. 모두 옥살이에, 고문에, 도망에 심신이 피폐했지만 기개는 살아 있었다. 그들 모두 어디로 갔는가?
지금 4개 당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제각각의 삶의 굴절을 거치며 세속적인 출세나 좌절을 맛보았다. 지금 내로라하는 정치인들 모두 거기 있었다. 그 시작은 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군부로부터 주어진 6·29 이후였다. 내가 현재를 '87년 체제의 종언'이라 부르자는 것은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 다함께 그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돌아가자 벗들이여, 그 때로! 그리고 생각해보자. '84년 저 피의 현장 광주에 모여서 미래를 소곤소곤 이야기하던 그 때로 돌아가자!'라는 것은 이제 냉혹한 현실 속에서 '낭만적인 작가'이기 때문에 아직도 하는 꿈같은 잠꼬대로 들리는가.
나는 정치하는 벗들이 가끔 상대의 궤변을 허위라고 공격할 때에 '소설 쓰지 말라'하고 얘기할 적마다 심한 모멸감을 느끼던 사람이다. 스스로 직업작가라고, '책장사'하는 처지라고 자학적으로 얘기하던 것도 그 이후부터는 삼가게 되었다. 물론 자본주의사회에서 대중과의 접점은 누구에게나 시장에서 이루어지고 그 접점을 잃으면 대중과의 소통도 끝이 난다. 그러나 소설이란 세상 도처에 널려있는 삶의 진실을 그럴싸하게 재현해내는,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작업이어야 한다. 6·29는 군부가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카드였고 기진맥진 그것을 받아들인 민주화 세력은 분열 이후에 스스로 3당합당이라는 미궁에 빠지고 만다. 그것의 어정쩡한 귀결이 현재의 형식적 민주주의이며 여당과 야당의 가건물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대등한 가치 평가는 과연 가능한가? 그것이 어떻게 대등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가 가치일 수는 있어도 산업화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나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행사장에서 애국가나 국기에 대한 예를 표한 적이 없다. 유명한 얘기로 5공시절 광화문의 그 살벌하던 국기 하강식 시간에 행인들이 모두 얼어붙어 중앙청의 태극기를 향하여 서있던 때에 나는 시인 김지하, 김정환과 셋이서 만취하여 얼어붙은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갔다. 그것은 민주주의만이 존엄을 가지고 국기와 애국가에 대한 예의를 표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중의 땀과 피로 이루어진 민주화시대 이후에 나는 우리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정통성을 세웠다고 말한다. 산업화도, 민주주의도 이름 없는 민중들의 업적이다. 감히 아무나 나서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의 구호는 아직도 민주주의이며 다만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 선진적 민주주의다. 그 짧은 단어 안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모두 들어있다.
내가 광대처럼 또 이제 나서서 '사람이 살고 있었네' 식으로 분위기 일신의 바람을 잡는 것은 이를테면 작가로서의 본능이다. 왜냐하면 나는 어느 자리에서나 좌중의 분위기가 침체되면 그게 '내 탓이거니' 여기는 못난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총대'의 본뜻이다. 나의 총대는 그러므로 '이제 나서서 다 같이 처음부터 생각했던 민주화운동 하자'는 소리다. 판은 모두 끝났다. 그러므로 현재의 구도는 깨져야 한다. 그것은 밖에서부터 스스로 잘못 기획하고 구축한 체제를 깨는 일이다. 운동성의 회복이야말로 이제는 오래전 어느 6월에 탄생했던 '시민'들의 몫이다.
3. 바깥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나
▲ 2001년 8월 15일부터 16일까지 평양에서 남·북·해외동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8·15민족통일대축전에 참석했을 때 모습. | |
ⓒ 노순택 |
소련에서 수정주의를 선언하고 일종의 안정적인 대치 상태가 유지되면서 미국과 서구는 레이거노믹스 또는 대처리즘이라는 정직하고 노골적인 자본주의를 내놓는데 그것이 점잖게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며 그 행동 강령이 미국식 '세계화'이다. 이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구체화 된 것은 동구 붕괴 이후부터며 그로부터 지금까지를 이른바 '세계화 체제'라고 부른다.
웬일인지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 선언이 나올 무렵부터 제3세계의 군사정권은 차례로 민간정부로 바뀐다. 한국에 문민정부라는 이행기적 민간정부 체제가 생길 무렵부터 김영삼은 세계화를 입에 달고 다녔고 남한 자본주의는 풍요와 소비의 짧은 시대를 구가한다. 이때에는 미국이 동구를 재편성하느라고 여념이 없던 시기다. 그리고 아시아로 돌아섰을 때 IMF 사태가 터진다. 남한은 비로소 분단된 자본주의가 한계에 부딪친 것을 깨닫는다. 중국의 생필품 생산 공세와 일본의 첨단기술 사이에 끼어버린 것이다.
미국 민주당 정권의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남한의 생존 의지가 만나면서 '햇빛'이 탄생한다. 그러나 이제 한반도를 둘러싼 기류는 신냉전의 판도로 흘러가고 있다.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은 그 세력 판도 사이에 한반도를 두고 다시 대치하려하는 중이다. 틈새를 조심스럽게 헤집어 나간다면 분명히 생존할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별로 많지 않다.
북의 붕괴가 중국과 미국의 적대적 공존관계를 노골화시키면서 대만과의 교환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눈치 채고 있는 상식이다. 북의 특정 지명을 거론하며 국토 영역 운운하는 중국이나 전작권 환수니, 주한미군 재편제니 하면서도 유엔사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주한미군사령관의 공언은 DMZ 관리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간접적 선언이다. 어쩐지 대선을 앞둔 이 시기가 매우 불안정하다. 더구나 북은 이미 핵실험이라는 비난받아 마땅한 절체절명의 강수를 두어버린 직후다. 앞으로 우리는 멀고 험한 길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 더욱 지혜롭게 모든 슬기를 모아 다함께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안과 밖을 향한 운동의 전략을 모두 까발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큰 선은 보수나 진보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 세력을 줄이고 통합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중도라는 깃발을 들어보는 것이다. 마치 독일 녹색당의 깃발처럼, 그것은 진보의 적색도 보수의 청색도 아닌 그 둘이 혼합된 보라색이다. 중도는 그러므로 기회주의가 아니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라는 공의 핵심을 뚫는 것이 중도다. 그 프레임 안에 누가 들어오든 살아서 온다면 그에게 깃발을 쥐어 주리라. 그리하여 지금의 카오스를 통합하고 북과의 소통을 살려내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점쟁이가 아니더라도 그에게 최고의 책임이 주어질 거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4. 모든 굳어버린 원칙이나 근본주의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장을 하는 혼자에게는 '근사하지만' 다중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리라고 작정한 것은 어느 후배의 조그맣고 나직한 목소리와 또한 어느 '대가'의 큰 목소리 때문이었다.
내가 어느 신문과 엉뚱한 인터뷰를 한 것은 이를테면 정갈하게 서 있는 현대식 빌딩에 흙덩이를 던져 말끔한 유리창에 얼룩을 만든 것과도 같았다. 고정된 판을 흔들어 보고 싶어서다. 뒤에 어느 후배 작가가 '하이킥'이라는, 나에게는 낯선 표현으로 내 가슴을 흔들었다. 매우 시니컬하고 자조적이지만 낮고 올곧은 음성이었다. 그리고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아, 젊은 사람들이 있었다. 6월항쟁의 그날 서울역과 굴레방 다리목에서 최루탄 연기에 눈물을 철철 흘리며 돌팔매질을 하던 지금은 칠순 노인이 된 선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채광석이가 그 선배의 돌팔매를 피하며 '우리 편 맞겠어요!'하며 핀잔을 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조태일이도 이문구도 채광석이도 이 세상에 없다. 아, 그런데 지금 저 젊은이들을 품에 안을 선배는 다 어디로 갔는가?
나는 언제부턴가 너무 아름다운 가치라든가, 점잖음, 선량함 등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지당도사'들의 지당한 말씀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역시 문학이란 세속의 길이기 때문에.
나는 큰 목소리를 내던 내 동년배의 작가를 지난 위기의 시대 어느 현장에서도, 어느 글귀의 서명란에서도, 심지어는 회비 목록에서조차 본 적이 없다. 우리가 광화문의 빌딩에서 그 바로 위층에 군사정권 당시 제도권의 문협 사무실이 있다는 이유로 김지하와 양성우 시인의 석방과 긴급조치 철폐를 부르짖으며 시위했을 적에, 모두 잡혀가고 계단에 있던 염무웅과 몇몇이 문협 사무실에 몰려 올라갔을 때에 난색을 표하던 사무국장이 누구였던가.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나, 먹고 살려고 허덕이며 써온 글줄을 신주단지 모시듯 내세운 적도 없다. 책을 사준 이름 없는 독자들에게 겸허해야 하므로. 우리는 먹고 살만큼만 쓰고 남는 시간에는 체험하고 독서하고 놀고 위기의 시간에는 항의하고 감옥 가고 그러면서 시시껄렁하게 산다. 그러므로 노대가들이 늙어가면서 글 쓰는 행위를 무슨 하늘이 내려준 형벌처럼 엄살을 떨고 과장하는 것에 구토를 느낀다.
우리는 자신의 기념관이나 기념비를 살아서 자기가 세우지 않으며 작품 이외의 흔적을 이승에 남기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노벨상 캠페인 따위는 그야말로 아이들 말로 '쪽이 팔려서' 스스로 벌린 적 없다. 노벨상에는 몇 가지의 도그마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가 딛고 있는 대지와 구체적인 현실에서 애매모호하게 멀어지게 하는 점이다. 그야말로 '먼 산에는 거짓이 많다'.
늘 말하지만 포즈로 세상이 유지되지는 않는다. 지금은 화면 영상의 시대라 외국인도 공식석상에 나서서 뭐라고 하면 그 말이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허공의 화면 속에서 캐릭터가 다 드러나고 만다. 자아, 모두들 자신의 성채를 부수고 광야로 나오라.
이제부터 나는 점잖지 않을 것이며 예전으로 돌아가련다. 온몸에 얼룩이 튀면 다시는 개량 한복 따위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거나 넥타이에 정장을 하지 않으면 된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명천 이문구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를 원했다. 무슨 문학상이니 기념비석이니 세우지 말라고 그랬고 자신의 껍데기를 화장하여 고향 뒷산 솔숲에 뿌려주기를 유언으로 남겼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하나의 엄정한 가르침이다. 모두들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
뭐라고, '민족'이 문제라고? 나는 근년에 '작가회의' 근처에는 가본 적이 없는데 '권태' 때문이다. 물건은 안 나오면서 '말'만 무성하다. 나는 진작 감옥에서 나오면서 시인 김사인과 농담으로 '저 간판 언제 떼어내냐'고 헛헛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일단 조직이든 집이든 사람이 만든 것은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쇠락하기 마련이다. 친목회 정도의 기능만 남았다면 '해소'하는 것도 하나의 역사적 과업이다.
요즈음은 엉뚱한 객손님들이 뒤늦게 나타나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과거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위원회가 되어 조직 안에 깃들었지만, 이제는 6·15 민족문학회에다 무슨 평화포럼인지까지 있다. 내가 '민족'자를 떼든지 '해소'를 하든지 하자고 안을 내었던 것이 이시영 시인이 사무총장을 맡았던 나의 출옥 직후였다. 탈퇴를 하겠다니까, 그러면 시끄러워지니 '평회원'으로 명단만 남으라고 하여 그냥 그대로 지금까지다.
총회 전날에야 '민족' 문제가 안건인 줄을 전해 들었고 백낙청 선배와 만났다가 그의 온유한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민족'을 떼어내는 것은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제안하고 끌고 간 것은 바로 남북작가회담을 성사시키고 단일 협의체를 이루어낸 젊은 문인들 자신이다. 그 뜻을 곰곰이 새겨보기 바란다.
언젠가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작가와 대담을 하면서 우리는 동아시아의 민족주의 바람을 걱정스러워하였다. 남북 분단이 민족 문제인 것은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지만 이제 이 분단체제가 남북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 전체, 나아가 세계의 문제라는 것은 또 다시 너무도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니까 6자회담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가 동구 붕괴 이후로 이념적 방향의 한 축을 동아시아 진보, 평화, 연대로 삼은 것도 오래 전의 일이다. 우리는 무명의 '혈기방자한' 젊은 네티즌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세계인 작가다. 우리는 일본에서도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수많은 시민단체들과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알고 있다. 이는 중국, 대만과도 마찬가지며 오랫동안 젊은 문인들은 묵묵히 이러한 연대를 위하여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몽골, 카자흐스탄 심지어는 중동에까지 평화 시위대를 파견하기도 하면서 씨앗을 뿌려왔다.
그런데 '민족문학'을 꼭 붙여야 한다고? 그러면 그것을 떼자는 측의 가슴이나 작품에는 민족이 없는가? 뭐라고, '민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고인다고? 뭐라고, 작가의 고향은 '민족'이라고? 나는 작가란 국경이나 민족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라고 본다. 그러나 그에게도 조국은 있다. 그의 조국은 바로 '모국어'가 아닌가. 혼혈아를 아직도 멸시하는 사회, 외국인 노동자를 일하는 기계쯤으로 아는 사회, 재일동포의 차별은 목청 높이 외치면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교를 배척하고 밀어낸 사회가 아직도 '민족'이라고? 그것도 명색이 작가들이라는 사람들이.
몇 년 전에 가슴 아픈 일화를 겪었었다. 미국에 망명하고 있을 때의 일인데 어느 날 로스앤젤레스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내 작품 <무기의 그늘>을 번역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딘가 말투가 서툴고 어눌해서 외국인인 줄 금방 알아차렸다. 내가 왜 그 책을 번역하려느냐고 물으니 그가 너무도 쉽게 대답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입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말에 모든 것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 더 통화를 했는데 나는 뉴욕이고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있어서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나중에야 자신이 한국과의 혼혈임을 밝혔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김수임을 아십니까?" 나는 6·25 전쟁 직전에 유명했던, 이강국과 박헌영을 주한미군 헌병사령관 차로 개성을 통과시킨 여간첩 김수임을 해방공간의 자료를 통하여 알고 있었다. 안다고 그랬더니 "제가 그이 아들입니다"하는 것이었다. 그럼 누구와? 미군 헌병사령관 사이의? 그는 자그맣게 "네"하고 대답했다.
그를 기른 것은 저 유명한 김수임의 어머니, 삯바느질을 하여 딸을 대학 보내고 동경까지 보냈던 혼혈아의 할머니였다. 김수임의 이화여전 동창생인 시인 모윤숙의 회상기에 나온다. 딸이 전쟁 직후 대전형무소에서 총살된 뒤에 시신을 수습한 것도 할머니, 미군 헌병사령관이 버리고 떠난 혼혈아를 고등학교 때까지 거두어 기른 것도 그 할머니였다. 그는 입양기관의 도움으로 십대 소년을 넘기고 나서 미국에 도착했다. 그가 전쟁을 겪은 한국에서 받았을 여러 어려움은 침묵 속에 다 들어 있었다.
피난지 학교에서도 적응이 어려워 할머니에게서 한글을 배웠다고 한다. 나는 곧 귀국하여 구속되게 되는데 미국을 떠나기 전에 로스앤젤레스에 망명하여 '한국청년연합'을 꾸려가던 광주사태 수배자 윤한봉에게 그와 연락하라고 전해 두었고, 뒤에 들으니 그는 평화시위나 연대활동에 적극적인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도 지금쯤은 늙었을 게다.
이러한 일화는 내가 너무나 많이 겪은 일이라 끝이 없다. 예를 한 가지만 더 들어보면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한 세대나 지나서 작가 방현석과 김남일의 소개로 알게 된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은 <전쟁의 슬픔>이라는 작품을 써서 유명한데, 그는 전쟁 당시에 17세의 소년병이었다. 시간대를 맞추어 보니 그는 플레이쿠와 호이안 전선에 있던 월맹 정규군이었고 바로 같은 시각 나의 맞은편에 있던 적이었다. 이제 우리는 아시아의 평화를 얘기하는 친구다.
아아, 정말 끝이 없고 장황하다. 한 가지가 백 가지라고 요즈음의 <요코 이야기>에서 또 한 번 씁쓸한 회한의 느낌이 감돈다. 나는 당시에 만주를 거쳐 평양을 지나 서울까지 내려오면서 부모님, 누나들과 함께 개성까지 와서 피난민 수용소에 있던 기억도 남아있다. 당시 해방된 뒤인 48년에 남한에서 유명했던 베스트셀러가 <내가 넘은 38선>이라는, 지금 요코라는 아이의 어머니 세대의 이야기였다.
당시에는 아무런 편견 없이 '인간의 이름'으로 겪은 고초의 기록이 모든 이에게 감동적으로 읽혔다. 염상섭도 같은 소재로 당시에 단편소설 두 편인가를 썼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일은 당연히 그냥 책이 아니라 부교재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 소동을 보면서 나는 어느 낯선 공항에 서있는 것처럼 타인의 '시선'에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자의식에 빠진다. 우리의 이 복잡한 정체성과 단순하지 않은 표정을 어떻게 하리.
내가 '민족'의 이야기를 이렇듯 길게 공들여 쓰는 것은 우리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이런 종류로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마을과 골목에서 벌어지는 일은 바그다드나 이스탄불이나 파리에서도 벌어진다. 그런 나는 모국어를 지고 다니니 어디로 튀랴.
'우리 민족끼리'가 중요하면 그건 식구들의 공간인 저 안쪽에 안방 쪽이라 할 '6·15 민족문화협의회'에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민족'의 헛것에서 놓여날 때에 통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을 얻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미 유럽이나 아메리카와 대등한 '아시아 공동체'를 꿈꾼다. 이제 젊은 후배들은 '제3세계' 연대로 80년대의 한계와 범위를 시원스럽게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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