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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바보들, 인간에 대한 예의

하/ㅗ 2007. 1. 11. 11:15 Posted by 로드365

[홍세화칼럼] 새해의 소박한 바람
 

인터넷 토론의 댓글에서 익명성이 주는 솔직함은 대부분 이유 없는 반대로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자주 듣는 말은 “그렇게 한국사회를 비판하려면 프랑스로 돌아가라”는 것인데, 아내도 은근히 돌아가기를 바란다. 아이들과 함께 살려는 희망도 담겼지만, 사람 관계가 차갑고 팽팽한 것에, 소유로 삶을 평가하는 물신주의 가치관에 질린 탓이 크다.
대부분의 한국사회 구성원이 일생 동안 대학입시와 취직시험 때 두 번만 긴장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 가치관에 영합한 결과다. 내면세계를 풍요로우면서 정교하게 하려고 긴장하지 않으며, 사회와도 긴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물질세계에 관심을 두며, 그것으로 다른 사회 구성원과 비교하고 경쟁한다. 핵가족 단위의 가족 사이를 벗어난 사적 인간관계가 차갑고 팽팽한 것은 다른 사회 구성원이 서로 연대하면서 더불어 사는 대상이 아니라 비교·경쟁의 대상으로만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가 강요하는 긴장에서 자유롭게 해준다고 믿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물질이며 소유다. 이제 돈은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아는 대신 유일한 해방자가 되었고 초등학생들이 거침없이 장래 희망을 부자라고 말한다.

청소년들은 사적 이해관계에서 영리함을 넘어 영악하다. 반면에 사회에 대해서는 거의 바보 수준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몰이해는 주체적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인데, 그런 문제의식조차 갖고 있지 않다. 내가 겪은 유럽 청년들은 이와 반대다. 사적 인간관계에서는 무척 소박하지만, 사회에 대해서는 비교적 비판적 안목을 가졌다. 그들이 토론을 즐길 수 있는 것도 각자 나름의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교육과정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사회 안전망이 허용한 사회 분위기,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과도 연관된다.

지난 여름 한 고등학생이 스페인 여행을 떠났다가 병원 신세를 졌다. 수술을 받아야 했고 일주일이나 입원했다. 모든 게 무상이었는데, 의사와 간호사들이 무척 친절했다고 전했다. 무상인 곳에서 사적 인간관계가 따뜻한데, 유상인 곳에서 사적 관계가 따뜻하지 않다. 이 모순 같은 점은 예컨대 어떤 과정을 거쳐 의사가 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의사들은 치열한 경쟁 과정에서 승리하고 오랜 수련 기간에다 많은 돈을 들여야 하므로 그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특권의식과 보상의식이다. 스페인 의사는 교육과정에서 형성된 연대의식과 함께 스페인 사회의 비용으로 의사가 될 수 있었기에 사회환원 의식을 가질 수 있다. 이처럼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는 서로 맞물려서 사회에 작용한다.

가끔 시(詩)에서나 인간에 대한 예의를 찾을 수 있을 뿐, 대학이나 종교 부문에서도 소인배들이 판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 구성원의 의식이 바뀌어야 제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만, 제도 변화는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계층간 소득편차가 심한 위에 국민 부담률이 25% 수준인 나라에서 가증스러운 세금 폭탄론을 넘어 사회 공공성의 가치를 구체화하는 임계점은 언제 도달할 수 있을까? 민주공화국의 새 대통령을 뽑는 대선의 해, 정치의 계절은 또다시 찾아왔고 누구나 2만달러 시대를 말하는데, 대부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나라들이 오래 전부터 실현해 온 제도를 새삼 제기하는 것은, 그것이 민주공화국 정신의 기본 요구이기도 하지만 이 천박하기 짝이 없는 사회의 가치관을 바꾸어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이다.

기획위원

hongs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