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 씨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강의, 글쓰기, 번역 작업을 통해 대중의 교양을 높이고 지식을 전파하는 데 힘쓰고 있다. 그 역시 직장생활을 하며 강단에 오르는 ‘회사원 철학자’였다. 개인 홈페이지에 철학 관련 자료도 공개한다.
▼ 일반 사람들이 고전에서 무엇을 얻어갈 수 있나
먹고사니즘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해지면 하는 일이 없다. 인문학을 진정한 소프트웨어 산업이라 하는데, 이는 틀렸다. 단지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하고 또 사람의 한계가 어딘지, 살고 있는 영역이 과연 전부인지 묻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 주로 도서관에서 강연하는 이유는?
도서관은 무료거나 출석을 압박하는 수준의 돈만 받는다. 도서관 강연은 80명, 120명 대단위 규모다. 주부도 많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도 많다. 무상복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밥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부도 가르쳐주어야 한다. 이제 구청, 시청 등이 나서야 할 때다.
▼ 동네 양아치부터 인기 드라마까지 고전을 설명하며 드는 예시가 과감하다.
인문학이 무엇인가?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인문학자는 정작 사람에 관심이 없다. 주부들은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를 보고 “아들이 사귀는 여자를 못마땅해할 게 아니라 남자와 안 사귀는 것을 고마워하자”고 말한다. 실제 하는 이야기를 강의에 담는 것이다. 나도 ‘어려움의 골짜기’를 넘어가는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강연에선 일단 알아듣게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발전과 이데올로기 어떤 관계를 맺어왔을까요?
“오늘 여러분이 읽어 오신 그람시의 전통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의 정의, 정당 역할, 문화연합의 개념과 필요성 등에서 문제 제기하실 분 있나요?”
3월 8일 오후 9시 30분 서울 서교동 ‘다중지성정원’ 건물.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람시(1891~1937)의 철학을 강의하는 조정환(56, 도서출판 갈무리 대표) 씨는 15㎡ 겨우 넘을 듯한 강의실에 모인 수강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수강생들은 이미 1시간 30분가량 그람시의 책 ‘옥중수고 이전’과 ‘옥중수고2’ 일부를 나눠 내용을 요약하고 발표한 상태다. 이날 강의 시간에 다루는 내용만 책 100쪽 분량은 족히 넘는다. 하지만 수강생들은 자기가 맡은 부분을 사전에 요약해보고, 강의 땐 전체 내용을 속독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
강의에선 ‘돌민’이라는 예명을 쓰는 한 남학생이 밝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딱딱한 철학, 이데올로기 이론 수업을 받는 강의실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미소다.
“행복해서 한말씀 드리고 싶은데요. 그람시가 지식인을 정의하는 부분이 정말 구절구절 마음에 들어서요. ‘지식인은 사회적 헤게모니와 정치적 통치의 하위 기능을 수행하는 지배집단의 대리인이다’란 구절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쳤어요. 그런데 그람시가 이 점을 근거로 ‘국가기구는 능동적으로든 수동적으로든 동의하지 않는 집단을 합법적으로 징계하는 강제력을 행사한다’고 뽑아낸 구절을 보고 다시 한 번 무릎을 쳤습니다. 아, 행복해요.”
수강생들이 돌민 님의 ‘돌출’ 의견에 한바탕 웃었다. 조씨도 미소를 지으며 “그람시는 자신이 내린 정의와 이론을 세밀한 부분까지 확장하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한 여성 수강자도 “조국 서울대(법학) 교수는 최근 자기가 가장 중요하게 읽는 책 가운데 그람시 저서가 있다고 말했어요”라고 받아쳤다.
그람시는 사회 발전에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과정에서 기계론적으로 철학을 적용하는 일을 무척 꺼렸던 이론가로 알려졌다. 다중지성의 정원 그람시 강좌의 방식도 그 연장선에 있다. 수강생들이 그람시의 정서를 자유롭고 다양하게 끌어내는 것이 핵심이다.
“문필가, 과학자로 대표되는 전통적 지식인이 특수 사회계급의 두뇌이자 조직자인 유기적 지식인으로 이동하는 건 우리 시대에서도 큰 의미가 있어요. 음, 앵커를 하다 정당에 입문하거나 성직자가 직접 정치에 몸담는….” 현실과 어우러져 귀에 쏙쏙 들어오는 그람시 강좌는 그날 밤 계속됐다. 주 1회 수업, 10강에 10만 원.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2011.3.14
★ 강유원이 대학시절 내내 놀기만 하다가 뒤늦게 "철학 공부를 제대로 하고싶다"고 지도교수에게 말했더니 "요하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50회 정독한 뒤 찾아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상·하 모두 1500쪽에 이르는 '서양철학사'를 하루 18시간씩 50회 정독한 뒤 교수를 찾아갔고 공부를 시작해 박사 학위까지 땄다.
그의 직업은 웹 마스터다. "학회에 열심히 나가고, 학회지에 논문써서 그걸 들고 다니며 대학교수 채용에 응하는 것"을 포기한 탓이고 그 시간에 차라리 공부를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학문이나 글쓰기로 생계를 해결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3년 문화일보 인터뷰에서다.
"오늘날 공부 좀 했다는 사람들은 손에 물 묻히기를 싫어하며 힘있는 자에게 지식을 팔고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며 기생한다. 지식인들이 기득권자의 편을 들고 이들의 노예로 전락하는 이유다. 나는 영주에게 아부하며 기생하는 르네상스식 지식인이 아니라, 기도와 학문과 노동을 병행하며 자급자족한 중세 수도원의 수도사와 같이 건강한 지식인이 되기를 원한다."
그는 날마다 저녁 9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공부를 한다고 한다. 회사원이라서 다음날을 생각해서 잠을 자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평생 안경알을 갈면서 철학사에 한획을 그은 스피노자를 보라. 어느 대학 교수는 그런 스피노자가 부럽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 나는 말로만 스피노자를 부러워하지 말고, 안경사 자격증을 따라고 말해주고 싶다." -출처 : 이정환 닷컴
강유원은 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막판에 멋진 말 쓰는 거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거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냥 끝을 맺자니 허전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쓰면 안 된다. 허전하더라도 끝을 맺어라. 앞에서 하지 않은 말을 결론에 써서는 안 된다. 결론은 항상 앞에 나온 말들보다 범위가 작거나 같아야 한다. 이걸 어기면 논리적 비약이고, 일상용어로 말하면 사기다."
다음의 글은 강유원이 민음사 현대사상에 실었던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라는 글에서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전체 글은 그이의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함께 있는 다른 글들도 읽어볼만 하다.
공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을 분별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는 학문적 업적이나 주위 사람들의 평판을 참고해서 선생님을 찾게 된다. 그러나 이는 지도 교수를 고르는 방법이지 선생님을 찾는 방법은 아니다. 선생님은 지도 교수 이상의 그 무엇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고작 지도 교수 고르는 법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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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데 제일 좋은 건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지만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므로 선생님 없이도 공부하는 방법을 생각해 둘 필요가 있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면 훌륭한 학생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지만 이런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젠가 20년쯤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를 만나서 <비법>을 물은 적이 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베껴라>였다. 베끼라니, 표절을 하라는 말인가? 그런 뜻은 아니었다. 초보자가 대단한 걸 만들어보겠다고 덤벼봤자 땀만 빼고 시간만 낭비되니 잘된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해보는 일을 되풀이해야 기본을 익힐 수 있다는 거였다. 똑같은 물체를 두고 그대로 그린다 해도 그리는 사람마다 그림은 다르다. 초보자가 내놓은 그림과 숙련자가 내놓은 그림, 대가가 내놓은 그림은 아주 다르다. 어떤 대가의 그림은 전혀 엉뚱하기까지 하다. 그러면 그 대가는 처음부터 그런 엉뚱한 그림을 그렸을까? 그건 아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데생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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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끼기를 열심히 하는 건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기초가 다져졌으면 구체적인 자기 공부에 들어갈 차례다. 도대체 무얼 공부할 것인지, 다시 말해서 무엇을 주제로 삼을지를 결정해야 한다. 주제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인데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어떤 이는 그걸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공부 주제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던 문제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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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할 주제를 정했으면 책을 읽기 시작해야 한다. 그럼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 주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학설을 제시한 철학자의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철학자를 판별하는 근거는 베끼기를 통해 축적한 데이터베이스이다. 그 철학자가 쓴 책이 번역되어 있다면 일단 그걸 정독한다. 번역이 잘못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또 제대로 된 번역본이 드문 것도 사실이므로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 원전을 읽기 위해서 해당 외국어를 익혀야 함은 당연하다. 철학자의 책을 읽어나갈 때는 머리를 비우고 그의 입장에 서서 읽어야 한다. 괜한 말 덧붙여 봐야 쓸데없는 일이고 감상일 뿐이다. 철학자의 책을 충분히 읽어서 그 책에 등장하는 개념과 논지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있으면 관련된 책, 즉 해설서나 참고 문헌을 읽는다. 이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관심 가진 주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학설을 제시한 학자가 칸트라면 칸트의 책부터 읽어야지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민음사)부터 읽기 시작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순서를 바꾸면, 칸트의 책을 읽을 때에도 이미 들뢰즈가 규정한 칸트, 즉 "들뢰즈 버전의 칸트"를 머리에 담고 들어가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의 글에도 들뢰즈가 강조한 문장만 인용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도서관에서 어떤 철학자에 관한 논문을 여러 권 가져다 놓고 인용된 원문을 비교해 보라. 거의 다 똑같은 걸 인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눈으로 읽은 성과를 발견할 수 없다. 순서를 바꿔 공부했기 때문이다.
...
오로지 원저작만을 인용하여 글을 써야 한다. 그렇게 써서 글이 안 되면 원저작을 다시 읽어야 한다. 원저작의 인용만으로 글을 쓴 다음에는 참고서에서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여 각주에 덧붙인다. 본문과 각주가 글에서 차지하는 지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각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본문은 글의 뼈대요, 살이다. 각주에나 들어갈 내용을 본문에 쓰는 것은 페이지 늘리기이다.
다음은 그이의 게시판에서 인용한 글이다:
'내가 공부하는 방법'에 나오는 공부법이 얼핏 보기에는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몸에 관한 것입니다. 철학사를 50번 읽으려면 그걸 읽는 동안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앉아 있는 일 자체가 힘든 것입니다.
학문을 한다는 사람들은 머리로써 뭐든지 해결하려는 악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병폐가 바로 이것이라고 여깁니다. 몸으로 익히는 학문, 몸으로써 알아내는 세상, 이것이 있은 다음에야 제대로 된 소설도 철학도 문학도 있을 것입니다.
십여년전에 읽었던 '시간을 정복한 사나이'(see 시간을지배한사나이)에서 러시아의 생물학자가 '우리같은 학자들은 얼굴이 아니라 엉덩이 사진을 찍어야 한다'라고 말했던 부분에서 크게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끈기와 인내역시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능력'의 중요 요소겠죠? 아자봉. 출처
★ 번듯한 학위·학점도 없지만…
"우린 아직 배고프다! 지적으로…"
[한국일보]2007-01-02
[인문학은 살아있다] '수유+너머' 등 재야 인문학 강의에 수강생 북적시간·돈 쪼개 스스로 공부 "인문학에 위기는 없다"
인문학은 죽어가고 있는가. 역사와 철학과 문학과 미술이 죽을 수 있는 것인가. 여기 "즐거운 지식이 새벽을 시작하고 있다"고 외치는 이들이 있다. 학위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공부가 좋아 인문학에 매달리는 사람들. 그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선언한 아카데미에 "위기는 없다"고 반박한다. 새해의 들뜬 분위기에도 아랑곳없이 인간과 세상의 문제를 놓고 진지한 고민을 이어가는 풀뿌리 인문학 지킴이들의 이유있는 삶을 들여다보자. [편집자주]
들뜬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던 지난 달 21일 저녁 7시. 서울 용산구 용산동 남산 자락의 연구ㆍ생활 코뮨 ‘수유+너머’의 회원들은 이사 준비로 부산했다. 매주 평균 40여 개의 세미나와 강좌가 열리는 공간. 연말까지 잡혀있는 그 일정들을 하나도 빼먹지 않으면서 운영 공간 전체를 “순차적으로 절묘하게” 옆 동으로 옮겨 재배치한다는 게 이들의 계산. 종로 시절 연면적 160평이던 연구ㆍ강의ㆍ세미나 공간이 용산으로 오면서 300평으로 늘었고, 이번에 옮기면 400평이 된다고 했다.
“어수선하지요? 그래도 확장ㆍ이전하는 겁니다.” 찐 고구마를 건네는 한 회원의 농담이 없더라도 분위기는 사뭇 활기찼고 또 진지했다. 복사기와 씨름하는 사람, 책꽂이 앞에 서서 눈을 부라린 사람, 책을 펼쳐놓고 머리를 맞댄 사람들…. “오늘이 하반기 ‘주제학교’(석사급 강의) 종강하는 날이거든요. 모두들 그 강좌 수강생들이에요.”
대학은 인문학이 위기라고 외치는데, 재야 인문학 기지들의 풍경을 보면 아닌 것 같다. 학위를 주는 것도 아니고 강제도 없는데 공부하겠다고 오는 사람이 날로 늘어난다. 전공과 무관하게, 그저 공부하고 싶어서, 자기 돈 내고 시간 쪼개서 배우는 보통 사람들이다.
수요가 많다 보니 새로운 기지도 등장하고 있다. ‘철학아카데미’ ‘문예아카데미’ ‘풀로엮은집’ 외에 3월이면 ‘문학과지성사’가 운영하는 인문학과 예술의 복합 문화공간 ‘사이’가 문을 연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 양성소로 유명한 ‘심산스쿨’도 6일부터 1년 과정의 인문학 강좌로 재야 인문주의자 조중걸의 ‘예술사 : 철학적 해명’을 시작한다.
‘수유+너머’ 주제학교 강좌의 좌장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이 날 텍스트는 아직 국내에 출간되지도 않은, 유럽의 저명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의 저서의 번역 원고 마지막 장이다. 텍스트 요약과 함께 논쟁점을 찾아 제시해야 하는 발제 조원들은 강의 전에 밤샘 토론을 벌일 만큼 ‘빡센’ 강좌에 속하지만, 수강생 가운데는 직장인도 있고 학부생도 있다. 이진경 교수가 좌장으로서 개입하는 비율은 10~20%나 될까.
시종 토론으로 진행된 3시간이 별 삐걱거림 없이, 팽팽한 긴장과 느슨한 웃음으로 이어졌다. 이날 종강을 했어도 수강생들은 기일 내에 강좌에서 다룬 개념 하나씩을 정해 논문 수준의 에세이를 써내야 한다. 물론 학위도, 학점도 없다. 인류학 석사 과정에 있다는 한 수강생이 “대학에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지적 허기를 여기서 채운다”고 말하니까, 곁에서 웃고 섰던 이 교수가 ‘나도 채운다’며 끼어든다.
“미처 생각지 못한 논점들을 이 친구들과의 토론 과정에서 발견하곤 해요. 또 이들의 토론에 개입하지는 않더라도 혼자 속으로 생각하며 뭔가를 찾아가죠. 이들이 주지 않는 것을 저는 늘 얻어요.”
강좌팀이 휴게실로 자리를 옮겨 ‘쫑파티’를 시작할 즈음, 이사 준비팀도 당일 할당량을 채웠는지 건물 전체가 조용한 어둠에 묻혀 있었다. “거의 놀자판”이라는 청소년 강좌에서부터 “가장 어렵다”는 강학원 과정까지 이 건물은 또 이런 활기로 내일을 시작할 것이다.
‘회사원 철학자’ 강유원 씨는 ‘풀로엮은집’에서 이번 겨울 학기에 사회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요제프 레만의 <사회철학에의 초대>를 강독하는 8주 과정이다. 학문 장사가 싫어서 밥벌이는 따로 한다는 그는 회사에 다니는 웹사이트 기획자다. 헤겔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여러 권의 저술ㆍ번역ㆍ서평에서 박학다식과 깊이, 통쾌한 글쓰기로 꽤 많은 열혈 독자를 거느린 주인공이다.
제2강이 열린 지난달 21일, 그는 수강생들을 협박했다. “숙제 해왔냐. 안 해오면 강력 제재 하겠다. 그러려고 주먹을 ‘야스리’(줄)로 갈고 있는 중이다. 인격적으로 괴롭혀서라도 공부시키겠다”는 말에 수강생들은 긴장했다. 엄포가 아니다. 그는 계속 질문을 던져 수강생들을 괴롭힌다.
대충은 없다. 이번 강의 교재도 첫 문장부터 막히는, 머리에 쥐가 날 만큼 어려운 책이다. 숙제는 미리 읽고 요약하기다. 내용이 하도 어렵다보니 같은 문단을 놓고도 수강생마다 요약 내용이 제각각 달랐다. 이날 강의는 속어와 전라도 사투리, 썰렁하거나 신랄한 농담이 난무하는 걸진 입담 가운데 ‘이론과 실천의 상호이행’ ‘실천적 진리론’ 등 난해한 개념의 고공 비행을 펼쳤다.
수강생은 약 20명, 대부분 직장인들이다. 취업은 전공인 공학으로 하겠지만 혼자 인문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 만큼의 기본을 다지기 위해 그의 강의를 세 과목째 듣고 있는 공대생도 있다. 이 진지한 공학도는 애정어린 구박을 받았다.
“저 친구 때문에 1시간 일찍 왔다. 올해 읽고 공부할 책을 의논하고 싶다고 해서. 공대생이 사회철학을 공부해? 요즘 세상에 그건 시대착오이고, 인생 엉망으로 산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강 씨는 그를 계속 갈구는 중이라고 한다. 3년 계획으로 책 한 권 공동 번역하는 과제도 맡겼다. 실제로 2년 간 애쓴 끝에 강씨와 공동 번역서를 낸 수강생이 있다.
무엇이 이들을 재야 인문학 기지로 불러 모았을까. 대충대충은 통하지 않을, 단단히 각오해야 따라갈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 강 씨의 말대로, 학위나 명예가 필요하다면 딴 데 가서 좀 더 ‘뽀대나게’ 공부할 일 아닌가. 어떤 갈증이, 어떤 욕구가 그들을 떼민 것일까. 인문학 위기론은 거기서부터 돌파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최윤필기자 walden@hk.co.kr
★ [화제의 책]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
2006-05-28 오후 1:30:45
철학자 강유원(44)은 한국 지식사회에서 특별한 존재다. 이런저런 이유로 대학에 적을 두지 않은 철학자는 꽤 있지만 그처럼 철학과 전혀 무관한 '웹 사이트 기획'과 같은 직업을 가진 '회사원 철학자'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학문적 깊이가 얕은 것도 아니다. 헤겔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0년이 넘게 헤겔의 저작을 강독해 온 그의 실력은 입소문으로 널리 알려진 터이다. 그는 이런 모습을 '기행'처럼 여기는 이들에게 다음처럼 지청구를 놓기도 했다.
"속 편하게 학문과는 무관한 직업을 가지는 것이 학문적 독립성을 지키는 데에는 가장 좋을 것이다. 게다가 직업을 가지면 구체적인 현실 속에 정신이 자리 잡을 수 있고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자학과 자만에 빠지지도 않는다. 글을 통한 현실 공부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차적인 것일 뿐이다. 스피노자를 존경한다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당장 안경사 자격증을 따라."('내가 공부하는 방법', <현대사상> 제9호, 민음사, 1999)
이 같은 강유원이 최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에 펴낸 <공산당 선언>에 대한 해설서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뿌리와이파리 펴냄)을 펴냈다. 저자와 출판사는 이 책을 처음 기획할 때 "좌파를 위한 자기 계발서"라는 제목을 붙이려 했다고 한다. 이 '회사원 철학자'는 지금 <공산당 선언>을 통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좌파를 위한 자기 계발서?
강유원은 2005년 봄 야간에 개설한 한 교양 강좌에서 주로 회사원을 상대로 강의한 내용을 뼈대 삼아 이 책을 썼다. 수강생 중에는 <공산당 선언>은 물론이고 마르크스라는 이름조차 처음 들어보는 이도 있었다. 이런 학생들과 공산당 선언을 같이 읽기로 한 그의 목표는 명확했다.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는 것."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는 책들은 많다. (…) 그러나 그 모든 책들이 회사원의 입장에서, 임금 노동자의 입장에서, 임금 노동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쓰인 것은 아니다. 책을 고를 때는 이 책이 과연 누구 좋으라고 쓴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 아니겠는가. 어떤 책을 읽더라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 그 이익은 당장 연봉 올라가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을 길게 보아 사람답게 사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것도 이익은 이익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유원이 당장 혁명을 하자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와 맞서 싸우는 법을 구체적으로 살피는 것도 이 책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공산당 선언>의 1장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한 줄, 한 줄 읽어 가면서 그는 자본주의의 정체를 규명하고 "왜 (자본주의와) 맞서 싸워야 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과연 어떤 세상을 만들지"에 관심을 가진다.
이 과정에서 강유원은 해박한 지식을 동원해 <공산당 선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충실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는 <공산당 선언>을 19세기가 아니라 21세기 맥락에서 읽을 것을 요구한다. 책 곳곳에 지금 이 세상을 이해하려면 꼭 읽어야 할 참고도서 목록이 줄줄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동춘의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창비 펴냄), 부르스터 닌의 <누가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가>(안진환 옮김, 시대의창 펴냄)가 그런 책들이다.
군데군데 일상생활에서 뽑은 다양한 예가 입말이 살아 있는 생생한 설명 속에 녹아 있는 것도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을 보자.
"자신이 프롤레타리아인데도 그걸 모르는 사람은 뜻밖에도 많다. 회사에서 가장 얄미운 사람이 누군가. 사장도 아니면서 사장 마인드 가진 팀장, 사장보다 더 사장스러운 사람, 회사에는 사장과 사장 아닌 사람밖에 없는데 사장도 아니면서 회사 입장에서 생각해보자고 하는 사람들이다. 자기의 객관적 위치를 알지 못할 뿐더러 남이 그 위치를 알려줘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답이 없다. 그냥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르주아는 이런 사람들을 적절히 활용한다."
"2004년에 삼성이 낸 세전 이익은 19조 원이었다. (…) 대한민국의 삼성이니까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풀렸을까. 그래서 그게 '우리 경제'를 지탱해주고, '우리 서민'들을 배부르게 했을까. 그건 아니다. 이건 고용효과만 들여다봐도 금방 알 수 있다. 그 회사 공장들은 이미 중국, 인도, 브라질, 말레이시아, 태국, 슬로바키아 같은 곳으로 이전해버렸다. (…) 삼성의 매출과 이익은 거의 다 반도체 산업에서 나온다. 그런데 반도체 산업은 장치산업이기에 국내에 공장을 아무리 많이 지어도 생색낼 만한 고용효과가 별로 없다. 고용된 인원인 별로 안 되니 당연히 발생되는 이익이 사회로 돌아오는 효과도 적을 수밖에 없다."
강자에게 무릎 꿇기 싫은가? 그럼 '고전'을 읽어라!
강유원이 지금 새삼 <공산당 선언>을 같이 읽자고 목소리를 높인 두 번째 이유는 이 책이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고전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고전 읽기는 "강자에게 흡수되기 십상"인 "성찰 없는 몰역사성의" 시대에 "진정한 자기를 찾는 방법"이다. 고전을 천천히 곱씹다 보면 결국 자신과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그는 책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고전 읽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고전이라고 알려진 책을 읽어보니 어떤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과 동떨어진 것들이 좀 있기는 하지만, 찬찬히 읽어보면 사실 별 거 아니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는 말 중에 고전 그 자체보다는 해설서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버거워 보이더라도 고전을 직접 손에 집어 드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이제 고전을 어렵게만 여기지 말고 읽어보기로 하자."
사실 강유원의 고전 읽기에 대한 관심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강유원 때문에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세 번째 고쳐 번역해야 했던 이윤기의 말을 들어보면 그를 고전 읽기의 안내자로 삼은 게 얼마나 행운인지를 알 수 있다. 이윤기는 2000년에 나온 <장미의 이름> 세 번째 개정판의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1992년 미국에서 원고를 다시 손보았다. 미국과 일본에서 나온 <장미의 이름> 관련 서적을 구입, 약 500개에 이르는 각주도 달아, 같은 해 개역판을 냈다. 오금 저린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잡초 없는 뜰이 어디 있으랴, 하면서 스스로 위로하면서 8년을 보냈다. 2000년 3월, 무려 60여 쪽에 달하는 원고를 받았다. 철학을 전공한 강유원 박사의 '<장미의 이름> 고쳐 읽기'라는 제목이 달린 원고였다.
강유원 박사는 동국대학교에서 철학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장미의 이름>을 바르게 읽어 주면서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철학적 의미를 가르쳤던 모양인데, 바로 그때의 메모를 내게 보내 준 것이다. 매우 부끄러웠다. 이 원고는 무려 300여 군데의 부적절한 번역, 빠져 있는 부분 및 삭제해야 할 부분을 지적하고 있었다. 강 박사의 지적은 정확하고도 친절했다.
(…) 2000년 6월말부터 7월초까지 강유원 박사의 지적을 검토하고, 300가지 지적 중 260군데를 바르게 손을 보았다. 그러고는 강유원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부끄러웠다고 고백하고, 그의 지적을 새 책에 반영해도 좋다는 양해를 얻었다. 이것이 바로 <장미의 이름>에 내가 세 번째로 손을 댄 내력이다."
이윤기가 탄복한 강유원의 실력은 이미 그가 2004년 펴낸 <장미의 이름 읽기>(미토 펴냄)를 통해 세상에 선보였다. <장미의 이름 읽기>에서 중세의 역사와 철학을 종횡무진 누비며 제대로 된 텍스트 읽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강유원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최근의 '고전 다시 읽기' 류의 책의 범람에 대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제법 배웠다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텍스트를 재미 삼아 뜯어서 아무 데나 붙여서 제멋대로 읽어대는 일을 대단한 학문적 행위로 간주하는 요즘, 제대로 된 텍스트 읽기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글쓰기 어떻게 할 것인가? 유용한 조언까지…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의 또 다른 미덕은 글쓰기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지침서로서의 역할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막판에 멋진 말 쓰는 거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거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냥 끝을 맺자니 허전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쓰면 안 된다. 허전하더라도 끝을 맺어라. 앞에서 하지 않은 말을 결론에 써서는 안 된다. 결론은 항상 앞에 나온 말들보다 범위가 작거나 같아야 한다. 이걸 어기면 논리적 비약이고, 일상용어로 말하면 사기다."
이쯤 되면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이 대단히 매력적인 책임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강유원의 '썰렁한' 유머를 빌리자면 올해 도서 구입비를 1만 원으로 책정했으면 꼭 이 책을 사서 읽을 일이다. 독일어 판에서 번역된 <공산당 선언> 1장이 부록으로 붙어 있는 것은 돈을 따로 들이지 않고도 직접 '고전 읽기'에 나설 수 있도록 한 배려라고 봐야겠다.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
★ 책 - 인터뷰/‘공산당선언’ 펴낸 강유원씨
[한겨레]2006-05-19 06판 M14면 1651자 문화 인터뷰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이제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얼마 전까지 인생을 바꿀 각오가 아니라면 감히 입에 올리기조차 힘들었던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1848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들이다. 세상이 변하긴 변했나 보다. 정훈이의 유머러스한 만화까지 곁들인 신판 〈공산당선언〉(뿌리와 이파리 펴냄)이 나왔다. ‘회사원 철학박사(헤겔의 사회철학)’로 널리 알려진 강유원(44)씨. 지난해 봄학기 한 대학 철학과 야간 강좌에서 〈공산당선언〉을 교재로 16주 동안 풀었던 내용을 정리했다. 일종의 〈공산당선언〉 해설서인 셈.
일단 총 4부 가운데 제1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만 다뤘다. 청강생 포함해서 60~70명이 그 강의를 들으러 몰려들었고, 그 3분의 1은 회사 다니는 직장인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마르크스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이들도 있었고 그냥 들어보긴 했다는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강좌의 목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강력한 힘인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자는 것”으로 설정했다.
톡톡 튀는 어법, 걸쭉한 입담, 풍부한 예시, 그러면서도 좌표 설정이 분명한 그의 고전 텍스트 읽기는 경쾌하면서도 깊다.
왜 지금 마르크스냐고 물었더니, 대뜸 “지금 세상에 횡행하는 신자유주의니 뭐니 하는 말은 정치적 레토릭(수사)에 지나지 않는다”며, 요컨대 지금 이 문제 많은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는 체제는 결국 자본주의체제고 비록 계급환원론적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 본질을 과학적 체계적으로 분석해낸 사람이 마르크스였다, 그러니 강좌 목표에 부합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적어도 그런 말로 들렸다. 그것은 일본 도쿄대 히로마쓰 와타루 교수가 사회주의 몰락 뒤 했다는 “지금이야말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라는 말보다 훨씬 더 실천적 함의가 강한 얘기로 들렸다.
그가 강의 첫 과제물로 ‘나는 누구인가’를 주제로 글을 써오라고 하고, 책 서문에서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을 돌이켜 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본질, 즉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그 체제에 자신의 몸과 머리를 완전히 착취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안내하는 일종의 약도”라고 쓴 것도 그와 상통하지 않는가. 다시 왜 하필 〈공산당선언〉이냐는 질문엔, “팸플릿이어서 (다른 마르크스 저작들에 비해) 얇고 싼데다 비교적 쉬워서” 부담없이 자본주의의 본질을 적확하게 포착해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강의 목표를 “근대적 개인의 자각과 계급적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말로도 요약했는데, 알맹이 없는 보수우파 논객의 신자유주의 경제학 강의에 대학생들이 수백명씩 우르르 몰리는 “성찰 없는 몰역사성의 시대”에 대한 힐난과 더불어 묘한 여운을 남겼다.
1995년께부터 멀티미디어 콘텐츠 기획으로 밥벌이를 하면서 공부와 ‘우리교육’, ‘풀로 엮은 집’, 인터넷 라디오 <라디오21>, 블로그 등을 통한 대중과의 만남을 계속해온 그의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등 원전 읽기는 하루 한 쪽도 나가기 어려운 ‘정통독법’인데 대학 시절 스승과 독대하며 익힌 이래 지금까지 고수하며 제자들과 공유하고 있다. (http://armarius.net) ■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