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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또 다시?

가/ㅏ 2007. 3. 11. 20:03 Posted by 로드365

“치열한 실명비판 다시 할 생각이다, 원숙하게”


강준만은 ‘문제적 인간’이다. 1990년대 한국 사회의 금기와의 싸움에는 그가 있었다. 비판자들을 냉혹한 실명비판의 도마에 올려놓고 생체 해부에 가까운 비평을 감행했다. 그로 인해 피 흘리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의 피도 흥건했다. 200여권의 책을 지치지도 않고 “써대고” 있는 괴물 같은 근성은 경외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런 그가 최근 <미국사 산책> 17권을 완간했다. <한국 근·현대사 산책> 시리즈도 각각 18권과 10권을 냈다. 한 해에 스무권이 넘는 책을 낸 적도 있는 그에게 저술의 양은 뉴스 거리도 아니지만, ‘산책’이란 책의 제목에서 기자의 직업적 후각이 발동했다. ‘천하의 강준만’은 날카롭고 긴 창을 옆구리에 끼고 단기필마로 적진을 피 튀기며 누비는 지식 전사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역사 속을 한가로이 산책이나 하고 있다니. 인터뷰를 청하는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빨리 답변을 보낼 줄은 몰랐다. 전주에 오시면 술 한잔 하자고. 전북대 연구실로 찾아간 것은 1월12일이었다. 추운 날씨였는데 그의 연구실은 더 추웠다. 사람 참, 썰렁하게 사네…. 테이블에 마주 앉았더니 비타500 두 상자를 준비해 놓았다. 결기가 느껴졌다. 맺혔던 그 무엇이 실밥 터지듯 툭툭 터지고, 다시 평정으로 돌아가길 몇 번. 2시간 반의 토로였다. 인터뷰 말미에 두 사람은 비타민 음료를 나눠 마시며 치열함과 원숙함이 양립할 수 있는 명제인가에 대해 스쳐가듯 대화를 나눴다. 가능했으면 좋겠다, 라고 그가 말했다.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2003년 ‘민주당 분당-우리당 창당’때 좌절

“문제 지적한 것인데 돌아온 건 모진 비난
”‘분노·증오서 소통·성찰로’ 삶의 자세 전환

-최근 활동이 뜸한 것 같다. 근황을 먼저 소개해달라.

“활동이 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책을 더 썼는데, 독자들이 요즘은 덜 읽어주더라(웃음).”

-핸드폰은 왜 없나? 불편하지 않은가?

“24일 미국 콜로라도대학에 1년간 교환교수로 나간다. ‘강준만식 한국학’을 소개하러 가는데, 그걸 핑계 삼아 생활방식을 조금 바꿔보려는 중이다. 미국 생활 하려면 차가 있어야 된다고 해서 얼마 전 운전면허를 땄다. 핸드폰도 하나 준비중이고. 자발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획기적인 변화다. 허허.”

그는 89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래 23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에 간다고 한다.(대학교수가 그동안 차도, 핸드폰도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신문방송학 교수가 미국 여행 한 번 안 하고 여태껏 버티다니!)

-생활의 변화가 강준만이라는 사람의 삶의 태도나 방식의 변화를 예고하는 건가? 확대해석인가?

“솔직히 전에는 사람 만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 만나는 일에도 시간을 내고 있다. 동창회도 나가고. 주변에서 그러더라. 야, 강준만이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 사람이 그리워지는 걸 보니. 인생이란 큰 차원에서 볼 때 내가 조금 달라지는 국면에 서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 얘긴 뒤에 또 하고, 초기의 강준만은 우리 사회의 금기였던 지역감정, 정치갈등 문제 등에 대해 강렬한 발언을 많이 했다. 왜 전라도, 김대중, 안티조선(일보) 같은 결코 유리할 것 없는 화두에 자신의 학자적 생명을 걸었나?

“원천적으로 지역문제에 대해서는 내 안에 쌓였던 분노 같은 게 있었다. 그런데다 내가 본래 삐딱해서인지 우리 사회의 내면화된 금기를 깨고 싶었다. 비교적 학맥에서 자유로웠던 입장도 작용했고. 실제적인 측면에서는 개마고원 출판사 장의덕 사장의 영향이 컸다. 당시 김대중이란 호남 출신 정치인에 대한 여러 편견에 도전하는 글들을 여기저기 썼는데, 장 사장이 그걸 가지고 책을 만들자고 해서 낸 게 <김대중 죽이기>(1995)다. 이어서 <전라도 죽이기>도 썼고. 그런 책들이 큰 반향을 일으키니까 그때부터 그런 쪽으로 나선 거다. 한 십년 갔나….”

-말이 나온 김에 노무현에 대해서도 질문하고 싶다.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고, 비판자이기도 했다.

“그가 죽은 뒤 좀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시간적 거리를 두고 그를 보게 된다. 나는 노무현을 정확히 ‘한국인의 얼굴’이라고 말한다.(그게 무슨 의미냐고 묻기도 전에) 한국 사람의 피에, 민족성에는 아웃사이더의 피가 흐른다. 외세의 침탈과 수탈, 식민지, 미군정과 동족상잔, 개발시대의 디아스포라와 고난에 찬 민주화의 여정 등 역사의 격랑을 한국인들 대부분은 주체가 아닌 아웃사이더로 살았다. 소위 우리 사회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에게도 대부분 이런 피가 흐르고 있다. 이중성의 피가. <노무현과 국민사기극>(2001)에서도 썼지만, 이해관계가 없을 때는 뒤집어 엎어야 하는 세상이지만, 이해가 걸려 있을 때는 이기는 편에 서야 살 수 있는 세상이 한국 사회다. 뒤엎어야 한다고 거품을 물다가도 정작 뒤엎겠다고 나서는 사람한테는 절대 표를 안 준다. 그래서 내가 대한민국 국민들아 사기 좀 그만 치라고 한 것이다. 그에 대한 호오를 떠나 노무현의 명암과 부침은 한국 사람들 대부분의 내면 속에 동일하게 반복된다. 엄청나게 뻔뻔한 인간들이 쌔고 쌨는데, 바보같이 그 정도로 죽냐고 통곡할 때의 그 원통함과 서러움의 응어리가 바로 노무현이고 나의 얼굴이다.”

비타500을 또 하나 깠다.

-하나 더 물어보자. 당신이 천착한 주제 중의 하나가 지역주의였다. 스스로 ‘전라도주의자’로 매도될 정도로. 민주화 이후 호남지역의 정치를 어떻게 보는가?

“내가 그 주제로 진보 쪽 분들한테 욕을 많이 먹은 적이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를 주도한 지역이 호남이니 앞으로도 호남이 진보·개혁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본다. 진보정치가 가능하려면 사회경제적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호남이 (노동자가 많이 모여 사는) 울산인가? 과거 지역차별을 받은 것을 가지고 역할을 더 떠맡으라는 것은 호남을 두번 죽이는 짓이다. 차별해소, 지역 균형발전 같은 명제와 진보정치의 실현은 별개의 사안이다.”

-호남 민중과 디제이 집권으로 덕을 본 토호나 정치적 기득권자들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더라.

“진보적인 분들 가운데서도 지역문제를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는 분들이 많다. 토호니 지방건설업자니 이런 사람들 문제가 많은 건 나도 안다. 그런데 지역에 살면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토호와 서민의 이익은 분리될 때보다 같이 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자꾸 계급적으로만 보려 한다. 그러니 이론과 현실이 안 맞게 되는 거다. 새만금 문제가 대표적이다. 나도 새만금 공사에 반대했지만, 지역에서 그 문제는 환경문제 이전에 차라리 인권문제였다. 절박한 삶의 터전의 문제였단 말이다.”

-유시민, 문성근씨 등 그간 논쟁했던 분들과 털고 갈 것은 없는지.

“보통 비판을 해도 인간에 대한 애정만은 운운하는데, 사람인 이상 그거 잘 안되더라. 밉고 괘씸하지. 그런데 요즘은 밉고 괘씸한 게 없다. 내가 그런 쪽으로 생각을 안 하니까, 오히려 소통의 여지가 더 생기고, 사람 보는 시각도 달라지더라. 그렇다고 비판이 의미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되, 중간의 영역이 좀더 넓다면 의미가 더 크지 않겠느냐 하는 게 요즘 생각이다. 중간영역이 아직 좁다면 내가 그쪽으로 더 옮겨가서 좀 넓혀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 그러다 보니 죄송스럽지만, 그분들이 뭘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젠 별 관심이 없다. 그분들은 그분들대로 열심히 일하고, 나는 나대로 다른 일을 하고 싶은 거다. 누가 되든, 민주당이든 참여당이든 한나라당 사람이든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사안이라면…. 요즘 내가 그런 쪽이다.”

-그런 변화가 세월 탓인가? 아니면 어떤 깨달음이 온 건가?

“주변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나이다. 야, 천하의 강준만이도 이젠 나이가 들었네, 늙었네, 그런다. 사람에게 세월은 아마도 가장 강력한 변인이겠지만, 그것 말고도 내게 변화를 강제한 것이 있다. 민주당 분당(열린우리당 창당) 사건이다. 그 사건을 겪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변화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비타500 한 상자를 더 가져왔다.

미 콜로라도대서 1년간 ‘한국학’ 소개 예정
귀국뒤 중립지대서 비판하고 칭찬할 생각
“치열함과 원숙함, 양립 가능했으면 좋겠다”

-결정적인 전환점이란 말씀?

“그렇다. 완전한 전환점. 당시 민주당 분당, 즉 열린우리당 창당은 내가 보기에 지역주의에 기반한 기회주의였다. 그래서 반대한 것인데, 내게 돌아온 것은 모진 비난이었다. 쉽게 하는 말로 전라도주의자, 김대중주의자였다. 민주당을 분당하고 노통 권력 중심으로 당을 새로 짜는 걸 지지하는 건 나로서는 내 이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호남지역에서조차 심리적으로 왕따가 되었다.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사람들, 독자들이 나에게 등을 돌렸다. 아, 그때 받았던 비난 중에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게 너무 많았다. 니 책을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졌다, 니 책을 몽땅 불태워버렸다…나도 화가 났다. 이게 제대로 성찰이 있는 나라냐고. 그래, 성찰 따윈 애시당초 없는 사회다, 그냥 이렇게 흘러가는 거다. 사람들도 독자들도 사실은 자기가 필요로 할 때 내가 떠들어주니 호응한 거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심하게는 이래서 지식인을 졸이라고 하는구나 하는 비하까지 했다. 그 뒤론 나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서게 되더라. 그런 걸 안 겪고 그냥 세월의 힘으로 원숙해지고 그랬더라면 좋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비타500을 이번엔 기자가 깠다.

-인간적인 고통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실명비판하고 그럴 때가 더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지나고 보니 오히려 그쪽이 더 쉬웠다. 그때는 내 뒤에 확실한 내 편이 있어서 아무리 극한의 대치를 해도 힘들다는 생각을 안 했다. 그런데 민주당 분당 때처럼 양쪽이 싸울 때 중간쯤에 서서 양쪽의 문제점을 지적하니 어느 쪽에서도 환영을 못 받더라. 그래서 투쟁보다 성찰이 더 어렵다는 걸 알게 된 거고. 그러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남은 인생은 분노, 증오, 그런 따위가 아닌 다른 세계로 가봐야겠다고. 그런데 그 길로 가려니, 글을 ‘싸납게’ 써서는 안 되는 것이더라. 그 길로 가기로 작정하면 글쓰기도 달라져야 하는 걸 알았다. 생각이 바뀌면 문체가 바뀌고, 문체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그때 내 앞에 떠오른 주제가 이 지긋지긋한 승자독식 문화에 도전해 보는 거였다. 승패에 따라 10 대 빵으로 갈리는 이놈의 사회, 7 대 3, 6 대 4 정도라도 될 수는 없을까… 그런데 그런 심심한 주장을 정색하고 하면 누가 열광하겠는가? 상대편한테까지도 비웃음을 살 게 뻔하지. 그래서 직접적인, 직설적인 글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또 깨닫게 되는 거고….”

-그래서 요즘 당신의 글쓰기가 역사 속으로 가고, 미국으로 가고, 문화로 가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논문 몇 편을 들고 왔다. <빨리빨리의 문화정치학> <자동차의 미디어 기능에 관한 연구> <아파트의 문화정치학> <죽음의 문화정치학> <간판의 문화정치학>….

“이런 것들이 요즘 내 관심사다. 예컨대 <빨리빨리…>는 한국의 속도 커뮤니케이션을 다룬 논문이다. 이걸 연구해보니 민주당 분당 사건이 조금 이해가 되더라. 기회주의라고 내가 공격했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사실 기회주의라기보다는 빨리빨리 뭔가 개혁도 하고 바꿔도 보고 싶은 조급증이었다는 것을….”

-거친 분류지만 진보에서 중도로 건너간 게 맞나? 아니면 내용은 진보이면서 소통의 영역을 넓혀간다는 차원에서 중간영역의 확장이냐?

“굳이 따진다면 후자이다. 내가 중도로 옮겨간다는 게 아니라, 내가 주장하고 싶은 내용을 더 많은 사람들과 같이 소통하고, 그것을 통해 좀더 바람직한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 보자는 거다. 낮은 단계의 권모술수라 해도 좋다. 그렇게 해서라도 대중들에게 내 이야기가 더 다가갈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오늘 주제는 성찰인 것 같다. 분노나 증오 같은 센 단어가 소통이나 성찰 같은 부드러운 단어로 바뀌어가는 과정… 개인적으로 성찰의 의미를 찾는다면?

“<한겨레>에서 한의사 고은광순씨가 계룡산 밑에 한의원을 새로 연 기사를 봤는데 그분이 ‘지금까지는 사회 변화를 위해 목소리를 많이 냈지만 앞으로는 나와 주변사람들이 좀더 행복해지는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더라. 전적으로 공감한다. 거대 주제에서 작은 주제로 사고의 대상을 옮기고 싶다. 그걸 후퇴 또는 보수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해한다. 하지만 큰 것에서는 성찰의 기회를 얻기 어렵다. 예컨대 당장 엠비정권으로부터 정권을 되찾는 게 목적인 사람에게는 성찰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렇다고 투쟁만이 승부에 도움이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큰 것을 놓고 싸우는 사람이 있으면, 곁에서 작은 것의 의미를 축적해 가는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 그들이 같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때 승부도 이기는 것이 아닌가?”

-이런 걸 원숙해진다고 해야 하나? 당신의 치열함과 원숙함은 공존할 수 있을까?

“원숙해진다고 치열함이 사라지는건 아니다. 나도 노력해 보련다. 귀국하면 다시 실명비판을 시작할 생각이다. 중립지대에서의 실명비판도 가능하지 않겠나? 양쪽을 다 비판하고 견인도 하는. 그러나 과거와 같이 분노를 자극하고, 증오를 증폭시키는 그런 방식은 아닐 것이다.”

자리를 옮겨 술을 마셨다. 사실상 초면이나 다름없는데도 편했다. 기자는 그의 변화가 결실을 거두기를 진심으로 기원했고, 연장의 그는 기자의 건방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혹한의 전주에서, 익산으로 옮겨가며 마지막 열차가 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즐겁게 대취했다. 


강준만 교수는

1956년 전남 목포생.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이다. 숭실고·성균관대 경영학과를 나와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신문방송학 박사(1989) 학위를 받았다. 실명비판을 전개한 일인 매체 <인물과 사상>(현재 월간지)을 창간했고, <김대중 죽이기> <서울대의 나라> <대중문화의 겉과 속>(3권) <한국 현대사 산책>(현재 18권) <한국 근대사 산책>(10권) <미국사 산책>(17권) 등 200여권의 저작이 있다. 2005년 제4회 송건호 언론상을 받았다.  2011.1.23 -


 


★ ‘고종석’식 진보주의를 위하여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주의’를 이론 없이 곧장 실천으로 들어간 ‘진보주의자’…한국 지식계의 축복, 그의 엄격한 책임 윤리가 곳곳에 스며드는 세상이 오길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께 질문을 하나 드리겠다. 민주노동당(민노당)이 창당 기념일 행사로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여론 형성에서 민노당의 발전과 성장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지식인에게 감사장을 수여한다면, 1순위로 누구를 꼽겠는가?

가장 효과적인 민노당 지지

나는 고종석이다. 고종석의 반열에 오를 만한 다른 지식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의 이런 주장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 고종석이 펴낸 <바리에떼: 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개마고원)이라는 책을 읽기를 권한다. ‘사람’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고종석의 ‘복잡성’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아니 무심코 읽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나는 자칭 ‘고종석 전문가’로서 그가 얼마나 ‘복잡한 사람’인지에 대해 이제부터 예비 지식을 드리고자 한다. 고종석에 대한 칭찬도 비판도 아니다. 담담하게 해부해보는 것이다.


△ 고종석은 진보마저도 책임 윤리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래서 선뜻 “나 진보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다.(사진/ 한겨레 장철규 기자)

고종석은 “개인적으로 나는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나는 진보 정당의 지지자가 아니다”(203쪽)라고 했다. 고종석은 진보주의자가 아닐뿐더러 집단주의를 혐오한다. 그는 “만국의 개인들이여, 흩어져라! 흩어져서 싸우라! 민족주의의 심장에, 모든 집단주의의 급소에 개인주의의 바이러스를 뿌려라!”(30쪽)라고 선동적인 개인주의 선언을 한 바 있다. 고종석이 낙관적 열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나는 염세주의자에 가깝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탐욕과 포악과 비굴에서 사람에게 맞설 만한 동물이 있을지 모르겠다”(291쪽)고 털어놓았다.

이 정도면, 고종석을 잘 모르는 분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그런 사람에게 왜 민노당이 감사장을 줘야 한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고종석만큼 효과적인 민노당 지지를 역설한 지식인은 찾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이다.

민노당 당원이거나 당원은 아니더라도 민노당 색깔을 가진 진보적 지식인들은 평소 글쓰기 활동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민노당 당원들도 잘 알아듣기 어려운 용어로 논문식 글을 쓰는 지식인들이 다수다. 대중적인 글을 쓰는 지식인들도 있지만, 이들은 보수(자유주의 포함) 정당 비판에만 몰두한다. 보수 정당 비판이 곧 민노당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충분히 입증된 것 같은데도, 이들은 왜 민노당을 지지해야 하는지 겸손하고 간곡한 자세로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보수 정당 지지자들에 대한 호통, 야유, 조롱이 주요 메뉴다. 비극은 많은 민노당 당원들이 그걸 말리면서 “손님 쫓아내지 말라”고 고언을 하는 게 아니라, “아이고 속 시원해라” 하면서 즐긴다는 사실이다.

호통, 야유, 조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 차분하고 정중한 설득보다는 그게 더 필요할 때도 있고 효과를 낼 때도 있다. 문제는 시종일관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져 본말이 전도되는 사태다. 나를 위한 진보인가, 민중을 위한 진보인가?

고종석은 시종일관 겸손하게 민노당 지지를 설득한다. 그는 한국 사회의 극우 편향을 개탄하면서 ‘이념적 정상화’를 위해 자유주의자들이 민노당에 표를 던져야 한다고 타이르고 호소한다. 이 책에도 그런 호소가 나와 있지만, 고종석이 정치를 주제로 쓴 많은 글엔 명시적·암묵적인 민노당 선전이 들어 있다.

고종석이 묘한 사람인 건 분명하다. 한국 사회의 야만에 대해 그 어떤 진보주의자보다 더 진보적 의분을 표출해왔으면서도, 자신은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딱 잡아떼니 말이다. 문학평론가 백철은 고종석의 소설집 <제망매>에 쓴 발문에서 고종석의 묘한 이념 지향성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한국형 진보주의의 리트머스 시험지

“그는 우리나라의 어떤 ‘좌파들’보다도 더 좌파적이었고, 어떤 ‘우파들’보다도 더 우파적이었다. 인간과 세상의 진보를, 아니 진보의 험난한 좌절들을 진실로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그는 충실한 좌파였고, 많은 좌파들을 부끄럽게 만들 줄 안다는 의미에서 또한 충실한 우파였다.”

사회과학적 분석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고종석은 한국형 진보주의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진보 세력이 ‘고종석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선 큰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 시험의 이름은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 정립 문제다.

개인주의는 오랫동안 사회주의와 갈등 관계를 유지했다. 사회주의에 호의적인 사람들도 개인주의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해 유보적 자세를 취하곤 했다. 예컨대, 미국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사회주의에 공감했지만 사회주의가 개인과 천재에 반대하는 것을 싫어했다. 가치 있는 것은 오직 개인뿐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그런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1891년에 낸 <인간의 영혼과 사회주의>에서 “우리가 사회주의를 통해 이르고자 하는 것이 개인주의”라고 주장했으며, 조레스는 1898년에 낸 <사회주의와 자유>에서 “사회주의는 완전하고 논리적인 개인주의”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를 개인주의의 논리적 완성으로 보았으며, 빅토르 바슈는 1904년에 낸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에서 “일관성 있는 개인주의는 사회주의로 귀결된다”고 주장했다.(알랭 로랑의 <개인주의의 역사>)


△ 고종석은 참여정부의 파산을 염려해 열린우리당 지지를 역설하고 다른 대안으로 민주노동당 지지를 제시했다. 2003년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개최된 열린우리당 창당대회.(사진 / 한겨레 김정효 기자)

한국에서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주의’를 시사한 이는 한양대 교수 임지현이다. 그는 “낡은 전통에 가위 눌려 있는 남한의 좌파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에서만 건설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회한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 것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론 없이 곧장 실천으로 들어간 대표적 인물이 바로 고종석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종석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 가운데 사회주의자는 얼마나 되겠는가? 고종석은 진보주의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고종석은 한사코 자신이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개인주의와 진보주의가 양립하지 못하는 한국의 진보주의 풍토를 정면 돌파할 뜻이 없기 때문일까? 나는 그게 고종석의 개인주의가 요구하는 ‘책임 윤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책임 윤리가 박약한 편이다. 책임 윤리란 어떤 일을 할 때 나타난 결과뿐만 아니라 예상 가능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윤리의식을 말한다. 옳은 일이니까 결과에 개의치 않고 무조건 밀어붙인다는 진보주의는 책임 윤리가 없는 모험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선 곧잘 모험주의가 진보주의로 통용되기도 한다. 독재정권 시절에 형성된 습속이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지속된 탓이다.

이념을 떠나 일상의 차원에서도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공직을 맡는 걸 두려워한다. 책임 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비극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공직자, 특히 고위 공직자들의 책임 윤리 부재 또는 박약을 들겠다. 대부분 고위 공직을 출세로 생각한다. 그건 ‘출세’가 아니라 ‘봉사’하는 거라고 반박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봉사하기 위해 치열한 로비를 하고 남이 자신보다 좋은 봉사 기회를 갖게 되면 배 아파하고 헐뜯는 사람들이 왜 그리도 많단 말인가?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함부로 공적 단체를 만들지도 않는다. 공공의 목적을 위한 단체면 성공 가능성을 검토하지도 않은 채 무조건 만들고 보는 게 우리 시민사회의 풍토다. 하다 안 되면 때려치우면 그만이다. 책임? 공익을 위한 이타적 활동에 무슨 책임?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이타성을 면죄부로 내세우는 그런 반문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책임 윤리 유전자를 가진 고종석이 영원히 공직을 맡거나 상시적인 공적 단체를 만드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여태까지 내가 분석해온 고종석은 그렇다는 것이다.

선뜻 “나 진보요!”라고 하지 않는 이유

고종석은 진보마저도 책임 윤리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선뜻 “나 진보요!”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진보를 고위 공직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백철의 평가를 다시 읽어보라. 가슴에 와 닿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고종석은 과격한 개인주의 선언을 하였지만, 나는 실천에선 내가 고종석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이기주의에 더 충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2003년 12월 나는 고종석과 민주당 분당 문제로 논쟁을 한 바 있다. 이와 관련된 글이 <바리에떼>에 실려 있으므로, 이 이야기를 좀 해보자.

민주당 분당에 비판적이었다는 점에선 나와 그의 생각은 같았지만, 전체 또는 집단을 생각한다는 점에선 고종석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고종석은 “가난한 부모가 창피하다며 집을 뛰쳐나갔다가 세상에서 따돌림당하는 자식을 거두어 보살피는 어미의 심정으로 호남 유권자들은 신당을 감싸야 한다”(187쪽)는 주장을 폈다.

나는 이런 ‘부모·자식·어미’론이 부적절한 유추라고 생각한다. 고종석이 ‘참여정부의 파산’을 염려해 열린우리당 지지를 역설하고, 다른 대안으로 민노당 지지를 제시한 건 나로 하여금 “이 양반 개인주의자 맞나?”라는 의문을 갖게 했다. 고종석은 나의 주장이 ‘민주당 지지’를 ‘암시’한다고 해석했지만, 나는 “이 양반 진짜 개인주의자 맞나?” 하는 생각을 했다. 혹 ‘대안 중독증’이나 ‘독수리 5형제 신드롬’에 빠져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했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노무현의 해체주의는 ‘창조적 파괴’라고 예찬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그건 노무현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란 말이냐고 내심 쏴붙였다.

나는 열린우리당은 내가 반대한 정당이므로 열린우리당이 파산하건 말건 아무런 책임 의식이 없는 반면, 고종석은 대선에서의 투표에 대한 책임을 말하면서 노 정권에 대한 책임 윤리마저 역설하는 게 아닌가! 고종석이 자유주의자요, 개인주의자라고?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노무현은 자신의 약속을 뒤집고 민의를 폄하하면서 결과야 어떻게 되든 모험주의라고 불러주기조차 어려운 도박주의로 치달리는데도 고종석은 그런 노무현까지 어미의 마음으로 껴안자고 역설했으니, 나로선 “오지랖도 참 넓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종석은 “노무현이 아무리 나빠도 최병렬이나 이회창보다는 수백 배 덜 나쁘고, 전두환보다는 수만 배 덜 나쁘다”(199쪽)는 논리를 내세워 특검법 통과에 한나라당과 공조한 민주당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나는 여기서 고종석의 평소 ‘쿨함’이 사라졌다는 게 흥미롭다. 이는 그가 ‘개인’보다는 집단적 ‘대의’를 앞세운 탓이리라.

나도 평소 대안을 어지간히 강조하는 편이지만, 잘못된 것을 비판함에 있어서 늘 그 결과와 대안까지 미리 생각하고 비판에 임하진 않는다. 그런데 고종석은, 비록 그가 ‘국가’와 ‘민족’이라는 단어를 혐오할망정, 사실상 국가와 민족을 염려하는 지극한 애국심을 발휘했으니 이 어인 일인가.

<바리에떼>엔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 대한 성실한 반론이 실려 있다. 87쪽에서 137쪽에 이르는 긴 글이다. 고종석 스스로 “식민지 시기의 역사적 복권을 통해 민주주의 운동의 정통성을 흔들려는 온갖 ‘경제론’들의 급소를 이 글이 비교적 정교하게 움켜쥐었다고 나는 판단한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그 이상이다. 최근 홍수처럼 쏟아져나오고 있는 식민지 시절에 대한 모든 논란에 대해 명쾌한 교통정리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종석은 복거일을 내내 비판하지만 그의 비판은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하다. 나는 복거일에 대한 과분한 대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복거일은 철저한 사회진화론자이며,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니 보수주의니 하는 건 편의적으로 동원되는 것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고종석이 복거일의 자기 교정 가능성에 대해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건 자신이 복거일로부터 배운 점이 있다는 것에 대한 책임 윤리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닌가 의심하곤 한다.

내려다보는 일부 진보주의자에게

고종석과 같은 희귀한 지식인이 있다는 건 한국 지식계의 축복이지만, 내가 정작 높이 평가하는 그의 미덕은 매사를 깊이 꿰뚫어보는 시력이다. 내 기준으론 보아선 과도할망정 고종석의 엄격한 책임 윤리가 곳곳에 스며드는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다. 물질적으론 낮은 곳에 있을망정 정신적으론 높은 곳에 서서 진보 아닌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일부 진보주의가 고종석형 진보주의로 교체되는 그런 세상은 언제 올 것인가?


‘거리두기 실패’는 양이 아닌 질

646호 성한용 선임기자의 반론에 부쳐

<한겨레> 성한용 선임기자의 반론에 감사드린다. 나는 성 선임기자가 노무현 정권을 비판한 칼럼·기사들이 많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성 선임기자는 “강 교수가 이런 칼럼이나 기사를 혹시 일부러 외면한 것이라면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반은 인정한다. ‘일부러’의 의미가 이중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제기했던 문제는 ‘거리두기’의 양보다는 질이었기에, 성 선임기자가 노 정권을 비판한 칼럼·기사들이 많이 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집중적으로 문제 삼은 노 정권의 ‘남 탓’은 성 선임기자의 다른 칼럼·기사들의 비판 주제와는 다른 것이었으며, 이런 성격의 ‘거리두기’는 전체적 평균보다는 각 글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따라서 내가 문제 삼은 글들이 거리두기에 실패했다는 나의 비판은 유효하다고 본다.

그러나 내 글이 방금 설명한 원칙을 밝힘으로써 성 선임기자의 평소 저널리즘 활동을 잘 모르는 독자들이 오해할 소지를 차단해야 할 노력을 하지 않은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 점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했더라면 훨씬 더 설득력이 높은 글이 되었으리라 믿기에 나도 아쉽다.

<한겨레>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계량화된 수치를 내놓을 순 없지만, 적어도 정치적 논조에선 나는 성 선임기자가 <한겨레>의 대표 필진급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뒷받침할 나름의 근거가 있다. 사실 이런 문제 제기를 염두에 두고 <한겨레>의 사설 분석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성 선임기자의 반론처럼 양의 균형이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어 좀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노 정권의 집요한 ‘언론 탓’과 나 같은 사람의 시비 사이에서 시달리는 성 선임기자의 노고에 위로와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노무현과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恨)

[인물과 사상의 눈] 한풀이의 동력을 받은 '단일 이슈 정치' 슬픈 운명
 
강준만  
 
아비투스’에 의한 ‘단일 이슈 정치’

‘단일 이슈 정치(single issue politics)’라는 게 있다. ‘단일 이슈 정치’란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열악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해 한 가지 이슈에만 ‘올인’하면서 다른 이슈들을 그 메인 이슈에 종속시키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 메인 이슈에 대한 의견만 같다면, 또는 메인 이슈를 실현할 수 있는 출구만 열린다면, 이념적으로 자신의 정반대편에 있는 정치세력과 연대연합하기도 한다. 심지어 극우와 극좌가 연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국가를 책임진 집권세력이 단일 이슈 정치에 몰두한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희귀하다. 그 희귀한 사례가 양상을 좀 달리한 채 한국에 나타났으니, 바로 노무현 정권이다.

노 정권의 행태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는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恨)’이다. 한이란 적어도 한 세대 이상 되는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그 어떤 ‘아비투스(습속)’다. 아비투스는 논리와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는다. 그래서 자신이 그 아비투스를 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아무리 논쟁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

돌이켜보면, 영남 민주화 세력만큼 가시밭길을 걸은 사람들도 없다. 1961년 박정희 집권 이래 민주화 세력은 늘 영남에선 ‘찬밥’이었다. 온갖 서러움을 다 당해야 했다. 특히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제7대 대통령 선거(1971년 4월 27일)가 그들에겐 ‘재앙’이었다.

4·27 대선은 영남 지역주의가 강하게 드러난 선거였다. 이후 영호남 지역구도가 강고하게 형성되면서 영남 민주화 세력은 영남에선 ‘고향을 배신한 세력’으로까지 낙인찍혔다. 김영삼이라는 영남 출신 민주화 지도자마저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화 세력의 반대편에 서게 됨으로써 영남 민주화 세력의 고립과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반면 호남 민주화 세력은 독재정권들의 모진 탄압은 받았을망정 고향에선 대접받았다.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도덕적 우월감까지 누릴 수 있었다. 민주화 세력 내에선 호남인이 압도적 다수를 점함으로써 헤게모니까지 장악했다. ‘민주화’는 사실상 ‘호남화’였다. 영남 민주화 세력의 고립과 고통은 배가되었다. 고향에서 버림받은 동시에 민주화 진영에선 호남세에 눌려 지내야 했다.

수도권에서 김대중 정당에 소속돼 국회의원 배지를 단 비호남 출신 의원들은 호남 출신 유권자들의 비위마저 맞춰야 하는 ‘호남화’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른바 ‘향우회’ 그룹을 지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호남 출신 유권자들의 행태는 결코 고상하지 않았다. 추태를 부린 사람들도 많았다. 결코 겉으로 표출할 순 없었을망정 민주파 비호남 출신 의원들 사이에서 독재정권들과는 다른 종류의 반(反)호남 정서가 싹트지 않을 수 없었다. 독재정권은 내내 영남이 장악했지만, 정치권 야당의 헤게모니 세력은 호남이었다는 사실, 이건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사실임에도 간과되고 있다.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恨)과 지역구도 타파

영남 민주화 세력의 고립과 고통은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돼 대통령 임기를 끝내면서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지만, 의식과 문화는 하루아침에 사라지거나 청산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영남 지역주의라는 장벽에 여러 차례 도전을 함으로써 호남인의 호감과 신뢰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은 자신이 영남 민주화 세력의 오랜 한(恨)을 풀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 한풀이엔 ‘지역구도 타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을 푸는 게 지역구도가 타파되는 것이고, 지역구도가 타파되는 것이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을 푸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건 같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건 차별받은 호남의 한을 푸는 것이 지역구도 타파로 연결되지 않았던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지역구도 타파’를 먼저 생각하는 것과 그러지 않고 그간 맺힌 한을 푸는 걸 앞세운 뒤 그 일에 ‘지역구도 타파’라는 명분을 갖다 붙이는 건 선후가 바뀐 정도를 넘어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 이제 시간이 흘러 분명해졌지만, 노무현은 지역주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나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한화갑의 증언이다.

“2002년 민주당 후보 경선 때 노무현 후보가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도 경선에 나가야 할 입장인데 어쩌겠느냐’ 했더니 ‘내가 전라도 DJ 밑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또 더하란 말이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인간적인 실망이 들었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이해의 폭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머슴살이란 말입니까! 겉으로는 지역감정을 타파한다면서 속으로는 지역감정에 휩싸인 사람입니다. 도대체가 전라도 머슴살이였다는 게 뭡니까. 자신도 ‘광주 사람들이 내가 좋아서 찍었겠느냐, 이회창이 싫으니까 찍은 거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1)

유종필의 주장이다.

“노 대통령의 후보 시절 ‘동서화합 국민통합’의 기치에 감동해 노무현 캠프에 참여했으나, 지금은 노 대통령의 머리와 가슴속에 뿌리깊은 지역 우월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영남 출신 노 대통령의 ‘호남당’ 운운에는 호남에 대한 멸시와 비하 의식이 짙게 배어 있다.”2)

그러나 한화갑과 유종필의 생각은 적어도 한동안 다수 호남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또 여전히 많은 호남 엘리트들이 노무현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노무현은 오히려 한화갑·유종필의 생각을 지역주의로 몰아붙였고, 이게 힘의 논리에 의해 먹혀 들어갔다. 누가 옳건 그르건 정치 현실만 놓고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한화갑·유종필의 생각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무엇보다도 모양새가 너무 우습기 때문이다. 호남인들이 동의하지 않는 ‘호남 차별론’을 역설한다? 그게 정치적으로 현명한 처신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호남이 최근 일련의 선거에서 열린우리당보다는 민주당에 기운 걸 그 성과로 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이 선사해준 것일 뿐이다. 더욱 중요하게 생각할 일은 왜 민주당의 전국 지지율엔 아무런 변함이 없는가 하는 점이어야 한다.

민주당의 배신론이 실패한 이유

민주당이 노무현의 ‘호남에 대한 멸시와 비하 의식’을 공격한 건 잘못된 노선이었다. 그건 호남인에게 지난 총선에서 무슨 이유에서였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걸 인정하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월간 <인물과사상> 2005년 8월호에 쓴 "김대중노무현의 매트릭스: ‘역사의 배신’인가?"라는 글에서 김욱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더욱 고통스러운 건 ‘가혹한 비판’을 각오하는 김욱의 ‘정면 대결’의 상대가 영남 패권주의이기 이전에 호남 실용주의라고 하는 사실일 것이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는데, 도무지 싸움이 되질 않거니와 무의미하거나 자학적인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자. 호남인들이 김대중은 물론 노무현에게도 90%가 넘는 몰표를 주었을 때 그들은 심약했던가? 아니다. 그들은 전혀 심약하지 않았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어떻게 보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대담무쌍했다. 그런데 왜 그런 호남인들이 갑자기 심약해진단 말인가? 오래 생각할 것 없다. 답은 ‘실용성’에 있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은 호남인들에게 실용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대담할 수 있었지만, 실용성이라곤 눈을 비비며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민주당에게서 무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민주당의 배신론이 먹혀들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열린우리당이 해체되거나 사분오열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민주당의 명예회복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유권자의 선택은 늘 옳은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민주당은 몰락의 책임을 노무현보다는 자신들에게 돌리는 게 옳았다. 민주당이 할 일은 시종일관 자신들의 무능과 과오를 참회하면서 다른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했다.

어찌됐건 지역주의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노무현에게 우선적인 건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을 풀고 자신의 고향에서 인정받고 싶은 인정욕구 충족이었다는 점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 전엔 그게 분명하게 드러나기 어려웠다. 그는 지역구도 때문에 피해를 본 희생자로만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예컨대, 양동주는 “반(反)DJ 반(反)호남 정서의 본질은 노무현 자체이며 그 점은 그가 걸어온 상대적으로 짧은 정치경력 속에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강준만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고 애써 눈감고 보지 않았을 따름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노무현의 20년 정치 여정의 이정표는 강준만 자신이 왜곡된 지역주의의 아류로 숱하게 비난하여온 ‘3김 청산’이었다. 노무현과 그의 조숙한 386 참모들은 대권을 쟁취하기 위한 여정에서 교묘한 위장술을 성공적으로 구사하였다.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도 노무현은 DJ에게 철저히 아부하였고 그 대상은 동교동 구주류라면 누구든 상관없었다. 노무현은 실질적으로 김근태 의원이 이끈 당정 쇄신운동에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고 같이하자는 권유도 단호히 뿌리쳤다. 노무현의 위장술에 대한 공개된 혹은 공개되지 않은 사실과 증언들은 얼마든지 널려 있다. 노무현에게 ‘올인’한 <한겨레> 신문이 일부러 감추었다고 해도 모든 미디어들을 꼼꼼히 살펴보는 강준만이 이를 무시한 것은 솔직히 말해서 그의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의심케 한다.”3)

양동주의 비판에 대해선 월간 <인물과사상> 2005년 8월호에 자세한 답을 했으므로, 하던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겠다. 양동주의 주장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노무현의 ‘교묘한 위장술’이다. 노무현이 ‘교묘한 위장술’을 쓴 건 분명하지만, 김영삼김대중도 그런 정도의 위장술은 구사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문제는 위장술의 결과다.

노무현의 ‘교묘한 위장술’

김영삼은 5·6공 세력을 지켜줄 것처럼 위장했다가 그들을 숙청했고, 김대중은 JP에게 권력을 줄 것처럼 위장해 성사시킨 DJP 연합으로 집권한 후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김영삼김대중은 정치 도의적으론 비난받을 짓을 했지만, 민주화 세력의 박수는 받았다. 노무현도 ‘민주당 죽이기’로 처음엔 박수를 받았지만, 박수를 오래 치긴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다. 노무현의 위장술은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대연정으로까지 치달았기 때문이다. 지역구도 때문에 피해를 본 희생자로만 여겨졌던 노무현이 대통령 권력을 누리면서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게 분명해진 것이다.

노무현이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을 풀기 위해 구사한 3대 이슈는 ‘대북 송금 특검’ ‘민주당 죽이기’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등이었다. 모두 다 상상을 초월하는 파격이었다. 세 번째의 파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의 파격이 모두 성공했는데, 왜 세 번째의 파격은 안 된단 말인가? 노무현은 이 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늘 자신의 모든 걸 거는 ‘치킨 게임’으로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다수당까지 만들어낸 노무현은 자신이 늘 시대를 앞서간다는 확신으로 무장한 채 ‘국민은 20세기, 대통령은 21세기’라는 말마저 믿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세 번째의 실패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채 장관직을 선거에 이용하는 등 국정 운영마저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을 풀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네 번째 파격을 연출했지만,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노무현은 5·31 지방선거의 참패 결과도 수긍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는 일은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풀이’가 아니라 ‘지역구도 타파’라고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늘 내세우는 게 ‘역사로부터의 보상’이다. 하지만 그런 보상은 ‘최악의 방법론’이라는 그늘에 묻힐 가능성이 높다.

‘지역구도 타파’의 선결 조건은 권력자의 출신 지역이 어디냐에 따라 정책인사가 좌우되지 않는 공정투명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정반대로 나아갔다. 조급한 한풀이 욕망이 앞선 나머지 오히려 시스템을 엉망으로 만든 건 물론이고 급기야 영남 표 얻겠다고 스스로 ‘부산 정권’임을 주장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노무현은 당당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1987년 지역구도로 가기 전의 여야구도로 돌아가야 한다나. 이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감동시킨 노무현표 지역주의의 면죄부다. 길게는 36년, 짧게는 20년 묵은 그 역사의 업보를 자신이 단칼에 해치울 수 있다고 믿는 만용도 놀랍지만, 1987년 지역구도를 김영삼김대중만의 문제로 보는 그 발상의 단순함이 낭만적이다. 이건 노무현만 탓할 일은 아니다. 의외로 많은 지지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지역주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1987년 이전에 무엇이 있었나? 한 세대 기간에 걸친 독재만 있었다. 1987년에서야 최초로 제도권화를 이룬 민주세력의 분열이 왜 일어났나? 박정희전두환이 원흉이었다. 권력자의 출신 지역이 어디냐에 따라 정책인사가 극편향되는 시스템이 문제였다. 따라서 그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지, 그 시스템을 악화시키면서 인위적으로 정당 구성원들을 뒤섞는 건 답이 아니다. 하수 중의 하수다. 성사되지도 않을뿐더러 아무런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

노무현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김대중 정당에 들어간 뒤 ‘교묘한 위장술’을 쓰느라 한 번도 그 생각을 밝힌 적이 없다. 검증은커녕 논의된 적조차 없다. 민주당의 계승발전을 이루겠다는 충성 맹세만을 수없이 외쳤을 뿐이다. 광주에선 그 맹세의 일환으로 큰절까지 했다. 그래놓고서 대통령이 되자 표변하여 자기만이 모든 답을 안다는 듯 선구자 노릇을 하려 들었다. 이게 과연 온당한가? 이건 지역주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 기본 원리에 관한 문제다. 인간으로서의 진정성 문제다.

우리가 염원했던 민주화란 시스템 교정의 기회이기도 했다. 시스템이 교정되면 지역주의가 약화되면서 이념정책이 살아날 것이다. 이건 오랜 시간과 더불어 인내가 필요한 과정이다. 조급한 모험주의영웅주의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악덕이다. ‘부산 정권’임을 내세워 해결하려는 건 최악의 수법이었다.

‘부산 정권’은 노무현의 최측근인 전 청와대 민정수석 문재인의 발언이었지만, 노무현도 지역에 따라 말을 바꾸는 이상한 행태를 드러내곤 했다. 노무현은 2004년 7월 9일 전북 군산에서 열린 혁신토론회에서 “선물을 주러 온 게 아니다. 전북 스스로 지역 혁신 역량을 키워라”고 발언한 반면 그로부터 20일 후인 7월 29일 전남 목포에선 “광주전남은 직접 챙기겠다. 큰 판을 벌이겠다”고 말했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하나둘이 아니다. 지역주의에 도전하다 지역주의에 중독된 비극이라고나 할까?

문재인·노무현의 발언을 선의로 해석하자면,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恨)이 판단 장애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 한에 의해 형성된 아비투스를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남 탓을 하고 세상을 원망한다. 자신들의 진정성을 몰라준다고 억울해 한다. 아마 진심으로 그럴지도 모른다.

임원혁의 ‘영남 민주화 세력의 고민’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恨)’이라는 표현 대신 ‘영남 민주화 세력의 고민’이라는 부드러운 표현으로 이 문제를 지적해 반향을 일으킨 사람은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임원혁이었다. 임원혁은 2005년 8월 대연정 파동을 노무현이 영남 민주화 세력 출신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 역사적인 관점에서 분석했다.

임원혁은 “2002년 대선은 맹목적 지역주의에서 벗어나 이념과 가치 중심으로 정치권이 재편될 계기를 마련해주었지만, 실제 정계개편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다. 집권당 내 소수파로서 정권을 잡은 영남 민주화 세력이, 민주화라는 가치보다는 영남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양극화 해소와 같이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정책보다 영남발전특위처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제안이 선거대책으로 더 중시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나라당에 대한 대연정 제안은 영남 민주화 세력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라도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선거구제 개편이나 개헌 논의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현실 정치인인 영남 민주화 세력에게는 절박한 문제일 수 있지만, 국민 대다수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뿐이다.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지 못하는 정치 공학적인 논쟁으로 참여정부의 후반기를 시작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울 뿐이다.”4)

노무현의 대변인이라 할 수 있는 유시민이 <한겨레21> 인터뷰에서 굳이 임원혁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반박한 건 임원혁의 지적이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는 걸 시사한다. 유시민은 대연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호남에서 왜 그리 많이 밀어줬나. 저 사람이 영남에서도 많이 득표할 수 있다, 적자로 가업 계승이 안 되니 양자를 들여서 밀어주기만 하면 이회창을 이길 수 있다, 한나라당이 다시 집권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러한 기대로 노무현 후보를 광주에서 확 밀어준 것 아니냐. 이것은 비극적이다. 암 환자에게 모르핀 주사를 놓은 것과 똑같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모르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투약된 모르핀 약이 암을 뿌리 뽑겠다고 지금 나선 것이다. 지금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인가. 그런데 호남에서는 ‘니가 뭔데?’ 하고, 임원혁 박사는 이것을 ‘영남 민주화 세력의 고민’이라 표현했다. 이것은 사태를 완전히 잘못 보는 것이다.”5)

유시민의 이 주장은 “호남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찍었나요. 이회창이 보기 싫어 이회창 안 찍으려고 나를 찍은 거지”라는 노무현의 2003년 9월 발언의 복사판이다. 이게 잘못 알려진 발언이니 뭐니 하는 논란이 있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유시민이 입증해준 셈이다.

유시민은 대연정을 역설하면서 그간 잘 위장해온 자신의 지역주의관을 엉겁결에 스스로 폭로하고 말았다. 그간 유시민은 영남 출신이면서도 호남을 옹호하는 사람인 것처럼 알려져 왔지만, 알고 봤더니 그게 아니다. 그게 꼭 위장이었을까?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비투스의 문제일 수도 있다.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을 푸는 일에 도움이 되거나 장애가 되지 않는 한 진보적 인사로서 상식적인 수준의 판단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표변하는 것이다.

이영성의 ‘노무현 이해하기’

노무현에게 표를 준 사람들이 노무현을 ‘모르핀’으로 이용했다? 일부 사람들의 경우,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렇게만 보는 건 폭력이다. 우리 인간의 생각이란 건 늘 복합적이다. 지역구도가 타파되면 누구에게 이익인가? 그 이익의 실현을 위해 노무현이 기여하리라는 기대가 없었을까? 노무현이 생각하는 방법만이 옳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노무현이 생각한 방법은 민주적 논의 과정을 거친 것인가? 앞서 지적했듯이, 적어도 공론장엔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생각이 아닌가? 그런데 그 생각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렇게 험한 말을 들어야 하는가?

사실 자기만이 선하고 정의롭고 현명하다는 독선독단독주야말로 노 정권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평가는 개혁진영 내에서도 양극을 달린다. 노 정권하에서 벌어지는 많은 갈등은 예전처럼 단순하지 않다. 개혁세력이라도 평소 과정과 절차의 중요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노 정권에 너그러울 수 있지만, 과정과 절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가 막힌다. 이 기막힘은 스타일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말로 격하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에도, 노 정권 사람들은 그것마저 ‘기득권 대 반기득권’ ‘귀족 대 서민’의 구도로 몰아간다.

그들의 선의를 이해하려 애를 쓴다면, 다시금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이 그만큼 처절하다는 깨달음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임원혁에 이어 그 문제를 지적한 이는 <한국일보> 정치부장 이영성이었다. 그는 노무현을 이해할 만한 사람들을 찾아 물어보았더니, 노무현의 진정성을 믿는 사람들은 ‘영남 민주화 세력의 소외’라는 답을 내놓았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어린 시절에도, 젊은 시절에도 고향에서 소외된 그룹에 속해 있었다. YS를 통해 정치에 입문했을 때도 상도동의 변방 인물이었을 뿐이었다. 1990년 3당 합당을 거부하면서 고단한 야당의 길을 걸었지만 고향은 그를 ‘호남(DJ)에 붙은 배신자’로 손가락질했다. 몇 번이고 출마했지만 정치적 고향인 부산은 그를 외면했다. 대통령이 돼 금의환향했지만 그래도 부산은 지난해 총선에서, 금년 재선거에서 노무현의 사람들을 우수수 떨어뜨렸다. 형편이 어렵지만 의지가 강한 사람들은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 친구들로부터, 친척들로부터, 짝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겠다는 꿈을 갖는다. 노 대통령도 그랬을 법한데 고향은 대통령으로 돌아온 그를 여전히 냉대한 것이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을 뽑아주면서 자신의 동지들은 떨어뜨리는 부산을 보면서 그는 모순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외치는 지역구도 극복은 호남의 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 대통령과 그 주변의 영남 측근들에게는 영남 민주화 세력의 소외와 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다고 한다. 영남에서, 아니면 부산에서라도 노무현의 사람들이 국회의원으로, 시장으로, 구청장으로 당선되는 변화가 생긴다면 대통령직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6)

이영성은 이어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노 대통령은 대선과 총선을 기적적으로 두 번이나 이긴 대단한 전략가이자 승부사이기 때문에 소외와 한만으로 대통령직을 걸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분명 내년 지방선거와 개헌 정국을 염두에 둔 전략적 구상이 있을 것이다”라고 토를 달긴 했지만, 그건 예의상 한 말로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그 이후 벌어진 일은 모두 ‘소외와 한’으로 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경태 사건’

오히려 문제는 영남 민주화 세력의 ‘소외와 한’은 공론화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깊고 처절하다는 데에 있다. 이걸 잘 보여준 게 이른바 ‘조경태 사건’이다. 2005년 8월 29일 열린우리당 의원 워크숍에서 조경태(부산 사하을)가 전 대통령 김대중과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을 비유하며 연정의 당위성을 강조한 발언 내용이 뒤늦게 알려졌다.

조경태는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 제안은 지역주의 문제가 절박하기 때문”이라며 “내가 한 가지 예를 들겠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때 부산 어르신들이 ‘김정일은 선글라스도 멋있고 걸음걸이도 씩씩하다. 그런데 DJ는 걸음걸이도 그렇고 창피하다’고 했다”면서 “그때 부산에서 DJ와 김정일에 대한 투표를 했으면 김정일 지지율이 더 높게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역주의가 이데올로기보다 상위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연정 당위성을 역설했다.

<국민일보>에 따르면, “순간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지고, 대부분 의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고 한다. 한 의원은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사회를 보던 구논회 원내부대표가 부랴부랴 ‘표현이 부적절하다. 그 발언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회의록에서도 빼자’고 좌중에 동의를 구했다. 조 의원은 수긍했고, 다른 의원들도 문제의 발언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기로 암묵적 공감대를 이뤘다.”7)

보라. 영남 민주화 세력의 ‘소외와 한’은 열린우리당 의원들조차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의 것이다. 그러나 조경태의 생각이 곧 노무현의 생각임을 어이하랴. 그런 실상은 공론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꾸 나오는 게 ‘지역구도 타파’라는 명분이고, 이 명분만으론 설득력이 떨어지니까 유시민식의 폭력적 강공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늘 말을 학술적으로 하는 최장집은 “노무현 정부의 경우 지역주의를 통하여 정치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이념이나 이데올로기 수준에 가깝다”면서 노무현이 지역주의 의제를 내놓는 것은 “실제의 중심 문제를 회피하게 될 때 그저 많은 사람들이 나쁜 것이라고 인식하는 어떤 문제를 과장하거나 극화하여 실제의 현실을 전치시키고자 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오늘의 시점에서 지역 문제가 정권의 운명을 걸고 청산해야 할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진 정치적 알리바이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8)

그 ‘다른 의도’가 바로 한풀이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이걸 노 정권이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유시민은 최장집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한겨레신문이 최 교수의 글을 무비판적으로 인용 보도한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사실이 아닌 주장을 무책임하게 중계방송 했다”며 “당신들의 확고부동해 보이는 논리도 알고 보면 분열이라는 질병의 한 증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9) 유시민에 대해 절망하지 않으려면, 아무래도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은 그 주체에 의해 스스로 자각되지 못하고 있다는 쪽을 믿어야 할 것 같다.

그 한은 노 정권의 판단력 장애를 가져왔다. 모든 비극은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한풀이의 동력을 받은 ‘단일 이슈 정치’의 슬픈 운명이다.

노 정권이 기여한 ‘다원성의 축복’

그러나 노 정권은 한국 사회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큰 기여를 했다. 그건 바로 단일대오의 해체다. 다원성의 진작이다. 노무현 덕분에 이제 더 이상 민주화 세력은 하나가 아니다. 호남도 하나가 아니다. 물론 오래전부터 내부 이견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서로 갈등하다 못해 적대적으로까지 대립한 적은 없었다. 이는 노무현 시대의 확실한 업적이다. 이를 부정적인 분열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성장통으로 볼 수도 있거니와 민주화 세력 전체가 자기성찰을 잃어버리는 최악의 사태보다는 더 나은 현상일 수도 있다.

노무현의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은 야당과 보수언론에 대한 증오심이 강한 세력과 과거사 청산 세력이다. 노무현이 가장 확실하게 해낸 업적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최장집의 경우처럼 민생을 중시하는 진보파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지지했던 세력과 노무현 정부를 구별해야 한다”면서 민주세력이 노 정부와 결별할 것을 요구한다.10) 크게 보아 ‘과거사 청산 진보파’와 ‘민생 진보파’의 분화가 확실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기질에 따른 차이도 있다. 노무현의 가장 확고한 지지세력은 ‘아웃사이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여전히 목숨 걸다시피 하면서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 매우 강한 아웃사이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노무현을 비판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아웃사이더 기질파의 노무현 지지도는 더욱 강고해진다. 이유는 없다. 그건 아웃사이더 기질파의 본능이다.

아웃사이더 기질과 진보성은 같은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다. 아웃사이더 기질파는 ‘책임 윤리’가 박약하다. 그간 미분화된 채로 진보의 우산 밑에 같이 머무르던 아웃사이더 기질파가 그 모습을 확실하게 드러낸 것도 노무현 시대의 공이라면 공이다. 이 다원성의 축복을 어떻게 사회발전에 활용할 것인지가 남겨진 숙제라 하겠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써야 한다는 건 비극이다. 어쩌면 모두 다 잘해보자는 뜻이었을 텐데 이토록 소통 불능 상태에 처하게 된 건 민주적 훈련의 부족 탓인지도 모른다. 독선적 소신이 존경받던 세월이 너무 길었다. 자신이 누리게 된 새로운 권력의 무게는 의식하지 않은 채 예전에 하던 그대로 내지르고 보는 관성을 고집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비극, 한때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 비극이 비극인지도 모르고 환호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행태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역사의 업보치곤 가혹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독재정권 탓만 할 순 없는 일이다. 모두 다 ‘내 탓’부터 하는 게 필요하다. 사랑과 용서도 다원성을 전제로 할 때에 가능해진다. 누군가의 독선독단독주가 혐오감을 넘어 징그럽게 여겨진다면, 나도 그런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랑·용서·관용·화해·양보·성찰·역지사지(易地思之) 등 아름다운 개념이 흘러넘치는 2007년이 되길 기대해본다.

출처:
http://www.politizen.org/zeroboard/zboard.php?id=wired&page=1&page_num=40&select_arrange=headnum&desc=&sn=on&ss=on&sc=off&keyword=&category=&no=150288




이문열과 ‘상류 지식인’의 기품

진정성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오해를 풀기 위해 말하는 ‘그의 묘한 기품에 대하여’“깃발을 내리면…” 대신 “기품 보이면 이념갈등이 생산적이 된다”는 자신감 가지길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내게 ‘작가가 그러면 안 된다’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소설의 정치화를 문제 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정치성의 색깔, 즉 내 태도를 문제 삼는 것이다. (이씨는 소설 <호모 엑세쿠탄스>의 서문에서 ‘넘어져도 왼쪽으로 넘어져야 하는 세상’이라고 비판했다.) 내가 깃발을 내리면 문단이 저쪽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나라도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이전투구의 ‘방법론’을 살피는 이유


△ 작가 이문열씨는 자신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을 ‘하류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그가 쓴 정치적 글에는 대부분 등급제 의식이 가득 배어 있다.(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

소설가 이문열이 <조선일보> 1월22일치 지면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안경환과 대담하며 한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문열의 그런 활동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다. 그의 당연한 권리라고 본다. “내 이념이 중하면 남의 이념이 중한 줄도 알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문열이 가진 ‘정치성의 색깔’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색깔’을 드러내는 방법론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으리라고 본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문열의 방법론을 공론화하는 건 이문열 개인에게나 우리 사회를 위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다. 한국 사회에선 이념 간 선의의 경쟁보다는 이전투구가 더 발달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전투구의 원인이 이념의 내용보다는 그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면 성찰해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이 글이 넓은 의미의 ‘비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나는 비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이문열의 진정성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그가 품고 있는 ‘오해’를 풀어주고 싶다. 결국 독자들이 판단할 문제이겠지만, 이런 선의를 강조하고 싶어 내가 지난해 10월 <한국일보>에 ‘이문열 선생님께’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의 일부를 여기에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이문열 선생님! 몇 개월 전 건강을 상하셨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고 걱정했습니다만, 건강은 어떠신지요? 제 선의가 이 선생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질지 자신은 없습니다만, 이 선생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선생님을 위로하기보다는 이 선생님께서 하고 계시는 한 가지 오해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오해를 푸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 선생님은 노 대통령 지지자들의 선생님에 대한 비난의 이유를 자신이 ‘보수반동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더군요. 저는 그게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선생님은 자신의 힘을 과소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강한 필력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지요. 전 이 선생님이 ‘이념’의 문제를 넘어서 그 점에 대해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이 선생님이 상처받기 이전에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살펴주시라는 뜻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우리는 ‘기질’의 문제를 ‘이념’의 문제로 보기 쉽다는 거지요.”

내가 말한 ‘기질’은 ‘기품’을 포함한다. 이 기품의 문제는 이미 고종석이 여러 차례 지적했던 것이다. 이념과 기품은 어떻게 다른가? 우익은 인간세계의 위계질서를 긍정하고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이건 이념이다. 그러나 그 이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지식인에도 1류, 2류, 3류가 있다는 걸 잘 알지만, 논쟁적인 주장을 펼 때에 상대편을 향해 “나는 1류인 반면 너는 3류다”라는 식으로 자신의 우월적 입지를 역설하진 않는다. 이는 그 어떤 극우파 인사라도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시마네현 촌것들 다스리는 법’?

그런데 우리의 이문열은 꼭 그렇게 표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묘한 기품을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을 ‘하류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물론 자신은 ‘상류 지식인’이라는 뜻이다. 그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학력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중퇴나마 서울대 물을 먹었느냐의 여부가 상류·하류를 나누는 기준일까? 아니면 책을 많이 판매한 실적? 그것도 아니면 언제든 자신이 원하면 보수신문들의 전면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권력과 상품성?

이문열 나름의 기준이 무엇이건,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너무 천박하다. 이문열이 어쩌다 화가 난 상태에서 ‘하류 지식인’ 운운하는 게 아니다. 그가 쓴 정치적 글에는 대부분 그런 등급제 의식이 가득 배어 있다. 심지어 그는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독도의 날’을 조례로 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때에도 <조선일보>에 ‘시마네현 촌것들 다스리는 법’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도쿄 도시것들’도 아닌 ‘시마네현 촌것들’이 설쳐대는 게 더 화가 난다는 뜻이었을까?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이 세상 모든 일을 ‘돈’으로 이해하고 분석하고 평가한다. 사회적으로 무슨 일만 벌어지면 다 돈이 이유라는 식이다. 물론 꽤 설득력이 높다. 그러나 돈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도 그것마저 돈으로 설명하려 드니, 그게 문제다. 그런데 이문열은 모든 걸 ‘돈’ 대신 ‘등급’으로 이해하고 분석하고 평가한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사석에서만 그럴 뿐인데, 이문열은 과감하게 공개적으로 그런다.

이문열은 자신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동기도 ‘등급 투쟁’으로만 해석한다. ‘하류’가 ‘상류’를 물고 늘어지면 클 수 있다든가, ‘하류’는 ‘하류’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한 ‘패자부활전’의 일환으로 비판에 임한다든가 하는 분석법이다. 동의할 수 없을망정 이 원리를 자신에게도 적용시키면 좋겠건만 그는 그건 한사코 거부한다. 자신의 비판 행위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거다. 이문열은 한국에서 ‘등급 투쟁’을 초월한 유일한 지식인인 셈이다.

논쟁을 거부하는 이유만 해도 그렇다. 지식인은 자신에 대한 모든 비판에 일일이 답을 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답을 전혀 하지 않아도 좋다. ‘소통’을 해보고자 하는 진정성이 없는 비판은 오히려 무시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검도 5단이 검도 초단을 만나 싸우면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 같지만 팔 하나 내줄 각오를 해야 해요”라는 그의 지론엔 동의하기 어렵다.


△ 2001년 11월 이문열씨의 문학 사숙인 경기 이천시 ‘부악문원’에서 ‘이문열돕기운동본부’가 그의 홍위병 발언을 비판하며 책 반환행사를 열고 있다.(사진/ 연합)

논쟁엔 ‘검도 5단’과 ‘검도 초단’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회적 지위·경륜·지명도 등이 어떤 사안에 대한 우월적 입지를 확보해주는 건 아니다. 물론 ‘솔직’이 희귀한 한국 지식계 풍토에서 이문열의 솔직함은 평가할 만하지만, 바로 그 솔직함이 고종석이 지적한 ‘우익의 기품’과 직결된다는 걸 이문열이 이해하면 좋겠다.

문재(文才)의 활용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다. 나는 문재에 관한 한 이문열이 ‘상류 지식인’이요 ‘검도 5단’이라는 걸 흔쾌히 인정한다. 그러나 그 문재를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서 자신의 혐오감이나 증오심을 표출하는 도구로 사용할 경우엔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고종석은 ‘표독’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나는 그 ‘표독’이 나르시시즘의 일종인 ‘주연 강박증’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주연 강박증과 편집증적 응징

이문열은 <월간조선> 2005년 3월호 인터뷰에서 ‘실패’ ‘불화’ ‘왕따’ ‘암흑’ ‘위험’ ‘고독’ ‘상실감’ ‘억압감’ ‘불안’ 등의 감정을 토로하면서 “고약한 패를 잡아 단기필마로 벌판에 서 있지만 ‘대반격’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늘 모든 분야에서 ‘주연’을 맡아야 한다는 강박증이 처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람들은 ‘주연 강박증’이라고 하면 대인관계에 무슨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정반대다. 그걸 가진 사람들은 남들에게 대범하고 관대하다. 지극정성으로 남들을 감동시킨다. 크게 성공한 사람들 중엔 ‘주연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노무현은 물론 대부분의 역대 대통령들도 그 강박증의 소유자였다. 그러니 이건 인신공격적인 평가가 아님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주연 강박증’의 진면목은 갈등·대립·적대 관계에서 나타난다. 자신에게 우호적이거나 적어도 중립적인 사람에겐 대범하고 관대하지만, 자신과 갈등·대립·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응징한다. 편집증적인 응징이다.

‘주연 강박증’은 이념과 아무 관계가 없다. 진보적 인사들 중에도 이걸 가진 사람들이 꽤 있다. 늘 민중을 사랑하는 듯한 아름다운 이야기만 하지만 자신의 헤게모니가 위협당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공격한다. 이건 막연한 짐작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진보운동을 하다가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그 바닥을 떠난 인사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그런데 ‘주연 강박증’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걸 가진 주인공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주인공의 좋은 점만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연’을 하는 한 조연과 엑스트라에게 우아하고 온화하고 너그럽고 겸손하고 인간성 좋은 멋쟁이가 될 수 있지만, 자신이 ‘주연’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거다. 그게 성공의 동력이 되니 좋긴 한데, 자신의 ‘주연’ 자리가 위협받으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표변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자신의 탁월한 문재를 남을 공격하는 데에 활용하는 논객들이 적지 않다. 소통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채 상대편의 약을 바짝 올리면서 상처를 주는 일에만 천재적이다. 지지자들은 열광한다. “아이고 후련해라. 당신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논객이다!” 개탄을 금치 못할 일이지만, 그런 열광을 막을 길은 없다. 카타르시스에 굶주려 있는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까 말이다. 이문열은 좌파 진영의 그런 열광을 온갖 독설로 공격하면서도 우파 진영의 자신에 대한 열광은 아는 바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능력의 박약이라고나 할까.

이문열에겐 과도한 본질주의가 있다는 것도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본질주의란 무엇이 되는 데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근본적인 속성들이 있다고 보는 관점인데, 이게 지나치면 ‘범주화의 폭력’을 낳을 수 있다. 이른바 “너 전라도지?” 사건도 바로 그런 본질주의 때문일 수 있다. 이문열은 이 사건에 대해 <한국일보> 1월22일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몇 년 전 고약한 경우를 당했어요. 책 장례식 할 당시 11월 부산 해운대 모 호텔에 강연을 갔었어요. 10월 즈음부터 책 장례를 주동한 사람들이 부산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어릴 적에 부산서 5년간 살았거든요. 그래서 강연장에서 ‘이만하면 저도 부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라고 물었더니 다들 ‘부산 사람이라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아는 바로는 책 반환운동 하면서 책 모으고 있다는 사람들은 부산 사람 아닌 것 같다. 부산 사람들은 성격이 급하고 직정적이어서 한 권씩 책 모아서 불태우고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말했어요. 그랬더니 책 장례식의 주동 격인 사람이 찾아와서 ‘선생님, 그럼 내가 부산 사람 아니면 어디 사람입니까? 전라도 사람이란 말입니까?’ 하더라구요. 그때 내 실수가 ‘어느 지역이든지 간에’라고 했어야 하는데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한 게 실수예요.”

“너 전라도지?”, 그 과도한 본질주의

이문열의 해명과 무관하게, 정작 내가 문제 삼고 싶은 건 ‘부산 사람’의 본질이 있다고 보는 이문열의 시각이다. 물론 이런 시각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누구나 자주 드러내는 것이지만, 공적 담론에선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매우 폭력적일 수 있다. 부산에 사는 인구의 수십%는 부산 출신이 아니다. 그들은 ‘부산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어떤 범죄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범죄의 양상을 보고 어디 사람들은 성격이 어떠하기 때문에 그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면, 그 역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문열이 페미니스트들과 자주 부딪친 것도 바로 그런 본질주의와 무관치 않다. 고정된 정체성을 믿는 본질주의적 입장은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매우 낮게 보기 때문에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다. 이문열이 ‘기품’의 문제를 자꾸 ‘이념’의 문제로 끌고 가는 것도 그런 본질주의 때문은 아닌지 의심해보면 좋겠다. ‘상류’니 ‘하류’니 하는 것도 그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거나 고정적인 범주가 아님을 이해한다면 좀더 소통 가능한 담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품 있는 이문열을 보고 싶다. “내가 깃발을 내리면 문단이 저쪽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보다는 “내가 기품을 보이면 한국의 이념갈등이 생산적으로 바뀔 수 있고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자신감”을 가지면 좋겠다.



진보는 신영복을 다시 사색하라

그가 구체적 대안이나 ‘래디컬함’이 없다고 비판하는 건 옳은가…편가르기에 사로잡힌 진보 진영에 신뢰와 성찰의 필요를 역설하다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과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신영복에 대한 오해가 만만치 않다. 신영복에 대한 일부 개혁·진보 인사들의 부정적·소극적 평가는 ‘진보’에 대한 편협한 정의와 상황·여건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건 아닌가 하는 문제 제기를 하고자 한다. <교수신문> 2006년 9월26일치에 실린 ‘탈이념 시대의 진보 신화’라는 기사에 소개된 익명의 평가 5개를 인용하겠다. 내용이 다소 중복되기도 하는 긴 인용이 되겠지만, 신영복에 대한 오해를 넘어서야 참된 진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의 중요성을 감안해 꼼꼼하게 검토해주시기 바란다.

신뢰가 죽은 사회에서 진보는?


△ 신뢰와 성찰의 미덕을 강조하는 신영복은 가급적 비판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그래서 일부 진보파는 그에게 구체적인 입장이나 답안,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이 없다고 불평한다.

(평가 1) “신영복 교수는 진보가 아니다. 신 교수의 저작 내용이 현재 KTX 여승무원 문제, 한-미 FTA에 대한 ‘진보’ 입장과 크게 입장을 달리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에 대한 구체적 입장이나 답안이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누가 신 교수의 저작을 읽고 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을 느끼겠냐.”

(평가 2) “신영복 교수는 ‘진보적 상징’이라기보다는 ‘어른’이다. 그가 학계나 대중에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각박하고 경쟁 위주인 현실에서 한숨 돌리면서 사색할 수 있는 사색의 인도자, 지혜로운 어른 정도다. 그렇기에 그의 저작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

(평가 3) “사실 신영복 교수의 학문적 연구성과라는 것은 사회과학적 맥락에서 보면 전혀 없지만 이는 신 교수가 살았던 시대, 한국 현대사가 만들어낸 우리 ‘지식인의 초상’이기 때문에 그런 시대를 살아낸 ‘어른’에 대한 경외감은 필요하다. 그러나 실제 ‘그러한 것’보다 신비화되는 측면은 있고 이는 경계할 부분이다.”

(평가 4) “신 교수의 이론을 실제 사회 대안으로서 적용하려면, 그래서 낮은 사람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도록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주장이자 사상들이다. 현실은 감옥 속의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나은 상황과 평균적 이해와 속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복잡한 사회인데, 선생님께서 감옥이라는 현실과 동질성이 떨어지는 곳에 오래 머물렀다는 점, 또 학교라는, 사회와는 다른 세계에 오래 있어서 현실적 대안과 구체적 답을 원하는 이들에게 적절한 답을 줄 수는 없다.”

(평가 5) “나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의 말씀이 조금씩 추상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선생님의 ‘관계론’이 소통되는 방식은 좀 ‘존재론’적으로 느껴졌다고, 그래서 선생님의 사상이 ‘고통의 바깥자리’에서 교양의 한 자락으로 변모돼가는 것을 느꼈다고, 세상의 악한들에게도 열려 있는 선생님의 너른 품이 속 좁은 내게는 문득 안타깝기도 했다고, 나는 그렇게 고백하고 싶다.”

위에서도 지적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영복에겐 ‘구체적 입장이나 답안’ ‘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 ‘현실적 대안과 구체적 답’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을 생각을 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한국의 지도층 인사나 엘리트 계급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는 늘 한 자릿수와 10%대를 오락가락한다. 진보건 보수건 민중은 ‘출세’한 그들을 믿지 않는 것이다. 공적 신뢰가 무너진 세상이다. 그런데 일부 진보파는 신영복에게 ‘구체적 입장이나 답안’ ‘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이 없다고 불평한다.

신뢰가 죽은 사회에서 진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보수에게 타격을 입힐 대안을 강구하는 것인가? 민중이 믿지 않는데도 진보의 비전과 대안을 역설하는 사람이어야 하는가? 신뢰의 문제를 외면하고 벌이는 그런 ‘대안 노름’은 문자 그대로 사상누각(沙上樓閣)은 아닐까? 신영복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묻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신뢰받는 집단이 있습니까. 대학? 대학교수? 전혀 신뢰받지 못합니다. 문제가 있는 곳이면 어디 안 끼는 곳이 없어요. …정치권, 종교계, 법조계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신뢰집단이 되려고 하는 이들이 보이는 모습이 어떤 것이지요. 상대방을 흠집 내서 자신이 신뢰받으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엄청난 내부 소모를 겪고 있습니다.”


△ 87년 민주화 항쟁은 민주화운동 세력의 두세 번의 집권으로 이어졌다.이제 새로운 진보 프로그램이 요구된다(사진/ 연합)


누가 누구를 이끈단 말인가

진보파는 그런 ‘내부 소모’를 필요악으로 본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필승’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진보적 지식인의 역할은 그런 ‘필승’을 위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아우성친다. 물론 그 덕분에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탄생했다고 볼 수도 있으니, 그게 무조건 잘못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두 정권이 보인 한계에 대해 아무런 성찰도 없이 또 한 번 무조건 ‘필승’해야 한다고 외치는 모습이다.

‘신뢰’와 ‘성찰’의 미덕을 강조하는 신영복은 가급적 비판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신영복의 그런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역할 분담’으로 이해하면 간단히 풀리는 문제다. 한 사람에게 모든 걸 기대하려는 ‘영웅 만들기’ 게임의 유혹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지금 정작 하려는 말은 그건 아니고, 그런 신영복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땐 행간의 의미를 읽는 게 필요하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다.

“196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굉장히 능력 있고 진보적인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제가 그들과 헤어져 감옥에 있는 동안 내내 그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참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출소한 직후에 제일 먼저 물어본 게 그 친구들의 근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 중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가 하나도 없더군요. 다들 출세했더군요. 그 대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예전에 별 능력 없어 보였던 친구들, 사명감이 아니라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참여했던 이들, 그런 사람들이 남아 있더라고요. 제게는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이끌고 나가겠다’는 오만한 생각은 큰 잘못입니다.”

내 나름의 직설법으로 해석해보겠다. 신영복은 ‘진보의 사유화·이권화’를 지적한 것이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농민운동가 천규석의 독설을 빌리자면, “지나고 보니, 60~80년대까지의 그 풍성했던 민주화운동이란 것들도 잘난 놈들에게는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동시에 거두어갈 기회로 활용되었다.” 물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까지 훼손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 민주화운동 세력이 2번 또는 3번의 집권을 했지만 민중에겐 큰 실망을 안겨준 게 분명한 이상, (평가 1)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이야말로 이미 현실 적합성을 잃어버린 옛날 이야기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진보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가 되었으며, 그 전제는 ‘성찰’과 ‘신뢰’라는 게 바로 신영복표 진보의 핵심이다. 누가 이 중요한 문제를 신영복만큼 일관되고 끈질기게 역설했는가?

신영복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건 그가 “각박하고 경쟁 위주인 현실에서 한숨 돌리면서 사색할 수 있는 사색의 인도자, 지혜로운 어른 정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란 (평가 2)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선 안 된다. 그 ‘사색’에 담겨 있는 진보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모색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진보를 ‘이끄는’ 입장에서만 말할 뿐 ‘이끌림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다. 상투적인 민중예찬과 실질적인 민중모독을 범하면서도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의 문제를 외면한 진보는 허구라는 게 신영복의 주장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가장 절실한 아픔과 기쁨은 모두 사람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관대한 사람과 오만한 사람이라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관대한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입니다. 오만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오만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은 자신보다 강한 이들에게는 결코 오만하지 않습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관대한 사람인지 오만한 사람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보다 약한 이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 오만한 진보는 가능하지 않다.신영복의 이같은 강의도 우리는 제대로 소비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우리 사회는 고집이 센 사회”

지금 신영복은 ‘오만한 진보’는 원초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보수’의 구도 이전에 ‘오만-관대’의 구도가 진보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 더 적절하다는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진보’로 출세한 이들에게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눈물이 있는가? 공감과 눈물은 사회과학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무시해야 하는가? 진보의 ‘진영 강화’라는 명분을 앞세워 끼리끼리 뜯어먹는 데만 골몰했던 건 아닌가?

(평가 3)은 신영복의 학문적 연구성과라는 것은 사회과학적 맥락에서 보면 전혀 없다고 했는데, 그 이전에 학문이건 진보적 실천이건 그걸 지배하는 기존 사회과학의 틀을 의심해볼 수는 없을까? 그 사회과학이란 것도 수입품이거나 보세가공품 아닌가. 신영복이 이런 문제 제기를 직설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단지 ‘어른’에 대한 경외감으로만 그를 대해야 하는가? 오히려 ‘신비화’를 걱정할 필요조차 없이 ‘어른’에 대한 경외감을 아예 버리고, 신영복을 대담한 도발자로 보는 게 더 옳지 않을까?

신영복이 겪은 20년20일간의 감옥 생활이 갖는 한계를 지적한 (평가 4)에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발상의 전환일 것이다. 위 평가들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건 ‘전투적 일상에 매몰돼버린 진보’의 모습이다. 근본과 더불어 크게 보는 법을 놓쳐버린 타성의 정치일 수 있다. 신영복의 이론은 실제 사회 대안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대안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지적한 것으로 보는 게 옳다. 토대 없는 대안에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평가 5)는 “세상의 악한들에게도 열려 있는 선생님의 너른 품이 속 좁은 내게는 문득 안타깝기도 했다”고 고백했는데, 이는 “대립과 갈등만 있을 뿐,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라는 신영복의 고민을 비켜간 고백은 아닐까? ‘세상의 악한’을 무력하게 만들거나 소외시키는 게 진보일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그건 옳기 때문에 무조건 실천해야 할 그런 일인가?

그런 의문에 대해 신영복은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 이것은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쌓아온 역사의 결론”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사회는 흔히 말하는 것처럼 ‘젊은 사회’가 아니라 ‘굉장히 나이 많은 사회’라고 했다.

“지난 세월 동안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아온 사회거든요.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를 지고 있는 나이 든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지요. 이렇게 나이 많은 사회라서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셉니다. 우리 사회가 처한 대립과 갈등의 문제를 풀어가려면 이런 전제, 즉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센 사회다’라는 것을 먼저 수긍하는 태도가 우선 필요하다고 봅니다.”

위와 같은 진단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악한’에 대해 무조건 이기는 게 좋은지 그것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게 신영복의 문제의식이다. 그는 “한쪽에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쪽에 어린 시절 강가에서 코피를 씻던 나처럼 좌절하는 사람도 있으니까”라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하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도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노 정권 사람들 간의 이전투구를 보라

이런 말이 현실과 동떨어진, ‘고통의 바깥자리’에서 교양의 한 자락으로 변모돼가는 담론으로 여겨진다면, 정작 현실과 동떨어진 건 바로 그런 생각일 수 있다는 반론을 펴고 싶다. 민중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았던 노무현 정권은 한 자릿수 지지를 받는 ‘식물 정권’으로 전락한 가운데 민중은 노 정권에 대한 환멸과 반감을 한나라당과 ‘박정희 신드롬’을 껴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과연 민중이 생각하는 ‘세상의 악한’은 누구인가?

신영복은 ‘승자 독식주의’ 진보를 공격한 것이며, 그 내용은 너무도 현실적이다. ‘편 가르기’와 ‘적에 대한 증오’ 등과 같은 진영 의식에 사로잡혀 늘 ‘남 탓’만 하면서 외쳐대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는 그의 메시지가 현실적이지 않으면 무엇이 현실적이란 말인가? 문제는 너무도 현실적인 이야기를 ‘교양’으로만 간주하거나 소비하려 든 우리 모두에게 있는 건 아닐까? 한때 피를 나눈 형제 이상으로 끈끈하게 보였던 노 정권 사람들 간의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보라. 늘 사람을 강조해온 신영복에게 ‘사람 얘기’를 너무 많이 한다는 비판이야말로 비현실적인 게 아니었을까? 지금 우리는 신영복을 제대로 ‘소비’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