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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루시디 : 이슬람의 이광수

사/ㅏ 2001. 1. 21. 15:56 Posted by 로드365

이 이슬람권 출신의 작가는 중동 상황의 표피만 건드린 채 자신의 글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용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사진:SYGMA)




이슬람의 이광수, 살만 루시디 Salman Rushdie

“이슬람주의는 근대에 실패한 집단 정신병”… 민족개조론 펴는 그의 ‘반성문’을 읽으며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의 사관에는 ‘도전과 응답’이라는 도식이 중심적인 위치에 놓여져 있다. 각 문명권이 그 역사의 전환기에서 내부적 모순이나 외부 세력의 ‘도전’을 받게 돼 있고, 그 ‘도전’의 형태·심도·규모와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그 ‘응답’을 제시한다는 논리다. 그 논리에서, 사회 현상들의 의미와 인과론적인 뿌리를 내외부적 상황의 ‘도전’에서 찾아야 한다는 역사 연구의 접근 방식이 성립된다. 필자는 토인비의 관념주의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않지만 세상의 표피만 보지 말고 ‘도전’이라는 ‘뿌리’를 중시하라는 신중한 논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완전히 무시된 ‘도전과 응전’

토인비의 ‘도전·응답론’ 이야기를 왜 꺼내게 됐는가? 지금 노르웨이를 포함한 북구사회에서는 반전의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경우에 평상시에 주로 우파를 두둔해주는 루터교회(노르웨이의 국교)마저도 주요 이슬람 단체와 공동으로 강한 반전 성명서를 낼 정도이다. 주요 좌익 정당인 노동당의 대중적 기반인 전국 노총(LO, 약 80만명의 노조원을 대표함) 등의 핵심적 단체들이 확고한 반전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보수적 일간지마저도 미국의 전쟁을 ‘중앙아시아의 자연자원에 접근하기 위한 인종주의적 민간인 말살·인권침해’로 보고 있는 만큼, 인종차별 방지·인권옹호 운동가들이 앞장서서 전국적으로 데모를 이끌어나간다. 보수적 일간지에서마저도 “내 식구들을 이유도 없이 죽인 미국을 나는 평생 용서못할 것”이라는 미국폭격의 희생자 유가족들의 인터뷰들을 선보인다.

그런데 이번 사태의 책임을 전적으로 아랍·이슬람 세계에 물어 미국 행동의 ‘당위성’을 암시하는 한 저명한 지식인의 논문이 나와 반전 운동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그 논문의 영향력이 크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저자가 다름아닌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1947년생)라는 인도의 이슬람 출신 영국 문호이기 때문이다. 몇 작품이 각급 학교의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명성을 떨친 그는, <악마의 시>라는 이슬람의 교주 마호메트를 풍자한 포스트모던 소설로 1980년대 후반부터 이슬람 극우의 극단적인 노여움을 산 뒤에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는데, 미국의 <뉴욕타임스>(11월2일치)와 노르웨이의 <다그블라데트>(11월3일치)에 실린 그 논문의 비중은 매우 높다. 그러나 찬란한 문체로 쓰인 그의 논문을 읽어가면서 느낀 것은, 사회 현상의 표피 뒤에 숨겨져 있는 ‘도전에 대한 응답’이라는 인과론적 구조를 루시디가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루시디의 논문은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그게 바로 이슬람이 문제다”는 제목은, “이슬람과의 전쟁이 아니고 테러리스트와의 전쟁이다”는 식의 미국 지도부 궤변의 맹점을 찌른다. 루시디의 진단의 핵심은, 전쟁의 원인이 이슬람 과격분자들의 ‘반(反)서구적·반(反)근대적 편집병’에 있다는 것이다. 루시디가 생각하는 ‘편집병의 증후군’은, 이슬람주의를 이질시·적대시하는 대부분의 서구의 보수 논객들이 많이 언급하는 신에 대한 공포심리의 강조와 여성인권의 부정, 성직자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의 강요와 현대 대중문화의 절대적 부정 등이다. 한마디로 루시디는 이슬람주의를 ‘근대에 대한 중세 복고적·정신병적인 반란’으로 규정하고 이 반란이 마땅히 패배해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반전운동 확산에 찬물을 끼얹다

루시디의 논리가 헌팅턴의 악명높은 ‘문명 충돌론’과 확연히 다른 점은, 그가 이슬람주의를 ‘문명’도 아닌 단순한 ‘집단 정신질환’으로 보고, ‘이슬람 문화권의 이슬람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외친다는 것이다. 수백만명의 이슬람 신도들이 동시에 ‘집단 정신질환’에 걸린 이유로서, 루시디는 미국의 ‘부패한 독재정권에의 지원’도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지만, 주된 이유로는 ‘근대에의 적응 실패, 종교를 사생활적인 부분으로 보는 개인주의 수용에의 실패’ 등을 제시한다. 요약하자면 서구적 근대를 제대로 자기화하지 못한 자신들이 결국 ‘문명’한 인류를 위협할 만한 집단 정신질환이 생길 토양을 만들어낸 만큼, 반성하여 ‘근대화’에 좀더 힘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프간을 공격하는 미군과 영국군을, 루시디는 물론 공개적으로 ‘치료해주는 의사’로까지 칭찬하지 않지만 그가 이번의 전쟁에 ‘정신질환의 치유’라는 명분을 부여하는 것이 문맥상으로 파악된다. 지성인답게 루시디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공동적인 책임 유기에 대한 이슬람 세계 지성인의 반성”을 촉구하고 나선다. 식민주의 침략의 책임이 열등하고 잘 개화되지 못한 조선인들에게 있다는 개화 지상주의자 출신의 친일파 윤치호나 이광수의 논리와 놀랍게도 닮은 루시디의 논지는, 이미 일부의 보수 노르웨이 독자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이로 봐서는 그의 글이 반전 운동의 확산을 억제하는 쪽으로 작용할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까지 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이 전쟁에 명분이 있다”는 주장을 펴고자 하는 일부 우파와 극우들의 위치를 크게 강화시킬 가능성이 많다. 그들 ‘주전’(主戰)쪽에서 루시디의 ‘근대화 실패론’이 귀중하게 평가되는 이유는 외부인인 서구인이 아니라 이슬람 문화권의 내부인이 이슬람의 ‘내재적 결함’을 논한다는 것이다.

루시디의 글을 읽으면서 필자가 안타까웠던 부분은, 이슬람권 출신의 작가가 중동 상황의 표피만 보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피상성과 그 글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이용될지에 대해 관심없는 무책임성이었다. 루시디가 이미 글머리에 언급했던 토인비의 ‘도전·응답론’만이라도 인식했다면, “근대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기에 이슬람주의라는 집단 정신병에 걸렸다”는 자기비하적이며 단순한 논리를 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다 아는 서구·미국, 그리고 그 첨병인 이스라엘의 노골적인 침략과 약탈, 제국주의적 착취에 의한 ‘강요된 빈곤’ 이외에도 이슬람권이 20세기에 직면한 ‘서구의 도전’이 과연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지적인 도전 정도였는가?

서구적 제국주의적 ‘근대’가 중동의 후진성 심화라는 결과를 가져다준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루시디 자신도 미국에 의한 ‘중동 독재들의 지원’을 간단히 언급했지만, 이를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대부분 이슬람 국가 정권들의 전반적인 예속화와 대미 예속관계에 의한 부패한 독재의 영구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동·북아프리카의 친미 독재정권의 대다수는 그 주민들에게 약탈자·폭군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몇천명의 주민들을 “이슬람 게릴라 지원을 했다”는 혐의로 살육한 알제리의 군사정권, 고문의 기술로 전세계적인 악명을 떨친 이집트의 독재,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장군도 정상적인 정통성의 부재를 미국의 원조로 메우고 있다. 친미 약탈정권의 희생자인 주민들이 결국 반미 운동의 중심지인 사원과 이슬람주의를 구심점으로 결집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국가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과연 ‘집단 정신병’만으로 취급할 수 있는가? 과연 민중 복지와 교육, 그리고 전통 풍속의 옹호에 주력을 경주하는 모든 이슬람주의자들이 다 테러리스트인가? 그리고 친미 압제하에서 약탈적 정권의 희생자들이 힘을 모을 수 있는 또다른 구심점- 예컨대 좌익 정당이나 독립적 노조- 이 존재하는가?


용서받을 수 없는 ‘오만한 귀족주의’


물론 현재 뉴욕의 고급 주택가에서 살고 있는 루시디는, 언제나 고문과 암살의 위험하에서 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운동 방식을 ‘정신병’으로밖에 보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오만한 귀족주의이다. 그리고 과연 그는 양민들을 죽이는 미국 폭탄들이 중동인들로 하여금 사생활과 여성인권, 그리고 개인주의의 중요성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믿을 만큼 순진한가? 미국의 침략이 중동의 오히려 ‘저항적인 종교적 극우’들의 영향력만을 키울 것이라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사실이다.

루시디는 반전 운동의 무의미성을 암시하지만 사실상 그가 갈망한다는 ‘중동에서의 근대의 달성’은 반전 운동의 성공에도 크게 달려 있다. 반전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인 미국의 중동 독재 지원의 중지가 이루어져 중동에서도 민주화가 시작해야 그들이 공포·복종 심리를 떨쳐버리고 개인주의의 매력과 사생활의 귀중함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루시디가 이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가 속하는 포스트모던 문화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와 같은 ‘문화 귀족’들이 약자의 보호라는 문학인의 본연의 의무를 망각하고 제국주의에 대한 주구(走狗)적 역할을 하는 것이 사회적인 해악을 끼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반제·반전 운동의 큰 흐름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