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이탈리아의 밀라노 남쪽의 작은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생 1954년 토리노 대학 철학과 졸업, 졸업 논문 '성 토마스의 미학적 문제' 1962년 첫 저서 <열린 작품> 출간 1965년 주간지 <레스프레소>에 기고 시작 1971년 데달루스라는 필명으로 좌파 기관지 <일 마니페스토>에 기고. 1971년 이후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 기호학 교수 1973년 밀라노에서 제1회 국제기호학 회의 조직, 이후 세계를 다니며 강연 및 활발한 저술 활동
■ 작가 이야기
살아있는 기호학자이자 문명의 탐구가 움베르트 에코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어렵다. 국내에 뿐만 아니라 그를 세계적으로 알린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를 저술한 작가의 명성 못지 않게 기호학과 언어학 그리고 중세 학문에 대학 박식함은 백과사전적인 지식인의 대표적인 인물로써 에코의 명성을 채우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지에 기고한 에세이들 또한 현대문명에 대한 에코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편린들이다. 여기에서 그는 카사블랑카에서 콩코드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를 일구는 다양한 코드들을 기호학적인 태도 이상의 의미들을 통찰해 냄으로써 현대 문명의 해부를 시도한다. 뿐만 아니라 추기경과의 대화를 통해 인류의 미래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는가 하면 밀레니엄을 앞두고 밀레니엄이라는 시간적 조류의 의미를 석학들과 논쟁하기도 했다. 에코는 그만큼 살아있는 기호학자이자 문명의 탐구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에코를 가장 에코이게끔 만드는 것은 국내에도 번역된 바 있는 세 권의 장편 소설집일 것이다. <장미의 이름>은 장자크 아노의 손으로 영화화되어 대중적 친근함이 더해졌는데 명탐정 셜록 홈즈와 그의 파트너 왓트슨의 인물구조를 빌어온 윌리엄 신부와 조수 아드소의 설정 위에(패러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대한 경쾌학 해석 지평 그리고 무엇보다 중세 문명(수도원을 둘러싼)의 어두운 이면에 대한 통찰력이 더해져 단순한 추리물 이상의 의미를 열어놓는다. 에코 스스로는 <대중의 수퍼맨>이라는 저작에서 "대중 소설은 평화를 지향하고, 문제적 소설은 독자를 자신과의 갈등 속에 빠뜨린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 소설만큼 후자의 입장을 간명하게 제시하는 것도 드물다.
이후에 발표한 <푸코의 진자>에서도 중세 신비주의에 관한 탐구는 소설적 형상으로 더욱 심오해졌고, <전날의 섬>은 포스트모던 소설의 한 계파로 보아야 할만큼 다양한 서술 양식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최근에 에코는 각종 강연과 에세이들로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고 있는데, 워낙 방대한 관심 영역과 활동 범위를 지닌 전방위 지식인이라 그의 행보를 예측하기란 불가능하지만 기호학에 대한 그의 도전과 응전은 여전히 이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쌓아올리는 중이다. (이상용/문화평론가)
2011년 01월 05일 사진. 많이 후덕해지셨다
Umberto Eco 1932.01.05~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미학자이자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이자 소설가이다(...). 게다가 무려 9개 국어(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한다.[1] 이쯤 되면 그야말로 인간이 아니다(...). 거기에 80년대까지만 해도 본인이 재직하던 볼로냐 대학 도서관의 모든 책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기억력의 괴수. 흠좀무
볼로냐 대학의 기호학 교수였으나, 2007년 75세의 나이로 은퇴하였다. 미학, 기호학, 문학, 에세이, 문화 비평 등의 영역에서 이론과 실천의 경계를 넘나들며 경이로운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식계의 T-Rex로 불릴 만큼 엄청난 양의 독서에서 비롯된 깊이 있는 비평과 수필글로도 유명하다. 그의 저서들은 상당부분 스스로 밝히길, 기존의 저작물에 나오는 문장과 단어들을 가지고 짜집기한 2차 창작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결과물들은 물론 다른 작가들의 오마쥬니 표절이니 하는 작품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작품. 2차 창작물(?)이 순수 창작물을 압도한다. 하늘아래 완전한 창작은 없으며 모든 작품은 무언가의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 제대로 적용되는 경우.
참고로 2011년 출판한 그의 저서 제목은 Confession of a young novelist, 즉 젊은 소설가의 고백이다. 이는 자신의 나이는 70대지만 실제 데뷔는 50대에 했으니 자신은 데뷔 20년밖에 안되는 초짜 소설가이기 때문에 붙힌 제목이라고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박사 논문을 써서 낼때 심사하던 교수들이 논문을 탐정소설처럼 썼다고 간략히 지적했는데 이후 모든 논문은 이렇게 써야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썼다고 한다("젊은 소설가의 고백"에서).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등 국내에서는 소설과 수필집으로 유명하다. 그의 저서들은 서구 문명이나 역사에 대한 매우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몇번에 걸쳐 읽는 재미가 있다. 주석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 사실 그런거 다 놓고 소설로만 봐도 꽤 재밌다.
모든 에코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특징은 진실과 허구사이의 줄타기이다. 그게 과학적인 것이든, 비과학적인 것이든, 등장인물들은 주어진 시공간안에서 진실과 허구를 구별하기 위해 투쟁한다. 결국 이러한 구도는 진리의 존재유무와 연결되고, 에코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진공의 유무에 대한 토론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소설을 쓸때는 철저한 사전 조사와 구상을 통해 소설내의 세계를 완벽히 만든 다음 집필을 시작한다(본능대로 쓰는 스티븐 킹과는 성향이 반대). 장미의 이름의 경우 캐릭터들뿐 아니라 주무대인 수도원의 구조, 인물들 스케치등을 2년간 했고, 푸코의 진자를 쓸때는 몇달간 소설의 주무대인 곳을 지나다니면서 아이디어를 녹음하곤 했다.
한마디로 20세기 인문학계의 먼치킨. 한국에서는 주로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의 면모만 강조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쓴 기호학 저서들은 기호학사에서 명저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기호학 이론은 그의 스승인 루이지 파레이손의 '해석' 이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따라서 소설은 독자에게 주어지는 순간 독자에게 해석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소설에 대한 질문에는 가급적 대답을 하지 않는 편이다.
폐쇄적이며 자신들이 진리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밀교나 음모론을 파시즘과 유사하다며 굉장히 싫어한다. 그 때문에 밀교와 그 신봉자들을 '음모론 집대성' 소설인 푸코의 진자로 적나라하게 깠다. 다빈치 코드를 새로운 밀교로 여기며, 댄 브라운을 푸코의 진자에 나오는 음모론 믿는 얼간이들에게 비유하기도 했다.[2] 그리고 전 이탈리아 총리인 베를루스코니는 에코의 단골 까임거리였다.이제는 ByeBye BungaBunga! 올레!
삼국지에도 손을 댔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이 마지막 소설이라는 소문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한국에서만 이리 알려졌는데 그건 에코의 책들을 번역하는 열린책들이 과장광고한게 분명. 이미 '프라하의 공동묘지'라는 소설을 2010년에 냈고, 현재 한국에선 열린책들이 번역중. 에라이 프라하의 공동묘지는 그 진위가 불분명한 '시온 의정서'[3]라는 문서에 얽힌 이야기이다. 어떤 반유대주의자가 유대인을 엿먹이기 위해 시온 의정서를 조작해낸다는 것이 그 내용. 빨리 번역해주세요 현기증난단말이에요 그러다 스티브잡스 자서전 꼴나게??
소설들이 대체적으로 슬프게 끝나는 편이다.
커피메이커로 만든 과추출된 드립 커피를 구정물 커피라 부르며 매우 싫어하신다.
정치적으로는 중도 진보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탈리아 북부의 혈통적 순수성을 근거로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극우정당인 북부동맹 및 그 지도자인 움베르토 보시에 대해서도 원색적 비난을 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붉은 여단과 같은 극좌 테러조직에 대해서도 정신착란적이라고 비난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와 더불어 종교적 근본주의 및 미디어를 통한 대중의 광기 역시 경계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사회적으로는 세속적 계몽주의 성향이 강한듯.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움베르토 에코 "베를루스코니 총리 퇴진" 집회참여
또한 파시즘에 대해서도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취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저서에는 맹신에 대한 비판(장미의 이름), 무형적 사고의 무분별한 실체화에 대한 경계(푸코의 진자), 주인공의 주변 인물의 반파시스트 투쟁 기록(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등 직간접적으로 파시즘을 비판하는 내용이 많이 첨가되어 있다. 연세가 연세이시니만큼 유년기에 2차 세계대전과 파시즘 정권을 겪어본 세대인데,『미네르바 성냥갑』 에 수록된 "<지도자>에 대한 나의 주제"라는 글에서 흑역사 를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여덟살과 열살때 파시스트 주최의 작문대회반공웅변대회에서 수상을 했다고 한다.[4] 물론 자신에게 이러한 기억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파시즘을 더욱 용서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신다.
저서에 보이는 사상을 종합해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도 상당히 계몽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를 하고 있는 듯.(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의 보수성을 우려하여 '새로운 중세'라며 비판한 바도 있다. 모든 대가들이 그렇듯, 그리고 에코의 기호학적 작업 자체가 그렇듯 대립되는 부분들을 자신의 사상속에 융합하고 있는 듯 하다.)
브리짓 바르도의 개고기 혐오 발언을 우둔한 파시스트라며 깠었다http://kk1234ang.egloos.com/2213765. 다른 문화들간의 충돌이 있을땐 상식과 관용이 필요하다고 주장.
[1] 이탈리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는 라틴어에서 갈라진 로망스어군의 언어라서 이중 하나를 모국어로 하면 다른 것들은 거의 사투리 수준으로 빨리 익힐 수 있다. 어느 정도냐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스페인어를 전혀 안배웠어도 80% 정도는 알아듣는다고 한다. 유명한 이탈리아 물리학자인 페르미가 라틴어를 2주만에 마스터했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 러시아어, 독일어, 영어, 그리스어는 이보다는 조금 근친성이 멀지만, 이탈리아어와 같은 인도유럽어족 계열이고, 영어같은 경우, 프랑스어를 비롯해 로망스어군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독일어보다 쉽게 마스터할 수 있다. 따라서 영어도 그들에게는 의외로 어렵지 않다. 독일어, 러시아어, 그리스어는 그들에게도 좀 많이 어렵겠지만 그래도아마 한국인이 일어를 하는 정도 또는 많이 잡아도 그 정도의 2배 정도의 노력이면 마스터할 수 있을 듯. 그러므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자유자재의 출처는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발간된 <장미의 이름> 양장본(역자는 이윤기)의 작가 소개. 다만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라고 하기엔 살짝 미묘한게, 원본에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 까지 해독하는...'이라고만 적혀있다. 즉 문자를 읽어 해독하는 게 가능한 건 확실하지만, 언어로 구사할 수 있을지는 불명확하다. 영문으로 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원어민과 자유자재로 회화를 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확실한 것은 이 양반은 영어와 프랑스어로 각각 강의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건 아마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봐도 될듯.
[2] 순수하게 음모론에 대한 지식의 면에서만 비교해 보더라도 다빈치 코드에서 대단한 것 마냥 플롯의 토대로 삼는 음모론은 푸코의 진자에서는 한 챕터에서 지나가는 가설로 언급될 정도로 스케일이 다르다.
[3] 유대인의 세계정복에 대한 야심이 얽힌 이야기로 히틀러의 유대인 사냥에 떡밥으로 이용됐다.
[4] 기회가 되면 찾아서 보자. 내용은 충격과 공포지만 본좌는 뭘 해도 재능을 숨길 수 없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에코가 어린 시절 그대로 성장했다면 이탈리아의 서정주가 되었을듯. 출처
움베르토 에코, 바나나껍질 같은 신문을 무시하는 법. 2003.12.10
우리 시대만큼 대중들이 프라이버시를 원치 않는 시대는 없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노출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TV 토크 쇼에 나와서 가족 문제를 이야기하고 기차를 타고 가면서 자신의 성적 문제나 돈 문제를 핸드폰에다 대고 두서없이 떠들어댄다.
편집자 주) 1998년 12월 [New Statesman]에 실렸던 이 글의 원제는 “Don't slip on the media's banana skins”입니다.
시간이 없어 오늘 신문을 읽지 못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지난밤에 TV 뉴스를 보았기 때문이다. 유명인의 죽음, 자연 재해, 전쟁의 온상 지대 등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을 TV 뉴스가 다 말해줬다. 환율을 알아보기 위해 신문을 살수도 있겠지만 인터넷의 국제적인 서비스에 무료로 가입되어 있으니 매일 도착하는 이메일을 통해 - 하다못해 짐바브웨와 스리랑카까지 포함한 - 전 세계 통화와 리라의 대비 가치를 알 수 있다.
내가 열차에서 또는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 동안 신문 읽기를 가치 있게 만들 것을 얻게 된다면 그건 뭘까? 바로 가십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하나의 보편적인 현상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가십이 인쇄 매체의 최고 관심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모니카게이트와 이란케이트에 관련된 지면과 칼럼의 수를 비교해본다면 전자의 가십이 근래 정보의 원재료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근 바티칸에서 살인 사건이 났을 때 모든 언론의 군대는 즉시 작전에 돌입했다. 누가 총을 쏘았는지조차 밝혀지기 전부터 말이다. 신문은 복잡하고 그럴 듯한 설명들로 가득 메워졌다. 살인 사건에는 사랑의 삼각 관계 또는 동성애 관계가 개입되어 있다고 그들은 떠벌렸다. 스위스 근위대의 대령이 구 동독의 비밀 스파이였다고도 했다 (설사 그가 스파이라고 해도 살인 사건을 전혀 설명할 수 없었다). 이건 정보의 심각한 위기 현상이다.
나는 최근까지 위의 명백한 문제들이 이탈리아 언론에만 관련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클린턴 케이스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스타들과 유럽 왕가에 대한 소식을 싣는) [파리 마치(Paris Match)]가 프랑스 언론은 정치 지도층(presidents)의 사생활에 관심 없다는 통념을 깨버렸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문제점과 직접 연결되는 빅이슈이다. 만일 미디어의 주요 관심이 가십이라면 사회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질병은 인터넷을 감염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매일 아침 환율 정보를 보내는 사이트보다 종말론의 풍문(metropolitan legends)을 유포하는 사이트가 훨씬 더 많을 터이다. 가령 지적인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2000년에 닥칠 공포가 무엇이냐고 묻는 신문들의 질문 공세에 포위되어 있다. 첫 번째 밀레니엄에 공포의 사건들이 있었으니 두 번째 밀레니엄의 공포에 대해서도 세계의 신문들이 찾아보고 있는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널리스트들이 악마주의 집단이나 점성술의 희생자들 그리고 UFO론자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 20세기의 시작부터 그들은 이미 있어왔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사람들은 하등의 관심이 없다. 그들은 새해 전날 피지나 몰디브에 예약할 생각 뿐이다. 2000년의 상점에는 공포가 준비되어 있지 않지만 오직 언론만이 공포의 존재를 믿고 그것을 지어내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매스 미디어의 한 가지 문제점이 가십이라면 다른 하나는 프라이버시이다. 오늘날처럼 프라이버시에 대해 말들이 많았던 적은 없었다. 이탈리아에는 프라이버시 문제를 담당하는 관공소까지 있다. 내가 사회학자는 아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사회학적 진술을 해야 할 것 같다(철학자라면 모름지기 모든 것에 대해 말하도록 허용되지 않는가). 우리 시대만큼 대중들이 프라이버시를 원치 않는 시대는 없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노출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TV 토크 쇼에 나와서 가족 문제를 이야기하고 기차를 타고 가면서 자신의 성적 문제나 돈 문제 그리고 건강에 대해서 핸드폰에다 대고 두서없이 떠들어댄다. 어떤 사람들은 신문에 나오기 위해서 연쇄 살인범이 되기도 한다.
누가 프라이버시를 원하는가? 오직 소수의 부자들만이 프라이버시를 원한다. (피아트의 창업자) 지아니 아넬리 (Gianni Agnelli)나 빌 클린턴은 휴대폰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중은 - 내가 여기서 더 이상 설명하지 않을 여러 이유에서 - 지위 상징(status symbols)을 얻을 생각으로 프라이버시를 바람 속으로 던진다. 그러나 그 지위 상징은 더 이상 위대함의 표식이 아니다. 그것은 범속함의 표식일 뿐이다. 아무에게나 매우 낮은 가격에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보호받길 원치 않는 프라이버시를 사회가 보호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프라이버시는 분명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시민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프라이버시를 가치 있는 일로 인식하도록 시민들을 교육하는 일이다. 이것은 신문에게도 가르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알렉상드르 뒤마가 [몽테 크리스토 백작]에서 미디어의 금융 세계에 미치는 충격에 대해서 처음으로 묘사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해두고 싶다. 은행가인 당글라르를 파멸시키기 위해 몽테 크리스토 백작은 전선을 타고 흐르는 메시지를 변조했다. 거짓 뉴스가 도착했고 주식 시장은 주저앉았으며 당글라르는 파멸했다. 국내는 물론 국제 은행가들이 기억해야 할 최우선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 미디어를 믿지 말라.
끝으로 내가 상당한 교훈을 얻은 짧은 일화를 한 가지 소개한다. 우리는 바나나 껍질을 밟으면 미끄러지고 넘어질 위험이 크다고 알고 있다. "그는 바나나 껍질 때문에 미끄러졌다"는 표현이 모든 나라의 언어에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바나나 껍질이 사람을 미끄러지게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물리 화학적 요소들을 따져보면 바나나 껍질이 으깨진 토마토나 포도 씨나 배 껍질 보다 더 미끄러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바나나 껍질이 미끄럽다고 확신하게 된 경위는 무엇일까? 최초의 슬랩스틱 코미디에서 사람을 미끄러지게 하기 위해 포장도로 위의 개 배설물이 쓰였기 때문이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신문이 –역자) 효과도 있는 동시에 눈뜨고 볼만한 대체물로 바나나 껍질을 발명해낸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언어, 우리의 세계에 대한 지식, 그리고 우리가 길을 걷는 방식은 오늘날 인터넷에 싹튼 전자적인 날조 때문이 아니라 미디어의 왜곡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바나나 껍질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내가 어디에서 읽었을까? 바로 신문에서다. 결국 정보의 순환이 신문이 유발한 상처까지도 치유할 수 있는 생물학적 능력(biological capacity)을 갖고 있다고 신뢰하게 된다. -컬티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