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o (Vocal)
"We have to be great or we're going to break up and kill each other"
---Who's Bono
full name : Paul Hewson
date of birth : May 10, 1960, in Dublin, Ireland
nickname : Bono (BAH'-noh)
The Antichrist, Alton Dalton, The Sonic Leprechaun,
The Fly, Mirrorball Man, Mister MacPhisto,
The Mother Teresa of Abandoned Songs,
position : lead singer, songwriter, sometime guitarist
---Bio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신교도인 어머니와 구교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매우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성장했다. 그가 태어나기 전, 그의 아버지에 의하면 1주일간 Sligo를 여행하던 중 찾아간 한 점쟁이로부터 두 아이를 가질 것이며, 그 중 이니셜이 P인 아이는 무엇을 하든지 매우 유명해 질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표현에 의하면 Bono는 "굉장히 분통 터지게 하는"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따지기를 좋아하는 성격으로 유명했다. 이로 인해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the Antichrist"라는 좋지 않은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런 별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짝이는 눈을 가진 끔직할 정도로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매우 낙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으며 동시에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아이이기도 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일례는 3살 때의 일이다. 아장거리며 뒷뜰에서 놀고 있는 그는 꽃속에서 손가락으로 벌들을 집어 들었고, 그 벌들에게 얘기를 건 후 다시 꽃잎 위에 내려놓은 것이다. 신기하게 아무데도 쏘이지 않았으나 그 광경을 목격했던 부모는 거의 기겁을 했다.
15살 때 그는 자기에게 찾아온 비극과 지독한 상실감에 괴로와하게 된다. 외할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던 어머니가 뇌출혈로 사망한 것이다. 많은 작가나 팬들은 이 사건이 Bono가 지닌 불안정하고 호기심 많은 성격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당시부터, Bono는 Patti Smith, Thin Lizzy, The Ramones, Television 같은 밴드의 음악에 영감을 얻어 음악과 기타 연주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죽음은 후에 Tomorrow, I Will Follow, Mofo 같은 곡의 영감이 된다.
고등학교 시절, 타고난 말재주와 연극적 재능을 지닌 그는 교내 여러 써클을 두루 섭렵하며 다양한 예술매체를 경험하게 된다. 인기도 많았으며, 어느 정도 착실한 학생이었다. 역사와 체스, 미술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상당히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학창 시절 가장 즐겼던 것은 연극반 활동이었고 노래하는 그의 모습을 종종 무대에서 볼 수 있었다. "Bono"라는 새이름을 얻게 된 것도 이 당시의 일이었다. 고등학교 몰려다니던 친구 중(Lypton Village라는 그룹으로 통했다) 하나인 Guggi는 더블린에 있는 한 보청기 상점(원명은 Bona Vox)의 이름을 따서 그에게 "Bono Vox"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라틴어로 "good voice"를 뜻하는 이 이름은 그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후에 짧게 'Bono"라고 고치고 현재까지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Lypton Village 멤버들과 오랜 친구관계를 지속하고 있는데, 닉네임을 지어주었던 Derek Rowan (Guggi)과 Fionan Hanvey (Gavin Friday)도 그들 중 하나이다.
낭만적이고 듣기 좋은 그의 목소리를 동경하는 많은 여자 친구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검은 머리를 한 Alison이었고 그 후로 그는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남자가 되었다. Bono를 그저 친구로만 여기던 그녀는 그의 어머니 사망 이후로 임시로 어머니 역할을 하면서 식사, 잠, 학교생활 등을 돌봐주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처음으로 마스크를 하지 않은 모습으로 Ali를 대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항상 마스크를 착용했었나 보다).
1976년 어느 날, 그는 학교 게시판에 붙은 밴드 모집 공고에 응했다. 자기보다 어리지만 매우 상식적이고 재능있는 드러밍을 구사하였으며, 또한 밴드 결성에 촉매제 역할을 한 Larry를 위시해 기타리스트이자 기타 제작자였던 Edge, 아마츄어 베이시스트 Adam과 함께 밴드를 결성하게 된 것이다. 당시, Bono는 기타 연주 뿐만 아니라 제대로 노래를 부르지도 못했지만(모집 당시에는 둘 다 가능하다고 말했다), 진지한 매력과 시적인 작사 능력, 극적요소를 가진 인물로서 밴드의 프론트맨과 작사를 맡게 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그와 밴드 U2가 전세계적인 명성(동시에 악명)을 얻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던 Bono와 Larry는 밴드 초창기에는 특히나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Bono는 87년 매니저 Paul McGuinness와 함께 두차례 체포된 경력이 있다. 첫번째는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 뮤직 비디오 촬영 시 허가없이 진행한 야외 연주(the million dollar hotel 옥상 공연) 때문이었고, 두번째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조각상에 한 Rock n Roll 낙서 때문이다. Bono는 기존의 낙서를 Rock and Roll stops the traffic!로 마무리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청소 비용을 지불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엉뚱한 그의 일면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기도 하다.
Bono는 종종 주요 방송시간대에 적합하지 않은 내용을 담은 발언을 행했으며 한 때 그래미 시상식에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95년 파리에서 열린 MTV 시상식장에서 프랑스를 경악하게 한 발언을 했다. "대단한 도시입니다! 대단한 밤이에요! 엄청난 군중들이군요! 엄청난 폭탄입니다!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다니! 정말 변변치 못한 대통령을 두고 있군요!" 프랑스 정부의 핵폭탄 실험이 이루어지던 때였다.
1999년 Bono는 Jubilee 2000 캠페인으로 MTV Free Your Mind상을 수상했다. NetAid과 Warchild에도 깊이 관여를 하고 있으며 싱글 Miss Sarajevo의 수익금은 모두 이 자선단체에 기부된다. 이것은 Bono가 주도해 온 일련의 운동 중 가장 최근의 것에 해당한다. 현재는 제3세계 부채탕감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어 세계경제 포럼에 참가하여 연설을 하기도 했다.
---Family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Alison Stewart와 1982년 결혼해서 현재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Jordan, Memphis Eve, Elijah Bob Patricus Guggi Q Hewson) 현재 더블린에 거주하고 있다. 독일산 셰퍼드 2마리(Fanny와 Angel)를 기르고 있다. 이들 부부는 지금까지 매우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Ali 또한 독자적인 일을 하고 있으며 Bono가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족으로는 아버지 Bobby, 어머니 Iris, 형 Norman이 있다.
---Who's Bono in U2
밴드 초기에 Bono는 작곡, 보컬, 기타까지 맡고 있었으나, Edge의 실력에 밀려 보컬만을 담당하게 된다. 심지어, 그의 목소리가 표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머지 멤버들이 모두 그가 탈퇴하기를 바라던 시기도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그는 밴드에 잔류하게 되었다.
밴드의 리드 싱어이자 작사가로서 Bono는 성적인 자극이나 변화의 영감을 주는 방식으로 듣는 사람들이 영적인 여행을 떠나게 하는 곡을 써왔다. 언론에게 자신은 엄밀한 의미의 "pop star"가 아니라고 지겨울 정도로 되풀이해 왔고, 위대한 가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지속적으로 표현해 왔다. 파워풀한 그의 목소리는 대부분의 록밴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다재다능함을 지니고 수년 간 진화해 왔다. 초창기 그의 목소리는 80년대 앨범 Boy와 War에서처럼 갈망과 반항으로 가득찬 감상적인 10대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중반을 넘어선 앨범 The Joshua Tree와 Rattle and Hum에서는 분노와 열정이 가득찬 거친 포효로 변해 있었다.
가사를 통해서 대중을 감화시키려 노력해 온 사회적 의식이 있는 송라이터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공연을 펼치는 동안 실질적으로 그들과 결합하려고 노력하는 매우 드문 경우이기도 하다. 가장 좋은 예로 85년 Live Aid 공연 당시 "Bad"를 부르던 중간에 무대에서 뛰어내린 그는 안전용 바리케이드를 넘어 관중석에 있는 한 여성관객을 끌어 올려 춤을 춘 적이 있었다. 어디에 올라가는 것도 그가 특히 좋아하는 것으로 무대 위나 근처에 올라갈 발판만 있으면 올라가곤 한다. 대부분 다치지 않고 내려오지만 87년에는 떨어져 어깨뼈가 어긋난 경험이 있었다. 그 후로 그에게는 오르기 금지령이 내려졌고 아직까지 적용되고 있다. 그 외에, 절제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시킨다는 이유로 커피 또한 금지당하고 있다.
U2는 항상 정치에 매우 진지한 면을 보여왔는데, 이는 특히나 Bono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한 때 그가 공연 도중 무대를 관중 대상의 정치설교에 이용하는 것에 대해 밴드 내에서 의견차이가 있었다. 특히나, 정치토론에 걸맞는 시간과 장소가 따로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던 Edge는 팬들에게 강의를 하는 것에 상당한 거북함을 느꼈던 것이다.
90년대, 정치적 진지함(대부분 Bono의 정치적 비난과 무대에서의 설교로 인한)으로 인해 풍자만화꺼리가 될 위험에 처했을 당시, 그들은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베를린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초현실주의적인 록 공연 방식의 선례를 따라 자신의 이미지를 보다 사이버펑크한 쪽으로 바꾸게 된다. 밴드의 스타일리스트인 "Fighting" Fintan Fitzgerald의 도움으로 어깨까지 닿는 갈색 머리에 새까만 두건, 두눈을 완전히 덮는 썬글래스, 몸에 딱 붙는 가죽의상을 입고서 The Fly로 변신했다.
가상의 인물이 된 Bono는 밴드의 이정표가 된 앨범 Achtung Baby의 어두침침한 전자 섬광 한복판에서 노래했다. 부분적으로 Jim Morrison과 Lou Reed를 딴 이 캐릭터는 Zoo TV 공연동안 무대에 등장한 다른 캐릭터들의 모체가 된다. 전세계 텔레반젤리스트(티비나 대중매체를 이용하는 복음전도사)에게 헌정된 번쩍이는 the Mirrorball Man과, 악마와 쇠약한 소울 싱어로 전락한 말년의 Elvis를 혼합한 인물 Mister MacPhisto가 그 것들이다. 대중을 움직이는 힘과 그들과의 상호작용을 하는 데에 있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그는 항상 무대에서 대단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는 Zoo TV 공연 때 가장 두드러졌다.
---Other Facts
appearence: 푸른 눈에 적갈색 머리
car: 붉은 보라색 Jaguar, 노란색 Ford Cortina
favorite musician: Bob Dylan, Patti Smith, The Verve, Waterboys, The Clash, Radiohead
favourite food: fish'n chips(포테이토칩이 따라 나오는 생선 프라이), caviar (상어알)
favourite beverage: 차, Jack Daniels, 포도주
his most treasured possession: 가족, 친구들
his heroes : 보통 사람들
his real life nightmare: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
his real life dream: 잡지를 시작하는 것
his personal best thing: 코 (^^)
His personal worst thing: 역시 코 (^^)
가장 존경하는 인물: Frank Sinatra
가장 신세를 많이 진 사람: 신만이 안다 (아마도 God을 의미하는 듯)
가장 천박해 보이는 소장품: 표범무늬 실내장식을 한 1973년식 노란색 포드 코티나(Ford Cortina)
other occupations/interests(그외 직업/관심사) :
Activist. Screenwriter. Orator(연설가). Amateur thespian (아마츄어 희(비)극배우)
"I don't particularly like myth, but to me mystery is everything"
---Who's Edge
full name: David Howell Evans
date of birth: August 8, 1961 in East London
nick name: the Edge
position: great U2's edgy guitarist
---Bio
David Howell Evans는 61년 8월 8일 East London의 Barking Maternity Hospital에서 태어났다. 한 살때 가족들이 더블린 근처의 Malahide로 이사했고, 후에 그는 Mount Temple Comprehensive School에 입학하게 된다.
Edge는 Larry의 모집 공고에 처음 응한 사람이었다. 자체 제작한 기타를 가지고 형인 Richard (Dick), 친구인 Adam Clayton과 함께 찾아갔다. Larry의 집 주방에서 처음 열린 모임에는 Paul Hewson을 포함한 5명이 참여했었다.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연주실력을 보여주었고 멤버들은 첫 모임 때부터 의기투합했다. 형인 Dick은 Virgin Prunes에 가입하기 위해 곧 밴드를 떠났고, Edge가 리드 기타를 맡게 되었다. 조용한 성격에 매우 지적이었던 그는 학교 성적도 우수해 대학에 진학해 의사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를 마친 그는 1년 간의 휴식기를 두고 밴드와 음악이 자기 진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두고 보겠다고 부모를 설득했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밴드 일원으로 남을 것을 선택했고 그는 이 사실에 만족스러워 했다.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던 그는 81년 Bono, Larry와 함께 Shalom 성경 그룹의 멤버가 되었고 신앙심과 rock'n roll lifesyle 사이에서 심리적 갈등을 겪기도 했다. Edge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신암심과 밴드를 병행해 나갈수 있을 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당시, U2의 미래는 매우 불확실한 것이었고, 그런 분위기에서 2번째 앨범 "October"를 녹음했다. Larry와 Bono는 곧 밴드 활동을 선택했으나 Edge는 여전히 확신을 갖지 못했고 War 앨범 작업 직전에는 거의 탈퇴를 결심할 정도의 상황까지 갔다.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르라는 Bono의 충고가 있은 지 2~3주 후, 자신에게 있어 신앙심이나 음악, 생활방식은 서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역시 밴드를 선택하게 되었다. 다른 음악인들이 보여준 생활방식에 젖어 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밴드 활동 초창기에 Bono는 예리한 그의 얼굴선에서 연상된 Edge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항상 모든 일에 대해 가장자리에 서서 관찰하는 입장(always on the edge of things)을 고수하는 그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83년 7월, U2 초창기 그루피(groupie;록밴드를 쫓아다니는 극성 여성팬)였던 Aislinn O'Sullivan과 결혼을 했고 3명의 딸을 낳았다. 불행히도 두사람은 90년에 헤어졌으나, 아이들을 위해서 친구 관계로 남아 있다. 당시, 밴드는 "Achtung Baby"를 녹음 중이었고 수록곡 중 하나인 'So Cruel'은 Aislinn에 대한 것이라는 루머가 돌았다. 국민투표로 이혼이 합법화되던 96년 두사람은 이혼했다 (이전까지는 이혼을 금지하고 있었다). 93년 몰리 스타인버그(Morleigh Steinburg)가 Zoo TV 투어의 안무와 bellydancer를 맡았고 Edge는 그녀와 데이트를 시작했다.
---Family
91년 이혼한 아내 Aislinn O'Sullivan와의 사이에 딸 Holly (85년 출생), Arun (86년 출생), Blue Angel(89년 출생)이 있다. 현재는 Morleigh Steinberg(Zoo TV 쇼에서 "Mysterious Ways"에 출연한 belly dancer)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Sian (97년 출생)과 아들 Levi(99년 출생)와 함께 아일랜드의 Dalkney에 거주하고 있다. 가족은 아버지 Garvin과 어머니 Gwenda, 2살 위인 형 Richard (nickname: Dick)와 여동생 Gill이 있다.
---Who's the Edge in U2
Edge라는 별명은 직접적으로는 그의 외모에서 연유된 것이나, 연주 스타일이 최첨단(cutting edge)을 달리기 때문에, 혹은 그의 연주가 깔끔하면서도 착 감기는 예리함(full of edges)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지어진 것이라고도 한다. Edge라는 별명은 그와 관련된 여러가지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다.
9살 때 첫 기타를 갖게 된 이후 지금은 32개 정도의 기타를 소유하고 있다. 초기의 연습 방법은 주로 멤버들이 제공하는 레코드를 틀어 놓고 따라 연주하는 것이었다. 곡의 빈 틈새를 기타로 메우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스스로 "doing the work of two"(두사람 몫하기?)로 표현하는 특유의 스타일을 개발했다.
Edge의 기타 사운드는 U2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이다. 개성적이면서도 최면을 거는 듯한 매혹적인 연주와 그 안에 담겨있는 정서들은 록큰롤 분야에 있어 가장 독창적인 기타리스트 범주 안에 그를 들게 한다. 그는 종종 "anti-guitar hero"라는 칭호로 불려져 왔다. 수많은 동시대 연주자들이 보여주는 자기 과시형의 솔로 스타일을 지양하고, 듣는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통해 의미깊은 무언가를 전달하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Bullet the Blue Sky"에서 잡아낸 El Salvador의 고통과 좌절, "One"에서의 감상적이고 영혼을 사로잡으면서 듣는 이를 흥분시키는 기타 리프는 오로지 Edge이기에 가능한 것들이다. 깔끔하고, 선명하며, 예리한 첨단의 연주는 다른 연주자의 그것과는 혼동될 수 없는 명백한 그만의 스타일인 것이다.
그는 기타 뿐만 아니라 많은 곡에서 키보드와 백킹 보컬, 작곡과 편곡에까지 참여하는 등 다재다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단조롭지만 흥미로왔던 "Numb"에서나, PopMart Tour 중 "Sunday Bloody Sunday"에서 들려주었던 부드럽지만 충분히 리드했던 목소리는 Edge의 재능에 한계가 없음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Other Facts
appearance: 푸른색 눈과 갈색 머리
cars: 다양한 모델의 회색 벤츠(Mercedes)
favourite groups: Radiohead, Underworld, Oasis
drinks: Guinness (맥주), 몇가지 종류의 위스키
most treasured possessions: 기타와 벤츠
hobbies: 음악, 컴퓨터
real life nightmare: 미쳐버리는 것
real life dream: 잠재력을 십분 발휘하는 것
best personal thing: 코를 골지 않는 것
가장 신세를 많이 진 사람: 어머니
가장 천박한 소장품: 번쩍이는 금속조각(sequin)으로 장식된 위스키 병
one of his favourite songs: 'Drowning Man' from the 'War' album
사용장비:
Gibson Les Paul Customs, Fender Stratocasters, Gibson Explorer, Vox AC30 amplifiers,
Randall combos, AMS digital delay, Roland SDE-3000, E-Bow.
lead vocal을 맡은 곡들:
'Seconds' from the 'War' album, 'Van Dieman's Land' from 'Rattle and Hum',
'Numb' from 'Zooropa', 'Corpse' from 'Passengers Original Soundtrack 1'
live version of 'Sunday Bloody Sunday' from the single 'If God Will Send His Angels'.
Adam Clayton (Bassist)
"Men should not be forced to wear pants when it's not cold"
---Who's Adam
full name: Adam Charles Clayton
date of birth: 1960/03/13
nickname: Sparky
position: Great U2's rebellious bassplayer
---Bio
Adam은 잉글랜드 Oxfordshire의 Chinnor에서 태어났다. 5살 때 Dublin 근처 Malahide의 Yellow Walls Road로 이사를 했고 그곳에서 여동생 Sarah와 남동생 Sebastian이 태어났다. Adam은 영국공군 조종사였던 아버지 직업적 특성상 St. Columbia 기숙학교에 보내졌다. 그는 기숙학교를 싫어했고, 결국 16살 때 학교를 그만 두었는데 아마도 퇴학 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Malahide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Mount Temple Comprehensive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어릴 때부터 코메디언이나 뮤지션이 되어 무대에 서는 것이 꿈이었던 Adam은 항상 반항적이었고 학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히피 스타일의 옷을 자주 입거나 종종 벗은 채로 복도를 뛰어다는 등 기행으로 유명했다. Max Quad Band에 가입했으나 악기 연주를 못한다는 이유로 탈퇴했고 U2의 전신인 Feedback에 합류한다. 76년 결성 당시, 그는 Larry의 밴드 모집공고에 응한 유일한 베이시스트이자 밴드경험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gig'이나 'jam', 'fret action'라는 음악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멤버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동안의 특이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일단 밴드를 결성하자 그는 밴드의 성공을 위해서 자신을 바치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둔 Adam은 (학교를 계속 다녔다면 아마도 퇴학당했을 것이다) 남는 시간을 밴드의 매니저 역할에 투자했다. 이 역할은 그가 Paul Mcguiness를 만나 그에게 밴드를 맡기겠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 지속되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멤버 중에서 특이한 사람이다. 밴드 초창기 그와 매니저 Paul은 개종을 반대하면서 종종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종교적 믿음을 공유하지도 않으며 'rock'n roll lifestyle'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일하게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멤버였고 파티광으로 외박을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음주운전이나 마약 소지 등 법을 어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89년에는 마약 소지죄로 체포되어 1년간 미국 입국이 금지 된 경험도 있다. 93년 슈퍼모델 Naomi Campell과 데이트를 시작했으나 곧 헤어졌다. 이 상처로 인해 같은 해, 시드니에서는 만취상태로 인해 콘서트에 불참하기도 했다. 그의 자리를 로드 매니저인 Stuart Morgan이 대신 채워주기는 했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다른 멤버들과 약간의 마찰을 일으켰다. 다행히, 이 일이 경종이 되어 그는 자신을 추스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Larry의 지속적인 도움이 그를 북돋우는 큰 힘이 되었다. 1년 동안 그와 함께 New York에 머무르며 베이스 레슨을 받고, 영화 'Mission Impossible'의 타이틀곡을 비롯한 여러 영화 사운드트랙 작업을 하면서 다시 원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다. 제2의 부흥기를 거친 그는 Pop에 수록된 'MoFo', 'Gone', 'Miami', 'Please'를 통해 창의적이고, 복잡하면서도 독창적인 그만의 리프를 선보이며 앨범의 성공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82년 Bono의 결혼식 때 그가 신랑 들러리를 맡았다.
87년 그래미 상을 수상했을 당시, 그 상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이제 집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것이었다.
어떤 이유인지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97년 Bono가 그를 'Sparky'라고 부르는 것이 드러났다.
---Family
흑인 슈퍼모델 Naomi Campbell과 약혼까지 한 경력이 있는 그는 현재 Paul McGuinness의 어시스턴트인 Suzie Smith와 사귀고 있다. 가족관계는 아버지 Brian, 어머니 Jo와 여동생 Sarah, 남동생 Sebastian이 있다.
---Who's Adam in U2
보컬이 되기를 원했던 Larry, 기타를 치고 싶어했던 Bono, 드럼을 맡고 싶어했던 Edge와는 달리 Adam만이 현재와 같은 포지션을 원한 유일한 멤버였다.
현재 매니저인 Paul McGuinness를 만나기 전까지, 베이스 뿐만 아니라 매니저 역할을 맡았던 그는 공연 예약을 비롯해 밴드를 대표해서 CBS Ireland와의 협상을 진행하기도 했다. 파티를 찾아다니며 밴드의 데모테잎을 들고 홍보에 열심이기도 했다.
Bono는 밴드 초기에 그의 추진력으로 밴드가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성공을 위한 그의 헌신과 결단력이 나머지 멤버들에게도 작용했다는 것이다. 80년대 초, 밴드 내에서 아웃사이더와 같은 존재였으나 그의 위치는 확고한 것이기도 했다 (이 점은 그가 Bono의 결혼식 때 들러리였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독창적이고 기억에 남는 그의 베이스라인은 'New Year's Day'나 'With Or Without You'같은 이들의 대표곡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드럼의 Larry와 함께 그는 점차적으로 U2 사운드의 골격을 확고히 다져갔다. 딱딱하지 않으면서 느긋한 그의 리프는 정확한 드러밍과 명쾌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베이스와 드럼은 Bono와 Edge가 각각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운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도록 곡의 배경을 채워 주는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Adam이 다른 멤버들과 함께 대외적으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된 것은 Zoo TV 공연 때였다. '최고의 록스타'라는 위상은 그가 가진 바람둥이 기질에 부합했고 그는 완전히 거기에 빠져들어 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그는 그 위상을 뒷받침할 만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Zoo Station', 'Until the End of the World', 'Mysterious Ways', 'Tryin' to Throw Your Arms Around the World', 'Babyface', 'Lemon', 'Some Days Are Better Than Others'에서 그는 더없이 빛나는 연주를 들려 주었다.
---Other Facts
appearance: 푸른색 눈동자에 금발머리
cars: 검은색 골프 폭스바겐, 붉은보라색의 포드
favorite singers: Underworld, Patti Smith (최근 NME 문답에서는 Bob Marley를 언급했다)
food: 멕시코와 중국음식을 좋아함
preffered drink: 데킬라, 위스키
most treasured possession: 자기 ** (심의에 걸려 모자이크처리)
hero: Robert Mapplethorpe
heroine: Angellica Houston
hobbies: 담배와 여행
real life nightmare: 기억하지 않기
real life dream: 베이스 연주하기
personal best thing: 당신을 바라보는 방식
personal worst thing: 아침에 상태가 나쁘다
가장 신세를 많이 진 사람: 은행 지점장
가장 천박스런 소지품: 93년도 입었던 노란색 슈트
*그의 생일날, Pop 앨범이 미국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Larry Mullen Jr. (Drummer)
"I think the lyrics are shit. I think it's all about drums."
--- Who's Larry
full name: Lawrence Mullen Jr.
date of birth: 1961/10/31
nickname: Duke Dalton, Babyface Mullens
position: Great U2's cool drummer
--- Bio
Larry는 더블린 북쪽에 위치한 Artane의 Rosemont 가 60번지 (60 Rosemont, Artane)에서 태어났다. 유명해 지면서 그의 이름 뒤에는 아버지 Larry Mullen, Sr. 와 구분하기 위해 "Junior"를 붙여야 했다. 운나쁘게도, 늘어난 세금 청구서를 그의 아버지가 받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71년, 10살 되던 해 이전에 배우던 피아노를 그만두고 아일랜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드러머인 Joe Bonnie와 함께 드럼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수업을 받긴 했으나, 그는 자신의 드러밍 스타일은 "가르칠 수 없는" 것이고, 영혼과 본능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73년, 누이인 Cecilia는 17파운드짜리 첫 드럼 키트를 그에게 사 주었다.
70년대 중반, 군악대 스타일로 드럼을 치기 시작했고 Artane Boys' Band에 가입하게 된다 (이 밴드는 98년 재발매된 the Sweetest Thing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다). 긴머리를 자르지 않아 밴드에서 탈퇴하게 된 후에는 밴드를 결성할 즈음까지 jazz를 배우기도 했다.
그 유명한 76년 가을, Mount Temple Comprehensive School에 한 공고를 붙였고, 그 이후로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당시에 그가 붙인 공고는 다음과 같다.
"난 드럼키트 사는데 돈을 다 써버렸다. 또 누가 나처럼 기타 사는데 돈 다 써버린 사람 있으면, 같이 밴드 만들지 않겠느냐?"
이 공고를 보고 사람들이 모였고, 그의 집 주방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그 중 음악경력이 있는 사람은 Larry가 유일했다. 이듬해 어머니가 사망하는 불행을 겪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이 밴드명을 U2로 알고 있지만, 밴드의 진짜 이름은 "the Larry Mullen Band"라고 말하기도 한다. 화려한 경력을 쌓아가는 동안 그는 건염(tendinitis;힘줄에 염증이 생기는 병인듯 함)에 시달렸지만, 특수 제작된 드럼스틱 덕으로 상태가 악화되지는 않았다.
Harley Davidson (모터싸이클) 애호가로, 공연 때마다 자신의 모터싸이클을 타고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Zoo TV 투어 때만 하더라도 10,000 마일 이상을 기록했다고 한다. 또한, Elvis Presely의 팬이기도 하다.
밴드 내에서 그는 가장 수줍음이 많고 분별력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허풍떨거나 하는 그런 타입의 성격은 아니지만, 그는 상당한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에게 짖꿎은 장난을 잘 치기도 하고 가라오케 기계 앞에서는 어느새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멤버 중 지금까지 유일하게 헤어스타일을 한번도 바꾸지 않았다. 성공이 가져다 준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배경으로 남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 Family
그는 고등학교 때 만난 Anne Acheson과 아들 Aeron Elvis(October 4, 1995)와 배우 Ava Gardner의 이름을 딴 딸 Ava(1998)와 함께 아일랜드의 Sutton에 살고 있다. 2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으며 이전 앨범들을 보면 JJ와 Missy, 두 마리의 이름이 thanks to 리스트에 올라와 있다. (역주: zooropa에는 리스트 마지막에, pop에는 중간에 있습니다. achtung은 라이센스 부클릿이 엉망이라서 확인 불가능) JJ는 죽고, 현재 Missy가 함께 하고 있다.
그 외의 가족은 77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어머니 Maureen, 아버지 Larry Sr., 누이 Cecilia (57년 출생), 그리고 73년 사망한 여동생 Mary(64년 출생)가 있다.
--- Who's Larry in U2
초창기 밴드 내에서의 역할은 단순히 사람수를 채우기 위한 드러머의 역할이었고, 심지어 밴드내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실제로 CBS Ireland에서는 그를 빼지 않으면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단도직입적으로 거절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스타일이 점점 확실하고 충실해짐에 따라 곡을 쓰는데도 관여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드러밍은 점점 U2 음악의 절대적 요소가 되었다. 곡을 쓸 때는 특히 그와 함께 리듬섹션을 맡고 있는 Adam과 함께 작업을 한다. 영화 Mission Impossible의 Theme은 두 사람의 훌륭한 합작 결과물이다. (개인적으로 007시리즈 이후 가장 완벽한 곡이라 생각한다)
Bono는 그가 '매우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이고, U2를 진정한 록앤롤 밴드로 만드는 것은 바로 Larry의 베이스 드럼이라고 말해 왔다. 이 부분은 밴드 결성자로서 Larry가 여전히 밴드의 뼈대라는 것과도 맞아 떨어진다.
조용한 성격인 그는 항상 무대나 인터뷰장에서 다른 멤버들이 중앙을 차지하도록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가장 분별력있는 멤버로서, 특히 Bono가 구상하는 복잡한 무대 세트를 만들기 위한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기획들에 제동을 걸만한 인물이기도 하다.(Popmart 세트에 대해서도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Larry는 밴드와 관련된 상품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T-shirt에 들어갈 문구 때문에 앨범 타이틀과 관련된 멘트를 종종 접할 수 있다.
---Other facts
appearance: 청회색 눈에 금발머리.
cars: 흰색 르노, 검은색 지프, 붉은보라색의 시트로엥 XM
food: 채식을 즐김.
preferred beverage: 과일쥬스, 맥주, 위스키
favorite possession: 어머니의 반지
real life nightmare: 유혹
real life dream: 유혹에 굴복하는 것
favorite personal thing: 기르고 있는 개
유투 공식 홈페이지 www.u2.com
u2는 가장 열렬한 네티즌 팬을 거느린 록그룹 중 하나답게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 하다. 인터넷으로만 공개되는 다양한 음악과 동영상들, 네티즌들의 투표로 베스트 앨범 트랙을 선정한 후 이를 CD 음질로 다운로드 할 수 있도록 한 이벤트, 그리고 수시로 업데이트되는 밴드와 그 주변에 대한 뉴스들...
메인 페이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인트로를 지나야한다는 점은 조금 번거롭다. 하나는 사이트에 대한 일반 정보가 써있는 평범한 인트로 화면, 그리고 나서는 플래시 인트로. (플래쉬 인트로는 처음 접속할 때만 나오고 다음번부터는 바로 사이트 인트로로 넘어간다) 하지만 깔끔하고 세련된 메인 화면이 펼쳐지고 그 안에서 보물찾기를 하듯 정보와 컨텐츠들을 찾아가다보면 두 개의 인트로는 전혀 귀찮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유투닷컴의 네비게이션은 크게 두 가지 툴을 이용한다. 먼저 가장 보편적인 상단의 네비게이션 바를 이용하는 것. 하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유투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짜여진 하단의 타임라인 네비게이션 툴이다. 결성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앨범, 싱글, 이벤트 등을 연도순으로 늘어놓고 클릭에 따라 메인프레임에 원하는 내용과 더불어 그 시기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보여준다.
별다른 이미지 요소 없이 메인 컬러와 밴드의 사진, 앨범 등의 정보성 이미지만으로 깔끔하게 이루어져 있으나 로딩은 조금 느린 편이다. 특히 타임라인 네비게이션의 로딩이 너무 느렸었는데, 최근 들어서 모뎀 사용자들을 위해 타임라인을 html 버전으로도 선보이고 있다.
유투에 대해 어떤 질문이 있다면, 우선 이곳에서 찾아보는 것이 바람직. 최근에는 Zootopia라는 커뮤니티 파트도 오픈했다
U2가 지원한 공공사업들
CAUSES AND CRUSADES
CONTRACEPTION ACTION CAMPAIGN
1978년, 리버티홀, 유투는 아일랜드 내에서 자유로운 콘돔의 사용을 지지하는 공연을 펼쳤으며, 이후에는 아일랜드 가족계획협회를 후원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초창기 유투가 지지한 또다른 캠페인은 'Rock against Sexism'이었다. 이를 위한 자선공연은 1978년 마그넷 바에서 이루어졌으며 50명의 관중이 모였다.
BAND AID/LIVE AID
Principle(유트이 매니지먼트사)이 별로 달가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노와 아담은 1984년 밴드 에이드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에 참가한다. 그리고 이디오피아 기아 문제에 대한 전세계의 관심이 고조되고, 이에 따른 구호자금이 모여지면서 밥 갤도프는 1985년 7월 13일 전세계적인 이벤트를 감행한다. 바로 Live Aid였다. 유투는 웸블리 구장에서 매우 파워풀한 공연을 펼쳤고, 이로 인해 그들의 위상은 점점 더 높아지게 된다. 보노의 그의 아내 알리는 이디오피아로의 봉사활동을 자원했고, 이후에도 보노의 정치적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니카라구아, 엘 살바도르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ARTIST AGAINST APARTHEID
'Silver and Gold'는 보노가 곡을 듣기도 전에 먼저 가사를 쓴 첫 곡이었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가장 끔찍한 인종차별 장면을 상상했고, 그 상상을 가사로 옮겼다. 1995년 발매된 Artist against apartheid의 [Sun City]앨범에 수록된 'Silver and Gold'에서는 롤링스톤즈의 키스 리처드와 로니 우드가 기타를 쳤다.
A CONSPIRACY OF HOPE
국제사면위원회를 위해 1985년 행해진 미국 투어로 유투, 루 리드, 네빌 브라더스, 스팅, 피터 가브리엘 등이 참가했다. 이 공연의 결과로 국제사면위원회의 회원이 급증했으며 사면위원회 25주년 기념 모금에서 400만 달러의 기금이 모였다. 이후 국제사면위원회는 유투 투어때마다 부스를 세우고 홍보활동을 했으며, 앨범 부크릿마다 관련 자료를 싣고 있다.
SELF AID
아일랜드 버전의 Live AId로 아일랜드의 실업구제를 위한 공연. 아일랜드 출신의 유명인사들과 더불어 유투도 RDS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펼쳤다. 하지만 이 행사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이 나이브했다고 한다. 유투는 마가렛 대처에 대항하는 의미로 'Maggie's Farm'을 불렀다.
FRISBEETARIANS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지붕에 달라붙어 아무도 떼어낼 수 없다고 믿는 작은 종교집단으로 배우이지 희극배우인 George Carlin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유투는 조슈아 트리 시절에 이 종교집단에 진지하게 심취해있었다.
STOP SELLAFIELD
셀라필드 원자력 발전소의 유출물들로 인해 아일랜드 동부연안의 폐결핵 환자가 급증했다. 게다가 셀라필드가 폐기물 가공 처리소를 지어 전세계의 쓰레기들을 끌어모으려하자 유투는 셀라필드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1992년 6월 그들은 그린피스와 함께, 셀라필드로 인해 오염된 아일랜드 동부연안의 오염물들을 고무보트에 실어 셀라필드에 가져다가 버렸다.
THE GOOD FRIDAY REFERENDUM
1998년 5월 19일 벨파스트. 유투는 애쉬(ASH)와 함께 워터프론트 홀에서 학생들을 위한 무료 공연을 가졌다. 이는 벨파스트 협정에 대한 국민투표 지지를 위한 공연이었다. 지지부진한 PR 프로그램으로 인해 지지도는 그리 쉽게 올라가지 않았으니. 보노는 공연에서 Unionst와 SDLP 소속의 정치인들이 악수를 하는 장면을 연출해냈고, 이 사진이 매스컴을 타면서 국민투표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DROP THE DEPT/JUBILEE 2000
정치/종교계의 지도자들에게 제 3세계의 부채 탕감을 지지하게 하기 위해 보노와 다른 멤버들이 인간적인, 사회적인, 문화적인 지위와 매력을 모두 동원하고 있는 캠페인. 현재까지 100억 달러(100 milloin-숫자에 약해서... 100million이 100억 맞나요?)의 부채가 탕감되었으며, 크리스마스 경에는 획기적인 발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THE SPRINGFIELD GARBAGE SITUATION
스프링필드의 공공정책에 분노한 호머 심슨은, 자신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유투의 공연에 뛰어든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보노는 흥미로워했다가... 흥분했다가... 결국 새 친구의 이야기로 관객을 선동하려 한다. 반면 에지는 그를 노려보다가... 술마시러 가버렸다. 아담은 그의 스푼 콜렉션에만 관심을 가질 뿐 호머의 이야기에는 무관심했다. 유투가 지지할만한 멋진 명분이 하나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HOT PRESS u2 | Slane 2001 특집호 중
(리아님이 빌려주신 책에서 번역했습니다. 늘 그럿듯이 번역은 허접입니다.
그리고 차차 다른 기사들도... 올리겠습니다)
-출처 : 사탕발림
U2 인터뷰 모음
U2 인터뷰...NME U2 36문 36답
새 앨범을 통해 당신들이 찾고 있던 것을 찾았습니까?
에지: 늘 그게 목표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늘 변하니...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앨범 작업하는 동안 어떤 음악을 들었습니까?
에지: Aaliyah, Sonique, Moloko, TLC, Craig David and Kelis 같은 팝음악도 많이 들었고, Primal Scream, Rage Against The Machine, Chilli Peppers 등의 클래식 수준의 록큰롤도 들었습니다. 모비도 간혹 들었는데, 우리가 모비를 들을 때면 래리는 늘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했죠.
당신들이 듣는 음악이 새로운 레코딩 작업에 영향을 주나요?
에지: 당연하죠. 모든 것에서 영향을 받죠.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어쩔 수 없죠. 그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u2 공식 사이트를 만드는데 어느 정도나 참여했나요?
아담: 전적으로요. 웹사이트를 만들고 운영하는데 참여하는 건 멋진 일이죠. 웹사이트는 우리가 투어를 할 때 정말 진가를 발휘할 겁니다.
인터넷 상의 u2 채팅방에 참여한 적 있나요?
아담: 네. 지난 몇년 동안 몇몇 채팅방에 들렀어요. 모호한 이야기들에 대해 답을 해주려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틀린 이야기만 해주었더라구요.
제 친구와 저는 오랜동안 이 문제를 가지고 다투어왔는데... 대답을 좀 해주세요. [Joshua Tree]와 [Achtung Baby] 중 어느 앨범이 더 나은가요?
에지: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제 생각엔 친구분과 계속 다투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만약 채소통조림이 된다면 어떤 채소가 되고 싶나요?
에지: Palm Hearts(<--이게 뭘까요? 사전이 없어서 모르겟습니다)
u2가 가장 좋아하는 u2 앨범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보노: 늘 바뀝니다. 게다가 우리는 한 앨범을 만드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을 들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그 앨범을 들을 수가 없죠.
에지: [Achtung Baby]입니다. 그리고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가 아주 근소한 차이로 두 번째구요.
u2가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누군가요?
래리: 엘비스
에지: 벨벳 언더그라운드
보노: 비틀즈
아담: 밥 말리
u2가 부른 커버송 중 가장 어색한 곡은 무엇이었나요?
에지: 달튼 브라더스로 가장한 후 부른 'Tequila Sunrise'일 꺼에요.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에 수록된 노래의 다른 버전을 인터넷 상에 올릴 계획은 없습니까? 한 곡에 대해 다른 버전들을 들을 수 잇으면 멋질텐데요.
에지: 별로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가 아니군요. 지금 나와있는 버전이 우리들 마음에 가장 든 것이니까요.
앞으로 있을 투어의 공식 부틀렉을 인터넷을 통해 판매할 계획은 없습니까? 한 공연당 8불씩을 받은 후 이익금을 자선사업에 쓰면 어떨까요?
에지: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긴 한데... 하지만 제 생각엔 콘서트 실황은 바로 냅스터같은 사이트에 올라올테니...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부트랙과 냅스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에지: 우리 음악에 대해 댓가를 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진짜 문제는 공연의 부틀랙이나 냅스터 같은 사이트에 올라있는 u2의 곡들이 궁극적으로 이 부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죠. 저는 만약 음반업계가 잘만 꾸려나간다면 인터넷이 음악산업을 상승시켜줄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보노는 집에 있을 때 아이들의 더러운 기저귀도 갈아주고, 밤에 목욕도 시켜줍니까?
보노: 물론입니다.
그런데, 보노, 당신은 REM의 새로운 앨범의 곡들을 들어본 것 같던데... 어땠나요? 정말 그렇게 말도 못하게 아름다운 곡이던가요?
보노: 네, 네, 그리고 또 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요?
에지: 한밤중이요.
Paul Hewson(보노)은 운전을 난폭하게 하나요?
에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보노가 운전하는 차는 타지 마세요.
래리: 그는 운전에는 전혀 재능이 없어요.
아담: 운전하는 건 그에게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죠.
어렸을 때 꿈이 뭐였나요?
에지: 우리는 지금 그 꿈대로 살고 있죠.
팬케이크를 어떻게 드시나요?
에지: 뜨겁고, 버터와 시럽을 듬뿍 발라서요. 사실 그건 내가 요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음식이죠.
당신들의 새 앨범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들을만한 걸 권한다면?
에지: 좋은 충고를 들으세요.
u2는 아일랜드의 테러리스트 조직을 후원합니까?
에지: 농담하세요? 우리는 살인자나 미치광이들을 후원하지 않아요. 하지만 예술계의 테러리스트들은 지지하죠.
만약 당신들이 현실세계의 수퍼 히어로들이라면, 당신들의 스페셜 파워는 어떤 것이엇을까요?
에지: 우리는 실제로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진 현실세계의 수퍼 히어로들이죠.
내가 바로 이런 곡을 작곡/작사했으면 좋았을텐데...하고 생각한 노래가 있나요?
보노: 절대 잊을 수 있는 가사 부분이 있어요. 밥딜런의 'Vision of Johanna' 중 'Ain't it funny how the night play tricks on you when you're trying to get some quiet... We all sit here stranded, doing our best to deny it'.이란 부분이죠. 정말 더이상 좋을 수는 없는 가사죠.
에지: 비치 보이스의 'God only Knows'
u2의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은?
아담: 매일 바뀝니다.
더블린에서 기네스 맥주를 마시기 가장 좋은 곳은 어디인가요?
에지:Walshes of Stoney Batter. 하지만 더블린 어느 술집에서 마셔도 다 좋답니다. 기네스를 샴페인과 섞으면 최고의 'Black Velvet(<--이게 뭘까요? 칵테일인가요?)을 만들 수 있죠.
더블린의 술집에 가면 술값을 냅니까?
에지: 물론이죠. 더블린은 인심 좋기로 유명한 곳이긴 하지만, 매일매일 술값을 안 받을 수는 없는 일이죠.
만약 당신 넷이 서로서로 결혼을 해야한다면 누구랑 하시겟습니까?
에지: 사실 우린 서로와 결혼한 상태나 다름없죠. 보노는 아담과, 그리고 저와 래리와.
Johnny Cash가 부른 'One'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왜 그곡을 불렀을까요?
에지: 그 노래는 무척 큰 히트를 기록했죠. 그리고 두번째 질문은 Johnny Cash에게 묻는 게 낫겠네요.
RadioHead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에지: 완벽한 사운드, 아름다운 노래들. 그들의 노래를 들을 때마나 마음이 무척 아파집니다.
밴드의 다른 멤버들에 대해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에지: 우리가 가장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어떻게 아직까지도 계속 밴드를 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밴드를 떠나지 않나요?'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불화나 마찰을 두려워하게 되죠. 하지만 우리들에게 불화와 마찰은 우리가 정말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당신 넷이 인정사정 없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요?
아담: 보노
래리: 보노
에지: 보노
보노: 저죠.
만약 아담이 1976년 학교 게시판에 밴드모집 공고를 붙이지 않았다면 당신들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래리죠? 인터뷰하는 사람이 혼동한 것 같습니다)
에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지금처럼 즐겁게 살고 있지는 못하겠죠.
만약 90년대에 당신들이 커다란 레몬을 끌고 전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80년대에 알았다면, 펑크정신의 발동으로 해산하지 않았을까요?
에지: 우리는 펑크의 부정적인 면에 한번도 찬동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레몬 뿐 아니라 80피트짜리 이쑤시개를 끼운 올리브도 있었다는 걸 잊지 말아주세요.
록스타로서 엄청 많은 질문들을 받을 겁니다. 그런데 혹시 누가 꼭 이 질문은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데 아무도 물어봐주지 않은 질문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에지: 질문은 '왜 그룹명이 u2입니까?'라는 것이구요, 대답은 '신경끄고 당신일이나 해!'입니다.
PopMart 투어 중 오슬로에서 레몬이 열리지 않은 적이 있었죠? 그 안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나요?
에지: 의자 아래 구명조끼가 있을까?...
누구 **가 가장 큰가요?
에지: 아담
보노: 아담
래리: 아담
아담: 저요.
유투 인터뷰 by 박은석
2001년 10월 발매된 U2의 새 앨범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는 여러모로 전작부터 커다란 관심을 모았던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상 외로 길어진 3년의 공백 끝에 발표하는 신작인데다, 지난 앨범인 [Pop](97)이 (그 야심찬 아이디어와 그에 상응하는 대대적인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80년대 중반 이후 줄곧 그들을 따라다닌 상징적인 레테르로써의 '세계 최고의 록 밴드'라는 명성에 균열의 조짐을 가져온 '실패한 혁명'으로 드러났다는 제반요인들이 그 정황증거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98년, 베스트 앨범 [The Best Of 1980-1990]을 발표하면서 밴드 활동의 지난 시간들을 분명한 단락들로 경계짓는 방점을 찍어 놓은 상태에서 맞이한 2000년은, 여기 20세기 후반기의 록 스타에게 완전히 새로운 출발점으로 가로놓여진, 또 다른 시공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두 달. 우리는 새 앨범 속의 U2가 [Achtung Baby](91) 이후로 90년대 내내 그들이 지향해왔던 일렉트로닉 성향의 노선을 경유해서, 로큰롤의 보다 근원적 양태로의 회귀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일반의 반응이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가닥이 되어 잡히고 있음도 체감하고 있다. 이제 남겨진 것은 "왜?"라는, 다소간 쟁점적인 질문에 대한 논의 뿐인 셈이다. 그들 스스로도 지난 앨범이 실패였음을 수긍했기 때문일까? 혹은 새 천년의 록계에 대한 오피니언 리더로써 자임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일까? 이 인터뷰는 그에 대한 아주 작은 단서이다. 그리고 보다 넓은 관점에서,'세계 최고'라는 수식어의 남다름을 직접 확인시켜주는 새로운 경험이기도 하다. 정상의 여유로부터 우러나오는 몸에 벤 예의와 친절은 물론이고 그 행간에서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자긍심과 책임감의 자연스러운 발로를 목격하는 일은, 한국의 미디어와 U2간에 이루어진 최초의 만남이라는 이정표로서의 의미에 명실상부하게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2000년 10월 10일 행해진 이 인터뷰가, 몇 가지 사정으로 인해 마그네틱 테이프 속에 처박힌 채로 지난 2개월을 보내며 그 역할이 요구하는 정상적인 유통기한을 넘어서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만만치 않은 지면 위에 영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정의를 화두로 쌓아온 그들의 지난 20년을 알고 있기에 여기 '2달 전의 진실'은 그 가치의 유효성을 의심받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대중음악이 여중생들의 환호성과 기성세대의 몰이해 속에서 질식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 위에서, U2는 록 음악이 획득할 수 있는 권위와 그 거대한 정치, 사회, 문화적 영향력의 최상위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타산지석의 산 표본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인터뷰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 소재한 U2 소유의 스튜디오에서 행해졌다.인터뷰 시간을 10여분 앞두고 도착한 그 곳에서 매니저가 건넨 커피잔을 받아들고 잠시 질문 내용을 점검하는 동안 멤버들이 도착했고,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에 인터뷰가 이루어질 방으로 각각 자리를 옮겼다. 우리측의 인터뷰이(interviewee)로는 보컬리스트인 보노(Bono)와 드러머 래리 뮬랜(Larry Mullen)이 내정되어 있었고, 기타리스트 엣지(The Edge)와 베이시스트 아담 클레이튼(Adam Clayton)은 같은 시간 다른 방에서 말레이시아 기자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미리 준비해둔 소파에 보노가 먼저 자리를 잡았고, 카메라와 마이크의 설치가 준비되는 동안 격의없는 대화가 자연스레 오갔다.
보노 더블린에는 와 본 적이 있으신가요?
박은석(이하 박) 이번이 처음입니다.
보노 그렇군요.한국에서 여기까지 먼 길을 오셨는데, 이 인터뷰가 끝나면 바로 돌아가시나요?
박 아니요. 멘체스터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와의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거든요.
보노 아, 브리트니! 대단한 소녀죠? 그 음악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기가 그렇지만, 10대의 나이에 그런 걸 보면 대단한 것 같아요.
박 인터뷰도 그렇긴 하지만, 멘체스터라는 도시가 제게는 매력적이에요. 버즈콕(Buzzcocks), 스미스(Smiths), 스톤 로지즈(Stone Roses)같은 좋은 밴드들이 그 곳 출신이어서 관심이 많이 갑니다.
보노 아, 버즈콕스... 커트(Kurt Cobain)가 가장 좋아했던 밴드 가운데 하나죠. 그래서 90년대 초반, 버즈콕스가 재결성되었을 때 너바나(Nirvana)의 공연에서 오프닝을 맡기도 했었죠.
박 너바나 공연의 오프닝이요? 그건 몰랐었는데...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이런 얘기들이 오가고 있을 때, 매니저가 카메라 셋팅이 완료되었음을 알려주었다. 곧이어 래리 뮬렌 주니어가 착석을 했고, 공식적인 인사말과 함께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박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래리 뮬렌(이하 래리) 고향에서 당신을 만나게 된 우리가 오히려 더 반갑다고 해야겠죠.
보노 그래요, 당신은 한국에서부터 멀리 이곳까지 왔으니까요.
박고맙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한국의 미디어가 U2와 갖는 최초의 인터뷰인데요, 우선 한국 팬들에게 인사 한 마디 해주시죠.
보노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의 사람들이 저희를 잘 알고 이해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U2의 음악이 한국 사람들과 통한다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우리는 음악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저희가 한국에 간다면 공연을 보러와주시길 바랍니다.
래리 안녕하세요(Hello Korea!) (멋적은 듯한 웃음 후에 보노를 바라보며) 웃기지? 한 도시도 아니고 한 나라 전체를 향해 인사를 한다는 게 말야...
3년만의 새 앨범은 20년 경험의 산물
박 지난 앨범 [Pop]이후 3년만에 새 앨범을 완성했는데, 지금 기분은 어떤가요?
보노 라이브를 하고 싶어요. 새 앨범의 곡들은 라이브로 연주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라이브에서 연주하고 싶은 앨범을 갖는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죠. DJ가 있어야 했던 지난 앨범과는 달리 새 앨범은 그다지 많은 테크놀로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물론, 지난 앨범도 좋은 경험이었어요. 하지만 이번 앨범은 전적으로 우리 네 사람의 멤버를 위주로 제작되었어요. U2사운드의 독창성은 그렇게 우리 네 사람이 함께함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는 거죠. DJ나 믹싱을 담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 보다 보편적인 사운드가 되고 마는 느낌이에요. 사운드는 다이얼 조작만으로도 컨트롤할 수 있지만, 밴드의 분위기를 다이얼로 제어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박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로 바빴다는 건 알지만 3년이라는 공백은 그래도 너무 길다는 느낌입니다.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나요?
보노 엄밀히 말해서 3년의 공백은 아닙니다. [Pop] 앨범을 발표한 이후, 1년 반 동안 계속해서 공연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정확히는 약 1년 반의 공백이라고 할 수 있죠. 예전 모타운(Motown) 계열의 소울 클래식들 같은 경우는 A면 2곡과 B면 2곡을 녹음하는 데에 4개월이나 걸렸어요.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그들보다 빨리 작업을 한 셈이죠. 많은 밴드들이 2곡 정도의 돋보이는 트랙들 외에 나머지는 적당히 그저 그런 곡들로 채워 넣곤 하죠. 우리도 그렇게 만들 수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이번 앨범에서 원했던 것은 수록된 11곡 모두를 싱글로 발매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드는 것이었죠. 그러다 보니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었구요. 하지만, 물론 저도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오래 걸렸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다음 번에는 앨범을 좀 더 일찍 발표하고 싶기도 하구요.
래리 맞아요. 장기간의 투어를 마치고 다시 스투디오 작업에 들어가면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게다가 스투디오에서도 타이밍을 기다려야 할 때가 있어요. 어떤 곡들은 쉽게 나오지만, 그렇지 않은 곡들도 있기 마련이니까 고치고 다듬을 시간이 필요하게 되는 거죠. 이번 앨범에서도 많은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녹음에 임했고, 계속해서 다시 연주해보곤 했어요. 이번 앨범에 많은 시간을 들인 이유는 모든 곡들을 제대로 다듬고 완성해서 11곡의 A트랙들을 배치해 넣고자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다음 번에는 좀 더 신속하게 작업을 진행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박 새 앨범의 타이틀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는 U2의 지난 작품들에 비해 이례적으로 긴 편인데요, 어떤 특별한 뜻이라도 담겨 있기 때문인가요?
보노 래리가 화난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타이틀을 티셔츠 사이즈에 넣을 수가 없었거든요. (웃음) 밴드와 관계된 모든 상품들을 래리가 담당하고 있거든요. (래리를 향해) 그렇지 않아? 너를 설득하는데 시간이 걸렸잖아.
래리 그래요. [Pop]앨범은 제목이 근사하잖아요. 티셔츠에 새겨 넣어도 멋있고, 그런데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는 익숙하게 들리지도 않고 좀 그렇잖아요, 원래는 앨범 수록곡의 가사 중 일부인데...
박 "Walk On"이라는 곡이죠?
보노 그래요. 그 노랫말 가운데서 타이틀을 따왔죠.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 꼭 필요한,없어서는 안될 것들에 관한 내용이죠. 말하자면, 화재가 발생했을 때 옆에 끼고 나올 그런 것들 말이예요. 그것은 인생에도, 음악에도 모두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없으면 살 수 없는 그런 것들 있잖아요?
박 그렇군요. 이번 앨범의 사운드는 초기로 회귀하여, 보다 심플하고 로큰롤의 근본에 충실한 것으로 들립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보노 앨범의 몇몇 곡들에서 엣지의 연주는 '82, '84년의 그것처럼 들려요. 사실, 80년대는 전 세계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탐욕 투성이었고, 팝 음악은 끔찍했죠. 당시 우리는 록 음악을 통해 그런 것들을 초월하려 했었는데, 엣지의 기타가 바로 그런 역할을 했죠. 반면에 90년대에 들어서 우리는 좀 더 언더그라운드 지향적인 노선을 택했습니다. 주제도 내향적인 것으로 변했고요. 90년대에 우리가 던진 돌들은 우리 자신을 겨냥한 것이었어요. 결국, 두 개의 각기 다른 그림을 그려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새 앨범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는 그동안 줄곧 우리 작업의 일부분이었던 어두움(혹은 침울함)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즐거움을 갖도록 노력했습니다. 분위기를 상승시키려 했었죠. 물론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밴드가 한 번 발동이 걸리면 그 이상 좋은 건 없죠. 엣지는 바로 그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 이전과 비슷한 사운드를 만들어냈습니다.물론 모든 곡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는 완전히 새롭습니다. 소울풀한 곡들도 있고요, "Stuck In A Moment You Can't Get Out Of"는 거의 필라델피아 소울이고, "Little While"은 알 그린(Al Green)풍이죠. 또, "Grace"는 트립합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곡들은 모두 새로운 사운드죠.
박 그러고보면 이번 앨범은 전작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군요.
보노 네, 굉장히 새로운 느낌이에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 앨범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지도 확신이 없었어요. 보다 더 테크노적인 것을 원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지난 수년 동안 U2의 그런 모습에 익숙해져 왔으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통상적인 사운드와 아이디어에 이미 질려버렸어요. 결국, 21세기의 음악은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멜로디와 진실된 노랫말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죠. 너무도 복잡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또 하루를 버티는 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처럼 말이죠.
박 그렇다면 [Achtung Baby]에서부터 [Pop]까지, 지난 세 장의 앨범에서 보여준 일렉트로닉 사운드 지향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래리 우리를 따르고 우리로 하여금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도록 밑받침해주는 관객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싶었고, 그런 기회가 필요하기도 했죠. 우리는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이번 앨범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실험입니다. 다시 밴드를 한 방에 모이게 한 거죠. 그건 매우 익숙해서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할 것은 아닙니다만... 사실, 저는 지난 앨범들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것도 시도할 겁니다. 이번 앨범에서는 곡 자체에 비중을 많이 두었고,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물론, 이전의 다른 앨범들에서도 배운게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발전해 가는 거죠.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게 기뻐요. 대부분의 다른 밴드들은 그렇지 못하니까요. 우리는 예전의 우리 자신을 반복하는 것에는 익숙치 않습니다. 그런 적도 없었고요.
보노 앞에서 이번 앨범을 만드는데 1년 반이 걸렸다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상 20년이 걸린 셈입니다. 처음 음악을 시작한 이후 거쳐온 각각의 시대와 아이디어의 산물이라는 기분이 듭니다.
이상은 하늘을 향하고, 이성은 땅에 머물길..
박 상투적인 질문입니다만, 이번 앨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은 어떤 곡들인가요?
보노 그렇게 쓸데없는 질문은 아닙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물어보니까 결국 그들과 같은 답을 얻을 수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Elevation"이예요. 이 곡을 라이브로 연주하면서 관객들과 교감하는 게 눈에 선하기 때문입니다.
래리 그런데, 그건 이번 앨범 전체가 다 그래요. 연주를 하는 즉시 느낄 수 있는 그런 앨범이라고 생각해요. 6개월간의 투어를 해가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그런 앨범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수록곡들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곡을 만들고 녹음과 재녹음 과정을 거치면서 이미 다 파악을 했죠. 아무튼..그 질문에 대한 답은 "Elevation"입니다.
보노 지금 스투디오에서 노래를 한다면 "Stuck In A Moment You Can't Get Out Of"를 꼽겠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제 친구에 관한 곡으로, 저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고 감정을 북받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박 저는 개인적으로 "Kite"와 "Grace"가 마음에 들던데... 물론 "Elevation"도 좋았고요. 그 밖의 다른 곡들은 어떻습니까?
보노 흥미롭군요. "Kite"가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Kite"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것에 관한 곡인데, 뒷 부분의 가사가 좋아요. The last of the rock stars, When hop hop drove the big cars..
박 Roof top to the basement...
보노 맞아요 그 부분이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Kite", 그리고 "Stuck In A Moment You Can't Get Out Of"도 좋아요.
박 "Kite"에서는 당신의 보컬이 특히 인상적이던데...
보노 몇 년 동안 잃어버린 것만 같았던 제 목소리를 되찾았어요. 지난 얼마 동안은 제 머리 속에 그리던 그런 방식으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번 앨범에선 제 목소리가 다시 돌아왔고, 특히 "Kite"에서는 보컬리스트로서 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기도 했죠. 이상은 하늘을 향하고, 이성은 땅에 머물길 원한다는 걸 말이죠.
박 이번 앨범에서는 엣지의 연주도 오랜만에 아주 인상적인 것을 보여주었다고 느껴지던데, 그가 이 자리에 없어서...
보노 사실은, 제가 이 앨범의 거의 모든 기타 연주를 했는데요...
박 네?
보노 (웃음) 농담입니다. 그러고 싶었지만.
래리 그가 여기 없으니까 마음대로 얘기해도 되잖아.
보노 엣지는 지난 20년 사이에 등장한 가장 중요한 기타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힘들어요. 미국에서 기타는 마치 총과 같습니다. 숭배되는 악기입니다. 그래서들 기타에 집착을 하죠. 하지만 카를로스 산타나(Carlos Santana) 이후로는 기타를 가지고 새로운 것을 보여준 사람이 아마 없었죠. 그러다가 엣지가 등장해서 기타 연주를 새롭게 접근하도록 만들었죠.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색깔을 선보이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엣지에게 기타 연주를 하도록 만드는 게 너무 힘들어요. 항상 키보드나 컴퓨터 음악을 하고 싶어했죠. 아마도 기타 연주가 그에겐 신성시되는 그런 건가봐요. 그래서 그가 연주를 하도록 만들기 위해 제가 앞에서 연주를 해야 했죠. 그러면 그제서야 그가 저를 말리면서 자신이 하겠다고 하죠. 아무튼, 그는 대단히 뛰어난,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기타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U2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그건 인정할 거에요. 그런 연주자와 같은 밴드에 있다는 게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죠.
박 동감입니다. 새 앨범의 첫 싱글인 "Beautiful Day"의 비디오 클립은 공항에서 촬영되었는데, 제작 중에 어떤 에피소드는 없었나요?
래리 공항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박 어느 공항이었죠?
래리 파리의 '찰스 드골 공항'이었어요. 더블린과 프랑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우리들에게는 중간 지점이 되는 셈이죠. 런던을 거쳐서 너무 힘들고 해서, 찰스 드골 공항을 자주 이용하죠.
보노 오래 전부터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국을 피하기 위해서 프랑스로 많이 갔죠. 우리에게 파리는 특별한 곳이에요. 많은 노랫말들이 파리에서 만들어졌고... 찰스 드골 공항은 폴 앤드류라는 천재적인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마치 미래의 건축물처럼 느껴지죠. 비디오 촬영은 재미있었어요. 단순한 록 비디오에요. 구체적인 컨셉같은 게 없이, 그냥 연주하는 모습을 위주로 만들어진 '록 밴드의 록 비디오'죠. 한 가지 후회되는 게 있다면, 선글래스를 쓰고 찍었다는 점이에요. 비디오를 보다보면 가끔씩 너무 록 스타같은 이미지라고 느껴져서 말이죠.
치유를 위해 직면해야 하는 상처같은 노래, Peace On Earth
박 수록곡 가운데 하나인 "Peace On Earth"는 제목만으로도 여러 가지를 상기시키는데, 어떻게 만들어진 곡인가요?
보노 "Peace On Earth"는 북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인 오마에서 발생했던 폭탄 테러 사건에서 영감을 받고 만든 곡입니다. 당시 사고로 29명이 죽고, 200여명이 부상을 당했죠. 북아일랜드와 우리의 고향인 (남)아일랜드간의 평화협상 과정을 방해하려 했던 폭탄 테러였죠. 아일랜드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사건이었죠. 서로에 대해 그리고, 신에 대해 좌절하게 했고, 미래에 대한 절망을 주었습니다. 바로 그 사건에 대해서 썼습니다. 또, 제가 자라면서 주위에서 봐왔던 폭력들에 대해서도 썼습니다. 폭력에 희생되지 않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어려서부터 더블린 북부 지역에 살면서 보아왔던 많은 폭력적인 것들에 대한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
박 그렇다면 곡의 가사 중에 언급되는 이름들은 혹시 당시 사건의 희생자들인가요?
보노 네, 실제 인물들입니다. 다들 음악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었죠. 션, 줄리아, 브리다...다들 17세-20세의 청소년들이었죠. 그러고 보니 제 기억을 일깨워 주셨는데 (래리를 보며)그 유가족들에게 이 곡을 먼저 들려주어야겠어. 라디오를 통해 듣기 전에 우리가 직접 들려줘야 할 것 같아. (다시 고개를 돌리며) 왜냐면 그들은 실존 인물들이었고, 가족들이었거든요. 당시 사건은 사람이 붐비는 토요일, 시장에서 벌어졌습니다. 테러리스트가 도망을 친 후 경찰들이 사람들을 대피시켰는데, 그게 오히려 폭탄이 설치된 쪽이었어요. 사람들이 폭탄이 있는 쪽으로 대피한 게 돼버렸죠.
박 그게 정말인가요?
보노 네, 사실이에요. 경찰들도 폭탄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으니까요. 정말 끔찍한 순간이었죠. 아일랜드 사람들은 그 사건을 잊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과거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 아픈 과거와 직면해야 할 때도 있어요. 이 곡이 상처를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에겐 도움이 되었거든요.
박 "Grace"라는 곡은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던데, 타이틀은 상당히 중의적인 뜻으로 사용된 것 같더군요.
보노 "Grace"란 말은 그저 평범한 단어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커다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죠. 우리는 운명에 의해 작동되는 세계에 살고 있어요. 모든 종교가 그렇게 얘기하고 있죠. "Grace"는 그와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을 운명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을 "Grace"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남자보다는 여자에게서, 예컨대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에게서 볼 수 있는 신성함, 새 청바지를 입고 거리를 거니는 십대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매력도 역시 "Grace"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인 셈이죠.
음악은 내 인생의 반영
박 이제 앨범 제작에 관해서도 얘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이번 앨범은 다시 한 번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와 다니엘 라노아(Daniel Lanois)를 불러들여 작업을 했는데...
래리 다시 그들과 함께 일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앨범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들을 필요로 했어요. 낄 때와 빠질 때를 분명히 잘 아는 사람들 말이죠. 그들은 몇 주 동안 와서 녹음하고 몇 주 동안은 사라지고 그랬는데, 일하기에 좋은 방법이었죠.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이어서 앨범을 만들기에 좋은 여건이 되었습니다.
박 그들이 다른 프로듀서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래리 그동안 우리는 스티브 릴리화이트(Steve Lilywhite)나 플러드(Flood)같은 유능한 프로듀서들과 함께 작업을 해왔습니다. 모두 뛰어난 사람들이죠. 중요한 것은, 다니엘과 브라이언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걸 가져다 준다는 겁니다. 다니엘은 그 자신이 기타리스트입니다. 브라이언은 아이디어 메이커죠. 스투디오에 들어와서는 아이디어, 그것도 아주 엉뚱한 아이디어를 내놓곤 하는데,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면 그는 다시 방향을 틀곤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죠. 그들은 팝이나 록을 완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밖의 다른 것들을 이해하고 있죠. 서로 밀고 당기는 게 계속되는 작업 환경이었고, 바로 그런 점에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 그렇게 밀고 당기며 작업하는 동안 그들과의 사이에 긴장감은 없었나요? 녹음할 곡을 선택하거나 할 때 말이죠.
래리 항상 긴장감이 있었죠.
보노 U2와 앨범을 녹음하는 일은 힘든 작업입니다. 멤버들 모두가 각자 분명한 주관을 갖고 있는 밴드니까요. 브라이언 이노와 다니엘 라노아, 두 사람은 모두 뛰어난 프로듀서들입니다. 두 사람은 지난 20여년 사이에 만들어진 가장 훌륭한 작품들에 속하는 앨범들을 프로듀스해 왔습니다. 브라이언은 록시 뮤직(Roxy Music), 데이빗 보위(David Bowie), 토킹 헤즈(Talking Heads)등을, 다니엘은 밥 딜런(Bob Dylan)과 윌리 넬슨(Willie Nelon) 등의 작품을 담당했었죠. 하지만 두 사람은 정반대의 스타일을 갖고 있어요. 다니엘은 U2의 영혼과도 같은 사람이에요. 그는 우리가 만든 노래가 그의 감성을 자극시키길 원하죠. 반면에, 브라이언은 이성적으로 진보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상반된 스타일의 극과 극 사이 어딘가에 우리 U2가 존재하는 겁니다.
박 U2는 확고한 정치적 태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보노 저는 정치인들이 누군지 관심도 없고, 그들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 잘 보이려기 보다는 당당히 맞서죠.
박 반전, 인권 옹호, 환경 문제 등에 관한 다양한 사회적 활동도 많이 하고 있죠.
보노 음악은 그 모든 것들에 관한 겁니다. 그래야 하구요. 음악은 자신의 성, 영혼, 정치적 관점, 가족 생활 등 모든 것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음악이 인생이라면, 자신의 인생을 노래해야겠죠.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런 겁니다. 아일랜드는 수 년동안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 놓여 있었어요. 한국과 마찬가지로, 남과 북이 나뉘어져 있었죠.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타협을 통해서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한국도 지금은 남과 북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요. 한국이 잘 되길 빕니다. 우리는 아일랜드인으로써, 아일랜드 밴드로써 분단의 고통을 잘 알고 있거든요.
박 그래서 제 생각에는 당신들이야말로 한국에서 공연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밴드이고, 또 남북간의 대화가 재개된 지금이 그 가장 좋은 시기라고 생각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노 아직 약속할 수는 없지만, 지금 노력하는 중입니다. 내년쯤에 한국에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가면 꼭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어요. "One"이라는 곡입니다. 한국에 가게 되면 그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박 올 초 벌어진 '유로2000'축구대회 중계에서 당신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 걸 본 기억이 있습니다. 2002년에는 월드컵이 한국에서 개최될텐데, 그 때 한국을 방문할 계획은 없습니까? 바이올리니스트 나이젤 케네디(Nigel Kennedy)는 월드컵 주요 경기 티켓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한국에서 공연을 갖기로 했다고 하거든요.
보노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군요. (농담조로) 우리도 거래를 해봐야겠는데요. (웃음) 아니면 주제곡을 만들든지...
래리 일본과 동시에 개최하죠?
박 네, 그래요.
래리 굉장히 이례적인 일인데... 안 그래요?
박 맞습니다. 최초의 일입니다.
래리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항상 긴장 속에 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두 나라가 동시에 월드컵을 개최하게 된 건 정말 훌륭한 일인 것 같아요.
보노 저도 그 때 가보고 싶어요.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한국에서 월드컵을 보는 것보다, 우리 자신이 공연하는 것을 봤으면 좋겠어요.
박 공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새 앨범 발매를 앞두고 호텔 옥상에서 공연을 한 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였나요?
래리 존, 폴, 조지, 링고. (웃음)
보노 비틀스가 옥상에서 공연을 가진 이후, 모든 록 밴드들이 그걸 해보고 싶어했죠. 우리는 야외에서 공연하는 걸 좋아해요. 우리의 음악에는 지붕이 없으니까요. 사실, 예전에 L.A.의 한 건물 옥상에서 "Where The Streets Has No Name"을 부르다가 경찰에게 쫓겨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 소유의 호텔에서 했기때문에 문제가 없었죠.
박 재미있었나요?
보노 네, 재미있었죠. 거의 폭풍우가 몰아칠 듯한 날씨였지만 잘 해냈어요.
이 때 매니저가 들어와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고 마지막 질문을 종용했다. 남아 있는 질문들 가운데 몇 가지를 서둘러 골라내야 했다.
박 영화 [Million Dollar Hotel]에 관해서 얘기하려고 하는데... 지금 현재 빔 벤더스(Wim Wenders)가 한국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여기 (신문을 건네며) 한국 신문에 빔 벤더스의 인터뷰 기사가 나기도 했거든요.
보노 (신문을 받아들고) 고맙습니다. (신문에 난 빔 벤더스의 사진을 가리키며) 진짜 대단한 사람입니다. 천재적이죠. 제 첫 영화를 그와 함께 할 수 있어서 행운입니다.
박 당신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냈다죠?
보노 빔 벤더스와 함께 직접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U2가 음악을 담당했고, 잠깐 출연도 했죠.
박 [Million Dollar Hotel]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곡 "Ground Beneath Her Feet"은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가 가사를 썼다고 하죠?
보노 네, 예전에 살만 루시디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자유와 권리는 소설뿐만 아니라 로큰롤에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얘기하더군요.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피할 때였는데도, 우리는 그를 지지했어요. 그래서 그는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되었고, 자신이 쓴 "Ground Beneath Her Feet"에 곡을 붙여 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죠. 빔 벤더스가 그 곡에 대해 만든 비디오도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보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몇 가지 질문이 더 남아 있었지만, 매니저의 독촉으로 여기서 인터뷰를 끝내야만 했다. 하긴 또 다른 인터뷰가 멤버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우리의 사정만을 내세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박 이제 마칠 시간이 되었군요.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보노 오히려 저희가 감사하죠. 맨체스터까지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래리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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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U2's Beautiful New Day 1 by 다시
U2's Beautiful New Day
Finding studio magic again with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U2 prepares to hit road with renewed vigor, Bono says.
By Brain Hiatt from sonicnet.com
Bono는 자기가 내는 소리에 만족스러워 하지 않는다. 그래서 U2의 리드싱어는 인터뷰하는 사람에게 몇 분 기다리라고 요청한 뒤, 전세계에서 가장 지나치게 자격이 충분한 전화기 수리공을 호출했다. 수리공은 Pacific Palisades에 방금 전 그와 함께 도착했던 것이다. "Edge, 여기 전화기에서 약간 쉿소리가 나는데", Bono는 말했다. U2의 기타리스트는 스크류드라이버로 몇 번 돌려서 그 소음을 없앴다. "우린 우릴 위해 일하는 과학자를 갖고 있어요"라고 Bono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Edge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싱어의 설명이 계속되면서 몇 가지 음향문제는 그리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1997년에 있었던 일렉트로닉이 가득찬 Pop과 화려한 PopMart 투어에 뒤이어 - 이 두가지 모두 미국에서는 그다시 환영을 받지 못했다 - U2는 댄스뮤직 사운드를 뒤로 한 채 Bono가 말하는 "primary colors of rock (록 본연의 색)"으로 채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80년 Boy에서 1998년 Rattle & Hum을 거치면서 U2는 그런 본연의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전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밴드 중 하나가 되었다; Edge의 에코 기타 사운드, Larry Mullen의 군악대식 드럼과 Adam Clayton의 미니멀리스트 베이스가 그것이다.
그러한 본연의 색은 1991년 Achtung Baby와 1993년 Zooropa와 함께 변화했다. 밴드는 찬가 스타일의 열정에서 일렉트로닉이 강조된 아이러니로 옮겨간 것이다.
밴드가 '쓸만한 소음'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고 있을 즈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위대한 록 레코드를 만든다는 희망은 증발해 버렸다고 Bono는 말한다. 대신 10월 31일 발매된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는 전염성 강하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준비가 된 매력적인 소울 사운드로 가득찬 곡들로 이루어진 앨범이 되었다.
Stuck in a Moment You Can't Get Out Of나 In a Little While 같은 곡에서, 이들은 약간의 싱코페이션을 적용한 드럼과 Edge의 멜로딕한 리듬기타가 주가 되어, 소울의 개척자인 Curtis Mayfield를 잇는 가스펠 풍의 R&B 사운드로 방향을 돌렸다.
Bono는 말한다. "우린 우리가 만들고 있던 곡들에 지루해졌어요. 그래서 우리가 취해야 했던 방법은 감정적으로 매우 본연의 상태로 가는 것이었죠. 제가 생각하기에 그게 바로 소울 뮤직이라고 부를 수 있을거에요. 숨기기보다는 드러내는 그런 곳 말이죠."
Bono는 최근 TV 연주에서 지난 90년대 투어에서 보여줬던 냉담한 록스타의 이미지를 버렸다. 수년간 써왔던 얼굴을 다 덮던 썬글래스조차 벗었다. 그는 또한 지난 2년간 극빈국들이 부국들에게 지고 있는 대량 부채의 탕감을 납득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자선단체인 Jubilee 2000를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 40년을 주기로 빚을 탕감해주고 노예들을 풀어주었다는 성경 속의 개념인 Jubilee는 U2의 음악에서도 울려 퍼진다.
Bono는 "이건 오래된 유대교의 아이디어인데 제 생각엔 구원이에요. 구원은 우리가 언제나 관심을 가져왔던 생각이죠."라고 말한다.
sonicnet (이하 S): Rattle & Hum 이후, Achtung Baby 전에 U2가 멀리 떠나 스스로를 재개발한다고 말했었죠. 그리고 그게 바로 당신이 마침내 끝을 낸 것이죠. 그로부터 10여년 정도가 지난 후, Pop에서 이번 앨범로의 음악적인 변화와 정신적인 변화가 함께 수반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Bono (이하 B): 스스로 재미를 지속해왔다고 생각해요. 지난 수년간 우리가 취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우리의 본질로부터 좀 떨어져서 뭘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사람들은 물에 빠져서 떠오르려고 노력할 때에야 자신이 누군지 발견하게 된다고 생각해요(웃음). 그리고 첫 앨범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레코딩은 바로 그런 식이었어요.
그래서 우린 이 레코드에 Pop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대량 생산과 대중 매체에 흥분하게 되었죠. DJ문화와 힙합이 있는 흑인 음악에 대해 흥분했어요. 백인의 록앤롤은 굉장히, 굉장히 지루해졌다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우린 영국과 유럽의 클럽 문화에 우리를 내던진거에요. 그리고는 머랄까 거기에 정말로 빠져서 워싱턴의 한 호텔 지하에 있는 오래된 볼룸에서 리허설 할 때야 깨어났죠.
우린 트럭의 기어를 잡을 수가 없었어요. 벌써 길위를 달리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구식 Vox AC-30 (기타앰프)하고 장난감 드럼 키트, 웨딩밴드 같은 P.A.를 마련했어요. 그리곤 지하실에서 연습 연주를 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Pop 당시 우리와 함께 작업했고 PopMart 투어 때도 함께 했던 DJ Howie B가 방에 들어왔는데 머리를 뱅뱅 돌리고 있더군요. "지금 만들고 있는 사운드가 뭐에요?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린 이렇게 말했죠. "Howie, 이건 록밴드야" 그러자, 그는 "이런걸 들어본 적이 없는데. 꼭 이런 레코드를 만들도록 해요." 그래서 우리가 말했죠. " 당신없이 말이야?" 그러자, "아니면 나같은 사람하고요."라고 하더군요.
그는 정말 우리를 방 안에 가두고 록 음악 본연의 색깔로 음악을 만들도록 만든 사람이에요. 그리고, 사실은 Eno와 Dan Lanois한데서 도움을 받았어요. 비범한 사람들이죠. 다른 이유에서 우리도 역시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죠. 스튜디오 안에서는 서로 얘기를 할 필요가 없어요.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바로 앞에 닥친 일을 잘 진행해 나갈 수 있는거죠: 21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록 밴드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보는 것이죠. 쓸만한 소음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제 생각에 우리가 가지고 돌아온 것은 이 생각이 아마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에요. 지금 록밴드를 쓸만하게 만들만한 유일한 것은 아마 그 록 밴드가 시간을 초월하는 그런 곡을 쓸 수 있느냐 마느냐 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그게 우리가 이번 앨범에 접근한 방식이에요.
S: 록 앨범이라는 거에 덧붙여서, 록 앨범이라고는 해도 제가 느끼기에 이 앨범은 실제로 소울과 팝 앨범인데요.
B: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이상한 일이에요. 우린 이제서야 언론의 힘을 깨닫고 있거든요. 사람들은 이게 록 앨범이라고 말하죠. 근원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말하죠. Beautiful Day의 도입 소절은 드럼머신과 스트링 루프인데도 말에요. 그리고, 앨범의 대부분이 소울 레코드와 비슷하고 우리에겐 새롭고 신선한 영역이에요, Stuck in a Moment You Can't Get Out Of나 In a Little While같은 곡처럼 말이죠. 이거와 비슷한 건 해본 적이 없죠. 그런데 사람들은 보도자료를 너무 좋아해서 사람들이 앨범을 듣고 있을 때조차 보도자료가 더 큰 소리를 내죠.
S: 어떻게 해서 그렇게 소울 중심의 앨범이 되었나요?
B: 곡을 만들만한, 정말 좋은 곡을 만들만한 곳에 도달하는 기술을 발견했거든요. 하지만 마법같은 건 없어요, 그 뿐이에요. 아마 제가 얘기했던 그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죠,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온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아주 특별한 것을 찾아내는 것이죠. 그리고 나선 우리가 만들던 곡들이 지겨워졌어요. 감정적으로 굉장히 근본으로 갈 수 밖에 없었죠. 저는 그런걸 바로 소울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감추기보다는 드러내는 것이죠.
S: "Kite"에서는 "새로운 매체가 각광을 받고 있고, 힙합이 큰 차를 몰고 다니는 그런 시대에 사는 최후의 록스타(the last of the rock stars when hip-hop drove the big cars/ in the time when new media/ was the big idea)"가 되는 것에 대해 노래했죠. 힙합과 랩록, 틴팝 시대에 거대한 록 밴드 일원으로서의 느낌을 요약한다면 얼마나 그 표현에 가까운가요?
B: 저는 그냥 일종의 날짜를 넣고 싶었어요. 일기를 쓸 때 하는 것처럼요. 그리고 록 평론가들을 화나게 할지도 모를 미끼이기도 하죠. 저는 항상 U2의 역할 중 하나라고 느껴요, 사람들의 인생을 노래하는 것뿐 아니라 가끔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거죠.(웃음) "최후의 록스타(the last of the rock stars)"는 뭘 의미하는 거죠?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해당될 수 있다고 봐요.
S: 지난 1년 반, 아니면 더 오랜 기간을 Jubilee 2000과 함께 보냈는데요. 그런 활동이 이번 앨범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만약 그런 부분이 있다면 말이죠?
B: 아마 훨씬 더 일찍 앨범을 발매했을지도 몰라요.(웃음) 그 한가지뿐이에요. 하지만, Jubilee 개념은 나에게 특별한 것이죠. 그건 오래된 유대교식인데 구원이죠. 구원은 우리가 항상 관심있어 왔던 것이고,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다는 개념이에요. 그리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Jubillee 2000과 함께 다뤘던 개념이죠. 하지만, 재시작한다는 개념에서는, 바로 이번 앨범이 의미하는 것이죠. 우리에겐 다시 시작하는 것이란 거죠. Jubilee 2000의 개념은 하루를 1달러도 안되는 돈으로 살아가는 수십억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시작이죠; 그게 우리가 자동차 범퍼에 붙였던 광고 스티커에요. 그리고 우리도 똑같은 평행선 상에 있었던 같아요; 새로운 시작이었죠.
우리가 바로 원했던 것이었어요. 우린 다시 시작하고 싶어했고 우리가 한 것은 모두 다 과거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었고 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처럼 되지 않는 것이었죠. 당시에는 그들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때였어요. 대부분의 시간을 웨일즈의 양어장에서 보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거에요. 그들은 기타 솔로와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레코딩 스튜디오에 들어갔죠. 그게 제 머리속을 떠나지 않아요.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말이죠.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아요. (웃음) 아마 다음번이 될 수 있겠죠. 컨셉 앨범의 때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린 그냥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요.
S: 이번 앨범. 이번 투어 이후에 U2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있나요?
B: (질문을 잘못 이해하고서) 글쎄요. 무언가 이루고 싶고 지금은 아일랜드인이 정복(Irish Invasion)하는 시대라고 생각해요. 록 음악이 바보같은 팝 차트를 정복할 수 있는지 보고 싶어요. 그게 정말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죠. 우리로 말하자면, 우린 Rolling Stones에서 Beatles를 거쳐 Nirvana에 이르는 밴드들이 만들어 냈고, 3분 30초나 4분 안에 걸러질 수 있었던, 위대한 록앤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어요. 이 앨범은 우리가 프로그레시브 록 앨범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죠. 이 앨범은 팝차트를 광고 대행사들 손에 맡기지 말자, 또 우리가 라디오 전파를 탈 수 있는지 두고 보자, 라는 것이에요. 그냥 연주만 할 줄 아는게 아니라 실제로 라디오를 타고 MTV를 탈 수 있는지 두고 보자는 것이죠. 제 생각에 우린 그렇게 할 거에요. 라디오 프로그래머들이 "Beautiful Day"에게는 정말 잘 해주고 있죠. 앨범을 들어보면 "Beautiful Day"보다 훨씬 훌륭한 곡들이 더 많이 있어요.
S: "Beautiful Day"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싱글이나 앨범이나 왜 그 곡으로 시작을 했는지요?
B: 그 곡은 낙천적이에요. 모든걸 잃을 수 있지만, 여자친구나 집을 잃을 수도 있고 모든게 엉망이 되가는 거죠, 하지만 어쨌든지 자신을 발견한다는 상승하는 개념(an up idea)이에요. 그 곡에 등장하는 인물은, 절대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 그런 사람이에요(웃음). 약간은 하이쿠(haiku) 혹은 선(禪)의 개념이기도 하지만, 멋진 개념이에요. 낙천적이죠. 저속하지 않은 상승 분위기의 음악을 만드는 것은 상당히 힘들어요. 검은색으로 칠해 버리는게 훨씬 쉽죠.
S: 그러면 당신은 자동적으로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게 되는데요.
B: 글쎄요, 네, 록 밴드에서 노여움을 표출하는 건 쉽죠. 더 만들기 쉬운 감정이에요. 그렇기는 하지만, 위대한 록앤롤은 근본적으로는 순수한 기쁨 같은 걸 담고 있죠.
S: "Beautiful Day"는 특별히 만드는데 노력을 많이 기울였나요 아니면 그런대로 쉽게 나왔나요?
B: 멋진 즉흥연주 도중에 굉장히 빨리 나왔어요. 하지만, 그걸 붙잡는데는, 물고기를 보트 안으로 끌어 올리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어요. 왜냐면, 실제로는 곡이 3개 있거든요. 코러스나 분위기, 연주에서도 절이 완전히 다른 곡이죠. 중간 8소절이 너무 긴데 정말 그걸 없앨 수가 없었어요. 없애면 안되었죠. 뭘 하는지도 확실치 않더군요(웃음). 하지만, 대중음악에 참치어선(tuna fleet)을 넣은게 굉장히 자랑스러워요. "Tuna Fleet"은 우주 비행사가 궤도에서 바라본 지구를 묘사한 부분에 들어있어요.
S: "Bedouin fires at night"...은,
B: 네, 다 그런 것들이죠. 그냥 해보려고 했어요. 아주 어렵게 따온 내분의 한 장면이라고 할까요, (거친 히피같은 목소리로) 우주에서 보이는 한 장면이에요(웃음).
S: 제 생각에 "New York"에는 Lou Reed와 Frank Sinatra에 대한 존경심이 담겨있는데요. 이 곡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B: Lou Reed에 관한 소절이 있었는데 그건 쓰지 않았고, Frank Sinatra에 관한 소절도 있었어요(역시 쓰지 않았죠). Lou Reed 앨범 중 New York이 있는데 거기 수록된 "Beginning of a Great Adventure"에 제 이름이 언급되었어요. 저는 더블린에 James Joyce가 있는 것처럼 뉴욕에는 Lou Reed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1절에서 약간은 그를 재현할 수 밖에 없었던 거고 그가 기뻐하면 좋겠어요. 그런데, 몇 주 전에 그를 만났는데 그 얘긴 안했죠. 두번 녹음하면서 굉장히 많은 가사들을 그 부분에 썼죠. 그리곤 작년 여름 뉴욕에서 지낼 때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일종의 짜집기(콜라주)를 했어요.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게 바탕이 되었긴 해요. 그 때가 104 F.(40 C.)일 때였는데, 평온한 삶을 망치려고 열성인 사람들을 봤죠.
S: "Walk On"은 앨범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듯한 또 다른 트랙인데요. 앨범 타이틀을 그 가사에서 따왔네요.
B: 그 곡은 버어마 지도자인 아웅산수키 여사와 버어마의 자유선거를 위한 그녀의 노력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Oxford 교수라는 안정된 가정을 뒤로 한 채 가족과 아들과 남편을 헤어져 동포를 위해 옳은 일을 하려고 갔죠. 그건 20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용기있는 행동 중 하나에요. 그리고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어요. 그녀의 생활은 지금도 가택감금 상태이죠. 모두들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많이들 걱정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그녀의 가족들의 시각에서 , 아들이나 남편의 시각에서 쓰기 시작했는데, 결국엔 약간 추상적으로 만들었죠. 정당한 이유로 하나의 관계를 떠나야 하는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 노래가 되도록 말이죠.
S: 이번 앨범의 투어 계획은 어떤 것인가요? 체육관에서 할 예정이고 군더더기도 없을 것이고, 아마 기간도 짧을 거라고 알고 있는데요. 투어에 대해 다른 얘기거리가 있나요?
B: 지난 수년동안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을 겪어오면서, 우리들 사이엔 일종의 결속 같은게 있어요. 우리가 연주할 때는 방 안의 분자들이 다른 속도로 진동하기 시작하죠. 앨범에 담아낸 불가사의한 힘을 여전히 우리가 가지고 있고 그게 얼마나 오래 지속될 지는 모르죠. 하지만, 이번에는 무대에 선다는 것이 우리 네 사람에게는 정말 특별한 일이 될 거에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한동안 밴드에 속해 있으면서 이런 힘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지금처럼 계속 연주할 수 있다면, 이번 여름까지 이런 기분을 간직할 수 있었으면 해요. 3월, 4월, 5월에 모두를 볼 수 있을 때까지 말이에요.
지난 주에는 파리의 한 클럽에서 500명 앞에서 연주를 했어요. 지난 18년 동안 그런 식으로 해 본적이 없었고, 몇 가지 기술적인 면에서 어려운 점이 있어서 약간 망쳤어요. 어떤 면에선 역시 대단했죠. 마법같은 무언가가 있었죠. 그리고, 바로 그 단어가, 우리가 음악에서 원하는 게 바로 그 '마력'이에요. 그게 제가 일전에 말했던 거죠. 기술을 원하는 게 아니고 사실은 마력을 원한다는 것이죠. 멀리 떨어지는 것이죠;초월(transcendence), 비약(elevation), 수직상승(liftoff) 말이에요. Edge가 더블린에서 있었던 Radiohead 공연에 갔었는데, 전 갈 수가 없었죠. 그 공연에서 그런 마력이 있는 걸 느꼈다고 하더군요.
S: (Elevation의 일부를 응용하면서) the goal is elevation (목표는 비약이야).
B: 네, 바로 그겁니다. 바로 그거죠. 그게 목표에요. the goal is elevation이죠. 이번 공연 티셔츠는 그게 되야 해요. 실제로 지금 그럴지도 몰라요(웃음)
S: 이번 앨범과 공연을 지나고 보면, U2의 미래는 어떨거라고 생각하죠?
B: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머리 속에 멜로디가 떠오른채 깨어나곤 하는데 더 만들 곡이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다음 앨범까지 죽 보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더 이상은 알 수가 없어요.
S: 솔로 앨범 낼 생각을 한 적이 있나요?
B: 실수한 거라고 느낄거에요.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날 위해 일하는 그런 곳에 있다는 생각 자체가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져요. 과대망상증같은 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하지만, 우린 그런 부분을 서로 억제시켜 왔어요. 우리 중 한 명이 혼자서 따로 행동하는 것, 세상이 그걸 필요로 하지 않을 거란 건 확실해요.
서로 걷어차기도 하면서 굉장히 많이 웃었어요. 굉장히 많이 웃었어요. 탈의실에 혼자서 앉아 있는데 모두가 다 보스라고 부른다면, 정말 괴로울 거라고 생각해요. 보스가 아닌데도 말이죠. 물론, Bruce (Springsteen)은 예외죠.
S: 그리고 또, 어떤 시점에서 U2가 해체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데요. 혹은 그렇게 생각하기 쉬울 수도 있고 말이죠.
B: 네, 동감이에요. 내 말은, 우린 확실히 해체하지는 않을 거란 거죠. 우린 해체가 진행되고 있다곤 생각지 않아요. 그런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도움이 안된다는 거죠. 전 모든 레코드가 그만이 지닌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의미에서는 앨범을 만들려고 스튜디오에 들어갈 때마다 우린 밴드를 해체했다가 다시 재결성하죠. 그래서, 그게 얼마나 오래 지속될 지는 모르겠어요. 지금은 노래하는 게 너무 좋습니다. 이번 앨범에서 내 목소리를 찾은거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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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인터뷰-롤링스톤지
유투, 연말을 겨냥하며...
"예측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유투의 베이시스트 아담 클레이튼이 슬며시 웃으며 말을 꺼냈다. "멜로디(Tune)가 여섯 개쯤 만들어지면, 어쩌면. 그걸 가지고 어떤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도 있겠죠." 그는 여기서 '어쩌면'을 무척 강조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 바로 이 시간, 유투는 더블린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즉흥연주를 하고, 새로운 곡을 쓰고, 지난 앨범에서 남은 곡들을 재작업하면서 아마도 6월까지를 스튜디오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우선 시작하고. 가능하면 올 해 내에 새 앨범을 끝내는 것이다. 유투의 멤버 네명은 지난 투어 이후 벌써 두 번째 스튜디오 작업을 하고 있는데, 아담 클레이튼의 말을 따르면, 1년에 걸친 투어가 끝난 지금도 유투는 에너지가 가득한 상태라고 한다.
"실내공연장 투어의 이점 중 하나가 바로, 밴드가 연주를 정말 잘 하게 된다는 겁니다. 실내공연장에서는 스테이지에서 서로의 소리를 들을 수 있거든요." "[ATYCLB] 앨범을 만들 때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던 곡들도 지금은 다 완성이 되었어요. 유투에겐 참 드문 일이죠. 한 10곡 정도는 바로 연주할 수도 있는데.. 좀 더 대중적이고 좋은 노래들이죠."
그는 계속해서 스튜디오 안의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에지가 먼저 여러 가지 제안을 하죠. 그러면 그룹으로서 우리는 그 제안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방법을 찾아요. 아니면 그냥 즉흥연주를 하다가 적당한 사운드를 찾아낼 때도 있어요." 클레이튼은 [ATYCLB] 앨범의 곡 중 이 두 가지 작곡 방법의 예를 들었다. "'Elevation' 같은 경우는 먼저 에지가 기타 사운드를 만들어냈어요. 그리고 그걸 토대로 노래가 완성되었죠. 'Walk On'은 원래 두 가지 다른 노래였어요. 사운드는 근사했지만. 결코 좋은 노래가 되진 못했죠. 우리는 그 두 노래를 잘라 붙여서 'Walk On'을 만들었어요"
클레이튼은 [ATYCLB] 앨범의 파워에 놀랐다고 이야기한다. "그 앨범은 우리가 밴드로서, 남자로서, 그리고 부모님의 자식으로 걸어온 길에 관한 앨범이에요. 우리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부담감, 상실감-예를 들어서 보노의 아버지의 죽음 같은-에 대한 것이죠. 그런데 9월 11일의 사건이 그것을 바꾸어 놓았다. "갑자기 미국에 그 일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그 앨범을 아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죠." 10월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에 들어섰을 때는 "마치 1997년 사라예보 공연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거기서 공연하는 것이 사람들이 외출을 하게 하는 유일한 이유 같았다는 거죠. 그 공연은 우리가 그들을 이끄는 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투어가 끝나고 새 앨범이 가시권 안에 들어서고 있는 지금. 유투와 캠페인(제3세계 부채탕감 캠페인과 아프리카의 AIDS 문제) 사이를 오가고 있는 보노에 대해 클레이튼은 별로 초조해하지 않는다고 말하다. "보노가 캠페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보다 더 자주 그를 만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정치가들과 최고경영자들에게 보노가 통찰력과 아일랜드인 특유의 매력을 발휘하는 걸 지켜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기도 하구요. 그 사람들은 아마도 보노가 그렇게 그 문제들을 완벽하게 꿰뚫어보고 있을 줄 몰랐을 거에요. 그 사람들은 그저 보노와 사진만 찍으면 될 줄 알았을텐데, 보노는 필요하다면 증거 자료와 숫자들도 다 들이댈 수 있고, 그들을 설득할 수도 있죠."
"보노가 성취한 것들을 중요한 일이에요" 클레이튼은 말한. "그리고 그 사실은 보노를 제외한 우리들이 하는 일이 유투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죠. 우리는 보노가 왔다갔다 하면서 계속 음악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계속 작업을 진행지켜 나가야 해요. 보노가 늘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없는 데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요. 그리니 우리는 함께 있는 시간을 정말 유용하게 사용해야 하죠."
DAVID FRICKE(April 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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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 Press Q&A: U2 Got a Lot to Answer For
::'Stay (Faraway, So Close)'는 빔 벤더스의 영화를 위해 쓰여진 건가요? 그리고 다음 투어에도 하트 모양의 스테이지를 쓸 건가요? 마지막으로 [Propaganda]가 앞으로 발행될 예정인지 아니면 그냥 온라인으로만 남아있을 건지도 알려주세요.
: LARRY: 'Stay'는 빔 벤더스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겁니다. 그리고 다음 투어에 대해서는 우리도 아직 잘 모른답니다. 먼저 레코드가 만들어지고 나면 거기에서부터 투어에 대한 계획이 세워지니까요. 그리고 [Propaganda]는 더 이상 발행하지 않을 거에요. 웹사이트가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냥 그쪽으로 집중하자고 결정했죠.
:: 지금 새 앨범 작업을 하고 있는지. 만약 그렇다면 언제 발매될 예정인지.
: BONO: Elevation 투어를 끝낸 바로 다음날부터 우리는 새 앨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Richard Rainey와 함께 프랑스 남부에 있는, 이제는 영업을 하지 않는 한 클럽에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우리가 예전에 공연을 했던 것 같은 아주 오래되고 펑크록 느낌이 강한 클럽이었죠. 하지만 그런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든 음악은 로파이에 강한 에너지를 가진 것들이었어요. 이 노래들 중 한 곡 정도는 어쩌면 올해 말에 나올 우리의 두번째 베스트 앨범에 실릴 지도 모르죠.
:: 보노에게 질문합니다. 만약 다음에 예 중에서 스스로를 규정하는 용어를 선택하라면? 1> 정치 활동가 2> 뮤지션
: BONO: 아침에 일어났을 때 떠오른 멜로디를 유투 같은 밴드와 함께 되살려 내는 것 같이 멋진 일은 세상에 없을 겁니다. 내가 핫프레스 어워드 수상식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대단한 싱어는 아니지만 내가 음악을 하는 곳은 대단한 곳이죠. 그리고 그곳은 바로 유투랍니다. 정치인들이나 정치는 음악처럼 나를 흥분시키지 못해요. 나는 예전보다 정치인들을 훨씬 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일을 많이 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 래리, 유투의 리드싱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나요? 우리는 당신의 노래를 정말 듣고 싶은데요.
: LARRY: 아주 멋진 아이디어군요. 그러면 트랙리스트에는 'Dirty Old Town' 같은 곡들이 들어가게 되겠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진짜 이유는 보노가 드럼을 칠 수 없기 때문이에요.
:: 저는 80년대에 남아프리카에서 자랐습니다. 백인 전용학교에 다녔고, 백인 전용 해변에서 놀았습니다. 내 생활은 여느 13살짜리와 다를 게 없는 평범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9살때부터 유투팬이었는데, [Rattle and Hum]에서 'Silver and Gold'라는 곡을 듣고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처음 깨달았습니다. 나는 얼마 후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습니다. 내 태도에 문제가 있고 또 내 생각이 아프리칸 고등학교에서 받아들이기엔 너무 리버럴했기 대문이죠. 당신들은 자신들의 음악이 사람들의 인생에 이렇게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 BONO: 곡을 쓰고자 하는 영감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의 삶을 바꾸고자 하는 바램에서 시작됩니다. 참을 수 없는 어떤 감정을 종이에 써내려가면 결국 그 감정에서 해방되는 경험을 종종 할 수 있죠.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죠. 하지만 투투 주교의 프로그램을 통해 이루어낸 타협점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 당시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들은 참 이상한 것이었죠. 누가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에 대한 진실을 털어놓으면 그는 사면을 받았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인종문제에 관한 한 진실을 털어놓는 것은 복수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죠. 그것은 정말 놀라운 관용이죠. 나는 이런 일들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Bono, 당신은 오래 동안 록앤롤을 했는데, 이제는 아일랜드 대통령에 나가볼 생각이 없습니까?
: BONO: 음. 나는 아무래도 연봉을 줄이거나 더 작은 집으로 이사가서는 못 살 것 같은 걸요?
:: 미 재무장관과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 같은 일들이 당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그들을 위해 싸울 정신적인 에너지를 공급해주나요?
: BONO: 물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를 먹고 가족을 갖게 되면서 그들이 유약해졌다고 하는데, 저는 정반대입니다. 저는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하고, 우리의 생활의 아주 조금만을 희생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의 삶을 무척이나 윤택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죠.
:: 래리 팔에 있는 문신이 무슨 의미를 가진 건지 알고 싶어요.
: LARRY: 당신이 문신을 들여다볼 수 있을만큼 내게 가까이 온다면, 당신은 너무 가까이 다가온 겁니다. 조심하세요.
::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보노. 혹시 가사에 섹스에 대한 언급을 좀 더 넣어줄 수는 없나요? 나도 세상을 바꾸는 데는 동의하지만, 유투의 음악에서 뭔가 섹시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 AB나 Zooropa 앨범을 들어야하는데 좀 지겨워서요. 섹시한 검은 가죽옷을 입고, 와인을 퍼마시고, 퇴폐적이고, 부적절한 록스타의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폴 휴슨과 아프리카 이슈를 잠시 접어두고, 보노도 잠시 쉬라고 하고 맥피스토로 돌아가주면 안 될까요? 당신은 언젠가 아주 매력적인 모순덩어리가 될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런 당신의 모습을 또다시 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그렇게 해주겠어요?
: BONO: 뭘 해주어요? 아프리카에서 섹스를?
:: 작년 Elevation 투어 중 앤트워프 두번째 공연에서 처음 들어보는 아름다운 발라드 곡을 하나 연주해서 16500명의 팬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 이후로 이 노래에 대해 들은 적이 없어요. 그 노래 제목조차도 뭔지 모르겠는데 그냥 'I Love You'라고 부르고 있죠. 이 노래가 유투의 앨범에 실릴 건지, 아니면 그냥 한번으로 끝인건지 궁금해요.
: BONO: 그 공연은 에지의 생일 근처였어요. 그래서 나는 'Gonna make it up as we go along/ I love you. Love you and our Love is True'라고 즉석 가사를 만들어 불렀죠. 그 노래는 에지의 생일 축하노래였어요.
:: 래리, 당신이야말로 유투의 존재에 책임이 있는 사람인데, 옛날에 그 공고문을 내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하는 날은 없나요?
: LARRY: 없는 것 같아요. 나는 아직도 유투의 멤버라는 사실을 좋아하거든요. 사실 후회될 때는 내가 원하는 만큼 음악일을 많이 하지 않을 때죠.
:: 만약 책을 꼭 한 권만 가질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고를 건가요?
: BONO: 맞춰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이야기책이랍니다.
:: 내 친구와 나는 11년 전에 내기를 했습니다. 'Until the End of the World'의 인트로는 보컬인가요? 아니면 기타소리인가요? 나는 보노가 소리지르는 것처럼 들리는데, 내 친구는 에지의 기타소리라고 하더군요. 어떤 게 맞나요?
: BONO: 사실은 두 소리가 섞인 거랍니다. 에지가 기타로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놀라운 수준이죠.
:: 'New Year's Day' 비디오에서 정말 말을 탔나요?
: BONO: 네. 그런데 Anton Corbijn이 눈쌓은 계곡으로 떨어져서 하마트면 카메라가 물에 빠질 뻔 했었죠.
:: DATA를 위해 당신이 한 일에 무척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도 꼭 참여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좋은지 모르겠어요.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게 있는지 알려주세요. 기부금을 내는 것 외에 다른 일-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을 알려주면 좋겠습니다. 멋진 음악과 나도 세상을 바꾸는 데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것에 대해 무척 감사드립니다.
: BONO: 쥬빌레2000 운동은 웹사이트에 서명을 하는 것 하나도 많이만 모인다면 커다란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죠. 사람들의 힘, 엽서, 청원, 평화 시위, 퍼레이드... 아프리카의 부채 문제를 해결하도록 정치인들을 끊이없이 괴롭히세요. 그렇게 귀찮게 구는 사람들의 힘을 절대 과소평과하지 마세요. DATA는 아프리카의 커다란 이슈들 그러니까 에이즈와 무역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곳입니다. 그 기구는 점점 커져가고 있으니 www.datadata.org 사이트를 둘러보고 어떤 귀찮게하기 방법을 써야하는지, 어떤 지식들을 알고 있어야 하는지 누구에게 편지를 써야하는지 어떤 모임에 참가해야하는지를 알아보세요. 그리고 당신의 목표를 정하고 그들의 캠페인에 참가하세요.
Hot Press, July 16, 2002
전세계의 유투팬들이 보낸 질문 중 선별하여 유투가 대답을 한 형식으로 이루어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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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Guinnesse On The 'Principle' Of U2 Management by 다시
from Billboard magazine, November 16, 1991
by Thom Duffy
11월 19일 U2의 새앨범 Achtung Baby가 세상에 발매되면, 그것은 78년 더블린의 한 펍에서 시작해서 미국의 스테디엄으로까지 진출한 한 밴드에게 새로운 이력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U2의 성공에 일관된 불변수 중 하나는, 다른 고객없이 U2만을 고객으로 일했던, 바로 더블린에 본사를 둔 Principle Management사의 Paul McGuinness의 매지니먼트였다. U2가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밴드로 커감에 따라 Principle Management도 같은 속도로 성장해갔다. Ellen Darst가 현재 McGuinness의 뉴욕 사무소를 맡고 있다. 마케팅에서 상품 기획까지 모두 이 안에서 이루어져 왔다.
Achtung Baby 발매 며칠 전, 뉴욕을 방문 중이던 McGuinness는 U2의 작품을 팝 시장에 내놓는 데 있어 자신의 역할과, 음악산업의 경향에 대한 그의 시각에 대해 Billboard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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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board (이하 BB): 당신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봅니까?
McGuinness (이하 PM): 제 역할은 항상 변해 왔습니다. 14년 동안 매니저를 해왔기 때문에 서로를 상당히 잘 알고 있죠. 그런 과정들이 나한테 정말 매력적인 건, 멤버들이 굉장히 훌륭한 아티스트인데다, 자신들이 임하는 예술형식 안에서 꾸준히 발전하고, 앞서나가고, 또 도전한다는 것입니다.
BB: 이번 앨범은 Ireland가 PolyGram으로 매각된 후 발표하는 첫 앨범이죠.
PM: 여러가지 면에서 그건 모든 것을 더욱 단순하게 만듭니다. 과거에는 Ireland가 전 세계의 무수히 다양한 계약자들에게 라이센스를 주었기 때문이죠. 몇몇은 아직도 제자리에 있긴 하죠. 아직도 대부분의 유럽국에서는 BMG가 Ireland의 유통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BMG와 PolyGram 단 두개의 회사와 거래를 하면 그건 정말로 훨씬 더 간단하죠. Ireland에게는 예전과는 다른 시기이죠, 그건 사실이에요. 일이 그렇게 되자, 사실 우리는 (Principle Management에서) 자력적인 조직이 되었죠. 하여간 끔찍할 정도로 많은 창의적인 일들이나 디자인, 영화 제작과 수많은 마케팅 공격이 수년간 우리한테서 나온 것들입니다. 앨범 포장은 전부 더블린에서 이루어지죠.
BB: Achtung Baby의 커버아트는 여러 이미지들을 인상적으로 모아 놓은 것입니다. 아트웍이 앨범 마케팅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요.
PM: 지난 번 앨범 발매 이후로 소매시장 환경이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작은 앨범 패키지들일수록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거대하죠. 미국에서 새로 생긴 몰타입의 상점에 가보면, 진열 기회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시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해 정말 굉장히 창의적으로 생각해야만 하죠. 소매상에서 우리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바로 이 이미지들을 포스터로 배포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관심깊은 것은 미국에서 무료 주간지가 늘어 난다는 겁니다. 그 간행물들을 통해 매우 많은 양의 포스터를 배포하고 있죠. 사람들의 침실 벽에 그 이미지를 거는 것이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BB: 앨범 발매관련 기획을 떠나서, 앞으로 어떤 마케팅 전략을 예상하고 있는지요.
PM: 전자 프레스키트 사업(Electronic Press Kit business)에 종사하고 있는 EPK사람들과 굉징히 많은 얘기를 나누어 왔습니다. 우리 사업에서는 텔레비젼이 비교적 덜 이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산업이 텔레비젼을 이용하는 마케팅 방식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 부분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방법들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죠.
BB: 음악사업과 다른 엔터테인먼트 사업 분야 사이에서 대조적인 것은 무엇이라고 보는지요.
PM: 예술성과 상업성이 상호 작용을 해야만 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다른 부분과 비교해 보자면, 당신만의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의도를 CD에 담아내는 기회들을 갖는다는 것은 영화나 텔레비젼 스크린 위에 그런 아이디어를 담아내는 기회와 비교하면 굉장한 것입니다. 비교해 보면 레코드에는 아직까지 무언가 매우 순수한 면이 있어요.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이 여전히 록앤롤과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빠지는 것 같습니다.
BB: 이 앨범이 담아낸 공격적이고 산업적인 부분이 록밴드인 U2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영한 것인가요?
PM: 전 그들을 해석하는 건 피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들의 예술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걸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 앨범은 굉장히 독특합니다. 이건 우리가 만들고 있다는 루머가 돌았던 그런 댄스 앨범은 아니지만, 지금은 1991년이고 댄스는 모든 사람의 음악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록앤롤은 언제나 그것이 만들어지는 그 시대의 산물입니다. 이번 앨범은 매우 단순한 레코드입니다. 근본적인 록앤롤의 색깔들을 담은 앨범이죠. 실질적으로 앨범 상의 모든 악기는 밴드의 네 멤버들이 연주를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라이브하기에도 훌륭한 앨범이 될 것입니다.
BB: U2 투어 계획은 어떤가요?
PM: 이번 투어는 약간 색다르게 진행할 예정입니다. 3월에 미국에서 시작될 텐데 7~8주 동안 약 30개 도시를 돌면서 하루밤 공연을 가질 예정이죠. 경기장에서 열릴 텐데 한 도시에서 하루밤만 공연을 가질 예정입니다. 부분적으로는 가능한 한 많은 곳에서 공연을 갖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미국 관중에게 구하기 힘든 티켓에 대한 개념도 다시 도입하려는 것이죠, 그런 개념(구하기 힘든 티켓)은 사람들에게 거의 잊혀졌어요. 아마 올해 후반에 다시 와서 더 많은 곳에서 공연도 가질 예정이고요. 공연 사업이 침체된 것은 알고 있지만, 솔직이 지난 몇년 동안 흥분시키는 공연이나 새로운 인재들의 공연은 별로 없었습니다.
BB: 현재 Ireland와의 계약 기한은 어떻게 되나요?
PM: 이번 앨범 이후에 두 장이 더 남아 있습니다. Ireland와의 관계, 그리고 PolyGram과의 새로운 관계는 훌륭하다고 말해야겠군요. 최근에 Ireland의 Rick Dobbis, Chris Blackwell, Andy Allen와 함께 미국에 있는 9개의 PolyGram 지사 전부를 돌면서 이번 앨범을 소개하고 사람들을 만났는데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BB: 이번에 알려진 슈퍼스타 거래에 대한 의견과 그런 거래들의 미래에 대한 의견은 어떻습니까?
PM: 제가 보기에는 많이 과장된 것 같습니다. 굉장히 마초식으로 변해 버렸죠. 내가 가진 것이 당신이 가진 것보다 더 크다 이런 식인 겁니다. 어쨌든지 저는 그런 식의 사업을 공개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점잖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 내가 대변하고 있는 U2는 - 자체적으로 권리를 소유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곡들을 소유하고 있지요. 곡 뿐만 아니라 레코딩까지도 말이죠. 각 곡마다 일정 기간 동안 라이센스를 내주지요. 미래에는 이 점은 상당히 분명합니다. (소비자들에게 음악을 전달하는) 다양한 전송방법으로 인해서 수많은 물리적인 사운드 전달 매체가 늘어날 것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권리권 소유자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방식도 변할 겁니다.
BB: 디지탈 방식을 통해 음악이 소비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될 날을 기대하고 있는지요.
PM: 그럴 때를 고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쇼 비즈니스계에 몸담고 있고, 항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팔고 있는 것은 소비자들이 그 트랙에 접속하는 수치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팔고 있는 것은 토요일 아침, 그 레코드를 가져야 하는 그 팬이 가게에 들어가서 그 레코드를 들고 나오는 바로 그 순간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부분에서 멀어질 수록, 쇼 비즈니스계의 매력과 신비, 흥분의 기회는 더 줄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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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Guinness On The 'Principle' Of U2 Management
From Billboard magazine, November 16, 1991
by Thom Duf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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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s Pride (in the Name of Songs) by 다시
93년 기사입니다. 한 평론가가 선정한 베스트 10곡에 대한 Bono와 Edge의 평가에 관한 것입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정리했는데, 제대로 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아래에 원문 보시고 잘못된 곳이 있으면 고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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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s Pride (in the name of songs)
Achtung, Babies: Bono And Edge Evaluate One Critic's Choices For The Group's 10 Best Recordings, From 'I Will Follow' To 'One'
from the LA Times, September 12, 1993
by Robert Hilburn
Edge와 함께, 내가 선정한 베스트 10에 대한 의견을 말하기 전에 Bono는 질문을 하나 했다.
"로스 엔젤레스 폭동 기간 동안 라디오에서 One을 많이 방송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몇몇 친구들한테 그렇다고 들었는데, 놀랄만한 데요. 한 번도 희망적이거나 위안이 되는 곡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나한테 그 곡은 매우 쓰라린 곡이에요"
하나의 곡이 발표된 후 어떻게 자체적인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지에 대해 Bono가 계속 놀란다 하더라도, 그 사실은 또한 그를 기쁘게도 한다. 약간 초점을 벗어나서 광범위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열린 음악을 그 자신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이든지 청자에게 분명히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느끼는 pop 송라이터 전통을 습관으로 삼지는 않았어요. 밴드에 있는 우리 모두 다 항상 추상적인 개념에 관심이 많았죠. 생각들이 초점을 벗어나도록 하는 거에요."
Bono와 Edge에게 Achtung Baby 앨범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10곡에 대해서 그들 개인의 리스트에서는 얼마나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포함해서 의견을 말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리스트는 발표순이다.
* I Will Follow
from the debut album, "Boy" (1980)
Edge(이하 E): 내 생각에 "Boy" 녹음 당시 이 곡을 녹음할 때 다른 곡들보다 더 행복했던 거 같아요. 음악적인 면에서 보면, 이 곡의 강점은 매우 간결하다는 것에 있죠. 초창기 곡들 중에서 이 곡은 내 리스트에서 상당히 상위를 차지합니다.
Bono(이하 B): 정말이지 80년대 중반까지는 가사를 쓰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 곡을 포함해 초기의 많은 곡들은 매우 빨리 썼지요, 대부분 몇 분 만에 말이죠. 이 곡에 들어있는 아이디어는 매우 개인적인 감정이에요,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노래이죠 : "당신이 멀리 간다면, 난 뒤쫓아갈 거에요". 이 곡은 아마 내 리스트에서 상위를 차지할 거에요.
* New Year's Day
from the album "War" (1983)
E: 난 이 곡을 상당히 좋아해요. 아마도 밴드 내의 송라이터로서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 첫 번째 곡이지 않을까 싶어요.
B: 피아노가 이 트랙에 무언가 차가운 느낌을 줬어요, 매우 유럽적이죠. 그리고, 나한테 떠올랐던 이미지는 자유노조가 일어났던 시기에 눈 밖에 서서 파업 중인 폴란드 노동자들 중 한명이었어요. 바웬사가 수감되어 가족들로터 격리 당했던 시기였죠.
*Pride (In the Name of Love)
a top 40 hit from the album " the Unforgettable Fire" (1984)
E: 이 곡은 곡 자체가 레코드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요. 내게는 녹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거든요. 난 우리가 절대 따라갈 수 없는 리드미컬한 접근을 했다고 생각했어요. 아마도 그것이 뮤지션으로서 우리의 한계일지도 모르죠. 내 리스트에서는 상위보다는 중간쯤에 올라 있을 겁니다.
B: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일생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적극적인 평화주의자로서 그를 얘기했죠. 그게 음악에 적합한 것처럼 보였어요.
*Bad
from "the Unforgettable Fire"
E: 내 기억에 우리가 발표한 버전이 첫 번 녹음분이었을 거에요. 스튜디오에서 있었던 정말 마술같은 순간들 중 하나였죠. 이 곡은 매우 미니멀리스트한 곡이에요; 일정한 시간동안 계속해서 반복되는 패턴이 자체적으로 추진력과 나름대로의 특성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아이디어였죠. 내 리스트에서 이 곡은 상위를 차지해요.
B: 이 곡의 아이디어는 마약으로 아주 심하게 몸이 망가진 친구에 대한 것이었죠. 즉석에서 만들어진 곡이에요. 불행히도 당시에 녹음은 한 순간이었는데 곡을 그대로 놔두어야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다시 손보지는 않았죠. 한번도 레코드에 있는 가사와 똑같이 불러본 적이 없어요. 매일밤 이 곡을 가지고 (가사를 바꿔 부르며) 노는데, 그건 내가 아주 좋아하는 것이죠.
*Where The Street Has No Name
from the album "The Joshua Tree" (1987)
E: 이곡은 "Bad"처럼 즉흥연주를 통해서 만들어진 곡은 아니에요. 리듬백업부터 시작했죠. 기타, 그 다음에 드럼, 마지막에 베이스인 Adam 이런 식으로요. 이 곡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인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힘든 정도까지 갔어요. 사실 브라이언은 이 곡이 레코드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한 순간 이 멀티트랙을 지워 버리자고 했죠. 다행스럽게도 그는 그러지 않았고, 레코드에 제대로 수록할 수가 있었죠.
B: 여행 중인 누군가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 곡의 아이디어를 너무 좋아해요. 콘서트란게 그런 것이잖아요. 이 곡은 관중들에게 "그래요, 우리는 음악을 들으려고 주차장이나 스테디엄, 혹은 또 다른 말도 안되는 장소에 있을 수도 있지만 음악은 어딘가 다른 장소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어요. 음악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죠. 음악으로써 이 곡은 나한테는 우리 곡 중 거의 top에 근접해 있어요.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from "the Joshua Tree"
E: 우리가 무언가 특별한 걸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개별적인 특징을 부여하면서 그 걸 우리 식대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이것 저것 다 벗겨내고 보면, 이 곡은 정말이지 상당히 가스펠 멜로디이고 가사도 거의 가스펠 가사죠.
B: 이 곡은 내가 항상 너무 좋아하는 (성경의) 시편의 시에서 영향을 받아 접근했죠. 제 생각에 이 곡은 굉장히 블루스 스타일이죠, 거기서 사람들은 신에게 말하는 거에죠. 신에게 외치는 다윗과 같은 거죠.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 당신은 어디 계셨나요?" 그거에요.
*Running To Stand Still
from "the Joshua Tree"
E: 이 곡은 스튜디오에서 즉흥 연주하던 도중에 떠올랐어요. 나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Danny (Lanois)가 리듬기타를 집어들었죠. Larry와 Adam이 여기에 가세했어요. 실제 그 연주는 15분 정도 이어졌죠. Bono가 멜로디 아이디어를 집어 넣었고...전 이 곡을 매우 좋아해요.
B: 이 곡은 더블린에서 있었던 한 헤로인 사건에 관한 곡이에요. 노래에 나오는 7개의 타워는 내가 자란 곳 바로 뒤에 있던 곳이죠. 보통 주택단지라고 부르는 7개의 타워가 있던 곳이에요. 이 곡은 개인적으로 top 5에 들어가는 곡이죠.
*Love Rescue Me
from "Rattle And Hum" (1988)
E: 이 곡 정말 좋아해요. 그런데, 사운드면에서 좀 더 우리 스타일로 만들지 못한게 아쉬워요. 당시에 우리는 포크와 블루스 등 다른 음악적 전통을 탐구하고 있었죠. 그래서 함부로 바꾸고 싶지 않았어요.
B: 내 생각은 달라요. 내가 보기에 그 트랙은 굉장히 음악적으로 여지가 있다는 사실이 더 들어맞는다고 생각해요. 로스 엔젤레스에 있을 때였는데 굉장히 심한 숙취 상태에서 잠을 깼죠. 그 때 머리 속에서 가사와 멜로디가 돌아 다니는 거에요. 나중에 Edge에게 이 걸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죠, 옛날 노래가 아니냐고 말이죠. 사실 나는 Bob Dylan 노래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날 그를 만나서 물어봤죠. 그런데, 자기 노래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아무튼 우리는 앉아서 함께 그 곡을 마무리했어요.
*Love Is Blindness
from " Achtung Baby" (1991)
E: 세션하던 동안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연주하는 동안 뮤지션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면, 특히 솔로의 경우, 뮤지션이 가끔 예상했던 경로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려고 했는데 나는 전혀 그 컨셉을 즐기지 않았어요. 그래서 연주를 멈추고 혼자 있게 내버려두라는 식으로 말했죠. 그리고는 니중에 곡에 쓰기로 한 솔로 부분을 썼죠. 이 곡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에요.
B: 이 곡은 Nina Simone을 위해서 쓴 곡이에요. 어느 날 밤 연주를 시작했고 밴드 모두가 이 걸 좋아했어요. 그래서 앨범에 넣기로 결정했죠. 이 레코드에서 최고는 Edge의 기타 연주에요. 나에게는 마치 기도 같아요.
*One
from "Achtung Baby"
E: 이 곡은 앨범 녹음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곡이에요. 베를린에서 진행된 세션은 극도로 힘이 들었는데, 이 곡이 첫 번째 돌파구라고나 할까요. 나는 이 가사를 굉장히 좋아해요. 행들이 매우 깔끔하게 서로 연결되서 내용이 너무 분명하고 강경(jingoistic)해지지만, 결국은 절대 그렇지 않아요. 주관적인 채로 남아 있죠.
B: 이 곡에 대해 전에 얘기했었어요. 함께 모이는 것에 관한 곡이긴 하지만, "다함께 같이 살자"라는 옛날식 히피 아이디어는 아니죠. 사실, 이건 그 반대에요. "우리는 하나다, 그렇지만 똑 같지는 않다."라고 얘기하죠. 심지어는 함께 잘 지내고 싶다는 얘기도 아니에요. 하지만, 생존하려면 이 세상에서 의좋게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곡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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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s Pride (In The Name Of Songs)
Achtung, Babies: Bono And Edge Evaluate One Critic's Choices For The Group's 10 Best Recordings, From 'I Will Follow' To 'One'
from the LA Times, September 12, 1993
by Robert Hilbu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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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o's Top 10 List by 다시
Bono's Top 10 List: Give Him Beatles, Bee Gees and Public Enemy From the Los Angeles Times, September 27, 1998
(참고: 이 내용은 LA TIMES가 주목할만 한 몇몇 뮤지션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TOP 10 앨범은 무엇인지에 관해 쓴 기사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U2의 싱어는 밴드가 발표한 앨범에 한해서 선정했으며, 자신의 목록은 절대 최종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주의를 주었다.
1.The Punk Rock Album :(Sex Pistols의 싱글들이 최고이긴 하지만, 선택은) the Ramones의 "Leave Home"
우리가 만든 곡을 어떻게 편곡하느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Glad to See You'와 'I Remember You'가 우리 곡이라고, 아일랜드 국영 TV 프로듀서를 속였다. 당시, Edge와 Larry는 14살이었고, Adam과 나는 16살이었다. 우린 TV쇼에 출연했고, 우리 곡으로 바꿔 연주했다. 부와 명성이 곧 따라왔다. Ramone 만세!
2. The Hip-Hop Album: Public Enemy의 "Fear of a Black Planet"
힙합은 비틀즈 이후로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무브먼트이다. 퍼블릭 에너미는 L.A.에서 우리와 함께 게스트로 출연했었다.
3. The Only-White-Folks-Doing-This category(백인 힙합 뮤지션 분야):the Beastie Boys의 "Check Your Head"
백인랩의 'White Album'
4. Great Wordy Album(위대한 언어로 만들어진 앨범) :
Patti Smith Group의 "Horses"
the Waterboys의 "This Is the Sea"
록에서 '시인'이란 단어는 마구 사용된다. 그러나, 이 앨범에서는 그렇지 않다. '구원'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라고 느낀다.
5. The Haircuts-So-Bad-They-Were-Ignored-for-Years category
(헤어스타일이 엉망이라서 수년간 무시당한 뮤지션 분야):
the Bee Gees의 "Best of the Bee Gees"
선율, 또 선율. 위대한 뮤지션이지만, 프로그레시브 록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마음이 상할게 틀림없다.
6. The Seminal Album slot (모태가 된 앨범):
The Pixies의 "Doolittle"
'Velvet Underground'나 Buzzcocks의 'Another Music in a Different Kitchen'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Nirvana에게 큰 영향을 끼친 'Doolittle'을 선택할 것이다. Pixies는 '그런지'의 상징인 매우 극적인 코러스-절 변환 방식(high drama chorus-verse gear shift)을 개발해냈다. Frank Black(Pixies의 보컬)은 죽은자도 깨우는 외침을 가지고 있다. 굉장한 곡들이지만, 그의 손재주는 아니다. 자기 연민은 없는 편집증. 그리고, 유머...
7. Girls in Groups 여성그룹:
"The Pretenders" 와 Hole의 "Live Through This"
the Pretenders - 강한 의지를 보이면서도 다정다감하다. 'Brass in Pocket'은 그 해 최고의 싱글이었다.
Hole - 앞서가는 기타 사운드에, 남편의 앨범에 필적할 만한 팝 센스를 보여주었다. 'In Utero'보다 훌륭하며 'Nevermind'의 수준에 이른다. 두 명 다 전자기타를 어떻게 잡아야하는지 가르쳐주었다.
8. The Calls-to-Mind-a-Location Album(어떤 장소를 떠오르게 하는 앨범) :
The Beach Boys의 "Pet Sounds"와
R.E.M.의 "Automatic for the People"
Beach Boys - 눈을 감으면, Brian Wilson이 만든 모래 놀이터와, 웨스트 코스트 해변, 아빠, 약물, 분위기를 볼 수 있다. 인생이나 예술, 영화(Steven Spielberg), 음악(Sly & the Family Stone)에서 즐거움을 훌륭히 표현하기란 가장 어려운 것이다. Beach Boys는 진부하게 들리는 메이저 코드의 장벽을 극복했다.
R.E.M. - 보통 그들의 음악에서는 빛나는 태양을 볼 수 있다. 한번도 조지아 주의 아테네에 가본 적은 없지만, 그 곳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이런 빛바랜 우울함은 위대한 crooner(낮은 소리로 노래하는 사람, 감상적인 저음가수)가 절대 컨트리 앨범을 만들지 않도록 했다. 여기 R.E.M.은 협동조합과도 같고, 네 다리를 가진 테이블과도 같다. 모든 멤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진정한 밴드이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R.E.M.은, 너무 튀는 선율을 선보이지 않으면서도 거물 밴드가 된다는, 불가능한 일을 훌륭히 해왔다.
9.The One-Person-Writes-the-Tune-but-It-Wouldn't-Be-the-Same-Without-the-Band scenario (한명이 곡을 쓰지만 밴드의 시나리오가 없이는 완성되지 않았을 앨범):
The Who의 "Live at Leeds"
the Smashing Pumpkins의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
Oasis의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10. The Best-Pop-Group-in-the-World category(세계 최고의 팝그룹 분야):
the Beatles의 "White Album"
이 분야는 Best Rock Group와는 반대 분야이다. Clash의 'Give 'Em Enough Rope' (U2가 쫓지 않을 유일한 밴드이다.)나 Rolling Stones의 걸작 'Exile on Main Street'가 될 수 도 있었다. Stones는 훌륭한 곡들을 만들었고, 라이브에서 훨씬 더 훌륭했다. 하지만, 스튜디오에서는, 바로 'White Album'이다. 모든 숍에서 이 앨범을 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U2 본부에서 그건 청사진이나 마찬가지이다. 실험적인 팝, 메틀 정신, 블루스, 모두 다 그 안에 있다. 그룹에 관심이 없다면, 아무 의미도 없을 것들이지만, 나는 여전히 관심을 갖고 있다.
p.s. 만약, 'Black' 앨범 분야가 있었다면, Nine Inch Nails의 'Pretty Hate machine'을 골랐을 것이다. 극적인 효과는 검은색으로 칠했을 때 쉽게 얻을 수 있다. 고딕은 90년대식 나팔바지이기도 하지만, 훨씬 더 특별한 무언가가 앨범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
출처 : 사탕발림
U2 히스토리
U2의 역사1 - 시작에서 첫앨범전까지
U2의 역사는, 잘 알려진 대로 래리 뮬랜이 어느날 더블린의 Mount Temple Comprehensive School 게시판에 밴드를 조직하고 싶다는 공고를 붙이면서 시작되었다. 그때 래리의 나이 14살이었다. "용돈을 모두 드럼 세트를 사는데 써버렸죠. 그리고 6개월 동안 제 방에서 연습한 후 드디어 스테이지에 오르게 되었어요. Paul Hewson이라는 친구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사실 그는 다소 악명이 높았죠. 그리고 아담은 이리로 이사온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멋진 기하학무늬의 코트를 입고 다녔기 때문에 그를 기억하고 있었죠." -래리 뮬랜 주니어.
당시 16살이었던 Paul Hewson(Bono)은 주유소 점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노래를 끄적거리고 있었는데, 게시판의 공고를 보자 곧바로 밴드를 한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래리 역시 유명한 Paul을 밴드 일원으로 맞아들이는 걸 찬성했다.
래리, 폴, 아담, 데이브 에반스, 딕 에반스. 이렇게 5명이 아담의 집에 모였다. 멤버들은 한결같이 기타 파트를 맡길 원했다. 폴이 리드 기타를 맡겠다고 우겼는데, 이미 아는 바와 같이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결국 보노는 리듬 기타를 맡게 되었다. 다른 멤버들은, 보노가 'FeedBack'이라고 이름지어진 그들 밴드의 매니저 역할도 해주기를 바랬다고 하는데, 결국 매니저는 아담이 하게 되었다.
Dick Evans(에지의 형)는 오래지 않아 밴드의 아마추어적인 노래들에 실증을 내기 시작했고, 그들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FeedBack의 오디션에 왔던 사람들은 보노, 에지, 래리, 아담, 그리고 딕을 제외하고는 래리의 친구인 피터, 피터의 친구인 이반이 전부였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976년 가을, FeedBack은 피터 프램트의 'Show Me The Way'를 연주해서 학교장기자랑 대회에서 1등을 한다. 그리고 Paul Hewson은 스스로를 '보노'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보청기 가게의 이름인 Bono vox에서 따온 것이다. 또 데이브 에반스는 그의 각진 얼굴 때문에 보노에게서 '디 에지'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이윽고 FeedBack은 밴드명을 'The Hype'으로 바꾸게 되는데, 이는 데이비드 보위의 백밴드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들은 클래쉬, 섹스피스톨즈, 데이비드 보위 같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받았는데 이름을 바꾼 것도 그 영향의 한 표현이었다.
The Hype의 첫 공연은 1978년 초 'Mcgonnigals'라는 더블린의 한 클럽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Revolver라는 그룹의 오프닝 밴드로 출연해서 클래쉬와 섹스피스톨즈의 곡들을 불렀다. 1978년 3월 17일 The Hype는 아일랜드의 도시 Limerick에서 열린 신인콘테스트에서 우승해 500파운드를 상금으로 받게 된다. 에지의 형인 딕 에반스는 이 시점까지도 밴드와 함께 있었으나 몇 달 후 밴드를 떠나고 만다. 어쨌든 이 대회에서 1등을 함으로써 그들은 짧은 데모 세션을 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이때 만들어진 곡이 'Magic Carpet'이었다.
최초의 공식 U2의 음반은 1979년에 발매된 [U2-3]으로 'Out of Control', 'Stories for Boys', 'Boy/Girl'의 3곡이 수록된 LP였다. "밴드를 해서 가장 좋은 점은 바로 곡을 만드는데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느 순간 노래가 만들어지죠. 그리고 그곡은 레코딩되고, 라디오를 통해 전세계에 방송되고... 가끔은 아주 먼 나라에서 그 곡이 방송되는 것을 들으면.. 그건 정말 특별한 느낌, 돈으로 절대 살 수 없는 기분이지요" -보노.
보노 대신 밴드의 매니저 역할을 한 것은 아담이었다. 그는 영국의 음악신문에 "매니저가 멋진 공연을 한 후 사라진 'the Hype'의 소재를 찾습니다. 브라이언에게 연락해주십시오"라는 광고를 냈다. 물론, 브라이언이라는 사람도 없었고, 신문에 낸 전화번호는 아담의 것이엇다. 이 광고는 Paul Macuiness의 관심을 끌었다. 맥기네스는 음악평론가들의 의견을 듣고, 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주의 깊게 관람한 후 밴드의 매니저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들의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다.
밴드는 이 지점에서 또한번 이름을 바꾼다. 아담은 밴드명을 좀더 나은 것으로 바꾸고 싶어했고, Steve Averill이라는 사람이 U2를 제안했고, 채택되었다.
U2의 역사2 - [BOY]와 [OCTOBER]
1980년 봄, U2는 이제 데뷰 앨범을 낼 수 있을만큼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CBS 레코드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Island 레코드는 한번에 채택했다.
"처음 음악을 해서 레코드를 취입하게 되면 주위에서 여러가지 잔소리들을 듣게 됩니다. 19살인가 20살, 그러니까 [Boy]를 레코딩하고 있을 때였죠. 당시에는 아직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밤새도록 작업을 하고 집에 돌아가면 새벽 3~4시 정도였어요. 그날도 아버지를 깨우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죠. 하지만 아버지는 깨어나셨고 제게 '너 지금 뭐하는거야? 지금 몇시냐?'라고 물으셨어요. 저는 1시라고 거짓말을 했는데, 아버지는 '너 도대체 몇 일이나 그일을 하고 있는거냐?'라고 물으셨고, 제가 '1주일'이라고 대답하자 아버지는 '그럼 그 레코드는 몇 시간 짜리냐"고 되물으셨어요. 제가 '70분인데요'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세상에! 그런데도 아직 다 못 만든거냐?'고 하셨어요" -보노
첫 앨범이 발매된 후 첫 3주 동안, U2의 데뷰 앨범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지루하다'는 평판을 들었다. 하지만 영국과 유럽으로 짧은 투어를 다녀온 후 앨범은 점차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반응은 특히 미국에서 뜨거웟다. 특히 'I will Follow'가 방송될 때-보노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기분을 이야기하고, 곧이어 에지의 날카로운 기타 소리와 강한 드럼 소리가 울려퍼지고 5초도 되기 전에 사람들은 이들의 음악은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1981년 3월 22일, U2가 오레곤주 포트랜드에 있는 'The Foghorn'이라는 클럽에서 공연을 벌인 후 3명의 젊은 여자들이 백스테이지로 찾아왔다. 그리고 30분 후. 그녀들이 돌아갈 때 300불과 다음 앨범을 위해 준비해놓은 가사가 담긴 보노의 가방 역시 함께 사라졌다.
이 사건은 U2에게 매우 큰 위기였다. 그들은 12주 후에 새로운 앨범을 레코딩하기로 되어있었고, 그 가사들은 보노가 1년 동안 준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보노는 [BOY] 앨범의 가사를 쓰는데는 3년이나 걸렸었다고 한다. 모두들 무척 당황했고, 약간의 신경쇠약 증상까지 보였으나, 결국 모두 합심해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U2의 프로듀서였던 Lillywhite가 아주 좋은 충고를 했다. "5분 동안에도 노래 한 곡을 쓸 수 있다. 그러니 징징거리지 말고 어서 일을 해!"라고. 당황하고 침울해있던 보노는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가사들을 써내려가야했다.
새 앨범의 노래 중 한 곡은 매니저인 폴 맥기네스가 좋아하는 그레고리안 성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보노는 친구인 제레미와 고등학교 은사의 도움을 받아서 라틴어 구절들을 완성했다. 'Gloria'는 반은 캐톨릭 미사곡이고, 반은 보노의 우상 중 한 명인 '패티 스미스'와 '반 모리슨'에 바치는 곡이었는데 '패티 스미스'와 '반 모리슨'은 둘 다 'Gloria'라는 제목을 노래를 취입한 적이 있다.'Gloria'는 새 앨범에서 싱글 커트된 첫 곡이었다. 사실 새 앨범은 [Scarlet]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발매일을 따서 [October]로 개명되었다. 발매일은 1981년 10월 12일이었다.
새 앨범을 발매한 후 U2는 또다시 순회공연을 시작했고, 관중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태세인 열정적이고 활동적인 리드 싱어가 있는 아일랜드 그룹에 대한 소문이 퍼져감에 따라 관중은 점차 불어났다. 사실 보노는 관중들 틈으로 다이빙을 하기도 하고 공연장 높은 곳으로 기어올라 노래를 하기도 하고, 스테이지를 온통 뛰어다니기도 하는 등 정말 공연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어떤 일도 불사할 듯이 보였다. 그 10개월 동안 U2는 엄청나게 많은 공연을 해내면서 틈틈이 그들의 새 앨범을 위한 곡들을 만들어갔다.
U2의 역사3 - [War]와 [The Unforgettable Fire]
U2의 세번째 앨범은 더블린의 Windmill Lane Studios에서 지난 두 앨범에서 함께 했던 프로듀서 Steve Lillywhite와 함께 만들어졌다. 1983년 2월 25일에 발매된 이 앨범은 정치적, 시회적 메시지와 성숙하고 자신감 있는 사운드로 가득차있었다. [War]로 인해 U2는 그해 말 롤링스톤지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밴드'라는 찬사를 듣게 된다.
'New Year's Day'는 새 앨범을 위해 만들어진 6번째인가 7번째 곡이다. 처음에 아담이 베이스 라인을 만들었고, 그걸 들은 에지가 그가 피아노로 만들고 있던 것과 연결시켰다. 그렇게 어느 정도 기본적인 구조가 갖추어진 곡이 만들어지면 가사를 붙이는 것은 보노의 몫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 보노는 머리 속에 가득한 이미지들을 명확하게 가사로 적어내는데 무척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가사를 만들어내고 고치고, 다시 고치고 하는 작업을 되풀이했다. 밴드는 보노가 원하는 가사를 쓸 때까지 같은 곡을 100만 번도 넘게 연주했고, 마침내 그곡이 너무 지겨워 새 앨범에서 그 곡을 제외시키기로 결정하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그곡을 완성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노래가 매우 진지한 정치적인 커멘트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보노는 아내 알리에 대한 사랑의 노래를 만들려고 했었다고 한다.
'New Year's Day'는 어떤지 몰라도 [war] 앨범에서 적어도 한곡은 진지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1972년 1월 30일 일요일. 북아일랜드에서는 민중시위가 일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치 않은 이유로 영국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그자리에서 14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그날 TV를 통해 방송된 장면 중 하나가 카톨릭 주교가 항복의 표시인 흰 깃발 대신 흰 손수건을 흔들면서 부상자들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뛰어가는 것이었다. 보노는 이 사건에 대한 가사를 쓰면서, 이 노래가 어느 한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바라보는 아일랜드 젊은이들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하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싸우고 죽는 일에 너무 지쳐있었다. 그후 보노는 종종 항복이 아닌 백지상태(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거겠죠?)를 상징하는 흰 깃발을 흔들며 이곡을 부르곤 한다. 그 깃발은 녹색,백색, 오랜지색의 아일랜드깃발도 아니고, 유니온 잭도 아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정치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폭력의 악순환에 대한 저항의 노래인 것이다.
"'Suday Bloody Sunday'는 에지의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게 에지가 아닌 제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마도 흰 깃발을 흔드는 사람이 저이기 때문이겠죠." -보노
[War] 이후로 U2는 '양심을 가진 밴드'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네번째 스튜디오 앨범을 녹음하기 시작하려했을 때 U2는 그들이 세계를 바꾸는 일에 동참하려면, 그들 자신부터 바꾸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U2는 그들의 노랫말과 언행이 신랄하고 관중들에게 설교조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걱정하기 시작햇다. 사실 '보노는 신이다'라는 식의 말들이 난무하고 있었던 데다가 [war] 앨범 투어가 무척 타이트했기 떄문데 그룹은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쉴 시간이 필요햇다. 어느 정도 휴식기를 가진 후 그들은 새로운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세 앨범을 함께 한 릴리화이트 대신 브라이언 이노라는 새로운 프로듀서와 함께 였다. U2는 변화를 원했고, 사물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었기 떄문이었다. 브라이언 이노는 마치 감독이 영화 작업전체를 관장하는 것처럼 레코딩 세션을 지휘하는 프로듀서였다. 브라이언 이노는 대니얼 라노아라는 캐나다인 조수와 함께 참여했는데 그들은 모두 무척이나 쉽게 잘 어울렸다.
새 앨범의 초반 작업은 아일랜드의 고성에서 이동 레코딩 장비를 이용해 이루어졌다. 모두들 긴장을 풀고, 편하고 느슨하게 연주했고. 특히 리듬에 대한 감각이 좋은 라노이즈는, 래리와 아담이 조금 더 펑키하게 연주하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점차 모두는 부담감 없이 연주를 즐기게 되었으며 어느날은 모두가 누드로 연주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업을 힘들어했던 멤버가 한 명 있었다. 바로 보노였다. 10일 후에는 레코딩을 마치고 투어를 떠나야하는 시점까지도 그는 가사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마지막 순간에 일을 모두 해치웠다.
새 앨범 [The Unforgettable Fire]에서 가장 훌륭한 곡 중 하나는 실수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1983년 11월 16일, 하와이 호놀룰루. 밴드는 사운드체크를 하는 동안 연주를 즐기고 있었다. 래리인지 아담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하여튼 리듬 섹션의 누군가가 실수를 했는데 U2는 멈추어서 다시 시작하는 대신 그냥 그대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 연주를 계속했다. 당시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조는 그걸 모두 녹음해놓았고, 1년 후 새 앨범을 작업하는 동안 그때의 테이프는 새로운 곡으로 태어났다. 보노는 그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스테이지 위에 있었죠. 아담은 그의 기타를 연결하고 연결선을 목에 두르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래리와 함께 연주하기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서 그곡의 기본라인이 된 부분을 만들어냈죠. 그리고는 내가 그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곧이어 에지가 함께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5~7분 사이에 그곡은 완성되었어요. 멜로디, 가사, 코러스, 독주까지 완전히 완성된 거예요. 우리가 연주를 끝내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곡에 대해 묻기 시작했죠. 난 "내가 다 녹음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테이프 레코더를 꺼내어 플레이 버튼을 눌렀는데, 지직거리는 소리 밖에 안 나는 거예요. 배터리가 다 되었던 거죠. 우리는 나중에 다시 그곡을 작업해야했고, 난 그 지직거리는 소리를 다 해독해서 가사를 완성해야했죠." -보노
그곡은 'Pride(in the Name of Love)'였다. "우린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록밴드일 겁니다" -보노 "우린 모두들 그냥 연주를 시작해요. 30분쯤 제각각 연주를 하죠. 어쩔 때는 모두 다른 곡을 연주하고 있을 때도 있어요. 30분이 지난 후 우리는 모여 앉아 녹음된 테이프를 들으면서 '에지, 이 부분은 좋은데' '그래. 좋아' 하면서 이리저리 곡들을 자르고 짜맞추어 결국 노래를 한 곡 만들어내요.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하지 않겠죠? 그냥 앉아서 좀더 질서정연한 방법으로 곡을 쓰지 않을까요?"
U2의 역사4 - [the Joshua Tree]
1986년이 되자 U2는 1980년대 밴드 중 가장 열정적이고 혁신적이고, 중요한 밴드로 여겨지게 되었다. 1985년에 있었던 라이브에이드에서 그들의 무대는 굉장했다. 그들의 레코드 역시 모두 잘 팔리고 있었고, 콘서트들은 대성황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모든 U2의 앨범들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986년은 U2가 공공서비스를 위해 보낸 한 해였다. 라이브에이드의 성공에 고무된 U2는 'Conpiracy of Hope Tour for Amnesty International'과 'SelfAid'라고 불린 아일랜드의 자선콘서트에 참여했다. 그 공연이 끝나자 보노는 니카라구아나 엘살바도르 같이 내전으로 얼룩진 나라들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보노가 멀리 가 있는 동안 에지는 'Captive'라는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작곡했는데, 그중 한 곡은 당시 10대 가수였던 Sinead O'conner가 노래를 불렀다. 이윽고 보노가 중남미에서 돌아왔다. 그는 그곳에서 오래된 아메리칸 리듬과 블루스, 토속음악, 민속음악들을 들으며 지냈고, 그는 완전히 재충전되어 한시라도 빨리 음악작업을 하고 싶어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앨범은 U2를 유명한 아일랜드 밴드에서 진정한 슈퍼스타로 변모시켰다. 그 앨범은 미국 역사상 가장 빨리 팔린 앨범이 되었고 플래티넘을 기록한 첫 CD 레코드이기도 했으며, 전세계에서 150백만 장이 넘게 팔렸다. [The Joshua Tree]였다.
"[The Unforgettable Fire]는 포커스가 잘 맞추어져있지 않은 앨범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난 그 점이 좋기도 하구요. 모든 게 다 말끔하게 정돈되어있고, 직선처럼 깔끔한 세계에서 멋지게 포커스가 나가있고, 인상파적인 그런 앨범이었죠. [The Joshua Tree]는 무엇보다도 포커스가 정확하게 맞추어져있는 앨범이예요. 그점이 [The Unforgetttable Fire]와는 확실히 다르죠." -보노
[The Joshua Tree]의 첫 싱글인 'With or Without You'는 1987년 3월 9일에 발매되었다. [The Joshua Tree]는 실로 훌륭한 앨범이었으나 U2의 멤버 중 한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보노였다. "우린 정말로 [The Joshua Tree] 앨범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 줄 몰랐어요. 난 앨범의 발매를 막아야한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죠. 그래서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는 'with or Without You'가 3장 이상 팔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난 우리가 큰 실수를 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 싱글은 전세계에 깔려있었죠." 하지만 그렇게 걱정했던 보노도 나중에는 [The Joshua Tree]가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고 인정했다.
"라디오 TOP 40 차트를 정복하는 건 정말 흥분되는 일입니다. 사실 라디오에서 틀어주는 노래들은 왠지 나 자신이나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노래들이었거든요. 나는 그런 음악들을 엘리베이터 음악, 배경 음악이라고 부르죠. 난 지구상 어디서엔가 사람들이 자동차 안에서, 혹은 땅을 파면서 라디오를 통해 'one'을 들을 거라는 생각이 마음에 듭니다. 또 부엌에서 일을 하면서 주부들이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를 듣는 것도요. 나는 U2가 엘리트들의 음악으로 여겨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U2가 예전에는 소수가 광적으로 좋아하는 그룹이었다고 이야기하는데, 난 U2의 그런면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U2에 정말로 열광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자신들만의 비밀로 남겨두길 원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신자이기 때문에 모든 대답을 다 알고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사실 나는 신자가 된 이후로 더이상 의심과 질문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이야기하곤 했었죠. 하지만 내가 가는 길은 여러가지 교차로가 많이 있어서 길을 잃기 쉽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신을 위한 좋은 표본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도 똑같은 죄인이니까요.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는 늘 갈구하는 영혼으로 쓰여진 가스펠 송입니다. 긍정적인 내용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기쁨을 담고 있죠. 어쩌면 나는 끝내 내가 찾던 것을 찾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난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보노
[The Joshua Tree] 앨범 이후의 투어는 그때까지 U2가 했던 모든 투어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투어는 Joshua Tree가 자라고 있는 사막 근처의 아리조나 템페에서 1987년 4월 2일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천 공연이 시작되기 이틀 전에 사고가 생겼다. 공연 리허설을 하면서 'Bullet the Blue Sky'를 부르고 있던 보노가 그만 무대 뒤로 떨어지면서 조명 기구에 얼굴을 부딪힌 것이다. 보노는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어 상처를 꿰메어야 했고 그 상처는 지금까지도 그의 입술 아래 왼쪽턱에 남아있다.
그달 말 U2는 비틀즈와 더후에 이어 록밴드로서는 세번째로 타임 지 커버에 실렸다.투어는 유럽으로 이어졌고 5월이 되자 [The Joshua Tree]는 7백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네덜란드에서는 9만2천장의 티켓이 1시간 만에 매진되었고, 글래스고우에서는 티켓이 매진되었음에도 모여있는 군중들에게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아서 해산시키고 250명을 연행해가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U2의 역사5 - [Rattle & Hum],[Achtung Baby]
26세의 영화감독인 Phil Jonoau는 U2의 [the Joshua Tree] 투어를 따라다니며 16mm 카메라에 투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담고 있었다. 몇 달 동안 160시간이 넘는 필름을 찍고 편집한 그는 마침내 90분짜리 영화를 완성했다. 그리고 1988년 10월 전세계에서 영화 'Rattle & Hum'이 개봉했다.
1988년 10월 더블린의 사보이 시네마에서 첫 개봉을 한 'Rattle & Hum'의 사운드트랙격인 [Rattle & Hum]은 더블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라이브 곡으로 채워진 새 앨범의 스튜디오 신곡 중 하나인 'Desire'는 월드 투어 중 어느날 LA에서 레코딩 되었다. 이곡은 그 당시 보노와 에지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미국 음악의 영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밴드는 당시 Bo Diddley나 B.B.King 같은 옛 리듬앤블루스 곡들을 듣고 있었고, 에지는 Iggy Pop에 심취해있었다. 에지는 'Desire'의 리듬은 한편으로는 Bo Diddley에게서 그리고 한편은 'Lust for Life'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the Joshua Tree] 이후 U2는 거의 3년을 꼬박 투어를 하며 보냈다. 1987년 4월 2일에 시작해서 1990년 1월 10일에 끝났으니 말이다. 밴드는 투어를 끝낸 후 1990년 11월이 되어서야 새로운 앨범 작업을 위해 독일의 베를린으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타고간 비행기는 동서독이 통일되기 전 베를린에 착륙한 마지막 상업용 비행기가 되었다. U2에 있어 동서독 통일의 시기에 베를린에 있는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밴드 멤버들은 말 그대로 서로를 죽이고 싶어하기 직전까지 가게 된다. "베를린에서의 작업은 창작작업의 의견 불일치, 개인적인 긴장상태, 지속적인 혼돈이 범벅된 고문이었습니다" -보노
앞으로 무얼 해야할지에 대해 합의를 볼 수도 없었고 곡을 쓰거나 레코딩을 하는 등의 건설적인 작업도 전혀 진행되지 못햇다. 베를린에서 작업한 3개월 동안 만들어진 노래 중 제대로 된 것은 겨우 2곡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솔직히 쓸데 없는 쓰레기들이었다. 보노와 프로듀서인 다니엘 라노이스는 몇번이나 매우 격렬하게 입씨름을 벌였다. 그 와중에서 밴드가 분열되는 것을 막은 유일한 사람은 브라이언 이노였다. 그는 밴드에 합류하자 먼저 "꺠끗하게 청소를 했다". 질이 떨어지는 곡들을 가차없이 찢어버리고, 기본법칙들을 정하고 음악작업에 질서를 가져왔다. 다음해 3월, 그는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밴드와 함께 아일랜드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해 11월 18일 U2는 [Achtung Baby]를 발매했다.
'Zoo Station'은 베를린 작업에서 살아남은 2곡 중 하나로 동.서 베를린을 있는 역인 Zoo Benhof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Zoo Benhof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통일이 진행되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기로였고 이것은 U2의 진화를 의미하는 은유로 사용되었다. 이곡의 메시지는, "조심해라. 세상은 미친듯이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변화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U2의 다음 투어가 발표되자 티켓 경쟁률은 거의 10대 1로 치솟았다. 월드 투어는 1992년 2월 플로리다의 레이크랜드에서 시작되었다. 매번 공연은 늘 신곡 8곡으로 시작했지만 아무도 그걸 트집잡지 않을 정도로 관중들은 U2에 미쳐있었다.
U2의 역사6 - [Zooropa]
[The Zoo TV Tour]는 어마어마했다. 전세계를 돌며 벌인 157번의 공연은 1992년 2월 플로리다에서 시작해 1993년 크리스마스 직전 동경에서 끝났다. 밴드는 투어 도중 6개월 간의 휴식 기간을 가졌는데, 더블린의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것이라는 많은 사람의 예상 밖으로 그들은 투어에서 얻은 에너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앨범 작업을 시작했다. 게다가 에지는 당시 뭔가 몰두해서 일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른 멤버들이 작업을 잠시 쉬고 즐거운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도 그는 스튜디오에서 그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며 혼자 작업을 계속했다.
그때 에지가 스튜디오에서 발견한 것 중의 하나가 [Achtung Baby] 레코딩할 당시 작업했던 것으로 'Down all the days'라는 제목이었다. 에지는 이 곡을 만지작거려 계속 반복되는 구조의 곡을 완성했고 보노가 그 위에 랩을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보노는 그때 너무 즐겁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랩을 위해 스튜디오로 돌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에지는 어쩔 수 없이 그가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해야했다. 스스로 노래를 부른 것이다. 에지는 자신이 별로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더욱 얼굴이 어두웠다. 게다가 그가 와이프와 헤어진 후의 감정을 응축한 것이기도 했다.
밴드의 다른 멤버들은 이 곡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고, 보노가 가성으로 부른 부분을 첨가하고 브라이언 이노는 키보드 파트를 첨가해서 이 곡은 완성되었다. 이곡은 U2의 노래 중 가장 쉽게 만들어진 곡 중 하나였다. 이곡 제목은 'Numb'으로 정해졌다. 'Numb'은 1993년 7월 5일에 발매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U2의 새앨범 [Zooropa]의 첫 싱글이 되었다.
[Achtung Baby]와 [Zooropa]를 둘러싼 투어는 너무 길고 또 너무 돈이 많이 들어서 U2는 또한번의 긴 휴식을 가져야했다. 앨범을 발표하고, 거대한 세계 투어를 다니고, 1~2년 간 휴식을 취하면서 재충전의 시기를 가지는 것은 지난 10년 동안의 패턴이었다. U2는 시대에 뒤떨아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난 앨범과는 아주 다른 앨범을 만들어야한다고 믿고 있엇다. 그들은 늘 전진하고,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고, 새로운 영향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위험을 감수해야한다고 믿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The Passengers Project]를 예로 들어보자. U2는 원래 [The Passengers]를 U2 정규 앨범으로 발매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도 너무 실험적이었다. 게다가 멤버들 중에서는 그 앨범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멤버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U2 대신 The Passengers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로 햇다.
한편, U2의 네 멤버는 모두, 동시에 댄스 클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서 영감을 얻었다. U2의 다음 앨범은 정통스타일의 록앤롤로 채워질 예정이었으나 그들이 테크노, 정글을 접하고 나서 그 예정은 바로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특히 더블린에 있는 'kitchen'이라는 이름의 나이트클럽을 사들인 후 U2는 테크노에 더욱 심취하게 되었다. kitchen의 DJ들은 테크노에 무척 몰두해있었고, 보노가 클럽에 맥주를 마시길 좋아했기 때문에 자주 그곳에 들렀던 멤버들은 곧 테크노에 푹 빠지고 말았다.
이 새로운 앨범에 대해서 말 그대로 전쟁이 일었다. 게다가 이 앨범에는 브라이언 이노가 빠진 대신 두 명의 댄스 프로듀서들이 영입되었다. 앨범은 1996년 9월에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11월로 연기되었다. 하지만, 1997년 1월에도 새 앨범은 발매되지 않았다. 몇달간의 심사숙고와 소문, 그리고 인터넷으로의 음원 유출이 있은 후 1997년 3월 드디어 [POP]이 발매되었다.
U2의 역사7 - [POP]
"우리는 라이브 콘서트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연주를 보여주려고 노력하죠. 우리의 노래가 1위를 차지하거나 우리의 노래를 라디오에서 듣거나 또는 무척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할 수 있게 되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죠. 하지만 가끔은 우리가 그걸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선 안 될 것 같죠. 왜냐하면 우리는 '양심'을 가진 밴드니까 그걸 즐겨서는 안 될 것 같은 겁니다" -보노
"노래를 만들겠다고 결심한다고 노래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예요. 사실 우리가 작사작곡을 하긴 하지만 그 과정을 다 컨트롤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잘 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때도 있죠. 그러니 이제 우리는 좀 쉬려고 합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혼자 작업을 좀 해왔어요. 우리는 다 같이 모여서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죠.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곡들은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되기도 하죠. 사실 보노와 나는 지난 몇년간 다른 싱어들에게 곡들을 주어왔어요. 또 어떤 곡들은 우리 앨범에 사용되고 어떤 곡들은 다른 프로젝트에 사용됩니다. 우리가 의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한 6개월 정도 쉬고 나서 아이디어 떠오르면 기타를 잡거나 또는 워크맨 같은데 녹음을 하죠. 아이디어 생기면 무조건 어딘가에 적거나 테이프에 녹음하거나 삐삐에 녹음을 하기도 하죠. 앨범 작업을 할 때에는 투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요. 앨범 발매 이후에 어떤 일을 할지에 대해서 어떤 가정도 세워놓지 않는 거죠. 그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걸 즐기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이 될지 두고보는거죠." -에지
U2는 14년 동안의 밴드 생활 중 가장 긴 휴식을 취한 후 1996년 초 [POP]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목표는 록앤롤 앨범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스튜디오 작업을 시작했고 6개월이면 전부 작업을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U2는 한번도 6개월에 앨범 하나는 완성한 적이 없었고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U2는 새로운 걸 시도하면 그들의 사운드는 그 와중에서 돌연변이를 일이키기 일쑤였다. 이번에도 역시 그들이 처음에 목표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앨범이 완성되었다.
[POP]을 녹음할 때 래리 뮬렌의 등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벌써 몇년 동안이나 등 아래쪽에 통증이 있었는데 [POP] 작업의 아주 초반에는 통증이 너무 심해져서 몇주 동안이나 작업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앨범의 프로듀서인 Flood와 Howie B, 리믹스 엔지니어가 이전 연주의 샘플을 이용해서 리듬파트의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넣었다. U2는 진짜 드러머 대신 테크노와 트립합 비트를 이용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POP] 앨범의 사운드가 만들어졌다.
1998년 8월이 되자 새 앨범이 크리스마스까지 끝나지 않을 게 확실해졌다. 첫 싱글은 이듬해 1월이 되어서 발매되었고, 앨범은 그들 스스로가 정한 데드라인을 넘겨 2월 초에 발매되었다. 상황은 정말 미친 듯이 돌아갔다. U2는 데드라인 전의 12시간 동안 4곡을 믹싱하고, 3곡의 보컬을 녹음했다. 게다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사를 쓰고 곡을 완성하느라 야단이었다.
[POP] 앨범의 사운드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The Kitchen'이라는 U2 왕국의 한 부분을 이해 해야한다. 1992년 보노와 에지, 그리고 Harry Crosby라는 더블린 사업가는 'The Clarence'라는 이름의 더블린 호텔을 구입했다. 1800년대에 지어진 아주 좋은 호텔이었다. 에지와 보노는 지하에 그들이 아직 어렸을 때 숨어들어가 술을 마시곤 하던 곳 같은 나이트 클럽을 열길 원했다. 그렇게 해서 'The Kitchen'이 문을 열었고, 그곳에서 연주되던 음악은 [POP]의 사운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래리 뮬렌이 회복해 연주에 참여할 수 있을 때쯤 U2의 사운드는 매우 펑키했고 마치 댄스 음악 같았다. 록앤롤 앨범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On March 2nd, 9th, and 16th, 1997, 102.1 The Edge, a Toronto based radio station, took a look at the history of U2, on their weekly program called 'The Ongoing History of New Music.
U2의 역사8 -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모든 유투 앨범이 그렇듯이 [POP] 역시 날카로움과 아름다움, 소란스러움과 서정적인 면이 뒤섞여 있었다. 평론가들은 이 앨범이 '유투 음악 같지 않다'고 평했고, 이에 대해 유투는 '하지만 우리는 유투이다'라고 대응했다. 그들은 매 앨범을, 과거의 성공을 답습하기보다는 새로운 음악적 영역을 탐험하는 방편으로 사용하고 싶어했다. 1997년, 유투는 [POP]앨범을 위한 전세계 투어인 PopMart 투어를 시작했다. 커다란 금색 아치, 거대한 레몬, 비디오 스크린이 동원된 거대 규모의 투어였다. 투어는 북미, 유럽, 북미, 남미, 오스트레일리아, 일본으로 이어졌다. 투어의 정점은 이탈리아에서 15만 명의 관객이 모인 순간이었고, 멕시코 시티 공연은 TV를 통해 중계되었으며 PopMart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PopMart 투어는 1998년 3월 21일 요하네스버그에서 끝났다.
1998년 11월에는 [Best of U2] 앨범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의 수록곡은 1980년부터 1990년까지 유투가 발매한 앨범 중에서 발췌되었고, 발매되자마자 차트 정상을 밟았다. 한편 보노는 1999년, 음악 외적인 활동으로 인해 늘 뉴스의 초점에 있었다. 제3세계 부채 탕감을 위한 캠페인인 쥬빌레2000을 위해 뛰어다녔고, 빈민을 위한 자선행사인 Net Aid에도 참가했으며 그해 9월에는 쥬빌레2000 회담을 위해 바티칸에서 교황을 만났다. 보노는 또한 빔 벤더스의 영화 [밀리언 달러 호텔]의 스토리라인과 사운드트랙 작업도 병행했다. 2000년 3월에 발매된 사운드트랙에는 유투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한 곡도 있고, 보노 혼자 참여한 곡들도 있었다.
유투의 새 앨범은 2000년 10월 말에 발매되었다. 다니엘 라노아와 브라이언 이노가 프로듀싱한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은 유투가 최근에 발매한 앨범들에 비해 컨셉트 앨범 같은 성향도 덜 했고, 테크놀러지의 사용도 자제되었다. 이 앨범에서 처음 싱글 커트된 곡은 'Beautiful Day'였으며 'Stuck in a Moment', 'Walk on' 등이 뒤이어 싱글로 발매되었다.
새 앨범을 위한 투어인 Elevation 투어는 2001년 3월 24일 마이애미에서 시작되었다. 투어 도중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보노의 넷째 아이가 태어났고, 'Elevation'이 싱글로 발매되었고, 보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보스톤 공연은 DVD로 출시되었다. 투어는 12월 2일 마이애미에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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