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EDICINE FOR MELANCHOLY
레이 브래드버리 Ray Bradbury 지음
이 기석 옮김
이 책을 아버지에게 바칩니다.
─그 깊은 애정에 오늘날까지도 감사드리는 아들로부터
그리고 또 이 책을
버너드 헬렌슨와 닉 마리아노에게 바칩니다.
─그 두 사람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해 가르침받은 남자로부터.
온화한 하루
In a Season of Calm Weathe
어느 한여름의 대낮, 조지 스미스와 앨리스 스미스는 비아리츠(프랑스 남부의 해수욕장)에서 기차를 내렸다. 한 시간쯤 뒤에는 호텔을 빠져나와 해변으로 가서 한바탕 수영을 한 다음 모래 위에 엎드려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엎드려 햇볕을 쬐고 있는 조지 스미스를 보면 이제 막 비행기로 유럽 대륙에 운반된 서양 상치처럼 곧 다시 배에 실려 귀국할 한낱 관광객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러분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누워 있는 것은 인생 그 자체보다도 예술을 사랑하는 사나이다.
"후유......" 조지 스미스는 한숨을 쉬었다.
1온스의 땀이 가슴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오하이오의 술을 증발시키고 최고급 보르도 산(産) 포도주를 한껏 마셔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감칠맛이 나는 프랑스의 술을 핏속에 스며들게 해야겠다, 토박이들과 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어째서? 어째서 프랑스의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먹고 호흡하고 마시려 하는가?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한 사나이의 천재를 이해할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입술이 움직여 누군가의 이름이 흘러나오려고 했다.
"여보,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알아요. 입술 모양으로 짐작할 수 있거든요."
아내가 덮치다시피하며 그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꼼짝 않고 누운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무언데?"
"피카소지요" 하고 아내가 말했다.
그는 질려버렸다. 언젠가는 아내도 이 이름을 발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제발 휴양을 즐기세요. 오늘 아침 그 소문을 듣고 그러시는 거지요? 하지만 당신의 눈을 좀 보세요─안면경련 증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그야 피카소가 와 있어요─여기서 몇 마일 떨어진 조그만 어촌에 친구를 찾아서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것은 잊어버려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모처럼의 휴가 여행도 소용없게 돼요."
"소문을 듣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피카소 이외의 다른 화가를 좋아하면 좋을 텐데요" 하고 아내가 말했다.
피카소 이외의 다른 화가? 그야 좋아하는 화가가 또 있긴 하다. <가을의 배>며 <한밤중의 자두> 같은 칼라바지오의 정물화를 보면서 아침식사를 드는 것은 그의 취미에 맞는다. 점심에는─그 불을 뿜는 듯이 화끈한 반 고호의 <해바라기>??같은 캔버스에 타는 듯한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장님이라도 읽을 수 있는 그 꽃이 좋다. 그러나 호화스러운 대향연에서 진정으로 미각을 기쁘게 해줄 비장의 그림은? 보리수 잎과 설화석고(雪花石膏)와 산호를 머리에 이고, 손톱이 길게 자란 손에 삼지창 같은 그림붓을 움켜쥐고, 거대한 꼬리를 휘저으며 지브롤터 일대에 소나기를 뿌리는 바닷속에서 불쑥 나타난 넵튜운(로마의 신화 중의 海神)처럼 수평선을 가로막고 서 있는 사람―<거울 앞에 서 있는 소녀> <게르니카>의 창조자를 제쳐놓고 또 누가 있으랴?
"앨리스,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군. 기차 안에서 나는 생각했지―모두가 다 피카소 그림과 똑같다고!" 그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그러나 과연 실제로 그럴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늘, 땅, 사람들, 붉은 벽돌, 소용돌이 무늬의 철제 발코니, 몇천 개의 지문이 묻은 과일같이 무르익은 만돌린, 종이 풍선처럼 밤바람에 불리어 날아다니다 갈기갈기 찢긴 광고 용지―이 가운데 어느 정도가 피카소 적이었을까? 얼마만큼이나 집어삼킬 듯한 피카소 적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조지 스미스는 여기에 대한 대답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늙은 화가의 테레빈 유(油)와 아마인(亞麻仁) 유 속에 흠뻑 잠겨 조지 스미스의 존재는 늙은 화가의 붓 끝이 그리는 대로 형성되고 말았다―황혼의 <청색 시대>도 새벽녘의 <장미빛 시대>도.
"그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만일 돈이 모이면......" 그는 소리내어 말했다.
"5천 달러도 모으지 못할 거예요."
"그야 그렇겠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오" 하고 그는 조용히 말했다."멋있다고 생각되지 않소? 언젠가는 피카소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파블로, 여기에 5천 달러가 있습니다. 바다든, 해변이든, 저 하늘이든, 그밖의 무엇이든 좋으니 그려주십시오. 우리에게 이보다 더한 행복은......'"
그러자 아내가 그의 팔에 손을 얹고 말했다.
"바다에 들어갔다 나오시는 게 어때요?"
"응. 그게 좋겠군." 그는 대답했다.
그가 물을 헤치며 나아가자 하얀 불꽃이 튀겼다.
오후 내내 조지 스미스는 바닷속에 뛰어들었다 모래 위로 올라왔다 하면서 지냈다―많은 해수욕객들과 함께 물보라를 튀기며. 그러나 그 사람들도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결혼 케익처럼 호텔을 향해서 하나 둘 돌아가기 시작했다―새우빛,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통닭빛, 색시닭빛으로 몸을 물들이고.
몇 마일에 걸친 해변에는 이제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두 남자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은 조지 스미스―타월을 어깨에 걸치고 마지막 예배를 하기 위해 나와 있는 것이었다.
같은 해변 훨씬 저쪽에서 조지보다 키가 작은 네모진 얼굴의 사나이가 조용한 하늘 밑을 혼자 거닐고 있었다. 새까맣게 햇볕에 그을린 사나이의 훌렁 벗어진 머리는 거의 마호가니 빛이었고, 눈은 그 앞에 펼쳐진 바닷물처럼 맑고 반짝반짝 빛났다.
이리하여 해변을 무대로 모든 준비가 다 갖추어졌다. 몇 분 뒤에 이 두 사람은 서로 만나게 되리라. 그리고 운명의 여신은 충격과 놀라움, 만남과 헤어짐을 위한 실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 고독한 방랑자들은 우연의 만남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거리의 온갖 사람들이 서로 팔꿈치를 스치며 지나가는 흐름 속에 뛰어드는 일 따위는. 용기를 내어 흐름 속에 뛰어들면 두 손에 기적을 잡을 수 있다는 것도 그들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그들도 어깨를 움츠리고 그런 어리석은 일에는 등을 돌린 채 운명의 여신의 손에 잡히지 않으려고 둑 위에 두 다리를 버티고 서 있었다.
낯선 사나이는 혼자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자기의 고독을 확인하고, 아름다운 바닷물을 바라보고, 소리없이 지는 저녁해를 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몸을 조금 돌렸을 때 모래 위에 버려진 조그만 나뭇조각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녹아버린 얼음과자의 가느다란 막대기였다. 사나이는 빙그레 웃으며 그 막대기를 주워올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고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다시 몸을 굽혀 ?굅?막대기를 쥔 손을 날렵하게 움직였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그가 익숙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모래 위에다 어떤 터무니없는 형태를 그려나갔다.
하나의 형태를 다 그리자 뒤로 물러서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완전히 그 일에 열중해 버린 이 사나이는 제2, 제3의 형태를 그렸고 또한 제4, 제5, 제6의 형태를 그려나갔다.
해안선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고 있던 조지 스미스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마침내 앞쪽에서 그 사나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새카맣게 그을린 한 사나이가 몸을 굽히고 있었다. 좀더 다가가 보니 그 사나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조지 스미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바닷가에 혼자 있는 이 사나이―나이는 몇 살일까? 예순 다섯일까? 일흔일까?―그는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형태를 마구 그리고 있었다. 모래가 흩날렸다. 어쩌면 저렇게도 거친 그림이 모래 위에 떠오를까! 그리고 또......
조지 스미스는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서 조용히 걸음을 멈추었다.
사나이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므로 자기와 자기가 그린 모래 위 그림의 세계 바로 뒤에 누가 서 있는지 조금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때 사나이는 이미 이 고독한 제작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어 바닷가에 폭탄을 터뜨린다 해도 그의 나는 듯한 손 끝을 멈추게 할 수도, 고개를 들게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조지 스미스의 눈은 모래 위에 못박혔다.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나더니 그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평평한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은 그리스의 사자, 지중해의 양, 금가루 같은 모래로 도톰하게 살이 붙여진 소녀, 손으로 깎은 뿔피리를 부는 사티로스(그리스 신화 중의 怪人으로 半人半神), 뛰노는 어린 양을 거느리고서 꽃을 뿌리고 춤을 추며 바닷가를 거니는 아이들, 하프와 거문고를 켜며 춤추는 악사들, 저 먼 초원으로, 숲으로, 폐허로, 화산으로 달리는 젊은이를 뒤쫓는 유니콘(一角獸), 평평한 해변에 땀을 흘리며 몸을 굽히고 있는 이 사나이의 손과 나뭇조각은 모래 위를 달리며 길게 뻗기도 하고, 원을 그리기도 하고, 매듭을 짓기도 하고, 속삭이기도 하다가 멈추어선다. 그리고 다시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다―마치 태양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전에 이 미친 듯한 향연의 행렬이 화려하게 그 막을 내려야 하는 듯이. 20, 아니 30야드도 넘게 물과 나무의 요정(妖精)들이 줄을 짓고 여름의 분수는 풀 수 없는 상형문자를 이루며 뿜어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사라져가는 햇빛에 반사하는 적동색 모래―그 위에는 먼 훗날까지도 읽히고 찬양받을 메시지가 새겨져 있다. 모든 것이 제각기 독자적인 형태로 춤추고, 독자적인 중심에 중점을 두어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미친 듯이 춤추는 포도주 상인 딸의 포도빛으로 물든 발 밑에서 포도주가 흘러나오는가 하면, 무럭무럭 김이 솟아오르는 바다에서는 황금 칼집 속에서 괴물이 태어난다. 그런가 하면 꽃으로 장식된 연이 흘러가는 구름을 타고 가며 꽃향기를 뿌린다...... 그리고 또...... 또...... 또......
이윽고 예술가의 손길이 멈추었다.
조지 스미스는 뒤로 물러나 꼼짝 않고 있었다.
예술가는 눈길을 들어 그렇게 가까운 곳에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조지 스미스와 모래 위에 발자국같이 무수히 그려진 자기의 그림을 번갈아보았다. 이윽고 사나이는 미소지으며 마치 이렇게 말하듯 어깨를 움츠렸다―"내가 한 짓을 보시오. 꼭 어린애 같지요? 하지만 너무 나무라지는 마십시오. 언젠가는 누구나 다 바보가 되는 법이니까요...... 아마 당신도 그릴 테지요? 이 늙은 바보를 용서해 주십시오. 좋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조지 스미스는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와 맑고 날카로운 눈을 가진 이 키 작은 사나이를 뚫어지게 치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단 한 번 이 사나이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두 사람은 아마 5초쯤 더 그렇게 서 있었을 것이다. 조지 스미스는 모래 위의 그림을 바라보았고, 예술가는 신기한 듯이 조지 스미스를 바라보았다. 조지 스미스는 입을 열려고 하다가 곧 다물고, 손을 내밀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림 쪽으로 다가가려다 다시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바닷가에 떠올라온 어떤 고대 폐허 속의 귀중한 대리석을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연속되는 그림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눈 한 번 깜박거리지 않았고, 손을 대보고 싶으나 용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달려갈 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언뜻 호텔 쪽을 보았다. 달려야 한다! 빨리 달려야 한다! 무엇 때문에? 삽을 가지고 와서 이 무너지기 쉬운 모래 위의 예술품을 구하겠다는 말인가? 수리공을 데리고 와서, 석고공을 데리고 와서 이 무너지기 쉬운 부분의 모양을 본뜨게 하겠다는 말인가? 아니, 아니, 바보 같은 소리다! 그렇다면......? 그의 눈길은 호텔 창문으로 달렸다. 그렇다, 카메라다! 빨리 달려가서 가지고 와야겠다. 그리고 서둘러 찰칵찰칵 찍고 필름을 갈아넣어서 또다시 찰칵찰칵......
조지 스미스는 몸을 홱 돌려서 태양 쪽으로 향했다. 저녁해가 부드럽게 뺨을 태워준다. 눈은 햇빛을 받아 두 개의 작은 불길로 바뀐다. 태양은 절반쯤 물 속에 잠겨 있다. 그가 지켜보고 있는 동안에, 불과 몇 초 동안에 태양은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었다.
예술가는 그에게로 다가와 정답게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마치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속속들이 꿰뚫어보고 있는 듯이. 저런, ?굅?고개를 끄덕여 인사까지 하는군.
얼음과자의 막대기가 손가락 사이에서 슬며시 땅으로 떨어져내렸다. 안녕, 안녕 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윽고 사나이는 바닷가를 따라 남쪽으로 사라져갔다.
조지 스미스는 멍하니 서서 사나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꼬박 1분이 지난 다음에야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일을 했다. 사티로스, 포누스, 포도주에 젖은 소녀, 미친 듯이 춤추는 유니콘, 뿔피리 부는 젊은이 등 이 환상적인 그림의 끝에서부터 천천히 바닷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그림의 향연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 그림에 이르자 방향을 바꾸어 다시 거꾸로 오던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마치 무언가를 땅에 떨어뜨렸는데, 어디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아래만 내려다보며. 하늘에도, 모래 위에도 의지할 만한 빛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그는 줄곧 그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호텔 식탁에 마주앉았다.
"늦으셨군요. 나는 혼자서 저녁을 먹었어요. 너무 배가 고파서요" 하고 아내가 말했다.
"잘했소."
"산책하시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었나요?" 하고 아내가 물었다.
"아니, 별로."
"당신 표정이 이상한데요. 혹시 바다 쪽으로 멀리 헤엄쳐 나갔다가 빠질 뻔한 건 아니에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너무 멀리까지 헤엄쳐 나갔었지요. 그렇지요?"
"응."
"여보." 그녀는 남편을 찬찬히 살펴보며 말했다."앞으로는 그런 짓 하지 마세요. 그럼―무얼 잡수시겠어요?"
그는 메뉴를 들고 읽다가 갑자기 눈을 다른 데로 돌렸다.
"왜 그러세요?" 하고 아내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들어보오."
그녀는 귀를 기울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요."
"들리지 않는다고?"
"네, 무슨 소리가 나지요?"
"파도 소리." 그는 눈을 꼭 감고 말없이 앉아 있다가 ?牟눼?"바닷물이 들어오고 있어."
화룡
The Dragon
황야에 우거진 키 작은 풀들이 밤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그밖에 움직이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다. 멋없이 크고 두루뭉술한 조개껍질 같은 하늘로 둥지를 떠난 새가 날아올라간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한두 개의 돌조각이 부서져 모래흙으로 바뀌는 일로 그나마 목숨이 붙어 있는 듯이 여겨졌던 때도 훨씬 오래 전의 일, 지금은 다만 황야에서 타오르는 고독의 불길로 몸을 태우는 두 사나이의 마음에 밤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어둠은 두 사람의 맥박에서 천천히 물결치며, 관자놀이로 팔목으로 조용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불길의 혀 끝은 두 사람의 거친 얼굴을 아래위로 핥으며 오렌지 빛으로 갈라져서 눈으로 스며들어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조용하고 차가운 숨결과 도마뱀처럼 이따금 깜박이는 속눈썹 부딪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뒤 한 사나이가 칼을 뽑아 모닥불을 마구 일으켰다.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게.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릴 작정인가?"
"어차피 용은 몇 마일 밖에서도 우리의 냄새를 맡을 텐데 뭘 그러나. 신의 숨결은 차가와. 나는 성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네" 하고 또 한 사나이가 말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야. 어차피 잠잘 수는 없고, 우리는......"
"왜? 왜? 용은 절대로 거리에 발을 들여놓지 못해!"
"조용히 하게, 바보같이! 사람들이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가는 동안 그 녀석이 모두 잡아죽이고 있지 않나!"
"먹히는 놈은 모두 먹히라고 해. 나는 돌아가겠네!"
"잠깐만,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나!"
두 사나이는 얼어붙었다.
그대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들리는 것은 그들의 말이 신경질적으로 몸을 떨어 은등자(銀?>?가 탬버린처럼 조용히 흔들리는 소리뿐이었다.
"아아, 악마 같은 고장이로군!" 하고 한 사나이가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이런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지. 태양을 불어버리는 자가 나타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밤이 계속되겠지. 또 있네, 또 있어. 오오, 신이여, 들어주옵소서! 소문에 듣자하니 이 용의 눈은 불이라고 하더군. 내뿜는 숨결이 새하얀 장독( 毒)이 덮인 어둠의 황야를 불태워 유황 냄새와 전차의 폭음 같은 소리를 내고, 풀을 짓이기며 달린다고 하네. 양은 두려워 달아나다가 미쳐서 죽어버리고, 여자들은 그 다음부터 괴물을 낳는다는군. 한 번 당하면 탑도 무너져 흙모래로 변하고, 새벽녘이 되어보면 희생된 사람들의 모습이 언덕 여기저기에 내동댕이쳐져 있다고 하네. 이 괴물을 쳐부수기 위해 나온 용사가 수없이 많았으나 모두 허사였지. 그러니 우리인들 쳐부술 수 있겠나!"
"이제 그만!"
"이제 그만이라니! 이 삭막한 땅에서는 지금이 몇 년인지조차 정확히 알 수 없네!"
"지금은 원시(原始) 9백 년일세."
"아니, 그렇지 않아." 또 한 사나이가 눈을 감고 나직하게 말했다."이 황야에 시간이란 없네. 다만 영겁(永劫)이 있을 뿐이지. 말을 달려온 길을 되돌아가 봐야 거기에는 거리가 없을 걸세. 사람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모든 것이 다를 거야. 집을 세울 주춧돌과 뼈대로 삼을 만한 재목은 아직 베어지지 않은 채 숲 속에 있을 걸세. 어떻게 내가 그것을 아느냐고 묻지 말게. 황야가 말해 주고 있다네. 그런데 우리는 여기 이 용의 고장에 단둘이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을 뿐일세. 오오, 신이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두려워하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갑옷 끈을 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네."
"갑옷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용은 어디서인지 모르게 불쑥 나타날 텐데...... 어디서 사는지도 알 수 없고, 사라지는 곳은 안개 속. 그러니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네. 좋아, 갑옷으로 몸을 감싸면 죽은 모습이 추하게 보이지 않겠지."
은빛 갑옷을 반쯤 여미다가 사나이는 언뜻 손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저 먼 어둠의 들판 끝, 밤과 허무가 가득찬 황야의 심장으로부터 느닷없이 한 가닥 바람이 일고, 먼지와 쓰레기로 때를 알리는 천 개의 시계인 지표(地表)에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이 새로운 바람의 중심부에 한 점 검게 타오르는 태양이 있고, 둘레에 온통 흩날리는 것은 지평선 저쪽에 숨어 있던 수없이 많은 가을의 타는 듯한 낙엽이었다. 이 바람의 눈에 띄는 것은 모두 녹아서 뼈는 백랍처럼 늘어지고, 피는 진흙처럼 걸죽하게 되어버린다. 이 바람은 언제나 떼지어 움직이는 몇천의 죽어가는 영혼. 바람인가 하면 안개, 안개인가 하면 어둠. 이미 여기는 인간이 발디딜 땅이 아니었다. 세월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다만 거기에 두 사나이가 밋밋한 허무의 덩어리로 응결되었고, 그 위에서 번개가 칠 뿐이었다. 그 번개가 떨어지는 거대한 초록빛 유리판 저쪽에 폭풍우와 천둥이 움직이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흠뻑 젖어 숨도 쉴 수 없으리만큼 정적에 싸인 황야에 두 사나이는 우뚝 서 있었다. 이 으스스 찬바람 부는 계절에 온 몸을 불태우며.
"저기에, 오오, 저기에......" 하고 한 사나이가 속삭였다.
몇 마일 앞에서 귀청이 뚫어질 듯 울려오는 어떤 소리―바로 용의 소리였다.
두 사나이는 말없이 갑옷을 여미고 각각 말에 올라탔다. 차츰 가까이 다가오는 온 누리를 뒤흔들 듯한 용의 소리에 깊은 밤의 황야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그 불타는 듯한 노란 눈빛이 언덕 위에서 번뜩일 때 멀찍이 어렴풋하게 검은 그 몸이 꿈틀 하고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용은 순식간에 언덕을 넘어 골짜기로 사라졌다.
"빨리!"
두 사나이는 작은 동굴로 말머리를 돌려 박차를 가했다.
"저기서 나온다!"
손에 창을 든 두 사나이는 각각 말에 눈가리개를 씌워 앞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오오, 하느님!"
"신이여, 도우소서!"
순식간에 용은 언덕을 한 바퀴 휘감았다. 용은 커다란 눈을 호박빛으로 빛내며 두 사람을 사로잡았으며 그들의 갑옷을 붉게 물들였다.
소름이 끼칠 듯한 슬픈 외침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용은 차바퀴처럼 발을 구르며 덤벼들었다.
"신이여, 은총을 내리소서!"
속눈썹이 없는 노란 눈―그 밑에 창을 박았다. 창이 휘어지고, 사나이는 하늘로 들어올려졌다. 그것을 용이 걷어차 땅에다 내동댕이친 다음 그 위를 밟고 지나가자 말도 사나이도 커다란 바위에 부딪쳐 짓눌리고 말았다. 용은 새된 소리로 마구 울부짖었으며, 주위는 온통 새빨간 불바다였다. 분홍색, 노란색, 오렌지 색의 태양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구름이 눈 앞을 겹겹이 가렸다.
하나의 목소리가 외쳤다.
"여보게, 보았지? 내 말이 맞았지!"
"정말 그렇군! 갑옷을 입은 기사였어, 해리! 나동그라지더군!"
"기차를 멈출까?"
"한 번 멈추어본 일이 있는데, 아무것도 없었어. 이런 들판에서 멈추다니, 난 질색이야. 어쩐지 소름이 끼치고 기분이 나쁘거든."
"하지만 무언가를 걷어찼어. 틀림없어!"
"그렇게 기적을 울렸는데도 달아나지 않았잖나!"
기적 소리가 안개를 헤치며 울려퍼졌다.
"스토클리에는 제 시간에 닿겠지. 석탄을 더 지필까, 플레드?"
또다시 기적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우박을 뿌렸다. 밤기차는 화난 듯이 불을 뿜었다. 좁은 골짜기 사이를 마구 달렸다. 언덕을 올라갔다. 울퉁불퉁한 대지를 북쪽으로 북쪽으로 달려갔다. 뒤에 남은 검은 연기와 증기는 뒤흔들린 공기 속에 녹아버렸다. 기차가 지나간 다음 몇 분 사이에.
멜랑콜리의 묘약
A Medicine for Melancholy
"거머리를 잡아오십시오. 피를 빨려야겠습니다" 하고 김프 의사가 말했다.
"이 아이에게는 이미 피가 남아 있지 않아요!" 윌크스 부인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선생님. 대체 우리 캐밀리어는 어디가 나쁜 거지요?"
"어쨌든 상태가 좋지 않군요."
"그래서요?"
"아무튼 병에 걸려 있습니다." 의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병인지 말씀해 주세요."
"바람 앞에 켠 등불과 같습니다."
"김프 선생님, 그렇다면 아까 선생님이 오셨을 때 우리가 한 말과 똑같은 말을 해주고 돌아가시는 게 아닙니까?" 윌크스 씨가 옆에서 항의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환약을 먹이십시오―새벽과 점심때와 해질 무렵에. 특효약입니다!"
"제기랄! 이 아이는 벌써 특효약으로 뱃속이 가득차 있단 말입니다!"
"쯧쯧! 돌아가기 전에 1실링 주십시오."
"썩 물러가시오!" 윌크스 씨는 의사의 손에 은화 한 개를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그러자 의사는 숨을 헐떡이며 담배를 한 모금 피우고 재채기를 한 다음 쿵쿵 발소리를 울리며 계단을 내려가 혼잡한 런던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1762년 보슬비가 내리는 어느 봄날 아침의 일이었다.
윌크스 부부는 사랑하는 딸 캐밀리어가 누워 있는 침대 옆으로 갔다. 캐밀리어는 핏기없이 여위었으나, 아직도 아름다왔다. 커다란 연보랏빛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아름다운 금발이 베개 위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아아!"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나는 어떻게 될까요? 이른봄부터 벌써 3주일째나 이렇게 누워 있으니, 거울을 보면 마치 유령 같아요. 나 자신이 보아도 소름이 끼칠 정도예요. 아아, 20살 생일도 맞이하지 못한 채 죽는다고 생각하니―"
"얘야, 어디가 아프냐?" 하고 윌크스 부인이 물었다.
"이 팔이, 그리고 다리도, 가슴도, 머리도 다 아파요. 벌써 의사 선생님이 몇 사람이나 왔었지요?―여섯 사람이었던가요?―꼬치에 끼워진 고기처럼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으며 나를 진찰했잖아요. 이젠 질색이에요. 제발 조용히 죽게 해주세요!"
"정말 끔찍하고도 이상한 병이에요, 여보. 무슨 수를 좀 써주세요!" 윌크스 부인이 말했다.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오? 윌크스 씨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의사도 약사도 그리고 목사도 손을 떼는데!―될 대로 되라지!―나는 이미 빈털터리가 되어버렸어! 저 한길에 뛰어나가 넝마주이라도 불러오란 말인가?"
"맞아요, 그게 좋겠어요"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세 사람 모두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캐밀리어의 남동생 제이미가 있다는 것을 세 사람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제이미는 저쪽 창가에 서서 이를 쑤시며 보슬비가 내리는 북적대는 거리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4백 년 전에 그렇게 해 보았는데 잘됐었대요. 그렇다고 넝마주이를 불러오라는 말은 아니에요. 다만 침대에 눕힌 채 누나를 들어서 아래층에 내려다 현관 앞에 놓아두는 거예요" 하고 제이미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왜? 무엇 때문에?"
"한 시간쯤 동안에" 제이미의 눈은 사람의 수를 세듯이 움직였다."천 명도 넘는 사람들이 우리 집 문 앞을 지나가겠지요. 하루면 2만 명입니다―달려가는 사람, 절룩거리는 사람, 마차를 탄 사람...... 모두 몹시 쇠약해진 누나를 보고는 누나의 이를 세어보기도 하고 귓밥을 잡아당겨 보기도 하겠지요. 그 사람들이 특효약을 가르쳐줄는지도 모릅니다! 그 가운데 어느 하나가 효험있으면 좋지 않겠어요!"
"아아,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윌크스 씨가 어리둥절하여 외쳤다.
"아버지!" 제이미는 숨?微?말했다."<의약전서> 정도는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요? 목이 아플 때는 초록색 고약이 좋고, 말라리아나 배가 딴딴해졌을 때는 소의 고약이 좋고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만 명 이상이나 되는 자칭 약장수들이 한길을 지나가고 있을 겁니다―그런데 우리는 그 말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제이미, 넌 정말 멋진 생각을 해냈구나!"
"그만둬요!" 윌크스 부인이 말참견을 했다."내 딸을 구경거리로 내놓을 수는 없어요. 이 거리에서도 저 거리에서도―"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당신!" 윌크스 씨가 나무랐다."캐밀리어가 눈처럼 창백해지고 여위어버렸는데도 이 더운 방에서 밖으로 내보내주는 것이 싫단 말이오? 자아, 제이미, 침대를 들어올리자!"
"캐밀리어, 네 생각은 어떠니?" 윌크스 부인이 딸을 보고 물었다.
"죽을 바에는 차라리 밖에서 죽고 싶어요. 서늘한 산들바람에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나는......" 하고 캐밀리어가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그만둬!" 윌크스 씨가 말했다."너는 죽지 않아. 제이미, 어서 들어올리자! 그래, 그렇게! 이봐, 비켜, 당신! 자아, 제이미, 좀더 높이 들어올려라!"
"오오, 나는 날아갈 것 같아요. 날아갈 것만 같아요......!" 캐밀리어가 가느다랗게 소리쳤다.
갑자기 런던 위에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시민들은 갑작스러운 날씨의 변화에 놀라 밖으로 뛰어나와 구경하기도 하고 일터로 가기도 하고 물건을 사기도 하며 저마다 서둘렀다. 눈먼 거지는 노?罐0? 개들은 뛰어다녔으며, 어릿광대는 춤을 추고 공중제비를 돌았으며, 아이들은 분필로 낙서를 하고 공을 던졌다. 마치 축제가 시작된 것 같았다.
이마에 푸른 힘줄을 세우고 비틀거리며 제이미와 윌크스 씨는 이러한 한길로 캐밀리어를 날라다놓았다. 캐밀리어는 가마에 탄 여자 법왕처럼 눈을 꼭 감고 기도의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조심하세요!" 윌크스 부인이 걱정스럽게 말했다."아아, 죽으면 어떡해요! 안돼요! 거기, 거기, 거기에 내려놓으세요. 가만히......"
이리하여 캐밀리어―상품처럼 사람들 앞에 놓여진 크고 창백한 발트론메오의 <인형>―가 밀려오는 자애(慈愛)의 물결을 맞이할 수 있도록 침대는 집 정면에 놓였다.
"펜과 잉크와 종이를 가져오너라, 제이미"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이제부터 사람들이 말하는 증상이며 치료법을 적어두어야겠다. 밤에 그것을 검토할 수 있도록. 자아―"
벌써 지나가던 군중 속에서 캐밀리어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뚫어지게 보고 있는 사나이가 하나 있었다. 그 사나이가 말했다.
"저 소녀는 병에 걸렸군!"
"그렇소" 하고 윌크스 씨는 기쁜 듯이 소리쳤다."자아, 시작이다. 얘야, 펜을 이리 다오. 그래, 그래. 어서 말씀하십시오!"
사나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몸이 좋지 않군요. 병에 걸려 있어요."
"병이라―" 하고 윌크스 씨는 받아쓰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당신은? 당신은 의사요?"
그는 미심쩍다는 듯이 그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네, 그렇소."
"어쩐지 어디서 들은 듯한 말투라고 생각했지. 제이미, 내 스틱을 가지고 와서 이 사나이를 쫓아버려라! 자아, 어서 썩 물러가시오!"
그 사나이는 몹시 화를 내며 지독한 욕을 퍼붓고 급히 가버렸다.
"'몸이 좋지 않군요. 병에 걸려 있어요'라고...... 빌어먹을!"
윌크스 씨는 흉내를 내다가 문득 그만두었다. 이제 방금 무덤 속에서 나온 유령같이 깡마르고 키 큰 여자가 캐밀리어에게 손가락 하나를 들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울증(멜랑콜리)이로군요" 하고 여자는 가락을 붙여 말했다.
"우울증?" 하고 윌크스 씨는 만족스러운 듯이 적었다.
"폐의 출혈" 하고 여자가 노?罐5?말했다.
"폐의 출혈!" 윌크스 씨는 받아쓰면서 빙그레 웃었다."그렇지, 그럴 듯한 말이오!"
"우울증의 묘약이 필요한데요." 창백한 여자는 말했다."댁에 미이라를 간 가루약이 있나요? 미이라 가루 중 최고품이라면 이집트 산, 아라비아 산, 힐라스파토스 산, 리비아 산―모두 자성(磁性)의 병에는 매우 잘 듣지요. 나를 찾아오세요―나는 플로덴 거리에 사는 집시라오. 파드득 나물이며 유향(乳香)의 수꽃술도 팔지요―"
"플로덴 거리, 파드득 나물이라―좀더 천천히 말씀하시오."
"―그리고 오레오 수지(樹脂), 흑해에서 나는 길근초(吉根草)―"
"잠깐만 기다리시오! 오레오 수지―였지요! 제이미, 저분을 붙들어라!"
그러나 여자는 약 이름을 늘어놓고는 소리없이 사라졌다.
이번에는 아직 17살 정도밖에 안되는 소녀가 와서 캐밀리어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이 사람은―"
"잠깐만!" 하고 말하고 나서 윌크스 씨는 열심히 받아적기 시작했다."―자성의 병―흑해에서 나는 길근초라―이건 됐고. 그럼, 이번에는 아가씨, 내 딸아이의 얼굴에서 무엇이 보입니까? 당신은 아까부터 뚫어지게 바라볼 뿐 숨도 쉬지 않고 있는 것 같았는데, 말 좀 해보시오."
"이 사람은―" 그 낯선 소녀는 캐밀리어의 눈을 살피듯이 들여다보고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이 사람의 병은...... 저어......"
"빨리 말해 봐요!"
"이 사람은...... 이 사람은...... 아아!"
소녀는 캐밀리어에게 다시 한 번 깊은 동정의 눈길을 던진 다음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바보 같은 여자로군!"
"아니에요, 아버지." 캐밀리어는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바보가 아니에요. 그녀는 보았어요. 알았어요. 제이미, 그녀를 붙잡아다 말 좀 듣게 해다오!"
"그녀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 그 집시 여자가 늘어놓은 약 이름을 좀 보렴."
"그건 알고 있어요, 아버지."
캐밀리어는 더욱 창백해지며 눈을 감았다.
누구인지 헛기침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보니 앞치마를 싸움터에서처럼 새빨갛게 물들인 푸주관 주인이 무시무시한 콧수염을 곤두세우고 서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얼굴이 이렇게 된 소를 본 적이 있소. 브랜디와 신선한 달걀 세 개를 먹여 겨우 그 소를 살렸지요. 지난겨울에는 나 자신이 같은 영약(靈藥)으로 목숨을 건졌소―"
"내 딸은 소가 아니오!" 윌크스 씨는 펜을 내던졌다."당신 같은 사람과는 격이 달라요! 그리고 지금은 겨울이 아니잖소! 자아, 물러나시오. 다음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밀려왔다―어떤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드는 묘약을, 또 어떤 사람은 영국의 어느 곳보다도 남 프랑스의 어느 곳보다도 비가 적게 내리고 맑은 날이 많은 시골을 권하고 싶어서 안달했으며, 나이든 사람들, 특히 나이든 의사들은 서로 스틱을 맞부딪쳐가며 다가왔다.
"돌아가 주세요!" 윌크스 부인이 겁을 먹고 외쳤다."딸이 딸기처럼 짓밟히겠어요!"
"물러들 가요!" 하고 제이미는 스틱을 빼앗아 폭도들의 머리 위로 집어던졌다.
그들은 몸을 돌려 그 스틱을 찾느라고 야단이었다.
"아버지, 나는 이제 가망이 없어요" 하고 캐밀리어는 숨을 헐떡거렸다.
"아버지!" 제이미가 외쳤다"이 소동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이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는 겁니다! 돈을 받고 요법을 들어주는 거예요!"
"제이미, 과연 너는 내 아들이로구나! 어서 빨리 그렇게 하자! 간판을 써야겠군! 여러분, 들으십시오! 2펜스씩 받겠습니다! 한 줄로 서시오. 말씀을 하시려면 2펜스를 내야 합니다! 자아, 돈을 내시오! 네, 그렇게요! 네, 좋습니다, 부인. 자아, 이쪽 선생님. 그럼, 펜을 들고 받아쓰겠습니다. 어서 시작하십시오!"
폭도들은 어두운 바다처럼 들끓었다.
캐밀리어는 한 눈을 떴다가 다시 기절했다.
해가 지자 한길은 텅 비었다. 어슬렁거리는 사람이 몇몇 있을 뿐. 귀에 익은 짤랑거리는 소리에 캐밀리어의 눈꺼풀이 나방처럼 파닥이기 시작했다.
"3백 99, 4백...... 4백이나 되는군!"
윌크스 씨는 싱글거리며 아들이 쥐고 서 있는 자루에 마지막 동전을 집어넣었다.
"자아, 어떠냐!"
"그것으로 훌륭한 검은 장의차 값을 치를 수 있겠군요" 하고 창백한 딸이 말했다.
"쉿!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2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돈을 내면서까지 자기 의견을 말해 주다니, 상상이나 해 보았니?"
"그래요. 아내도, 남편도, 아이들도 모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말을 들어달라고 기꺼이 돈까지 냈던 거예요. 불쌍한 사람들이지요. 모두들 자기만이 편도선염이며 수종(水腫)이며 마마에 대해 알고 있다고, 슬레이버와 두드러기를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밤 우리에게는 돈이 들어왔고, 2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의학 지식의 알맹이를 모두 우리 집 현관에 내려놓아 무척 행복해졌어요" 하고 윌크스 부인이 말했다.
"제기랄, 처음에 소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개처럼 물어뜯다시피하여 쫓아버리지 말 걸!"
"적은 것을 읽어보세요, 아버지." 제이미가 말했다."―2백 가지의 요법을. 그 중에서 어떤 것이 효험있을까요?"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캐밀리어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어두워졌어요. 너무나도 많은 요법을 들어서 속이 메슥거려요. 2층으로 데려다주지 않겠어요?"
"그러자꾸나. 제이미, 들어올려라."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절반쯤 굽힌 채 두 사람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체격의 넝마주이가 거기에 서 있었다. 얼굴이 그을음으로 더럽혀져 있고, 하늘빛 눈이 반짝였으며, 웃으면 상아 같은 이가 보였다. 그가 몸을 움직이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하는 도중에도 소매며 바지에서 검댕이 우수수 떨어졌다.
"굉장히 사람들이 많아서 여태껏 오지 못했습니다" 하고 그는 더러운 모자를 손에 든 채 말했다."그래서 지금 돌아가는 길에 들러보았습니다. 돈을 내야 합니까?"
"아니에요, 아저씨. 괜찮아요" 하고 캐밀리어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 안된다―" 하고 윌크스 씨가 항의했다. 그러나 캐밀리어의 상냥한 눈길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한 가지만 충고하겠습니다."
넝마주이의 미소는 퍼지는 황혼 속에서 따뜻한 햇빛처럼 반짝였다. 그는 캐밀리어를 들여다보았다. 캐밀리어도 그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보스코 성인(? "달빛이 비치는 밖에다가요?" 하고 윌크스 부인이 물었다.
"달빛을 받으면 미치지 않을까요?" 하고 제이미가 말했다.
"실례입니다만―" 하고 넝마주이는 꾸벅 절을 하고 말했다."보름달은 앓는 사람을 위로해 준답니다―사람이건 야생동물이건. 차분한 빛깔과 조용함이 흘러넘치는 보름달빛을 받으면 몸도 마음도 상쾌하게 가라앉지요."
"하지만 비가 내릴지도......" 윌크스 부인이 불안한 듯 말참견을 했다.
"맹세합니다만 나의 누이동생도 이와 같은 병세였습니다." 넝마주이는 재빨리 말했다."달이 떠오른 봄날 밤 화분에 심은 백합처럼 누이동생을 밖에 내놓았었지요. 그 누이동생은 지금 웨섹스 주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새로 태어난 것처럼 건강하답니다."
"새로 태어난 것처럼! 달빛! 그렇다면 오늘 모인 4백 펜스를 하나도 쓰지 않아도 되겠구료. 여보, 제이미, 캐밀리어!"
"안돼요! 안돼요, 그건!" 하고 윌크스 부인이 소리쳤다.
"어머니" 하고 캐밀리어가 불렀다.
그녀는 넝마주이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더러운 얼굴을 한 넝마주이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미소는 어둠속에서 비치는 작은 초생달 같았다.
"어머니, 나는 달님이 나의 병을 고쳐주실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틀림없이......" 하고 캐밀리어가 말했다.
윌크스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낮이건 밤이건 나는 필요없나 보구나. 그럼, 마지막 키스나 하게 해다오."
그리고 나서 윌크스 부인은 2층으로 올라가버렸다.
넝마주이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모두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밤새도록 나와 있어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달빛 아래에―새벽까지 조금도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꼭 주무세요, 아가씨. 그리고 꿈을 꾸는 겁니다, 멋진 꿈을.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어둠이 그을음을 삼켜버렸다. 넝마주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윌크스 씨와 제이미는 캐밀리어의 이마에 키스했다.
"아버지, 제이미, 걱정 마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혼자 남겨진 캐밀리어는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하나의 미소가 떠올라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며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것을 본 듯했다.
그녀는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런던의 밤. 술집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졸린 듯했으며, 문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술 취한 사람들의 작별 인사, 탁상시계의 차임 소리. 캐밀리어는 보았다―고양이가 여자처럼 털가죽을 입고 지나가는 것을. 여자가 고양이처럼 지나가는 것을―양쪽 다 빈틈없는 집시처럼 약 냄새를 몹시 풍기고 있었다. 15분마다 2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니, 얘야?"
"네, 아버지."
"어떠니, 캐밀리어?"
"어머니, 제이미, 염려 말아요."
그리고 마침내―"잘 자거라."
"안녕히 주무세요."
마지막 등불이 꺼졌다. 런던은 잠들어버렸다.
달이 떠올랐다.
달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한길이며 뒷거리며 오솔길을 바라보는 캐밀리어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한밤중이 되자 달은 그녀의 머리 위에 떠올라 고대의 무덤 꼭대기에 있는 대리석상 같은 그녀의 모습을 비추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이 있었다.
캐밀리어는 귀를 곤두세웠다.
가느다랗게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한 사나이가 골목의 그늘에 서 있었다.
캐밀리어는 숨을 죽였다.
사나이는 손에 든 비파를 뜯으며 달빛 속으로 나왔다. 옷차림도 훌륭하고 단정한 얼굴의 사나이로, 어딘지 위엄마저 풍겼다.
"음유시인이로군요" 하고 캐밀리어가 말했다.
사나이는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대고 천천히 앞으로 나와 그녀의 침대 옆에 섰다.
"이렇게 늦은 밤에 무얼 하고 계시지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어찌된 일인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어떤 친구의 부탁을 받고 당신의 병을 고쳐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사나이는 비파줄에 손을 댔다.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은빛의 달빛을 받아 참으로 아름다왔다.
"그럴 리가 없어요. 달님이 나를 고쳐줄 거라고 어떤 분이 말했어요."
"그 말이 맞습니다, 아가씨."
"당신은 어떤 노래를 부르세요?"
"봄날 밤의 노래, 이름모르는 아픔이나 병을 고쳐주는 노래입니다. 당신이 앓는 열병의 이름을 말할까요, 아가씨?"
"아신다면 가르쳐주세요."
"첫째 증상은―심한 열이 났다가는 갑자기 내리고, 심장이 빨리 뛰었다가는 늦어지고, 몹시 신경이 곤두섰다가는 다시 차분해지고, 우물물만 마셔도 취하고, 손을 대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지요. 이렇게 살짝 대기만 해도―"
그는 그녀의 손목에 손을 대자 그녀가 감미로운 망각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을 보며 뒷걸음질쳤다.
"우울해졌는가 하면 곧 흥분하고" 사나이는 말을 계속했다."꿈을 꾸는가 하면―"
"그만하세요!" 캐밀리어는 황홀한 듯이 외쳤다."나에 대해 당신은 무엇이든 다 알고 계시는군요. 어서 병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그럼, 말하겠습니다."
사나이는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댔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떨었다.
"병 이름은 <캐밀리어 월크스>라고 합니다."
"이상하군요." 그녀는 몸을 떨었다. 눈에서 라일락 빛 광채가 반짝였다."그렇다면 나 자신이 병의 원인인가요? 자기가 자기를 앓게 하고 있단 말씀이군요. 아아, 이 가슴에 손을 대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의 손발이 여름의 태양처럼 불타고 있어요!"
"네, 나의 손가락도 타는 듯합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밤바람에 떨고 있어요. 보세요, 이렇게―오오, 추워! 나는 죽을 거예요. 틀림없이 죽을 거예요!"
"아닙니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겠습니다" 하고 사나이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당신은 의사 선생님이신가요?"
"아니오, 오늘 당신의 병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병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군중 속으로 달아나버린 그 소녀와 같습니다."
"네, 그녀의 눈을 보고 나도 알았어요. 나의 병이 무엇인지 그 소녀는 알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아아, 이가 마구 부딪쳐요, 그런데 담요가 이것뿐이니!"
"나를 넣어주십시오. 옳지, 그렇게. 두 팔, 두 다리, 머리와 몸, 이제 다 됐습니다!"
"무슨 짓을 하시는 거예요!"
"밤의 추위에서 당신을 지켜드리려는 겁니다."
"어머나, 난로 같군요! 나는 당신을 알고 있나요? 당신의 이름은?"
"보스코."
그의 머리가 그녀의 머리를 재빨리 덮었다. 싱싱하고 맑은 물 같은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미소지을 때 하얀 이가 산뜻해 보였다.
"아마 그런 이름의 성자(?>?가 있었지요?"
"한 시간만 있으면 나를 그렇게 부르게 될 겁니다."
그의 머리가 바싹 다가왔다. 그리하여 어둠 속에 사라졌던 아까 그 넝마주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는 엉겁결에 환성을 질렀다.
"아아, 세계가 빙빙 돌아가는 것 같아요. 나는 죽을 거예요. 나를 고쳐주세요. 상냥한 의사 선생님, 모든 것이 사라져요!"
"이제 곧 나을 겁니다. 이렇게 하면......"
어디선가 고양이가 울었다. 창문에서 던져진 구두 한 짝이 울타리 저쪽으로 고양이를 쫓아버린다. 이윽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달이......
"쉿......"
새벽녘 월크스 부부는 살금살금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안뜰을 들여다보았다.
"어젯밤의 추위로 틀림없이 얼어죽었을 거예요."
"아니야, 저것 보오! 살아 있어! 볼에는 장미빛이 돌고! 아니, 그보다 분홍빛이라고 해야겠군. 주홍빛이야! 장미빛으로, 우유빛으로 반짝이고 있어! 사랑스러운 캐밀리어는 완쾌됐어!"
두 사람은 잠들어 있는 딸의 옆에 몸을 굽혔다.
"오오, 웃고 있어. 꿈을 꾸고 있나 보오. 뭐라고 말하는 것일까?"
"묘약이에요" 하고 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 뭐라고?"
딸은 꿈 속에서 다시 미소짓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우울증의 묘약......" 그녀는 반짝 눈을 뜨고 외쳤다."오오, 어머니, 아버지!"
"오오, 얘야! 내 딸아! 2층으로 올라가자!"
"아니에요, 어머니, 아버지."
그녀는 부모의 손을 잡았다―다정하게.
"왜 그러느냐?"
"아무도 모를 거예요. 햇님이 떠오를 뿐이에요. 제발 나와 함께 춤추어주세요."
그들은 춤추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을 축하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들은 춤을 추었다.
시작의 끝
The End of the Beginning
그는 뜰 한가운데에서 풀 베는 기계를 멈추었다. 지금 막 해가 지고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얼굴이며 몸에 달라붙어 있는 갓 벤 풀들이 축 늘어지며 시들었다. 분명히 별이 떠 있다. 처음에는 희미한 빛이었으나 지금은 맑게 갠 사막의 하늘에서 밝게 반짝이고 있었다. 현관의 망사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밤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자기를 아내가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곧 그 시간이 될 거예요" 하고 아내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를 볼 필요도 없었다. 순식간에 부쩍 늙어버렸다는 생각이 드는가 하면 곧 젊어진 듯했고, 무척 춥다고 생각되었다가는 갑자기 더워지기도 하는 등 정신없이 느낌이 바뀌었다. 갑자기 그는 몇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혼자 있었다. 어느덧 자기의 아들이 되어 있었다―새로운 제복으로 몸을 감싸고, 식량과 산소통과 기밀(氣密) 헬멧과 우주복을 점검하고, 오늘 밤 땅 위에 있는 누구나가 다 그렇게 하듯 순식간에 하늘을 가득 채우는 별을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가슴과 되살아나는 공포를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지껄이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아들로.
그러다가 언뜻 정신이 들어 다시 아버지로 돌아갔다. 그는 아직도 손에 풀 베는 기계의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아내가 불렀다.
"포치에 와서 앉지 않으시겠어요?"
"가만히 있을 수가 없구료!"
아내는 층계를 내려 잔디를 밟으며 다가왔다.
"보브의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그애는 문제없어요."
"하지만 이번이 처음이잖소" 하고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지금까지 한 번도 거행된 일이 없었단 말이오. 생각 좀 해보구료―첫 우주정거장을 세우기 위해 오늘 밤 사람을 태운 로켓이 발사된다는 것을. 어쨌든 지금까지는 이런 일이 거행된 적도 존재한 적도 없었으니까. 로켓도 없었고, 실험장도 없었고, 이륙(離陸) 시간도 몰랐고, 전문 기술자도 없었단 말이오. 그러고 보니 보브라는 아들도 없는 거나 다를 바 없군. 모든 것이 나에게는 힘겨운 일이오!"
"그렇다면 이런 데 나와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멍청히 쳐다보고만 있으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아침 늦게 회사에 가는데, 누가 크게 웃는 소리가 들리더군. 나는 움찔하며 한길 한가운데에 얼어붙은 듯이 서버렸지. 그런데 바로 나였단 말이오, 웃고 있었던 것은! 왜 그랬을까? 보브 녀석이 오늘 밤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정말로 알았기 때문이었소. 마침내 나는 그것을 믿게 되었단 말이오. 신성하다는 말을 나는 여태까지 써본 일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붐비는 속에 우뚝 서자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이오. 그리고 오후에는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오더군. 알고 있겠지, 이 노래―<수레 속에 또 하나의 수레. 머나먼 공중을>. 나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소. 그야 물론 우주정거장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공중에서 바퀴살이 돌아가는 커다란 수레―그 속에서 보브는 6개월, 아니면 8개월 동안 생활한 다음 달세계로 옮겨간단 말이오.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노래의 다음 귀절이 머리에 떠오르더군. <작은 수레바퀴는 신념으로 돌아가고, 큰 수레바퀴는 신의 은총으로 돌아간다>. 나는 펄쩍 뛰어오르다시피 하며 환성을 질러 몸 안의 불을 모두 꺼버리고 싶었지!"
아내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왕 밤에 나와 있으니까 편히 앉아요."
두 사람은 등의자를 잔디밭 한가운데 놓고 조용히 앉았다. 별은 어둠 속에서 나타나 지평선 저 멀리까지 뿌려진 연푸른 돌소금 가루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아내가 말했다.
"마치 해마다 시슬레이 필드에서 열리는 불꽃놀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오늘 밤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이 나와 다니겠지......"
"나는 생각해요―지금 몇십억이라는 사람들이 꼼짝 않고 모두 한결같이 입을 멍하니 벌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거라고요."
두 사람은 기다렸다. 의자 밑의 땅이 움직였다.
"지금 몇 시지요?"
"8시 11분 전이오."
"당신은 언제나 시간을 잘 맞추는군요. 마치 머릿속에 시계가 들어 있는 듯이."
"오늘 밤이야 더욱 틀릴 리가 없지. 발사되기 1초 전도 알아맞출 수가 있소. 저것 보오! 10분 전의 신호가 오르는군!"
서쪽 하늘에 네 개의 새빨간 불꽃 신호가 올라가더니 사막 위를 불어젖히는 바람을 타고 깜박이다가 조용히 꺼지며 땅 위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다시 어둠이 찾아들었다. 부부는 등의자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한참 뒤 남편이 말했다.
"8분 전."
또다시 침묵.
"7분 전."
아까보다 더욱 길게 느껴지는 침묵.
"6......"
아내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바로 머리 위의 별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어째서, 어째서 로켓을 오늘 밤에...... 어째서 이런 일을 할까요? 나는 알고 싶어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는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끝없이 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은하(銀河)의 빛 속에서 그 얼굴은 창백했다. 그는 대답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아내가 말을 계속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 대답의 되풀이가 아니에요―어째서 ?7뭣뵈?산에 올라가느냐고 물었을 때 '왜냐하면 그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대답하셨었지요. 나는 지금 그런 식의 대답은 듣고 싶지 않아요.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 것은 대답이 아니거든요."
(앞으로 5분 남았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시계는 똑딱똑딱 움직였다...... 그의 팔목시계...... 수레 속에 또 하나의 수레, 작은 수레바퀴는...... 큰 수레바퀴는...... 저 먼 하늘을...... 앞으로 4분!...... 승무원들은 이미 로켓에 들어가 있겠지. 그 상자 속에, 콘트롤 보드(制御盤)의 불빛이 깜박인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다만 이것이 시작의 끝이라는 것뿐이오. 이 순간부터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이러한 모든 시대를 총괄하여서 하나의 명칭을 붙일 수 있지―<지구 위를 걸어가고, 아침에 새 소리를 듣고, 선망(羨望)의 소리를 지르던 시대>라고 말이오. 아마도 <지구시대>, 또는 <지구인력시대>라고 부르면 되겠지. 몇십억 년 동안 우리는 지구 인력과 싸워왔소. 우리는 아메바나 어류(魚類)였던 시대에 지구 인력에 짓눌리지 않고 바다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했지. 그리고 무사히 육지로 올라오자 새로 생긴 척추가 인력으로 인해 부러지지 않도록 있는 힘을 다했고, 성큼성큼 걸을 수 있고 쓰러지지 않도록 노력했지. 몇십억 년 동안이나 인력은 우리를 지구에다 묶어놓고 비바람이며 양배추나방이며 메뚜기 등으로 우리를 괴롭혔어. 오늘 밤 일의 크나큰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가 있소...... <지구인력시대>의 옛 사람들과는 작별을 고하고, 이 시대도 이미 오늘 밤이 마지막인 셈이오. 어디서부터 시대를 구분해야 할지 나로서는 모르겠소. 하늘을 나는 융단을 꿈꾸던 페르시아 사람에게다 경계선을 두어야 할지, 아니면 그저 천진스럽게 과자를 잔뜩 장식해 놓고 하늘높이 불꽃을 쏘아올려 생일이나 새해를 축하하던 중국 사람에게 두어야 할지, 또는 다음 시대의 어떤 경이적인 순간에 두어야 할지―아무튼 우리는 10억 년의 노력 끝에 와 있소. 긴 세월이지만 지금 우리 인류로서는 어쨌든 번영하는 시대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오."
앞으로 3분...... 2분 59초...... 2분 58초......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아직 모르겠어요" 하고 아내가 말했다.
(앞으로 2분 남았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준비는 다 되었을까? 되었을까? 되었을까? 멀리서 라디오가 외치고 있었다. 준비 완료! 준비 완료! 준비 완료! 쿠르릉 하고 로켓에서 희미한 대답이 들려왔다. 체크! 체크! 체크!
그는 생각했다―오늘 밤 이 첫 발사에 실패하더라도 제2, 제3의 발사를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온갖 혹성을 향해, 나중에는 온갖 항성을 향해 쏘아올릴 것이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날아가리라―불멸이니 영겁이니 하는 거창한 말이 그 뜻을 나타낼 때까지. 거창한 말―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며, 끝없는 연속이며, 우리의 입 속에서 처음으로 혀가 움직이기 시작한 다음부터 계속 찾아온 것이다―에는 대체 어떤 뜻이 있을까? 여기에 비하면 그밖의 의문은 아무런 뜻도 없다. 공연히 죽음의 신이 토하는 숨결이 목덜미를 어루만질 뿐. 그러나 일단 1만 개도 더 되는 태양의 둘레를 빙빙 돌고 있는 1만 개도 더 되는 세계에 살아보면 알 것이라는 의문은 곧 사라질 것이다. 인간도 영원하고 무궁할 수 있다, 영원무궁한 우주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우주와 같이 영원히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개개의 사람은 여전히 죽어간다. 그러나 사람의 역사는 앞을 내다볼 필요조차 없을 만큼 무한한 미래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영겁까지 우리가 존속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확고부동한 진리를 깨닫는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늘 찾아헤매던 대답이다. 삶을 얻으면 적어도 생명을 유지하고, 그것을 무한한 미래에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목표로 삼을 만한 값어치있는 결승점이다.
등의자가 풀 위에서 바스락 소리를 냈다.
1분 전.
"앞으로 1분 남았소" 하고 그는 말했다.
"오오! 제발 보브가......" 아내가 덥석 그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염려 마오!"
"아아, 하느님, 부디......"
30초 전.
"자아, 찬찬히 보구료."
15초, 10초, 5초......
"저것 보오!"
4, 3, 2, 1, 0!
"오오, 발사되었소. 발사됐어!"
두 사람 모두 소리쳤다. 두 사람 모두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기우뚱하더니 잔디 위에 쓰러졌다. 남편과 아내는 비틀거렸다. 서로의 손을 찾아서 움켜잡으며 부둥켜안았다. 하늘이 갑자기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10초 뒤, 발사된 커다란 혜성이 하늘을 불태우며 별빛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불을 뿜으며 돌진하여 수없이 반짝이는 은하 속으로 사라졌다. 남편과 아내는 꼭 끌어안고 있었다―어둡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 앞의 절벽가에 서 있기라고 한 듯. 그는 꼼짝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울었다. 그리고 외치고 있는 자기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참 지난 다음이었다.
"마침내 가버렸구료."
"네......"
"아무 일 없이 발사되었지?"
"네...... 그래요......"
"추락하지 않았지......?"
"네, 네, 무사했어요. 보브는 무사했어요."
그들은 비로소 떨어졌다.
그는 얼굴을 손으로 만져보고 젖은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투덜거렸다.
"제기랄, 이게 뭐람!"
그 뒤로 5분, 10분,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머릿속의 어둠이, 망막이 반짝반짝 빛나는 수많은 불의 별 때문에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만 안으로 들어가요" 하고 아내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만이 기계적으로 뻗쳐져 풀 베는 기계의 손잡이를 찾고 있었다. 그는 손이 한 짓을 알아차리고는 마침내 말했다.
"조금 더 해야겠소......"
"하지만 보이지 않잖아요."
"괜찮아. 이것만은 해치워야지. 다 끝나면 잠깐 포치에서 함께 쉬고 나서 잡시다."
그는 아내가 포치로 의자를 옮기는 것을 도와준 다음 아내를 앉히고, 자신은 다시 잔디밭으로 돌아가 풀 베는 기계의 손잡이를 잡았다. 풀 베는 기계. 수레 속의 또 하나의 수레. 손으로 움직일 수 있는 간단한 기계―재빠르게 앞으로 밀기만 하면 된다. 자신은 다만 뒤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기며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덜컥덜컥하는 소리, 그 다음에는 따뜻한 정적이 이어질 뿐이다. 빙빙 돌아가는 차바퀴, 그 뒤를 따라가는 생각에 잠긴 듯한 발걸음.
"내 나이는 10억 살이다" 하고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아니, 나는 태어난 지 1분밖에 되지 않는다. 키는 1인치, 아니, 1만 마일일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내리떠도 나의 발이 보이지 않는다―너무나도 아득히 저 밑에 있기 때문에......"
그는 풀 베는 기계를 움직여보았다. 풀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는 풀 냄새를 맡아본다. 그러자 자신이 맑은 청춘의 샘물로 목욕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걸어가며 그는 그 노래를 생각했다. 차바퀴의 노래―신앙도, 신의 은총도 저 먼 우주 공간에 있다는 그 노래를. 그리고 그 우주에는 하나의 별이 꼼짝하지 않는 백만의 별 사이를 누비며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그는 풀 베기를 끝마쳤다.
멋진 하얀 양복
The Wonderful Ice Cream Suit
도회지 여름의 황혼 무렵. 딸각딸각 소리가 나는 당구장 앞에서 세 명의 젊은 멕시코 계 미국인이 무더운 공기를 마시며 이 세상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따금 말을 주고받기도 하고, 입을 꾹 다문 채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검은 표범처럼 달려가는 자동차를 바라보기도 하고, 뇌우처럼 나타나 번개를 뿌리고 굉장한 소리를 내며 차츰 멀어져가는 전차를 바라보기도 했다.
"이거 정말 멋있는 저녁이로군. 정말 멋있어" 하고 참다못해 한숨을 내뱉은 것은 마르티네스였다.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리고 인상이 좋은 우울한 얼굴의 사나이였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세상은 바싹 가까이 다가왔다가는 다시 멀어졌다가 또다시 다가온다. 사람들이 서로 스치고 지나가는가 하면 어느새 저쪽 건너편에 있다. 그런가 하면 5마일 앞의 건물이 갑자기 그의 머리 위를 덮친다. 그러나 대개 모든 것은―사람도 자동차도 건물도―세상 끝에 꼼짝 않고 멈추어 있어 손을 댈 수도 없다. 조용하고 무더운 여름 저녁 무렵인데도 마르티네스의 얼굴은 차가왔다.
"이런 저녁에는 무언가 하고 싶어지지...... 여러 가지 일을."
"무언가 하고 싶다는 것은―소망이라는 것은 실업자(失業者)의 허무한 울분이야" 하고 두 번째 사나이가 말했다.
빌리어너슬이라는 이름의 사나이로, 방 안에서는 크게 소리내어 책을 읽지만 한길에서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이다.
"실업자?" 라고 외친 것은 수염을 더부룩이 기른 바메노스라는 사나이였다."지금 그 말 들었지? 우리는 일도 없고 돈도 없어!"
"그래서 친구도 없지" 하고 마르티네스가 말했다.
"맞아!"
빌리어너슬은 눈길을 푸른 광장으로 옮겼다. 거기에는 종려나무가 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겠나? 나는 저 광장으로 들어가 밤마다 와서 허풍을 떠는 실업가(實業家)들과 섞여 말을 나누고 싶어. 하지만 이런 옷차림으로는...... 나같이 가난해서는 누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겠나. 마르티네스, 우리는 친구일세. 가난뱅이의 우정이야말로 진정한 우정이라고 할 수 있어. 우리는―"
이때 짧은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잘생긴 멕시코 청년이 그 옆을 지나갔다. 그의 양쪽 팔에는 웃으며 재잘거리는 여자가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저것 좀 보라구!" 마르티네스는 이마를 철썩 때렸다."어째서 저 녀석은 여자를 둘이나 거느리고 있지?"
"멋진 하얀 여름 양복을 새로 마추어 입었기 때문이지." 바메노스가 새까만 엄지손톱을 깨물며 말했다."산뜻해 보이기 때문이야."
마르티네스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멀어져가는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때 한길 저쪽 아파트 4층의 한 창문에서 아름다운 처녀가 웃몸을 내밀었다. 검은 머리가 바람에 조용히 나부끼고 있었다. 그녀는 줄곧 거기에 있었다. 줄곧―즉 6주일 동안. 마르티네스는 인사를 한 적도 있고, 손을 들어올린 적도 있고, 미소를 던진 적도 있고, 살짝 윙크한 적도 있고, 허리를 깊숙이 굽힌 적도 있었다―한길에서, 친구를 만나러가다가, 홀에서, 공원에서, 번화가에서. 이때도 그는 손을 들어올려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그녀는 여름바람에 검은 머리를 나부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무엇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아, 나에게도 한 벌의 양복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제대로 옷을 갖추어 입기만 하면 돈 따위는 없어도 돼."
그는 한길 저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까의 그 사나이가 두 여자와 함께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빌리어너슬이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고메스를 보았겠지? 그 녀석은 한 달 이상이나 미치광이처럼 옷에 대한 말만 하고 있다니까. 그 녀석을 쫓아버렸으면 좋겠어."
"이봐" 하고 조용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고메스 아닌가!"
모두들 뒤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고메스는 기묘한 미소를 띤 채 끝도 없이 길고 가느다란 노란 끈을 꺼내었다. 이윽고 그는 그 끈을 여름바람에 팔락팔락 나부끼며 빙빙 돌렸다.
"고메스, 그 줄자로 무엇을 하려는 거지?" 하고 마르티네스가 물었다.
"모두의 몸칫수를 재려고." 고메스가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몸칫수라고!"
"잠깐만" 하고 말하며 고메스는 마르티네스를 곁눈질해 보았다."여보게, 자네는 그동안 어디에 있었나? 먼저 자네부터 재야겠군."
마르티네스는 팔을 붙잡힌 채 줄자가 팔에, 다리에, 기슴둘레에 감기는 것을 보았다.
"가만히 좀 있게" 하고 고메스는 외쳤다."팔 이상없고, 다리―가슴―훌륭해! 자아, 그럼, 키! 좋아, 5피트 5! 자네는 합격일세! 그럼, 악수하세!" 그는 마르티네스의 손을 움켜쥐고 펌프처럼 아래위로 흔들다가 갑자기 멈추었다."잠깐만, 그런데 자네...... 10달러 갖고 있나?"
"내게 있네." 바메노스가 손때묻은 지폐를 몇 장 흔들어보였다."고메스, 나도 재주게."
"주머니를 탁탁 털어도 8달러 92센트밖에 없군. 옷을 새로 마추려면 모자라겠지? 무얼 하려고 그러나?" 마르티네스가 양쪽 호주머니를 모두 뒤지며 말했다.
"무얼 하려느냐고? 자네가 아주 좋은 몸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세."
"하지만 고메스, 나는 아직 자네가 누구인지 잘 모르네."
"뭐라고, 나를 모른다고? 자네는 나와 함께 사는 거야. 함께 가세!"
고메스는 당구장 안으로 사라졌다. 마르티네스는 정중한 빌리어너슬의 부축을 받고 열렬한 바메노스에게 등을 밀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도밍게스!" 하고 고메스가 불렀다.
도밍게스라는 사람은 바람벽에 붙은 전화 앞에 서 있다가 모두들에게 눈으로 인사했다. 수화기에서는 여자 목소리가 울려나오고 있었다.
"마누로!" 하고 고메스는 또 불렀다.
마누로라는 친구는 입에 온통 거품을 묻힌 채 술병을 기울이고 있다가 돌아보았다.
"마침내 다섯 번째의 동지를 찾아냈네." 고메스는 마르티네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도밍게스가"나는 데이트가 있으니 방해하지 말아주게―" 하고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수화기가 손가락 사이에서 떨어졌다. 조그만 글씨로 이름과 번호를 써넣은 그의 검은 전화수첩이 재빨리 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고메스, 자네 혹시―?"
"아하! 자네의 돈 말인가?"
축 늘어진 수화기에서 여전히 여자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도밍게스는 불안한 듯이 수화기 쪽을 흘겨보았다.
마누로는 손에 든 빈 술병과 길 건너 술집의 간판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마지못해 초록색 빌로도 당구대 위에 10달러씩 놓았다.
빌리어너슬은 깜짝 놀랐으나 그들이 하는 대로 했다. 고메스도 그대로 하고는 마르티네스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마르티네스는 꾸깃꾸깃한 지폐와 동전을 세어서 내놓았다. 고메스는 로열 플래시(포커 놀이)를 할 때처럼 돈을 흔들어보였다.
"50달러 모였군. 양복은 60달러니까 앞으로 10달러만 더 있으면 되겠어."
"잠깐만!" 하고 마르티네스가 말했다."고메스, 그것은 양복 한 벌을 말하는 건가? 한 벌 값을 말인가?"
"그럼, 한 벌 값이지." 고메스는 손가락을 한 개 세우며 말했다."아이스크림같이 새하얀 멋진 여름양복 한 벌! 새하얀, 8월의 달님처럼 새하얀 양복 말일세!"
"그런데 그 양복은 누가 가지나?"
"나지!" 하고 마누로가 말했다.
"나야!" 하고 도밍게스가 말했다.
"나야!" 하고 빌리어너슬이 말했다.
"나란 말이야!" 고메스가 외쳤다."그리고 마르티네스, 자네의 것이기도 해. 자아, 모두들 이 녀석에게 보여주세. 나란히 서게."
빌리어너슬, 마누로, 도밍게스, 고메스는 뛰어가서 당구장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마르티네스, 자네도 저쪽 끝에 가서 서게. 자아, 바메노스, 그 큐를 우리들의 머리 위로 건네주게."
"알았어, 고메스."
마르티네스는 대열에 가서 섰다. 큐가 머리에 얹혀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웃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앗!" 하고 그는 놀라서 소리쳤다.
바메노스가 싱글거리며 큐를 머리 위에 얹었다. 큐는 위로도 아래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채 모두들의 머리 위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모두 키가 똑같아" 하고 마르티네스가 말했다.
"정말 똑같군!" 하고 모두들 웃었다.
고메스가 줄지어서 있는 모두들의 앞을 지나며 노란 줄자로 한 사람 한 사람 재었다. 모두들 더욱 큰 소리로 웃었다.
"됐어. 한 달―꼬박 4주일이 걸렸다네―나와 키가 똑같고 몸집이 똑같은 사나이를 네 사람 찾기 위해." 고메스가 말했다."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재보는 데 꼬박 한 달이나 걸렸단 말이야. 물론 때로는 키가 5피트 5인치인 사람이 있긴 했지만 살이 너무 쪘거나 너무 말랐거나 했어. 또는 다리뼈가 지나치게 길기도 하고 팔이 너무 짧기도 했지. 하지만 골격이 모두 똑같아야만 하거든. 그런데 여기 모인 다섯 사람은 어깨도 가슴둘레도 허리도 팔도 모두 똑같단 말이야. 그럼, 몸무게는 어떨까?"
마누로, 도밍게스, 빌리어너슬, 고메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르티네스가 저울에 올라섰다. 바메노스가 크게 웃으며 동전을 집어넣자 잉크 스탬프 찍힌 카드가 툭 튀어나왔다. 마르티네스가 가슴을 두근거리며 카드를 읽었다.
"135파운드...... 136...... 133...... 134...... 137...... 이건 기적이로군!"
"정말이야, 고메스." 빌리어너슬이 말했다.
모두들 자기들을 두 팔로 에워싸고 있는 천재에게 미소를 던졌다.
"모두들 불만이 없겠지?" 고메스는 미심쩍어했다."모두 똑같은 크기, 모두 똑같은 꿈―그리고 양복. 따라서 적어도 일주일에 하룻밤만은 산뜻하게 차려입을 수가 있단 말이야, 그렇지 않나!"
"벌써 몇 년 동안이나 산뜻하게 차려입어본 적이 없어." 마르티네스가 말했다."그래서 여자들도 달아난단 말이야."
"이젠 달아나지 않을 걸세. 얼어붙을 거야. 차가운 아이스크림같이 하얀 양복을 입고 나서면" 하고 고메스가 말했다.
"여보게, 고메스, 한 가지만 묻겠네." 빌리어너슬이 말했다.
"말해 보게."
"그 산뜻한 아이스크림같이 하얀 새 양복을 사면 어느 날 밤 그걸 입고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1년쯤 엘파소(미국 텍사스 州 서부의 도시)에 가서 사는 건 아니겠지?"
"여보게, 빌리어너슬, 어째서 그런 말을 하나?"
"나는 선견지명도 있고 바른말도 잘한다네." 빌리어너슬이 말했다."<밑천 안 들이고 버는 장사>는 어떻게 됐나? 구멍 뚫린 카드의 복권놀이는 어떻게 됐나? 아무도 돈을 번 사람이 없는데도 여전히 계속하지 않던가? 자네가 설립하려던 칠리 콘 카르네(멕시코 요리로 고기에 고추를 넣고 끓인 것)와 광저기 콩(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중요한 식료품) 연합회사는 어떻게 되었나? 지금까지의 성과란 조그만 사무실의 사용료조차 지불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닌가?"
"젊은 혈기로 저지른 잘못이 지금에 와서 커졌지" 하고 고메스가 말했다."이제 그만하게. 이렇게 더운 곳에서는 우리들을 위해 지은 특제 양복을 사기만 하면 그만이야. <셤웨이 양복상회>의 진열장에서 사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그 양복을! 우리에게는 50달러라는 돈이 있네. 이제 같은 몸집을 가진 친구를 하나만 더 찾아내면 되는 거야!"
모두들 당구장 안을 둘러보는 것을 마르티네스는 보았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쏠린 곳도 보았다. 바메노스의 모습을 곁눈질해 본 자기의 눈길이 마지못해 다시 되돌아와 자기의 더러워진 셔츠와 니코틴으로 찌든 굵은 손가락에 쏠리는 것을 그는 느꼈다.
"나 말인가?" 바메노스는 마침내 참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내 골격을 재보게. 너무 커. 나는 손도 팔도 크단 말이야. 도랑 파는 일을 해왔으니까. 하지만―"
바로 이때 바깥 보도에 아까의 그 으스대던 남자가 두 여자를 거느리고 웃으며 지나가는 소리를 마르티네스는 들었다.
그는 당구장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뭉게구름의 그림자 같은 고뇌의 빛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바메노스는 천천히 저울 위에 올라가 동전을 넣었다. 그는 눈을 감고 기도의 말을 중얼거렸다.
"성모 마리아여, 부디......"
기계에서 소리가 나자 카드가 툭 튀어나왔다. 바메노스는 눈을 떴다.
"이것 보게, 135파운드일세. 다시금 기적이 일어났군."
모두들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카드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왼손에 쥐어진 더러운 10달러 지폐를 바라보았다.
고메스는 눈 앞이 어질어질했다. 땀이 배어나왔다. 그는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불쑥 손을 내밀어 돈은 움켜쥐었다.
"자아, 양복점으로 가세. 양복을 살 수 있어. 어서!"
모두들 환성을 지르며 당구장에서 튀어나왔다.
버려진 전화기에서는 아직도 여자 목소리가 울려나오고 있었다. 혼자 뒤에 남은 마르티네스는 손을 뻗어 전화를 끊었다. 조용한 당구장 안에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무슨 꿈 같은 일이람! 남자 여섯 명에 양복이 한 벌. 거기에 무엇이 생긴단 말인가? 광기? 방탕? 아니면 살인? 하지만 나는 하느님과 함께 가겠어. 고메스, 기다려줘!"
마르티네스는 젊었다. 빨리 달릴 수 있었다.
<셤웨이 양복상회>의 셤웨이 씨는 넥타이걸이를 매만지고 있던 손길을 얼른 멈추었다. 상점 밖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점원에게 귀띔했다.
"레오, 나?린?....."
한길에서 한 사나이―고메스―가 상점을 기웃거리며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사나이―마누로와 도밍게스―가 상점 안을 들여다보며 급히 지나갔다. 세 사나이―빌리어너슬과 마르티네스와 바메노스―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쳐갔다.
"레오." 셤웨이 씨는 엉겁결에 침을 삼키고 말했다."경찰을 불러."
여섯 명의 사나이가 갑자기 입구에 막아섰다.
마르티네스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 꼭 끼어 뱃속이 조금 이상한지 얼굴을 벌겋게 해가지고 레오에게 히죽히죽 웃어보였기 때문에 레오는 손에 들었던 전화기를 놓았다.
"저기, 저기 멋진 양복이 있군!" 마르티네스는 눈을 크게 뜨고 속삭였다.
"아니, 이쪽에 있는 것이 더 좋아." 마누로가 양복 깃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 세상에서 양복이라면 오직 하나―" 고메스가 쌀쌀하게 말했다."셤웨이 씨, 아이스크림처럼 새하얀 사이즈의 양복이 바로 한 시간 전까지 저 진열장에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군요. 설마 그것이―"
"팔렸느냔 말씀입니까?" 셤웨이 씨는 후유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아닙니다, 탈의실에 있습니다. 아직 마네킨에 입혀진 채로......"
마르티네스가 움직였기 때문에 모두가 움직이는지 아니면 모두가 움직였기 때문에 마르티네스가 움직이는지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갑자기 모두 움직이기 시작했다. 셤웨이 씨는 달려가서 모두들의 맨 앞에 서려고 했다.
"이쪽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어느 분이......?"
"모두이지요. 하지만 한 벌이면 됩니다. 한 벌을 가지고 모두가 입는단 말입니다." 마르티네스는 웃었다."모두 차례로 입어보는 겁니다."
"여러분 모두가?"
셤웨이 씨는 탈의실 커튼에 덥석 매달렸다. 마치 가게 전체가 기선이 되어 갑자기 큰 파도를 만나 기울어지기라도 한 듯이.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답니다―하고 마르티네스는 마음 속으로 말했다―우리의 기뻐하는 얼굴을 보십시오. 그리고 이 미소 뒤에 숨어 있는 우리의 골격을 보십시오! 한 번 재보십시오, 여기 저기를. 똑같아요. 아시겠지요?
셤웨이 씨는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여러분 모두란 말씀이지요!" 그는 커튼을 홱 열어젖혔다."자아, 사십시오. 마네킨은 덤으로 거저 드리겠습니다!"
마르티네스가 조용히 탈의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들여다보았다.
그 양복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새하얀 양복이었다.
마르티네스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을 쉬고 싶지도 않았다. 숨을 쉴 필요도 없었다. 숨을 쉬면 양복이 녹아버리지 않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마침내 몸을 떨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토해 내며 속삭였다.
"아아, 정말 멋있군!"
"눈이 부셔!" 하고 고메스가 중얼거렸다.
"셤웨이 씨."
레오의 쉰 목소리가 마르티네스의 귀에 들려왔다.
"이것을 파는 것이 위험한 조짐이 되지는 않을까요? 다시 말해서 여섯 사람이 입기 위해 한 벌의 양복을 사는 일이 많아지면 어떡하지요?"
"59달러짜리 양복 한 벌로 여섯 사람이 동시에 행복해진다는 말을 지금까지 들어본 일이 있나?" 하고 셤웨이 씨가 말했다.
"마치 천사의 날개 같아. 하얀 천사의 날개." 마르티네스가 중얼거렸다.
그는 셤웨이 씨가 어깨 너머로 탈의실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았다. 의미한 빛이 셤웨이 씨의 눈에 흘러넘쳤다.
"자네는 모르나, 레오?" 셤웨이 씨는 감탄하며 말했다."이것이야말로 슈트라는 걸세(<슈트>에는 <꼭 맞는다> <어울린다>라는 뜻도 있음)!"
고메스는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휘파람을 불기도 하며 3층의 층계참으로 뛰어올라가 모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모두들 머뭇머뭇 웃으며 멈추어섰다가 아래층 계단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옳거니, 오늘 밤에 나와 이사하지 않겠나? 양복뿐만 아니라 방세도 절약해야겠어. 암, 그래야지! 마르티네스, 양복 가지고 있겠지?" 고메스가 외쳤다.
"나 말인가?" 마르티네스는 하얀 포장지로 싼 상자를 높이 쳐들었다."모두 번갈아가며 입는단 말이야!"
"바메노스, 마네킨도 들었나?"
"물론이지!"
낡은 여송연을 입에 물고서 불꽃을 튀기고 있던 바메노스가 쭉 미끄러졌다. 마네킨이 손에서 떨어져나가 앞으로 고꾸라지며 두 번 구르더니 콰당 하고 계단 밑으로 떨어졌다.
"바메노스! 바보! 얼간이!"
그들은 마네킨을 잡아일으켰다. 바메노스는 슬픔에 잠기며 무언가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마누로가 딱 하고 손가락을 꺾었다.
"이봐, 바메노스, 축배를 들어야겠어! 술을 얻어오게!"
바메노스는 불꽃의 소용돌이 속을 뚫고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모두들 양복을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홀에 남은 마르티네스는 고메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고메스, 자네 안색이 나쁘군."
"응, 기분이 언짢아. 내가 무엇을 했지?" 고메스는 마네킨을 둘러싸고 있는 방 안의 사람들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나는 도밍게스를 주워왔어. 여자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녀석이었지. 그런데 좋은 일을 했어. 그 다음에 마누로를 주워왔거든. 술주정군이었지만 노래를 부르게 하면 여자처럼 목소리가 예뻐. 이것도 잘한 짓이야. 빌리어너슬은 책벌레였다네. 그리고 자네는 귀 뒤를 씻고 있었지. 그런데 그 다음에 나는 무엇을 했지?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던가? 난 기다릴 수 없었어! 어쨌든 저 양복을 사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주워온 녀석은 더러운 얼간이였지만 그래도 나의 양복을 입을 권리를 가지고 있지―" 그는 마음이 혼란해진 듯 잠깐 말을 끊었다."그가 어느 날 저녁 우리들의 양복을 입고 나가 넘어지거나 비에 흠뻑 젖어 돌아오지 않기를! 대체 나는 왜 이런 짓을 했을까!"
"고메스" 하고 빌리어너슬이 방 안에서 작은 소리로 불렀다."양복 준비가 다 됐네. 이리 와보게. 자네의 전기불 밑에서라면 더욱 돋보일 걸세."
고메스와 마르티네스는 들어갔다.
그러자 방 한가운데에 놓인 마네킨에 터무니없는 옷깃, 정확한 재단, 곱게 바느질한 단추 구멍의 유령이 인광(燐光)을 뿜으며 초자연적인 흰빛을 띠고 서 있었다. 양복의 백색 조명을 두 뺨에 받으며 서 있던 마르티네스는 갑자기 교회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얗다! 새하얗다! 그것은 순백의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흰빛이었다. 희끄무레하게 밝아오는 새벽 무렵 아파트의 복도에 놓인 우유병 속의 우유와도 같은 흰빛이었다. 그것은 또한 달이 떠 있는 이슥한 밤에 외로이 흐르는 겨울구름 같은 흰빛이었다. 무더운 여름밤인데도 지금 그것을 보고 있노라니 토해내는 숨결이 하얗게 보이는 듯했다. 눈을 감아도 그것은 눈꺼풀에 새겨져 있었다. 오늘 밤에 꿀 꿈이 무슨 색인지 그는 미리 알 수 있었다.
"새하얗군......" 빌리어너슬이 중얼거렸다."내 고향 멕시코에 있는 산꼭대기의 눈처럼 새하얗군―그 산의 이름은 <잠자는 미녀>였었지, 아마."
"다시 한 번 말해 보게" 하고 고메스가 말했다.
빌리어너슬은 의기양양했으나 거만하지 않게 기꺼이 그 말을 되풀이했다.
"......산꼭대기의 눈처럼 새하얗군―그 산의 이름은―"
"여어, 돌아왔군!"
모두들 돌아다보니 문간에는 바메노스가 서 있었다. 두 손에 하나씩 술병을 쥐고 있었다.
"자아, 축배를 드세. 그런데 오늘 밤에는 누가 맨 먼저 양복을 입지? 내가 입나?"
"너무 시간이 늦었어!" 하고 고메스가 말했다.
"늦었다고? 아직 9시 15분인데!"
"늦었다고? 너무 늦었다고?"
모두들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고메스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모두 눈을 번뜩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양복으로, 활짝 열려 있는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바깥의 한길은―하고 마르티네스는 생각했다―맑게 갠 여름의 토요일 밤이었다. 무덥고 조용한 어둠을 누비며 여자들이 물 위에 떠다니는 꽃처럼 사뿐사뿐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들 슬픈 소리를 질렀다.
"고메스, 한 가지 제안이 있네" 하고 빌리어너슬이 말하고 연필을 핥으며 편지지에 도표를 그렸다."9시 반에서 10시까지는 자네가 양복을 입게. 그리고 10시 반까지는 마누로, 11시까지는 도밍게스, 나는 11시 반까지. 마르티네스는 12시까지. 그리고―"
"내가 마지막이란 말인가?" 하고 바메노스가 무서운 얼굴을 지으며 따졌다.
마르티네스가 재빨리 지혜를 짜내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한밤중이 제일 좋은 시각인데 뭘 그래."
"하긴 그래. 미처 생각지 못했군. 그럼, 좋아" 하고 바메노스가 말했다.
고메스는 한숨지었다.
"좋아, 한 사람 앞에 반시간씩이로군. 앞으로는 각각 일주일에 하룻밤씩 입기로 하지. 그렇게 되면 하룻밤이 남는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날 누가 입을지는 일요일에 제비를 뽑아서 결정하세."
"그렇게 되면 내 차례야. 나는 제비 운이 강하거든!" 바메노스가 웃으며 말했다.
고메스가 갑자기 마르티네스의 어깨를 와락 움켜잡았다.
"고메스, 자네가 맨 처음일세. 어서 입게" 하고 마르티네스가 재촉했다.
고메스는 평판이 나쁜 바메노스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결심하고 그는 셔츠를 훌렁 벗었다.
"야잇!" 그는 소리쳤다."얏!"
바스락 바스락...... 깨끗한 와이셔츠.
"아아......!"
새 양복이란 참으로 산뜻하고 기분좋은 것이로군―마르티네스는 웃옷을 벗기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이다지도 깨끗하게 보일까! 어쩌면 이다지도 깨끗한 냄새가 날까!
바스락 바스락...... 바지...... 넥타이―부스럭 부스럭...... 바지 멜빵―바스락 바스락...... 마르티네스가 양복 웃옷을 벗겨서 구부린 고메스의 어깨에 걸쳐주자 꼭 맞았다.
"어때!"
고메스는 멋지게 차려입은 투우사처럼 한 바퀴 돌았다.
"여어, 고메스, 멋있어!"
고메스는 절을 한 번 하고 나갔다.
마르티네스는 팔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0시 정각에 마르티네스는 홀을 왔다갔다하는 발소리를 들었다. 마치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한 발소리였다. 마르티네스는 도어를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고메스가 엉거주춤하니 거기에 서 있다.
(저 친구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군) 하고 마르티네스는 생각했다. (아니, 어리둥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것이겠지.)
"고메스, 이쪽일세!"
고메스는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왔다.
"여보게, 나는 아주 재미있었다네. 이 양복, 이 양복 덕분에......"
"어서 말해 보게, 고메스" 마르티네스가 말했다.
"멋지게 설명할 수가 없어. 어떤 말로 표현하면 좋을지!"
그는 두 팔을 벌려 손바닥을 위로 올리고 천장을 우러러보았다.
"어서 말해 보게, 고메스."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직접 경험해 봐야지. 맞아, 경험을 해봐야―"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모두들 일어나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그는 겨우 알았다.
"다음은 누구 차례지? 마누로인가?"
마누로는 팬티 하나만 입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준비!"
모두 웃고 떠들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마누로는 양복을 차려입고 나갔다. 29분 30초에 도어 손잡이에 매달려 벽을 만지고, 자기의 팔꿈치를 눌러보고 손바닥을 얼굴에 대고 그는 돌아왔다.
"오오, 모두 들어보게! 나는 술집에 갔었지. 술 마시러 갔느냐고? 천만에! 술집 안에 들어가진 않았어. 이봐, 듣고 있나? 나는 술은 마시지 않았단 말이야. 걸어가다가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오더군. 노래가 입에서 흘러나오고, <왜 그럴까?> 하고 나는 가슴에 손을 대고 자신에게 물었지. 이유는 간단해―이 양복이 술보다 더 나를 기분좋게 해주었기 때문일세. 나는 이 양복에 완전히 취해 버린 걸세! 그래서 나는 술집으로 들어가는 대신 <개덜핼러 레프리테리아>로 가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네 곡 불렀지. 아주 크게 말이야! 아아, 정말 멋있어, 이 양복은!"
그 다음에 도밍게스가 양복을 입고 나가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고 나서 돌아왔다.
그 검은 전화번호 수첩은 어떻게 했을까 하고 마르티네스는 생각했다. 떠날 때는 틀림없이 손에 들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했을까?
도밍게스는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본 다음 입을 열었다.
"한길을, 한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어떤 여자가 말을 걸더군.'도밍게스, 당신 도밍게스가 아니에요?'그러자 다른 여자가 말하더군.'도밍게스라고? 아니야. 동방에서 온 위대한 하얀 하느님 케처알코아톨이야'라고. 갑자기 나는 여러 여자들과 함께 걷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더군. 혼자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혼자가 좋아! 그러나 그 다음에 내가 그 여자에게 뭐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아무도 모를 걸세.'내 것이 되어주오!'라든가'나와 결혼해 주오!'라고 말하고 싶었다네. 제기랄! 이 양복은 위험해! 하지만 난 상관없어! 살아야지, 살아야 해! 고메스, 자네 경우도 이런 식이 아니었나?"
고메스는 그날 밤에 있었던 일에 아직도 취하여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니,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네. 너무나도 멋있었으니까. 나중에 언젠가 말해 주지. 다음은 빌리어너슬의 차례였던가......?"
빌리어너슬은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빌리어너슬은 주춤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빌리어너슬은 주춤거리며 돌아왔다.
"상상해 보게." 그는 모두를 보지 않고 바닥만 내려다보며 바닥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푸른 광장이었어. 별빛 아래에서 나이 지긋한 실업가들이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또 이야기를 주고받았지. 그러다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속삭이자 모두들 뒤돌아보더니 깜짝 놀라며 옆으로 비켜서서 길을 내주었네. 그 길을 굉장한 열기를 띤 빛이 얼음 속을 지나가듯 불타며 통과했네―그 위대한 빛의 한가운데에 바로 내가 있었던 걸세.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지. 나의 위(胃)는 젤리. 목소리는 매우 작지만 차츰 커지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나? 이렇게 말하지.'여러분, 카알라일의 《의상철학》을 아십니까? 그 책에는 의상에 대한 그의 철학이 씌어 있으며......'"
마침내 마르티네스가 양복을 입고 어둠 속을 헤맬 차례가 되었다.
그는 그 구획을 네 번 걸어다녔다. 그는 그 건물의 현관에서 걸음을 멈추고 불이 네 번 켜져 있는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하나의 그림자가 움직이더니 아름다운 아가씨의 모습이 보였으나 다음 순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다섯 번째로 올려다보았을 때 그녀는 발코니에 나와 있었다. 여름의 무더위를 이기지 못하여 바깥의 서늘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나온 것이다.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어떤 몸짓을 했다.
그는 그녀가 자기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하얀 불꽃이 되어 그녀의 주의를 끌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그러자 다음 순간 검은 테 안경이 그녀의 코 위에 얹혀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아아) 하고 그는 생각했다. (맞아, 그래야지. 맞아! 장님이라도 이 양복은 보일 거야!)
그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손을 흔들 필요는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미소를 던졌다. 그녀도 손을 흔들 필요는 없었다. 그 다음 달리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그는 두 뺨에 얼어붙은 미소를 지워버리지 못한 채 빠른 걸음으로, 거의 달리다시피 모퉁이를 돌았다―그녀의 시선을 등 뒤에 느끼며. 돌아다보니 그녀는 안경을 벗고 근시인 듯한 눈으로 그 짙은 어둠 속에서 이제는 겨우 움직이는 빛의 한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물체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그 구획을 한 바퀴 돌고 난 다음 거리를 지나왔는데, 거리가 갑자기 아름답게 보여 그는 크게 외치고 웃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눈을 반쯤 감고 얼빠진 사람처럼 헤맸다. 모두들은 입구에 마르티네스가 나타났을 때, 마르티네스가 아니라 자기들의 모습을 거기에서 보았다. 순간 모두들은 자기들이 조금 돌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늦었군, 자네!" 하고 바메노스가 외쳤으나,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직도 주문(呪文)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 좀 가르쳐주게. 나는 대체 누구지?" 하고 마르티네스가 물었다.
그는 천천히 원을 그리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맞아―하고 그는 생각했다―맞아, 이 양복 때문이야. 확실히 이 양복과 이 맑게 갠 토요일 밤에 그 상점에서 있었던 모든 일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마누로가 말했듯이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웃음이 터져나와 술을 마셨을 때보다 더욱 기분이 좋았다. 으슥한 밤에 양복을 한 사람씩 서로 번갈아 갈아입고 비틀거리면서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 몸을 제대로 가눈 다음 밖으로 나갔다가는 마음이 커지고 따뜻해지고 상쾌해져서 돌아왔다. 또한 지금 여기에 멋진 하얀 양복을 입은 마르티네스가 서 있다―그가 한 번 명령을 내리면 온 세계가 말없이 길을 비켜주는 명령자처럼.
"마르티네스, 자네가 없는 동안에 거울을 세 개 빌어왔네. 이것 보게!"
거울은 양복점에서처럼 어떤 각도를 유지하고 세워져 있어 마르티네스의 세 면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그와 동시에 이 옷을 입고 나가서 이 옷 내부의 빛나는 세계를 맛보고 돌아온 사람들의 반향과 추억을 비춰주고 있었다. 지금 이 반짝거리는 거울 속에서 마르티네스는 모두들이 입어본 이 옷의 죄많은 사연을 보고 눈물을 머금었다. 모두들 눈을 껌벅거렸다. 마르티네스가 거울에 손을 대자 거울이 움직였다. 하얀 갑옷을 입은 마르티네스의 몇천몇백만이나 되는 모습이 영원을 향해 행진하고 있는 것이 비쳤다. 영원히, 굽히지 않고, 끝없이 여러 겹으로 비쳐지는 그 모습을 그는 보았다.
그는 하얀 양복을 허공에 내밀었다.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던 모두들은 옷을 받으려고 뻗쳐진 더러운 손을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바메노스!"
"이 더러운 녀석!"
"몸을 씻지 않았군. 기다리는 동안 수염도 깎지 않았고. 이봐, 모두 이 녀석을 목욕탕에 집어넣게!" 하고 외친 것은 고메스였다.
"그렇지. 목욕을 시켜야겠군!" 하고 모두가 말했다.
"싫어! 밤바람을 쐬겠어! 아아, 나 죽겠다!" 하고 바메노스는 손발을 버둥거렸다.
모두들은 울부짖는 그를 억지로 홀 쪽으로 끌고 갔다.
이윽고 지금 여기에 바메노스가 서 있다―하얀 양복을 입고, 수염을 깎고, 머리를 빗고, 손톱의 때를 닦아 같은 인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 되어.
친구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이 아니겠지) 하고 마르티네스는 생각했다. (바메노스가 지나갈 때 산꼭대기가 움직이고 눈사태가 있었다는 것은.)
그가 창 밑을 지나가면 사람들은 침을 뱉고, 쓰레기를 뿌리고, 그보다 더욱 심한 짓도 했다. 그러나 오늘 밤은 활짝 열린 1만 개가 넘는 창 밑을, 발코니 밑을, 골목을 누비며 다니는 것이다. 갑자기 세계가 파리의 날개 소리로 윙윙거린다. 그리고 여기에 바메노스가 있다. 눈설탕을 뿌린 케익 같은 모습으로.
"그 양복을 입으니까 정말 멋져보이는군, 바메노스." 마누로가 슬픈 듯이 말했다.
"고맙네, 이젠 가도 되겠지?" 하고 바메노스는 꿈틀 움직여 바로 조금 전까지 모두들의 골격이 담겨 있던 옷 속에서 몸을 편히 가누려고 했다.
"빌리어너슬, 이제부터 내가 말하는 규칙을 적어두게" 하고 고메스가 말했다.
빌리어너슬은 연필을 핥았다.
"맨 먼저 그 옷을 입은 채 딩굴지 말 것. 알겠나, 바메노스?"
"염려 말게."
"그 옷을 입은 채 바람벽에 기대지 말 것."
"바람벽에 기대지 않겠네."
"그 옷을 입은 채 새가 앉아 있는 나무 아래를 걷지 말 것. 그리고 담배를 피우지 말 것. 술을 마시지 말 것―"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이 옷을 입고 앉아도 괜찮을까?" 하고 바메노스가 말했다.
"그런 의문이 생기면 바지를 벗고 접어서 의자에 걸어야 하네."
"나의 행운을 빌어주게" 하고 바메노스가 말했다.
"신이 함께 있기를 빌겠네, 바메노스."
그는 나갔다. 도어가 닫혔다.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메노스!"
마르티네스가 소리치며 도어를 홱 열었다.
바메노스가 두 조각으로 찢어진 손수건을 양쪽 손에 들고 서서 웃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지? 북북 찢었어!" 그는 손수건을 더욱 찢었다."그 표정이 왜 그런가, 하하하!"
바메노스는 크게 웃으며 도어를 힘차게 닫았다. 모두들 멍청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고메스는 두 손을 머리 위에 얹고 몸을 빙그르르 저쪽으로 돌았다.
"나에게 돌을 던져다오. 죽여다오. 나는 모두들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버렸다!"
빌리어너슬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은화 한 개를 꺼내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의 마지막 50센트일세. 누구 바메노스가 낸 돈을 돌려주는 데 보탤 사람은 없나?"
"없어. 옷깃과 단추구멍 값 정도밖에 없어" 하고 마누로가 10센트를 꺼내며 말했다.
고메스가 열어젖혀진 창문으로 천천히 웃몸을 내밀며 외쳤다.
"바메노스, 안된다니까!"
한길에서 있던 바메노스는 움찔하여 성냥불을 끄고 어디서인지 주워온 여송연 꽁초를 휙 버렸다. 그리고 2층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두들에게 기묘한 몸짓을 해보이고는 흥분한 듯이 손을 흔들며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기 시작했다.
왜 그런지 다섯 사나이는 창가에서 떠날 수가 얹었다.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저 녀석, 틀림없이 저 양복을 입은 채 함박스텍을 먹을 걸세" 하고 빌리어너슬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내가 걱정하는 것은 소스를 묻히면 어쩌나 하는―"
"그만하게, 제발 이제 그만!" 고메스가 참다못해 외쳤다.
마누로가 느닷없이 입구로 달려갔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고는 못 참겠군."
"마누로, 술이라면 여기 있네. 바닥에 놓여 있는 저 병에―"
마누로는 문을 닫고 나갔다.
빌리어너슬이 잠시 뒤에 크게 기지개를 켜고 나서는 어슬렁어슬렁 방 안을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광장까지 가서 보고 오겠네."
그가 나간 지 1분도 채 안되어 도밍게스가 모두들에게 검은 전화번호 수첩을 흔들어대고 윙크하면서 도어 손잡이를 돌렸다.
"도밍게스!" 하고 고메스가 불렀다.
"왜 그러나?"
"자네가 만일 바메노스를 만나면 미키 물리로의 <붉은 새> 카바레에 들어가지 말라고 일러주게나. 텔레비젼에서 선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방송국 앞에서도 선전하고 있거든."
"그 녀석은 물리로의 카바레에 들어가지 않을 걸세. 바메노스도 그 양복을 무척 아끼고 있으니까 더럽히지는 않겠지." 도밍게스가 대답했다.
"그런 짓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쏘아죽이는 편을 택할 걸세" 하고 마르티네스가 말참견을 했다.
"맞아, 틀림없어."
단둘이 남게 된 마르티네스와 고메스는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도밍게스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은 벌거벗은 마네킨 둘레를 빙빙 돌고 있었다.
고메스는 한참 동안 입술을 깨물고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두 번쯤 와이셔츠의 주머니를 만져보다가 그만두곤 하더니 마침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보지도 않고 마르티네스에게 건네주었다.
"마르티네스, 이거 받게."
"그게 뭔가?"
이름과 번호 등이 인쇄되어 있는 두 절로 접힌 한 장의 핑크 빛 종이조각을 마르티네스는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오늘부터 3주일 동안 쓸 수 있는 엘파소 행 버스표가 아닌가!"
고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르티네스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여름밤의 어둠 속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메스가 말했다.
"그것으로 여행을 하게. 그리고 멋진 하얀 파나마 모자와 연푸른 넥타이를 우리에게 선물로 가지고 돌아오게―저 하얀 아이스크림 빛 양복에 맞는 것을 말일세. 마르티네스, 부탁이네."
"하지만 고메스―"
"잠자코 받아주게. 아아, 여기는 찌는 듯이 덥군. 숨이 막힐 것만 같아."
"고메스, 정말 고맙네. 고메스―"
그러나 도어는 활짝 열려 있었고 고메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미키 물리로가 경영하는 <붉은 새> 카바레와 칵테일 라운지는 두 개의 커다란 벽돌 건물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에 폭을 좁게, 그리고 안의 길이를 길다랗게 잡지 않을 수 없었다. 현관에는 뱀처럼 꾸불거리는 빨강과 유황색이 섞인 초록빛 네온사인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안에서는 어렴풋한 사람들의 그림자가 뿌옇게 나타났다가는 혼잡한 어둠의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마르티네스는 발소리를 죽여가며 빨간 페인트 칠이 벗겨진 정면의 창가로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왼쪽에서 인기척이 났고, 오른쪽에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양옆을 보았다.
"마누로! 그리고 빌리어너슬이 아닌가!"
"나는 술은 마시지 않기로 했네. 그래서 이렇게 산책하고 있는 거야" 마누로가 말했다.
"나는 지금 광장으로 가는 길이야. 이리로 돌아서 가기로 했지." 빌리어너슬이 말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여기서 세 사람은 이야기를 그만두고 모두 함께 페인트 칠이 벗겨진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뒤 세 사람은 매우 흥분한 듯한 새로운 인기척을 느꼈고, 몹시 ??듯한 숨소리를 들었다.
"우리의 하얀 양복이 저 안에 들어갔나?" 하고 묻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고메스였다.
"고메스로군!" 모두들 놀라며 말했다.
"정말 그렇구면." 그때 막 달려와서 창문을 들여다보며 도밍게스가 외쳤다."오오, 저기에 양복이 있다. 아아, 고마와라. 아직 바메노스의 몸을 감싸고 있군!"
"안 보이는데!" 고메스는 손을 얹고 눈을 가늘게 떴다."저 친구 무엇을 하고 있지?"
마르티네스는 눈을 크게 뜨고 보았다. 정말 있다! 저 안쪽에 커다란 눈덩어리 같은 하얀 것이...... 그 위에 바메노스의 얼빠진 얼굴이 즐거운 듯 눈을 깜박이며 연기에 싸여 있었다!
"저 친구 담배를 피우고 있잖아!" 하고 마르티네스가 말했다.
"술을 마시고 있잖아!" 하고 도밍게스가 말했다.
"밤참을 먹고 있어!" 하고 빌리어너슬이 보고했다.
"국물이 듬뿍 담긴 밤참이야" 하고 마누로가 ?牟눼?
"그만두게. 듣고 싶지 않네. 이제 그만......" 하고 고메스가 말했다.
"루비가 함께 있군!"
"나도 좀 들여다보게 해주게." 고메스가 마르티네스를 밀어내며 말했다.
맞아, 틀림없이 루비다! 2백 파운드짜리 찬란한 브로치. 발에 꼭 맞는 검은 공단 구두를 신고, 새빨갛게 칠한 손톱이 바메노스의 어깨를 붙잡고 있다. 분을 덕지덕지 바르고 입술연지가 번들거리는 암소 같은 얼굴이 바메노스에게 덮치고 있다!
"저 하마 같은 계집! 어깨의 심을 눌러 찌그러뜨리고 있잖아! 저런, 이번에는 무릎에 올라앉는군!" 도밍게스가 소리쳤다.
"안되겠어, 저 분과 입술연지가 묻으면 절대로 안되지!" 고메스가 말했다."여보게, 마누로, 안으로 들어가서 저 술을 뺏어야 하네. 빌리어너슬, 자네는 담배와 음식을. 도밍게스, 자네는 루비 에스콰도릴로를 불러서 데리고 나와야 해. 자아, 모두 어서!"
세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고메스와 마르티네스는 숨을 죽이며 창가에 서서 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마누로 녀석이 술에 손을 댔어. 저런, 들이마시잖아!"
"맙소사! 이번에는 빌리어너슬이 담배를 집었어. 먹을 것에 덤벼드는군!"
"옳지, 도밍게스가 루비를 붙잡았어. 정말 용감한 녀석인데."
하나의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더니 물리로의 카바레 정면 입구를 통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여보게, 고메스!" 마르티네스가 고메스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지금 들어간 녀석은 루비 에스콰도릴로의 애인 트로 루이즈라네. 여자와 바메노스의 현장을 보면 저 아이스크림 빛깔의 양복은 피투성이가 되겠지. 온통 피투성이가―"
"사람 약올리지 말게. 어서 빨리 들어가세" 하고 고메스가 말했다.
두 사람은 뛰어들어갔다. 두 사람이 바메노스 곁으로 달려갔을 때 트로 루이즈가 그 멋있는 아이스크림 빛 양복 깃으로부터 2피트쯤 떨어진 곳에서 덤벼들려 하고 있었다.
"바메노스를 놓아!" 하고 마르티네스가 소리쳤다.
"그 양복을 놓아!" 하고 고메스가 고쳐 말했다.
바메노스를 상대로 탭 댄스를 추는 듯한 자세였던 트로 루이즈는 수상쩍은 듯이 방해자를 노려보았다.
빌리어너슬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빌리어너슬은 억지로 웃음지으며 말했다.
"이 녀석을 때리지 말고 나를 때려주게."
트로 루이즈는 빌리어너슬의 코를 찰싹 때렸다.
빌리어너슬은 코를 누르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비틀비틀 물러섰다.
고메스가 트로 루이즈의 한쪽 팔을 붙잡고, 마르티네스가 또 한쪽 팔을 눌렀다.
"그 녀석을 놓아라! 놓으라니까! 색마(色魔), 악당, 천치!"
트로 루이즈가 아이스크림 빛 양복을 비틀자 여섯 명의 사나이가 일제히 단말마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 녀석을 때리지 말고 나를 때려라!"
트로 루이즈가 다시 빌리어너슬의 코에 일격을 가했을 때 트로의 머리에 의자가 정통으로 내리쳐졌다.
"이 녀석!" 하고 고메스가 소리쳤다.
트로 루이즈는 비틀비틀 눈을 희번덕거리며 쓰러지려다 멈칫하며 바메노스를 붙잡았다.
"놓아라, 놓으라니까!" 고메스가 외쳤다.
한 개씩, 매우 천천히 트로 루이즈의 바나나 같은 손가락이 옷에서 떨어졌다. 다음 순간 그는 모두들의 발 밑에 쓰러졌다.
"모두들, 이쪽이다!"
그들은 바메노스를 밖으로 들고 나가 내려놓았다. 바메노스는 위엄을 잃은 채 모두의 손에서 벗어났다.
"알았네, 알았어. 하지만 내가 차지할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앞으로 2분과 그리고―10초가 남아 있단 말이야."
"뭐라고!" 하고 모두들이 소리쳤다.
"이봐, 바메노스, 자네는 개덜핼러의 암소를 무릎에 앉히고, 싸움을 하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밤참을 먹은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아직 시간이 끝나지 않았다고 떠벌리는 건가" 하고 고메스가 말했다.
"2분과 1초가 남아 있단 말이야!"
"여보세요, 바메노스, 아주 멋있는데요!" 한길 저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메노스는 빙그레 웃으며 웃옷 단추를 채우고서 그쪽으로 뛰어나갔다.
"라모나 알바레스로군. 라모나, 기다려줘!"
"바메노스!" 하고 고메스가 애원하듯 말했다."1분밖에 없는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팔목시계를 보았다."40초뿐인데!"
"기다려, 라모나!" 바메노스가 달려가며 말했다.
"바메노스, 위험해!"
바메노스가 깜짝 놀라 몸을 돌렸을 때 자동차가 눈 앞에 다가와 찌익 하고 브레이크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끝장이다!" 하고 길에 선 다섯 사나이가 똑같이 외쳤다.
마르티네스는 충돌하는 소리를 듣고 주춤했다. 그리고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마치 공중을 날아가는 하얀 빨래 같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윽고 그의 머리가 다시 수그러졌다.
마르티네스는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들 제각기 다른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었다. 어떤 사람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고, 어떤 사람은 후유 하고 숨을 내뱉었다. 어떤 사람은 숨을 딱 멈추었고 어떤 사람은 신음했다. 정의의 외침을 부르짖는 사람도 있었고, 얼굴을 가리는 사람도 있었다. 마르티네스는 너무나도 답답하여 엉겁결에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치고 있었다. 발이 그 자리에 못박힌 듯했다.
"이젠 더 살고 싶지 않아. 죽여주게, 아무라도 좋으니" 하고 고메스가 중얼거렸다.
주춤거리고 있던 마르티네스는 눈을 떨구며 자기 자신과 자기의 다리한테 명령했다. 걸어라, 비틀거려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어라―하고. 그는 사람들과 충돌했다. 모두들 달려가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들은 달려가기 시작했다. 바메노스 곁으로 달려가려고 한길을 가로질렀다. 간신히 건널 수 있는 깊은 강을 건너듯이.
"바메노스, 살아 있나?" 하고 마르티네스가 말했다.
바메노스는 벌렁 누워서 입을 쩍 벌리고 눈을 꼭 감은 채 머리를 몇 번 앞뒤로 움직이며 신음하고 있었다.
"말해 보게, 말해 보게, 어서 말해 보라니까."
"말해보라니, 무엇을 말인가, 바메노스?"
바메노스는 주먹을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양복 말이야, 내 양복이 어떻게 됐는지 말해 달란 말이야!"
모두들 허리를 굽혔다.
"바메노스, 양복은...... 말짱해."
"거짓말이지?" 바메노스가 말했다."찢어졌겠지, 틀림없어. 온통 찢어졌을 거야. 양복 바지도."
"아니야." 마르티네스가 무릎을 꿇고 여기저기 만져보았다."바메노스, 양복 바지도 모두 말짱해!"
바메노스는 눈을 뜨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기적이로군!" 그는 흐느껴 울며"아아, 고마운 일이야!" 라고 말하더니 이윽고 울음을 그쳤다."자동차는 어떻게 됐지?"
"도망쳤어." 고메스는 갑자기 생각난 듯 텅 빈 한길을 노려보았다."달아나서 차라리 잘 되었어. 멈춰섰더라면―"
모두들 귀를 곤두세웠다.
먼 곳에서 신음하는 듯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전화로 구급차를 부른 모양이로군."
"빨리!"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메노스가 소리쳤다."일으켜주게. 옷을 벗겨주게."
"바메노스―"
"잔소리 말고 이 옷을 벗겨달란 말이야!" 바메노스가 외쳤다."그리고 바지도 빨리 벗겨. 그 의사들이...... 영화에서 보았지? 바지를 벗기려고 면도날로 바지를 찢는단 말이야. 그 녀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거든. 미친 녀석들이니까. 어서 빨리, 빨리!"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모두들 겁을 먹고 다급하게 바메노스의 옷에 손을 댔다.
"어서 오른쪽을 벗겨. 빨리, 이 바보들! 그렇지, 그래. 다음은 왼쪽, 왼발이야! 들리지 않나! 옳지, 벗겨지는군. 빨리 해주게. 마르티네스, 자네 바지를 벗어주게."
"뭐라고?"
마르티네스는 얼어붙은 것처럼 되어버렸다.
사이렌 소리가 부쩍 다가왔다.
"이 바보야!" 하고 바메노스가 울음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발가벗게 되었잖아. 자네 바지를 나에게 줘야지."
마르티네스는 허리띠의 버클을 힘껏 쥐었다.
"모두 내 둘레를 에워싸주게."
검은 바지와 하얀 바지가 공중에서 엇갈리며 날아갔다.
"빨리! 미친 녀석들이 면도날을 가지고 온단 말이야. 오른발, 왼발. 어서!"
"빨리, 자크를 채워줘. 이 굼벵이들!" 하고 바메노스가 울부짖었다.
사이렌 소리가 그쳤다.
"아아, 겨우 끝났군. 녀석들이 왔어. 아아, 살았다."
바메노스는 벌렁 누운 채 눈을 감았다.
마르티네스는 돌아서서 인턴이 지나가는 동안 시치미를 떼고 하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하고 인턴 한 사람이 말했다.
그들은 바메노스를 들것에 실었다.
"모두들 제발 화내지 말게" 하고 바메노스가 말했다.
"대체 누가 화를 낸단 말인가?" 고메스가 말했다.
구급차에 실릴 때 머리를 뒤로 젖히고 그들을 거꾸로 내려다보며 바메노스는 더듬더듬 말했다.
"자네들, 내가...... 내가 병원에서 돌아오면...... 다시 한패에 넣어주겠지? 나를 내쫓지 않겠지? 나는 담배를 끊겠네. 물리로의 카바레에도 가지 않고. 맹세코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겠어―"
"바메노스, 아무 맹세 하지 않아도 좋아" 하고 마르티네스가 다정하게 말했다.
바메노스는 눈물이 가득 괸 얼굴을 내밀고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배경으로 온통 하얗게 입고 서 있는 마르티네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아, 마르티네스, 자네의 그 모습이 정말 훌륭하군. 여보게들, 마르티네스가 매우 아름답지 않나?"
빌리어너슬이 바메노스 옆에 섰다. 도어가 쾅 하고 닫혔다. 남은 네 사나이는 구급차가 사라지는 것을 전송했다.
그리고 나서 하얀 옷을 입은 마르티네스는 친구들에게 에워싸여 보도 끝까지 정중하게 호송을 받았다.
아파트에 들어가자 마르티네스는 세척액을 꺼냈고, 모두들은 그 주위에 둘러서서 옷의 더러움을 빼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 일이 끝나자 다리미를 지나치게 뜨겁게 하지 않는 방법이며, 깃과 주름에 다림질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더러움도 빠지고 다림질도 끝나 양복이 이제 막 지어낸 싱그러운 치자나무의 꽃처럼 되자 그들은 그것을 마네킨에 반듯하게 걸쳤다.
"벌써 2시로군. 바메노스 녀석, 잠을 잘 자야 할 텐데. 병원에서 헤어질 때는 기분이 좋은 것 같았지만" 하고 빌리어너슬이 중얼거렸다.
마누로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오늘 밤에 이 양복을 입고 나갈 사람은 이제 없겠지?"
모두들 그를 흘겨보았다.
마누로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내 말뜻은......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걸세. 그리고 모두 너무 지쳐 있어. 아마 48시간 안에는 아무도 이 양복을 입겠다고 하지 않겠지? 양복을 쉬게 해야 할 테니까. 아암, 그렇고말고. 그럼, 우리는 어디서 자지?"
밤이 되어도 여전히 찌는 듯이 더워서 도저히 방 안에 있을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양복을 걸친 마네킨을 들어다 홀에 내놓았다. 베개와 담요도 들고 나갔다. 그들은 건물 옥상을 향해 계단을 올라갔다. 옥상이라면 바람이 서늘하여 잘 수 있으리라고 마르티네스는 생각했다.
그들은 활짝 열어젖혀진 여러 개의 도어 앞을 지나갔다. 사람들은 아직도 일어나 앉아 땀을 흘리며 트럼프를 치기도 하고, 음료수의 병마개를 따기도 하고, 영화잡지를 부채처럼 흔들기도 하고 있었다.
어쩌면 하고 마르티네스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맞아! 4층의 그 도어가 열려 있었다.
그 아름다운 아가씨가 눈을 치켜뜨고 모두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아가씨는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마르티네스의 모습을 보자 얼른 안경을 벗어 책 밑에 숨겼다.
한순간―길게 느껴지는 한순간이었다―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겨우 그는 말을 걸었다.
"나는 호세 마르티네스요."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나는 셀리아 오블레곤."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나이들이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마르티네스는 그 뒤를 따라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다급하게 ?牟눼?
"오늘 밤에 당신을 보았어요."
그는 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면서 말했다.
"그 양복 말씀이군요."
"네, 그 양복을 일고 계시는 것을―" 그녀는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牟눼?"하지만 그 양복을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네?" 하고 그는 되물었다.
그녀는 책을 치우고 무릎 사이에 숨겼던 안경을 꺼내보였다. 그녀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설명했다.
"나는 눈이 잘 보이지 않아요. 멋으로 안경을 낀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아요. 벌써 몇 년 동안이나 안경을 주머니에 넣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며 돌아다니고 있어요. 하지만 오늘 밤은 안경 없이도 보였어요. 저 밑의 어둠 속을 커다랗고 하얀 것이 지나가는 것을. 새하얀 것! 그래서 급히 안경을 꼈지요!"
"그 양복이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대로" 하고 마르티네스가 말했다.
"네, 잠깐 동안은 확실히 그 양복이 보였어요. 하지만 양복보다 조금 위에 또 하나의 하얀 것이 보였어요."
"또 하나의?"
"당신의 이였어요! 아아, 그토록 새하얗고 가지런한 이가 줄지어 있다니!"
마르티네스는 손을 입에 갖다댔다.
"아주 행복해 보이시더군요, 마르티네스 씨. 그토록 행복한 얼굴, 그토록 행복한 미소는 좀처럼 보기 힘들어요."
"아아!" 하고 그는 외쳤다.
그녀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시겠지요? 처음에는 그 옷이 눈에 띄었어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그 흰빛이 아래의 어둠을 환하게 만들었어요. 하지만 이가 훨씬 더 하얗게 보였기 때문에 그 양복에 대한 것을 깡그리 잊고 말았지요."
마르티네스는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도 자기의 말에 취해 있는 듯했다. 그녀는 코 위에 안경을 얹었다가 신경질적으로 벗어서 다시 제자리에 감추었다. 그녀는 자기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의 도어를 바라보았다.
"저어, 괜찮을까요?―" 그는 간신히 말했다.
"뭐가요?"
"괜찮을까요, 당신을 초대해도? 다음에 그 양복을 입을 때......"
"어째서 그 양복을 입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실은 저어―"
"그 양복을 입을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그야 그 양복을 입으면 누구나 훌륭하게 보이지요. 안 그래요? 나는 죄다 보았어요. 그 양복을 입은 사람을 오늘 밤에 여러 명 보았답니다―하지만 모두 제각기 달랐어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당신이 그 양복을 입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어요."
"아아!" 하고 그는 행복한 듯이 외쳤다. 조금 뒤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牟눼?"하지만 때로는 양복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1년에 한 달일지 또는 여섯 달일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일이 마음에 걸립니다, 아직 젊으니까요."
"그야 당연하지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저어―"
"셀리아 오블레곤이에요."
"셀리아 오블레곤 양."
마르티네스는 도어로 걸어갔다.
모두들 옥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올리는 문을 통해 위로 올라간 마르티네스의 눈에 옥상 한가운데 놓여 있는 마네킨과 양복, 그것을 둘러싸고서 나란히 깔려진 담요와 베개가 비쳤다. 모두들 누워 있었다. 여기 하늘 높은 곳에는 서늘한 밤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르티네스는 하얀 양복 옆에 혼자 서서 옷깃을 어루만지며 얼마쯤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아아, 정말 멋있는 밤이로군! 7시부터 벌써 10년이나 지난 것 같아. 그때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었어―친구도 없었지. 그리고 지금은 오전 2시. 온갖 종류의 친구를 얻었어......"
그는 잠깐 말을 끊고 셀리아 오블레곤을 생각했다, 셀리아 오블레곤을.
"......정말 온갖 종류의 친구들......" 그는 말을 계속했다."방도 생겼고, 입을 것도 생겼어. 어때, 그렇지?"
그는 마네킨과 그 자신을 에워싸고 옥상에 누워 있는 사나이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참으로 이상해. 나는 이 양복을 입으면 틀림없이 당구에서 이기거든, 고메스처럼. 그리고 도밍게스처럼 여자가 나를 쳐다보고, 마누로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罐?수도 있으며, 빌리어너슬처럼 정치술을 멋지게 펼 수도 있어. 바메노스처럼 힘도 생기지. 그럼, 어떻게 되지? 오늘 밤 나는 여느 때의 마르티네스가 아니야. 나는 고메스이고 마누로이고 도밍게스이고 빌리어너슬이고 바메노스란 말이야. 나는 그 모두란 말이야. 아아...... 아아......"
그들의 앉는 모습, 서는 모습, 걷는 모습을 돋보이게 해주었던 양복 곁에 그는 잠시 더 서 있었다. 고메스처럼 빨리 달리고, 빌리어너슬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절대로 땅에 발을 딛지 않고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도밍게스처럼 떠돌아다닐 수 있는 이 양복. 그들의 소유인 동시에 그들 모두를 소유하고 있는 이 양복, 그리고 또한―호화스러운 이 양복.
"여보게, 마르티네스, 자지 않겠나?" 고메스가 말을 걸었다.
"물론 자야지. 조금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야."
"무슨 생각?"
"우리들이 부자가 되면 조금 서글퍼질 것 같아. 부자가 되면 모두 제각기 양복을 짓겠지. 오늘 밤 같은 날은 없을 거야. 친구들은 뿔뿔이 헤어지고 결코 지금처럼 되지는 않을 테니까" 하고 마르티네스는 슬픈 듯이 말했다.
사나이들은 누운 채 지금 마르티네스가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고메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절대로 예전대로 되지는 않을 걸세...... 그렇게 되면―"
마르티네스는 담요 위에 누웠다. 어둠 속에서 그는 모두들과 마찬가지로 옥상 한복판으로 얼굴을 돌려 마네킨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그들 삶의 보람의 중심이 있었다.
그들의 눈은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났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했다. 가까운 건물의 네온사인이 켜졌다가는 꺼지고 꺼졌다가는 켜지며 그 멋있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하얀 양복을 비추고 있었다.
열병
Fever Dream
새로 깨끗이 세탁한 시트 속에 누워 있었다. 갓 짜온 짙은 오렌지 쥬스가 담긴 유리잔이 한 개 언제나 엷은 핑크 빛을 던져주는 램프 밑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찰즈는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병세가 어떤지 보기 위해 그의 방을 들여다보러 온다.
그 방의 음향효과는 굉장했다. 매일 아침 욕실의 도기(陶器)로 만든 세면대에서 꾸르륵꾸르륵 물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 천장에서 뛰어다니는 장난꾸러기 쥐들과 아래층 새장에서 카나리아의 지저귐도 들려온다. 이런 것이 들릴 정도의 병이라면 앓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찰즈는 13살이었다. 9월 중간 무렵, 대지가 가을빛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자리에 누운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손이 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그의 오른손이. 이불 위에 꺼내보았더니 오른손만 벌겋게 달아오르고 땀이 배어 있었다. 그것이 바르르 떨리며 꿈틀꿈틀 움직였다. 더우기 이불 위에 내놓고 있으려니까 빛깔이 차츰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날 오후 의사가 와서 작은 북을 두드리듯 그의 야윈 가슴을 통통 두드렸다.
"기분이 좀 어떠니?" 하고 의사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나는 다 알고 있다.'감기는 괜찮습니다, 선생님. 하지만 무서워요!'라고 말하려는 거지? 하하하!"
의사는 여러 번 되풀이했던 농담을 또다시 이야기하고는 웃었다.
찰즈는 누워 있었다. 그에게는 그 낡은 농담이 무서운 현실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 농담은 그의 마음에 달라붙어 있었다. 마음이 오므라들고, 공포 때문에 바르르 떨며 그것을 떨쳐버리려고 애썼다. 의사는 자기의 농담이 이토록 잔혹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리라!
"선생님" 하고 창백한 얼굴로 기운없이 누운 채 찰즈가 중얼거렸다."내 손이 이제는 내 손이 아닌 것 같아요. 오늘 아침에 다른 것으로 바뀌어버렸어요. 본디대로 해주세요, 선생님, 네, 선생님!"
의사는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그의 손을 어루만졌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구나, 얘야. 아마 열에 들떠서 꿈을 꾸었나 보다."
"하지만 달라졌어요, 선생님. 정말이에요, 이것 보세요, 이렇게!" 하고 찰즈는 외치며 한심스러운 듯 핏기없는 거친 손을 내밀었다.
"그럼, 분홍색 약을 주지." 의사는 눈을 깜박이며 찰즈의 손바닥에 정제 한 알을 얹어주었다."어서 먹어라."
"이것을 먹으면 손이 본디대로 내 것이 되나요?"
"그렇고말고."
의사가 부드러운 9월의 푸른 하늘 밑으로 자동차를 타고 돌아가버리자 집 안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래층 부엌 쪽에서 시계가 똑딱거리고 있었다. 찰즈는 누워서 손을 들여다보았다.
손은 본디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여전히 다른 것이었다.
밖에서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뭇잎이 떨어지며 차가운 유리창에 부딪쳤다.
4시가 되자 왼손도 변하기 시작했다. 열병에 걸린 것 같았다. 세포 하나하나가 맥박치며 달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따뜻한 심장처럼 고동치고 있었다. 손톱이 파랗게 되었다가 다시 빨갛게 되었다. 완전히 달라질 때까지 한 시간쯤 걸렸다. 완전히 달라지자 여느 손과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것이다. 이미 그것은 그의 손이 아니었다. 그는 공포 때문에 눈이 빙빙 돌았으나, 마침내 지쳐서 잠들어버렀다.
6시에 어머니가 스프를 가지고 올라왔다. 그는 손도 대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손이 없어요" 하고 말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무슨 말이니, 손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아니에요." 그는 울며 말했다."내 손은 없어졌어요, 의수(義手)처럼 되어버렸어요. 어머니, 나를 꼭 붙잡아주세요, 꼭. 아아, 무서워요!"
어머니는 그에게 스프를 떠먹여주어야만 했다.
"어머니, 의사 선생님을 불러주세요, 다시 한 번. 기분이 굉장히 나빠요."
"선생님은 오늘 밤 8시에 또 오신단다" 라고 말하고 어머니는 나갔다.
7시. 어둠의 장막이 집을 온통 감쌀 무렵, 찰즈가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있자 처음에는 한쪽 다리가, 이어서 또 한쪽 다리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 빨리 와주세요!" 하고 그는 째지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어머니가 왔을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버리자 그는 꼼짝 않고 누워서 다리가 욱신욱신 쑤시고 뜨거워지고 새빨개져도 참고 있었다. 몸에서 뿜어나오는 열 때문에 방 안이 무더웠다. 열은 발가락에서 복사뼈로, 그리고 무릎으로 기어올라왔다.
"들어가도 괜찮겠니?" 하고 의사가 문간에서 미소지으며 말했다.
"선생님! 빨리빨리 담요를 걷어보세요!" 찰즈가 외쳤다.
의사는 하라는 대로 담요를 걷어젖혔다.
"이것 봐라, 아무렇지도 않지. 땀이 나왔을 뿐이야. 열이 조금 나서 그러는 거다. 움직이면 안된다고 말했지? 약은 먹었니? 손은 본디대로 되었니?"
의사는 눈물에 젖은 찰즈의 분홍빛 볼을 살짝 건드렸다.
"약이 듣지 않아요. 왼손도, 두 다리도 달라졌는걸요."
"어디 보자. 그렇다면 약을 세 알 더 주어야겠구나. 세 군데가 더 나빠졌다니까. 그렇지, 얘야?" 하고 의사는 웃으며 말했다.
"그 약은 잘 듣나요? 저어, 선생님, 내가 걸린 병은 무엇이지요?"
"???성홍열이야. 감기가 심해져서 그렇게 되었단다."
"나의 몸 속에 병균이 들어가 그 병균이 새끼를 낳아서 그렇게 됐나요?"
"그렇지."
"정말 성홍열이 틀림없나요? 아직 아무것도 검사하지 않으셨잖아요?"
"어떤 종류의 열병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
의사는 싸늘한 위엄을 보이며 소년의 맥박을 짚었다.
의사가 검은 가방에 의료기구를 익숙한 솜씨로 모두 주워담을 때까지 찰즈는 잠자코 누워 있었다. 이윽고 조용한 방 안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작고 가냘픈 파문을 던졌다.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언제인지 나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어요. 석화목(石化木)에 대한 것이었어요. 나무가 돌로 변하는 것. 나무가 쓰러져 썩으면 거기에 광물이 섞이며 뿌리를 내리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 같지만 사실은 돌이라는 이야기였어요."
찰즈는 말을 끊었다. 조용하고 따뜻한 방 안에서 그의 숨결이 들렸다.
"그래서?" 하고 의사가 재촉했다.
"나는 생각했어요." 조금 뒤 찰즈는 말을 이었다."병균은 자라나는 것일까 하고요. 왜냐하면 생물 시간에 아메바인지 무엇인지 하는 단세포 생물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에요. 몇백만 년 전에 그러한 것들이 모여 한덩어리가 되어가지고 최초의 동물이 생겨났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더욱 많은 세포들이 모여서 더욱 크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물고기가 되고 그 다음에는 우리 같은 인간이 되었다고요. 그러므로 우리들은 모여서 서로 도우려고 마음먹은 세포들의 덩어리라고요. 정말 그런가요, 선생님?"
찰스는 열 때문에 바짝 마른 입술을 혀 끝으로 축였다.
"그것이 대체 어떻단 말이냐?" 하고 의사는 소년의 머리 위에 몸을 굽혔다.
"꼭 알고 싶어요, 선생님, 꼭!" 하고 소년은 외쳤다."어떻게 되는 것인지 제발 가르쳐주세요. 정말 그 옛날처럼 많은 병균들이 모여서 한덩어리가 되어 번식하고, 더욱 많은―"
소년의 하얀 손은 가슴 위에 얹혔다가 목으로 올라갔다. 찰즈는 외쳤다.
"그리고 병균들이 사람의 몸에 달라붙으려고 결심하면......"
"사람에게 달라붙는다고?"
"네, 그리고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내 몸, 내 손, 내 다리가! 병이라는 녀석이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고, 사람이 죽은 다음에 살아남는 방법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새된 소리를 질렀다. 소년의 두 손이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의사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외쳤다.
9시. 의사는 자동차에 올랐다. 소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전송하러 나와 의사에게 가방을 건네주었다. 그들은 2, 3분 동안 서늘한 강바람을 쐬며 이야기했다.
"손을 가죽끈으로 다리에 붙여서 묶어두십시오.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자기 손으로 상처를 입히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하고 의사가 말했다.
"괜찮을까요, 선생님?" 어머니는 의사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의사는 어머니의 어깨를 상냥하게 두드렸다.
"나는 30년 동안이나 댁의 주치의(主治醫)가 아닙니까? 열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어떤 망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목에 그런 상처를 내다니, 하마터면 질식할 뻔했어요."
"어쨌든 가죽끈으로 묶어두십시오. 내일 아침에는 괜찮을 겁니다."
자동차는 어두운 9월의 길을 달려갔다.
오전 3시. 찰즈는 캄캄한 작은 방에서 아직 눈을 뜨고 있었다. 침대의 머리와 등이 닿는 부분이 젖어 있었다. 몸이 몹시 뜨거웠다. 이미 팔도 다리도 없으며 몸이 변화하기 시작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침대 위에서 꼼짝하지 않고 미친 듯이 깜깜한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 동안 째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고 있었으나 지금은 축 늘어지고 목소리도 쉬어버렸다. 어머니가 몇 번 올라와서 젖은 타월로 이마를 식혀주었다. 그래서 지금은 얌전해졌다. 두 손을 가죽끈으로 다리에 묶인 채.
그는 몸의 내부가 변화하고 있다고 느꼈다. 내장이 흔들리고 폐는 핑크 빛 알콜 램프처럼 불이 댕겨진 것 같았다. 방 안을 환하게 비춰주는 어른거리는 난로 속의 불처럼.
이미 몸은 없는 것이다.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목 밑에 붙어 있긴 해도 어떤 강렬한 수면제를 먹었을 때처럼 심하게 맥박치고 있다. 마치 교수대에서 목을 싹둑 잘린 것 같았다. 머리는 한밤중의 베개 위에 빛을 뿜으며 누워 있고 몸은 아직 산 채로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있다. 병이 그의 몸을 삼켜버렸으며, 영양분을 섭취하여 번식해서 열로 달아오른 복제품(複製品)을 만들어낸 것이다.
손의 솜털도, 손톱도, 상처 자국도, 발톱도, 오른쪽 엉덩이에 있는 작은 사마귀도 모두 똑같이.
(나는 죽었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아직 살아 있단 말이야. 나의 몸은 죽어버렸다. 여기 있는 것은 병의 덩어리. 하지만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는 걸어다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닌 어떤 다른 사람이다. 어떤 나쁜 것, 좋지 않은 덩어리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어떤 커다란 악의 덩어리이다. 그놈은 구두를 사고, 물을 마시고, 아마도 언젠가는 결혼할 것이며, 세상에 지금까지 없었던 나쁜 일을 꾸밀 것이다.)
열은 뜨거운 포도주처럼 그의 목덜미로 뺨으로 퍼지고 있었다. 입술은 불타고 눈두덩은 마른 잎처럼 불이 붙었다. 콧구멍에서 조금씩조금씩 파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제 마지막이겠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놈은 나의 머리와 뇌수를 가지고 간 것이다. 눈도, 이도, 뇌수에 새겨진 흔적도, 머리카락도, 귓속에 있는 주름까지도 남김없이 가져갈 것이다.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는 뇌 속에 펄펄 끓는 수은(水銀)이 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왼쪽 눈이 수축되어 달팽이처럼 오므라드는 것을 느꼈다. 왼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이 눈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다. 적의 영토이다. 혀도 없어졌다―잘리어서. 왼쪽 뺨이 감각을 잃었다. 왼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이미 다른 녀석의 영토가 된 것이다. 이 새로 태어나고 있는 것, 통나무를 점령하고 태어난 이 광물성의 것, 건강한 동물의 세포를 침범한 이 병이라는 녀석의 것이 되었다.
그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는 방 안에서 높고 크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뇌 속이 터져버리고, 오른쪽 눈과 오른쪽 귀가 잘리고, 장님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온 몸이 불과 공포와 죽음으로 바뀌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외마디 소리를 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방문으로 들어와 그의 옆으로 달려오기 전에 비명은 그쳤다.
맑게 갠 상쾌한 아침이었다. 바람이 몹시 불어 소년의 집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걸어오는 의사의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2층 창가에 소년이 정장을 하고 서 있었다.
의사가 손을 흔들며"웬일이냐? 일어나 있으면 안되는데!" 하고 말을 걸어도 소년은 손을 흔들지 않았다.
의사는 달리다시피 2층으로 올라가 숨을 헐떡거리며 침실로 들어갔다.
"일어나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하고 그는 소년에게 물으며, 소년의 야윈 가슴을 두드리고, 맥박을 짚어보고, 체온을 재보았다."이거 참, 놀라운걸! 정상이야. 아주 정상이란 말이야!"
"나는 다시는 병에 걸리지 않을 거예요, 다시는요" 하고 소년은 명확하게 조용히 말하면서 넓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기를 바란다. 정말 다 나은 모양이로구나, 찰즈."
"저어, 선생님."
"왜 그러니, 찰즈?"
"이젠 학교에 가도 좋을까요?" 하고 찰즈는 말했다.
"내일부터 가도 좋다. 무척 가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네, 나는 학교가 좋아요. 친구들과 함께 놀고 싶고 씨름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침을 뱉는 놀이도 하고, 여자아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장난도 하고, 선생님과 악수도 하고 싶어요. 옷걸이에 걸려 있는 외투에다 차례차례 손을 닦는 장난도 하고 싶어요. 어른이 되어 두루 여행하며 세계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싶어요. 그리고 결혼해서 많은 아이를 낳고 싶기도 하고, 도서관에 가서 온갖 책을 만지기도 하고―나는 무엇이든지 모두 하고 싶어요! 선생님은 나를 뭐라고 부르셨었지요?"
소년은 눈길을 들어 9월의 아침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부르다니?" 의사는 당황했다."그저 찰즈라고 불렀지."
"아예 이름이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하고 소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빨리 학교에 가고 싶다니, 아주 잘됐다." 의사는 말했다.
"너무 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소년은 빙긋이 웃었다."선생님, 여러 가지로 고맙습니다. 악수해 주세요."
"아아, 좋고말고."
두 사람은 진지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열어젖혀진 창문으로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두 사람은 1분 가까이나 손을 잡고 그대로 있었다. 소년은 빙긋 웃으며 늙은 의사를 쳐다보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소년은 웃으며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가서 의사가 자동차를 타는 데까지 전송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기쁜 작별을 하기 위해 뒤따라나왔다.
"이렇게 건강해지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아버지가 말했다.
"게다가 힘도 세어졌답니다. 밤 사이에 혼자서 가죽끈을 풀었으니까요. 안 그렇니, 찰즈?"
"그랬었나요?" 하고 소년이 말했다.
"그렇고말고. 어떻게 빠져나왔지?"
"그것은 벌써 옛날 일이에요" 하고 소년은 말했다.
"옛날 일이라고!"
모두들 웃었다.
이렇게 웃고 있는 동안 얌전한 소년은 길에 맨발로 기어다니고 있던 몇 마리의 불개미가 자기의 발에 기어오르자 그것을 살짝 밟아버렸다. 부모와 늙은 의사가 말을 주고받고 있는 동안 소년은 남몰래 눈을 번뜩이면서 개미들이 당황하여 부들부들 떨며 시멘트 위로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개미들이 싸늘해지는 것을 그는 느꼈다.
"안녕!"
의사는 손을 흔들며 돌아갔다.
소년은 부모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저 먼 거리 쪽을 바라보며 입 속으로 조그맣게 <학교 시절>을 노?罐0?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기운을 되찾아서 정말 다행이구나."
"들어보세요, 학교에 다시 가게 된 것을 저렇게 기뻐하고 있어요!"
소년은 조용히 돌아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대여섯 번 입을 맞추었다.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현관 계단을 깡총깡총 뛰어올라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거실에 들어가자 부모가 들어오기 전에 재빨리 새장문을 열고 손을 집어넣어서 노란 카나리아를 힘껏 쥐었다. 꼭 한 번.
그 다음 새장문을 닫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기다렸다.
결혼 개량
The Marriage Mender
해가 비치면 그 침대의 머리판은 분수처럼 맑디맑은 빛을 반사한다. 사자며 괴수(怪獸)며 턱수염이 길게 늘어진 염소 등이 조각되어 있다. 깊은 밤에 보면 무서움을 느끼게 하는 조각들이었다. 한밤중에 앤토니오는 침대에 걸터앉아 구두끈을 풀고 못이 박힌 억센 손을 뻗어 그 희미하게 반짝이는 하프를 만져보았다. 그리고 이 신화 같은 꿈의 기계 속으로 기어들어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어느덧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덮이는 것이었다.
"매일 밤 증기 오르간 옆에서 잠자는 것 같아요" 하고 옆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내의 말소리에 그는 가슴이 뜨끔했다. 복잡하게 얽힌 머리판의 차가운 쇠붙이―벌써 몇 년 동안이나 거친 노래며 아름다운 노래를 수없이 연주해 온 이 하프의 줄을 굳어진 손가락으로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그는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이것은 증기 오르간이 아니오" 하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그런 소리가 나는걸요. 오늘 밤 침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세계에 몇십억이나 될 거예요.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침대가 없지요?" 아내 마리아가 말했다.
"이것은 훌륭한 침대야" 하고 앤토니오는 조용히 말했다.
그는 머리 위에 있는 놋쇠로 만든 ?瓚?하프에 손을 대고 짧은 가락을 켜본다. 그의 귀에는 <산타 루치아>로 들렸다.
"이 침대에는 혹이 있어요. 낙타의 등에 있는 것 같은 혹이."
"엄마야" 하고 앤토니오는 불렀다―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으나, 아내가 화를 낼 때 그는 이따금 <엄마야>라고 불렀다."그런 말은 하지 않았었잖소, 아래층의 블랭코티 부인이 다섯 달 전에 새 침대를 사오기 전까지는."
마리아는 부러운 듯이 말했다.
"블랭코티 부인의 침대는 마치 하얀 눈 같아요―반듯하고 새하얗고 폭신폭신해요."
"그런 눈 같은 것―반듯하고 새하얗고 폭신폭신한 것 따위는 부럽지 않소. 어때, 이 스프링―좀 만져보오!" 그는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이 스프링은 나를 알고 있소. 지금은 이런 자세로 자고, 2시쯤에는 저런 자세로 잔다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이오. 3시에는 이렇고, 4시에는 저렇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요. 마치 이것과 덤블링을 하고 있는 것 같소―벌써 몇 년 동안이나 함께 말이오. 부추겨주는 방법도 쓰러지는 방법도 요령을 잘 알고 있소, 나는."
마리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따금 발트레 제과점의 설탕과자 제조기 속에 들어가 있는 꿈을 꿀 때가 있어요."
"이 침대는 말이오" 하고 그는 어둠을 향해 선언했다."가리발디 장군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대대로 우리 집안에 내려오는 물건이지! 여기에서 태어난 사람만 해도 하나의 선거구를 이룰 수 있을 만큼 되오―경례를 멋지게 하는 육군 군인이 일개분대, 제과업자가 두 사람, 이발사가 하나, <일 트로바토레>와 <리골레토>의 알토 파트 주장을 지낸 사람이 넷, 게다가 성격이 너무나도 복잡하여 마침내 생애에 무엇을 하면 좋을지 결정하지 못했던 천재가 두 사람, 그리고 또 무도회장에서 어떤 장식품보다 훨씬 아름다왔던 미인도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오! 풍요의 뿔이오, 바로 이 침대는! 풍요로운 수확을 낳는 기계란 말이오!"
"결혼하고 2년이 되지만" 하고 짜증이 나는 것을 누르며 아내가 말했다."우리들 <리골레토>의 알토 파트 주장은 어떻게 되었나요? 우리들의 천재는? 우리들 무도회장의 장식품은―?"
"조금만 참아, 엄마야."
"<엄마야>라고 하지 마세요! 이 침대가 당신에게는 밤새도록 좋은 꿈을 꾸게 해줄는지 몰라도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어요. 여자아기조차 태어나지 않잖아요?"
그는 벌떡 일어나앉았다.
"이 아파트 여자들의 시시한 말 때문에 당신은 완전히 얼이 빠지고 말았군. 블랭코티 부인에게 어린애가 생겼나? 어린아이건 새 침대건 아직 다섯 달밖에 안됐잖소?"
"아니에요, 이제 곧 생긴대요! 블랭코티 부인이 말했어요...... 게다가 그 침대는 무척 아름다와요."
그는 벌렁 누워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복수의 세 여신이 모두 밤하늘을 달려가기라도 하듯 침대가 삐걱 소리를 냈다. 새벽녘이 다가오자 그 소리도 사라졌다.
달의 위치가 바뀌자 바닥에 비치는 창문의 모양도 바뀌었다. 앤토니오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옆에 마리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 반쯤 열린 욕실문을 들여다보았다. 아내가 거울 앞에 서서 피곤한 얼굴로 자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아요."
"다투어서 미안하오. 곰곰 생각해 봅시다―침대에 대해서 말이오. 돈을 마련할 궁리를 해봐야겠소. 내일까지도 기분이 언짢으면 의사에게 진찰을 받도록 하오, 알겠지? 이제 어서 잡시다."
그는 아내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다음날 정오 앤토니오는 제재소에서 나와 유혹하듯이 시트가 씌워져 있지 않은 멋진 새 침대가 진열되어 있는 쇼윈도까지 걸어갔다.
"나는 몹쓸 녀석이야!"
그는 자기 자신에게 속삭이며 팔목시계를 보았다. 마리아는 지금쯤 의사에게 가서 진찰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오늘 아침 싸늘한 우유 같았다. 그래서 의사에게 ?마箚?말했던 것이다. 그는 그 다음 제과점 쇼윈도 앞까지 걸어가 설탕과자 제조기에서 과자가 나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설탕과자는 빽빽 소리를 지를까 하고 그는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그렇게 소리를 지를 것이다. 그러나 너무 높은 소리를 지르기 때문에 들리지 않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문득 튀어나온 설탕과자 속에서 그는 마리아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몸을 돌려 가구점 쪽으로 되돌아갔다. 그만두자. 사자. 그만두자. 아니, 사자. 그는 싸늘한 쇼윈도에 코 끝을 갖다댔다. 여어, 침대야. 거기 있는 새 침대야, 너는 나를 아느냐? 밤마다 나의 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져줄 수 있겠니?
그는 천천히 지갑을 꺼내 그 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그 부드러운 머리판, 그 낯선 적(敵), 그 새 침대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돈을 움켜쥐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아!"
그는 한 번에 두 계단씩 뛰어올라갔다. 밤 9시. 제재소의 시간 외 근무를 하지 않고 집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그는 웃음띤 얼굴로 열어젖혀진 도어에 뛰어들어갔다.
방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아아!" 하고 그는 낙심했다.
하는 수 없이 마리아가 돌아오면 볼 수 있도록 그는 새 침대의 영수증을 장롱 위에 놓았다. 그가 시간 외 근무를 하는 밤이면 마리아는 이따금 같은 아파트의 아래층에 사는 누군가의 집에 놀러간다.
찾아볼까 생각하다가 그는 그만두었다. 아내 혼자에게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다리자. 그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낡은 침대야, 이제 너와는 작별이로구나. 정말 섭섭하지만......"
그는 놋쇠로 만든 사자를 신경질적으로 어루만졌다. 그리고 방 안을 서성거렸다. 어때, 마리아! 그는 아내의 미소지은 얼굴을 마음 속에 그려보았다.
서둘러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아내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나 하고 그는 귀를 곤두세웠다. 그러나 들려온 것은 느릿하고 조심스러운 발소리였다. 그는 생각했다―저것은 마리아의 발소리가 아니다. 저런 느릿한 발소리, 마리아는 저렇지 않다.
도어의 손잡이가 달그락거리며 돌아갔다.
"마리아!"
"어머나, 당신 일찍 오셨군요!"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그에게 던졌다.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생각했다―나의 얼굴에 씌어 있단 말인가?
"나는 아래층에 가 있었어요. 모두에게 알리려고요!" 그녀가 소리쳤다.
"모두에게 알리려고?"
"의사 선생님에게―의사 선생님에게 진찰을 받았어요!"
"의사에게? 그래서?" 그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랬더니 아빠, 그리고―"
"아빠라고―그럼, 여보―?"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오오, 그랬었군. 그래서 그처럼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왔군."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
그는 아내를 끌어안았다―그러나 너무 심하지 않게. 그리고 양쪽 볼에 키스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환성을 질렀다. 그 다음 이웃 사람들을 몇 명 깨워 이 사실을 알렸다.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술도 조금 있어야지.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바퀴 왈츠를 추고는 기쁨에 가슴을 부풀리며 부둥켜안고 키스했다―이마에, 눈두덩에, 코에, 입술에, 관자놀이에, 귀에, 머리카락에, 턱에―다 끝났을 때는 12시가 넘어 있었다.
"이것은 정말 기적이오!"
그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들은 다시 단둘이 있게 되었다. 조금 아까까지 웃으며 떠들썩하던 사람들의 숨결로 방 안 공기가 아직도 따뜻했다. 이제 두 사람은 다시 단둘이 있게 되었다.
불을 끄자 그는 장롱 위의 영수증으로 눈길을 돌렸다. 흥분한 그는 또 하나의 이 큰 소식을 어떻게 멋들어지고 달콤한 방법으로 아내에게 말할까 생각했다.
마리아는 행복에 젖어 어둠 속에서 침대 한쪽 귀퉁이에 앉아 있었다. 마치 자신의 몸이 낱낱이 흩어져 손발이 한 개씩 바뀌어지는 이상한 인형이라도 된 듯이 그녀는 두 손을 움직거렸다. 한밤중에 따뜻한 바다 밑에서 움직이고 있는 듯한 유연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부서지기 쉬운 물건이라도 다루듯 가만히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마리아, 할 말이 있어."
"무엇인데요?" 그녀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몸이 되었으니까 편안히 쉴 수 있는 예쁜 새 침대를 사주겠소."
그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환성을 지르지도 않았고, 그 쪽으로 돌아눕지도 않았고, 매달리지도 않았다. 잠자코 있는 것은 생각에 잠겨 있기 때문이리라.
그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말했다.
"이 침대도 이젠 파이프 오르간―증기 오르간이 되어버렸으니까."
"이 침대는 말짱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낙타처럼 혹투성이요."
"그렇지 않아요. 이 침대에서 하나의 선거구를 이룰 만큼의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어요. 육군 군인이 일개분대, 발레리나가 두 사람, 유명한 변호사가 하나, 키가 몹시 큰 순경이 한 사람, 그리고 알토 가수, 소프라노 가수가 일곱 명이나 태어났잖아요" 하고 아내는 조용히 말했다.
그는 희미하게 밝은 방 한구석의 장롱 위에 놓여 있는 영수증을 곁눈질해 보았다. 닳아빠진 매트리스가 등에 느껴진다. 사지를, 근육을, 뼈마디 하나하나를 확인하려는 듯 스프링이 조용히 움직인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침대로 싸우지 맙시다, 마리아."
"<엄마야>라고 부르세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엄마야" 하고 그는 말했다.
이윽고 그는 눈을 감고 담요를 가슴 언저리까지 끌어올리고는 어둠 속에서 그 멋있는 분수 옆에 누워 무서운 금속의 사자, 호박빛 염소, 미소짓고 있는 괴수가 줄지어서 있는 곳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들려오는 것이었다―처음에는 먼 곳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다가 차츰 뚜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살짝 머리 위로 들어올린 마리아의 손 끝이 반짝이는 하프 줄, 낡아빠진 침대의 반짝반짝 빛나는 놋쇠판을 만지며 가냘픈 무도곡을 켜기 시작했다. 그것은―맞아, 두말할 나위도 없이 <산타 루치아>였다. 그는 거기에 맞추어서 입술을 움직여 마음 속으로 노?念떪? 산타 루치아! 산타 루치아!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왔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
The Town Where No One Got Off
밤과 낮 내내 기차를 타고 미국 본토를 횡단하면, 아무도 내리지 않는 황야의 거리거리를 그대로 통과하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지방 사람들은, 이러한 시골 묘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는 사람들은 일부러 그런 쓸쓸한 역에 내리거나 쓸쓸한 경치를 구경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나는 옆자리의 승객에게 해보았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세일즈맨이었다. 시카고 발(發) 로스앤젤리스 행 열차로 아이오와 주(州)를 통과하고 있을 때였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시카고에서 내리지요. 모두 거기서 내리더군요. 뉴욕에서도 보스턴에서도 로스앤젤리스에서도 내리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곳에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 이야깃거리로 삼지요. 하지만 구경을 하기 위해 네브래스카의 폭스 힐에서 내리는 관광객이 있을까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라면 또 어떨까요? 내릴 리가 없지요!. 그런 곳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용건도 없거든요. 더구나 요양지도 아닌데 누가 일부러―" 하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무척 색다르고 매력적인 곳이 아닙니까?―한 번쯤은 전혀 색다른 휴가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겠지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황야에 묻힌 마을을 골라 무작정 ?릿?것도."
"몹시 지루할 겁니다."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으면 지루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음 역은 어디입니까?" 나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램퍼트 쟁크숀입니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괜찮은 이름이군요. 나는 거기에서 내릴지도 모릅니다."
"거짓말 마시오, 바보같이. 거기에 무슨 볼일이 있습니까? 모험? 아니면 로만스입니까? 그렇다면 어서 빨리 뛰어내려 보시지요. 10초도 안되어서 자신이 바보였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택시를 잡아타고 다음 역에 가서 이 기차를 기다리게 되는 것이 고작일 겁니다."
"어쩌면 그럴는지도 모르지요."
나는 전신주가 휙휙 나타났다가는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멀리 앞쪽에 거리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겁니다" 하고 나는 계속 말하고 있었다.
나와 마주앉아 있던 세일즈맨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가 일어섰기 때문이다. 나는 모자를 집어들었다. 또 한쪽 손이 여행가방을 더듬고 있었다. 나 자신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만!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세일즈맨이 말했다.
기차가 갑자기 커브를 돌았다. 나는 비틀거렸다. 저 멀리 앞쪽에 교회의 뾰족탑과 깊은 숲과 여름의 밀밭이 보였다.
"자아, 그만 앉으시지요" 하고 그가 말했다.
"아닙니다. 저 앞에 보이는 거리에는 무언가가 있을 겁니다. 꼭 가서 보고 싶군요. 시간도 있습니다. 실은 다음 주 월요일까지는 로스앤젤리스에 돌아가지 않아도 되거든요. 지금 기차에서 내리지 않으면 볼 기회가 있었는데도 놓치고 말았다고 언제까지나 후회할 겁니다."
"지금 내가 말했지 않습니까, 저런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그럴 리가 없습니다. 무언가가 있을 겁니다."
나는 모자를 쓰고 여행가방을 들었다.
"틀림없이 당신이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고 세일즈맨이 말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기차는 기적을 울리며 철길 위를 마구 달려갔다. 거리가 차츰 다가왔다!
"행운이나 빌어주십시오!" 하고 나는 말했다.
"안녕히 가시오!" 하고 그는 외쳤다.
나는 큰 소리로 짐군을 부르기 위해 달려갔다.
페인트 칠이 벗겨진 낡은 의자가 플랫폼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이 의자에 파묻히도록 헐렁한 옷을 입은 70살쯤 된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이 역이 생긴 이래로 주욱 거기에 못박혀 있었기라도 한 듯한 모습으로. 얼굴이 햇볕에 까맣게 그을고, 뺨에는 도마뱀 같은 주름살이 새겨져 있었으며 그것이 그의 눈을 사팔뜨기처럼 보이게 했다. 머리카락은 여름 바람에 나부끼어 잿빛으로 뿌옇게 보였다. 커프스가 벌어져 하얀 시계의 태엽을 드러내보이고 있는 푸른 셔츠는 소나기구름 옆에 살짝 드러난 하늘처럼 말끔했다. 구두는 마치 난로가에서 한없이 쬐고 있었던 듯이 부풀어 있었다. 그림자는 변색되지 않는 검은 빛깔로 새겨져 있었다.
내가 기차에서 내리자 차창을 차례차례 뒤쫓고 있던 노인의 눈길이 퍼뜩 멎었다.
손을 흔들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수수께끼 같은 눈이 불쑥 어떤 빛깔을 띠었을 뿐이었다―낯익은 것을 보았을 때 나타나는 화학적 변화 같았다. 그러나 입이나 눈꺼풀이나 손가락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덩어리가 그의 내부에서 움직인 것이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눈길을 돌려 기차를 배웅했다. 플랫폼에는 그 노인 외에 아무도 없었다. 거미줄이 쳐진 못박힌 듯한 역 사무실 앞에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 같은 것도 한 대도 없었다. 나는 기차바퀴 돌아가는 소리를 뒤로 들으면서 플랫폼의 통나무길을 밟고 걷기 시작했다.
기차는 기적 소리를 울리며 언덕을 올라갔다.
어리석은 짓을 했나 보다고 나는 생각했다. 같이 앉아 있던 세일즈맨의 말이 옳았다. 여기에 내리자마자 느끼기 시작한 지루함은 마침내 공포를 가져다줄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바보짓을 했다. 그러나 절대로 달아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나는 노인 쪽을 보지 않은 채 여행가방을 끌며 플랫폼을 걸어갔다. 노인의 옆을 지나갈 때 그의 속에 있는 작은 덩어리가 다시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이번에는 뚜렷이 귀에 들려왔다. 그는 깊숙이 파인 판자에 발을 대고 똑똑 두드렸다.
나는 계속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자그맣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구름 한 점 없는 눈부신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거리 쪽을 향해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백 야드쯤 갔을 때 나는 흘끗 뒤돌아보았다.
노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은 채 물끄러미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계속 걸어갔다.
나는 꿈꾸는 듯한 기분으로 해질 무렵에 가까운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거리를 오직 혼자서. 강물의 흐름을 거슬러올라가는 송어처럼. 몸을 맡기고 있는 인생의 맑은 흐름의 강변으로 다가가지 않고.
이 거리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다음과 같은 일이 있을 뿐―
4시 정각에 허네저 철물점의 문이 소리도 요란하게 닫히자, 한 마리의 개가 한길의 흙먼지를 뒤집어쓰기 위해 나왔다. 4시 반―빨대가 소다수 속으로 가라앉으며 쥐죽은 듯 고요한 드러그 스토어에서 폭포 같은 소리를 냈다. 5시―소년들과 조약돌이 이 거리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5시 15분―느릅나무 밑 비탈진 양지에서 개미들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그러나―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이 거리의 어디엔가 틀림없이 구경거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계속 걸으며 찾아내야만 한다. 마침내 그것을 찾으리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 걸었다. 나는 계속 찾아다녔다.
오후 내내 변함없이 계속되는 일이 꼭 한 가지 있었다―낡은 청바지와 파란 웃옷 차림의 노인이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드러그 스토어에 앉아 있으면 그는 바로 앞에서 씹는 담배를 뱉어냈다―그것은 흙먼지 속에서 동그랗게 뭉쳐져 풍뎅이처럼 되었다. 내가 강가에 서 있으면 그는 물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자못 열심히 손을 씻는 척했다.
저녁 7시 반쯤 나는 일곱 번째인지 여덟 번째인지 조용한 한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옆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보았더니 그 노인이었다. 곧장 앞을 바라보며 마른풀 한 개를 더러운 이 사이에 물고 있었다.
"정말 지루했다오." 노인이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황혼 속을 걷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 역의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이?" 하고 나는 물었다.
"그렇소, 내가" 하고 그는 나무 그늘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에서 누구를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당신을."
"나를?" 놀라움이 목소리에 배어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왜......? 나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으실 텐데요."
"내가 언제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소?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을 뿐이오."
우리는 거리 끝에 와 있었다. 그는 방향을 돌렸다. 나도 역시 어두워지기 시작한 강가를 따라 다리가 있는 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거의 멈춰서지 않는 밤기차가 동쪽으로 서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나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으십니까? 당신은 보안관이신가요?" 하고 나는 불쑥 물었다.
"아니, 보안관은 아니오. 그리고 당신에 대해 알고 싶은 것도 없소. 당신이 마침내 여기에 왔으므로 놀라고 있을 뿐이오."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해는 이미 지고 공기가 갑자기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놀라셨다고요?"
"그렇소, 놀랐소. 그리고...... 기쁘기도 했소."
나는 갑자기 멈추어서서 똑바로 그를 쳐다보았다.
"언제부터 그 플랫폼에 앉아 계셨습니까?"
"20년 동안. 몇 안되는 손님을 맞이하고 전송하기 위해."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목소리가 강물의 흐름처럼 거침없고 차분했다.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고요?"
"또는 당신 같은 사람을" 하고 그는 대답했다.
우리는 차츰 짙어가는 어둠 속을 계속 걸어갔다.
"어떻소, 이 거리가?"
"좋은 거리로군요. 조용하고."
"좋은 거리요. 조용하고. 거리의 사람들은 어떻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착하고 조용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렇소, 조용하고 좋은 사람들이지요."
나는 되돌아가고 싶었으나 노인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실례가 되지 않도록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나는 그와 함께 걸어야만 했다. 드넓은 어둠 속을, 거리 너머에 있는 들과 푸른 초원을.
"나는 20년 전 일을 그만두게 된 날부터 역의 플랫폼에 앉아서 오늘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그러나 마침내 일어나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요. 그렇지, 그것을 보는 순간 이것이야말로 내가 기다리고 있었던 바로 그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거요. 기차 전복? 아니오. 50년 만에 옛 여자친구가 돌아오는 일? 아니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 뭐라고 말할 수는 없소. 누구인지, 무엇인지. 아무튼 그것은 당신과 관계가 있는 것 같소. 똑똑히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째서 똑똑히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자신의 내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소?"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 말씀의 뜻은―내장에 대해서입니까, 아니면 심리적인 뜻을 가리키는 겁니까?"
"머리와 뇌에 대한 것이오. 거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소?"
나의 발 밑에서 풀이 서걱서걱 소리를 냈다.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평생 동안에 미워한 사람이 많이 있었소?"
"더러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오. 미워한다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거든요. 그리고 미워할 뿐만 아니라,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때려주고 싶다거나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겠지요?"
"일주일에 한 번쯤은 틀림없이 그런 기분이 듭니다. 물론 그런 기분을 억제하지만요"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일생 동안 억제하며 살지요. 마을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러쿵저러쿵하고, 법률 또한 이러쿵저러쿵하기 때문에 죽이고 싶은 기분을 하나하나 억누르며 여러 개의 살인을 단념하게 되지요. 나만큼 나이가 들게 되면 그런 일들이 머릿속에 잔뜩 쌓이게 된다오. 그리고 전쟁에라도 나가지 않는 한 그것을 풀어버릴 방법이 없소" 하고 그는 말했다.
"사격이나 오리 사냥 등으로 달래는 사람도 있고, 권투나 레슬링으로 발산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소. 내가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오. 예를 들어 바로 나 같은 사람. 나는 일생 동안 이른바 그러한 시체들을 소금에 절여 머리속에 냉동 저장해 왔소. 이런 일을 강요당하면 거리며 거리의 사람들에 대해 몹시 화가 날 때가 있지요. 무섭게 소리를 지르며 사람의 머리에 곤봉을 내리치는 그 옛날의 혈거인이 부러워진다오."
"무슨 말씀이신지......?"
"다시 말해서 누구나 일생 동안에 한 번쯤 살인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단 말이오. 그때까지 용기가 없어서 하지 못했던 <살인>이라는 응어리를 떨쳐버리고 싶어진단 말이오. 그리고 이따금 기회가 오지요. 달리는 자동차 앞으로 누군가 불쑥 튀어나오는 수가 있는데, 그럴 때 미처 브레이크를 걸지 못하고 그대로 마구 달리는 거요. 그렇게 하는 것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자신조차도 그런 행위를 했다고는 생각지 않소. 다만 브레이크를 미리 걸지 못했다고 생각할 뿐이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게 된 건지 당신도 나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네" 하고 나는 대답했다.
이제 거리는 훨씬 뒤로 멀어져 있었다. 우리는 철길 둑 가까이에 있는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갔다.
"그런데 값어치있는 살인이라면 오직 하나―누가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누구를 죽였는지 아무도 추측할 수 없도록 한 살인이오. 안 그렇소? 나는 이러한 생각을 벌써 20년 전부터 품어왔소. 날마다, 매주일마다 생각했던 것은 아니오. 몇 달이나 생각하지 않고 지낸 적도 있었지요. 이 거리의 역에 멎는 기차는 하루에 하나, 그 하나마저 없는 때도 있기 때문에 만일 누군가를 죽이려면 여러 해를 기다려야 하오. 전혀 낯모르는 사람이 아무 이유도 없이 기차에서 내려 이 거리로 들어올 때까지. 바로 그때야말로 그 역 의자에 앉아서 기다린 보람을 느끼게 되리라고 나는 생각했지요. 그 사나이에게로 다가가서 그를 죽이고 강물에 집어던져넣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단 말이오. 시체는 몇 마일이나 하류에서 발견되겠지요. 어쩌면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는지도 모르오. 그 사나이를 찾기 위해 램퍼트 쟁크숀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요. 그 사나이의 행선지가 아니었으니까. 어디 다른 곳으로 가던 도중이었을 테니까. 이것이 내 생각의 전부요. 그리고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런 사람은 금방 알아볼 수 있소. 뚜렷이 가려낼 수 있단 말이오. 마치......"
노인은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캄캄했다. 달이 뜨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있어야 한다.
"그렇습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소."
노인은 별을 쳐다보았다. 머리의 움직임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 말을 많이 했구료."
그는 나에게로 다가와 나의 팔꿈치를 잡았다. 그 손이 몹시 뜨거워 마치 난로불을 쬐고 있었던 것 같았다. 또 한쪽 오른손은 주머니 속에 불룩하니 감추어져 있었다.
"정말 말을 너무 많이 했구료."
갑자기 울려오는 요란한 소리.
나는 머리를 급히 돌렸다.
머리 위의 보이지 않는 철길을 밤기차가 칼날처럼 날아갔다. 열차는 언덕으로, 숲으로, 밭으로, 거리로, 들로, 도랑으로, 목장으로, 경작지와 물 위로 빛을 뿌리고, 높이 외치고, 커브를 틀고, 새된 소리를 지르며 가버렸다. 기차가 지나간 다음에도 한참 동안 레일이 진동하고 있었다. 마침내 정지.
노인과 나는 어둠 속에서 서로 마주보며 서 있었다. 그의 왼손이 아직 나의 팔꿈치를 붙잡고 있었다. 오른손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있었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한 마디만 해도 좋겠습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자신에 대한 것을 말입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거의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참 만에 나는 비로소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상하군요. 나도 당신과 똑같은 생각을 해왔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오늘도 대륙을 횡단하며 생각했지요―이토록 완전히 똑같을 수가 있을까요? 요즈음에는 장사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아내는 병에 걸려 있고, 지난 주일에는 친구가 죽었습니다. 세상에는 전쟁이 일어나 온통 들끓고 있잖습니까? 이럴 때 만일―"
"만일......?" 노인은 나의 팔꿈치를 붙잡은 채 말했다.
"만일 어떤 작은 거리에서 내린다면―그 거리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옆구리에 권총을 차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찾아내어 죽이고 그 사람을 묻은 다음 역으로 돌아가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무도 모르겠지요. 누가 죽였는지 아무도 영원히 모를 겁니다. 그렇게 하면 완전범죄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나는 기차에서 내렸던 것입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계속 1분쯤 서로 노려보며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아마도 우리는 듣고 있었을 것이다―두근두근 심하게 맥박치는 상대방 심장의 고동 소리를.
나는 눈 앞이 어지러웠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쓰러지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기차처럼.
지금 한 말이 반드시 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사람에게 한 말은 모두 진실이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깨달았던 것이다―어째서 내가 기차에서 내려 이 거리를 걷고 있었는지를. 그리고 무엇을 찾아헤매고 있었는지를.
노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손은 나의 팔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러지기라도 할 듯이 그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로 몸을 내밀자 그도 나에게로 몸을 내밀었다. 긴박한 무서운 정적, 폭발 직전과도 같았다.
한참 만에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것은 엄청나게 무거운 짐에 짓눌린 듯한 사나이의 목소리였다.
"당신이 권총을 가지고 있는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소."
"당신이 알 리 없지요."
나는 어렴풋이 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기절할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랬었군요." 하고 노인은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눈을 꼭 감았다. 입을 꼭 다물었다.
5초 뒤 그는 천천히 나른하게 몹시 무거운 동작으로 나의 팔을 놓았다. 그리고 자기 오른손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그 손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우리는 느릿느릿 반대 방향으로 갈라져 무작정 어둠 속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밤중의 도중 승차를 알리는 불꽃 신호가 철길 위에서 반짝거렸다. 기차가 덜컹거리며 역을 출발하기 시작할 때 나는 열려 있는 침대차의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뒤돌아보았다.
플랫폼의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져 놓인 의자에 그 노인이 앉아 있었다―빛바랜 청바지에 파란 웃옷, 햇빛에 그을린 얼굴, 햇볕에 바랜 눈을 하고. 기차가 떠나기 시작할 때 그는 이쪽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동쪽으로 뻗은 텅 빈 철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 또는 모레, 또는 그 다음날 언젠가 기차가 날듯이 또는 속력을 떨어뜨리고 통과할지도 모르고 멈춰설지도 모르는 동쪽의 철길을. 그의 얼굴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눈도 얼어붙은 듯 역시 동쪽으로 쏠려 있었다. 그는 백 살쯤 되어보였다.
흐느끼는 듯한 기차의 기적 소리.
갑자기 나 자신도 늙어버린 듯 느껴졌다. 나는 몸을 내밀다시피하여 비스듬히 밖을 내다보았다.
우리를 만나게 했던 이 어둠이 그와 나 사이에 가로막고 있었다. 노인도, 역도, 거리도, 숲도 모두 밤의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한 시간 동안이나 나는 윙윙거리는 돌풍 속에 몸을 내밀고 그 어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소다수 냄새
A Scent of Sarsaparilla
윌리엄 핀치 씨는 사흘 동안 오전에도 오후에도 바람이 몰아치는 어두운 다락방에 가만히 서 있었다. 11월 끝무렵 사흘 동안 그는 부드러운 하얀 <시간>의 단편이 강철같이 차갑고 먼 하늘에서 소리없이 ?굅?내려와 살며시 지붕을 덮으며 처마 끝에 매달리는 것을 혼자 서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다락방은 해가 비치지 않는 긴긴 하루를 바람의 바닷속에서 삐걱거리고, 쌓이고 쌓인 먼지를 들보에서 털어내며 기둥과 평고대(처마 끝에 가로놓은 오리목)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의 둘레에서는 수많은 한숨 소리와 신음 소리. 그는 거기에 서서 그 건조하고 우아한 냄새를 맡으며 옛날의 유산을 매만지고 있었다. 아아, 아아!
아내 코라는 아래층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그가 걸어다니고 위치를 바꾸고 천천히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숨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그녀는 상상했다―바람이 몰아치는 다락방에 혼자 올라가 먼지투성이의 풀무처럼 천천히 뿜어냈다가는 들이마시는 그의 숨소리밖에.
"저런 바보 같은 짓이 또 어디 있담!"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사흘째 되는 날 오후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왔을 때 그는 미소짓고 있었다. 쓸쓸한 바람벽에, 이가 빠진 접시에, 흠집이 난 은그릇에, 그리고 아내에게.
"왜 그렇게 흥분하고 계세요?" 하고 그녀가 캐물었다.
"기운이 넘쳐흐른다는 증거지. 기운이 왕성해서 그러는 거요."
그리고 그는 웃었다. 히스테리컬할 정도로 그는 기뻐하고 있는 듯했다. 끓어오르는 흥분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아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냄새는 무엇이지요?"
"냄새―냄새라니?"
"소다 수 냄새로군요. 틀림없어요!" 하고 그녀는 수상쩍다는 듯이 코를 킁킁거렸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찬물을 끼얹은 듯 한껏 달아올랐던 그의 행복감이 갑자기 사그라졌다. 그는 당황하여 침착성을 잃고 갑자기 경계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어디 가셨었지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당신도 알잖소. 다락방을 청소하고 있었지."
"잡동사니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겠지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니까요. 다락방에 안 계시는 줄 알았어요. 그것이 무엇이지요?" 하고 그녀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째서 이런 것이 달라붙어 있을까?"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얇은 바지단과 뼈가 앙상한 복사뼈를 이어주고 있는 자전거의 검은 용수철 멈춤쇠를 내려다보았다.
"다락방에서 찾아냈지" 하고 그는 대답했다."기억나오, 코라? 아침 일찍 둘이서 함께 자전거를 타고 자갈길을 달리던 시절의 일을. 40년 전이었지. 그 무렵에는 모든 것이 신선하고 싱그러웠는데......"
"오늘 안으로 다락방을 정리하지 않으면 내가 올라가서 무엇이든 집어던져버리겠어요."
"아, 안돼! 모두 내 마음에 들게 해놓고 있단 말이야!" 그가 외쳤다.
아내는 쌀쌀맞게 남편을 쳐다보았다.
"코라―"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식사를 하며 다시 열띤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다락방이 어떤 것인지 당신도 알겠지? 다락방이란 말하자면 타임머신과 같아. 거기에 들어가면 나같이 나이들고 어리석은 인간도 40년 전으로 여행할 수가 있단 말이오―일년 내내 여름뿐이고, 아이들이 냉차장수의 손수레 곁으로 우르르 몰려드는 옛날로. 어떤 맛이었는지 기억하고 있소? 얼음을 손수건으로 쌌었지. 헝겊과 눈의 맛을 동시에 빨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어."
코라는 답답했다.
그는 반쯤 눈을 감고서 생각에 잠겼다. 그것을 눈으로 보고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리라. 다락방을 생각해 보라. 거기의 분위기부터가 아무리 보아도 <시간>이다. 거기에는 현재와는 다른 연령이 있고, 시대를 달리하는 누에와 애벌레가 집을 짓고 있다. 옷장 서랍은 모두 작은 관(棺)이다―그 속에는 몇천 날이나 되는 과거가 안치되어 있는 것이다. 아아, 다락방이라는 곳은 <시간>이 가득 채워져 있는 정다운 암실이다. 그 속에서 허리를 쭉 펴고 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이것저것 회상하며 <과거>의 냄새를 맡고 두 손을 내밀어 <옛날>을 만져보려고 하면, 그렇게 하면......
여기서 문득 그쳤다. 이러한 생각의 일부를 입 밖에 내어 말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코라는 열심히 식사하고 있었다.
"어때, 재미있지 않소?" 하고 그는 아내의 머리카락을 향해서 물었다."―시간 항행(航行)을 현실적으로 할 수 있다면, 우리 집 다락방만큼 적당하고 어울리는 장소가 또 어디 있겠소?"
"옛날로 돌아간다 해도 여름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아내가 말했다."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머리가 조금 돌아 있기 때문일 거예요. 당신이란 사람은 좋은 일만 기억하고 나쁜 일은 모두 잊어버리지요. 옛날이라고 해서 여름만 있었던 것은 아니잖아요."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옛날은 여름뿐이었어, 코라."
"그렇지 않아요."
"내가 말하는 뜻은 말이오―" 하고 그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속삭이는 목소리로 설명하며, 자신이 쫓고 있는 환영을 밋밋한 식당 벽에서 잡기라도 하려는 듯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만일 나이와 나이 사이를 팔을 양쪽으로 벌려 몸의 균형을 유지하며 조심조심 외바퀴 차를 타고 간다면―만일 나이에서 나이로 차를 몰고 돌아다니며 1909년에 일주일, 1900년에 하루, 그밖에 1905년과 1898년에 한 달이든 2주일이든 지낸다고 하면, 죽 여름만 살 수 있지."
"외바퀴 차로요?"
"왜 그거 있잖소. 크롬으로 만든 커다란 바퀴가 하나밖에 없는 자전거 말이오. 일인용 수레. 서커스에서 어릿광대가 타는 것. 균형을,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균형을 유지해야만 하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물체를 공중으로 아름답게 높이높이 달리게 한단 말이오―눈부신 빨강·노랑·파랑·초록·하양·황금빛과 섬광과 불꽃과 폭탄 등을 과거의 6월과 7월과 8월을 거의 손도 대지 않고 주위에 뿌려 공중에 날려보내고는 그 속을 미소지으며 타고 돌아다닌단 말이오. 균형이야말로 가장 중요하오, 코라."
"어리석은 소리! 그런 어리석은 소리가 어디 있어요." 아내가 말했다. 그녀는 한 번 더 되풀이했다."정말 어리석은 소리예요!"
그는 다락방으로 통하는 추운 계단을 덜덜 떨며 올라갔다.
겨울 밤에 어쩌다가 눈을 뜨는 수가 있다―뼛속에 사기 그릇이 들어 있기라도 한 듯 싸늘한 차임 벨이 귓속에서 울려퍼지고, 신경이 서리를 맞은 것처럼 깊숙한 잠재의식 속으로 밀리어 타오르는 눈처럼 적막한 곳으로 쏟아져내리는 차가운 불꽃처럼 빛을 뿜으며 잠에서 깨어나는 수가 있다. 춥다. 참으로 춥다. 이 얼어붙은 몸을 따뜻이 하고 겨울의 깍지 속에서 빠져나가려면 초록빛 횃불과 블론드 빛 태양이 있는 끝없는 여름이 몇십 번이나 필요할 것이다. 그는 지금 아무 맛도 없는 얼음덩어리였고, 별사탕의 꿈을 꾸며 밤마다 잠드는 눈사람이었다. 결정(結晶)과 비바람이 뒤섞인 덩어리였다. 그리고 바깥은 끝없는 겨울. 납빛의 포도주를 짜내는 거대한 기계가 잔뜩 찌푸린 하늘의 뚜껑을 깨뜨리고, 모든 것을 포도알처럼 짓이겨서 빛깔과 감각과 존재를 모든 사람으로부터 쥐어짜고 있다―그러나 아이들은 다르다. 낮이나 밤이나 거리 위에 낮게 드리워진 무쇠 방패를 비추고 있는 거울 같은 언덕에서 스키며 썰매를 타고 미끄름타는 아이들은 다르다.
핀치 씨는 다락방의 들어올리는 문을 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기에는...... 여름의 먼지가 그의 주위로 우수수 날아올라갔다. 다락방의 먼지는 다른 계절에서 옮겨온 열기로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그는 들어올리는 문을 가만히 닫았다.
그리고 미소짓기 시작했다.
다락방은 폭풍우가 일기 직전의 소나기구름처럼 조용했다. 이따금 코라 핀치 부인은 남편이 위에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오후 5시, 핀치 씨는 <내 황금 꿈의 섬>을 노?罐8?부엌문 앞에서 빳빳한 새 맥고 모자를 톡톡 두드렸다.
"당신은 대낮부터 주무시고 계셨어요? 네 번이나 불렀는데도 대답하지 않으시더군요" 하고 아내가 대들듯이 말했다.
"자고 있었느냐고?" 그는 생각해 보니 웃음이 나와 부리나케 손으로 입을 가렸다."맞아, 잠자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갑자기 그녀는 남편을 보며 소리쳤다.
"에그머니! 어디서 그 양복을 찾아냈지요?"
그는 빨간 줄무늬 웃옷에다 숨이 막힐 듯한 하얀 칼라를 높이 달고 있었으며, 아이스크림 빛 바지를 입고 있었다. 맥고 모자에서는 한줌의 신선한 건초를 흔들었을 때와 같은 냄새가 났다.
"낡은 트렁크 속에서 찾아냈지."
"나프탈린 냄새가 나지 않아요. 새옷 같은데요" 하고 그녀는 코를 킁킁거렸다.
"처, 천만에!" 하며 그는 다급하게 말했다.
아내가 옷차림을 뚫어지게 살펴보자 그는 몸을 꼿꼿이 하며 몹시 거북스러워했다.
"여기는 여름용품 가게가 아니에요" 하고 아내가 말했다.
"조금쯤 즐기면 안되오?"
"모두 당신이 사온 것들이겠지요." 그녀는 오븐 뚜껑을 탁 닫았다."내가 집에서 뜨개질하고 있는 동안 당신은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상점이나 드나들고 계셨겠지요."
그는 비꼬는 말을 듣는 것이 아주 질색이었다.
"코라." 그는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맥고 모자 속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옛날처럼 둘이서 일요일에 산책 나가면 멋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소? 당신은 비단 양산을 쓰고 긴 드레스 자락을 하늘거리며 소다 수 파는 가게의 철제 의자에 앉아 옛날에 맡던 드러그 스토어의 냄새를 다시 맡아본다면...... 요즈음의 드러그 스토어에서는 어째서 옛날 같은 냄새가 나지 않을까? 그리고 소다 수를 두 개 주문해야겠어, 코라. 그 다음 1910년 형(型)인 우리 포드를 타고 해너헌 부두로 가서 나무 도시락에 담은 저녁식사를 사가지고 브라스 밴드의 연주를 들어야지. 어때, 이 계획이?"
"저녁식사 준비가 다 되었어요. 그 어정쩡한 양복은 벗으세요."
"만일 자동차가 붐비는 시간이 되기 전에 시골의 떡갈나무 가로수길을 드라이브할 수 있다면 당신은 나가겠지?" 하고 그는 아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골길은 더러워요. 돌아올 때는 아프리카 사람 같은 얼굴이 되어버리잖아요. 그건 그렇고―" 그녀는 설탕 단지를 들어올려서 흔들어보였다."오늘 아침 여기에 40달러가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설마 그 돈으로 양복을 산 건 아니겠지요? 그 양복은 아주 새것이군요. 트렁크에서 꺼낸 것이 아니에요!"
"나는―" 하고 그는 말하려고 했다.
아내는 반시간 동안이나 아우성쳤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11월의 바람이 집을 뒤흔들었다. 아내가 지껄이고 있는 동안 겨울 눈이 얼어붙은 새하얀 하늘에서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대답해 보시라니까요!" 아내는 소리쳤다."당신 미치지 않았어요? 입고 나갈 수도 없는 양복에다 그렇게 돈을 들이다니!"
"다락방에―" 하고 그는 말하려고 했다.
아내는 일어나더니 거실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눈이 몹시 내렸다. 춥고 어두운 11월의 저녁 무렵이었다. 그녀는 그가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다락방으로, 지난 세월의 먼지에 뒤덮인 곳으로, 의상과 기둥과 <시간>의 그 캄캄한 곳으로, 아래의 세계로부터 고립된 세계로 올라가는 그의 발소리를.
그는 들어올리는 문을 조용히 닫았다. 손전등을 켜면 그것만으로도 쓸쓸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 여기에는 온갖 <시간>이 종이로 만든 꽃 속에 압축되어 있다. 기억을 더듬으면 모든 것이 맑디맑은 마음의 물 속에서 꽃을 피운다. 실물보다 크게 봄날의 산들바람 속에서 아름답게 꽃피는 것이다. 옷장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보면 먼지로 테를 두른 숙모와 사촌들, 할머니들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여기에는 <시간>이 있다. <시간>의 숨소리가 느껴진다. 기계 장치가 되어 있는 시계가 아니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아래층은 지금 지나간 날들처럼 멀게 느껴진다. 그는 반쯤 눈을 감고 기다리고 있는 다락방의 모든 면을 둘러보았다.
여기에는 프리즘 식 샹들리에 속에 무지개가 뜨고, 끝없는 <시간> 속을 거꾸로 흐르는 새로운 강물 같은 밝은 아침이, 그리고 낮이 있다. 그의 손전등은 이런 것들을 포착하여 밝게 비춰주고 숨결을 불어넣어주었다. 무지개가 떠오르더니 빛깔있는 그림자의 곡선을 던졌다. 자두, 딸기, 콩코드 산 포도 비슷한 빛깔, 레몬 같은 빛깔, 폭풍우가 지나가고 구름이 걷힌 다음 빠끔히 나타나는 하늘빛. 그리고 다락방의 먼지는 향로의 연기이다―끊임없이 피어오르는 향로의 연기. 당신은 그저 불길만 바라보고 있으면 된다. 참으로 거대한 시간의 기계이다―이 다락방은. 그는 깨닫고, 느끼고, 확신한다. 만일 이 프리즘에 손을 대고, 저 도어의 손잡이를 만지고, 줄을 잡아당기고, 유리창을 두드리고, 먼지를 일으키고, 트렁크의 열쇠를 잠그고, 옛날식 난로의 풀무를 옛날의 불티가 수없이 눈 속으로 들어올 때까지 불면―이 갖가지 소리를 내는 따뜻한 기계를 불면―이러한 모든 잡동사니들, 지레며 발동기며 톱니바퀴를 매만진다면―그렇게 하면,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하면!
그는 관현악을 작곡하려고, 지휘하려고, 지휘봉을 휘두르려고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의 머리와 입 속에 음악이 있다. 그는 그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기계를 연주했다―우뢰와 같은, 그러나 소리없는 오르간을. 베이스, 테너, 소프라노, 낮게, 높게, 그리고 마침내 온 몸이 떨려오는 듯한 화음. 그는 눈을 감았다.
그날 밤 9시쯤 되자 아내는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코라!"
그녀는 위로 올라갔다. 위에서 그가 얼굴을 내밀고 그녀에게 미소지으며 모자를 흔들었다.
"잘 있소, 코라."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하고 그녀는 소리쳤다.
"나는 사흘 동안 생각했는데, 작별하기로 결정했소."
"내려오세요. 그런 말씀 하지 마시고. 바보같이!"
"어제 은행에서 5백 달러를 찾아왔소.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 오던 일이오. 그런데 막상 결심하고 나니, 저어...... 코라......" 그는 열심히 손을 내밀었다."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겠는데, 당신도 함께 가지 않겠소?"
"다락방으로요? 그 계단을 내려오세요, 윌리엄 핀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올라가서 그 더러운 곳에서 당신을 내쫓을 거예요!"
"나는 해너헌 부두로 갈 거요. 조개 스프를 먹기 위해. 그리고 브라스 밴드에게 <달빛어린 바닷가>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하겠소. 함께 갑시다, 코라......"
그는 손을 내밀어 오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다정한 그의 얼굴을 지켜볼 뿐이었다.
"안녕!" 하고 그가 말했다.
그는 정답게 손을 흔들었다. 그 다음 얼굴이 사라졌고, 맥고 모자도 사라졌다.
"윌리엄!" 하고 아내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다락방은 캄캄하고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의자를 놓고 그것을 발판삼아 울부짖으며 곰팡이 냄새가 나는 캄캄한 다락방으로 기어올라갔다. 그리고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윌리엄! 윌리엄!"
암흑의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겨울바람이 집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서쪽 창문이 열려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더듬으며 다가갔다. 한순간 머뭇거리며 숨을 죽였다. 이윽고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줄사다리가 창 밖에 걸려 현관 지붕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창가에서 뒷걸음질쳤다.
활짝 열어젖혀진 창문 밖에는 사과나무가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반짝이고 있었으며, 그곳은 7월 여름날의 황혼 무렵이었다. 희미하게 폭발하는 소리와 불꽃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즐겁게 웃는 소리,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켓이 여름 밤하늘로 올라갔다, ?굅? 빨강·파랑·하양―그리고 사라졌다.
그녀는 창문을 닫고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 섰다.
"윌리엄!"
차가운 11월의 햇빛이 그녀의 등 뒤에 나 있는 들어올리는 문으로 비쳐들어왔다. 내려다보니 아래층 11월의 세계에는 얼어붙은 듯한 투명한 창유리에 눈이 펄펄 날리고 있었다. 그곳은 그녀가 앞으로 30년 동안 지내야 할 세계이다.
그녀는 다시 창가로 다가가지 않았다. 혼자서 캄캄한 다락방에 앉아 아득한 하나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것은 만족스러운 한숨처럼 주위에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옛날의 그 그리운 잊을 수 없는 드러그 스토어의 소다 수 냄새였다.
이카로스 몽골페 라이트
Icarus Montgolfier Wright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바람이 창문을 통해 귓전으로 불어왔다. 반쯤 벌어진 입가로 불어왔다. 그의 꿈을 향해 속삭였다. 마치 그것은 델포이(중부 그리스 포키스 지방의 고대 도시. 아폴론의 神託을 받는 곳으로 알려짐)의 동굴로 파고들어가 어제 했음에 틀림이 없는 말을, 오늘 했음에 틀림이 없는 말을, 내일 할 것임에 틀림이 없는 말을 하려 할 때의 바람 같았다. 목소리는 멀리서 단 한 번 외칠 때도 있었다. 때로는 두 번 외칠 때도 있었다. 열 두 번이나 외칠 때도 있었다. 인류 모두에게 외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하는 말은 언제나 똑같았다.
"보아라, 보아라! 마침내 해치웠다!"
그는 그럴 때, 그들은 그럴 때 혼자 또는 모두 함께 꿈 속에서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그가 헤매고 있는 하늘에는 부드럽고 따뜻한 바다처럼 대기가 퍼져 있었다.
"보아라, 보아라! 마침내 해치웠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보아달라고 부탁하지는 않는다. 다만 오감(五感)을 모조리 열어서 대기를, 바람을,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고, 맛보고, 냄새맡고, 만져보려고 할 뿐이었다.
오직 홀로 하늘을 나는 것이다. 어느덧 무거운 대지는 발 밑에 없다.
(그러나 기다려, 잠깐만 기다려) 하고 그는 생각했다.
오늘 밤은―대체 무슨 밤인가?
물론 전야(前夜)―달을 향해 로켓이 처음으로 날아가는 전야인 것이다. 이 방에서 백 야드쯤 떨어진 불타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로켓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정말 로켓이 있는 것일까?
잠깐만! 그는 생각했다. 몸을 구부려 뒤채고 땀을 흘리며 눈을 꼭 감고 벽을 향해 누웠다. 잇새에서 잔인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사실대로 말해라! 대체 너는 누구냐?
(나 말인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나의 이름은?)
제디다이어 플렌티스, 1938년 출생. 1959년 대학 졸업. 1965년 로켓 항공사 면허 취득. 제디다이어 플렌티스...... 제디다이어 플렌티스......
바람이 그의 이름을 날려버렸다! 그는 외치고 두 손을 허위적거리며 매달렸다.
그러나 이름은 날아가버렸다. 그것을 다시 몰고올 바람을 그는 기다렸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다만 고요함이 계속될 뿐이었다. 심장의 고동 소리를 천 번이나 들은 뒤에 어떤 움직임을 느꼈다.
부드러운 파란 꽃처럼 하늘이 열렸다. 멀고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포도주빛 파도에 출렁이는 에게 해(海)는 바람에 끊임없이 나부끼는 몇천의 부드러운 하얀 부채.
바닷가에 출렁이는 파도 속에서 그는 자기의 이름을 들었다.
이카로스(그리스 神話에 나오는 인물. 아버지가 날개를 초로 붙여서 하늘을 날게 했는데,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갔기 때문에 초가 녹아 에게 海에 빠져죽었음).
다시금 한숨 비슷한 속삭임이 들렸다.
이카로스―
누군가가 그의 팔을 흔들었다. 보았더니 아버지(다이다로스)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밤을 걷어올리고 있었다. 그는 몸을 웅크리고 누워서 창문과 아래쪽 바닷가와 깊은 하늘에 반쯤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그들의 침대 옆에 놓여 있는 것은 호박빛 초로 잠을 재운 황금 날개였다. 새벽바람이 날개의 털을 곤두세우고 있음을 그는 느꼈다. 황금 날개는 아버지의 팔 안에서 반쯤 살아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어깨 위의 날개는 기절하였으며, 그 가지런히 가다듬은 밑뿌리는 그가 날개를 쳐다본 다음 서쪽 낭떠러지를 바라보았을 때 부르르 떨렸다.
"아버님, 바람은 어떻습니까?"
"나에게는 충분하다만, 너에게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버님, 염려 마십시오. 지금은 이 날개가 별로 보기 좋지 않지만, 날개 속의 나의 뼈가 힘을 주고 초 속에 흐르는 나의 피가 생명을 줄 것입니다."
"그 속에 나의 피와 나의 뼈가 섞여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람은 모두 피와 살을 자식에게 나누어주고, 그것을 훌륭하게 키우기를 바라는 법이다. 알겠느냐? 너무 높이 날지 말아라, 이카로스. 나의 아들아, 태양의 화력과 그 열기로 날개가 녹을 터이니 조심하여라!"
훌륭한 황금 날개를 지고 두 사람은 아침 일찍 출발했다. 그들은 각기 팔에서 날개의 속삭임을 듣고 있었다. 날개는 속삭였다―그의 이름을. 하나의 이름을. 누군가의 이름을. 그 이름은 부드러운 대기 속의 깃털처럼 공중으로 날아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졌다.
몽골페(형 조셉과 동생 잭이 협력하여 熱氣球를 만들어낸 프랑스 인 발명가 형제. 다음의 묘사는 아마포 자루에 짚불로 뜨겁게 한 공기를 넣어 날게 하는 데 성공했던 1782년의 첫 실험을 그리고 있음).
그의 손은 불 같은 밧줄에, 반짝이는 아마포에, 한여름같이 달아오른 실에 닿았다. 그의 손은 양털과 짚을 살아있는 불길로 만들었다.
몽골페―
그의 눈길은 부풀어오른 정도를 재고, 치우침을 재고, 반짝이는 줄, 들어올리는 줄, 불길에서 밀려온 대기의 빛나는 큰 물결을 뱃속에 집어넣으며 부풀어오르는 크나큰 은빛 배(梨)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을 쳐다보았다. 침묵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신처럼 프랑스의 외진 시골 위를 뒤덮고 있었다. 이 섬세한 아마포 자루는, 이 잔뜩 팽창된 열기가 가득찬 자루는 이제 곧 자유로이 날아올라갈 것이다. 침묵의 푸른 세계로 바람을 타고 올라가며 그의 마음도 동생의 마음도 모두 함께 허공에서 여행할 것이다. 소리없이 맑게 갠 구름 사이를 야만스러운 번갯불들이 잠자는 구름의 섬 사이를 여행할 것이다. 새소리도 사람의 소리도 결코 미치지 않고, 해도(海圖)에도 나타나 있지 않는 깊은 소용돌이의 수렁 한가운데까지 기구는 조용히 사라져간다. 그는, 몽골페는, 모든 사람은 떠돌아다니며 신의 무한한 숨결과 사원에 울려퍼지는 영원한 발자국 소리를 들을 것이다.
"아아......"
그는 움직였다. 사람들도 움직였다. 따뜻한 기구 밑에서 모두 그림자가 되었다.
"모든 채비가 갖추어졌다. 모든 일이 문제없다......"
문제없다. 꿈 속에서 그의 입술이 비뚤어졌다. 문제없다. 조용히. 속삭임. 날개 소리. 출발. 됐다!
아버지의 손에서 장난감이 천장으로 날아올라갔다. 바람을 일으키며 그 바람을 타고 돌아다니다가 공중에서 멈추어 그와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날개를 퍼득이며 파드득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속삭임으로 바뀌어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라이트(1903년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에 성공한 미국인 형제).
속삭임은 계속되었다―바람, 구름, 하늘, 우주, 날개, 비행......
"윌버(라이트 형제 중 형으로, 1867년 출생. 동생 오빌은 1871년 출생), 오빌, 저것 좀 보아라, 어떠냐?"
아아! 잠자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장난감 도르래는 부르릉거리며 천장에 부딪쳤다. 도르래는 중얼거리는 독수리. 큰 까마귀. 참새. 울새. 매. 중얼거리는 독수리. 큰 까마귀. 참새. 울새. 매. 속삭이는 독수리. 속삭이는 까마귀. 마침내 그들의 손에 아직 오지 않은 여름 하늘을 달리는 질풍처럼 꼬리를 끌고 최후의 신음 소리를 지르며 기운없이 떨어지는 속삭이는 매.
꿈 속에서 그는 미소지었다.
그(여기서는 이카로스를 말함)는 보았다. 에게의 하늘을 뒤덮는 구름의 물결을.
그(여기서는 몽골페를 말함)는 느꼈다. 투명한 바람이 불어치기를 기다려 배를 크게 부풀리는 것을. 술주정뱅이처럼 흔들리고 있는 기구를.
그(여기서는 라이트를 말함)는 들었다. 대서양을 바라보는 벼랑 밑에 병아리인 그가 떨어진다면 사뿐히 받아줄 부드러운 모래밭의 속삭임을. 기체의 테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이 하프줄이 되어 소리를 내고, 그 가락을 타고 날아오르려는 것을.
그는 느꼈다. 방 밖에 있는 사막 기지의 발사대 위에 준비를 갖춘 로켓이 그 불의 날개를 접고, 그 불의 숨결을 가다듬고, 삼십억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것을. 이윽고 그는 일어나 그 로켓을 향해 조용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벼랑 끝에 섰다.
뜨거운 기구가 던지는 그림자 밑에 서늘하게 섰다.
키티 호크(미국 노드 캐롤라이나 州의 地名. 여기서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비행에 성공했음)에 울려퍼지는 해일을 온 몸에 맞으며 섰다.
그리고 내(여기서는 다이다로스를 말함) 자식의 팔을, 손목을, 손을, 손가락을 황금의 초로 황금의 날개에 붙인다.
그리고 자기의 꿈을 하늘에 쏘아올리려고 놀라움과 경탄과 경이의 허덕임을, 숨결을 모아 뜨겁게 하여 관(管)을 통해 불어넣고는 그 상태를 마지막으로 살핀다.
그리고 가솔린 기관에서 불꽃이 일게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자기의 날개에 소원을 말한 다음 그것을 접고는 벼랑에서 날아올라갈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날개를 퍼득이며 날아올라갔다.
그리고 밧줄을 끊고 거대한 기구를 바람에 맡겼다.
그리고 발동기를 걸어 기체를 하늘로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스위치를 넣어 로켓에 불을 당겼다.
그리고 공중을 헤엄치고, 공중을 달리고, 공중제비를 돌고, 공중을 날고, 공중을 미끄러지고, 태양을, 달을, 별을 향해 곤두섰다. 대서양을, 지중해를, 시골 마을을, 넓은 들판을, 도시를, 부락을 저 멀리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고요 속에서, 날개의 퍼득임 소리 속에서, 기체의 떨리는 소리 속에서, 뿜어오르는 불길과도 비슷한 폭음 속에서, 자잘하게 떨리는 신음 속에서 처음에는 두려워하고 주춤거렸으나, 마침내 곧바로 올라가 정확한 위치를 잡고 멋들어지게 비행하며 그들은 제각기의 이름을 자기 자신에게 외쳤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도 큰 소리로 불러보았다. 먼 옛날에 죽은 사람들의 이름도 큰 소리로 불러보았다. 그 목소리는 포도주 같은 바람에, 짭짤한 바람에, 살며시 타이르는 듯한 기구의 바람에, 기계가 일으키는 불의 바람에 날아가버렸다. 반짝이는 날개가 한 장 한 장 움직여 깊숙이 묻혀 있는 그 날갯죽지가 드러나며, 퍼득일 때마다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 날개의 퍼득임 하나하나를 메아리처럼 등 뒤에 남기고 지구를 돌고 또 돌아 마침내 다가올 세월에게, 아들의 그 아들의 또 그 아들에게 거는 말소리를 남기며 한밤중의 하늘에서 이는 어수선한 소리를 자면서 듣는다(이 부분은 반은 깨고 반은 꿈꾸며 이카로스가 되기도 하고 몽골페가 되기도 하고 라이트 형제가 되기도 하고 로켓 조종사인 자기 자신이 되기도 하는 환상을 그린 것임).
올라간다, 올라간다, 또 올라간다. 더 높이, 더 높이. 봄의 파도, 여름의 파도, 끝없는 날개의 강!
벨이 가냘프게 울려퍼졌다.
그는 중얼거렸다.
"이제 곧, 이제 곧 잠에서 깨어날 테니 기다려다오......"
창 밑의 에게 해는 어느덧 뒤로 사라져버렸다. 대서양 바닷가의 모래밭도, 프랑스의 시골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뉴멕시코의 사막에 이르렀다. 방 안의 침대 곁에 황금 초로 붙인 날개는 이미 없다. 바깥에도 공기를 넣어 부풀린 배는 없다. 퍼득거리는 기계로 만든 나비도 없다. 있는 것은 다만 로켓뿐이다. 그의 손이 조금 움직이면 언제든지 날아올라가며 불을 뿜는 꿈이 있을 뿐이다.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물었다.
한밤중부터 지금까지 들은 이름을 그는 조용히 들려주었다.
"이카로스 몽골페 라이트!"
그는 이름을 물은 누군가에게 이름의 순서도 철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마지막 한 글자까지 천천히 되풀이했다.
"이카로스 몽골페 라이트. 기원전 9백 년 출생. 1783년 파리에서 국민학교 졸업. 1903년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키티 호크의 단과대학을 졸업했음. 그 뒤 지구에서 달로 이주. 오늘은 신이 축복을 내린 1970년 8월 l일. 1999년 여름 행복하게도 화성의 땅에 매장되리라."
그리고 그는 간신히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 뒤 태머크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던 그는 누군가가 여러 번 되풀이하여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등 뒤에 누가 있는 것인지 없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한 사람의 목소리인지 여러 사람의 목소리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젊은 목소리인지 늙은 목소리인지도 알 수 없었다. 가까운 곳에서인지 먼 곳에서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래에서 나는 목소리인지 위에서 나는 목소리인지, 속삭이는 목소리인지 외치는 목소리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자랑스러운 세 개의 새로운 이름을 그는 들었으나 뒤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기 시작했다. 그 바람이 잠깐 멈추었다가 단숨에 몰아칠 때를 이용하여 그는 나머지 거리를 좁혔다. 서둘러 걸어가는 사막 한가운데에는 그를 기다리며 듬직하게 서 있는 로켓이 있었다.
가발
The Headpiece
그 소포는 저녁 무렵에 우편으로 도착되었다. 앤드류 레몬은 흔들어보고서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았다. 그 속에서는 커다란 털북숭이 독거미가 부스럭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있는 용기를 다 내어 떨리는 손으로 포장을 풀고 하얀 종이상자 뚜껑을 열 때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거기에는 새하얀 안피지(雁皮紙) 위에 억센 털이 돋아난 물체가 얹혀 있었다―낡은 소파 속에 들어 있는 검은 말털로 된 쿠션같이 개성도 없는 물건이었다. 앤드류 레몬은 싱긋 미소지었다.
"습격해 왔다가 물러가는 인디언 녀석들은 표적이나 경고의 표시로 이런 대학살의 성과를 뒤에 남기고 간다고 했었지. 이런 식으로!"
그는 그 반짝이는 까만 가발을 머리에 썼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모자의 챙에 손을 살짝 얹고 인사할 때처럼 그는 가발을 잡아당겨보았다.
그 가발은 그에게 꼭 맞았으며, 이마 윗부분에 나 있는 동전만한 구멍도 감쪽같이 감추어주었다. 앤드류 레몬은 거울에 비친 낯선 사람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환성을 질렀다.
"여어, 당신은 누구시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찬찬히 보지 않으면 거리에서 지나쳐도 모르겠는걸! 어째서냐고? 바로 그것이 없어졌기 때문이지! 그 보기 흉한 구멍이 없어졌으니 아무도 그런 것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테지. 새해에는 정말 복 많이 받으십시오로군!"
그는 작은 방 안을 빙빙 돌아다녔다.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무언가 하고 싶어 좀이 쑤셨으나, 문을 열고 나가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태세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그는 거울의 옆으로 걸어가며 그 속에서 지나가는 어떤 사람의 모습을 곁눈질해 보고는 그때마다 소리내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그는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흔들며 빙그레 미소를 띤 채 <주간 서부>를 들여다본 다음 <드릴러 영화잡지>를 보려고 했다. 그런데 자연히 오른손이 떨리며 머리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양쪽 귀 위의 빳빳한 새 가발의 가장자리를 만져보기 위해서였다.
"나에게 한턱내게 해주겠나, 젊은이!"
그는 파리똥이 묻어 있는 약장을 열고 병을 꺼내 병째 세 모금쯤 꿀꺽꿀꺽 마셨다. 눈에 눈물을 머금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우려던 손을 문득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방 밖의 어두운 복도에서 닳아빠진 융단 위를 들쥐가 돌아다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프렘웰 양이다!" 하고 그는 거울을 향해 말했다.
갑자기 가발이 머리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상자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마치 깜짝 놀라 가발이 스스로 그 속으로 도망치기라도 하는 듯이. 그는 뚜껑을 닫고 식은땀을 흘렸다―여름의 산들바람처럼 지나가는 여자가 내는 소리에도 겁을 먹으며.
그는 한쪽 벽에 나 있는 도어로 살금살금 걸어가 훌렁 벗어져서 몹시 새빨갛게 달아오른 머리를 갸우뚱했다. 프렘웰 양이 자기 방의 자물쇠를 열었다가 다시 닫고는 쇠붙이 소리를 내며 방 안을 잰걸음으로 걸어다니면서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빗장이 걸려 있고, 자물쇠가 잠겨 있고, 걸쇠가 걸려 있고, 4인치짜리 단단한 쇠못이 박혀 있는 그 도어에서 그는 물러섰다. 그녀가 살짝 못을 뽑고 빗장에 손을 내어 걸쇠를 벗기고 있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여 침대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밤의 일이 문득 생각났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은 뒤 잠이 들 때까지 꼬박 한 시간 이상이나 걸렸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한 시간쯤 방 안을 부스럭거리며 돌아다닐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어두워진다. 별이 반짝이기 시작할 무렵에 그는 그녀의 방문을 똑똑 두드리며"포치에 나와 앉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면"공원을 산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고 말을 걸어보는 것이다. 그녀가 그의 머리에 나 있는 이 제3의 보이지 않는, 깜박거리지 않는 눈을 알아차리려면 점자(點字)를 읽을 때처럼 머리를 움직이거나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작고 하얀 손가락은 그 상처에서 1천 마일 이내에 다가오는 일은 결코 없는 것이다. 그녀의 눈에는―그렇다, 오늘 밤 떠오를 보름달 표면에 나 있는 자국만큼밖에 비치지 않으리라. 그의 발가락이 한 권의 <과학 경이(驚異) 소설>을 쓰다듬었다. 그는 킁킁 코를 울렸다.
만일 그의 상처를 보게 되면―그녀는 어쩌면 노래나 시를 지을 것이다―오랜 옛날에 유성이 날아와 그의 머리에 부딪쳐 수풀도 나무도 없는 눈 위의 그 하얀 곳에서 사라졌나 보다고 상상하면서. 그는 다시 코를 킁킁 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아마도 그럴 테지. 그러나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 해가 진 다음에 만나야 한다.
그는 한 시간 더 기다렸다―이따금 창문으로 무더운 여름밤을 향해 침을 뱉으며.
"8시 반이다. 이젠 ?맛?"
그는 복도 쪽 도어를 열고 잠깐 멈추어서서 상자 속에 숨겨놓은 그 멋진 가발을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아직 그것을 쓰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는 홀을 지나 나오미 프렘웰 양의 방문으로 다가갔다. 도어 저쪽에 있는 그녀의 작은 심장의 고동에도 진동할 것 같은 얇은 도어였다.
"프렘웰 양" 하고 그는 속삭였다.
흰빛의 작은 새 같은 그녀를 커다란 주발 같은 손으로 떠올려 잠자코 있는 그녀에게 살짝 말을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 이마에서 솟아나오는 땀을 닦다가 그는 다시 그 구멍이 생각나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뻔하였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는 그 구멍을 감추기 위해 손을 살짝 갖다댔다. 한참 동안 그 구멍에 손을 꼭 대고 있으려니까 손을 떼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 두려움이 바뀌었다. 이 구멍 속으로 빠질 것 같은 두려움 대신 어떤 무서운 것, 어떤 보이지 않는 것이 와락 쏟아져나와 그를 삼켜버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또 한쪽 손으로 그녀의 도어를 흔들어보았으나 먼지가 일어날 뿐이었다.
"프렘웰 양!"
등불이 환히 켜져 있는지 어떤지 보기 위해 도어 밑 틈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도어를 확 열었을 때 빛이 눈을 쏠지도 모른다. 램프 불빛이 한 줄기 비치면 머리에 대고 있던 손을 엉겁결에 떼어 움푹 파인 상처가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그것을 통해 열쇠 구멍을 들여다보듯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게 되지 않을까?
도어 밑 틈새로 어렴풋이 빛이 보였다.
그는 한쪽 손으로 프렘웰 양의 방문을 세 번 조용히 두드렸다.
도어가 천천히 열렸다가 다시 천천히 닫혔다.
나중에 포치에서 저린 다리를 줄곧 고쳐포개고 땀을 흘리며 그녀에게 열심히 결혼신청을 해야겠다. 달이 높이 떠오르면 그의 이마에 있는 상처는 마치 낙엽이 떨어진 것처럼 보이리라. 한쪽 옆얼굴만을 그녀 쪽으로 돌리고 있으면 그 분화구는 보이지 않으리라. 그의 세계 저쪽으로 몽땅 감추어지리라. 그러나 그는 이런 경우 하고 싶은 말을 반도 못하는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프렘웰 양" 하고 그는 겨우 말했을 따름이었다.
"왜 그러세요?"
그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프렘웰 양, 당신은 요즈음 나를 멀리하시는 것 같군요."
그녀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실은...... 그...... 이제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포치에 나와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래되었지요. 다시 말해서 서로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물론 나보다 15살이나 아래지만, 우리 두 사람이 약혼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고마와요, 레몬 씨. 하지만 나는―"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매우 정중한 말투였다.
"아니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나의 머리 때문에 그러시지요. 언제나 머리에 있는 이 괘씸한 상처가 말썽이니까요!" 하고 그는 말했다.
그녀는 어른거리는 빛 속에서 외면하고 있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머나, 그렇지 않아요, 레몬 씨! 그런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전혀 달라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 생각해 본 일은 있습니다만...... 하지만 그런 일은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나의 친구 가운데―매우 친한 친구입니다만 의족을 붙인 사람과 결혼한 사람도 있는걸요. 얼마 동안 살다 보니 그 사람이 의족을 달았다는 것조차 잊었다고 하더군요."
"언제나 이 괘씸한 구멍이 말썽이란 말이야!" 하고 그는 우울하게 외쳤다.
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다 말고 다시 집어넣었다. 그는 두 주먹을 쥐고, 마치 커다란 바위덩어리라도 보듯이 쓸쓸하게 자기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모두 말씀드리지요, 프렘웰 양."
"말씀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좋아요."
"나는 한 번 결혼한 일이 있습니다, 프렘웰 양. 억울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쇠망치로 나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답니다!"
프렘웰 양은 깜짝 놀랐다―마치 자기 자신이 머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앤드류 레몬은 불끈 쥔 한쪽 주먹을 무더운 허공에서 힘껏 내리쳤다.
"정말입니다. 아내가 그 쇠망치로 나를 정통으로 내리쳤단 말입니다. 그야말로 온 세계가 나를 덮치는 것 같았지요. 집이 한꺼번에 무너지기라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작은 쇠망치의 일격이 나를 매장해 버렸습니다―매장해 버렸단 말입니다! 얼마나 아팠느냐고요? 그 아픔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프렘웰 양은 그의 아픔을 자신이 당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겨 말했다.
"어머나, 가엾어라, 레몬 씨!"
"그것도 아주 태연하게 해치웠단 말입니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내가 긴의자에 누워 있을 때 그녀는 내 위를 덮치듯이 서 있었습니다. 화요일 오후 2시쯤이었지요.'앤드류, 일어나요!'하고 아내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눈을 뜨고 아내를 쳐다보았지요―그저 그뿐입니다. 그때 아내가 그 쇠망치로 나를 내리쳤던 것입니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프렘웰 양이 물었다.
"별로 이유도 없었습니다―그저 질이 나쁜 여자이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어째서 그런 짓을 했을까요?" 하고 프렘웰 양이 되풀이해서 물었다.
"지금 말했듯이 이유 따위는 별로 없었습니다."
"정신이 돌았었나요?"
"그랬겠지요. 맞아요, 정신이 돌아서 그랬음에 틀림없습니다."
"당신은 부인을 고발했나요?"
"아니오, 고발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몰랐거든요."
"그래서 당신은 녹초가 되어버렸겠군요?"
앤드류 레몬은 입을 다물었다. 그때의 기억이 다시금 뚜렷하게 마음 속에 되살아났던 것이다. 눈에 선한 그 기억을 그는 말로 옮겼다.
"아니오, 그때 나는 일어섰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일어서서 아내에게 말했지요.'무슨 짓을 하는 거야!'그리고는 아내 쪽으로 비틀거리며 다가갔습니다. 거기에 거울이 있었지요. 머리에 구멍이 뚫어진 것이 보였습니다―깊은 구멍이. 거기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더군요. 마치 인디언처럼 말입니다. 아내는 우뚝 서 있었지요. 그러다가 마침내 공포의 비명을 세 번 지르더니 쇠망치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밖으로 뛰어나가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당신은 기절하셨나요?"
"아니오, 기절하지 않았습니다. 간신히 밖으로 뛰어나가서 의사에게로 데려다달라고 누구에겐가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버스를 탔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버스를 탔단 말입니다! 그리고 버스삯을 치렀지요! 다음에 어느 병원 앞에서 내려달라고 말했습니다. 승객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더군요. 정말입니다. 아마 그 다음에 나는 기절한 모양입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의사가 나의 머리를 치료하고 있더군요. 마치 술통의 아가리를 씻듯이 깨끗이 씻고 있었지요......"
그는 손으로 자기 머리의 상처를 만졌다. 지난날에는 든든한 이가 나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도 없는 잇몸을 민감한 혀가 더듬듯이, 손가락으로 상처 자국을 더듬어보았다.
"그는 매우 솜씨있게 치료해 주었습니다. 의사는 내가 당장에 죽지나 않을까 하는 듯이 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었지요."
"얼마 동안 입원하고 계셨지요?"
"이틀 동안이었지요. 그리고는 일어났습니다. 아내는 내가 회복되자 달아났습니다."
"어쩌면, 정말 큰일을 겪으셨군요." 프렘웰 양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의 심장이 달걀 교반기처럼 두근거려요. 소리가 들릴 정도예요. 만져보면 알 수 있어요. 눈에도 보일 정도인걸요. 레몬 씨,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부인이 그런 짓을 했을까요?"
"아까도 말했듯이 별로 이유 따위는 없습니다. 아마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겠지요."
"하지만 틀림없이 있었겠지요. 말다툼이나 뭐 그런 것이―?"
그의 뺨에 핏기가 솟아올랐다. 머리의 그 부분이 불을 뿜고 있는 분화구처럼 활활 타는 듯이 그는 느꼈다.
"말다툼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일어났을 뿐입니다―순순히 하라는 대로. 나는 오후가 되면 구두를 벗고 셔츠의 단추를 끄르고 누워 있기를 좋아했지요."
"어쩌면―당신에게 다른 여자가 있지 않았나요?"
"처, 천만에요,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혹시 술을 마시지 않으셨나요?"
"이따금, 아주 조금은―마셨지요."
"도박을 하지 않으셨나요?"
"처, 천만에요!"
"머리에 그런 구멍이 뚫리다니, 레몬 씨, 정말 안됐군요! 아무 이유도 없이."
"여자란 모두 그런 것입니다. 무엇을 조금 보면 금방 최악의 사태를 상상합니다. 정말 아무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다만 불쑥 쇠망치를 휘두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쇠망치를 내리치기 전에 부인은 뭐라고 말했지요?"
"그저'앤드류, 일어나요!'하고 말했을 뿐입니다."
"아니, 그 말을 하기 전에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반시간이나 한 시간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무언가 물건을 사러가고 싶다고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이렇게 날씨가 더운데'하고 말했습니다. 낮잠을 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거든요. 그녀는 나의 기분 따위는 이해해 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짜증스러운 기분을 안고 한 시간쯤 생각하며 앉아 있었겠지요. 그리고는 쇠망치를 들고 와서 느닷없이 나를 내리쳤던 것입니다. 너무 더워서 머리가 이상하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프렘웰 양은 창문의 그늘에 등을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눈썹이 천천히 치켜올라갔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결혼하고 얼마쯤 되었었나요?"
"1년쯤 되었었지요. 7월에 결혼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병이 난 것이 7월이었습니다."
"병이 나셨다고요?"
"나는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자동차 수리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등이 아프기 시작하여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후에는 누워 있어야만 했지요. 엘리는 제일 국제은행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나, 그랬었군요" 하고 프렘웰 양이 말했다.
"왜 그러시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함께 살기에는 편한 남자랍니다. 별로 말수도 많지 않고, 느림보이지만 여유가 있지요. 낭비도 하지 않습니다. 절약가거든요. 엘리도 그 점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나는 말다툼도 하지 않습니다. 그야 때로는 엘리가 몹시 짜증을 부릴 때도 있었지요. 공을 힘껏 집어던져서 퉁기듯이. 하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었답니다.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살았지요. 안절부절 못하거나 많이 떠벌린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프렘웰 양은 달빛에 비친 그의 이마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으나 뭐라고 말했는지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깊이 숨을 들이마신 다음 눈을 크게 뜨고 창 너머 저쪽 세계를 바라보았다. 한길에서 나는 소리가 포치에도 들려왔던 것이다―마치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한 것처럼. 얼마 동안 한길이 조용했던 것이다. 프렘웰 양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뱉었다.
"당신 말씀대로 레몬 씨, 말다툼을 해봐야 소용이 없지요."
"그렇습니다! 나는 태평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프렘웰 양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그러한 그녀를 보고 말끝을 흐렸다.
밤바람이 그녀의 ???여름 드레스와 그의 와이셔츠 소매를 펄럭이게 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야겠어요" 하고 프렘웰 양이 말했다.
"아직 9시인데요!"
"내일 아침에 나는 일찍 일어나야 하거든요."
"하지만 나의 질문에 아직 대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프렘웰 양."
"질문이라니요?" 그녀는 눈을 깜박거렸다."아아, 그 질문 말인가요?" 그녀는 등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망사문의 손잡이를 더듬었다."저어, 레몬씨, 생각 좀 하게 해주세요."
"그러는 것이 공평하겠지요. 강요한다고 되겠습니까?"
망사문이 닫혔다. 어둡고 무더운 홀을 걸어가는 그녀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얕게 숨을 쉬고 머리에 있는 제3의 눈,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눈에 손을 대보았다.
그는 지나치게 떠벌렸기 때문에 얻은 병처럼 막연한 패배감이 가슴 속에서 들쑤시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그때 뚜껑이 닫힌 채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새하얀 선물 상자가 생각났다. 그는 갑자기 활기를 되찾았다. 망사문을 열고 조용한 홀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매끄러운 <로만스 실화> 잡지를 밟고 미끄러져 하마터면 나동그라질 뻔했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웃음띤 얼굴로 전등을 켜고 상자를 열어 안피지 속에서 가발을 꺼냈다. 그는 밝은 거울 앞에 서서 사용법을 읽으며 머리에 쓰고 고무풀과 테프로 여기저기 붙인 뒤 다시 한 번 전체의 모습을 가다듬고는 가지런히 빗질을 했다. 그리고 도어를 열고 홀을 지나 프렘웰 양의 방문을 노크했다.
"프렘웰 양" 하고 그는 미소지으며 불렀다.
그러나 그 순간 도어 밑으로 흘러나오던 불빛이 꺼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캄캄한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았다.
"여보시오, 프렘웰 양." 그는 빠른 말투로 다시 불렀다.
방 안에서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캄캄했다. 잠시 뒤 그는 시험삼아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손잡이가 덜컥거렸다. 프렘웰 양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뭐라고 중얼거렸으나 다시 끊겼다. 작은 발소리가 도어 쪽으로 다가오더니 불이 켜졌다.
"왜 그러세요?" 하고 도어 저쪽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프렘웰 양, 열어주십시오. 그리고 나를 보아주십시오" 하고 그는 애원했다.
도어의 빗장이 벗겨지고 그녀가 도어를 1인치쯤 열었다. 한쪽 눈이 날카롭게 그를 보고 있었다.
"나를 좀 보십시오" 하고 움푹 들어간 분화구가 조금도 보이지 않도록 가발을 고쳐쓰며 그는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옷장에 달려 있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는 광경을 상상하고 기분이 좋았다.
"이것 좀 보십시오, 프렘웰 양!"
그녀는 도어를 조금 더 열고 찬찬히 보더니 다시 쾅 닫고 자물쇠를 걸었다. 엷은 판자 저쪽에서 그녀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구멍이 보이는군요, 레몬 씨."
금빛 눈
Dark They Were, and Golden-eyed
로켓은 초원의 바람을 맞아 차가와졌다. 로켓 뚜껑이 펑 하고 소리를 내며 열렸다. 시계와 비슷하게 생긴 그 안에서 남자 한 사람과 여자 한 사람, 그리고 아이들 셋이 내렸다. 다른 승객들은 이 가족과 함께 그 사나이를 남겨둔 채 바삭바삭 풀을 밟으며 화성의 초원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나이는 머리카락이 팔락거리고 몸의 조직이 오므라드는 것을 느꼈다. 마치 진공 속에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앞에 있는 그의 아내는 뿜어오르는 연기 때문에 현기증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지금 당장에라도 어떠한 화성의 풍토에 뿌려지든 문제없는 듯싶었다.
아이들은 몇 시쯤일까 하고 태양을 우러러보듯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싸늘했다.
"왜 그러세요?" 하고 아내가 물었다.
"로켓을 타고 돌아갑시다."
"돌아가자니, 집으로 말인가요?"
"그렇소! 저 소리를 들어보오!"
바람이 마치 그를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정체도 알 수 없게 하려는 듯이 불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 화성의 공기가 그에게서 영혼을 앗아갈는지 모른다―척추를 하얀 뼈에서 발라내듯이. 지성(知性)을 녹여 과거를 태울 수 있는 약품 속에 잠겨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화성의 산들을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시간>에 의해 닳고 세월의 압력으로 짓눌리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옛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지금 초원 속에 잠기어 바람부는 풀 위에 가냘픈 어린아이의 뼈처럼 누워 있었다.
"가슴을 펴고 기운을 내세요, 여보. 너무 늦었어요, 이제는. 우리는 6천 마일 이상이나 날아왔는걸요."
노랑머리의 아이들은 높은 화성의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다. 들리는 것은 딱딱한 풀을 흔들며 달려가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는 싸늘하게 식은 두 손으로 짐을 들어올렸다.
"자아, 갑시다" 하고 그는 말했다―바닷가에서 이제부터 물 속으로 들어가 빠져죽으려는 사람처럼.
그들은 거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성(姓)은 비털링이라고 했다. 남편은 헨리 비털링, 아내는 코라, 아이들은 댄과 로라와 데이비드. 그들은 조그만 하얀 오두막을 짓고 거기에서 맛있게 아침식사를 먹었으나 불안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비털링 부부를 쫓아다니다가 한밤중에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나, 새벽녘에 잠에서 깨어날 때 불청객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소금의 결정처럼 바다로 밀려내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우리는 이 땅의 사람이 아니라 지구인이오. 여기는 화성으로, 화성인에게 맞게 되어 있소. 여보, 코라, 제발 지구로 돌아갈 차표를 삽시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지구는 원자폭탄으로 언젠가 끝장이 날 거예요.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여기에 있으면 우리는 안전해요."
"안전할는지는 모르지만, 미쳐버릴 거야!"
똑딱똑딱 소리를 내는 시계가 7시를 노래했다―<일어날 시간입니다>하고. 그래서 그들은 일어났다.
무언가에게 쫓기는 듯 그들은 매일 아침 모든 것을 살펴보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따뜻한 난로라든가 화분에 심은 빨간 제라늄이라든가―마치 무언가 고장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오전 9시에 지구에서 온 로켓이 싣고 온 아침신문은 토스트 빵처럼 따뜻하였다. 그는 그것을 아침식탁에 세워놓았다. 그는 억지로 명랑해지려고 했다.
"온갖 곳에서 다시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고 있군" 하고 그는 말했다."앞으로 10년만 지나면 화성에도 지구인이 백만 명쯤 될 거야. 큰 도시가 생기고, 모든 것이 갖추어지겠지. 모두들 우리보고 실패할 거라고 말했소. 우리가 침입하면 화성인은 분개할 것이라고 말이오. 그러나 화성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소? 한 사람도 없었지. 텅 빈 화성인의 도시를 찾긴 했지만 정작 화성인은 한 사람도 없었잖소."
바람이 강물처럼 그들의 집을 두둥실 뜨게 했다. 창문이 덜컥거리는 소리가 그치자 그는 음식을 삼키며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글쎄, 어떨까요." 데이비드가 말했다."어쩌면 곳곳에 화성인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건지도 몰라요. 이따금 밤중에 화성인의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바람 소리가 들려오고 모래가 내 방 창문을 두드릴 때면 나는 무서워요. 그리고 화성인이 오랜 옛날에 살고 있던 산 속의 저 거리들을 보면, 거기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요. 아빠,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을 화성인들은 싫어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떤 보복을 하려고 계획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닐까요?"
"바보 같은 소리 그만두어라!" 헨리는 창 밖을 보았다."우리는 깨끗하고 고상한 인간이야." 그는 아이들 쪽을 돌아보았다."죽은 거리에는 어떤 종류의 유령이 있는 법이란다. 다시 말해서 영(靈)이라는 것이 있지." 그는 산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예를 들어 계단을 보면 화성인들이 어떤 모습으로 거기를 올라갔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지 않니. 화성인이 그린 그림을 보면 화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생각하게 마련이지. 이런 식으로 각자의 마음 속에 작은 유령을 만든단 말이야.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란다. 바로 상상력이라는 것이지."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너희들은 아직 폐허의 거리를 거닐어본 적이 없지?"
"네, 없어요, 아빠." 데이비드는 구두에 눈길을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어쨌든 가까이 가지 말도록 해라―얘야, 그 잼을 이리 주겠니?"
"하지만 역시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하고 데이비드가 말했다.
바로 그 무언가가 그날 오후에 일어났다.
로라가 울부짖으며 마을에서 달려왔다. 그녀는 정신없이 포치로 뛰어올라오며 소리쳤다.
"엄마!―전쟁이 터졌어요, 지구에!" 그녀는 훌쩍거렸다."라디오의 속보가 지금 말했어요. 원자폭탄이 뉴욕에 떨어졌대요! 우주 로켓이 모두 폭파당했대요. 그래서 앞으로는 로켓이 화성으로 오지 못하게 되었대요!"
"오오, 여보!" 하고 코라는 남편과 딸에게 매달렸다.
"그것은 확실한 정보냐, 로라?" 하고 그가 조용히 물었다.
로라는 흐느껴 울었다.
"우리는 화성에 유배당하고 말았어요, 영원히!"
한참 동안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해질녘의 바람 소리뿐이었다.
(외톨이가 되었군)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 화성에는 지구인이 천 명밖에 없는데, 돌아가는 길이 끊어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얼굴이며 손이며 몸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그는 불안으로 몸이 달아올랐고, 땀에 흠뻑 젖었다. 로라를 때려주며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아니야, 이 거짓말장이! 로켓은 올 수 있어!"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는 대신 로라를 끌어안고 정답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알겠니, 로켓은 틀림없이 올 거야."
"아빠, 우리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요?"
"물론 열심히 일을 해야지. 농작물을 재배하고 아이들을 기르며 기다려야지. 전쟁이 끝나고 로켓이 다시 오는 날까지 일을 해야지."
두 남자아이가 포치로 뛰어나왔다.
"너희들에게―" 그는 포치에 앉아 아이들 어깨 너머로 눈길을 주며 말했다."너희들에게 말해 둘 것이 있다."
"알고 있어요" 하고 두 아이는 말했다.
이어지는 나날, 그는 이따금 뜰을 거닐며 홀로 불안을 되새기고 있었다. 로켓이 우주에 은실을 걸치고 있는 동안은 화성에 와 있는 사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가 있었다. 내일이라도 만일 그럴 생각만 든다면 표를 끊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늘 자신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실은 사라지고, 흐늘흐늘하게 녹아버린 사다리며 축 늘어진 철사 더미로 바뀌어버렸다. 지구인이면서도 낯선 화성의 먼지와 공기에 몸을 맡겨야 한다. 화성의 여름에는 생강이 든 케익 모양으로 구워졌다가, 화성의 겨울이 되면 거두어들여지고 저장되는 것이다. 그의 몸에, 다른 사람의 몸에 어떤 재난이 덮쳐올까? 이것이야말로 화성이 기다리고 있던 순간으로서 화성은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그는 억센 손으로 쟁기를 움켜쥐고 꽃밭에 무릎을 꿇었다. 일을 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일을 함으로써 잊어버려야 한다.
그는 뜰에서 눈길을 들어 화산의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난날에 자랑스럽게 붙여진 낡은 화성의 이름을 생각했다. 지구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며 그 이름의 산들과 강과 바다―지금은 없어졌지만―를 내려다보았던 것이다. 지난날에 화성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에 이름을 붙였다. 산에 올라가 그 산에 이름을 붙였다. 바다를 건너며 그 바다에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산은 닳고 바다는 마르고 도시는 붕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인은 이들 낡은 언덕과 골짜기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데 대해 남모르게 죄악감을 느꼈던 것이다.
아무튼 인간이란 부호와 레텔에 의지하여 사는 법이다. 다시 말해서 이름을 붙이는 일이 흔하다는 것이다.
헨리 비털링은 화성의 태양 밑 자기 정원에 있으면서 몹시 고독을 느꼈다. 시대 착오라고나 할까―지구의 화초를 이 황폐한 땅에 심으며.
생각해야 한다. 계속 생각해야 한다. 온갖 일을 생각해야 한다. 지구며 원자폭탄이며 잃어버린 로켓에 대하여는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땀을 흘렸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넥타이를 풀었다. 매우 대담한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먼저 옷을 벗고 이어서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그것을 매사추세츠에서 어린 묘목을 가져와 옮겨심은 복숭아나무에 가지런히 걸었다.
그는 아까의 이름과 산에 대한 명상으로 되돌아갔다. 지구인이 이름을 바꾸어놓았다. 그래서 지금 화성에는 호멜 계곡이 있고, 루즈벨트 바다가 있고, 포드 언덕이 있고, 반다빌트 고원이 있고, 록펠러 강이 있다. 미국에서 온 화성 이주자들이 낡은 인디언 대초원의 이름을 써서 지혜로움을 표시했다. 위스콘신, 미네소타, 아이다호, 오하이오, 유다, 밀워키, 워킹검, 오세오. 이러한 낡은 이름, 낡은 뜻.
눈을 부릅뜨고 산을 노려보며 그는 생각했다―너희들은 거기 있는가? 너희들 죽은 모든 화성인이여! 그런데 우리는 여기 있다―차단되어 완전한 고독 속에 있다! 자아, 내려와서 우리를 어떻게든 해다오! 우리는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
바람이 불어 복숭아 꽃잎을 비처럼 뿌렸다.
그는 햇볕에 그을린 손을 내밀었다가 조그맣게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꽃잎에 손을 대어 그것을 주워올렸다. 그리고 뒤집어보고 여러 번 만져보았다. 그 다음에 큰 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코라!"
아내가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아내에게로 달려갔다.
"이 꽃을 보오, 코라!"
그녀는 꽃을 만져보았다.
"알겠지? 이 꽃이 여느 때와 달라. 달라졌단 말이오! 이미 복숭아꽃이 아니란 말이오!"
"내 눈에는 다르게 보이지 않는데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달라졌어! 어째서 그럴까? 꽃잎이 한 장 더 있고, 잎도 그렇군. 그리고 빛깔도, 냄새도!"
아이들이 부리나케 달려나와 그가 뜰 안을 뛰어다니며 밭에서 무우와 당근을 뽑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코라, 이리 와보오!"
모두들 양파와 무우와 당근을 번갈아가며 만져보았다.
"그것이 당근으로 보이오?"
"네...... 아니오." 그녀는 머뭇거렸다."잘 모르겠어요."
"달라진 거요."
"그럴는지도 모르지요."
"알겠소? 달라졌단 말이오! 양파이긴 한데, 양파가 아니오. 당근이긴 한데 당근이 아니오. 맛은―같은 것 같은데 달라. 냄새도 그전과는 어딘지 달라." 그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불안했다. 그는 흙 속에 손가락을 찔러넣었다."코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대체 어찌된 까닭일까? 여기서 도망가야겠어." 그는 뜰을 뛰어다니며 모든 나무를 만져보았다."장미가, 장미가 초록색으로 바뀌어가고 있어!"
그는 우뚝 선 채 초록색 장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틀 지난 뒤 댄이 뛰어들어왔다.
"이리 와보세요. 소를 좀 보세요. 젖을 짜다가 발견했는데, 어서 빨리 와보세요!"
그들은 외양간으로 가서 한 마리뿐인 암소를 바라보았다.
세 개째의 뿔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집 앞의 잔디가 조용하게 천천히, 봄날의 오랑캐꽃 빛깔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지구에서 가지고 온 씨를 뿌렸었는데, 부드러운 보랏빛을 띠기 시작하는 것이다.
"달아나야겠어" 하고 그는 말했다."우리도 이런 야채를 먹고 있으면 틀림없이 달라질 거요―어떻게 달라질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러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소.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이런 것들을 불태워버려야만 해!"
"하지만 독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니, 들어 있소. 조금, 아주 조금. 아주 조금밖에 들어 있지 않지만 손을 대서는 안되오."
그는 낙심하며 집을 쳐다보았다.
"집까지 저렇게 되었군. 바람 때문에 나빠졌어. 대기 때문에 그을렸고, 밤이슬 때문에 판자가 모두 뒤틀렸군. 형태도 일그러졌고. 아무리 보아도 이미 지구인이 살 집이라고는 할 수 없소."
"그것은 당신의 공상이에요!"
그는 웃옷을 입고 넥타이를 맸다.
"나는 거리에 ?종煞靡? 무슨 수를 써야지. 곧 돌아오겠소."
"잠깐만, 여보!" 하고 그의 아내가 외쳤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거리에서는 식료품가게 입구의 그늘진 계단에 남자들이 무릎에 손을 얹어놓고 앉아 할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헨리 비털링은 허공에 대고 권총을 한 발 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이 바보들!)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곳에 질펀히 앉아서 뉴스를 들었겠지―우리는 이 혹성에 남게 되었단 말이야. 어서 일어나! 무섭지도 않아? 걱정되지도 않아? 앞으로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여어, 헨리" 하고 모두가 말했다.
"모두들 뉴스를 들었겠지?" 그는 모두에게 말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고, 그리고 웃었다.
"듣고말고. 틀림없이 들었지, 헨리."
"그래, 자네들은 어떻게 할 작정인가?"
"어떻게 할 작정이라니,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로켓을 만들어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로켓을? 고뇌의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하지만 꼭 돌아가고 싶지 않나? 보았겠지?―복숭아꽃이며 양파며 화초를."
"그야 보았지, 물론" 하고 그중 하나가 대답했다.
"그래, 깜짝 놀라지 않았나?"
"그다지 깜짝 놀라지는 않았네, 헨리."
"이 얼간이들!"
"하지만, 여보게!"
헨리 비털링은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나에게 협력해 줘야겠네. 만일 우리가 이 땅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되면 하나도 남김없이 달라지고 말 걸세. 이 공기는 어떤가―냄새가 난다고 생각지 않나? 공기에 무언가가 섞여 있단 말이야. 어쩌면 화성의 비루스인지도 모르겠네. 어떤 종자, 아니면 꽃가루일 걸세. 모두 내 말 좀 들어보게!"
모두들 그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샘" 하고 그는 그 중의 하나에게 말했다.
"왜 그러나, 헨리?"
"로켓 만드는 일을 도와주지 않겠나?"
"나에게 금속 재료가 모두 있네. 그리고 청사진도 몇 장 있고. 우리 공장에서 로켓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면 그야 환영이지. 재료로 쓸 금속이라면 5백 달러에 팔 수도 있어. 혼자서 만든다면 아마 30년쯤 뒤에야 꽤 훌륭한 로켓이 완성될 걸세."
모두들 큰 소리로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야."
샘은 유머가 담긴 표정으로 부드럽게 비털링을 보았다.
"샘, 자네의 눈은―" 하고 비털링은 말했다.
"나의 눈이 어떻단 말인가, 헨리?"
"본디는 회색이었지?"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는걸."
"틀림없이 회색이었지?"
"어째서 그런 것을 묻나, 헨리?"
"지금은 노르스름한 빛으로 바뀌어 있기 때문일세."
"저런, 그런가, 헨리?" 하고 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전보다 귀가 커졌고, 몸이 조금 말랐어―"
"그럴는지도 모르지."
"샘, 눈이 노랗게 되면 안되네."
"그럼, 여보게, 자네 눈은 무슨 빛깔인가?" 하고 샘이 물었다.
"나 말인가? 나의 눈은 파란빛이지, 물론."
"그럼, 이것 좀 들여다보게" 하고 샘은 주머니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헨리 비털링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얼굴 앞으로 거울을 가져갔다.
아주 희미하긴 해도 작은 새로운 금빛 반점이 파란 눈에 생겨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내 거울을 깨뜨려버렸잖아!" 하고 한순간 뒤에 샘이 말했다.
헨리 비털링은 공장에 가서 로켓 제작에 착수했다. 남자들이 열어젖혀진 문간에 서서 소리를 높이지 않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농담을 하고 있었다. 이따금 그들은 그가 무엇을 들어올릴 때에는 도와주기도 했으나,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랗게 되어가는 눈으로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젠 저녁식사 시간일세, 헨리" 그들은 말했다.
그의 아내가 버드나무 바구니에 저녁식사를 넣어가지고 왔다.
"그런 것은 안 먹어. 나는 냉동기 속의 음식만 먹겠소. 지구에서 가지고 온 음식만 먹겠단 말이오. 우리 집 채소밭에서 난 것은 아무것도 안 먹겠다니까" 하고 그는 말했다.
아내는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로켓은 완성되지 않아요."
"나는 옛날에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소, 20살 때. 그래서 금속에 대한 것을 잘 알고 있지. 어느 정도 만들어놓으면 모두들 도와줄 거요" 하고 그는 아내를 보지 않은 채 말하며 청사진을 펼쳤다.
"여보, 여보, 나 좀 보세요." 하고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불렀다.
"우리는 달아나야만 해, 코라. 무슨 일이 있어도!"
밤에는 바람이 몹시 불었다. 물이 마른 달빛어린 바다를 넘어서 그 바닷가에 1만 2천년 동안이나 누워 있는 하얀 작은 장기판 같은 도시를 꿰뚫고 지나갔다. 지구인 개척지의 비털링네 집에서는 변화해 가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동요하고 있었다.
침대에 드러누운 헨리 비털링은 몸 안의 뼈가 움직여 금처럼 녹아서 다른 형태를 이루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 옆에 누워 있는 아내는 계속 내리쬐는 오후의 태양 때문에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눈은 금빛으로 바뀌었으며, 몸은 거의 새까맣게 된 채 잠자고 있었다. 아이들은 금속같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바람은 윙윙 소리를 내며 불어와 해묵은 복숭아나무와 오랑캐꽃 사이로 스쳐가며 초록빛으로 변한 장미 꽃잎을 흔들었다.
두려움은 아무래도 거두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목구멍을 쥐어짜고 심장을 죄었다. 가슴과 팔과 관자놀이를, 그리고 바들바들 떠는 손바닥을 적셨다.
초록빛 별이 하나 동쪽 하늘에 떠올랐다.
기묘한 말이 비털링의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이어루루토. 이어루루토" 하고 그는 되풀이했다.
그것은 화성어였다. 그는 화성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데.
한밤중에 그는 깨어나 다이얼을 돌려 고고학자 심프슨을 불렀다.
"심프슨 씨, <이어루루토>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고대 화성어로, 우리의 지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왜 그러시지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만―"
수화기가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수화기에서 계속 말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의자에 앉아 초록빛 별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비털링 씨, 여보세요, 거기 없소?"
낮에는 금속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차 있었다. 별로 내키지 않아하는 세 사나이의 도움을 받으며 그는 로켓의 뼈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시간도 채 못되어서 녹초가 되어 앉아 쉬어야만 했다.
"고도(高度)가 문제로군" 하고 한 사람이 웃었다.
"자네는 먹고 있나, 헨리?" 하고 또 한 사람이 물었다.
"먹고 있지!" 하고 그는 화를 내며 말했다.
"냉동기 속의 음식을?"
"그렇다네!"
"그런데도 자네는 자꾸만 여위는군, 헨리."
"그럴 리가 없어!"
"그리고 키도 커졌는데."
"거짓말 말게!"
며칠 뒤에 아내가 그를 한쪽 구석으로 끌고갔다.
"여보, 냉동기 속의 음식이 이제 모두 바닥났어요. 화성에서 가꾼 음식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야만 해요."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먹어야만 해요. 몸이 쇠약해졌으니까요." 그녀는 말했다.
"으음" 하고 그는 말했다.
그는 샌드위치를 집어서 펼쳐보고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은 이제 그만하세요" 하고 아내는 말했다."날씨도 덥고, 아이들은 강에 가서 헤엄치고 싶다고 야단이에요. 그리고 하이킹을 하고 싶다고 하니 함께 가주세요."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소. 지금 우리는 위기에 처해 있단 말이오!"
"한 시간이면 돼요. 잠시 헤엄치고 나면 몸이 나아질 거예요." 그녀는 재촉했다.
그는 땀을 흘리며 일어났다.
"알았소, 알았다니까. 그만 ?릴막? 곧 갈 테니."
"고마와요, 여보."
햇살이 뜨거웠다. 조용한 날씨였다. 땅이 맹렬하게 햇빛을 반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강가를 따라 걸어갔다―아버지, 어머니, 수영복을 입고 뜀박질하는 아이들. 그들은 한숨돌리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는 모두의 살갗이 갈색으로 그을어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의 노란 눈을 바라보았다. 전에는 결코 노랗지 않았던 눈. 몸이 조금 떨렸으나, 양지에 잠깐 누워 있자 그것은 상쾌한 뜨거운 파도에 실리어 사라졌다, 너무나 지쳐 있어 공포를 느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코라, 당신 눈은 언제부터 노랗게 되었지?"
그녀는 당황했다.
"전부터 그랬겠지요."
"지난 석 달 동안에 갈색에서 노랑으로 바뀐 것이 아닐까?"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어째서 그런 것을 물으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그들은 그대로 거기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의 눈도 역시 노랗군" 하고 잠시 뒤 그는 말했다.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의 눈은 빛깔이 바뀌는 수도 있어요."
"어쩌면 우리도 아직 어린아이일는지 몰라―적어도 화성에서는. 아마 그럴 거요." 그는 웃었다."그럼, 한바탕 헤엄이나 칠까?"
그들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황금의 조상(彫像)처럼 몸이 차츰 물 속으로 가라앉게 내버려두어 강바닥의 초록빛 정적 속에 몸을 뉘었다. 물은 조용하고 깊어 주위는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부드럽고 잔잔한 흐름에 편안히 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여기에 오랫동안 가만히 있으면―하고 그는 생각했다―물의 작용으로 나의 살이 깡그리 없어지고 산호처럼 뼈만 남겠지. 그리고 물이 그 해골 위에 초록빛을, 검푸른빛을, 붉은빛을, 노란빛을 뿌리겠지. 바뀌어라, 바뀌어라, 천천히 조용히 바뀌어라. 그것이야말로 저 위에 있는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머리 위에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기와 시간과 공간에 의해 화성적인 것이 되어버린 태양을 바라보았다.
(저 위는 크나큰 강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화성의 강이다. 우리는 모두 그 속에 깊숙이 누워 있다. 작은 돌로 지은 집 속에 가재처럼 몸을 움츠리고. 우리들의 소중한 육체는 물에 침식당하여 차츰 뼈만 남을 것이며, 그리고......)
그는 부드러운 빛 속에서 물에 떠내려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댄이 강가에 앉아 그의 모습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유타."
"뭐라고 했니?" 하고 그가 물었다.
소년은 방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시지요? <유타>라는 것은 화성어로 <아버지>라는 뜻이에요."
"어디서 배웠지?"
"그저 배웠어요. 유타!"
"왜 그러니?"
소년은 말을 더듬었다.
"나―나는 이름을 바꾸고 싶어요."
"이름을 바꾼다고?"
"네."
어머니가 헤엄쳐왔다.
"댄이라는 이름이 뭐가 나빠서 그러니?"
댄은 안절부절 못했다.
"지난번에 댄, 댄, 댄이라고 불렀다고 하셨는데, 들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지요―그것은 나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새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싶다고요."
헨리 비털링은 강가로 올라왔다. 몸이 싸늘했고, 심장이 느릿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그 새 이름이란 어떤 것이냐?"
"리누르예요. 좋은 이름이지요? 그 이름을 써도 괜찮겠지요, 아빠?"
비털링은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는 로켓에 대해 생각했다. 혼자서 그것을 만들고 있다―그는 가족과 함께 있을 때조차도 고독했다.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고독했다.
"그야 상관없지" 하고 말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냐, 써도 괜찮다" 하고 말하는 자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아!" 소년은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나는 리누르다. 리누르다!"
목초지로 달려가고는 깡총깡총 뛰며 외쳤다.
"어째서 그런 것을 허락했소?" 헨리 비털링은 아내를 쳐다보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그저 좋은 생각인 듯해서요." 아내가 말했다.
그들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옛날의 모자이크 식 오솔길을 걸어가다가 아직도 솟아오르고 있는 샘물 곁을 지나갔다. 오솔길은 여름 내내 차가운 물의 엷은 막으로 뒤덮여 있었다. 개울을 건너갈 때처럼 물을 튀기며 하루 종일 맨발을 식힐 수가 있었다.
그들은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화성인의 작은 별장에 이르렀다. 골짜기의 전망이 아름다왔다. 별장은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푸른 대리석을 깐 홀. 거대한 벽화. 그리고 풀장. 그 곳은 한여름에도 서늘했다. 화성인은 큰 도시를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정말 멋있군요" 하고 아내가 말했다."여름 내내 이 별장에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만 갑시다. 우리는 거리로 돌아가야 해. 로켓을 만들어야지." 비털링이 말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일을 하면서 푸른 대리석의 서늘한 별장이 마음 속에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로켓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이 여겨졌다. 날이 가고 달이 바뀌는 동안 로켓에 대한 생각은 조그맣게 멀리 사라져버렸다. 그전의 열성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로켓에 대한 생각이 어느덧 머릿속에서 사라졌음을 깨닫고 그는 움찔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이 더위, 이 공기, 이 노동 조건―
그는 남자들이 공장 포치에서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모두 떠나고 있네. 저 소리가 들리지?"
"정말 모두 떠나고 있군."
비털링이 나왔다.
"떠나다니, 어디로?"
아이들과 가구를 실은 트럭이 두 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별장으로 간다네" 하고 사나이가 대답했다.
"그렇다네, 헨리. 나도 가겠네. 샘도 간다네. 그렇지, 샘?"
"물론.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헨리?"
"나는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
"일이라고? 가을이 와서 조금 선선해지거든 그 로켓을 완성하면 되지 않나?"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뼈대가 완성되었거든."
"가을에 접어들어 하는 편이 좋을 걸세."
사나이들의 목소리는 더위 때문에 늘어져 있었다.
"아니, 지금 해야만 돼" 하고 비털링이 말했다.
"가을에 하게" 하고 사나이들은 설득했다.
매우 현명하고 타당한 느낌을 주는 말투였다.
"가을이 좋을지도 모르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그때에는 시간도 충분히 생길 테고."
안된다! 그의 마음 속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깊숙이 감추고 굳게 자물쇠를 잠가두었던 숨막히는 외침이. 안된다! 안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가을이 되면 하지."
"그럼, 가세, 헨리" 하고 모두가 말했다.
"응, 가을이 되면 다시 일하기로 하세."
그는 무더운 맑은 공기 속에 자기의 육체가 녹아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틸러 강가의 별장을 손에 넣었다네" 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루즈벨트 강 말인가?"
"틸러 강. 고대 화성어 이름이지."
"하지만 지도에는―"
"지도 따위는 잊어버리게. 틸러라고 하게. 나는 필런 산맥 속에서 좋은 장소를 찾아냈다네."
"그것은 록펠러 산맥이겠지?" 하고 비털링이 말참견을 했다.
"나는 필런 산맥이라고 하겠네" 하고 샘이 말했다.
"그래, 필런 산맥이라고 하세." 뜨거운 공기에 파묻혀 비털링이 말했다.
다음날, 바람도 없는 무더운 오후에 모두들은 트럭에 짐을 실었다.
로라와 댄과 데이비드는 보따리를 들었다. 그들로서는 스틸과 리누르와 웨르르는 보따리를 들었다고 말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가구는 작은 하얀 오두막에 두고 가기로 했다.
"보스턴에 있는 집의 가구는 훌륭했어요." 코라가 말했다."그리고 이 오두막의 가구도. 하지만 별장은 어떨까요? 가을에 돌아와서 사들여요."
비털링은 잠자코 있었다. 잠시 뒤 그는 말했다.
"별장으로 가지고 갈 가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소. 크고 다루기 힘든 가구 말이오."
"당신의 백과사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정말 가지고 가시겠어요?"
비털링은 흘끗 눈길을 돌렸다.
"다음 주일에 다시 가지러오지."
"뉴욕에서 사 온 드레스는 어떻게 하겠니?" 두 사람은 딸 쪽을 보며 물었다.
로라는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다.
"어머나, 그런 것은 이제 필요 없어요."
그들은 가스 마개를 죄고, 수도꼭지를 막고, 도어의 자물쇠를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가 트럭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별로 많이 가지고 갈 수 없겠군. 지구에서 화성으로 가지고 온 물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오."
그는 트럭에 발동을 걸었다.
잠시 동안 작고 하얀 오두막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달려가서 손으로 만지며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두 번 다시 돌아올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을 남기고 기나긴 여행길에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어, 헨리! 어서 가세!"
트럭은 낡은 큰길을 달려 거리를 빠져나갔다.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트럭이 그밖에도 60대나 되었다. 잇달아 지나가는 자동차가 일으키는 심한 먼지가 거리에 자욱했다. 강물은 햇빛을 받아 파랗게 반짝였고 산들바람이 이상한 나무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안녕, 우리들의 거리여!" 하고 헨리 비털링이 말했다.
"안녕, 안녕!" 거리 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가족들은 소리쳤다.
그들은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뜨거운 열기 때문에 강물이 말랐다. 여름이 불길처럼 목초지를 핥았다. 인기척없는 지구인 개척지에서는 집집마다 페인트 칠이 갈라지고 벗겨졌다. 뒤뜰에서 아이들이 돌리며 놀던 고무 타이어는 타는 듯한 공기로 인해 멈추어서버린 시계추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공장에서는 로켓의 뼈대가 녹슬기 시작했다.
조용한 가을이 찾아오자 헨리 비털링은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금빛 눈을 하고 별장 위의 비탈에 서서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젠 거리로 돌아갈 때가 왔어요" 하고 코라가 말했다.
"응, 하지만 돌아가는 것을 그만두어야겠소. 거리에 돌아?종?이젠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하고 그는 조용히 말했다.
"당신의 책이 있어요. 그리고 좋은 양복도."
"당신의 이루레스. 그리고 좋은 이어루우에레 주레도." ―그녀가 실제로 한 말은 이런 것이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을 거요. 아무도 돌아가지 않으니까. 돌아갈 이유가 하나도 없거든."
딸은 뜨개질을 하고, 두 아들은 옛날의 플륫과 피리를 불었고, 그들의 웃음 소리는 대리석 별장 속으로 울려펴졌다.
헨리 비털링은 저 멀리 골짜기에 퍼져 있는 지구인 개척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지구인들은 참으로 기묘하고 시시한 집을 세웠군."
"그런 것밖에 모르니까요. 참으로 못생긴 인간들이에요. 사라져서 마음이 개운해요."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지금 자기들이 한 말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만 웃어버렸다.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아내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처녀처럼 아름답고 날씬했다. 그녀도 남편을 치다보았다. 그는 맏아들과 거의 비슷하리만큼 젊어보였다.
"모르겠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거리로 돌아가는 것은 아마도 내년이나 내후년이나 그 다음해쯤 되겠지. 그런데―굉장히 덥군. 한바탕 헤엄이라도 칠까?" 그는 태연히 말했다.
그들은 골짜기 쪽으로 등을 돌리고 말없이 팔짱을 낀 채 맑은 샘물 쪽으로 걸어갔다.
5년 뒤, 한 대의 로켓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골짜기에서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남자들이 환성을 지르며 그 속에서 뛰어나왔다.
"우리는 지구에서 전쟁에 이겼소! 당신들을 데리러왔소!"
그러나 미국인들이 건설한 거리―집들, 복숭아나무, 극장들이 있던 거리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그들은 텅 빈 공장에서 녹슨 로켓의 기체(機體)를 발견했다.
로켓 승무원들은 언덕을 수색했다. 대장은 내버려진 술집에 본부를 설치했다. 부관이 보고하기 위해 돌아왔다.
"거리는 텅 비어 있으나 언덕에 원주민이 살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살빛이 검은 인종으로 눈은 금빛입니다. 화성인일 겁니다.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조금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아주 조금입니다만―그들은 영어를 금방 배우더군요. 우리는 아마 사이좋게 지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대장님."
"살빛이 검다고?" 대장은 생각에 잠겼다."몇 명이나 되던가?"
"6백―아니, 8백 명쯤 될 겁니다. 저쪽 언덕의 대리석으로 지은 폐허에 살고 있습니다. 키가 크고 건강해 보였습니다. 여자들은 아름답구요."
"이 지구인 개척지에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 주지 않던가?"
"그들은 이 거리며, 거리의 주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모르는 모양입니다."
"이상하군. 그 화성인들이 그들을 죽인 것 같지는 않던가?"
"그들은 놀라우리만큼 평화스러워 보였습니다. 어쩌면 이 거리는 돌림병으로 전멸했는지도 모릅니다."
"글쎄, 이것은 결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의 하나인 것 같군. 책에 나오는 수수께끼 같은 것 말일세."
대장은 둘러보았다―방을, 먼지투성이의 창문을, 저 멀리 솟아 있는 푸른 산들을, 빛 속을 흐르는 강물, 그리고 공중에서 부는 산들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는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조금 뒤 제정신으로 돌아가자 그는 책상 위에 압정으로 꽂아놓은 새로운 큰 지도를 똑똑 두드렸다.
"할 일이 많군, 부관." 대장의 목소리는 태양이 푸른 언덕 저쪽으로 넘어가자 나른한 듯 쉬어 있었다."새로운 개척지 문제. 그리고 광산지대 문제―광석을 찾아야만 해. 세균의 표본도 만들어야 하고. 일, 어쨌든 일을 해야 하는 거야. 낡은 기록이 없어졌으니 지도를 새로 고쳐야겠군. 산이나 강에 새 이름을 붙여야겠어. 얼마쯤 상상력이 필요한 일이지. 저 산맥은 링컨 산맥, 이 강은 워싱턴 강이라고 이름지으면 어떨까? 저 언덕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겠지, 부관. 그리고 외교 문제. 자네는 저 거리의 이름을 붙여보게나. 그리고 이 골짜기는 아인시타인 계곡이라고 하면 어떨까? 그리고...... 이봐, 듣고 있나, 부관?"
부관은 저 먼 언덕에 파랗게 끼어 있는 자욱한 안개에서 눈길을 돌렸다.
"네? 네, 듣고 있습니다, 대장님!"
미소
The Smile
벽촌에서는 닭이 울어 새벽을 알릴 뿐, 아직 불기도 없는 이른 새벽 5시인데 그 거리의 광장에는 벌써 사람들이 줄지어서 있다. 황폐한 빌딩 골짜기에 아침 안개가 자욱하였다. 그러나 7시의 아침해가 그 안개를 걷어버렸다. 길에는 차츰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들었다. 축제의 날, 축제의 날인 것이다.
상쾌한 대기 속에서 두 사나이가 큰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바로 그들 뒤에 그 소년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의 큰 목소리는 아침의 추위 때문에 배나 더 크게 들렸다. 소년은 발을 동동 구르고 새빨갛게 터진 두 손에 입김을 후후 불어넣으며 더러운 즈크 양복을 입은 사나이들을, 그리고 앞에 길다랗게 줄지어서 있는 남자와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얘, 꼬마야, 왜 이렇게 일찍 나왔지?" 소년의 뒤에 서 있던 사나이가 물었다.
"자리를 잡으려고요." 소년은 대답했다.
"좀 빠지면 어떠냐, 자리를 양보하면 다른 사람들이 기뻐할 텐데."
"내버려둬." 앞에 있던 사나이가 불쑥 뒤돌아보며 말했다.
"그저 농담으로 말했을 뿐이야."
뒤에 선 사나이가 소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소년은 귀찮은 듯 그 손을 뿌리쳤다.
"나는 다만 이런 아이들이 아침 일찍부터 나와 있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꼬마야, 네 이름이 뭐지?"
"톰이에요."
"톰. 얘, 톰, 이렇게 줄지어서 있는 것은 아주 정확하게 침을 튀기기 위해서란다."
"암, 그렇고말고!"
웃음의 물결이 사람의 줄을 타고 번졌다.
줄 앞쪽에 이빠진 컵에 뜨거운 커피를 담아 팔고 있는 사나이가 있었다. 톰은 그 따뜻해 보이는 작은 불과 녹슨 남비 속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았다. 저것은 진짜 커피가 아니다. 거리 끝의 목초지에 우거져 있는 풀의 열매로 만든 것이다. 뱃속을 뜨뜻하게 하라고 한 잔에 1페니로 팔고 있지만, 그다지 잘 팔리는 것 같지 않았다. 아무도 그런 여분의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톰은 줄이 얼마나 긴가 하고 발돋움하여 바라보았다. 공습으로 부서진 돌담 저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여자는 웃고 있다면서요?" 하고 소년이 말했다.
"그렇단다" 하고 글리스비가 대답했다.
"그림물감으로 캔버스에 그려졌다면서요?"
"그래. 하지만 진짜가 아닌 것 같기도 해. 들은 이야기지만, 진짜는 오랜 옛날에 판자 위에 그려졌다고 하니까."
"벌써 4백 년이나 지났다면서요?"
"더 됐겠지. 아무도 정확한 것은 몰라."
"2천 6백 1년이나 됐다고요!"
"그렇다지만, 아무래도 거짓말일 거다. 내가 알고 있는 한 3천 년이나 5천 년쯤 되었을 것 같아.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졌다니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아주 하찮은 것들뿐이지."
모두 한길의 차가운 돌담을 따라 다리를 끌며 갔다.
"얼마나 가면 볼 수 있을까요?" 톰이 미덥지 못하다는 듯이 물었다.
"조금만 참으면 돼. 네 개의 놋쇠 기둥과 빌로도 끈으로 옛날처럼 깨끗하게 단장해 놓았단다. 아니, 돌은 안돼, 톰. 돌을 던지면 안된단 말이야."
"네."
태양이 하늘높이 떠올라 기온이 따뜻해지자 사나이들은 더러운 웃옷이며 때묻은 모자를 벗었다.
"어째서 모두 이렇게 줄지어서 있을까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모여 있을까요?" 하고 톰이 물었다.
글리스비는 소년을 보지 않고 태양을 우러러보았다.
"그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그는 무의식적으로 오래 전에 떨어져나간 주머니를 뒤져서 있지도 않은 담배를 찾았다. 톰은 벌써 여러 번 그러한 그의 몸짓을 보고 있었다.
"톰, 그것은 미움 때문이란다. 과거의 모든 것에 대한 미움 때문이야. 어째서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해야만 하는지, 나는 그걸 묻고 싶다. 거리라는 거리는 모두 엉망이 되었고, 도로는 폭탄을 맞아 울퉁불퉁, 보리밭은 야간 방사능으로 거의 타버리지 않았니? 정말 비참하게 되었어."
"네, 그래요, 아저씨."
"여기 이렇게 줄지어서 있는 이유는 말이다, 톰, 모두가 자기들을 엉망으로 망쳐놓은 것을 미워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지. 그다지 깊은 이유는 없어. 다만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하고 톰이 말했다.
"맞아! 이 세상을 움직이던 모든 과거의 사람들을 미워한단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으리만큼 주린 배를 움켜쥐고 동굴 속에서 추위에 떨며 담배도 못 피우고 술도 못 마시고 살다가 다만 이 축제를 위해 목요일 아침에 모였지. 맞아, 톰, 우리의 축제란 말이다!"
톰은 지난 몇 년 동안의 축제를 생각해 보았다. 모두들 이 광장에 모여 온갖 책을 찢어 불태우고는 술을 마시며 미친 듯이 웃어댔던 일을. 한 달 전에 있었던 과학축제 때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한 대의 자동차를 끌고나와 여러 개로 해체된 그 자동차의 부분들을 제비를 뽑아 당선된 운좋은 사나이들이 큰 망치로 때려부쉈던 것이다.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니, 톰? 그때 나는 그 자동차의 앞유리를 때려부쉈지. 그때는 정말 멋있었어! 와장창 하는 소리가 났거든!"
톰은 그 앞유리가 반짝이는 파편이 튀며 깨어지는 소리를 들었었다.
"빌 헨더슨은 엔진을 부쉈지. 그때 그는 정말 멋지게 해치웠어. 깨끗이 부숴버렸으니까. 와지끈 하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멋있었던 것은 비행기를 만들고 있던 그 공장을 엉망으로 부쉈을 때였어. 아주 깨끗이 태워버렸으니까! 그리고 그 신문사와 탄약고를 찾아내어 둘 다 모두 태워버렸지. 안 그러니, 톰?" 글리스비는 회상하듯 말했다.
"그랬지요." 톰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벌써 점심때가 되었다. 황폐한 거리의 냄새가 열기 속에서 코를 찔렀고, 온갖 잡동사니들이 찌그러진 건물 사이에 널려 있었다.
"뒤로 되돌아가지는 않나요?"
"무엇이? 문명이? 아무도 그런 것은 바라고 있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야!"
"문명이란 그다지 나쁘지는 않아. 좋은 점도 얼마쯤 있지" 하고 뒤에 서 있던 사나이가 말했다.
"바보 같은 생각은 그만둬, 그런 것을 생각할 틈이 없을 텐데" 하고 글리스비가 윽박질렀다.
"하지만 언젠가는 누군가 상상력이 풍부한 녀석이 나타나 틀림없이 그것을 완성할 거야. 틀림없어. 어떤 마음 따뜻한 녀석이 말이야" 하고 그 사나이의 뒤에 서 있던 사나이가 말했다.
"천만에!" 하고 글리스비는 말했다.
"어림없어.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올 거야. 그리고 어느 정도의 문명을 우리에게 돌려줄 거야. 우리가 평화롭게 살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그런 다음에 맨 먼저 손을 대는 것이 전쟁이겠지?"
"아니, 이 다음에 올 문명은 조금 다른 것일는지도 몰라."
마침내 그들은 광장 한가운데에 이르렀다. 말을 탄 사나이가 하나 저쪽에서 거리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나이는 한쪽 손에 한 장의 종이를 쥐고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는 밧줄로 칸이 막혀져 있었다. 톰과 글리스비와 다른 사람들은 침을 입에 가득 머금은 채 앞으로앞으로 움직여갔다―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톰은 심장이 갑자기 세게 뛰며 기분이 고조됨을 느꼈다. 땅의 열기가 맨발에 스며들었다.
"자아, 톰, 뱉어라!"
밧줄 칸막이의 네 귀퉁이에는 경관이 한 사람씩 서 있었는데 군중에게 위엄을 보이려는 듯 팔에 노란 소매 장식이 달려 있었다. 경관은 돌던지기를 막기 위해 서 있는 것이었다.
"침을 뱉어!" 글리스비가 마침내 말했다."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는 법이야. 알았니, 톰? 자아, 바로 지금이다!"
톰은 그 그림 앞에 우뚝 서서 뚫어지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톰, 침을 뱉어!"
소년의 입 속은 바싹 말라 있었다.
"자아, 톰, 어서!"
"하지만 저 여자는 너무 아름다와요" 하고 톰은 주춤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대신 침을 뱉어주지."
글리스비는 침을 뱉었고, 그 침덩어리는 햇빛 속을 날아갔다. 그림 속의 여자는 톰에게 조용한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그 그림을 보며 소년의 가슴은 뛰었고,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저 여자는 정말 아름다와요" 하고 소년은 말했다.
"어서 가자, 경관이......"
"여러분, 조용히 하시오!"
줄지어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앞으로 갈 수 없어서 톰을 비난하고 있던 사람들도 잠깐 동안 말을 타고 있는 사나이를 올려다보았다.
"저것은 무슨 그림이지요, 아저씨?" 톰이 조용히 물었다.
"저 그림 말이냐? 아마 모나리자일 거다. 맞아, 모나리자야."
"여러분!" 하고 말탄 사나이가 말했다."당국은 오늘 정오를 기해서 이 광장에 있는 그림을 시민 여러분의 손에 넘기려고 결정하였소. 따라서 여러분은 그림을 파괴하는 기쁨과―"
톰이 소리지를 틈도 없이 군중은 그를 밀치고 마구 욕을 퍼붓고 팔을 휘두르며 그 그림 쪽으로 몰려갔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소리가 나자 경관은 이미 달아났다. 군중은 고함을 지르며 굶주린 새처럼 그 그림을 마구 쪼았다. 톰은 그 엉망이 되어버린 그림을 향해 달려가 다른 사람들처럼 팔을 내밀어 캔버스의 조각을 움켜쥔 순간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소년은 성난 군중들 밖으로 걷어차이고 말았다. 옷이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면서 소년은 노파가 캔버스 조각을 이빨로 물어뜯고, 사나이들이 그 그림 속 여자의 이마를 부수고 누더기가 되어버린 캔버스 조각을 색종이처럼 잘게 찢는 것을 보고 있었다.
오직 톰만이 혼자 남아 도가니 같은 광장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자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은 캔버스 조각을 꼭 움켜쥔 채 가슴에 대고 있었다.
"여어, 너 여기 있었구나, 톰!" 글리스비가 큰 소리로 불린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톰은 뛰어갔다. 광장을 지나 폭탄을 맞아 구멍투성이가 된 길을 달려 들판으로 나갔다. 그리고 얕은 여울을 건너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리며 소년은 주먹을 꼭 쥔 채 웃옷 속에 넣고 있었다.
해질 무렵 소년은 작은 마을에 닿았는데, 그 마을도 지나갔다. 9시쯤 그는 몹시 황폐한 농가로 들어갔다. 그 집 뒤꼍의 절반은 여물 광이었으며, 아직 여물이 조금 쌓여 있었다. 그곳으로 들어가자 가족들의 잠자는 숨소리가 들려왔다―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형제들이었다. 소년은 살짝 재빨리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 숨을 헐떡이며 누웠다.
"톰이냐?"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어디 갔었니? 날이 새면 혼날 줄 알아라." 아버지가 말했다.
누군가가 소년을 걷어찼다. 잠자리가 좁아 구석으로 몰렸던 그의 남동생이었다.
"자거라." 어머니가 졸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누군가가 걷어찼다.
톰은 숨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주위는 고요했다. 그는 손을 굳게 굳게 가슴에 대었다. 소년은 반시간쯤 이렇게 꼼짝 않고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싸늘하고 희끄무레한 빛이었다. 달이 높이 떠올라 여물 광을 뚫고 작고 네모진 빛을 조용히 톰의 몸에 던져주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손의 힘을 풀었다. 주위의 숨소리를 엿들으며 톰은 조심스럽게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조금 주저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소년은 살금살금 손바닥을 펴서 작은 그림 조각을 펼쳤다.
달빛 속에서 모두들 조용히 잠자고 있다.
소년의 손에 얹혀 있는 것은 미소였다.
어두운 하늘에서 내리비치는 어렴풋한 빛 아래에서 소년은 황홀한 듯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여러 번 자기에게 조용히 말했다―(미소다, 아름다운 미소.)
달이 차가운 하늘을 천천히 가로질러 내일 아침으로 향하고 있을 때도 미소는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따뜻하고 정답게.
사순절 초야
The First Night of Lent
그렇다면 자네는 아일랜드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단 말이지? 그들이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지 자네는 알고 싶단 말이지? 좋아, 그럼, 들어보게. 내가 알고 있는 아일랜드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지만, 그 대신 나는 그와 함께 백하고도 사십 남짓한 나날들을 함께 지냈다네. 찬찬히 들여다보면 자네는 이 사나이에게서 빗속에서 나타나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아일랜드 사람의 모든 모습을 볼 수 있을 걸세. 저것 보게, 그들이 오네! 저것 보게, 그들이 저기를 지나가고 있네!
이 아일랜드 사람의 이름은 닉이라고 했다.
1953년 가을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나는 더블린에서 영화에 손을 대고 있었다. 매일 오후 전세낸 택시가 리버 리피에서 30마일 떨어진 조지 왕조풍의 커다란 잿빛 시골집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거기에서 나의 제작자 겸 감독이 일하고 있었다. 기나긴 가을, 겨울, 그리고 이른봄까지 우리는 매일 나의 대본을 9페이지씩 검토했다. 그리고 매일 밤 늦은 시간에 아일랜드 바닷가의 로열 히버니언 호텔로 돌아갈 때가 되면 나는 킬코크 마을의 교환수를 깨워 불기는 없으나 아주 따뜻한 그 장소로 이어달라고 말했다.
"히버 핀 술집이오?" 전화가 연결되면 나는 커다랗게 고함쳤다."닉 있소? 닉을 바꿔주시오."
내 마음 속에 이런 광경이 떠오른다―고장의 젊은이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카운터 너머의 흠투성이 거울을 마치 얼어붙은 겨울의 연못을 들여다보듯 바라보며 그 아름다운 얼음 밑에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자신들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에 잠겨 있는 광경. 그 북적임 속에서, 소용돌이 속에서 나의 운전수―닉은 시무룩하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히버 핀이 닉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닉이 일어나며 대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알았어, 이제 곧 간다니까!"
나는 이 <이제 곧 간다니까!>라는 말이 히버 핀의 멋있는 무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섬세한 대화를 깨뜨리고, 품위를 손상시키고, 기분을 몹시 상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말투가 일종의 해방감을 주어 대부분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모두에게 배척당하여 문이 꼭 닫혀 있는 술집 저 구석으로 정중하게 밀어젖혀지는 것이다. 그리고 몇 개의 낱말 조각이 쉰 목소리의 응답에 의해 융합되고 간추려지고 확립되며,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 이런 식으로 쉴 틈도 생각할 틈도 없이 이야기가 오가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닉의 한밤중 여행의 대부분―히버 핀에 있는 시간―이 30분 걸리는 뜻을 알게 되었다. 그의 한밤중 여행의 짧은 부분―핀의 술집에서 내가 기다리고 있는 집까지 오는 시간―은 겨우 5분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순절(四旬節―광야에서 40일 동안 禁食하고 시험당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리기 위해서 斷食, 贖罪를 행하도록 규정한 기독교 敎會曆의 계절)로 접어드는 전날 밤의 일이었다. 나는 전화를 걸고 기다렸다. 캄캄한 숲을 지나 1931년 형 시보레가 꿈틀거리며 겨우 왔다. 닉처럼 온통 흙탕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자동차도 운전수도 덜컹거리고 한숨을 쉬며 느릿느릿 허덕이면서 시골길을 달려왔다. 나는 달은 없으나 별이 총총한 어둠 속을 더듬으며 현관 계단까지 나갔다.
차창으로 어렴풋한 자동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닉인가......?"
"그렇습니다."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굉장히 따뜻한 밤이군요."
온도는 50도였다. 그러나 닉은 티펠러리 해안선 저쪽의 로마까지는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온도란 상대적인 것이다.
"으음, 따뜻한 밤이로군." 나는 앞자리로 기어들어가서 비명을 지르는 도어를 힘주어 소리나게 닫았다."닉, 요즈음은 어떤가?"
"네, 원기왕성합니다. 내일부터는 즐거운 사순절이지요."
그는 자동차를 시골길에 처박기도 하고 뛰어오르게 하기도 했다.
"사순절이라......" 나는 생각에 잠겼다."사순절의 금기(禁忌)는 무엇으로 할 작정인가, 닉?"
"그 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닉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의 주름투성이인 핑크 빛 얼굴이 연기에 싸였다."내 입 속에 박혀 있는 이 어이없는 물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금니처럼 입 속에서 활개를 치기도 하고, 폐 속에 잔뜩 달라붙어 있기도 하는 이것을. 이런 짓을 계속하고 있다가는 1년 동안에 엄청난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이번 사순절 동안에는 이 괘씸한 것이 나의 입에 드나들지 못하게 할까 합니다. 그 다음이야 어찌되었든!"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는 것을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브라보!"
"나 자신도 브라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며 닉은 담배 연기 때문에 한쪽 눈을 찌푸렸다.
"잘해 보게나" 하고 나는 말했다.
"잘해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금연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요." 닉은 중얼거렸다.
이윽고 우리는 안정된 속도와 주의깊은 운전으로 골짜기를 지나 안개를 헤치며 한 시간에 31마일씩 천천히 더블린을 향해 달렸다.
닉이 이 세상에서 가장 주의깊은 운전수라고 내가 강조하는 것을 용납해 주기 바란다―건전하고, 작고, 조용하고, 버터와 우유를 산출하는 모든 나라에서. 특히 닉은 순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운전석에 앉으면 대뜸 편집광처럼 되어버리는 로스앤젤리스나 멕시코 시티나 파리의 운전수들에 비하면 거룩한 존재라고까지 여겨질 정도였다.
또한 은컵이니 지팡이 같은 것은 체념했으나, 그 대신 헐리우드 풍의 색안경을 끼고 베네트 가도를 미친 듯이 웃어대며 달리다가 축제의 행렬처럼 찌익찌익 브레이크를 밟으며 운전하는 경주용 자동차와 무모한 사나이들에 비해도 역시 그렇다. 로마의 황폐한 모습을 보라. 거기에는 온통 쓰레기가 널려 있다. 이것은 모두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바보들이 어질러놓은 흔적이다. 그들은 호텔의 창문 밑에서 밤새도록 고함을 질러 로마의 오솔길 가득히 울리게 한다. 마치 콜로세움의 사자굴에 떨어진 그리스도 교인들의 비명같이.
그럼, 다시 닉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하늘에서 별들이 떨어지는 듯한 겨울 눈, 마치 그 눈이 땅 위에 쌓일 때처럼 사뿐히 조용하게 핸들을 애무하며 시계바늘이 똑딱거리듯이 닉은 핸들을 다룬다. 길들도 밤의 적막 속에 울려퍼지는 그의 깊이있고 매혹적인 목소리를 들어라! 그는 계속 중얼거리는 악셀레터 위에 ?굅?상냥하게 발을 얹고 30마일로 속도가 떨어지는 적도, 32마일로 속도가 오르는 적도 결코 없다. 아아, 닉, 닉! 그가 조종하는 배는 시간도 졸고 있는 달콤하고 상냥한 호수 위를 조용히 떠다닌다. 그 운전수들과 비교해 보라. 이리하여 어느덧 시간은 흘러, 그에게 약간의 팁을 주고 그의 손을 따뜻하게 쥐고 흔들면 매일 밤의 여행은 끝나는 것이다.
"잘 가게, 닉, 내일 또 부탁하네" 하고 나는 호텔 앞에서 말한다.
"알았습니다" 하고 닉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리고 천천히 가버린다.
23시간 동안에 수면, 아침식사, 점심식사, 저녁식사, 밤술, 그리고 각본을 고쳐쓰는 일 등을 끝내면 시간은 안개와 빗속으로 사라지고 그 다음날 밤 나는 다시 그 조지 왕조풍의 건물에서 나온다. 안개 속에서도 그 자동차가 어디 있는지 육감이 예민한 장님처럼 느끼며 계단을 내려가는 내 앞에서 자동차문은 따뜻한 난로 빛을 던져준다. 그리고 그 천식 환자같이 신음하는 엔진 소리가 어둠 속에서 크게 들리고, <너무 자주 나와서 고맙지 않은> 닉의 기침 소리도 들려온다.
"아아, 거기 계셨습니까!" 하고 닉은 말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앞자리로 들어가앉아 도어를 쾅 닫았다.
"잘 있었나, 닉!" 나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자동차가 마치 대포에서 퉁겨져나온 대포알처럼 앞으로 튀어나가더니 부르릉 소리를 내며 마구 달리고, 튀어오르고, 옆으로 미끄러지고, 몸을 내동댕이치더니 우거진 가시덤불과 엉긴 나무 그늘 속의 길로 마구 달려갔던 것이다. 나는 정강이를 삐었고, 머리를 자동차 천장에 네 번이나 부딪쳤다.
닉! 나는 비명을 지를 지경이었다. 로스앤젤리스나 멕시코 시티나 파리의 악질 운전수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다급하게 속도계를 들여다보았다. 80, 90, 1백 킬로미터. 우리는 자갈을 퉁기며 길 가운데를 달렸다. 다리를 건너 한밤중인 킬코크 거리를 달렸다. 거리를 빠져나가자마자 속도는 1백 10킬로미터가 되었다. 우리들이 외치며 뛰어넘을 때 아일랜드의 모든 풀들이 납작 엎드려 겁을 먹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닉! 나는 마음 속으로 빌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거기에 있었다. 여느 때의 닉과 똑같은 점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불붙은 담배를 입에 물고 눈을 한쪽씩 번갈아감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 담배를 물고 있는 닉은 한편 그 자신이 악마로 돌변하여 순진한 마음을 훔치고, 굴복시키고, 검은 손으로 그를 불태워버리기라도 한 듯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핸들을 빙빙 돌려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곧장 고가도로 밑을 빠져나가 터널을 통과하고 회오리바람 속의 바람개비처럼 교차로 표지판에 거의 부딪치다시피하며 달렸다.
닉의 얼굴에는 이미 지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고, 두 눈에는 상냥함도, 철학적인 빛도 없었다. 입가에는 너그러움과 평화의 빛도 없었다. 거친 표정, 부글부글 끓고 있는 껍질이 벗겨진 감자 같은 표정이었다. 아니, 사정없이 강렬한 빛을 던져 눈을 멀게 하는 서치라이트 같은 표정이었다. 그의 손은 뱀같이 움직였고, 우리의 몸은 자동차가 커브를 돌 때마다 옆으로 기우뚱했으며, 어두운 낭떠러지에 접어들 때마다 튀어올랐다.
(이자는 닉이 아니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자는 닉의 형제나 뭐 그런 사람일 것이다. 아니면 어떤 무서운 괴물이 그의 몸 속으로 기어들어간 것이다. 어떤 꺼림칙한 병이나 재난이 그를 내리덮친 것이다. 유전적인 운명이라든가, 질병 같은 것이―그렇다. 틀림없다.)
마침내 닉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도 변해 있었다. 늪처럼 매끄럽고 잔디처럼 촉촉하고 비바람 속에서도 따뜻한 난로를 연상시키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잔디 같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강철과 양철로 만든 나팔이나 클라리온같이 딱딱한 느낌을 주며 나의 귓전에 울렸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하고 닉이 소리쳤다.
자동차 자체도 거칠게 다루어져 완전히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이 변화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낡아빠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그 수명을 다해 가고 있던 이 자동차는 호흡과 뼈 마디마디를 조심스럽게 다루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지칠 대로 지친 거지처럼 천천히 달려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닉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이 지옥으로 곧장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라는 듯 마구 몰아댔다. 지옥이라 하더라도 그의 그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해주려면 특별한 불이 필요했으리라. 닉이 몸을 기울이면 자동차도 기울어졌다. 새파란 가스가 배기구에서 불을 뿜었다. 닉의 몸도 나의 몸도 차체도 모두 제각기 놀았고, 덜덜 떨며 심하게 덜컹거렸다.
내가 제정신이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뼈가 몹시 아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의 두 눈은 지옥의 밑바닥에서 뿜어오르는 열기처럼 내 옆에서 불타고 있는 사나이에게 쏠려 있었다. 두 손은 언제라도 쓸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닉! 오늘은 사순절 첫날 밤일세!" 나는 허덕이면서 말했다.
"그렇습니까?" 하고 닉은 놀라는 듯했다.
"그렇다네. 자네의 사순절 금기가 무엇인지 나는 기억하고 있는데, 어째서 담배를 물고 있나?" 하고 나는 말했다.
닉은 잠시 내가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으나, 시선을 떨구어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아아, 그것 말입니까? 다른 것을 끊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것이 뚜렷해졌다.
지난 백하고도 사십 남짓한 밤을 그 고풍스러운 조지 왕조풍 집의 문간에서 나는 제작자가 주는 스코치나 버번 같은 독한 술을 추위를 이기기 위해 한 잔씩 받아마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술에 데어 숯처럼 된 입에서 여름의 밀이며 보리며 귀리 같은 숨을 토해내며 나는 그의 택시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었다. 내가 전화를 걸 때까지 긴긴 밤들을 히버 핀의 술집에서 시간보내며 기다려준 그가 있는 곳까지.
(이럴 수가 있담!)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것을 잊고 있었다니!)
뜰에 나무를 심고 열매를 맺게 하는 행위와 비슷하게 바쁜 사람들이 히버 핀에서 자아내는 갖가지 대화. 누구나 자기의 씨앗과 꽃을 뿌리고, 가래나 쟁기 아닌 자신의 혀를, 그리고 거품이 이는 길다란 술잔을 매만지고 좋아하는 술을 음미하며 그칠 줄 모르는 이야기로 밤을 새우는 그 장소에서야말로 닉은 자신을 황홀경 속에 젖어들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황홀이 부드러운 빗줄기가 되어 그의 날카로운 신경을 가라앉히고 온 몸에서 흉포한 피를 쫓아내주었던 것이다. 그 빗줄기는 또한 그의 얼굴에도 내려와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예지의 그림자와 플라톤이나 아이스퀼로스의 그림자를 깃들게 했음에 틀림없다. 술이 가져다주는 그 도취경이 그의 마음을 북돋아주고, 그의 눈동자를 부드럽게 해주고, 목소리에 나직하고 안개가 낀 듯한 울림을 주고 그의 가슴 속에 깊이 퍼짐으로써 심장의 고동까지도 부드러운 리듬을 띠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빗줄기는 그의 팔에도 내려 이 무서운 핸들을 쥐는 억센 팔을 부드럽게 함으로써, 우리와 더블린 사이를 가로막는 안개 속에서 조용하고 차분하고 침착하게 운전석에 앉아 있도록 했던 것이다.
나 자신, 혀 끝에 술향기를 머금고 혈관에 알콜을 들끓게 하고 있던 나 자신이 어떻게 이 다정한 친구가 술에 취해 있었다는 것을 알았겠는가!
"다른 것을 끊었습니다" 하고 닉은 다시 한 번 말했다.
이로써 조각 그림맞추기 마지막 한 조각을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 밤은 사순절 첫날 밤이다.
이때까지 밤마다 닉이 자동차를 운전했지만, 그가 술에 취하지 않은 것은 오늘 밤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백하고도 사십 남짓한 밤, 닉은 내 몸의 안전을 위해 그처럼 세심한 운전을 했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커다란 낫처럼 휘어진 커브를 지날 때마다 그의 몸 속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그 상쾌한 술기운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아, 아일랜드 녀석이란―" 하고 나는 신음했다."대체 그 속셈을 알 수가 없어. 닉이라고?―닉이란 누구를 말하는가?―어디의 누구인가? 어느 닉이 진짜 닉이란 말인가? 어느 쪽이 누구나가 알고 있는 닉이란 말인가?"
그런 것은 생각조차 하지 말자!
나에게는 다만 <하나의> 닉이 있을 뿐이다. 그 하늘, 그 강, 그 씨앗을 뿌리는 들판, 그 사료로 쓰는 밀기울이며 농도가 짙은 국물, 그 술과 병조림, 그 진수성찬, 그 초록빛 술집에 넘쳐흐르는 북적임. 보리밭의 밤바람을 쐬며 산책하는 사람들로 채색된 아일랜드 숲과 늪지를 걸어다니면 어디서인지 속삭임이 들려온다. 그것이 닉이다. 닉의 이이고 눈동자이고 심장이다. 그의 여유있는 두 팔이다. 아일랜드 기질이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나는 잠자코 히버 핀으로 꼬부라지는 모퉁이를 가리키겠다.
사순절 첫날 밤 우리는 날 듯이 더블린에 도착했다. 나는 아직도 덜커덩거리고 있는 자동차에서 길 위로 뛰어내려 몸을 굽히고 운전수의 손에 요금을 건네주었다. 나는 호소하는 듯한 기분으로 온갖 다정한 정을 담아 이 멋진 사나이의 거칠고 기묘한 횃불 같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닉!" 하고 나는 말했다.
"네, 손님!" 하고 그는 기운차게 대답했다.
"부탁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거스름은 필요없으니 그것으로 되도록 큰 병에 담긴 시골 술을 한 병 사오게. 그리고 내일 아침 나를 데리러올 때까지 그 술병을 깨끗이 비워야 하네, 닉. 알겠나, 닉? 제발 부탁이니 약속해 주게!"
그는 생각에 잠겼다―그 때문에 그의 얼굴의 황량한 불길이 꺼지고 말았다.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의 손에 억지로 돈을 쥐어주었다. 마지못해 그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시무룩한 얼굴을 앞으로 돌렸다.
"잘 가게, 닉, 내일 또 보세" 하고 나는 말했다.
"하느님이 허락해 주신다면" 하고 닉은 말하고 자동차를 달려갔다.
길 떠날 때
The Time of Going Away
그 생각은 만 사흘 동안 무르익었다. 낮 동안 그는 그것을 무르익은 복숭아처럼 머리에 간직하고 돌아다녔다. 밤에는 그것을 고요한 공중에 매달아놓아 거친 들판의 달빛과 별빛을 맞으며 살을 붙이고 영양분을 흡수하도록 했다. 새벽녘에는 고요 속에서 그 생각의 둘레를 빙빙 돌아다녔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을 뻗어 그것을 따서 통째로 삼켰다.
그는 부리나케 일어나 낡은 편지를 모두 불태우고 작은 가방에 갈아입을 옷을 조금 챙겨넣은 뒤 까마귀의 깃털같이 반짝이는 검은 넥타이를 맸다. 마치 상(喪)을 입은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등 뒤에서 아내가 당장에라도 무대에 뛰어올라가 연극을 중지시키려고 도사리고 있는 비평가 같은 눈으로 그의 이 비밀스러운 연극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그는 느꼈다. 그는 아내의 옆을 스쳐지나갈 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라고요? 할 말이 그것뿐인가요? 몰래 여행 계획을 세워가지고 떠나면서!" 아내가 소리쳤다.
"계획 따위는 세우지 않았소. 우연히 이렇게 되었을 뿐이지. 사흘 전부터 죽는다는 예감이 들었단 말이오"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 바보 같은 말은 그만하세요. 그런 말을 들으면 신경이 곤두서요."
지평선이 그의 눈 앞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피의 순환도 나빠졌고, 뼈도 욱신욱신 쑤시고, 천장에서 들보가 움직이기도 하고, 먼지 쌓이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소."
"당신은 아직 75살이잖아요! 두 다리로 똑바로 설 수 있고, 눈도 보이고, 귀도 들리고, 음식도 먹을 수 있고, 잠도 깊이 잘 수 있어요. 무슨 어리석은 말씀을 하세요."
"자연의 소리가 나에게 그렇게 속삭였단 말이오." 그는 말했다."문명이라는 것이 인간을 자연스러운 자기로부터 멀리멀리 떼어놓고 말았소. 미개인들을 보오―"
"어리석은 소리는 그만둬요!"
"누구나 다 알고 있잖소―미개인은 자기가 죽을 때를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친구에게 작별의 악수를 나누고 재산을 모두 나누어준 다음―"
"미개인의 아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나요?"
"아내에게도 재산을 남기고 가지."
"그럴 테지요."
"그리고 친구에게도―"
"그럴 테지요."
"친구에게도 그런단 말이오. 그리고 통나무배를 저어 석양을 향해 가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거요."
아내는 바싹 마른 재목 같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것은 도망이에요!"
"아니, 그렇지 않소, 밀드레드. 그것은 죽음이오―단순하고도 뚜렷한 죽음이란 말이오. <길을 떠난다>―미개인들은 그렇게 표현하지."
"그렇게 떠난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한 사람이라도 있나요?―통나무배를 타고 뒤쫓아가서 말이에요."
"물론 없지. 그런 짓을 하면 모든 것이 파괴되고 마니까." 그는 조금 초조한 듯이 말했다.
"다른 섬에 또 다른 아내나 예쁜 친구라도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않소. 남자란 피가 싸늘해지면 고독과 청순을 원하게 된다오."
그의 아내는 한쪽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들이 정말 죽었다는 증거가 있다면 나는 잠자코 있겠어요. 그러나 아무도 그런 남자들의 뼈를 멀고먼 섬에서 발견했다는 사람은 없잖아요?"
"죽을 때가 가까와졌다는 것을 아는 동물들처럼 그들은 석양을 향해 배를 저어갈 뿐이오. 그 다음의 일은 알고 싶지도 않소."
"그럴 테지요. 당신은 또 <국민 지지(國民地誌)>에서 코끼리가 뼈를 묻는 장소에 대한 기사를 읽으셨군요."
"무덤이오, 뼈를 묻는 장소가 아니라!"
그는 화를 냈다.
"무덤, 뼈를 묻는 장소―그런 잡지는 모두 태워버렸는데, 당신은 또 감추어두었었군요."
"여보, 밀드레드!" 하고 그는 여행가방을 옮겨쥐며 선언했다."나의 마음은 북쪽을 향해 있어서 당신이 뭐라고 말하든 남쪽으로 돌아서지는 않소. 나의 마음은 원시적인 영혼의 영원한 비밀의 샘을 향해 있단 말이오."
"당신이라는 사람은 언제나 그 흙 냄새 나는 잡지에 씌어 있는 말에 마음이 쏠려버리니까요." 아내는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내가 잊어버리고 있는 줄 아세요?"
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제발 부탁이니 이제 그만 몰아세워......"
"털북숭이 맘모스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지요?" 그녀는 물었다."30년 전에 러시아의 툰드라에서 냉동된 코끼리가 발견되었을 때의 이야기 말이에요. 당신과 사람좋은 샘 하트가 맘모스의 고기 통조림으로 세계 시장을 독점하겠다고 하며 시베리아로 떠나려고 하지 않았던가요? 내가 잊어버린 줄 아세요? 당신은 말했지요―'1만 년이나 먼 옛날에 전멸해 버린 시베리아 맘모스의 1만 년이나 냉동되어 있던 연한 고기가 가정의 식탁에 오르게 되면 지리학계의 권위자들이 얼마나 지불할 것 같소!'하고 말이에요. 내가 지금 그때의 충격에서 회복되었다고 생각하세요?"
"뚜렷이 기억하고 있고" 하고 그는 대답했다.
"전멸한 오세오스 족인가 뭔가를 찾는다고 위스콘신인지 어딘지로 가서 토요일 밤마다 술집에서 마구 마시다가 그 채석장으로 떨어져 다리를 부러뜨리고 사흘 동안이나 거기에 누워 있었던 일을 내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하세요?"
"당신의 기억은 완벽하오"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무슨 흉내를 내는 거예요―미개인이니 길을 떠날 때니 무슨 잠꼬대 같은 말씀이에요? 지금은 얌전하게 집에 계셔야 할 때예요. 나무에서 열매가 손으로 굴러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갖고 싶으면 가게까지 걸어서 가야만 한단 말이에요. 왜 걸어가야만 하느냐고요? 이 집의 그 누군가가 오래 전에 자동차를 시계처럼 분해한 채 뜰에 내버려두었기 때문이지요. 우리 집 뜰에서 자동차의 부품을 주워 모으기 시작한 지가 이번 목요일이면 10년이 돼요. 앞으로 10년만 더 있으면 우리 집 자동차의 잔해는 한줌의 녹이 되어 있겠지요. 창 밖을 내다보세요! 낙엽을 긁어모아 태워야 할 때예요. 나무를 잘라 난로에 피울 장작을 장만해야 할 때예요. 그리고 난로를 깨끗이 하고 덧문을 닫아야 할 때예요. 지붕을 새로 이어야 할 때예요. 그것이 싫어서 달아나신다면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주세요!"
그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판날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은 나의 기분을 이해해 주지 않으니 참으로 한탄스럽군."
"<국민 지지>가 머리가 좀 이상해진 노인의 손에 들어간 것이야말로 한탄스러운 일이에요. 당신은 그 잡지를 읽으면 몽상에 빠지고, 나는 언제나 그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지요. 다락방이나 이 창고나 지하실에 있는 만들다 만 보트며 헬리콥터며 박쥐 모양의 날개가 달린 일인승 글라이더를 <국민 지지>나 <여러분의 기계> 편집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가져가게 하고 싶어요!"
"얼마든지 지껄이구료. 하지만 당신 앞에 서 있는 이 나는 망각의 파도 속으로 가라앉는 하얀 작은 돌이니 제발 평화로운 죽음의 여로에 오르게 해주오" 하고 그는 말했다.
"망각의 여로에 오르려면 아직 시간이 많아요―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돌처럼 싸늘해지기까지에는 아직 시간이 많단 말이에요."
"천만에! 내가 죽는 시기를 인정하는 것이 허영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오?"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은 그것을 씹는 담배처럼 씹고 계세요."
"이제 그만! 나의 재산은 부엌문 앞에 쌓아두었으니 구세군에게 기부하구료." 그는 말했다.
"<국민 지지>도 함께요?"
"암, <국민 지지>도 함께! 자아, 비켜요!"
"죽으러 가신다면 갈아입을 옷을 넣은 여행가방은 필요없을 텐데요" 라고 그녀는 말하였다.
"참견 마오! 죽을 때까지는 아직 여러 시간이 있소. 최후의 인간다운 편안함마저 바라서는 안된단 말이오? 다정한 이별을 나누어야 할 자리에서 쓰디쓴 비난과 비꼼과 의심의 말을 던지다니―"
"좋아요. 그럼, 숲 속으로 가서 추운 밤을 보내세요." 그녀는 말했다.
"반드시 숲 속으로 간다고는 할 수 없지."
"일리노이 사람이 죽으러 가는데 달리 어떤 장소가 있겠어요?"
"그야―" 하고 그는 말 끝을 우물거렸다."큰길로 얼마든지 나갈 수 있지."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다가 자동차에 치이겠지요. 그 점을 잊고 있군요."
"그렇지 않소." 그는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숲이며 들판을 지나 저 먼 호수로 나갈 수 있을 거요. 그리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호젓한 지름길도 있고......"
"그럼, 통나무배를 빌어타고 강을 건너겠다는 말씀이세요? 기억하고 계시겠지요―방화수에 빠져 하마터면 익사할 뻔했던 일을?"
"누가 통나무배를 탄다고 했소?"
"당신이 말씀하셨지요! 미개인이 위대한 미지의 경지를 향해 통나무배를 타고 저어간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것은 남양에 있는 여러 섬에서의 이야기요. 이곳 사람들은 걸어가서 자연의 뿌리를 찾아내어 자연스러운 말로를 맞이하기를 바라고 있소. 나는 북쪽으로 가겠소―미시간 호수를 따라 언덕을 넘어 바람과 싸우고 파도를 맞으며―"
"여보, 윌리!" 하고 그녀는 정답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아아, 윌리, 나는 당신에게 무엇을 해드리면 좋을까요?"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면 되오."
"알았어요" 하고 말하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넘쳐흘렀다.
"자아, 그만!" 하고 그는 말했다.
"아아, 윌리!......" 그녀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당신은 진심으로 죽음이 다가왔다고 생각하세요?"
그는 그녀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작긴 해도 뚜렷이 비치고 있는 것을 보고 멋적은 듯이 눈길을 돌렸다.
"나는 밤새도록 사람을 날라오고 날라가는 우주의 파도를 생각했소. 지금은 아침이오. 그럼, 안녕."
"안녕이라고요?" 아내는 지금까지 그런 말은 들어본 일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물론 당신이 끝까지 가지 말라고 한다면, 밀드레드―"
"아니에요!" 그녀는 힘을 모아 코를 풀었다."당신은 일단 이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뒤로 물러서지 않는 사람인걸요.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당신은 그런 사람이에요, 윌리." 그녀는 말했다."어서 떠나세요. 외투를 입고―바람이 차가와요."
"하지만―" 하고 그는 말했다.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달려가 외투를 가져오고 그의 뺨에 입맞춤을 한 다음 그가 곰처럼 그녀를 끌어안을 틈도 주지 않고 몸을 살짝 뒤로 뺐다. 그는 난로 옆의 큰 안락의자를 보며 입을 우물거렸다. 그녀는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먹을 것은 넣으셨어요?"
"먹을 것은 필요없소......"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가방 속에 햄 샌드위치와 피클이 들어 있소, 하나뿐이지만. 그것이면 되겠지......"
그는 현관을 나와 돌계단을 내려가 숲을 향해 오솔길을 걸어갔다. 그는 뒤돌아보고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손을 흔든 다음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여보!" 하고 그녀는 불렀다."무리하지 마세요. 처음에는 너무 빨리 걷지 않는 편이 좋아요. 피곤하면 앉아서 쉬고, 시장하시면 뭘 잡수셔야 해요! 그리고......"
그녀는 목이 메어 말을 끊고 돌아서서 손수건을 꺼냈다.
한참 있다가 그녀는 오솔길을 내다보았다. 1만 년 동안이나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은 길처럼 보였다.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므로 그녀는 할수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밤 9시, 9시에서 15분이 지나자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달은 차고, 집 안의 등불은 커튼 너머로 산딸기 빛깔 같은 빛을 던졌고, 굴뚝에서는 혜성의 꼬리 같은 불을 뿜으며 뜨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굴뚝 밑에서는 남비며 프라이팬이며 도마 소리가 났고, 난로에서는 커다란 오렌지 빛 고양이 같은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부엌의 커다란 무쇠 화덕에서는 불길이 춤추고, 프라이팬에서는 기름이 지글거리며 거품을 뿜어 김이 공중으로 올라갔다. 이따금 노부인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쫑긋이 내밀고 이 집, 이 불, 이 음식의 바깥 세계에 주의를 기울였다. 9시 반. 멀리서 톡 톡 톡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부인은 허리를 펴고 스푼을 놓았다.
밖에서는 톡 톡 톡 하는 희미한 소리가 달빛 아래에서 여러 번 났다. 그 소리는 3, 4분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 동안 그녀는 거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리가 날 때마다 입가에 힘을 주고 주먹을 불끈 쥐었을 뿐이었다. 소리가 그치자 그녀는 난로가로 달려가 휘젓고, 붓고, 들어올리고, 날라다가 식탁을 차렸다. 모든 준비를 끝마쳤을 때 창 밖의 어둠 속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발소리가 천천히 오솔길로 다가오더니 그 무거운 발소리는 현관의 층계참에서 멎었다.
그녀는 출입문으로 가서 노크 소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녀는 꼬박 1분 동안 기다렸다.
바깥 포치에서 키 큰 사람의 그림자가 초조한 듯이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한숨을 쉬고 문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여보, 거기서 숨쉬고 있는 것은 당신이지요?"
대답이 없었다. 야릇한 고요함이 문 밖에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힘차게 문을 열었다.
노인이 거기 서 있었다―믿을 수 없으리만큼 많은 양의 장작을 팔에 안고.
"굴뚝에서 연기가 나기에 장작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했지."
그녀는 길을 비켰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장작을 난로 옆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녀는 포치를 내다보고 여행가방을 집어 안으로 들여놓고 문을 닫았다.
그가 저녁식탁에 앉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그녀는 난로 위에 얹혀 있는 스프를 저어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오븐에 고기가 들어 있소?" 하고 그가 조용히 물었다.
그녀는 오븐의 뚜껑을 열었다. 김이 솟아올라 그를 흠뻑 감쌌다. 그는 앉은 채 눈을 감고 김을 쐬었다.
"눋는 냄새가 나는데, 무엇이 타고 있소?" 잠시 뒤 그가 물었다.
그녀는 등을 돌린 채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국민 지지>예요."
그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따뜻하고 지글지글 소리가 나는 음식이 식탁에 오르자, 그녀는 마주앉아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기도 드리지 않으시겠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하구료."
그들은 뜰이 활활 타고 있는 따뜻한 방에 앉아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그녀는 미소지으며 기도를 시작했다.
"주여, 감사합니다......"
모든 여름을 이 하루에
All Summer in a Day
"어때?"
"다 됐어."
"벌써?"
"응."
"과학자들은 정말 알고 있을까? 정말 오늘일까?"
"저것 봐, 저것 보라니까.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해 봐!"
아이들은 서로 밀치락거렸다. 꽃이 만발한 장미나무처럼, 우거진 잡초처럼 서로 얽혀서 한덩어리가 되어 보이지 않는 태양을 보려고 밖을 내다보았다.
바깥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7년 동안 계속 내리고 있는 것이다. 몇천 날동안 날마다 비가 내려 비에 파묻혔다. 억수 같은 비에, 도도히 흐르는 물에, 반짝이는 수정을 뿌리는 소나기에, 섬들을 뒤덮는 거대한 해일 같은 폭풍우에 파묻혔다. 수백 군데의 큰 숲은 비에 씻겨내려갔고, 또한 씻겨내려갔기 때문에 수백 번이나 다시 우거졌다. 바로 이것이 금성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생활상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비의 세계에 문명을 이룩하고 생활의 터전을 닦으려고 로켓으로 날아온 사람들의 아이들의 교실인 것이다.
"그치고 있다. 그치고 있어!"
"정말인데, 정말이야!"
마고는 모두에게서 조금 떨어져 서 있었다. 끊임없이 비가 내려서 비가 오지 않는 날을 상상할 수 없는 아이들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아이들의 나이는 모두 9살. 8년 전 어느 날 한 시간 동안 태양이 얼굴을 내밀어 놀라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때로는 이슥한 밤에 생각이 나서 모두 야단법석을 떠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마고는 아이들이 모두 노란빛 또는 황금빛 크레용이나, 온 세계를 살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금화를 상상하며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태양의 온도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얼굴이며 몸이며 팔이며 다리며 떨리는 손 등을 벌겋게 만들 정도의 온도를 가지고 있다고. 그러나 단조로운 비의 북소리에 잠이 깨면 끝없이 멀어지는 투명한 구슬목걸이가 지붕에, 길에, 뜰에, 숲에 가득하였다. 그러면 순식간에 모두의 꿈은 사라져버린다.
어제는 하루 종일 교실에서 태양에 대한 공부를 했다. 얼마나 레몬과 비슷하며, 얼마나 뜨거운가 하는 것을. 그리고 모두들 태양에 대한 짧은 작문과 감상문과 시를 지었다.
태양은 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한 시간만 피는 꽃입니다.
이것은 마고가 쓴 시였다. 밖에서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고, 교실에서는 조용한 목소리로 시를 읽었다.
"흥, 이것은 네가 쓴 것이 아니야!" 하고 한 남자아이가 트집을 잡았다.
"내가 썼어. 내가 지었단 말이야" 하고 마고는 말했다.
그러자 여선생님이 나무랐다.
"윌리엄!"
그러나 그것은 어제 있었던 일―지금은 빗줄기도 약해졌고, 크고 두터운 창문마다 아이들이 몰려 있었다.
"선생님은 어디 가셨을까?"
"이제 곧 오실 거야."
"빨리 오시지 않으면 못 보실 텐데."
서로 부르고 이야기하며 불이 댕겨진 불꽃처럼 모두 뱅뱅 돌아가고 있었다.
마고만이 혼자 떨어져 서 있었다. 빗속에서 길을 잃은 몇 년 동안 눈에서는 파란빛이, 입에서는 빨간빛이, 머리카락에서는 노란빛이 그 비에 씻겨져 나간 것 같은 매우 가냘픈 소녀였다. 앨범에서 뜯기어나간 낡은 사진처럼 창백한 그녀는 말을 하면 목소리의 유령이라도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 모두에게서 떨어져 멀찍이 서서 두터운 유리 저쪽의 비에 젖은 세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무엇을 보고 있니?" 하고 윌리엄이 말했다.
마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걸면 대답 좀 해봐라" 하고 그는 그녀를 쿡 찔렀다.
그러나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힘에 자기를 움직이도록 맡길 따름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차츰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를 보지도 않게 되었다. 모두들 멀어져가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이런 대우를 받게 된 것은 땅 밑 도시의 메아리치는 터널에서 그들과 함께 놀지 않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그녀를 술래로 삼고 숨어도 그녀는 눈을 깜박거리며 서 있을 뿐 잡으려 하지 않았다. 교실 안에서 모두들 함께 행복이며 생활이며 유희의 노래를 부를 때도 그녀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입술이 움직이는 것은 태양과 여름을 노래할 때뿐이었다―비에 젖은 창문을 지켜보며.
물론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마고가 지구에서 이곳으로 온 지 5년밖에 안되었다는 사실이다. 마고는 태양을 기억하고 있었다. 4살 때 오하이오에서 본 태양이 어떤 모습이었고 하늘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금성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들이 태양을 본 것은 겨우 2살 때였다. 따라서 그 빛깔, 그 온도, 그 모습을 사실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마고는 기억하고 있었다.
"동전과 비슷하단다" 하고 마고는 눈을 감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 않을 거야." 아이들은 소리쳤다.
"불과 비슷해. 난로 속의 불 말이야" 하고 그녀가 말했다.
"거짓말 마. 네가 어떻게 기억하니?" 하고 아이들은 외쳤다.
그러나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에게서 떨어져 서서 비로 얼룩진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달 전 마고는 학교의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머리에 물을 뒤집어쓰는 것이 싫어서 비명을 지르며 귀와 머리를 두 손으로 가렸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그녀는 조금씩 깨달았다. 자기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 그들도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멀리한다는 것을.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년에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간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녀를 위해 그렇게 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몇천 달러라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하더라도. 이러한 이유가 큰 문제며 사소한 문제 등과 겹쳐서 아이들은 그녀를 미워했다. 그녀의 눈같이 창백한 얼굴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침묵을, 바싹 마른 몸을, 상상되는 그녀의 미래를 아이들은 모두 미워했던 것이다.
"저리 비켜!" 소년이 또 그녀를 힘껏 밀었다."무엇을 기다리고 있니?"
이때 비로소 그녀는 얼굴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그 두 눈에 나타나 있었다.
"흥, 이런 데서 기다리면 뭘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소년은 크게 소리쳤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야. 그렇지, 얘들아?" 하고 그는 소리치며 아이들을 뒤돌아보았다.
아이들은 모두 눈을 깜박거리다가 이내 알아차리고 와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일어나지 않아, 일어나지 않고말고!"
"하지만 오늘이라고 과학자들이 예고했어. 과학자들은 알고 있어. 태양이......" 마고는 나직이 말했다.
"거짓말 마!" 하고 소년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았다.
"얘들아, 선생님이 오시기 전에 이애를 벽장 속에 가둬두자."
"싫어!" 마고는 뒷걸음질치며 소리쳤다.
그녀의 둘레에 아이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이들은 저항하고 애원하고 울부짖는 그녀를 들어올려 터널을 지나 어떤 방으로 들어가 벽장 속에 넣고 문을 닫은 다음 쇠를 잠갔다. 그리고 그녀가 몸을 부딪치며 그 문을 잡아흔드는 것을 모두들 바라보고 있었다. 가냘픈 울음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자 모두들 싱글싱글 웃으며 몸을 돌려 터널을 빠져나갔다. 그 순간 선생님이 나타났다.
"여러분, 좋습니까?" 그녀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네!" 하고 모두 소리맞추어 대답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였지요?"
빗줄기는 차츰 더 약해졌다.
모두 커다란 문으로 모여들었다.
비가 그쳤다.
마치 그것은 눈사태나 소용돌이, 태풍이나 분화의 영화 필름이 처음에는 발성 장치에 고장이 나서 폭음, 진동, 굉음이 차츰 작아지다가 마침내는 조용해지고, 그 다음에는 필름이 영사기에서 떼어지고 그 대신 아무것도 움직이지도 떨리지도 않는 평화로운 열대 풍경의 슬라이드가 한 장 삽입된 것과도 같았다. 온 누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끝없는 정적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귀에 귀마개를 했거나, 아니면 듣는 힘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다. 아이들은 귀에 손을 대고 제각기 떨어져 서 있었다. 큰 문이 열리자 정적 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온 누리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태양이 나타난 것이다.
불타오르는 구릿빛 태양, 그것은 엄청나게 컸다. 그 둘레의 하늘은 반짝이는 청기와빛, 속박에서 풀려난 아이들이 짧은 봄을 외치며 뛰어나가는 저쪽에는 수풀이 햇빛을 받아 불타고 있었다.
"멀리 가면 안돼요, 겨우 두 시간밖에 없으니까 길을 잃지 않도록 해요" 하고 선생님이 아이들 뒤에서 소리쳤다.
그러나 아이들은 달려가고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따뜻한 다리미처럼 태양을 두 뺨에 느끼며, 웃옷을 벗고 태양에 두 팔을 쬐었다.
"태양등보다 훨씬 좋구나!"
"훨씬, 훨씬 좋아!"
모두는 달려가다가 금성을 뒤덮은 드넓은 덤불 속에 멈추어섰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라며 결코 자라기를 그치지 않는 뒤엉킨 덤불로서 문어의 소굴과도 같았고, 살덩이 같은 잡초의 팔이 엉기고 물결치며 짧은 봄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몇 년 동안이나 햇볕을 보지 못한 이 덤불은 고무빛, 잿빛, 하얀 치즈 빛, 먹물빛, 그리고 달빛을 띠고 있었다.
아이들은 옆으로 누워 웃으며 자기들 밑에 있는 덤불요가 살아서 뛰고 한숨을 쉬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들은 나무 사이를 달리며 미끄러져 넘어지고 서로 밀치며 술래잡기를 했다. 그러나 눈물이 나올 때까지 태양을 우러러보는 때가 가장 많았다. 그 노란 빛깔과 넋을 잃을 정도로 그 파란 빛깔에 두 손을 들어올려 말할 수 없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복된 바닷속에 모두를 잠기게 하는 고요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음미하고, 마침내 바위굴에서 달아나는 짐승처럼 거칠게 달리기 시작하였다. 끝도 없이 소리치며 빙빙 원을 그리면서 달렸다. 한 시간 동안 아이들은 계속 달렸다.
그러다가―
그렇게 달리다가 한 소녀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은 모두 멈추어섰다. 소녀는 들판 한가운데에 서서 한쪽 손을 벌리며 내밀었다.
"이것 좀 봐."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손바닥을 보기 위해 모두들 천천히 모여들었다.
그 소녀의 펼친 손바닥 한복판에 하나의 빗방울이 떨어졌다.
소녀는 그것을 보이며 흐느껴울었다.
아이들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아, 아아!"
차가운 물방울이 모두의 코에, 모두의 뺨에, 모두의 입에 떨어졌다. 소용돌이치는 안개 뒤로 태양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들의 둘레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모두들은 발길을 돌려 땅 밑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 손을 양쪽에 축 늘어뜨린 채 이미 그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갑자기 일어나는 천둥 소리에 놀라 폭풍우 앞의 나뭇잎처럼 서로 똘똘 뭉쳐 아이들은 달렸다. 번갯불이 10마일 앞에서, 5마일 앞에서, 1마일 앞에서, 반 마일 앞에서 번뜩였다. 다음 번갯불이 일 때까지 하늘은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땅 밑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아이들은 잠깐 멈추어섰다. 문을 닫자 몇 톤이나 되는 눈사태처럼 마구 쏟아지는 빗소리가 영원히 그치지 않으려는 듯이 심하게 모두의 귀청을 때렸다.
"또 7년 동안 계속 비가 올까?"
"그럼, 7년 동안."
그러자 한 아이가 조그맣게 소리쳤다.
"마고!"
"뭐라고 했니?"
"벽장 속에 갇힌 채 아직 거기 있을 거야."
"마고!"
누군가가 아이들을 모두 바닥에 못박아놓은 듯 다같이 장승처럼 서버렸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는 얼른 그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모두 비가 내리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비가 내리는 바깥 세계를 내다보았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우울하고 창백한 얼굴을 숙이고 모두들 자기의 손발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마고!" 한 소녀가 입을 열었다."어떻게 하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 ?맛" 하고 그 소녀가 속삭였다.
차가운 빗소리가 울리는 복도를 아이들은 천천히 걸어갔다. 폭풍우 소리와 천둥 소리가 나고, 번갯불이 파랗게 모두의 얼굴을 물들이는 가운데 아이들은 그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벽장 앞에 다가가 아이들은 그 앞에 나란히 섰다.
벽장문 저쪽에는 다만 고요함이 있을 뿐이었다.
모두들은 벽장의 자물쇠를 열고 천천히 마고를 밖으로 끌어냈다.
선물
The Gift
내일은 크리스마스를 축하해야 한다. 아들과 함께 로켓 정거장으로 향하는 자동차 속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소년에게는 이번이 첫 우주여행이고 로켓도 이번에 처음 타보는 것이었다. 부모로서는 이 여행을 완벽한 것으로 해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세관의 테이블에서 제한 중량을 겨우 몇 온스 초과했다는 이유로 마련했던 선물과 귀여운 하얀 초가 잔뜩 달린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두고 가야만 하게 되었을 때 크리스마스는 물론 두 사람의 애정까지 박탈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년은 터미널 대합실에서 부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주여행국 직원과의 절충이 실패로 끝난 뒤 아들에게 걸어가며 어머니와 아버지는 속삭였다.
"어떻게 하지요?"
"하는 수 없지. 하는 수 없잖소."
"정말 시시한 규칙이에요!"
"그애는 트리를 그토록 손꼽아 기다렸는데!"
사이렌 소리가 크게 울리자 사람들은 화성행 로켓에 서로 밀치며 올라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맨 나중에 탔다. 작고 창백한 아들은 두 사람 사이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무슨 수를 생각해 내야겠소"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하고 소년이 물었다.
로켓은 발사되어 어두운 우주를 향해 곧바로 날아올라갔다.
로켓은 불꽃을 뒤에 남기며 2052년 12월 24일 지구를 떠나 날짜도 해(年)도 시간도 없는, 때라는 것이 전혀 없는 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 <때>의 나머지를 모두 잠자며 보내고 있었는데, 지구 시간으로 뉴욕의 시계가 한밤중을 가리키고 있을 무렵 소년이 잠에서 깨어나 말했다.
"창 밖을 내다보고 싶어요."
<창>은 저쪽 승강구에 단 하나, 크고 두꺼운 유리로 만들어진 것이 있을 뿐이었다.
"아직 안된다. 나중에 데려다주마" 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우리가 지금 어디 있는지, 이제부터 어디로 가는지 보고 싶어요."
"이유가 있어서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라" 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는 누워 있었으나 잠들지는 않았다. 그는 몸을 뒤채며 두고 온 선물에 대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대해, 트리며 하얀 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5분 전에 잘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일어나앉았다. 그 계획을 잘 진행시키기만 하면 이 여행은 참으로 멋있고 즐거운 것이 되리라.
"얘야, 앞으로 정확하게 30분만 있으면 크리스마스가 된다"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어쩌면 당신도!" 하고 어머니는 말했다.
소년이 잊고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것을 아버지가 말했으므로 어머니는 당황했던 것이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아버지. 선물을 받게 되겠지요? 트리도 있겠지요? 약속하셨으니까요―" 소년은 두 뺨을 붉게 물들이고 입술을 떨며 말했다.
"암, 그렇고말고. 모두 있지. 더 좋은 것도 있단다" 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하지만―"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아암, 그렇고말고. 정말이야. 더 좋은 것도 있지. 아주 멋진 것이란다. 잠깐만 기다려라. 이제 20곧 가지고 올 테니까" 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는 20분쯤 자리를 비웠다. 돌아왔을 때 그는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있었다.
"이제 곧 주마."
"시계를 나에게 빌려주세요" 하고 소년은 부탁했다.
그 시계는 불길과, 고요함과, 느낄 수 없는 움직임 속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는 시간을 소년의 손가락 사이에서 새기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예요! 지금 막 크리스마스가 되었어요! 선물은 어디 있지요?"
"그럼, 가자."
아버지는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를 끌며 방에서 나갔다. 어머니도 복도를 내려가 비탈로 된 승강구를 올라가는 그들 뒤를 따라 올라갔다.
"대체 왜 그러세요?" 하고 그녀는 되풀이 물었다.
"이제 곧 알게 될 거요. 자아, 여기다!"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큰 방의 닫혀진 문 앞에서 세 사람은 멈추어섰다. 아버지는 규칙대로 그 문을 처음에는 세 번,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두 번 ?굅?두드렸다. 도어가 열렸다. 방 안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으며, 다만 서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들어오너라, 얘야"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하지만 어두운데요."
"손을 잡아주마, 당신도 들어오구료."
세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혀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앞에는 어렴풋하게 거대한 유리의 눈(眼)―높이 4피트 가로 6피트의 창이 달려 있었는데, 그 앞으로 달려가자 느닷없이 우주가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뒤에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역시 숨을 들이마셨다. 이때 어두운 방 안에서 몇 사람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얘야,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거란다"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방 안의 노랫소리는 먼 옛날의 그리운 성가(聖歌)였다. 소년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매끄러운 창유리에 얼굴을 갖다댔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우주를 바라보고 끝없는 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억을 세고 조를 세었는데도 아직 다 세지 못한 하얀 초가 반짝이고 있었다. 우주는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월요일의 큰 사고
The Great Collision of Monday Last
그 사나이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모습으로 히버 핀 술집의 활짝 열린 도어로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갈짓자걸음, 그리고 얼굴과 웃옷과 찢어진 바지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 신음 소리에 카운터 앞에 앉아 있던 손님들은 모두 얼어붙은 듯이 꼿꼿해졌다. 잠깐 동안 레이스 모양의 조끼에서 일어나는 부드러운 거품 소리만이 들려왔다. 뒤돌아보는 손님의 얼굴 중에는 창백한 얼굴, 복숭아빛으로 물든 얼굴, 정맥이 튀어나온 얼굴, 닭의 볏처럼 빨간 얼굴도 있었다. 한 줄로 줄지어 있던 눈꺼풀들이 일제히 깜박거렸다.
그 낯선 사나이는 엉망으로 되어버린 옷을 입고 있었으며,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떨며 비틀거렸다. 술을 마시던 손님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봐요! 그들은 마음 속으로 외쳤다―말해 봐요, 무슨 일이 일어났소?
낯선 사나이는 비틀거리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충돌했습니다. 한길에서 충돌했습니다." 그는 중얼거리듯 말하고 나서 무릎을 꺾으며 쓰러졌다.
"충돌했다고!"
십여 명의 사나이들이 우르르 그의 둘레로 몰려들었다.
"케리!" 하고 히버 핀이 카운터를 훌쩍 뛰어넘으며 소리쳤다."밖에 나?? 피해자를 돌봐줘야겠다, 조심해서! 조, 너는 의사를 불러와!"
"잠깐만!" 하고 누군가 차분하게 말했다.
술집의 어두컴컴한 한쪽 구석 철학자가 명상에 잠기기에 알맞는 으슥한 자리에서 얼굴빛이 검은 사나이가 여러 사람 쪽을 보고 있었다.
"오오, 의사 선생님, 거기 계셨군요!" 히버 핀이 외쳤다.
의사와 사나이들이 함께 어둠 속으로 뛰어나갔다.
"충돌......" 바닥에 쓰러진 사나이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조용히 하십시오, 여러분!"
히버 핀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피해자를 카운터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그 얼굴은 솜씨가 훌륭한 상아 세공의 죽은 얼굴처럼 아름다왔다. 프리즘 식 거울이 끔찍한 참상을 곱절이나 더 끔찍하게 비춰내고 있었다.
바깥의 층계에서 사나이들은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마치 아일랜드가 바닷속으로 침몰하여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드넓은 바닷물뿐인 듯했다. 50피트의 큰 파도 속으로 안개가 달과 별의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사람들은 눈을 깜박이고 서 있다가 마구 욕을 퍼부으며 뛰어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밝은 문지방에 한 젊은이가 서 있었다. 아일랜드 사람처럼 얼굴빛이 붉지도 않고 창백하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고 명랑하지도 않았다. 미국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과연 그러했다. 그러므로 그가 이런 법석에 끼어들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아일랜드 땅을 밟고 나서 오늘까지 자기가 늘 아베 극장(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던 유명한 극장)의 무대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자기가 취해야 할 길을 알지 못해 달려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볼 뿐이었다.
"하지만 한길에서 자동차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요." 그는 가냘프게 이의를 내세웠다.
"나지 않았다고!" 하고 거의 대들 듯이 한 노인이 말했다. 관절염 때문에 층계 맨 윗단에 선 채 비틀거리며 그는 사람들이 달려나간 하얀 파도를 향해 소리쳤다."십자로 쪽으로 ?맒첼? 모두들! 제일 사고가 많이 나는 곳이니까!"
"십자로!"
멀리서 가까이에서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충돌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하고 미국인 청년이 다시 말했다.
노인은 경멸하듯이 흥 하고 코를 울렸다.
"굉장한 소동이든 무섭게 충돌하는 소리든 들리지 않소. 하지만 거기에 가면 충돌을 볼 수 있지. 어쨌든 ?맒첼? 달리지 말고. 악마라도 나올 듯한 밤이니까. 덮어놓고 달리다가는 케리 녀석과 부딪칠는지도 모르오. 아무튼 폐에 구멍이 뚫릴 만큼 달리는 일에는 기가 막힌 녀석이니까. 그리고 또 어쩌면 피니 녀석과 부딪칠는지도 모르오. 그는 술에 취하면 길도 모르고, 길에 무엇이 있건 도무지 상관하지 않으니까. 손전등이나 칸델라는 있소? 어디를 가든 등불은 가지고 가야 하오. 달리면 안되오. 알겠소?"
미국인은 안개 속을 손으로 더듬어 자동차 쪽으로 다가가 손전등을 꺼낸 뒤 히버 핀 술집 저쪽의 어둠 속으로 갔다. 그는 앞쪽에서 나는 발소리와 여러 사람의 떠들썩하는 소리를 의지하여 걸었다. 백 야드 떨어진 곳에 사나이들이 모여 중얼거리고 있었다.
"조심해서 하시오."
"아아, 차마 볼 수가 없군."
"안돼, 흔들면 안돼."
흐느적거리는 물체를 지고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며 무럭무럭 김을 일으키는 한무리의 사람들과 부딪쳐 미국인은 나동그라졌다. 그는 업혀가는 피투성이의 흙빛 얼굴을 언뜻 보았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가 그의 손전등을 탁 쳤다.
본능적으로 히버 핀 술집의 위스키 빛 등불을 찾아내자 그들은 늘 가던 낯익은 항구를 향해 몰려갔다.
뒤에서 어렴풋한 모습이 나타나더니 소름끼치는 곤충같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야!" 하고 미국인은 소리쳤다.
"우리들이오. 자전거를 끌고왔소. 소문은―우리가 충돌했다고―" 쉰 목소리가 대답했다.
손전등이 그들의 모습을 비췄다. 미국인은 깜짝 놀랐다. 한 순간 전지가 끊어졌다.
그러나 그 직전에 태평스럽게 터덜터덜 걸어오는 마을의 두 젊은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앞쪽 라이트와 꼬리등이 없는 낡아빠진 검은 자전거를 끌고 있었다.
"뭐라고요......?" 미국인이 말했다.
그러나 두 젊은이는 사고가 난 물건을 끌고 총총히 사라졌다. 안개가 두 사람의 모습을 감쌌다. 미국인은 인기척없는 한길에 혼자 남게 되었다―불 꺼진 손전등을 든 채.
그가 히버 핀 술집의 도어로 들어섰을 때 그들의 이른바 <시체>는 둘 다 카운터 위에 뉘어 있었다. 미국인이 들어가자 노인이 뒤돌아보며 말했다.
"카운터 위에 뉘어놓았소."
사람들이 한 줄로 몰려서 있었다―지금은 술을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길을 막아섰으므로 의사는 안개 짙은 밤길을 마구 달려 사고를 일으킨 하나의 <시체>에서 또 하나의 <시체>로 가기 위해 몸을 비스듬히 하고 나가야 했다.
"이 사람은 패트 노런이오" 하고 노인이 속삭였다."―지금은 실업 상태에 있지요. 저쪽은 메이누스에서 온 피비라는 사람인데, 과자며 담배를 갖고다니며 팔았지요."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죽었습니까, 의사 선생님?"
"좀 조용히 할 수 없습니까?"
의사는 두 개의 등신대 대리석상을 어떻게든 동시에 완성하려고 애쓰는 조각가 같았다.
"피해자 한 사람은 바닥에 내려놓읍시다!"
"바닥은 무덤이오." 히버 핀이 말했다."바닥에 내려놓으면 죽음의 신에게 사로잡히고 맙니다.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숨결로 따뜻해질 수 있는 지금의 위치에 놓아두는 편이 나을 거요."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이런 사고를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자동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합니까? 이 두 사람은 각각 자전거를 타고 있었을 뿐이란 말이지요?" 미국인이 당황하며 조용히 물었다.
"그렇소!" 하고 노인은 외쳤다."땀을 뻘뻘 흘리며 마구 달리면 60킬로미터의 속력을 낼 수 있지. 내리막으로 된 미끄러운 길이라면 자전거를 타고도 90이나 95킬로미터쯤 낼 수 있소. 아마 이 두 사람은 그런 식으로 달려왔겠지요. 앞 라이트도 꼬리등도 없이―"
"그런 짓을 금지하는 법률은 없습니까?"
"그 따위 법률이 무슨 소용 있소! 이 두 사람은 그런 식으로 불도 켜지 않은 채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마구 달렸겠지요. 서로 반대 방향에서 달려왔으나 같은 쪽을 달리고 있었을 거요. 언제나 반대쪽을 달리는 편이 안전하다고들 말하지요. 이 젊은이들을 보시오. 관청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규칙에 완전히 당하고 말았으니. 왜냐고요? 모르겠소? 한쪽 사람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나 또 한쪽 사람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오! 관리가 쓸데없는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때문에 이 두 사람은 다 죽어가고 있단 말이오!"
"다 죽어가고 있습니까?" 미국인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젊은이, 생각 좀 해보시오! 킬코크에서 메이누스로 가는 길을 달리고 있던 혈기왕성한 두 젊은이 사이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었겠소? 안개지! 온통 안개였단 말이오! 두개골의 충돌을 피하게 해주는 것이란 안개밖에 없었소. 그러니 저 두 사람이 저렇게 십자로에서 충돌한 장면을 생각 좀 해보오. 볼링장에서 핀이 서로 부딪칠 때와 똑같았겠지. 와장창 하고! 그런 식으로 9피트 높이에서 서로 다정한 친구가 만나듯 요란하게 이마를 맞부딪쳐 공기를 진동시킨 다음 자전거는 두 마리의 수코양이처럼 맞붙었겠지.
그리하여 두 사람은 나동그라져, 검은 천사를 찾아헤매고 있단 말이오."
"설마 이 두 사람은―"
"설마라니? 작년만 해도 온 아일랜드 자치령에서 치명적인 충돌사고가 없었던 날은 하루도 없었소!"
"그럼, 아일랜드에서 해마다 3백 명 이상이 자전거 충돌사고로 죽는단 말입니까?"
"틀림없는 사실이오, 억울하지만."
"나는 밤에는 절대로 자전거를 타지 않기로 했지요. 반드시 걸어다니기로 했답니다."
히버 핀이 <시체>를 흘끗 보며 말했다.
"하지만 걸어다녀도 괘씸한 자전거에 치이는 수가 있지 않소!" 하고 노인은 말했다."타고 가건 걸어가건 얼빠진 녀석은 언제나 상대방에게 재난의 숨결을 훅훅 뒤집어씌우거든. 손을 흔들며 <여어!> 하고 말하기도 전에 이쪽을 깔아뭉개버린단 말이오. 어쨌든 어엿한 사나이가 다치거나, 완전히 병신이 되어버리거나, 또는 그보다 더 비참한 꼴을 당하는 것을 나는 많이 보아왔소. 평생을 두통으로 고통받는 사람도 보았지요." 노인은 눈꺼풀을 떨면서 감았다."당신은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없소?―사람이란 그런 정교한 도구나 기계를 다루게는 되어 있지 않다고 말이오."
"해마다 3백 명이나 사고로 죽다니!" 미국인은 어이없는 듯 말했다.
"그 숫자에는 반달 동안에 몇천 명이나 생기는 <보행자의 부상>은 포함되어 있지 않소. 그런 사람들은 욕을 마구 퍼부으며 자전거를 늪 속에 처박은 다음, 정부의 보조로 폐인이나 다를 바 없는 몸을 치료받지요."
"여기 이렇게 서서 이야기하고 있어도 될까요?" 미국인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몸짓을 하며 피해자 쪽을 가리켰다."병원은 없습니까?"
"달이 없는 밤에는 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가는 것이 가장 좋지요. 위험한 한길 따위는 안됩니다. 내가 이렇게 50대까지 살아 있는 것은 모두 그 덕분이랍니다" 하고 히버 핀이 말했다.
"아아......" 하고 사람들은 안절부절 못했다.
의사는 자기가 말을 너무 삼가고 있었음을 깨닫고, 사람들이 안절부절 못하는 것을 보고는 몸을 꼿꼿이 펴고 숨을 후유 토해낸 다음 모두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자아, 여러분!"
술집 안은 순식간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쪽 사람은―" 하고 의사는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타박상과 열상, 그리고 2주일 동안 계속되는 심한 두통. 그런데 저쪽 젊은이는―"
의사는 잠깐 눈살을 찌푸리며 한층 더 창백한 사나이를 보았다. 그 사나이는 피로 붉게 물들고 핏기가 하나도 없어 당장에라도 최후의 의식(儀式)을 받아야 할 듯한 모습이었다.
"뇌진탕을 일으켰습니다."
"뇌진탕!"
조용한 바람이 일었다가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지금 곧 메이누스 병원으로 보내면 가망이 있습니다만...... 어느 분이든 자동차를 내주실 수 없을까요?"
모두들 일제히 미국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의식의 바깥에 있다가 깊은 내부의 핵심으로 이끌려들어오자 ???동요를 느꼈다. 그는 히버 핀 술집의 정면을 생각하고 얼굴을 붉혔다. 거기에는 지금 17대의 자전거와 한 대의 자동차가 있다. 그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줄 분이 나왔소! 여러분, 서둘러서 이 사람을 들어냅시다―가만히!―이 친절한 분의 자동차로!"
사나이들은 그 몸을 들어올리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때 미국인이 헛기침을 했으므로 사나이들의 손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멎었다. 미국인이 모두에게 손을 흔들며 술잔 모양으로 꾸부린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가는 것을 그들은 보았던 것이다. 모두들은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그 몸짓이 끝나기 전에 술 거품이 카운터에 흘렀다.
"도로를 위해 건배!"
그러자 ???부상을 입은 사나이까지 갑자기 의식을 되찾아 치즈 같은 얼굴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술잔에 살짝 손을 댔다.
"여보게...... 말 좀 해주게......"
"......왜 그러나? 뭐라고?"
그러자 사나이의 몸이 카운터 위에서 들어올려졌다―잠재적인 자국을 뒤에 남기고. 술집 안에는 미국인 청년, 의사, 제정신을 차린 젊은이,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두 친구만이 남게 되었다. 밖에서는 이 큰 충돌사고로 중상을 입은 사람을 독지가의 자동차로 날라가는 사나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사가 말했다.
"술잔을 비우시지요, 미스터―누구시더라?"
"맥가이어라고 합니다" 하고 미국인이 말했다.
"틀림없이 아일랜드 사람인 모양이야!" 누군가가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하고 미국인 청년은 생각하며 무감동하게 술집 안을 둘러보고는 정신을 차린 부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의자에 앉아 사람들이 다시 와서 자기를 둘러싸주기를 기다리며 피로 얼룩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대의 자전거가 신파 연극의 소도구처럼 도어 가까이에 기대어져 있었다. 밖에서는 어둠이 믿을 수 없으리만큼 짙은 안개를 안고 사람들이 제각기 목청과 환경에 어울리는 목소리로 낭랑하게 억양과 균형을 이루어가며 주고받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하고 맥가이어라고 자기 소개를 한 미국인은 생각했다. (나는 아일랜드 피를 많이 받고 있긴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없어......)
"의사 선생님." 카운터 위에 돈을 놓으며 그는 엉겁결에 말했다."자동차가 전복하거나 자동차끼리 충돌하는 사고도 이따금 있습니까?"
"이 거리에는 없습니다!" 의사는 경멸하듯이 동쪽으로 턱을 주억거리며 말했다."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면 더블린이야말로 본 고장이지요!"
나란히 술집 안을 가로질러나올 때 의사는 미국인의 팔을 붙잡았다―마치 그의 운명의 실을 바꾸는 비밀을 일러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의사가 팔을 붙잡은 채 그의 귀에 대고 무언가 속삭일 때, 미국인은 조금 아까 마신 맥주가 좌우로 조절해야 하는 이동추(移動錘)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맥가이어 씨, 당신은 아일랜드에서 자동차를 운전한 일이 거의 없으시지요? 그렇다면 들어보시오. 안개 속을 뚫고 메이누스로 자동차를 달릴 때에는 그저 날 듯이 달리게 하는 게 가장 좋소. 아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야 하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자전거를 탄 사람이나 소들이 겁을 먹고 좌우로 길을 비켜주니까요. 천천히 운전하면 그들이 살살 다가오기 때문에 몇천 명, 몇십 마리나 치어죽일는지 모르오―상대방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자동차가 다가오면 라이트를 꺼야 합니다. 라이트를 끈 채 맞스치고 지나가면 서로가 안전하거든요. 그 괘씸한 라이트 때문에 눈이 부셔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보기에도 무참하게 치어죽이게 되니까요. 이제 아셨지요? 두 가지 점이 중요합니다. 첫째는 속력, 둘째는 자동차의 모습이 앞에 희미하게 나타나면 라이트를 끌 것!"
도어 앞에서 미국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그 경상자가 의자에 편안히 앉아 흑맥주를 마시여 이것저것 생각하고 채비하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올 때 콧노래를 부르며 맹렬한 기세로 내리막길을 마구 달려 십자로 가까이에 이르렀는데―"
밖으로 나와 뒷좌석에서 나직이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 또 하나의 부상자를 태운 자동차에 올라타자 의사는 마지막 충고를 했다.
"언제나 잊지 말고 모자를 써야 합니다. 밤에 길을 걷고 싶으면 앞으로는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모자를 쓰면 심한 편두통에 걸리지 않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케리나 모러 또는 성격이 불 같은 바보 녀석들이 저쪽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온다 해도 말입니다. 비록 걷고 있다 해도 이런 녀석들은 위험하거든요. 아시겠지요? 아일랜드에서는 보행자에게도 규칙이 있단 말입니다. 밤에 모자를 쓸 것―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미국인은 아무 생각 없이 좌석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그날 더블린에서 사온 갈색 트위드 모자를 꺼내어 썼다. 모자 모양을 고치며 그는 창 밖의 들끓는 듯한 어두운 안개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조용히, 그러나 어딘지 조용함과는 조금 다른 인기척이 끊긴 한길이 그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모든 아일랜드의 몇백 마일이나 되는 한길의 천 개도 더 되는 십자로가 안개에 뒤덮여 있었다―그 속을 트위드 모자를 쓰고 회색 머플러를 두른 천 개의 유령이 노?罐0?소리치며, 기네스(더블린 시에 있는 양조 회사)의 흑맥주 냄새를 물씬 풍기며 날 듯이 달려가는 모습을 그는 보았다.
그는 눈을 깜박거렸다. 유령들이 사라졌다. 한길은 인기척 하나 없이 캄캄한 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이 가로놓여 있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감자 맥가이어라는 미국인은 스위치를 돌려 스타터를 밟았다.
작은 쥐 부부
The Little Mice
"참으로 묘한 사람들이야, 저 멕시코 인 부부는" 하고 나는 말했다.
"어떤 점에서요?" 하고 아내가 물었다.
"달그락 소리 하나 내지 않으니 말이오. 귀를 기울여보구료"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아파트에 둘러싸인 구석진 집으로, 거기에 또 한 채의 집이 우리 집과 붙여 세워져 있었다. 아내와 나는 이 집을 살 때 바람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실이 맞붙어 있는 증축된 그 집을 세놓았었다. 그 바람벽에 귀를 대고서 듣고 있노라면 우리들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부부는 틀림없이 집에 있어. 3년 전 여기로 이사온 이후, 남비 소리 하나, 말소리 하나, 전등 스위치 켜는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으니 대체 저 사람들은 집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나는 속삭였다.
"나는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아내가 말했다.
"전등을 늘 하나만 켜고 있단 말이오. 그것도 언제나 똑같이 어두컴컴한 25와트짜리 파란 전구를 거실에 켜고 있을 뿐이거든. 지나가다가 현관을 들여다보면 그는 틀림없이 안락의자에 앉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지. 그녀 역시 거기에 있어―또 하나의 안락의자에 앉아 말 한 마디 없이 그를 바라보며 두 사람 모두 꼼짝도 하지 않소."
"얼른 보면 마치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거실이 그렇게 어두우니...... 하지만 찬찬히 보면 눈이 어둠에 익숙해짐에 따라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여요." 아내가 말했다.
"언젠가는 뛰어들어가 불을 켜고 마구 소리를 질러주어야겠어. 사실 남인 나조차 그런 침묵을 견딜 수가 없는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을 견디고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설마 벙어리는 아니겠지. 안 그래?" 나는 말했다.
"매달 집세를 내러올 때'안녕하십니까'하고 그는 말하는걸요."
"그밖에는?"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말해요."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골목에서 마주치면 웃음띠며 달아나버리더군."
아내와 나는 앉아서 책을 읽기도 하고, 라디오를 듣기도 하고, 잡담을 하며 저녁 한때를 보낸다.
"그들은 라디오를 가지고 있을까?"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전화도 없어요. 집 안엔 책도 잡지도 신문도 아무것도 없어요."
"정말 한심하군!"
"너무 그러지 마세요."
"내가 너무할 것은 하나도 없소. 하지만 어두운 방 안에 앉아 2년이건 3년이건 말도 하지 않고 라디오도 듣지 않고 책도 읽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여태까지 고기 굽는 냄새도 달걀 프라이 냄새도 난 적이 없소. 정말 이상해. 그들이 잠자리로 들어가는 소리조차 들어본 일이 없는 것 같아."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여보."
"그렇다면 멋들어지게 성공한 셈이지!"
나는 부근을 한 바퀴 산책하기 위해 나갔다. 상쾌한 여름의 황혼 무렵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들의 현관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캄캄하고 조용했다. 앉아 있는 어렴풋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고, 그 작은 푸른 전등이 켜져 있었다. 나는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 거기에 서 있었다 그 자리를 뜨려고 발길을 돌리다가 문간에 서 있는 사나이의 모습을 알아차렸다―동그스름한 온화한 얼굴로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대답이 없었다. 다음 순간 그는 등을 돌려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아침이 되었다. 몸집이 작은 그 멕시코 사람은 7시에 혼자 집에서 나왔다. 방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골목을 잰걸음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8시에 여자가 나왔다. 통통한 몸을 검은 코트로 감싸고 미장원에서 파마한 머리에 검은 모자를 쓰고서 신중한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몇 년 동안이나 서로 말없이 일터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디서 일하고 있지?" 나는 아침식사를 하며 아내에게 물었다.
"남편은 US 강철회사의 용광로에서 일하고 있어요. 아내는 어느 양장점 2층에서 재봉틀을 밟고 있다더군요."
"고된 일들을 하고 있군."
나는 내가 쓴 소설을 몇 페이지 타이프치고 한 번 읽어본 다음 잠깐 쉬었다가 다시 타이프를 쳤다. 오후 5시에 통통한 멕시코 여자가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급히 안으로 들어가더니 문에 단단히 쇠를 잠갔다.
남자는 6시 정각에 날 듯이 돌아왔다. 그러나 부엌문 앞에 이르자 몹시 느릿해졌다. 그리고는 통통한 작은 쥐가 조용히 문을 긁듯이 손으로 창문을 박박 긁고 나서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나와 그를 안으로 넣었다. 보아하니 그들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기름이 졸아드는 소리도, 접시 소리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작은 푸른 전등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늘 저런 식이에요―집세를 지불하러 올 때도 가만히 노크하기 때문에 나는 잘 알아듣지 못해요. 어쩌다가 창문 쪽을 보면 거기에 와 있는 거예요. 도어를 <조용히 씹듯> 하며 얼마 동안이나 거기에 서서 기다렸는지 알 수가 없어요" 하고 아내는 말했다.
이틀 밤이 지난 어느 맑게 갠 7월 저녁 무렵 키 작은 멕시코 사나이가 뒤쪽 포치로 나오더니 뜰을 가꾸고 있는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미치광이요!" 그리고 나의 아내를 보며"당신도 미치광이요!" 그는 통통한 손을 조용히 저으며 계속 말했다."당신들은 내 맘에 안 들어요. 너무 소리를 크게 낸단 말이오. 당신들은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미치광이요!"
그리고 나서 그는 작은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8월, 9월, 10월, 11월. <작은 쥐 부부>―우리는 그들을 이렇게 불렀다―는 침침한 보금자리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한 번은 나의 아내가 집세 영수증과 함께 낡은 잡지를 몇 권 그에게 준 일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정중히 받았다―미소를 짓고 고개를 한 번 숙이며, 그러나 말없이. 한 시간쯤 뒤에 아내가 보았더니 그는 그 잡지를 마당의 휴지 태우는 난로 속에 쑤셔넣고 성냥을 긋고 있더라고 한다.
다음날 그들은 집세를 석 달치 선불했다. 이렇게 하면 석 달에 한 번만 우리와 얼굴을 마주해도 된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한길에서 그와 만나면 그는 가공의 친구에게 인사하기 위해 반대쪽으로 급히 건너갔다. 여자 쪽도 마찬가지로 당황한 듯 어색한 미소를 띠고 고개를 까딱한 다음 달아나버렸다. 그녀와는 20야드 이내에 가까이 서본 적도 없다. 집에 연관(鉛管)을 갈아끼워야 하게 되자 그들은 우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몰래 연관공을 데리고 왔다. 그 연관공은 아마도 손전등을 켜고 일을 한 모양이었다.
"정말 괘씸하기 짝이 없습니다!" 골목에서 나와 마주친 연관공은 말했다."그런 사람들은 처음 보았습니다. 소켓에 전구 하나 끼워져 있지 않더군요. 전구가 어디 있느냐고 내가 물었더니, 제기랄, 그저 싱글벙글 웃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밤에 잠자리에 누워 <작은 쥐 부부>에 대해 생각했다. 어디서 왔을까? 옳지, 멕시코였지. 어느 지방일까? 작은 농촌―어느 강가의 마을이었을까? 아무리 보아도 도회지에서 온 것 같지는 않다. 별이 반짝이고 밤과 낮이 정상적으로 되풀이되는, 언제 달이 뜨고 언제 달이 지고, 언제 해가 뜨고 언제 해가 지는지 알 수 있는 고장이겠지. 그러다가 지금은 이런 곳에서 살게 되었겠지. 고향에서 멀리멀리 떨어진 고장, 견디기 어려운 도회지에서. 그는 지옥 같은 용광로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그녀는 몸을 구부리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재봉틀을 밟고 있다. 그러다가 이 구석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시끄러운 거리를 지나서. 덜컹거리며 달리는 전차를 피하고 붉은 앵무새같이 울부짖는 길가의 술집을 피하며 수많은 새된 목소리 사이를 누비고 그들은 한달음에 집으로 돌아온다―단둘이 있을 수 있는 거실로, 푸른 전등 아래로, 푹신한 의자로, 침묵의 세계로. 나는 이따금 생각해 보았다. 이슥한 밤에 내 침실의 어둠 속에 손을 뻗어본다. 그러면 바람벽의 벽돌이 손에 닿으며 귀뚜라미의 울음 소리와 달빛 아래를 흐르는 강물 소리와 가냘픈 기타 소리에 맞추어 가만히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온다―고 느꼈다.
12월의 어느 날 밤 늦게 이웃 아파트에 불이 났다. 불길이 활활 타올라 벽돌이 사태를 이루며 쓰러졌고, <작은 쥐 부부>가 살고 있는 조용한 집 지붕에 불꽃이 마구 떨어졌다.
나는 그 집의 도어를 쾅쾅 두드렸다.
"불이요, 불!" 나는 소리쳤다.
그들은 파란 전등이 켜져 있는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더욱 세차게 두들겼다.
"들리지 않소? 불이 났단 말이오!"
소방차가 왔다. 마구 타오르는 추녀에 물을 끼얹었다. 벽돌은 여전히 무너져내렸다. 그 중 네 개가 <작은 쥐 부부>의 집에 떨어져 구멍을 냈다. 나는 지붕으로 올라가 불길을 밟아 끄고 다시 기어내려왔다. 얼굴이 더러워졌고, 두 손에 상처를 입었다. <작은 쥐 부부>네 집의 도어가 열렸다. 그리고 말이 없는 키 작은 멕시코 인 부부가 문간에 나타났다. 몸을 빳빳이 하고 우뚝 서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좀 들어갑시다! 댁의 지붕에 구멍이 뚫렸소. 불티가 침실에 떨어졌을지도 모르오!"
나는 도어를 활짝 열고 그들을 밀치며 들어갔다.
"들어가면 안되오!" 하고 키 작은 사나이가 외쳤다.
"아아!" 키 작은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망가진 장난감처럼 뱅그르르 몸을 돌렸다.
나는 손전등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나이가 나의 팔을 붙잡았다.
그가 토해내는 숨결 냄새가 났다.
그리고 내가 들고 있는 손전등의 빛이 온 방 안을 꿰뚫었다. 빛은 홀에 늘어서 있는 수백 개의 술병에, 부엌 선반에 얹혀 있는 병에, 거실 선반에 세워진 수십 개의 병에, 침실의 옷장이며 선반에 늘어놓은 더욱 많은 술병에 부딪쳐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났다. 어느 쪽에 대해서 더 놀랐는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다―침실 천장에 뚫린 구멍에 대해서인지 수많은 술병이 무한히 반짝이고 있는 것에 대해서인지. 나는 그 숫자를 어림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매맞아죽고, 저버려지고, 그 옛날의 어떤 병에 걸려 죽은 반짝반짝 빛나는 거대한 투구벌레의 침입을 연상시켰다.
침실로 들어가자 등 뒤의 문간으로 몸집이 작은 그 부부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고 시선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손전등을 반짝이는 술병에서 노란 천장의 구멍으로 옮겨 주의깊게 촛점을 맞추며 계속 비췄다.
통통한 여자는 울기 시작했다. 조용히 울고 있었다. 우리는 세 사람 모두 꼼짝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나갔다. 문을 여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오전 6시에 그들은 골목 중간쯤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거의 빈 거나 다름없이 ??幟맛甄?가방을 들고. 나는 그들을 불러세웠다. 말을 걸어보았다. 오랜 친구가 아니냐고 나는 말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고. 당신들은 불이 난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으며, 지붕에 뚫린 구멍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다고 나는 말했다. 당신들은 죄없는 방관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역설했던 것이다. 지붕은 내가 고칠 것이며, 비용을 당신들에게 부담시키지 않겠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말하고 있는 동안 집과 눈 앞의 골목어귀를 뚫어지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말을 끊자 두 사람이 동시에 이젠 가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한 듯 골목 어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은 달리기 시작했다―나에게서 도망치듯이. 전차와 버스와 자동차가 오가는 시끄러운 한길이 미로처럼 이리저리 뻗어있는 거리를 향해 급히 사라졌다―자랑스러운 듯이 고개를 쳐들고 이쪽은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아주 우연하게 나는 그들을 다시 만났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어느 날 저녁때 황혼의 거리를 조용히 달리고 있는 몸집이 작은 사나이의 모습을 앞쪽에서 보았던 것이다. 나는 일종의 호기심으로 그의 뒤를 따라?맘年? 그가 길을 꺾어들어가면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다섯 구간쯤 떨어진 곳에 있는 어떤 작은 하얀 집의 도어를 그는 가만히 긁었다. 도어가 열려 그가 들어간 다음 도어는 곧 닫히고 자물쇠가 잠겼다. 도회지 집들의 지붕 위에 어둠이 내려앉자 작은 등불이 파란 안개처럼 조그만 거실에 켜지는 것이 한길에서 보였다. 보인다고 생각했으나, 아마 그것은 상상이었는지도 모른다―거기에 두 개의 그림자가 비쳤다. 그는 그 방 한쪽 구석의 특별한 의자에 앉고, 그녀는 또 한쪽 의자에 앉았을 것이다―어두컴컴한 방에 그들은 앉아 있을 것이며, 의자 뒤의 선반 위에는 두세 개의 병이 놓여 있을 것이다. 달그락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말 한 마디 주고받지 않으며 쥐죽은 듯 조용하게.
나는 노크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그 앞을 지나갔을 뿐이다. 나는 한길을 걸어가며 앵무새처럼 아우성치는 술집의 시끄러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신문 한 부와 잡지와 25센트짜리 책 한 권을 샀다. 그리고 온 집 안에 불이 켜지고 식탁에 따뜻한 요리가 놓여 있는 나의 집으로 돌아갔다.
황혼의 바닷가
The Shore Line at Sunset
밀려오는 파도에 무릎까지 담그고 떠내려오는 나뭇조각을 손에 든 채 톰은 귀를 기울였다.
바닷가 고속도로가에 외로이 서서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집은 벌써 쥐죽은 듯 조용했다. 옷장을 뒤적거리는 소리도, 슈트케이스의 열쇠 잠그는 소리도, 병을 모조리 깨뜨리는 소리도, 마지막 이별을 하고 문을 닫는 기운찬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티코는 창백한 모래 위에 서서 철망으로 만든 체를 흔들고 있었다. 누군가가 떨어뜨리고 갔을 잔돈을 모래 속에서 체질하여 거두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톰 쪽은 보지도 않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런 여자 따위는 가고 싶다면 가라지!"
이것은 매년 있는 일이다. 일주일 또는 한 달쯤 그들 집의 창가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현관 난간에는 싱싱한 수국 화분이 놓이고, 도어라는 도어와 계단은 모조리 새로 페인트 칠이 입혀진다. 빨랫줄에 널리는 옷도 줄무늬 팬티에서 자루 모양의 드레스로, 또는 하얀 파도 무늬가 그려진 손으로 만든 멕시코 드레스로 바뀌는 것이었다. 집 안에 들어가 보면 벽에 걸린 마티스의 복제품도 이탈리아 르네상스 모조품으로 바뀌어 있다. 이따금 여자가 혼자 바람에 나부끼는 밝은 노란 빛깔의 깃발 같은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올 때도 있다. 그 깃발은 때로는 검은빛일 때도 있고 때로는 빨간빛일 때도 있다. 여자의 키도 때로는 클 때도 있고 작을 때도 있다. 그러나 한꺼번에 여자가 하나 이상 입은 적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같은 날이 오는 것이다......
제각기 휴가를 마치고 벌써 오래 전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남기고 간 수천만 개의 발자국을 체로 거르고 있는 티코 옆에 수북이 쌓여가고 있는 나뭇 조각 더미에 톰은 지금 막 건져온 또 하나의 조각을 얹었다.
"티코,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레일리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잖아(1880년대에 패트 루니가 노래한 코믹송
에서 비롯된 말로, 사치스럽게 산다는 뜻)!"
"레일리라는 녀석을 나는 싫어해, 티코."
"그런 말 하지 말고 어서 일이나 하게!"
톰은 한 달 뒤의 집을 상상하고 있었다. 화분에는 먼지가 앉고, 벽에는 액자 자국이 하얗게 나고 바닥에는 모래의 융단뿐. 방이란 방은 모두 바람 속의 조?籌낮?소리없는 메아리를 칠 뿐이리라. 오늘 밤도, 그 다음에 오는 밤도, 또 그 다음에 오는 밤도 제각기 자기 방에 틀어박혀 그와 티코는 침대 속에서 끝없는 바닷가에 자국도 남기지 않고 멀리멀리 사라지는 파도 소리를 들을 것이다.
톰은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해엔가 그는 귀여운 아가씨를 자진해서 데려온 일이 있었다. 나무랄 데 없는 처녀라는 것을 알면서, 그리고 두 사람이 결코 결혼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뚜렷이 알면서. 그러나 그의 여자들은 자기를 잘못 안 것이라며, 그런 역할은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동이 트기 전에 몰래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 나은 편이고, 티코의 여자들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진공 소제기와 비슷했다. 소름이 끼칠 만큼 침울한 소리로 으르렁거리며 뛰어다니다가 마지막에는 실 조각 하나 남기지 않았으며, 진주를 빼낸 진주조개 꼴로 만들어버린다. 나갈 때 가방을 들고 가는 모습도 티코가 귀여워하던 강아지의 턱을 억지로 벌리고 이빨을 세어볼 때와 똑같았다.
"올해는 지금으로선 여자가 네 명뿐이었지."
"알았어, 레펠리. 샤워가 있던 자리를 가르쳐줘" 하고 티코는 웃었다.
"티코―" 톰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나는 생각해 보았는데, 우리는 서로 헤어지는 편이 나을 것 같아."
티코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각자 헤어지는 편이 운이 열리지 않을까 싶어" 하고 톰은 빠른 어조로 말했다.
"그런 말을 하고 싶겠지만, 내 말 좀 들어보라구." 티코는 큰 손으로 체를 움켜쥐며 천천히 말했다,"자네와 나는, 우리는 서기 2천 년이 되어도 여기 있어야 해. 우리는 그때까지도 머리가 조금 돈 얼간이 바보란 말이야. 둘이서 나란히 햇님에게 등뼈를 태우고 있는 거야.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톰, 너무 늦었어. 그 점을 명심하고 아무 말도 하지 말게."
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상대방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는 여기서 떠나려 생각하고 있어―다음 주일에."
"그만해. 그만하라니까. 어서 일이나 하세."
티코는 화가 나서 모래를 마구 뒤집어엎었다. 덕분에 43센트를 얻었다. 10센트짜리 은화와 1센트짜리 동전, 5센트짜리 니켈을 모래에서 건져냈다. 핀볼(미국의 슬로트 머신. 득점하면 숫자의 전등이 켜진다) 기계에 불이 모두 켜진 것처럼 철망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잔돈을 그는 들여다보았다.
톰은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무언가가 일어났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저 멀리 모래밭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달려오면서 외치고 있는 것은,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은 한 남자아이였다. 2백 야드쯤 떨어져 있었다.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어떤 느낌이 문득 톰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는 두 손을 꼭 쥐고 기다렸다.
"여보세요!"
소년은 헐떡거리며 뛰어와 뒤쪽의 저 먼 바닷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상한 여자가 혼자서 북쪽 바위에 누워 있어요."
"여자라고?" 하고 티코는 말하며 웃기 시작했다."그럴 리가......"
"<이상한 여자>라니, 어떤 뜻이냐?" 하고 톰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맑셀? 굉장히 이상해요!" 소년은 소리쳤다.
그의 눈이 크게 뜨여져 있었다.
"다시 말해서 물에 빠졌었단 말이냐?"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물에서 올라왔겠지요. 바닷가에 누워 있어요. ?맑셀? 정말 이상해요." 소년은 우울한 목소리로 다시 북쪽을 돌아다보며 말했다."물고기의 꼬리 같은 것이 달려 있어요."
티코는 웃었다.
"저녁도 먹기 전에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거짓말이 아니니 빨리 ?맑셀?" 소년은 펄쩍펄쩍 뛰며 소리쳤다.
소년이 달려가기 시작하다가 따라오는 기척이 없음을 알고는 낙심하며 뒤돌아보았다.
톰이 느낀 것은 자기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난으로 여기까지 달려왔을까, 티코?"
"더 시시한 일로도 이보다 더 먼 곳까지 달려가지."
톰은 걷기 시작했다.
"?맛? 얘야."
"고맙습니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소년은 달렸다. 바닷가를 북쪽으로 20야드쯤 간 곳에서 톰은 뒤돌아보았다. 애꾸눈에 사팔뜨기인 티코가 어깨를 움츠리더니 나른한 듯이 손의 모래를 털고 이쪽을 항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황혼의 바닷가를 그들은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햇볕에 그을린 그들의 피부는 햇빛으로 빛깔이 바랬고, 희끗희끗한 머리털도 짧게 깎은 덕분에 눈에 잘 띄지 않아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였다. 잔잔한 바람에 바다는 느릿한 리듬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만일 거기에 ?린?정말이라면 어떻게 하지? 바다가 지금까지 인간에게 보이지 않았던 어떤 것을 밀어올렸을까?" 하고 톰이 말했다.
그러나 티코가 대답할 틈도 없이 톰은 서둘러 걸어갔다. 게며 성게며 해초며 조약돌이 널려 있는 바닷가 저 멀리로 그의 마음은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바다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지금까지 들은 갖가지 이름이 밀려오는 파도와 함께 돌아왔다."낙지" 하고 파도는 속삭였다."대구, 상어" 하고 파도는 속삭였다. 가자미와 해마(海馬), 돌고래와 백경(白鯨), 바다표범―이상한 느낌을 주는 이런 이름들을 듣고, 대체 그것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늘 상상했던 것이다. 안전한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파도가 넘실대는 깊은 바다 위에 이러한 것들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죽을 때까지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모두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이름을 가지고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림에 그려진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9천 마일을 달리는 군함에 몸을 싣고 어느 날엔가 거기에 간다면 그러한 것들이 보이겠지 하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어서 빨리 가세요. 가버렸을지도 몰라요."
소년은 다시 돌아와 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침착해라, 꼬마야" 하고 티코는 말했다.
그들은 북쪽 바위 가까이에 이르렀다. 또 하나의 남자아이가 서서 발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래 위에 있는 것을 똑바로 보기가 어쩐지 두려웠다. 그렇다고 전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톰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우선 거기에 서 있는 소년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창백했으며, 숨도 쉬지 않고 있는 듯했다. 이따금 생각난 듯이 숨을 쉬기는 했으나, 시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래 위의 것을 보면 볼수록 시선이 차츰 멍청해지며 넋이 빠지는 듯했다. 파도가 운동화를 적셔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깨닫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톰은 소년에게서 모래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 얼굴은 다음 순간 소년의 얼굴과 똑같아졌다. 두 손은 양쪽 겨드랑에서 똑같은 곡선을 그렸고, 입이 천천히 벌어지더니 반쯤 열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빛깔이 엷은 그 눈은 너무나도 놀라 더욱 더 하얗게 되었다.
해는 수평선 바로 위에 걸려 있었다.
"큰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버린 다음 이 여자가 있었어요" 하고 아까의 소년이 말했다.
그들은 거기에 누워 있는 여자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길었다. 모래 위에 흩어져 그것은 거대한 하프의 줄 같았다. 그 줄을 파도가 밀려와 들어올렸다가는 다시 가라앉혔다. 그때마다 그것은 다른 모양의 부채와 그림자를 만들었다. 머리카락의 길이는 5, 6피트쯤 되었고, 지금은 물에 젖은 모래 위에 엉겨서 열매처럼 초록빛으로 퍼져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남자들은 넋을 잃고 허리를 굽혔다.
여자의 얼굴은 하얀 모래의 조각(彫刻). 바닷물방울이 반짝여 우유빛 장미꽃을 적시는 한여름의 비를 연상시켰다. 그 얼굴은 창백한 하늘에 하얗게 떠오른 신비스러운 낮의 달과 같았다. 살갗은 우유빛 대리석. 관자놀이 언저리에 정맥이 희미한 보랏빛으로 두드러져 있었다. 두 눈을 덮은 속눈썹은 하늘색 가루를 뿌려놓은 듯하였다. 그 우아한 발(簾) 밑에서 두 눈은 조금 벌어져 마치 주위에 둘러선 남자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입술은 파랗게 반짝이는 바다의 장미. 아랫입술은 두텁고, 그 위에 윗입술이 꼭 다물어져 있었다. 하얀 목이 가냘프게 보였고, 두 젖무덤은 작고 하얗다. 밀려오는 파도에 덮였다가는 다시 밀려가는 파도에 나타나곤 했다. 젖무덤에는 젖꼭지가 반짝였으며, 온 몸이 놀라우리만큼 새하얀 것이 마치 조명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모래에 반사하는 희고 푸른 조명을. 물이 그녀를 적실 때마다 그 피부는 진주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하반신은 엷은 푸른빛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엷은 초록빛으로 바뀌었고, 엷은 초록빛은 짙은 초록빛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이끼낀 짙은 초록빛으로, 그리고 불꽃과 별을 박은 어두운 초록빛으로 바뀌며 떠올랐다가는 모래 위에 하얀 거품의 테를 두른 보석과 레이스 부채로 바뀌었다. 물 속에 사는 생물의 하반신을 몸에 붙이고 파도를 타고 바닷가에 밀려와 하반신이 소속하는 저 먼 바다로 이끌리며 모래 위에 누워 있는 진주빛 처녀, 크림 빛 물과 맑게 갠 하늘로 만들어진 하얀 여자, 이 생물의 상반신과 하반신은 그 이음새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감쪽같이 연결되어 있었다. 여자는 바다, 바다는 여자. 흠도 없고 이음새도 없고 주름도 없었다. 만일 어떤 장치가 있다면 그 장치는 한쪽 피가 다른 한쪽으로 흘러들어가 서로 가려낼 수 없으리만큼 완벽하게 섞이도록 했을 것이다.
"나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달려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스키프가 이 여자는 벌써 죽었으니 도움을 청해도 소용없다고 말했어요. 그럴까요?" 하고 아까의 소년은 목소리를 높이기가 두려운 듯 말했다.
"이 여자는 살아 있었던 일이 없었을 거야." 티코가 말했다."틀림없어." 그는 모두의 시선이 갑자기 자기에게 쏠린 것을 느끼고 얼른 ?牟눼?"어떤 영화 회사에서 촬영을 하다가 잊어버리고 간 강철 뼈대에 액체 고무로 살을 붙인 것일 거야. 이건 인형이야."
"아니에요. 진짜 사람이에요!"
"찾아보면 어딘가에 레텔이 붙어 있겠지." 하고 티코가 말했다.
"만지면 안돼요!" 하고 아까의 소년이 외쳤다.
"괜찮아."
티코는 여자의 몸을 뒤집으려고 손을 댔다. 그러나 그 손은 그 자리에 멎었고, 그의 얼굴 표정이 달라졌다.
"왜 그래?" 하고 톰이 물었다.
티코는 내밀었던 손을 들여다보며"내가 잘못 생각했어" 하고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말했다.
톰이 여자의 손목을 잡았다.
"맥박이 뛰고 있어."
"자네의 심장 뛰는 소리를 잘못 들은 건 아닌가?"
"모르겠어...... 어쩌면...... 어쩌면......"
여자의 상반신은 달빛 같은 진주, 파도 같은 크림―하반신은 멀고먼 고대의 거무스름한 초록빛 화폐가 수없이 많이 바람과 물에 나부끼며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듯했다.
"어딘가에 틀림없이 장치가 있을 거야!" 갑자기 티코가 소리쳤다.
"아니야." 역시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톰이 말했다."장치 따위는 없어. 정말 굉장해! 이런 굉장한 느낌은 생전 처음이야!"
그들은 천천히 여자를 둘러쌌다. 파도가 여자의 하얀 손에 닿자 다섯 개의 손가락이 조용히 부드럽게 물결쳤다. 그것은 마치 파도를 부르고 있는 듯했다. 파도로 하여금 더욱더 밀려와 손가락을 들어올리고, 손목을 들어올리고, 팔을 들어올리고, 목을 들어올리고, 마지막에는 몸을 들어올려 그 모든 것을 함께 바다 저쪽으로 날라가게 하려는 듯.
"톰, 우리 트럭을 이리로 몰고 오지 않겠나?" 하고 티코가 말했다.
톰은 움직이지 않았다.
"들리지 않나?" 하고 티코가 말했다.
"들었어. 하지만―"
"하지만 뭐야? 이것은 누구에게든 팔 수 있어. 옳지―대학이나 실 해변의 수족관이나...... 차라리 우리들이 오두막을 짓고 사람들에게 구경시키면 어떨까? 이봐, 톰!" 그는 톰의 팔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방파제까지 트럭을 몰고 오라니까. 3백 파운드쯤 얼음도 사오고. 물에서 올라온 것에는 무엇보다도 얼음이 필요하니까."
"그런 것은 생각도 못했어."
"머리를 써야 해. 빨리 갔다 오라니까!"
"나는 모르겠어, 티코."
"그게 무슨 뜻이지? 이것이 진짜가 아니란 말인가?" 그는 소년들을 쳐다보았다."너희들도 진짜라고 했지? 그렇다면 우리는 우물거릴 필요가 없잖아."
"티코, 자네가 직접 얼음을 사러가면 되잖아" 하고 톰이 말했다.
"누군가가 여기에 지켜서서 파도가 이 여자를 쓸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단 말이야!"
"티코!" 하고 톰이 말했다."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군. 어쨌든 자네를 위해 얼음을 사러가고 싶지 않네."
"그렇다면 내가 가지. 얘들아, 여기에 모래를 쌓아올려 파도가 밀려오지 못하도록 해라. 5달러씩 주마. 어서 시작해!"
지금은 수평선에 닿아 있는 햇빛을 받아 소년들의 옆얼굴은 핑크 빛 도는 청동색이었다. 청동빛 눈이 티코를 올려다보았다.
"안 들리니! 용연향(龍涎香)을 찾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란 말이야." 티코는 가까이의 모래언덕 꼭대기까지 달려올라가 큰 소리로 말했다."당장 시작해!"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북쪽 바위의 고독한 여자 옆에 지금은 톰과 두 소년이 남아 있고, 태양은 서쪽 수평선에 이미 4분의 1쯤 가라앉아 있었다. 모래와 여자와 핑크 빛 어린 황금색.
"줄이 나 있어요."
두 번째 소년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자기의 턱 밑에 가만히 손가락으로 줄을 그으며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의 하얀 턱 아래, 그 양쪽에 나 있는 보일락말락한 줄을 확인하기 위해 톰은 다시 몸을 굽혔다.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줄은 아가미가 있었던 자리일까? 지금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줄이 나 있었다.
"아름답군."
소년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등 뒤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모래언덕에서 훌쩍 날아올라갔다. 소년들은 깜짝 놀라며 뒤돌아보았다.
톰은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보니 소년들도 떨고 있었다. 자동차의 경적이 울렸다. 그들은 눈을 깜박거렸다. 갑자기 두려움을 느끼며 그들은 고속도로 쪽을 올려다보았다.
파도가 여자에게 밀려왔다. 맑고 새하얀 물결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톰은 턱을 끄덕거려 소년들을 옆으로 비키게 했다.
파도는 그녀의 몸을 1인치쯤 밀어올렸다가 바다 쪽으로 2인치쯤 끌어갔다.
다시 파도가 밀려왔다. 몸을 2인치쯤 밀어올렸다가 바다 쪽으로 6인치쯤 끌어갔다.
"이러다가는―" 하고 첫번째 소년이 입을 열었다.
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파도가 밀려와 몸을 들어올렸다가 바다 쪽으로 2피트쯤 끌어갔다. 다음 파도는 1피트쯤 몸을 밀어올렸다가 조약돌 위로 끌어내렸다. 그 다음에 밀려온 세 번째의 파도가 6피트쯤 끌고갔다.
첫번째 소년이 외치며 그 뒤를 쫓아갔다. 톰이 달려가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소년의 얼굴은 낙심과 두려움이 섞인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잠시 동안은 파도가 밀려오지 않았다. 톰은 여자를 바라보며 가슴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여자다. 이 세상 사람이다. 나의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지 않다. 적어도 이대로 여기에 그냥 놓아두면......
"그냥 내버려두면 안돼요. 어째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안돼요!" 하고 첫번째 소년이 말했다.
또 한 소년은 여자와 바다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톰을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는 이 여자를 어떻게 할 거지요? 여기에 그냥 놓아둘 건가요?"
첫번째 소년이 그 말에 대답하려고 했다.
"우리는―우리는―" 그러나 그는 말을 끊고 고개를 저었다."제기랄!"
두 번째 소년이 옆으로 비켜섰다. 여자가 바다 쪽으로 가는 길을 터놓았다.
다음의 파도는 보다 큰 것이었다. 밀려왔다가 밀려간 뒤 다만 모래밖에 없었다. 하얀 것은 가버렸다. 수많은 검은 보석도, 크나큰 하프 줄도.
그들은 바닷가에 서서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한 사나이와 두 남자아이는 등 뒤의 모래언덕으로 다가오는 트럭 소리를 들을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태양도 이제는 가라앉았다.
모래언덕을 달려오는 발소리와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를 그들은 들었다.
두꺼운 타이어가 달린 ???트럭으로 어둠이 짙어가는 바닷가를 따라 그들은 조용히 돌아갔다. 두 소년은 뒤에 실은 얼음 자루 위에 타고 있었다. 한참 지난 뒤 티코는 마구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침을 뱉으며 언제까지나 그칠 줄 몰랐다.
"3백 파운드의 얼음이야! 얼음이 3백 파운드!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지? 게다가 배꼽까지 속속들이 젖었으니 말이야. 내가 바다에 뛰어들어가 온통 헤엄치며 찾아다니는데도 자네는 꼼짝도 하지 않았어! 바보, 얼간이! 자네는 언제나 그래! 언제나 이랬어! 옛날부터 이랬단 말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저 바보같이 서 있을 뿐이었지. 그저 우뚝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청히 보고만 있었어!"
"그렇다면 묻겠는데, 자네는 무엇을 했나?" 하고 톰이 말했다―지친 목소리로, 앞을 보며."언제나 하는 짓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어. 똑같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자기 자신을 우선 보라구."
두 소년을 그들의 집 앞에 내려주었다. 나이어린 소년이 바람 속에서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쳇,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야......"
두 사나이는 바닷가를 따라 트럭을 몰고가다가 이윽고 세웠다. 2, 3분 동안 티코는 주먹을 무릎 위에 얹어놓고 앉아 있다가 코를 울렸다.
"할수없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잘되었는지도 몰라."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앞으로 20년이나 30년 뒤에, 그것도 한밤중에 전화 벨이 울릴 거야. 그것은 아까 그 두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그 중 누군가가 어떤 술집이나 뭐 그런 곳에서 거는 장거리 전화겠지. 한밤중에 그 녀석은 꼭 한 가지를 묻기 위해 전화를 걸어'그것은 정말이었지요? 정말 있었던 일이지요? 그 옛날 1958년에 우리는 정말 보았지요?'라고. 그러면 우리는 침대가에 앉아 한밤중에 이렇게 대답하지.'그렇고말고. 1958년에 우리는 정말 본 일이 있지.'그러면 그 녀석은 이렇게 말할 거야.'고맙습니다.'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겠지.'옛친구인데 고맙다고 할 것까지는 없네.'그리고 우리는 서로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누고...... 그리고 2, 3년 동안 그 녀석들은 전화를 걸어오지 않을 거야."
두 사나이는 캄캄한 현관의 계단에 앉아 있었다.
"톰."
"왜 그러나?"
티코는 조금 있다가 말했다.
"톰, 다음 주일에도―떠나지 않겠지."
질문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단정이었다.
톰은 곰곰이 생각했다. 손가락 사이에서 담뱃불이 꺼졌다. 여기서 떠날 수 없다고 지금은 뚜렷이 깨달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는 바닷가로 내려가 초록빛과 하얀빛 물 속을 헤엄칠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파도 밑과 파도 골짜기의 어두운 바위 사이를 헤엄칠 것이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아암, 티코, 나는 떠나지 않아."
북으로 남으로 끝없이 뻗어 있는 바닷가에 들쭉날쭉 테가 둘러져 은빛 거울이 퍼져 있다. 깔려 있는 거울의 수는 알 수 없으나, 많은 것을 비추지는 않았다. 건물 하나도, 나무 한 그루도, 고속도로 한 부분도, 자동차 한 대도, 단 하나의 인간조차도 비추지 않았다. 비추는 것은 오직 고요한 달뿐. 그것도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져 수억수만 개의 거울의 파편을 이루어 바다에 퍼지고 바다를 뒤덮으며 온통 반짝였다. 그러자 어느덧 바다는 캄캄한 암흑으로 돌아가 그대로 한참 동안 있다가 다시 또 수많은 거울을 드러내어 두 사나이를 놀라게 했다. 언제까지나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거기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두 사나이를.
딸기빛 유리창
The Strawberry Window
꿈 속에서 그는 문을 닫았다―딸기빛 유리와 레몬 빛 유리와 하얀 눈 같은 빛깔의 유리와 시골의 시냇물같이 맑은 빛깔의 유리가 끼워져 있는 현관문을. 과실주와 젤라틴과 차가운 얼음 빛깔의 커다란 한 장의 유리 둘레에 네모진 두 다스 가량의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어린아이인 그를 아버지가 안고 있었다.
"저것 좀 보아라!"
초록빛 유리를 통해 보면 세상은 에머랄드 빛, 이끼빛, 한여름의 박하잎빛이었다.
"저것 좀 보아라!"
연보랏빛 유리는 지나가는 사람을 모두 포도빛으로 보이게 했다. 그리고 딸기빛 유리는 언제나 따사로운 장미빛으로 감쌌고, 세상을 새벽놀의 핑크 빛으로 물들였으며, 잔디도 페르시아의 융단 시장같이 보이게 했다. 가장 멋있는 딸기빛 유리는 사람들의 창백한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였고, 차가운 비를 따뜻하게 보이도록 했으며, 몰아치는 2월의 눈에 불길을 댕겨주었다.
"아아, 저기―!"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꿈결에 그는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누운 채 하얀 바다 밑에서 푸른 산맥으로 불어올라가는 바람같이 슬픈 아이들의 목소리에 그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이 났다.
(우리는 화성에 있는 것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왜 그러세요?" 잠을 자던 아내가 놀라서 물었다.
그는 자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가만히 누워 있었을 뿐이다. 아내가 일어나 창백한 얼굴로 반원형 지붕의 조그만 천창(天窓)으로 보이는 맑지만 낯선 별을 올려다보며 걸어다니는 것을 그는 이상한 기분으로 멍청히 보고 있었다.
"캐리" 하고 그는 속삭였다.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은 듯했다.
"캐리, 할 말이 있소. 벌써 한 달이나 참아왔던 말이오. 내일...... 내일 아침엔......"
그러나 그의 아내는 푸른 별빛 속에 가만히 선 채 그를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태양이 언제나 떠 있기만 하면―밤이 오지 않는다면―하고 그는 생각했다. 낮이면 그는 이주지의 거리를 건설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캐리는 청소를 하고 뜰을 가꾸고 밥을 짓는다. 그러나 해가 져서 꽃도 망치도 못도 주판도 내려놓으면 그의 마음은 밤에 나는 새와 같이 어둠 속을 날아 지구로 달려간다.
그의 아내는 몸을 움직였다―머리를 조금 돌리며.
"보브, 나는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요" 하고 그녀는 겨우 말했다.
"캐리!"
"여기는 집이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눈에서 막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캐리, 조금만 더 참아요."
"이 이상 더 참을 수 없어요!"
몽유병자처럼 그녀는 옷장 서랍을 열어 손수건이며 셔츠며 속옷을 꺼내 옷장 위에 놓고는 보지도 않은 채 만져보고 들어올리고, 그리고 내려놓았다. 이러한 습관은 벌써 오래 전에 생겼다. 혼잣말을 하며 물건을 꺼내고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그것을 모두 도로 집어넣은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잠자리로 들어가 다시 꿈을 꾼다. 옷장에서 모든 것을 꺼내고 벽에 기대어놓은 슈트케이스의 뚜껑을 여는 밤이 오는 것을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보브......" 그녀의 목소리는 가시가 돋쳐 있지 않고 부드러웠으나, 아무 개성도 없이 그녀의 동작을 비춰주는 달빛처럼 희미했다."지난 반년 동안 밤마다 이렇게 혼잣말을 해서 미안해요. 당신은 거리에 나가서 열심히 집을 짓고 계시는데.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남편을 슬프게 하는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지껄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요.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하찮은 것들뿐이에요. 정말 하찮은 것들뿐이에요. 앞뒤로 열리는 현관문, 등나무의자, 여름밤에 사람들이 걸어가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하는 광경―오하이오의 저녁 한때의 풍경, 음정이 맞지 않는 검은 피아노, 나의 스웨덴 제 유리 꽃병, 응접실의 가구―코끼리의 무리 같았지요, 모두 낡아서. 중국산 수정 커튼―바람이 불면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지요. 6월의 따뜻한 밤 현관 앞에 서서 주고받은 이야기. 모두 우스꽝스럽고 시시한 것들뿐...... 모두 하찮은 것들이지만 새벽 3시쯤 되면 그런 것이 온통 머리에 떠오른답니다. 미안해요."
"사과하지 않아도 되오. 화성은 먼 곳이니까. 게다가 이상한 냄새가 나거든. 경치도 이상하고 느낌도 이상해. 나도 밤마다 생각에 잠기곤 하지. 우린 좋은 고장에서 왔소."
"봄이나 여름에는 온통 초록빛으로 반짝이고 있었지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그리고 가을에는 노랑과 빨강. 우리 집은 좋은 집이었어요. 조금 낡긴 했지만요. 8, 9년이나 되었거든요. 밤에는 집이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것이 들렸어요. 바싹 마른 나무 손잡이, 현관, 문지방. 어디를 만져보나 말을 걸어왔어요. 밤마다 모두 다른 음색으로. 집이 온통 말을 걸 만큼 오래되면 집은 당신을 잠재워주는 가족과 같아지지요. 지금 모두들이 세우고 있는 집은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집을 길들이려면 사람이 몇 대나 계속 살아야만 해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은 내가 지금 여기 살고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어요. 내가 살든 죽든 관심이 없어요. 주석(朱錫) 같은 소리가 나요. 주석은 차가와요. 연대(年代)가 스며들 만한 숨구멍이 없어요. 내년, 내후년까지 물건을 넣어둘 지하실도 없구요. 작년의 물건이나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물건을 간직해 둘 다락방도 없어요. 조금이라도 정을 붙일 만한 것이 있기만 한다면 정붙이기 어려운 것이 많은 속에서도 참고 살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여보. 하지만 무엇 하나 정붙일 만한 것이 없으니 언제까지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요."
그는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모두 맞아."
그녀는 달빛에 떠오른 바람벽에 기대어놓은 슈트케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그쪽으로 뻗어가는 것을 그는 보았다.
"캐리!"
"왜 그러세요?"
그는 침대에서 다리를 늘어뜨리고 흔들었다.
"캐리, 나는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소. 지난 몇 달 동안 내내 당신과 아이들이 꿈을 꾸며 외치는 소리를 들었지. 그 바람, 그 화성의 풍물, 바다 밑, 그 모든 것......" 그는 말을 끊고 침을 삼켰다."내가 한 일을 이해해 주어야 하오. 그리고 어째서 내가 그렇게 했는지 알아주어야 해.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은행에 예금되어 있었던 돈을, 우리가 10년 걸려서 저축해 온 전재산을 나는 하나도 남김없이 써버렸단 말이오."
"보브!"
"나는 내던져버렸어, 캐리. 참으로 하찮은 일 때문에 내던져버렸단 말이오. 당신은 놀랐을 거야. 하지만 오늘 밤에는 당신이 거기에 있고, 저 바닥에는 낡은 슈트케이스가 있고......"
"보브!" 하고 그녀는 뒤돌아보았다."화성에서 이런 생활을 하며 매주 저축해 온 돈을 순식간에 물쓰듯이 써버렸단 말인가요?"
"그랬는지도 몰라" 하고 그는 말했다."나는 정신이 나갔어. 이제 곧 아침이 되겠지. 빨리 일어나 내가 한 짓을 보러 갑시다. 말로는 하고 싶지 않고, 직접 보여주겠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맞아, 거기에 슈트케이스가 있고 매주 네 번 지구로 가는 로켓도 있으니까―"
그녀는 꼼짝 않고 서서"보브, 보브!" 하고 중얼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마오" 하고 그는 말했다.
"보브, 보브......"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몸을 돌려 침대의 자기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녀는 다른 한쪽에 앉아 잠시 동안 누우려 하지도 않고 손수건이며 보석이며 옷들이 가지런히 들어 있는 옷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밤에는 달빛으로 물든 바람이 잠자는 모래를 불어올려 공중에 가루를 뿌렸다.
이윽고 그녀도 자리에 누웠으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밤의 동굴에서 새벽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차가운 물건처럼.
그들은 동이 트자 일어나 반원형 지붕의 작은 집 속에서 소리없이 움직였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아이들은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토스트와 과일 쥬스와 커피를 말없이 들었다―아무도 서로의 얼굴은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토스트의 반짝거리는 측면과 유리그릇이며 나이프, 포크에 비치는 비뚤어지고 몹시 쌀쌀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뿐. 침묵을 이기지 못하여 누군가가 그만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리만큼 긴 무언극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반원형 지붕의 작은 집 문을 열어 모래의 물결이 무너지고 움직이고 기괴한 무늬를 자아내고 있을 뿐인 화성의 창백한 바다를 건너온 바람을 불러들이고 원색 그대로의 싸늘한 하늘 밑으로 나가 거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삭막하고 인기척없는 영화의 세트 같은 거리가 그들의 눈 앞에 보였다.
"어디로 가세요?" 하고 캐리가 물었다.
"로켓 기지로. 하지만 거기에 닿을 때까지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소" 하고 그는 대답했다.
아이들은 귀를 곤두세우고 부모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그는 줄곧 앞쪽만 바라보고 걸었다. 그는 이야기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자기가 하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아보기 위해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화성의 미래를 믿고 있소" 하고 그는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화성은 언젠가는 훌륭한 우리들의 것이 될 거요. 화성을 완전히 정복하고 정착하게 된단 말이오. 따라서 꼬리를 감추고 달아나는 짓은 하지 않아. 1년 전 어느 날 우리들이 여기에 도착하고 얼마 안되었을 무렵의 일인데, 그때 나는 생각했지―우리는 어째서 여기에 왔는가? 그것은―하고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소―그것은 해마다 강물을 거슬러올라가는 연어와 같다고. 연어는 어째서 그리로 가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리로 거슬러올라가는 거요. 아무런 기억도 없는 강을 거슬러올라가 시냇물에 이르고 폭포수를 뛰어넘어 번식한 다음 죽을 자리에 이르지. 이것을 연어는 되풀이하는 거요. 종(種)의 기억이라고 할까, 본능이라고 할까, 뭐라고 하든 상관없지만 아무튼 연어는 그곳으로 간단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기에 있는 거요."
그들은 자기들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하늘 아래의 조용한 아침 거리를 걸어갔다. 이상하리만큼 푸른 모래며 증기처럼 하얀 모래가 새로 포장한 도로를 걸어가는 그들의 발 밑에서 날아다녔다.
"우리들은 지금 여기 있어. 화성에서 이번에는 어디로? 목성으로, 해왕성으로, 명왕성으로? 그렇지. 앞으로 다시 차례차례로 옮길 거요. 어째서? 언젠가는 태양이 금이 간 용광로처럼 폭발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오. 꽝!―그렇게 되면 지구는 끝장이지. 하지만 화성은 안전할지도 몰라. 화성이 안전하지 않다 해도 명왕성은 안전하겠지. 명왕성이 안전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우리 자식들의 그 자식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그는 흠 하나 없는 거대한 조??같은 살구빛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 인간은 번호가 매겨진 별에 가 있겠지―97성좌의 제6혹성이니, 99성좌의 제2혹성으로!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먼 곳이야. 인간은 그런 먼 곳에 감으로써 안전하게 될 거요. 그래서 나는 생각했지―아아, 이것이 우리가 화성에 온 이유로구나 하고. 그래서 인간들은 로켓을 쏘아올리는 거요."
"보브......"
"끝까지 내 말을 들어주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오. 진귀한 경치를 보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런 것은 자기를 속이는 엉터리 이유요. 부자가 되기 위해서니 유명해지기 위해서니 하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즐기기 위해서라느니 이리저리 다녀보고 싶기 때문이라느니 하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맥박치고 있는 거요―연어나 고래 속에서 맥박치고 있듯이, 조그만 세균이 맥박치고 있듯이. 어떠한 생물 속에서나 맥박치고 있는 작은 시계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고 있소? 나가라, 퍼져라, 전진해라, 헤엄쳐라!―라고 말하고 있단 말이오. 온갖 별의 세계로 가서 인간을 결코 죽이지 않는 거리를 많이 세워라!―이렇게 말하고 있단 말이오. 알겠소, 캐리? 화성에 온 것은 우리뿐이 아니오―우리의 종족이, 온 인류가 왔단 말이오. 인류의 장래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룩하는 업적에 달려 있소. 그 책임이 너무나도 중대하여 웃음이 나을 지경이오. 몸이 얼어붙을 지경이오."
그는 아들들이 그의 뒤에 바싹 붙어서 걸어오고 있는 것을, 아내가 자기 옆에 바싹 붙어서 걷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는 자기가 한 말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아내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고집스럽게 보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은 모두 어릴 적에 씨뿌리는 기계가 고장났으나 그것을 고칠 돈이 없어 아버지와 함께 손으로 씨를 뿌리며 밭을 돌아다니던 때의 일과 다를 바가 없소. 누군가가 그런 일을 해야만 하오―후세를 위해서. 캐리, 당신은 기억하고 있겠지―'백만 년 뒤에 지구는 언다'라고 쓴 어느 일요일 기사를. 어릴 적에 나는 그런 기사를 보고 울었지. 왜 우느냐고 어머니가 묻기에 백만 년 뒤의 사람들이 불쌍해서라고 대답하며 나는 울었소. 어머니는 그런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지. 그러나 캐리, 사실은 그것이 중요한 일이란 말이오. 우리는 그것을 걱정하고 있소. 그렇지 않다면 이런 곳에 오지도 않았겠지. 온 인류의 미래에 관한 문제거든. 인류만큼 나의 마음을 끄는 것은 없소. 나는 인류의 한 사람이니까. 인류의 오랜 꿈이 죽지 않는 방법을 알아낸다면 그것이야말로―퍼져라, 우주에 씨앗을 뿌려라―하고 외칠 만한 일이지. 그러면 흉작이 되어도 어디에서든 수확을 거둘 수가 있고, 지구가 아무리 기근을 만나도, 아무리 지쳤다 해도 걱정없을 거요. 앞으로 천 년 동안에 인간은 새로운 보리를 금성이건 어디건 운반할 수가 있게 되지. 나는 그런 생각으로 온통 정신이 없소.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 나는 아무나 붙잡고, 당신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소. 하지만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소. 언젠가는 누군가가 그 맥박치는 소리를 들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그런 말을 해줄 필요는 없거든. 참으로 이것은 굉장한 일이오, 캐리. 다섯 자 다섯 치도 못되는 남자로서는 너무나도 벅찬 생각이지.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진지한 이야기란 말이오."
그들은 인기척없는 거리를 걸으며 자기들의 발소리가 메아리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은요?" 하고 캐리가 말했다.
"이제 겨우 오늘 아침 이야기에 이르렀군." 그는 말했다."또 하나의 나는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하고 있소. 하지만 또 하나의 다른 나는 돌아가면 모든 일이 끝장이라고 말하고 있소. 그래서 나는 생각했지―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무엇인가? 옛날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것이었소. 자식들의 것, 당신의 것, 나의 것―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 낡은 것이 필요하다면 낡은 것을 써야 한다―하고 나는 생각했지. 역사책에서 읽은 것을 기억하고 있소―천 년도 더 넘는 옛날에는 사람들이 소뿔을 파가지고 그 속에 목탄을 채워넣고 낮에는 그것을 불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했고, 밤에는 아침부터 간직해 온 불씨로 불을 댕겼다는군. 언제나 새로운 불이지만, 낡은 불씨가 섞여 있었지. 그래서 나는 저울질을 해보았소. 낡은 것은 우리의 온 재산과 비길 만할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소. 그리하여 비기지 못한다고 생각했소. 값어치있는 것은 우리가 낡은 것을 이용하여 이룩한 일뿐이오. 그렇다면 새로운 것은 우리의 온 재산과 비길 만할까? 비길 만하지―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기분을 이기기 위해서는 돈을 석유에 담가 성냥을 그어야 하오!"
캐리와 두 아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길에 꼼짝 않고 서서 그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땅에서 그들을 불어올릴 만큼 심하게 불어젖히다가 지금은 조용히 가라앉은 폭풍우처럼.
"화물 로켓이 오늘 아침에 도착했지" 하고 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우리들의 짐이 실려왔단 말이오. 어서 가서 그것을 찾읍시다."
그들은 로켓 정거장의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 화물 취급소를 향해 걸어갔다. 때마침 문이 걷어올려지고 있는 참이었다. 하루의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연어 이야기를 언제고 다시 해주세요" 하고 아들 하나가 말했다.
따뜻한 아침 공기 속에서 그들은 큰 것이며 높은 것이며 낮은 것이며 평평한 것이며 갖가지 나무 상자며 꾸러미며 종이 상자들을 전세낸 트럭에 가득 싣고 돌아왔다. 짐 하나하나에는 번호가 붙어 있었고 <화성 뉴 트레드 로버트 프렌티스 행>이라고 깔끔하게 씌어 있었다.
트럭은 반원형 지붕의 작은 집 앞에 멎었다. 아이들이 먼저 뛰어내려 어머니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잠깐 동안 보브는 핸들 뒤에 앉아 있다가 마침내 자동차에서 내려 뒤로 돌아가 짐을 바라보았다.
점심때까지 모든 꾸러미가 풀어져 물건들은 가족을 에워싸고 있는 <바다 밑>에 놓였다.
"캐리......"
아내의 손을 잡고서 거리 어귀에 놓여진 그리운 현관의 나무로 만든 발판을 올라가며 그는 불렀다.
"들리지, 캐리?"
발판은 발 밑에서 삐걱거리며 속삭였다.
"뭐라고 하오? 뭐라고 하는지 일러주구료, 캐리."
그녀는 낡은 발판 위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손짓했다.
"현관은 여기. 거실은 저기. 식당과 부엌과 침실이 세 개. 절반은 새로 짓고, 절반은 지구에서 날라와야겠소. 지금 여기에는 현관과 응접실 가구와 낡은 침대가 하나 있을 뿐이오."
"그 돈을 모두, 여보!"
그는 뒤돌아보며 미소지었다.
"당신은 화내고 있지 않겠지? 어디 나 좀 보오! 당신은 화내고 있지 않군. 내년, 아니 5년 동안에 모두 날라오자구! 유리 꽃병도, 1961년에 당신 어머니가 주신 아르미니아의 융단도! 태양 따위는 폭발하겠으면 하라지!"
그들은 번호와 행선지가 씌어 있는 꾸러미를 바라보았다―앞뒤로 열리는 현관문. 현관 앞의 등나무로 만든 흔들의자. 중국산 수정 커튼.
"내가 커튼에서 소리가 나도록 해보겠어요."
그들은 발판 위에 작은 색유리가 끼워진 현관문을 세우고, 캐리는 딸기빛 유리창으로 내다보았다.
"무엇이 보이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도 색유리를 통해 내다보고 있었으니까. 차가운 하늘은 따뜻해지고 죽은 바다는 불빛으로 물들고, 딸기빛 빙산 같은 산으로 바뀐 화성의 경치가 보였다. 모래는 바람에 불리어 타오르는 불 같았다. 딸기빛 유리창! 딸기빛 유리창은 땅을 부드러운 장미빛으로 물들게 하고, 마음과 눈을 영원한 새벽놀빛으로 채웠다. 등을 구부리고 내다보며 그는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
"앞으로 1년이면 거의 완성된다. 여기는 마음에 드는 고장이 될 거야. 당신의 마음에 드는 현관도 생기고, 친구도 생기겠지. 그때에는 당신도 이런 것을 그다지 그리워하지 않게 될 거요. 이런 일부터 시작하여 정을 붙이고 조금씩 이룩해 나가면, 거리가 넓혀지고 화성이 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화성도 어느덧 어릴 적부터 살고 있던 곳같이 느껴지겠지."
그는 계단을 뛰어내려와 아직 풀지 않은 시트로 싼 마지막 짐 옆으로 갔다. 주머니칼로 구멍을 뚫으며 그는 말했다.
"한 번 맞춰보구료!"
"부엌 난로? 아니면 화덕?"
"아니―" 그는 다정하게 미소지었다."노래를 부르구료."
"여보, 당신 정신이 조금 어떻게 된 게 아니에요?"
"노래를 불러주오―은행에 맡겨두었던 온 재산에 비길 만한 노래를. 지옥에 서늘한 바람을 불어넣을 만한 노래를."
"나는, <주네브, 다정한 주네브>밖에 몰라요."
"그럼, 그것을 불러요."
그러나 그녀는 노래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은 움직였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시트를 넓게 찢고 손을 넣어서 한참 동안 더듬으며 ?潁?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손의 움직임과 함께 맑은 피아노의 화음이 한층 더 높이 아침 공기를 흔들었다.
"자아, 끝까지 노?罐@? 모두 함께 피아노에 맞추어!" 하고 그는 말했다.
비 내리는 날
The Day It Rained Forever
바싹 마른 뼈 같은 텅 빈 호텔이 사막 하늘의 한가운데에 서 있고, 태양은 하루 종일 그 지붕을 내리쬐었다. 밤에는 한낮의 태양 잔해가 산불의 환영처럼 모든 호텔 방에 감돌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진 다음에도 빛은 곧 열이므로 등불 켜는 것도 삼가고 있었다. 호텔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둠 속을 홀에서 홀로 손으로 더듬으며 서늘한 바람을 찾아 걸어다니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특별한 날의 해질녘에 호텔 주인 탤르 씨와, 외모도 체취도 오래되어서 말라비틀어진 담배잎 비슷한 두 사람의 투숙객 스미스 씨와 플렘리 씨는 늦게까지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철제 흔들의자에 앉아 바람을 불러들이려는 듯 헐떡거리며 의자를 흔들고 있었다.
"탤르 씨...... 만일 냉방장치를...... 설치할 수 있다면...... 정말 멋있겠지요......?"
탤르 씨는 눈을 감은 채 한참 동안 흔들의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런 돈은 없답니다, 스미스 씨."
두 장기 투숙객은 얼굴을 붉혔다. 21년 동안이나 두 사람은 한푼도 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뒤 플렘리 씨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어째서, 정말 어째서 이런 곳과 작별하고 짐을 싸가지고 온전한 거리로 이사하지 않소? 찌는 듯한 더위에 시달리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정말 이제 진절머리가 날 텐데요?"
"사람들이 외면해 버린 유령 마을의 쓰러져가는 호텔을 누가 사겠소?" 하고 탤르 씨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 안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다려야 합니다―그 날을, 1월 29일을."
마치 불이 꺼지듯 세 사나이는 의자 흔들기를 그쳤다.
1월 29일.
1년 중에 단 하루 비가 둑이 터질 듯 내리는 날이다.
"조금만 있으면 되오."
스미스 씨는 손바닥에 놓인 뜨거운 한여름의 달 같은 회중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앞으로 세 시간 9분만 있으면 1월 29일이오. 몇백 마일 이내에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지만."
"1월 29일이 되면 해마다 틀림없이 비가 왔소!" 탤르 씨는 자기의 큰 목소리에 놀라며 말을 이었다."나는 그것이 금년에 하루쯤 늦는다 해서 하느님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짓은 하지 않겠소."
플렘리 씨는 숨을 죽이고 사막을 둘러본 다음 산맥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어떨까요...... 다시 이 고장에 금광 붐이 일어날까요?"
"금 따위가 나을 리 없지." 스미스 씨가 말했다."그리고 내기를 해도 좋지만 비도 안 올 거요.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날도 비가 오지 않을 거요. 금년 내내 비는 안 와요."
나이 지긋한 세 사나이는 고요히 높은 곳에 둥근 구멍을 뚫어놓은 듯한 커다란 노란 달을 앉아서 쳐다보고 있었다.
꽤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헐떡거리며 다시 의자를 흔들기 시작한 것은.
첫새벽의 열기를 머금은 산들바람이 달력 페이지를 뱀의 마른 껍질처럼 불어올렸으므로 달력은 호텔 프런트에 부딪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세 사나이는 횃대 같은 어깨에 바지 멜빵을 끌어올리며 맨발로 내려와 어이없이 맑게 갠 하늘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1월 29일......"
"한 방울도 베풀지 않는군."
"날은 아직 젊어요."
"나는 젊지 않소."
플렘리 씨는 발길을 돌려 가버렸다.
졸린 눈을 뜨고 플렘리 씨가 복도를 가로질러 뜨거운 자기의 잠자리로 돌아가는 데 5분이 걸렸다.
정오에 탤르 씨가 들여다보았다.
"플렘리 씨......"
"저주받은 사막의 선인장―그것이 우리들이오!" 하고 플렘리 씨는 잠자리에 누운 채 헐떡거리며 말했다. 그의 머리는 당장에라도 거친 마룻바닥에 쌓여 있는 뜨거운 먼지 속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아무리 저주받은 선인장이라도 이 뜨거운 지옥에서 1년을 보내게 하려면 한 번쯤은 물을 먹여주어야 견딜 수 있지. 나는 지렛대로 밀어도 움직이지 않겠소. 지붕 위에서 퍼덕이는 새의 발소리밖에 들려오는 것이 없다면, 여기 누운 채 죽는 편이 낫겠소!"
"큰소리는 그만 치고 우산이나 준비해 두시오" 하고 탤르 씨는 말하고 발 끝으로 걸어서 가버렸다.
저녁 무렵, 지붕에서 희미하게 후두둑 소리가 들려왔다.
플렘리 씨의 목소리가 침대에서 원망스러운 듯이 흘러나왔다.
"탤르 씨, 그것은 비가 아니오. 당신이 호스로 우물물을 지붕에 뿌리고 있는 소리요. 그 마음씨는 고맙지만 그만두구료. 당장 그만두라니까요!"
후두둑 소리가 그쳤다. 뜰에서 한숨 소리가 한 번 들렸다.
그리고 나서 탤르 씨가 건물 옆으로 나와보니 달력이 흙먼지 속을 춤추며 올라갔다내려왔다하고 있었다.
"괘씸한 1월 29일이로군!"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 달과 그리고 두 달! 앞으로 다시 열 두 달을 기다려야 하다니!"
스미스 씨가 입구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 낡은 두 개의 슈트케이스를 들고 나타나더니 현관에 털썩 앉았다.
"스미스 씨!" 하고 탤르 씨는 불렀다."30년이나 있다가 이제 와서 나가다니, 말이나 됩니까!"
"아일랜드에는 한 달에 20일은 비가 온다지요?" 스미스 씨가 말했다."나는 거기에서 일자리를 찾아보겠소. 그래서 모자를 쓰지 않은 채 입을 크게 벌린 모습으로 돌아다니고 싶소."
"가면 안됩니다!" 탤르 씨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고 하다가 언뜻 손뼉을 쳤다."당신은 나에게 9천 달러의 빚이 있소!"
스미스 씨는 주춤했다. 그의 눈이 좌절과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미안합니다." 탤르 씨는 시선을 돌렸다."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오. 그건 그렇고―당신은 시애틀에 갈 작정이었었지요? 거기는 일주일에 2인치는 비가 내리니까. 돈은 생기면 갚도록 하시오. 독촉하지 않겠소. 하지만 제발 부탁이니 한밤중까지만 기다려보시오. 어쨌든 그때쯤이면 서늘해질 테니까. 거리로 나가려면 서늘한 밤길을 걸어야 하지 않겠소?"
"한밤중까지 기다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신념을 가져야지요.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 때에는 무언가가 일어난다고 믿어야 합니다. 나와 함께 여기 서서―앉지 않아도 좋으니―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오."
사막에서 갑자기 작은 회오리바람이 흙먼지를 일으키더니 다시 가라앉았다. 스미스 씨의 시선은 서쪽 지평선을 따라 달려갔다.
"무엇을 생각하라고요? 비, 오오, 비여, 내려라―이렇게 말입니까?"
"무엇이든, 무엇이든 좋소!"
스미스 씨는 낡아빠진 슈트케이스를 양옆에 놓고 한참 동안 꼼짝하지 않는 채 우뚝 서 있었다. 두 사람이 토하는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결심한 듯이 스미스 씨는 허리를 굽혀 가방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때 갑자기 탤르 씨는 눈을 깜박거렸다. 몸을 앞으로 내밀고 귓전에 손을 갖다댔다.
스미스 씨는 몸을 빳빳이 했다―손을 가방에 얹은 채.
저 먼 산골짜기에서 술렁임이, 희미한 땅울림이 들려온 것이다.
"비가 온다!" 하고 탤르 씨는 들뜬 목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는 차츰 커졌다. 산골짜기에서 희끄무레한 구름이 떠올랐다.
스미스 씨는 발 끝을 세우고 서 있었다.
2층의 플렘리 씨는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체를 알아보려고 탤르 씨의 눈동자가 한껏 벌어졌다. 표류하던 배의 선장이 라임 열매와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하얀 야자 열매의 향기를 머금은 남해의 산들바람을 처음으로 느꼈을 때처럼 그는 현관의 난간으로 몸을 내밀었다. 아주 희미한 미풍이 그의 아프도록 말라버린 콧구멍을 날아오른 굴뚝의 구부러진 곳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어루만지고 갔다.
"왔구나! 왔어!" 탤르 씨가 외쳤다.
최후의 산을 넘고 뜨거운 모래를 말아올리며 구름이―천둥이―울려퍼지는 폭풍우가 몰려왔다.
그 산을 넘어 스무 하루 동안이나 지나간 일이 없는 자동차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서운 기세로 평원을 달려내려왔다.
탤르 씨는 도저히 스미스 씨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스미스 씨는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플렘리 씨가 생각나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플렘리 씨는 창문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자동차가 호텔 주차장에서 숨이 끊어져 죽은 것을.
왜냐하면 자동차가 내는 소리는 이상스럽게도 임종에 가까운 듯한 소리였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타는 듯한 유황의 길을 달려 1천만 년 전에는 바닷물에 씻기어 소금을 뿜고 있던 평원을 가로질러온 것이다.
솔기에서 식인종의 머리카락같이 엉긴 머리털이 비어져나오고, 커다란 눈꺼풀같이 찢어진 캔버스 천이 젖혀져 박하껌처럼 찰싹 뒷좌석에 달라붙은 1924년 형 키셀 자동차는 하늘로 영혼을 올려보내려는 듯이 최후의 몸부림을 쳤다.
앞좌석의 노부인은 세 사나이와 호텔을 내다보며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그 모습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미안해요, 나의 친구가 병에 걸려 있답니다. 무척 오랜 친구여서 숨을 거두는 것을 보아주어야만 한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동차에 탄 채 경련이 멎고 최후를 알리는 근육의 이완(弛緩)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동차의 상태에 귀를 기울이며 그녀는 꼭 30초 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는 어딘지 모르게 매우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듯한 데가 있어 탤르 씨와 스미스 씨는 엉겁결에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윽고 그녀는 그들을 보며 우아한 미소를 던지고 손을 흔들었다.
플렘리 씨는 어느덧 자기의 손이 창문 밖으로 나가 부인의 인사에 대답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현관에서 스미스 씨가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폭풍우가 아니었소. 그런데도 낙심이 되지 않으니 무슨 까닭일까?"
탤르 씨는 자동차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들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는 말을 더듬었다."나는 탤르라고 합니다. 조 탤르입니다."
그녀는 그와 악수를 나누고, 수천 마일 저쪽에서 눈이 녹아 해와 바람에 정화되며 긴 여행을 하고 온 물같이 맑고 밝은 푸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미스 블랜슈 힐굿이에요" 하고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그린넬 대학을 나온 독신 음악교사지요. 아이오와의 그린 시에서 30년 동안 고등학교의 합창부와 학생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었어요. 20년 동안 피아노, 하프, 성악의 개인 지도를 해왔고요. 한 달 전에 은퇴하여 연금으로 살아가고 있지요. 지금은 새출발하기 위해서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이랍니다."
"미스 힐굿, 여기서 다시 다른 곳으로 가실 작정은 아니시겠지요?"
"글쎄요,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그녀는 그들이 자동차를 훑어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류머티즘에 걸리 할아버지의 무릎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차바퀴는 울타리가 될 수 있고, 브레이크 드럼은 식사를 알리는 종 구실을 할 수 있으며, 나머지는 훌륭한 뜰의 장식 장식이 될 수 있습니다." 탤르 씨가 말했다.
플렘리 씨가 높은 곳에서 고함질렀다.
"죽었소? 자동차가 죽었느냔 말이오? 여기서도 알 수 있지요! 그건 그렇고―식사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요!"
탤르 씨는 손을 내밀었다.
"미스 힐굿, 저것이 조 탤르 사막 호텔입니다. 하루에 26시간 영업을 하지요. 사막의 도마뱀도 손님도 2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목욕탕의 카운터에 들르십시오. 그리고 푹 쉬십시오. 요금은 필요없습니다. 아침에는 우리의 포드 차로 거기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녀는 탤르 씨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여주인이 가버리는 것을 항의라도 하듯 엔진이 부르릉거렸다. 그녀는 ???소리를 내며 자동차문을 닫았다.
"친구 하나가 세상을 떠났어요. 하지만 아직 또 하나 있습니다. 그녀를 데려다 주지 않으시겠어요, 탤르 씨?"
"그녀라니요?"
"미안합니다. 나는 물건도 사람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있답니다. 자동차는 남성이지요. 온갖 곳으로 데려다주니까요. 하지만 하프는 여성이 아닐까요?"
그녀는 자동차 뒷좌석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는 하프 케이스가 바람을 헤치며 나아가는 고대의 구름 모양으로 생긴 배의 이물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사막의 무인지경이며 도시의 잡담(雜談) 속으로 자동차를 몰고가는 어떠한 운전수보다도 높이 솟아 있었다.
"스미스 씨, 도와주시오." 탤르 씨는 말했다.
두 사람은 커다란 케이스의 끈을 풀고 조심스럽게 들어냈다.
"그 속에 무엇이 있소?" 하고 플렘리 씨가 2층에서 소리쳤다.
스미스 씨가 걸려서 넘어질 뻔했다. 미스 힐굿은 깜짝 놀랐다. 케이스가 두 사나이의 팔에서 기우뚱했다.
케이스 속에서 가냘프게 아름다운 곡이 흘러나왔다.
2층의 플렘리 씨에게도 들렸다―그 속에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이없다는 듯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리고 두 사나이와 상자 속에 갇힌 친구가 비틀거리며 땅굴 같은 현관으로 사라지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심해요!" 하고 스미스 씨가 말했다."어느 바보 녀석이 짐을 여기다 놓고 갔군―" 그는 말을 하다 말았다."바보 녀석?―바로 나로군!"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미 땀은 흘리고 있지 않았다. 어디서인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의 옷깃을 상냥하게 스치고 모래 위에 흩어진 달력을 펄럭이게 하는 바람이―
"내 짐......" 하고 스미스 씨가 말했다.
그리고 모두들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미스 힐굿, 포도주를 더 드시지요. 지난 몇 년 동안 식탁에 포도주가 오른 적이 없었답니다."
"그럼, 조금만―"
모두들은 오직 한 자루의 촛불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그 열기로 방 안은 마치 오븐 속 같았다. 그들은 지껄이면서 뜨뜻미지근한 포도주를 마시고 먹었다. 고급 은그릇이 반짝반짝 빛났다.
"미스 힐굿, 지나온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베토벤과 바하와 브람스 등을 편력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29살을 훨씬 넘어 있더군요." 미스 힐굿이 말했다."그 다음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40살이었어요. 어제로 71살이 되었답니다. 네, 남자는 있었어요. 하지만 남자란 10살이면 벌써 노래를 그만두고, 12살에는 하늘을 날기를 그만둡니다. 나는 언제나 생각하지요―사람이란 각자 자기 나름으로 하늘을 날게 되어 있다고요. 그래서 이 세상의 무거운 족쇄를 끌며 걷고 있는 남자를 보면 나는 참을 수가 없어요. 9백 파운드보다 ???남자를 나는 만난 적이 없었어요. 검은 양복을 입고 으스대며 장의차처럼 덜거덕거리는 족쇄를 끌고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답니다."
"그래서 당신은 하늘을 날아다니셨습니까?"
"마음 속의 문제이지요, 탤르 씨. 그것을 졸업하는 데 60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내내 나는 피콜로며 플륫이며 바이올린 등과 씨름했어요. 땅 위에 작은 시냇물과 큰 강이 있듯이 음악은 공중에 흐름을 만드니까요. 나는 어떠한 작은 흐름에도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헨델로부터 슈트라우스에 이르는 작은 후미까지도 들어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습니다. 그렇게 돌고 돌다가 겨우 여기에 다다른 거예요."
"어째서 그것과 작별할 결심을 하셨습니까?" 하고 스미스 씨가 말했다.
"지난 주일의 일이었어요.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고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지요―'정말 너는 혼자서 날고 있구나. 네가 날아올라가 아무리 높은 곳에 도달한다 해도 그린 시의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아. 언제나 <멋있어, 블랜슈>니으로 끝났지'하고요. 진정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랜 옛날 뉴욕이며 시카고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나를 놀리며 비웃었지요. 하지만 <시골에서는 큰 개구리로 있을 수 있지만, 큰 연못으로 가면 작은 개구리가 되어버린다>―는 생각에서 나는 버텼지요. 한편 사람들은 큰 곳으로 나?링瑩? 포기해 버리든지, 아니면 나가서 일단 해보고 포기해 버리든지 하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나는 용기를 내어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지요―'잠깐만, 언제부터 개구리가 날개를 달게 되었지?'하고."
"그래서 서쪽을 향해 여행을 떠나셨군요?" 하고 탤르 씨는 말했다.
"영화나 별빛 아래에서 연구해 보려고요. 하지만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는 사람을 위해 연구해 보고 싶어요......"
그들은 무더운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끝났다. 모두 말해 버렸다―어리석은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2층에서 누군가가 기침을 했다.
그 소리를 듣고 미스 힐굿은 일어섰다.
흩어진 침대 옆에 쟁반을 놓으려고 허리를 굽힌 미스 힐굿의 모습을 플렘리 씨가 달라붙은 눈꺼풀을 벌리고 확인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여태까지 아래에서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나중에 다시 와서 모두 말씀드리겠어요" 하고 미스 힐굿이 말했다."지금은 잡수세요. 맛있는 샐러드예요."
그녀는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 그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냥 계실 작정이신지요......?"
그녀는 문 앞에 서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땀이 배어나온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에게는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동안 말없이 서 있다가 계단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들리지 않았을까?" 하고 플렘리 씨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들었다는 것을. 미스 힐굿은 아래층 로비를 가로질러 슈트케이스 앞으로 가서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식사값을 지불하겠어요."
"나중에 주십시오" 하고 탤르 씨가 말했다.
"아니, 지금 지불하겠어요" 하고 말한 뒤 그녀는 하프 케이스를 열었다.
찬란한 황금빛 하프가 나타났다.
의자 위에서 두 사나이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거대한 하트 모양의 악기 옆에 서 있는 몸집이 작은 노부인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높이 솟은 베실꾸리 무늬가 있는 기둥 위에는 영양(羚羊)의 눈같이 조용한 그리스 풍의 얼굴이 차분히 그들을 보고 있었다.
두 사나이는 놀라움의 눈길을 재빠르게 주고받았다. 그들은 이제 무엇이 시작되려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급히 로비 저쪽으로 건너가 빌로도를 씌운 긴의자 끝에 자리잡고 젖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미스 힐굿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서 황금빛 하프를 여유있게 어깨에 기대세우고 그 줄에 손을 댔다.
탤르 씨는 불같이 뜨거운 공기를 한 번 들이마시고 나서 기다렸다.
갑자기 사막의 바람이 바깥 현관으로 한바탕 불어와 의자에 부딪쳤다. 밤의 연못에 떠 있는 보트처럼 의자가 앞뒤로 흔들렸다.
플렘리 씨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위층에서 들러왔다.
"무슨 일이 일어날 모양이군!"
그때 미스 힐굿의 손이 움직였다.
어깨 밑 활 모양의 부분에서 시작하여 기둥 위에 있는 그리스 여신의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시선을 따라서 그녀의 손가락은 비단결 같은 줄 위를 오갔다. 그리고 잠시 그녀는 손길을 멈추었다. 그 소리는 타는 듯한 로비의 허공을 날아서 인기척없는 방 하나하나에 스며들어갔다.
이때 위층에서 플렘리 씨가 고함을 질렀다 해도 아무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으리라. 탤르 씨도 스미스 씨도 넋을 잃고 있었는데, 들려오는 것은 자신의 심장의 고동 소리와 폐 속으로 불어젖히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말하자면 완전한 실신상태로 두 여자―황금의 기둥 위에 있는 아름다운 뮤즈와 다소곳이 눈을 감고 자그마한 손을 앞으로 내밀고 앉아 있는 노부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조그만 소녀 같군―하고 두 사람은 두서없이 생각했다―조그만 소녀가 창문으로 손을 내밀고 있다......
무엇 때문에?
물론 비를 손으로 받기 위해서이다.
소나기의 첫울림이 저 먼 곳의 둑이며 지붕의 홈통으로 빨려들어갔다.
2층의 플렘리 씨는 마치 누구에게 귓밥을 잡아당겨지기라도 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스 힐굿은 하프를 켰다.
그녀가 켜는 곡은 사나이들이 전혀 모르는 곡이 아니었다. 아니, 그들의 긴 생애에 ?渶琯?멜로디로든 몇천 번이나 들어왔던 곡이었다. 켤 때마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비는 어두운 호텔 안으로 두둑두둑 떨어졌다. 비는 서늘하게 열려 있는 창문으로 들어와 포치의 타는 듯한 바닥을 씻었다. 비는 지붕에 내렸다. 뜨거운 모래에 소리를 내며 내렸다. 비는 녹슨 자동차에도, 텅 빈 마구간에도, 뜰의 말라비틀어진 선인장에도 마구 쏟아졌다. 비는 창문을 씻고 먼지를 가라앉히고 빗물통을 채우고 문간에 물방울의 발을 쳤다―사람이 지나가면 양쪽으로 갈라지며 딸그락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의 경쾌한 감촉과 서늘함을 탤르 씨와 스미스 씨에게 마구 퍼부었다. 비의 상냥한 무게와 압력에 짓눌린 듯이 두 사나이는 차츰 허리를 굽히더니 아까처럼 다시 의자에 앉았다. 끊임없이 빗줄기가 그들의 얼굴을 때렸으므로 그들은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손으로 이마에 차양을 만들었다. 앉은 채 그들은 조용히 머리를 뒤로 젖히고 비한테 얼굴을 맡겼다.
심한 빗줄기는 한참 동안 계속 내렸다. 손가락이 하프 줄에서 떨어질 때마다 약해졌다가는 다시 두세 번 심하게 때리듯이 퍼붓고는 그쳤다.
떨어지고 있는 몇천 개의 빗방울을 번갯불이 얼어붙게 했을 때 찍은 사진처럼 마지막 화음이 공중에서 멎었다. 그러자 번개가 사라졌다. 마지막 빗방울이 어둠 속에 소리없이 떨어졌다.
미스 힐굿이 하프 줄에서 손을 뗐다. 눈이 감겨져 있었다.
탤르 씨와 스미스 씨가 눈을 뜨자 로비 저쪽의 그 이상한 두 여자는 비를 맞은 기색도 없이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몸을 떨었다. 그들은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자 2층 복도 구석에서 소리가 났다. 그것이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가르쳐주었다.
지칠 대로 지친 새가 힘없이 날개를 퍼덕이고 있는 듯한 소리가 2층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던 것이다.
두 사나이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플렘리 씨가 낸 소리였다.
플렘리 씨가 자기 방에서 박수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분간하는 데 탤르 씨는 몇 초나 걸렸다. 그러자 탤르 씨는 스미스 씨를 쿡 찌르고 먼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터질 듯한 박수를 보냈다. 메아리는 호텔의 텅 빈 공간을 이리저리 반향하여 벽에 부딪고, 거울을 치고, 창문에 부딪치고는 모든 방에서 달아나려고 했다.
이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폭풍우의 내습에 당황한 듯이 미스 힐굿은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에는 사나이들이 리사이틀을 할 차례였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손뼉을 쳤다. 마치 손에 가득한 폭죽(爆竹)을 차례차례 터뜨리고 있는 듯했다. 플렘리 씨가 소리질렀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손가락이 부어오르고 숨이 찰 때가지 우뢰 같은 박수를 되풀이했다. 이윽고 그들은 손을 무릎에 놓았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스미스 씨는 천천히 일어나 하프를 뚫어지게 보다가 밖으로 나가 슈트케이스를 날라왔다. 그는 로비 계단 밑에 서서 한참 동안 미스 힐굿을 보고 있었다. 그는 계단의 첫째 단 구석에 놓여 있는 그녀의 가방을 흘끗 보았다. 그는 그녀의 슈트케이스와 그녀를 번갈아보며 묻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미스 힐굿은 하프를 보고 자기의 슈트케이스를 보고 탤르 씨를 보고 마지막으로 스미스 씨를 보았다.
그녀는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스미스 씨는 허리를 굽혀 자기의 가방을 한쪽 겨드랑에 끼고 어두컴컴한 긴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미스 힐굿은 다시 하프를 어깨에 대고 켜기 시작했다―그녀가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켰는지 그녀의 연주에 맞추어 그가 움직였는지는 알 필요도 없었지만.
계단 중간쯤에서 스미스 씨는 빛깔이 바랜 가운을 걸치고 천천히 내려오는 플렘리 씨와 마주쳤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멈추어서서 저 밑 로비 한쪽 구석에 있는 사나이와 또 한쪽 구석에 있는 두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빛과 움직임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했다.
앞으로는 매일 밤―평생토록 매일 밤 하프 켜는 소리가 흐르고 서늘한 빗소리가 흐르겠지. 뜰의 호스로 지붕에 물을 뿌릴 필요도 이젠 없다. 포치에 앉은 채, 침대에 누운 채 들으면 되는 것이다...... 내리는 소리를...... 내리는 소리를...... 내리는 소리를......
스미스 씨는 계단을 올라갔다. 플렘리 씨는 내려갔다.
하프여, 하프여, 귀를 기울이고 들어라!
50년 이래의 가뭄이 걷히고 영원한 장마가 시작된 것이다.
해설
미국은 신비스러운 나라라고 여겨질 때가 있다.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그렇게 생각된다. 공상과학소설 독자라면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 레이 브래드버리는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이다.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가 대중적인 인기도 있다. 주로 단편을 쓰지만, 일류 오락잡지며 부인잡지며 SF 잡지에 작품이 연재되고 단편집으로도 엮어져서 여러 판(版)을 거듭하고 있다. 물론 고료(稿料)도 꽤 비싸다.
결국 아주 인기있는 대중작가인 셈이다. 그러나 그의 문장을 읽어보면 이미지가 풍부하고 연상(連想)의 비약이 개성적이며, 언어의 선택이 자유로와서 한국적인 상식으로 볼 때 결코 대중적인 문체(文體)가 아니다. 이해하기 쉬운 점 등은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의 감각에 충실하게 쓰고 있다. 그러면서도 구어체(口語體)의 쉬운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지만, 그 조합(組合)이 독특한 데다 곳곳에 하나씩 어려운 단어가 들어 있다. 과연 미국 대중들에게 이것이 이해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추리소설 작가 중에는 엘러리 퀸처럼 얽히고 설킨 난해(難解)한 문장을 쓰는 사람도 있 감각적인 느낌을 겨냥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순수문학가 가운데에는 트루먼 캐포티처럼 감각적이고 섬세하고 화려하며 기교적인 어려운 문장을 쓰는 작가도 있으나, 대중의 인기를 얻으면서 브래드버리만큼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사람은 달리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비평가들이 격찬하는 까닭은 잘 알 수 있지만―많은 독자를 끌어들이고 있는 힘은 과연 무엇일까? 문체없는 소설의 범람 속에 살고 있는 우리 한국인으로서는 좀 이해하기가 어렵다. 미국은 신비스러운 나라라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아무튼 브래드버리는 자신의 문체를 중요시하는 작가이다. 스토리 텔러로서의 재능이라면 그를 능가하는 다른 작가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보아서 우리말로 옮기기 참으로 불가능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의 작품에는 때때로 스토리다운 스토리가 없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것은 그 문체 때문이니만큼 우리말로 옮기기가 아주 어렵다. 이 책에 수록된 <이카로스 몽골페 라이트> 등이 그러한 작품으로서, 원문(原文)의 리듬과 감각의 비약을 한국어로 옮김에 있어 실패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좋은 점은 어느 나라 사람에게 있어서나 역시 좋은 듯하다.
그의 본명은 레이먼드 더글러스 브래드버리로, 일리노이 주에서 1920년에 태어났다. 하이 스쿨을 나왔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며, 작품이 활자화되던 처음 무렵에 O 헨리 상을 수상하고는 고급 잡지로 진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책 한 권만을 읽고는 그가 어느 정도의 순수문학가인지 알 수 없으나, 브래드버리라는 작가가 이해되는 독자에게는 여러 설명이 필요없으며 이해되지 않는 독자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납득할 수 없는 작가일 것이다. 클리프튼 파디먼은"브래드버리처럼 쓰는 작가는 오직 브래드버리뿐이다" 라고 말하고 있으며, 브래드버리 자신도"나는 나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작품을 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브래드버리는 참으로 유니크한 작가인 것이다.
이 단편집은 1959년 더블티 사(社)에서 출판된 것으로 본디 제목은 이며, 지금으로서는 가장 새로운 작품집이다.
그에게는 다음 현재 아홉 권의 저서가 있다. 첫작품이 1940년에 발표되었으므로 20년에 걸쳐 아홉 권을 발표했다면 과작가(寡作家)인 편이다.
1 Dark Carnival
2 The Martian Chronicle
3 The Illustrated Man
4 The Golden Apples of the Sun
5 Fahrenheit 451
6 Switch on the Night
7 The October Country
8 Dandelion Wine
9 A Medicine for Melancholy
이기석/역자
일본 ??오치대예과를 거쳐 연희전문을 졸업하다. 수도여사대영문과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일보출판국장으로 있다. 역서에 드라이저<아 레니> 모옴<오색의 여신> 서로이언<생의 어느 하오> 등이 있다.
멜랑콜리의 묘약 / 레이 브래드버리 동서추리문고
1979년 6월 1일 발행
역자 이기석 발행인 고정일 발행처 동서문화사
서울 강남구 신사동 299-2 전화 58-7710·4466·4477 등록 제2-101호(윤)
인쇄·신일인쇄 신성인쇄 달성인쇄 옵셋·평화당 인쇄 제책·동협제책
'마 > ㅓ'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멀홀랜드 드라이브 (0) | 2013.03.10 |
---|---|
명탐정 코난, 네버앤딩 결말이 보이지 않는 만화 (0) | 2012.09.14 |
멘붕, 멘탈붕괴 (0) | 2012.08.17 |
명탐정 하퍼의 낡은 포르쉐 오픈카에 대해서 (0) | 2012.08.02 |
멜린다 게이츠, 코카콜라로부터 배워야 할 것 (0) | 2011.06.29 |
메탈베이블레이드. 팽이 신드롬. 마케팅 트렌드를 바꾸다 (0) | 2011.06.13 |
명계남, 러시앤캐시 노짱 패러디 광고 (0) | 2011.05.31 |
메시, 축구의 신을 경배하라 (0) | 2011.05.29 |
메가쇼킹 만화 어록 (0) | 2011.05.25 |
메모상자 사용법 - Niklas Luhamann (0) | 2008.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