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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선>에 대한 비판을 비판한다.

2002.12.16 / 문일평(영화평론가)  

필름 2.0은 지난 103호에 김기덕의 새 영화 <해안선>을 비판하는 토니 레인즈, 김영진, 이지훈의 평을 실었다. 매우 공격적인 톤으로 일관한 글에서 세 필자는 김기덕 영화의 동어 반복과 조악한 표현을 '씹었다'. 김기덕의 작품 세계에 관한 평문으로 평단에 데뷔한 본지 스탭 평론가 문일평이 그에 대한 반론을 보내왔다. 김기덕을 비판한 글의 논지 못지 않게 공세적인 분위기로 쓴 이 글에서 문일평은 세 평론가의 김기덕 비판이 무의미하며 심지어는 폭력에 가깝다는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이 논쟁이 김기덕의 영화에 대한 생산적인 토론이 되길 기대하며 문일평의 반론을 전제한다

뭔가 좀 이상하다. Film2.0 지난 호에 실린, 김기덕을 비판하는 세 편의 글은 정말 이상하다. <해안선>을 보고 '분노'를 참지 못해 멀리서 글을 보내온 토니 레인즈를 비롯해, 김기덕을 너무 무시한 것이 아닌가 스스로를 의심해 오다 그것을 일축시키는 영화가 개봉되자 무섭게 달려드는 김영진, 그리고 김기덕 옹호론자였다가 이번 영화를 계기로 전향한 이지훈, 이들은 거침없는 어투로 김기덕의 새 영화를 총체적으로 공격한다. 이들은 김기덕을 에워싸고 그의 새 영화를 열심히 밟아 뭉갠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들은 너무 열심히 김기덕을 비난한다. '기본적인 예술가의 태도를 망각'(김영진)하고, '일종의 재앙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한'(토니 레인즈) 영화를 내놓은, 그리고 '심하게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이지훈) 감독을 끌어내리는 데 이들은 너무 넓은 지면을 소비하고, 필요 없는 정력을 쏟아붓고 있다. 그들 말대로라면 <해안선>을 그토록 수고롭게 비판하는 것은 넌센스다. 그들에게는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는 영화인 것이다. 아마 그들이 <해안선>을 막다른 골목 한구석에 몰아넣은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들은 김기덕에게 속아왔다는 사실이 불쾌했을 것이다. <해안선>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라는 사실에, 또 그가 영화를 내놓을 때마다 그의 이름이 큰 지면에 오르내리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영화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 그들은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그가 무엇인가를 더 숨겨놓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해안선>에 이르러 손바닥을 펴 보인 그의 손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음을 확인한 듯 하다.

김기덕의 영화가 어쨌다고? 그걸 몰랐나?

나는 사실 이 세 편의 글이 모두 설득력 있는 글이고, (일부 동의하지 못하는 대목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구구절절 옳은 말들로만 씌어진 글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해안선>이라는 텍스트만을 대상으로 했을 때, 세 필자의 이야기에는 별다른 오류나 모순이 없었다. 김기덕 옹호론자로 간단히 분류될 수는 없지만, 그의 영화들을 관심 있게 지켜봐온 나로서는, 어이없게도 이렇게 손쉬운 언어로 김기덕의 영화들이 재단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 동안 김기덕을 이야기하던 논자들이 의도적으로 간과했던 지점들을, 그들은 남김 없이 들춰내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그들의 매서운 발길질이 범하고 있는 오류이기도 하다. 그들은 김기덕에 관한 논의의 맥락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진행돼온 김기덕에 관한 논의의 맥락을 꼼꼼히 살피지 못한 토니 레인즈가 깃발을 들어서일까. 그들은 <해안선>을 논쟁의 궤적으로부터 분리하고, 단지 그 영화가 안겨준 불쾌함에 기반해서만 글을 쓰고 있었다. 김기덕의 영화들이 점하는 위치의 고유함만큼이나 그에 관한 논의들도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는 여느 감독들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접근되었고, 그러한 특수한 독법의 연속성 위에서만 논의가 진전될 수 있었다. 그런데 김기덕을 비난하는 이 세 편의 글은, <해안선>을 둘러싸고 있는 컨텍스트를 부정하고, 김기덕이 <악어>를 내놓을 당시의 언어로 돌아가고 있다. 그래야 <해안선>이 풍기는 불쾌하고 조악한 냄새를 설득력 있게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니 레인즈는 "인물의 범위가 너무 작고, 플롯은 너무 반복적이며, 추정할 수 있는 정치적 '메시지'도 아주 끝까지 나이브하다."고 김기덕의 원시주의가 실패로 돌아간 이유를 설명한다. 이 말은 전적으로 옳지만, 한편으로는 틀렸다. 그가 나열한 약점들은 김기덕의 모든 영화가 안고 있는 불구적인 결함들이다. 과연 <섬>에서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실제상황>의 플롯은 덜 반복적이며, (토니 레인즈가 가장 좋아하는 김기덕의 영화인)<야생동물 보호구역>의 정치적 메시지는 팽팽하고 정교한가. 그는 <해안선>의 조악함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하지만, 결국은 김기덕에 관한 논의의 원점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 역시 김기덕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서구에 그의 영화들을 소개할 때는, 저러한 핸디캡들을 괄호로 묶어놓았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그 "사춘기적 욕망"으로 연출된 '조악한 습작들'에 관한 논의를 진행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 김기덕 영화의 불구성에 눈을 감고 관용적인 태도를 취해온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서만 발견되는 고유한 에너지를 목격했기 때문이 아닐까.(사실 김기덕의 영화에 대한 관용적인 시선과 불관용의 비난이 뒤얽혀 마찰음을 내 온 것이 김기덕 논쟁의 주요한 양상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허약한 기본기와 명백한 불구성을 감춰두었던 괄호를 지워내고, 김기덕의 영화를 비난하는 그의 변심이 나는 당혹스럽다. 마치 수화로 귀머거리와 줄곧 대화하던 사람이 난데없이 음성언어로 '왜 너는 듣지도 못하냐'고 일갈하며 등을 돌리는 격이다.

토니 레인즈는, 또한 김기덕이 '1998년부터 기존의 체제에 편입되었다'며, 그가 더이상 아웃사이더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김기덕의 작품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 이 안락한 제작 환경에 대한 대응책이라는 주장까지 펼친다. 그런데 이 말은 가볍게 생각해 보아도 억지스러워 보인다. 물론 김기덕의 세계가 근본적으로 조금도 변하지 않고 반복돼온 것은 사실이다. 토니 레인즈의 말대로 "그는 여전히 눈길을 던지는 모든 곳에서 야만성과 잔인함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문제될 만한 것인가. 오히려 김기덕의 시야에서 야만성(그것을 어떻게 부르든)이 사라진다면, 김기덕의 존재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이상 김기덕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김기덕은 의도적으로 '문명'을 거절한 것이 아니다. 그 야생성이 그의 정체이고, 깜냥이다. 그가 "이제 디자이너의 옷을 입고 베를린이나 베니스의 최고급 호텔에 머문다는 사실"보다는, 드레스 코드가 정장으로 규정된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장에 여전히 야구 모자를 쓴 채 나타나는 인물이라는 사실에 더욱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맨살의 상상력이 주는 흥미

김기덕에 관한 진지한 논의는 이러한 폭력적인 비난이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이지훈은 <해안선>이 이러저러한 '최초의 아이디어로부터 단 한 줄의 시나리오도 쓰지 않은 영화'라고 쓴웃음을 짓고 있는데, 사실 이는 김기덕의 '고유한' 작업 방식이다. <파란 대문>은 친구 대신 몸을 대주는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영화고, <나쁜 남자>는 길거리를 지나가는 마음에 드는 여대생을 창녀로 전락시킨다는 초기의 설정으로부터 몇 발자국 나가지 않은 영화다.

이러한 아이디어 외의 설정과 이미지들은 모두 러닝 타임을 채우기 위해 부연된 요소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또 김기덕의 영화를 독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은, 김기덕이 의도한 대목에서보다 그가 긴장을 풀고 느슨해지는 순간 그의 본심이 노출된다는 사실이다. 표현의 잉여에서 김기덕은 더욱 김기덕다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곧이 곧대로 바라보는 대신 그 손가락 자체의 뉘앙스를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가 '조국의 평화 통일을 기원한다'는 자막을 삽입했다고 해서, 또 족구장의 네트 아래 한반도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해서 그에게 너무 화를 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김기덕이 지시한 방식으로 읽어내기를 애초부터 거부해야 그에 관한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관습적인 관점으로 그러한 기호들의 조악함을 비난한다면 무의미한 냉소만이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김영진의 말대로, 한반도 분단 상황에 관해 언급하는 자막은 자신감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배달의 기수'를 떠올리게 할 만큼 그의 느슨한 인식을 노출시킨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표현들이 항상 흥미롭다. 그것이 맨살의 상상력이고, 벌거벗은 인식론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표현의 깊이와 숙성도를 일반적인 기준으로 측정하고 재단하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은 빙 둘러가지 않아서(혹은 그러지 못해서) 일단 의미 있다. 김영진은 부정하지만, 그것은 순진하기 때문에 재미있고 의미 있다. 그 순진함은 광기 때문이고, 그의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그 광인의 비극성이 의도되지 않은 희극적 상황과 만나기 때문이다. (김기영의 영화에서도 유사한 결합의 양상이 종종 목격되는데, 그 영화들은 훨씬 계산되고 조직화된 입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성격은 정반대로 나타난다.)

김기덕의 공격적이고 잔혹한 세계 역시 여전히 오해되고 있다. 김영진은 김기덕에게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이 존재하는 잔혹한 세상을 목격하고 우리의 감각을 흥분시키려는, 발견자인 척하는 자의 사상"이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에 관해 좀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김기덕 영화의 공격성은 계급적인 박탈감에 근거하는 심리적 양상이다. 찬찬히 더듬어보면 이는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모델에 신기하리만큼 꼭 들어맞는다. <해안선>에서 강상병은 의병 제대를 하고도 부대를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그곳으로 되돌아가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가 도시에서는 더이상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는 그것이 민간인을 사실했기 때문인 듯이 그려지지만, 그러한 트라우마와 부대로 돌아가는 행위 사이의 논리적인 고리는 허약하다. 물론 민간인을 사살하고 그의 애인을 미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그를 심리적으로 더욱 고립시키기는 한다.) 부대는 완전 계급의 사회인데, 이는 동시에 '사회적 계급'이 무의미한 집단임을 의미한다. 즉 도시에서의 계급은 부대 안에서 무효화된다. 이곳은 <악어>의 한강 다리 밑, <파란 대문>의 외딴 여관, <섬>의 저수지와 그 성격이 같은 공간이다. 그곳은 강상병이 유일하게 숨쉴 수 있는 (김기덕 영화의 주요한 이미지인) 물 속이고, 자궁이다. 그런데 그는 그를 보호하는 상병이라는 2차적인 계급마저 박탈당한 것이다. 강상병의 공격성은 이러한 정황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해안선>은 예전의 공격성이 누그러진 김기덕 영화다. '장동건이 출연하는 영화'이기 때문인지, 김기덕은 동물적인 본능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렸다.' 추측하건대 <해안선>에 대한 대부분의 불만은 사실 그의 세계가 너무 밋밋해져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동안 장동건을 비롯한 제도권의 배우들에게 프러포즈해 보기 좋게 거절당했지만, 이제 그들에게조차 매력적인 감독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대한 경계를 늦추기 시작한 듯 하다. 그는 더이상 배우들에게 낚시 바늘을 쥐어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는 그의 영화팬들을 실망시켰지만 '인간 김기덕'에게는 분명 긍정적인 변화다.

문명화되지 않은 육질의 감촉

<해안선>이 김기덕의 영화 중에서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작품이라는 데에는 나 역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해안선>이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별도로 집중 공격을 당할만한 근거도 그리 분명하지 않다. 김기덕은 수평 이동해서 다른 소재로 동어 반복했을 뿐이다. 만약 그 동어 반복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다른 논리로 진작에 비판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김기덕에 관한 일련의 논의는 일단 그 동어 반복을 끌어안은 채로 이루어져 왔다. 그의 영화가 지닌 독특한 에너지 때문에 눈감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기덕은 독특한 경력을 가진 감독이다. 그가 제도권 교육이나 영화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영화를 제대로 보면서 자라지도 못했다는 사실은 김기덕 영화를 폄하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하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김기덕 감독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맨손으로 영화를 만드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문명화되지 않은 육질의 감각을 품고 있다. 이는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해안선>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의 영화에는 독특한 계급성이 반영되어 있고, 제도권 교육을 고스란히 거친 감독들이 짜낼 수 없는 고유한 뉘앙스들이 행간에 숨어 있다. 공격적인 폭력 뒤에 자리잡은 독특한 서정이나, 구원을 꾀하는 동물적인 안간힘은 그만의 것이다. <해안선>이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평가는 다른 김기덕 영화들과의 유기적인 연속성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단지 한 편의 영화가 안겨준 불쾌감 때문에 김기덕 영화 전체에 회의를 표하거나, 다음 작품의 가능성까지 원천 봉쇄하는 입장 역시 비평의 사명을 저버리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김기덕의 영화는 독특한 심리적인 상황과 계급적인 조건의 산물이다. 그에게 영화적 관습의 질서, 즉 '문명'을 강요하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