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에 관한 논쟁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나쁜 남자'
이번 일기는 좀 이상한 속편이다. 여기서 이상하다는 말을 한 이유는 이 속편이 티티엘의 영화일기에서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씨네 21에 쓴 김기덕감독에 관한 글 (그런데 이 제목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결국 홍상수는 미학을 선택했고, 김기덕은 종교를 선택했다"의 속편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시네 21 337호 2002년 1월 22일-29일 호에 실려있다. 물론 씨네21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한겨레 사이트인 http://www.hani.co.kr/로 들어가신 다음 씨네 21을 클릭 하시면 된다. 다만 과월호 원고라서 번거로우시겠지만, 무료 회원등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속편은 앞의 글을 반드시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이 두 개의 글은 완전히 독립된 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글을 쓰면서 (사실 나는 남의 영화에 관한 글을 거의 안 읽는 편인데) 미리 허문영 씨네 21 편집장이 내게 논쟁의 맥락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언질을 주었기 때문에 동료들이 쓴 김기덕감독에 관한 글들을 읽어보았다. 그러면서 영화저널들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네티즌들의 견해들도 찾아보았다. 내가 읽은 김기덕감독에 관한 인터뷰는 21개 였고, 영화평론가(의 이름을 걸고 쓴 자못 비장한 내용)의 글은 37편이었고, (웹 진들의 필자를 포함해서) 네티즌들이 '호의와 적대감을 가리지 않고, 최소한 열 줄 이상의 견해를 밝히면서' 쓴 글은 184편이었다. (아마도 '당연히' 더 있을 것이다. 사실 인터넷에 올라온 모든 글을 다 찾아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김기덕 감독의 홈페이지와 <나쁜 남자>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서너줄의 자유게시판 글은 포함시키지 않은 숫자이다) 이걸 모두 읽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사실 이리저리 뒤적이기 위해서는 디스켓에 담아놓고 볼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프린트를 해야 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환경보호운동가들께서는 안심하실 것. 나는 항상 프린트의 대부분을 이면지를 활용한다) 그러니까 이 글은 김기덕의 영화에 관한 글이라기보다는 그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떠올리면서(또는 영감을 얻으면서) 역설적으로 김기덕(의 담론들)에게 다가가려는 글이다.
추신. 여기에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용을 밝히지 않았다. 이 점 글의 주인들께서는 양해를 바란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함께 나는 이 글을 쓴 것이다.
(중략)......악한 것이 항구적인 법칙이 되어가고 있으며, 선한 것이 노력이 되는, 그럼으로써 이미 다른 잔혹함에 추가된 하나의 잔혹함이 되는......(중략)
앙토냉 아르토 "서간집"
나는 구역질이 난다, 고로 존재한다.
쥘리아 크리스테바 "사랑의 역사, 또는 이야기(들)"
제 영화를 보면 갈 데까지 가잖아요. 그 다음은 갔던 데까지 갔던 그 끝이 도로 시작점이 아닐까. 그런 순환구조를 생각하죠. 도대체 우리가 이 사회에서 악을 다 몰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라는.
김기덕 인터뷰 중에서
그러니까 이 이상한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나는 마치 도서관의 사서가 고문서를 뒤지듯이, 우리 시대의 기괴하게 얽힌 문서고인 인터넷을 이러 저리 찾아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영화감독 김기덕에 관해서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평소 같으면 그냥 한자씩 또박또박 써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좀 성격이 다른 글이었다. <나쁜 남자>는 이제까지의 그의 영화와는 달리 크게 성공하고 있었으며(그런데, 그 성공은 영화감독 김기덕을 응원하는 영화 애호가들이 생겨나서가 아니고, 주인공 한기역을 맡은 배우 조재현씨가 텔레비전 드라마 <피아노>로 성공하면서 그를 스크린에서 보려는 관객들의 덕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 드라마를 보지 못했다), 두 개의 영화주간지 씨네 21과 필름2.0에서는 김기덕을 중심에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또 하나의 주간지 시네버스는 이 영화를 그저 스쳐 지나갔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내가 몸담았던 키노에서는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리미어는 관심을 가졌지만, 그건 조재현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였다. 스크린은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한 가지 다행한 점과 한 가지 안타까운 점. 다행한 까닭은 이 토론이 조재현을 중심으로 벌어진 것이 아니라(사실은 조재현 때문에 성공한 것이라고 공공연히 이야기되어지는 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연출한 김기덕과 영화 <나쁜 남자>를 그 중심에 놓고 벌어진 점이며, 안타까운 점은 두 영화저널 사이에서 서로 아무런 견해가 오가지 않으면서 자체 내에서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싣고서 논쟁을 서로 따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건 좀 모순된 태도이다. 이를테면 까이에 뒤 시네마에서 지지하기로 작정하면 거기에 글을 쓰는 필진 전체가 애정을 고백한다. 그래서 다른 영화저널에서 이 영화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반격한다. 이를테면 모두들 무시한 최근 서극의 영화 <순류, 역류>에 대한 지지의 입장. 그런데 이 영화는 진짜 걸작이다!) 그건 두 저널이 서로 자신의 권위를 매우 중시 여기기 때문일 것이며,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두 저널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모인 편집동인들의 공개적인 지면이 아니라 말 그대로 기능적인 저널의 몫을 하기 때문에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까닭일 것이다. (나는 두 저널의 부수를 알지 못한다. 또는 알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두 저널에서 어떤 영화를 놓고,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갖고 격렬하게 토론을 벌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견해의 합의를 볼 수 없는 예술이다. 만일 그런 합의를 본다면 그 자리는 대부분 국가기구에 의해서 무언가 강제적인 조치를 취하거나, 아니면 영화를 질로부터 수량화하여 이윤을 계산하거나, 가장 부드러운 경우에조차 영화를 보고 난 다음 교과서적인 판단을 내리려는 경우뿐이다) 씨네 21에서는 내게 한 주 앞서 쓴 유운성씨외 주유신씨의 글을 보내왔고, 그 다음에는 김기덕감독과 <나쁜 남자>에 대한 글을 찾아보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썼고(씨네 21 제 337호), 심영섭씨의 글('여성을 재예속화하는 4중의 시선')과 함께 실렸다. 그 주에 필름 2.0에서는 여섯명의 필자를 동원해서 <나쁜 남자>에 관한 찬반논쟁을 사이좋게 세 명씩 나눠서 썼다. 옹호한 글은 이상용씨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문일평씨의 '암컷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이지훈기자의 '폭력은 그들의 도덕이자 순결이다'이다. 그리고 비판한 글은 오동진 편집위원의 '김기덕의 분노, 그러나 이상한 아쉬움', 김성욱씨의 '신체의 훼손에 관한 남자의 나쁜 상상', 그리고 김선아씨의 '여성의 몸을 동원한 동정 없는 세상의 역겨움'이 실렸다. 내 글이 실린 다음 주 씨네 21에서는 문학평론가 정과리씨와 정신분석의 백상빈씨의 좌담이 이어졌다. 아마도 한 편의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글이 양쪽의 진영으로 나뉘어서 일시에 쓰여진 것은 처음 인 것 같다. 모든 글들이 배울 점도 있었고, 미처 내가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을 건드리는 대목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찬성과 반대로 나누기는 했지만, 양쪽의 글이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또한 비판의 글들이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 비판의 지점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영화를 지지하는 글들이 같은 이유로 <나쁜 남자>를 변호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글들은 분류되어 묶여서 읽히는 것보다는 별도로 하나씩 읽을 때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 글들을 페미니즘과 반(反) 페미니즘의 글쓰기로 한 쌍을 만들거나, 또는 페미니즘과 작가주의로 묶는 것은 위험하다. 우선 <나쁜 남자>를 페미니즘으로 읽으려는 글들의 전제조건은 그 바탕에 신기하게도 김기덕을 이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다음(이 논법은 대부분 같은 과정을 따라간다. 이를테면 "김기덕은 어찌되었건 작가이다. 그런데 '나쁜' 작가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제부터 밝히려는 것은 그가 작가인 것이 아니라 그가 '나쁜' 이유이다") 그것의 바탕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위험해진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영화를 다루는 방식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낸 작가를 효과의 최종 책임자로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가설을 믿지 않는다. (좀 더 나의 입장을 고백하자면) 작가주의가 (전기주의적) 신비평이나 (기호학의 틀 안에서 도식화 시켜낸) 구조주의의 틀 안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작가의 죽음을 말하는) 롤랑 바르뜨나 (작가,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어보는) 푸코를 빌려오는 것은 너무 멀리 나가는 것이다. 나는 작가라는 말을 끌어들일 때 (프랑소와 라블레를 설명하는) 바흐친과 (보들레르를 끌어들이는) 벤야민의 그 중간 어딘가에 서려고 한다. (사실 영화에서 작가에 관한 담론들은 너무 다른 입장의 배경에 기대어 있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작가와 텍스트는 그 둘 사이에서 살아 숨쉬는 세상이, 모순으로 꿈꾸는 사회가, 투쟁이 계속되는 영토가, 역사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알레고리가 피와 살과 눈물을 갖고 개념적 인물이 된 주인공과 협상을 벌이는 중이다. 그러니까 그 사이를 매개하는 경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쁜 남자>에서 한기를 문제 삼아서 김기덕을 공격하는 한편, 그렇게 함으로써 한기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이론의 이름을 빌려 정말 전투를 벌려야 하는 행위의 대상을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건 이미 (정신분석을 바탕으로 한 시네 페미니즘의 교과서가 된) 롤라 멀베이가 1975년 '보이는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라는 글에서 알프레드 히치콕과 조셉 폰 스턴버그를 끌어들이면서 예정된 일이기 때문이다. 매우 은밀한 형식이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페미니즘 영화 담론들은 작가주의의 자장 안에 있거나 또는 장르의 틀 안에서 수행된다. 이 말은 시네 페미니즘이 다른 예술이론 분야에서와 달리 작가주의와 장르의 가설을 부정하면 비판의 틀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또는 페미니즘은 영화에서 작가주의와 장르의 남근주의적 가설을 공격하면서 역설적으로 그것을 그냥 인정해버린다. (똑같이 정신분석학에 기대고 있으면서 여기서 시네-정신분석학과 갈라선다. 페미니즘이 정신분석학의 주도권을 쥔 것처럼 보였을 때는 이것이 문제되지 않았지만, 정색을 하고 정신분석학을 끌어들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프로이드 이론 자체가 페미니즘의 관점과 맞서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크리스테바와 이리가라이, 엘렌느 시쿠스의 이론적 굴곡들과 오이디푸스 이전 단계에로의 후퇴. 앞문에서 쫓아낸 늑대가 뒷문으로 들어온다는 속담 그대로! 끌어들인 이론이 자신들의 주장을 뒤집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슬라보예 지젝을 중심으로 한 라캉-헤겔(-마르크스)주의의 지적처럼 페미니즘은 이론적이라기보다는 점점 미시-정치적 담론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자리는 페미니즘에 대한 검토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 서로 다른 글들은 마치 대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마치 거울에 마주한 것처럼 서로를 비쳐보는 왜상(歪像)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읽으려는 텍스트는 구조로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항상 효과의 흔적이기 때문에, 결국 그 흔적을 만들어내는 정서의 운동을 뒤따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운동의 개념적 인물인 주인공이 중요해진다. (적어도 <나쁜 남자>가 '좋든 나쁘든' 예술적인 텍스트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운동이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뒤집힌 귀납주의자가 되어서 구조가 운동을 만들어낸다고 오해한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생각해보려는 것은 이 운동을 구조로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이다. <나쁜 남자>를 둘러 싼 대부분의 글이 (그를 옹호하건, 아니면 비판하건 마찬가지로) 이 영화를 매우 위험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위험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실제로 라는 말이 중요하다. 이 영화는 사법제도가 인정하는 심의를 통과해서, 공개적인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보여졌으며, 이 집행과정에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장선우의 <거짓말>과 비교해 보라) <나쁜 남자>는 겁주는 척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두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서운 척 하는 것이다. 왜 서로가 그 무언가를 말하는 대신 그런 척 하는 것일까? 이 논쟁은 어딘가 그림자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연극처럼 보인다. 두려운 척 하지만 정말 두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 어떤 글도 이 영화를 두고 말하면서 자기의 세계관을 걸고 말하지는 않는다) 겁을 주긴 하지만 정말 무섭지는 않다. (<나쁜 남자>는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이나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처럼 근본주의적인 논쟁을 벌이려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나쁜 남자>를 빌려서 자기의 입장을 강조하는 선에서 멈추는 것으로 대부분의 글들은 만족한다. 여기서 그로데스크한 텍스트는 <나쁜 남자>가 아니라 <나쁜 남자>에 관한 글들이다. <나쁜 남자>는 그러니까 이 영화에 대해서 말할 때 사람들은 <나쁜 남자>를 말하기보다는(또는 말하는 척 하면서) <나쁜 남자>가 만들어내는 그 효과-영향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영화에 대해서 부정적인 많은 네티즌들의 글에는 여성을 (남성의) 성적인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것, 매춘에 대한 혐오, 한기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선화의 궁극적인 동의, 그 모든 것들을 정말 흉내내고 싶은 남성들의 심리를 부추길 수 있다는 염려가 담겨있다. 그러나 정말 영화가 그 정도의 직접적인 힘을 사회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사실 그 염려는 인과관계가 바뀐 것이다. 그건 영화를 효과가 아니라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사회의 관계와 사건에 대한 원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화를 너무 과장하는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는 반대로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나쁜 남자>를 통해서 자기의 담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그 어떤 생산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어떤 글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글들 전체를 만들어내는 통합 담론으로서의 주인-담론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 안에서 일시적으로 거의 동시에 동일한 모델이 등장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사실은 <나쁜 남자>가 그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매개하여, 그 매개가 만들어내는 관계를 경유해서, 그로 인하여 만들어낸 담론들을 생산하면서, 그 안에서 정말 행사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또는 어떤 것인가?) 그러니까 이 두 개의 질문은 전혀 다른 수준의 것이다. 그것이 행사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과 어떤 것이냐고 물어보는 것은 이 담론들의 주인-담론의 (프로이드적 의미에서) 경제적 기능성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점. <나쁜 남자>를 둘러싼 담론들이 신기하게도 거대한 비판에 기대어서 실행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담론들은 결국에는 윤리적 판단을 하기 위해서 과학적 기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계몽주의적 경향에로 이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매우 흥미 있는 비판을 던진 것은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오은하씨의 "사랑이 원래 짐승 같은 거 아닌가?"라는 글이다. (씨네 21 제 338호) 거기서 그녀는 "이제 여자로서 <나쁜 남자>를 좋게 보았어요, 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내가 여자가 아닌 줄 알고 파시스트적인 남자들과 함께 관음증과 사도-마조히즘을 희희락락 즐기는 꼴볼견 반편이에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척 하면서 이 영화를 둘러싼 담론들을 풍자한다. 오은하씨는 사실상 문제의 핵심을 건드린 셈이다. 왜냐하면 이 담론들은 이중의 난처함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우선 <나쁜 남자>가 (틀렸다고 말하건, 아니면 옳다고 말하건) '나쁘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나쁜 남자>는 제도 안에서 과격한 것이다. 만일 정말 나쁘다면 그것을 공개적으로 영화관에서 일반 대중들에게 상영할 수 있도록 허가한 제도의 선택 과정이 문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위험한 모서리가 있다. 만일 한 걸음을 잘못 딛으면 예술에서의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 물론 누구도 그런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쁜 남자>는 아무리 논쟁이 진척되어도 그런 틀 안에서는 결코 정치적인 모서리를 갖지 못한다. 그러기는커녕 점점 더 모서리를 건드리려고 할수록 결국 정치적 침묵을 끌어낼 수 있을 뿐이거나, 아무리 좋게 말해도 미학적인 과격한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 뿐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나쁜 남자>를 걸고 넘어지면서 사실은 이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을 대상으로 비판이 전개된다. 하지만 진퇴양난이 되긴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 비판은 결국에는 아무 말도 안 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상상적 관객(imaginary spectatorship)을 끌어들여 벌이는 숨바꼭질은 아주 교활하게 정치적 범인을 숨겨주는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타니아 마들레스키와 카자 실버만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롤라 멀베이를 비판하고 있다) 또는 정치적 범인을 내버려두고 윤리적인 제도 안에 남겨진 초자아를 꾸짖는 것이다. 그러나 초자아는 그 꾸지람을 듣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쁜 남자>는 초자아의 얼룩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불화가 있다. 그러니까 <나쁜 남자> 안에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려고 아무리 들어오려고 해도 사실 텍스트 안에서 그 나쁜 태도가 실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부에 남아서 버티면서 동시에 외부에로 다시 나가야 하는데 나가면 정말 정치적인 투표가 필요해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 경계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이 경계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이 경계를 건드리는 대목을 수수께끼로 만든다.
그 수수께끼는 김기덕을 불연속적인 대상, 또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 상징의 서사, 이미 주어진 윤리의 지식을 위협하는 불결함,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당연히 있어야 할 이상적인 비전에 대한 상실을 가져 올 것이라는 경고, 더 나아가 이미 그것이 현실에서 교정되고 있는 치료를 다시 후퇴시킬 것이라는 태도의 재생산이라는 예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사실상 이 대부분의 공격은 김기덕을 향한 것이 아니라(그렇게 하면 결국에는 제도와 마주쳐야 한다), <나쁜 남자>를 본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을 추상화시키고 개념화시키면서 문제는 이중 삼중으로 얽힌다. 왜 그러한 일을 벌이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을 둘로 만들어놓은 다음, 한편으로는 공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편이라고 앞질러 선언해서 미처 반문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인용한 오은하씨의 말은 얼마나 솔직하게 그 담론의 강박관념을 표현하고 있는가! 이 담론들은 자꾸만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이중의 추방과 연대의 담론들은 이 영화가 현실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현실을 재생산하고, 그 안에서 이미 주어진 현실의 관계를 고정시키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한다. 여기에 갑자기 그의 영화를 설명하는 대신 자꾸만 가정법이 개입하는 것을 눈 여겨 볼 것. 만일 이렇게 바꾼다면, 또는 만일 이렇게 된다면, 또는 당신이 이런 입장에 놓인다면, 이라는 가정법을 통해서 설명한다. 그런데 이미 그것은 소용없는 차이의 반복이다. 왜냐하면 그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사실-효과를 말하면서 원인을 바꾸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동일화를 강조하는 것은 그 대상과 주체를 맞바꿔 치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사라지는 것은 과정의 원인이며, 새롭게 만들어낸 구조는 정서를 지식에 예속시킨다. 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일까? 여기 다시 주인-담론이 어슬렁거리면서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가정법을 쓰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주인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는 자기의 주인-담론의 복화술을 가장 순진하게 그만 들키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나쁜 남자>에게 너무 부당한 연출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분명하게 현실과 영화가 일차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그 위험을 스스로 충분히 경고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예방효과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부터 갑자기 소설이 끼어 든다. 또는 담론들은 김기덕을 소재로 하여 <나쁜 남자>를 인용한 소설이 되어간다. 무엇보다도 담론들이 자기의 주인에게 충실하기 위해서 거꾸로 <나쁜 남자>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방해해야만 하는 역설이 생겨난다. 그러니까 상징적 절차에 의해서 가정법을 통하여 전제를 만들고, 이미 사람들이 본 것을 잘못 본 것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이미 주어진 윤리의 바깥에 놓여야 하는 잘못이 있다는 계몽주의 소설의 경향을 그대로 따른다. (그런데 문학평론가인 정과리씨는 이것을 꼭 이 맥락에서 한 말은 아니지만 한국적인 모더니티의 기형적인 신파라고 부른다. 나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아마도 이에 대한 정의는 좀 더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쁜 남자>를 바깥에 놓을 수 있을까? 우선 책임의 소재를 묻는 과정이 이미 집행된 다음이다. 여기에 어쩔 수 없이 이 영화를 반대하건, 아니면 옹호하건 상관없이 그를 작가주의의 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깥에 놓아야 하는 것은 제도이거나, 또는 이 영화를 만든 시스템이 되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이를테면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 대해서 냉전주의를 껴안은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 '미안하게도' 아무도 이 영화를 만든 이시명 감독을 끌어들이지는 않는다. 그 대신 이러한 영화를 만들어낸 영화의 시스템을 말한다) 그러나 김기덕은 바깥에 놓여지면서 작가의 영광을 얻는 대가로 그 작가는 인간의 탈을 쓴 그 어떤 다른 범주에 속하게 된다. 그렇게 전제를 만들어낸 담론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또는 같은 말이지만 그 담론의 주인이 다루는 바깥에 놓임으로서 김기덕은 여기서 괴물이거나, 정신병자이거나, 짐승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이 대목이 미시-정치학의 주인이 개입하는 순간이다. 왜 괴물이나 정신병자, 짐승을 다루는(서로 다른 여러 분야의) 어휘들이 특정한 영화에 대한 담론 안에서 하나의 텍스트를 둘러싸고 의인화되는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같은 이야기지만 영화와 관련 없는 어휘들이 영화 안에서 미학에 우선하는(또는 심미적인 설명을 대신하는) 윤리적인 판단의 기준이 되어 그 안에서 김기덕을 비-인간의 형상으로 다시 구성하는 것은 결국 무엇 때문일까? 또는 그러한 구성에로 이끄는 우회는 무엇을 정면으로 마주볼 수 없어서 그렇게 돌아서야 하는 것일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수 있다. 소수의 입장으로 이루어진 김기덕의 <나쁜 영화>를 억압받는 다수의 관점으로 비판하면서 그 반대로 이것을 억압하는 다수의 계보 안에 속한다고 꾸짖는 일이 왜 일어난 것인가? 여기에는 일종의 역학이 존재한다. 의도적으로 일반화의 오류 추론을 끌어들이면서, 사실은 자기의 담론을 방어하는 기술인 것이다.
이 의인화의 소설에 과학을 내세운 윤리적 계몽주의가 끼어 든 것은 몇 개의 가설을 떠올리게 만든다. 여기에는 비판의 도식주의가 있다. 물론 그 도식의 주인-담론은 억압 가설이다. 그 가설은 동의할 수도 있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관계 속에서 모든 문화는 그 재생산의 장치이며, 그 중에서도 영화는 그것을 재현관계 속에서 미시적 권력의 운송 메커니즘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억압의 기원을 묻지 않는다면 이 투쟁은 무의미하다. 가부장제를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계급(과 부르주아 국가기구)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나쁜 남자>는 남자의 관점만이 존재하는 포르노그래피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복종과 억압, 육체적인 타락과 계급의 추락은 전적으로 남자의 편에 서서 현실 속에서 그 관계를 재현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오히려 여기에는 상징과 알레고리가 동화처럼 이루어져서 현실로부터 두 걸음이나 물러나 있다. 그 한 걸음은 비현실성을 염두에 둔 판타지의 서사 구조이고, 두 번째 걸음은 다시 거기서 더 물러서 종교적인 구원과 희생의 담론에 맞닿아 있다. 그것을 남성의 성적인 판타지라고 말하는 것은 판타지를 증후와 착각한 것이다. <나쁜 남자>가 기대고 있는 판타지는 욕망의 재현이 아니라 상상적 타자와 상징적 타자의 상호-주관적인 대상의 욕망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죽은 한기가 어떻게 살아서 다시 선화를 데리고 매춘을 하면서 여행을 돌아다닐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서로 겹치고 있지만(그러니까 마지막 장면은 사실은 이 영화의 절반이며, 그 앞부분 전체가 나머지 절반이다. 그런데 두 이야기는 어느 쪽이 어느 쪽의 판타지인지를 알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동시에 그 이야기는 그 자체로 내부적인 폐쇄의 억압 안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그 안에서 김기덕은 두 명의 등장인물을 다룬다. 그가 다루는 등장인물에게서 우리는 내면의 변화를 발견하기 어렵다. 또는 내 생각으로 김기덕은 다루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영화 속의 표현을 빌리면) '깡패 새끼'가 여대생을 창녀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것을 실행하는 의도나 결정의 차원을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그 안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행된 다음에 이루어지는 그 의도의 실패에 대해서 주목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쁜 남자>는 대부분의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의 견해와 달리 그 의도의 실패에 기대고 있다. 그래서 그 실패를 통해서 판타지의 좌절을 말하고 싶어한다. 결국 의도는 실패했기 때문에 의미는 매거핀이 된다. <나쁜 남자>를 금방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정작 김기덕이 하고 싶은 말은 거의 끝에 이르러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앞부분에서 던져놓은 이야기로 이해하려고 하면, 결국에는 의미의 무미건조한 도식에로 끌려 들어가서 자꾸만 여대생 선화를 창녀로 만드는 것이 옳은가, 또는 그런 것을 상상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런 것이 기쁨을 주는가, 라고 묻게 만든다. 김기덕은 타락한 대상이 숭고해질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가 거울과 유리를 놓고, 한쪽이 다른 한 쪽을 바라보면서 다른 한 쪽이 반대쪽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시선의 판옵틱 비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쿨레쇼프 효과를 통해서 거울에 반사될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상호-주관적인 욕망의 구멍이다. 그 고정점에서 자꾸만 모든 것이 지연된다. 그 안에 뛰어들어 채워져야 하는 이상적 자아는 누구의 것인지 끝내 알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서 그것은 할 수 없이 잉여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의사 소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잉여를 소비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위협하는 자아-이상은 신경질을 내기 시작한다. 여기에 비대칭의 선택이 주어진다. 그런데 그것을 대칭으로 만들려는 것은 갑작스러이 개입한 윤리적 각색이다. 그러한 노력은 전면적이거나 지배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 반대로 자꾸만 개입해서 순환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기능 하는 위치를 바꾸면서 이 논쟁 전체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김기덕(의 <나쁜 영화>)를 논쟁적으로 만드는 대신 여기에 어떤 추방의 메카니즘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김기덕은 자기 영화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는 자기 영화의 주제를 찾아가는 중이다. 우리는 왜 우리 시대에 하필이면 김기덕의 영화가 도착했느냐고 물어보는 대신 이미 도착한 김기덕의 영화가 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냐고 물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김기덕의 영화가 우리들의 문화적 자장 안에서 제도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로 하여금 그를 외면하고픈 일그러진 왜상의 정체에 대해서 마주보게 될 것이다. 그를 마주 보기 힘든 것은 그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문제를 가졌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점. 김기덕은 괴물이나 정신병자나 짐승이 아니다. 그가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하는 생각이 우리와 다른 것을 끌어내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생각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생각할 때 앞과 뒤를 바꿔치면 안 되는 것은 영화란 효과가 아니라 원인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 중심에서부터 출발하여 자신의 힘이 아래쪽으로 어디까지 뻗쳐갈 것인지, 어느 만큼 재생산될 것인지, 그리고 사회의 가장 미세한 요소들까지 어떻게 침투해갈 수 있는지를 알고자 애쓰는 권력에 대해 연역적 방법을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푸코의 말이다.
-정성일
이번 일기는 좀 이상한 속편이다. 여기서 이상하다는 말을 한 이유는 이 속편이 티티엘의 영화일기에서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씨네 21에 쓴 김기덕감독에 관한 글 (그런데 이 제목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결국 홍상수는 미학을 선택했고, 김기덕은 종교를 선택했다"의 속편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시네 21 337호 2002년 1월 22일-29일 호에 실려있다. 물론 씨네21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한겨레 사이트인 http://www.hani.co.kr/로 들어가신 다음 씨네 21을 클릭 하시면 된다. 다만 과월호 원고라서 번거로우시겠지만, 무료 회원등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속편은 앞의 글을 반드시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이 두 개의 글은 완전히 독립된 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글을 쓰면서 (사실 나는 남의 영화에 관한 글을 거의 안 읽는 편인데) 미리 허문영 씨네 21 편집장이 내게 논쟁의 맥락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언질을 주었기 때문에 동료들이 쓴 김기덕감독에 관한 글들을 읽어보았다. 그러면서 영화저널들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네티즌들의 견해들도 찾아보았다. 내가 읽은 김기덕감독에 관한 인터뷰는 21개 였고, 영화평론가(의 이름을 걸고 쓴 자못 비장한 내용)의 글은 37편이었고, (웹 진들의 필자를 포함해서) 네티즌들이 '호의와 적대감을 가리지 않고, 최소한 열 줄 이상의 견해를 밝히면서' 쓴 글은 184편이었다. (아마도 '당연히' 더 있을 것이다. 사실 인터넷에 올라온 모든 글을 다 찾아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김기덕 감독의 홈페이지와 <나쁜 남자>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서너줄의 자유게시판 글은 포함시키지 않은 숫자이다) 이걸 모두 읽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사실 이리저리 뒤적이기 위해서는 디스켓에 담아놓고 볼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프린트를 해야 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환경보호운동가들께서는 안심하실 것. 나는 항상 프린트의 대부분을 이면지를 활용한다) 그러니까 이 글은 김기덕의 영화에 관한 글이라기보다는 그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떠올리면서(또는 영감을 얻으면서) 역설적으로 김기덕(의 담론들)에게 다가가려는 글이다.
추신. 여기에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용을 밝히지 않았다. 이 점 글의 주인들께서는 양해를 바란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함께 나는 이 글을 쓴 것이다.
(중략)......악한 것이 항구적인 법칙이 되어가고 있으며, 선한 것이 노력이 되는, 그럼으로써 이미 다른 잔혹함에 추가된 하나의 잔혹함이 되는......(중략)
앙토냉 아르토 "서간집"
나는 구역질이 난다, 고로 존재한다.
쥘리아 크리스테바 "사랑의 역사, 또는 이야기(들)"
제 영화를 보면 갈 데까지 가잖아요. 그 다음은 갔던 데까지 갔던 그 끝이 도로 시작점이 아닐까. 그런 순환구조를 생각하죠. 도대체 우리가 이 사회에서 악을 다 몰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라는.
김기덕 인터뷰 중에서
그러니까 이 이상한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나는 마치 도서관의 사서가 고문서를 뒤지듯이, 우리 시대의 기괴하게 얽힌 문서고인 인터넷을 이러 저리 찾아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영화감독 김기덕에 관해서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평소 같으면 그냥 한자씩 또박또박 써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좀 성격이 다른 글이었다. <나쁜 남자>는 이제까지의 그의 영화와는 달리 크게 성공하고 있었으며(그런데, 그 성공은 영화감독 김기덕을 응원하는 영화 애호가들이 생겨나서가 아니고, 주인공 한기역을 맡은 배우 조재현씨가 텔레비전 드라마 <피아노>로 성공하면서 그를 스크린에서 보려는 관객들의 덕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 드라마를 보지 못했다), 두 개의 영화주간지 씨네 21과 필름2.0에서는 김기덕을 중심에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또 하나의 주간지 시네버스는 이 영화를 그저 스쳐 지나갔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내가 몸담았던 키노에서는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리미어는 관심을 가졌지만, 그건 조재현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였다. 스크린은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한 가지 다행한 점과 한 가지 안타까운 점. 다행한 까닭은 이 토론이 조재현을 중심으로 벌어진 것이 아니라(사실은 조재현 때문에 성공한 것이라고 공공연히 이야기되어지는 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연출한 김기덕과 영화 <나쁜 남자>를 그 중심에 놓고 벌어진 점이며, 안타까운 점은 두 영화저널 사이에서 서로 아무런 견해가 오가지 않으면서 자체 내에서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싣고서 논쟁을 서로 따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건 좀 모순된 태도이다. 이를테면 까이에 뒤 시네마에서 지지하기로 작정하면 거기에 글을 쓰는 필진 전체가 애정을 고백한다. 그래서 다른 영화저널에서 이 영화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반격한다. 이를테면 모두들 무시한 최근 서극의 영화 <순류, 역류>에 대한 지지의 입장. 그런데 이 영화는 진짜 걸작이다!) 그건 두 저널이 서로 자신의 권위를 매우 중시 여기기 때문일 것이며,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두 저널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모인 편집동인들의 공개적인 지면이 아니라 말 그대로 기능적인 저널의 몫을 하기 때문에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까닭일 것이다. (나는 두 저널의 부수를 알지 못한다. 또는 알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두 저널에서 어떤 영화를 놓고,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갖고 격렬하게 토론을 벌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견해의 합의를 볼 수 없는 예술이다. 만일 그런 합의를 본다면 그 자리는 대부분 국가기구에 의해서 무언가 강제적인 조치를 취하거나, 아니면 영화를 질로부터 수량화하여 이윤을 계산하거나, 가장 부드러운 경우에조차 영화를 보고 난 다음 교과서적인 판단을 내리려는 경우뿐이다) 씨네 21에서는 내게 한 주 앞서 쓴 유운성씨외 주유신씨의 글을 보내왔고, 그 다음에는 김기덕감독과 <나쁜 남자>에 대한 글을 찾아보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썼고(씨네 21 제 337호), 심영섭씨의 글('여성을 재예속화하는 4중의 시선')과 함께 실렸다. 그 주에 필름 2.0에서는 여섯명의 필자를 동원해서 <나쁜 남자>에 관한 찬반논쟁을 사이좋게 세 명씩 나눠서 썼다. 옹호한 글은 이상용씨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문일평씨의 '암컷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이지훈기자의 '폭력은 그들의 도덕이자 순결이다'이다. 그리고 비판한 글은 오동진 편집위원의 '김기덕의 분노, 그러나 이상한 아쉬움', 김성욱씨의 '신체의 훼손에 관한 남자의 나쁜 상상', 그리고 김선아씨의 '여성의 몸을 동원한 동정 없는 세상의 역겨움'이 실렸다. 내 글이 실린 다음 주 씨네 21에서는 문학평론가 정과리씨와 정신분석의 백상빈씨의 좌담이 이어졌다. 아마도 한 편의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글이 양쪽의 진영으로 나뉘어서 일시에 쓰여진 것은 처음 인 것 같다. 모든 글들이 배울 점도 있었고, 미처 내가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을 건드리는 대목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찬성과 반대로 나누기는 했지만, 양쪽의 글이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또한 비판의 글들이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 비판의 지점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영화를 지지하는 글들이 같은 이유로 <나쁜 남자>를 변호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글들은 분류되어 묶여서 읽히는 것보다는 별도로 하나씩 읽을 때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 글들을 페미니즘과 반(反) 페미니즘의 글쓰기로 한 쌍을 만들거나, 또는 페미니즘과 작가주의로 묶는 것은 위험하다. 우선 <나쁜 남자>를 페미니즘으로 읽으려는 글들의 전제조건은 그 바탕에 신기하게도 김기덕을 이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다음(이 논법은 대부분 같은 과정을 따라간다. 이를테면 "김기덕은 어찌되었건 작가이다. 그런데 '나쁜' 작가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제부터 밝히려는 것은 그가 작가인 것이 아니라 그가 '나쁜' 이유이다") 그것의 바탕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위험해진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영화를 다루는 방식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낸 작가를 효과의 최종 책임자로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가설을 믿지 않는다. (좀 더 나의 입장을 고백하자면) 작가주의가 (전기주의적) 신비평이나 (기호학의 틀 안에서 도식화 시켜낸) 구조주의의 틀 안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작가의 죽음을 말하는) 롤랑 바르뜨나 (작가,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어보는) 푸코를 빌려오는 것은 너무 멀리 나가는 것이다. 나는 작가라는 말을 끌어들일 때 (프랑소와 라블레를 설명하는) 바흐친과 (보들레르를 끌어들이는) 벤야민의 그 중간 어딘가에 서려고 한다. (사실 영화에서 작가에 관한 담론들은 너무 다른 입장의 배경에 기대어 있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작가와 텍스트는 그 둘 사이에서 살아 숨쉬는 세상이, 모순으로 꿈꾸는 사회가, 투쟁이 계속되는 영토가, 역사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알레고리가 피와 살과 눈물을 갖고 개념적 인물이 된 주인공과 협상을 벌이는 중이다. 그러니까 그 사이를 매개하는 경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쁜 남자>에서 한기를 문제 삼아서 김기덕을 공격하는 한편, 그렇게 함으로써 한기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이론의 이름을 빌려 정말 전투를 벌려야 하는 행위의 대상을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건 이미 (정신분석을 바탕으로 한 시네 페미니즘의 교과서가 된) 롤라 멀베이가 1975년 '보이는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라는 글에서 알프레드 히치콕과 조셉 폰 스턴버그를 끌어들이면서 예정된 일이기 때문이다. 매우 은밀한 형식이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페미니즘 영화 담론들은 작가주의의 자장 안에 있거나 또는 장르의 틀 안에서 수행된다. 이 말은 시네 페미니즘이 다른 예술이론 분야에서와 달리 작가주의와 장르의 가설을 부정하면 비판의 틀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또는 페미니즘은 영화에서 작가주의와 장르의 남근주의적 가설을 공격하면서 역설적으로 그것을 그냥 인정해버린다. (똑같이 정신분석학에 기대고 있으면서 여기서 시네-정신분석학과 갈라선다. 페미니즘이 정신분석학의 주도권을 쥔 것처럼 보였을 때는 이것이 문제되지 않았지만, 정색을 하고 정신분석학을 끌어들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프로이드 이론 자체가 페미니즘의 관점과 맞서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크리스테바와 이리가라이, 엘렌느 시쿠스의 이론적 굴곡들과 오이디푸스 이전 단계에로의 후퇴. 앞문에서 쫓아낸 늑대가 뒷문으로 들어온다는 속담 그대로! 끌어들인 이론이 자신들의 주장을 뒤집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슬라보예 지젝을 중심으로 한 라캉-헤겔(-마르크스)주의의 지적처럼 페미니즘은 이론적이라기보다는 점점 미시-정치적 담론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자리는 페미니즘에 대한 검토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 서로 다른 글들은 마치 대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마치 거울에 마주한 것처럼 서로를 비쳐보는 왜상(歪像)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읽으려는 텍스트는 구조로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항상 효과의 흔적이기 때문에, 결국 그 흔적을 만들어내는 정서의 운동을 뒤따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운동의 개념적 인물인 주인공이 중요해진다. (적어도 <나쁜 남자>가 '좋든 나쁘든' 예술적인 텍스트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운동이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뒤집힌 귀납주의자가 되어서 구조가 운동을 만들어낸다고 오해한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생각해보려는 것은 이 운동을 구조로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이다. <나쁜 남자>를 둘러 싼 대부분의 글이 (그를 옹호하건, 아니면 비판하건 마찬가지로) 이 영화를 매우 위험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위험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실제로 라는 말이 중요하다. 이 영화는 사법제도가 인정하는 심의를 통과해서, 공개적인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보여졌으며, 이 집행과정에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장선우의 <거짓말>과 비교해 보라) <나쁜 남자>는 겁주는 척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두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서운 척 하는 것이다. 왜 서로가 그 무언가를 말하는 대신 그런 척 하는 것일까? 이 논쟁은 어딘가 그림자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연극처럼 보인다. 두려운 척 하지만 정말 두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 어떤 글도 이 영화를 두고 말하면서 자기의 세계관을 걸고 말하지는 않는다) 겁을 주긴 하지만 정말 무섭지는 않다. (<나쁜 남자>는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이나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처럼 근본주의적인 논쟁을 벌이려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나쁜 남자>를 빌려서 자기의 입장을 강조하는 선에서 멈추는 것으로 대부분의 글들은 만족한다. 여기서 그로데스크한 텍스트는 <나쁜 남자>가 아니라 <나쁜 남자>에 관한 글들이다. <나쁜 남자>는 그러니까 이 영화에 대해서 말할 때 사람들은 <나쁜 남자>를 말하기보다는(또는 말하는 척 하면서) <나쁜 남자>가 만들어내는 그 효과-영향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영화에 대해서 부정적인 많은 네티즌들의 글에는 여성을 (남성의) 성적인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것, 매춘에 대한 혐오, 한기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선화의 궁극적인 동의, 그 모든 것들을 정말 흉내내고 싶은 남성들의 심리를 부추길 수 있다는 염려가 담겨있다. 그러나 정말 영화가 그 정도의 직접적인 힘을 사회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사실 그 염려는 인과관계가 바뀐 것이다. 그건 영화를 효과가 아니라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사회의 관계와 사건에 대한 원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화를 너무 과장하는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는 반대로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나쁜 남자>를 통해서 자기의 담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그 어떤 생산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어떤 글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글들 전체를 만들어내는 통합 담론으로서의 주인-담론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 안에서 일시적으로 거의 동시에 동일한 모델이 등장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사실은 <나쁜 남자>가 그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매개하여, 그 매개가 만들어내는 관계를 경유해서, 그로 인하여 만들어낸 담론들을 생산하면서, 그 안에서 정말 행사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또는 어떤 것인가?) 그러니까 이 두 개의 질문은 전혀 다른 수준의 것이다. 그것이 행사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과 어떤 것이냐고 물어보는 것은 이 담론들의 주인-담론의 (프로이드적 의미에서) 경제적 기능성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점. <나쁜 남자>를 둘러싼 담론들이 신기하게도 거대한 비판에 기대어서 실행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담론들은 결국에는 윤리적 판단을 하기 위해서 과학적 기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계몽주의적 경향에로 이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매우 흥미 있는 비판을 던진 것은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오은하씨의 "사랑이 원래 짐승 같은 거 아닌가?"라는 글이다. (씨네 21 제 338호) 거기서 그녀는 "이제 여자로서 <나쁜 남자>를 좋게 보았어요, 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내가 여자가 아닌 줄 알고 파시스트적인 남자들과 함께 관음증과 사도-마조히즘을 희희락락 즐기는 꼴볼견 반편이에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척 하면서 이 영화를 둘러싼 담론들을 풍자한다. 오은하씨는 사실상 문제의 핵심을 건드린 셈이다. 왜냐하면 이 담론들은 이중의 난처함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우선 <나쁜 남자>가 (틀렸다고 말하건, 아니면 옳다고 말하건) '나쁘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나쁜 남자>는 제도 안에서 과격한 것이다. 만일 정말 나쁘다면 그것을 공개적으로 영화관에서 일반 대중들에게 상영할 수 있도록 허가한 제도의 선택 과정이 문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위험한 모서리가 있다. 만일 한 걸음을 잘못 딛으면 예술에서의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 물론 누구도 그런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쁜 남자>는 아무리 논쟁이 진척되어도 그런 틀 안에서는 결코 정치적인 모서리를 갖지 못한다. 그러기는커녕 점점 더 모서리를 건드리려고 할수록 결국 정치적 침묵을 끌어낼 수 있을 뿐이거나, 아무리 좋게 말해도 미학적인 과격한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 뿐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나쁜 남자>를 걸고 넘어지면서 사실은 이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을 대상으로 비판이 전개된다. 하지만 진퇴양난이 되긴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 비판은 결국에는 아무 말도 안 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상상적 관객(imaginary spectatorship)을 끌어들여 벌이는 숨바꼭질은 아주 교활하게 정치적 범인을 숨겨주는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타니아 마들레스키와 카자 실버만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롤라 멀베이를 비판하고 있다) 또는 정치적 범인을 내버려두고 윤리적인 제도 안에 남겨진 초자아를 꾸짖는 것이다. 그러나 초자아는 그 꾸지람을 듣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쁜 남자>는 초자아의 얼룩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불화가 있다. 그러니까 <나쁜 남자> 안에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려고 아무리 들어오려고 해도 사실 텍스트 안에서 그 나쁜 태도가 실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부에 남아서 버티면서 동시에 외부에로 다시 나가야 하는데 나가면 정말 정치적인 투표가 필요해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 경계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이 경계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이 경계를 건드리는 대목을 수수께끼로 만든다.
그 수수께끼는 김기덕을 불연속적인 대상, 또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 상징의 서사, 이미 주어진 윤리의 지식을 위협하는 불결함,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당연히 있어야 할 이상적인 비전에 대한 상실을 가져 올 것이라는 경고, 더 나아가 이미 그것이 현실에서 교정되고 있는 치료를 다시 후퇴시킬 것이라는 태도의 재생산이라는 예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사실상 이 대부분의 공격은 김기덕을 향한 것이 아니라(그렇게 하면 결국에는 제도와 마주쳐야 한다), <나쁜 남자>를 본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을 추상화시키고 개념화시키면서 문제는 이중 삼중으로 얽힌다. 왜 그러한 일을 벌이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을 둘로 만들어놓은 다음, 한편으로는 공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편이라고 앞질러 선언해서 미처 반문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인용한 오은하씨의 말은 얼마나 솔직하게 그 담론의 강박관념을 표현하고 있는가! 이 담론들은 자꾸만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이중의 추방과 연대의 담론들은 이 영화가 현실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현실을 재생산하고, 그 안에서 이미 주어진 현실의 관계를 고정시키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한다. 여기에 갑자기 그의 영화를 설명하는 대신 자꾸만 가정법이 개입하는 것을 눈 여겨 볼 것. 만일 이렇게 바꾼다면, 또는 만일 이렇게 된다면, 또는 당신이 이런 입장에 놓인다면, 이라는 가정법을 통해서 설명한다. 그런데 이미 그것은 소용없는 차이의 반복이다. 왜냐하면 그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사실-효과를 말하면서 원인을 바꾸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동일화를 강조하는 것은 그 대상과 주체를 맞바꿔 치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사라지는 것은 과정의 원인이며, 새롭게 만들어낸 구조는 정서를 지식에 예속시킨다. 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일까? 여기 다시 주인-담론이 어슬렁거리면서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가정법을 쓰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주인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는 자기의 주인-담론의 복화술을 가장 순진하게 그만 들키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나쁜 남자>에게 너무 부당한 연출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분명하게 현실과 영화가 일차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그 위험을 스스로 충분히 경고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예방효과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부터 갑자기 소설이 끼어 든다. 또는 담론들은 김기덕을 소재로 하여 <나쁜 남자>를 인용한 소설이 되어간다. 무엇보다도 담론들이 자기의 주인에게 충실하기 위해서 거꾸로 <나쁜 남자>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방해해야만 하는 역설이 생겨난다. 그러니까 상징적 절차에 의해서 가정법을 통하여 전제를 만들고, 이미 사람들이 본 것을 잘못 본 것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이미 주어진 윤리의 바깥에 놓여야 하는 잘못이 있다는 계몽주의 소설의 경향을 그대로 따른다. (그런데 문학평론가인 정과리씨는 이것을 꼭 이 맥락에서 한 말은 아니지만 한국적인 모더니티의 기형적인 신파라고 부른다. 나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아마도 이에 대한 정의는 좀 더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쁜 남자>를 바깥에 놓을 수 있을까? 우선 책임의 소재를 묻는 과정이 이미 집행된 다음이다. 여기에 어쩔 수 없이 이 영화를 반대하건, 아니면 옹호하건 상관없이 그를 작가주의의 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깥에 놓아야 하는 것은 제도이거나, 또는 이 영화를 만든 시스템이 되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이를테면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 대해서 냉전주의를 껴안은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 '미안하게도' 아무도 이 영화를 만든 이시명 감독을 끌어들이지는 않는다. 그 대신 이러한 영화를 만들어낸 영화의 시스템을 말한다) 그러나 김기덕은 바깥에 놓여지면서 작가의 영광을 얻는 대가로 그 작가는 인간의 탈을 쓴 그 어떤 다른 범주에 속하게 된다. 그렇게 전제를 만들어낸 담론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또는 같은 말이지만 그 담론의 주인이 다루는 바깥에 놓임으로서 김기덕은 여기서 괴물이거나, 정신병자이거나, 짐승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이 대목이 미시-정치학의 주인이 개입하는 순간이다. 왜 괴물이나 정신병자, 짐승을 다루는(서로 다른 여러 분야의) 어휘들이 특정한 영화에 대한 담론 안에서 하나의 텍스트를 둘러싸고 의인화되는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같은 이야기지만 영화와 관련 없는 어휘들이 영화 안에서 미학에 우선하는(또는 심미적인 설명을 대신하는) 윤리적인 판단의 기준이 되어 그 안에서 김기덕을 비-인간의 형상으로 다시 구성하는 것은 결국 무엇 때문일까? 또는 그러한 구성에로 이끄는 우회는 무엇을 정면으로 마주볼 수 없어서 그렇게 돌아서야 하는 것일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수 있다. 소수의 입장으로 이루어진 김기덕의 <나쁜 영화>를 억압받는 다수의 관점으로 비판하면서 그 반대로 이것을 억압하는 다수의 계보 안에 속한다고 꾸짖는 일이 왜 일어난 것인가? 여기에는 일종의 역학이 존재한다. 의도적으로 일반화의 오류 추론을 끌어들이면서, 사실은 자기의 담론을 방어하는 기술인 것이다.
이 의인화의 소설에 과학을 내세운 윤리적 계몽주의가 끼어 든 것은 몇 개의 가설을 떠올리게 만든다. 여기에는 비판의 도식주의가 있다. 물론 그 도식의 주인-담론은 억압 가설이다. 그 가설은 동의할 수도 있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관계 속에서 모든 문화는 그 재생산의 장치이며, 그 중에서도 영화는 그것을 재현관계 속에서 미시적 권력의 운송 메커니즘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억압의 기원을 묻지 않는다면 이 투쟁은 무의미하다. 가부장제를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계급(과 부르주아 국가기구)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나쁜 남자>는 남자의 관점만이 존재하는 포르노그래피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복종과 억압, 육체적인 타락과 계급의 추락은 전적으로 남자의 편에 서서 현실 속에서 그 관계를 재현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오히려 여기에는 상징과 알레고리가 동화처럼 이루어져서 현실로부터 두 걸음이나 물러나 있다. 그 한 걸음은 비현실성을 염두에 둔 판타지의 서사 구조이고, 두 번째 걸음은 다시 거기서 더 물러서 종교적인 구원과 희생의 담론에 맞닿아 있다. 그것을 남성의 성적인 판타지라고 말하는 것은 판타지를 증후와 착각한 것이다. <나쁜 남자>가 기대고 있는 판타지는 욕망의 재현이 아니라 상상적 타자와 상징적 타자의 상호-주관적인 대상의 욕망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죽은 한기가 어떻게 살아서 다시 선화를 데리고 매춘을 하면서 여행을 돌아다닐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서로 겹치고 있지만(그러니까 마지막 장면은 사실은 이 영화의 절반이며, 그 앞부분 전체가 나머지 절반이다. 그런데 두 이야기는 어느 쪽이 어느 쪽의 판타지인지를 알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동시에 그 이야기는 그 자체로 내부적인 폐쇄의 억압 안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그 안에서 김기덕은 두 명의 등장인물을 다룬다. 그가 다루는 등장인물에게서 우리는 내면의 변화를 발견하기 어렵다. 또는 내 생각으로 김기덕은 다루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영화 속의 표현을 빌리면) '깡패 새끼'가 여대생을 창녀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것을 실행하는 의도나 결정의 차원을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그 안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행된 다음에 이루어지는 그 의도의 실패에 대해서 주목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쁜 남자>는 대부분의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의 견해와 달리 그 의도의 실패에 기대고 있다. 그래서 그 실패를 통해서 판타지의 좌절을 말하고 싶어한다. 결국 의도는 실패했기 때문에 의미는 매거핀이 된다. <나쁜 남자>를 금방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정작 김기덕이 하고 싶은 말은 거의 끝에 이르러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앞부분에서 던져놓은 이야기로 이해하려고 하면, 결국에는 의미의 무미건조한 도식에로 끌려 들어가서 자꾸만 여대생 선화를 창녀로 만드는 것이 옳은가, 또는 그런 것을 상상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런 것이 기쁨을 주는가, 라고 묻게 만든다. 김기덕은 타락한 대상이 숭고해질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가 거울과 유리를 놓고, 한쪽이 다른 한 쪽을 바라보면서 다른 한 쪽이 반대쪽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시선의 판옵틱 비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쿨레쇼프 효과를 통해서 거울에 반사될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상호-주관적인 욕망의 구멍이다. 그 고정점에서 자꾸만 모든 것이 지연된다. 그 안에 뛰어들어 채워져야 하는 이상적 자아는 누구의 것인지 끝내 알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서 그것은 할 수 없이 잉여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의사 소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잉여를 소비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위협하는 자아-이상은 신경질을 내기 시작한다. 여기에 비대칭의 선택이 주어진다. 그런데 그것을 대칭으로 만들려는 것은 갑작스러이 개입한 윤리적 각색이다. 그러한 노력은 전면적이거나 지배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 반대로 자꾸만 개입해서 순환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기능 하는 위치를 바꾸면서 이 논쟁 전체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김기덕(의 <나쁜 영화>)를 논쟁적으로 만드는 대신 여기에 어떤 추방의 메카니즘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김기덕은 자기 영화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는 자기 영화의 주제를 찾아가는 중이다. 우리는 왜 우리 시대에 하필이면 김기덕의 영화가 도착했느냐고 물어보는 대신 이미 도착한 김기덕의 영화가 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냐고 물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김기덕의 영화가 우리들의 문화적 자장 안에서 제도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로 하여금 그를 외면하고픈 일그러진 왜상의 정체에 대해서 마주보게 될 것이다. 그를 마주 보기 힘든 것은 그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문제를 가졌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점. 김기덕은 괴물이나 정신병자나 짐승이 아니다. 그가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하는 생각이 우리와 다른 것을 끌어내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생각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생각할 때 앞과 뒤를 바꿔치면 안 되는 것은 영화란 효과가 아니라 원인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 중심에서부터 출발하여 자신의 힘이 아래쪽으로 어디까지 뻗쳐갈 것인지, 어느 만큼 재생산될 것인지, 그리고 사회의 가장 미세한 요소들까지 어떻게 침투해갈 수 있는지를 알고자 애쓰는 권력에 대해 연역적 방법을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푸코의 말이다.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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