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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년 (2000) 
감독: 봉만대 
출연:  이규영,이천년,박진위,박나정,김동주 
TV방송: 2002/11/30 캐치온 방송


지난 99년말에 비디오대여점에 일대 선풍을 몰고온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해석남녀>란 AV(어덜츠 비디오)란다. 1980년 초 <애마부인>의 안소영 이후 에로 무비에서 이름 석자를 남긴 배우가 있다면 진도희(혹은 진주희) 이후 처음으로 '이규영'이라는 여자배우 아닌가 한다. 각종 미스테리와 전설에 싸인 이규영은 아직도 매니아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단다. 2000년 새해 벽두에 그 '이규영'은 '이천년'이란 에로배우와 공동주연으로 <이천년>이란 비디오에 나왔고 이 영화 또한 비디오 대여점에 일대 폭풍을 몰고 왔었다고 그런다.

사실 <이천년>은 내가 2000년 1월 1일 새 밀레니엄 기념으로 리뷰를 올리려고 했던 작품이었다. (그땐 미혼이었고, 그땐 내 홈페이지가 아직은 '개인'홈페이지의 자유로움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리뷰를 못 올리고 이제사 <이천년>을 새로보고 새롭게 리뷰한다.

최근 미국 HBO자본이 떠나간 프레미엄 영화채널이 '캐치온'이란 이름으로 문패를 바꿔 달았다. 이 채널(캐치온 플러스)에서 주말 밤에 보내주는 '에로틱 아일랜드'라는 시간에 지난 토요일 밤 <이천년>을 방송하였다. 프레미엄 채널에서 '이천년'을? <이천년>은 에로영화 매니아가 아니더라도 들었을만한 몇 가지 흥미로운 이력을 가진 작품이다. 이규영이 나왔다는 사실, 최근 AV업계에서 충무로로 '커밍 아웃'(!)한 봉만대 감독의 작품이며, 이런 영화의 명가 '클릭'이 제작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 영화에 나오는 포르노업자 '박진위'라는 배우도 이 계통에선 알아주는 스타배우이다.

이런 계통의 영화를 충무로 대작영화와 비교한다는 것은 불공정게임이며, 이런 영화의 리뷰를 독립영화 계열과 병치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클릭 사장이 화낼 일이며 봉만대 감독이 짜증낼 처사인지 모른다. 이런 8미리(요즘은 6미리로 찍을테지만) '디지털영화'는 비디오 대여점의 효자종목으로 그 존재의의를 다 하고 있다. 雜說은 여기서 그만 두고.

<이천년>은 출발부터가 왕가위 스타일이다. (정확히는 <타락천사>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싸구려 베끼기 전략이라기보다는 초저예산 영화가 가지는 미덕일 수도 있다. 봉만대 감독(혹은 제작사'클릭') 나름대로 미디어의 특성과 심의의 수위, 그리고 AV매니아의 기대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춰 눈높이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일반 AV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우선 비디오 케이스가 그렇게 천박하지 않다는 것이고, 영화가 어느정도 일정수준의 '내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AV가 갖기 쉬운 최대 결점(아니 최대 강점이기도 하다만...)인 진부한 화면전개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비디오를 빌리는 사람이 기대하는 것은 뻔하다. 출연진들은 밥먹고 하는 짓거리는 그 짓밖에 없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온갖 체위를 다 선보이며 시간을 탕진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봉만대 감독의 <이천년>은 제법 수준높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에 출연하는 20대 전후의 새파란 젊은이들은 나름대로 삶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한다. (출연배우나 등장인물의 이름을 몰라 시놉시스를 잠깐 옮겨본다..)

.....오토바이 레이서가 되고 싶은 용수, 평범을 거부하고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 천년, 평생의 꿈이 영화감독인 주민. 하루하루 용돈을 벌기 위해 물주 용만과 교제하는 거리의 여자 소아, 용수와 주민의 친구이면서 소매치기인 철수. 영화감독이 꿈인 주민은 용수의 오토바이를 팔아 캠코더를 구입하고 용수의 여자인 천년이와 함께 포르노를 찍는다......

이들 젊은이들은 서로 친구이며, 연인이며, 동반자이다. 영화에서 '사실적'이란 섹스씬을 제외하고 감독이 집어넣은 '청춘의 고뇌'는 일반 극영화에서보다 효과가 높다. 생일날 모인 친구들. 서로들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친구를 축복해준다. 그러나 조금씩 쌓이던 갈등구조는 마침내 폭발하고 서로를 비난한다. 이 장면은 이창동 감독이 자주 사용하는 '가족의 분열'을 떠올리게 한다. 잔칫날 모여서 결국은 깨지는 그런 이상한 갈등구조 말이다. 그리고, 돈을 위해 친구를 위해 포르노를 찍게 되었을때 배달된 자장면을 뒤집는 장면도 괜찮은 장면이었다.

괜찮다고? AV에서 괜찮은 것이 무엇이냐면 '박진위'가 다 보여준다. 난 이규영이 누구고, 이천년이 누군지 모른다. 몰라도 감상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그나저나 이 영화에서 젊은이들의 골방, 자취방, 아지트의 공통점이 있다. 사방 벽면에는 각종 영화 포스터가 잔뜩 붙어있다. 영화 만든 사람, 정말 영화 좋아하나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결국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스타일로 자신의 이상(꿈)을 향해 달려가지만 모든 것이 허망하게 무너진다. 교훈적이기도 하네...

참, 이규영의 눈부신 등장과 갑작스런 사라짐에 대한 수많은 전설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폴 토마스 앤더슨 같은 감독이 있다면 이규영을 모델로 하여 괜찮은 영화산업 비하인드 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