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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 : 하나비 Hana-Bi

가/ㅣ 2001. 10. 28. 20:53 Posted by 로드365

Sub』1998.12. 하나-비 / 花-火 Fireworks For A Center Beginning  -정성일

상투적인 도입부, 또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 : 그러니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작해보자. 어쩌면 정말 그랬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일본영화에 너무 익숙하고(설마라고? 그렇다면 당신이 어린 시절 그렇게 소리지르며 주제가를 따라 부르던 그 수많은 텔리비전 '만화영화'들은 모두 어떻게 할 참인가?), 만일 발 빠르게 유행의 담론을 뒤쫓고 있었다면 이와이 슈운지(岩井俊二)로 거의 정점에 오른 일본영화들을 결코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자리에서 일본영화가 법적으로 한국에 53년 3개월 5일 만에 대중 공개를 허가받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를 물어보아야 한다면 다른 표정을 지어야겠지만, 일본영화 중의 그 어떤 한편의 텍스트를 논하기 위해서라면 그 자체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도 일본영화에서 '나카무라 형사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유관순 누나를 때리는 장면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헐리우드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미국인이 되지 않는 것처럼일본영화를 보았다고 해서 일본인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러기는 커녕 매일 헐리우드 영화를 보고 팝송을 들어도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이 이상한 분위기 안에서 우리가 '정식으로 수입추천을 받아 해방 이후 처음 영화관에서 만나는' 일본영화는 기타노 다케시(北野武)의 '하나-비(花-火)'이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으며, 이것은 이 영화제에서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가 '라쇼몽(羅生門)'으로 그랑프리를 받아 일본영활르 처음 서방세계에 알린 지 47년만의 복귀이기도하다. 그는 일본보다 앞서서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자신의 영화를 소개하였으며,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손도장을 찍기도 하였다.



이상한 작가주의, 또는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들 :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비'를 보면서 두세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하나-비'가 일본영화이지만, 이 영화가 '일본영화적'인가라는 의문이다. 그것은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이 미국영화이지만 미국영화적이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이며, 또는 왕가위의 '아비정전'이 홍콩영화이지만 홍콩영화적이지 않은 것과 같은 의문이다. 그러니까 영화들에는 자기에게 주어진 계보 바깥으로 빠져나오려는 의지를 지닌 내부로부터의 바깥 영화들(cinema-dehors)이 존재한다. 이들은 특별히 다른 계보에 서려한다기 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과 싸우는 과정속에서 스스로의 좌표를 상실하고 거꾸로 바깥에서 안의 아우라를 탐색하고 그것을 찾으려는 과정을 자기 영화의 이미지들의 디아스포라적 가치들로 바꾼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상한 형식이 등장한다. 그들에게서는 형식이 자신들이 모색하는 주제에 가 닿아 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연결선을 줄거리에서 찾는다. 그럼으로써 줄거리와 형식은 그들의 지리학 속에서 반대의 기능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에게 일종의 운명이다. 왜냐하면 주어진 것은 그들의 이미지 안에서 이미 아닌 것이며, 그들에게 없기 때문에 그들이 그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시 돌려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타노 다케시의 여화들은 그것을 찾으려는 영화들이다. 그에게는 (영원히 자기의 시대로부터 바깥을 산책하는 유대적 비전으로 독일 로망 시대와 나치즘의 제삼제국 시대의 간극을 비극의 비전으로 파악했던) 벤야민이 말했던 정지상태의 변증법적 긴장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그의 데뷔작 '이 남자, 흉폭하다'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은 살인범과 경찰들의 추적을 그리면서 그 안에서 이상하게도 조용함을 발견하는 인서트들이다. 그들은 추적을 하다 말고 우리들로 하여금 갑자기 세상을 둘러보게 만든다. '3 X 4 - 10월'에서 주인공들은 갑자기 줄거리에서 빠져나와 줄거리를 찾아다닌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에서 두 명의 주인공은 벙어리와 귀머거리이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으며, 정확한 이야기는 그저 우리들이 미지에서 추론할 도리밖에 없다. '소나티네'에서 주인공들은 사건에서 빠져나와 마치 휴가를 떠나듯이 모든 진행을 일시적으로 멈춰 세운다. '키즈 리턴'은 모든 우여곡절을 돌아서 다시 원점으로 온다. 그러니까 기타노 다케시는 이야기로 이어지는 그 모든 계보로부터 나와서 거꾸로 이야기를 찾아다닌다. 그것은 일본영화의 화법으로 더 이상 일본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는 위기의 표현이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본영화의 전통이 악전고투하고 있다면, 기타노 다케시는 그 전통의 현재를 찾아가면서 그 반대로 위기로부터의 비판적 거리를 만들어낸다.



죽음에 관한 명상, 예술에 관한 액션 : 그런데 기타노 다케시는 여기서 그 질문을 멀리서 던지는 대신 그 스스로의 내부로부터 찾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이 영화의 감독이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며, 또한 그가 영화를 준비하여 완성하는 대신 먼저 촬영을 하고 편집을 하면서 생각해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영화를 연출하고 창조한다기 보다는 그 반대로 만들면서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 안에서 점점 더 자기의 위기를 밀어넣으면서 반성한다. 그의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창조보다는 반성으로 기울어진다. 그것이 그의 영화가 온통 후회로 가득차 있는 이유이다.



'하나-비'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자기들의 삶 안에서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부터 철회해야만 한다. 주인공 니시 형사(기타노 다케시)는 얼마전 딸을 잃었고, 게다가 아내는 백혈명으로 서서히 죽어간다. 그 아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야쿠자들에게 돈을 빌렸고, 그 때문에 빚독촉에 시달린다. 그의 가장 친한 호리베 형사는 니시 형사를 대신해서 잠복근무를 하다가 그만 총에 맞아 하반신 불구가 된다. 그의 아내도 떠나가고, 그의 아이들도 그를 버린다. 니시 형사는 현실 안에서 아무런 해결방법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제 니시 형사에게 남은 방법은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버릴 것인가이다. 이 영화는 자기의 운명에 관한 결정이 아니라 그 의지의 과정에 관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죽음은 예정되어진 것이고, 이미 시작하는 순간은 소멸로 향하는 그 어느 순간붙의 좌료이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의 모든 세세한 이야기들은 모두 죽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이 영화에서 폭력에 관한 기대를 갖고 있다면 실망할 지도 모른다. 물론 예상치 않은 순간, 폭력과 피를 흘리는 장면들이 보여지지만(심지어 나무젓가락으로 눈을 찌르기도 한다) '하나-비'에서 다루어지는 폭력들은 대부분 죽음과 관련지어져 있기 때문에 정서적일뿐 결코 감각에 의지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하나-비'가 불러 일으키는 진정한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니시 형사를 괴롭히는 것은 그가 저항할 수 없는 운명적인 폭력들이다. 느리게 죽어가고 있는 아내의 병은 이 영화속에서 폭력의 본질을 드러낸다. 또는 친구의 반신불수는 그를 계속해서 폭력의 플래쉬 백으로 되돌린다.



하지만 기타노 다케시는 그 모든 폭력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만이 이 통속적인 이야기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들이 만들어내는 숭고함이다. 그는 이 폭력들로부터 거꾸로 자기를 구원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는 죽어가는 아내를 데리고 영원히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반신불구의 친구를 위해서 그림 도구를 사서 보내준다. 서로 달라 보이는 이 두가지 구원의 모색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두가지가 니시 형사를 통해서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여기 영화의 마술이 개입된다. 그 둘 사이를 영화는 평행편집으로 보여주면서 단숨에 하나로 서로 이어낸다. 그것을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그저 표면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에 대한 은유로 탈바꿈하면서 그 둘은 서로에 대한 내면에로의 여행이 된다. 말하자면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오직 액션만 남아있는 이 영화에서(니시 형사의 아내는 영화 전편을 통해서 단 두마디만 할 뿐이다. 또한 니시 형사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액션이라는 표면은 더할 나위 없는 고백의 제스츄어가 된다. 호리베 형사가 그리는 그림들은 니시 형사 부부의 마음의 교류가 되며, 니시 형사 부부의 여행은 호리베 형사가 혼자 남은 고독 안에서 그 안에 들어앉은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 되어간다.



그러니까 '하나-비'에서 기타노 다케시가 문제 삼는 것은 왜 지금 세상의 구조는 통속적인 장르의 세계이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없는가에 관한 명상이다. 그는 종종 영화를 멈춰 세워가면서 (이 영화에서 결정적인 순간들은 대부분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그냥 서 있음으로써 우리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돌아보게 만든다. 만일 그것을 세울 수 없으면 주의를 돌리기 위하여 갑자기 반대편의 이야기로 건너가 버린다. 그들은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아무 것도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다. 니시 형사가 마지막 순간 자살할 장소에 도착하는 것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국에는 추적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의 제목 '하나-비'(일본어로 '불꽃놀이')가 영화 안에서 그저 실패로 끝나는 것은 이 영화 전체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그들은 번번히 실패하고, 그 순간 자신들을 돌아본다. 실패만이 지금 우리들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방법일까? 또는 그것에 저항하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일까, 폭력일까? 그 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긴장을 계속되고 대답을 미루어지면서 마지막 순간은 자살로 마무리지어 진다. 그것은 더없이 일본적으로 보이면서도, 이 영화가 우리들의 동시대를 다루면서 자기의 무대를 지구의 그 어느 곳으로 만든다. 기타노 다케시는 영화에서 자기의 지리학적 정서와 보편적 생활세계(Lebenswelt)를 연결시켜 보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일본영화가 아니라 기타노 다케시에게서 배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