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rss 아이콘 이미지

김훈, 한겨레 시절 기사 모음

가/ㅣ 2003. 12. 8. 17:37 Posted by 로드365

함께 해야할 세상 / 부와 가난 대물림되는 ‘신분’  
 
 [한 겨 레] 2003-01-01 (특집) 기획.연재 41면 01판 4189자    
 
   
부자아빠 이상민(38·가명)씨, 대치동에 산다. 할아버지는 종로, 아버지는 서초동에 살았다. 지금 그의 집은 대치동 60평대 아파트다. 가난한 아빠 박경하(40·가명)씨, 봉천동에 산다. 할아버지는 충북 제천, 아버지는 남산 밑 판잣집에 살았다. 지금 그의 집은 7평짜리 월세 단칸방이다.
부자아빠 이씨의 할아버지는 경기도 이천과 파주에 걸쳐 땅을 가진 대지주였다. 조선시대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다.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뒤, 사업을 시작해 월남전 특수와 건설경기를 타고 재산을 더 늘렸다. 강남권 개발 정보를 입수하고 서초동으로 집을 옮긴 것도 1970년대 초반이었다.
이씨는 연세대(84학번)로 진학했다. 어두웠던 시기, 학생운동에 잠시 관심을 보이자 아버지는 그를 미국으로 보내버렸다.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국내에 돌아와 자동차부품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3년 만에 문 닫았다. 2년의 ‘근신’ 기간을 거쳐 99년 유통사업을 시작했다. 두번 다 사업자금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 두번째 사업은 반석 위에 올랐다.
그의 취미는 미식이다. 올해 친구들과 강남에 이탈리안 식당과 일본식 카레집도 열 생각이다. 그는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아들이 있다. 딸은 영화감독, 아들은 금융인이 꿈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딸은 영국, 아들은 중국의 사립학교에 보낼 계획이다.
가난한 아빠 박경하씨. 할아버지는 소작농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할아버지는 마흔 전에 세상을 떠났다. 박씨의 아버지는 해방 직후 중학교를 중퇴하고 무작정 상경해 서울역 소년 지게꾼이 됐다.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지만, 쌀을 빼돌리다 쫓겨났다.
어린 시절 박씨에게 하루는 굶주림과의 전쟁이었다. 어머니는 시장바닥에 떨어진 배추를 주워와 시래기로 죽을 끓여 가족들을 먹였다. 박씨는 공부를 꽤 잘했지만, 공고를 중퇴했다. 육성회비 2천원이 없어서였다. ‘노가다’가 첫 직업이었다. 그런데 20여년이 지난 최근까지 그는 노가다판을 못 떠났다. 그나마도 막노동판에서 얻은 허리병으로 3년 전부터는 일을 못 나간다. 아내의 파출부 월급으로 생계를 꾸린다. 유일한 낙은 200원짜리 솔담배와 700원짜리 소주다.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은 가끔 집에 안 들어온다. 그에게는 삶을 고쳐살 기회가 한번도 오지 않았다. 자녀들에게도 기회가 올 것 같진 않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서울 청담동
서울 성북동이나 한남동은 전통적인 부촌이었다. 이 부촌의 특징은 고립성과 폐쇄성이었다. 부는 드러내지 않아야 할 가치였다. 1970년대 강남 개발과 함께 압구정동에 부촌이 들어섰다. 압구정동은 명동을 옮겨다 놓은 듯했지만, 주민들이 인접 상업권과 생활로 연결되는 소비문화를 만들어냈다.
90년대 들어서는 청담동에 새로운 부촌이 건설됐다. 청담동은 압구정동의 번잡한 분위기를 벗어나 세련된 고급소비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청담동’이라는 마을 이름은 이제는 거대 브랜드다. 부는 마음놓고 드러내도 좋은 가치로 바뀌었다.
시가 20억원 이상의 고급주택과 빌라들이 들어선 주택가 앞 거리에는 최고급 명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청담동 부의 풍경은 패션화되고 살롱화되어 간다. 고급 레스토랑 변기에는 물 위에 빨간 단풍잎이 떠있다. 레스토랑이나 카페의 식탁은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차린다. 조리사가 아니라 음식을 식탁 위에 펼쳐놓는 전문가다. 식탁은 조형예술로 변한다. 프랑스에서 몇년 동안 유학하고 와야만 청담동의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될 수 있다.
단 1종의 명품만으로도 청담동에서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파티를 열 수 있다. ‘프랭크 뮬러’는 최고급 시계 브랜드다. 시계 1개가 2천만~1억원이다. 지난달 중순, 청담동에서는 ‘프랭크 뮬러’ 판촉 파티가 열렸다. 이 파티에는 300여명의 미녀와 신사들이 모였다. 돈은 받지 않는다. 초청된 사람들만 올 수 있는 ‘프라이빗 파티’였다. 부자들은 때때로 실내악 파티를 연다. 자녀들이 모두 악기를 다룰 줄 알아서 몇 가족만 모이면 실내악단을 구성할 수 있다.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고 혼맥이 생기기도 한다. 그들의 부는 상속과 교육과 친교와 정보의 힘에 업혀서 세습된다. 자녀들끼리 고급 명품을 선물로 주고받아 문화적 감성의 동질성을 유지해나간다. 재산과 문화가 함께 세습되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전이 열기를 뿜던 와중에도 청담동 레스토랑은 손님들로 붐볐다. 청담동에서 10여년을 살아온 디자이너 김아무개(42)씨는 “청담동 사람들은 술자리에서 정치이야기를 거의 않는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이미 확보한 부의 기득권을 침해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서울 돌산마을
부와 빈곤은 세습되면서 고착돼가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대물림되어온 부와 빈곤은 아이엠에프 이후 더욱 소통될 수 없는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이제 빈곤은 개인의 노력만으론 극복하기 힘든 ‘절망의 빈곤’이다.
서울 강북구 미아6동 돌산마을에는 1995년 재개발사업으로 철거민이 된 50여세대가 7년째 임시주거단지에서 살고 있다. 50년대 한강홍수 이재민, 60년대 이농자, 70년대 무작정 상경자들이다. 돌산마을은 빈곤의 현대사 그 자체다.
박아무개(73)씨는 전남의 한 섬에서 태어났다. 할머니는 섬에서 소작농의 집으로 출가했다. 남편은 30대 무렵 ‘겨우 밥먹을 만한’ 자신의 농토와 돛단배를 장만했다. 그러자 간경화에 걸렸다. 한줌의 ‘부’는 병 앞에 무너졌다. 남편은 10년을 앓다 떠났고, 할머니는 농토와 배를 팔아 치료비를 댔다. 남편이 떠나자 그는 서울로 올라와 이 마을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노점상, 취로사업, 봉제공장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왔으나 치솟는 전셋값에 몰려 여태껏 이 마을을 떠나지 못했다.
아들 김아무개(40)씨는 어려서 소아마비에 걸렸다. 목발을 짚고 구두공장에서 일해 한 달에 40만~50만원을 벌었다. 그런데 지금은 합병증으로 더이상 일하지 못한다. 김씨의 소망은 검정고시로 2년제 대학에 들어가 사회복지사가 되는 것이다. 3과목은 합격했으나 7과목이 남아 있다. “컴퓨터와 참고서로 공부하는 사람들과 경쟁하기 어렵다”고 김씨는 말했다.
송아무개(77)씨는 전북 부농의 딸이었다. 남편은 일본 유학생이었다. 남편은 한국전쟁 때 좌익활동을 했고, 전쟁이 끝난 뒤 경찰조사를 받고 나서 죽었다. “온몸이 매에 흩어져 죽었다”고 그는 말했다. 남편이 죽자 농토도 흩어졌고,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못 견뎌 서울로 올라왔다. 60년대 초에 이 마을로 들어와 40여년을 살았다. 공사판 막노동을 하며 돈을 벌었다. 아들 문아무개(48)씨는 건설 노동자로 일하다 3년 전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쳤다. 그래서 이 집안에서 돈버는 사람은 할머니의 손녀(24)뿐이다. 딸은 미용기술을 배워 미장원에 취직했다. 이제 막 돈벌이를 시작한 딸에게 세습된 가난의 무게는 무겁다.
더는 일을 할 수 없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여생을 부양해야 하는 일이 딸 혼자 책임져야 할 몫이라면, 딸이 가난을 극복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딸은 “컴퓨터가 있어야 이 세상을 헤치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달 전 300만원을 주고 컴퓨터를 구입했다. 또 아픈 이를 뽑고 임플란트 치아를 해넣는 데 300만원이 들었다. 카드로 결제했다. 앓아누운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600만원 카드빚의 중압을 안고 딸은 매일 산동네를 내려와 미장원으로 출근한다.
자신의 노동수입으로 정부 보조금을 겨우 물리친 사람들의 앞날도 한계선상에서 위태롭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의 주민 6명은 3년 전부터 음식물 쓰레기 수거작업을 하고 있다. 자활지원기관의 보조를 받고 마을의 실직자들과 힘을 합쳐서 시작한 음식물 쓰레기 수거사업은 이제 자리잡혀가고 있다. 이들은 돈을 모으고 자활지원 기관에서 융자도 받아 2.5t짜리 중고트럭 3대를 구입했다. 아침 6시부터 음식점 쓰레기를 수거한다. 한달 평균 1500만원 정도의 수거료를 걷는다. 한 달에 남자들은 120만원, 여자들은 80만원의 수입을 올린다. 이들은 정부보조금을 받지 않는 자립 노동자들의 최하위 계층인 셈이다. 2년째 이 일을 하고 있는 김현수(63)씨는 지난 72년부터 아이엠에프 직전까지 연탄장사를 했다. 부인은 무거운 연탄짐에 뼈를 다쳤다. 난치성 류머티즘이다. 한 달 치료비는 30만원이다. “아직은 버틸 수 있다. 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이들고 병들고 작은 사고라도 난다면, 아무 대책이 없다. ‘이나마라도 또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 속에서 매일 뼛골이 빠지게 일하고 있다.” 김씨의 말이다.
김훈 기자







효순이·미선이 살던 효촌마을 ‘각오 다지는’ 세밑  
 
 [한 겨 레] 2002-12-28 (사회) 뉴스 15면 01판 1575자    
 
지난 여름, 미군 궤도차에 깔려 숨진 효순이와 미선이네 마을(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2리)은 미군 훈련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효순이와 미선이는 이 마을 효촌초등학교 졸업생이다.
효순이 아버지 신현수(49)씨와 미선이 아버지 심수보(49)씨도 같은 해에 효촌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두 집안은 4대째 이 마을에 살고 있다. 두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미군 탱크와 중장비들이 마을길을 지나다녔다. 심씨는 “한평생 미군 옆에서 살면서 미군이란 그저 피해 다녀야 할 존재로 알았다. 그것이 일상이어서 한번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고 말했다. 사고가 난 뒤 미군들은 이 훈련장에 드나들지 않는다. 마을에는 캐터필러 소리가 멈췄다.
미선이·효순이의 장례는 두 아버지의 초등학교 친구들이 맡아서 치렀다. 화장한 재를 뿌릴 때 부모들은 따라가지 않았다. 친구들은 “부모들이 그 꼴을 보면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오지 말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효순이 아버지와 미선이 아버지는 딸의 유골이 어디에 뿌려졌는지 알지 못한다. 물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미선이 어머니 이옥자(47)씨는 충격으로 아직도 몸을 추스르지 못한 채 누워 있다.
미군이 드나들던 56번 지방도로 서낭당 고개 사고현장에는 지난 9월 추모비가 들어섰다. 추모비는 ‘미 육군 제2사단 장병 일동’ 이름으로 건립됐다. 추모비에 새겨진 영문 비명에서 미군 장병들은 죽은 소녀들의 영혼에 용서를 빌었다. 미군 장병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우리에게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었다.” 그 말은 돌에 새겨져 있었다. 그 뒤, 사고를 저지른 미군 병사들은 ‘무죄’ 판결을 받고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갔다.
‘인간의 존엄성’을 새긴 돌 앞에서 주민들은 분노의 집회를 열었다. 유가족과 주민들은 이제는 미군을 피해 가며 묵묵히 땅을 가는 농사꾼이 아니다. 유가족과 주민들은 “불평등한 소파를 개정하라”는 펼침막을 마을 곳곳에 걸어놓았다. 효순이 아버지 신현수씨는 “딸을 잃고서야 비로소 소파가 무엇인지, 왜 이대론 안되는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두 아버지는 미군 재판에 초청받았지만 가지 않았다. 대신 미군부대 정문 앞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가했다. 신씨는 “미군들이 유가족 사진을 찍어 재판의 공정성을 과시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그래서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두 아버지는 법무부로부터 1억9천만원씩의 배상금을 받았다. 두 아버지는 겨울 농한기에는 함께 목수일을 다니며 부업을 한다. 1억9천만원은 평생 만져보기 어려운 큰돈이다. 시민단체들은 싸움의 명분을 위해 두 아버지가 이 돈을 받지 않기를 원했다고 신씨는 말했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신씨는 이 돈으로 농협 빚 4천만원을 갚았다고 했다. 심수보씨는 “무엇에 쓸는지는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미군 훈련장 틈에 낀 농촌마을은 올해 역사가 격변하는 소용돌이의 핵심부로 떠올랐다. 국민들은 이제는 미군에 주눅든 과거의 주민이 아니다. 추모비가 들어선 서낭당 고개에는 미군의 기척이 끊겼고, 마을은 흰눈에 덮여서 새해를 기다리고 있다. 오는 30일, 주민들은 숨진 두 소녀를 추모하는 송년 촛불집회를 연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노무현시대 개막 / 고뇌에 찬 50대  
 
 [한 겨 레] 2002-12-21 (사회) 기획.연재 15면 07판 1955자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는 지역보다는 세대별로 갈라섰다.
조직되지 않고 동원되지 않은 젊은이들의 힘이 젊은 정치권력의 시대를 열었다.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18일 밤,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진 젊은 세대들의 민첩하고도 전략적인 대응에 기성세대들은 경악했다. 이회창 후보를 찍었다는 엘지그룹 오정환(59) 전무는 “한마디로 무서웠다. 쇠뭉치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20일 아침, 오 전무가 주재한 회사 간부회의 분위기는 무겁고 침울했다. “나이먹은 간부들은 모두 멍한 표정이었다. 간부들은 리더십의 문제를 심각히 고민했다. 한평생 먹고사는 일과 회사수익 올리는 걱정만 하다가 미래의 가치를 내다보지 못한 죄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소설가 이문열(56)씨는 19일 밤 개표방송을 보다가 술을 마시고 대취했다. “선동성에 노출된 젊은이가 다수가 되었다. 빨간 옷을 입고 다수의 힘으로 광장을 점거하는 젊은이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20일 아침까지 그는 술이 덜 깨어 있었다.
전직 차관인 김시복(59)씨는 “젊은 세대가 대통령을 만들었다고 해서 정치세력화한다면 기성세대와 마찰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익명을 원한 대기업 중역 김아무개(57)씨는 “젊은이들의 힘이 특정정치세력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순수한 변혁의 힘이기를 바란다. 통일 원동력이 된 경제력을 건설해온 세대의 고통을 부정하지 말아달라. 무섭고 두렵다”고 말했다.
월간지 〈바자〉 기자 김경숙(32)씨는 개혁국민정당 당원이다. 19일 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수많은 젊은이와 함께 만세를 불렀다. 카페마다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맥주잔을 쳐들며 환호를 질렀다.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젊은이들도 함께 함성을 질렀다. “우리는 정치적 이익을 바라지 않고서도 우리 후보를 위해 열렬히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청춘이다. 우리는 조직이 아니지만 필요할 때는 조직처럼 움직인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우리의 무기다”라고 김씨는 말했다.
소설가 조정래(61)씨도 개표방송을 보며 술을 마셨다. “이것은 혁명이다. 50대와 60대들은 근대화라는 업적을 민주화, 합리화로까지는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실패로 나타났다. 젊은 세대들은 정치에 대한 환멸을 희망으로 전환시켰다”고 말했다.
얼마 전 문화일보사에 입사한 도올 김용옥(55) 기자는 전국의 유세 현장과 투·개표 현장, 정당 상황실을 며칠째 쫓아다녔다. “미국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세대가 시대의 전면으로 등장했다. 기성세대들은 이 젊은이들의 힘을 그저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이 힘이 현실로 나타나자 기성세대는 충격을 받고 있다. 이회창은 일방적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젊은이들과 쌍방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이것이 노무현의 승인이다”라고 김 기자는 말했다.
19일 밤, 광화문에서 고려대생들이 20~30명씩 모여 건배를 하고 있었다. 고려대 학생기자 윤수현(23·경제학과 3)씨는 “이회창이 이겼다면 어른들은 이런 자리를 만들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배인 임춘택(32·고대신문 간사)씨는 “월드컵, 소파개정 투쟁 열기 속에서 젊은이들은 개인의 판단으로 참가했다. 친구들끼리 가족들끼리 광장으로 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희망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 ‘희망’에 대해 50대는 여전히 의구심을 제기한다. 젊은 대통령의 ‘희망’ 앞에서 50대의 보통 사람들은 주눅들고 불안해하고 있다. 늙음은 다만 낡음인 것인가, 고생하며 살아온 세월은 단지 수구 냉전의 고착화에 기여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 앞에 처한 50대들의 자괴감이었다. 서울대 황상익(50·전국교수노조 위원장) 교수는 “기성세대는 이제 행동이나 판단에 있어서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역할분담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20일 낮, 서울 도심 식당에서 젊은이들의 식탁은 ‘노무현’으로 시끌벅적했고, 50대들은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젊은층 투표참여·한-미 평등관계 촉구  
 
 [한 겨 레] 2002-12-17 (종합) 뉴스 02면 04판 332자    
 
   
전국 국공립대학 교수협의회 등 7개 교수단체들은 16일 오전 서울 언론회관에서 ‘학계 원로교수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평등한 한-미 관계 정립과 젊은 유권자들의 투표 참여를 호소했다.
이들은 127명이 서명한 시국선언을 통해 “한국 정부는 미국에 대한 굴종적 태도를 버리고 바람직한 한-미 관계 수립을 위한 제도를 정비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또 “젊은 세대가 투표에 적극 참여해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통일조국의 번영을 일궈내야 한다”고 호소했다.
교수들은 이날 ‘연세대 참여정치 1219’ 등 대학생 유권자 운동을 벌여온 세 학생단체에 상패를 주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전태일 열사 민주화보상금 거부 / “민주화운동 범위 너무 좁다”  
 
 [한 겨 레] 2002-12-11 (사회) 뉴스 17면 04판 346자    
 
   
전태일기념사업회는 10일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카페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원회가 전태일 열사에 대해 책정한 보상금 930만원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보상법이 규정하고 있는 민주화운동의 범위가 협소하고 보상규정이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하며, 실질적인 명예회복과 정당한 보상을 요구했다. 1970년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전태일씨는 당시 평화시장 재단사 임금인 2만원을 기준으로 해 보상금이 930만원으로 정해졌으나, 1991년 분신자살한 노동운동가 윤용하씨는 역시 임금기준을 적용해 2억3000만원을 받게 돼 형평성 논란이 제기돼 왔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모든 양심수 석방을”/ 55회 세계인권선언일 맞아 589개 사회·종교단체들 요구  
 
 [한 겨 레] 2002-12-11 (사회) 뉴스 17면 04판 356자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등 전국 589개 사회·종교단체들은 10일 제55회 세계인권선언일을 맞아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대중 대통령 임기 안에 양심수들을 전원 석방하고 수배를 해제하라고 요구했다.
사회·종교단체들은 이날 회견에서 현재 구속중인 양심수는 모두 96명이며 한총련 소속 학생 수백명이 수배중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또 ‘양심수 석방, 정치수배 해제, 사면복권’에 대해 대선 후보 7명에게 공개질의한 결과,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와 사회당 김영규 후보만 ‘동의’를 표시했으며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검토중’,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답변을 유보했다고 전했다.
김훈 기자







한겨레가 만난 사람 / 지학순 정의평하상 받은 소파개정국민행동 공동대표 문정현 신부  
 
 [한 겨 레] 2002-12-03 (특집) 인물평/약력 37면 02판 4763자    
 
   
문정현(64·불평등한소파개정국민행동 공동대표) 신부는 싸우는 거리의 신부다.
1970년대의 반독재 투쟁에서부터 80년대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90년대의 통일운동, 그리고 지금 전국적인 분노로 번져가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소파) 재개정 투쟁에 이르기까지, 그는 당대의 억압과 모순을 향해 육탄으로 맞서왔다. 수많은 시위와 집회 현장에서 그의 얼굴은 노여움의 함성으로 사나웠다. 시위현장에서 경찰은 언제나 그를 ‘특별대우’한다. 그 한 사람을 별도로 끌어내어 경찰병력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놓는다. 경찰용어로는 ‘고착’이다. 그 안에 갇혀서 그는 날이 저물도록 고함치고 발버둥친다. 끼니때가 되면 휴대폰으로 자장면을 시켜서 그 울타리 안에서 먹는다.
지학순 정의평화기금(법인대표 윤공희 대주교)은 문 신부가 이끄는 ‘불평등한 소파개정 국민행동’에 올해 ‘지학순 정의평화상’을 12월9일 수여할 예정이다. 수상이 결정되던 날, 그는 ‘동두천 싸움’에서 돌아와 독감으로 누워 있었다. ‘동두천 싸움’이란 미군 2사단 정문 앞에서 연일 벌어지는 규탄시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싸움에서 팔다리가 비틀려 그는 지팡이에 기대고 있었다. 그는 병상에서 겨우 몸을 추슬러 기자를 맞았다. 그의 목소리는 갈가리 찢어져 있었다. “이제 나이도 들어서 얼마나 더 고함을 지를 수 있을는지…”라며 그는 말문을 열었다.
-몸은 어떤가. 견딜 만한가?
=몸이 견뎌내야 하는데 걱정이다. 내 싸움은 몸으로 하는 싸움이다. 11월22일(니노 병장에 이어 워커 병장에게도 무죄평결이 내려지던 날) ‘동두천 싸움’은 힘들었다. 경찰의 진압은 난폭하고 잔인했다. 방패로 찍으면서 달려들어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땅바닥에 엎드려서 경찰들 다리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고 기어서 10m를 나아갔다. 나는 내 몸을 아스팔트에 갈면서 나아갔다. 슬픈 일이지만 이 세계의 철벽 앞에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늘 현장에 있어야 하고, 몸이 철벽에 부딪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몸은 아프고 쑤신다.
-교구청 윗분들은 당신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주교님께서는 지금까지 한번도 나를 칭찬하지 않았고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 침묵의 속뜻을 나는 알 수 없다.(웃음)
-미군부대 앞에서, 미국을 규탄하는 한국인 시위대와 이를 저지하는 한국경찰이 무슨 원수처럼 치고받는 풍경은 안타깝지 않은가?
=젊은 전경들과 뒤엉켜 멱살잡이를 하면서 밀고당길 때, 가슴이 미어져서 울었다. 이 무슨 비극인가, 이 무슨 희극인가. 우리는 왜 이래야만 하는가.(그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이더니 안경을 벗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부대 앞에서 한국인들끼리 뒤엉켜 싸울 때 부대 안에서는 미군들이 발코니에 나와 우리 꼴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고 낄낄거렸다. 돌을 던져도 닿지 않았다. 비참하지만 하는 수 없다.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들의 분노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미국을 심정적으로 증오하는가?
=그들이 우리를 깔보고 업신여기는 한 그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미군들이 3개월 동안 학교에 주둔했다. 그들은 교실의 책상을 모두 뽀개서 난로에 넣고 불을 땠다. 우리는 미군의 설거지를 해주고 구두를 닦아주었다. 탱크 뒤를 따라가며 닭 모이 주듯 뿌려주는 초콜릿과 껌과 치즈를 받아먹었다. 시래기국에 치즈를 넣으니까 그 맛은 황홀했다. 마을의 가난한 누나들은 도시로 나가서 ‘양갈보’가 되었다. 그때의 굴욕은 이제 심정적으로 모두 극복되었다. 미군들은 더 이상 한국인을 향해 초콜릿을 던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의정부 여중생 참사에서 보여준 미군의 의식과 태도는 그때의 미군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소파개정 투쟁은 주한미군의 존재를 긍정하는 전제 아래서 전개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주한미군은 궁극적으로 철수해야 한다. 소파 개정은 그 중간단계일 뿐이다. 나는 미군이 한국의 자유를 수호했으며 한반도에서 전쟁억지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논리에 승복하지 않는다. 미국은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을 주도했으며, 해방 이후 한국현대사 속에서 벌어진 억압과 모순에 대해 책임이 있다. 이 억압과 모순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자행되고 있다. 미군은 나가야 한다.
-소파는 어떤 방향으로 개정돼야 하나?
=한국과 미국이 완전히 대등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상식과 예절에 맞아야 한다. 올해 파주에서 한국인 노동자 한 명이 2만2천볼트의 미군 고압선에 감전돼 죽었다. 고압선은 민가의 지붕 위를 지나고 있었다. 주민들은 수차례 진정을 했다. 미군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가 죽은 뒤에도 이 고압선은 여전히 민가 위를 지나고 있고, 피복조차 입히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소파다. 군산 미군기지에서는 하루 3천t의 독극성 오폐수를 서해로 방류하고 있다. 시청, 환경부, 검찰, 경찰에 수없이 찾아가 싸우고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단속하거나 조사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파란 말이다. 용산 미군기지 앞에서는 일과 후면 번호판 없는 승용차를 마구 몰고다니는 미군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소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망나니 짓일 뿐이다.
-당신의 행동은 소파를 개정하기 위한 실질적인 성과를 쌓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현실적으로 성취한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매향리 사격장은 폐쇄되지 않았고 스토리 사격장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군산에서는 미군들이 민가 주변에 탄약고를 짓고 있고 오폐수는 여전히 서해로 흘러든다. 여중생을 깔아죽인 미군들은 무죄방면되어 제 나라로 돌아갔고 미군 고위층은 그 재판이 정당하다고 한국인을 향해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불평등과 모순과 치욕에 대한 사회적 침묵을 깨뜨리고 분노의 공감대를 확산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행동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우리는 ‘한 줌의 반미주의자’가 아니다.
-소파를 개정해야 한다는 분노의 여론이 한국 정부에 힘을 실어주어서 대미협상에서 좋은 입지를 만들어주는, 그런 관계를 설정할 수는 없는가?
=지금까지 한국정부 관료들이 이 문제를 대하는 태도로 보아서 그런 아름다운 관계설정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관료들은 미국을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무소불위의 나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당신은 한국에서 ‘반미주의’로 대다수 여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반미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미국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미 제국주의에 반대한다. 나는 착하고 정직한 수많은 미국인들을 알고 있다. 내가 지향하는 목표는 한국의 자주성이고, 한-미 간의 대등한 관계 회복이다. 미군이 제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는 외침은 반미가 아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지난 1975년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 일을 축하드린다.
=그때 사형수들의 주검을 탈취하려는 경찰에 맞서 영구차 바퀴 밑에 드러누워 한나절 몸부림쳤다. 국가권력에 의한 야만적 고문과 사법살인이 자행되고 있는데도 이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고 일상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국가권력보다도 이 세상의 침묵이 더 무서웠다. 예수의 죽음도 그처럼 외로웠다. 악에 대한 사회적 침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외치고 또 외치면 그 침묵은 조금씩 깨어져 나갈 것이다. 나는 이 외침들을 합쳐서 소파를 개정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익산/김훈 기자 hoonk@hani.co.kr

■문정현 신부는 누구?
인혁당 사건으로 처형된 사형수들의 유가족들은 문정현 신부를 ‘인혁당 당수’라고 부른다. 1970년대 초 인혁당 구명투쟁을 문 신부가 주도했기 때문이다.
문 신부 집안의 천주교 신앙은 5대째 이어지고 있다. 임수경 방북사건으로 수감됐던 문규현(58·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 신부는 문 신부의 동생이다. 사제단이 임수경씨와 함께 평양에 파견할 신부를 고르고 있을 때 문 신부가 동생인 문규현 신부를 천거했고, 동생은 형의 뜻에 따라 평양을 다녀와서 감옥에 갔다. 여동생 문현옥(62)씨는 경기도 동두천성당의 수녀다. 문 신부가 동두천 미군기지 앞에 ‘싸우러’ 오면 문 수녀가 밥과 반찬을 장만해서 시위 현장에 가져다 준다.
문 신부는 66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74년부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참가했다. 이때부터 거리의 투사 문정현 신부의 험난한 생애는 시작되었다. 76년에는 ‘3·1 민주구국선언’으로 투옥되었고, 79년에는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되었다. 그 후 문 신부는 천주교 노동사목 지도신부, 민주노총 전북지역 지도위원을 맡으면서 노동운동 현장으로 들어갔다. 그의 싸움은 이제 자주권 회복을 위한 싸움으로 넓어져 가고 있다.

■인터뷰 낙수
문정현 신부는 전북 익산시 월성동에 ‘작은 자매의 집’이라는 정신지체아 보호시설을 운영하며 현재 장애인 41명을 돌보고 있다. 정부 보조를 받기도 하지만, 한 달에 1200만원 정도의 성금이 들어온다. 이 성금은 모두가 1000~2000원씩 보내오는 소액성금이다.
문 신부의 얼굴에는 두 가지 표정이 있다. 시위 현장에서 보여주는 그 사나운 표정이 있고, ‘작은 자매의 집’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놀때 보여주는 평화로운 표정이 있다. 문 신부는 거의 매일 서울이나 군산의 집회에 참가한다. 밤이 늦더라도 문 신부는 차를 몰아서 익산으로 내려온다. 아침에 장애인들과 함께 미사를 올리고 나서 문신부는 또 ‘싸우러’ 간다. 싸움이 끝나고 익산으로 내려갈 때, 문 신부는 노점상에서 장난감을 산다. 그가 사는 장난감은 플라스틱 뱀이나 개구리, 봉제완구 같은 것들이다. 그는 이 장난감을 가져다가 장애인들에게 나눠주고 뱀을 흔들면서 함께 논다.
인터뷰는 29일 익산에서 이뤄졌다. 그 다음날 저녁 서울 광화문에서는 소파 개정을 촉구하는 촛불시위가 있었다. 거기서 또 문 신부를 만났다. 그는 맨 앞장에서 경찰저지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허원근일병 사망사건 공방 / 떠도는 ‘죽음의 진실’  
 
 [한 겨 레] 2002-11-29 (사회) 일지 17면 02판 2209자    
 
   
국방부특별조사단은 28일 허원근 일병의 죽음을 자살로 최종 결론지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곧바로 특조단 발표의 진실성을 전면 부정했다. 국가기관들 사이에서 한 육군 사병의 죽음의 진실이 표류하고 있다.
진실의 핵심부는 사건 당일의 2발의 총성과 2발의 탄피, 그리고 주검에 드러난 3군데의 총상에 있었다. 나머지 총성 1발과 탄피 1개의 출처와 행방을 찾아야만 진실은 밝혀질 수 있었다. 특조단은 이번 조사에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밝혔다.
당일 오전 9시55분께 현장에서 80m 떨어진 초소 근무자 성아무개씨가 총성 1발을 듣고 상황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1시가 임박해서 다시 2발의 총성이 여러 초소에서 청취됐다. 나중의 총성 2발은 의문사위 조사와 일치한다.
특조단은 이 9시55분께의 총성을 허 일병이 자신의 몸에 쏜 제1탄으로 추정했다. 허 일병은 1탄을 쏜 뒤 1시간여 동안을 뒹굴면서 계속 2탄, 3탄을 쏘아 자살했다는 결론이다. 법의학자 이윤성 교수(서울대)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테지만 자살을 상정할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당시 헌병대는 사건 당일 현장에서 탄피 2개를 수거한 뒤 “상처가 3곳인데 탄피가 2개인 것이 문제”라고 기록했다. 헌병대는 다음날 탄피 1개를 다시 찾아 탄피는 3개가 됐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헌병대 수사기록은 이 마지막 탄피 1개를 찾게 된 경위와 장소, 발견자 등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번 특조단 조사는 이 헌병대 수사의 과오를 인정하면서도 그 결과는 그대로 채택했다.
참고인들의 진술 번복이나 진술 후퇴도 특조단 결론의 중요 근거가 됐다. 당시 중대본부 상황을 증언했던 이아무개씨는 위원회에서의 진술을 전면 부인했다고 특조단은 설명했다. 그러나 이씨는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모두 부인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또 14소초에서 오전 11시께 중대본부쪽 상황을 보았다고 증언한 김아무개씨의 진술은 위원회에서 주입시킨 것이라고 특조단은 밝혔다. 그러나 김씨는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특조단에서의 진술에 대해 “틀린 것을 부분적으로 번복했을 뿐 전체의 흐름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특조단이 마련한 법의학 토론회에 참가했던 학자들 가운데 압도적 다수가 이 죽음을 ‘자살’로 추정한 것도 특조단에 큰 힘이 됐다. 이 토론 참가자 7명 가운데 5명은 특조단 자문위원들이고 그 가운데 2명은 과거의 재조사 때 이 사건을 ‘자살’로 추정한 사람들이다.
최초 부검을 맡았던 군의관 박의우씨는 “‘이것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고 다수로 결정할 사안도 아니다’라는 입장을 특조단에 통고하고 토론회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주요 참고인들은 지나치게 오랜 기간 조사한 점이나 조사 환경의 엄격성을 유지하지 못한 점 등을 의문사위 조사의 허술한 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의문사위 관계자들도 그 점을 인정한다. 거듭된 지방출장 조사에서 녹화·녹취를 소홀히 한 점 등은 조사의 객관성을 훼손하고 있다.
허 일병 죽음의 진실은 이제 국가기관 사이의 비방과 불신으로 번져가고 있다. 의문사위 관계자는 “검시제도와 군 수사관행을 개혁하지 않는 한 진실에 접근하기 어렵다”며 차기 위원회에서의 재조사는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수성 특조단장은 “이 사건은 앞으로 국방부나 의문사위가 더 이상 조사해서는 안 된다. 조사의 필요성이 있다면 제3의 국가기관이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허원근일병 사건 일지
△1984년 4월2일=허원근 일병, 가슴과 머리 등에 3발의 총을 맞고 사망
△1984년 4월24일=2군단 헌병대 ‘자살’로 판명
△1984년 4월30일=7사단 헌병대 ‘자살’로 판명
△1984년 5월=1군 헌병대 ‘자살’로 판명
△1990년 2월=육군 범죄수사단 ‘자살’로 판명
△1995년 3월=육군본부 법무감실 ‘자살’로 판명
△2001년 1월13일=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허 일병 의문사 조사 착수
△2002년 8월20일=의문사진상규명위, 허 일병이 술취한 중사의 총에 맞아 숨졌다고 중간 조사결과 발표
△2002년 8월27일=국방부 특별조사단, 허 일병 사건 조사 착수
△2002년 9월10일=의문사진상규명위, 허 일병이 내무반과 폐유류고에서 총에 맞아 타살됐다고 최종 결론
△2002년 10월29일=국방부 특별조사단 중간 조사결과 발표, ‘내무반 총기오발 사고 없었다’ 발표
△2002년 11월28일=국방부 특별조사단 최종 조사결과 발표. ‘허 일병 자살’ 결론
△2002년 11월28일=의문사진상규명위, 국방부 발표 반박


 

“오발 목격” 전씨 인터뷰 / “동료들은 거짓말을 하고있다”  
 
 [한 겨 레] 2002-11-29 (사회) 인터뷰 17면 02판 1157자    
 
   
국방부 특조단이 28일 허원근 일병 사건에 대해 자살로 최종 결론을 내놓았지만 당시 현장 목격자 전아무개(42)씨는 타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사건 당시 중대본부 요원으로 현재 지방에 머물고 있는 전씨는 “허 일병이 오발로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 의문사진상규명위에서의 진술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다음은 전씨와의 일문일답이다.
-왜 국방부 특조단 조사에 응하지 않았나?
=(내가 사는) 지방에서 조사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특조단은 합의를 깨고 한사코 서울에서 대질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래서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대질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진실을 부인하는 다수 앞에서 나 자신을 지켜낼 자신이 없다. 비겁하다고 욕해도 하는 수 없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한 진술은 모두 사실인가?
=내 기억과 양심의 범위 안에서 모두 진실이다.
-그런데 왜 위원회에서의 진술에 일관성이 없는가?
=처음 조사를 받을 때, 나는 위원회의 조사 의지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동안 군에서 진행된 수많은 재조사 과정의 허술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원회 조사가 거듭될수록 진실을 규명하려는 위원회의 의지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차츰 적극적으로 진술해 나갔다. 그래서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것이 오히려 일관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부분적인 기억의 착오는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수의 옛 전우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답답하다. 그들이 헌병대나 중대에서 주입받은 그릇된 것들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당신 주변에선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진실을 말했다. 그러나 내 주변의 친척, 친구, 직장 동료들은 모두 나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해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리냐는 것이다. 아무도 내 편이 없다. 다들 편히 사는 길을 가라고 한다.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고립돼야 하는 세상이 무섭다.
-의문사위에서 보상금 3천만원을 받게 됐다는데?
=괴롭다. 내가 돈에 팔려서 헛소리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피할 수 없는 돈이라면 내가 다니는 교회에 기증하거나 의문사 유족들에게 보내고 싶다.
-특조단은 당신이 모두 거짓말을 했다고 믿고 있다.
=그 믿음을 내가 어찌하겠는가. 몸이 아프다. 제발 일상의 나로 돌아가게 해 달라.
김훈 기자






허일병 “자살”- “타살” 상반된 결론 / 국방부-의문사위 정면 충돌  
 
 [한 겨 레] 2002-11-29 (종합) 뉴스 01면 08판 986자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을 조사해온 국방부 특별조사단(단장 정수성 육군 중장)은 28일 ‘허 일병은 자살했다’는 내용의 최종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특조단은 이날 오전 국방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허 일병이 당시 중대장 김아무개 대위(1999년 사망)의 가혹행위에 못이겨 자신의 소총으로 자살했으며, 허 일병의 죽음을 타살로 발표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는 모두 ‘조작’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의문사위는 “특조단 조사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고 반박해, 두 국가기관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관련기사 17면
특조단은 이날, 허 일병이 사건 당일 오전 9시50분부터 1시간10분 정도에 걸쳐 자신의 양쪽 가슴과 머리에 엠16 소총 세 발을 차례로 쏘아 자살했으며, 이 세 발의 총성이 인접 초소에서 청취됐고, 탄피 세 개도 현장에서 모두 수거됐다고 말했다. 특조단은 또 “의문사위의 조사는 강압과 유도심문으로 이뤄진 허구이며, 위원회가 실시한 현장검증도 날조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는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열어 “특조단의 조사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의문사위는 “사건 현장에는 헌병대가 도착하기 전 이미 중대본부 요원 등 최소한 5~6명이 다녀갔고, 총과 주검에 손을 댄 것은 헌병대 기록에도 나오는 일”고 지적했다. 의문사위는 또 “자살하는 사람이 피묻은 탄띠를 스스로 풀고 다시 총을 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의문사위는 “특조단은 위원회 조사결과를 반박하기 위한 조사에 매달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의문사위는 “내년 초 조사활동이 재개되면 특조단이 제기한 문제점까지 수용해 사건의 실체를 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국방부 특조단은 “의문사위는 어떤 경우에도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해서는 안 되며, 의문사위가 재조사하더라도 수사자료를 절대 넘길 수 없다”고 말해 두 기관 간의 갈등이 예상된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국방부 특조단 ‘허일병 자살’ 결론  
 
 [한 겨 레] 2002-11-28 (사회) 뉴스 18면 04판 474자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국방부 특별조사단은 27일 강원도 화천군 육군 7사단에서 현장검증을 실시하고 허 일병의 죽음을 사실상 ‘자살’로 결론지었다.
이날 특조단은 지난 9월3일 같은 곳에서 실시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현장검증 내용을 재검증하면서 위원회의 현장검증은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특조단은 자살자가 엠16 소총으로 자신의 몸에 3발을 쏠 수 있는 자세를 연출해 보이기도 했다. 이날 현장검증에는 당시 3중대 선임하사 노아무개씨 등 중대본부 요원 6명이 참가해 새벽 내무반의 총기 오발사고를 부인했다. 특조단은 28일 최종 조사결과를 발표한다.
한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이날 특조단 발표를 반박하는 입장을 발표할 예정이다. 위원회 관계자는 “국방부가 위원회와 정반대 입장을 발표함으로써 이 사건은 내년 봄부터 활동이 재개되는 의문사위원회에 의한 재조사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화천/김훈 기자 hoonk@hani.co.kr






국방부 특조단 ‘허일병 사인’ 법의학 토론회 / 7명중 6명 ‘자살’ 추정  
 
 [한 겨 레] 2002-11-26 (사회) 뉴스 18면 05판 622자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을 재조사하고 있는 국방부 특별조사단은 25일 서울 용산 국방회관에서 이 사건에 대한 법의학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법의학자 황적준 고려대 의과대학장, 이한영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장, 이삼재 경찰청 수사연구관 등 특조단 민간자문위원 5명과 이윤성 서울대 교수(전 의문사위원회 비상임위원) 등 외부 법의학자 2명이 참가했다.
이날 토론에서 이윤성 교수는 “허 일병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견해를 보였고, 나머지 참석자 6명은 모두 ‘자살’로 추정했다.
이 교수는 △자살자가 3발을 자신의 몸에 쏠 수 있는지 △3발로 양쪽 가슴과 머리를 차례로 쏠 수 있는지 △자살자가 손을 바꿔 2~3탄을 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이는 불가능하지 않다 하더라도 매우 이상한 자살”이라며 “이 의문점이 애초 헌병대 수사과정에서 밝혀지지 않은 점이 문제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참석자들은 “1탄과 2탄 사이에 시차가 없다고 본다”는 소견 등을 내세워 자살로 추정했다. 특조단쪽은 “토론 결과를 최종발표 때 참고하겠다”고 말했다. 특조단은 26일 현장검증을 거친 뒤 28일 이 사건에 대한 최종 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도올 이번엔 ‘현장기자’로 변신  
 
 [한 겨 레] 2002-11-26 (사회) 인터뷰 17면 01판 844자    
 
   
철학자 김용옥(54·사진) 전 고려대 교수가 다음달 2일부터 〈문화일보〉에서 평기자(편집국장석 근무)로 일하게 됐다.
김용옥씨는 지난 24일 “문화일보쪽과 모든 근로조건에 합의했다. 나는 평기자 월급을 받고 평기자로 현장 일선에 배치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8월부터 〈교육방송〉을 통해 방영된 김씨의 공개강좌 ‘도올-인도를 가다’는 오는 29일 28회 강좌로 끝맺을 예정이다. 서울 동숭동의 한 카페에서 김씨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의 심경을 들었다.
-왜 〈문화일보〉를 택했나?
=〈문화일보〉에서 제의가 왔다. 그러나 특정신문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보편적 기자의 입장에서 모든 기자들이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회복하는 일에 기여하려 한다.
-왜 현장을 선택했나?
=나는 현장의 구체성으로 철학을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는다. 철학은 관념과 사변을 넘어서야 한다. 인도철학에서 철학은 ‘봄(see)’이다. 나는 어떠한 전제도 갖고 있지 않다.
-언론은 진보와 보수로 대치하고 있다. 어떻게 입지를 설정할 것인가?
=세계는 빠르게 탈이념화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좌우, 진보·보수의 규정성은 더이상 세계를 설명하는 틀이 될 수 없다. 현실을 이런 시각에서 재단하는 것은 지식인의 성실성을 포기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기사를 구상하고 있나?
=나는 가장 소외받고 학대당하는 계층으로부터 이 세계의 권력을 장악한 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본질과 진실에 접근하려 한다. 두어달 정도 적응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이 세계의 다양한 분화의 내용을 지식의 틀로 파악하는 능력을 훈련했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현장 / 미아동 임대아파트 두 세입자의 삶  
 
 [한 겨 레] 2002-11-26 (종합) 기획.연재 01면 08판 1600자    
 
   
서울 강북지역에 새도시인지 뉴타운인지를 건설한다는 계획에 따라 또다시 대규모 철거가 불가피하게 됐다. 철거 규모와 시점은 아직 알 수 없지만, 벌써부터 땅값, 집값, 전세금이 치솟고 위장 전입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지상의 방 한 칸’은 모질고도 가혹하다. 그 방 한 칸의 무게에 짓눌려 세입자들은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유은자(66·서울 미아동 임대아파트) 씨는 지금 재개발이 진행 중인 정릉4동 4구역 무허가 건물 단칸방에서 지난 36년 동안 살았다.
36년 전 유씨의 단칸방 전세금은 15만원이었다. 지금 이 동네의 단칸방 전세금은 1300만원이 됐다. 유씨는 공사판 막일, 남의 집 일 등을 하면서 조금씩 돈을 벌었다. 그러나 버는 돈은 모두 전세금으로 들어갔다. 36년 동안 정릉4동 14통 안에서만 스물다섯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이사할 때마다 방값은 올랐다. 벌어서 모두 방값으로 내줘 한 푼도 모을 수 없었다.
1999년 강제철거를 당한 뒤, 63살이던 유씨는 집이 뜯긴 자리에 천막을 치고 다섯달을 지냈다. 세입자 임대아파트는 완공되지 않았고 일터인 마을을 떠날 수도 없었다. 아파트가 완공되자, 전셋값을 빼 보증금을 냈다. 유씨는 이제 집 걱정이 없다. 그러나 팔다리에 힘이 없어 더는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는 다달이 기초생활 보장법에 따른 정부 지원금 40만원을 받아 살아간다. 한평생 노동이 모두 전셋값으로 날아갔다. 유씨는 노동으로는 가난을 극복할 수 없었고, 결국 정부 보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수급자’로 여생을 보내게 됐다.
같은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정덕례(52)씨는 ‘지상의 방 한 칸’을 얻음으로써 해묵은 가난을 청산할 수 있었다. 정씨도 정릉4동 4구역 무허가주택 단칸방에서 20여년을 살았다. 20여년 전 보증금 500만원, 월세 3만원짜리 방을 얻었다. 99년 방값은 1300만원까지 올랐다. 정씨는 페인트공 보조, 가내수공업을 하며 돈을 벌어 치솟는 전셋값을 충당해 왔다.
정씨는 이 마을에서 서른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정씨도 99년 강제철거를 당했다. 먼저 철거하고 아파트는 나중에 짓는다. 아파트 입주 전까지 천막에서 살았다.
99년 연말 임대아파트에 입주하자, 정씨는 집 걱정이 없어졌다. 전셋값을 빼 아파트 보증금을 내고 남은 돈으로 청량리 수산시장 안에 두평짜리 식당을 얻어 밥장사를 시작했다. 보증금 200만원, 월세 40만원짜리 가게다. 밥값은 한 그릇에 2000원이다. 하루에 120~130그릇을 팔아 매출액은 하루 25만원 정도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은 몇 해 전 취직해 120만원의 월급을 받아 온다.
“아이를 교육시키지 않으면 가난을 물려줄 수밖에 없다”고 정씨는 말했다. 교육비와 전셋값 고통이 그의 생애를 짓눌러 왔다. 그러나 정씨는 이제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지상의 방 한 칸’이 해결됨으로써 정씨는 자신의 노동으로 가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정씨는 정부 지원금을 받지 않는다. 매일 오후 4시부터 자정께까지 시장에서 밥을 판다.
“이 14평짜리 임대아파트 한 칸이 없었다면 나는 도리없이 전셋값과 싸우며 한평생을 보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새벽마다 채소와 과일과 생선을 싣고 몰려오는 전국의 상인들이 정씨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취재파일]오만한 미국  
 
 [한 겨 레] 2002-11-25 (오피니언/인물) 칼럼.논단 08면 01판 924자    
 
   
지난 8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진정조사에 불응한 미군 2사단에 부과했던 과태료 1천만원은 결국 받아낼 길이 없어졌다. 납부기간이 지나 독촉장을 보내도 미군은 대답조차 없었다. 인권위는 강제징수를 추진했지만,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소파) 규정상 미군자산에 대한 강제징수는 불가능하다는 법적 판단을 내려 돈 받기를 포기해버렸다.
지난 6월26일 여중생 사망사건을 취재하던 기자 2명이 2사단 영내로 들어갔다가 미군들에게 끌려가 감금당했다. 미군들은 기자들을 밧줄로 묶어놓고 폭행했다고 전한다. 기자들이 이 사건을 인권위에 진정했다. 인권위는 폭행을 가한 미군들의 진술서와 관련 자료를 미군 쪽에 요청했다. 미군은 아무 자료도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위원회는 과태료를 물리기로 했다. 인권위는 통지서를 보내기 전에 미군 쪽에 과태료에 대한 의견진술 기회도 줬다. 미군 쪽은 아무 의견도 보내지 않았다. 다만 외교통상부를 통해 불만을 정치적으로 표시했다. 통지서가 발부됐다. 과태료를 내기 싫으면 30일 이내에 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 미군은 이의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납부기한이 지났다. 독촉장이 발부됐다.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관련자료도 안 보내고, 돈도 안 내고, 이의신청도 않고, 의견제출도 않고, 왜 못내는지 설명도 없이, 그저 ‘무시’로 일관했다.
인권위는 과태료를 부과할 때 ‘주한미군은 부대 및 시설 안 경찰권을 한국정부로부터 위임받고 있다’는 소파규정을 근거로 삼았다. 미군은 한국 법률이 정하는 기본적 인권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 논리는 오만한 침묵 앞에 무너져내렸다. 인권위가 스스로 알아서 “과태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는 결정은 기막히다.
여중생을 숨지게 한 사병 2명은 무죄로 풀려났다. 한국인들의 분노가 들끓어도 미군은 역시 대답조차 않고 있다.
hoonk@hani.co.kr 김훈 민권사회2부 기자







‘출산중 사망’ 미라 공개 / 문정왕후 종손녀로 추정  
 
 [한 겨 레] 2002-11-16 (사회) 뉴스 14면 05판 415자    
 
   
고려대 박물관은 15일 지난 9월7일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파평 윤씨 묘역에서 발굴한 436년 전의 윤씨 모자 미라를 공개했다.
20대에 숨진 이 여성 미라는 얼굴표정이 남아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았고, 분만 직전의 남자 태아를 임신중이었다.
박물관은 이 미라의 신원에 대해 조선시대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의 조카 윤소가 소실의 몸에서 낳은 딸(윤원형의 종손녀)로 추정했고, 관 속에서 ‘병인 윤시월(10월)’이라는 한글 영정이 발견돼 사망연도를 1566년(명종 21년)으로 확정했다. 미라 주인공은 당시 출산을 위해 친정에 머물렀던 상태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미라가 잘 보존된 까닭을 두고 고려대 지구환경과학과 도성재 교수는 “땅속의 탄산염 광물이 산소 유입을 차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의문사위 조사 아쉬운 마감  
 
 [한 겨 레] 2002-11-02 (사회) 뉴스 14면 01판 1079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시한이 끝남에 따라 조사관 57명은 지난 31일 해산했다.
권한은 미약했고 조사 대상기관들의 장벽은 높았고, 의문의 죽음들은 쌓여있었고 기한은 촉박했었다. 이 난관을 조금씩 뚫어가면서, 조사관들은 과거의 국가기관들이 저지른 악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의 한계와 좌절은 이 사회 민주주의의 발전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조사관들은 정부 조직상 일찍이 없었던 이질적 인원들로 구성됐다. 절반은 과거 운동권 경력을 가진 재야 민간 출신이고, 나머지는 정부기관에서 파견나온 현직 공무원들이었다. 민간 출신 조사관들은 대부분 국가보안법, 집시법에 관련돼 실형을 선고받았던 전과자들이고, 파견 공무원들의 소속기관은 육군, 해군, 공군, 검찰, 경찰 등이었다.
국가보안법으로 복역을 마친 상급 조사관이 검찰 수사관이나 경찰 간부, 현역 장교들을 지휘하는 모습을 위원회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다. 민간 출신 조사관들과 정부파견 조사관들은 조사의 범위와 방향 설정을 놓고 시각과 입장의 차이를 노출시키기도 했다.
민간출신 조사관들은 의문의 죽음이 발생한 배경과 정치권력의 작동실태, 다른 죽음과의 사회적 관련성 등을 포괄적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 정부파견 조사관들은 개별적 죽음의 자·타살 여부를 구체적 현장을 중심으로 엄격한 증거주의에 의해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입장차는 갈등으로 충돌했고, 위원들이 그 방향설정의 역할을 맡았다. 인혁당사건, 녹화사업, 삼청교육대사건 같은 구조적 ‘악’을 단지 개별적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 배후에서 작동됐던 정치권력 전체의 실체를 규명해 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포괄적 조사방향 설정에 따른 것이었다. 황인성 사무국장은 “파견 조사관들의 실증주의적 태도는 조사에 많은 도움이 됐다”며 “시민적 정의의 힘으로 국가의 악을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을 위원회는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민간인 조사관들은 그동안 직급에 관계없이 월급을 다 모아서 똑같이 나누었다. 매달 200만원씩 각자에게 돌아갔다. 31일 그들은 다시 아무런 직급도 없는 재야운동권으로 돌아갔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알몸수색 요건 강화/인권위, 경찰에 권고  
 
 [한 겨 레] 2002-10-23 (사회) 뉴스 15면 04판 254자    
 
   
국가인권위원회는 22일 경찰이 피의자를 유치장에 입감할 때 하는 신체검사의 요건을 강화해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찰청장에게 권고했다. 인권위는 지난 4월2일 집회 현장에서 서울 구로경찰서에 연행된 한국시그네틱스 노조원 7명이 유치장에 입감되는 과정에서 알몸수색을 당했다는 진정사건을 조사한 결과, 경찰이 피의자들에게 가운을 입히지 않은 상태에서 속옷을 벗게 했다고 밝히면서 이런 권고를 결정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잘 가이소” “통일되면 또 만납시다”/북 선수·응원단 떠나  
 
 [한 겨 레] 2002-10-16 (종합) 뉴스 01면 01판 534자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했던 북쪽 응원단 270여명과 선수단 2진 161명이 15일 오후 ‘만경봉-92호’와 고려항공편으로 각각 북으로 돌아갔다.
북쪽 응원단을 태운 만경봉호는 이날 오후 1시 부산 다대포항을 출항했다. 이에 앞서 이날 낮 12시께 만경봉호 앞 부두에서 열린 환송식에는 안상영 시장 등 부산시청 관계자, 부산시민 대표 등 남쪽 환송객 800여명이 참가했다. 북쪽 응원단의 취주악 공연이 계속되는 동안 북쪽 응원단과 남쪽 환송객들은 서로 마주보고 한반도기를 흔들며 동요 〈우리의 소원〉 을 불렀다. 이날 다대포 인근 남항, 감천항 소속 10t급 저인망어선 10척은 떠나는 만경봉호를 남쪽 5㎞ 떨어진 목섬까지 따라가며 배웅했다.
한편, 북쪽 선수단 2진도 이날 오후 3시께 고려항공편으로 김해공항을 통해 평양으로 떠났다. 김해공항에서도 대회 관계자들과 부산시민 북쪽 후원단 160여명이 나와 〈아리랑〉을 부르며 이들을 환송했고, 북쪽 선수들도 이들의 손을 맞잡으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부산/김훈 신윤동욱 기자 hoonk@hani.co.kr





북 응원단 보며 “아가야, 아가야” 눈물/‘자갈치 할매’의 망향가  
 
 [한 겨 레] 2002-10-14 (사회) 뉴스 15면 06판 1237자    
 
   
부산 자갈치시장 제일횟집 주인 박창숙(77)씨는 아시아경기대회 기간 내내 텔레비전에 비치는 북쪽 응원단을 보고 “아가야, 아가야!” 부르며 울고 있었다.
박씨는 평안북도 신의주가 고향이다. 22살 나던 1947년에 첫돌을 갓 지난 아들을 등에 업고 월남했다. 서울에서 3년을 살다가 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왔다. 아기를 업고 걸어서 부산까지 왔다. 스물여섯살 박씨는 자갈치시장에서 생선장사를 시작했다.
피난민의 한맺힌 설움을 노래한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가 전국을 휩쓸던 시절이었다. 박씨의 생애는 바로 그 ‘금순이’ 그대로다. 처음에는 광주리에 생선 몇마리를 담아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팔았다. 이듬해 박씨는 한 평짜리 점포를 마련했다. 자갈치시장 안에는 피난온 사람들의 한 평짜리 점포가 수백개씩 들어서 있었다. 박씨는 조금씩 돈을 모아 이웃의 한 평짜리 점포를 사들였다. 박씨는 51년 동안 자갈치시장을 떠나지 않고 있다. 지금 박씨의 점포는 35평으로 늘어났고, 월남할 때 업고 온 첫돌배기 아들 장영화씨는 56살의 초로가 되었다.
박씨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신의주 말씨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북쪽 응원단의 거리공연을 보며 박씨는 “저 봐라. 저 얼마나 예쁘냐. 내가 저 아가들 나이 때 월남했지. 기때는(그때는) 나도 저 아가들처럼 고왔지 않갔어”라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지난 달에는 고향인 신의주가 특구로 지정돼 며칠 안에 고향에 갈 줄 알고 울었는데, 이번 달에는 북쪽의 ‘예쁜 아가’들을 보면서 또 운다. 만경봉호가 정박한 다대포에도 가보고 싶고, 거리에 나가 북쪽 ‘아가’들을 만나보고 싶지만 오래된 노인성 관절염을 앓고 있는 박씨는 움직이기가 어렵다.
아시아경기대회 기간 중에 자갈치시장 상인들은 외국인들을 초청해 ‘자갈치 축제’를 열었다. 자갈치시장은 부산 특유의 왁자지껄한 활력이 넘쳐났다. 박씨는 이 축제에서 ‘자갈치 아지매’로 선발됐다. 트로피를 품에 안고 시상대에 오른 박씨는 “자갈치에서 보낸 한평생은 피와 눈물의 세월이었습니다. 살아야 했기 때문에 억척스러워졌습니다”고 말했다.
박씨는 북쪽 아가들을 보면서 오래된 관절염을 수술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 아가들의 웃는 얼굴을 보니까 “기어이 내 두 다리로 걸어서 내 고향 신의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고 박씨는 말했다. “저 봐라, 저 얼마나 예쁘냐.” 텔레비전 화면을 가리키며 박씨는 50년 생선장수의 억센 손으로 또다시 눈물을 닦았다.
부산/김훈 기자 hoonk@hani.co.kr







아시아경기 출전 스포츠 약소국들/ “우린 당당한 아시아 이웃 참가 자체가 금메달이죠”  
 
 [한 겨 레] 2002-10-12 (사회) 뉴스 15면 01판 1158자    
 
   
지난 10일 부산 구덕경기장에서 벌어진 제14회 아시아경기대회 태권도 경기장에서 네팔 선수 리투라이(23·라이트급)가 동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대에 올랐다. 응원 나온 네팔인 이주노동자 몇 사람과 선수·임원단은 끌어안고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네팔은 1회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 대회에 참가해 왔다. 그러나 반세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네팔이 얻은 메달은 지난번 13회 때 태권도 은메달을 비롯해 2개가 전부다.
아시아대회 금메달 419개는 중국·한국·일본 세 나라가 대부분을 휩쓸어가고 있다. 폐막을 앞둔 11일까지 대회에 참가한 44개 나라·지역 가운데 마카오 브루나이 동티모르 라오스 캄보디아 몰디브 부탄 아프가니스탄 오만 팔레스타인 등 10곳은 메달이 없다. 그러나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 나라·지역들이 없다면, 아시아경기대회의 ‘아시아적 위상’은 성립하지 않는다.
부경대 체육학과 지삼업(53·부산아시아경기대회 교수연구단장) 교수는 “이번 대회는 두 가지 아시아 역사적 의미가 있다. 첫째는 남북한 화해의 필연성이 세계적 공인을 받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신생국 동티모르, 전란에 시달리는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수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대거 참가했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500여년의 식민통치를 청산하고 지난 5월 독립정부를 수립한 동티모르는 9개 종목, 14명의 선수를 이끌고 참관국(옵서버)으로 참가했다. 동티모르는 메달은커녕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다. 동티모르 선수들은 국가상비군이 아니다. 여러 마을에서 운동 잘하는 청년들이 촌로들의 추천을 받아 왔다.
조아오(57) 동티모르 선수단장은 제1야당인 민주티모르동맹 당수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500년간의 식민통치를 겪었다. 그러나 이제 아시아에 우리가 당당한 이웃임을 알리고 간다. 그래서 이번 대회의 가장 값진 금메달은 우리의 것이다.”
(동티모르를 식민통치한) 인도네시아가 금메달을 받을 때, 그는 선수들을 데리고 시상식장에 나가 박수를 치고 포옹했다. 남은 마라톤 경기를 그는 벼르고 있다. “그날, 부산거리를 끝까지 달리는 티모르 선수를 세계는 보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네팔 선수단 단장 비노드(45)는 “기량으로 한국이나 일본을 당할 수 없다. 그러나 메달이 없더라도 우리는 영원히 이 대회에 올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김훈 기자 hoonk@hani.co.kr






만경봉호 정박 인근마을 풍경/다대포엔 시민과 인민이 함께산다  
 
 [한 겨 레] 2002-10-10 (종합) 뉴스 01면 03판 1975자    
 
   
다대포는 낙동강이 남해와 합치는 어귀에 있는 포구다.
바다는 전방위로 열려, 포구의 남쪽 언덕 몰운대에서는 일출도 일몰도 두루 볼 수 있다. 이 열린 바다를 헤치고, 북쪽 응원단 250여명을 태운 ‘만경봉-92호’는 포구 안으로 깊이 들어와 남한 땅에 닻을 내렸다. 뱃머리의 밧줄을 다대포 부두 쇠말뚝에 묶었다.
만경봉호 주변은 부산시민들의 일상적인 주거공간이다. 만경봉호 앞으로 2차선 도로가 지나가고, 그 길 건너편은 고층아파트와 상가, 노래방, 호텔들이 들어서 있다. 일터에서 돌아온 아파트 주민들이 저녁식탁에 둘러앉을 때, 경기장을 돌며 하루의 응원을 마친 북쪽 여성 응원단들도 배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다. 주민들의 저녁식탁 유리창 너머로, 바로 길 건너에서 만경봉호의 저녁 등불이 켜지고 돛대에 걸린 한반도기가 바닷바람에 나부낀다. 바닷가 삼환아파트 25층에 사는 박상건(47·부경대 강사)씨는 “놀라운 일이다. 길 건너에 정박한 북한 배와 함께 저녁을 먹다니. 통일이 이렇게 평화로운 방식으로 다가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3층에 사는 한 주부는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북쪽 배를 보려고 식탁을 베란다 쪽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8일에는 만경봉호 앞 빈터에서 다대포 5일장이 열렸다. 배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200여 노점 좌판들이 들어서서 푸성귀와 생선을 팔고, 가마솥에 국밥을 끓이고, 뻥튀기 기계를 돌렸다. 전경들이 길을 가로막기는 했지만 만경봉호와 5일장터가 빚어내는 풍경은 평화로웠다. 이따금 갑판을 돌아보는 북쪽 승무원들이 이 북적거리는 5일장터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낮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이리 내려와 국밥 한 그릇 자시오”라고 소리쳐 응답했다. 이날 북쪽 응원단은 오후 2시께 나들이에 나섰다. 해군 사관생도처럼 차린 북쪽 취주악단이 배에서 내리자 장보러 나왔던 아파트 주부들과 노점상인들이 일제히 길가로 달려가 박수를 쳐주었다.
만경봉호가 들어온 이후 다대포 부두에는 연일 300~400명의 환영객이 몰려들어 북쪽 배를 향해 손을 흔들고, 악기를 연주하고, 손나팔로 고함을 지르고 있다. 만경봉호 사람들은 응답에 넉넉하지 않다. 이따금 선실 커튼이 열리고 웃음띤 젊은 여성이 손을 흔들어 보일 뿐이다. 다대포 부두에서, 가까이 가려는 사람들의 열망은 목마름과도 같았다. 망원경 장수가 재미를 보고 있다. 사람들은 선실 커튼이 열리는 그 잠깐 동안 망원경으로 선실 안을 들여다본다.
해운대에서 이삿짐 운반업을 하는 김동훈(48)씨는 32m짜리 고가사다리차를 만경봉호 옆 빈터에 옮겨다 놓았다. 김씨는 배 안을 들여다보려는 사람들을 이 고가사다리에 태워서 하늘 높이 올려준다. 부산에 사는 이희완(48)씨는 아침 9시부터 이 부두에 나와 배를 향해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이씨가 “두만~강 푸른 물에”를 연주하면, 밀양, 창원에서 온 노인들이 배를 향해 합창으로 노래한다.
저물어서 돌아온 응원단은 배로 들어가기 전에 부두에서 한바탕 노래연습을 한다. 이 시간에 부두의 환영객들이 가장 많이 몰린다. 이쪽 저쪽이 모두 노래를 부르고, 고층아파트 주민들은 일제히 베란다로 나와 배를 내려다본다. 응원단이 배 안으로 들어가고 배에 오르는 다리가 걷혀도 부두의 노랫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북쪽 응원단 사회자 김영희(24)씨의 목소리는 늘 감격으로 고양되어 있다. 김씨는 8일 거리공연에서 “남쪽 동포들의 뜨거운 정에 감격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만경봉호 주변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가까이 가려는 열망은 남쪽이 훨씬 더 뜨거워 보였다.
만경봉호는 내항선 자격으로 입항했다.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북한 항구는 모두 내항으로 분류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만경봉호는 “내항선에 할인이 적용되는 항만시설 사용료만 내면 된다”고 이 관계자는 말했다. 만경봉호는 같은 나라의 북쪽 항구에서 남쪽 항구로 온 것이다. 이 진귀한 배가 지금 부산시민들의 평온했던 일상생활의 공간 깊숙이 닻을 내리고 있다. 13일 만경봉호 앞에서는 다시 다대포 5일장이 열린다.
부산/김훈 기자 hoonk@hani.co.kr






장준하씨 사망의혹/의문사위도 못풀어  
 
 [한 겨 레] 2002-09-23 (사회) 뉴스 19면 05판 1335자    
 
   
지난 16일 조사활동 시한이 끝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고 장준하씨의 죽음을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했다. 1988년의 재수사(의정부지청) 때는 “타살혐의 없음”으로 종결되었고, 93년 민주당의 사인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고인의 주검에 대한 법의학적 의문을 제기하는 수준에서 조사를 종결했다.
이번 의문사위의 ‘규명 불능’ 결정으로 고인의 죽음은 다시 미궁으로 빠졌으나, 지난 1년8개월에 걸친 위원회의 조사는 의문점의 윤곽을 구체화하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의 중앙정보부는 고인의 죽음 직전과 직후에 바싹 다가와 있었음이 위원회 조사 결과 밝혀졌다. 중정은 75년 3월31일 ‘위태분자 관찰계획’을 수립하고, 고인의 일일동향을 파악하고 감청해 온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나 위원회에 제출된 당시 중정의 동향파악 자료는 사고 당일인 8월17일분이 빠져 있다. 또 위원회는 사고 직후 중정요원 3명이 현장으로 급파되었다는 사실과 이들의 인적사항을 뒤늦게 파악했으나, 위원회의 조사시한 만료로 이들에 대한 소환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 또 당시 중정에서 야당 동향파악을 담당했던 계장급 직원은 고인의 사망현장의 유일한 동행자인 김아무개씨가 자신의 사설 정보원이었다고 위원회에서 진술했으나, 이 직원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직원의 후임 계장들을 조사하면 이 사설 정보원의 윤곽은 좀더 선명히 드러날 것이지만, 이 또한 조사시한 만료로 이뤄지지 않았다. 위원회 관계자는 “사고 직전과 사고 직후의 중정의 역할이 연결되지 않아 중정을 사인과 관련되어 특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밖에도 위원회가 밝혀낸 의문점은 많다. 동행자 김씨가 사고 직후 포천경찰서, 의정부지청 등을 옮겨다니며 조사를 받는 동안, 간단한 인적사항만을 기록하는 등 사실상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점도 중요한 의문점이다. 그러나 당시 경찰 수사지휘 계통의 직원들이 모두 숨져 이 부분은 더이상 조사할 수 없다고 위원회 관계자는 밝혔다.
또 현장에 가장 먼저 출동했던 이동파출소 순경 이아무개씨가 포천경찰서가 아니라 경기도경의 출동지시를 받은 점, 그리고 사고 발생시각이 오후 2시30분인데 2시부터 3시 사이에 고인의 가족들에게 “사고가 났으니 현장으로 가보라”는 발신자 불명의 전화가 걸려온 점도 의문점이다.
장준하씨는 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에서 등반하다가 12m 아래 절벽으로 추락해, 실족사한 것으로 당시 경찰은 발표했으나 추락사체에 두부함몰상 이외에는 아무런 외상이 없었으며, 안경과 보온병 등에 긁힌 자국도 없었고, 당시 정보기관들이 장씨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었다는 점 등이 의문점으로 제기되어 있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삼청교육 저항중 사망 /전정배씨 ‘민주화’ 인정  
 
 [한 겨 레] 2002-09-17 (사회) 뉴스 19면 06판 1372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981년 6월20일 육군5사단 삼청교육감호대대에서 경계병들의 사격으로 숨진 전정배(당시 30살)씨가 당시 삼청교육대의 불법성에 대해 집단저항을 벌이는 과정에서 숨진 것으로 드러나, 전씨의 죽음을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죽음으로 인정했다고 16일 밝혔다.
의문사위 조사를 보면, 사건 당일 도로정비 작업에서 돌아온 감호생들 가운데 일부가 술과 담배를 몰래 들여온 사실이 발각돼 부대 장교들이 감호생 6명을 구타하는 장면을 다른 감호생들이 목격하고, 감호생들이 “때리지 말고, 행정적으로 처리하라”고 항의하면서 집단저항이 시작됐다.
감호생들은 이날 오후 2시부터 연병장에 모여 “죄가 있으면 재판을 통해 교도소로 보내달라”, “사회정화위원장과 의정부지청장을 만나게 해달라”는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연좌농성을 벌이다가 밤 9시께 스크럼을 짜고 위병소 근처까지 나아가다 이를 저지하던 경비병들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당시 지휘관 ㅇ씨는 위원회 조사에서 “상황이 급박해 발사명령을 내렸다”며 “그러나 조준하지 말고, 땅바닥을 향해 위협사격을 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위원회는 “현장 지휘 장교들과 하사관들의 진술을 종합한 결과, 경비병들의 엠16 소총 이외에도 망루 위에 설치됐던 엠60 기관총도 발사됐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당시 발포로 인해 전씨는 총상을 입고 병원 후송 도중 숨졌고, 감호생 장아무개(당시 14살)씨 등 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지휘관 ㅇ씨가 근신처분을 받았고, 대대 간부 3명이 구속수사 후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감호생은 집단저항을 주도한 10명이 초병협박 등의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돼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위원회는 전씨가 불법 구금에 항의해 정식 재판과 책임자 면담을 요구했던 점 등을 들어 전씨의 죽음이 민주화 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인정했다.
한편, 1980년대 초 삼청교육대 사건을 광범위하게 조사해온 의문사위는 이 사업이 80년 7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사회정화위원회에서 전두환 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재가를 받아 시행됐으며, 이 계획에 따라 전국에서 6만여명이 검거돼 이 중 4만여명이 군부대에 배속돼 4주간씩 ‘삼청교육’(일명 순화교육)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순화교육이 끝난 뒤에도 당시 사회보호법에 따라 재판 없이 감호처분을 받아 계속 군부대에 수용됐다. 또 검거 대상이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 등 모호하게 규정돼 경찰의 자의적 집행이 가능했다고 의문사위는 덧붙였다.
숨진 전씨는 여자 문제로 아버지와 다투다가 주민 신고로 파출소에 연행된 뒤 삼청교육대로 보내진 것으로 밝혀졌다. 위원회는 삼청교육대 전반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와 함께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배상을 정부에 권고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인혁당 사형’ 도예종씨 부인 신동숙씨/“숨죽여 산 28년 한 풀어”  
 
 [한 겨 레] 2002-09-13 (사회) 뉴스 15면 06판 1670자    
 
   
인혁당 지도부 핵심요원으로 몰려 사형당한 도예종(당시 51살)씨의 부인 신동숙(73·사진)씨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당시 중앙정보부의 조작에 의한 것이었다”고 발표한 12일 지난 28년 동안의 한을 이제야 덜어낸 듯한 모습이었다.
신씨는 “그이가 처형된 뒤, 우리 가족은 죄인처럼 사회에서 내몰려 숨죽이고 살아왔다. 경찰들의 감시를 피해 수없이 이사를 다녔다. 살아서 이런 날을 볼 줄은 몰랐다. 진실을 밝혀주는 정부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신씨는 남편이 떠난 뒤, 행상과 노인회 직원 등을 전전하며 혼자서 3남2녀를 키웠다.
함께 처형된 사람들 중 대구가 고향인 4명은 지금 대구시 현대공원 묘역에 묻혀 있다. 매장 직후 가족들은 ‘민사, 여기 살아 있다’라고 새긴 묘비를 세웠다. ‘민사’는 ‘민주투사’를 감추려는 약자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곧 경찰에 적발돼 철거됐다. 1994년 20주년 기념 때에야 ‘민주열사’라는 묘비명을 새길 수 있었다.
도씨와 신씨는 한국전쟁 직후, 대구국민학교 교사로 함께 재직하던 중 연애결혼을 했다. 신씨는 남편 도씨에 대해 “그이는 연애 시절부터 늘 나에게 통일과 자주를 말해왔고, 대중연설도 가끔했다. 애국적인 열정을 가진 남자였다”고 말했다.
도씨는 1974년 두번째 검거 직전, 경북지역에서 굴지의 건설회사 명예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도씨가 사형된 뒤, 장례식에는 형제와 자녀들 이외에는 단 한명의 문상객도 없었다고 신씨는 회고했다. “모두들 무서워서 우리 가족을 멀리했다”고 신씨는 말했다. 또 공기업에 다니던 장남(당시 21살)은 이유없이 해직됐다.
신씨는 78년 남민전 사건 때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남민전 관계자들이 숨진 남편의 여름내복으로 깃발을 만들었다가 경찰에 적발됐기 때문이다. 경찰은 신씨를 상대로 이 내복의 유출 경위를 수사한 것이다. “그 후유증으로 아직도 심장병을 앓고 있다”고 신씨는 말했다.
신씨는 다가오는 추석에 남편의 묘소에 성묘 갈 준비를 하고 있다. “기쁘고 뜻깊은 성묘가 될 것”이라고 신씨는 말했다.
글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인혁당 사건이란
인혁당 사건은 1964년과 1974년 두 차례에 걸쳐 관련자들이 사법처리됐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64년 당시 중앙정보부(부장 김형욱)는 인혁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도예종씨 등 13명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1~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기소 과정에서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은 고문으로 이뤄진 중앙정보부의 수사를 신뢰할 수 없다며 기소를 포기하고 3명이 사직했다.
그후 유신반대 학생 시위가 번져나갔던 74년, 인혁당 관계자들은 ‘인혁당 재건위’를 결성한 혐의로 다시 기소됐다. 당시 중앙정보부(부장 신직수)는 “인혁당 재건위가 하부조직인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해 공산국가 건설을 도모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도예종씨 등 8명이 사형, 15명이 15년~무기형을 받았다. 75년 4월8일 대법원은 이들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고, 선고 20여시간 뒤인 다음날 형이 집행돼 ‘사법살인’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사형자들 중 일부의 유해는 가족들에게 넘겨지기 전에 화장됐고, 가족들에게 인도된 유해는 다시 탈취돼 강제 화장됐다.
김훈 기자






동료들 외면하고 두려움·외로움 커지고…/‘허일병 타살’증언 두 사병 “우리 진실 누가 지켜주나”  
 
 [한 겨 레] 2002-09-11 (사회) 뉴스 15면 04판 1206자    
 
   
1984년 군부대에서 ‘자살’한 것으로 발표됐던 허원근 일병 사건이 18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된 것은 당시 현장에서 사건을 목격한 두 사병이 ‘진실의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들은 총을 쏘았다는 노아무개씨와 그 밖의 사병들이 상황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상당한 심적 갈등과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벽 1차 총격과 물청소 등 당시 중대본부 막사 안의 상황에 대하여 가장 적극적인 진술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당시 부대 사병이었던 전아무개씨와 이아무개씨다. 전씨는 의문사위원회에서 당시 상황을 자세히 언급했고, 또 지난 3일 허 일병이 숨졌던 7사단 중대본부 내무반에서 열린 현장조사에도 참가했다.
현재 지방의 한 도시에서 살고 있는 전아무개씨는 지난 7일 밤 〈한겨레〉 기자와 만나 “대다수 목격자들이 아니라고 하는데, 나 혼자서 그렇다고 말하기가 무척 겁난다”고 말했다. 또 “당시 동료들이 전화를 걸어와 ‘너 왜 그러냐,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다’라고 말할 때마다 극심한 두려움과 외로움에 빠진다”고 털어놓았다. 전씨는 지금 종업원 4~5명을 둔 영세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다. “나는 소시민적 삶에 대한 애착이 있다. 나 혼자서 진실을 말하다가 이나마도 먹고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겁난다”며 전씨는 인터뷰 내내 “겁난다”라는 말을 계속 내뱉었다.
전씨는 특히 의문사위원회의 시한만료에 커다란 공포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전씨는 “위원회마저 사라져 버리면 누가 나의 진실을 방어해 줄 것인가?”라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전씨는 최근 휴대전화 번호를 바꿨다. 전씨는 “내가 ‘진실’을 밝힐 때는 내 진술을 토대로 다른 목격자들도 돌아오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점점 무너져 가는 것 같다”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허 일병이 내무반에서 흘린 피를 닦아냈던 물청소 상황 등을 위원회에서 자세하게 진술한 이아무개씨는 전씨와 함께 지난 3일 7사단 현장조사에까지 나섰으나, 이날 아침 화천읍내까지 왔다가 현장조사를 거부하고 돌아갔다. ‘불안감’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씨는 “대다수 목격자들이 상황을 부인하고 있는 판에 나 혼자서 현장을 재연할 수 없다. 위원회가 나를 보호할 수 있는가?”라며 자신을 붙잡는 위원회 관계자들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그는 “위원회 조사과정에서 내가 한 진술은 모두 나의 기억한도 안에서 진실”이라고 말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의문사 규명 계속돼야 한다/(하)시한연장 당위성  
 
 [한 겨 레] 2002-09-11 (종합) 기획.연재 01면 01판 2268자    
 
   
운동권 학생에 대한 공안기관의 프락치 공작이었던 이른바 ‘녹화사업’이 강도높게 진행되던 1983년 강제로 징집된 사병 5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죽음이 일정한 시기에 집중돼 있어 큰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0년 뒤 이 사건을 조사 중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개별 죽음의 배경만 설명할 수 있을 뿐, 의문의 전모에는 거의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군 정보기관이 거듭 자료제공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없다”는 것이 이유다. 최근에는 당시 녹화사업 실무 책임자로 자료제출을 요구받고 있던 전 보안사 과장 서의남씨가 개인자료를 불태우고 잠적했다. 현직 검사 3명이 동행명령을 거부하고 있고, 위원회의 유일한 처벌수단인 과태료를 납부한 사람도 없다.
광복 이후 국가제도의 권능으로 과거의 죄악을 규명하고 청산하려는 노력은 거듭된 시련에 부닥쳐 늘 좌절되었다. 그 시련은 그 시대의 정치발전 수준과 맞물려 있다. 오는 16일로 조사시한 만료를 앞두고 있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어려움도 그런 역사적 파행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48년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 제정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과 이에 따른 ‘반민특위’는 지금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권한을 확보하고 있었다. 독자적 수사권과 심판권·기소권을 갖고 있었고, 조사관들은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처벌법은 3년 동안의 한시법이었다. 반민특위는 그 3년의 시한조차 견뎌내지 못하고 이승만 정권에 의해 무장 해제됐고, 자유당이 장악한 국회는 특위의 수사권을 박탈했다. 4·19 혁명 이후에는 반민주 행위자의 공민권을 제한하기 위한 특별법을 만들고 이 법에 따라 특별재판부를 구성했으나 5·16 쿠데타로 이 과거청산 노력은 또다시 무산된 바 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비록 친일파를 처벌하거나 재산을 환수하지는 못했지만 과거의 악을 청산하기 위해 필요한 법제를 성취한 전례를 남겼고, 또 친일파들의 행적을 조사해 후세에 전한 공적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의문사위원회의 규명작업이 개별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수준을 넘어 과거 청산과 연결될 수 있을지는 출범 당시부터 의문이었다. 70년대의 전향공작, 80년대의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삼청교육대 등 여러 국가 기관들이 대거 참여해 같이 기획하고 집행했던 악의 구조적 실체에 겨우 접근하기 시작한 단계에서 위원회의 조사 기능은 이제 종말을 맞고 있다. 특히 삼청교육대 문제는 당시 사업의 기획과정, 군 부대 내부에서 벌어졌던 피교육생들의 집단저항 실상 등에 바짝 접근할 수 있었다. 조사시한이 연장된다면 이 부분은 많은 진전이 기대된다. 그러나 국가기관들이 합세해서 저지른 악의 구조를 밝히는 것은 이들 국가기관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단순한 시한 연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위원회의 권한 강화를 위한 입법안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 의문사위 한상범 위원장은 “위원회 활동을 통해 과거의 반민주적 악법과 제도와 판례를, 그리고 거기에 가담했던 인사들이 여전히 버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위원회는 지금까지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종합적 건의서를 정부에 낼 계획이다.
그러나 국가기관들이 합세해서 저지른 악의 구조를 밝히는 것은 이들 국가기관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단순한 시한 연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위원회의 권한 강화를 위한 입법안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 의문사위 한상범 위원장은 “위원회 활동을 통해 과거의 반민주적 악법과 제도와 판례를, 그리고 거기에 가담했던 인사들이 여전히 버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위원회는 지금까지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종합적 건의서를 정부에 낼 계획이다.
이 건의에는 보안감호 제도를 철폐하거나 보안감호소 내부를 일정하게 공개할 것, 조사과정에 제3의 기관을 참여시킬 것, 군 사법권 독립성을 강화할 것, 교도소내 징벌방 제도를 폐지하고 계구 사용을 엄격히 제한할 것, 국가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철폐 등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런 건의들이 재발 방지책은 될 수 있겠지만, ‘과거 청산’이 되기는 어려워보인다. 위원회의 미결사항들과 관련된 방대한 기록들은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된다. 위원회 기능을 국가인권위로 이첩하자는 논의도 더 이상 진전이 없다. 시한이 연장되지 않는다면 16일 이후에는 새로운 증거나 증인이 나타나도 위원회의 조사기능은 작동될 수 없다.
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국가기관들이 능동적으로 과거의 악을 청산하려는 의지가 없는 한 위원회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의문은 또다른 의문을 낳기 마련이다. 의문의 죽음들이 풍문으로 떠도는 한 국가의 정당성과 도덕성은 신뢰받지 못할 것이다. <끝>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전·노씨 ‘녹화사업’ 동행명령 불응  
 
 [한 겨 레] 2002-09-05 (사회) 뉴스 15면 43판 527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지난 1980년대 초 ‘녹화사업’과 관련해 4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게 동행명령장을 전달했으나, 두 사람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의문사위 조사관들은 이날 오전 10시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집을 찾아갔지만, 전 전 대통령이 개인약속을 이유로 아침 7시께 집을 비워 동행명령을 집행하지 못했다. 전 전 대통령 변호인인 이양우 변호사는 “전 전 대통령의 통치행위와 녹화사업은 무관하다”고 밝혔다. 또 “행정기관의 장이 동행명령장을 발부해 인신을 구속하는 것은 법원의 사전영장이 아니고서는 인신을 구속할 수 없다는 헌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사관들은 이어 인근에 있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집을 방문했으나, 노 전 대통령 역시 신병치료차 얼마 전 시골로 요양을 갔다고 비서관들이 밝혀, 역시 동행명령을 집행하지 못했다. 의문사위는 동행명령에 불응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 의문사특별법에 따라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리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장기수 3명 전향강요 폭행 사망/의문사위 “교도소쪽 심장마비·단순자살 처리”  
 
 [한 겨 레] 2002-08-30 (사회) 뉴스 15면 07판 526자    
 
   
지난 1970년대 비전향장기수 전향공작과 관련된 옥사사건을 조사중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대전과 대구교도소에서 숨진 무기수 최석기(당시 43살), 박융서(당시 53살), 손윤규(당시 51살)씨 등 3명이 전향을 강요받는 과정에서 숨졌다고 29일 밝혔다.(〈한겨레〉 8월21일치 14면 참조)
의문사위 조사를 보면, 최씨는 지난 74년 4월4일 교도소내 격리방으로 끌려가 수감중인 폭력사범 조아무개(현재 수감중)씨로부터 사상전향을 강요당하며 폭행을 당해 그날 저녁 8시께 숨졌다. 또 박씨는 같은해 7월19일 격리방으로 끌려가 몸을 바늘로 찔리는 고문을 당한 뒤, 감방으로 돌아와 유리조각으로 허벅지 동맥을 끊고 자살했다고 위원회는 밝혔다. 손씨도 76년 3월24일 전향공작을 강요하는 폭행을 당한 뒤, 항의단식을 계속하다 4월1일 교도관들에 의해 강제급식을 당했고, 이날 저녁 7시께 사망했다고 위원회는 설명했다. 교도소는 당시 이들의 죽음을 모두 심장마비, 단순자살, 또는 병사 등으로 처리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예정없던 상봉, 울어버린 핏줄/여원구씨, 남쪽 친척 12명 만나  
 
 [한 겨 레] 2002-08-16 (사회) 뉴스 15면 01판 541자    
 
   
‘8·15 민족통일대회’ 북쪽 대표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온 몽양 여운형 선생의 딸 여원구(74)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이 15일 오후 2시30분께 행사장인 서울 쉐라톤워커힐 호텔로 찾아온 남한의 친척들을 만나 예정에 없었던 ‘이산가족 상봉’을 했다.
여씨의 오촌조카 여인영(55·철공업)·인성(38·대구중공업 해외사업부 본부장)씨와 사촌 시누이 윤기수(78), 오세연(73)씨 등 서울과 대구에 살고 있는 친척 12명은 여 의장이 서울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전연락 없이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다가, 남북 합동공연 관람을 마치고 객실로 돌아가던 여 의장과 마주쳤다.
여 의장은 사촌 올케들을 끌어안고 울면서 다른 친척들의 안부를 물었다. 여씨와 친척들은 오후 4시까지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은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서로를 확인하고, 살아온 인생역정을 이야기했다. 친척들은 여 의장에게 자녀들을 인사시키고,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여 의장은 이날 북한에 1남2녀를 두고 있다고 친척들에게 말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동해 해수욕장 가보니/세파 씻으려다 인파에 부대끼고…  
 
 [한 겨 레] 2002-08-02 (사회) 뉴스 14면 07판 1526자    
 
   
대관령, 죽령, 이화령은 태백산맥이나 소백산맥을 넘어서 동해와 내륙을 잇는 험준한 고개였다. 이제, 고개들은 그 밑으로 터널이 뚫려 아무도 넘지 않는 ‘옛길’이다. 산맥에 터널이 뚫리자 동해의 격절감은 사라졌다. 대도시에서 출발한 피서차량들은 고갯마루로 올라가는 일 없이 평탄한 고속도로를 달려 동해에 닿는다. 대관령은 지난해 연말 모두 7개의 터널로 아래가 뚫렸다. 이번 여름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터널로 뚫린 뒤 처음 맞는 피서철이다. 지난해 피서철과 가을 행락철까지만 해도 차량으로 막히던 영동고속국도 대관령 구간에는 이제 ‘대관령 옛길’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대관령 옛길’의 휴게소, 주유소, 식당, 과일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고 떠났다. 죽령 고갯마루도 인기척 없는 폐허로 변해간다.
동해는 그렇게 대도시와 잇닿았다. 지난 31일 찾아가본 경포해수욕장은 젊은이들만의 바다다. 강릉권역 피서객 150만명 중 120만명이 경포로 몰렸고 나머지 30만명이 22곳의 작은 해수욕장으로 흩어졌다. 경포 백사장은 14만4천㎡이고 나머지 해수욕장들은 대개 2만~5만㎡다. 경포에는 중년 또는 가족단위 피서객들을 찾기 어렵다. 넓은 백사장을 메운 인파는 대부분 10~20대들이다. 경포에서 20여년간 식당업을 해온 유아무개(47)씨는 “3년 전부터 젊은이들이 몰리더니 올해는 젊은이 일색이 됐다. 경포는 물좋은 해수욕장”이라고 말했다. ‘물좋다’는 그의 말은 몸매가 ‘잘 빠진’ 젊은 여자들이 많다는 뜻이다. 경포에서는 비키니의 젊은 미녀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 여자들은 해수욕보다는 몸매를 과시하는 일에 더 열중하고 있었다. 비키니 차림에 큰 스카프로 한쪽 어깨를 비스듬히 가리고 텐트촌을 천천히 걸어다녔다. 워터프루프(방수) 화장으로 마스카라와 아이섀도를 칠했고, 립글로스를 바른 입술이 번들거렸다. 잘 구어진 등판에 샤이닝 파운데이션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남자끼리 온 팀과 여자끼리 온 팀이 금방 어울려 함께 둘러앉아 놀았다. 야행성은 젊은이들의 생리적 특성인 듯싶다. 백사장에서 밤을 새운 젊은이들은 거기서 해돋이를 맞았다. 먼동이 트는 바다를 향해 함성을 지르고 나서 그제서야 여관으로 돌아갔다.
경포백사장은 오전 6시부터 10시까지는 텅 빈다. 그때가 청소시간이다. 아침 경포백사장에는 따지도 않은 채 내버린 맥주·양주·음료수들이 그득하다. 부지런한 상인이 백사장을 뒤져 두어상자 가져갔다.
송정, 안목, 고성목은 경포 남쪽의 작은 해수욕장이다. 대부분 중년부부와 가족들이다. 중년여자들의 휴가는 여전히 가족들을 위해 밥 짓고 찌개 끓이고 상추 씻는 일이었다. 밤 11시가 되면 이 해변은 고요해진다. 주차장에 세운 9인승 승합차 안에서 가족들은 밤을 지낸다. 그 승합차로 장사를 하는 상인 부부들이었다.
아무래도 이 시대의 휴가는 목가적이기보다는 전투적이다. 아침햇살이 젊은이의 해안과 중년부부의 해안과 이제는 인기척이 끊어진 대관령 고갯길을 두루 비추었다. 휴가를 마친 차량 대열들은 다시 7개의 터널을 따라 삽시간에 대도시로 돌아가고 있었다.
강릉/글·사진 김훈 기자 hoonk@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한상범 의문사규명위원장/‘과거’ 인적·물적 기득권 청산해야 화해 가능  
 
 [한 겨 레] 2002-07-23 (특집) 인물평/약력 26면 01판 4737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과거의 ‘악’과 대결하고 있다. 악은 은폐돼 있거나 정당화돼 있다. 그래서 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풍문의 모습으로 시대의 뒷전을 빠져나가고, ‘의문’의 신기루들이 역사의 발목을 잡는다. 민주화가 달성됐다던 1990년대 말까지도 국토분단과 억압적 정치권력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젊은이들은 공권력의 추격을 받아왔다. 그 젊은이들은 남쪽 바다의 후미진 갯벌에서 온몸이 밧줄에 감겨진 변사체로, 시멘트 덩어리를 몸에 매달고 물에 빠져죽은 익사체로, 또는 급박한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고층건물에서 떨어져 죽은 참혹한 추락사의 모습으로 발견됐다. 그들의 죽음은 모두 자살, 수영미숙, 단순추락사로 처리됐다. 그 죽음과 공권력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일은 단순한 법의학적 문제를 훨씬 넘어선다. 그것은 과거 악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미래를 여는 일이다. 2002년의 한국사회는 여전히 그 과거의 악과 인적·제도적 연장선 위에 머물러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현 정부 출범 초기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과 시민들의 힘에 정부가 떠밀린 양상으로 2000년 7월10일 설치됐다. 유가족들은 98년 11월4일부터 422일 동안 국회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이며 입법을 요구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직속기관이지만, 강제수사권이나 처벌권이 없는 한시적 조직으로 출범했다. 위원회는 오는 9월16일로 법적인 활동을 끝내게 돼 있다. 모두 85건의 ‘의문의 죽음’이 접수됐고 그중 70건이 아직도 조사중인 채로 위원회의 법정시한은 다가오고 있다. 마무리 작업을 지휘하고 있는 한상범 위원장을 만났다.
***진상규명 빈약해도 그자체로 소중
-한국 현대사에서 과거청산 노력은 늘 좌절돼왔다. 그 원인과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광복 후 국토는 분단됐고 남한에서는 친일파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세력이 지배권력을 장악했다. 그 후 4월 혁명이 5·16 쿠데타로 좌절되고 군부독재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악’을 청산하려는 모든 노력은 번번이 실패했다. 김대중 정권의 개혁도 부패한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 부닥쳤고 또 그 반대세력과 타협해가는 과정에서 표류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를 청산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어떻게 하는 것이 과거를 ‘청산’하는 일인가?
=첫째는 인적 청산이다. 지나간 시절 악의 세력의 실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그들의 가면을 벗기고 사회의 주도적 역할에서 후퇴시키고, 그들이 보유한 물적 정치적 기득권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물적 청산이다. 아직도 이 사회 구조의 근간을 이루는 반민주적 법령, 제도, 관행, 억압적 관료기구를 무력화시켜야 한다. 셋째는 반민주적 이데올로기를 청산하는 일이다. 반공 매카시즘의 병리적 사고와 개발독재에 대한 기만적 정치신화를 타파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용서와 화해 같은 동양적 관용으로 조화와 공존에 도달하는 삶의 방식이 있지 않나?
=어설픈 이야기다. 정치문제를 개인도덕 문제로 오판하지 말라. 책임과 처벌 대신 온정과 유화를 내세우는 건 기만적 논리에 불과하다.
-용서와 화해는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나는 학문도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현실에 입각해야 하는 것이 학문의 기초라고 할 때, 학문은 현실에 닿기 위한 투쟁이다. 더구나 개혁을 위한 투쟁은 그 주체와 그 반대세력 사이의 생사의 운명을 건 싸움일 수밖에 없다. 이 운명을 구체적이고도 현장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부딪쳐 나가야 한다. 여기에서 타협할 수 없는 한계선은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가능한 화해의 방식은 영영 없는 것인가?
=있기는 있다. 우선 공권력을 동원해서, 또는 지배권력에 편승해서 악을 저지른 사람들이 그 악의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고, 그리고 그 악이 가져다준 물적 정치적 기득권을 반납한 다음에야 화해는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동의대 사건이나 한총련 투쟁국장 김준배 사망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할 때마다 사회의 갈등과 대립은 폭발해왔다. 이런 갈등을 어떻게 보는가?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갈등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이다. 과거를 청산하는 일은 갈등을 통과하는 투쟁이다. 어느 편에 서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동의대 사건 때 순직한 경찰관들의 참극은 국가의 공적 법집행기구로서 직무를 수행하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애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죽음을 다른 국면과 결부시켜서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의문사규명위원회는 그 안타까운 진상규명 노력에도 실적이 너무 빈약하지 않은가?
=그 빈약한 실적이라도 소중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군사독재시대의 독재 하수인과 법 기술자들이 여전히 그 권력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위원회의 권한은 없고 규명되지 않은 죽음은 산적해 있다. 의문사에 관련된 범법자나 옛 기득권층들은 의문사위원회가 시한이 돼 스스로 말라죽어 버리기를 기다리며 시간끌기로 버티고 있다.
-시간끌기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피조사기관인 국가정보기관들이 위원회가 요청한 자료나 정보를 극히 일부분씩만 찔끔찔끔 보내주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 등이다.
-그런 비협조에 어떻게 대처하나?
=국방장관, 기무사령관, 국정원장, 검찰총장 등 관련 기관장들을 모두 만나 협조를 호소했다. 기관장들은 적극 협조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 하부 관료조직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국가공안기관들은 단 한번도 외부기관에 의해 그 직무내용을 검증받아본 적이 없었다. 결국 많은 죽음들의 진상을 밝히지 못한 채 위원회는 시한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관계기관들의 현장조사 거부, 비협조, 시간끌며 버티기 등의 사례를 낱낱이 모아 보고서 형식으로 국민 앞에 공개하려 한다.
-고문이나 강압적 수사에 가담했던 사람들도 그들 나름의 국가관과 애국심이 있었던 것 아닌가?
=그렇다. 그리고 그것이 이 시대의 비극이다. 법의 권능으로 저지르는 범죄는 용서하기 어렵다. 이런 범죄는 애국의 탈을 쓰고 있지만, 범죄일 뿐이다. 이런 범죄에까지 공소시효를 적용하는 건 법적 정의가 아니라고 본다.
-지금 진행중인 ‘녹화사업’ 조사는 진전이 있는가?
=녹화사업은 80년대 강제징집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군 내부에서 벌어졌던 사상개조 작업이고, 그 방법은 고문과 강압이었다. 자료협조가 거의 안돼 피해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군정보기관뿐 아니라 당시 대학관계자, 문교부 대학담당자들에 이르기까지 조사하고 있다. 과거 독재정권의 ‘악의 뿌리’ 하나를 적출해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반발이 심하고 조사는 어렵다.
***‘녹화사업’ 조사 반발심해 난항
-시한이 다가오는데, 규명이 안된 많은 죽음은 어떻게 정리하나?
=답답하다. 시한이 급박하다고 해서 죽음의 문제를 서둘러 졸속으로 결론지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백기를 들고 이 문제를 역사의 미궁 속으로 흘려보내는 것도 무책임한 일이다.
-무슨 방안이 없는 것인가?
=개인의견을 말하라면, 미결사항들을 국가인권위원회로 이관해서 계속 조사하든지, 좀더 큰 권한을 갖는 별도의 조사기구를 설치하든지, 아니면 현재 위원회의 한시성을 철폐하든지 등의 방안이 있다. 모두 입법이 필요한 사항들인데, 아직까지 정치권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해 일언반구의 협의나 문의가 없었다.
글 김훈 최혜정 기자, 사진 김정효 기자 hoonk@hani.co.kr

● 한상범 위원장/ 40년간 법학 전수 헌법학자 한글운동·일제청산 힘쏟기도
한상범(63) 위원장은 지난 40년 동안 동국대에서 법학을 가르쳐온 헌법학자다. 황해도 개성 출생으로 동국대 법학과를 졸업했고, 지금은 동국대 법대 명예교수다.
그는 학문적 입장과 생애의 궤적이 일치하는 지식인이다. 그의 학문은 헌법 안에서 인간의 기본권과 자유의 영역을 확보하고, 시민사회의 자유 영역을 넓히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이 분야에서 그는 〈현대법의 역사와 사상〉(2001), 〈헌법이야기〉(1997), 〈한국 헌법〉(1973) 등 많은 저서를 펴냈다. 그는 64년 한일협정 반대, 69년 3선개헌 반대, 72년 유신반대 운동에 참가하면서 수많은 파란을 겪었다. 그의 현실참여는 글쓰기와 행동, 양쪽에서 진행됐다.
그의 생애의 주된 관심은 학문 이외에도 일제잔재 청산, 한글운동, 불교시민운동 등으로 다양하게 펼쳐졌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직을 지금도 맡고 있다. 위원회가 끝나면 그는 다시 연구소로 돌아간다. 〈친일인명사전〉을 펴내는 일은 그의 필생의 사업이다.
한글운동에 대한 공로로 94년 한글학회의 표창을 받았고, 일제청산의 공로로 2000년 외솔상을 받았다.

● 인터뷰 후기
한상범 위원장의 어조는 논리적이면서도 단호했다. 그는 인간의 역사와 현실을 대립과 투쟁의 관계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화해, 관용, 자비, 용서 같은 타협적 언어들을 극도로 배척했다. 그러나 그는 〈불교신문〉 주필을 역임했던 독실한 불교신자이고, 지금도 전국 대학교수들의 불교신자 모임을 이끌고 있다.
“인간의 죄악을 함부로 용서해주는 것도 죄악일 것”이라고 그는 인터뷰 말미에 말했다. “인간의 정치현실은 종교가 아니다”라고도 말했다. 그의 사회인식이 그의 불교와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 것인지를 그에게 물었다. 그는 한마디로 답했다.
“불교의 근원은 인간의 살아 있는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다. 살려는 사람의 생명을 압살하고 억압하는 자에게까지 사회적 관용과 화해를 베푸는 것은 안될 말이다.”
그의 전자우편함에는 위원회의 결정을 비난하는 글들이 가득 들어와 있다. “당신 몸 조심해야겠다”는 익명의 협박전화도 가끔씩 걸려온다. 그는 “정치적으로 또는 이념적으로 비난받는 일을 감수한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위원장 옆방에서는 ‘녹화사업’ 피해자들을 불러놓고 조사관들이 하루종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고지식해 보이는 위원장 휘하에서 위원회의 마지막 날들은 힘겹게 흘러가고 있었다.

 







시공사 “터 수용뒤 재개”/사찰쪽 “보상 협의 불가”  
 
 [한 겨 레] 2002-07-18 (사회) 뉴스 15면 02판 1015자    
 
   
법원이 16일 북한산 국립공원 관통도로(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에 대해 공사중지 결정을 내렸으나, 사찰과 시공회사쪽이 법원의 결정을 정반대로 해석하고 나서는 등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북한산 관통도로 사패산 터널구간 중 회룡사, 홍법사 등 2개 사찰 구간에 대한 법원의 공사중지 가처분 결정으로 터널 굴착공사는 일단 보류됐다.
그러나 건설교통부와 시공사인 엘지건설쪽은 17일 “나머지 구간에 대해서는 공사를 허용한 것”이라며 “중지 구간도 사찰 소유 토지에 대한 보상 또는 수용 방식으로 공사를 재개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사찰쪽도 완강하다. 회룡사 주지 성견 스님은 이날 “시공사쪽이 토지 보상이나 수용 문제를 협의해온 적이 없으며, 제안을 하더라도 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전통사찰보존법은 전통사찰의 토지를 수용하거나 사용할 때에는 종단쪽과 협의해야 하고 문화관광부 장관 승인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회룡사는 1400여년 전에 창건된 신라고찰이며, 한강 북쪽 지역의 유일한 비구니 선방이다. 홍법사쪽도 “절을 팔고 옮길 계획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엘지건설이 시공을 맡은 북한산 관통도로 사패산 터널구간 현장은 그동안 여러 건의 소송과 엇갈리는 가처분 결정으로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해 왔다. 회룡사 등 23개 사찰은 지난해 12월 건설교통부 장관을 상대로 북한산 관통도로 사업허가를 취소하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맞서 시공자인 서울고속도로(주)와 엘지건설쪽도 사패산 공사현장에서 장기 농성을 벌이고 있는 승려, 환경운동가들을 상대로 ‘공사방해금지 가처분신청’을 청구해 유리한 결정을 얻어낸 바 있다.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 제4민사부는 지난 1월30일자 가처분 결정에서 회룡사 주지 등 23개 사찰 대표와 조상희 우이령보존회장 등 환경운동가 6명에 대해 “공사구간에 1회 출입할 때마다 100만원을 시공사쪽에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시공사들은 이 결정에 따라 회룡사 등 20개 사찰을 상대로 지난 5월 2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김준배 전 한총련 투쟁국장 검거위해 경찰 프락치고용 확인  
 
 [한 겨 레] 2002-07-17 (사회) 뉴스 14면 01판 1279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6일 지난 97년 경찰의 연행과정에서 사망한 제5기 한총련 투쟁국장 김준배(당시 27살)씨의 사망 배경(〈한겨레〉 7월10일치 1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수배자를 검거하기 위해 프락치를 고용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경찰이 사실상 이 프락치를 ‘보호’해주기 위해 범인은닉 혐의로 구속해 교도소에 수감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규명위는 밝혔다.
다음은 규명위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것이다.
1997년 김준배씨를 뒤쫓던 전남경찰청 형사기동대 소속 도아무개 경장은 김씨의 광주대 후배인 전아무개씨를 만나 ‘김씨의 은신처를 알려주면 1300~1500만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도 경장은 실제로 전씨에게 500만원을 주고, 술자리 등 향응도 베풀었다. 도 경장은 수배자를 검거한 경찰관에게 주어지는 1계급 특진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전씨에게 돈을 줬다고 규명위에서 진술했다.
전씨는 97년 9월 김씨 애인인 배아무개씨를 통해 김씨의 은신처를 알아낸 뒤, “추석이니, 함께 지내자”며 김씨를 자신의 친구집인 광주시 오치동 ㅊ아파트로 데려왔으며, 3일 뒤 도 경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전씨의 제보를 받은 도 경장은 9월25일 밤 경찰 기동대원 25명을 둘로 나눠 일부는 13층 아파트를 덮치게 하고, 일부는 아파트 마당에 배치했다. 갑작스럽게 경찰이 들이닥치자, 김씨는 아파트 외벽 케이블선을 타고 내려오다 4층 부근에서 아래로 떨어진 뒤, 마당에 배치된 경찰들에게 구타까지 당했고, 다음날 새벽 병원에서 숨졌다.
김씨가 숨지는 바람에 도 경장과 경찰관들은 검거미숙을 이유로 특진되지 못했다. 이 사건을 지휘한 정윤기 검사(현 영월지청장)는 사건을 종결하면서 김씨의 은신처를 제보했던 전씨를 범인은닉 혐의로 구속했다. 규명위는 이에 대해 “한 경찰간부가 ‘전씨의 프락치 역할이 알려지면 위험하니 전씨를 보호해야 한다’며 정 검사에게 구속을 요청한 사실을 진술했다”고 밝혔다. 이후 전씨는 구치소에서 30일간 있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뒤 징역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전씨는 지난해 9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돈을 받기로 하고 도 경장과 프락치 관계를 맺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규명위는 전씨를 구속한 정 검사의 행위에 대해 “프락치 신변보호를 위해 검사가 법원을 기만해서 영장을 발부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 검사는 “김씨 검거 당시 제보자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 제보자가 전씨였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며 규명위의 주장을 부인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2002월드컵/8강전 앞둔 광주 르포/빛고을 `그날의 거리' 붉은 물결이 넘실대고  
 
 [한 겨 레] 2002-06-22 (사회) 기획.연재 15면 04판 1619자    
 
   
4강 진출의 날이 밝았다. 전국 50만 인파가 광주로 향하고 있다. 전남 서남해안 섬지역 주민들도 광주로 모여든다. 광주로 가는 길목의 휴게소와 주유소들은 태극기로 뒤덮였다.
1980년 5월항쟁의 격전지였던 도청 앞 광장, 금남로, 상무시민공원, 옛 광주은행로터리, 송정리역 광장에 대형 전광판이 설치되었다.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는 함성들이 그날의 거리로 모여들고 있다. 80년 5월 이후 금남로 집회는 금지되었다. 금남로는 금단의 거리였다. 89년 5월항쟁 전야제 때부터 금남로는 열렸다. 집회 허가도 필요없이 모여드는 사람들의 힘에 밀려 거리는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오늘, 지역을 넘어선 더 많은 인파가 이 거리에 모여 '대한민국'을 외친다.
80년 5월에 이 거리의 노래는 (애국가)였다. 그로부터 20여년 동안, 이 거리의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애국적이거나 국가적인 표상들은 이 거리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워 보였다. 이탈리아를 무너뜨리던 18일 밤, 이 거리에 모인 10만여 인파는 경찰악대의 주악에 따라 (애국가)를 불렀다.
'타는 목마름으로 4강으로 가자'처럼, 자유를 향한 갈망의 노래를 응용한 현수막들이 여기가 그날의 거리임을 일깨우지만, 지금 금남로의 기억은 나이든 세대들의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다. 5.18 관련 단체들이 거리응원에 참여하려는 기색은 없다.
이세영(42)씨는 80년 5월의 총상 피해자다. 평생을 목발에 의지하고 있다. 지금은 망월동 묘지 앞에 꽃가게를 차렸다. 이씨는 "나는 그날 도청 앞에서 총에 맞았다. 내가 쓰러졌던 그 싸움의 자리가 축제와 신명의 광장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 변화를 긍정한다"고 말했다. 김준태(55) 시인은 80년 5월의 학살 속에서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를 발표하고 수배를 피해 달아났다. 김 시인은 16강전을 금남로에서 겪었다. "이 집단적 신바람은 냄비근성이 아니라 가마솥 근성이다. 익기 전에 달아올라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 공동체의 미래를 믿는다"고 말했다.
최효경(22.광주여대4)씨는 80년 11월에 태어났다. 어머니 이추자(47)씨는 임신 4개월의 몸으로 계엄군에 끌려가 상무대에서 고문을 당했다. 그 뱃속의 아기가 자라서 오늘의 최효경씨다. 최씨는 길거리 응원이 벌어질 때마다 80년생 친구들과 함께 붉은 옷을 입고 도청 앞에 나간다. 톨게이트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최씨는 "광주로 오는 한국 선수단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다"며 기뻐했다. 어머니 뱃속에 있던 시절의 고통이 최씨에게는 아무런 그림자도 드리우고 있지 않았다. 염주동 월드컵경기장 앞 광장에서는 18일 이후부터 야영을 시작한 젊은이들이 앰프음악에 맞춰 응원연습을 하고 있다. 핫팬츠와 브래지어만을 걸친 젊은 여성들이 태극기를 아랫도리에 휘감고 댄스곡으로 편곡한 (애국가)에 맞추어 격렬하게 몸을 흔든다. 그들의 젊은 신바람은 애국적 표상들의 엄숙주의를 단숨에 무너뜨려 버린다. 이 놀라운 젊은 생명의 힘들이 금남로, 충장로, 도청 앞으로 모여들고 있다. 이 거리의 5월을 기억하라는 요구조차도 그들에게는 또다른 억압일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80년에도 그랬듯이, 금남로는 다시 새롭게 분출하는 것들의 힘으로 들끓고 있다. 그 힘들이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고 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월드컵 / 설치미술가 이명환씨 '월드컵 차 몰고 전국 누비죠'  
 
 [한 겨 레] 2002-06-07 (사회) 뉴스 18면 04판 544자    
 
   
"월드컵을 꿈꾸며 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8년간의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막 돌아온 설치미술가 이명환(40)씨는 지난달 20일부터 매일 미니축구장을 설치한 자동차를 몰고 전국 도시를 순회하고 있다.
지난 2000년 프랑스 정부가 선정하는 '최우수 청년작가 장학생'으로 뽑히기도 했던 그는 이번에 프랑스대사관의 후원을 받아 월드컵 미술작품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자동차 보닛과 지붕 위에 잔디구장을 깔고 그 위에 달나라에서 온 토끼 두 마리가 트럼펫을 불며 지구촌을 달리는 상징물을 설치한 것이다. 잔디구장에는 세계 각국 선수들의 등판 번호가 세워졌고, 토끼는 문명의 원동력인 바퀴를 굴리며 달린다. 작품의 제목은 '달나라 토끼의 월드컵 여행'이다. 이씨는 "우화와 현실을 결합해 화합의 메시지를 만들어 보았다"고 말했다. 이 달리는 미술작품은 이씨의 개인전시회이기도 하다. 이씨는 월드컵 기간 중 경기가 열리는 모든 도시를 찾아갈 계획이다. 후원을 해준 프랑스대사관쪽은 이씨의 작품을 인터넷방송으로 프랑스에 소개할 계획이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구제역 현장 르포 / 거대한 돼지무덤...함께 묻힌 농가의 꿈  
 
 [한 겨 레] 2002-05-18 (사회) 기획.연재 14면 02판 1687자    
 
   
경기도 안성시, 용인시, 충북 진천군의 농촌마을에 거대한 돼지무덤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지난 3일 안성시 삼죽면 율곡마을의 한 농장에서 처음으로 돼지 구제역이 발생한 이후 최근까지 반지름 500m 이내의 돼지 1만8천여마리가 '살처분'을 받고 매립되었다. 돼지들이 묻혀가는 동안에도 구제역은 인접 마을로 확산되었다. 15일부터는 진성으로 판명된 축산농가 주변 3km까지 살처분 범위가 확대됐다. 다시 5만여마리가 묻혀야 한다. 이번에 죽음을 당한 돼지는 모두 9만마리가 넘는다.
죽인 돼지는 외부로 싣고 나올 수 없다. 이동과정에서 구제역 바이러스가 확산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 집 돼지는 자기 집 땅에 묻어야 한다. 첫 발생지인 율곡농장에선 8700여마리를 한 구덩이에 묻었다. 수가 너무 많아 한 마리씩 전기충격을 가하기도 힘들어 구덩이를 판 뒤, 돼지를 산 채로 몰아넣고 흙을 덮었다. 솟아오른 돼지 무덤 위에는 '발굴금지' 경고판이 꽂혔다.
용인시 백암면 장평리는 율곡리에서 3km 떨어져 있다. 장평리 돼지들은 15일부터 도륙되기 시작했다. 이 마을 3개 축산농가의 돼지 2500여마리가 밭이나 공터에 묻혔다. 모두 축사나 마을에서 가깝다. 돼지 무덤과의 거리는 250~300m 정도다. 이 마을 박아무개(42)씨도 이날 돼지 1천여마리를 묻었다. 묻을 땅이 따로 없어 축사와 잇닿은 수박재배용 비닐하우스 두 동을 헐었다. 포클레인을 몰고 온 방역공무원과 군인들이 구덩이를 팠다. 공무원들은 돼지를 다룰 줄 몰랐다. 박씨는 공무원들의 간청으로, 제 손으로 기른 돼지를 구덩이 속으로 내몰았다. 중장비 기사들이 포클레인 바스켓으로 소리치며 날뛰는 돼지들을 꾹꾹 누르고 흙을 덮었다. 박씨의 돼지는 특수사료를 먹여 기르는 '브랜드 돼지'다. 박씨는 면소재지에 정육점도 차렸다. 돼지고기 전문식당도 차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박씨는 이날 꿈을 단념했다. 박씨는 이날 정육점 문을 닫았다.
지난 13일 저녁 농림부 고위관리들이 이 마을에서 축산농민들을 만났다. 정부 입장은 '신속한 매립'이었다. 농민들도 매립에 반대하진 않았다. 그러나 농민들은 생계와 환경문제에 대한 정부 대책을 따졌다. 돼지를 시가로 보상해주더라도, 언제 다시 돼지사육을 시작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생계는 막연하고, 또 새끼돼지를 다시 어미돼지로 키우는 동안의 투자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농민들의 하소연이다. 정부 관계자는 '매립 먼저, 나중 대화'를 주장하고 돌아갔다.
주거지에서 가깝거나 경작지 한복판에 들어선 거대한 돼지무덤도 농민들을 겁나게 한다. 장평리 마을은 상수도가 없어 지하수를 모터로 끌어올려 쓰고 있다. 돼지무덤과 마을 사이에 냇물이 흐른다. 더운 여름 돼지무덤에 고이는 침출수가 지하수에 스며들지나 않을지, 농민들은 시름겹다. 구제역은 가축의 역사와 함께 한 오래된 전염병이다. 사육되는 돼지는 돌아다니지 않는다.
구제역은 인간이 돼지에게 옮기는 병이다. 이번 구제역 전파경로도 지방도나 산길로 연결된 마을들이다. 해외 여행자가 급증하면서 아시아의 구제역은 일본 한국 말레이시아로 권역화됐다. 건국대 수의학과 류영수 교수는 "구제역은 인간에 의한 재앙"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동물에게 재앙을 가져다주고, 그 재앙은 다시 인간에게 돌아오고 있다. 인간과 가축의 관계는 여전히 상호 의존적이다. 돼지무덤들은 늘어나고, 돼지가 사라진 마을마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한겨레 14돌 특집/'자율과 참여' 시험대오른 주민자치센터  
 
 [한 겨 레] 2002-05-16 (정치/해설) 기획.연재 16면 07판 1330자    
 
   
지난해 3월부터 온나라의 동사무소가 주민자치센터로 바뀌어가고 있다. 필수적 민원업무만 남겨놓고, 일반행정업무는 모두 구청으로 이관됐다. 동사무소의 남는 시설에 주민들을 위한 문화·복지시설이 들어서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행정자치부가 제정한 조례준칙을 보면, 주민자치센터의 운영원칙은 지역공동체 형성에 주민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다. 정치목적의 이용은 금지돼 있다. 이 자치센터는 주민들로 구성되는 자치위원회가 자율적으로 운영한다. 이 자치위원회가 작은 지역사회에서 여론수렴을 통한 민주적 리더십을 만들어낼 수 있을 지가 자치센터 성패의 관건이다.
인천시 연수구 연수2동 주민자치센터는 지난해 11월 전국주민자치센터 박람회에서 최우수자치센터로 선정됐다. 이 마을의 자치위원회(위원장 윤용복)는 의사, 식당주인, 공인중개사, 직장인, 주부 등으로 구성된 30명이다. 그중 여성이 14명이다. 위원회는 총무, 기획, 청소년, 자원봉사 등 4개의 소위원회로 나뉜다. 지역의 작은 문제들을 찾아 행정과 연결시키거나 자율적 해결방안을 실천하는 것이 위원회의 일이다. 연수2동은 신흥개발지역이다. 중산층과 개발에서 소외된 저소득층이 함께 산다. 자치위원회의 복지 관심은 이 저소득층에게 쏠려 있다. 이전까지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한 `청소년 공부방'은 공간만 있을 뿐 그저 방치돼 왔다. 주민자치위원회는 이 공부방에 자원봉사자를 보내 아이들을 지도하고 놀이와 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했다. 지난달의 자원봉사자 공문에 100여명이 몰려들었다. 그중에서 10명을 골라 뽑아 아이들을 지도하게 했다. 위원회는 또 자치센터 문화프로그램을 통해 낯선 주민들을 몇 개의 동아리로 묶어냈다. 동호인 동아리로 시작한 이 모임은 공동체적 분위기 조성에 작은 기여를 하고 있다. 마을에 불이 났을 때, 무의탁 장애인이 사망했을 때, 위원회는 그동안 쌓은 인적 응집력을 바탕으로 관청에 기대지 않고서도 이웃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주민자치위원회는 또 2000년부터 매년 늦가을 지역주민들과 함께 마을축제를 벌여왔다. 이 잔치의 이름은 `솔안말 축제'다. 축제 프로그램도 지역 특색에 맞춰 자치위원회가 스스로 만들었다. 동네의 연화초등학교 풍물패가 해마다 축제의 서막을 연다.
연수2동 주민자치위원회의 올해 사업목표는 다양한 분야의 자원봉사자들을 발굴해 마을 일을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치센터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전국의 주민자치센터들과 경험을 나누는 것이다. 윤용복 위원장은 “지역의 작은 리더들이 주민 참여를 유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삶의 현장에 밀착하는 것만이 자치센터의 길이다”라고 말했다. 자율과 참여의 최일선으로서 주민지치센터는 시험대 위에 올라 있다.
김훈 기자







김훈 기자의 현장르포/죽음은 일상과 뒤섞여 있었다    
 
 [한 겨 레] 2002-04-17 (종합) 뉴스 01면 08판 1901자    
 
   
중국 여객기 추락사고 현장인 경남 김해시 지내동 현장 지휘소에는 16일 오후 1시께까지 불에 타고 비에 젖은 주검이 실려 내려왔다. 여객기 동체에 눌어붙어 있던 살점과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주검 조각들이 비닐자루에 담겨서 내려왔다. 항공유가 타는 고열에 오그라진 주검은 다만 한 줌이었다. 119대원들이 배낭으로 지고 내려온 조각들도 있었다. 산을 내려온 구조대원들은 급식소 앞에서 긴 줄을 이루며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콩나물국 그릇으로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죽음은 평화로운 일상과 뒤섞여서 겹쳐 있었다. 그 이중성을 긍정할 수 없는 유족들은 자신들을 '실종자 가족'이라고 불렀다. 유족들은 밤새 병원을 뒤졌다. 생존자들은 즉각 신원이 확인됐다.
사망자들의 주검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른인지 아이인지를 구별할 수 없었다.
16일 새벽 2시 이후 수색현장에서 생존자의 소식은 끊겼다. 외곽을 뒤지던 수색견들도 하산했다. 부산, 창원지검 검사들과 의료진이 저녁내 병원을 돌며 주검을 살폈다. 자정께 검사들은 '육안 식별 불가' 판단을 내렸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 구포 한중병원에 안치된 주검은 초저녁에는 7구였는데 밤중에 8구로 늘어났다. 2구의 주검이 뒤엉켜 1구로 접수됐으나 병원 의료진의 검시 결과 2구로 판명됐다. 반대로 2구로 처리된 시신이 1구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죽음과 삶의 경계는 밤새 엎치락뒤치락했고, 병원마다 쌓인 주검들 앞에서 유족들이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탑승자 명단에서 생존자 명단을 제외한 나머지가 사망자 명단이라는 단순한 산술을 유족들이 받아들이는 일은 밤새 불가능해 보였다.
눈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온전한 주검들도 3구 있었다. 대구에 사는 이정숙씨는 동창생들끼리의 해외여행 귀국길에 부부가 참변을 당했다. 이씨의 오빠 이장상(52)씨와 가족들은 16일 새벽 3시께 구포의 한 병원에서 이씨의 주검을 확인했다. 그제서야 가족들은 '맞다, 맞아' 외치고 통곡하며 죽음을 인정했다. 가족들은 이씨의 남편 홍아무개씨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다시 병원을 뒤지기 시작했다.
김해시청에 모인 유족 500여명의 가장 다급한 요청은 주검의 신원을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신원이 밝혀지기까지는 죽음을 부정하면서도 유족들은 통곡했다. 부산지검의 담당검사는 주검의 훼손상태를 설명하면서 디엔에이 검사결과를 기다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유족들은 책상을 내리치며 비탄에 빠졌다. 여객기가 추락할 때, 꼬리부분이 먼저 부딪쳐서 앞자리 쪽에서 비교적 생존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앞쪽 자리에서도 삶과 죽음은 순간적으로 엇갈렸다. 그 엇갈림을 설명할 길은 없을 것 같았다. 또 앞쪽에서 발견된 사망자들 중에는 한 움큼으로 오그라진 주검들도 있고, 이정숙씨처럼 얼굴과 의복과 장신구가 모두 온전한 주검도 있다. 어떤 유족들은 아직도 '실종'이기를 바라고 있다.
유족들은 16일 아침부터 주검을 확인시켜 줄 것을 요구했고, 검사와 김해시청 관계자들이 유족들을 만류했다. 결국 병원별로 안치된 주검의 사진을 찍어서 16일 저녁부터 전시하기로 합의했다. 사진이 신원을 확인해 줄 수도 없겠지만, 유족들이 일상성 속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여전히 어려워 보였다.
하루 전날, 중국에서 걸려온 삼촌의 전화를 받고 '술 한병을 선물로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아무개씨는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이런 일이 빚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며 울었다. 유족들은 결국 이 일상성 속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상성 속의 죽음이 삶을 경건하게 해주는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밥을 다 먹은 젊은 구조대원들은 다시 빗속을 헤치며 수색현장으로 올라갔다.
#사회2부=김훈 부국장, 김현태 부장대우, 이수윤 차장, 신동명 최상원 박영률 서정민 황석주 남종영 기자 #국제부=하성봉 베이징 특파원 #사진부=김봉규 강창광 김진수 기자 hoonk@hani.co.kr






[취재파일]돌아온 노동자 앞에 놓인 시련    
 
 [한 겨 레] 2002-04-05 (오피니언/인물) 칼럼.논단 08면 01판 1012자    
 
   
지난달 26일부터 38일 동안 파업투쟁을 벌여온 발전노조원 3900여명은 3일 저녁부터 4일 아침 사이에 대부분 각 발전회사 근처의 사택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6일 아침 9시부터 작업라인으로 복귀한다.
발전노조원들의 파업대오는 3일 정오께 서울 동국대 교정에서 흩어졌다. 이날 오전 11시 '노정 합의문'에 대한 노조원 전체의 찬반투표가 예정돼 서울 근교에 흩어져 있던 이른바 산개투쟁조들은 동국대로 이동했다. 이들이 이동하는 도중 노조 지도부는 갑자기 '투표없는 복귀'를 결정하고 일부 조직에 복귀를 지시했다. 따라서 동국대 교정에 모인 노동자들은 600여명으로, 성원 미달이었다.
자유토론에 나선 노동자들은 "우리는 지난 38일 동안 놀라운 결속력으로 뭉쳐왔다. 그런데 왜 얻은 것이 없는가"하며 지도부를 성토했다. 한 노조 간부는 "할말이 없다. 앞으로의 박해를 각오하고 이제 다들 돌아가자"고 호소했다.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허탈하고 피곤해 보였다. 파업은 끝났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노동자들 앞에 서 있는 벽은 여전히 높다. 시급한 문제는 민영화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문제다. 해임자 341명에 대한 정부 태도는 여전히 완강하다. 회사쪽이 이들을 파업가담 정도에 따라 선별해 구제한다면 갈등은 다시 도질 조짐이다. 수배자 22명이 언제까지 쫓겨다녀야 하는지도 걱정거리다. 또 일부 발전회사들이 돌아온 노동자들에게 '이번 파업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다시는 가담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하려는 움직임도 이들을 격분시키고 있다. 노조 지도부는 지난 3일 '각서를 요구한다면 집단적으로 거부하라'는 지침을 내려보냈다.
노동자들은 조기 복귀자들을 '대오이탈자'라고 부른다. 그들과의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일도 돌아온 노동자들의 시련이다. 동국대에서 흩어질 때 한 늙은 노동자는 "우리는 합의에 따라 복귀하는 것이지, 패자로서 복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절규했다. 정부와 회사쪽이 '승자'의 자세를 버려야만 이 문제는 풀려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훈 민권사회2부 기자
hoonk@hani.co.kr



 



[취재파일]철도파업이 남긴 것    
 
 [한 겨 레] 2002-02-28 (오피니언/인물) 칼럼.논단 07면 04판 1021자    
 
   
3조2교대 순환근무제 도입은 이번 철도노조 파업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가시적인 성과물로 보인다. 이로써 한국 철도 100여년 동안의 노동방식이었던 24시간 맞교대는 사라지게 되었다.
24시간 맞교대 철폐는 해방 이후 줄기차게 제기되어온 철도 노동자들의 요구였다. 그러나 정부는 일주일 또는 한달 전체의 노동시간을 합산한 결과로 노무를 관리해 왔고, 노동시간을 인간의 몸의 생리에 맞게 배분해야 한다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묵살해 왔다.
지난 1988년 철도파업 때 기관사들의 투쟁구호는 '경부직통 철폐'였다. '경부직통'이란 서울서 부산까지 열차를 몰고온 기관사와 부기관사가 바로 다시 부산에서 서울까지 열차를 몰고가는 방식을 1순환으로 삼는 근무체제였다.
마산에서 열차를 몰고 출발한 기관사가 부산~마산~순천~마산을 잇달아 운행하던 '2박3일 직통'도 있었다. 88년 파업 때 '직통'은 철폐되었다. 그러나 24시간 맞교대는 계속 유지되어 왔고, 94년 파업 때도 철폐되지 않았다.
기관사들은 지금도 개인별 '행로표'에 따라 근무하고 있다. 이 행로표는 매일매일의 운행시간과 운행코스를 적은 근무일정표인데, 날마다 운행시간이 바뀌고 밤과 낮의 구별이 없이 불규칙하다. 또 추석이나 설 같은 특별수송기간에는 별도의 행로표에 따라야 한다.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되면 주말 교통수요가 크게 늘어나 기관사들의 행로표는 더욱 복잡하게 된다.
이번에 합의된 단체협약에 따라 노사는 공동으로 근무실태를 실사해서 2004년까지 3조2교대 근무를 점차적으로 도입해 나갈 계획이다.
지금까지의 24시간 맞교대 근무 중에서 근무조는 심야에 둘로 나뉘어 4시간씩 근무현장에서 잠을 잤고, 이에 따른 숙사와 식당시설 문제도 철도 노동자들의 해묵은 고통이었다. 노사는 이번 합의서에서 구내식당과 숙사 문제를 개선하기로 합의했다.
정부의 점진적인 노력으로 기간산업의 근로조건이 개선되는 게 아니라 파업으로 막대한 경제손실과 사회적 갈등을 겪어야만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을 이번 사태는 보여주었다. 김훈 민권사회2부 기자 hoonk@hani.co.kr








철도 노조 위원장의 '눈물'    
 
 [한 겨 레] 2002-03-02 (사회) 뉴스 15면 02판 689자    
 
   
지난달 27일 오전 10시께, 파업 철도노조원들이 농성중인 서울 건국대 운동장에 김재길(36.기관사) 위원장이 나타났다. 김 위원장은 단체협약 합의서 내용을 보고하고 직장 복귀를 명령했다. 3조2교대는 관철되었지만 '민영화 철회'는 합의서에 명시되지 않았다. 일부 노조원들은 '위원장 사퇴'와 '복귀 불가'를 외치며 거칠게 항의했다.
김 위원장은 협상과정 중 '넘을 수 없었던 벽'의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거듭 직장 복귀를 호소했다. 위원장과 노조원들은 끌어안고 울었다. 먼지 낀 뺨과 텁수룩한 수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들의 눈물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우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눈물처럼 보였다.
서울지부 노조원들이 위원장의 앞을 가로막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해산 불가'를 주장했다. 위원장은 '미래의 승리'를 절규하며 거듭 직장 복귀를 호소했다. 한 조합원이 나서서 "이제 감옥으로 가야 하는 위원장의 길을 열어주자"고 호소했다. 조합원들은 눈물을 닦으며 길을 열어주었다. 5천여 조합원들은 깃발을 앞세우고 대오를 지어 농성장을 빠져나갔다.
27일 오후 6시께 김 위원장은 경찰에 출두했다. 여기서 그는 "작은 것을 발판으로 큰 것을 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1일 김 위원장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국경일인 3.1절이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철도노동자 열악한 삶 / 철도청 달력엔 `빨간날'이 없다    
 
 [한 겨 레] 2002-02-27 (사회) 뉴스 15면 01판 1516자    
 
   
24시간 맞교대의 고통을 해소해 달라는 철도노동자들의 요구는 지난 1988년 파업과 94년 파업 때도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다. 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3조2교대'는 이번 파업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쟁점이다.
24시간 맞교대는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근무제도다. 정부는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제도라고 주장하고, 노동자들은 인간의 몸이 감당해 낼 수 없는 야만적인 작업방식이라고 맞서고 있다.
철도수송원, 차량관리원, 시설부문 노동자들은 아침 9시에 출근해 다음날 아침 9시에 퇴근하는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는 한 조가 전원 함께 근무하고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는 그 중 절반이 숙사에서 잔다. 새벽 2시부터는 자던 사람들이 일어나 다시 6시까지 일하고 2시까지 일하던 사람은 숙사에서 잔다. 새벽 6시에는 자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9시까지 함께 일한다.
수색역 수송과에 근무하고 있는 송진영(39)씨는 "철도에 근무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단 하루도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며 "아내나 딸의 생일도 근무시간에 쫓겨 미리 치른다"고 말했다. 송씨의 동료 홍순미(32)씨는 "쉬는 날은 자는 날일 뿐"이라며 "생리휴가는 그저 규정상 있을 뿐이고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생리 때는 진통제를 먹으며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철도 시설 부문은 96년 이후 가장 많은 인원이 감축되었다. 8~9명의 작업반 두 개를 한 반으로 합치고 인원은 늘리지 않아 일은 두 배로 늘어난 셈이다.
서울 시설관리사무소에서 일하는 경력 26년째의 이수일(46)씨는 "인력감축까지 겹쳐 철로에서 작업을 할 때 열차감시원도 제대로 세워두지 못한다. 지난해에도 시설 부문에서만 11명이 순직했다"며 "우리의 요구는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25년을 근속한 기관사 전성철(46.서울 기관차 승무사무소.6급)씨는 서울에서 서대전 사이를 운행한다. 오후 5시께 수색 차량기지에서 기관차를 배정받아 이상 유무를 점검한 뒤, 6시35분께 수색 기지를 떠나 서울역에서 승객을 싣고 발차한다. 전씨가 운전하는 421호 무궁화열차는 밤 9시3분께 서대전에 도착한다. 서대전역에서 교대한 전씨는 역 구내의 승무원 숙사에 들어간다. 여기서 전씨가 쉴 수 있는 시간은 2~3시간이다.
자정께 전씨는 다시 2006호 화물열차를 몰고 새벽 2시30분께 부곡에 도착한다. 수색 기지에 기관차를 입고시키고 기착 보고를 마치고 나면 새벽 4시30분이다.
운행 일정이 매일 달라져서 출퇴근 시간은 날마다 바뀌고 밤과 낮의 구별은 없다. 열차 운행계획이 갑자기 바뀌면 서대전 숙사에서 10시간 정도 대기할 때도 있다. 대기시간은 시간외 근로에 가산되지 않는다. 전씨는 다만 이부자리 한 채만 준비되어 있는 썰렁한 방에서 다음 작업지시를 기다릴 뿐이다.
파업 중인 철도노동자 5000여명이 농성을 하고 있는 건국대 운동장에는 26일 오후부터 노동자 가족들이 잇따라 모여들어 노동자들은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발전노동자 9일째 고달픈 `투어투쟁'    
 
 [한 겨 레] 2002-03-07 (사회) 뉴스 19면 07판 1777자    
 
   
*흩어졌지만 흔들림없이... '당당히 일하고 싶을 뿐'
파업 중인 발전노조원 5300여명이 520여개의 분임조로 나뉘어 9일째 수도권 일원을 떠돌고 있다. 지난달 26일 저녁 농성장인 서울대를 빠져나온 노조원들은 조별 '산개투쟁'에 들어갔다.
'산개'는 공권력을 무력화하는 전략이지만 강한 결속력이 없으면 무너지기 쉽다. 노조원들은 이에 미리 대비해 돈과 이동장비를 준비하고 지도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조별로 조용히 흩어졌고, 방송뉴스는 '파업 노동자들이 해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젊은 노동자들은 이렇게 흩어져서 싸우는 것을 '투어투쟁'이라고 부른다. 소형승용차 짐칸에는 침구와 취사도구가 가득 차 있다. 농구공, 축구공, 배드민턴 라켓을 싣고 다니며 학교운동장 등에서 모처럼 대낮에 공도 찬다. 밤이면 여관방에 들어가 라면을 끓이거나 카레라이스를 만들어서 동료들과 빙 둘러앉아서 먹는다. 노사협상은 벼랑으로 몰려가고 있어도 그들의 저녁식사 자리에는 젊음의 활기와 웃음이 넘치고 있었다.
5일 저녁, 경기도 북부의 한 소읍에서 투어투쟁 중인 분임조 9명을 만났다. 30대 초반의 노동자들로, 동해안에서 수도권으로 가는 중이었다. 소속, 신원, 장소를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그들은 어렵게 취재에 응했다. 2000년 파업 때 언론에 등장했던 동료들에게 회사가 얼마나 모진 박해를 가했던지를 그들은 설명했다.
여관 방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그들은 식사당번이 만들어 온 카레라이스로 저녁을 먹었다. "신문은 밥 먹을 때 깔개용밖에는 안 된다"고 분임조장 박아무개(36)씨는 말했다. "경제가 잘 풀려나가는 판에 파업을 해서 나라를 다 망쳐놓았다고 매일 써대고 있다"며, 그는 손가락으로 깔고 앉은 신문의 제목을 가리켰다. 그 한많은 신문을 그들은 매일 사 본다.
저녁을 먹으면서 그들은 다른 분임조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뭘 먹는지, 맛있는지를 묻는다. 분임조는 직장내 부서별, 작업라인별로 조직되었다. 다들 오래 함께 일한 동료들이다. 고령 노동자들은 따로 분임조를 묶었다.
조장은 하루에 세번씩 조원들의 건강상태, 결속상태를 상부조직에 보고한다. 하루에 세번씩 피시방에 들러서 인터넷 홈페이지로 지도부의 지침도 확인한다.
홈페이지에는 노조위원장과 간부들이 동영상으로 나와서 육성으로 지침을 내린다. '건강 유지에 만전을 기하라. 되도록이면 수도권을 이탈하지 말고 재집결 지시에 대기하라. 사쪽에서 흘리는 복귀율에 현혹되지 말라. 가족들에 대한 회사의 압력과 회유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 주요 지시내용이다. 며칠 전에는 "날씨가 풀렸다. 겨울파카를 벗고 봄점퍼로 갈아입어라. 겨울파카는 검문당하기 쉽다"는 지시도 있었다. 조원들은 가족들에게 연락해서 봄점퍼를 가져오도록 했다.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오면 무조건 받지 말라는 것이 지도부의 지침이다. 그러나 휴대전화에 집 전화번호가 찍혀서 반갑게 받아보면 회사 간부가 나온다. 회사 간부가 투어투쟁 중인 노동자의 집에 가서 그 집 유선전화를 쓰는 것이다. '복귀율이 날로 올라가고 있다', '어리석게 굴지 말고 빨리 복귀하라', '해임절차를 진행하겠다'는 것이 회사쪽의 협박내용이라고 박아무개씨는 말했다. "우리는 오직 일하기를 원한다. 복귀는 노조위원장의 지시에 따를 뿐이다"라고 그는 대답해 주었다고 한다.
기약없는 유랑길에서도 젊은 노동자들의 웃음소리는 건강하게 들렸다. 그러나 어두워지는 창밖을 내다보며 내일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그들의 뒷모습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어두워지면, 가족이 가족을 부르는 휴대전화 소리가 여관방에 가득 찬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