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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스타벅스적 삶

가/ㅣ 2004. 7. 17. 17:52 Posted by 로드365

스타벅스적 삶 1

스타벅스니 커피빈이니 시애틀즈베스트니 하는 미국식 커피 프랜차이즈들의 증식 속도가 무섭다. 이들은 여러 가지로 공통점이 많다. 우선 손님을 줄 세운다(앉아서 느긋하게 메뉴판을 보던 즐거움은 어디로 갔는가). 직원들은 유니폼을 입고 있으며 그들 머리 위엔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커피 이름이 적혀 있다. 이탈리아어와 영어가 뒤섞인 커피 이름들은 신참 고객들을 주눅들게 만든다. 프라푸치노가 뭔지, 블렌디드가 뭔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다. 먹고 알아내는 수밖에는. 그리고 이들은 모두 마일리지 카드를 발행하고 있다. 열 잔을 마시면 한 잔을 거저 준다는데 그거 한 번 얻어먹으려면 매번 온 지갑을 다 뒤져야 한다.

겨우 주문에 성공한 손님들은 직원의 지시에 따라 옆으로 이동해야 한다. 거기서 자기가 주문한 것이 나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린다. 마침내 자기 커피가 나오면 감지덕지 받아 들고 빈자리를 찾아 앉는다. 커피 나왔다며 손님 부르는 소리는 끝없이 이어지고 커피 가는 소리는 또 왜 그리 요란한지. 그런데도 직원들은 모두가 씩씩하고 태연하다. 이 모든 장면에서 우리는 미국을 본다. 언제나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한 그 이상한 나라를.

스타벅스적 삶 2

미국식 커피 프랜차이즈들은 질문이 많다. 어느 미국 영화의 주인공은 스타벅스를 일컬어 “커피 한 잔 시킬 때마다 자기 정체성을 생각하게 되는” 커피숍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정말이다. 카페인이냐 디카페인이냐, 뜨거운 거냐 차가운 거냐, 작은 거냐, 큰 거냐, 아니면 왕창 큰 거냐. 여기서 마실 거냐, 가지고 갈 거냐. 머그컵이냐 종이컵이냐, 마일리지 카드는 없느냐, 혹시 케이크는 안 먹느냐, 묻고 또 묻는다.

손님들은 그때마다 대답을 해야 한다. 일단 그 자리에 선 이상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스핑크스의 질문인 것이다. 그래서 단골들은 자주 먹는 것을 정해놓는다. 그래야 직원의 날카로운 질문에 진땀을 흘리지 않는다. 그러지 않고 뭐 좀 새로운 거 하나 마셔볼까 생각하면 허둥대게 된다. 음, 어, 네, 아, 그래요, 음, 네, 얼마요? 아, 네. 이런 대화를 하고 옆으로 이동하여 기다리면 내가 주문했다는 커피를 받아 들게 되는데 도대체 왜 이 커피를 주문하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내가 마시려던 커피가 정말 이 ‘아이스 화이트 프라푸치노 톨 사이즈’였단 말인가? 혼란스럽지만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는 게 미국식 삶의 요체다. 다 마신 후에 빈잔을 반납하는 것도 손님의 신성한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