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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의 야간비행 글모음

가/ㅣ 2003. 11. 13. 17:26 Posted by 로드365


김규항의 야간비행 : http://go.jinbo.net/column/gyuhang_list.php



그가 제 고향에서 민족을 말하게 하라

국가보안법은 일제 시절 일제가 한국인들을 탄압하는 수단이던 치안유지법의 충성스런 아들이다. 일제가 물러 간 후 남한 사회는 제국주의 침략자에 붙어 영화를 부리던 부역자 세력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른바 대한민국은 그렇게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더러운 피를 갖고 태어났다. 아무런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남한의 지배세력은 국가보안법을 통해 남한 사회를 반공주의 파시즘 체제로 만들어갔다.

반공주의는 남한을 지배하는 유일한 정신이었다. 남한 사회에서 모든 학문과 종교와 예술, 그리고 인간적 양심은 반공주의,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가보안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했다. 반공주의 파시즘을 제외한 모든 의견은 국가보안법에 의하여 공산주의적 활동이자 친북 활동으로 규정되었다. 단지 민주주의와 자유를 소망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거나 죽임을 당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 공개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 건 90년대 이후, 오랜 민주화 운동의 성과로 반공주의 파시즘의 절대적인 권위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매우 한정된 사람들 끼리나 알고 있던 ‘국가보안법의 비밀’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90년대 말에 이르러선 최소한의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21세기의 첫 해가 뜨기 전에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거나 적어도 개정될 거라 믿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폐지도 개정도 되지 않았고 3년이 지난 오늘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 배경에 비굴하고 거대한 타협이 있다. 국가 권력은 그 법을 조금은 덜 야만적으로 보이게 사용하는 대신, 국가보안법을 반대하는 이들은 그 법의 존재에 눈을 감기로 한   대타협 말이다. 송두율 씨를 둘러싼 이런저런 상황들은 그런 비굴하고 거대한 타협의 진실을 한꺼번에 드러낸다. 민주화운동 이력과 국가보안법에 의한 상흔을 훈장처럼 달고 행세하는 자들은 말한다. “몰랐다. 당혹스럽다.” “국민에게 사과한다.”

반공주의와 국가보안법의 행동대를 자임하며 온갖 잔인하고 야비한 공작을 일삼아 온 국정원이라는 거대조직과 분단된 조국의 경계인으로 살아온 한 연약한 학자가 ‘공정하게’ 대결한다. 안기부는 지난 반세기 동안 수백 수천 번을 거듭해온 매우 숙련된 공작 수법으로 그 학자의 순진함과 학자적 양심에 의한 말들을 요리조리 교묘하게 짜 맞추어 여론에 흘린다. 여론은 반전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여론이 그래왔듯 말이다.

국가보안법을 먹고 살아온 극우 세력과 파시스트 언론이 그런 야비한 공작을 지지하고 부추기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 당연한 태도를 “너무 심하다.”라고 비판하는 건 하나마나한 말에 가깝다. 문제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세력의 비굴한 태도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국가보안법으로 송두율을 말하지 말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몹시 곤혹스러운 얼굴로 ‘관용’을 애걸한다. 대체 누가 누구에게 관용을 애걸한다는 걸까. 오늘 우리는 국가보안법을 찬성하는 자들과 국가보안법을 반대하는 자들의 싸움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찬성하는 자들과 국가보안법을 인정하는 자들의 하나마나 한 싸움을 보고 있다.

공개적인 학술활동을 해온 송두율씨의 이력에 대해 말하는 건 자유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 반공주의와 국가보안법을 전제로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분단 조국을 살아가는 지식인이 남한과 북한을 넘어 민족을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독일이라는 제3국에 거주하는 지식인이 반세기 동안 반공주의 파시즘이 지배해 온 남한을 일방적으로 지지했다면 그는 더 이상 어떤 의미에서도 지식인이 아니다. 사람들이 의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송두율의 이런저런 이력들은 분단 조국을 살아가는 지식인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양식을 설명할 뿐이다.

우리는 “송두율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국가보안법에 찬성하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그 질문에 당당하지 않은 누구도 송두율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우리가 국가보안법에 가져야 할 유일한 태도는 그 법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국가보안법을 전제로 하는 송두율에 대한 어떤 의견이나 조치도 무시해야 한다.   누가 감히 송두율의 추방을 말하는가. 남과 북을 넘어 민족을 말해 온 그는 여전히 제 고향에서 민족을 말할 자격이 있다. 그가 제 고향에서 민족을 말하게 하라.






국익

결국 놈들은 전투병 파병을 요구해왔다. 놈들이 순수한 장사 놀음으로 시작한 침략전쟁에 우리 죄 없는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보내라는 요구다. 워낙 더러운 요구다 보니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영감들과 미국을 하느님이 축복한 나라라 믿는 목사들 정도를 빼고는 다들 전투병 파병을 반대하는 분위기다. 심지어 함부로 말하는 버릇 때문에   늘 욕을 얻어먹는 노무현씨조차 이번엔 꽤나 신중해 보인다. “먼저 보내는 것도 국익이 아니고 먼저 거부하는 것도 국익이 아니다.”

그러나 매우 신중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으로만 보이는 그 말 속엔 실은 매우 강한 파병 의지가 들어있다. 바로 ‘국익’이라는 말 속에 말이다. 한국에서 ‘국익’이라는 말은 주술에 가깝다. 노동자들의 싸움이든 농민의 싸움이든 전쟁을 반대하는 싸움이든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당한 싸움들은 언제나 국익이라는 주술 앞에 힘을 잃는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아야 하고 농민은 모두 배를 가르거나 몸을 불살라도 어쩔 수 없으며 청년들은 기꺼이 더러운 전쟁에 총알받이로 나가야 한다.

우리가 그 주술에 대적하는 무기는 이른바 ‘명분’이었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 ‘농민을 죽이는 개방’, ‘명분 없는 전쟁’ 그러나 사랑이나 존경 같은 고상한 가치마저 돈으로 사고 팔리는 세상에서 명분으로 실리를 이기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오늘 한국에서 명분으로 실리를 이기려는 노력은 한국에도 명분을 좇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외에는 의미가 없어 보인다.

‘국익’이란 주술과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그 주술 자체를 부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명분’이 옳지만 어딘가 국익에는 배치되는 데가 있다는 노예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런데 그놈의 국익은 대체 누구의 국익이지?’

국익이란 ‘나라의 이익’이란 말이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나라에도 ‘나라의 (단일한)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층층한 여러 계급들로 이루어진다. 계급들의 이익은 몹시 다르거나 심지어 적대적이다. (이경해씨 추모집회에서 제 몸을 불사른 박동호 씨와 제 아비의 막대한 재산을 모조리 물려받는 이재용 씨는 서른넷 동갑내기 한국인이다.)

‘국익’이란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속여 이르는 말이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자기들의 이익을 국익이라 주장한다.(그게 자기들만의 이익이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다.) 노동자의 정당한 싸움도 농민들이 제 배를 가르고 제 몸을 불사르는 일도 죄 없는 청년들이 더러운 침략 전쟁에 총알받이로 가는 일도 단지 자기들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한 일이지만 국익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그걸 거스르는 사람은   애국심이 부족한 사람이거나 반역자라는 오명을 들씌운다.

주술을 깨트려야 한다. 진정한 국익은 한줌도 안 되는 지배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모든 뒤엉킨 것들을 바르게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싸움을 존중하는 게 국익이며 농민의 아픔을 함께 하는 게 국익이며 더러운 침략전쟁에 절대 전투병을 보내지 않는 게 바로 국익이라면 누군들 애국자가 되려 하지 않겠는가.








추모

“이오덕 선생님, 김규항입니다.” “예. 조금 아까도 김선생이 전화하셨습니까.” “예. 30분쯤 전에 제가 했습니다.” “누워서 주사를 맞고 있어서 일어나기가 어려웠습니다.” “많이 편찮으십니까.” “좀 그렇습니다.” “잡지가 이제 거의 짜여져서 한번 찾아뵈려고 연락드렸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제가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드릴 이야기도 있고 하니 한번 와주시겠습니까.” “다음주에 언제가 편하십니까.” “화요일은 서울 병원에 가고 다른 날은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찾아뵙는 걸로 하고 시간은 그날 아침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나는 월요일 아침에 전화 드린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전날 폭우를 무릅쓰고 산에 올랐다가 전화기에 물이 들어가 버렸다. 전화번호야 달리 알아볼 수도 있었지만 그날은 종일 이래저래 경황이 없었다. 전화 드려야 하는데, 드려야 하는데 속으로만 생각하다 하루가 다 지났다. 새벽녘에 사무실에서 깜박 잠이 들 즈음에야 나는 선생이 이미 월요일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찾아뵈었어야 했다는 소용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거의 짜여진 잡지’란 내가 한해 전부터 준비해온 ‘어린이 교양 월간지’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대개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그들이 내 글을 제 얼마간의 사회의식을 배설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는 두 가지 결심을 했었다. 하나는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 만큼 급진적인 글을 쓰는 것. 다른 하나는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꿀 가능성이 남은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만드는 것.

첫 번째 결심은 얼기설기 진행 중이고 두 번째 결심은 ‘어린이 교양 월간지’로 이어졌다. ‘만화라는 그릇’을 사용한다는 내 생각을 선생은 손뼉을 치며 반겼다. 선생은 한글 교열을 자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선생은 당부했다. “아이들에게 어떤 생각을 심어주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잃어버린 것들을 아직 가지고 있다는 걸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게 잘 열매 맺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선생의 당부는 내내 기획 작업의 기조가 되었다.

문상은 물론 부조, 화환도 받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문상객들은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아 담소나 하고 있었다. 어느 거들먹거리는 인사들이 보냈을 몇 개의 화환은 돌려 세워져 있다. 엉덩이를 옮기며 여기 앉아 좀 드시라 부르는 어떤 이의 호의를 나는 목례로 거절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만큼 편안한 상가라면 굳이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동행한 후배와 감나무에 파란 감이 주렁주렁 달린 선생의 작업실 둘레를 한바퀴 돌아보고 바로 길을 나섰다.

그날 밤 선생의 사진들을 노트북 화면에 띄웠다. 나는 두해 동안 반년 간격으로 선생을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었다. 선생은 지난해 초순으로 접어들면서 눈에 띄게 쇠잔해지고 있다. 그 무렵 선생은 당신을 존경하고 따른다는 사람들이 정작 당신의 생각을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낙심했다. 선생보다 육체적으로 젊은 누구도 선생보다 정신적으로 젊지 않았다. 그들은 선생의 낙심을 노인의 강퍅함으로 해석하는 듯 했다. 선생은 절대 고독에 침잠해갔다. 제 신념에 제 삶을 완전하게 일치시키는 사람들이 겪곤 하는 숙명적인 절대고독에.

노트북 화면에 뜬 선생의 커다란 눈을 보며 나는 말했다. “선생님을 온전히 이어받을 사람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대신 선생님은 여러 사람들의 정신 속에 나누어 살아 계십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예수의 얼굴

‘주일 성수’를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라 여기는 어머니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아들을 늘 근심한다. 어머니의 근심이 어머니의 신앙 때문이듯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도 내 신앙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대개의 한국 교회란 한국인들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종교인 ‘돈’교의 지회에 불과하며, 적어도 예수와는 별 상관없는 곳들이다. 교회란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대리석 첨탑에 네온 십자가를 단 건물이라고 해서 교회가 되지 못할 법은 없지만 나에겐 예수를 팔아먹는 곳에 앉아 예수를 생각할 만큼의 인내심이 없다.

아내가 고창으로 연수를 떠난 일주일 동안 어머니가 살림을 도우러 왔다. 늙은 어머니는 오랜만에 아들 손주 밥을 챙겨주는 일이 마냥 즐거운 모양이다. 어머니의 즐거움을 위해 나도 안 먹는 아침을 꼬박꼬박 먹는다. 사흘째 아침엔가 김단과 김건이 제 친구들을 따라 여름성경학교에 가겠다고 나섰다. 어머니는 반색을 하면서도 짐짓 “아빠한테 허락을 받아야지.” 한다. 나는 두말없이 허락한다. 종교적 평화는 다른 이의 신앙을 ‘같은 정상을 향하는 다른 등산로’라 생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차조심하거라.” 신바람이 나서 뛰어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잠시 상념에 잠긴다. 그들에게 종교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들이 가는 교회가 크게 나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때론 좋은 것보다 나쁜 걸 알아보는 게 더 약이 될 수도 있으니 그저 지켜보기로 한다. 아이들은 오늘부터 제 앞에 나타나는 이런저런 종교적 재료들을 제 삶과 세상의 진실에 반추해가며 제 나름의 것으로 만들어갈 것이다.

아이들은 어둑해져서야 돌아왔다. “고래의 전설 0장 0절!” 혼자 성경 구절을 중얼거리던 김건이 외친다. 제가 공룡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의 귀엔 ‘고린도전서’도 그렇게 들린다. 김건이 내 무릎에 앉아 묻는다. “아빠, 일곱 살 중에 교회 데리고 갈 아이가 있을까.” “글쎄, 그건 건이가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친구 데려오면 스티커 주는데 스티커 모으면 상 준대.”

나는 그런 식의 판촉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김건에게 설명할 말을 한참 생각하다가 접는다. 일곱 살짜리 아이가 알아듣기엔 너무 어려운 문제이거나 내가 일곱 살짜리 아이에게 그 문제를 설명할 능력이 없다. 김단은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 열심히 그린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있고 그 위론 횃불 같은 걸 죽 늘어놓았다. 그런데 예수가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았다.

“여자니?” “응.” “예수님이야?” “예수님은 아니고...” “단아, 여자 예수를 그려도 되는 거야.” “예수는 남자잖아.” “그래 예수는 남자였지. 그런데 예수는 여자에겐 여자이고 흑인에겐 흑인일 수 있는 거야.” “무슨 말이야, 아빠.” “교회에서 예수 그림 본적 있지.” “응.” “어떻게 생겼지.” “백인. 머리 길고 얼굴 하얗고.” “그건 백인들이 자기 마음 속의 예수를 그린거야. 단이도 단이 마음 속의 예수를 그리면 되는 거야.”

김단은 알아들을 것 같다는 표정이다. 나는 더 할 말을 속으로 떠올려본다. ‘예수는 2천년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김새는 우리가 흔히 테러리스트의 얼굴로 떠올리는 평범한 팔레스타인 사람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예수의 실제 얼굴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얼굴이다. 예수는 언제나 억압 받고 슬픔에 빠진 사람의 편이었다. 예수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며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며 잘난 사람이 아니라 못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더 말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내 마음 속의 예수를 김단이 그리게 하기보다는 김단이 제   마음 속의 예수를 그려서 언젠가 그가 그린 예수의 얼굴에 내가 감동받는 쪽을 선택한다.









텔레비전

나는 텔레비전이 싫다. 보는 거 말고 나가는 게 말이다. 우선 피디라는 신종 왕자들을 만나는 게 싫다. 90년대 들어 군사 파시즘이 물러난 자리를 차지한 신자유주의는 한국인들의 머리통에 돈이면 뭐든 살 수 있다는 믿음과 끊임없이 자기를 선전하고 팔아야 한다는 강박을 심어놓았다. 한국은 온 국민이 텔레비전 출연을 열망하는 텔레비전 왕국이 되었고 피디들은 그 왕국을 거들먹거리는 왕자가 되었다.

지식인 나부랭이들의 텔레비전 병도 눈뜨고 보기 어렵다. 시사 프로그램 같은 데서 막간 인터뷰라도 걸릴라치면 공부고 연구고 만사를 제쳐 두고 카메라 앞에 제 얼굴을 대령한다. 반시간 넘어 이런저런 지당한 말씀을 늘어놓아봤자 정작 텔레비전엔 나오는 건 몇 초고 그 몇 초도 피디가 멋대로 난도질(방송 용어로는 ‘편집’)한다는 걸 잘 알지만 아랑곳없다. 텔레비전에 나간다면.

이런 소리를 하는 나도 텔레비전에 나간 적이 있다. 몇 해 전에 <백분토론>에 한번 나간 적이 있고, 나와 어떤 이가 공저로 되어 있는 책을 홍보하는 프로그램에 나간 적도 있다. 그 책은 어느 주간지에 일년 쯤 연재한 대담을 묶은 것이다. 나는 그걸 단행본으로 내는 데 반대했지만 인세를 몽땅 베트남 양민학살 기금으로 보내겠다는 말에 승낙했다. 홍보 프로그램에 나간 것도 그래서였다.

<백분토론>에 나간 일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텔레비전을 피하던 내가 그땐 무슨 생각으로 거길 나갔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날 나는 토론보다는 불편한 자리에선 말을 하지 않는 내 습성에 충실했다. 그 일로 나는 한동안 핀잔께나 들어야 했다. 내가 제법 말을 근사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잔뜩 기대하고 백분을 기다렸으나 나는 두 마디만 하고 앉아 있었으니 오죽 답답했을까. 나는 싱거운 농으로 그들을 달래곤 했다. “두 마디나 백 마디나 출연료는 같아.”

속으로는 그랬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하는 놈도 있어야지.’ 존중할 수도 없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도 없으며, 불편하기까지 한 일에 부러 시간을 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 후 텔레비전 출연 요청에 “텔레비전은 안 합니다.” 한마디로 끊곤 했다. 이 판도 연예계의 관성이 지배하는지라 내가 언론개혁이니 정치개혁이니 하는 인기 종목을 떠나 신자유주의 세계화니 노동자 계급이니 사회주의니 하는 구린 종목에 매달리는 오늘은 그나마 그런 출연 요청도 잦아들었다.

몇 달 전 나는 내가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 텔레비전에 한방 먹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강아지똥> <몽실언니> <한티재 하늘>의 권정생 선생이다. 몇 달 전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에서 선생의 책 <우리들의 하느님>을 선정하고 녹색평론사에 연락했다. “최소 20만부를 준비하고, 표지엔 ‘느낌표 선정도서’라고 박아주고, 어쩌고...” 그러나 녹색평론사에선 “책이 그렇게 팔리길 바라지 않는다며” 그 일을 거부했다. 텔레비전은 다시 권정생 선생에게 연락했다. 결과는 끔찍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장 행복한 경험 가운데 하나가 책방에서 자기 손으로 책을 고르는 일인데, 왜 그런 행복한 경험을 텔레비전이 없애려는 거냐.”

<우리들의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삶의 길잡이가 될 책이니 그 책이 거기 소개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면 좋은 일이다. 그 책을 팔아 벌 막대한 돈도 녹색평론사와 권정생이라면 더 좋은 책을 내고 더 좋은 글을 쓰는 일에나 쓸 테니 역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유익들을 거리낌 없이 거부했다. 그런 유익들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런 유익들을 얻기 위해 포기할 수밖에 없는 다른 가치 때문이다. 그 가치는 오늘 인간의 위엄을 스스로 접고 사고 팔리는 물건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수작

몇 해 전에 강준만이 <조선일보>에 협조적인 지식인들을 매달 게시한 일이 있다. ‘목표가 정당해도 방법이 정당하지 않다면 잘못이다’ 식의 지당한 말씀들(이 나는 종종 역겹다. 이를테면, 어떤 폭력의 위협도 없는 안온함 속에서 주장되는 ‘폭력은 모두 나쁘다’, ‘한 사람의 생명은 우주보다 귀하다’ 따위 빤질빤질한 말들이) 덕에 그 일은 중단되었는데, 그 후 강준만의 운동은 꾸준히 진행되어 어느 순간부터는 <조선일보>에 협조하는 일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태도는 보기 어렵게 되었다.

요즘 들어 다시 그런 말들을 종종 듣게 된다. 특정한 신문을 반대하는 건 자유지만 그런 선택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뭐 그런 말들이다. 그런 말이 다시 불거지는 데 아무런 배경이 없는 건 아니다. <조선일보>와 사이가 나쁜 노무현이라는 이가 대통령이 되면서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것이 그 본래 의미 외에 현 정권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포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준만의 5중대’라 불리던 시절이나 진보적 주제에 집중하는 지금이나 <조선일보>에 한결같은 나지만, 오늘 <조선일보> 반대가 갖는 그런 이중적 의미는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나는 “<조선일보>는 우리 모두에게 면죄부를 발부해주는 전지전능한 악당이 아니다.”라는 신윤동육의 의견에 찬성한다. 시민의 지위를 확보한 사람들에겐 여전히 <조선일보>가 악이고 <한겨레>가 선일 수 있겠지만, 시민에 이르지 못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겐 <조선일보>가 악이라면 <한겨레>는 차악이다.

나는 특정한 신문에 협조하고 안 하고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말을 존중한다. 그런 말에 걸맞은 신문을 두고, 그런 말을 할 만한 사람이 할 때라면 말이다. 특정 ‘신문’이 아니라 특정 ‘범죄조직’인 <조선일보>를 두고 그런 말은 도무지 걸맞지 않는다.(신문이 사실을 보수적으로 해석하는가 진보적으로 해석하는가는 해당 신문이 선택할 문제다. 그러나 사실 자체를 아예 날조하거나 진실을 감춘다면 그건 더 이상 신문이 아니라 범죄조직이다. <조선일보>는 줄곧 그래 왔다.)

그리고 그런 말은 적어도 ‘범죄조직에 협조하지 않는 정도’의 양식은 갖춘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강준만이 등장한 지 한두 해도 아니고 <조선일보>가 어떻다는 건 어지간한 사람이라면(특히 <조선일보>에서 원고를 청탁할 만한 사람이라면) 모르기 어렵게 된 마당에 굳이 <조선일보>에   글을 쓰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그저 <조선일보>에 글을 씀으로써 겪어야 하는 이런저런 불편을 덜어보려는 수작일 뿐이다.

나는 누가 <조선일보>에 글을 쓴다 해서 애써 비난할 생각은 없다. 내가 하고많은 일 가운데 하필이면 출판 일을 하다보니(빌어먹을!) 갖은 교양과 지성을 자랑하는 동업자들(쌍팔년의 민주화 운동 이력을 주렁주렁 매단 느끼한 중년남성들의 출판사에서 미래와 생명을 고민하는 신선하고 청량하기 짝이 없는 출판사까지)이 하나같이 술자리에선 <조선일보> 욕을 하면서 하나같이 <조선일보>에 책을 보내고 머리를 조아리는 꼴을 물리도록 보아온 터다.

써라. 써서 짭짤한 원고료 받아 귀여운 새끼 운동화도 바꿔주고 늙은 어미 맛난 것도 사드려라. 기왕이면 사진도 크게 박아, 옛 애인과 재회도 하고 동네에서 명사 행세도 실컷 해라. 다만 고작 그런 이유로 지식 넝마들을 팔아넘기는 주제에 무슨 대단한 자유주의적 양식이라도 지키는 양 떠들지는 마라. 그 범죄조직에 숨이 넘어간 사람들이 얼마며 그 범죄조직 덕에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인지 잘 알면서, 제발이지 허튼 수작들 부리지 마라.







활동가

“어이, B급!” 박래군은 늘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른다. 작년에 페미니즘 일로 괜스리 시끄러울 때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나를 “마초!”라고 부르곤 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내 성격에, 다른 누가 그랬다면 바로 코라도 주저 앉혔을 것이다.   박래군이 그러면 그냥 “저 웬수.”하며 웃고 만다.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고 그의 그런 장난끼 어린 조롱엔 무슨 대단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세상과 끊임없이 불화하는 나에 대한 속 깊은 염려와 조심스런 지지가 담겨 있다. (설사, 그게 진짜 조롱이라 한들 어떤가. 현역 활동가인 그가 나처럼 입이나 놀리는 얼치기 좌파를 조롱하는 건 눈곱만큼도 사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몇 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를 의심했다. 그가 지나치게 좋은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처럼 어디서나 좋은 사람 소리를 듣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세상은 헤아릴 수 없는 옳음과 그름으로 중첩되어 있는데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근거하면,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란 대개 가장 세련된 처세술을 가진 위선자들이다.

박래군과 친해지면서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면서 옳은 사람도 있을 수 있겠거니 싶어졌다. 나는 확실히 박래군과 친해졌다. 그러나 내가 박래군과 친해졌다는 건 박래군과 사적으로 친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활동가로서 삶과 친해졌다는 뜻이다. 활동가도 인간인지라 대개 제 신념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운동을 하고 싶어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박래군은 지난 십수 년 동안 한국 사회의 가장 궂은 부위에서, 빛도 이름도 나지 않는 그런 운동을 해왔다.

노동운동을 하던 박래군이 그렇게 된 일이 있다. 박래군은 1988년 ‘광주학살 원흉처단’을 외치며 제 몸을 불사른 박래전 열사의 친형이다. 동생의 주검과 그 주검이 남긴 신념을 수습한 박래군은 잇따르는 수많은 주검들과 그 주검들이 남긴 수많은 신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를 쓴 1991년을 전후로, 박래군이 수습하고 장례를 치룬 죽음은 50여건에 이른다. 그는 ‘장의사’라 불렸다. 박래군은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기 이전에, 비탄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다.

“명동성당이라고? 엊그제 에바다*라며.” “야, 그게 언젠데. 너한테 전화한 다음날 들어왔어. 벌써 9일째야.” “그랬어. 네이스 반대 농성 얘긴 들었는데 박래군이 있는 건 몰랐지. 신부들이 뭐라 안 해.” “나가라 그러지.” “한심한 X들. 예수가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싫어했지.” “요즘 다 그런걸 뭐.” “몸은 어때.” “이번엔 준비를 좀 했어. 괜찮아.” “필요한 건.” “노숙 단식에 뭐가 필요하겠냐. 저녁에 한번 놀러나 와라.” “가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나 같은 놈이 가서 분위기나 흐려지지.” “어유, 겸손할 줄도 알아.” “나야 가진 게 겸손뿐이지. 내 맛난 것 한 보따리 싸가지고 갈게.”

싱거운 농을 주고받으며 전화기를 내려놓지만 속은 끓어오른다. ‘세상이 갈수록 지랄 같아지는구나. 6년 전에 전자주민증인가 하는 것도 여론에 밀려 폐기됐었는데 극우 반동들이 밀린다는 오늘 그보다 더 악랄한 네이스를 두고 하네 마네 난리니 온 나라가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걸까. 싸울 수밖에,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불과 몇 분 전 안온하던 내 속은 점점 더 뜨겁게 끓어오른다. 활동가는 분노를 실어 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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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년 동안 평택 에바다농아원은 ‘법이 멈추는 공간’이었다. 도둑들은 농아어린이 70여명을 인신매매하고 강제노동, 임금착취에다 국고보조금 및 후원금을 횡령했고, 6명이 변사했다. 지난 5월 28일, 똥물을 뒤집어쓰고 폭행을 당하는 오랜 싸움 끝에 드디어 민주이사진이 에바다를 접수했다. 사람들아, 에바다를 기억하자.








숭고


대통령 선거 날이던가. 나와 소주잔을 기울이던 선배가 환호하는 군중을 보며 말했다. “안 됐군. 그래도 실망하는 데 일년은 걸리겠지.” 내가 대꾸했다. “사람 스타일이 그렇게까지 안 걸릴 것 같아요. 이회창을 따돌렸을 때 김영삼한테 달려가는 거 봤잖아요.”

노무현의 스타일. 그게 언제나 나빴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노무현이 극적으로 대통령이 되는 중요한 힘이었다. 역겨운 스타일의 중년남성들로 가득 찬 한국 제도 정치권에서 노무현의 솔직하고 화끈한 스타일은 사람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저 이가 대통령이 되면 이 역겨운 정치도 신선해지리라, 마법처럼.

오버의 연속. 그런 걸 두고 ‘입만 벌리면 실패한다’고 하던가. 대통령이 되자 그 스타일은 간단하게 바닥을 드러냈다. 솔직함과 화끈함은 단순함과 오만함으로 밝혀졌다. 하여튼 노무현의 스타일은 갈수록 무너지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정신건강은 갈수록 정처 없어져간다.

그러나 노무현의 스타일은 여전히 노무현을 돕기도 한다. 노무현의 스타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스타일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정작 내용은 덮어두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사람들은 그의 단순함과 오만함 앞에서 “무슨 말을 저 따위로 하는 거야”, 짜증이나 내고는 좀더 진지하게 노무현의 문제를 따져보기를 성가셔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잊는 건 노무현의 스타일이 살아나건 무너지건 그 스타일 속에 든 노무현의 정치적 내용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그가 부시 앞에서 천박하게 말했든 위엄 있게 말했든 정작 말하려고 한 바, 즉 한미관계에 대한 그의 의견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그의 정치적 의견은 그의 개인적 인격이나 스타일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의 ‘사회적 인격’, 즉 이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개인적 인격이 개인적 행태로 반영되듯 사회적 인격(이념)은 사회적 행태로 반영된다. 그러나 사회적 인격(이념)은 매우 복잡한 사회적 이해관계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규정되기에 대개 더욱 오차 없이 반영된다.

오늘 한 사람의 이념을 가늠하는 가장 정확한 잣대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야 말로 오늘 세상의 정치, 사회, 문화적 현상들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모든 전쟁이 모든 착취가 모든 사회적 악행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이름으로 기획되고 집행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나,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수용하는 진보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다시피, 노무현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매우 충성스런 정치인이다. 이라크 침략전쟁, 한미관계, 노동운동 따위 이런저런 사회 문제에 대한 그의 일관된 보수적 태도는 놀랄 만한 일도, ‘대통령이 되더니 달라져서’도 아니다. 그런 모든 태도들은 단지 보수주의자로서 그의 이념을 오차 없이 반영할 뿐이다.

돌이켜보면, 노무현의 개혁적 면모들도 대개 부풀려진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일보>와 지역감정 문제에 대한 그의 ‘용감한 도전’을 되새겨 보자. <조선일보>야 이미 그가 잘 보인다고 해서 잘 해줄 가능성이 없는 상황인데다 안티 조선 분위기도 무르익어 아예 맞서는 게 이득이었다. 지역감정을 무릅쓰고 부산에서 출마한 일도, 당내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그가 대통령 후보급으로 뛰어오르려면 획기적인 여론적 지지를 업는 방법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역시 당연한 선택이었다.

물론 그런 행동들과 관련해서도 노무현의 진심이 무엇이었나를 따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노무현과 사귀려는 게 아니라면, 그의 개인적 인격이나 스타일은 접고 그의 사회적 인격(이념)에 집중하는 게 좋다. 하여튼 오늘 노무현은 온 세상의 이목을 제 스타일에 집중시킴으로써, 선량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보수 정치에 침을 뱉고 돌아설 수많은 순간들을 예방하는 보수의 전사로, 숭고한 보수의 전사로 살아가는 중이다.








요구르트

1917년 러시아혁명을 시작으로 지구 곳곳에 사회주의 나라들이 생겨났다. 그 나라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나라들과 긴장하며 자본주의의 야만을 극복한 사회를 시도했다. 70여년 후, 그 가운데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이 일제히 무너졌다. ‘현실 사회주의’의 그런 결과는 대개 사회주의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판단으로 이어진다. 사회주의란 실현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더라도 끔찍한 것이라고 말이다.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약탈적 형태로 내달리는 오늘 우리는 10여 년 전 그 일을 한번 쯤 되새길 만하다. 그 사회주의는 우리가 확신하듯 그저 끔찍한 것이었나. 만일 그렇다면 모든 사회주의적 시도는 미망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주의에 존중할 만한 구석이 있어서 그렇게 무너지고 만 게 애석한 일이라면, 우리는 사회주의에 대해 좀더 사려 깊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 하나는 우리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사회주의를 판단하는   이런저런 정보들이란 대개 (CNN에 의해 걸러진 이라크처럼) 다시는 지구상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길 바라지 않는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걸러진 것이다. 사실 한 사회가 살만 한 곳인가를 판단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가장 쉽게 범하는 실수는 사회주의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자유’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러나 그 자유란 단지 자본주의적 자유다.

자본주의가 야만의 체제인 건 경쟁력 있는(잘나고 능력 있는) 소수의 인간은 한없이 안락하고, 평범한(정직하고 성실할 뿐인) 다수의 인간은 한없이 고단한 인생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안락한 소수에겐 고단하게 살아볼 자유마저 보장되지만 고단한 다수에겐 고단하게 살 자유만 보장된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란 어디에나 진열되어 있지만, 돈이 없으면 구매할 수 없는 상품이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적 자유가 제한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 제한은 보다 많은 정당한 자유를 위한 제한이다. 사회주의에선 경쟁력 있는 소수가 평범한 다수보다 몇 백 몇 천배 안락할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선 그게 정당한 일일 수 있지만 사회주의에서 염치없고 부도덕한 일일 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선 제 아무리 경쟁력 없는 사람도 사회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한다면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할 자유가 보장된다.

경쟁력 있는 소수에게 사회주의란 달갑지 않은 것이다. 나처럼 잘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저런 평범한 멍청이들과 큰 차이 없이 살아야 한다는 건 견딜 수 없는 모욕일 테니. 그러나 한없이 고단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란 여전히 희망의 근거다. 사회주의는 유식한 혁명가들의 고민거리가 아니라 나와 내 새끼들의 미래를 염려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거리인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를 진지하게 되새겨 보는 일은 그런 고민을 푸는 한 갈래가 된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반공주의자들의 목소리나 사회주의에 살았으되 자본주의적 자유를 갈망했던 특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사회주의에서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다. 우리가 이라크 전쟁의 진실을 이라크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듯 말이다.

불가리아의 장수마을(요구르트 먹고 장수한다는 광고에 나온 그 마을)엔 더 이상 장수노인들이 없다. 마을 묘지엔 1990년 즈음 세 해 동안 죽은 사람들의 묘로 그득하다. 마을 사람들의 얘기는 이렇다. “사회주의 시절엔 안락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진 않았다. 소박하나마 집과 자동차도 나왔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 감당해야했다. 노인들은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했다.”

그 노인들의 장수비결은 요구르트가 아니라 사회주의였던 셈이다. 그게 그 마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인지 아닌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한다.








선택

현재는 언제나 우리에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현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연한 현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놀라운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제 정신을 가진 모든 한국인들이 반대한 일이 그렇다. 한국인들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이라는 점에서 다를 게 없는 베트남 전쟁을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믿었던 유일한 나라의 사람들이었다.

지난 50여 년 동안 한국은 거대한 반공주의 파시즘의 감옥이었다. 오늘 한국인들은 줄지어 그 감옥 문을 나서는 중이다. 노무현이 온갖 위기를 넘어 극적으로 대통령이 된 일은 오늘 한국인들에게 부는 바람, 이른바 개혁의 바람을 상징한다. 바람은 거세며 그 바람을 주도하는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한국은 이제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 반동 세력만 제거하면 짐짓 낙원에 이를 모양이다.

물론 그런 세력을 제거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다른 중요한 것을 생략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라크 침략전쟁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고, 오늘 한국사회를 휘감은 개혁 바람과 그 상징인 노무현의 진실을 스스로 폭로하게 했다.

노무현의 침략전쟁 지지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품위 없는 세상에서 순진함은 가련함과 그리 다르지 않다. 세상은 이미 품위를 잃은 지 오래다. (이를테면, 한국사회의 모자람을 말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프랑스나 독일이 이라크 침략전쟁을 반대한 건 얼치기 지식인들이 말처럼 그들의 높은 양식 때문이 아니라, 옛 동구와 중동 지역을 독차지하려는 미영 제국주의에 대한 유럽 제국주의의 반발일 뿐이다.) 세상은 그저 어느 음악가의 노랫말 대로다. 이 좆같은 세상 다 썩어가네. 총알은 튀고 또 피바다 되어. 돈 쫓아가다 다 지쳐버렸네 어린애들은 다 미쳐버렸네.

노무현이 침략전쟁 지지를 선택한 건 그 선택을 설명하는 노무현의 고통스런 얼굴과는 달리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노무현의 그런 선택은 지역감정이나 조선일보에 대한 노무현의 태도로는 추정하기 어려운 노무현의 보다 근본적인 태도, 바로 노무현의 이념에서 나온다. 그것은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노무현의 태도이기도 하다.

80년대 이후 자본주의는 미국 위주의 초국적 금융독점자본이 세계를 침략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자본주의는 케인즈주의, 혹은 수정 자본주의로 불리는 최소한의 절제를 벗어던지고 초기의 약탈 자본주의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세계는 20의 부자 나라를 위해 80의 가난한 나라가 존재하고, 20의 부자를 위해 80의 가난한 인간이 존재하는 20:80의 세상으로 변하는 중이다. 이라크 전쟁은 그런 야만으로 회귀가 낳은(낳을) 수많은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다.

노무현은 한국 경제에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길을 닦은 김대중에 이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거스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정치인이다. 바꿔 말하면, 오늘 한국의 개혁 바람을 상징하는 노무현은 지역감정과 조선일보를 거스르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당연한 귀결인 노동자 민중의 고통이나 제국주의 침략전쟁은 거스르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한 정치인이다. 그것이 개혁정치인 노무현의 진실이다.

개혁은 수구보다 좋은 것이다. 개혁은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과 교양을 가진 사람들의 삶에서 파시스트의 악취를 가시게 한다. 그러나 개혁은 그런 최소한의 안정조차 얻지 못한 사람들, 파시스트의 악취가 가시는 것으로는 그다지 달라질 게 없는 노동자 민중의 삶을 능욕한다. 개혁 바람 속에서,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단순하다. 개혁이 생략하는 현실을 외면할 것인가, 외면하지 않을 것인가.








딸 키우기 2

메신저 창에 ‘조폭소녀’가 접속을 해왔다.   김단(열살 먹은 내 딸)이다. ‘이 녀석은 제 별명을 만족해하는군.’ 나는 혼자 조용히 웃었다. 몇 달 전 나는 김단이 제 동무들, 특히 남자 동무들 사이에서 ‘조폭소녀’라 불린다는 걸 알았다. 겉모습에서부터 하고 노는 짓까지 여느 여자아이들과 다를 게 없는 김단은 유독 ‘남자의 폭력’ 앞에선 자못 전사로 변한다고 했다. ‘잘 가고 있군.’ 나는 그때도 혼자 조용히 웃었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물리적으로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저런 전문가들이 이런저런 장황한 분석을 내놓곤 하지만, 이유는 실은 단순하다. 물리적으로 약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여자는 남자보다 물리적으로 약하며, 여자와 남자 사이에서 물리적 폭력은 대개 남자의 선택 사항이다. 여자는 물리적으로 당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침묵하고 살 건지 제 자존을 되찾기 위해 싸울 것인지 선택하게 된다. 물론 싸워야 하고 싸우는 건 침묵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은 건 처음부터 물리적으로 당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는 ‘약한 인간인 여자’가 적어도 10년 이상의 철저하고 조직적인 교육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한 여자 아이는 그의 유년기와 소년기 동안   ‘여자다움’이라 설명되는 철저하고 조직적인 교육을 통해 ‘약한 인간인 여자’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 약함은 모든 사회적 억압과 차별의 공식적인 근거가 된다. 강한 인간(남자)은 약한 인간(여자)을 당연히 다스리며 고작해야 ‘보호’하는 것이다.

변화는 ‘여자답게 키우는 일’과 ‘약한 인간인 여자, 남자에게 물리적으로 당하는 여자로 키우는 일’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 시작한다. 나는 그런 생각을 지난 10년 동안 나름대로 실천해왔다. 그 실천이란 그저 소박한 것이다. 김단이 말귀를 알아먹을 무렵부터   ‘남자들의 세상’에 대해 토론식의 대화를 한 것(이젠 그런 토론을 한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김단에게 몇 가지 무술을 맛보게 했고 제가 고른 태권도를 꾸준히 하게 한 것(끼니는 건너도 태권도는 빠지지 않으려 들만치 김단은 열심이다. 몸에서 밀리면 모든 것에서 밀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쩌다 김단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눈물이라도 보이면 “여자라서 우는 거냐?” 야비하게 빈정거리는 것(모든 눈물을 빈정거리는 건 아니다. <레미제라블>에서 판틴이 죽을 때, 나는 내 눈물을 감추며 김단의 눈물을 슬쩍 확인하는 것이다.) 따위다.

그런 소박한 실천들은 내 일상에 어떤 부담도 주지 않는다. 앞으로 10년 더 하는 것 역시 별 부담이 없다. 그러나 오늘 김단이 ‘조폭소녀’라 불리고 자신이 ‘조폭소녀’라 불린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 그리고 내가 김단이 ‘약한 인간’ 아니 아니라 ‘대등한 인간’으로 살아갈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분명한 성과인 셈이다. 이런 얘기를 듣던 어떤 이가 참으로 근심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김단이 남성적인가요.”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김단은 인간적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내 진정한 바람이다. 김단이 남자에게 당하고 사는 것도 심란하지만, 김단이 남자놈들이 하던 못된 짓을 해보는 게 유일한 목표인 ‘치마 두른 마초’가 되거나 세상을 성기로만 구분하는 ‘파시스트 여성주의자’가 된다는 건 또 얼마나 심란한가.)

오랜 만에 한가로이 소파에 늘어져 있는 내게 김단이 다가왔다. “아빠.” “응.”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응, 나 나중에 결혼 해 안 해.” “그걸 지금 결정해야 해.” “그냥, 생각나서.” “김단의 결혼이야 김단이 알아서 할 일이지.” “맞아.” 조폭소녀. 나를 아빠라 부르는 긴 머리의 여자가 씩 웃으며 돌아섰다.









개혁이냐 개뼈냐

운동한답시고 다리를 다쳐 꼼짝 못하고 방에 있는데, 바깥에서 내 딸과 그의 동무가 말한다. "너는 미국 편이야, 이라크 편이야?" "히히, 아무 편도 아닌데." 나는 미소 지으며 대화에 귀 기울인다. "그래도 미국하고 이라크하고 저렇게 계속 싸우면 누구 편인데." "히히, 그럼 이라크 편. 미국은 맨날 약한 나라만 괴롭혀." "맞아, 정말 짜증나지." 기분이 환해진다. 제국주의자들은 제 더러운 침략전쟁을 이런저런 요사스런 논리로 분칠하려 애쓰지만 변방의 열 살 먹은 아이들의 눈도 속이지 못한다.

분칠은 여기저기서 계속된다. ‘개혁정치인’ 유시민은 노무현의 이라크전 지지와 파병결정을 ‘대통령으로선 바른 선택’이라고 분칠한다.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긴장 상태로 볼 때 노무현이 부시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한 일이라는 얘기다. 유시민은 ‘정치란 현실적인 것이기에 대의를 거스를 수 있다’는 뻔한 이야기를 하는 유시민에게 명분과 이상을 말하는 건 싱거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유시민의 이야기는 전혀 현실적이지도 않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은 대통령들 사이의 ‘의리’가 아니라(조폭도 ‘의리’로 전쟁을 벌이진 않는다.) 순수한 손익계산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그렇게 하고 있듯) 미 제국주의는 한반도전에서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분명히 많다고 판단하면 언제든 전쟁을 벌이려 들 것이다.   ‘의리’는 간단하게 무시될 것이고,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전쟁 명분이 다시 반복되면,   남의 땅의 더러운 전쟁을 지지한 노무현에게 제 땅의 더러운 전쟁을 반대할 명분은 없을 것이다. 미 제국주의가 한반도에서 순수한 손익계산만으로 전쟁을 벌일 수 없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지금 미 제국주의가 순수한 손익계산만으로 벌이는 전쟁에 대해 가장 정당한 태도를 갖는 것이다. 오늘 전쟁을 반대하는 것만이 내일 전쟁을 거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개혁정치인’ 유시민은 그에 대해, ‘대통령은 전쟁을 지지하고 국민은 그것을 반대하여 결국 대통령이 반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한다. 궤변도 이쯤 되면 사람을 서글프게 만든다. 대체 정치를 개혁한다는 것의 출발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정치란 현실적인 것이라 대의를 거스를 수 있다'는 생각을 부수는 것이다. 정치란 대의를 좇는 것이라는 것, 정치가 대의를 좇는 게 절대 비현실적인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야말로 정치 개혁의 핵심이다. 물론 그건 유시민이 엄살하듯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개혁정치인’ 명찰을 달고 행세하는 사람에겐 당연한 임무다. 명찰은 그러라고 달아준 것이다.

유시민의 궤변은 처음이 아니다. 여중생 살해사건에 대한 온 나라의 분노에 노무현이 경우 없는 소리를 했을 때도 그는 '원래, 대통령은 그렇게 하고 국민은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유시민의 궤변대로라면 우리의 모든 사회적 신념과 가치들은 뒤집힌다. 그렇다면,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보다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는 게 훨씬 나았을 게 아닌가. 이회창이 전쟁을 지지했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을 거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전쟁을 거부하긴 더 좋았을 테니 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군사 파시즘에 감사해야 하고, 여성들은 제 인권을 일깨워 준 가부장제에 감사해야 할 것 아닌가.

‘참여 대통령’ 노무현이 주창하고 ‘개혁정치인’ 유시민이 분칠하는 국익/생존론은 이광수 따위 일제 부역자들이 떠들어대던 민족이익/생존론에서 한 치도 발전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세월 동안 정치란 당연히 대의를 거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놈들에게 원 없이 농락당해왔는데, 급기야 대의를 거스르는 정치를 개혁하겠다며 등장해 다시 대의를 거스르는 놈들에게 당하게 된 셈이다. 정말이지 궁금하다. 그 구린내 풀풀 나는 개혁은, 개혁이냐 개뼈냐.








작은책 머리말

<작은책>은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를 주제로 만들어져온 잡지입니다. 지난해 <작은책>은 여러 사정으로 이미 다른 지면에 발표된 글들을 골라 다시 싣는 방식을 일부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변화는 어떻든 간에 원래의 목표를 조금이나마 '포기'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작은책>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포기'는 '완전하고 후안무치한 포기'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본다면 매우 가치있는 것일 수 있을 겁니다. 제가 편집진에 불려간 것도 그 즈음입니다. 제가 하는 일이란 게 편집회의에 참석하고 짧은 원고를 한개 쓰는 게 고작입니다만(요즘 이곳에 올리는 글이 같은 원고입니다).. 하여튼 저는 <작은책>에 불려간 걸 영광으로 알고 군말없이 따르고 있습니다. 아래는 3월호에 쓴 머리말입니다.

제가 동네 아주머니들에게도 드려보고 했습니다만, <작은책>은 아마도 우리나라 잡지 가운데 완독율이 가장 높은 잡지이지 싶습니다. 누구든 한번 붙들면 끝까지 보더라는 얘깁니다. 한다 하는 지식인들 잡지처럼 고상하진 않지만, 누구나 부담없이 읽으면서 곱씹어볼 만한 글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달라진 체제도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나아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지하철 매점에서도 파니까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읽어도 좋고, 화장실에 꽂아두기에도 그만입니다. <작은책>은 한권에 2천원이고 1년구독이라봐야 2만원(4천원 깍아서)입니다. <작은책>을 사보는 일은 그 만한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로는 비할수없을만치 근사한 일이라는 걸 보장합니다. 물론, 저는 <작은책>과 아무런 금전적 관계가 없습니다..ㅎㅎ (홈페이지 : www.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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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잡지, 작은책

개혁 바람이 거셉니다. 다 죽었던 노무현씨가 마치 영화처럼 아슬아슬하게 대통령에 뽑힌 것도 개혁 바람의 결과일 겁니다. 개혁 바람은 이 나라의 모든 썩고 냄새 나는 것들, 이를테면 <조선일보> 같은 깡패 신문이나 양아치 정치인 따위들을 짐짓 궁지에 몰아넣는 듯합니다. 개혁은 좋은 것입니다. 특히 지난 반세기 동안 이미 정해 놓은 사회적 규칙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는 깡패와 양아치들이 다스려온 나라에서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개혁은 진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개혁은 세상의 구조와 규칙들을 바꾸자는 게 아니라 대놓고 지켜지지 않는 세상의 구조와 규칙들을 지키자는 운동입니다. 만일 세상의 구조나 규칙들에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다면 개혁이란 세상을 바꾸는 게 전혀 아닌 것입니다.

<작은책>은 ‘일하는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을 목표로 해왔습니다. <작은책>의 목표는 대단한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억눌리고 빼앗기는 세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건 세상의 구조와 규칙을 아예 바꾸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작은책>은 참으로 무서운 잡지입니다. 적어도 일하는 사람들을 억누르고 빼앗아서 영화를 누리는 놈들에겐 말입니다. 그러나 <작은책>은 참으로 정다운 잡지입니다. 비록 지금은 그놈들에게 억눌리고 빼앗기지만 언젠가는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야 말겠노라 주먹 불끈 쥐는 사람들에겐 말입니다.

희망이 없다고들 합니다. 진보는 글렀으니 개혁이라도 하자고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을 찾기 전에 희망을 찾는 방법부터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남에게서 희망을 찾습니다. ‘아, 진보운동이 저렇게 힘이 약하니 희망은 없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서 희망을 앗아가려는 놈들이 부린 오랜 공작의 결과입니다. 먼저 나 자신에게서 희망을 찾는다면, 우리는 그 희망의 힘을 세게 할 수많은 희망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은책>이 희망의 잡지로 우뚝 서야겠습니다.









글쟁이와 운동

근래 몇 년 새 ‘전투적 지식인들’이라 불리는 일군의 지식인들이 있습니다. 주류 매체를 중심으로 글을 쓰며 안티 조선을 비롯한 이런저런 사회 개혁문제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저 역시 때론 그들과 함께 거명되기도 하는데 한 때 그들과 한동아리로 활동했던 게 사실입니다.

제가 그 동아리에서 빠져 나온 건 제가 사회에 미치는 유익이 터무니없이 부풀려진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여전히 사회의 한 구석에서 몸으로 싸우는 활동가들에 비하면 말입니다. 저는 진정한 운동가란 어느 시대든 작고 보잘것없는 겉 모습에 어리석은 몽상가 취급을 받곤 했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금 되새겨야 했습니다.

저는 이제 대학생들과 얼치기 교양인들을 상대로 ‘사회 비판’이라는 색다른 자극을 팔아먹는 ‘지식 연예인’ 노릇을 접고, 원고료나 명성 대신 보람과 떳떳함을 주는 한두 지면에만 글을 쓰며 진보 운동에 좀더 생산적으로 끼어드는 방식을 궁리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야간비행에서 곧 낼 책 <서준식 산문집>의 머리말입니다. 글쟁이에 대한 정당한 경멸로 가득찬 이 글을 함께 읽고 싶습니다. 인간의 이치로 보나 자연의 이치로 보나, 머리와 입으로 사는 이들은 몸과 근육으로 사는 이들 앞에서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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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운동가나 노동자에 비해 일반적으로 지식인, 그리고 그 하나의 형태로 인정되는 '글쟁이'들이 부당하게 높은 대접을 받는 병든 사회다. '매체'가 기본적으로 팔려야 할 '상품'이기 때문에 글줄이나 하는 지식인이나 글쟁이들이 그것을 독과점하게 되고 그들은 다시 그런 구조에 기꺼이 편승하면서 시대의 스타가 된다.

매체를 독·과점하면서 대중의 '스타'가 되는 그들은 기고만장으로 현란한 논쟁을 벌이지만 그들의 글에서 행동하지 않는 자의 부끄러움, 고난 받지 않는 자의 죄책감,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자의 초조감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오만하며 그들의 글을 무심코 따라가다 보면 십중팔구 '근육'을 경멸하고 '입'을 숭상하게 되어 있다. 그들은 글이 과잉하고 행동이 과소한 사회의 덕을 보면서 그런 현상을 더 부추기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문의 공포가 가득한 감옥에 몸을 둔 운동가는 말할 것도 없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운동을 조직하고 다니면서도 차비를 걱정해야 하는 운동가, 항상 감옥에 갈 준비를 해놓고 집회에 나가야 하는 운동가, 국회의사당을 멀리 바라보면서 자신이 조직한 고작 2-30명의 시위대와 함께 '악법 철폐!'를 외치다 닭장차에 실려 가는 실의에서 언제나 다시 일어서야 하는 운동가…. 글쟁이가 자신의 글쓰기와 그들의 삶이 운동이라는 점에서 '같다'라고 말한다면 그런 오만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본적으로 폭력의 원리가 관철되어 있다. 글로 사회가 변할 만큼 이 사회는 아직 신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땅 위에 그어놓은 금 안에서만 놀아라! 이것이 이 사회의 '룰'이다. 그 금을 넘어가면 반드시 피를 보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일정한 한도에서 폭력의 벽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이성이 통하지 않는 지점부터는 '입'이 아닌 '근육'이 현실의 어둠을 뚫고 가는 것이다.











선거 후기


선거 이틀 전인가 <대학생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봄에 창간할 ‘어린이 진보 교양지’ 준비 때문에 원고고 인터뷰고 안하고 지내는 중이지만 그 신문이 어떻게 살림을 꾸려가는가를 알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날 밤 <오마이뉴스>에 그 인터뷰가 올랐던 모양이다. 나는 그 사실을 일주일쯤 더 지나 송년 술자리에서야 알았다. “김규항, 권영길 비판적 지지”라는 제목이라 했고, 나를 비난하는 글들이 돌아다닌다고도 했다. “어떤 놈들은 내가 노무현 안 찍는다고 ‘이념적 도식주의에 빠졌다’고 욕하고, 어떤 놈들은 내가 권영길 안 찍는다고 ‘이념을 저버렸다’고 욕하니, 내 이념은 완전히 걸레군.”

나는 비판적이든 그냥이든 권영길을 지지하지 않는다. 나는 노동자 민중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이 언제나 제도적이고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권영길을 찍었다. 그런 내 선택은 “네 이념대로 찍어라”라는 내 글과 배치된다. 그러나 그 글은 진보주의자가 보수후보를 찍는 ‘이념적 자살’을 비판한 것이었다. 나는 오늘 한국의 제도 정치가 진보주의자의 이념을 온전히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도 정치란 정치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뿐이며, 마찬가지로 제도권 진보 정치란 진보정치의 일부일 뿐이다.

그 일부는 일부로서 중요하다. 여전히 한국의 제도정치는 사회주의는커녕 사민주의 의원 한명 없는 완전한 보수판이다. 이런 판에서 선거의 과제는 무엇보다 ‘보수가 아닌 정치’를 늘이는 데 있다. 나는 민주노동당이 대중적 호감을 얻는 사민주의 정당으로 성장해가길 바란다. 그것이 진정한 진보정치의 구현인가를 따지는 일은 그 당의 의원수가 ‘김종필의 졸개들’보다 많아질 즈음으로 미루어도 좋다. 우리는 사민주의의 개량적 반동성도 잊지 않아야 하지만 사민주의가 노동자 민중에게 갖다 줄 실익도 잊지 않아야 한다.

내가 권영길을 찍은 건 바꿔 말하면 김영규를 안 찍은 것이다. 나는 사회당이 내세우는 이념을 존중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내세우는 이념과 그들이 제도 선거를 대하는 방식이 영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사회당에게 제도 선거가 전술인지 전부인지 잘 모르겠다. 그들의 선거 구호들이 공허하게 들리는 일 역시 그런 괴리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그들이 제도정치의 구현에 집중하려면 그들의 이념을, 이념의 구현에 집중하려면 제도 정치를 대하는 방식을 조정하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한다.

내 관심은 오히려 제도 바깥에서 진지하고 성실하게 진보정치의 미래를 모색하는 단체들에 있다. 식구들의 8할 이상이 현장과 관련을 가지면서 비제도 투쟁정당을 모색하는 ‘노동자의 힘’, 현존 사회주의에서 나타난 문제들에 대한 대안으로 평의회 체제를 모색하는 부산의 ‘노동자민중회의’나 전주의 ‘노동의 미래를 여는 현장연대’ 같은 곳들이다. 그 단체들은 반공주의자들의 선전을 제 체험인양 암송하는 인간들이 말하듯 망상에 빠진 스탈린주의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원칙과 신념을 버리지 않는 사회주의자들이다.

오늘 한국 진보정치를 가로막는 벽은 누구보다 진보주의자들,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의 정치적 관심은 무슨 큰 빛이라도 진 듯 온통 제도정치, 보수정치에만 쏠려있다. 우리는 민주당이니 개혁당이니 노사모니 하는 보수정치의 살림엔 속속들이 빤하면서, 노동자의 힘이나 노동자민중회의나 노동의 미래를 여는 현장연대 같은 내 살림은 아예 있든가 말든가 식이다. 이러니 무슨 놈의 진보정치가 되겠는가. 정신 차리고 힘을 기르자. 다음 선거에서도 비판적 지지니 사표니 하는 되어먹지 못한 소리에 휘둘린대서야 우리가 살아있되 산 목숨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되어먹지 못한 소리

"대중이가 말야..." "영삼이가 말야..." “종필이가 말야..." 오래 전, 동네 복덕방에 모인 영감님들은 저마다 한국정치의 운영자였다. 정치적 권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보이는 이들이 자못 한국정치를 운영하는 희한한 풍경은 오늘 인터넷 세상에서 흔히 발견된다. 오늘 적지 않은 한국의 청년과 노동자들(물론 사무직을 포함한)은 밤마다 인터넷의 복덕방에 모여든다. "노무현이 말야..." “정몽준이 말야...” “이회창이가 말야...” 신문 쪼가리에서부터 출처가 불분명한 풍문에 이르기까지 온갖 시사 자료들을 꿰어찬 채 그들은 밤이 새도록 한국정치의 운영자 노릇을 하는 것이다.

서글픈 일은 그토록 정치에 열중하는 그들이 예나 지금이나 정치에 당하기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정치에 당하는 단 한가지 이유는 그들이 열중하는 정치가 실은 그들의 정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화해야만 제 삶이 변화할 그들은 딱하게도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 보수정치가 정치의 전부라 생각하고 그들의 정치라고 생각한다. 간혹 그들 가운데 평소 보수정치의 기만성에 넌더리를 하며 진보정치의 중요함을 내비치던 사람들도 막상 선거철이라도 되면 마법에라도 걸린 듯 보수 정치에 목을 맨다. 그들에게 진보란 대개 좀더 나은 보수, ‘좋은 보수’를 뜻한다.

그런 딱한 상황엔 아픈 배경이 있다. 오랜 군사 파시즘 기간 동안 우리의 소망은 민주화, 즉 ‘좋은 보수’를 이루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피의 대가로, 보다시피 오늘 우리는 죄없이 잡혀가 고문을 당하거나 벌건 대낮에 군인들이 양민을 도살할 가능성은 적어진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물론 그런 변화는 참으로 대단하고 값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변화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세상의 출발점에 불과하다. 죄없는 사람을 고문하거나 죽이는 일이 적어졌다고 해서,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세상이 만들어진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애초부터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었던 사람들, 민주화만으로도 살 만한 세상이 된 ‘시민 계급’에게 더 이상의 변화는 절박한 게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들로선 선거에서 ‘나쁜 보수’가 이기는가 ‘좋은 보수’가 이기는가는 대단한 차이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가 되고서도 제 삶이 달라진 게 없거나 오히려 나빠진 사람들, 그놈의 ‘좋은 보수’의 정치에 늘 당하기만 하는 대다수 노동자 민중의 처지에서, 선거에서 어떤 보수후보가 이기는가는 그리 대단한 차이를 갖지 않는다. 노동자 민중의 현실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수정치란 똑 같은 놈들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노동자 민중들이 ‘좋은 보수’를 찍어야 한다고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못나고 비굴한 일은 없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노동자 민중들이 ‘좋은 보수’를 찍어야 한다고 그게 최선이라고 강요한다면 세상에 그렇게 염치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급기야 “너희들 때문에 이회창이 되면 어쩔 거냐.”는 공갈까지 나온다니 아마도 오늘 세상은 인간의 염치가 완전히 사라진 세상인 모양이다. 대체 무슨 이유로 보수 정치에 거덜이 난 노동자 민중이 보수 정치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박정희와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오늘 다시 이회창을 대통령으로 미는 나라라면 ‘이회창 대통령’이 걸맞은 나라라고 밖에!)

노무현은 다르다고? 11월 13일 농민대회에서 노무현이 달걀을 맞고 쫓겨나는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가. 노무현이 되면 적어도 더 나빠지지 않는다고? 속없는 소리 하지 마라. 노동자 민중에게 이미 세상은 충분히 나쁘다. 사람들아, 제발이지 되어먹지 못한 소리들 좀 그만 두어라.









돌팔이 3

재작년 의사폐업과 관련하여 세번의 글을 썼습니다. 이른바 '돌팔이' 시리즈인데 돌팔이 3은 더 이상 의사들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정리 삼아 쓴 글입니다. 당시, 의사폐업에 대해 이런저런 복잡하고 난해한 분석들이 많았는데.. 저는 아무리 궁리해봐도 이 글 이상의 논지를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2년이나 지난 글이지만, 요즘 의협(참으로 의협심 있어 보이는 이름)이 하는 짓을 보니 달라진 게 없다 싶어 올려봅니다.



돌팔이 3


서양 의학이 한국의 환자들을 장악한 이래, 의사들은 한국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고소득 전문 직업군이자 일체의 사회 개혁에 가장 비협조적인 반동 집단의 지위를 유지해 왔다. 그런 의사들이 2000년 어느 날 '국민의 건강권을 수호'한다는 고난에 찬 폐업에 강철 대오를 이룬 일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 일은 적어도 모든 일엔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우리의 상식을 거스른다.

의사들에 따르면, 의사들이 분개한 이유는 한국의료제도의 모순 때문이며 그 모순의 뿌리는 1977년 시작한 의료보험제도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가 종막을 향해 치닫던 시절답게 한국의 의료보험제도는 졸렬한 내용으로 시작되었고 그후 23년이 지나도록 의료보험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사들 입장에서 한국 의료보험제도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진료비의 70% 가량만이 의사들 손에 쥐어진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의사들은 지난 23년 동안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30%나 빼앗기며 살아왔다.

그런 딱한 처지의 의사들이 23년 동안 여전히 대표적인 고소득 전문 직업군이자 일체의 사회 개혁에 가장 비협조적인 반동 집단의 지위를 유지해 온 비결은 무엇일까. 그 비결은 전적으로 그들이 선택한 범죄 덕이다. 의사들은 약을 먹지 않아도 될 환자에게 약을 먹이는 일로,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의료행위로도 충분한 환자를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의료행위로 유도하는 일로 제 밥그릇의 부족분을 채워 왔다. 소아과 의사는 제 자식을 내맡긴 어미의 가련한 불안감을 이용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아이들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약을 먹였고 산부인과 의사는 제 몸을 내맡긴 임산부의 본능적 불안감을 이용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산모들을 셀 수 없이 많은 제왕절개 수술대에 눕혔다.

그렇게 23년 동안 국민들의 몸을 더렵혀 가며 제 밥그릇을 채워 온 의사들이 갑자기, 일제히 '국민의 건강권을 수호'하게 된 건 이른바 의약분업 실시로 그들의 주요한 범죄 수단이던 약 조제권이 약사에게 넘어가게 되면서다. 그것이 서울의 잘 나가는 종합병원 원장부터 저 시골의 당구장만 못한 의원 의사까지 강철 대오를 이루게 한 이유다. 그것이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된 지난 23년 동안 단 한번도 그 의료보험제도의 정체를 국민들에게 알린 일이 없는 의사들이, 한달 백만 원을 받으며 하루에 세 시간밖에 못 자는 극악한 노동을 치르면서 단 한번도 그들을 착취하는 선배 의사들을 상대로 싸운 일이 없는 전공의들이 단결 투쟁한 이유다.

(그런 의사들에게 하나마나한 말이겠지만) 의사들이 의약분업 실시로 더 이상 국민들의 몸을 더렵혀 가며 제 밥그릇을 채우기 어려워졌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제 밥그릇을 채우기 위해 23년 동안 저지른 그들의 범죄를 그 범죄의 피해자인 국민들에게 고백하고 참회하는 일이었다. 그 다음 의사들이 할 일은 현재 한국의료제도의 이런저런 모순들을 국민들에게 가장 겸손한 자세와 가장 친절한 방법으로 설명하는 일이었다. 그렇게만 했다면 국민들이 어쩌겠는가. 한국 의료제도의 모순이 분명한 사실이라면, 그런 의사라도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불쌍한 국민들이 말이다.

그러나 한국 의사들이 한 일이란 그들이 23년 동안 제 밥그릇을 채우기 위해 몸을 더렵혀 온 국민들을 아예 외면하는 일이었다. 먹지 않아도 될 약을 먹어도 좋고 안 째도 될 배를 째도 좋으니 제발 진료만 해달라는 국민들을 향해 의사들은 전례 없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국민건강권 수호를 위해 싸우는 겁니다."

추신 : 지난 23년 동안 한국 의사들이 마음놓고 국민들의 몸을 더렵혀 가며 제 밥그릇을 채울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한국 정부의 협조 덕이다. 의사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알면서 단 한 명의 의사도 잡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한국 정부는 빌어먹을 통치 자금을 표도 안 나는 사회복지에 헐지 않아도 되었다. 더러운 정부와 더러운 의사가 동침하고 있다.   |2000년_11월








자유?

딱딱한 정치경제학 용어들을 접고 말하자면, 자본주의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서 100원어치 노동력을 70원에 사서 30원을 공으로 먹는 착취 체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개미처럼 일해도 베짱이 같은 자본가보다 한없이 가난해진다.(이를테면 1980년 무렵 미국 경영진은 사무직 노동자보다 40배 많은 봉급을 받았는데 현재는 120배 많이 받는다.) 게다가 자본주의에서는 연탄 집게나 화장실 똥 막대기처럼 하찮은 것부터 사랑이나 구원처럼 고귀한 것까지, 인간의 삶과 관련한 모든 것이 상품의 형태로 교환되기에 두 계급의 삶의 질은 하늘과 땅처럼 벌어져 만 간다. 자본가나 노동자나 다를 게 없는 사람인데 한쪽은 착취하고 다른 한쪽은 착취 당하니 두 계급의 갈등은 당연하다.

아무런 대책 없이 착취에만 전념했던 초기 자본주의는 언제나 심각한 갈등 상태에 있곤 했다. 자본은 그 갈등을 공적 폭력(군대와 경찰)과 사적 폭력(청부 폭력배)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갈등의 뿌리를 제거할 순 없었다. 노동자들의 연대는 갈수록 강해지고 세상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칼 맑스가 그 붉은 물결에 과학을 부여하자 물결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아예 빨갱이들에게 넘어가는 나라가 생겨나자, 자본은 폭력 이외의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얼마간의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가미하여 혁명의 가능성을 흡수하는 수법이었다. 프랑스니 독일이니, 제도 정치에 좌파정당이 존재하고 국가가 노동자들에게 교육, 의료 같은 최소한의 삶의 문제를 지원하는 이른바 서유럽 복지 국가들은 그 최선의 결과라 불린다.

자본이 마련한 보다 최근의 대책은 더욱 세련되고 문화적인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뭐든 가질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만듦으로써 자본주의에 호감을 갖게 만드는 수법이다. 그런 수법에 사용되는 광대들이 자본과 노동자 계급이라는 양대 계급 사이에 기생하는 지식인이니 문화 예술인이니 하는 ‘자유로운 정신들’이다. 그들은 대개 많이 배운 사람들이고, 자신의 의지 외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멋스러운 사람들이며, 먹고 사는 일 따위에 집착하는 속물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그런 삶이 그들의 격조 있는 정신과 관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삶은 그들의 격조 있는 정신이 아니라 그런 삶에 필요한 돈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은 그들의 충실한 광대 짓의 대가로 자본이 주는 부스러기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삶이란 단지 선택하기 나름이라,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속물 근성만 버리면 삶은 얼마든 자유로운 것이라, 제 ‘라이프 스타일’로 선전하는 광대 짓의 대가로 말이다.

광대 짓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끊임없이 다른 성교 대상을 찾는 프리섹스주의는 ‘감정의 자율성을 존중한 결과’라 선전된다. 물론 그건 개소리다. 생각해보라. 못 생기고 돈도 없어 장가도 못 가는 노총각 노동자가 백날 프리섹스주의를 표방한들 프리섹스주의가 되겠는가. 광대 짓은 짐짓 자본주의에 대한 경멸에 이르기까지 한다. 물론 그 경멸의 목적은 제 격조있는 정신을 유세하려는 것일 뿐, 그들에겐 세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신념이 있다.

그 신념이야말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법한 그들이 이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호기롭게 살 수있는 재능이다. 세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신념은 세상은 절대로 변해서 안 된다는 자본의 욕망과 행복하게 교미한다. 자본가들은 흔쾌히 그들의 격조있는 정신 앞에 정중함을 표시하고 그들은 제 광대 짓을 알아차릴 만한 자의식을 완전히 잃는다. 그들은 완벽한 광대가 된다. “삶이란 결국 선택하기 나름 아닌가? 진보니 혁명이니 대학 시절에나 하는 것 아닌가? 인생이 그렇게 단순한 것인가? 세상이 과연 변할까?”

그들은 이제 그들의 말과 그들의 글과 그들의 책과 그들의 작품과 그들의 모든 문화적 영향력을 통해 광대 짓을 지속한다. 그들은 자본가의 천박함과 혁명가의 촌스러움마저 비웃으며 참으로 자유롭게 살아간다. 그 광대들, 정말 자유롭지 않은가?









좌파와 조선일보


(독자게시판에 김상태님이 적은 안티조선운동에 대한 의견은 조선일보 문제에 대한 좌파의 입장과 관련하여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감사 드리며, 제 생각을 적습니다.)

저는 흔히 안티조선 진영의 일원으로 분류되어 왔고 지금도 그런 편입니다. 제가 어떻게 불리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겠지만, 저에 대한 그런 분류는 절반만 맞습니다. 저는 조선일보를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반대해왔다는 점에서 안티조선 진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안티조선운동’이란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방식의 전부가 아닌,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개혁적 우파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저는 안티조선 진영이 아닙니다. 저는 좌파이며, 사민주의자가 아니라 생산관계의 변화를 좇는 근본주의자입니다.

안티조선 운동에 대한 김상태님의 비판들은 좌파로선 당연한 의견들이며, 저 또한 거의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안티조선운동이 명석하고 정열적인 젊은이들로 하여금 마치 그 운동이 운동의 전부인 것 처럼 여기는 어리석은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강준만 같은 이들이 안티조선 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은 좌파들을 부당하게 모욕한 것도 어느 얼마간 사실입니다. 좌파는 안티조선운동의 그런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 분명히 비판해야 합니다. 그것은 좌파와 우파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이념적 갈등입니다. 그러나 안티조선운동에 대한 그런 비판을 조선일보 반대 자체에 대한 비판이나 혐오로 확대하는 건 잘못입니다. 앞서 말했듯, 오늘의 안티조선 운동이란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전적인 방식이 아니라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개혁적 우파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그들이 독점하게 된 건, 좌파가 그 문제를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 문제를 좌파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고 치부하는 건 잘못입니다. 강준만이 조선일보를 어떻게 생각한다를 떠나서, 조선일보는 명백히 좌파의 적대물입니다. 좌파가 조선일보와 싸워야 하는 이유는 조선일보가 강준만의 말마따나 “반칙을 일삼는 신문”이라서거나 진중권의 말마따나 “시민사회의 상식을 어겨서”가 아니라, 그 신문이 변혁운동에 가장 적대적인 세력의 총화이자 그 세력의 가장 강력한 선전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강준만이나 진중권 같은 개혁적 우파들의 목표가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라면 좌파의 목표는 조선일보와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계급의 분쇄입니다. 조선일보를 공격하는 일은 곧 변혁운동을 강화하는 일이며 변혁운동의 분명한 일부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좌파가 조선일보를 강준만보다 덜 적대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조선일보 문제와 관련하여, 좌파가 해온 일이란 대개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개혁적 우파의 방식을 ‘논평’하는 일이었습니다. 강준만의 방식을 비판하고 안티조선운동에 빠진 젊은이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좌파에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좌파가 좌파의 방식으로 조선일보와 싸우고, 안티조선운동에 빠진 젊은이들을 좌파로 만드는 일입니다. 안티조선이 젊은이들을 망친다고 비판하기만 할 게 아니라, 젊은이들을 그런 운동에 모조리 내 준 좌파의 무능과 불성실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좌파는 ‘가장 좌파다운 게 뭔가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좌파의 방식으로 싸우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좌파가 싸우지 않아야 할 부분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노동자계급 운동만 좌파 운동이 아닙니다. 좌파는 세상의 모든 부분에 좌파의 방식으로 개입하고 싸워야 합니다. 젊은이들의 현실을 개탄할 게 아니라 그들을 모조리 좌파로 만들 궁리를 해야 합니다.

조선일보를 ‘활용’할 수 있다는 의견에 대해선, 좌파는 이른바 도덕이니 상식이니 하는 관념적 목표를 좇니 않기에, 조선일보든 월간조선이든 아니면 그 보다 더 악랄한 매체든 가능만 하다면 선전도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대상을 활용한다는 것은 단지 활용하겠다는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적대적인 성향의 대상을 활용할 때는 일부는 상대에게 활용 당하게 마련입니다. 결국 활용 당하는 부분이 큰가 활용하는 부분이 큰가를 세심하게 계산해야 하는데, 상대가 지난 수십년 동안 남한 사회의 최고급 정보를 주무르며 단련된 조선일보라는 점에서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진보평론 창간준비위원들이 조선일보에 활짝 웃으면서 등장했던 일을 비롯, 좌파와 조선일보와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좌파는 스스로 냉정하게 평가해야 하고 앞으로도 그래야 합니다. 어설프게 조선일보에 ‘출연’해놓고선 조선일보를 활용햅네 하는 건 그저 코미디입니다. 강준만 등이 대놓고 조롱한 것도 그래서지요.   물론 저는 좌파가 조선일보를 활용하는 통쾌한 첫 예를 기대합니다.

추신 : 제가 얼마 전 쓴 ‘구토’는 조선일보 문제에 대한 좌파의 견해랄 것도 없이, ‘먹고 사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까지 추접스럽게 살아서야 되겠느냐’는, 소박한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그런 소박한 생각을 굳이 적는 건 그런 소박한 생각마저 무시되는 세상이라서 겠지요. 온갖 양식과 교양과 진보적 지성으로 치장한 사람들이 자기의 작은 이해관계 앞에서 그 양식과 교양과 지성을 서슴없이 생략하는 한심한 상황 말입니다. 그들은 조선일보를 활용합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구토


객기로 책을 내며 ‘때론 객기가 고전을 사수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고 주장하는 출판사, 야간비행의 회의 시간. 식구들의 말 끝에 이른바 사장인 내가 말한다. '한국에서 조선일보에 책을 안 보내는 출판사가 세 곳인데, 강준만 선생 책을 내는 두 곳을 빼면 우리 밖에 없지.' 조금은 과장일(부디 그렇기를) 내 말에 식구들의 잔잔한 웃음이 번진다. 그 웃음 속에도 객기가 들어있고 그 객기 속엔 소박한 자부가 들어있다. ‘우리는 조선일보에 책을 보내지 않는다.’ 대체 한 출판사의 식구들이 오랜 시간과 땀을 들여 만든 책을 조선일보에 ‘어여삐 여겨주소서’ 보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조선일보라는 신문이 정직하게 일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어 왔는가를 눈곱만큼이라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한국의 거의 모든 출판사가 조선일보에 책을 보낸다. 조선일보가 일부 여론 영역에서 수세에 몰렸다는 오늘도 그들은 여전히 책을 보낸다. 달라진 건 그들이 조선일보를 옹호하며 책을 보내지 않고, 짐짓 조선일보를 비난하며 책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들이 짐짓 조선일보를 비난하는 건 제 양식을 과시하기 위해서고, 그러면서 책을 보내는 것은 제 욕망을 지키기 위해서다. 조선일보의 책 기사가 다른 신문을 모조리 합한 만큼 효험이 있음을 아는 그들은 제 책을 팔아먹기 위해 조선일보에 책을 보낸다. 책도 아닌 허섭스레기나 찍어대는 출판사에서부터 내는 족족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출판사는 물론, 진보 지성의 총본산을 자처하는 저명한 출판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거의 모든 출판사가 그렇게 한다. 한국의 거의 모든 출판사가 그렇게 하고, 조선일보와 끈이 닿는 한국의 거의 모든 저자가 그렇게 한다.

이오덕 선생과 세 번째 인터뷰를 했다. 두 번의 인터뷰에 어리석은 질문이 많았기에 오늘은 주로 말씀을 듣자 했으나, 그는 근래 무리한 집필로 적이 고단해 보였다. 염려의 말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며칠 전에 나온 두 권의 책을 내게 건넸다. ‘신문 기사를 제대로 쓴 데가 없어요. 내가 서울 나가기가 어렵다고 했더니 전화로 몇 마디 물어보고 쓰고…’ ‘찾아오겠다는 데는 없었습니까.’ ‘한군데 있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조선일보에서 인터뷰하고 싶어한다고 하길래 내가 조선일보하고는 안 한다고 했더니 그럼 편찮으셔서 안 한다고 하겠다고 해요.’ ‘싱거운 사람들이군요.’   ‘그냥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일보 기자가 전화를 했어요. 전부터 선생님 책을 많이 읽고 존경하고 그러면서 찾아오고 싶다고, 그래 난 조선일보와는 인터뷰 안 한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정치 이야기는 안 할 테니 걱정 말라고 하면서…’ ‘그 친구들 집요하지요.’ ‘예, 그러면서 도무지 전화를 끊지 않길래 안되겠다 싶어 그 얘길 했습니다.’

그 얘기란 이런 것이다. 지난해 말 이오덕 선생은 오랫동안 함께 어린이 문학과 우리말 운동을 해 온 동료인 한 중견 출판사 사장에게 ‘앞으론 같이 일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 출판사 사장이 조선일보에 글을 썼다는 이유였다. 단지 조선일보에 글을 썼다는 이유로 절교를 선언한다는 건 매우 편협하다 여겨질 만하다. 편협한 것은 대개 좋은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때론 편협만이 바른 선택인 지점을 만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죄 없이 폭행하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편협하다. 조선일보가 바로 그렇다. 조선일보엔 편협만이 바른 선택이다. 조선일보에 책을 보내는 모든 출판사는 나쁘며, 조선일보에 책을 보내는 모든 저자는 나쁘다. 조선일보에 책을 보내며 책에 대해 인간에 대해 말하지 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 가운데 조선일보에 보낼 건 단 하나, 구토뿐이다.

(조선일보를 욕하는 사람은 노무현 지지자거나 한겨레신문 소속이라 여기는 이들을 위해 굳이 덧붙인다. 나는 노무현 지지자들과 긴장을 이루며,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쓰다 내용 문제로 잘린 바 있는, 나름의 급진주의자다.)









세 청년


지난해 가을, 9.11 사건과 관련한 어떤 이의 발언을 격렬하게 비판한 며칠 후, 이오덕 선생이 내 글을 읽었다며 전화 메모를 남겼다. 화가 나신 건가 싶었지만, 설사 야단을 맞더라도 이분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지 싶어(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의 아이들과 한국의 말을 위해 가장 비타협적으로 싸워온 전사다.) 다음 날 일찌감치 전화를 드렸다. 그는 내 글을 잘 읽었다며 말했다. “사람이 몸을 움직여 일도 하고 해야 바른 정신을 가질 수 있는데, 늘 앉아 책만 읽고 생각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지 싶습니다.” 그는 그 일의 본질을 검소한 한마디로 꿰뚫었다. 나는 안도했다. 그가 나를 야단치지 않아서, 논란에 빠진 내 글을 옹호해서가 아니라, 그의 정신이 건재함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존경할 만한 정신들은 대개 90년대를 통과하면서 ‘아무것도 분명히 판단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총체성을 늘어놓는’ 걸레가 되었다.   나는 그도 그렇게 되었을까 내심 두려웠던 것이다.

겨울이 시작할 무렵 나는 그의 거처를 찾았다. 동그란 산들과 동그란 물들. 충북(의 풍경은 곧 한국의 풍경이다) 음성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길목, 산 구비를 비껴 돌로 지은 집에 그가 살았다. 그는 세 해 전 건강이 나빠져 아들이 살고 있는 이곳으로 내려왔다. 어림잡기 힘들 만치 많은 책들이 밀림을 이룬 그의 서재 한켠에 놓인 낡은 소파에 그와 마주앉았다. “제가 말도 잘 못하고… 아이구, 인터뷰 그거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의 생각이 사람들에게,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좀더 친절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말로 간신히 그를 설득하고, 녹음기를 켰다. 그가 내놓은 차를 마시며, 나는 서사시를 읽듯 천천히 그의 곧고 광활한 정신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와 글로 사는 적은 사람들이 몸과 말로 사는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세상을 반대한다. 말하자면 그의 생각은 매우 계급적이며 급진적이다.(그는 ‘계급’이나 ‘급진’ 같은 개념어를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하긴, 계급이나 급진이라는 말은 계급과 급진을 표현하는 한 방법일 뿐이다.) 그가 아이들의 문제에 일생을 다 바친 이유 역시, 아이들의 바른 정신이 세상을 바르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모든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그렇듯 그는 늘상 오해에 휩싸여 산다. 그는 완고한 우리말 전용론자라 오해 받곤 한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젠 사용하지 않는 생경한 옛말들을 우리말이랍시고 사용하는 일은 오만한 엘리트주의라 여긴다. 그는 모든 우리말에 완고한 게 아니라,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담긴 우리말에 완고하다.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질문을 했다. “선생이 말하는 말의 혁명은 결국 정치 혁명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결국 그런 셈입니다.” 조용히 미소 짓는 그의 주름진 얼굴 왼편으로 충북의 동그란 햇살이 들었다. 나는 그가 청년임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늙는 게 숙명이라는 말은 거짓말이거나 절반만 맞다. 몸이 늙는 건 숙명이지만 정신이 늙는 건 (온갖 요사스런 핑계와 그럴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선택이다. 일흔의 몸에 스물의 정신을 가진 청년이 있고 스물의 몸에 일흔의 정신을 가진 노인이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제 선택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조금씩 하루도 빠짐없이 신념과 용기와 꿈이 있던 자리를 회의와 비굴과 협잡으로 채워갈 때, 그런 순수한 오염의 과정을 철이 들고 성숙해가는 과정이라 거대하게 담합할 때, 여전히 신념과 용기와 꿈을 좇으며 살아가는 청년들이 있다.

그 청년들 역시 계급적이며 급진적이다. 전북 변산의 윤구병 청년은 종일 논과 밭을 메며 가르치는 게 다인 듯한 변산공동체를 이끌지만, 9.11 사건을 초국적 금융독점자본에 대한 제3세계인민의 전쟁이라 해석하는 급진주의자다. 서울 혜화동의 서준식 청년은 억울한 사람의 호소를 들어주는 일에 전념하는 듯한 인권운동사랑방을 이끌지만, 인권을 모티브로 세상의 근본적인 변혁을 꿈꾸는 급진주의자다. 그 청년들이, 그 철없는 비타협의 정신들이, 청년의 몸에 노인의 정신을 가진 수많은 우리가 망가트린 세상을 복구하는 중이다.









인터뷰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그 페미니즘이라는 글은 적지 않은 소란을 낳았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소란을 '페미니즘 논쟁'이라 했는데, 실은 저는 논쟁에 임한 적은 없습니다. 그 페미니즘을 쓰고, 그 글에 대한 보론 삼아 그놈들과 그년들이라는 걸 썼을 뿐이지요. 그후 한겨레를 비롯, 여기저기서 인터뷰니 대담이니 해서 기사거리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제가 응하지 않았던 건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다음 충분한 분량(앞의 두 글은 10매짜리들입니다)의 글로 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인터뷰로 그런 계획을 대신할까 합니다. 원래 기사엔 '위선을 혐오하는 지식인 김규항'이라는 민망한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위선을 혐오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만.. (김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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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페미니즘' '그놈들과 그년들'이라는 칼럼으로 페미니즘 진영과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김규항씨를 만나 그에 대한 입장과 월드컵에 관한 생각, 최근의 정치흐름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고종석씨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비장함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 비장함이 글의 주제와 어울려서 메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을 때 비장함은 옳은 것이고, 그렇지 못할 때 비장함은 그른 것이다. 김규항 글의 비장함은 대체로 옳고 좋은 것 같다. 그가 칼럼에서 다루는 주제는 대개 진지한 것들이고, 그 비장함이 실릴 때 김규항의 메세지는 매우 효율적으로 전달된다"


그런데 이번의 그 칼럼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이번엔 그 비장함이 그르거나, 나빴던 것일까? 강준만 교수는 "지식인들이 숭배하는 그 어떤 서구의 석학들로부터도 건질 수 없었던 그 어떤 소중한 깨달음을 김규항에게서 자주 얻는다. 김규항의 글을 꿰뚫는 한 가지 중요한 정신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위선에 대한 강한 혐오다"라고 말한 바 있다. 확실히 김규항은 위선을 아주 혐오하는 지식인이다. 그는 자신의 글에 대한 입장을 충분히 보충설명했고, 그 글이 애정에서 비롯된 비판이었다는 것과 '그 페미니즘'이 아닌 다른 어떤 페미니즘과는 더 확실히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음은 김규항씨와의 일문일답이다.


지승호(이하 지) - 예전에 쓰신 글 중에 "(98년 프랑스 월드컵때) 월드컵은 이 나라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불편했다. 하지만 4년에 한번씩 온 나라가 '짜고 미치는' 축제에 파시즘의 혐의를 둘 수는 없었다"고 하셨는데요. 이번 월드컵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김규항(이하 김) - 비슷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월드컵에 흥분하고 열광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 보지만, 그런 현상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서 국가주의로 몰고가거나 장사에 이용해먹으려는 데는 비판적입니다.


지 - 인권운동사랑방 논평 보셨습니까? 거기에 대해 일부 네티즌들이 상당히 과격한 반발을 했는데요.

김 - 꽤 광범위해 보였지만 그런 반발이 보편적인 건 아닙니다. 인터넷 게시판의 익명성이 민주적인 분위기를 만든다고들 하는데, 함부로 아무렇게나 말하게 되는 측면이 좀더 강합니다. 저는 사랑방의 논평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랑방의 첫번째 논평이 대중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좀 더 세심하게 드러내야 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진지하게 읽었다면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겁니다. 게다가 그 논평은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조차 민족이 어떻고 국운이 어떻고 미쳐돌아가는 일방적인 상황에서 나왔음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논평이 편향되었다고 말하는 건 오히려 편향된 얘깁니다.


지 - 저한테는 그것이 소수의견을 무시하거나, 탄압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것 같아 씁쓸하던데요. 그런식으로 다수의 힘으로 말을 막거나 말하기 무섭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집단주의적인 측면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김 - 집단주의적입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익명성에 숨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은 보편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매우 특정한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오늘의 월드컵은 일종의 '주술'입니다. 우리보다 근대적이라는 나라 사람들도 별다른 게 없구요.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동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따져가며 행동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지 - 더 심한 나라들이 많죠. 영국도 그렇고.

김 - 대중들이 월드컵에 정신을 놓아버리는 건 그들이 그만큼 고단하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자랑스럽습니다"라고 외치는 사람 누구도, 자랑스러운 나라의 기준이 축구 순위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고단한 삶 속에서 참으로 오랜 만에, 다시 오지 않을 환희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런 환희와 열광이 본격적인 국가주의로 가는 데는 의식성이 부여되어야 하는데, 알다시피 진보적인 지식인들이라는 이들이 대거 그 짓을 했습니다.


지 - 사실 축구가 영국에서 노동자 계급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 시작됐고, 요즘의 월드컵은 국가주의보다는 자본주의의 지배를 더 많이 받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 - 축구가 원래 그랬던 건 아니지만 자본이 그렇게 사용해왔습니다. 물론 그건 축구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월드컵과 축구를 분리해서 보고 싶습니다. 오늘의 월드컵은 단지 자본의 잔치이지만, 그럼에도 월드컵 속의 축구는 여전히 아름답고 정직한 육체의 향연입니다. 누구든 국가니 민족이니 하지 않고도 월드컵 속의 축구를 즐길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지식인이라면 경우가 다릅니다. 그들은 월드컵의 본질이 뭔지 잘 알고 월드컵의 열기에 묻혀 버린 현실을 잘 알고 있고, 그걸 말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지 - 소위 강-진논쟁(강준만, 진중권 논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논란이 많은데요. 강준만을 지지하는 측은 '진중권의 예의없음이 지나쳤다'고 하고 진중권을 지지하는 측은 '할 수 있는 문제제기에 대한 과도한 대응이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김 - 제대로 읽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 노무현이 김영삼 만나고 할 때, 강준만선생이 노무현이 YS를 만난 것이 YS의 반성을 유도한다면 좋은 것일 수 있다 뭐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강선생의 실용주의가 갖는 의미를 존중하지만 그 말은 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이라면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가치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진중권씨는 나름대로 현실주의적인 노선을 좇는 건 좋은데, 자신보다 왼쪽의 입장은 모조리 닭짓이라 한다거나 자신만이 옳다는 식의 태도는 문제라고 봅니다. 하여튼 두분의 갈등은 선거와 관련해서 일어났는데, 두분이 선거에 열중하는 건 좋은데 자신들이 단순한 선거운동원이 아니라 보편성을 좇는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선거운동원이라면 해당 선거의 결과에 모든 걸 걸어야 하지만 지식인은 좀더 장기적인 생각을 가져야 할테니까요.


지 - 강준만 교수를 '근대화의 기수'라고 평가하신 적이 있으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에 대해 도덕적 순결주의를 벗어나 시장과 언론 같은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라는 의견은 이치에 맞지 않는 무리한 훈수이며, 좌파에 대한 이념적 공격이라고 표현하신 적이 있으신데요. 그것 역시 민주당 편향의 정치성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김 - '강준만'이라는 글은 강준만 선생을 비판한 게 아니라 강준만과 나는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걸 다르다고 했을 뿐이지요. 그런 얘길 굳이 하게 된 건 강준만의 활동을 존중하는 일과 강준만의 이념을 존중하는 일이 뒤섞여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의 언론개혁운동을 지지하는 일과 노무현을 지지하는 일은 다르다는 겁니다. 언론개혁 운동이란 현실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이 아니라 현실을 좀더 합리적으로 만드는 운동입니다. 강선생은 제 이런 말에 마땅치 않아하시는 것 같은데 이건 서로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언론개혁운동을 무시해온 것도 아니었구요.


지 - 강진논쟁에 관련해서 강준만 교수가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월간 인물과 사상에 3개월째 진중권에 관한 글이 나가고 있고, 무크지에서도 절반 가까운 분량으로 진중권을 공격하고 있는데, 그간 그렇게까지 공격받은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공격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김 - 비판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비판의 내용이 문제겠지요. 제대로 읽어보지 않아서 판단하기 어렵지만, 강선생은 오래 전부터 그런 얘기를 신물나게 들어왔습니다. 말은 맞는데 말하는 방식이 거칠다느니(웃음) 그런 비판은 언뜻 공감을 주지만 실은 가장 너절한 것입니다.


지 - 진보적인 남성으로 여성운동에 대한 공격이 쉽지는 않았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조심스러운 질문인데요.

김 - 편하게 얘기하세요(웃음)


지 - 주위에서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더 짜증나고, 그것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혹시 그런 글을 쓰게 된것은, 최보은씨와 같이 '쾌도난담'을 진행하면서 느낀 불편함 때문은 아니었습니까?


김 - 분명히 해두고 싶은 건, 그 글은 최보은씨를 대상으로 쓴 게 아닙니다. <씨네21>에 실린 최보은씨의 ‘그 페미니스트 입 열다’라는 기사도 그런 컨셉이던데, 제 글을 제대로 안 읽어서 그렇겠지요. 최보은씨와 안지 오래지만 저는 그가 어떤 일관된 논리를 가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장점이 참 많은 사람인데 유독 여성문제에 합리적이지 않아 보이고 개인적으로 그건 그가 자신의 체험에 매몰되어 있어서라 생각해왔습니다. '박근혜 지지' 발언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저 '최보은답구나'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 글을 쓴 이유는 최보은의 발언이 아니라 최보은의 발언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반응 때문입니다. 최보은의 발언은 페미니즘의 대의를 망칠 만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뜨겁게 얼싸안았다 그 심정을 잘 안다는 식의 정서적 공감대가 넓게 형성되었지요. 저는 그런 반응이 한국 페미니즘의 오늘 상태를 전적으로 대변하진 않더라도 매우 강하게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염려하는 분들은 그러게 뭐하러 페미니즘을 건드렸느냐고도 하지만, 오히려 저는 그 지경에서도 아무도 그런 얘길 안 했다는 게 희한할 뿐입니다.

지 - 김어준은 "규항이형의 말이 옳지만, 아직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배려하는 방식이 아니다"라고 했는데요.

김 - 그런 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런 듣기 좋은 말이 페미니스트들의 기분을 낫게 만들어주는 것 외에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페미니즘에 실재하는 문제를 비판하는 건 바로 페미니즘을 위한 일입니다.


지 - IF의 이숙인은 "지적한 부분이 어떤 사회운동에게도 있는 딜레마인데, 왜 유독 여성운동에서만 맵고 독하게 작용하는가?"하고 반문했는데요.

김 - 저는 한국 사회의 판관이 아닙니다. 제가 무슨 권리로 한국 사회의 문제들에 순위를 매길 수 있겠습니까. 이를테면 저는 김지하 선생님이나 이현주 목사님도 비판했는데 그분들은 제 청년기의 소중한 스승들이고 여전히 존경합니다. 저는 페미니즘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한 게 아니라, 단지 페미니즘 문제를 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운동입니다. 제 생각에, 모든 운동엔 두가지 필수적인 덕목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하는 운동에 대한 분명한 '자부'이고, 둘째는 자기가 하는 운동이 운동의 일부라는 '겸손'입니다. 자부가 없으면 운동은 비루해지고, 겸손이 없으면 운동은 빗나갑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자부만큼 겸손을 갖는다면 그런 반문은 안 해도 될 겁니다.



지 - 페미니스트들이 다른 체험에는 무지하거나 자신이 하는 운동이 운동의 일부라는 ‘겸손’이 부족하다는 뜻인가요?

김 - 페미니즘이라는 운동은 '아픈 체험의 연대' 이기도 합니다. 여성이기에 겪어야 하는 온갖 억울한 체험들이 페미니즘의 바탕에 정서적으로 깔려 있지요. 신분이나 처지가 다름에도 남성쪽의 공격에는 자연스럽게 뭉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실재하기에, 그건 당연한 것이고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부분이 페미니즘을 빗나가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체험이란 매우 주관적이면서도 강한 확신을 갖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죽을병 걸렸다 살아난 기독교인이나, 가족을 빨갱이에게 잃은 사람은 기독교나 이념에 대해 심각한 아집을 갖게 됩니다. 그런 아집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비판하긴 어렵지만, 사회적으로 표현될 땐 엄격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얼마 전 최보은과 가깝고 저와도 아는 사람을 얼마 전 만났는데, 자기는 개인적으로는 최보은을 비판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사회적으로 비판하더라도 개인적으로 그럴 자신은 없습니다. 공중 앞에 제출하는 의견이기에 엄격해지는 겁니다.


지 - 그렇다면 박근혜 지지론을 반대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 - 저는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서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좌제는 누구에게 사용되어도 연좌제입니다. 제가 박근혜를 반대하는 건 그가 박정희의 정치적 딸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부터 대통령 후보로 성장하기 까지 박근혜씨는 철저히 박정희의 아우라를 사용합니다. 페미니스트들이 박근혜 지지를 논리적으로는 찬성하지 않으면서도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건 아까 말한대로 '아픈 체험의 연대'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을 한 심정을 나는 이해한다, 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런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한 체험이 다른 체험을 무시할 권리는 없습니다.


얼마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30여년 전에 중앙정보부에서 수사 받다 죽은 서울대 최종길 교수의 죽음이 타살로 여겨지며, 민주화 운동과의 관련성이 인정된다고 발표했습니다. 유족들은 즉시 국가와 당시 중정부장 등을 상대로 10억원의 배상 소송을 했지요. 그런데 그들이 승소해서 10억을 받는다고 한들 30년 동안 지속되는 그 아픈 체험이 배상될 수 있습니까. 최종길씨의 가족들에도 물론 여성이 포함되어 있는데, 박근혜 지지 발언에 공감한다는 여성들은 과연 그 여성들 앞에서도 '여성의 이름으로' 박근혜 지지를 말할 수 있을까요. 자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짓을 했는지 똑똑히 알기 바랍니다. 그들이 그 발언을 분명히 반성하지 않는 한 그들은 여성의 적이고 치마두른 마초들입니다. 이 생각은 전혀 타협할 뜻이 없습니다.


지 - 일부 페미니즘 진영에 대한 문제제기를 생각하시면서 고민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 후 주변 여성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김 - 개인적으로는 받은 이메일은 공감한다는 쪽도 많았는데, 다들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어렵다더군요(웃음) 통쾌했다는 남성 편지엔 '너 같은 마초 새끼 좋으라고 쓴 게 아니다’라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지요. 한 여자 선배는 대학 선생이고 진보정당 쪽에서 여성위원장 제의도 받고 하는 분인데, 어디서고 제 얘기 나오면 제가 어떤 사람인지 열심히 설명한다더군요. 아내와의 관계에서 얼마나 민주적인지, 딸을 얼마나 당당하게 키우는지, 아들에게 올바른 성의식을 길러주려 얼마나 노력하는지 등등. 저보다 더 억울해 하면서.(웃음) 서준식 선생은 저를 옹호하는 글을 쓰고 싶은데 그러면 판이 이상하게 될 것 같다고 웃으시더군요. 제가 부디 품위 유지하시라 했습니다. 하여튼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친 셈입니다. 아내에게도 그렇고.


지 - 야간비행에서 서준식 선생님의 책을 출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김 - 네. 서준식 옥중서한(1971-1988), 850페이지 짜리 양장본입니다. 이 놈들아 이게 바로 책이다 하는 마음으로 냅니다. 때론 객기가 소중할 수도 있습니다. 고전이 될만한 책입니다.


지 - 권혁범 교수가 '노력하는 마초'라는 말에 대해 '인종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말처럼 모순적이다. 여성주의에 절대적 보편성을 요구하는 것은 이미 그것에 대한 무지 혹은 근원적 거부를 전제하는 것'이라고 했는데요.

김 - 무슨 말이 그렇게 어렵고 거창한가요 노력하는 마초라는 건....


지 - 전 일종의 겸손의 의미로 받아들였는데요.

김 - 그렇죠. 자괴감의 표현입니다. 아까 여성문제에 대해 듣기 좋은 말 하는 게 오히려 더 무성의한 것이라고 했는데, 말 그대로 자지라는 성기를 지녔다는 것만으로도 억압자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이 한국입니다. 저는 여성문제에 협조적이라고 해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는 남성도 보기 민망합니다. 과연 제 세대쯤 되는 남성이 아무리 노력한들 수십년 동안 체화된 마초적 습속을 완전히 씻어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나쁜놈들일 뿐입니다. 제 글에 분노한 여성들이 그 말을 오해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남성인 권혁범씨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가 과연 '세상의 온기와 냉기를 직접 느끼는 사람인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지 - 무지했기 때문에 용감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아무도 여성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발언하지 않는 상태에서 옳든 그르든 간에 비주류에 대한 진지한 반론을 해주어서 오히려 고마웠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대화파트너로 인정해줬다는 거죠.

김 - 멋진 분이군요. 그쯤 되어야 마초들이 위협을 느끼지요.(웃음) 저는 페미니스트들이 약자의 태도를 벗어나길 바랍니다. 우리의 아픔을 알아주는가 몰라주는가 만으로 피아를 구분하는 건 동정을 바라는 약자의 태도이지 싸우는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남성들에게 값싸게 이용됩니다. 은근슬쩍 동정심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우호적인 남성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죠. '그 페미니즘' 이런 거 쓰면 구제 받기 어려운 마초 취급을 받는 거구요. 알다시피, 제 또래 이상의 한국 남성들은 보수고 진보고 할 것없이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워낙 그렇게 교육되고 관습이 되어서 그런데 우습게도 그런 편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놈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그건 여성들을 존중해서도 아니고, 페미니스트들을 무서워 해서도 아닙니다. 그저 여자들에게 욕먹는 걸 용납할 수 없어서, 성가셔서일 뿐이지요. 상대를 업신여길 때는 절대 비판하지 않는 법입니다.


지 - 지지하는 정당은 있으십니까?

김- 없습니다. 제 이념은 사회당이나 민노당 좌파에 가깝겠지만, 한 당을 지지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현재의 진보정당이 실재하는 진보 이념을 포괄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시도를 싸잡아 의회주의라 폄하하는데도 반대합니다. 저는 민주당 후보를 염두에 둔 당선 가능성 운운은 우습게 생각하지만, 진보정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 문제엔 관심이 많습니다. 민노당 우파라 해도 보수 후보가 되는 것보다는 백배 낫기 때문입니다.


지 - 강준만 교수 같은 분은 최악이 되지 않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는데요.

김 - 강선생은 실용주의자이고 스스로 그렇게 자처하는 분입니다. 실용주의자는 옳은 것보다는 가능한 것을 좇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 분의 역할이고 저는 그걸 존중합니다. 하지만 모든 지식인이 실용주의자라면 제도 정치권과 다를 게 없을 겁니다. 강선생은 최악과 차악의 차이에 집중하는 분이라면, 저는 차악과 선한 것의 좀더 근본적인 차이에 집중합니다. 중립적으로 말하자면, 그분이 단기적인 문제에 성실하게 집중하니까 저 같은 사람이 좀더 장기적인 문제를 고민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지 - 조중동을 옹호하기 위해 볼테르의 말까지 인용했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요즘 언론인들에 대한 고소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 홍세화 선생이 사람 하나 버려놓았군요 (웃음)


지 - 이회창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 이회창이 되는 건 끔찍한 일이지만, '니들 땜에 이회창이 됐다'는 비판은 사양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우리는 니들한테 양보하려 존재하느냐'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게 기본 입장이지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태도로 볼 때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몇 년 후 한국이 남미 꼴이 될 가능성이 좀더 높다는 게 사실 걱정입니다. 정태인씨는 그런 이유에서 노무현을 돕겠다고 하던데, 요즘 노무현씨 하는 것 보면 돕기도 쉽지 않겠더군요. 노무현의 새로운 적은 바로 노무현입니다.


지 - 폭주족에 관한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폭주족에 대한 사회적인 적의는 지나치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어떤 영화를 보니까 폭주족에 짜증을 내던 택시 승객이 그 폭주족이 사고로 죽자 '그 놈 참 잘 뒈졌다'고 말하더군요. 음주운전을 하는 사람이나 고속도로에서 과속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정도의 적의를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죠.

김 - 저도 오토바이를 오래 탔습니다만, 폭주족은 두가지죠. 할리데이비슨 타는 귀족 폭주족과 125씨씨 이하 타는 하층 폭주족. 우리가 말하는 폭주족은 대개 후자고 그 비판엔 하찮은 놈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데 대한 계급적 경멸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계급적 경멸을 기반으로 하는 폭주족에 대한 비판이 전국민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중파 뉴스 같은 데서 폭주족이 어떻고 떠드는 것을 보면 비위가 상합니다. 그들이 뉴스 시간 30분 동안 저지르는 범죄는 어떻습니까.


지 - 그 아이들이 정말 나쁜 짓을 하려면 강도를 하지 않을까요?(웃음)

김 - 그렇지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몰아가면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미래나 꿈을 갖지 못하게 하는 우리가 죄인입니다. 제 아무리 막되어먹고 불량한 사람도 품위있게 살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게 도무지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아는 순간 사람은 파행하게 됩니다. 점잔 빼는 우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 - 청소년 성범죄자 신상공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 그게 정말 청소년을 위하는 건지, 청소년을 통제하자는 건지, 아니면 범죄자들에 대해 복수하자는 건지 헷갈릴때가 있던데요.(웃음) 성폭행 같은 것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그런 측면이 없지 않나하는 우려도 있구요. 몇몇 사람을 단죄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구요.

김 - 생각이 좀 바뀌었는데… 명단 공개는 반대합니다. 인권 문제이고, 인권은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선입니다. 사실 원조교제라는 것 자체가 우스운 얘기입니다. 그건 성인 남성과 10대 여성의 사랑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죠. 그것이 사랑인지 매매춘인지 누가 구분할 수 있습니까. 연애라 해도 나이 더 먹고 돈버는 사람이 비용 내는 게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까. 따지고 들면 오늘의 결혼제도라는 것 자체가 대부분 공인된 매매춘입니다. 경제적 능력을 가진 남성에게 평생 동안 독점적인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계약이지요. 10대 소녀들이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줄 생각은 안 하면서 명단공개 같은 선정적 단죄를 사용하는 건 구조적인 문제를 감정적으로 감추려는 위선입니다.


지 - 과격한 일부 영 페미니스트들의 경우 지나친 피해의식 탓인지, 빠져나갈 구멍도 주지 않고, 몰아 붙이거나, 인간으로서 당연히 고마워해야할 호의를 베풀어도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서준식 선생님 같은 분도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잖습니까? 조직보위 논리니 뭐니 얘기할 진 몰라도 그렇게 사회적으로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을(앞으로도 계속 해야할 사람이기도 하구요) 농담 한마디로 매도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사장되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습니다.

김 - 아까 말했듯 우리를 알아주는가 몰라주는가에만 집착하는 건 동정을 바라는 약자의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로 얻을 수 있는 건 심리적 위안뿐이지요. 운동이란 그 운동에 이미 동의하는 사람들끼리의 한풀이가 아닙니다. 그 운동에 찬성하지 않거나, 회의하는 사람들을 한명이라도 끌어들여 세를 늘이는 게 운동이지요. 후배가 월장 회원들이 제 글을 비판하는 토론기사를 보내주어 읽어보았는데, 경박한 마초 흉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그들은 경박한 태도를 당당한 태도로 착각합니다. 운동은 인간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운동 사회의 성폭력 문제 거론 할 때 조직보위논리를 많이 공격합니다. 저는 그런 공격이 정당하다 생각하지만, 페미니스트 자신들도 조직보위논리에 빠진 경우가 많습니다. 박근혜 지지 발언에 대한 두리뭉실한 반응도 결국 그런 경우지요.


지 - 월장논쟁 같은데서의 남성들의 반응에 대해 '악성마초'라고 하셨는데요.

김 - 그랬습니다. 하지만 월장 자체에 대한 평가는 별개입니다. 싸우는 여성들의 목표는 남성들의 권력을 빼앗아 남성이 누리던 것을 누려보는 게 아니라, 남성들이 망쳐놓은 세상을 좀더 품위있는 여성의 정신으로 변화시키자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좀더 낫게 만드는 게 아니라면 페미니즘이 존재할 이유도 지지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지 - 잘 아시겠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이 폭력의 피해자로 노출되는 경우가 훨씬 많지 않습니까?

김 - 일반적인 게 꼭 절대적인 건 아닙니다. 가정 폭력은 알다시피 대부분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입니다. 그러나 모든 가정 폭력이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인 건 아닙니다. 이를테면 몇 년 전 저희 아버님 동네 수퍼 아주머니가 남편을 폭행해서 죽였습니다. 이웃 아주머니들 얘기가 뭐냐하면 평소엔 저녁부터 때리더니 그날은 아침부터 때리더라였습니다. 저는 이런 특수한 예로 일반적인 상황을 뒤집겠다는 게 아니라, 가정 폭력의 핵심은 생리적 남성에 의한 생리적 여성의 폭력이 아니라 권력자에 의한 피억압자의 폭력이라는 겁니다. 그걸 잊고 감정적으로 매몰되면 박근혜 지지 같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지 - 홍세화씨와의 대담에서 '신세대가 어찌 보면 늙었다. 제도권 게임의 법칙을 일찍이 파악해 냉소적으로 산다고 볼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월드컵때 20대가 우리의 패배주의를 극복할 가능성을 보였다고 믿으면서도 여전히 우려되는 부분이 그런 부분인데요.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전세계가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집단주의로 흐를 우려 역시 있고.

김 - 제가 대중들을 열심히 옹호했으니 이면도 얘기해야겠지요.(웃음) 아까 말했듯 별다른 고민없이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게 그 자체로 우려할 만한 국가주의라고 할 순 없지만, 국가주의에 사용되기 충분한 상태인 건 분명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이 감정적인 차원을 넘어서 대한민국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말아야할 부분, 적대적으로 긴장해야할 부분을 무마해버리는 효과 때문이지요. 사랑방 논평에 대한 집단주의적인 반발도 보편적이지 않지만 보편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지 - 몇몇 운동가만을 가지고 여성운동의 전부인 것처럼 오도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김 - 저는 그 글에서 '90년대 이후 한국 주류 페미니즘'이라고 했습니다. 90년대 이후라는 말은 90년대 이전과의 변별성의 표현이고, 주류란 양적인 차원을 넘어 말 그대로 주요한 흐름이란 뜻입니다. 90년대 이후 어떤 불건전한 경향이 페미니즘 전반을 두루뭉실하게 휩쓸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 제 생각이 부당하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들의 두리뭉실한 상태를 먼저 분명히 구분하기 바랍니다. 이를테면 박근혜 지지 발언은 페미니즘의 건전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분명히 드러낼 기회였고, 반드시 그랬어야 합니다. 그런 발언엔 침묵하다가 그런 침묵에 대해 비판받으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건 떳떳치 못합니다. 그 글에서 "내 주변의 진보주의자 남성들은 하나같이 페미니즘을 못마땅해한다"라는 구절 기억하십니까?


지 - 네, 기억합니다.

김 - 그게 원래 '진보주의자 남성'이 아니라 '진보주의자'였습니다.


지 - 불리함을 자초하신 거네요.

김 - 사실 진보주의자가 맞는데, 왠지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고쳤지요.(웃음)


지 - 그것이 평소 스타일인 비장미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 것 같은데요. 기왕 논쟁하는거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으로 하신 겁니까?(웃음)

김 - 그런 대단한 의미를 둔 건 아니고, 그녕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데… 하여튼 그렇게 고쳤다고 아내한테도 핀잔께나 들었습니다.(웃음) 그러나 진정성을 가진 여성이라면 그런 차이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 겁니다. 조선희씨는 뜬금없이 저를 ‘현실의 경험에서 떠나 관념적’이라고 적었던데, 그걸 읽고 저는 역시 이 사람은 현실을 모르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온세상의 일에 보편적인 양식을 가진 듯 행동하지만, 실은 무엇 하나도 양식있게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자기 책을 조선일보 기자에게 갖다주고 홍보를 부탁하는 사람들입니다. 조선일보 기자와 마주 앉아 문화계의 근황들을 양식있는 어휘로 교환하면서 말입니다. 사람이 양식있게 산다는 건 양식있는 어휘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크든 작든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가 걸린 일에 양식있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실은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고 그걸 지키는 사람들은 매우 적습니다.


지 - 지식인들의 사회적 의견에는 좀 더 엄격한 태도가 필요한데, 편향된 페미니즘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는 말씀인가요?

김 -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은 우리의 일상에 매우 구체적인 관습으로 스며들어 있습니다. 여성의 도리, 여자다움, 착한 여자 따위들로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관습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모든 관습엔 이념이 숨어 있고 그 관습을 통해 이익을 누리는 계급이 존재합니다.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게 하는 관습은 지배계급의 가장 효율적인 지배 방식입니다. 세상의 절반만 지배하면서 전체를 지배하는 효과를 갖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이윤은 노동자의 잉여 노동에서 발생합니다. 그런데 남성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유지시키는 것은 여성입니다. 여성들은 남성을 먹이고 입히고 재웁니다. 게다가 다음 노동력을 생산하고 기르기까지 하지요. 그게 자본주의에서 가사 노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자본은 알다시피 여성에게는 한푼도 지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런 노동이 여성의 당연한 도리라는 관습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착취는 충분히 유지되는 것이지요. 그런 구조를 꿰뚫어보지 않는다면 여성에게 해방은 없습니다. 여성들이 생리적 남성을 최종적인 적으로 규정하는 건 실은 자신에 대한 억압 구조를 스스로 은폐하는 일입니다.


지 - 여성들이 자신에 대한 계급적 억압을 보지 못하고, 단지 눈에 보이는 일반 남성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를 스스로 은폐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여성들의 싸움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할까요?

김 - 여성들의 싸움은 구조적인 측면과 관습적인 측면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관습이 사회 구조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이미 체화된 관습은 구조를 해결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의 문제는 대개 관습적인 부분에만, 말하자면 생리적 남성과의 싸움에만 매달리는 데 있습니다. 장상이라는 사람 문제도 그런데, 그는 생리적 여성이지만 한국 보수영역의 가부장적 정신에 누구보다 충실하게 적응해온 사람입니다. 그는 성공한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정신에 투항한 여성입니다. 그와 관련한 모든 추문을 보면 가부장적 매뉴로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그가 생리적 여성이라고 옹호하는 건 여성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인앤아웃>이라는 영화에 보면 커밍아웃한 게이 선생님을 옹호하는 졸업생이 게이선생이 학생들에게 무슨 게이파라도 쏜다는 말이냐? 말합니다. 장상을 옹호하는 여성들은 생리적 여성이 총리가 되면 온나라에 무슨 여성파라도 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저는 그가 치마 두른 남성으로만 보입니다.


지 - 인물과 사상에 실렸던 '김규항의 지식인 비판은 어떻게 소비되는가?'라는 글 보셨습니까? 지식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이 오히려 '모두 다 똑같아'라는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부추길 수 있다고 썼는데요. 그 글이 '강준만'이라는 글을 쓰신 이후에 나온 것 같은데, 항간에는 '간접적인 공격'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김 - 간접적인 공격이라… 설사 강선생이 저 좀 공격하면 어떻습니까.(웃음) 그런 게 다 근래 몇 년 새 대거 등장한 종합 논평가들'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어떤 문제에도 실존적인 투신을 하지 않으면서 마치 구름 위에라도 앉은 듯 이놈은 이게 문제고 저놈은 저게 문제고 한가한 훈수만 일삼지요. 묵묵히 진보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을 낡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비웃어가면서 말입니다.


그 글은 부산대 학생이 쓴 건데 저는 이 친구 똑똑한걸 하면서 읽었습니다. 고맙다는 편지와 제 책도 한권 보내주고 그랬는데, 조금 설명하면 전 한국 지식인 전체를 싸잡아 공격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강준만 선생처럼 최악을 모면하는 일에 집중하는 분과 저처럼 차악조차 거부하는 사람은 공격 대상의 범위가 다른 것이지요. 강선생은 적시할 수 있는 몇 명일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만, 제 얘기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포함되는 겁니다. 이를테면 80년대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목숨이라도 바칠 것처럼 소리치다가 고작 10년 이 지난 오늘 진보적 신념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이를테면 저와 동갑내기인 신현준씨는 저를 비난하며 옛 좌파는 쿨했다고 말합니다. 그게 과연 정치경제학 이론가였다는 사람이 할 말인지, 참 딱한 일입니다. 우리 세대가 대개 비루하게 살아가지만, 비루하게 살더라도 비루한 삶을 자랑할 건 없습니다.


지 - "글쓰기란 용접공이 용접을 하듯 한사람이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한가지 노동이다. 용접공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건너다닐 다리를 용접하는 것처럼 지식인의 글쓰기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사용할 정신의 다리를 용접하는 일이다"고 하셨는데요. 사회구성원과 갈등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계몽하려한다고 욕하기도 하구요.

김 - 다행스럽게도 저는 계몽하려느냐는 비판을 받은 기억은 없습니다. 글이 비교적 쉬워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욕을 얻어먹은 적은 많지요. 김지하, 이현주 선생님, 의사들, 해병들, 페미니스트들… 제가 제일 우습게 생각하는 글쓰기는 '안전한 글쓰기'입니다. 항상 점잖은 얼굴로 안전한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겨레의 전속필자로서 맨날 조선일보 욕을 하는 건 정말이지 안전한 일입니다.


진보주의란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것인데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건 현재 세상의 경계를 건드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확연히 적대적인 대상만을 비판하는 방식은 단지 안락을 좇는 색다른 방식입니다. 확연하고 일반적인 경계에서 드러나 있지 않은 애매한 부분, 세부에 대해서 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진중권은 그런 점에서 높게 평가합니다. 경계를 많이 건드렸죠. 최근 서해교전이나 여중생 압사사건과 관련한 의견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엉뚱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안전한 글쓰기만을 하는 사람보다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전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은 곤란한 문제엔 언제나 두리뭉실하게 듣기 좋은 말만 합니다. 이를테면 제가 페미니즘을 비판한 일에 대한 의견을 물을 때 반드시 그런 식으로 답변할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얻는 것은 존경과 품위의 증가이지만, 경계를 건드리는 사람이 얻는 것은 오해와 욕설과 고단함이죠. 진보주의자가 존경과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세상은 오래 전에 변했을 겁니다.


지 - '글을 쓰는건 그로 인해 사회가 모기다리만큼이라도 영향받으라고 쓰는 것이다'고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은데요.

김 - 하나마나한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진보적이라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한겨레나 우리 모두의 자리에서 조선일보 욕하는 것은 이젠 너무나 당연해서 새삼스레 진보적이랄 게 없습니다. 진보는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증명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급진적인 주장도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 자체론 대단치 않지만 많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스템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진보적 가치란 계속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몇 년 전에 조선일보 반대를 말하는 것과 오늘 조선일보 반대를 말하는 건 전혀 다른 가치를 갖습니다.


지 - "글은 구원이다라는 말은 개소리다. 구원은 행동에 있다"고 하셨는데, 공격적인 글쓰기를 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하십니까?

김 - 제가 무슨 대단한 진보주의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분도 있는데, 진보운동은 글이나 말로 하는 게 아니라, 땀을 흘려 조직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진보적인 글쓰기도 진보 운동의 일부일 수는 있겠지만, 진보 운동 가운데 가장 낮고 주변적인 운동이겠지요. 진보주의자에게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글쓰기에 사용된다면 저는 그게 대단하든 대단치 않든 제 역할에 진지하게 임할 뿐입니다. 요즘은 이른바 지식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 누가 누구하고 논쟁을 했다느니 누가 이런 걸 썼다느니 하는 것보다는, 현장 쪽에 좀더 실천적으로 결합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니리포터 지승호 기자 triana@freechal.com
웹진 시비걸기 편집장www.freechal.com/sibi












민족과 계급 메모

(독자게시판 이봉석님 질문에 대한 답변을 겸해서 적습니다.)

1
모든 극우 이념과 파시즘의 기초이기도 한 민족주의는 남한에서 진보적인 함의를 가져왔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36년 동안 지배되었던 경험과, 지난 50여년 동안의 분단 상황과 관련한 것이다. 일제에 대한 독립은 당시 진보 세력에게도 가장 중요한 과제였고 수많은 진보주의자들은 보다 실천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이 곧 분단으로 귀결된 후, 적어도 남한에서 민족주의는 분단 체제 자체를 부인하는 불온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남한 지배계급은 민족이니 통일이라는 말을 지배체제 내에서만 독점적으로 사용했다. 다른 말로 하면, 민간 영역에서 자주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민족이나 통일은 지배계급과 충돌하는 매우 진보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남한에서 민족주의가 미국과 관련을 맺게 된 건, 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다. 광주항쟁 무렵까지 남한의 사회운동이란 진보적 변혁운동이 아니라 극단적인 군사파시즘을 반대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절차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남한의 사회운동 세력은 반미를 포함하지 않았고, 미국은 여전히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남았다. 광주항쟁이 참혹하게 진압된 후 비로소 남한의 사회운동세력은 광주에서 미국의 역할을 파악했다. 반미 구호가 없는 세계 유일의 나라이던 남한에서 반미 구호가 터지기 시작했다. 반미는 미국을 반대한다는 의미와 함께, 남한 사회운동세력의 성역이 사라졌다는 의미를 가졌다. 남한 사회운동세력은 급속히 진보적 변혁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런 변혁운동의 흐름은 적어도 90년대 초반 동구 스탈린주의 국가들이 무너질 때까지 활발했다. 오늘 남한에서 반미 의식은 보편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물론 그런 변화는 단지 쇼트트랙 경기 사건이나 여중생 압사사건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그런 일은 지난 50여년 동안 수없이 반복되어 왔고, 철저히 외면되어 왔다) 광주항쟁의 경험에서 시작한 반미의식이 결국 대중영역으로 확산되는 현상이다. 오늘 남한에서 반미의식은 정당한 것이고 진보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계급이라는 체로 걸러질 때만 그렇다. 반미의 대상은 미국인 전체가 아니라 미국의 지배계급,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끝없는 전쟁을 통해 제3세계 민중의 피를 빠는 미제국주의자들이다. 부시와 미국 노동자들은 전혀 하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주영과 남한 노동자들은 전혀 하나가 아니다. 정주영이 사망하자, 민족통일 문제에 집중한다는 일부 진보운동 세력은 그의 통일 업적을 칭송했다. 정주영은 통일 업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통일운동의 업적마저 돈으로 구입한 사람이다. 계급이라는 체로 걸러지지 않을 때, 민족은 짐짓 반동적이다.        

2
알다시피, 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한국의 진보운동 세력은 계급 문제에 집중하는 민중민주(PD) 세력과 민족/통일 문제에 집중하는 민족해방(NL) 세력으로 크게 나뉘어진다. 두 세력은 ‘노선이 다른 동료’로서 존재하지만, 일부에선 ‘적보다 노선이 다른 동료를 더 적대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90년대 초반에 이르러 동구 스탈린주의 국가들이 무너지자, 스탈린주의의 자정 능력을 갖지 못한 민중민주 세력은 급속히 세를 잃었고, 전반적인 우경화 바람은 민족해방 세력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다. 10여년이 지나, 오늘 시점에서 민족과 통일을 말하는 것은 여전히 정당한 것이지만, 무조건적으로 북한정권을 좇는 일부 경향은 그 자체로 반동적이다. 나는 북한 체제가 일제 부역자 처리 문제를 비롯하여 그 출발부터 적어도 남한 체제보다는 정당했다고 생각하고, 이른바 주체 사상 역시 미제국주의와 적대적 긴장을 유지해 온 북한의 특별한 상황과 관련해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 북한에 대한 평가도 신중해야 한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북한에 대해 극히 제한된 정보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북한의 문제를 북한과 다른 체제의 잣대(흔히들 북한의 인권을 말하지만, 거주 이동의 자유나 사적 소유의 자유 따위 자유권들은 실은 매우 자본주의적인 개념이다)로 평가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의 진보운동 세력이 북한 정권(은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 정치인들이다.)의 입장을 무원칙하게 좇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도 존중하기 어렵다. 그런 종북적 태도의 기본적인 모순은, 신념과 원칙을 기반으로 행동해야 하는 진보활동가가, 때로는 당연히 신념과 원칙을 벗어나서 행동해야 하는 현실 정치인들을 무작정 따르는 데 있다. 그런 종북적인 경향은 민족 해방 세력에 대한 무분별한 폄하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계급에 집중하는 사람들과 민족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진지한 고민없이 서로 반목하는 것은 진보주의자의 태도가 아니다. 민족이나 통일 얘기를 하면 저거 주사파군 한다거나, 계급 이야기를 하면 저거 피디군 하는 식은 전혀 진보운동과 관계가 없는 인간적 경박함이다. 제 아무리 잘못된 편향이 실재하고 또 서로 비판하더라도, 남한의 진보 운동이 계급과 민족을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우리의 선배/어른들에게서 피디니 엔엘이니 하는 구분을 무색케 하는 차원을 가진 분들을 볼 수 있다. 언뜻 떠오르는 대로 말하자면, 백기완 선생이나 홍근수 목사님, 또 서준식, 채만수 선생 같은 분들이다. 그들은 피디의 입장에서나 엔엘의 입장에서나 기꺼이 존경할 만한 분들이고, 우리에게 성숙한 진보주의자의 차원을 몸소 보여주는 분들이다. 경박한 반목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그런 실재하는 인간들에게서 배우는 일로 풀 수 있다. 경박함은 사상이나 이념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3
확산되는 반미의식이 두리뭉실한 감정 표출이 아니라 정확한 대상으로 집중되어 진보적인 함의를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진보주의자의 당연한 임무일 것이다. 우리는 두리뭉실한 반미감정이 자칫 엉뚱하게 사용될 수도 있음을 ‘반일감정’을 돌이켜 봄으로써 알 수 있다. 알다시피, 반일감정은 일제에 의한 36년 동안의 침략 경험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경험은 일본 민족과 한국 민족 사이의 일이 아니라, 일본 지배세력(제국주의세력)과 한국 민중 사이의 일이었다. 한국의 지배새력은 대개 그 시기에도 안락했으며, 반대로 일본 민중들은 한국 민중들과 다를 바 없이 수탈당하고 전쟁에 끌려나가 죽어야 했다. 분단 이후 남한 체제는 일제 부역자들을 골간으로 출발했고, 박정의 이후 군사독재 정권들은 일본 극우세력(제국주의세력)의 구체적인 지도를 받아왔다. 그러나 남한의 지배세력은 줄곧 일체의 일본 것을 금하는 반일정책을 고수해왔다. 정기적으로 제공되는 독도 망언이나 공중파 뉴스에서 주기적으로 기획되는 ‘젊은이들의 왜색’ 기사 따위들만으로 남한 지배세력은 남한 민중의 두리뭉실한 반일감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배세력은 매우 효율적으로 민중들의 반일감정을 관리할 수 있었다. 독도에 그렇게도 흥분하는 사람들은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해선 어땠는가.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울부짓는, 이젠 늙고 병들어 몇 남지 않은 그들에겐 말이다. 민족주의는 어떤 계급에게 사용되는가가 문제다. 계급이라는 체로 걸러지지 않을 때, 민족은 짐짓 반동적이다.










편지 3 - 하나되면 죽는 사람들


해미님. 월드컵이 끝나고 히딩크씨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여진은 남습니다. 고단한 사람들이 모처럼 맞은 축제의 달콤한 기억을 쉽게 잊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겁니다. “히딩크,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에서 “4700만 우리 모두 가슴 벅차게 행복했습니다.”로 이어지는 삼성카드의 심령부흥회풍 광고(이 기괴한 광고에 왜 아무도 항의하지 않는 걸까요)나, 월드컵에 돈을 댄 KT와 거저먹은 SK의 싸움박질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장사꾼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팔아먹는 것이고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애국심’은 ‘대한민국의 구매력’일 뿐입니다.

인텔리들의 호들갑 역시 여전합니다. 몇 달 전 ‘노풍’을 87년 민주화운동과 연결시켜 ‘혁명’이라 부르던 그들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혁명을 갖다 붙입니다. 소시 적에 잠시 혁명에 몰두했으되 이젠 누구보다 혁명을 회의하는 그들이 혁명이라는 말을 그리 즐겨 쓰는 건 희한해 보이지만, 2년 전 낙천낙선운동에 슬그머니 혁명을 갖다 붙인(과연 그 혁명은 무엇을 바꾸었던가요) 다음부터 그들은 무엇에든 기회가 되는 대로 혁명을 갖다 붙입니다. 10여 년 전 별다른 자기 설명 없이 제 혁명에 침을 뱉은 그들로선 혁명을 일반적이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인텔리들이 그렇게 혁명을 갖다 붙이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그걸 진짜 혁명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속이 아니라 세상의 외곽, 술집이나 세미나실에서 세상에 대한 관찰기를 교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창백한 눈에 650만이 넘는 붉은 인파가 거리를 메우고 함성을 지르는 광경은 그저 ‘혁명’인 것입니다. 해미님. 우습지 않습니까. 꿈도 희망도 없는 고단한 일상에 찌들 대로 찌든 사람들이 제 나라 축구팀이 세계 16강 진출이라는 목표치를 두 번이나 갱신했다면 너도나도 광장으로 뛰쳐나오는 일이야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거기에 무슨 의식성이 있고 혁명이 있다는 겁니까.

인텔리들은 늘 뒤늦게 흥분하고 먼저 절망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대중의 저력’에 뒤늦게 흥분하고 ‘대중의 반동’에 먼저 절망하는 발작과 패닉의 끝없는 반복 상태를 보입니다. 대중이 그저 묵묵히 흐르는 강물이라면 그들은 그 강물의 굽이굽이 변화무쌍한 속도에 시시각각 깡총거리는 송사리들입니다. 노풍은 조금만 진중한 사람이라면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민주당 경선이야 민주당 안에서 하는 건데 한나라당도 아니고 민주당이라면 한국 평균은 되는 사람들일 터, 그런 사람들이 몇 년 전 앞머리 이상하게 치켜세우고 박정희 흉내나 내던 사람을 대통령후보로 뽑는단 말입니까.

월드컵과 관련한 인텔리들의 호들갑을 그저 볼썽사나운 꼴로만 넘길 수 없는 건, 그들이 연신 ‘국민 통합’이니 ‘국운 융성’이니 ‘민족적 환희’니 하는 국가주의적 선동을 해 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매우 급진적이라 알려진 한 문화과학자는 “국민적 열정을 국민적 캠페인으로”라는 언사를 스스럼없이 사용합니다. 해미님. 진보주의의 출발은 세상을 계급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물론 국가가 있고 국경이 있는 한 국가나 민족의 구분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한국 국적을 가졌거나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해서 다 내 나라 내 동포는 아닙니다. 일생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오신 해미님 아버님은 과연 이건희씨와 동포입니까, 켄 로치의 <빵과 장미>에 나오는 3등 미국인들과 동포입니까.

세상엔 응당 하나 되어야 할 것과 갈라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과 노동자가 적대적 긴장을 이루는 사회이고 우리는 그 분명한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건 도덕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실재하는 현실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직하게 땀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끼리의 ‘연대’이지 적대하는 계급끼리의 ‘통합’이 아닙니다. 한국의 자본과 노동자가 ‘애국’의 이름으로 하나될 때 노동자에게 돌아올 건 죽음뿐입니다. 해미님. 오늘은 ‘계급’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해 드리려 했는데 그렇지 못했군요. 건강하십시오.

2002년 7월 11일. 김규항 드림.











편지 2 - 보수는 공기처럼

해미님. 한국 축구팀이 월드컵 8강에 오른 아침 서울은 열기로 가득합니다. 이런저런 방송과 신문들(심지어 BBC와 NEWSWEEK를 포함한)이 요청한 월드컵에 대한 '독설'도 모두 사절하고, 그저 '축구나 보며' 지내자 했습니다. 고단한 사람들이 모처럼 맞은 축제를 모욕하고 싶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축제를 분별할 책임은 없지만 축제를 즐길 권리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양식있는' 지식인들의 요사스런 행태는 연신 내 속을 긁는군요. 그들은 붉은 악마의 구호에서 반공 콤플렉스에 대한 저항을 시청앞 응원전에서 6월항쟁의 함성을, 급기야 보라 역사가 바뀌었노라, 국민 통합을 외칩니다. 하긴, 무솔리니도 소시적엔 사회주의자였지요.

지난번 편지에서 나는 진보는 '부러 선택한 상태'지만 보수는 '진보를 선택하지 않은 모든 상태'라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라는 표현을 하곤 하지만, 오늘 세상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보수입니다. 보수가 '진보를 선택하지 않은 모든 상태'인 가장 큰 이유는 보수적 선전이란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는 게 다 그런거지."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능과 맞아."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지." "사회주의는 이미 끝난 얘기야." 우리가 별 생각없이 당연한 삶의 이치인 양 반복하는 그 말들은 실은 가장 강력하고 교활한 보수적 선전들입니다.

그 선전들에 최종적인 신뢰감을 심어주는 건 언제나 '양식있는' 지식인들입니다. '진보적 지식인'이라 불리기도 하는 그들은 한 때 진보주의자였고 이젠 진보를 회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오늘 그들의 나른한 삶을 유지하면서도 양식있는 사람으로 행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진보적 이력을 들먹입니다. 그들은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읽던 순간의 격정을 들먹이고 체 게바라나 마르코스나 캔 로치의 낭만을 들먹입니다. 그들이 '지난, 저기'의 진보를 들먹이는 이유는 단지 '오늘, 여기'의 진보에 혐오감을 부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은 '보수의 개'로 살아가는 제 '오늘 여기'에 품위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진보주의자는 오늘 세상의 주인에 꿇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해서 진보주의자는 세상의 외부에 처하게 마련이고(어리석은 사람들은 진보의 이런 상태를 관념성과 결벽증의 소산이라 말하지요) 진보적 선전은 사람들에게 낯설고 거칠며 위험해 보이게 마련입니다. 오늘 세상의 주인이 통제하는 모든 제도 미디어들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그 미디어들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입니다. 보수적 선전은 공기처럼 자연스럽지만 진보적 선전은 짐짓 혐오스럽습니다. 이를테면 <한겨레>가 <조선일보>와 함께 국가주의적 광기로 폭발한 오늘자 <진보넷 참세상>의 머릿기사는 '단식 9일째, 시그 노동자들의 피울음을 먹고사는 영풍' 입니다.

우리에게 쉽게 포착되는 '명성을 동반한' 진보란 대개 세상에 수용된 진보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론 진보지만 다른 한편으론 '보수의 악세사리'입니다. 나는 보수의 악세서리인 주제에 엉뚱하게도 진보적 주장을 일삼는 경우입니다. 보기보다 실속있는 편은 아닙니다. "오로지 까대고 씹어대서 댄스가수적 인기를 누리는" 나는 글쓰기로 한달에 13만3천원을 법니다. 나는 세상의 내부에선 "현실과 경험에서 유리된 도그마에 빠진 위태로운 사람"이라, 세상의 외부에선 "우파와 어울리는 상업주의적 글쟁이"이라 모욕당합니다. 나에겐 세상 내부의 안락도 세상 외부의 자부도 없습니다. 처량하기 짝이 없지만, 나는 그런 내 처량한 처지 덕에 안도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더한 모욕 속에서 나보다 더 처량하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얘긴 다음에 해야겠군요. (월드컵에 대해 해미님 동갑내기가 쓴 바른 글이 있습니다. <한겨레> 6월 13일자에 실린 홍익대 1학년 문상욱씨의 '월드컵과 진보'라는 글인데, 그 글 앞에서 '양식있는' 지식인들은 혀를 깨물거나 붓을 꺽을 만합니다. 웹에서라도 찾아 꼭 읽어보시지요.) 2002년 6월 19일. 김규항 드림.










편지 1 - 교양

해미님. 서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해미가 있습니다. 역시 서해안에 있는 비인과 함께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땅이름 가운데 하나지요. 나는 그 이정표를 볼 때마다 마음이 환해지곤 합니다. 특히, 그 이정표를 기다리는 것을 잊고 있다 우연처럼 그 이정표를 만나는 순간은 정말 근사합니다. 사람이든 땅이든 아름다운 이름은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그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편지 잘 읽었습니다. 해미님의 긴 편지는 질문으로 가득합니다. 나는 오늘부터 그 질문들에 느릿느릿 답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편지 끝에 적힌 "진보주의자는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이 내 안에 아득한 공명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진-보-주-의-자-는-행-복-합-니-까… 어린 시절, 깊은 우물 안으로 머리통을 잔뜩 구부려 넣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처럼 말입니다. 조금 멋을 부리자면, 이 편지는 나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강연에서 만난 청중들에게 늘 묻습니다. 진보가 뭡니까? 그러나 이 간단한 질문에 답이 나오는 일은 드뭅니다. 몰라서라기 보다는, 뭐든 어렵고 그럴싸하게 말해야 한다는 못된 버릇 때문이겠지요. 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보수란 오늘 세상을 지키려는 생각이고) 진보란 오늘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입니다. 그 둘의 끊임없는 긴장 상태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흔히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른바 서구식 문명을 등진 소수 부족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아예 이기심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있습니다. 이기심은 본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길러진 사회적 습성일 뿐입니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라는 주장은 대개 사람이 본능적으로 보수적이라는 주장을 위해 존재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기에 함께 연대하여 세상을 바꾸는 건 본디 불가능다는 것이지요.

해미님은 그게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는 걸 알겁니다.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헌신적인 연대로 세상을 바꾼 예는 얼마든 있습니다. 이를테면, 1980년 5월의 해방 광주입니다. 계엄군을 몰아낸 그 며칠 동안 광주는 가장 조화로운 사회였습니다. 도시의 모든 기능이 자발적으로 작동했고, 그렇게 많은 무기들이 나돌았지만 단 한건의 절도조차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해방 광주의 주인공은 못배우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은 오히려 본능적일만치 진보적입니다. 해미님. 여기 대여섯으로 이루어진 작은 사회가 있습니다. 친구들끼리든 취미 동아리든 말입니다. 언젠가부터 그 중 하나가 그 사회의 열매를 가로챕니다. 물론 그는 그 일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겠지요. 그러나 누군가가 그 일을 알아채게 되고 그 일은 곧 사회에 알려집니다. 그 다음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사회는 가장 '진보적인'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겁니다. 누구라도, 과장해서 말하면 <조선일보>의 김대중 같은 이조차도 그 상황에선 짐짓 진보적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많은 강제와 함께 속해 있는 국가나 세계 같은 사회는, 그런 대여섯으로 이루어진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치 크고 복잡한 구조를 가집니다. 물론 사회 성원들의 열매를 가로채는 사람들의 제 일을 숨기려는 노력 역시 비교할 수 없을만치 크고 복잡한 구조를 가집니다. 이쯤되면, 사람의 진보적 본능은 맥을 못춥니다. 우리 주변에서 더할 나위없이 선하고 정의로운 품성을 가진 사람이, 국가나 세계 같은 거대사회의 문제에선 믿을 수 없을 만치 보수적인 경우를 보는 건 바로 그래서입니다.

그런 슬픈 부조화를 물리치는 힘, 제가 속한 사회를 분별하는 능력이 바로 '교양'입니다. 제 아무리 선하고 정의로운 품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교양이 부족하다면 단지 '보수의 개'로 살게 됩니다. 진보는 '부러 선택한 상태'지만 보수는 '진보를 선택하지 않은 모든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지에선 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빠트릴 뻔 했군요. 대학생이 된 것 축하합니다. 연애와 여행을 많이 하기 바랍니다. 2002년 5월 30일. 김규항 드림.










조선일보 단상

3년쯤 되었나. 내가 이른바 ‘강준만 5중대’의 일원으로 조선일보 반대 운동을 처음 거들 무렵, 한국을 통틀어 공개적으로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지식인은 대여섯뿐이었다. 당연히 얼마간의 불편이 따랐다.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뭐, 보수상업신문이 다 마찬가지지...” 어쨌거나 그 운동은 인터넷을 포함 이런저런 방식을 통해 발전해갔고 좀더 시간이 지나자 ‘대통령도 대통령후보도 하는 운동’이 되었다. 이제 그 운동은 적어도 인텔리/여론 영역에선 대세가 되었다. “조선일보는 문제가 있지…” 쯤은 해야 무리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 일련의 변화에 좌파의 기여는 적은 편이다. 물론 언론’개혁’운동은 그리 좌파적인 운동은 아니다. 좌파에겐 좀더 근본적이고 계급적인 운동들이 쌓여 있다. 그러나 우파적 운동이니 좌파적 운동이니를 떠나, 조선일보가 노동자계급에게 가장 적대적이기에 조선일보는 좌파의 적이며 그 문제에 분명한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좌파들은 강준만 등 개혁적 우파들의 조선일보 반대운동이 한참 진행되도록 마치 그 문제는 좌파와는 무관한 듯한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러나 그리고 그 운동이 중반기를 지나 그 운동이 대세를 이룰 즈음에야 그들은 그 운동에 못 이기는 듯 편승했다.

적어도 조선일보 반대운동과 관련하여 좌파는 처음에 둔감했고 나중에 비굴했다. 그런 행태는 ‘좌파는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들’이라는 편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런 둔감함과 비굴함이 좌파 전체의 둔감함과 비굴함을 말하는 건 아니라 해도. 좌파라면 그런 분명한 둔감함과 비굴함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반성의 성과를 조선일보 반대운동에 대한 좌파적 접근으로 드러내야 한다.

앞서 말했듯, 오늘 조선일보는 적어도 인텔리/여론 영역에서 궁지에 몰렸다. 그런 변화는 적어도 ‘시민의 삶’을 분명히 개선했다. 그런 더러운 신문이 활개치는 꼴, 그 더러운 신문의 이야기들이 아무 장애 없이 먹혀 드는 꼴은 덜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시민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의 삶’ 역시 분명히 개선했는가. 좌파가 확인할 일은 조선일보가 궁지에 몰렸다는 오늘, 조선일보로 표현되는 계급의 정치경제적 토대 역시 궁지에 몰렸는가 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조선일보가 좌파의 분명한 적이라는 점에서 좌파에게 조선일보 반대운동은 이제 시작인 셈이다. 좌파는 조선일보 문제에 대해 강준만 같은 우파들을 무색케 하는 섬세하고 과학적인 논리를 만들어야 한다. 좌파의 조선일보 반대운동은 강준만의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운동이어야 한다. 그것은 도덕이 아니라 토대를 건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첫번째 이야기] 닭짓

“원용수 후보는 가장 닭짓을 했지요. 도대체 정책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사회주의자' 타령 뿐이더군요. '저는 사회주의자입니다.' 그래, 근데 누가 물어 봤어? (…) 무슨 자기가 레닌이나 된 것처럼 뜬구름 잡는 얘기나 하고 있더군요. 스스로 우스꽝스러워지는 것을 그래도 이명박이 체면을 살려줬습니다.”

웹에 오른, 서울시장 후보 텔레비전 토론에 대한 진중권의 논평을 읽으며 착잡했다. 논평의 내용(은 여럿일 수 있다. 나 역시 원용수 후보의 토론이 만족스럽지 않다. 다만, 당선 가능성을 염두에 둔 후보와 그렇지 않은 후보의 토론 목적은 처음부터 다르다는 점은 고려할 필요가 있다.)이 아니라 논평에 다시 한번 드러난 혐오, 좌파에 대한 ‘상식적인 좌파’ 진중권의 끈질긴 혐오 때문이다.

진중권은 늘 자신보다 왼쪽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일관된 혐오를 표시하곤 한다. 그 혐오는 적어도 정서적으로는 당연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정치적 입장은 제 나름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충분히 고려한 가장 올바르고 합리적인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정치적 입장은 자신과 다른 정치적 입장에 일정한 혐오를 갖게 된다. 오른편은 지나친 현실주의라 혐오스럽고, 왼편은 지나친 이상주의라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 당연한 혐오를 사회적으로 주장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국처럼 이념적 스펙트럼이 협소한, 그 스펙트럼을 펼치는 일이 시급한 숙제인 사회에선 더욱 더 그렇다.

제 설명에 의하면, 진중권은 서유럽의 사회당이나 녹색당에 해당하는 사민주의자다. 과연 진중권이 그런 사민주의자인지에 대한 논란은 접고, 분명한 것은 진중권이 매우 현실주의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중권의 그런 선택은 같은 세대인 나도 공감할 만하다. 우리 세대는 80년대에 지나친 이상주의 편향이었다. 90년대 이후 우리는 그 이상주의가 남긴 상처를 안아야 했고 얼마간 현실주의로 기우는 건 과거의 편향에 대한 반성의 측면이 있다.   안티조선 운동을 비롯 진중권의 그런 현실주의적 행보는 근래 한국 사회에 분명히 기여했다.

그러나 진중권이 자신의 분명한 사회적 기여를 근거로 자신보다 좀더 원칙주의적인 좌파를 쓸모없는 ‘닭짓’이라 규정하는 건, 과거의 편향을 반성하느라 또다른 편향에 빠진 상태이다. 유럽형 사민주의를 모델로 드는 진중권은 그 사민주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사민주의는 오로지 (가장 합리적인 좌파의 자부를 가진) 사민주의자들에 의해, 혹은 사민주의자의 요구에 대한 우파의 배려나 양보에 의해 이루어졌는가? 그 우파들은 모조리 닭이었는가?

진중권이 모델로 드는 서유럽 나라들의 정당 분포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얘기지만, 사민주의는 언제나 (사민주의를 포함한) 사민주의보다 왼편의 힘의 합계가 우파로부터 ‘쟁취하여 유지하는 정치적 상태’이다. 사민주의를 구현하는 힘은 사민주의 자체라기 보다는 사민주의보다 왼편으로 당기는 힘인 것이다. 말하자면, 진중권이 바라는 사민주의의 실현은 진중권이 혐오해마지 않는 ‘닭짓’의 성장에 거의 전적으로 달려있다. 본의는 아니겠지만, 결국 진중권은 자신이 바라는 사민주의가 한국에서 이루어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는 셈이다.

좌파가 굳이 좌파인 것은 세상의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좇기 때문이다. 사민주의를 개량주의적인 좌파라고 할지언정 우파라고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세상의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좌파에겐,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원칙과 단기적이고 실용적인 실천을 조화하는 현명함이 가장 중요하다. 세상의 변화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지금 이순간에도 그 변화는 조금씩 진행되기 때문이다.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원칙에만 매달릴 때(80년대에 그러했듯) 좌파는 자족적인 몽상가가 되고, 단기적이고 실용적인 실천에만 매달릴 때(진중권이 그러하듯) 좌파는 굳이 좌파일 이유가 없게 된다.

전근대적 잔재들이 천민자본주의의 수렁에 뒤섞인 오늘 한국 사회에서 넓은 의미의 사회진보에 기여하는 정치적 입장은 대략 세가지다. 개혁적인 우파, 현실주의적 좌파, 원칙주의적 좌파가 그것이다. 앞서 말했듯, 각각의 입장들은 나름대론 가장 올바르거나 합리적인 입장이라 믿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입장도 다른 두 입장이 사회진보에 일정한 유익을 갖는다는 사실, 자신의 전진을 보완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한국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아직 협소하기 짝이 없고 특히 그 왼쪽 방향은 갓 봉오리에 불과하다. 그 봉오리의 미래가 좌파의 미래이자 곧 한국 사회의 미래이다. 그걸 거스르는 일이야말로 ‘닭짓’이다. (끝)





@지난 칼럼 모음


얼치기 도사들

자신의 오류를 역사의 오류로 자신의 실패를 역사의 실패로 돌리는 데 능한, 유약하고 비굴한
인탤리들은 역사적 격변 앞에서 종종 파행한다. 한국에서 80년대의 열망과  90년대의 좌절이라는
역사적 격변 역시 인탤리들의 이런저런 파행을 낳았다.  인탤리들의 그런 파행은 단지 제 삶에서
현실의 무게를 덜어보려는 얕은 수작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고유한 기술(제 생각을 글이나 말로
남다르게 표현해내는)과 결합하여 자못 그럴싸해진다. 그런 파행의 가장 멋진 예는 바로 '도사'다.
김지하에서 박노해까지, 역사적 격변 앞에서 인탤리들은 '모든 것을 깨우친 도사'가 되어 현실을
'초월'한다.
“똥을 누면서 나는 내가/아래 위로 구멍 뚫린/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아하! 내가
통이다/내가 걸어다니는 통이다” 10월 27일자 <한겨레>를 보며 나는 서글프게도 내 청년시절의
소중한 선생이던 이현주 목사가 도사의 대열에 합류했음을 알았다. 도사가 된 그는
말한다.“부시와 라덴은 같은 편이다. 그들은 싸우는 척하지만 서로를 돕고 있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세력의 대표들이 바로 그들이다.” 얼핏 공평무사하기 짝이 없는 그 말은 (경솔하게도
라덴이 미국 사건의 범인이라는 미국의 주장을 전제로 하는 데다) 그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관계들을 마치 진공상태처럼 차갑게 뭉게버린다.
미국사건은 어느 호사스런 서양학자의 말처럼 '문명의 충돌'이 아니고, 부시의 말처럼 '자유에
대한 침범'은 더더욱 아니며,  단지 '오랜 일방적 가해자가 당한 뒤늦은 최초의 보복'이다. 그런
분명한 사실 앞에서, 가해자의 무소불위한 권세 덕에 단 한번도 제대로 인류 앞에 제 억울함을
알릴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한 앞에서 '폭력은 모두 나쁘다'는 지당한 말씀(폭력을 사용하는
누구도 폭력이 좋은 거라 말하진 않는다)이나 읍조리는 일은, 동네 양아치의 싸움 앞에서 '누가
먼저 때렸는가'를 따지는 파출소 순경보다 한가롭다.
그는 다시 말한다. “모세는 앙갚음을 하라고 했지만,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우리는
기독교를 대표할 만한 이 유명한 경구가 역사 속에서 피억압자의 정당한 분노를 무마하는 데, 늘상
동원되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평화주의자였으나 뼈없이 흐물거리는
무작정한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어떤 극악한 상대도 끝내 용서했지만, 그 극악함에
분노하는 데 폭력적일 만치 분명했다. 이를테면 예수는 타락한 성직자들과 뒤로 결탁하한
장사치들을 성전에서 한번에 쫓아낸다. 갈릴리 출신의 별볼일 없는 청년은 단지 자애로운 얼굴로
"여러분의 행동은 부적절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일을 성공할 수 있었을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태 23:33)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은 '끝내 용서하되, 분명히 분노하는' 방식으로 점철된다. 예수가 결국 정치적
혁명가의 혐의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은 바로 예수의 그런 독특한 지점을 드러낸다.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었지만 그의 행적은 늘 정치적 혁명가로 오해받곤 했다. 예수는 끝내
용서하되 분명히 분노했으며, 정치적 해방을 구원으로 삼지 않았으되 매우 정치적이었다. 그것이
예수가 단지 분노하지 않거나 단지 정치적이지 않을 뿐인 얼치기 도사들과 구분되는 지점이며,
끝내 용서할 줄 모르거나 정치적인 해방을 구원으로 삼는 하고많은 혁명가들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역사적 격변 앞에서 얼치기 도사들은 '깨우침'으로써 비루하고 덧없는 현실을 '초월'한다. 그러나
예수나 부처와 같은 가장 위대한 성인들은 도리어 '깨우침' 이후에 그 비루하고 덧없는 현실에
자신을 녹여 넣곤 했다. 그 비루하고 덧없는 현실 속에, 그 비루하고 덧없는 현실에 얽메어
살아가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서러운 가슴 속에 우주와 생명의 이치가 있다.(2001/11/5)









존경

얼마 전 <한겨레>에 쓴 ‘얼치기 도사들’은 약간의 소란을 낳았다. 이미 해병전우회나 의사들과
더 큰 소란을 겪기도 했거니와 졸렬하나마 사회적 의견을 제출함으로써 일용할 양식을 얻는
사람으로선 그런 일을 피할 수 없다 생각하는 나로선 대수롭지 않아 할 만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접을 수 없는 불편함이 내내 남았다. 그 글은 내 청년 시절의 소중한 선생 가운데 한
사람을 겨냥하는 패륜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 이현주 목사는 그저 예수를 팔아먹는 크고 작은 보도방들인 한국 교회에서 예수의 삶과 정신을
되새기는 일에 분투했다. 그가 짓거나 옮긴 예수와 복음서에 관한 몇몇 노작들은 서남동 안병무
같은 민중신학자들과는 다른 맥락에서 내게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다. 민중신학자들이 내게 예수를
논증해주었다면 이현주는 내게 두런두런 예수를 들려주었다. 최악의 반동과 최고의 열정이 맞서던
시절, 그와 권정생(<강아지똥>을 지은) 들은 조용한 소금이었다.
10여년이 흘러, 전해 듣는 그의 근황은 나를 적이 답답하게 했다. 우주적 이치를 깨친 듯한 얼굴을
한 그는 건전함을 잃고 있었다. 건전함을 잃는다는 건 대개 지저분한 현실로의 투신을 말하지만
드물게는 현실을 멀쩡히 초월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깨우침이 현실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욕망의 충돌에 머무는 일을 비판한다면 올바랐지만 급기야 그 깨우침이 “부시와 라덴은 같은
편”이라는 오만한 중립주의에 이르자 나는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를 가장 신중하게 그러나 가장
악랄하게 비판하는 방법으로 그에 대한 내 존경을 표시하기로 했다.
“폭력은 모두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심지어 폭력을 사용하는 어떤 놈도
폭력이 좋은 거라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모든 폭력은 모두 다르며 폭력을 반대하는 일은 그
다름을 세심하게 따지는 일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폭력을 반대하는 이유가 폭력이 우리의 알량한
미감을 거슬러서가 아니라 폭력에 처한 구체적인 인간들과의 연대감 때문이라면 말이다. 수십년
동안 단지 미국에 꿇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들이 죄없이 살해당하고
능욕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사람들의 분노 앞에서 “폭력은 모두 나쁜 것”이라 읊조리는 건
폭력적으로 한가롭다. 그런 말은 단지 그런 말을 하는 이가 그 처참한 현실과 철저히 무관함만을
지시한다.
역사 속에서, 특히 한국의 80, 90년대와 같은 격변의 역사 속에서 인텔리들은 제 좌절감을 세상에
치환하여 모면하려 한다. 이를테면, 정치적 변혁에 몰두하던 인텔리는 그 시도가 실패한 뒤 좌절감
속에 제가 생명이나 인간 같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들’을 빠트렸음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깨달음이 아니라 그런 깨달음 뒤에도 여전한 오만함이다. 빠트렸던 문제들은 원래의 문제를
보완하지 않고 전적으로 대체된다. 이제 그에게 정치적 변혁은 그저 낡고 부질없는 관념이다. 전에
그에게 생명과 인간이 낡고 부질없는 관념이었듯 말이다.
정치적 변혁을 배제한 생명과 인간의 탐구란 관념적 장난에 불과하며 생명이나 인간의 문제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본디 출발점이라는 총체적 사실은 그들에게 애써 부인된다. 그들은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제 삶이 몹시 고단해질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제 그들에게 깨달음이란 비루한
현실을 초월하고 오늘의 안식을 설명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깨닫고 그
깨달음을 더욱 열심히 광고한다. 혁명가의 이력을 팔아 문화자본가로 행세하려는 싸구려
코미디언에서 현실적 절망감을 우주적 깨우침으로 초월하려는 얼치기 도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오늘도 열심히 세상을 공전한다. 과연, 내 존경은 회복될 것인가.(끝)









지성

밀레니엄의 의미를 적어 달라는 몇몇 원고 청탁에 밀레니엄이란 밀레니엄 밀레니엄 하는 말로 한몫
잡으려는 장사꾼들이나 밀레니엄 밀레니엄 하는 말로 현실의 문제를 덮으려는 정치꾼들에게나
필요할 거라는 독설을 채워 보냈다. 21세기가 된다고 파시스트의 뇌가 갑자기 민주주의적으로
바뀌는 게 아니고 21세기가 된다고 결식아동에게 갑자기 밥이 생기는 게 아니며 21세기가 된다고
갑자기 예술에 대한 검열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면 우리가 밀레니엄이니 21세기니 하는 것에
별다른 의미를 둘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나 나 역시 21세기의 도입부는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지난 세기말 내 몸에 침입한 독감균은 여전히 내 몸을 지배하고 있다.
기억의 범주 안에서 몸이 아파 병원에 가본 일이 한번도 없는 나로선 지난 해 독감이 두 번씩이나
내 몸을 점령했다는 사실이 영 개운치 않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식은땀을 흘리며 나는 이제는
사라진 어린 시절의 질병 공포를 떠올린다. 그 시절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가 필시 무슨 큰 병에
걸려있다는, 나는 이제 곧 죽고 말 거라는 공포에 시달리곤 했다. 그런 공포가 처음 생긴 건
병약했던 어머니 덕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까지 어머니는 늘 위독했다. 다른 조무래기들은
들로 산으로 몰려다니며 그저 무럭무럭 자라기만 하면 되던 시절을 나는 위독한 어머니 옆에서
꼬박 보내야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늘 나를 바라보며 항이 불쌍해서 어쩌나 니 엄마 얼마
못산다, 하곤 했다. 나는 서서히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막연한 공포가 더욱 구체화된 건 4학년 때 옆자리에 앉았던 녀석이 죽고나서부터다. 한동안 자리를
비우던 녀석은 결국 죽었다는 소식으로 돌아왔으며 담임선생은 빈 책상 위에 국화 한 송이를
얹어놓고 디프테리아라는 병을 설명해주었다. 가장 뚜렷한 증세는 목구멍에 하얀 막이 생긴다는
얘기였고 그날부터 나는 틈만 나면 거울 앞에서 입을 벌려 내 목구멍의 이상을 확인하곤 했다.
매일 그 일을 거듭하던 나는 결국 대체 죽음이란 뭔가라는 의문에 빠져들었다.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따위의 의문은 초등학교 4학년
짜리에게 벅찼지만 해가 바뀌도록 계속되었다.
독감에 점령당한 오늘, 나는 어린 시절의 질병 공포를 떠올리며 과연 내가 암 같은 병에
걸리더라도 현재의 정신세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니 파시즘이니
사회주의니 혁명이니 하는 사회 개념들은 죽음에 직면한 내 머리 속에서도 여전히 긴장감을 유지할
것인가. 내 경험으론 그럴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인다. 고교 시절에 노장을 읽기 시작했다는 선배
O는 내가 아는 이들을 통틀어 독보적인 정신 세계를 가진 사람이지만 몇 년 전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을 때 그의 지성은 대폭 생략되거나 매우 단순해졌다. 그가 끼고 살던 노장 철학은 그 기간에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에서 발간되는 인문분야의 교양서를 모조리 챙겨 읽는 습관
때문에 교양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후배 S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항암 치료를 받으러
들어가던 날 녀석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 부질없어 형. 아이하고나 많이 놀아 줘."
지성이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일까. 우리가 말하는 지성이란 안온한 시절에는 사고의 축이다가
절박함 속에선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그런 것인 것 같다. 그 지성 속엔 분명 죽음을 포함한 모든
절박함이 포함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대개의 사람들, 특히 배운 사람들은 아마도 실제 필요한
양보다 터무니없이 많은 지성을 갖고 있거나 꼭 필요하지 않는 종류의 지성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배운 사람들은 언제나 제 머리통 속에 수집해놓은 동서고금의 온갖 지성의 부스러기들을
조금씩 내비치면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구별짓곤 하지만 절박함 속에서 그들은
그들의 지성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우리가 말하는 지성이란 대개 우리의 안온함을 장식하는
액세서리에 불과하며, 현명한 사람이라면 죽음에 직면해서도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지성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2000년_1월











혁명은 안단테로

사회주의는 이론이나 사상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인간 영혼의 가장 고귀한 감정의 항거에서
태어난다. 사회주의는 비참함, 실업, 추위, 배고픔과 같은 견딜 수 없는 광경이 성실한 가슴에
타오르는 연민과 분노와 만나 태어난다. 한쪽엔 호화, 사치가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엔 궁핍이, 또
한쪽엔 견딜 수 없는 노동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엔 거만한 게으름이 있는, 이 터무니없고도
서글픈 대비에서 사회주의는 태어난다."(레옹 블룸) 연민은 자선을 낳고 분노는 싸움을 낳으며
다시 그 둘은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는 자선도 싸움도 별 소용이 없다는 깨우침을 통해 과학적
사회주의가 된다. 말하자면 사회주의란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는 정서가 생략된 과학의 문제이기도 했다. 연민이나 분노가 사라진 이론과
사상은 강퍅하고 차갑다. 사회주의는 그 최대 수혜자여야 할 인민에게 무섭고 살벌한 얼굴로
다가가곤 했다.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론의 역사는 과학이 정서를 지배할 때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준다. 얼마나 많은 예술가와 얼마나 소중한 창의성들이 그 앙상한 과학적
예술론의 손에 목졸려 죽어갔던가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80년대 중후반 한국의 인텔리들은 사회주의에 열광했다. 그것은 부르주아 인권운동이라는 정서적
재료가 민중민주 혁명운동이라는 과학으로 변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인텔리들은 본 회퍼를 덮고
그람시를 읽었으며 이내 레닌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의 인텔리들이 80년대 중후반의 불과
몇 년 동안 마치 펄펄 뛰는 연어처럼 네오맑시즘에서 맑시즘으로 사회주의 이론사를 거슬러 오를
수 있었던 건 대개 군사파시즘이라는 절대적인 억압상황 덕이었다. 군사파시즘이 완화되고 동구가
무너지자 그들의 열정은 구멍난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사라져갔다. 사회주의의 길에 인생을
걸겠노라 맹세하던 수많은 한국의 인텔리들은 일제히 청산을 선택했다.
그런 어이없고 질서정연한 청산은 그들이 변명으로 삼는 상황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앙상한
사회주의 때문이었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80년대 후반 한국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몇몇 영재아들의
경제학 리포트의 지배하에 있었다. 80년대의 한국을 19세기말의 러시아와 같다고 보는 정도의
앙상한 과학이 세상의 변화와 그 변화에 관련한 정서의 무게를 감당할 방법은 없었다. 카드섹션의
카드들처럼 일제히 사회주의자가 되었던 인텔리들은 다시 카드가 뒤집히듯 일제히 사회주의에 침을
뱉었다. 오늘 그들은 자신들이 관여한 사회주의 편향의 문제를 사회주의 자체의 문제로, 자신들이
관여한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를 사회주의 자체의 실패라고 강변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시민운동단체에 얼마간 돈을 내고 <한겨레>를 구독하며 홍세화의 강연에 귀를 기울이고 노래방에서
<아침이슬>을 부르며 한편으론 신문에 팔짱을 끼고 돼먹지 못한 얼굴로 대문짝처럼 서있는
펀드매니저들에게 정신을 판다. 그들은 지울 수 없는 그들의 사회의식의 흔적을 마스테베이션하며
삶을 위무한다.
"터무니없고도 서글픈 대비"의 전적인 생산자이자 그것을 자정할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본주의가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체제라면 인류는 이쯤 해서 지구를 (자연의 자정능력을 가진)
동물들에게 돌려주는 게 낫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인간의 존엄과 지성에 대한 모욕이며, 오늘
인류가 미래를 희망하는 일이란 바로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의 문제다. 지난 10여
년 동안 지리멸렬해온 한국의 인텔리들은 이제 그 동안 온갖 수모를 무릅쓰고 사회주의의 비전을
모색해온 옛 동료들을 다시 찾을 때가 되었다. 동구를 말할 필요는 없다. 대체 우리가 새로운
사회주의를 처음 시작할 자격을 갖지 않아야 할 어떤 이유라도 있는가. 과거의 실패가 짐스럽다면
사회주의가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임을 잊지 말고 느리게 안단테로 가면 된다. 안단테라면,
우리가 혁명을 회피할 이유는 정말 적어진다. 안 그런가.  |1999년_12월









달콤 쌉쌀한 초콜릿

"...그 사람에 대한 제 생각은 간단합니다. 불신감. 이 한 단어로 족할 것 같습니다... 그의
변명은 간단하겠죠. 우리는 너무 조급했다, 내 그릇이 작았다. (항상 개운치 않은 건 그는 항상
'나는 감옥에서 엄청난 도를 깨우치고 더 큰 사람이 되었다'는 분위기를 여기저기서 풍기고
다닌다는 거죠.) 다른 건 모르겠지만 최근의 그의 신작 시를 읽을 때, 저는 예전의 그의 글과
마찬가지로 그 특유의 '가쁜 호흡', 어떤 '집요한 욕망'을 느낍니다... 그가 연예인이 되기로
작정했다면, 좀 덜 짜증나는 연예인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올해 초, 모스크바 유학 중인 옛 사노맹 조직원이 내 글을 읽고 보내 온 편지다. 나는 글에서
박노해(출소 이후의)를 두 번 언급했고 그 글들은 박노해에 대한 분명한 경멸을 담고 있었다.
준법서약서를 쓰고 나오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준법서약서를 거부하고 남기로 한 동료들을
"유연하지 못하다" 하고, 진보의 기본을 저버린 자신의 '새로운 진보론'을 강변하기 위해 여전히
진보의 기본만은 놓지 않으려는 옛 동료들을 "낡았다" 하는 인간에 대한 경멸 말이다. 그러나 정작
그 글들이 책이 되어 나오자 나는 도리 없는 불편을 안았다. 어쨌거나 사회적 이유로 오랜 고생을
한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편지는 그런 내 불편을 얼마간 덜어주었다.
생태니 공동체니 일상성이니 서태지니 여기저기서 짜깁기한 박노해의 '새로운 진보론'은 과거의
박노해(혹은 과거의 진보)가 갖는 정치적 강퍅함보다 달콤해 보이고 어떤 사람들에겐 호감을 주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진보론은 조금만 살펴보면 이미 진보의 테두리를 멀찌감치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새로운 진보론엔 정치성이 송두리째 빠져 있다. 이 영리한
전직 혁명가는 '과거의 정치 편향을 철저히 반성'한다는 핑계로 슬그머니 정치성을
빼버린다.(과거의 문제는 정치편향이었는가, 정치성 자체였는가.) 대체 정치성이 빠진, 현실에
대해 정치적 긴장을 일으키지 않는 진보가 이룰 수 있는 미래는 어떤 것인가.
나는 박노해가 다시 고난에 찬 혁명가가 되라는 게 아니다. 우리 중의 누가 그에게 그런 걸 요구할
수 있겠는가. 박노해는 할만큼 했다. 우리는 그의 과거만으로도 그에게 존경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이미 그가 그러고 있듯) 그가 안락하길 바란다. 그러나 박노해가 자신이
선택한 안락이 마치 새로운 진보의 방식인 양, 진보의 미래 비전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댐으로써,
여전히 그에게 호의를 갖는 순진한 사람들을 미혹하고 여전히 진지하게 진보의 갈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는 일은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이다.
거짓 선지자가 된 전직 혁명가는 피할 수 없는 자기 혼돈에 빠지고 그 혼돈은 더욱 깊어만 간다.
출소 직후 넘쳐나는 핸드폰을 개탄하던 그는 이제 자신의 신간 표지를 'TTL' 풍으로 만들어 달라
요구하고(이 경박한 미감), 출소 직후 하루 다섯 시간 노동하며 사는 농촌공동체를 만들겠다
약속하던 그는 이제 '세상을 배우기 위해' 주식투자를 해보겠다 말한다(이 가련한 현실감). 박노해
말마따나 세상은 변했고 진보도 변하건만, 변하지 않은 그 '가쁜 호흡'은 여전히 자신을 시대를
앞서가는 혁명가라 불리고 싶게 하고, 변하지 않은 그 '집요한 욕망'은 여전히 자신을 최고의
상품으로 만들고 싶게 한다.
추신 : <한겨레>에 실린 박노해의 신간('오늘은 다르게'라는 경쾌한 제목이 붙은) 광고엔 오늘 이
나라를 대표하는 부르주아 지성들의 주례사가 도열했다. 조혜정, 박원순, 유홍준... 박노해와 그
지성들의 계급 본능(교수나 변호사의 기득권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은 예술처럼 교감한다. 그
지성들에게 박노해는 달콤함(분명한 현재인)에 쌉쌀함(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과거인)까지 곁들인,
달콤 쌉쌀한 초콜릿이다. 그 지성들은 천천히 그 초콜릿을 씹으며 시민계급에 의한 노동계급의
인수합병을 자축한다. 하지만 내 귀엔 벌써 그들의 새로운 대사가 들리는 듯 하다. "무슨 초콜릿이
이리 달기만 해. 싸구려란..."  |1999년_10월










쪽의 거처

이른바 근대 정신의 핵심은 '개인'(나의 주인은 왕이나 신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이고 오늘날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에 적혀 있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그런 근대 정신을 보장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난 50여 년 동안 반공주의 외의 모든 사회적 의견을 빨갱이로 몰아온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건재하고, 이미 3년 전 예술 작품에 대한 사전심의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얻고도 여전히 예술작품에 대한 온갖 검열이 횡행하는 이 나라를 근대적인
국가라 생각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국민의정부가 만든 '민주적 검열기구'인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3개월 등급보류
판정을 받은 영화다. 알다시피 등급보류란 지정한 기간 동안 영화를 알아서 가위질 해오게 하는 손
안대고 코푸는 검열장치다. 등급보류는 1~3개월로 나눠지는데 기간을 나누는 이유는 자를 게
많을수록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예술적 배려' 때문이다.(공윤이 공진협을 거쳐 등급위로 바뀐
과정이나 등급보류가 뭔지 조차 모르는 독자는 이쯤 해서 읽기를 중단하고 조종국 기자의 지사적
저널리즘을 되훑어 보시길)
어느 시대든 검열자들이 내세우는 두 가지 핑계는 사회 안전과 도덕이다. 우리의 경우 사회 안전은
주로 반공으로 표현되어 왔지만 이젠 그 반공이 얼마나 맹랑한 반공이었는가가 대체로 밝혀진
편이라 새삼 말하기가 욕스럽다. 도덕은 주로 청소년문제로 표현되고 있다. 나는 청소년들에게
추하고 부도덕한 현실을 보이는 일이 그들의 정서 함양에 해가 된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이 나라의 성인들은 그들에게 곱고 바른 것을 많이 보여줄 의무가 있다. 문제는 청소년에게 해를
주는 현실이 '예술작품 속의 현실'인가 '실제 현실'인가 하는 점이다. 청소년들이 24시간 숨쉬는
실제 현실엔 어떤 도덕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판에, '청소년을 위해' 소설 한편 영화 한편
속의 도덕을 따지는 일이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것은 단지 어젯밤 술집에서 남의 딸을 희롱한
이 나라의 성인 남자가 오늘밤 제 딸이 같은 일을 당할까 노심초사하는 눈물겨운 부성애에
봉사하는 일일뿐이다.
나는 아직 <거짓말>을 보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장정일의 소설을 좋아한 일이 없고(산문을
통해선 그가 존중할 만한 작가임을 확인했지만) <우묵배미의 사랑> 이후 장선우엔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는다.(특히 그가 <거짓말>과 검열문제를 두고 자꾸 색즉시공이니 공즉시색이니 하면서
도사연 하는 일은 마땅치 않다. 그가 선방이 아니라 세상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길 바라며 그 영화가 이미 사회적 의제가 되어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최소한의 계몽적 태도를 보이는 게 예의가 아닐까.) 그러나 장정일과 장선우와 그들의 예술작품에
대한 내 입장과 장정일과 장선우와 그들의 예술작품에 가해진 검열에 대한 내 입장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모든 검열의 목적은 한 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그 기득권을 영속화하기 위해 그 사회의
정신세계를 묶어두려는 데 있다. 해서 검열은 언제나 한 사회의 정신적 생산물 가운데 가장 앞선,
가장 돌출된 부분만을 대상으로 한다. 뒤집어 말하면 한 사회에서 검열자의 먹이가 되는 정신적
생산물은 (그것이 설사 쓸모 없는 쓰레기처럼 보인다 해도) 그 사회의 정신세계의 확장을 위해 제
몸을 태우는 숭고함을 갖는 것이다. 나는 장정일(그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지만)과 장선우(그의
태도가 마땅치 않지만)가 가진 예술가로서의 용기를 존경하며 그들의 예술작품 <거짓말>(아직 보지
않았지만)을 진심으로 지지한다. 나는 <거짓말>을 시사회장이 아닌 내가 사는 곳 근처의 극장에서
내 돈 내고 볼 수 있기를 원한다.
추신 : <거짓말>은 '세계적'인 베니스영화제에 가 있고 이 글이 독자에게 읽힐 무렵엔 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이 나라의 사대주의 수준으로 볼 때, 이 영화가 상을 받는다면 검열자들은 두 번
쪽팔리게 됐다. '세계적'인 예술작품을 등급보류한 일로 한번, '세계적'인 예술작품의 등급보류를
더 이상 고집하지 못할 일로 한번 말이다. 하긴 상을 받든 못 받든 그 빌어먹을 검열에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한 우리도 '세계적'으로 쪽팔리긴 매한가지다. 아, 우리 쪽의 거처는.  |1999년_9월










그 신문에 침을 뱉어라

(내가 가진 약간의 좌파 성향과 상관없이 얘기하자면)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큰 미덕은 다양성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존중하며 여러 다른 의견간의 공정한 경쟁을 통해 최선의
사회적 합의를 얻는다. 그런 지리한 과정은 좌든 우든 좀더 ‘능률적인’ 사회 시스템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답답함을 주지만, 개인의 개성과 사회 정의를 동시에 기대할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는 자유민주주의의 적이다.
그 신문은 다양성에 반대한다. 그 신문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테러한다.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대사는 그 신문의 정수다. 이장희나 최장집을 빨갱이로 몰기 위해 그 신문이
저지른 사실 왜곡의 수준은 우리의 이성을 강간한다. 그 신문은 사회적 합의에 반대한다. 그
신문은 전쟁이 나자 국민을 버리고 도주했고 결국엔 중학생까지 가세한 저항에 의해 쫓겨난
독재자를 이 나라의 아버지라 일컫는다. 그 신문은, 일제 식민지 시절 바로 그 일본군 헌병이었고
해방공간에서는 사회주의자였다가 동료들을 밀고하는 대가로 살아남아 쿠테타로 대통령이 된
후에는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 하나로 제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려 든 또 다른 독재자를 민족의
신으로 추앙한다. 지난 50년을 통틀어 그 신문이 지지해온 건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파괴자들이다.
서글픈 일은 그 신문이 이 나라에서 300만 부(그 신문의 주장대로라면)나 팔린다는 사실이다.
300만 부가 팔린다는 얘긴 천만 명 이상 읽는다는 뜻이며 천만 명 이상 읽는다는 얘긴 그 신문이
이 나라의 정신을 대체로 지배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근대적 외관과 봉건적
정신’(빌어먹을 박정희의 위대한 업적인) 속에 살아가는 이 나라 사람들이 그 신문을 즐겨 보는
일이 되레 당연하다 싶다. 언뜻 보기에 그 신문의 정치 사회면은 <동아>나 <한국> 같은 보수신문과
다를 바 없고 그 신문의 문화면은 <한겨레> 만큼이나 진보적이다. 전체적으로 그 신문은 한국에서
발행되는 어떤 신문보다 볼 게 많고 재미있다.
문제는 그 신문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만만치 않은(적어도 나
같은 건달보다는 훨씬 훌륭해 보이는) 지적 능력을 가진 지식인들이 그 신문이 다른 보수신문들과
다른 게 무어냐, 반문할 때 맥이 풀린다. 나는 차라리 이 나라의 전근대적인 교육 시스템을
원망한다. 그들은 또 말한다. 어떤 신문이든 글만 바르면 되는 일 아닌가. 나는 이런 순진한
사람들에게 <월간조선>과 그 신문의 문화면을 찬찬히 비교해 보기를 권한다. 그 둘 사이의 믿기
힘든 간격이야말로 ‘<조선일보>라는 극우조직’의 운영 원리다.
그 신문의 정치 사회면이 평소 다른 보수신문과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다가 먹이가 나타났을 때만
기동한다면 <월간조선>은 ‘<조선일보>라는 극우 조직’의 별동대로서 상시적인 전투를 수행한다.
<월간조선>은 ‘<조선일보>라는 극우조직’의 정신이 좀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심지어 사무라이
정신과 몽골기마민족론 따위의 위험천만한 파시즘 맨털리티로 무장되어 있다. 그에 반해 그 신문의
문화면은 ‘<조선일보>라는 극우조직’을 중화하는 임무를 띤다. 문화와 학술로 포장된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담론들은 그 신문에 어떤 위협도 주지 않지만, 수많은 좌파나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이 ‘자유롭게’ 기고하는 신문은 그저 건전한 보수 신문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신문의 소품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지식인들이, 오늘날 근대성을 가진 나라라면 지식인이
극우 신문에 기고하는 일만으로도 사회적 스캔들이 된다는 상식쯤은 갖길 바란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신문이 극우신문이라는 의견이 아직은 충분한 사회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현실을
인정한다. 게다가 그 신문에 출연하는 이들 가운데는 머지 않아 나의 미더운 벗이 될 사람이
여럿이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파시스트의 부역자라 게시하기보다는 지루함을 무릅쓰는 논쟁이나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믿는다. 결국 우리는 함께 외칠 것이다. "벗이여, 그 신문에
침을 뱉어라."  |1999년_8월










어머니

'하루감옥체험'을 했다. 명동성당 앞에 지어놓은 0.75평 짜리 감방 일곱 개 가운데 하나엔 내
이름이 적혀 있고 나는 그곳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참여해 달라는 연락이 왔을 때 나 같은 건달을
뭐에 써먹으려나 싶었지만 군말 없이 따랐다. 민가협, 그들은 우리가 알량하나마 나름의 신념을
건사하고 살수 있도록 사랑하는 가족을 담보로 제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이라면 우리 가운데
누구에게든 하루쯤 감옥 체험을 하라고 권유할 자격이 있다. 또한 하루감옥체험은 한국에는
양심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더러운 파시스트들로부터 우리의 명예를 확인할 소중한 기회다.
0.75평 짜리 감방은 내 짐작보다 더 좁았다. 이런 곳에서 수십 년을 지내고도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이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체제의 요구와 일치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곳에 사람을 수십 년씩 가두는 국가에 우리가 걸 수 있는 신뢰는 어떤 것일까. 허락 받지
않은 상념에 빠진 나에게 그들(비전향 장기수 영감님들)이 찾아왔다. 전향서라는 이름의 종이 한
장과 수십 년의 세월을 맞바꾼 그들의 얼굴은 수도자처럼 맑았고 그들의 몸가짐은 사위를 바로
새울 만큼 정중했다. 그들이 창에 얼굴을 대고 자신을 소개한 후 "고생 많으십니다."라고 고개를
숙였을 때 나는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그저 "죄송합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쯤이었다. 그들은 내가 있는 곳을 들여다보며 그들이 있던 곳과 모양과 크기가
비슷하다 했다. 그러나 그런 도량형 상의 유사함이란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가. 수십 년 동안 여섯
면의 벽은 하루하루 그들을 향해 다가왔을 테니 말이다.
세 살쯤 되었을까. 이른바 국민의 정부 하에서 일어난 조직사건인 '영남위 사건'으로 투옥된
양심수의 딸아이가 찾아왔다. "아빠도 이런 데 계셔, 아저씨한테 인사해야지." 엄마 팔에 앉긴
아이의 눈엔 이슬이 맺혔고, 인사를 재촉하는 엄마의 말에 아이는 자꾸만 몸을 빼면서도 눈길만은
나를 놓치려 하지 않는다. 곱고 예쁜 세상만 보여주기에도 모자랄 저 아이의 눈망울에 이 비열하고
사악한 세상을 마련한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방법은 무엇일까.
"아저씨 힘들지 않으세요." 초등학교 일 학년 짜리 남자아이가 제 키를 넘기는 창에 간신히 얼굴을
대고 묻는다. "괜찮아, 아저씬 조금 있다 나가." "우리 아빤 광주 교도소에 있는데." "아빠가 뭘
잘못했지?" "아빤 착한 일 해서 잡혀가셨어요." 고개를 떨구는 저 아이가 익힌 세상의 이치는
'착한 일 하면 잡혀가는' 곳이다. 아이에게 양심과 정의를 가르치는 일이 아이의 인생을 망치는
일이 되는 세상에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모든 정신적 성취들(학문적 예술적 문화적 혹은
종교적인)은 한낱 오물에 불과하다.
교도관들(역시 양심수 출신인 청년들)의 감시를 피해 훔쳐 본 명동거리는 텔레비전 스케치
화면처럼 낯설었다. 따가운 햇살 아래 모델 같은 몸매의 아가씨들이 잦은 집회로 길이 든 명동성당
입구를 따분한 얼굴로 흘끔거리며 지나가고, 성당으로 오르는 고급승용차들은 진입로에 주저앉은
보라색 스카프의 어머니들에게 끊임없이 비켜줄 것을 요구했다. 저 아리따운 아가씨들은 자신들이
지켜 가는 다이어트에의 신념마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갇힌 이들의 신념 덕에
가능함을 알고 있을까. 고급승용차 뒷좌석에 우아하게 들어앉은 저 귀부인은 자신이 지켜 가는
종교에의 신념마저 한여름 땡볕 아래 주저앉은 저 어머니들의 뚫린 가슴 덕에 가능함을 알고
있을까.
어머니들은 창살 사이로 내 손을 어루만지며 자기 자식인양 안타까와했다. 이곳은 공갈 감옥이고
나는 공갈 양심수지만 그들은 진짜 어머니들이었다. 불과 몇 년 전, 제 자식의 안위만을 기원하며
살던 그들은 이제 이 나라의 가장 추악한 부위를 몸으로 겪으면서 제 자식이 풀려나고도 남의 자식
걱정에 거리를 누비는 투사가 되었다. 내 손을 잡은 채 미소지으며 한 어머니가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게 엄마잖아. 엄마의 힘은 하늘도 움직일 수 있거든. 우린 무서울 게 하나도 없어."
|1999년_8월










광수 생각

'출판사 영화언어 발행인'이라는 매우 영화적인 직함과는 달리 나는 영화에 대해 전문적이지 않다.
그런 내가 올해 초 한 시사월간지로부터 '김규항의 영화에세이'라는 지면을 수락한 건 극장에 가는
회수를 2년에 한번에서 한 달에 한 번으로 늘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평'을 피하느라 매달
심란해지지만, 나는 이제 한 달에 한 번은 극장에 가고 있다. 그렇게 본 영화가 <쉬리>, <인생은
아름다워>, <부기나이트>, <정크메일>, <이재수의 난>, <스타워즈 에피소드1> 들이다. 나는 내 삶
속에 갑자기 늘어난 영화의 부피에 만족해했다.
그런 내 흥을 깬 건 <이재수의 난>이다.(가장 한심한 건 <에피소드1>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영화라기보다는 캐릭터 사업을 위한 거대한 CF라 여긴다) 나는 <이재수의 난>이 불쾌했고 영화를
본 지 한 달이 넘은 지금 그 불쾌감은 불편함으로 남았다. 내가 <이재수의 난>에서 얻은
소득이라면 박광수가 사회파 감독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사회파 감독을 가름하는
기준이 사회적 소재가 아니라 사회의식이라 할 때 나는 <이재수의난>에서 어떤 사회의식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눈물을 찔끔거리며 보았던 <그들도 우리처럼>을 비롯 박광수가 만든
여섯 편의 영화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박광수는 사회파 감독이 아니라 '사회적 소재를 즐겨
채택하는' 감독이었다.
나는 <이재수의 난>이 민중영웅담이길 바라는 게 아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창작자의 몫이다.
내가 <이재수의 난>에 불쾌한 건 역사에 대한 박광수의 해석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박광수의
해석이 가진 무기력 때문이다. <이재수의 난>은 '구체적인 삶과 죽음이 포함된 실재'로서의 역사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못한 영화다. 나는 <이재수의 난>이 충실한 내러티브를 갖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얼치기 계몽주의자인 나로선 역사물엔 리얼리즘이 나아 보이지만 그렇다고 형식주의의
정당한 능력을 폄하하고 싶진 않다. 문제는 박광수가 역사에 무기력했듯이 내러티브에도
무기력했다는 점이다.
나는 <이재수의 난>이라는 영화에서 박광수가 굳이 '이재수의 난'이라는 역사를 소재로 채택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박광수가 사회적 소재를 즐겨 채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통속적인 것을
재미없어 하는 그의 고급한 취향에 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취향이야말로 박광수의 창작 방법의
골간인 듯 하다. 그러나 박광수의 그런 고급한 취향은 '이재수의 난'이라는 역사적 다이내미즘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하다. <이재수의 난>은 그런 무기력과 그것을 자인하지 않는 박광수의 오만의
불행한 결합물이다. 박광수의 취향대로 <이재수의 난>은 통속적이지 않지만, 잘 만들어진 고급
예술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난해한 긴장감은 한 순간도 찾아볼 수 없다.
'오만한 감독의 무기력한 실패'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건 박광수와 <이재수의 난>에 대한 이른바
전문가들의 정치적 배려다. 사회에 대해 별다른 배려가 없어 보이는 그들의 사회파 감독에 대한
무한정한 배려는 기이하기만 하다. 특히 <씨네21>의 캠페인에 가까운 박광수 옹호는 매우 위험해
보인다.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민족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중원을 평정한 영화 전문지로서의
정치적 입장(거의 유일한 작가적 감독을 밀어준다는)을 이해하지만 그런 정치적 배려가 영화와
감독에 대한 엄정한 평가에 우선할 수 있다는 태도는 파시즘이다. 문화권력이 된 <씨네21>은
'고급비평정보지'라는 독자와의 처음 약속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재수의 난> 시사회에 몰린 인파의 질과 양에 나는 놀랐다.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회파
감독'이라는 말은 박광수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수사는 '유행이 지난' 사회물을 만드느라 죽을
고생을 하는 독립영화 감독들에게나 어울린다. 빈정대자는 게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어떤
곳인지 다들 아는 대로)에서 지난 10여년 동안 사회적 소재만으로 여섯 편의 영화를 만들고도
파멸하지 않았다면 박광수는 특별히 행복했다 할 만하다. 나는 거꾸로 묻고 싶다. 대체 그 사회파
영화들은 어떤 것이었나?  |1999년_7월










개새끼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자 아버지가 분주해졌다. 하루는 아버지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거 OO본부 행정병으로 가는 건데, 그런 데 가면 책도 볼 수 있고 좋지 않으냐.”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는 당신 아들 됨됨이와 당신이 삼십 년 동안 체험한 군대가 빚어낼 부조화에 대해 오래
전부터 심각하게 걱정해온 터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모병 쪽에 있던 아버지 동기가 약간의 배려를
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청을 물리칠 수 없었고 그날 밤 종이를 채우기로 했다.
김-규-항-6-2-1-1-2... 워낙에 악필이라 글자 하나에 1분 정도를 들여 ‘그려나가던’ 나는 이내
짜증에 휩싸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나 때문에 원래 그 부대 운이 닿았던 한 녀석이
전방에 가서 뺑이 칠 거라는 데 생각이 이르자 도저히 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종이를 찢어
휴지통에 던졌다. “아버지 저 그냥 갈게요. 꼭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아버지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떨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대 당일 나는 가족들을 대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친구 녀석들에게 입대 날짜를 알리지
않은 건 물론이었다. 혼자 기차를 타고 논산에 내려 머리를 깎고 훈련소에 들어섰다. 의연하고
의젓하게, 하여튼 갖은 폼은 다 잡으며 입대했건만 내 선택을 후회하게 되는 데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67년 생부터 거슬러 시작한 나이 파악은 65년생에서 제일 많았고 63년생 땐 아무도
없었다. 파악을 마쳤다고 생각한 조교는 내무반을 나갔다. 조교가 다시 돌아온 것은 5분이 채 못
되어서였다. 다짜고짜 짠밥통을 걷어찬 조교가 소리쳤다. “손 안 든 새끼 나와.” 더럭 겁이 난
나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너 이 새끼 왜 손 안 들었어.” “62년생입니다.” 와 하고 폭소가
터졌다. 머쓱해진 조교는 나가버렸지만 그 요란한 웃음소리는 내 머리통 속에 아득한 공명을
일으키며 후회와 절망감으로 변해갔다.
그 광경을 본 건 상병 때였다. 휴가 길에 나는 화곡동 국군통합병원에 들렀다. 중대 이병 하나가
트럭 바퀴에 머리통이 끼는 사고를 당해 입원해 있었다. 귤봉지를 들고 정형외과 병동을 찾았을
때, 내가 찾은 녀석 건너편 침상에 유난히 체구가 큰 사병 하나가 눈을 감은 채 울고 있었다. 침상
옆엔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아들 손에 고개를 묻은 채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사병의 몸엔 담요가 덮여 있었지만 나는 이내 그의 다리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자의 끝
모를 절망과 비통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군대 가서 사람된다느니 사내다워진다느니 하는 얘기는 그저 농담이다. 사람이 되는 게 권위에
무작정 복종하는 일이고 사내다워지는 게 힘없는 사람에게 일수록 불량스러워지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군대도 군대 나름이겠지만 이 나라의 평범한 아들들이 가는 군대란 언제나 고되고
삭막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며 아차 하면 병신 되거나 죽는 곳이며 도무지 배울 게 없는
곳이다. 돈을 먹여서 군대를 빠지는 일이 끔찍한 죄인 건 단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 하지
않거나 남 하는 고생을 피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대신 군대에 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님 아들 빠진 자리를 머슴 아들이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시민사회에서 말이다.
군대란 안 갈수록 이익인 곳임에 분명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한국의 신체 건강한 청년이라면
그저 눈 딱 감고 3년 썩어줄 필요가 있다. 어쩔 것인가. 후진 나라에 태어난 것도 죄라면 죄
아닌가.
제 자식 대신 남의 자식 군대 보내는 더러운 아버지들, 그리고 이제 스물 몇 살의 나이에 그런
악취 나는 거래에 제 몸을 내 맞긴 음탕한 아들들. 그들에게 성질 나쁜 아들 군대 보내고 3년을 잠
못 이룬 내 아버지의 한숨과 다리 잘린 아들 곁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울던 한 어머니의 눈물을
담아 꼭 들려줄 말이 있다. 개새끼들.  |1999년_5월










영감과 빠가사리

고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20년 전 어느 날, 3학년 P가 '영감'(교련 선생)을 폭행했다. 총검술
수업 중에 '통제'에 따르지 않던 몇몇을 영감이 불러내어 기합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 P가 목총으로
영감을 친 것이었다. 체육 수업 중이던 나는 그 일을 목격했는데, 영감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해 있고 P는 여남은 명의 급우들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고 있었다. 한참 후 P는 갈비 두
대가 부러진 채 병원에 실려갔고 학교는 P의 갈비가 되붙기 전에 그를 학적부에서 파냈다. 3학년
대표 몇몇이 영감의 집을 찾아 무릎을 꿇고 사죄했고 영감은 다시 총검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19년 전 어느 날, 나는 '빠가사리'(수학 선생)가 수업 중인 교실 문짝을
걷어찼다. 급우들을 대신하여 한 짓이었지만 와장창 문짝이 넘어가면서 유리 조각이 튀고 사위가
정적에 휩싸이자 나는 모든 게 내 문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주먹과 발은 물론 걸레 자루,
걸상까지 동원한 구타가 시작되었다. "니 진짜 안 빌래." 빠가사리는 무조건 빌 것을 요구하며
나를 때리고 자빠트렸지만 나는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동작을 거듭할 뿐이었다. 그것은 전투였고
수백 개의 눈알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맞서 칠 수 없다면 그저 버텨서라도 이겨야 했다. 수업
시작종이 두세 번쯤 더 울리고서야 그 지루한 경기는 끝이 났다. 탈진한 빠가사리가 내일을
기약하며 복도 끝을 돌아 나가자 박수가 터져나왔다. 피가 고인 입안에서 살점들이 돌아다니고
교실 바닥이 파도처럼 넘실거렸지만 나는 녀석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녀석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가와 피를 닦아주거나 회칠갑이 된 교복을 털어 주었다.
얼마 전 어느 고등학교에선가 학생의 뺨을 수십 차례 때리던 선생을 학생들이 경찰에 신고해서
잡혀가는 일이 일어나 세상이 무너지는 '교권'을 한탄하고 있을 때, 나는 20여 년 전을 추억했다.
P는 선생을 팼고 나는 교실 문짝을 찼지만 그 차이가 몰매와 박수라는 결론의 차이를 낳은 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별명의 차이, '영감'과 '빠가사리'의 차이에서 나온다. 학생들에 의한
선생의 별명은 괜스레 착안되는 게 아니며 매우 긴 시간적 공간적 경험의 공유에 의해 만들어진다.
선생의 별명이란 대개 그 선생의 인간적인 등급인 것이다. 영감은 총검술이나 가르치는 시시한
존재였지만 매우 기품 있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빠가사리는 3학년 수학을 맡는 실력자였지만
악취가 나는 사람이었다. P가 아니라면 누구도 영감을 때리지 않았겠지만,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빠가사리가 수업 중인 교실 문짝을 걷어찼을 것이다.
선생이 학생을 때릴 권리를 '교권'이라 부르는 일은 폭력으로나 권위와 가치를 유지하려는
파시즘이다. 교권이 '사랑의 매'를 전제로 한다 해도 그 매가 사랑의 매인지 아닌지를 가장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역시 학생이다. 급우가 맞는 과정을 지켜본 학생들이 경찰을
불렀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의 매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 20년 전 선생을 때린 급우에게 몰매를
놓은 학생들과 19년 전 선생이 수업 중인 교실 문짝을 걷어찬 급우에게 박수를 보낸 학생들,
그리고 오늘 어느 교실에서 한 선생을 지켜보는 학생들은 전적으로 같다. 20여년 전 학생을 때리던
선생과 오늘 학생을 때리는 선생이 전적으로 같듯이 말이다. 양심과 정의를 가르치는 일이 학생의
인생을 그르치는 일이 되는 마당에, 선생이 단지 선생이라는 이유로(영감이든 빠가사리든) 똑같은
권위를 부여받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따져야 할 일은 선생과 학생 사이의 권위적 질서가
아니라 인간(선생이라는)과 인간(학생이라는) 사이의 인격적 질서이며, 지켜야 할 건
'교권'(선생만의)이 아닌 '인권'(선생과 학생의)이다.
후일담 : 졸업 이듬해, 그러니까 17년 전 어느 날, 나는 버스에서 빠가사리와 마주쳤다. 그를
발견한 내가 그래도 은사라고 다가가자(순진한 건가 노예근성인가) 빠가사리는 황급히 버스를 내려
도망쳤다. '교권'을 곱게 보기엔, 나는 너무 치명적인 경험을 가진 셈이다.  |1999년_4월










칭찬의 가족사

전북 태인이 고향이지만 아버지가 군인(공군 하사관)이었던 덕에 셀 수 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다.
전라 경상 충청 경기 할 것 없이 남한에서 비행장 있다는 고장은 다 살아 봤고 그 고장에서도
이런저런 형편 때문에 수시로 이사를 다녀야 했으니 기억하는 이사 횟수만 스무 번은 넘는다. 여섯
살부터 초등학교 4학년까지 살았던 대구는 매미가 다닥다닥 붙은 사과나무의 환영과 가슴 아린
첫사랑(!)의 추억으로 남은 곳이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가리켜 말하곤 했다. "김 상사
네는 전라도 사람 같지 않아."
그 희한한 칭찬은 어린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런 '칭찬'의 반복은 나로 하여금 전라도
사람이 어떤 큰 죄를 가진 사람인 모양이다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아버지에게 그 일을 따져 묻는
게 예의가 아니고 소용없는 일이란 걸 알아챘음은 물론이다. 말하자면 나의 성장 과정은 전라도
사람이 전라도 아닌 고장에서 사는 방법을 체득하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게 뒤집힌 건,
스무 살 무렵이다.
머리는 텅 비고, 반항기만 가득했던 내게 반역으로 점철한 전라도의 근현대사가 갑자기 다가왔다.
머리통을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로 채워가며 나는 난생 처음 겪는 지적 체험에 감격했다. 내 어린
시절 눈에 담았던 그 산과 벌판, 그리고 내가 걷던 길들이 그대로 동학군의 땀과 피가 서린
곳이었다니, 와. 그 뒤로 나는 전라도 사람임을 자랑하게 되었다. 묻지 않아도 내가 전라도
사람임을 밝혔고, 특히 전라도 출신을 꺼릴 법한 상대나 자리라면 반드시 내 고향을 밝혀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려하곤 했던 것이다.
'피해 지역'의 지역 감정도 좀더 엄격하게 조절되어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은 건 최근이다.
시사잡지 기자인 B는 처음 만난 술자리에서 대뜸 내 글 칭찬을 했다. 문장을 인용까지 해가며 하는
소리라 빈말은 아니었지만, 사람들도 많고 해서 점잔빼고 앉았다가 대신 고향을 물었다. 말씨로
보아 전라도 사람이 분명했기에 그걸 확인해서 우호감을 나누려는 수작이었다. "몰라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B는 정색을 하며 대답을 거부했다. 한참 후 다른 곳으로 술자리를 옭긴 후에야
나는 아까 일을 물었다. B는 대답했다. "짐작대로 나는 광주가 집이고 얼마 전엔 5.18 보상금도
받았다. 하지만 전라도 사람끼리 배타적으로 뭉치고 하는 건 딱 질색이다."
전라도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이 나라의 지역 문제는 일단 수면 아래로 내려앉은 듯 싶지만,
그럴수록 이 나라가 단일 민족인 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고향 좀 다른 것 가지고도 이렇게 못
잡아먹어 난리인 사람들이 인종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몇 년 전 르완다에선 인종청소로 100만이
죽었고 오늘 유고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아니할 말로 이 나라가 여러 인종이었다면
진작에 수백만은 죽어나가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 전라도 문제는 빼고라도, 연변 동포에게,
굶주리는 북한 인민에게 한국인들이 보이는 야비함을 보라.
어릴 적 대구에서의 '희한한 칭찬'을 아버지에게 꺼낸 건 서른 무렵이다. 아버지는 웃으며 당신의
'희한한 칭찬'을 들려주었다. 매우 정열적이었던 증조 할아버지는 만주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식솔들을 불러들였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살았다.
동네사람들(일본인들)은 아버지 가족을 가리켜 말하곤 했다. "김상 네는 조센징 같지 않아."
해방되던 해 아버지 가족은 연락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해가 바뀌도록
급우들(한국인들)로부터 매를 맞아야 했다. 급우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하곤 했다. "죽어라,
쪽발이 새끼."  |1999년_4월










에덴의 왼쪽

전세계 영화인들의 저주와 전세계 영화팬들의 찬미를 먹고사는 20세기의 에덴 동산, 할리우드의
연례 재롱잔치. 오스카 수상식은 보는 사람의 오감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모든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온갖 컨벤션들을 화사하게 배열한 최고급 종합선물이다. 오스카
수상식은 서너 시간 넘어 하기 때문에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 버릇을 가진 나는
챙겨보지 않아도 해마다 보게 된다. 그리고 매번 쇼가 무르익을수록 볼거리가 쌓여갈수록 불편함도
같이 쌓여 간다. 자본주의를 거부하기로 한 내가 자본주의의 꽃을 감상하고 있기 때문이며, 전세계
피압박 영화를 지지하기로 한 내가 가해 영화의 자축연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카는 자족적인 불편함에 기대어 구경을 지속하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메뉴까지 준비한다.
올해의 메뉴는 엘리아 카잔의 공로상 수상.
알다시피, 엘리아 카잔은 빨갱이 사냥이 극에 달한 1952년, 이른바 하원 반미행동조사위원회에
나가 자신이 좌파임을 시인하고 동료 8명을 밀고했다. 카잔은 54년 <워터프론트>로 오스카
감독상을 받는 등, 영화와 연극을 넘나들며 활동을 계속했지만 '밀고자'로 손가락질 받아왔다.
그를 불리한 처지로 몰아넣은 건 그 자신이었다. 카잔은 52년 하원 증언을 마친 직후 '공산주의는
위험천만한 적들의 음모'라는 광고를 <뉴욕타임스>에 싣는가 하면, 88년 발간한 회고록에선 "그런
기회가 또 다시 오더라도 똑같이 명예로운 행동을 하겠다"고 밝히는 배 째라 식의 행태를
보여왔다.
72년, 좌파라는 이유로 미국에서 쫓겨나 20년 동안 망명생활을 해오던 찰리 채플린이 '영화를
20세기의 예술이게 한 공적'으로 오스카 공로상을 받았다. 채플린의 공적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 상은 할리우드가 매카시즘의 피해자에게 정중하게 용서를 구하는 절차이기도 했다. 영화
<채플린>에 묘사된 대로, 채플린이 83세의 노구를 끌고 입장하자 할리우드 영화인들은 열광적인
기립 박수를 보냈고 채플린은 눈물을 흘렸다.
오스카가 FBI에 의뢰해서 좌석 배분을 한 걸까. 카잔이 입장했을 때, 객석의 오른쪽은 거개가
기립했지만 왼쪽은 팔짱을 끼고 있거나 박수치지 않았다. 머리가 비었을 거라 여겨지던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만만치 않은 사회의식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일이었고, 역사 속에서 '이미 확보된
이성'이 '우상이 남긴 상처'를 지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카잔은
"아카데미의 용기와 관용에 감사한다"는 짤막한 인사말을 하고 서둘러 퇴장했다.
<조선일보>는 그 일을 두 번 언급했다. "엊그제 열린 7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엘리아 카잔
감독이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매카시 광풍에 의해 채플린이 추방된 1952년, 카잔 감독은 자신의
동료였던 공산당원들의 이름을 의회 청문회에 밝혀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카잔의 원죄는
'마녀 (공산주의자) 사냥'이 극에 달했던 52년,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동료 영화인 8명을 밀고한
것."
도무지 <한겨레>와 구분할 수 없는 이 공평무사한 표현은 <조선일보>와 그들의 보수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왜 52년 미국의 메카시즘을 '광풍'이며 '마녀사냥'이라고 하면서, 오늘
한국의 '광풍'과 '마녀사상'을 요구하는 걸까. 그것은 그들의 보수 사상이 세상을 판단하는
신념체계가 아니라, 가진 것을 내놓지 않으려는 혹은 더 많이 가지려는 동물적인 욕망 체계이기
때문이다. 52년 미국의 메카시즘은 내 돈궤하고 아무 상관이 없지만, 오늘 한국의 메카시즘은 내
돈궤를 보존하거나 늘리는 일인 것이다. 새삼스런 얘기지만, 보수 사상이 진보 사상과 대립한다
해서 보수 사상을 진보 사상과 같은 층위에 놓는 일은 터무니없다. 그것은 순수한, 매우 순수한
욕망이다.  |1999년_3월










염치

알고 보면 이번 스크린쿼터 파동이란 골 때리는 일이었다. 스크린쿼터는 GATT는 물론 그 후신인
WTO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문화적 예외 조항'으로 볼 때, 현재로선 어떤 '경제 논리'로도 축소나
폐지를 거론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문제가 안 되는 일이 문제가 된 셈이다. 내막은
문화 의식이 결여된 한국 공무원들이 '공정 무역'이라는 채찍과 '5억 달러 투자'(외자 유치!)라는
당근으로 꼬드기는 미국 공무원들에게 은근슬쩍 땅문서(스크린쿼터라는) 내주려다 소란이 난,
'실화'보다는 '야담'에 가까운, 그런 일이었다.
영화인들은 전례 없이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싸웠냐 하면
'자신들의 모습에 자신들이 놀랄 정도'라고 했다. 두 달이 넘게 계속된 영화인들의 싸움은
공무원들이 꼬리를 빼고 국회 결의안이 관철되고서야 일차 마무리되었다. 농성을 풀며 영화인들은
"국민의 지지를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영화인들이 제아무리 열심히
싸웠던들 국민들이 외면했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왜 이리도
민망한가.
과연 한국 영화인들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만한 사람들인가. 제 밥그릇이 걸린 일에는 '자신들이
놀랄 정도'로 열심인 영화인들은 남의 밥그릇에는 어떤 관심을 보였던가. 자신들의 불행을 언제나
민족이라는 이름에 호소하는 영화인들은 정작 민족이 불행할 때 어디에 있었던가. 이번 싸움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독점 자본'으로 해석하는 참신함을 보인 영화인들은 다른 업종의 노동자들이
진짜 독점자본과 싸울 때 무엇을 도왔던가. 이번 싸움에서 한국 영화를 '민족 고유의 것'으로
해석하던 영화인들은 농민들이 신토불이를 외치며 미국쌀과 싸울 때 어떤 지지를 보냈던가. 이
나라의 유한 계급을 뺀 모든 백성들이 불행해진 구제금융 시대가 일년을 넘기고 있지만 그 동안
영화인들은 그 잘난 영화 예술로 세상의 어떤 모습을 그려냈던가. '경쟁력'을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길거리를 헤매는 이 나라의 백성들이 그런 염치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경쟁력'을 유보하는 아량을 베풀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한번도 사회적이지 않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사회적 혜택은 과연 공정한가.
이번 싸움을 통해 개발된 영화인들의 자기 논리가 전례 없이 정교함에도, 이번 싸움의 열기가
밥그릇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체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냉소하고
일상의 우연에 천착한다는 지성파 감독까지 연단에 오르는 이변이 생길 리 있었겠는가.('정치
의식'을 초월한 듯 행동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경제 의식' 아래에 머물 뿐이다.) 나는 영화인들의
'경제 투쟁'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 경제투쟁이 경제투쟁에 머물지 않기를,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열정이 남의 밥그릇도 함께 생각하는 사회적 지평으로 확대되기를 바란다.
영화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억울함과 고통을 이 나라의 백성들이 겪는 보편적인 억울함과 고통
속에서 재발견하여야 한다. 영화인들은 이번 싸움을 통해 지켜낸 스크린쿼터가 오로지 영화라는
업종에만 주어지는 소중한 혜택임을, 그들의 장사가 매우 특별한 장사임을 다시금 생각하여야
한다. 그것은 산업의 문제이자 예술의 문제지만, 오히려 '염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족 : 이 만큼 말하고도, 내 속은 여전히 찜찜하다. 한국 영화인들이 농성장에서 함께 흘린
눈물은 모두 같은가. 영화 자본가의 눈물과 영화 노동자의 눈물은 싸움이 끝난 다음에도
연대하는가. 싸움의 성과로 얻어지는 산업적 이익은 함께 흘린 눈물처럼 공정하게 분배되는가.
한국영화인들은 같은 민족인 동시에 같은 계급인가. 한국 영화인들에게는 '상식선'의 정치 의식이
필요하다.  |1999년_3월










아들 키우기


김건. 이름보다는 곰탱이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리는 세살 짜리 내 아들이다. 나는 애당초
아들을 갖기를 바라지 않았다. 세상에 한 명의 가해자를 추가하느니 차라리 한 명의 피해자를 낳아
강하게 키우는 편이 낫다는 소박한 생각에서였다. 다행히 첫째(몇 달 전 이 칼럼에 등장한 바 있는
김단)는 딸이었고 더는 아이를 두지 않으려 했다. 장가를 들고 아내와 딸까지 건사하며 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떠지던 나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곡절이란 늘 생각대로가 아니어서 한 아이를 더 갖게 되었고 나는 결국 아들을 키우게 되었다.

4.5킬로그램. 장대한 몸을 갖고 나온 김건을 보고 사람들은 "사내답게 생겼다" 말했고, 김건이
걷게 되고 생김새에 걸맞은 기질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주저 없이 "사내답다" 말하기
시작했다. 사나이. 어정쩡한 건달로 살아온 나를 그 부록인 '의리'와 함께 언제나 마법처럼
지배해온 그 말이 내 아들에게 사용되었을 때 나는 흐뭇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생각했다. 과연
사내답다는 건 무엇인가. 사나이의 실체란 무엇이며 그게 있기나 한 걸까. 잊고 있던, 아들을
갖기를 바라지 않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의구심은 커져갔다. 김건이 가진 사내다움, 제
누나하고는 확연히 다른, 다른 남자아이들과 비교해서도 두드러진, 아비 눈에 흐뭇하게만 비치는,
씩씩함 같기도 하고 난폭함 같기도 한 그 기질은 과연 좋기만 한 걸까. 김건이 어른이 되었을 때
그 타고난 사내다움은 제 여자에게 제 자식이나 부하나 후배들에게 제가 속한 사회망에 그리고
무엇보다 제 세계관에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

이른바 '이념적 진보성과 삶의 보수성'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사나이'에 대한 생각을 이어갔다. 삶의 진보성. 공허한 거대담론(이른바 '빛나는 시절', 수재형
좌파들의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던)이 아닌 일상과 생활의 진보성을 체득하는 일.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성적 차별의 문제였다. 세상의 절반이나 되는 여성들이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감수해야 하는 갖은 불공정함을 놓아 둔 채 어떤 진보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성적
차별은 '사나이'로부터 나온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사내다운 사나이가 존재'하기 위해선
언제나 '여자다운 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나이'라는 말은 온갖 범죄, 온갖 악행, 온갖
불평등, 온갖 권위주의, 온갖 파시즘의 면죄부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더러운 세상은 그저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사나이들이 뒤섞여 저마다의 사내다움을 과시하고 경합하는 과정의
부산물인 것이다.
나는 김건을 부드러운 남자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의 실체는 여전히
모호하다. 사내다움의 결정체로 계획된 듯한 김건의 어떤 부분을 제어하고 어떤 방향으로 조정해야
할 것인가. 박학기는 내시 같고 김현식은 사내답다고 느끼는 정서를 가진 내가 할 수 있는 일일까.
다만 김건은 그 모든 노력을 아비보다 좀더 일찍 시작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아비보다는 좀더
나가기를 바란다. 나는 김건이 세상에 유익을 주진 못할 망정 아비를 포함한 다른 모든 남자들처럼
세상을 가해하는 사나이가 되지 않길 바란다.

김건이 깁스를 풀었다. 김건은 1월 1일 '사내답게' 놀다가 다리가 부러졌었다. 집에 돌아와 욕조에
더운물을 받고 넣어주니 연신 첨벙대며 좋아한다. 한달 만의 목욕인 것이다. 깁스를 했던 자리에
낀 더께를 벗겨주다 옷이 젖어 나도 욕조에 들어갔다. 비스듬히 앉아 김건을 다리 위에 앉혀 놓고
그 씨름꾼 같은 몸과 능글맞은 얼굴을 들여다보자니 웃음이 나온다. 어쩌다 이런 놈이 나왔을까.
이 순간만은 '사나이'의 사회적 역기능 따위는 접어 두자. 뿌연 수증기 속에, 발개진 얼굴을
맞대고 웃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을 뿐이다.  (1999년_2월)










변태

게이 후배가 있다. 칠 년 전 어떤 책을 번역해보겠다고 찾아 왔을 때 해사한 얼굴에 주황색
사파리가 인상적이었다. 바로 일을 진행했으나 얼마 후에 다른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딱히 볼일이 없어졌지만 워낙 똑똑하고 호감 가는 친구라 언젠가는 같이 일할 기회가
있기를 기대했다. 그 녀석을 다시 만난 건 삼 년 전이었다. 나는 근근히 버텨오던 영화전문도서
출판을 지속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고 그 녀석을 찾았다.

저녁 무렵 대학로에서 만난 그 녀석은 살이 붙고 안색이 안 좋았지만 지적인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밥 대신 맥주를 먹기로 하고 골뱅이 집에 들어갔다. 일 이야기에 간간이 '깃발 꼽는
지식인들'을 안주(참으로 질긴 안주) 삼아 네댓 시간을 보냈다. 그 녀석은 내가 말을 하면 조금은
부끄럼 타는 듯한 얼굴로 잠자코 듣고 있다가 선량하게 웃었으며 이따금씩 손뼉을 쳤다. 그날 그
녀석으로부터 받은 느낌은 특별했다. 처음엔 '매력 있군' 했지만, 며칠 후 나는 그 '매력'이
성적인 지점에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성적 취향의 경계란 얇디얇은 것이었다.

그 후론 그 녀석한테서 그런 느낌을 받은 기억이 없다. 그 녀석은 내 앞에서 더 이상 부끄럼을
타지 않았고 술만 먹으면 악을 쓰고 차도에 오줌을 갈기곤 했다. "형, 나 남자 좋아해요." 한달 쯤
지났을까. 그 녀석은 포장마차에서 만취한 채 내게 커밍아웃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받은 느낌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 녀석은 제 애인을 나에게 소개했고 며칠 후 생일파티에 초대했다.
낙원동의 아담한 게이 카페에서 열린 생일파티엔 열댓 명이 참석했다. 열 명 남짓한 게이들이 짝을
이루어 참석했고 '일반'(그들은 이성애자들을 '일반'이라고 자기들은 '이반'이라고 부르더라)은 그
녀석의 여자 친구 둘과 나, 그 녀석의 남자 친구 그렇게 넷이었다. 게이들의 생일파티(네 가지
성이 참석한)는 유쾌했다. 적극적인 이성애자일 뿐인 나로선 그들 가운데 이정섭씨처럼 간드러지게
말하는 친구가 없다는 것부터 신기해 보였다. 돌아가면서 준비한 선물을 내놓고 덕담을 하는 식당
지배인, PD, 철인 경기 선수, 스튜어드, 학생에 백수까지 그들은 그저 건강하고 예의바른
남자들이었다. 그들의 짝짓기가 가진 원시성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성적 매력(육체적
의미만이 아닌)을 기반으로 짝짓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짝짓기에 돈과 계급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들에게 결혼이 없는 것은 축복이었다.

그 녀석은 첫 키스를 초등학교 5학년 때 했다고 했다. 남자와 말이다. 내가 여자에게 느끼는
성욕과 안타까움을 그 녀석은 남자에게 느끼는 것이다. 그 녀석과 내가 다른 건 단지 그것뿐이다.
그 녀석은 엑스포만 피는 나를 '변태'라고 놀리곤 했다. 맞는 말이다. 게이가 변태라면 남들 디스
필 때 엑스포 피는, 딱 그만큼의 변태다. 그 녀석은 아직 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하지 못했다. 그
녀석이 난 남자가 좋다라고 맘놓고 얘기할 수 있는 세상은 올 것인가. 퀴어 영화제가 번듯하게
열리고 게이 담론이 늘어나는 건 그런 세상이 오고 있는 징표다. 하지만 이미 찬성하거나 이해할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끼리 생각을 재확인하고 학습을 늘리는 일이 세상을 개선시키는 건
아니다. 퀴어의 세계는 문화 담론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변태인가. 꼴리면 하고 땅기면 살고 싫어지면 헤어지는 그들이 변태인가, 돈 때문에
하고 계급 때문에 살고 싫어져도 못 헤어지는 우리가 변태인가. 정말이지 누가 더 변태인가.
(1998년_11월)










교양


서울 나갔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30대 여자 코미디언과 40대 남자 가수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정확하게 말해서 버스 기사가 저 들으려고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가 승객 가운데 하나인
나에게 들려온다. 처음 듣는 프로그램이지만 사람들이 전화로 자기 사연을 이야기하고 전화를 걸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이 듣는 식인 모양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남의 체험을 즐긴다. 젊은 여자가
재미없는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은 다음 등장한 남자다. "제가 옛날에 구사대였거든요"
'피디수첩'도 '정범구의 세상읽기'도 아닌 30대 여자 코미디언과 40대 남자 가수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등장한 '구사대'에 내 귀는 긴장한다. 그러나 긴장은 이어지지 않는다. 30대
여자 코미디언과 40대 남자 가수는 '구사대'를 모른다.

"제가 옛날에 구사대였거든요." "뭐라구요?" "제가 옛날에 구사대였거든요." "구사대? 구사대가
뭐지?" "제가 옛날에 구사대였거든요." "구사대라, 회사를 구하는 대다 이건데, 어쨌든 그래서요."
30대 여자 코미디언과 40대 남자 가수는 어물쩍(방송용어로 순발력이라고 하는) 넘어간다.

'구사대'라는 말을 모르는 30대 여자와 40대 남자를 어찌 생각해야 할까. 나는 당혹스럽다. 나는
'교양'에 대해 생각한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교양이 문화적인 지식이나 감정표현의 절제, 우아한
말과 행동 따위라는 생각은 봉건적이다. 그것은 결국엔 맨얼굴이 될 유한계급의 사회적인
메이크업일 뿐이다.

아마도 교양이란 '사회적인 분별력'일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반드시 자기 힘으로가 아니어도), 그게 교양이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교양은 근대적인 사회에 주어지는 축복이면서 더욱 근대적인 사회를
지향한다. 말하자면 교양은 그지없는 진보다.(보수적인 교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보수란
사상이 아니라 그저 '욕망'이다. 남보다 더 가진 걸 내놓지 않으려는 노력이 사상인가.)

버스가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라디오 소리는 디젤엔진에 묻힌다. 나는 '구사대'를 모르는 30대 여자
코미디언과 40대 남자 가수의 애처로운 교양과 그들이 꾸려주는 허섭쓰레기를 들으며 피곤한
저녁을 맞는 근로대중들의 가소로운 교양 환경을, 사회문화적인 이슈만 있으면 유럽과 비교하여
제나라를 비하하는 게 일인 문화인들(유럽형 한국인)의 안개 낀 교양 환경과 비교한다. 나는 30대
여자 코미디언과 40대 남자 가수의 애처로운 교양을 용서한다. 나는 다시 썩은 세상을 욕하면서 그
기원인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강북 아저씨들의 시궁쥐 같은 교양과, 여전히 옛 여당을 그리는 강남
아줌마들의 암내나는 교양과, 조선일보를 보며 하루를 안도하는 파시스트들의 구역질나는 교양과
그 이빨에 편승하여 안도하는 중산층의 악어새 같은 교양에 대해 생각한다.

서럽게도 이 나라의 어디에도 조직적인 교양은 없어 보인다. 아무래도 이 나라는 봉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게 분명하다. 윗줄에 있는 놈들은 여전히 '마님'의 교양(사람의 귀천은 하늘이 정한
것이며 세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을 유지하고 아랫줄에 있는 이들은 여전히 '머슴'의
교양(모든 것은 운명이며 주는 대로 받아먹고 죽은 듯이 일한다)을 간직하는 것 같다. 나는 다시
이 나라의 나머지를 머리통 속에 넣고 검색해 보지만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의 폴더에 다다르자
또다시 미궁에 빠진다. 글쓰는 일을 '내공'이니 '진검승부'니 하며 한낱 재주 겨루기로 여기는 그
양아치 같은 교양과, 사상이라는 패키지 상품을 10년에 한번씩 개비하는 그 이동변소 같은
교양과...  (1998년_9월)










교회


술자리에서 내가 기독교인임을 밝히면 사람들은 당황한다. 그런 자리에서 그런 얘길 꺼내는 일이
웃기는 데다 나라는 인간이 도무지 교회 나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구석이 없기 때문일 거다. 사람들
짐작대로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인이다. 아이가 경기라도 하면 나는 며칠
사이 지은 죄를 떠올린다. 나는 예수에 의지한다. 내가 가진 단출한 지식과 사상을 통틀어 예수의
삶만큼 나를 지배하는 건 없다. 나는 진정으로 사회주의를 소망하고 내 나머지 삶을 연관시키려
하지만 사회주의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영혼을 따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며 나는 기독교인이다.

내가 처음 교회에 나간 건 중학 2학년 때였다. 교회는 나더러 믿으면 축복 받는다고 약속했는데 그
믿음의 세기와 축복의 양은 정비례한다고 했다. 믿음이란 교회에 열심 하는 것이고 축복이란
돈이나 명예, 건강 따위의 것들이었다. 교회는 욕망으로 물든 담장 밖을 말했지만 실은 담장 밖의
욕망에 찌들어 있었다. 교회는 언제나 영혼을 말했지만 영혼을 얻는 일이 돈을 잃는 일이라면
그마저도 없었을 거였다. 머리가 커가면서 나는 교회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제 새끼만
챙기는, 내 아버지보다 더 이기적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교회에 다녔지만
교회가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은 적어져 갔다. 교회에 다님으로써 일어나는 삶의 변화란 교회에
다니는 일 외엔 없었다.
내가 한신에 들어간 건 우연이었다. 나는 그곳이 문익환이나 장준하 같은 거인을 배출한 곳이라는
것, 인권운동의 젖줄이자 민중신학의 본산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마쳤을 때 내
관심은 오토바이와 음악, 그리고 여자에만 있었다. 내일이 없는 삶을 하루하루 태워가던 건달이
그래도 대학은 다니라는 권고를 받아들였을 때 나는 한신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머리통이 뒤집히는 충격을 받았다. 교회의 사회 참여. 정의의 하나님. 비천한 자들의 예수. 한
소년의 삶에조차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던 교회가 세상의 한 가운데서 세상의 바닥을 갈아엎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기독교임을 사랑하게 되었다.

보수 교회의 건물에 진보 교회를 칠하는 일은 무리였다. 경악한 목사와 장로들은 내게서 청년부
회보를 만드는 권한을 빼앗았고 나는 교회를 나왔다. 아버지가 눈물을 보였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친구 소개로 찾아간 교회는 작았다. 목사는 알려진 소설가였고 50명 남짓한 신도는
지식인들이었다. 나는 지쳐 있었고 새로운 교회의 진보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는 잠시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다시 교회를 의심하게 되었다. 광주항쟁 3주기가 되는 예배 시간.
목사는 감동적으로 설교했다. 목사가 눈물을 흘리자 신도들도 울기 시작했다. 예배가 끝나도
흐느낌은 그치지 않았다. 땡. 교단의 종이 울리고 목사는 웃으며 야유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신도들은 이제 야유회에 맞는 얼굴이 되었다. 장소에다 회비까지 정해지고 드디어 신도들은 개운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교회는 한줌의 양심과 사회의식을 마스터베이션하고 있었다. 징그러웠다.
나는 교회 문 앞까지 왔다가 되돌아가기를 거듭했다. 나는 청년부 총무였고 두 달만에 교회에
나갔을 때 회원들은 해명을 요구했다. 내가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모두 내 눈길을 피했다.


교회에는 예수 대신 맞춤식 예수상(像)들만 모셔져 있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하려던 나의 소망을
접고 입대했다. 그곳에서 세 번의 살인과 세 번의 자살을 생각했고 김씨 성을 가진 여자를
떠나보냈으며 김씨 성을 가진 창녀에게 구혼했다. 이제 십 년이 더 흘러 나는 며칠 후면 서른
여덟이다. 나는 이제 나보다 다섯 살이 적어진 예수라는 청년의 삶을 담은 마가복음을 읽는다.
내가 일년에 한번쯤 마음이라도 편해 보자고 청년의 손을 잡고 교회를 찾을 때 청년은 교회 입구에
다다라 내 손을 슬그머니 놓는다. 내가 신도들에 파묻혀 한시간 가량의 공허에 내 영혼을 내맡기고
나오면 그 청년은 교회 담장 밑에 고단한 새처럼 앉아 있다.  (1998년 12월)










딸 키우기


김단. 먹고 자는 시간을 뺀 하루의 대부분을 그리기와 종이접기 따위로 보내는 내 딸이다. 김단이
태어나자 아내와 난 김단에게 결혼을 권유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갓난아일 두고 좀 싱거운
짓이었고 얼마간 관념적이었지만 여자가 자존을 지키며 살기 힘든 세상에 또 하나의 여자를 내놓은
장본인들은 긴장했고 그렇게라도 미래를 대비하고 싶었다. 김단은 사랑니 빼러 치과에 가본 일
말곤 병원 근처에도 가본 일이 없는 아비와는 달리 세 살이 되기 전에 입원을 두 번씩이나 해서
애를 끓였다. 그후론 별 탈 없이 자랐고 언젠가 샤갈 화집을 사준 이후 커서 '화가아저씨'가
되겠다고 말하는 김단은 다섯 살이다.

다섯 살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밖에서 놀다 들어온 김단이 내방 문을 두드렸다. "아빠,
삼식이(가명)가 내 고추 만졌어." 나는 놀랐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랬어,
언제?" "응, 어제." 김단은 어제 이상의 과거는 전부 어제라고 말하지만 눈치로 볼 땐 이삼 일 전
일이다. "아빠한테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 "엄마한테 말하면 안 되는데..." "엄마한텐 말 안
할께. 약속. 그런데 아빠한테 말해야 아빠가 도와주지." 망설이던 김단은 말했다. "응, 삼식이가
내 고추 만지구 엄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어." "아빠가 삼식이 혼내 줄께. 다시는 안 그럴 꺼야.
그런데 혹시 다른 오빠나 아저씨가 단이 몸 만지면 단이가 싫다고 말해야 해." "그래도 만지면?"
"그땐 막 화내고 미운 말 해도 돼. 그리고 아빠한테 꼭 말해야 돼. 그런 오빠나 아저씨들은 다
겁쟁이들이니까 아빠가 혼내줄 수 있어. 약속할 수 있지?" "응."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까지 찍었지만 나는 엄마에게 비밀로 하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아내는 다음 날 삼식이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이 일을 일러주었고 삼식이 엄마는 아들에게 성교육을 시작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일거리('영화언어 발행인'이라는 그럴싸한 직함과는 달리
최근 이삼년 동안은 남의 책을 만들어 주거나 몇 푼의 원고료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끼적거리는
부업에 전념하는 편이다.)를 주겠다는 후배와 마주 앉아 애를 쓰고 있는데 집에서 삐삐가 왔다.
바로 전화를 했더니 김단이 눈 밑이 퍼렇게 되어 들어 왔단다. 김단은 지 아비를 닮아 무척 고집이
센데 완력은 그 고집에 못 미치다 보니 남자아이들한테 얻어맞는 일이 잦았지만(예나 지금이나
애나 어른이나 남자에게 항거한 여자에게 돌아오는 건 주먹뿐이다.) 그래도 눈탱이가 퍼렇게 멍이
든 건 처음이었다. 아내는 이 잘난 가장에게 지침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우선 김단이 제딴엔
놀랐을 테니 잘 안정시키라고 아내에게 이른 다음, 놀라긴 매한가지로 보이는 아내에게 때린 놈
엄마한테 전화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삼가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나는 아내에게 아들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는 걸 보고도 그냥 지나가던 김단의 할머니 얘길 해주었다.

제법 가장 노릇을 해내고도 나는 담배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드디어 상황은 시작된 것이다. 이제
김단은 나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떨어져 지내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일어난 일보다 훨씬 심각한
일들이 일어날 가망성도 점점 커질 것이다. 하지만 김단은 점점 더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얘기해주지 않게 될 것이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도 점점 작아질 것이다. 결국 김단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김단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강한 여자로 키워야 한다. 최악의 상황을 만나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울면 안 된다. 우는 여자가 남자를 이길 방법은 없다. 어떤 경우에도 울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육체적인 힘도 중요하다. 태권도나 검도를 삼 년쯤 배우면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맞진 않을 것이다. 킥복싱도 좋은데... 온갖 생각을 하며 담배 연기를 뿜던 나는
재미있는 상상에 접어들어 빙그레 웃었다. 15 년쯤 지나(그보다 훨씬 빠를 수도) 김단이 제 남자
친구와 처음으로 여행을 가는 날, 나에게 어떤 거짓말을 할까. 나는 과연 김단에게 속을 것인가,
아니면 속는 체 할 것인가. 아마 김단은 나를 속일 수 있을 것이다. 강한 여자는 남자를 속일 수
있다.  (1998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