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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vs 조선희, <오아시스>를 말하다

아/ㅣ 2002. 8. 21. 17:58 Posted by 로드365

˝소외된 사람들의, 가장 본질적인 사랑 이야기˝


소설가와 일간지 문학담당 기자로, 영화감독과 영화전문지 편집장으로, 그리고 영화감독과 소설가로, 이창동(48) 감독과 조선희(42)씨의 만남은 10년 넘게 이어져오고 있다. 특별히 친하다고 할 것도 없지만, 조씨는 이 감독을 만나자마자 “<오아시스> 지지자 중에서도 열렬한 극좌파”임을 고백해버리고 말았다. 8월 초 출간되는 조씨의 첫 장편소설 <열정과 불안>에 대한 이야기가 인사말처럼 오간 뒤 시작된 대담에서, 조씨의 호의적인 질문과 이 감독의 고해성사적 답변이 기묘하게 맞물리는 상황이 자주 연출됐다. 이 감독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또는 “이거 말이 되나?”라는 자기 반문을 수시로 던지면서도 쉽게 말하기 힘들 것 같은 자기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편집자

이창동 조선희씨랑 대담하면 안 좋은 게, 사기치기가 쑥스러워서.
조선희 <오아시스>에 대한 반응이 어때요?
이창동 반응이 썰렁한 것 같애. 느낌에.
조선희 어제 대한극장 시사에서도 그렇게 얘기했다면서요. 이번 여름에 날씨가 하도 더워서 좀 썰렁한 영화가 시원해지라고 하는 거다, 그렇게 말하셨어요?
이창동 썰렁하다 못해 추워서 더위를 잊기에는 좋을 것이라고 했지.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 가끔씩 자제가 안 되는 경우가 많죠.
조선희 실제로 작품에 대해 내심 좀 마음에 안 들거나 이건 버렸어, 뜻대로 안 됐어 이런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에요?
이창동 그렇진 않아요. 사람들이 뭐보다 낫다, 이런 식으로 자꾸 이야기하잖아요. 발전했냐? 안 했냐? 그런데 발전, 성공 이런 거 체질적으로 되게 싫어하니까. 그런 거는 의식조차 하지 않는데 그래도 한 작품 할 때마다 힘들지만 어떤 식으로든 한 걸음 내디뎠냐,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보면 어쨌든 내가 안고 있었던 고민을 가지고 나름대로 힘들게 뒹굴었다고 생각해요. 만족이라는 건 원래 없는 거니까.

촬영 - 100% 들고찍기, 프레임의 경계를 뛰어넘기

조선희 촬영과정에서 이전 두 작품보다 훨씬 힘들고 고초를 겪은 것 같은데 어떤 대목이에요?
이창동 4회를 찍고 새로 찍기 시작했죠. 영화를 이런 방식으로 찍자고 나름대로 컨셉을 세웠던 게 첫날 벽에 부딪혔다고. 내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구나. 다 들고찍기를 하려고 했는데, 첫날 들고 찍어보니까 이게 완전히 라스 폰 트리에야. 너무 카메라가 현란하게 돌고, 원래 이건 아닌데. 일단 촬영을 중지하고 고민 좀 해보자, 그리고 깊이 반성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 찍기 시작한 거죠. 그외에 특별히 어려운 건 없었어요. 문제가 될 만큼.
조선희 그것도 홍보성 멘트예요? 실제로 내가 이정란 선배, 부인에게 물었을 때 이창동 감독이 예전 영화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힘들어 해서, 충청도 어디서 홍삼을 가져와서 꿀에 절여 보급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창동 홍삼을 꿀에 절였다는 거 쓰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걸 혼자서 먹기가 민망하잖아. 그런데 먹기는 먹어야겠고. 그래서 이거 위장약이야 하고. (웃음)
조선희 그런데 들고찍기 했으면 분위기가 확 달라졌을 텐데.
이창동 다 들고찍기를 했어요. 들고찍기에 대한 개념을 내가 스스로 정리를 한 거지. 내 나름대로. 원래 영화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고민 했거든. 영화는 프레임이잖아. 프레임 잡으면 나머지는 없는 거예요. 무라고. 프레임 잡은 게 완결된 미적세계고. 영화를 한다는 건 프레임의 세계를 절대시하고 나머지는 다 빼버리는구나, 그러면 프레임은 뭐지? 그게 영화매체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다루는 매체의 굉장히 오래된 관습일 거라고 생각해요. 화폭도, 프레임 안으로 도려내잖아요. 지금 디지털도 나오면서 점점 프레임을 부수기 시작하죠. 프레임이 흔들린다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미세하게나마 흔들리고 있다는 게 닫혀진 구조를 깨려고 하는 거죠. 적어도 보는 사람은 그걸 느껴요. 프레임 안에 갇혀 있다는 걸 느끼질 않죠. 핸드헬드는 거기에서 출발했죠. 그런데 나는 카메라의 자유로움이랄까, 디지털처럼 자유롭고 유용하게 사용하기를 원했지만, 이게 움직이니까 새로운 형식과 문법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 움직임 자체가 하나의 형식이 돼버리는 거예요. 그것도 남들이 다 했던 것.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서 다시 카메라를 트라이포트 위에 얹고 나사를 조였죠. 그러니까 다시 옛날 방식, <박하사탕2>가 됐죠. 이게 아니다. 출발은 형식을 깨려고 한 건데, 그게 새로운 형식이 되니까 그걸 피하려고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는 태도가 인간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그래서 4회차에 끊은 거라구. 그러면 돌파구가 뭐가 있지? 고민하다가 그냥 그렇게 많이 움직이지도 말고, 그냥 들고찍자.
조선희 그게 100% 핸드헬드예요? 그런 것 치고는 파리채처럼 흔들리는 느낌이 없던데요.
이창동 처음에는 파리채처럼 흔들렸죠. 접점을 찾은 게 많이 흔들지는 않되 그래도 메자. 요 지점이 나 스스로도 납득시키기가 힘든 거지. 카메라 가만히 있는데 왜 메냐? 나도 몇번 메봤는데, 숨쉴 때마다 움직이게 돼 있고 힘줄수록 더 움직이게 돼 있거든. 그런 납득이 안 되는 고민, 싸움을 많이 했다니까.
조선희 그래도 결과를 놓고 보니까 프레임의 정형을 탈피했다는 느낌이 드는 거죠?
이창동 관객이 뭔지는 모르지만 거칠다고 할까,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느낌이 들 거라고 봐요.


소재 - 사랑? 멜로의 방법론은 모조리 피하자

조선희 아까 한발 내디뎠냐, 아니냐를 생각했다고 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어디까지 더 나아갔다고 생각하세요?
이창동 우리가 자기하고 같지 않은 걸 못 받아들이잖아요. 특히 한국 사람이. 이 두 사람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이죠.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는 더 힘들죠. 근데 영화에서는 그게 가능해요. 영화에는 온갖 장치가 다 있으니까. 영화적이라고 흔히 말하는 것들. 관객의 동의만을 이끌어내면 되니까. 때론 거기에서 여러 가지 사기와 영화적 거짓이 만들어지는 거거든요. 나는 받아들이기 힘든 두 사람의 사랑을 보여주는 거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 묻는 거니까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이거 말이 되나. 그러니까 멜로영화가 가지고 있는 온갖 방법론을 피하고 싶었던 거야. 음악도 없어야 하고. 멜로드라마할 때 멜로가 멜로디에서 온 거거든. 거기에는 본질이 숨어 있어요. 음악 위에 드라마를 싣는 거잖아. 중요한 건 멜로디지 드라마가 아니라고. 관객의 감정을 조작한다 그럴까. 그런 영화적 장치들을 피해가거나, 혹은 부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조선희 처음엔 전과자가 뇌성마비 여자를 사랑하는 얘기라는데 좀 억지스럽지 않을까, 그런 예상을 했어요. 영화를 보면서는 참 자연스럽다고 느꼈어요. 예컨대, 감옥에서 2년 반 동안 남성호르몬을 억제당한 사람이, 대단한 도덕의식 같은 것도 없는 젊은 남자가 빈집에 버려진 뇌성마비 여자를 봤을 때 강간의 충동을 느끼도록 설정한 게 굉장히 리얼해요. 이 모든 과정이 설명되는 건 종두라는 캐릭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무기나 경쟁력도 없고, 사회화 과정도 없고. 하얀 도화지 같은 인물이에요. 행동 하나하나가 다 튀고 대책이 없는 인물, 이 사람이 세상을 헤쳐나가는 데에 어떨지 감이 안 서잖아요.
이창동 그런 인간은 사회와 격리시켜야 해요. 실제로 격리시키잖아요. 우리의 제도가. 그런 인간은 대책이 없다. 정신병동에 갇히기에는 증세가 뚜렷하지 않으니까 격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죠. 가족조차. 그게 우리가 갖는 이른바 모더니티의 판단이에요. 그럼 우리는 뭐냐. 우리가 맞다고 믿는 건 뭐냐. 소위 말해서 사회화, 사회에 적응을 해야 한다, 그래야 어른이 된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 사회화의 내용은 뭐냐. 따지고 보면 한심한 거거든요. 밤에 라디오 틀면 안 돼요. 크게 틀면 안 돼요. 공부하는 수험생 있는데. 사회화의 내용이라는 게 그런 거죠. 자장면 오토바이 타고 의정부 가면 안 되고, 영화 찍는 데 방해하면 안 되고, 참 답답한 거지.





조선희 그러니까 상식을 뒤집고 싶은 의도가 있었고 그걸 위해서 캐릭터를 만든 거죠?
이창동 당연하죠. 공주 오빠 이름이 상식이에요. 한상식. 그리고 관객에게는 전혀 전달할 필요도 없는 건데, 나 혼자 이해하는, 영화를 만든 우리만이 이해하는 코드가 있어요. 설경구 이마에 보면 약간의 반점의 흔적이 있어요. 그거 화면에 잘 안 보이는 데도 세심하게 분장했어요.
조선희 그게 무슨 반란의 징표인가?
이창동 장수가 될 놈이 태어나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갖다버리죠. 동서를 막론하고 있는 설화잖아. 그게 사회화가 안 되는 인간이거든. 사회화가 안 되는 인간이 뭔가 징표가 있는 거예요. 그런 코드는 관객은 모르겠죠. 우리가 사회화라고 말하는 게 옛날에 장수를 내다버리는 거하고 똑같은 가치예요.
조선희 감독이 종두에게 특히 애정을 갖고 있는 건 어떤 부분이에요?
이창동 종두는 경계에 있는 인간이거든요. 보통 사람과 또라이의 경계, 아주 바보 같기도 하고 굉장히 영악한 놈 같기도 하고. 어느 쪽으로도 규정짓기가 힘든 인간이죠. 설경구도 연기하기가 굉장히 힘들었을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줄 위에서 줄타기 한 것 같을 거야. 어떤 순간에는 너무 정상처럼 보이고, 어떤 순간에는 바보 같고, 미친놈 같고, 그 선을 한발만 넘으면 위태롭고. 그 캐릭터가 나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조선희 얼마 전에 <오아시스>를 먼저 본 사람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었냐면, 1시간 반 동안 문소리가 계속 몸 뒤트는 걸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문이라는 거예요. 이 영화를 보기가 고통스러운 게 문소리가 몸 뒤틀고 있는 것보다도 영화에서 주인공 나름대로 순진무구한, 러브스토리를 꾸며가는 이들을 두고 주변에는 박해하는 인간들뿐이잖아요. 부모, 가족, 경찰, 심지어 목사까지 가담해서 거드는데, 우리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이 주류의 입장인 거라. 우리도 전과자를 대할 때 비슷했을 거예요. 주인공 둘이 한없이 몰리는 상황도 보기 힘든데다가, 우리가 그 가해자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게 굉장히 괴로운 것 같아요.
이창동 그 사람들이 특별히 사악하거나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도록 굉장히 조심했어요. 아주 교양있는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사회화된 상식의 평균치라고 생각했죠. 그들 나름대로는 종두나 공주를 걱정하고 생각해요.

“나는 받아들이기 힘든 두 사람의 사랑을 보여주는 거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 묻는 거니까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이거 말이 되나. 그러니까 멜로영화가 가지고 있는 온갖 방법론을 피하고 싶었던 거야. 음악도 없어야 하고.”
이창동


주제 - 소외된 인간의 사랑을 찾아서

조선희 우리는 상업영화 패러다임에 길들여져서 중간부터 자꾸 조바심이 났어요. 저 주인공들을 구원해야 하는데, 수렁에서 건져야 하는데. 어쩌려고 그러지? 나중에 공주가 주장을 하나? 그게 받아들여지나? 근데 아무리 시간을 끌면서 봐도 그런 식의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누명도 안 벗기고, 수렁에 빠뜨린 채로 끝내는 거야. 근데 그게 현실에 가깝거든요. 극단의 아웃사이더, 극단의 약자가 오해를 벗고 누명을 풀 힘이 없거든, 현실에서는. 현실적인 결말을 선택한 거야. 감히 영화판에서 어떻게 저렇게 끝을 낼 수 있지, 겁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이창동 그보다는 나는 사랑이라는 것의 상징이랄까, 그런 걸 더 생각했어요. 소외된 인간들의 사랑이라고 해서 별난 사랑으로 그리려고 했던 게 아니고, 오히려 감히 욕심을 부리자면 누구다 다 해보는데 가장 본질에 가까운 사랑을 그리려고 했던 거죠. 사랑이 가장 본질에 가까워지면, 가장 흉하고 추한 자들의 사랑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자들의 만남이 아닐까.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지 모르지만. 사랑의 본질로 보면 남자 입장에서는 파괴하려고 와요. 욕정을 가지고 온다고. 생물학적 법칙이죠. 강간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죠. 너무 갔나? 그리고 그것이 다른 어떤 걸로 승화되죠. 같이 판타지를 꿈꾸지. 사랑이라는 판타지는 정말 필요한 거잖아. 그건 조물주가 인간뿐 아니라, 모든 개체에게 놓아주는 마취제거든요. 생명력을 위해서. 생명력의 기초지. 그렇게 소중한 건데 워낙 흔하다보니, 워낙 세속화되고, 복제가 횡행하다보니 그 판타지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원래 의미를 잃어버리거나 훼손되거나 퇴색한 그런 판타지가, 사랑이 가장 크죠. 그런 점에서 사랑의 본질까지도 생각해보고 싶었어요.
조선희 그건 느낌이 오네. 가장 외로운 자들이 할 수 있는 사랑.
이창동 우리가 사랑을 느낄 때, 감격하는 이유가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지 그런 거 아닙니까. 판타지를 공유하고 있는 두 사람. 판타지니까 주관적이죠. 하지만 주변의 객관은 차갑죠.
조선희 사련이라는 말 있잖아요. 죽을 사자를 쓴 사련. 완전히 버려진 두 사람의 사랑, 아니면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 그 사랑으로 인해서 모든 걸 다 버려야 하고, 파문을 당하면서도 감당하는 사랑.  
이창동 그것도 한 가지 예가 될 수 있죠. 유부남, 유부녀의 사랑. 불륜이잖아요. 그것도 사회적 가치의 판단이거든. 근데 그건 너무 특수화돼 있으니까. 오히려 본질에 가깝기는 종두와 공주 같은 인물일 거라고 생각해요. 설명할 길도 없고, 사랑의 특성인 판타지를 실현하는 방법도 없고. 그 방법도 사회적으로 다 마련돼 있어요. 결혼, 내집 마련, 육아, 태교 등등. 그게 제도와 문명이 마련해 놓은 거지만, 과연 그게 사랑의 실현이냐. 정말 사랑을 실현하는 건 뭐지. 그건 종두처럼 나무를 자르는 것이 아닐까.  


관객 - 이야기꾼의 고민, 감독의 고뇌

조선희 둘이 사랑도 완성하고 주변과도 화해하면 금상첨화일 텐데. 관객도 바라는 바거든요. 그런데 영화를 보면 그 감독 참 지독하다는 생각 들어요.  
이창동 관객이 단순하지 않아요. 내가 그렇게 화해시켜봐요. 바로 욕해요. 그럴 줄 알았어라고. 관객은 그렇게 영악해요. 영악하기보다 잔인해요. 화해도 하고 오해도 풀길 원하지.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 마무리짓는 순간 실망해요. 왜냐하면, 가짠줄 아니까.
조선희 그래요. 이중적이죠. 한편으로는 그럴 줄 알았어 하면서 그런 방향으로 안 가면 불편해 하는 거야.
이창동 그게 이야기꾼의 고민이죠. 그렇지만 자기 노선을 분명히 선택해야 해요. 관객이 원하는 걸 줄래? 아니면 관객이 원하지는 않지만 어느 지점에서 만날래? 이거죠. 내가 하는 대로 관객을 일방적으로 끌고올 수도 없고. 그래서 섹스행위와 비슷하다고 보는데, 내가 창녀가 될 수도 있어요.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어요. 강제로 할 수도 있죠. 그러나 그러지 않고 서로가 좋아서 만나서, 어떤 순간에 접점이 있다고 믿죠. 그런 믿음이 없으면 갑갑하지. 절망이지. 이런 고민은 나한테는 적어도 수십년된 거거든요. 글을 끼적이든, 영화를 하든.


캐릭터 - 평균 이상은 없다, 평균 이하도 없다

조선희 주인공 빼고, 나머지가 다 나쁘게 그려져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주인공들이 벼랑 끝에서 사랑하는 거니까 우화적인 단순화나 과장이 있을 수도 있다고 보는데.
이창동 나는 과장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주변 인물이 다 평균적이지 않은가. 주변인물이 특별하게 보이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죠.
조선희 가령 <델마와 루이스> 봐도 주인공들이 벼랑에 몰려도 경찰 중에서 하비 카이틀처럼 그들을 이해하는 사람을 하나 박아놓음으로써 관객과 다리를 놓잖아요.


“처음에 이 영화 찍는다고 들었을 땐 전과자가 뇌성마비 여자를 사랑하는 얘기라는데 좀 억지스럽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들더라고요. 영화를 보면서 그게 굉장히 자연스럽게 설명이 된 것 같아요. 감옥에서 2년 반 동안 남성호르몬을 억제당한 사람이, 대단한 도덕의식 같은 것도 없는 젊은 남자가 빈집에 버려진 뇌성마비 여자를 봤을 때 아랫도리가 설 것 아녜요.”
조선희


이창동 우리 그런 거 안 좋아하지. 주변 인물에게는 선악은 없어요. 상식은 있지. 우리의 상식, 우리의 관습, 시스템, 사회화 이런 거는 있죠. 주변 사람들이 왜 저러냐,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상식이 왜 저러냐고 생각해야 하지 않나.
조선희 대개의 감독들은 자기 속은 시궁창이라도 영화는 뽀시시하게 만들잖아요. 그런데 이창동 감독은 반대예요. 내가 서른다섯살 이하라면 이창동 감독은 사람이 좀 문제있을 거야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 나이가 들다보니까 그 결벽주의를 이해하게 돼요. 우리 안에 다 똥개가 한 마리 들어 있는 거야.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달콤한 냄새만 나면 쫓아가서 핥아먹는 거야. 그러나 사람들이 그걸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지. 똥개가 들어 있어 그러면 신경질내고 짜증을 내지.
이창동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 속에 있는 똥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불편한 게 아니고, 똥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판타지가 있잖아요. 그걸 깨니까 불편해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내 영화를 보고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그게 영화라는 판타지가 아니어서 불편할 거예요.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특별히 과장돼 있거나, 특별히 더 부정적으로 그리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뭔가가 빠져 있어서, 그게 현실처럼 느껴지니까 싫은 것 같애요. 내 생각에는 똥개라도 조금 영화처럼만 그려놓으면 웃으면서 보잖아요. 그래 맞아, 나도 똥개야. 그런데 영화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불편한 것 같아요. 나는 이 영화 찍으면서 화두가 사랑이라고 했죠. 사랑과 판타지라고 했죠. 그 등가에 놓을 수 있는 게 영화라고 생각해요. 영화도 판타지죠. 영화를 볼 때 기대하는 마취상태가 있어요. 그걸 안 주니까 불편해지죠. 나는 이번에 사랑이라는 판타지를 놓고도, 관객하고 끊임없이 너무 판타지 속으로 밀어내지도 끌어들이지도 않고 그 선에서 계속 부딪치고 싶었어요. 영화라는 판타지도 마찬가지였어요. <오아시스> 찍는 동안 나한테는 사랑과 영화가 똑같은 것이었어요. 이 사랑을 어떻게 보여줄까가 곧 이걸 영화적으로 어떻게 보여줄까의 문제였으니까. 관습화된 건 무수히 많아요. 관습화된 사랑 이야기, 관습화된 영화문법 무수히 많거든요. 그것과 끊임없이 부딪쳐야만 했거든요. 그게 틀림없이 관객을 불편하게 하죠. 그렇지만 그게 내 의도였기 때문에, 그 불편함의 끝까지 가서 결국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냐 없냐는 문제였단 말이죠. <오아시스> 중간에 종두가 영화 레커차 따라가는 장면은 내가 오버한 거죠. 내가 의도를 일부러 지나치게 심은 거죠. 오토바이 타고 촬영차 따라갈 때 촬영차는 굉장히 판타스틱하게 보이도록 찍었거든요. 영화라는 판타지가 관객에게 어떤 건지 나도 잘 알죠. 멜로라고 레테르가 붙어 있는 이 영화를 보러오는 관객이 어떤 판타지를 기대하고 오는지도 알죠. 나는 그 판타지가 뭔가, 그것까지도 질문하고 싶었기 때문에 일단은 불편하게 할 수밖에 없죠. 원하는 대로만 해줄 수만은 없죠.
조선희 처음에 영화의 컨셉을 듣고 여러 가지 걱정을 했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설득이 됐어요. 통한 거죠. 감독이 뭔가 믿는 바가 있으니까 밀어붙였겠죠. 그래도 영화를 보면서 중간에 판타지 대목들 있잖아요. 문소리가 멀쩡해져서 연애하는 상상 속의 장면이나 하얀 새, 코끼리 같은 건 관객에 대한 나름의 배려 아닌가. 주인공들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끝까지 몰고가는 것이기 때문에, 중간에 진통제를 줘가면서 고문하는 거다, 그런 배려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던데.
이창동 아니에요. 그렇다면 판타지를 더 아름답게 찍겠지. 공주가 판타지에서 정상인이 됐을 때 더 어색하게 보이잖아요. 그 적당한 어색함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자연스럽고 예쁘면 아무리 판타지지만 어색하지 않을까? 또 현실적으로 판타지가 충분히 초라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코끼리 나온다고 해서 코끼리가 뭐 대단한 거 하는 거 아니잖아요. 인도 여자도 별 볼일 없잖아요. 그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 그 긴장이 굉장히 중요했어요, 나한테는. 관객에게 서비스 차원으로 제공하는 게 아니고. 판타스틱하게 만들려면야 무슨 짓이든 못하겠어요. 판타지가 지나치게 아름답거나 지나치게 현실과 거리가 멀거나 하면 내가 이야기하려는 판타지가 아니죠.





배우 - 심리적 경계선과의 전쟁
조선희 <박하사탕>을 볼 때는 문소리와 설경구라는 신인배우가 이창동 감독 때문에 스타가 되는구나 생각했는데, 이번에 이 영화를 보니까 저 두 배우 아니었으면 영화를 엄두도 내지 못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대요.
이창동 설경구는 스스로 내게 진 빚을 갚겠다는 생각도 있어서 처음부터 한다고 했고, 문소리는 내가 대안이 없었거든요. 나도 영화판에서 밥을 꽤 먹고 살아서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거든요. 이 역이 여배우에게 치명적이 될 수 있거든요. 또 신체적으로 잘하냐 못하냐를 떠나서 심리적 벽이 있을 거예요. 그건 거의 공포에 가까운 거죠. 문소리는 작품에 대한 애정도 있고 헌신성도 있었죠. 촬영하기 한달 전인가 본인이 드디어 해봐야 하는데, 사전준비는 충분히 했고 공주 역을 해야 하는데 막상 시작이 안 되더라고요. 충분히 예상했음에도 본인이 너무 두려워해서. 그때 제일 큰 위기였죠. 속으로 접어야 하는구나 생각했죠. 갑갑했죠. 다행히 그걸 어떻게 넘었죠. 그 심리적 선을.
조선희 여배우로서는 진짜 쉽지 않은 선택이죠. 그런데 설경구가 계속 훌쩍거리잖아요. 그건 감독이 지시한 거예요, 배우가 개발한 거예요?
이창동 개발했다기보다 감기들어서 그랬을 거예요. 본인도 굉장히 갑갑해했어요. 설경구라는 친구는 코드가 꽂혀야 하거든요. 분석하지도 않고, 계산하지도 않고 연습도 안 해요. 시나리오도 안 읽어요. 시나리오가 촬영 끝날 때까지 거의 새 책이야. 그런데도 대사를 외워오는 걸 보면 희한한 놈이지. 그런데 코드가 꽂히면 그 인물로 움직이는데, 종두가 자기에게는 전혀 없는 역이거든요. 지금까지 모든 역할이 <공공의 적>까지도 자기 안에 있는 어떤 부분을 극대화시키는 거거든요. 그런데 설경구한테 홍종두는 없어요. 나한테는 있는데. 누군지는 알아요. 주변에 있으니까. 그러나 자기 안에 없거든. 걸음걸이부터 표정까지 다 만들어야 하니까. 무척 어려웠을 거예요  



조선희 설경구에게는 전의 어떤 작품보다도 인물을 가장 잘 살린 연기 같아요.
이창동 본인은 굉장히 불안해했거든요. 왜냐하면 자기 속에 없는 거기 때문에.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외줄타기, 정상인과 미치광이의 중간, 바보와 영악한 놈의 중간, 그런 보이지 않는 선. 현장에서 제일 싫어한 말이 한 테이크 가고 나서 “내가 너 너무 바보 같다, 종두는 바보 아닌데”, 또 어떤 때는 “너 너무 정상 같다” 그러면 미치려고 하죠. 굉장히 불안해했죠. 한번은 내가 그런 얘기 했어요. <박하사탕>의 김영호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고. 나 개인적으로. 훨씬 매력적인 인물로 생각한다고. 얘기해도 잘 안 믿지만.
조선희 류승완 캐스팅은 어떻게 캐스팅하게 됐어요?
이창동 조감독이 아이디어를 냈는대, 나는 개인적으로 잘 모르거든요. 오다가다 인사하는 사이일 뿐이지. 의외로 너무 쉽게 하겠다고, 단서를 붙이는데 섹스신만 없다면.(웃음)


이미지 - 쫓았나, 좇았나

조선희 요즘 악몽을 꿔요?
이창동 아니오.
조선희 그러면 영화찍는 동안에는?
이창동 가끔. 가위 눌리는 거 있잖아요. 나는 악몽을 틀림없이 꿀 텐데 깨고나면 잊어버리니까. 가위는 원래 자주 눌려요.
조선희 왜 40대 후반의 신체 멀쩡한 남자가 가위를 자주 눌릴까?
이창동 나는 내 손이 가슴에 얹혀지면 가위 눌려요. 자다보면 손이 얹혀질 수 있잖아요.
조선희 영화와는 관련이 없다는 거죠? 세편이 넘어 가니까 조금 뻔뻔해진 건가요. 영화가 좀 쉬워진 거예요?
이창동 아무도 동의 안 할걸. 이런 생각은 오히려 해. 내가 점점 미쳐가고 있지 않나. 실제로 그런 불안에 사로잡힌 적이 있어요. 영화를 찍을 때마다 내가 너무 전보다 더 작은 것에 집착하더라고요. 더 만족을 못하고 까다로워지고. 사람 이러다가 미치는 것 아닌가 하는 괜한 불안 같은 것 느낄 정도로 날카로워져요. 좀 두려움이 있죠.
조선희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영화를 찍을수록 스킬도 그렇고, 노하우도 그렇고, 제작팀의 팀워크도 그렇고 점점 안정돼 가야 하는 게 상식 아닌가요.  
이창동 이번에는 영화적인 걸 피해가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전하고 다른 방식의 사고를 요구했고. 영화적이지 않은 걸 찾는다는 게 무지 힘들어요. 카메라 대보면 그냥 앵글이야. 조명하면 바로 분위기가 만들어져요. 그걸 피해간다는 게 기준도 없고 뭘 찾는지도 모르겠고. 현장에서 다 힘들어했죠. 그게 생색나지도 않는 거고. 촬영도 멋있게 잘 찍으면 생색이라도 나지, 후지게 찍으려고 이렇게 노력하는데 누가 알아줘. 카메라도 서 있는데 왜 어깨에 메고 덜덜 떨고 있냐고. 촬영뿐만 아니고 연기자도 마찬가지고. 다른 모든 스탭에게 영향을 끼치죠. 미술도 그렇고. 정확하게 지향하는 게 없기 때문에. 뭔가를 피하긴 피해야 하는데. 그럼 찾는 게 뭐지? 이건 다들 막막하니까.
조선희 소설가라서 처음에 생각하기에는 내러티브에 의지해서 이야기 위주로 드라이하게 갈 거다 싶었는데 아주 이미지에 강해요. <초록물고기>도 막동이 차창 앞 죽는 장면이나, <박하사탕>도 영호가 기차 앞에서 나 돌아갈래 하는 장면이나, <오아시스>에서도(이창동-이미지가 있었나요?)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가 강렬했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떠올려 놓은 이미지가 있었나요?
이창동 이번에는 이미지를 피해가려고 애를 썼다고 말할 수도 있어요. <박하사탕>이나 <초록물고기>는 지금 말한 몇몇개 이미지가 머리 속에 처음부터 있었고, 그걸 영화에서 재현하려고 노력했죠. 그런 특별한 이미지가 아니라도 이미 머리 속에 뭔가가 있어요. 그게 영화 속에서 보여야 하는데 왜 안 되나 그런 고민을 했는데 이번에는 이미지가 뭔가 만들어지려고 하면 걱정이 되는 거 있죠. 이게 아닌데. <오아시스>에서 종두가 꽃들고 왔다가 꽃만 주고 나와가지고 앞에 공사장 인부들 잡담하고 있는데 혼자 멀뚱하게 서 있는 장면 있어요. 그런 장면이 좋아요. 정말 후지거든. 그건 이미지도 아니고 X도 아닌데, 그런 게 좋아요. 사실은 그런 게 몇개 없어요. 그런 걸 찾아내기가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개봉박두 - 쉬운 영화, 착한 사람들이에요

조선희 개봉이 보름쯤 남았는데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이창동 착잡하지 뭐.
조선희 왜 착잡해요? 지금까지 이래서 잘 만들었다고 설명해놓고.
이창동 그랬나. 그럼 안 되는데. 겸손하게 포장할 필요가 있는데. (웃음) 이렇게 잘 만들었다는 게 아니라 이런 의도였다는 거지. 근데 이번엔 진짜 잘 모르겠네. <박하사탕> 때는 정말 큰 기대 안 했어요. 사람들이 영화 좋다라고 말하는 게 의외였다고. 이렇게 잘 통한다 말이야? (웃음) 언제부터 당신과 내가 이렇게 잘 통했지? 이렇게 날 잘 이해한단 말이야?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관객이 좋아할 땐 정말 의외였어요. 젊은 관객이. 정말 이해하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때는 너무 기대 안 해서 감격한 측면도 있지만, 이번에는 그게 내게 영향을 끼쳤어요. 내가 믿는다 그랬잖아요. 정말 관객 함부러 볼 게 아니다, 뭐 내 영화를 이해한다고 해서 대단하다는 게 아니라. 내가 통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관객을 안 믿는 이중성이 나에게 있었어요. 소설 쓸 때도 그랬어요. <박하사탕>이 내게 이중성이 있다, 위선이 있다는 걸 알게 해줬죠. 지금은 솔직히 기대를 해요. 통할 거다. 그런데 그 기대가 그냥 상처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죠.



조선희 이제 남은 건 홍보 마케팅인데, 감독님도 열심히 뛰셔야죠.
이창동 내가 나오는 게 아무 영양가가 없어요.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박하사탕>을 보고 영화보니까 재밌던데 솔직히 보기 싫었데. 왜? 신문기사 보니까 또 뭐 예술이구나. 별거 아닌데 잘난 놈들끼리 아는 척하는구나. 괜히 보기 싫어지잖아. <박하사탕>은 그런 점 좀 있지. 좀 어렵잖아요? 시간도 거꾸로 가고, 광주도 나오고. <오아시스>는 무지하게 쉬운 영화인데. 감독이 다니면서 입 벌려봐야 영양가 있는 소리 하나도 없고.
조선희 그럼 이런 인터뷰도 조금 부담스럽겠네요? 예술로 비칠까봐.
이창동 그럼요. 말을 편하게 해야 하는데, 잘 안 되네. 입력돼 있는 말들이 그런 종류의 말밖에 없어서.
조선희 그래도 굉장히 검열을 해가면서 말하는 것 같아요. 장사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신경써가면서. 자꾸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려고 하고.
이창동 근데 그건 분명히 해야 해요. 나는 장선우 감독이나, 홍상수 감독 계열이 아니에요. 그쪽은 문제아 계열이에요. (웃음) 실제로. 나는 모범생 계열이에요. 나는 긍정적으로 발언해요. 긍정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내 영화의 전략이 뭐냐. 어찌됐건 건전하게 출발한 영화인데, 진지한 영화인데 흠잡기 힘들잖아. (웃음) 농담이지만 진담이지. 나는 긍정주의자고 낙관주의자고 이상주의적이고 인간을 믿으려 하고. 그런데 <박하사탕> 때도 경험한 건데. 영화 한편에 주제넘게 여러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잖아. <박하사탕>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착한 사람들이야. 굳이 그 얘기 안 해도 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좋아하고, 정작 말하고 싶은 사람들은 안 보고, 봐도 화내고. <오아시스>는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떤 게 있었냐면 뒤로 가면서 두 인물이 이뻐보이더라고요. 공주도 이뻐보이고, 종두도 귀여워 보이더라고요. 처음에는 위기라고 생각했죠. 원래 컨셉이 그게 아닌데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스탭들이 그게 자연스러우면 되는 거 아니냐, 우리가 굳이 관객을 동화시키려고 장치를 하지 않는데, 그것까지 위험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그러더라고요. 나도 그랬으니까 마찬가지로 관객도 영화가 가면 갈수록 두 인물이 사랑스럽게 보일 것 같아요. 그러면 된 거 아닌가 싶어요.


정리 임범 isman@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오아시스>를 보고 새로 쓴 조선희의 이창동론

시대가 낳은 리얼리즘, 리얼리즘이 낳은 리얼리스트

드디어 <오아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7월29일 첫 시사회를 가진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는 단번에 격정의 폭우를 쏟아붇는 법없이, 조금씩 젖어들어 마침내 깊은 슬픔과 아련한 희망에 이르는 희귀한 멜로다. 그리고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과 혈연을 확인케 하는 어쩔 수 없는 이창동의 자식이다. 8월15일 관객과의 해후를 앞두고 조선희 전 편집장이 그를 만나 나눈 긴 이야기와 새로 쓴 이창동론을 싣는다.
편집자

조선희 / 소설가, 전 <씨네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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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헤라자데의 운명
작가란 뭘까. 이야기꾼의 운명이란 어떤 것일까. 그건 세헤라자데의 운명과 같은 것은 아닐까.
세헤라자데는 밤마다 흥미진진한 얘기를 꾸며내고 그러는 동안 하루씩 사형집행이 늦춰진다. 원래 왕은 아름다운 여자와 하룻밤씩 자고는 목 매달곤 하는데 세헤라자데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서 관례를 깬다. 세헤라자데의 입담은 대단하다. 무려 1천일 동안 이야기가 마르지 않았고 왕의 호기심을 붙들어두었다. 이야기의 효과란 강력한 것이다. 여자에게 배신당한 기억 때문에 여자들만 연쇄살인하는 남자라면 마땅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이 왕은 3년 동안 왕비에게 매일 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편집증이 말끔히 치료가 됐다. 이야기는 왕의 광기를 잠재우고 세헤라자데는 목숨을 건졌다.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라는 책이 있지만, 세헤라자데의 캐치프레이즈는 ‘이야기가 우릴 구원할 거야’다. 이야기가 구원하는 건 이야기꾼만이 아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처럼 전면적인 해피엔딩은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에드거 앨런 포 같은 위악적인 작가라면 이런 해피엔딩이 참을 수 없었을 만하다. 그는 <천일야화의 천두번째 이야기>라는 짤막한 단편을 썼는데, 여기서는 세헤라자데가 기껏 1천일을 잘 버텨오다가 한번 실수로 결국 죽임을 당한다. 왕은 왕비의 입담에 홀려 있었지만 그것도 3년쯤 되자 싫증이 났던 모양이다. 1천두 번째 밤에 세헤라자데는 신밧드의 황당무계한 세계일주 이야기를 속편으로 풀어놓는데 이 판타지가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왕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소릴 지르면서 날이 밝자마자 왕비를 교수대로 보내버렸다는 것이다. 리얼리티로 치자면 이쪽이 훨씬 그럴싸하다. 기질적으로 타고난 변덕이 어딜 가겠으며,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 해도 편집증을 그렇게 말끔히 고치기는 쉽지 않다. 세헤라자데는 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고 나와 있다. ‘날 살려주면 아직 할 얘기가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재미난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버리다니, 왕의 불행이지. 이렇게 죽음으로써 왕한테 복수할 수 있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이군.’

세헤라자데가 현대에 살았다면 어떠했을까. 왕이 없어졌다고 좋아하긴 이르다. 왕 대신 ‘시장’이라는 것이 있고, 이 시장도 변덕스럽고 잔인하기로 치면 결코 왕 못지않다.

자기가 누구이며 진정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워낙 문화적인 암시와 통제가 강력해서 정체성이나 개성을 탈취당하고 사는 현대에서 예술가란 드물게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개인’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규정했다. 그러나 프롬도 “예술가의 지위는 상처입기 쉬운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 개성이나 자발성이 존중되는 것이 실제로는 성공한 예술가의 경우일 뿐이고 만일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그는 이웃사람들로부터 괴짜나 신경증환자 취급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몇해 전 우디 앨런의 <브로드웨이를 향해 쏴라>에서 우리는 바로 그렇게 이웃사람들로부터 정신병자 취급받는 극작가를 보았다. 깡패인 투자자와 작품계약을 맺고 깡패의 애인을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극작가 셰인은 한밤중에 창문을 열고 “나는 창녀야! 돈에 팔렸어!”라고 동네가 떠나갈 듯 소리친다.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돈에 몸을 팔았어. 내 예술, 내 작품도. 내가 그렇게 성공에 목을 맸던 걸까.”

작가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면 누구나 이 대사 앞에서 속이 불편해질 것이다.

소설가는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서 쓰고, 영화감독은 관객에게 보이기 위해 찍는다. 그건 최소한의 직업의식에 해당한다. 그것까지 부인한다면 그건 작가도 아니다. 그런데 독자와 관객 앞에서도 최소한 자신의 할말을 추스르고 마음에도 없는 말이나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은 하지 않는 게 또한 작가의 자존심에 해당한다. 한국영화판에서 우리는 어떤 작가들을 보면서 ‘아무래도 저 이는 직업의식 때문에 자존심을 버린 거 같아’라는 혐의를 걸게 된다. 그런가 하면 직업의식을 발휘하면서도 자존심을 별로 다치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 작가도 리스트를 작성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리스트에 이름이 오를 가장 확실한 멤버들 가운데 한 사람은 이창동이다.


2, 세 남자 이야기

<초록물고기> 이후에 나는 늘 이창동의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게 되었다. 세헤라자데의 왕처럼 호기심에 가득 차서.
90년대 이후의 한국영화 문제작들이 수많은 캐릭터들을 생산해냈지만, 그 인물들 가운데 대다수는 그야말로 트렌드따라 왔다가 트렌드 타고 사라졌다. 그런데 유독 이창동의 인물들은 다들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가 정확히 찍힌 주민등록증 하나씩 지갑 안에 넣고 우리 주위에 섞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중에서 <박하사탕>의 영호는 실제로 나하고 동갑이다. 60년생이고, 만일 그 철로 위에서 “나 돌아갈래!” 하고 두팔을 번쩍 들었다가 기차가 덮치기 전에 잽싸게 뛰어내려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면 지금 마흔세살이다. 나머지 두 사람, 막동이하고 홍종두는 다 내 후배들이다.

이들 세 남자 중에서 아무래도 조폭의 ‘똘마니’가 된 막동이가 나하고 노는 물이 제일 다르긴 하다. 하지만 우리가 자라난 동네가 도시개발로 사라지고, 다방 나가는 여동생을 나무라면서 그 여동생한테 용돈을 타 쓰고, 식당 하나 열어서 가족과 함께 사는 꿈을 꾸고, 뭐 그런 건 우리 자신의 모습들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그렇게 변화무쌍한 개발도상국을 살아왔으니까. 막동이가 형한테 전화를 해서 어렸을 적 초록물고기 잡겠다고 냇물에 들어갔다가 ‘쓰레빠’ 잃어버린 얘기를 할 때 나도 내가 잡으려던 초록물고기는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했었다.

막동이는 노는 물은 달라도 바탕은 순진한 녀석이었는데 영호는 아주 질이 나쁜 놈이다. 광주에 진압군으로 가서 죄없는 여학생에게 총을 쏜 거야 본인의 뜻이 아니었다 쳐도, 경찰서에 잡혀온 운동권 학생을 악랄하게 고문하고, 바람 피고 아내를 패고, 이건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다. 그가 스무살엔 사진작가를 꿈꾸었고 여자친구에게 박하사탕을 건네받으면서 수줍어했다 해도 그 죄상을 용서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불평하기도 했다. “나쁜 짓을 골라서 해놓고 왜 징징 짜면서 동정을 구걸하는 거야?”

광주가 끝난 뒤 80년대 내내 진보적인 지식인들 대다수는 자신을 광주의 전사들에 투사시켜서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다.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은 윤상원 주변쯤에 자신을 놓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홍희담의 <깃발>을 정치적으로 올바른 광주문학의 표본으로 간주했고, 나중에 <꽃잎>으로 영화가 된 소설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가 발표됐을 때는 ‘웬 핀이 나간 문제제기야? 피해의식으로 역사를 정리하려 하다니!’ 그런 평을 안겼다. 세월은 가끔 차이를 지우기도 하는 것이어서, 90년대가 되자 이젠 80년 당시 광주를 둘러싼 피아의 구분도 희미해졌고 그때 광주사람들을 폭도라 했던 이들도 마음 편히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90년대의 말에, 이창동 감독은 그들 광주의 전사 또는 광주의 피해자라는 대세에 몸을 의탁하지 않고 가해자인 진압군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건 좀 뜻밖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대부분은 침묵하는 다수가 됨으로써 광범한 가해자 그룹에 속해 있었던 게 아닐까.
영호가 진압군으로 광주에 갔을 때 나는 학교가 문을 닫았으므로 친구집에 이따금씩 모여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지금은 국회의원인 한 대학선배가 보자고 해서 동대문 부근의 허름한 다방에서 만났는데, 그는 광주의 상황을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 건데 나한테 배포조에 들라고 했다. 아마 집으로 돌아와서 며칠을 고민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카프카의 소설들과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 같은 책들을 한보따리 싸들고 낙향해서는 강릉 부근에 있는 삼덕사라는 절로 들어가버렸다. 그런 내가 <박하사탕>을 보았을 때, 내 안에 있는 영호가 기어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여하튼 막동이는 죽었고 영호도 정황으로 보건대 죽은 것으로 사료되는 지금, 오직 <오아시스>의 홍종두만이 살아남았다. 물론 지금 감옥에 있지만. 전과 3범에서 강간 전과 하나가 더 추가돼서 전과 4범이 됐으니 언제 출감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종두가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세 남자 중에서 종두에게 제일 마음이 쓰이고 또 연민이 느껴지는 건 그가 이 경쟁사회를 살기엔 너무 경쟁력 없는 인간이라서일지 모른다. 사회성 실조, 목표의식 부재, 자존감 결여의 이 경쟁력 없는 인간에게 세상은 한껏 험하게 굴 텐데.

<오아시스>를 보고나니 나는 자꾸 종두 생각이 난다. 예전에는 무심코 지나쳤을 어떤 장면에서 공연히 종두 생각이 나서 쉽게 발을 떼지 못한 채 머뭇거리게 될지 모른다. 어떤 남자가 한겨울에 반팔 남방을 입고 코를 훌지럭거리면서 버스정류장에서 서성댈 때, 자장면을 배달하러 와서 음식을 다 내려놓고도 괜히 미적거리면서 철가방을 든 채 우리 판을 기웃거릴 때, 영화 찍는 것 구경하겠다고 따라붙다가 오토바이를 탄 채 길바닥에 나동그라질 때, 무전취식하고 식당에 신발을 벗어준 뒤 맨발로 파출소에 잡혀갈 때, 길에서 꾀죄죄한 몰골로 담배를 얻은 뒤 비시시 웃으면서 담뱃불도 빌리자고 할 때, 나는 그 가운데 종두가 있을지도 몰라서 유심히 그 얼굴을 들여다보게 될 것 같다.


3, 천재성의 재료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이창동 감독이 만든 영화의 제목들이다. 같은 이미지를 가진 세개의 제목이다. 그의 영화에는 온갖 비열하고 치사한 사람들이 나오지만 그는 이 사람들을 통해 결국은 초록물고기나 박하사탕이나 오아시스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오아시스는 가장 밝고 낙관적이다. 전작인 <박하사탕>과 비교해봐도 그렇다. 우리가 역사를 생각할 때 무기력해지고 더러 패배의식에 빠지지만, 사람을 하나하나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도 그렇다. 개인에겐 구원이 좀더 가까운 데 있고 정 안 되면 판타지라도 있는 것이다. 역사에는 환상이 없지만 개인에겐 환상이 있다. 세상이 사막이라도 어딘가엔 오아시스가 있다. 심지어 전과자인 남자와 뇌성마비의 여자가 둘이서 손잡고 그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런 얘기들을 만드니, 이창동은 갈 데 없는 이상주의자다. 그런 이상주의자가 영화를 만드는데, 그 영화가 재미있다니! 인물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고 그들이 놓인 상황은 너무나 있음직하고 그래서 눈물도 나고 웃음도 나고, 그런 건 뭘까. 이야기꾼으로서 이창동의 힘과 매력은 어디서 오는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프로이트 평전을 쓰면서 뵈르너라는 독일 작가의 말을 따다가 발문을 붙여놓은 걸 봤는데, 이런 문장이다. ‘정직성은 모든 천재성의 원천이다.’ 프로이트 평전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경구다. 인간은 원래 존엄하고 이성적인 존재라고 그렇게 덕담만 하고 있으면 좋을 텐데, 프로이트는 19세기 부르주아사회의 점잔 빼는 사람들 안에 들어 있는 원초적 본능, 그 동물적 본성을 까발기면서 ‘이걸 억누르고 참으니까 노이로제가 생기는 거야’ 하고 말해버렸다. 그래서 처음엔 빈의 정신의학자 그룹에서 왕따당했지만 결국 그는 심리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을 열었다. 정직성이 천재성의 원천이 되기는 학자뿐 아니라 작가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어떤 천재성을 발견할 때가 있는데 그 천재성의 재료는 대개 정직성이 아닐까 싶다.

위선을 걷어내고, 덕담을 걷어내고, 자기연민을 걷어내고, 내 밑바닥을 들여다보고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작가라고 아무에게나 가능한 건 아니다. 그건 작가로서의 재능인 동시에 정직함이라는 성품이다.

필모그래피가 세개까지 쌓이니 작가가 좀더 잘 보인다. 당대의 역사를 섣불리 기록하려는 태도는 정말 경계해야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창동이 우리 시대 최고의 리얼리스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