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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오아시스

아/ㅣ 2002. 8. 21. 17:54 Posted by 로드365
이창동- 난 진담을 하는 거요, 지금. 재미있지 않아요?  




이창동의 세번째 영화 <오아시스>는 누구나 기대하는 사랑의 판타지에 칙칙한 커플의 모습을 포개놓고 그것도 아름다운 사랑의 판타지라고 우긴다. 세상에! 사회 부적응자와 뇌성마비 장애인의 사랑을 이토록 처절하게 그려놓고 아름답다고 이해시키는 그는 리얼리스트와 몽환주의자의 경계를 오락가락하며 불가능한 꿈을 꾸는 이 시대의 반역자다. 그 반역자는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이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또 우긴다. 이 영화감독, 이창동의 마음속에 품은 오아시스의 풍경을 들여다본 인터뷰.

난 후지게 찍는 변태 감독이야
"이 영화는 다 후져. 감독도 후지고 배우도 후지고 촬영도 후지고 다 후져. 그렇게 후지게 찍으려고 했지. 이만큼 후지니까 한번 들여다보자. 우리가 사는 삶을. 근데 그 후진 삶에 보시다시피 뭔가가 있는 거야. 이렇게."

FILM2.0 모 일간지에 <오아시스>의 두 배우 설경구, 문소리씨 인터뷰를 실으면서 이창동 감독을 변태라고 쓴 걸 보고 놀랐다.(웃음)
이창동 감독 변태지. 변태라서 그래. 배우들이 그렇게 선전하고 다녀. 야비한 변태 감독!(웃음)
워낙 현장에서 지독해서 그런가? 아니면 영화가 쿨해서 그런가? 잔인할 만큼 등장인물에게 감상적으로 이입할 틈을 주지 않으니까.
잔인하다는 것이 변태보다 더 좋은 말인 줄 아나 봐?(웃음) 변태는 우리 영화에 대한 특별한 말일 수 있다. 설경구와 문소리, 같이 일한 스탭들도 변태라는 말에 애정을 갖고 있다. 영화에서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문소리)와 동침한 종두(설경구)에게 경찰이 '너 변태지?'라고 힐난하는 장면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종두를 변태로 보잖아. <오아시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찍는 방식도 그랬다. 컨셉이 쉽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후지게 찍고, 후지게 찍으면 만족해 한다. 그런 방식을 두고 우리 나름대로 '변태다, 우린 변태다'하며 위안을 삼았는데 막상 신문 제목에 나오니까 허탈하더군.(웃음)
종두의 동생으로 출연한 영화감독 류승완이 이런 말을 했다. '이창동 감독을 존경한다. 특히 그가 배우들에게서 뛰어난 연기를 뽑아내는 비결이 궁금했다.' 근데 출연하고 나서 그가 뭐라 했는지 아나? '뭐 별게 아니더군요. 좋은 연기가 나올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리더군요.'(웃음)
실제로 별로 주문을 하지 않는다. 나는 점잖은 감독이다.(웃음)
연출부 막내가 쓴 제작일지를 보니 현장에선 영락없는 마초라고, 배우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연기 지도를 할 땐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지닌 감독이라고, 그런데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머리털을 쥐어뜯는 모습은 고뇌하는 예술가라고 썼다.
영화 제작 시스템이 마초 행세를 하도록 만든다. 감독이 권위를 보이지 않으면 현장이 불안해진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불안해 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많이 들키는 편이다. 배우와 스탭들이 내가 불안해 하면 함께 그걸 느낀다. 표정에서 금방 드러난다. 난 감춘다고 생각하는데 드러나는 모양이다.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봤더니 뭐가 잘 풀리지 않는지 설경구와 감독이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담배를 피워 물고 고뇌하고 있었다. 그게 <오아시스>의 힘들었던 현장을 웅변하는 듯했다.
<오아시스>는 <박하사탕> <초록물고기>와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찍었다. 전에는 다 정해놓고 머릿속에 있는 그림에 맞추기 위해 계속 애를 썼다면 이번에는 정해지는 걸 피해 가려고 노력했다. 정해진 패턴이 생기면 바로 바꿨다. 정해놓고 촬영하면 등장인물의 감정 밖에는 보지 못한다. 남녀 주인공의 주변 사람들, 심지어 보조 출연자들 때문에 여러 차례 테이크를 갔다. 화면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주요 인물의 감정을 도와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눈에 거슬리면 감정을 깎아먹는다고 생각하니까. 현장에서 점점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고 조그만 것에 예민해졌다. 설경구는 내가 단점밖에 안 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웃음) 좋은 것도 있는데 단점만 집어내니까.
문소리씨는 영화 찍을 때 너무 힘들어서 이창동 감독을 미워했다고 하던데. 신기한 것은 영화가 만들어지자 그 미움이 씻은 듯 사라졌다는 것이다.
여배우가 뇌성마비 장애인을 연기하는 건 모험이다. 그녀가 할 수 없으면 영화를 포기하려고 했다. 실제로 그런 순간이 있었다. 뇌성마비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준비한 끝에 집에서 자기 혼자 연기한 모습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함께 보려는데 문소리가 비디오 작동 단추를 누르지 못했다.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 영화를 포기해야겠구나...

뇌성마비자 여인의 눈을 똑바로 보라.
"문소리씨가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휠체어에 타고 시내를 나간 적이 있거든. 혹시 누가 자신이 정상인인 걸 알아채지 않나 하고.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 누구도 문소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없었어. 보통 사람들은 뇌성마비 장애인을 보면 황급히 시선을 피해. 뇌성마비 장애인들은 바로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지. 이건 사실이야."

영화 초반에 공주를 봤을 때 당황하게 된다. 그녀 육체의 추함 때문에. 저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데 종두는 그런 그녀에게 느닷없이 욕망을 느낀다. 초반에 나오는 그 장면이 지나고 나서야 이상하게 공주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방치된 그녀의 상황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그녀가 여자로 느껴진다.
공주도 여자다. 그걸 설명해봐야 안 받아들일 거고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이 필요했다. 그래서 공주의 육체 노출 장면이 들어갔다. 찍기 괴로운 장면이긴 하지만 할 수 없이 찍었다. 몸이 빈약하면 벗겨진 몸 자체가 병적이라고 할까, 그럼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자로서의 느낌이 있어야 했다. 사실 공주는 성숙한 여자이다. 여자의 육체성은 중요하다. 그것보다 설득력 있는 게 없다.
시나리오에는 그 장면 이후로 공주가 자살을 기도하는 것으로 돼 있다.
첫 시나리오에는 그렇게 돼 있지만 완고에선 뺐다. 촬영할 때 다시 고민했다. 종두를 묘사할 때도 죄책감이라고 할까, 심리적 공황상태를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했다. 그 장면은 세트 사정 상 순서대로 못 찍었다. 강간 장면을 건너뛰고 다음 장면을 찍었다. 사실은 인물들이 감정을 체험해봐야 그 다음 장면의 감정을 알 수 있다. 배우도 그렇고 감독이나 스탭도 마찬가지다. 시나리오에는 나와 있더라도 현장에서 아, 이게 이런 거구나라고 감정을 나누고 체험해야 그 다음부터 알 수 있는데 그 중요한 걸 건너뛰었다. 진짜처럼 리허설을 찍어보고 가기는 했지만... 근데 공주 역의 문소리가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극단적인 감정을 보이는 게 싫다고 말했다. 자신이 공주라면 자살할 마음을 먹지 않을 거라고 했다. 종두가 심리적 공황상태가 빠지는 장면도 찍기는 찍었다. 그 짓을 저지르고 패닉상태를 보여주는 장면과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밤에 어머니와 묵찌빠하는 장면, 두 장면을 다 찍었다.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공주가 심각하게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자살을 기도하는 것은, 또 종두가 마음 밑바닥에서 죄책감을 드러낼 거다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남성주의의 시각일 수 있다. 종두의 죄책감을 드러내는 게 내 나름대로 도덕적인 면피를 하는 표식 같은 거지. 오히려 그들이 훨씬 뻔뻔스러워지는 게, 종두에게도 맞고 일반적인 남성의 모습으로도 맞다.
공주는 사실 밝은 성격이다. 영화 중반, 종두와 공주가 키득거리며 썰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에서 관객이 많이 웃는다.
웃기려는 게 목적은 아니었다. 장애인들이라 할지라도 어두운 생각만 하고 있고 신세한탄만 하고 있고 세상을 다 어둡게만 보는 게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낙관적이다. 세상을 밝게 보는 천진스러움이 특징이다. 진짜 놀라운 것이다. 신체적으로 가장 힘든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그런 천진성을 갖고 있다. 영화 속에 공주 캐릭터가 그렇게 설정돼 있는데 한 번 웃음이 터지면 참질 못한다. 그게 공주만의 특징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어린애가 그렇듯이 조금만 우스운 상상을 해도 참지 못한다. 예민한 소녀처럼. 남들은 나를 이상하게 보겠구나 금방 창피해하지만 그 표정이 글자로 써지듯이 얼굴에 보인다. 공주 얼굴에도 그런 게 보인다.
거기서 관객이 웃은 것은 그들이 보통 사람처럼 사랑하는 최초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하다. 이후로는 그들의 사랑이 여러 장애에 부딪친다.
종두같은 남자가 아니고 보통 남자라면 마음을 그렇게 쉽게 열지 못한다. 보통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를 그 사람들은 너무나 민감하게 안다. 거의 본능적으로 안다. 마치 어린아이 말하듯이 말하지만, 그건 말하기 힘들어서 그럴 뿐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이 말뿐만 아니라 생각도 감정도 어린애같은 것처럼 대한다. 종두처럼 아주 솔직하게 자기를 드러내고 얘기하지 않는다. 종두를 만났으니까 공주는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다.
어떻게 종두같은 사람을 상상해냈는가.
내 모습에 있다.
에이...
어휴, 참 내. 설경구는 날 보고 종두를 찾아냈다고 그러는데? 종두 걸음걸이가 내 걸음걸이래. 그 말 듣는 순간 좀 불쾌해지더군.(웃음) 나한테는 그 모습이 있다. 집에서 어릴 때 별명이 반피였다. 반편의 경상도식 사투리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반피라고 생각했고 늘 그랬다. 사회생활 하니까 적당히 나를 포장하고 아는 척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반피다. 감정이나 논리가 반피다.

감동이라는 두더지를 족치는 법
"비슷한 것과 제대로 찍은 것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거든. 그건 절대 말로 이뤄질 수 없는 거야. 현장에서 말로 지시하고 소통하는 순간 영화의 의미는 하나로 고정돼 버려. 말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스탭들이 애를 쓰지. 그게 영화 현장의 숙명이야."

영화 속 두 남녀의 사랑은 깊어 가는데 그들의 주변 현실은 그들의 사랑을 옥죄어 간다. 그게 답답하다.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하면 좋았을 텐데, 속이 시원할 텐 데라고 느낀다는 것이 중요하다. 관객이 이미 원하는 판타지가 있다. 관객은 그 다음을 예상할 수 있다. 관객이 이미 그걸 생각하면 된 거 아닌가. 내가 굳이 보여줘야 하나. 그렇죠?(웃음) 모두 함께 기대하는 판타지가 있는데 그게 관습적인 것이든 뭐든 간에, 내가 보여주는 것과 관객이 기대하는 것과의 충돌이 있다. 그게 불편하게 하고 답답하게 한다. 나는 그 긴장을 관객이 느끼게 하고 싶었다.
마지막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극적인 감동을 꾸미려는 유혹을 어떻게 이겨냈는가. 눈물을 흘리고 싶은데 쉽게 눈물 흘릴 수 없는 상황에 관객을 빠트린다.
내가 극적인 감동의 과장을 요구해도 다른 사람들이 거절했을 걸. 설경구도 싫어하고 촬영감독도 안 찍으려고 하고. '감독님 갑자기 왜 이러느냐'고 항의했을 걸? 그게 자연스럽다. 우리 조감독이 한 말이 있다. 두더지 작전이라고, 감동이라는 두더지를 잡는 거다. '너 감동이야? 그럼 바로 때려서 집어넣는다.'(웃음) 촬영 초반부터 그걸 견제했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을 그렇게 간 것은 당연하다.
현실이 아무리 비틀려 있어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남녀 주인공 사이에 흐르는 에너지에 카메라가 더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었다. 클라이맥스 장면의 마지막 두 쇼트의 '단호한' 각도는 정말 잔인하다. 망치로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 남는다.
감동적으로 보이려면 쉽게 할 수 있다. 주위에서 감동을 주라는 별별 주문이 많았는데. 나는 내가 제공할 수 있는 건 두 사람만의 꿈이라고 할까, 세상에 대한 외침이라고 할까, 거기까지라고 생각한다.
<박하사탕>도 그랬지만 <오아시스>는 한국 영화에서 드문, 디테일이 치밀한 영화일 것이다. 어머니 생신 잔치가 열리는 뷔페에 공주를 데리고 간 종두가 식구들 앞에서 어릴 적 아버지에게서 들은 방울새 얘기를 하며 킥킥거리는 장면은 말로 바꿀 수 없는 정서적 질감으로 꽉 차있다. 도대체 종두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궁금하다. 그의 주변 사람들처럼 관객도 마찬가지 심정이다. 이런 모호한 인간을 연기하는 배우에게 어떤 것을 주문하는가.
그 장면을 찍을 때 설경구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지나친 것 같은데, 조금 눌러주면 좋을 것 같은데'라고 말했을 뿐이다. 설경구도 그런 종두의 행동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인물을 이해했다. 그건 이러저러한 거야,라고 인물들과 스탭들에게 말하게 되면 상황은 이미 물 건너간 것이다. 종두나 공주나 내가 그 장면을 설명해주지 않아도 그 장면의 감정을 이해했을 것이다. 뭔가를 말하고 설명하면 영화가 한쪽으로 가게 된다. 이심전심으로 통하게 하는 게 좋은 것이다.
만약에 그 이심전심이 안 이뤄지면?
대다수 경우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게 스탭 일이든 등장인물의 문제든 간에 어차피 한계가 없다. 안 될 때는 문제가 나한테서 출발한다. 나 혼자 괴로워하고 자학한다. 그럼 주변에서 답답해한다. 난 배우란 말을 싫어한다. 적당히 쓸 말이 없다. 용어 자체가 연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만든다. 진짜와 비슷하게 보이는 것과 진짜는 다른 것이다. 그걸 얻어내기 위해 배우와 의견 충돌이 없지 않다. <오아시스> 때는 한 두 번 있었다. 예를 들면 공주와 사랑을 나누다 들켜 경찰서에 잡혀온 종두에게 형이 왔을 때 내가 설경구에게 '너 좀 쪽팔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설경구가 화를 냈다. 진짜로. 화를 내는 게 눈에 보여. 나한테 직접 얘기하진 않지만. '내가 왜 쪽팔려야 하나, 잘못한 게 없는데.' 화가 나는 거야. 극중 종두가 변변히 항변 한마디 못하는 것도 화가 나는데 쪽팔리기까지 하라고 하니까 그는 참지 못했다. 차라리 뻔뻔스러운 게 낫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그는 쪽팔려 한다. 쪽팔리니까 동생 종세에게 '넌 왜 경찰서에서만 만나냐?'고 싱거운 소리를 한다. 쪽팔린다고 분명히... 그렇지만 왜? 굉장히 예민한 문제라 감독과 연기자 당사자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건데 그 상황에서 서로 대치하고 밀고 당기는 기 싸움은 없다. 설경구와 문소리 둘 다 너무 힘들어해 감정을 푸는 경우는 있었다. 짜증도 내고 미워도 한다. 난 안 미워하는데 그 친구들은 내가 밉기도 하겠지.(웃음)
경찰서에서 수갑이 채인 종두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다.
어떤 장면이든 각각의 장면에 감정의 코드는 다 있다. 슬프게 찍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판타지가 후지다고? 그래도 사랑은 있다.
" <오아시스>에 주인공 종두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영화 촬영차와 조우하는 장면이 있지. '헤, 실제로 보니까 별 거 아니네.' 낄낄거리면서 종두는 오토바이로 열심히 영화 촬영 차를 쫓지. 내가 좀 오버한 거지만 그래도 그 장면을 넣고 싶었어. 영화가 주는 판타지가 사실 별 거 아니지 않나. 난 이 영화에서 현실과 비슷한 판타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구."

종두와 공주의 주변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 보면 좀 못된 구석이 있는데 사실은 그냥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우리 자신일 수도 있고... 영화는 그들에 대해 공격적이지 않다.
그냥 딱 내 정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넘지 않고 모자라지 않고. 평균적인 거지. 공격적이기가 어렵다. 내가 그럴 만한 입장에 있지도 않고. 그 사람들을 그렇게 악하게 그렸냐고 보는 사람도 있다. 난 섭섭하다. 그들을 악한 게 아니라 약한 사람으로 그린 건데.(웃음)
이 영화에 종종 나오는 판타지 장면 중에 공주의 시점으로 방안을 나는 비둘기 장면이 가장 판타스틱했다.
그거 CG다. 끝까지 CG 안 쓰려고 했지만 비둘기가 동선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난 CG가 싫었다. 그럴 듯한 판타지로 보이기 때문에 싫었다. 그 장면이 판타스틱하게 보이는 것은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반부에 나오는 코끼리 장면도 CG로 아는 사람이 있더라고. 그건 좀 억울하다. 태국까지 가서 찍은 장면인데.(웃음)
비둘기가 나는 장면이 공주의 마음에 비친 판타지라는 걸 알게 되고 나면 곧 이어 종두가 그 방에 나타난다. 판타지 다음에 종두가 화면에 들어오고 이어지는 장면에선 공주 식구가 탄 이삿짐 차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비친 초라한 종두의 모습이다. 공주의 눈에 비친 종두와 그녀의 주변 사람에 비친 종두의 모습이 퍽 대비된다.
우리는 머리가 나빠서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다.(웃음)
종두와 공주가 종두 형이 주인인 카센터에서 몰래 짜장면 시켜 먹다가 종두가 전화받을 때 공주가 일어나서 말하는 판타지 장면은 꽤 현실적으로 보인다. '나한테 어쩜 이럴 수 있어?'라고 공주가 울먹거리는 시늉을 한다. 다른 판타지 장면과는 틀리다.
영화 속의 모든 판타지 장면은 판타지같지 않게 보이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 장면뿐만 아니라 다른 장면도 마찬가지다. 지하철역에서 종두와 공주가 전철을 놓치고 '내가 만일'이라는 노래부르는 장면, 공주가 종두를 전철 안에서 생수병으로 치는 장면, 카센터 그 장면이 모두 판타지다. 사실은 영화라는 것 자체가, 벽걸이로 걸려있는 오아시스 그림처럼, 판타지다.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현실과 딱 붙어있는 판타지로 보이려고,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보다 훨씬 초라한 판타지, 보통 사람의 현실보다 초라한 판타지로 찍고 싶었다. 하지만 카센터 장면은 다른 판타지 장면에 비해 감정적으로 복잡한 게 드러난다. 기쁜 것만 아니고 좋은 것만 아니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고 모든 게 섞여 있다. 공주가 겉보기엔 뇌성마비 장애인이지만 보통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똑같이 갖고 있다. 모든 뇌성마비 장애인이 그렇다. 사랑하는 연인이라 해서 다 멋있게 보이는 건 아니다. 상황이 그렇다. 공주를 외출시켜서 꽃게탕, 샤브샤브 등의 맛있는 것 사준다고 허풍을 친 종두가 일요일 문을 닫은 형의 직장 카센터에 와서 짜장면이나 사주는 것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있다. 사랑의 일상적 감정이 드러난다. 오히려 후반부의 코끼리와 인도 여자가 나오는 판타지 장면이 골치 아팠다. 판타지에 어울리는 소도구를 동원해 현실보다 초라한, 또는 현실과 비슷한 판타지로 보이게 하는 방식이 어려웠다.
엔딩 장면은 시나리오와 바뀐 것인가. 해피 엔딩의 느낌을 확실히 주는데.
아니다. 원래 시나리오에 에필로그 있었다. 해피 엔딩이다. 화면 속 공주의 방에 먼지도 폴폴 날리는 것이 뽀시시한 느낌도 주고.
해피 엔딩이라고 생각하나.
그럼. 사랑이 승리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느껴지지 않나요? (웃음)
승리한다기 보다, 승리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인데.
뭐, 드라마적으로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이뤄지냐 마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사랑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까. '사랑은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지금까지 만든 세 영화 중에 <오아시스>가 가장 낙관적이다.
나는 항상 낙관적이다. 정말로.
그 낙관은 멀리 내다보는 낙관이다. 언제쯤이면 세상이 변하겠지만 그러기 위해 지금 깨지는 걸 태연하게 바라보는 그런 시선이 있다.
살림에 대한 태도, 인간에 대한 태도 면에서 나는 나처럼 생각하는 게 다행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별난 것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는데 영화판에 와서 항상 검증 받는다. '너, 세상을 너무 어둡게 보지 않느냐? 네가 말하는 낙관은 문제가 있지 않느냐? 관객을 불편하게 하지 않느냐?' 나한테는 별난 것도 없는 자연스런 일이다. 관객이 현실에서 경험하는 불편함에 비하면 내가 만든 영화에서 경험하는 것쯤이야 기본적인 것 아닌가. 내가 다른 동네에서 놀다와서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하는지 모르지만 그 불편함을 못 참는 게 문제다. 낙관 또는 희망이란 것도 쉽게 쓸 수 없는 단어다. 흔히 희망을 갖고 있느냐고 묻는데 난 그 말을 그렇게 쉽게 못 꺼낸다. 그건 그냥 느끼고 이심전심 나누는 것이다. 나는 역사에 대해 희망을 갖고 있어, 인간에 대해 낙관해, 그렇게 얘기해버리는 순간, 이상해진다. 영화 매체가 너무 대중적인 매체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자꾸 강요하는 듯하다. 그 강요가 나한테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좀 얼떨떨해지는 것뿐이다. 뭘 이야기해야 더 낙관적이고 희망적이고 해피 엔딩이 되는 걸까. 관객이 원하는 결말을 보여주면 낙관적인가. 그건 아니다.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건가. (웃음)

농담의 시대에 던지는 진담
"누군가는 내 얼굴을 보면 도덕적 공격성이 느껴진대. 그건 오해야. 정말 오해야. 성적 공격성이 느껴지면 좋겠는데.(웃음) 또는 꼰대라는 소리도 듣지. 그것도 오해야. 나는 그냥 진담을 말하고 있을 뿐이야."

시나리오에 보면 이런 묘사가 있다. 종두와 공주가 옥상에서 놀고 있는데, '화면에 가득 찬 공주의 눈동자. 그것은 어둡고 둥근 하나의 우주 모양을 닮았다. 그 위에 차갑고 푸른 하늘이 어려 있다. 그 위에 한 꺼풀 물기가 맺히더니 눈물이 되어 떨어진다.' 휴, 이걸 정말 스크린에 옮기려고 했단 말인가.
말로는 무슨 짓인들 못해?(웃음) 그보다 더한 것도 쓸 수 있지. 영화를 만드는 건 글 쓰는 것과 다른 영역이지만, 나는 시나리오를 쓸 때 <초록물고기> 때부터 버릇인데, 시나리오를 보고 캐스팅과 투자가 이뤄지니까 지문을 엄청 잘 쓰려고 노력한다. 마치 그렇게 찍을 수 있다는 듯이.(웃음) 그건 내 전략이다. 실제 그 장면을 찍어봤다. 정말 어렵다. 너무 클로즈업이라 초점 맞추기 어렵고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로테스크하게 나왔다. 영화적인 이미지, 낯선 이미지였지만 관객이 특이하게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뺐다.
영화적으로 보이는 것, 그럴 듯하게 느껴지는 것, 일반적인 영화관람의 방식에 불편해하는 것 아닌가.
난 타성적으로 만들고 있는데. 내 플롯이나 스타일이 모두 기존 관습을 이용한 것이다.
다른 감독 얘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이를테면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슬렁슬렁 흘러간다. 나름대로의 호흡을 갖고 세상을 여유 있게 눙치는 게 있다. 그러나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플롯부터 스타일까지 꽉 짜여 있는 상태로 '이게 세상의 모습이다. 정면으로 바라보자'고 말하는 느낌이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형식이나 문법이나 내용이나 기본적으로 농담이다. 세상에 대해 농담하는 것이다. 원래 그의 직업도 농담꾼이다. 형식적인 측면을 봐도 농담의 느닷없음이라고 할까,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을 들이대면서 사람을 웃긴다. 그 사람이 폭력을 사용하는 방식도 농담 소재로 한다. 세상에 대해 그 남자는 농담을 하고 나는 진담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담하는 사람은 싫잖아.(웃음) 90년대 넘어와서 진담하면 썰렁해진다. 사람들이 모르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모른 체 하는데 저 혼자서 아는 듯이 얘기하니까. 80년대에는 진담하는 것이 나름대로 가치가 있었다. 90년대 넘어와서는 사람들이 진담을 못 받아들인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 진담을 하고 있으니 이것 참, 갑갑한 노릇인 걸.(웃음)
진담을 다른 방식으로 한다.
내 나름대로 하는 거지.
<박하사탕>도 인과관계를 거꾸로 놓은 것, 그 부분이 혁신이다. 연대기순으로 갔다면 너무나 정색을 한 진담이 됐을 텐데 좀 다른 방식의 진담이 됐다. <오아시스>도 사랑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다.
<박하사탕>을 끝내고 난 뒤에 소설로 써보라는 제의를 곧잘 받았다. 어떤 평론가 한 분은 진지하게 소설로 써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제의했다. 나한테는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박하사탕>의 영화문법은 소설로서는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영화는 시간의 매체이다. 영화 러닝타임이 주는 시간을 관객이 경험한다. 그 경험의 질, 과정을 소설로 대체할 수는 없다. <오아시스>는 좀 차원이 다르다. 핵심적인 것은 여주인공 공주가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뇌성마비 장애인의 겉모습이 추하니까 보기 불편하다. 그건 문자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문자로 풀어버리면 사람들이 모두 연민을 갖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맞닥뜨려서 아주 가까이서 얼굴 맞대고 보는 듯이 보면 그 불편함을 관객이 체험하게 된다. 그 체험을 겪고 난 뒤에 그 인물을 받아들이든지, 그 인물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든지, 그 인물이 나와 똑같은 인물인 것처럼 끌어안을 수 있든지 할텐데, 그 과정은 소설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1%를 찾아라
"구도를 벗어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허망한 욕심이야. 흔히 보는 구도에서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 자체가 구도가 되지. 근데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것 자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가 해보고 싶었어."

<오아시스>를 들고 찍기로 연출했는데 결과에 만족하나.
들고 찍기는 자유롭고 싶어서 한 것이다. 그러나 몇 번 해보니까 자유로움은 형식도 문법도 없는 것인데 들고 찍기 그 자체가 형식이 된다. 촬영 초반에 다시 카메라를 삼각대에 놓고 찍었다. 그러니까 다시 <박하사탕>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고민하다가 어중간한 상태에서 들고 찍는 것이 됐다. 들고 찍을 이유가 없는데 들고 찍는 식이 돼버렸다. 백퍼센트 관철되지 못했지만 비슷하게 한 것 같다. 고민을 많이 했으니까.
형식 없는 형식은 무모한 강박 아닌가.
강박이다. 강박에 쫓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강박에 쫓겼다. 그 강박이 나로부터 시작한 거지만 나만 시달린 게 아니고 함께 일하는 스탭들도 그 강박에 전염됐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생색이 나나? 누가 알아주나? 선수끼리도 모른다.(웃음) 모르면 어때? 그 강박 때문에 힘들었다. 촬영감독은 내 생각을 이해하고 같이 추구했는데도 내가 너무 쫓기는 것에 답답해했다. 좀 덜해도 되는데 너무 그러는 것 아니냐. 나도 안다. 내 증세를. 근데 잘 못 고치겠다.
결국 카메라가 등장인물의 불안한 마음의 호흡을 따라가는 듯한 효과를 받았다. 의도와는 상관없이.
들고 찍기를 하지만 현란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문제는 인물이 움직일 때 카메라가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보통 영화에선 인물을 따라가는 방식이 정해져 있다. 트랙을 깔든지 해서 정해진 기계적인 동선 안에서 움직이게 돼있다. 들고 찍기를 하면 그게 없어진다. 내가 주문한 게 카메라를 센서처럼 움직이자는 것이다. 대부분 카메라의 움직임이 정해지면 인물의 동선도 정해지게 돼있다. 하지만 들고 찍기를 하면 인물의 동선은 미리 안 정해도 된다. 이 인물이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거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걸 느낄 수 있을 거다. 종두가 건들거리면 카메라도 건들거린다. 그런 게 재미있다. 불안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확실히 등장인물의 호흡을 따라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원래는 형식을 거둬내려는 의도였지 않나.
모든 형식을 거둬내고 새로운 뭔가를 만들려고 하는 거다, 이렇게 느껴지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뭐야 그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웃음). 허무한 거라고. 나도 스스로 허무한 걸 알아.
영화 제작 과정 중에 어떨 때가 가장 행복한가.
편집할 때다. 행복하다기 보다는 편하다. 내가 편집 체질인가 봐. 물론 편집할 때 절망한다. 재료가 변변한 게 없으니까. 재료가 개떡같은데 뺏다 붙였다 해봐야...(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집은 재미있다. 찍을 때 괴롭고 시나리오 쓸 때 괴롭다. 시나리오 쓸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시나리오 다 쓰고 헌팅 다니고 있으면 참 행복하겠다. 시나리오 쓰는 것도 참 고통이지만 현장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다른 감독들을 주변에서 보면 현장을 즐기는 사람이 많아. 현장에서 쾌락과 즐거움을 얻는가봐. 현장에 나가고 싶어 좀이 쑤신대. 나는 그게 없다. 그거 보면 내가 감독 체질이 아닌가봐. 나는 현장을 즐기고 행복해하진 않는 것같다.
현장에서 그런 내 감정 상태가 밖으로 배어 나온다. 사람들이 불편해한다. 그렇게 카리스마를 휘두르는 스타일이 아닌데 저절로 현장이 진지한 분위기가 돼. 내가 봐도 이게 무슨 영화 찍는 현장인지 강의실인지 도 닦는 절간인지...(웃음)
만족을 몰라서 그런 것 아닌가.
그런 것도 있겠지. 나는 연출부한테 1%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1%, 그게 모든 걸 다 결정한다. 99%와 100%의 차이가 뭐냐고 하겠지만 그 1%가 100%를 만드는 거다. 쉽지 않지만 그 1%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도 있다.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으라고... 썰렁하네.(웃음)
소설가로 이름을 얻었지만 영화계에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박광수의 <그 섬에 가고 싶다> 연출부 시절에 꽤 유능한 조감독이었나.
유능하진 않았는데 열심히 했다. 유능할 리가 없지.(웃음) <그 섬에 가고 싶다> 연출부는 당시 충무로에서 드림팀이었다. 박흥식(<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허진호(<봄날은 간다>), 장문일(<행복한 장의사>), 오승욱(<킬리만자로의 꿈>)이 있었다. 근데 일은 내가 다 했다.(웃음) 감독이 될 사람이 연출부로 일하면 현장이 굴러가지 않는다. 전부 고문관이야. 쓸데없는 데서 고민하고 딴 생각하다가 행동이 굼뜬다. 하사관처럼 행동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해 다들. 나 혼자 하사관처럼 행동하고 생각했다.
연출부는 그럼 일 잘하는 사람을 뽑는가.
아니다. 감독을 할 능력이나 성향이 있는가가 연출부를 고르는 기준이다. 연출부 일이 너무 고되지만 보수나 댓가는 없다.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다. 모두 고학력자이고 훨씬 고 임금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인데 그렇게 착취당하는 현실은 감독이 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현장에서 연출부가 일 제대로 못하는 건 괜찮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화낼 때는 창의적이지 못할 때, 말인즉, 감독으로서 생각하지 않고 단순 노동자처럼 기계적으로 생각할 때 화를 낸다. 사실 난 화를 자주 내지 않는다. 인간적인 감독이니까.(웃음) 촬영 들어가기 전에 준비하고 분석할 때는 다 작가야. 예술가고. 시나리오를 갈기갈기 찢어 분석하고 감독 머리 위에 올라 타 있어. 그러다 현장에만 들어가면 다 노가다가 돼 버린다. 그런 식으로 영화 메카니즘에 함몰돼 버리면 정말 못 빠져 나온다.

이건 '진짜' 멜로다.
"나는 내 영화를 보고 관객이 울었다, 이것도 감흥이 없다. 그게 뭐 별 건가? 나오면 눈물은 금방 마르는데. 뭔지 모르지만 대중적이다, 그럼 난 좋아. 정말 대중과 만나고 싶어. 그게 제일 나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말이야. <오아시스>를 두고 온갖 어려운 형용사를 붙이는 건 싫다. 해석은 내 전공이거든. 그걸 또 듣고 싶어? 내 머릿속에 들어가 또 듣고 싶어?"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너무 빡빡한 게 아닐까. <박하사탕>의 모든 장면은 한 장면 안에서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감정의 질감을 느낄 수 있다. <오아시스>에서도 상징, 감정의 논리가 너무 치밀하다. 청계천에서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남녀 주인공이 잠시 춤을 추는 것같은 상황이 주는 상징적 의미는, 촘촘하지만 또한 보편적이다.
그것은 내 약점이다. 나도 약간 여유를 가지면 벗어날 수 있겠지. 근데 안 바뀌면 어떡하지?(웃음) 근데 내 영화가 지면에 소개되면 안 봐도 본 것처럼 느껴지나 봐. 내가 먹어볼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 되나봐.
논리적이고 치밀하지만 실제 영화를 보면 이야기의 살이 풍부한데. 육질이 먹어볼 만 하다.(웃음)
막상 먹어보면 질겨. 쉽게 안 씹혀. 약간 노린내도 나고.(웃음) 그래도 정말 대중과 만나고 싶다. 영화의 이러저러한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싫다. 영화 끝나면 감독 직업이 고달픈 게 홍보에 나서야 된다. 월드컵 홍보대사처럼 띠 두르고 나서야 하는 거야. 거부할 수가 없다. 하긴 하는데 문제는 내가 자꾸 설명을 한다. 내가 학교선생 출신이다. 설명이라면 나도 꽤 한다. 밑줄 긋고 설명하는 건 내 전공이다. 설명하면 할수록 아닌데... 내가 말로 설명할 것 같으면 미쳤다고 영화를 만들어요? 그럼 나도 집에서 머리 싸매고 칼럼이나 쓴다. 그게 안 되니까 영화를 만드는 건데 돌아다니며 설명만 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아니, 설명만 해서는 영화가 파악이 되지 않는다. 걱정할 것 없다.
오해를 하게 된다.
오해와 이해의 접점 속에 만나는 게 영화다.
소설 쓰면 이런 일이 별로 없다. 소설을 써도 잘 나가는 작가는 인터뷰도 하지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영화만 그렇다. 소설가는 겸손을 떨어도 된다. 인터뷰하면서 '정말 형편없는 소설이에요.'라고 말한다. 영화감독은 그런 말못해. 당장 돌 맞는다. 적당히 사기를 치는 거야. 포장을 하면서. '내 영화 정말 재미없어요. 어떤 장면 잘 찍으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그런 말못해. 절대 못한다. 설명을 하던 뭘 하든 장사가 되게끔 해야 하니까. 이게 괴롭다.
똑같은 괴로움을 안겨드려 너무 죄송하다.(웃음)
이게 영화매체의 특징이다. 감독이 나름대로 어떤 진정성을 갖고 얘기해도 그게 그 감독의 상품이 되는 거다. 가끔 농담하지만 이게 상품이 되는 순간에, 본인은 안다. 아 이게 상품이구나, 내가 이런 식으로 팔리는구나, 알게 된다. 상품이니까 시장에서의 평가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절대로. 소설 쓰는 것과 틀리다.
누구나 다 시장에 나와 있는 것 아닌가.
시장이라 해도 벼룩시장은 대량유통 되는 월마트나 카르푸와 다른 거거든. 영화는 후자다. 그게 만만치 않다. 벼룩시장에선 소박해도 된다. 끼리끼리 놀고 사기를 덜 쳐도 되고. 하지만 이젠 적응이 됐어. 적당히.
이창동 감독의 브랜드 가치가 있다.
그게 관객 동원과 연결되지 않는 브랜드다. 내가 안다. <박하사탕>도 안 보고 <박하사탕>을 아는 사람 많다. 내 주변 사람도 영화 안 보고 '영화 잘 만들었다고 그러대.' 이런 식이지. 영화 쪽에 와서 쓸데없이 이름 날리고 얼굴 알려지는 것, 허명에 휘둘리는 것, 난 그러기 딱 좋은 대상이다. 그러다 보니 영화가 정말 재미있어서 많이 보고 유명해지는 게 아니고 그냥 지면에서만 유명하다.
이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오아시스>에 공감하기를 바란다.
대중적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다. 대중적이지 않은 모든 요소를 내 나름대로 살렸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과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중적이었다는 평가를 들으면 좋다. 새롭다는 얘기도 듣기 싫고, 또는 이 영화를 수식하는 그 밖의 형용사도 싫다. 이 영화는 멜로다. 멜로라고 주장하고 실제 멜로다. 영화를 보고 난 사람의 반응 중에 제일 기분 좋았던 건 모 감독이 '이건 진짜 멜로다.'라고 평해준 일이었다. 진짜에 방점 찍어 달래. 너무 대중적이어서 화난대. 그게 제일 나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말이었다. (웃음)


2002.08.19 / 김영진 편집위원  








변태 감독님 ‘야비한’ 주문 끝났죠?


<박하사탕>(1999)에서 호흡을 맞췄던 설경구 문소리씨가 2년만에 이창동 감독의 세 번째 작품 <오아시스>에서 다시 만났다. 설경구씨는 가족과 주위로부터 완전히 따돌림당하는 기묘한 사회부적응아 홍종두를, 문소리씨는 뇌성마비 장애인 한공주 노릇을 연기했다. 문소리씨는 몸이 심하게 뒤틀리고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한공주 역을 연기하기 위해 시나리오 작업 단계 때부터 장애인들과 생활하기도 했다. 촬영기간 다섯 달 반 동안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살아온 셈인 문소리씨는 골반이 약간 뒤틀려 교정이 필요한 상태다. 한 장면 한 장면에 대해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이창동 감독이 얼마나 치열하게 이 작품을 찍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둘 다 배역을 선뜻 맡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설경구 : (이창동 감독이) “니 성격이랑 하나도 맞는 게 없을 거다. 안 해도 되니까 할지 말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 뒤 하겠냐 말겠냐 묻질 않았다. 그래서… 그냥 했다. 이 감독이 쓴 거니까 믿고.

문소리 : 촬영에 들어가기 전, 혼자 매트리스 깔아놓고 장애인 연기를 연습하는 걸 트레이너가 비디오로 찍었다. 이 감독이 오디션을 비디오로 보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이런 영화를 찍는다는 것 자체가 무지무지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비디오 플레이 버튼을 못 누르고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닌가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때 감독은 이 영화 덮어야 하나보다 생각했다고 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오지혜 선배가 결정적으로 도와줬다. 내가 울어도 언니는 날 위로하는 대신 ‘니가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며 설득했다.

캐릭터를 어떻게 소화했나.

문 : 계속 한공주의 상태로 살았다. <나의 왼발> 등 장애인이 나오는 비디오는 다 빌려다 봤지만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다. 촬영 전에 휠체어 타고 코엑스몰도 가고 식당도 가봤다.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휠체어만 다가와도 눈길을 슬쩍 돌렸다. 시선의 높이가 달라 너무 어지러웠다. 그러다 화장실 가고 싶어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났더니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나중엔 (촬영하면서) 모니터 보면서도 괜히 몸이 돌아갔다. 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 경구 오빠나 스텝들도 다 (장애인처럼) 몸이 돌아가서 모니터를 봤다.

설 : <박하사탕>의 영호보다 훨씬 어려웠다. 영호는 감성적으로 나 자신과 맞았다. <공공의 적>의 강철중도 어렵지 않았다. 경찰 가운데 실제 그런 사람 있으니까. 그런데 종두는 감성적으로도 머리로도 와닿지 않았다. 처음엔 어리버리 바보짓이나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박하사탕> 때는 첫 감정을 그대로 쭉 끌고 가면 됐다. 그래서 <박하사탕>은 끝나고도 영호에서 잘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종두는 감이 안 잡히는 애다. 진짜 ‘또라이’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있는 앤데 어디로 튈지 모른다. 너무 바보처럼 연기하면 감독은 “종두 바보 아냐”라고 하고, 멀쩡하게 연기하면 “너무 정상인 같은 거 아냐”라고 지적했다.

이창동 감독에 대해.

설 : 그 성격은 누구 줘도 안 가져갈 거다. 무지하게 약은 사람이다. 현장에서 자학에 가까울 정도로 미안해한다. 모든 책임을 자기가 다 지려 한다. 그러면서도 (찍고 싶은 장면을) 절대 포기 안 한다. (시나리오를 보면) ‘야비한’ 지문이 무지 많다. (종두 엄마 생일잔치 장면에서) “웃는데 우는 듯 재미있게 꺽꺽꺽 운다.” 대체 어떻게 연기하라는 얘긴가. 글로는 뭘 못 쓰겠어. (종두가 출소한 뒤 두부 먹을 때) 가게의 비닐이 펄럭이는 게 ‘감정이 없다’며 반을 잘라냈다. 비닐 펄럭이는 데 무슨 감정! 그래서 감독에게 물었다. “감독님 변태죠” 그러자 이 감독의 대답. (종두의 말투로) “그래∼, 나 변태다∼.”

문 : (배우들에게) 미안해하면서 시킬 거 다 시키는 거 정말 너무 싫다. 강간 신의 경우 열 몇 번이나 찍었는데도 ‘약하다’고 계속 다시 갔다. 거의 실신 상태인데 그날 밤 하나 더 찍자고 병원 가서 주사 맞고 오라고 했다. 응급실에서 포도당 주사 맞고 세 시간 자고 왔더니 준비 안 됐다고 해서 허탈하게 그냥 집에 간 적도 있다. (시나리오의) 지문에는 온갖 호흡이 다 나온다. ‘꿈꾸는 호흡’이 도대체 뭔가. 촬영할 때도, 가능하지 않은 주문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면 난 그랬다. “여기서 더 어떻게 꺾으란 말예욧! 해보세요, 한번! 감독님이!”

다음 작품

설 : 경찰서, 교도서 갈 일이 이렇게 많지(<오아시스>에서도 구속당함) <광복절 특사>(김상진 감독)는 20% 정도 찍었다. <광복절…> 이후는 아직 결정된 게 없다.

문 : 한국에서 여배우란 셋만 있으면 될 것 같다. 예쁘거나 귀엽거나 섹시하거나. 이젠 (한공주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자 감독과 한번 작업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박하사탕> 이후 이지행 감독의 <봄산행>이란 단편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소통하는 부분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이상수
leess@hani.co.kr






이창동 - 5인 평론가의 <오아시스> 이야기  



리얼리즘은 힘이 세다

논란이 적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찬반 논쟁은 아니더라도, 관점을 달리하는 여러 시선에 의해 호오의 미세한 차이가 드러날 것 같았다. 몇곳에 청탁한 결과, 유보 내지 비판적 시선을 가진 극소수는 나름의 몇몇 이유를 들어 사양했다. 다음에 지면에 불러오자고 미루고보니, <오아시스> 예찬론 모음이 됐다.
전과자와 장애인이, 사회의 편견과 냉대를 딛고 사랑에 다가가는 <오아시스>의 이야기는 자칫 설교가 되거나, 아니면 신파적으로 사람을 울려 두 주인공과 사회 사이의 긴장을 해소시켜버릴 위험이 다분했다. 그걸 어떻게 극복했기에, 까다로운 비평가들로부터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를 받는 걸까.

김소희씨는 이창동 감독이 외부적 요인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동력으로 진화해왔다는 점에서, 김봉석씨는 사회의 시선 밖에 존재하는 타자들을 대하는 이 감독의 태도에서 답을 찾아본다. 유운성씨는 리얼리즘을 미학이 아니라, 도덕으로 인정해버린 이 감독의 솔직함을, 심영섭씨는 판타지를 끌어와서 되레 현실과의 간극을 드러내는, 다른 영화들과 반대되는 전략을 높이 샀다.






김봉석이 본 <오아시스>

사람이,사랑하고 있었네

종두의 형은 일장연설을 한다. 너도 이제 어른이 돼야지. 자기 행동에 책임도 지고, 남들이 널 어떻게 보는지도 좀 생각해 보고. 맞다. 어른은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아간다. 나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늘 따져본다. 체면이나 과시욕 같은 것들도,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면 생겨난다. 종두는 그런 ‘시선’ 같은 것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다. 내키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그냥 질주한다. 원인도, 결과도 없다. 무작정 가고, 사고를 치고, 모른 척한다. 종두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그런데 <오아시스>를 보고 있으면, 다른 생각도 든다. 혹시 종두는 인간이 아닌 게 아닐까? 저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종두의 가족은 과연 그를 동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공주는 장애인이다. 중증 뇌성마비로 말을 하기도 힘들다. 공주의 가족은 그녀를 동정하고 보살핀다. 직접 하지는 않고 옆집에 20만원을 주고 맡긴다. 그래도 생일이 되면 케이크를 들고 오고, 가끔씩 들러보기도 한다. 그들에게 공주는 조금은 귀찮은, 동정해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동등하지는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에게 공주는, 나와 동등한 인간이 아니다. 옆집 부부는 공주의 집에 들어가 사랑을 나눈다. 그 사랑은 추악하지 않다. 노모와 아이들의 ‘눈’을 피해 공주의 집으로 온 그들은, 공주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공주가 내다보는 것을 알고도, 그냥 ‘들어가’라고 한마디한다. 침대에 올라앉은 개나 고양이에게 말을 건네듯.

(딱히 계산적으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종두는 타인들의 시선을 무시한다. 청계천 고가도로가 막힐 때, 종두는 공주를 안고 자동차에서 내린다. 음악을 크게 틀고, 춤을 춘다. 타인의 눈을 의식하고는 세상의 그 누구도 못할 행동을, 종두는 과감하게 저지른다. 그것이 종두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열등한 인간이라고 무시당하는 종두만의 행동방식이다. 공주 역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살아갈 수 없다. 아니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자신의 시선을 유지하는 것만도, 공주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종두가 처음 공주를 본 날, 공주는 거울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다. 그녀는 거울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거울에 반사되는 빛을 종두의 눈에 비친다. 그리고는 거울을 깨버린다. 조각난 거울에 비칠 공주의 얼굴이, 그녀가 보는 자기 자신이다. 타인의 시선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시선조차도 깨지고 굴절되어 있다. 그래서 공주는 꿈을 꾼다. 거울에 반사된 빛이 나비로 변해 춤을 춘다. 종두와 함께 있을 때 그녀의 상상은 그러므로, 꿈이 아니다. 공주에게 그것은 현실이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날마다 라디오를 듣던 그녀에게 꿈은 곧 현실이다. 그 안에서, 타인의 시선 따위는 상관없는 것이다.

공주나 종두나, 우리 사회의 바깥에 존재한다. 변두리도 아니다. 시스템과는 전혀 상관없이, 저만큼 멀리서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와 동등한 존재가 아니다. 전과자와 장애인의 사랑을 보는 우리는, 그들의 사랑이 ‘특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건 공주의 오빠나 경찰들이 바라보는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경찰은 종두에게, 쟤를 보고도 이게 서냐? 너 변태지? 라고 지껄인다. 그건 짐승을 보고도 욕정이 생기냐고 묻는 것과도 같다. 뇌성마비로 온몸이 뒤틀리는 장애인 여성을 보고도 욕정이 일고, 사랑을 느끼는 남자는 정상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 그것이 경찰의, 공주 오빠의, 종두 형제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종두와 공주가 서로를 사랑하여 섹스를 했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우리와 동등한, 사람이 아니므로.

종두와 마찬가지로, 이창동 감독은 단 한번도 변명하지 않는다.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이 사람들은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이러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사람들의 삶을 다시 한번 지켜봐야 합니다, 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냥 이창동 자신이 종두와 공주를 따라가서 보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지켜보게 만든다. 그들은 전과자이고, 장애인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 이유로 나는, <오아시스>가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의 내레이션 따위는, 공주의 꿈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의 의도가 어쨌건, 나는 그 장면이 공주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화사하고 따뜻한 일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종두와 공주의 사랑이 화목하게 이루어질 세상이라면, 우리는 <오아시스> 같은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

꽤 오랫동안, 개인이 아니라 사회를 다시 보게 만든 한국영화를 보지 못했다. <오아시스>가 나에게 ‘절실한’ 이유는 아마도 그것일 게다. <오아시스>는 위대한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오아시스>는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잡아끈다.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을 일깨워주고, 비열한 나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다. 불편하기 때문에 아프고, 아프기 때문에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아니 나 자신이.

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









김소희가 본 <오아시스>

진화하는 작가,진화하는 시대정신

<오아시스> 때문에 불면이다. 졸음이 쏟아져야 마땅한 형편 속에서 시사회에 갔는데 감정을 온통 집중한 나머지 돌아오는 밤길에 무척 힘들었다. 하루를 지내고 난 지금, 또 고스란히 날이 밝았다. 소란스러운 능변 대신 이 영화에 대해서 차근차근 잘 말하고 싶다는 갈망이 무거운 걸음걸이로 덤벼드는 졸음보다 힘이 센 모양이다.
난 <박하사탕>이 싫었다. 내 가슴 한복판을 뜨거운 것이 꿰뚫고 지나가긴 했지만, 유능하게 조합된 관념적인 역사의식의 차가움이 함께 흘렀기 때문이다. 불타올랐지만 얼어붙게 만들었고 유능하고 싶었지만 무능했던 것은 386세대인 내가 80년대에 대해 느끼는 통한이다. 하물며 <초록물고기>는 평범했다.

이제 세편의 영화를 죽 돌이켜보니 이창동이 진화하고 있음을 알겠다. 지금 나는 진화라는 용어를 특별한 마음으로 쓴다. 진화는 전적으로 자신의 현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오아시스>는 이창동이 사회적으로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에 관해 진지한 톤으로 이야기하는 작가라는 자신의 경력과 정체성을 고스란히 껴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무언가 벽에 부딪힐 때마다 외부로 눈을 돌려 신기하고 효율적인 것들을 집어와 탈바꿈하곤 하던 우리의 버릇과 구별된다.

진화는 또한 변화라는 개념을 내포한다. 이창동은 이 사회가 약자를 만들어내고 돌보지 못하는 방식에 대해 새롭고 세밀해진 눈을 가지고 묘사한다. 그 눈이 얼마나 서늘한지, 보는 우리가 힘들고 아프다.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에는 이분법이 있었다. 주인공은 원래 선하다. 그런데 그를 타락으로 내몰거나 억압하는 사회적 역사적 악이 있다. 이같은 이분법은 이를테면 민중과 억압자,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제3세계와 제국주의, 민주와 반민주 등 80년대를 지배하던 이분법적 인식론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두편의 영화를 보는 내 심정은 이창동이 순정하기는 하되 80년대를 진정으로 뒤집어 질문하지는 않는구나였다. 게다가 순수한 유년과 타락의 성년이라는 문학의 오래된 이분법도 답습한다.

이제 이창동은 그것들을 버린 것 같다. <오아시스>는 거창한 도그마에 지배되는 시선 대신 자신의 영혼과 육체의 감수성을 가동시켜서 관찰한 결과물이다. 그의 눈은 인간 하나하나로부터 빛과 어둠을 동시에 본다. 그렇게 모순을 안은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혹은 무관심한 채로 어둠이라고, 쓰레기라고, 짐이라고 말한다. 이창동은 그곳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는 그곳에서 가장 밝게 빛나고 있는 영혼의 촛불 두개를 본다. 그들은 정신이 산만한 전과 3범의 남자와 중증 뇌성마비 여자의 육체를 지니고 거기에 떠밀려 박혀 있다. 이창동은 그들에게 홍종두와 한공주라고 이름붙여주었다.

그러고나서 그는 거기 있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을 가만가만 조심스럽게 자기가 본 대로 화면 안에 묘사한다. 그는 카메라가 자기 육체의 눈 그대로이기를 바랐다. 그가 카메라로 하여금 삼각대 위에서 내려오기를, 그러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있기를 바랐던 것은 자신이 살살 움직이면서, 그러나 조용히 그들을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장소는 어둡고 누추하다. 이창동은 그 누추함을 정성스레 묘사한다. 거기에서 잘난 척하고 있는 사람들이래봐야 애처롭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에 배우들로 하여금 자신이 보는 것에 완전히 적중해 들어오도록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쳤을 것이다. 그리하여 렘브란트가 검고 어두운 화면 안에서 주인공의 영혼이 발하는 낮고 은은한 빛을 포착했듯이, 이창동 또한 홍종두와 한공주의 영혼이 발하는 진기한 사랑의 향연을 포착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진화다. 한 작가가 진화하고 있고, 그를 통해 시대정신이 진화하고 있다.

<오아시스>는 문학적인 영화다. 영화는 문학을 뛰어넘어야 비로소 독자적인 예술이 되는 것이지만, 한국영화가 문학의 품에서 젖을 떼기는 아직 이른 모양이다. 문인 출신으로서 문학의 힘을 한껏 길어올리고 있는 이창동은 한국 문학의 저력이 한국영화의 소양을 앞서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우리는 시나리오라는 기초를 좀더 배워야 할 것 같다.

나는 이즈음에서 우리의 익숙한 비평 용어들을 교정하자고 제안한다. ‘리얼리즘’, ‘걸작’, ‘별 다섯개’ 이런 것들은 형성된 맥락이 있고 어느 정도 효용성도 있지만, 계속 사용하기에는 무기력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오아시스>에 대해서 이미 리얼리즘과 판타지라는 용어가 동시에 나왔고, 별점을 주자면 아이디어면에서는 세개, 영화적 혁신성면에서는 한개 반, 묘사력에서는 다섯개, 캐스팅과 연기면에서도 다섯개쯤이라고 말하겠다.

이런 판국에 어떤 용어를 써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세계영화사 책이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책을 뒤적이는 데서 더 나아가 여기 이 땅의 작가와 작품을 세밀히 들여다보고, 고통스럽지만 직접 그 이름을 지어 붙이며 분석틀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창동이 그러했듯이.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유운성이 본 <오아시스>

간절한 침묵의 속삭임

<오아시스>가 우리 영화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으며, ‘이창동 감독은 한국의 에밀 쿠스투리차’라고 주장한 고종석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오아시스>에서 현실과 판타지는 변증법적 통합을 위한 대립물로서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조금도 다치게 함이 없이 온전히 자신들의 특성을 유지하며 서로를 강화한다. 영화 속에 마르케스를 불러들이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일 테지만, 빈곤하고 누추한 공간에서 이루어진 빈곤하고 누추한 상상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마르케스의 단편 <사랑 저편의 변함없는 죽음>의 한 부분, “상원의원은 지껄이면서 석판화 캘린더를 한장 비틀어 뜯어서는 나비를 접었다. 슬쩍 선풍기 바람에 태우자 나비는 방 안을 훨훨 날아다니다가 절반쯤 열린 문으로 슬쩍 빠져나갔다.… 석판화의 거대한 나비는 두세번 방 안을 날아다닌 뒤, 벽에 부딪히더니 원래대로 한장의 종이로 돌아가서 그대로 붙어버렸다”. 중증 뇌성마비 환자인 공주가 가지고 놀던 거울에 반사된 빛 속에서, 나는 위와 같은 마르케스적 상상의 완벽한 영화적 실현을 떠올리며 행복에 잠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창동은 공주의 뒤틀린 육체를 갑작스레 보여줌으로써 <오아시스>가 단지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관계에 대한 탐색만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정말이지 이건 장식으로 덧칠된 묘사가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금세라도 거기서 눈을 돌려버리고 싶게 만드는 불완전한 형상의 폭력적인 현시(顯示)이다. <오아시스>는 이창동이 영화와 대면하여 시네마틱한 것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 그의 첫 번째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서 그가 비로소 형상에 대한 탐색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우선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종두의 건들거리는 듯한 걸음걸이와 공주의 뒤틀린 몸일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때로 깨진 유리조각이 섞인 풀을 잔뜩 먹인 밧줄로 당신의 심장을 동여매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종두의 그 걸음걸이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예기치 않은 사고를 빚어내는 그의 행동으로부터, (좀 이상하지만) 자크 타티의 윌로씨, 특히 <나의 삼촌>의 윌로씨를 떠올렸다. 이 ‘불편한’ 영화에 깃든 유머의 일부는 거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종두는 한마디로, ‘타티빌’이 없는 현실세계에 내던져져 졸지에 범죄자가 되어버린, 좀더 수다스럽고 모자란 윌로씨다. 그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우리가 끝까지 이 뒤틀린 형상의 세계를 응시하게 만드는 원천이 된다. 둘째, 이창동은 거의 바닥이 드러날 정도의 미장센으로 화면을 채우고(혹은 비우고), 전혀 미학적이지 않게 흔들리는 카메라를 들고 인물들 곁에서 함께 숨쉰다. 이창동은 프레임과 그 속의 형상들을 과격하게 부수는 디지털 시대의 미학적 시도들에 거리를 둔다. 여기에 새로운 미학적 탐구는 없지만, 미학의 유기로부터 길어올린 새로운 형상으로서의 프레임의 창조가 있다. <오아시스>는 스크린의 표면을 몸처럼, 피부처럼 다루면서, 뒤틀린 공주의 몸과 건들거리는 종두의 몸 모두에 호응하는 리듬을 만들어낸다. <오아시스>의 떨림은 형상에 대한 존중이 결국 그것의 포획에의 의지로 향하고 마는 오랜 미학적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암중모색의 결과물이다. 리얼리즘이 결국 ‘지적 엘리트들을 위한 판타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은, 부서지는 형상들을 포착하기 위해 끌어들인 형식이 언제나 또 하나의 미학적 자의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아쉬움은 바로 거기서 연유한 것이었고, 이창동은 <오아시스>에서 그 한계를 가까스로 뛰어넘었다. <오아시스>의 리얼리즘이 진정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여기서의 리얼리즘이란 형식적 선택이 아니라 도덕적 선택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송일곤의 <꽃섬>은 그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망설였다. 마지막으로, <오아시스>는 불완전한 형상, 혹은 거푸집이 우리 자신의 형상을 완전히 깨뜨려버리는 순간을 경험하게 만든다. 우리는 종두도, 공주도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아파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가 끝나고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란, 우리가 종두의 가족, 공주의 가족의 자리에 남을 수밖에 없다는 뼈아픈 인식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우리 자신의 반영을 통해 우리의 성찰을 자극한다면, 이창동은 우리가 간신히 빠져나온 거푸집을 응시하게 만듦으로써 거꾸로 우리의 추악함을 드러낸다. <오아시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버려진 형상이지만, 진정 문제삼는 것은 그것을 통해 만들어진 우리 자신의 형상이다. 요약하자면, <오아시스>는 ‘형상의 발견’을 통해 ‘생활의 발견’에 이르는 영화인 것이다.

물론 <오아시스>가 답변의 나열이 아니라 의문부호로 가득한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평론은 때로 영화 앞에서 오만을 부리고 싶은 법이지만 이런 영화 앞에선 잠시 겸손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뒤틀린 입에서 간신히 흘러나오는 공주의 말들처럼, <오아시스>는 외침과 침묵 사이에 존재하는 뒤틀린 속삭임이며, 한없이 간절한 속삭임이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심영섭이 본 <오아시스>

그대,사랑다운 사랑을 해보았는가

사내는 모두가 겨울옷을 입고 있는 엄동설한에도 반팔 차림으로 콧물을 흘리고, 여자는 휠체어에 의지해 손바닥만한 하늘을 처음 대하는 사람처럼 바라본다. 오아시스의 홍종두와 한공주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었다. 감독은 수선스런 시장통에, 나사가 널브러진 카센터에, 김칫국물이 누렇게 밴 아파트 벽에 주인공들을 숨겨놓고 ‘젊은이의 양지’로 박제돼버린 대한민국의 멜로에 일침을 가한다. 홍종두와 한공주, 그렇게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게 사랑의 문제라면, 사랑이 ‘함께’ 자장면을 좋아하게 되고 콩밥을 싫어하게 되는 단순하고 연약한 것이라면, 그런데도 당신, 왜 아직 사랑다운 사랑을 해보지 못했는가.
<오아시스>는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초록물고기> <박하사탕>처럼 <오아시스>의 사랑은 대한민국에서는 부재하는 어떤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거시적 이야기의 구조를 지녔던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이 산산이 부서진 가족과 근대화의 문제를 성찰하는 대의명분에 충만했다면, <오아시스>에 이르러서 이창동은 이러한 대의명분을 걷고 현재진행형의 미시적인 것들에 천착한다.

그러나 <오아시스>는 흔하지 않은 사람들의 흔한 연애담을 건드리면서도, 영화 만들기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할리우드가 현실을 잊게 하는 판타지의 공장임을 자임할 때, <오아시스>는 오히려 현실의 무게를 더하는 판타지의 그늘진 샘의 역할을 해낸 것이다. 아마 <오아시스>의 마지막 장면, 방바닥을 빗자루로 쓰는 한공주를 할리우드가 리메이크했다면 틀림없이 교도소에서 출감한 종두와 공주의 감격적인 해후로 판타지에 대한 독성을 높였을 것이다. 어쩌면 공주를 성형수술해서라도 진짜 공주로 만들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창동은 종두의 등에 식물처럼 업혀 있다 두발로 걸어 나와 장난을 치는 영양 같은 그녀를 잡아냄으로써, 영화가 태생적으로 판타지와 근친상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그러면서도 현실과 판타지의 간극은 얼마나 머나먼지를 아프게 일깨운다(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일이 단 한 프레임 내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깨진 거울조각으로 나비를 만드는 공주의 판타지는 절절하다. 그것은 <오아시스>의 중심에 놓여 있는 문제, 추하고 마비된 육체의 구속을 끊어내는 사랑과 동일한, 추하고 마비된 현실의 구속을 끊어내는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을 때에도 남아 있는 판타지로서, 현실을 되새김질하는 판타지로서, <오아시스>의 판타지는 진흙창에서 피워올린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났다.

그래서 <오아시스>를 보고 온 날은 한참을 걷고 싶었다. 비가 무척 와서 서울 시내가 온통 물 속에 잠긴 그날, <오아시스>의 영상들은 그 넘쳐나는 물 위에 거꾸로 떠서 흘러가고 있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난 사랑 이야기인데도 <오아시스>의 종두와 공주의 세상과의 의사소통은 여전히 불발이었고 그러한 해피엔딩에 마냥 감격스러울 수도 없었다.

종두와 공주의 첫날밤은 세상과 주파수를 달리한 소란스런 잡음으로 오인된다. 둘은 일상의 데이트를 원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식당에서 내몰고 먼지가 덥수룩하게 쌓인 카센터 한편에서 자장면을 배달시켜 먹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창동 감독은 종두와 공주의 사랑으로 ‘우리’와 ‘그들’을 나누려 했던 것일까? 아니다. 아니다. 오히려 무엇을 하든 소통 불능의 상태가 되는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공주 같은 의사소통의 장애인이자 종두 같은 사회 부적응자들이다. 그것이 이창동 감독이 종두와 공주의 사랑을 끝까지 비밀로 남겨놓은 이유는 아닐까. 세상에 들키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세상에 알려져도 끝내는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원래 모습이므로.

<오아시스>에서 나는 사랑영화를 보면서도 주인공의 사랑 자리에서 계속해서 배제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심지어 그들이 서로의 육체를 통해 처연하게 사랑을 확인할 때도 그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이방인으로 남겨져 있었다. 공주의 아파트 열쇠는 화분 밑에 숨겨져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아시스>는 한국판 <작은 신의 아이들> 대신 순도 100%의 사랑영화가 되어갔다. 나는 문득 <오아시스>가 판도라의 상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창동은 상자의 문을 따서 온갖 현실의 악취를 다 보여주고는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랑이라는 희망만 남겨놓고 상자를 닫아버렸다. 영화를 보다보면 이성복의 시처럼 가슴 위의 것은 다 헛것이라 느낀다. 아주 가난해지지 않는다면 상자의 문을 열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에 이가 시리다.

그러니 그대 <오아시스>를 보고도 마음을 빼앗기지 못한다면 이승의 낙타로 살아가리라. 지옥 같은 사막의 빌딩 사이를 헤집고 영겁의 갈증에도 목이 타본 적 없는 한 마리 물기없는 낙타로 남으리라.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오아시스>의 해피엔딩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

내 눈엔 온통 사막만 밟힌다

이 영화는 소외된 비정상인들의 지극히 정상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정상적인 사랑의 과정에 타인들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타인들에 의해 이 사랑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의 과정을 시종 목도한 관객은 그들에게 동화된다. 관객은 2시간 동안의 장애체험을 통해, 살풍경한 현실에 분개하는 한편 “아, 우리가 저렇단 말이지?” 하는 각성으로 가슴에 멍이 든다. 그들에게 영화의 에필로그가 던지는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라는 메시지는 그나마 위로가 된다. 캬! 냉혈한이 아닌 이상 누가 감히 이 도저한 휴머니즘을 거역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다. 지난달에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고 난 뒤 느껴지던 전일적 충만감이 없다. 이상하다. 분명 해피엔딩인데, 분명 희망을 이야기한 것 같았는데….
<레미제라블>이 그리는 비참함의 본질은 ‘가난’이다. 가난으로 인해 장발장은 죄수가 되고, 판틴은 환자가 된다. 이 작품이 그리는 ‘비참함’은 모두 경제로 환산 가능하다. 그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모두 강인한 인간들로서 자신들을 외부적으로 억압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부당한 국가권력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리얼하게! 싸운다. 그러나 비정상인 종두와 공주의 모순은 정치경제학적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들의 ‘범죄’와 ‘장애’는 빈곤 때문이 아니라, ‘부적응’과 ‘운명’ 때문이다. 결코 외부에 있지 않은 ‘비정상성’이라는 모순은 그들을 ‘소외’시키며, 심지어 ‘변태’라는 새로운 비정상성을 만들어낸다. 그들의 적은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전선을 만들 수 없다. 그들은 리얼하게! 싸워야 할지, 환상적으로! 꿈꿔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캬. 그림자가 없다.

범죄, 장애, 변태 - 비정상의 요소들 종두와 공주를 ‘비정상’으로 변별하고, ‘소외’로 응징하고 있는 항목은 다음 세 가지이다.

→ 범죄: 국가공권력의 상징인 형사는 자베르와는 달리 선생처럼 타이른다. 그러나 체형(體刑)이 훈육으로, 처벌이 교화로 바뀌었다고 형법체계가 바뀐 것은 아니다. 전과자는 어딜 가나 전과자다. 국가권력은 가족 안에도 있다. 형은 그를 모범시민으로 만들고자 “사람 돼라” 타이르고, 국가권력도 더이상 행사하지 않는 체형을 가한다. 권력은 가족 속으로, 개인 속으로 내면화된다. 내면화시키지 못하는 종두만 외적 권력에 의해 징치(懲治)된다. 주교와는 달리 목사의 공허한 기도는 부적응의 그를 대상화시킨 채 속죄만을 강요하므로 종두를 감화시키지 못한다.

→ 장애: 그녀는 혐오의 대상이거나, 잘해야 동정의 대상이다. 그녀는 신체에 아로새겨진 확실한 ‘비정상’의 징표로 인해 외부세계와 차폐된다. 그녀는 국가에 의해 추방되는 대신 등재되고, 관리된다. 그녀는 집에서 추방되지는 않으나, 결국은 가족과 격리된다. 분업사회에서 사회적 역할이 없는 그녀는 사회적 존재=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주체적 욕망을 지닌 인격적 존재가 아니고, 그녀의 몸은 엄정한 관리를 요하는 물질적 대상일 뿐이다.

→ 변태: 자발적 성욕이 있는 주체와의 성관계만이 강간이 아니다. 또한 같은 종(種)의, 다른 성별의,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대상을 성적 대상으로 삼아야 변태가 아니다. 이런 생산(? 생식!)적인 섹스만이 새끼들을 만들기 때문이다(가로수만 ‘국가재산’이 아니라, 애새끼들이야말로 ‘국가재산’이다.). 주체가 아닌 그녀는 일단 자발적 성욕은 애초에 없는 것으로 간주되므로, 무조건 강간이다. 그런데 그녀를 대상으로 한 성욕이 ‘변태’로 정의되면서 그녀는 주체로서는 물론이고, 감성적 객체로도 사람이 아니게 된다. 그녀에게 복지정책을, 인도주의를 시혜하라는 것과 그녀를 성적 대상으로 향유할 수 있느냐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그녀에게 감각적으로, 육체적으로 이끌리는가? 그녀를 전면적으로, 즉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대뇌에 각인된 미추(美醜)의 관념을 초월할 수 있는가? 인종문제보다 더 어려운 문제이다.

영화는 범죄, 장애, 변태라는 세 항목을 통하여 이토록 어려운 미시적 권력문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레미제라블>에서 그토록 이루고자 하였던 공화정을 이루었건만 자유와 평등은 헌법 속에만 있다. 우리 안에 개인적인 모습으로 도사리고 있는 억압과 차별은 지양되기는커녕 ‘정상/비정상’의 구별을 통해 나날이 심화되고 더욱 정교해졌을 뿐이다. 모더니즘 시대의 총체적인 지배담론이었던 ‘계급모순’은 미시적 권력 앞에서 전일적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

사랑이 만나는 세 가지 관계 영화는 ‘정상/비정상’을 이루는 탈근대적인 모순들을 제시하면서 그 모순들의 접점으로 사랑을 배치시킨다. 사랑은 이 영화에서 세 가지 지점에서 작동한다.

첫째, 극중인물 사이. 종두가 처음 공주를 보았을 때 그는 단지 본능적으로 그녀를 욕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후 ‘사과’와 ‘대화’와 ‘봉사’라는 인간적 소통 방식을 통해 사회화된다. 그녀는 장난치고, 삐치고, 고백하는 정상인의 사랑행위를 꿈꾸고 흉내낸다. 그들의 사랑은 어쩌면 정상인보다도 더 정상적인 방식을 취한다. 처음 그녀와 맨발을 맞대보고, 후위로, 막무가내로 강간하려던 동물적인 종두가 마침내 눈을 맞대고, 정상위로, 보살펴가며 섹스하는 인간이 된다. 그들의 지극히 정상적인 사랑의 방식은 ‘변태’라는 객관적 규정과 대비를 이루기 위하여 더욱 긴요한 설정이다.

둘째, 극중인물과 관객 사이. 이질적이고 비정상적인 그들의 정상적인 사랑을 지켜보던 관객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코드로 인해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되고, 마침내 여전히 그들을 비정상적으로 규정하는 타인들로부터는 감정적으로 이화된다. 멜로적 사랑은 극중인물과 관객의 감성을 매개하여 양자간의 이질적 거리를 삽시간에 줄인다.

셋째, 극중인물과 감독 사이. 이 영화는 인물을 바라보는 감독의 자애적인 응시로 가득 차 있다. 종두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그의 어머니가 종두를 바라보는 시선보다 따뜻하다. 흡사 문제아를 바라보는 인자한 선생의 눈이다. 그는 악한이 아니라, 단지 천진할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감독은 영화의 1/3을 할애한다. 그러한 감독의 시선은 급기야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해피엔딩에 대한 암시로 이어진다.

해피엔딩..., 그러나? 영화의 에필로그는 해피엔딩을 암시하지만 리얼리즘이 턱에 걸린다. 지금까지 이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리얼리즘에 기초하여 그 다음을 유추해보자. 종두는 전과 4범으로 가중처벌을 받아 30대 중반에나 빵에서 나올 것이다. 생활능력은 여전히 없고 ‘변태’ 딱지마저 붙고 나니 취직은 더 어렵다. 출감 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라면 형 집에는 발도 못 디밀 것이다. 한편 공주의 오빠는 이 사건으로 장애인을 빈집에 방치한 것이 들통날까봐 그녀를 데려갈 것이다. 그녀는 계속 마루를 청소하며 스스로 용기를 북돋기도 힘들는지 모른다. 범죄로부터의 보호라는 명목하에 골방에 감금된 채, 국밥을 말아서 디미는 밥상이나 받겠지. 종두가 빵에서 나오면 오빠는 강간범 종두를 그녀와 짝지워주려 할까? 종두도 못 미덥지만, 그보다 아파트는 어쩌고? 만만의 콩떡이다. 그러면 그녀는 이번에는 발작을 해서라도 자신의 뜻을 전달할까? 하세월이다. 둘 다 사랑을 알았으니 이제는 인식론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느냐고? 물론이지! 그런데 존재론적으로는, 관계론적으로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악화일로이다. 그러면 이번엔 공주를 보쌈하나? 그러면 납치인데? 또 빵에 가서, 또 편지를 보내나? 악무한이다. 잠시 똥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이들에게 저승사자 왈 “10분 휴식 끝, 500년 동안 잠수!”

냉랭하고 분절된 현실의 폭압과 차별을 보여주며 가족이고, 교회이고 현실 어디에도 이미 19세기적 휴머니즘은 설자리가 없다고 실컷 확인시켜주고 나서, 생뚱맞게도 “아직 우리에겐 사랑이 남아 있잖아”라고 말하는 감독의 어조는 립서비스이거나 소격효과이다. 이 요령부득의 해피엔딩이야말로 영화적 판타지의 지존(至尊)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충돌, 혹은 불화 영화는 범죄, 장애, 변태의 비정상 코드를 사랑이라는 지극히 보편적인 표면에 미끄러뜨리면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횡단하고자 한다. 사랑은 종두와 공주 사이에서, 그리고 그들과 관객 사이에서 소통과 공감이라는 변화를 이끌어낸다. 한편 영화는 이들 소외된 인물의 주관적 진실을 담아내고자, 판타지를 가미하고 들고찍기를 시도한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문제의식과 형식의 변주는 모두 포스트모던적인 것이다. 그러나 형식의 변주에도 불구하고 미장센은 세련되지 못하며, 정상/비정상 담론의 접점이자,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장치로 상정된 사랑은 감독의 애틋한 시선에 포획되어, 휴머니즘으로 발화하며 급기야 해피엔딩을 암시하기에 이른다. 그 덕에 이 영화는 온갖 포스트모던적 문제의식과 형식상의 시도에 불구하고 휴머니즘에 덜미가 잡힌 채 ‘모더니즘 혹은 그 이전의 낭만주의’로 회귀하고 만다. 너무도 진지한 모더니즘의 사도, 감독에게 불현듯 자신의 문제의식과 취향을 탈근대적인 것으로 바꾸고 싶다는 욕구가 일었던 것일까? 짐작건대 감독은 포스트모던의 정서와 사상을 몸소 체현하지 못했으면서 영화 속에는 너무도 ‘최신의 진실’을 담아내고자 고군분투하였으며, 그 벌어진 간극은 고스란히 연기자의 몫으로 남은 듯하다. 그들의 연기는 정말이지 눈물겹다. 온몸으로 둑을 막는 네덜란드 소년처럼! 그들에 의해 가까스로 그 간극은 봉합되고, 봉인된다.

이 영화가 리얼하게 보여준 ‘진실’에 의하면, 영화의 말미에 감독이 암시적으로 건네고 있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숨기고 있기 때문” 이라는 말은 틀렸다. 오히려 “오아시스가 오아시스인 것은 사방이 사막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은 틀렸다. 우리가 희박한 희망을 특별하게 ‘발견’해내는 것은 주위 사방이 모조리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를 보고 나도, 내 눈엔 온통 사막만 밟힌다. 사막의 한복판에서 날지도 못하는 남루한 카펫 같은 휴머니즘을 지분거리다 그만 탈진할 지경이다.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chingmee@freechal.com








이창동 - 문화계 6인의 <오아시스>에세이  




자기, 정말 나 사랑해?

2002.08.12 / 이제하(소설가)  

소설 쓰던 이창동이 영화 쪽으로 돌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필자는 기왕에 있었던 그런 전례 몇몇을 머리에 떠올렸다. 부업으로 시나리오를 쓰다가 장난 삼아 한번 만들어본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객기와 충동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실소나 자아낸 그 결과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흥행 실패 어쩌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물건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으레 같은 사례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동안에 그는 첫 작품인 <초록물고기>로 이미 영화감독이 되어 있었는데, 백 프래시 기법을 물고 늘어진 두번째 작품 <박하사탕>을 보고 필자는 그 변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 편의 소설을 썼다고 다 작가가 아니듯이 열 편 스무 편의 영화를 찍었다고 모두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형식을 가졌거나 적어도 그 단계에 있는 역량을 두고 하는 소리지만, 그 기준으로 볼 때 이 나라 영화감독의 수는 다섯 손가락에 채 미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창동의 경우는 <박하사탕>이 그 ‘형식’이었다면 세번째 작품인 이 <오아시스>가 그의 ‘목소리’에 해당되는 것일지 모른다.

이 필름을 대하면 소싯적에 어울려 다니던 친구 커플의 에피소드 하나가 또 저절로 떠오른다. 무슨 일 때문에 어쩌다 같이 밤을 새게 되었는데 새벽 4시 무렵인가 갑자기 “걔가 올 거야”라면서 친구가 바깥 계단으로 나가더니 쭈그리고 앉아 짝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 시간 이런 추운 날씨에? 청승일세. 약속이라도 있었냐?”고 물었으나 친구는 고지식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결국은 예감 하나를 믿고 그가 그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조만간 골목 저쪽의 박명 속에서 그 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라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즘은 영화도 사랑도 발에 채인다. 제 짝의 목을 닭 모가지 비틀 듯이 틀어쥐고 있는 지하철 풍경에서부터 일 분마다 터져 나오는 TV 연속극 대사에 이르기까지, 오죽하면 작고한 모 시인이 강의실에서까지 “너희들 ‘사랑’이라는 말 제발 좀 남발하지 마라. 차라리 '생각'이라는 말을 대신 쓰든지. 세상이 온통 쓰레기로 뒤덮이는 것 같다"고 한탄했을까. 그 정도로 넘치는 사랑이라면 벌써 천국이 됐을 세상이 갈수록 지옥에 가까워 가는 것만 봐도 그 사실은 알 수가 있다. '자기, 나 사랑해?'라고 어리광 삼아 던지는 질문이 '얼마나 사랑해?'라고 진지해지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같은 질문을 궁극적으로 던지고 있는 영화 <오아시스>는 폭로나 고발이라는 직설로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대신 상대적인 커플 하나를 완곡히 관객들에게 들이밀 뿐이다. 과실치사를 저지르고 2년 6개월을 살고 나와 피해자의 집을 찾아가는 종두라는 인물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캐릭터처럼 보이면서도 리얼하다. ‘벙어리 삼룡’을 연상시키는 칠뜨기에 가까운 성격인데 그렇게 제가 치어 죽인 환경미화원의 집을 미안해 하며 찾아갔다가 설상가상으로 뇌성마비의 그 딸까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칙칙한 오아시스 그림이 걸린 양탄자를 배경으로 그들의 사랑이 시작된다. 그 금단의 사랑과 그들의 가족과 형제 주변의 일상을 대비시키는 감독의 시선은 유쾌하고 코믹하다. 이창동의 감각과 절제력이 이런 데서도 드러난다. 그렇지 않고 어깨에 힘을 준 채 내러티브를 끌고 갔더라면 뒤집어쓸 정도로 사랑이 남아도는 보통 사람들이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한나절이나 전신을 뒤틀어야 하는 그들을 어떻게 감당을 할 수 있었겠는가. 순결한 사랑이 강간폭행으로 왜곡되고 그 왜곡이 다시 가족들의 보상금 담판으로나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 세계의 편견과 그 일상이 더이상 밀고 나갈 여지가 없을 정도로 포화 상태일 때, 종종 가벼운 환상 장면이 끼어드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극단적인 두 세계를 대비시킨 마무리로 끝 무렵 종두가 기어올라가 벌이는 나뭇가지 소동 시퀀스는 폭소가 나올 정도로 익살스럽다.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없으면 동물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소위 그 인간의 ‘사랑’을 말하는 감독의 어조는 설득이 아니라 호소에 가깝다. 코를 훌쩍이며 출소한 떨거지를 실감나게 재현하고 있는 설경구나 공주마마 역의 문소리가 다 열연이다.

 






명계남 대표님께

2002.08.13 / 박광정(배우)  

공식적인 호칭을 쓰니까 이상하네요. 그냥 형이라고 할게요. 특별한 일 아니면 1년에 한번 전화할까 말까 한데 이런 글을 쓰려니 쑥스럽네요.

형! 세계 최초의 <오아시스> 상영 날 대한극장 8관 맨꼭대기(X1)에서 영화를 봤습니다. 형도 알다시피 제가 촬영할 때나 공연장을 제외하곤 사람이 10명 넘는 곳에 가면 불편해 한다는 것 아시죠? 모르시나요?

영화 시사회에 처음 갔었습니다. 사실 제가 출연한 영화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질 못하는 성격인데 큰 용기를 냈었지요. 아! 얼마 전에 <아이언 팜> 시사회에 무대 인사하러 갔었네요....역시 영화는 자리에 앉아서 보질 못했지요.

영화 끝나고 형님을 찾으니 안 계시더군요. 다른 극장의 시사회 때문에 그곳으로 가셨다고... 전화를 했었지만 신호가 가는 동안 끊었지요. 그리고는 대학로 연습실로 가질 않고 집으로 들어왔지요.

형! 첫 시사회 날 전국적으로 35도가 넘는 날씨에 숨 쉬기도 힘들었는데 상영 시작 1시간 전에 소나기가 내렸어요. <오아시스>를 상영한다고 하니까 하늘도 미리 분위기를 시원하게 해준 거 아셨어요? 돌아오는 차 속에서 윈도 브러시가 움직이는데 나비가 날더라고요? 어라? 이게 뭐지? 하는데 차들을 뚫고 코끼리가
지나갔어요. 정말이냐고요?

물론 뻥이죠... 하지만 그런 환상을 느꼈답니다.

정말 독한 인간들이에요. 형이나 이창동 감독이나, 경구나 문소리씨나... 그렇게 독하게 영화를 만들어 놓고 사랑을 이야기하자고요? 희망을 얘기하자고요?

글쎄요... 형들은 절망하고 절망하고도 절망한 후에 사랑을, 희망을 얘기하지만 저는 아직 절망의 끝에 가 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형이 그렇게 보라고 했던 <박하사탕> 아직 끝까지 못 봤습니다. 그나마 마음에 걸려 비디오로 보다가 끝까지 못 보고 반납했었지요. 광주의 상황이 나오기 전인 것 같아요. 경구가 경익이를 때리면서 하는 대사였나요? '넌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냐?' 모르겠어요. 인생이 아름다운지 추한지....

형! 제가 지금까지 본 드라마 중에선 연극 <빈 방 있습니까?>가 최고의 드라마였어요. 연극을 보면서 진정 마음속으로 울어본 처음이자, 마지막 연극이었으니까요. 거기에도 장애우가 나오지요. 영화를 보러 가던 선입견은 <빈 방 있습니까?>보단 못 하겠지...였습니다. 사실 본 후의 느낌도 그랬고요. 하지만 마음속에 새겨지는 흔적은 비슷하게 남을 것 같네요. <빈 방...>의 차이는 소극장의 등받이도 없는 객석과 대한극장의 편안한 좌석에서 느끼는, 그리고 스크린에서 가장 먼 곳에서 본 느낌의 차이겠지요.

정말 독한 인간들입니다. 영화를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주 쉽게 CG로 해결하려고 했었을 것 같은 장면들을 인간 CG로 해결한 독한 인간들... 모두가 디지털이라고 할 때 홀로 일어나 아날로그라고 외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을 아는 독한 인간들입니다.

형! 제가 왜 이 글을 쓰는지 아세요?

'갓 뚜껑을 연 영화 만난 첫인상, 이 영화가 나에게 던진 화두'라는 제목의 글을 써 달라 해서입니다. 그런데 감히 고수의 깊은 뜻에 함부로 얘기하겠습니까?

황새의 뜻을 어찌 뱁새가 다 헤아리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된 작품에 제가 어떤 딴지를 걸겠습니까? 다만 영화제 출품작이라면 지레 겁먹을 사람들이
걱정되네요...

아마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웃기면서 울리는 영화
아닙니까? 웃기고 울리는 걸 동시에 하는 게 쉽진 않죠. 둘 중하나를 제대로 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자 이제 저의 숙제에 답해야 할 것 같네요.

질문1; '영화를 만난 첫 인상' 답; 죽인다!

질문2; 이 영화가 나에게 던진 화두는? 답; 영화 함부로 만들지 마라! 내공을 쌓아라! 정 찍고 싶으면 독하게 찍어라!
답은 그렇지만... 저도 오기가 있기에... 준비해온 영화 계속 준비하렵니다.

독하게 찍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성격상 <오아시스>같이 독하게는 못 찍겠지만 그냥 내 식대로 할 겁니다.
다만 이창동 감독은 6년을 준비해 처음 영화를 만들었다죠? 전 3년만 준비할랍니다.

아무튼 지독한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누군가 명계남, 이창동을 모델로 영화를 만들면 정말 재밌는 영화가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형! 이번엔 꼭 흥행 대박 터트려 돈 많이 버십시오. 형의 대학로 별명 '없어도 황제'가 '돈도 많은 황제'가 되시길 빕니다. 정말로...

두서 없이 길어졌네요. 베니스에서도 좋은 결과 있기를 빌면서 이만 줄입니다.

형! 장하십니다!!








진정한 사랑 영화는 달콤한 것이 아니라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
 
2002.08.14 / 채호기(시인)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는 아름다운 사랑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후 한동안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사랑 영화라면 뭔가 달콤하고 애틋하며 팬시 상품 같은 것일 거라고 미리 짐작했다가 어긋나버렸기 때문일까? 그 영화가 흔한 ‘신데렐라’식 사랑 영화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 기분을 들여다보건대,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영화는 내 안에 들어 있는 숨기고 싶은 편견과 야비한 욕망을 자꾸 밖으로 끄집어내어 부끄럽게 하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내가 사회적인 시선이나 굴레 때문에 억눌러 위장하고 있는 악한(?) 본성을 강제로 노출시키고 그것에 대해 한없는 선의 잣대로 단죄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내 자신에게 물어보지만, 뇌성마비 장애인인 한공주를 나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정직한 답변이다. 사랑은 매혹의 불꽃에 의해 점화되는데, 장애인에게 매혹을 느끼는 것은 현재의 나로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홍종두는 어떻게 한공주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영화에서도 설명되지 않지만, 아니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어서, 영화에서도 비켜 지나갔을 것이다.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일이라서, ‘왜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사자들도 정확한 대답을 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두고 나 같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홍종두는 훨씬 선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한공주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역시 아니다. 선하고 순수하다고 다 장애인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사랑은 주관적이고 돌발적인 것이라서 그 미묘한 이유를 객관적으로 설명하기란 역시 불가능하다. 어떻게 매혹되고 무엇에 끌리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 알 수 없음을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흔히들 둘러댄다. 아름다움 또한 미묘한 것이라서 굳이 그것을 틀린 대답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이 선택이 아니라 돌발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홍종두는 나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왜일까?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일인데도, 장애인을 정상인과 동등하게 대우하고 차별하지 않는 것과 장애인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인데도, 왜 나는 부도덕하게 느껴지고 그것으로 인해 불편해질까? 이 영화는 이처럼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사회 비판적인 영화인가? 홍종두의 순수성과 보편적인 사회인으로서의 다른 등장인물들을 비교하면 그럴싸하기도 하다. 하지만 주변 다른 등장인물을 두고 쉽게 악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평범할 뿐이다. 홍종두는 또한 절대적으로 선하기만 한가? 그렇지 않다. 그는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망나니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특정한 사회를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이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회라는 공동체를 비판하는 영화가 아닐까. 왜냐하면 모든 진정한 사랑은 근원적으로 사회에 대항하는 것이니까.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의 한 대목이 기억난다. “사랑은 이 세계에 고하는 하직 인사다... 그 관계는 공동체 전체에 대한 도전으로서 던져진 아름다움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보다 더 이 세상을 경멸하는 것도 없다.”(파스칼 키냐르, 송의경 옮김, '은밀한 생', p466, p474에서) 이처럼 파스칼 키냐르는 사랑을 사회로부터 스스로 격리되어 “사회의 중재 없이 살아가는 삶의 한 형태”로 파악한다. 그에 의하면 사회의 동의하에 연애하고 결혼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집단의 동의 없이 사랑에 빠진, 결혼이 아닌, 번식의 목적성이 배제된 철저하게 반사회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은밀하게 살아가는” 삶의 한 방식이다.(같은 책, p480에서)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진정한 사랑의 영화이다. ‘오아시스’는 그러한 사랑의 상징이다. 사랑은 오아시스처럼 사회로부터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 이창동 감독이 이 영화의 기본적인 구도를 장애인과 전과자의 사랑으로 설정한 것도 ‘집단의 동의가 없는’ 진정한 사랑의 비사회적인 속성을 좀더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보여진다. 이감독의 “세상에서 쉽게 허용해주지 않는 사랑일수록 그 충돌은 더욱 고통스럽고 비극적”이라는 '연출의 변'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느꼈던 불편함의 진정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도덕적인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의 자리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당사자 두 사람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그 자리를 허용해주지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랑의 외곽에서, 사랑의 대척점인 이 사회에서 불편하게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와 함께 또 다른 결론에 다다른다. 진정한 사랑의 영화는 달콤한 것이 아니라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진실과 왜곡, 그 뒤틀림 속에서

2002.08.16 / 구본창(사진작가)  

이창동 감독은 늘 사회 끝자락에 있는, 그늘에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다룬다. 그의 주인공들은 우리 사회가 파놓은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몸부림친다. 그 몸부림은 종종 너무도 격렬한 느낌이어서 시선을 가만히 두지 못하게 한다. 선뜻 다가서게 하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 하지만 그것은 결코 거부감은 아니다. 오히려 그건 두려움이다. 잠재돼 있는 나 자신의 몸부림을 발견하고 또 느끼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아시스>의 두 주인공 역시 이창동 감독의 전작에서처럼 세상이 자신들에게 부과한 편견의 늪에서 허우적댄다. 본의 아니게 전과범으로 낙인 찍힌 사회 부적응자 남자와 육체의 짐을 짊어진 뇌성마비 장애인 여자. 하지만 이 둘의 애틋한 몸짓은 사랑이란 것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또 어떤 방식, 어떤 끝맺음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정말 평소에 '사랑'이란 것을 올바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든다. 순수한 사랑의 시작은, 그것이 상대방 연인이 됐든 아니면 추상화된 어떤 것이 됐든 바로 그런 자책감과 반성에서부터 가능할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에겐가 의미 있는 꽃이 되고 싶어한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배우의 뒤틀린 손목과 사물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허망한 눈동자는 관객석에 앉은 나를, 그리고 모두를 상영 시간 내내 불편하게 했다. 우리는 혹시 의미 있는 꽃이란 것을 그저 예쁘기만 한, 보기에 편하기만 한 꽃으로 염두에 둬왔던 것은 아닐까. 영화 <오아시스>는 미에 대한 올바른 기준, 세상사에 대한 공정한 시선에 대해 줄곧 얘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영화를 따라가기에 관객들이 종종 힘겨울 수도 있음을 감독은 의식했던 것일까. 영화는 중간중간 판타지를 선사한다. 거울로 반사된 빛의 조각들이 하얀 비둘기로 변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하얀 나비가 되기도 한다. 빛의 조각들은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건 바로 오아시스란 존재의 또다른 모습이다. 주인공 여성의 내면을 보여주는 이들 장면들은 자칫 그녀의 힘겨운 몸짓과 호소를 따라가지 못하는 관객들에게 의미 있는 호흡의 시간을 선사한다.

여자의 방에는 이 영화의 제목 그대로 '오아시스'라고 쓰여진 벽걸이 카페트가 걸려 있다. 밤이 되면 그 카페트에는 창 밖 가로수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 그림자는 날카로운 바늘, 세상이 만들어낸 날카로운 바늘처럼 보이며, 여주인공의 약한 심성을 향해 세워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 남자는 그 세상의 바늘 같은 나뭇가지의 그림자를 없애준다며 종종 그녀 앞에서 마술을 부려댄다. 수리수리 마수리..그 치기에 빠져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이야말로 이 세상 그 어느 연인보다 아름답다.

영화 <오아시스>의 매력, 미덕, 그리고 에너지는 이창동이라는 한 작가의 노력 외에도 두 남녀 배우의 열정적인 연기에서 비롯된다. 때로 이 둘의 연기는 다소 과장돼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장이라는 건 우리가 알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우리가 외면해 왔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아시스>는 바로 그 점을 가르쳐준다.








그는 제 정신인가?

2002.08.17 / 정혁현(목사)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후 종종 “영화를 사랑하느냐?”는 다소 닭살스러운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럴 경우 나는 대개 미적거린다. 그러나 재차 삼차 질문을 받게 되면 그제야 마지못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건조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속으로는 이렇게 뇌까린다. ‘영화야 어차피 현실의 욕구 불만과 무기력에 기생하는 푸른 백일몽이 아니던가? 내가 영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마치 엑스레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들을 투사하듯, 영화가 거시적으로는 현실의 정치 사회적인 관계들, 미시적으로는 욕망의 벡터들을 과장해서 드러내기 때문일 뿐이야. 영화를 사랑하느냐고? 순진하기는...' 물론 그렇다고 내가 영화보기라는 쾌락을 무조건 거부하는 청교도주의자는 아니다. 다만 영화 보기의 쾌락이 갖는 정당성이란 현실의 결여, 그 부당성이 터무니없이 막대하다는 데서 오는 반대급부일 뿐이다. 나에게 영화의 쾌락이란 가난하고 남루한 삶의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대중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으나 잠시나마 현실의 시름을 잊고 도피할 수 있는 환영적인 오아시스일 뿐이다. 나는 여태껏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창동은 제정신인가? 그는 지금 영화에 대한 애절한 사랑 고백, 심지어 경건한 신앙 고백을 감행하고 있다. 그것도 닳아빠진 판타지의 이름인 '오아시스'라는 제목으로. 나는 지금 그의 열정적인 고백의 진정성에, 그 통제할 수 없는 신앙의 에너지에 완전히 나자빠져 버렸다. 그는 <오아시스>에서 설경구가 연기한,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종두를 통해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제멋대로인 그는 사회 부적응자이며 심지어 가족의 눈에조차 그들의 인생에 거치적거리는 방해물일 뿐이다. 착하기는 한 것 같은데 도무지 철이 없는, 그래서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그가 뇌성마비 여인인 공주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사지는 뒤틀리고, 혀조차 굳어 간절한 말 한마디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그녀는 남한이라는 혹독한 공간, 뒤틀린 역사와 뻔뻔스러운 정치, 그리고 빈곤한 문화와 가혹한 자본주의가 만드는 일상에 구속된 이 시대의 대중들, 특별히 영화 관객이다. 그들은 인간의 몸짓과 언어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그녀의 방 한 쪽에는 초라한 벽걸이 카페트가 걸려 있다. 암시랄 것도 없이 명백히 영화 스크린을 비유하는 이 카페트에는 오아시스가 그려져 있다. 귀에 닳은 라디오 소리와 함께 공주가 하루 종일 쳐다볼 수밖에 없는 이 장식물은 창 밖의 가로수가 드리우는 나뭇가지의 그림자로 뒤덮여 있다. 그림자는 남루한 오아시스를 기괴하게 만든다. 이 그림자야말로 영화를 현실과 무관한 환영으로 묶어둔 채, 때로 사회 문제의 희생양으로 손가락질하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일확천금을 챙기는 복마전쯤으로 여기는 이 시대 가졌다는 놈들, 배웠다는 놈들의 파렴치한 작태가 만드는 흙탕물이 아니겠는가? 흉흉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오아시스 그림이 공주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전락했듯, 영화는 이 시대의 대중들에게 반복 충동을 재생산하는 강박증의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공주와의 관계 속에서 홍장군이 된 종두는 마술을 걸어 오아시스에 드리운 그림자를 지운다. 그러나 이는 종두와 공주의 비정상적인 관계가 만드는 또 하나의 환영이 아니다. 그들은 함께 거리로 나가 이들을 비정상으로 틀 지우는 현실의 고정된 관계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단순히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청계 고가도로에서 ‘홍장군’이 ‘공주마마’를 안고 춤추는 장면은 이창동 감독이 영화에 대해 갖는 희망의 최대치를 극적으로 재현한다. 그 장면은 그가 영화를 매개로 이 시대의 관객들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투신하는 과정에서, 그들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 질곡의 상징인 청계 고가도로를 점령하고 그곳을 재창조를 향한 신명나는 춤판으로 만들겠다는 사자후이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 속에는 나의 분신도 있었다. 마침내 종두와 공주가 몸을 섞는 아름다운 의식을 깽판내고 그를 성폭행 현행범으로 끌고 간 형사가 그에게 묻는다. “너 변태지? 너는 그런 여자 앞에서 그게 서냐?” 그의 대사는 ‘사랑하느냐고? 순진하긴...’이라는 나의 뇌까림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겹쳐진다.

구약성서의 엘리야라는 예언자는 오랜 기근에 시달리는 마을에서 과부와 외아들만이 살고 있는 집에 들러, 그들의 마지막 양식인 밀가루 한줌과 기름 몇 방울을 자신에게 내오라고 명령한다. 가난한 신자들의 마지막 한푼마저 긁어내려는 성직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이 에피소드의 의미를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신성을 지배자의 도구로 전유하려는 자들과 평생에 걸쳐 투쟁해온 이 예언자의 먹거리야말로 제 언어와 몸짓을 빼앗긴 하위주체들의 고통과 절망이었던 것이다. 나는 영화가 끝나자 서둘러 일어나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 한 그릇을 시켰다. 영화 속에서 번듯한 음식점에서 쫓겨난 그들이 초라한 카센터에서 자장면을 시켜 그토록 맛나고 정겹게 먹던 장면을 생각하며, 신앙인이자 영화를 공부하는 내가 무엇으로 양식을 삼아야 할지를 생각하며...




이창동 -<오아시스>에 출연 류승완이 훔쳐본 이창동  




따뜻한 카리스마, 그의 곁에 머물고 싶다

이창동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 출연 같은 걸 좋아하지 않는다. <박하사탕> 때부터 제작자인 이스트필름 명계남 대표도 출연시켜주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오아시스>에 류승완 감독이 출연한 것은 의외다. 주인공 홍종두(설경구)의 동생 종세 역을 맡아 세번, 그것도 제법 길게 나오면서 대사도 많이 하니까 카메오가 아닌 조연이다. 류승완 감독의 출연 목적 중에는 이창동의 연출 비법을 훔치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그가 총 10회 촬영 동안 현장에 나와, 열심히 훔쳐본 이창동은 어떤 감독, 어떤 사람일까. 류감독의 말을 받아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이창동 감독과의 인연
99년 25회 한국독립단편영화제에서 내 단편영화 <현대인>이 상받을 때 이창동 감독님이 심사위원장이셨다(이하 존칭 생략). 얼마 뒤 서울극장에서 먼발치에서 봤을 때 “아, 거장의 이미지가 저런 거구나” 탄식이 절로 나왔다. 수년 동안 안 바뀌는 헤어스타일, 그 히틀러 가르마! 느린 걸음, 사람을 쏘아보는 시선! 인사하고 싶어도 단편영화제 응모생 신세에 자세가 안 나올 것 같았다. 계속 그랬다. 먼발치에서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오아시스> 조감독 중 한명이 내 친구와 형동생하는 사이였다. 친구 통해서 연락이 왔다. 이창동 감독이 나를 캐스팅하고 싶다고. “베드신 같은 거 없는 거지?” 묻고는 없다는 걸 확인하고 이 감독을 찾아갔다. 왜 베드신이 싫냐고? 애엄마가 싫어하니까. 쑥스럽기도 하고. 이스트필름에서 이 감독을 만났을 때 아주 자상했다. 시나리오를 주면서 그랬다. “같은 업계에 있는 사람끼리 시나리오 주고서 거절당하는 기분을 알 테니까 웬만하면 하자.” 내가 물었다. “저는 친구들 하고 노는 기분으로 출연한 것 빼고는 다른 감독 영화 출연한 적 없거든요. 저를 통제할 수 있으시겠어요?”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이 감독은 아주 유머러스하게 오케이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됐다.

첫째, 시나리오가 재밌었다. 종두 캐릭터가 좋았고. 한국영화에서 그런 캐릭터 있었나? 시작부터 끝까지 뭔 짓을 할지 예측이 불가능한 인간. 종두가 공주 아파트 앞 나뭇가지 자르는 대목부터 이어지는 끝장면의 해피엔드가 너무 좋았다. 둘째, 초급 연출가로서 이 감독 영화를 볼 때 조연들의 연기가 너무 생생했다. 지금도 송강호 선배 연기 중에 제일 좋아하는 게 <초록물고기>에서의 양아치다. <박하사탕>도 조연들이 모두 빛난다. 그 연출 비법을 빼내고 싶었다. 연출부 할 때와 달리, 이번에는 내가 배우로서 직접 디렉션(감독의 지휘)을 받는 거다.

공포의 이창동 권법

처음 현장 나가면서부터 틈틈이 비법을 엿봤다. 가장 놀란 건 “집에서 시나리오 많이 읽고 오지 마라”는 거였다. 비어 있는 상태에서 연기 방향을 함께 잡으면 쉬운데, 혼자 열심히 읽고서 방향을 잘못 잡아 오면 고치기가 힘들다는 거였다. “현장상황 안에 빠져들어라, 그 안에서 같이 살자.” 또 이랬다. “대사할 때 평상시처럼 말을 해라. 괜한 감정 넣거나 의식해서 대사치지 말고.” 이렇게 명확한 디렉션이 있을까. 나는 연출할 때 대사의 강세를 어디에 넣어라, 어휘를 어떻게 틀어라는 식으로 하는데.

이 감독은 현장을 능수능란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지휘했다. 나는 그가 소설가였을 때보다 학교 선생님이었을 때가 궁금하다. 사람 대할 때 긴장과 이완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그 솜씨는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통제하면서 익힌 것 아닐까.

나는 원래 세번 출연하기로 돼 있었다. 많으면 다섯번? 세번 촬영을 다 했는데 전부 다 재촬영한다고 했다. 솔직히 짜증났다. 앞의 것도 힘들게 찍었는데. 이 감독은 처음에 “이번 영화는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모습을 핸드헬드로 포착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일 가벼운 아톤기종 카메라까지 빌렸다. 그래놓고는 삼각대 위에 얹혀 놓고 찍었다. 그러더니 재미없다고 다시 찍겠다는 거였다. 자기 딜레마에 빠진 것 같았다. 나 같으면 쪽팔려서 다시 찍자고 못할 것 같다. 자기 실수를 인정하는 건데, 무척 놀랐다. 집요하다. 뚜렷하게 방향이 서 있는 게 있으면 그게 나올 때까지 계속 가는 건 물론이고, 스스로도 꿰지 못한 게 있을 때도 어떻게 해서든 찾아낼 때까지 밀고 간다.

그럼 조연을 잘 만드는 비법이 뭘까. 한마디로 하면 나올 때까지 하는 거다. 내가 대사를 치려고 하면, 계속 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연출한다. 그 상황에서 살 수밖에 없게 만든다. 대사를 열번 반복하면 지치게 마련. 그러면 대사는 이미 머릿속에 박혀 있고, 어느 순간에 나온다.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자기 말이 튀어 나온다.

답답했던 건, 내게는 특별한 지시를 안 주는 거였다. “다 알면서 뭘 그래?” 내가 뭘 안단 말인가. 그는 배우를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스스로 찾아가게 만든다. 무조건 친절한 게 아니라 불친절을 수반하면서 배우 스스로 그 역할에 대한 생존법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다. 배우가 그걸 안 하면 현장이 공포스러워 못 견딘다. 물론 촬영 뒤에는 배우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와! 독한 사람이구나.경찰서에 온 문소리씨를 찍을 때 문씨는 뇌성마비 장애인 연기로 체력이 소모돼 거의 거품물고 나가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나 같으면 더 못 찍는다. 그는 한번 더 찍자는 말을 태연하게 했다. 그런 감독들 있다. 박찬욱 감독도 <복수는 나의 것> 찍을 때 뇌성마비 장애인 역을 한 류승범에게 그랬다. “승범아, 힘들지?” “예!” “한번 더 할까.”

어느 연기학원 현판에 “연기는 기다림의 예술”이라고 써 있다. 배우의 연기가 원하는 만큼 나올 때가지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 같으면 A가 안 나오면 못 참고서 B를 선택해 A마이너스에 가깝게 하려고 할 텐데. 그는 기다린다. 감독이 기다리니까, 배우도 기다린다. 기다리니까 자연스럽게 현장에서 살게 된다.

종두가 처음 감옥에서 나왔다가 무전취식으로 잡혀온 걸 인천경찰서에서 찍었다. 이 감독이 형사반장에게 약간의 자문을 구했다. 그때 형사반장이 시연 비슷하게 하면서 종두, 설경구를 달래는 거였다. “감옥에서 나오면 집에 가야지, 안 그래” 하는 식으로. 원래 시나리오는 경찰이 무섭게 다그치는 것이었는데, 이 감독은 바로 접수했다. 형사반장에게 그 역을 부탁했다. 그랬더니 형사반장이 먼젓번과 달리 연기하는 거였다. 바로 공포의 이창동 권법에 걸려서 말이 나올 때까지 하고, 또 하고…. 결국 말이 나왔다.

경찰서는 재밌는 곳이다. 이렇게 말하면 욕하는 사람들 있을지 모르지만. 종두가 강간범으로 지목돼 끌려오고 가족이 다 경찰서에 출동하는 부분은 부산경찰서에서 찍었다. 진짜로 경찰서에 잡혀온 사람들이 떠들고 싸우고, 촬영이 오래되다 보니 그 사람들도 늘어나고. 스탭이 ‘슛!’ 하니까 한 형사가 싸우던 사람들에게 “슛 간단다, 임마!” 하고 외친다. 이내 조용해진다. 형사계 데스크에서 사건 접수하는 형사도 전화받다가 “촬영간다, 임마, 끊어라!” 그런다. 그 사람들 고맙다. 나도 한 칭찬 들었다. 공주 오빠에게 “니가 날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새꺄!” 할 때 한 형사 왈 “배우는 배우네, 똑같애.”




이런 액션이! 이런 예술이!

부산경찰서에서 종두 형 종일이 종두를 때리는 장면을 찍을 차례였다. 액션하면 내가 한 가닥 한답시고 종일이 이렇게 치면 종두는 이렇게 어깨를 내밀고… 자, 빨리 찍고 집에 가자, 배우들끼리 그러고 있는데 그가 나타났다. 액션이 아니라 감정을 얘기하는 거였다. “자기 감정으로 표현해라.” 그가 직접 시연을 하는데, 정말로 설경구를 때렸다. 나는 놀라서 억! 하는데 경구 형은 담담했다. “원래 변태야.” 그때 현장 분위기는 약물 복용한 뒤 감정이 순식간에 터지는 듯했다. 순간적으로 이 감독의 눈빛이 돌변했고, 그 공격적인 감정이 엄청나게 뿜어져 나와 현장을 뒤덮었다. 그는 또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았다.

액션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겠다. <피도 눈물도 없이>를 정두홍과 함께 찍으면서 많이 놀라고 많이 배웠는데, 이것도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 다음 신에서 이 감독과 설경구가 언쟁이 붙었다. 경구 형이 역할을 못 받아들이고 감독과 충돌했다. 설경구는 종두가 왜 스스로 강간 안 했다고 말을 못하냐는 거였고, 감독은 종두가 똑똑하게 자기 방어를 할 인물이 아니라는 거였다. 설경구는 촬영이 끝나도 종두 옷 입고 종두처럼 중얼거리면서 종두로 산다. 대단한 배우인데, 의견충돌이 생기니까 클라우스 킨스키가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에게 대드는 식이 아니라 ‘이거 우리 작품이다’, ‘작품 함께 만드는 거다’는 걸 전제로 붙는 거였다. ‘이거 하기 싫어’ 이런 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옆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장면인데, 보고 있으니까 멋있는 풍경이었다. 우리도 한 예술 하는구나, 이게 예술이구나.

보통 같으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한번 찍고, 나하고 싶은 대로 한번 더 찍자 할 수도 있다. 서로 신뢰하니까 작품에 대한 자기 진심을 털어놓고 언쟁을 하는 거였다. 결국 경구 형이 감독을 믿고 따라갔다. 독특한 건 이 감독이 배우에게 져주거나, 아니면 눌러버리거나 하지 않는 거였다. 항상 논쟁하면서 그 긴장을 끝까지 팽팽하게 가지고 갔다. 본인 스스로 그 긴장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을지 모른다. 뒤집어보면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해 항상 열어놓고 있는 거다. 무술로 따지자면 이소룡의 절권도, 최영의 극진가라테의 개념이다. 자기 공식을 만들어서 그것대로 진행하다보면 언젠가 빈틈이 생기고 틈은 깨지게 마련이다. 모든 공격과 방어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부딪치는 것. 고수다. 영화 마친 뒤에도 경구 형 인터뷰 같은 것 보면 아직도 종두 역에 납득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틀어져 있지는 않다. 촬영 끝나고 함께 술마시고 얼마나 놀았는데. 촬영 때 힘들어하던 것을 옆에서 본 나로서 그가 아쉬움은 있을지 모르지만 후회는 안 할 것 같다. 이 작품을 한 것을 부끄러워 하기에는 현장이 너무 치열했다.

인간 이창동

부산경찰서 촬영 마치고 감독 숙소에 모여 맥주 한잔 했다. 그때 이 감독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왜 <초록물고기> <박하사탕>을 만들었고 지금 <오아시스>를 찍는지 이해가 갔다. 그는 적어도 자기의 삶을 배신하는 일은 안 할 것 같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신뢰한다.

그는 어릴 때 좁은 시장통 골목에 살면서 옆집인지 앞집 형이 틀어놓은 <샌프란시스코>라는 팝송을 매일 들었단다. 그 노래가 10대 시절의 판타지였단다. 샌프란시스코가 어떤 곳이기에,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나. 나중에 출세해서 그곳에 가자마자 제일 먼저 사람들이 머리에 꽃 꽂고 다니나부터 확인했단다.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인데, 항상 자기의 판타지를 어디선가 찾았던 것 같다. 현실도피적인 게 아니라, 자기를 놓치지 않고 가려는 게 있었던 것 같다. 지금 그 판타지가 <오아시스>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그의 영화 세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장면이 있다. 한 집단이 모여서 잘 놀다가 누구 하나가 들어와서 파투나는 것. <초록물고기>의 가족 야유회, <박하사탕> 첫 장면의 강변 야유회, <오아시스>의 어머니 회갑연이 그렇다. 그런데 누구나 다 그런 기억이 있지 않을까. 또 셋 다 범죄의 요소가 있다. 확실히 이 감독은 자신의 기억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그걸 인정하고 끄집어내 보여주는 걸 꺼리지 않는다.

편집 끝나고 대학로에 모여 술마실 때 내가 그랬다. 90년대 대표감독으로 홍상수, 이창동을 꼽는데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세상보는 시선 같다, 홍상수는 유머러스한 것 같으면서 냉소를 지녔고 이창동은 되게 비열하고 잔인해 보이는 현실을 그리는데도 따듯한 것 같다고. 이 감독 왈 “아, 우린 또 따듯한 거 좋아하지.” 그의 유머는 선생님 티가 나면서 썰렁한 데가 있다. 내가 <초록물고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장르로서의 완성도도 높고 어쩌고 하는 순간 그가 말을 빼앗았다. “아, 우리 또 장르영화 좋아하지.”

그는 현장에서 재미라는 말을 자주 쓴다. “이거 재밌냐?”, “재미없냐?” 그 재미라는 게 특별한 말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 제대로 보이느냐는 것이었다. 만드는 사람이 진정성을 가지면 전달될 거라는 믿음을 가진 것 같았다. 짧은 경험이었지만 지켜본 바, 그는 따듯한 사람이고, 유러머스한 사람이었다. 선생님으로 따지면 왜 수업시간에 재미있게 해도 버스에서 만나면 조는 척하며 피하고 싶은 교사가 있고, 수업시간에 무섭게 해도 마주치면 인사하게 되는 사람 있지 않은가. 선생님일 때 그는 후자였을 것 같다.

이 감독은 나이로 치면 장선우, 박광수 감독 연배지만 데뷔를 90년대에 해서인지 박찬욱 이하 아래 세대 감독들이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다. 영화도 이 감독의 영화는 <초록물고기> 같으면 누아르, <오아시스> 같으면 멜로의 장르적 친근성이 있어서 좋다. 김지운 감독도 <오아시스> 촬영장에 놀러왔고. 물론 나보러 온 것도 있지만. 나만 해도 그렇다. 장선우, 박광수 감독 만나면 언다. “너, 어디 연출부니?”하고 물을 것 같다. 그러나 이 감독은 편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다.

<오아시스>

이 감독이 찍은 걸 엎고 다시 찍으며 힘들어 하는 걸 보면서 왜 그러는지 묻지는 못했다. 고작 단역배우가 시키는 일이나 잘하면 되지. 또 내가 연출할 때도 남이 자꾸 물으면 짜증난다. 그의 고민은 아마도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던 것 같고, 영화를 보면 알 수 있겠지 했다.

원래 시나리오 읽을 때 나는 우선 종두 캐릭터와 해피엔딩이 좋았지만 역시 이창동 영화라는 느낌은 확실했다. 그 주변사람들 하는 대사나 행동이 사실 살벌한 이야기 아닌가. 막상 완성된 영화를 보니까 엔딩 부분은 생각보다 약했다. 그러나 지하철역에서 공주의 판타지는 시나리오 읽을 때는 썰렁하게 느꼈는데, 영화로 보니까 내가 왜 이러지 싶을 정도로 가슴이 미어졌다. 별것도 아닌데. 코끼리 나오고 비둘기 나는 판타지 장면이 의외였는데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이 감독이 만만치 않은 무게의 작품 두개를 했는데 벗어나고 싶지 않겠는가.

김지운 감독은 나처럼 지하철 장면에서 가슴에 밀물이 쳤다며 이 영화가 “자극적”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공주를 보면서 성욕까지 느꼈다고 했다. 답답하다는 이도 있다. 허진호 감독이 그랬다. 경찰서에 끌려간 종두가 강간 안 했다고 왜 말 못하느냐는 거였다. 답답해 하는 사람은 이 부분과 종두가 형을 대신해서 감옥에 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 둘을 지적하는 것 같았다. <오아시스>는 논란이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전작들보다 열려 있는 것 같다. 감독이 관객의 우위에 서 있는 게 아니라, 관객 틈을 비집고 옆으로 들어오는 영화다.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내 생각에 <오아시스>는 이 감독에게 분기점이 되는 것 같다. <박하사탕> <초록물고기>를 보고서 이 감독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있을 거다.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실제의 이창동과 무관하게, 기대치를 만들어 거기에 박제되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박하사탕>에 비해서 어떻다, 이런 말들 나올 거다. 나는 <오아시스>를 통해서 이 감독이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될 것 같다. 관객도 <오아시스>를 보고나면 그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질 거다. ‘이럴 거야’ 하는 예단을 허락지 않는 궁금함. 사실 예상치와 맞아떨어지면 재미없지 않은가. 이런 무거운 얘기를 유머러스하게 풀어가는 부분 같은 것들, 그렇게 그가 가볍고 자유로워지면 좋을 것 같다.

류승완 감독, 이창동 출연


이창동 감독 영화에 다시 출연할 생각 있냐고? 시사회 때보니까 내가 나오면 “우” 하는 야유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써줄까? 그보다 다음에 내가 필름누아르 찍으면 이 감독이 악당으로 출연하겠다고 했다. <호파>를 보면 노조원이 알 카포네 만나고 와서는 “악수할 때 보니 손이 매우 부드럽더라”고 말한다.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감독은 얼굴 표정이나 주름을 보면 엄청난 일을 많이 겪은 것 같은데, 손이 매우 예쁘다. 가늘고 길다. 그 손을 보면서 알 카포네 생각이 나 출연 제의를 했더니 하겠다고 약속했다. 알 카포네 같은 조폭 두목이 아니라 시장통 다니면서 사과 빼앗아먹고 1만∼2만원씩 차비 뜯어가는, 상인들 피빨아 먹고사는 사람을 시키면 아주 어울릴 것 같다. 그때 복수전을 펼쳐야겠다. “감독님, 내일 새벽 6시에 집합입니다.” “다 아시잖아요, 알아서 해 주세요.”

구술정리 임범 isman@hani.co.kr·권치욱 dorre@hani.co.kr






이창동 인터뷰 후기 - 김영진  



이창동의 진담과 다케시의 농담

언제부터인가 영화감독들과의 인터뷰에서 한 수 배운다는 느낌이 적어졌다. 가끔 예외가 있는데 <오아시스>의 이창동 감독이 그랬다. 처음에는 그 만남이 부담스러웠다. <오아시스>의 형식에 100% 동의하는 것은 아닌데도 <오아시스>를 보고 감동한 내 자신에게 그 당장은 납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완벽해서 영화 내부에 완벽하게 감금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감동을 잊기 힘드니 그것도 희한했다. 나는 그 느낌을 해명하지 못해 이창동 감독과의 인터뷰를 앞두고 긴장했던 것이다. 좋은 영화를 만든 감독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가끔 인터뷰를 청하는 자가 품고 있는 호감 탓에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창조적인 긴장관계가 풀어져버리는 일이 있다. 그걸 경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감동을 끌어낸 감독에게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다. <오아시스>의 화면에 배어있는 팽팽한 긴장은 화면바깥의 카메라 뒤에서 감독과 배우, 스탭들이 치러낸 긴장의 화학작용 덕분일 것이다. 그런 긴장을 이겨낸 감독과 나누는 인터뷰가 부담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막상 이창동 감독과의 인터뷰 자리는 편안했다. 이창동 감독은 소설가 출신답게 모든 말이 그대로 받아 적으면 문장이 되는 사람이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관객과 짜고 치는 고스톱에 가까운 영화 장르 게임의 익숙한 규칙 안에서 이창동이 새로운 걸 시도한 야심가라는 걸 다시 실감했다. <오아시스>의 기승전결로 꽉 짜인 플롯은 너무 꽉 짜여서 여백이 없는 느낌을 주지만 이창동이 소재로 삼은 전과자 남자와 뇌성마비 장애자와의 사랑은 영화의 육체성으로 인해 뜨끔한 통증을 안겨준다. 스크린에 지금 이 시간에 재현되는, 사회적으로 경멸받는 사람들의 추한 육체에서 영화는 아름다움을 끌어낸다. 그건 대단한 야심이다. 그런데도 점점 고조되는 관객의 감정과는 아랑곳없이 영화는 또 매우 담담하게 끝난다. 그것도 대단한 야심이다. 관객은 이미 울 준비가 돼 있는데 영화는 울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리얼리스트의 뚝심 면에서 좀처럼 이 영화감독을 당할 자가 없다.

오밀조밀 꽉 찬 <오아시스>의 치밀한 형식에 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난 슬며시 시비를 걸고 싶어졌다. 이창동의 완벽한 허구적 세계, 현실을 가리키는 듯 하면서도 사실은 자신의 허구적 세계의 논리로 완벽하게 짜 맞춘 세계, 그래서 거기서 도망치는 것은 영 불가능한 세계의 모양에 대해 이의를 던지고 싶었다. 실례되는 짓이지만 최근에 본 기타노 다케시의 코미디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을 예로 들면서 '슬렁슬렁 찍은 그 영화도 사실은 현실에 절망하고 있지만 까짓 그럼 어때, 라는 자세로 현실을 눌러주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오아시스>는 너무 현실에 묶여 있는지 모른다'고 물었다. 이창동은 "기타노 다케시는 농담을 하고 나는 진담을 한다. 이 시대에는 진담하는 사람이 환영받지 못한다. 다 알고 있는데 혼자만 아는 듯이 말하니까, 괴로워서 피하는 것뿐인데 새삼스레 다시 말을 꺼내니까 싫어한다. 그런데 나는 진담을 하고 있으니..."라고 말하며 웃었다.

아무 것도 정해두지 않고 찍는 다케시 영화에는 등장인물이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데 카메라가 물끄러미 응시하는 듯한 장면이 곧잘 있다. 기타노 영화의 그런 느슨한 형식미는 해방감을 주지만 다케시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건 상영시간을 메꾸기 위해 할 수 없이 그렇게 찍었다는 것이다. 물론 농담이지만 그의 말을 전해주자 이창동은 정색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거짓말이다. 다케시 영화에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다가갈지를 면밀히 계산한 템포와 리듬이 있다. 그건 일본 연극의 양식인 노에서 따온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듯이 보이다가 느닷없이 행동의 폭발을 보여주는 그 스타일은 일본 전통극의 호흡이다. 그건 모르긴 몰라도 일본 관객에겐 새롭지 않을 것이다. 서구 관객에겐 호의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을 테지만..." 이창동 감독의 눈에는 그의 영화가 그렇게 대단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일본 내에서 그렇게 인기가 많은 편은 아니다. 나는 그 이유가 이창동 감독의 말처럼 그의 영화가 일본인들의 눈에 익숙한 영화여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다케시 영화의 밑에 깔려 있는 염세주의의 흔적, 세상이 그렇고 그러니 농담이나 건네자는 식의 불화의 몸짓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 농담이 먹히지 않는 것은 역시 그가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코미디언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그가 보여주는 자극적인 독설과 슬랩스틱 코미디에 비하면 그의 영화는 어딘지 사색적인 기운이 훨씬 강하다. 그런 면에서 이창동의 영화와 다케시의 영화는 서로 대척점에 선 영화는 아니다. 진담과 농담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을 뿐, 말하는 것의 도달점은 똑같다. 그들은 세상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걸 굳이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감동을 준다.

사물의 외양과 본질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세상사뿐 아니라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농담을 하는 다케시 영화에 비해 진담을 하는 이창동의 영화가 훨씬 낙관적인 기운으로 다가오는 것은 뜻밖이다. 정색을 한 가운데 슬며시 내비치는 웃음과 슬픔의 양면적인 얼굴은, 영화 내내 실실거리면서 관객을 홀리고 울리는 주인공 종두 역의 설경구 연기에 잘 살아있다. 그게 우리 세상사의 요약할 수 없는 어떤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언뜻 절망적인 듯한 세상을 보여주면서도 낙관에 도달하는 <오아시스>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접수한 감독의 시선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그걸 해낸 이창동과 동시대에 살면서 평론을 쓰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2002.08.13 / 김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