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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uble Life of Veronique

크지쉬토프 키에슬롭스키 감독
폴란드+프랑스 91
주연/이렌느 야곱, 필립 볼테르
감독/크지쉬토프 키에슬롭스키
제작/레오나르도 드 라 푸엔테
각본/크지쉬토프 키에슬롭스키, 크자슈토프 피에지에비츠
촬영/슬라보미르 이드치악
음악/즈비그뉴 프라이즈너
제작사/시데랄 프로덕션+르 스튜디오 까날 플리스+TOR 프로덕션+노르스크 필름
판매원/골든베어
제작연도/1991년
상영시간/98분


도플갱어(Doppelganger=Double Gore):분신(分身), 또는 생령(生靈).
살아 있는 사람이 또 다른 닮은꼴로서, 때에 따라 알터 에고가 되기도 하고 도덕적 카운터파트로 표상 되기도 한다.
정확히 일치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으나 당사자 아니면 알아볼 수 없다.
그것을 만나는 자는 곧 죽는다.
독일 민담의 분석에서 처음 사용된 개념이지만 이와 유사한 모티브는 세계 어디서나 발견되고 있다.
E. T. A. 호프만,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조셉 콘라드,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참조.


"사람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닮아 있다. 그렇다면 왜 똑같은 타인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가?"
키에슬롭스키의 화면은 마법에 걸린 듯 알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잡아당긴다.
그 속에 보이는 모습들은 하나하나 우리의 잠재된 기억을 되살린다.
공중에 떠도는 먼지, 어두운 골목에 좁게 떨어지는 햇빛의 작은 영토, 비온 뒤 흙길에 고인 물을 첨벙거리며 뛰어가는 소녀, 유리창에 흐르는 빗물이 흰 벽에 영사하는 그림자, 팔을 다쳐 방에 갇힌 소년의 거울 빛 장난, 차창 밖 풍경, 홍차의 김, 인형극, 낙엽, 별......
사춘기 이전의 가슴에 각인 되었으나, 사회라는 마녀의 성장이라는 흑마술에 걸려 얼어붙었던,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도 같은 이미지들은 키에슬롭스키의 키스를 받아 겨우 풀려난다.
그 해동(解凍), 혹은 전신 마비증세에 대한 물리치료 과정은, 또 사진의 인화와도 비슷하다.
빛을 쪼인 인화지는 이미지를 간직하고만 있다가 인화액 속에 담겼을 때 비로소 서서히 그것을 드러내곤 하지 않는가.
감광된 인화지 표면의 약품 성분은 인화액의 성분과 친화한다.

친화력:
화학에서, 원소가 결합할 때 특히 어떤 원소와 선택적으로 결합하는 경향이나 힘.

베로니끄와 베로니카도 영문을 모른 채 그 힘에 서로 이끌린다.
괴테 [친화력]의 인물들과는 달리 여기서의 두 여인은 단 한번도 눈이 마주친 적이 없다.
크라코우의 광장에서 둘은 잠깐 만났지만 상대를 발견한 것은 폴란드인 베로니카뿐,
프랑스 관광객 베로니끄는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채 무심히 사진만 찍다가 떠나버린다.
그 때문인지 베로니카는 얼마 못 가 죽음을 맞고 베로니끄는 살아남는다.
도플갱어를 보면 죽는다고 할 때의 '본다'는 말에는 자기 분신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베로니끄는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분명히 상대를 보았겠지만 그녀가 자기와 똑같다는 사실은 발견하지 못했었다.
나중에야 밀착 인화된 사진을 보고서 도플갱어와의 만남을 확인하지만 사진은 사진일 뿐이므로, 그녀는 이미 '죽기엔 늦었다.'
그러나 사진 속의 베로니카가 놀란 표정으로 뚫어지게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으므로 베로니끄는 상대가 자기를 인식했다는 걸 알 수 있고, 정말 그랬다면 그녀는 죽었을 것이므로 비탄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불분명하게나마 서로의 존재를 느껴왔던 이 '영혼의 쌍둥이'에게 있어, 서로는 언제나 고독의 동반자였다.
누군가가 늘 자기와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외롭지 않았고, 외롭지 않으므로 혼자여도 좋았다.

"세상에는 혼자가 아니라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베로니카.

둘은 똑같이 1966년생이고, 세 살때 난로에 손을 데었고, 성악에 특출한 재능이 있고, 홀아비인 아버지를 사랑하고, 안에 세 개의 별이 든 작고 투명한 고무공과 가죽 줄이 달린 커다란 악보첩을 가졌고, 피로할 때면 가락지로 눈자위 아래를 마사지하는 습관을 가졌으며, 매우 위험한 심장질환을 앓고 있다.
광장에서의 만남 때 둘은 비슷한 모양의 검정 코트를 입고 있으며, 베로니카는 그 안에 붉은 스웨터를 받쳐입었고 베로니끄는 붉은 목도리를 둘렀다.
둘다 붉은 장갑을 끼고 있음은 물론이다.
결국 둘은 서로에게 거울이다.
볼 수 없는 거울, 짐작만 하고 있던, 그러나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인정할 수 없었던. 그 미지의 그리움을 위로하려는 듯 화면은 대개 거울 이미지로 채워진다.
애인과 함께 누워있던 침대에서 베로니카는 빗소리를 들으며 벽에 붙은 자기 사진을 응시한다.
크라코우로 가는 기차의 창에 비치는 베로니카의 영상. 베로니카가 죽던 당시의 녹음을 들으며 거울을 보는 베로니끄. 심지어 베로니끄는 인형극을 연출하는 알렉상드르의 눈과 거울을 통해 마주친다. 그리고 인물들은 끈으로 연결된다.
일찍이 베로니카가 성악 오디션을 하며 손가락에 감았다가 그것을 알렉상드르로부터 전해 받은 베로니끄는 자기의 불안한 심전도 그래프 위에 놓고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그 직선의 그래프는 또다시 죽음을 암시한다. 어째서 '죽음'일까?

키에슬롭스키라는 신비주의자가 놀라운 것은 그의 묵상이 근원자, 보편자로 향해 가기보다는 당대의 현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TV용이었던 [십계] 시리즈 중 두 편을 극장용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자본이 유입된 이래, [베로니카]는 그가 다국적 자본으로 제작한 첫 번째 장편이며 폴란드 밖에서 촬영한 첫 번째 픽션 영화이다.
토니 레인즈가 공동제작의 가장 정교한 형태로 규정한 이 영화에서 키에슬롭스키는 크라코우와 끌레르몽-페랑을 아무렇게나 고른 게 아니었다.
평범한 감독들이 대개 그렇게 하듯 그는 동구와 서구의 두 도시를 대조의 방법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면밀하게 선택된 로케이션과 색채 설계는 철저하게 양자를 동일시하고 있다.
왜인가? 1990년 현재의 유럽을 묘사한 정치 영화로 다시 볼 때 [베로니카]는 전혀 새롭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동구 몰락과 유럽 통합의 대 격변기를 보내면서 키에슬롭스키는, 똑같지만 다른 두 여인을 통해 두 개 유럽의 관계 변화를 추적하려 한다.
도입부, 합창단원으로서 야외 공연을 하다가 소나기를 맞는 베로니카를 보라.
하나둘씩 대열을 이탈해 비를 피하러 달아나는 동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길게 고음을 뽑아낸다.
혼자서, 전신이 젖어가며,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독야청청한 그녀의 모습은 이내 친구들과 깔깔대며 빗속으로 뛰어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때 길을 가득 채우며 카메라 앞으로 다가오는 트럭과 그 짐칸에 실린 거대한 석상. 역광 때문에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으나 그것이 마르크스의 상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여기서의 공연은 훗날 크라코우에서의 공연으로, 좌대에서 내려온 모뉴망은 광장의 시위로 그 의미가 발전된다. 합창이라는 전체주의적인 형식에서 베로니카는 튀어나간다.
그녀의 비에 젖은 미소는 획일에서 벗어난 쾌감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녀의 열망은 연주회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제 합창을 뒤로하고 당당한 솔리스트로 무대에 선 그녀에게 이상하게 세상은 일그러진 영상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곧 죽음이 닥친다.
그녀에게 있어 죽음의 느낌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전에 그녀는 두 명의 늙은이를 응시한 적이 있다. 가뜩이나 꼬부라진 허리에 무거운 짐까지 들고 걸어가는 노파와, 점잖게 차려입은 정장에 성기만 밖으로 내놓고 다니는 노신사.
그는 심장발작으로 괴로워하는 베로니카에게 프록코트의 앞자락을 열어 보인다.
민중이 짊어진 고통과 관료주의의 정신질환을 여기서 보는 건 무리일까?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성기를 가리고 지나가는 신사를 보면서 베로니카는 안간힘을 다해 입술에 약을 발랐다.
잔뜩 찌푸린 하늘과 스산한 바람에 날리는 마른 낙엽, 그리고 베로니카의 튼 입술에 생명의 물기는 오를까?
(베로니카가 고등학교 때 친구 아버지에게 당했던 것처럼) 러시아에 의해 강간당한 나라 폴란드의 운명은 일단 베로니카와 함께 종말을 고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녀가 죽자마자 연주회장의 청중들 머리위로 날아가는 영혼의 시점 쇼트는 우리에게 영원성과 부활에 대한 강력한 암시를 남긴다.
그녀가 죽는 순간 프랑스의 베로니끄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공연히 눈물짓는다.
이 시점부터 영화는 그녀가 이미 세상을 떠난 동구의 여인과 일체감을 느껴 가는 과정, 그 통합의 역사에 바쳐진다.
마리오네트의 조종자 알렉상드르는 역사의 신비를 주도하는 신으로 나타나고, 베로니끄는 그가 움직이는 줄거리를 따라 두 여인의 운명이 결정되는지, 두 여자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어 알렉상드르가 소설을 쓰는 지의 여부는 감춰둔 채 감독은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논쟁지대를 교묘히 빠져나간다.
베로니카의 애인 안텍이 크라코우에서 묵었던 호텔 방 번호와 베로니끄가 파리에서 잡은 '트윈' 베드룸의 번호는 어찌하여 같은가.
베로니카의 죽음으로 좌절된 사랑은 베로니끄에 의해 부활하는 것이다.
아렉상드르가 공연하는 인형극도 죽은 발레리나가 천사로 부활하는 내용. 그는 나중에 베로니카/베로니끄를 닮은 인형을 두 개 만들어 보여준다.
베로니끄가 알렉상드르를 찾아내는 파리의 기차역은 나자르(Nazare), 바로 예수의 기적에 의해 무덤에서 살아난 자의 이름이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통합된' 부활이라는 점이다.
알렉상드르가 보낸 녹음 테이프를 듣는 그녀를 보자. 자동차 사고의 폭발음,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를 듣던 그녀는 갑자기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다.
의아해 하는 그녀의 뒤에 두 여인을 묶어주던 그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 소음이 채집된 장소로 달려가는 베로니끄. 나자르역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은 죽음의 사자인 '모자쓴 여인'이요, 그녀가 발견한 장면은 문제의 사고 자동차이다.
베로니끄 자신의 것과 같은 모양의 자동차! 사실상 그녀는 그때 죽었고 알렉상드르의 사랑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먼저 죽은 베로니카와 함께. 사랑을 버리고 음악을 택한 베로니카와, 음악을 버리고 사랑을 택한 베로니끄.
베로니카의 사진을 확인한 베로니끄에게 알렉상드르는 자신의 소설 제목을 일러준다.

[베로니끄의 두 삶].
아버지-베로니카의 아버지(동구)는 아티스트, 베로니끄의 아버지(서구)는 엔지니어라는 설정은 자못 의미심장하다-에게 달려가던 그녀는 갑자기 차를 세우고 손을 내밀어 나무줄기를 만진다.
(이때 실내에서 아버지는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다.)
그 나무의 정체를 알고 싶다면 마지막 음악이 들려올 때쯤 우리는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롤로그-어린 베로니카에게 엄마가 말한다.
"크리스마스야. 기다리던 별이 왔단다."
다음은 어린 베로니끄에게 엄마가 말한다.
"첫잎이야. 봄이 왔나 보구나."

-어느 누구.




      "베로니끄의 이중생활"은 당신을 신비로움과 강렬한 감동의 세계로 이끌 것이다. 감독 키에슬롭스키의 예술적 영화 언어가 작곡가 프라이즈너의 초자연적인 음악, 이렌느 야곱의 뛰어난 연기와 찬연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삶과 죽음. 기쁨과 고통. 외로움과 사랑. "베로니끄의 이중생활"은 우리의 가장 연약한 부위들을 어루만진다. 키에슬롭스키의 카메라가 여인들을 거대한 운명으로 이끄는 작은 디테일들에 감각적으로 접근하면서 우리가 평행을 이루는 두 인생을 관찰할 수 있게끔 조용하게 움직인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는 우리 자신들의 삶의 조각들을 보여 주면서 인생은 즐기고 잃어버린 기회들에 대해는 슬퍼할 줄 아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의 음악도 영화의 황금빛 색채에 신성함을 더해주고 있다.

       이야기 자체도 흥미롭다. 두 여자아이가 같은 시간에 폴란드와 프랑스에서 태어난다. 거기에 둘은 아주 똑같기까지 하다. 둘 다 마음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고 태어났고 마음의 상처로 고통스러워 한다. 베로니카와 베로니끄. 둘은 결국 만나게 될 것인가? 독특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 영혼의 친구를 연기한 이렌느 야곱이 숨을 막히게 한다.

       이 영화는 다른 작품들과 비슷하지도 쉽지도 않다. 비밀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관객들은 궁금한 상태로 남겨진다. 당신은 영화의 주제곡이 머릿속을 맴도는 가운데 극장을 나서게 될 것이다.

 
 
평가        이렌느 야곱은 야심찬 폴란드 소프라노 베로니카와 프랑스 음악학교 교사 베로니끄의 두 역할을 아주 매혹적으로 잘 해냈다. "베로니끄의 이중생활"은 서로 알지도 못하고 만난 일도 없는 채 심연의 교감을 갖고 있는 두 사람에 대한 매우 사색적인 이야기다. 우리는 폴란드의 베로니카를 먼저 만나게 된다. 합창단에서 노래를 하고 연인을 만나며 오디션을 받는다. 어느날 밤 이상한 꿈을 꾸고 놀라 잠이 깬 그녀는 아버지에게 그녀가 혼자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발작적인 호흡 곤란 증세에 시달리다가 결국 데뷔 무대에 서서 쓰러지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파리의 베로니끄를 만나게 된다. 어린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꼭두각시 인형극을 관람하고 시골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팬으로부터 이상한 소포를 받기 시작하면서 베로니끄는 자신이 깊은 사랑에 빠졌으며 그가 자신의 삶에 갑작스레 찾아온 설명할 수 없는 공허감을 달래줄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삶이 그렇듯이 환상은 흥미롭긴 하지만 결국 덧없는 것일 뿐이다. 그녀를 필연적인 결론과 결말로 이끄는 난해한 묵시가 남을 뿐이다.

       "베로니끄의 이중생활"은 한 영혼이 정체성과 교감을 찾는 과정을 묘사한 매우 도발적인 작품이다. 키에슬롭스키는 세피아 오버레이를 사용함으로써 매우 영묘한 분위기의 단색조의 영화를 연출해 냈다. 이 기술을 통해 얻어낸 음습한 어둠은 이야기의 신비롭고 꿈결같은 요소들을 나타낸다. (아그니츠카 홀랜드의 "올리버, 올리버"에서의 유사한 효과를 참조하기 바람) 이 영화는 무의식을 향한 시각적 탐험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의 우아한 이야기들과 생생한 꿈들을 주의깊게 살펴보기 바란다.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식은 마치 여주인공이 달콤하고도 묘한 꿈에서 마지못해 깨어나듯 생략이 많고 난해하기만 하다.


- 또다른 어느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