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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영화의 거장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Krzysztof Kieslowski, 보다 정확한 한글 표기는 '크쉬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입니다. 가급적 폴란드어 발음에 가까운 한글로 표기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현재까지 국내에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한글 표기를 따르기 위해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로 계속 표기합니다.-역자 주)는 1941년 6월 27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침공 하에서 보낸 그의 성장기는 유랑 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 아버지가 폐결핵에 시달리면서 그의 가족은 요양소를 전전하며 생활해야 했다. 16세에 키에슬롭스키는 소방 훈련 학교(Fireman's Training College)에 입학하지만 제복과 규율 속에 평생을 지긋지긋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 가지 않아 그만 둔다. 그 후 군입대를 피하기 위해 바르샤바 무대설치 학교(The Warsaw College for Theatre Technicians)에 입학한다. 1965년 그는 수 차례의 재수 끝에 로만 폴란스키(Roman Planski), 안제이 바이다(Andrzej Wadja), 예쥐 스콜리모프스키(Jerzy Skolimowski), 그리고 크쉬슈토프 자누쉬(Krzysztof Zanussi) 등이 거쳐간 우츠 영화학교(Lodz Film School)에 입학하여 이듬해 첫 단편 극영화 "전차"(Tramwaj)를 제작한다.


    1960년대와 70년대 공산 정권이 지배하던 폴란드는 정치적으로 몹시 불안정한 나라였다. 이로 인해 영화는 중요한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당에 의해 거부된 삶의 방식을 조심스럽고도 암시적으로 묘사하는 사회적 양심의 표현 수단이었다. 당시 다큐멘터리는 예술적 중요성과 함께 상업적으로도 극영화와 병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1966년작 "사무실"(Urzad)을 통해 키에슬롭스키는 처음으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한 국영 보험회사 사무실을 통해 관료주의적 정책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1967년 단편 "소망의 연주회"(Koncert Zyczen)로 잠시 극영화를 선보인 후 그는 1968년 폴란드 국영 방송국을 위한 32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사진"(Zdjecie)을 제작한다.

   

    1969년 졸업 작품 "우츠 시로부터"(Z Miasta Lodzi)에서 키에슬롭스키는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방식에 더욱 역점을 두게 된다. 졸업 후 그의 초기 작품들은 극장에서 극영화 상영 시 보조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일련의 단막극(One-act films)들로 이루어져 있다. 키에슬롭스키의 1970년대 초 다큐멘터리들로는 "나는 군인이었다"(Bylem Zolnierzem), "경주 전에"(Przed Rajdem), 그리고 "억제"(Refren)가 있다. 1972년에는 루빈 구리 광산(The Lubin Coper Mine)의 위탁을 받아 제작한 두 편의 다큐멘터리, "브로츠와프와 비엘로나 구라 사이에서"(Miedzy Wroclawiem a Zielona Gora)와 "구리 광산에서의 안전과 위생 원칙"(Podstawy BHP w Koplani Miedzi)이 있다. 곧 이어 제작한 "71년 노동자들: 우리 없이는 아무 것도 없다"(Robotnicy 71: Nic o Nas Bez Nas)는 폴란드 공산주의 연합 노동당의 일등 서기장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Wladyslaw Gomulka, '고물카'라는 한글 표기로 알려져 있음-역자 주)의 하야를 촉발시켰던 1970년 파업 사태를 묘사하고 있다.


    1973년 다큐멘터리 "벽돌공"(Murarz) 이후 키에슬롭스키는 자신의 첫 텔레비전 드라마 "보행자 전용 지하도로"(Przejscie Podziemne)을 만든다. 1974년 두 편의 다큐멘터리, "엑스-레이"(Przeswietlenie)와 "첫사랑"(Pierwsza Milosc)를 완성하면서 그는 "이력서"(Zyciorys)라는 드라마적 다큐멘터리(Dramatic Dacumentary)의 제작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제명 당할 위기에 놓인 한 공산당원의 반대 심문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허구였지만 그에 대한 당 통제 위원회의 결정은 있는 그대로였다. 영화의 기획이 상당한 논란과 비판을 불러 일으키고 많은 폴란드인들이 키에슬롭스키가 영화를 통해 당을 희롱했다고 생각했다. 이후로 그의 남은 여생 동안 자신의 조국에서 대중들의 견해는 줄곧 엇갈리게 되었다. 즉,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들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를 기회주의자요 자기 자신과 나라를 팔아먹은 배신자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키에슬롭스키는 국내에서의 유명세와 달리 해외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975년 "직원"(Personel) 이전까지는 장편 텔레비전 극영화조차 만들지 않았다. 1976년 두 편의 다큐멘터리, "병원"(Hospital)과 "석판"(Klaps) 이후 같은 해 첫 극장용 극영화 "흉터"를 만들게 된다. 텔레비전 드라마 "고요"(Spokoj)가 바로 그 뒤를 이은 다음에는 이후 2년에 걸쳐 세 편의 다큐멘터리, "야간 짐꾼의 시각에서"(Z Punktu Widzenia Nocnego Portiera), "난 몰라요"(Nie Wiem), 그리고 "서로 다른 나이의 일곱 여자들"(Siedem Kobiet w Roznym Wieku)가 소개되었다. 1979년에 드디어 극영화 "카메라 광"(Amator)이 키에슬롭스키를 세계 영화계의 전면에 알리게 된다. 결혼과 직장 생활이 위태롭게 되도록 새 8밀리 카메라에 집착하는 한 공장 노동자(예쥐 스투르, Jerzy Stuhr, 키에슬롭스키와 공동 각본, 현재 키에실로프스키 영화의 맥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99년 베니스영화제에 출품했습니다. "화이트"에서 카롤의 형으로 나오는 뚱뚱한 그 배우로 95년 에딘버러 연극제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정주영님 제공)에 관한 이 풍자극은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키에슬롭스키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겨 준 작품이다.


    1980년대 초는 폴란드에 격변의 시기였다. 키에슬롭스키가 다큐멘터리 "기차역"(Dworzec)과 "토킹 헤드"(Gadajace Glowy)를 만든 해인 1980년 8월에 자유 무역 연합(The free trade union)의 뒤를 이은 폴란드 자유 노조(Solidarity)가 탄생한다. 사회 전반에 자유의 물결이 넘치게 되면서 키에슬롭스키는 공산주의 지배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두 편의 극영화 "위기"(Przypadek)와 "짧은 근무일"(Krotki Dzien Pracy)을 제작했다. 그러나 1981년 계엄령이 폴란드 전역에 선포되어 영화 자본이 마르고 국영으로 제조되어 공급되던 장비들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게 되면서 영화 산업 전반이 무너지게 된다.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키에슬롭스키는 몇 개의 기획을 시도했으나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계엄령이 1982년까지 계속 되어 국가 재정이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는 1984년 극영화 "끝 없음"(Bez Konca)를 제외하고는 수년간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88년 폴란드 국영 방송국으로부터 "십계"(Dekalog)의 제작 의뢰가 들어오면서 마침내 키에슬롭스키에게 청신호가 켜졌다. 점점 더 많은 드라마를 제작하게 되면서도 키에슬롭스키는 액션 보다는 아이디어에 의해 진행되는 다큐멘터리식 영화제작 방식을 고집하였다. "십계"는 이러한 그의 제작 방식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작품으로서, 성경의 십계명에 기초하여 바르샤바 주택단지의 입주자들의 삶을 조명하는 매우 탈정치적인 연작이다. 이 야심적인 기획은 시청자들과 비평가 모두에게서 호평을 받았고 이 가운데 두편의 에피소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A Short Film About Love)와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A Short Film About Killing)은 장편 극영화로 다시 제작되어 국제적으로도 배급되었다.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의 경우 1988년 깐느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과 유럽 권위의 펠릭스 상을 수상하였다.


    동유럽 전역의 공산 정권이 무너지면서 폴란드 자유 노조가 1989년 복권하였고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자유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하던 키에슬롭스키는 프랑스에서 1991년 걸작 "베로니끄의 이중생활"(The Double Life of Veronique"를 완성하고 다시 한번 국제적 성공을 거둔다.


    1993년에 그는 프랑스 국기의 세가지 색과 그 상징에 기초한 "세가지 색: 3부작"(Three Colors: Trilogy)을 기획하는데, 그 첫 작품 '자유에 대한 명상'이랄 수 있는 "블루"(Blue)는 프랑스의 아카데미상인 세자르 상을 여러 개 수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줄리엣 비노쉬(Juliette Binoche)의 여우주연상을 비롯하여 여러 부분의 골든글러브 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같은 해에 '평등에 관한 에세이', "화이트"(White)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키에슬롭스키에게 은곰 감독상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3부작 가운데 키에슬롭스키에게 가장 큰 영예를 안겨 준 작품은 1994년작 "레드"(Red)일 것이다. "베로니끄의 이중생활"의 스타 이렌느 야곱(Irene Jacob)이 출연한 '박애에 대한 탐구' "레드"는 상당한 상업적 성공과 비평가들의 호평을을 동시에 받았으며 세자르 상과 골든글러브 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심지어 키에슬롭스키는 아카데미상 최우수감독상 후보에 지명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그는 "레드"의 완성과 함께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최고의 정점에서 스스로 은막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길을 선택했다.


    알려지는 바로는 심장절개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였던 1993년 3월 13일 당시 키에슬롭스키는 천국, 지옥, 그리고 연옥을 주제로 한 새로운 3부작을 기획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수술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켜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Jason Ankeny, All Movie Guide

 






Interview  :  Three colors triology

문: 어떻게 해서 프랑스의 모토인 자유, 평등, 박애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답: 전에 "십계"(1988)에서 가졌던 관심과 같은 이유에서다. 10개의 구절을 통해 십계명은 인생의 본질을 표현한다. 자유, 평등, 박애의 세 가지 단어도 마찬가지다. 수 백만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상을 위해 죽어간다. 그러한 이상들이 오늘날 어떻게 현실화되고 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문: 결국 당신이 관심 갖는 것은 인생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이 디자이너로서의 첫 직업을 버리고 우츠 영화 학교에서 다큐멘터리를 전공하게 된 이유인가?

답: 이미지를 통해 내가 느끼는 것들을 표현하는 동시에 세상을 묘사해 보고 싶었다. 당시는 리처드 리콕이나 조리스 아이번스 같은 위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작가들의 시대였다. 오늘날 텔레비전이 그런 방식의 영화 제작에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텔레비전은 복잡한 세상을 싫어한다. 단순한 생각으로 단순하게 보도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하얗고 저것은 검고,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고…

문: 세 편의 작품들이 갖는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우린 세 가지의 아이디어들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매우 철저하게 관찰하되 한 개인의 관점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 아이디어들은 인간의 본성에 반대되는 것들이다. 그것들을 진짜 만나게 된다면 아마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차도 모를 것이다. 사람들이 정말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원하는 걸까? 단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아무튼 우린 언제나 개인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했다.

문: 당신은 꾸며낸 이야기를 영화에 담으면서도 인생의 실재에 매우 근접하려고 하는 것 같다.

답: 삶은 문학보다도 훨씬 지적이다. 사실 다큐멘터리를 오래 한 것이 내게는 축복인 동시에 장애물이었다.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에는 대본대로만 연출하면 됐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촬영을 하는 동안에는 가능한 한 많이 담는 게 일이다.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는 곳은 바로 편집실이다. 요즘도 나는 그런 방식으로 작업을 한다. 내가 찍는 것은 사실 이야기가 아니다. 필름은 단지 이야기를 만들게 될 요소들을 담아 내는 것 뿐이다. 촬영을 하는 도중에 대본에 없던 디테일이 들어가기도 하고 편집 과정에서 많이 들어내기도 한다.

문: 그런 방식을 계속 밀고 가게 되면 결국 대본이란 핑계거리로 전락하게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답: 아니다, 절대 그렇지가 않다. 나에게 대본은 함께 작업하는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대본은 최소의 골격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결국 필수 불가결한 기초다. 물론 촬영이 진행되면서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다. 어떤 아이디어들은 없어져 버리기도 하고 마지막이 처음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행간과 아이디어들 사이에 있는 그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문: 세 편의 영화들을 막간을 두어 가면서 개별적으로 찍었는가?

답: 우리는 "블루"로 시작해서 1992년 9월과 11월 사이에 찍었다. 그 마지막 날 "화이트"를 시작했는데 두 편의 영화 주인공들이 함께 나오는 법정 장면 때문이었다. 파리에서 법원 촬영은 허가 문제 때문에 아주 어려웠는데, 우리는 그 장점을 활용했다. 영화의 첫 부분이 파리에서 이루어지는 "화이트"의 거의 30%를 즉각 찍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폴란드로 가서 완성했다. 이후 열흘간 휴식을 취한 다음 1993년 3월에서 5월 사이 스위스에서 촬영된 "레드"를 찍기 위해 제네바로 갔다.

문: 세 영화들의 시나리오는 완전히 완성된 상태였었나?

답: 촬영 첫 날 전에 완벽하게 준비되도록 6개월 전에 썼다. 기간이 걸리는 것은 장소 섭외라는 점을 기억해 줬으면 한다. 100개의 씨퀀스를 세 나라에서 세 사람의 각각 다른 촬영감독과 찍는다고 생각보라. 또 제작자와 합의된 사항을 맞추기 위해 준비도 많이 해야 했다.

문: 세 편의 영화에서 모두 같은 스텝과 작업했었나?

답: 촬영감독이 모두 달랐다. "블루"에서 스와보미르 이지악(Slawomir Idziak), "화이트"에서는 에드바르드 크워신스키(Edward Klosinski, 안제이 바이다와 여러 번 작업), 그리고 "레드"에서는 젊지만 매우 재능있는 피요트르 소보친스키(Piotr Sobocinski)와 촬영했다. 음향, 세트 디자인, 음악 같은 다른 스텝들은 모두 같았다. "십계"에서 꽤 잘 통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같은 원칙을 지켰다.

문: 세 영화들을 다 찍기 전부터 편집을 시작하지는 않았나?

답: 그렇다. 첫 주의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부터 편집했다. 심지어는 휴식 시간에도 편집했다.

문: 당신의 영화는 구체적이고 확실해 질수록 오히려 더욱 형이상학적이 되어 가는 것 같다. 클로즈업을 점점 많이 사용하고 캐릭터와 사물에 몹시 근접하고 있다. 당신은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것을 넘어선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만 같다.

답: 물론 구체적인 것들을 뛰어 넘고 싶다.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렵다. 정말로 어렵다.

문: 당신이 영화 속에 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답: 아마도 영혼일 것이다. 아니면 내 스스로가 발견해 보지 못한 진실이거나. 어쩌면 결코 잡을 수 없이 달아나 버리는 시간일 지도 모르겠다.

문: 주인공들의 이름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답: 관객이 기억하기 쉬우면서도 주인공들의 성격을 잘 반영하는 그런 이름을 생각해 내려고 했다. 실생활에서는 본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이름들 때문에 깜짝 놀라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문: "베로니끄의 이중생활"에서 베로니끄는 성경 속에서 따온 이름인가?

답: 나중에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처음 이름을 지을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게 무의식의 작용이었다고 할 지라도 어쨌든 괜찮은 연관성인 것 같다. "레드"에서는 이렌느 야곱에게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이름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그게 '발렌틴'이었고 그래서 주인공 이름을 발렌틴으로 했다. "화이트"에서는 남자주인공 이름을 '까롤'(폴란드어에서의 찰리)라고 지었는데 채플린에게 바치는 의미에서였다. 이 순진하면서도 영민한 남자는 '채플린적인' 면모를 가진 인물이다.

문: "십계"는 온통 수많은 만남의 기회들로 가득 차 있다. 어떤 만남은 실패하고 또 어떤 것들은 성공하기도 하고. 그리고 "세가지 색" 3부작에서 인물들은 서로 갑작스레 만나게 되는 것 같았다.

답: 나는 만남의 기회를 좋아한다. 인생은 만남으로 가득 차 있다. 하루하루 내가 알아야 할 사람들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스쳐 지나간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까페에서 우리는 낯선 사람들 옆에 앉아 있지 않은가.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갈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곤 서로 다시는 못 만나게 된다. 만일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그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3부작에서의 만남들은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미래의 살인자와 변호사가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의 중요성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3부작의 주인공들은 단지 각 작품들의 연관성을 찾아내길 좋아하는 영화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치 관객들을 위한 게임이었다고나 할까.

문: 세 편의 영화 모두에서 한 노인이 빈병을 쓰레기통에 넣으려고 애쓰는 장면이 나온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답: 우리 모두에겐 말년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빈병 하나를 콘테이너에 집어 넣을 힘 조차 없어지는 그런 날이 오게 된다는 생각을 했다. "블루"에서는 이 장면이 도덕적인 메시지로 보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지미에 노출을 많이 시켰다. 쥴리가 그 노인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앞날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녀는 너무 젊었으니까.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화이트"에서 까롤이 웃음 짓는 이유는 자신보다 더 형편없는 처지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레드"에서 우리는 발렌틴의 연민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문: 발렌틴은 박애의 가치를 알게 되고 쥴리는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 부분은 까롤과 도미니끄에게도 해당이 되는데, 당신은 자유나 박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 마지막 한마디는 결국 사랑인 셈이 아닌가.

답: 사실 내 작품들에서 사랑이란 다른 것들과 항상 대립을 할 뿐이다. 사랑은 딜레마를 초래하고 고통을 가져다 준다.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면서도 사랑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내 작품에서 해피엔딩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 거다.

문: 하지만 "레드"의 시나리오를 보면 당신이 박애의 정신을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블루"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쥴리가 울음을 터뜨리게 되면서 낙관적인 결말을 짓는 것 같던데.

답: 그런 것 같았나? 내게 있어서 낙관적이라는 것은 두 연인이 서로 껴안고 저녁노을을 향해 걸어가는 그런 거다. 어떤 점이 어필을 했건 상관없는 일이다. "블루"가 낙관적인 것 같았다면 안될 건 또 뭔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나는 블랙 코미디인 "화이트"가 진짜 해피엔딩이었다고 생각한다.

문: 한 남자가 감옥에 갇힌 자기 아내를 만나러 간다. 그게 해피엔딩이라고?

답: 어쨌든 둘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가! 남자는 바르샤바에 여자는 파리에 있는 상태에서 끝나는게 더 좋단 말인가? 둘 다 자유로운 대신 사랑하지는 않는 상태에서?

문: "화이트"에서 평등이란 주제는 처음 봤을 때에는 별로 명확하게 다가오질 않는다.

답: 그건 각기 다른 영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남편과 아내의 사이에서, 또는 야망의 수위와 부의 영역에서. "화이트"는 평등보다는 불평등에 대한 영화다.
       폴란드에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평등해지고 싶어한다'는 말이 있다. 일종의 속담인 셈인데 인간의 본성에 거슬리기 때문에 평등이란 결국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도 망했다. 하지만 평등은 좋은 말이고 평등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절대 이루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완전한 평등은 집단농장 같은 곳에서나 가능한 것이니까.

문: 프랑스에서 1년째 살고 있는데, "블루"에서와 같은 의미에서의 자유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게 된 계기라도 있었나?

답: 아니다. 다른 두 편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정치하고는 상관이 없다. 나는 내면적 자유를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외면적 자유, 즉 정치 활동의 자유를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이었다면 폴란드를 배경으로 택했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아직 변화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좀 멍청한 예를 들어 보자면, 당신은 여권만 있으면 미국에 갈 수 있지만 난 못한다. 프랑스에서의 월급으로 당신은 폴란드로 갈 수 있는 비행기표를 살 수 있겠지만 폴란드 사람이 프랑스행 비행기표를 사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내면적 자유는 어디에서건 똑같다.

문: "블루"는 "베로니끄의 이중생활"의 연장인 것 같고, 또 "베로니끄의 이중생활"은 "십계" 9편의 한 요소(심장병 걸린 가수)를 가져온 것 같다. 뭐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한 편의 영화에서 당신은 다른 영화의 윤곽을 잡게 되는 것 같다.

답: 물론이다. 나야 뭐 항상 똑같은 영화를 찍는 걸 뭐. 거기에 완전히 새로운 것이란 없다. 모든 영화 제작자들은 같은 영화를 찍고 작가들은 똑같은 책을 쓴다고 할 수 있다. '전문가'가 아니고 작가들 말이다. 난 분명 작가라고 했다. 예술가를 말한 게 아니다.

문: 세 편의 영화들은 각각 다른 나라에서 촬영됐다. 유럽 영화 산업에 대한 의무감 같은 것 때문은 아니었나?

답: 유럽 영화 산업이라는 말은 완전히 인위적으로 지어낸 말이다.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의 구분 정도가 있을 뿐이다. "레드"를 스위스에서 찍은 건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스위스 측이 공동제작을 맡아 줬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우린 "레드"와 같은 이야기가 어디에서 일어날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영국을 생각했고 이탈리아도 생각해 봤다. 그리곤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위치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나라인 스위스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유럽과의 관계에 대한 국민투표 같은 게 있는 나라가 스위스다. 스위스는 고립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유럽 속의 섬 같은 나라라고나 할까. "레드"는 고립에 대한 이야기다.

문: 프랑스어를 못하면서 프랑스에서 영화를 찍는 게 어렵지는 않았나?

답: 물론 그랬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프랑스에서 난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내가 너무 잘 아는 곳에서 일하는 것보다 좀 더 재미있는 점도 있었다. 아주 다른 세계에서 아주 복잡하고 풍부한 언어를 배우고 있다고나 할까. 내가 대사를 조금 수정하자고 (물론 폴란드어로) 제안할 때 그런 걸 느낀다. 그러면 프랑스에서는 모든 스텝이 나한테 와서 스무 가지가 넘는 방식으로 제안한다.

문: 당신은 세 편의 영화를 찍는 동안 하나의 조화로운 유럽을 창조해 냈다고 할 수 있겠다.

답: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스텝들은 각각 프랑스어, 영어, 폴란드어, 그리고 독일어를 사용한다. 우린 모든 이들이 편안히 작업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일하는 데 생기는 문제같은 것은 없었다.

문: 자신이 유럽인이라고 생각하나?

답: 아니다. 난 폴란드인일 뿐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조그만 집이 있는, 폴란드 동북부의 작은 마을 사람이다. 하지만 그곳에서까지 일하지는 않는다. 거기에 가면 나는 나무나 하러 다닌다.

 







Quotes :

 
    "나는 '성공'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기 때문에 항상 지독히도 멀리 해왔다. 나에게 성공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란 아마도 성취될 수 없는 것들이므로 나는 그런 식으로는 대상을 바라보질 않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은 성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성공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이야기일 뿐이다."

    "단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 만으로 '흉터'(1976)를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런 건 영화감독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일 것이다. 그냥 영화를 만들고 싶기 때문에 영화 한 편을 찍는 것 말이다. 우리는 뭔가 다른 이유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해야 한다. 뭔가를 말하고 싶어서 라든가,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어서 라든가, 아니면 누군가의 운명을 보여 주고 싶다든가 하는 그런 이유들 말이다. 단지 영화 자체를 위해서 만든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항상 작은 스케일로 생각한다. 큰 스케일이나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이는 것들에 대해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질 않는다. 나는 사회도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도무지 내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다. 잘 모르긴 해도 6천만 명의 프랑스인들, 4천만 명의 폴란드인들, 또는 6천 5백만의 영국인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뭐, 그런 이유에서다. 그들은 개별적인 사람들일 뿐이다."
    "사람들에게 뭔가를 전달하기 위해, 다른 어딘가로 인도하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을 직관의 세계로 인도하든 지성의 세계로 인도하든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하는 연출 방식을 이해하질 못하고 내가 뭐 세상을 바라보는 내 자신의 시각을 배반하고 있다 둥 그런 소리를 한다. 단호히 말하거니와 난 인생에 대한 나의 의견이나 태도를 팔아 먹고 있는 게 아니다. 미신의 영역, 점성술, 육감, 직관, 꿈 등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적 삶의 단면들이고 영화에 담아내기 어려운 것들이다. 나는 처음부터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잘 알지 못한 채 계속 찾고자 할 뿐이다."

 

    "나에겐 영화에 대한 뛰어난 재능 같은 건 없는 편이다. 예를 들어 오슨 웰스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스물 넷인가 여섯인가 하는 나이에 첫 작품으로 '시민 케인'을 만들고 영화 역사상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평생을 바쳐야 그런 위치에 다다를까 말까 한 형편이고 결국 그러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쉬지 않고 하는 것 뿐이다. 내 작품들은 더 뛰어난 것도 더 형편없는 것도 따로 없다. 모두가 한 걸음 씩 나아간다는 점에서 똑같고, 내 개인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모든 영화가 다 내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목표를 향해 조금씩 접근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나는 재능을 충분히 타고 태어나질 못했다."
     "영화와 텔레비전 시청자의 차이점은 아주 단순하다. 영화를 보러 갈 때는 다른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 가게 되지만 텔레비전은 혼자 시청한다. 자기 여자친구 손을 꼭 붙잡고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은 없지만 영화관에선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는가. 개인적으로 텔레비전은 고독, 영화는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영화관에선 스크린과 당신 사이의 긴장 뿐만 아니라 스크린과 관객 전체 사이의 긴장도 존재하게 된다. 그건 정말 엄청난 차이다. 영화가 기계에 의한 장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언젠가 몇 명이 함께 방금 전에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늙은 작가 한 사람이 불쑥 끼어 들었다. 그가 말하길, '그건 그냥 평범한 영화였어. 하지만 장례식 장면은 굉장히 좋더군. 그리고 그 검은 옷 입은 남자 얼굴 말이야, 프레임 왼쪽에 있던 사람, 정말 숭고함 그 자체였어.' 그러나 우리들 중 누구도 그 남자를 본 사람이 없었고 더구나 영화의 감독이 그 장면에 그런 인물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노작가는 우리를 설득시키려고 하지는 않고 그냥 '하지만 있었어'라고만 했다. 한 주 후에 그 작가가 죽었다. 내게 그 일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가 사는 동안 특별한 기로에 선 사람들만이 알아 볼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우리 옆을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린다면 과연 어떻겠는가?"
    "미국인들이 내게 '잘 지내?'하고 물으면 나는 '그냥 그래'라고 답했다. 내겐 '그저 그렇다'고 하는 걸로 충분하지만 이들은 즉각 뭔가 안좋은 일이라고 생긴 줄로만 안다. 그래서 '그냥 그래'라고 말해선 안되고 '좋아' 또는 '아주 좋아'라고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낙관적인 말이란 '난 아직 살아 있어' 정도인데 말이다."

    "영화 제작이란 관객들이나 영화 페스티발, 영화평론, 인터뷰 같은 것들과는 사실 거리가 먼 얘기다. 그건 차라리 매일 아침 새벽 6시 정각에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고 추위, 비, 진흙탕, 그리고 무거운 조명기구를 들고 다녀야 한다는 걸 뜻한다. 신경과민성 비즈니스일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가족이나 자기 감정, 그리고 사생활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저버릴 수 있어야 한다."

    "영화를 만들다 보면 자주 겪는 일인데, 아주 잠시 동안이긴 해도 이런 바보 병신같은 느낌을 사라지게 만드는 무언가가 일어나곤 한다. 이번 경우는 네 명의 프랑스 여배우들이다. 우연한 장소에서 부적절한 옷을 입고도 마치 기둥서방이나 파트너라도 만난 듯 너무 멋지게들 연기를 하니 모든게 진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들이 대사를 읇조리며 미소를 짓거나 근심스런 표정을 짓는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몇 년 전 프랑스 신문 '리베라시옹'에서 여러 감독들에게 왜 영화를 만들게 되었는지에 대해 질문을 하였다. 그 때 내 대답이란 '다른 건 할 줄 아는 게 없기 때문에'였다."

 
 

 









[ Krzysztof Kieslowski: I'm So-So... ]

Year: 1995
Genre: Documentary
Directed by Krzysztof Wierzbicki
Written by Krzysztof Wierzbicki
Cast: Krzysztof Kieslowski (as Himself)
Cinematography by Jacek Petrycki
Edited by Marion Fiedler



K. Kieslowski: "난 영화학교를 졸업하면 극장이나 연출에 대해 뭘 좀 알게 되는 줄로 알았지... 영화학교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고 다른 뭔가를 위해 필요했던 단계일 뿐이었어. 그래서 난 그 학교에 들어갔고, 내 말은 들어가려고 했었고... 근데 제대로 되질 않았지."
K. Wierzbicki: "몇 번이나 재수했었죠?"
Kieslowski: "세 번."
Wierzbicki: "하지만 결국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고집을 부렸죠?"
Kieslowski: "완전히 목을 맨 거였지. 정말 '이 나쁜 놈들, 날 원하지 않더라도 결국 그렇게 되고 말거야!'라고 생각했었어."
Wierzbicki: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는 곧이어 그렇게 슬픈 흑백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한 거였죠."
Kieslowski: "이봐, 온 세상이 몹시 슬픈 때였어. 그냥 흑백이 아니라 아예 검었었다구. 아니면 회색이었거나. 학교가 위치한 그 장소와 관련이 있긴 하지, 우츠(Lodz)말야. 우츠는... 형편없이 더러웠기 때문에 영화 찍기 좋은 곳이었지... 도시 전체가 그랬어. 그건 곧 온 세상이 그랬던 거였고. 사람들의 얼굴이 다 건물벽 같았어. 슬프고 눈에는 사연이 가득찬, 그러니까 별 소득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의미 없는 삶의 그런 얼굴 말이야... 내 생각엔 전쟁 이후로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담으려고 했던 첫 세대였던 거 같애. 물론 물방울처럼 아주 조그만 세상이었지. 이름들이 그렇잖아. 초등학교, 공장, 병원, 아니면 사무실.  이런 작은 세상들이 한 곳에 모여 좀 더 큰 무언가가 되도록 했었지. 우린 폴란드에서의 삶을 그리고 싶었던 거야."
Wierzbicki: "하지만 왜 그런 세상들이 그려져야 했던 거죠?"
Kieslowski: "묘사가 부족한 세상에서 살기는 힘든 일이야. 그런 세상에서 누군가가 살았다는 건 이해가 안되는 일이지. 정체성 없이 사는 거 잖아. 어디에도 자기를 돌이켜 볼 수 있는게 하나도 없는 거야. 아무 것도 설명되어 있지 않고 이름도 없기 때문에 주변을 아무리 찾아봐도 알 수가 없는 거지. 결국 혼자 스스로 살아가는 수 밖에 없어. 세상을 묘사하는데 쓰여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이론적으로 그럴 싸한 이념을 세우는 데 선전선동으로서 이용 당했어.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은 항상 다 똑같은 거야. 총구가 머리에 겨누어 진 걸 느끼는 거지. 우린 박애, 평동, 정의라는 이념으로 살아가지만 사실은 박애도 평등도, 정의란 것도 전혀 없는 거야."

K. Wierzbicki: "당신의 영화에는 정치적인 요소가 왜 그렇게 많은 거죠?"
K. Kieslowski: "과거에도 지금도 정치란 항상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지. 그때 난 정치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었어. 정치가 뭔가 해줄 수 있고 무엇보다 정치가 우릴 위해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지. 모든게 잘 되기를 바라고 개혁이 가능하고 또 모든게 제대로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란 희망 때문이었어. 아무도 공산주의가 스스로 무너지리라고는, 이런 식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었어. 그보다는 삶이 좀 수월해 지고 최소한 약간의 자유를 얻어내기를 바랬었지.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자기들 이야기라고 생각하는거 같애. 70년대 영화로서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해.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영화에서 발견했다는 점에서 말이야."
Wierzbicki: "결국 자기들이 결국 하나라는 것을 느꼈을 거예요. 두 차례의 혁명을 일으켰잖아요. 그리고 혁명은 우리가 꿈꾸었던 것들을 가져다 주었고요."
Kieslowski: "글쎄, 혁명은 별거 아니었지만 우린 모든 걸 이룰 수 있었지. 하지만 내겐 우리가 꿈꾸었던 것들이 결국에는 모두 우스꽝스러운 짓거리가 된 것 같아."

"내가 바라는 게 뭐냐고? 고요. 하지만 저절로 주어지는건 아니다. 그래도 우린 이걸 찾으려고 해볼 수 있다. 그 방식이 꽤 고무적이다. 영화를 만들 때 난 자주 작업이 끝나지 않길 바라곤 한다. 솔직히 말하면 모든 작품마다 난 카메라는 내 자신에게 향하도록 한다. 항상 그렇게 한다는 건 아니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때에만 그렇게 한다. [...] 내가 지닌 유일한 미덕은 비관주의다. 그래서 내가 보는 건 모두 검정색이다. 진짜 그렇다. 예를 들어 나에게 미래는 검은 구멍처럼 보인다. 내가 걱정스러워 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게 미래다... 내가 지금 있는 이 곳이 앞으로 내가 가야할 곳보다 좀 나은 곳이다. 예전에 살았던 곳이 더 나은 곳, 그러니까 내게 합당한 더 나은 선에 있었던 거다."

"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 물론 대화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 쪽에 어떤 책임 같은 것이 따는 법이지만 너무 심각해지지는 말자. 생각이나 인상, 감정들을 나누는 그냥 대화면 된다. 대화의 결과는 사람을 더 똑똑하게 하거나 더 멍청하게 만들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게 책임이라는 부분이다. 그 이상의 책임은 아니다. 그 이상은 나도 잘 모르겠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과 문화가 국가의 상황이나 사회의 정신 상태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난 이런 식의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 수준의 무언가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쳐 개선을 유도하고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등의 생각은 전혀 안한다. 하지만 우린 항상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에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없다는 걸 안다. 이 점이 오래 전에 다큐멘터리 영화를 포기했었고 이제는 어떤 영화도 만들지 않겠다고 하는 이유들 중에 하나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가 책임에 대한 질문이 된다. 카메라를 갖고 있으면, 특히 옛날 정치 상황에서는, 촬영 대상이 된 사람에 대해 엄청난 책임을 져야 한다. 더군다나 내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은 영화화하기에는 너무 개인적이다. 영화화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포기했다."

"어떤 기준에 합당한 삶을 사는 거? 그건 천주교가 하는 일이다. 천주교는 사람들이 통제 받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기준을 점차로 낮추어 가면서 스스로 하는 일에 반대되는 짓을 하고 있다. 나는 우리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고 또 목격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를 비롯해서 세상 만물을 창조한 신과 같은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의 손에서 자주 벗어난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역사, 우리의 역사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자주 신의 손으로부터 벗어 났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관객 없이 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 관객이 가장 중요하다. 예술을 위한 예술, 형식을 위한 형식은 재능과 기교의 무게 아래에 짓눌리곤 하는데 난 그렇지 못하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고 감동시키는 일이 내게는 더 어울린다. 그래서 극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책임성에 관한 한 그게 훨씬 더 수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실제로 하는 건 뭐냐고? 연기자들을 고용하고 어떤 일을 사람들에게 시킨다. 그렇게 수 십 년간 영화를 만들어 왔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일상 생활에서 완전히 떠나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내일을 위해 뭔가를 중요시하고 우리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그것에 좌우되는 그런 삶 말이다. 난 그런 것들을 떠나 뭐든지 가능하고 멋진 생활을 위해 많은 돈이 들어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 세상엔 엄청난 감정적 요소들이 존재하지만 실재하지는 않는다. 내게 평범한 일상 생활이란게 없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대신에 허구만 가득하다."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정성일  


『정은임의 영화음악』중 -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정성일
날씨가 참 따뜻해졌어요. 그래서 낮에 반팔로 나왔습니다.

정은임
예. 자, 오늘은 어떤 얘긴가요.

정성일
오늘은 아마 여러분들도 이 감독 좋아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으실 겁니다. 아마도 아... 타르코프스키 이후 우리를 이토록 매혹시키고 우리를 또 이토록 깊이 있는 세계로 이끈 영화 감독이라면은 누구나 바로 이 사람을 떠올릴 터인데요....

정은임
네, 그만큼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뜻이죠....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정성일
네, 맞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릴 감독은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입니다. 아마도 제 생각으로 지금 영화를 만들고 있는 감독 중에서는 이만큼 독창적이고 그리고 깊이 있는 영화를 만들어 내는 감독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그....최근에 창간한 문화 잡지가 하나 있는데요 그 라흐 쁘라스띠끄라고 그래가지고 뭐 <유연한 예술> 뭐 이런 제목의 잡지가 있는데요, 이 잡지에서 유럽의 영화 평론가들에게 "지금 마에스트로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러니까 거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독을 뽑아 주세요"라는 그 앙케이트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나와 있는데요....여러분들 혹시 이런 거에 관심 있으신 분이라면 펜 빨리 들어주십시요. 아, 유럽의 영화 평론가들이 생각하기에 지금 영화를 만들고 있는 감독 중에서 최고의 거장, 그야말로 영화를 그 예술의 경지로 이끌게 만든 바로 그런 이름들이라면 장-뤽 고다르, 에릭 로메, 클린트 이스트우드, 로버트 알트만, 마뉴엘 드 올리비에라 그리고 구로자와 아끼라, 로베르 브레송, 잉그마르 베르히만, 아마 이 사람 이름은 빼야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깐요. 바로 페데리코 펠리니.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입니다.

키에슬로프스키 선풍이 다가온 것은 그러나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은 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실 키에슬로프스키의 이름은 폴란드의 영화 감독 중에 그저 낯설은 새로운 이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고 그에게 주목하고 있는 영화 평론가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꾸준히 그의 작품이 깐느에 출품되기는 했었지만은 그러나 번번이 공식 경쟁 부분에 끼여들거나 아니면 'Un Certain Regard' 그러니까 '주목할 만한 시선'에 그 그의 영화를 찾아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됐었습니다. 하지만 88년도에 10편의 영화가 동시에 개봉되면서 그야말로 사정은 모두 바뀌었습니다. 그 영화가 그 유명한 십계입니다. 그 88년 십계를 발표하면서 그 영화 평론가들은 이 감독이 어쩌면 우리의 세기말에 다가온 우리 시대를 다음 시대에로 이어줄 유일한 이름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키에슬로프스키를 설명 드리기 전에 아마도 그가 영화를 출발한 폴란드에 대해서 잠깐 제가 설명해 드려야 될 것 같은데요....폴란드 영화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어 그러니까 누벨 바그보다 쪼끔 한 발 앞서서 그야말로 새로운 영화를 찍기 시작했는데요, 그들의 영화를 일컬어 이름 짓기를 그 '폴리쉰 노이에 메아리즈머'라고 불렀는데요....그러니까 '폴란드의 새로운 그 사실주의 영화들'이라고 불렀는데, 이 영화의 삼총사들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안제이 바이다, 이에즈 카발레로비치, 안제이 뭉크입니다. 이미 이 세 사람 중에서 두 사람은 유명을 달리했는데요, 안제이 바이다는 그의 영화 재와 다이아몬드, 세대 그리고 터널이라는 3부작을 통해서, 특히 그 폴란드 감독들은 그 연작 찍는데에 한해서는 뭐 아주 일가견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요, 어....이 감독들은 폴란드라는 그러니까 사회주의 내에서도 비교적 진보적이고 또 독일로부터 엄청난 탄압을 받았었기 때문에 반파시스트적인 투쟁이 가장 활발했었고 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해서 계속 비판적이었었던 마치 그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경계선 사이에 놓였었던 일종의 무인....그러니까 고립된 섬과 같았었던 그런 그 폴란드의 상황을 이 감독들은 아주 그 진지하고 또 독창적인 감각으로 영화를 그려 나갔었습니다.

이 세 감독의 영향을 받고 60년대에 등장한 감독은 예르즈 스콜리모브스키입니다. 이 사람의 영화는 우리 나라에도 그 비디오가 한 편 나와 있는데요 라이트 쉽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등대선이라는 제목인데 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비평가 대상을 받고 그 비평가 대상을 받은 상을 스콜리모브스키가 심사위원석을 향해서 집어던지고 나갔습니다. '내 영화는 그랑프리가 당연했었는데 왜 이러한 상을 줘서 나를 실망시키냐'라고 아주 불쾌한 표정을 짓고 나갔었는데....

정은임
도대체 어떤 영화길래 그러죠?

정성일
아....아버지와 아들이 배에 타서 그리고 나아가고 거기서 악당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배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벌어지는 이야기를 찍었는데 어....제 생각에도 그랑프리를 받아 마땅했었던 그러니까 폴란드라는 곳의 상황을 배 하나에다 집어넣어 놓고 모든 것을 다 이렇게 그려낸다는 것도 대단한 솜씨라는 생각이 드는데요...어 이 스콜리모브스키는 말씀드린 것처럼 스타일과 주제에 있어서 아주 놀랄 만큼 새로운 영화를 찍어낸 감독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영화 중에서도 독주라는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가 64년도에 등장해서 스콜리모브스키 선풍을 불러일으켰는데, 아주 새롭게 롱테이크를 찍었습니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모두 합쳐서 26커트가 전부인데요, 주인공은 이 상황을 벗어날려고 아주 악전고투하는 한 권투 선수의 이야기입니다. 스콜리모브스키 자신이 권투 선수 출신입니다. 그러다가 한 쪽 팔이 그 부러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영화 감독으로 직업을 바꾼 사람인데요, 도망칠려고 이렇게 고생하는 이 친구의 이야기를 카메라가 가둬 버립니다. 그러니까 카메라 프레임을 벗어날려고 막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데 카메라 프레임 안에서 도망칠 방법이 없습니다, 화면이 바뀌기 전에는. 그것을 롱 테이크가 아주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영화인데, 이 스콜리모브스키의 영화를 통해서 폴란드 영화는 동구 영화에서도 아주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동구 영화들이란 일반적으로 그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구 영화 보러 가자 그러니까 60년대 동구 영화 보러 가자라는 얘기는 사실은 아주 은밀하게 얘기하자면은 야한 영화 보러 가자란 뜻이기도 합니다. 정치적인 소재를 피하기 위해서 동구 영화들은 이른바 그 과도한 노출이라던가 아니면은 어떤 그 에로티시즘의 문제 쪽을 초현실주의적으로 다루는 것 그래서 아주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화면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요, 이것은 물론 사회주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였었을 겁니다. 이러한 그 동구 영화의 특징 속에서 폴란드 영화는 유럽 영화의 모더니즘 전통과 동구 영화의 초현실주의 경향 사이에서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성일
만약에 여기 그 이 프로의 청취자 분들께서 만약 유럽에 영화를 공부하러 가신다면은 4개의 학교 중에 하나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이 4개의 학교를 보통 최고의 학교라고 부르는데요, 영국의 그 BF'라는 학교가 있습니다. 이곳은 '런던 UNIVERSITY'와 같이 그 관계를 맺고 계속 세미나를 하는 학교이구요, 또 프랑스에는 이데끄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름을 페미스로 바꿨는데요 입학 시험 1주일을 봐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영화학교가 있습니다. 벤더스가 떨어진 바로 그 학교입니다. 마지막으로 폴란드의 로쯔 스쿨이 있습니다.

어....이 4개의 학교 출신들....학생들이 1년에 한 번씩 뮌헨 학생 영화 페스티벌을 벌리는데요, 우연히 한 번 이 페스티벌에서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4 학교 중에서 가장 영화를 새롭게 찍는 학교의 학생들은 프랑스 이데끄 출신이었습니다. 보면은 뭐 거의 눈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테크닉이 뛰어난 영화를 찍고 이렇게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입을 벌리게 합니다. 또 BFI의 학생들의 영화를 보면 테크닉이 거의 완벽합니다. 마치 이것이 학생 영화가 아니라 헐리우드에서 와서 온갖 일류의 스텝 진을 갖고 만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정은임
정석대로 하는군요....예....

정성일
그리고 베를린 영화학교 작품들을 보면은 거의 정치적인 이슈, 아주 민감한 소재들을 다루어서 충격적으로 묘사하는데는 일가견들이 있습니다. 제일 따분한 것은 바로 로쯔 학교 출신들입니다. 이 학생들의 영화를 보면 스타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영화는 다 로쯔 학교 출신들 영화입니다. 그 대부분이 따분한 것들인데 몇몇 작품들을 보고있노라면 최고는, 팜플렛을 뒤져보면 로쯔 학교 출신들입니다. 그러니까 학교 수업방식이 그래서 학생한테 물어보기를 '학교에서 수업을 어떻게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었을 때 대답하기를 다른 학교의 그 학생들과는 달리 수업의 절반이 일반 강좌를 무조건 들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학교의 일반 수업 방법이 전인적인 교육을 아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영화를 찍을 때는 스타일보다도 주제에 대해 아주 끈질긴 연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인데요,

바로 키에슬로브스키가 나온 학교가 이 학교입니다. 아, 크지쉬토프 키에슬로브스키는 1941년생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나이가 꽤 되는 셈인데요, 키에슬로브스키는 원래 영화를 전공할 생각이 아니었었고 신부님이 되는 것이 자기의 인생 목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25살이 되면서 자기의 인생관을 바꾸고 이제 영화를 하기로 결심하고 로쯔 필름 스쿨에 들어갔는데요, 이 학교에서 원래 전공한 것은 그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 영화 공부를 하면서 존경했었던 영화 감독은 그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찍었었던 지가 베르토프 그리고 독일 영화 감독인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또 북극의 나누크라는 그 무성 영화 시대 때의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낸 로버트 플레어티 그리고 프랑스의 장세니스트라고까지 불리우는 엄격한 촬영감독, 타르콥스키도 그렇도록 존경했었던 영화 감독 로베르 브레송이였었습니다.

어..이 키에슬로브스키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 꾸준히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왔었는데요...사실 다큐멘터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키에슬로브스키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근 그 영화광을 자칭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아졌었는 많아지고 있는데요 그 그런데 문제는 게으른 영화광들의 아주 그럴듯한 변명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그 영화 소년들이 또는 후배들이 영화를 이리저리 토론하고 분석하고 제단하고 해부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빈정거리는 듯한 태도로 보고 있다 딱 한마디 근사한 표정을 지으며 던집니다. '영화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거야.'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게으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사실 영화는 제 생각에는 머리와 가슴 모두를 따듯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입니다.

정은임
네.

정성일
가슴만이 따듯해진다면 그거야말로 그것은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것이지 그것이 영화의 본연의 자세라고 얘기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다큐멘터리 정신입니다.

키에슬롭스키는 자기의 인터뷰 책인 최근에 그 BFI 에서 발행한 <키에슬로브스키 & 키에슬로브스키>란 책을 보고 있으면 "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머리와 가슴 그 모두를 따뜻하게 만들어야할 것이다."

동구 다큐멘터리는 그 유럽 다큐나 미국 다큐 또는 라틴 아메리카나 소련, 일본 다큐멘터리들과는 다소 그 다른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동구 다큐멘터리의 특징은 인간을 다루는 것입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놓는 사회주의가 왔는데 왜 자본으로부터의 해방된 사회주의에서 인간은 그 중심에 있지 않은가 라는 것이 사회주의 다큐멘터리, 그 중에서도 특히 동구권 다큐멘터리들이 자신들이 서 있는 조건에 대해서 던지는 아주 비판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키에슬로브스키는 약 10년간 다큐멘터리 작업을 계속 해왔습니다. 그는 지금도 영화를 찍으면서 이 시기에 찍었었던 그 자기의 작업 방식을 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작업을 할 때 항상 하는 방법은...하얀 종이를 한 장 올려놓고 그리고 지금부터 찍어야될 영화의 스토리를 그 한 장에 요약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이제 5페이지 정도 늘립니다. 5페이지로 늘린 것을 다시 10페이지로 늘립니다. 그리고 10페이지로 늘린 것을 이제 시나리오 작가를 대동해서 20페이지에서 30페이지로 늘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늘려 논 다음엔 촬영 감독을 데려와서 100페이지로 늘려 논다고 합니다.

정은임
종이 한 장에서 영화가 시작되는데요....

정성일
그리고 100페이지가 되어진 다음에는 배우를 불러서 거기서 그것을 낭독하게 하면서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그 배우의 엑센트를 들어가며 대사를 써 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감독이 그 대사를 만들어 놓고 배우보고 그것을 아무리 주문해봐야 그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키에슬로브스키는 그것을 읽으면서 그 배우의 음색 그리고 그가 놓치고 있는 발음 같은 것들 도 그가 필요 이상으로 격앙하는 대목들을 일일이 체크하여 그 배우에 맞는 대사를 만들어 줄 때, 그러니까 그는 작업 방법은 배우 그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합니다.

정은임
네, 정말 그렇네요.

정성일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사실은 키에슬로브스키는 절반씩 섞어놓는 3부작으로 데뷔했습니다. 키에슬로브스키에 대한 그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그 Maestro of Series 그러니까 연작의 거장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가 만든 영화는 모두 연작입니다.

정은임
십계가 그렇구요 블루가 일단 그렇구 또....

정성일
그리고 맨 처음 데뷔했었던 작품이 아마추어라는 영화입니다. 1979년도에 데뷔를 했는데요 그 3부작 그러니까 79년도에 찍은 아마추어 그리고 82년도에 우연히 그리고 84년도에 끝없이. 사실 제가 이 제목들을 말씀 드리기는 하지만 저는 그 폴란드어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그 불어에 맞춰서 제가 그 번역을 해드렸는데요 원제는 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3편을 이름지어 부르기를 <우연한 만남 3부작>이라고 합니다.

정은임
네.

정성일
그리고 키에슬로브스키는 이 3편의 영화 속에서 자기의 스타일을 모색하고 있는데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은 실패와 성공 반반씩을 섞여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을 찍어나가면서 10년 동안 그는 시나리오를 꾸준히 준비해왔었습니다. 그리고 2년만에 이 10편의 촬영을 모두 끝내버립니다. 바로 그것이....

정은임
십계....

정성일
예, 맞습니다. 십계입니다. 이 십계그 텔레비전을 위해서 만든 8편과 영화를 위해서 만든 2편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위해서 만든 2편은 그 살인하지 마라 그 다음에 간음하지 마라 그러니까 십계 전편 중에서 5편과 6편인데 그 5편과 6편을 아마 그....어....영화사랑이나 씨앙 씨에 같은 곳에서 1시간 30분 정도 길이의 작품으로 보신 분들이 있으실 겁니다. 그리, 이 작품과 10편 속에 들어있는 십계 사이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이 10편의 이야기를 털레비젼에서 방영하기 위해서 편집한, 그러니까 십계 안에 들어있는 5화와 6화는 그것을 다시 편집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없는데요, 놀라운 것은 이런 영화를 찍을 때 보통 일반적으로 본다면은 하나의 팀 웍을 갖고 찍는 것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키에슬로브스키는 바로 그렇게 찍게 된다면은 이 10편이 일정한 어떤 매너리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경계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과 시나리오를 제외하고는 전편 모두 다른 팀과 함께 작업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십계는 그야말로 그 80년대 영화의 이정표라고 해도 그 과장이 아닐텐데요, 키에슬로브스키의 영화는 이제까지 그러니까 보통 모더니즘 이후 출발하고 있는 모든 감독들 베르히만이나 펠리니나 고다르나 이런 안토니오니나 모든 감독들의 특징은 이미지 중심의 영화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지 속에서 자신의 의식을 집어넣어 그것으로 하나의 미장센 하나의 그 화면 구도 하나의 화면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또 다른 이미지 그래서 중첩이미지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러나 키에슬로브스키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관찰의 영화입니다.

정은임
네....자, 이 관찰의 영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십계 중에서 6화 간음하지 말라가 그 대표적인 경우가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일단 여기서 간음하지 말라의 테마를 듣고 말씀 계속 나누도록 하죠.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의 음악입니다.

정은임
영화 십계의 제 6화 간음하지 말라의 테마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의 음악이었습니다. 자, 계속 말씀해주세요.

정성일
아... 조금 전에 키에슬로브스키의 영화의 중심에는 관찰의 영화라는 이야기를 드렸는데요 그렇더라면 무엇을 관찰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는 주인공을 관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영화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일종의 법칙과 예외에 관한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법칙을 꾸준히 지켜보고 바로 그 예외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 예외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키에슬로브스키는 바로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화면 바깥으로 빠져나갑니다. 그러니까 키에슬로브스키의 영화 속에는 두 가지의 화면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주인공의 화면이고 또 하나는 작가의 화면입니다. 이것이 주인공과 작가 사이를 영화가 어느 순간 오가고 왔다갔다 차례를 바꿔나가고 순서를 바꿔나갑니다. 이것이 편집이나 또는 어떤 특정한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것이 키에슬로브스키의 훌륭한 점입니다. 그는 주인공을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그러니까 법칙이 깨지는 예외의 순간 작가의 화면으로 빠져나갑니다.

정은임
작가의 화면이라는 것은 감독의 화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성일
작가의 화면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은 그 드라마의 운명 바깥 그러니까 드라마가 만들어내는 픽션과 그 픽션이 만들어내는 진실 그것을 갖고 이른바 인과율을 적용시켜 인과율이 어느 순간 깨지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그 인과율이 깨지는 것이 바로 인과율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정은임
네, 그럴 수 있죠.

정성일
마치 십계에서 그 10가지의 계명들이 지켜지는 순간들은 모두 예외의 순간들입니다. 인과율이 깨지는 순간, 예외 없이 십계의 인과율이 지켜집니다. 그는 그 주인공의 화면과 작가의 화면을 갖다 놓고 이것을 드라마의 화면과 의식의 화면으로 만들어놓습니다. 좀 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러니까 정은임씨가 지적한대로 이 의식의 화면은 고의적으로 키에슬로브스키가 만들어내는 화면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모더니즘 감독들과 키에슬로브스키는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키에슬로브스키는 의식의 화면을 결코 일부러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즉, 연출.....방법만으로 이야기한다면 키에슬로브스키는 타르코브스키와 정반대의 방법으로 출발해서 똑같은 지점에 도착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키에슬로브스키가 만들어내는 그 의식의 화면은, 일단 그는 드라마의 화면을 만들어냅니다.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그는 화면을 억지로 사람들과 배경들과 해서 이것을 맞추어내는 화면은 만들어나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카메라를 들고 그 순간을 그....찍어나가는 것, 그 일상 공간 속에 들어가 일상 속에 있는 드라마의 화면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선 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공적인 화면을 만들어나가는 것에 대해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다큐멘터리 작가들의 일반적인 태도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어나가고 드라마가 완성되고나면은 카메라의 위치 속에서 의식의 화면을 만들어나가는 키에슬로브스키의 입장은 바로 이 드라마를 다큐멘터리처럼 찍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정은임
네.....

정성일
그래서 이 화면의 구도가 깨어지거나 이 화면 속에 빛이 들어오거나 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NG의 순간은 또한 예외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화면 속에 그러니까 카메라와 주인공 사이에 어떤 빛이 끼어들어 온다든가 어떤 그림자가 끼어 들어오는 순간 관객들은 그것이 일상 속에 늘 벌어질 수 있는 순간이면서 또한 거기 키에슬로브스키의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예외를 통해서 키에슬로브스키는 우리를 명상하게 만듭니다. 이 십계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 시점 쇼트를 애써 배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영화 감독들이라면 시점을 갖고 일종의 게임, 일종의 퍼즐을 만들어나갑니다. 하지만 키에슬로브스키가 그것을 거절한 이유는 그에게서 카메라의 허구적인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는 카메라를, 카메라가 진실을 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카메라가 대상을 잡는 순간 그것은 거짓입니다. 마치 그것은 우리가 수사학에서 진실을 얘기한다는 것, 진실을 우리가 말하는 바로 그것이 거짓입니다. 그런데 그 거짓을 통해서 우리는 진실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실이야 라고 말하는 그 순간 그것이 진실이 아닙니다.

정은임
네, 모든 말의 속성처럼요....

정성일
그래서 바로 카메라가 드라마 바깥이 될 때, 이미지가 드라마의 바깥으로 나올 때, 키에슬로브스키는 거꾸로 의식과 드라마의 위치를 뒤집는 것입니다. 그는 의식의 이미지로 드라마의 화면을 지켜봅니다. 다소 말이 그......여러분들을 혼란스럽게 할지 모르겠지만 이 말은 키에슬로브스키 자신이 직접 환 얘기인데, 여러분들이 꼭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의식의 이미지로 드라마의 화면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 역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이러한 십계의 그 인과율의 영화를 찍으면서 이제 키에슬로브스키는 자신의 영화에 꾸준히 등장하는 한 작곡가를 등장시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이 이름을 외우고 계신 분들이 많을텐데요, 바로 반 덴 부덴마이어입니다. 어....이 작곡가 찾으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애서 제가 스펠을 불러드리면은요 그...Van Den Budenmayer 그러니까 반 덴 부덴마이어입니다. 어....영화 속에 나와있는 이 사람의 자료에 의하면은 1752년에 태어나서 1793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있는 폴랜드 작곡가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어느 시대의 작곡가이겠습니까...

정은임
18세기니까 그 때의 음악가로는 그 후기 낭만주의 뭐 그 당시니까 모짜르트라든지.....

정성일
네, 맞습니다. 모짜르트와 아주 동시대 그러니까 모짜르트보다 먼저 태어나서 모짜르트보다 먼저 죽은 작곡가인 셈인데요, 그런데 음악을 열심히 들어보면 좀 이상합니다.

정은임
그렇죠. 그 시대의 음악이 아니에요.

정성일
예. 그리고 이 작곡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작곡가입니다. 그러니까 키에슬로브스키가 영화를 찍기 위해서 일부러 고의적으로 그러니까 일종의 시뮬라크라르 일종의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로 만들어낸 존재인데....여러분, 이 이름이 나올 때 주목하십시요. 키에슬로브스키는 자기가 진실이라고 사람들이 믿는 거짓을 얘기할 때, 예술이라고 생각한 사기를 표현할 때 이 작곡가를 동원한다고 합니다. 즉, 이 작곡가의 음악이 나오는 그 순간, 이 이름이 나오는 그 순간 키에슬로브스키는 화면이 거짓을 얘기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작곡가는 그 후 그의 영화에 거듭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 십계가 끝나자마자 만든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은 그....이중생활 이후에 찍게될 그 그러니까 '삼부작 삼색'의 프롤로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얘기하자면 삼색은 4편의 영화로 이루어져있는 영화인데요....

정은임
어....베로니카의 이중 생활까지 합쳐서요.

정성일
예, 그렇죠. 이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에 원래 캐스팅할려고 그랬었던 배우는 이렌느 야콥이 아니었었다고 합니다.

정은임
누구인데요?

정성일
키에슬로브스키는 깐느 영화제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이 배우에게 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깐느 영화제에서 그야말로 스타가 된 여배우인데요, 바로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에 나왔었던....

정은임
앤디 맥도웰이예요?

정성일
예, 앤디 맥도웰이 이 영화의 배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고 합니다. 하지만 캐스팅에 실패하였고 그 다음으로 쓰고 싶었었던 배우는 블루의 주인공으로 나왔었던....

정은임
줄리에뜨 비노슈군요.

정성일
에, 그렇죠. 그리고 비노슈도 역시 그 당시 퐁네프의 연인들을 찍고 있어서, 여의치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이렌느 야콥을 택했지마는 결과는 100% 만족한다고 합니다.

정은임
네....

정성일
이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 이후 이제 그 키에슬로브스키는 첫 번째, 삼부작의 첫 번째인 블루를 줄리에뜨 비노슈를 주연으로 찍어서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와 여우주연상 그리고 촬영상을 받았고 또 두 번째 이야기인 화이트에서는 줄리 델피를 주연으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고 마지막 레드가 금년 5월 이렌느 야콥 주연으로 깐느를 찾아옵니다. 이 3부작 이야기는 그....사실 이전의 키에슬로브스키 영화를 본다면 굉장히 낯설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것은 키에슬로브스키가 그 이전의 영화들을 찍는 방법과 정반대로 찍어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키에슬로브스키는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이미지의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이 카메라가 서 있는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카메라 앞에서 카메라와 주인공 사이에 인공적인 여백을 계속 만들어냅니다.

정은임
네....

정성일
그 대표적인 예가 이를테면은 거울을 써서 지나가는 기차를 통해서 풍경을 굴곡 시킨다거나....

정은임
네....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에서....

정성일
아니면 앉아있는 줄리에뜨 비노슈 얼굴 앞에 파란빛이 끼어들기 시작한다거나 또는 화이트의 경우 줄리 델피 앞으로 스쳐 지나가는 하얀색같은 것들이 이미지 위에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다른 것은 그 뿐이 아닙니다. 블루는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연극적인 영화입니다. 또 화이트는 장르 영화를 찍었습니다. 그러니까 코미디를 기반으로 해서 느와르 영화를 찍고 있습니다. 그리고 레드는 이제 5월달에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이 세 편은 일종의 그러니까 그가 이전에 찍은 십계에 대한 그래서 그것이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것에대한 경계처럼 보입니다. 그는, 키에슬로브스키는 주인공의 드라마를 이미지로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어디서 영화를 멈출지 알 수 없는 그러니까 그는 자기의 이미지의 진실이 이끄는 대로 이끌려나가며 그의 영화에 진실이 있음을 아직도 믿고있는 그야말로 허구가 중심에 있다라고 주장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그 지배하는 바로 지금, 영화는 아직도 진실을 찍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그야말로 흔치 않은 감독일 것입니다. 여러분들, 금년 5월 깐느에서 레드를 기다리십시요.

정은임
크지쉬토프 키에슬로브스키감독아 전혀 다른 새로운 방법으로 찍었다는 영화 중에서 중에서 원래는 2편이라고 하셨죠. 예.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이 사실은 전편, 1편이라고 했구요 이게 2편이라고 하셨는데요, 블루 중에서 장송곡 들으면서 인사드리죠.

장송곡이 끝 곡이라서 약간 그렇네요. 정성일씨 오늘 감사합니다.

정성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