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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부엌 테이블에서 태어난 소설

순서대로 하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내가 제일 처음 쓴 소설이다. 즉 처녀작이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1979년 '군조(群像)신인상'을 받아, 일단 작가로 데뷔를 한 셈이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실로 간단하다. 갑자기 무언가가 쓰고 싶어졌다. 그뿐이다. 정말 불현듯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신주쿠에 있는 키노쿠니야에 가서 만년필과 원고지를 사왔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앉았다. 대학을 졸업한 이래 줄곧 일에 쫓기는  나날이어서, 글자라고는 세금 신고 서류나 가끔 쓰는 편지를 제외하면 거의 써본 적이 없었다. 거드름을 피우는 게 아니고 정말 그랬다.

  나는 옛날부터 작가는 아니더라도,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어했다. 하지만 학생 시절에 시나리오를 쓰려고  시도하다가(대학을 연극영화과에 다녔으므로), 결국은 제대로 쓰지 못하여,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나 보다'고 생각했다. 붓을  꺾었다고 할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별 수 없지 않은가, 하고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는 내 나름으로 무리없이  인생을 살았다. 일도 순조로웠고, 내 자신도 일을 하느라 하루하루가 바빴다. 자신이 만년필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내내 깨닫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스물아홉 살의 어느 봄날, 진구 구장의 맨흙더미 외야석(그 당시에는
아직 시트란 게 없었다)에 누워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재능이나 능력이 있든 없든, 아무튼 자신을 위하여 무언가 써보고 싶다고. 그 옛날 뭔가 쓰려고 하면 느껴지던  부담감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새로 사온 싸구려 만년필과 원고지를 테이블에 나란히 놓아둔 것만으로, 왠지 기분이 착 가라앉고 안심이 되었을 정도였다.

 1978년은 야구르트 스왈로즈가 우승한 해이다. 나는 봄에 쓰기 시작하여, 우승이 결정되기 전후에 완성했다. 진구 구장 바로  옆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곧잘 시합을 보려 다녔다. 야구르트는 29년 만의 첫 우승이었고, 나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물론  마쓰오카도 선전을 했고, 와카마쓰도 그랬다. 그런데 그 시즌에는 후나다나 이세, 힐튼 같은, 이미 전성기가 지났거나, 혹은 자질면에서도 일류라고 하기 어려운 선수들까지 제 맡은 자리에서 크게 활약을 했다. '모두들 열심히군. 나도 열심히 해야지'란 마음가짐으로 테이블에 앉았던 기억이 난다. 매일 밤늦게까지 일하고, 한밤중에 부엌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썼다. 매일 조금씩 단락을 지어, '오늘은 여기까지'란 식으로 써나갔다. 문장이나 각 장이 단편적인 것은 그 탓도 크다고 생각한다.

  다 쓴 후 군조 신인상에 응모했다. 군조를 택한 것은, 한정 원고 매수가 내가 쓴 글과 비슷했다는 점도 있지만, 막연하게나마 이 잡지에는 새로운 것을 평가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문예지에 관해서는 전혀 몰랐는데, 책방에 서서 이런저런잡지를 뒤적거리는 사이 그런 느낌이 들었고,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옳았다. 만약 군조가 아니고 다른 문예지의 신인상이었다면 안 됐을 거라는 소리를, 그 무렵 다른 잡지에 관계하는 사람들로부터 흔히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만약 이 작품으로 상을 받지 못했더라면, 나는 그 후로 소설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썼다 해도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과정을 밟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의 문단(이랄까 문예업계)이 모두 이 작품을 좋게 평가하고 따스한 눈길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몇몇 사람은《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소설 양식을 지지하고 격려해 주었지만, 이런 걸 소설로 인정할 수 없다는 분위기도 농후했다고 기억된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결코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수상 후 처음으로 고단샤(講淡社)를 방문, 편집국의 높은 양반에게 인사를 했을 때도, "자네 작품에는 상당히 문제가 많지만 아무튼 앞으로 열심히 해봐"란 말을 들었다.

 하기야 지금은, 과연 이 작품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나도 생각한다. 아니 그 당시 역시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런 게 아닌데,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을 삼분의 일도 채 쓰지 못한 게 아닌가. 이 다음에는 이보다 훨씬 더 잘 쓸 수 있겠지, 라고 말이다.

 그러나 변명할 마음은 없지만, 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처음에도 말했듯 아무 생각 없이 쓴 소설이다. 그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기도 하고, 문제점이기도 하다.이런 점은 소설적 테제러는 성립한다. 하지만 소설로는 어딘가 좀 불충분하다. 그것은 동전의 안과 밖이다. 어느 한쪽만 언급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당시, 이 소설을 새로운 소설적 테제로 평가하는 비평도 있었고, 소설로서의 불충분함을 공박하는 비평도 있었다.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는 모두 종합적인 비평으로는 부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테제이기 때문에 불충분하고, 불충분하기에 테제로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한쪽을 제거하면, 다른 한쪽이 성립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당시에는 테제를 쓸작정이 아니었다. 나는 자신의 기분을 정직하게 그저 문장으로 환치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작업을 진행해 나가는 사이에, 정직하게 쓰려고 하면 할수록 정직하지 않은 문장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장을  문학언어적으로 복잡화, 심화시키면 시킬수록, 거기에 담겨지는 생각이 부정확해지는 것이었다. 요컨대 나는 언어의 이차적 언어성에 의존하여 문장을 썼던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피츠제랄드는 "타인과 다른 뭔가를 얘기하고 싶어서"라고 어느 편지에 썼다.

          "타인과 다른 언어로 얘기하라."

 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곧잘 그 말을 떠올렸다, 그렇다, 나는 타인과는 다른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언어로.

 나는 좀더 심플하게 쓰자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쓰지 않았을 정도로 심플하게, 심플한 언어를 쌓아 심플한 문장을  만들고, 심플한 문장을 쌓아 결과적으로 심플하지 않은 현실을 그리는 것이다(그 후 레이먼드 카버를 번역하면서, 그가 하고자 하는 것도, 같은 의도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가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가능한 한 문장을 심플하게 하기 위해, 나느 실험적으로 처음 몇 페이지를 영어로  써보았다. 물론 나의 영어 실력이야 뻔한 것이다. 고등학생의 영작문 정도로 치졸한 것이다. 하지만 쓰고자 하면 정말 기초적인 심플한 어휘만으로도 문장을 쓸 수 있다는 발견은, 내게 큰 수확이었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테제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테제로 성립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렇지, 이렇게 쓰면 되겠구나, 제법 문장이 되는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내게 그 점은 매우 신선한 발견이었다.

  그런 식으로 이 소설에는, 콜럼버스의 달걀이 몇 개 숨겨져 있다. 나중에 다시 읽어 보니(정직하게 말해 다시 읽기가 상당히 괴로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내게도 콜럼버스의 달걀이었고, 다른 몇몇 사람에게도 콜럼버스의 달걀이었다.

  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출판된 후에,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게 소설이라면, 나도 그  정도는 쓸 수 있다"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그 작품이 소설로 통용된다면, 누구나 그 정도는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적어도 그런 말을 한 사람 어느 누구도 소설을 쓰지 않았다. 아마 써야 할 필연성이 없었던 것이리라. 필연성이  없으면--가령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아무도 소설 따위는 쓰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썼다. 그것은 역시 내 안에 그럴만한 필연성이 존재했다는 뜻이리라.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최종 심사에 올랐다고 군조 편집부의 M씨가 알려준 날의 일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이른 봄 일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이미 서른 살이었다, 그 무렵에는 신인상에 응모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으므로(송고를 한 것은 가을이었다), 전화가 걸려와 최종 심사까지 올라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무척 기뻤다. 나는 작가가 되어 여러 가지 기쁨을 경험했지만, 그때처럼 기뻤더 적은 한번도 없다. 정작 신인상을 받았을 때도 그처럼 기쁘지는 않았다.

  그 전화를 끊고 아내와 둘이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센다가야 초등학교 앞에서, 날개에 상처를 입어 날지 못하는 비둘기를  발견했다. 나는 그 비둘기를 두 손에 감싸들고 하라주쿠까지 걸어가, 오모테산도 파출소에 신고했다. 내내 비둘기는 내 손 안에서 파르르 떨었다. 그 아스라한 생명의 증거와 온기를 나는 지금도 손바닥으로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귀중한 생명의 향기가 사방에 충만한 따사로운 봄날의 아침이었다. 신인상을 받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무 근거도 없는 예감으로.

그리고 나는 실제로 상을 받았다.

열림원 인터넷특집  - "무라카미 하루키 내 작품을 말한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