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서울에서 출생했고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얼마동안 놀다가 공무원 생활을 했으며, 1993년에『소설과 사상』겨울호에「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그리고 2001년 직장을 휴직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고, 후에 휴직했던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현재 독일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소설가여서 소설에 억압받고 싶지 않아요. 전 작가일 뿐입니다.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글을 쓰고 싶습니다."
배수아는 소설을 발명이라고 말한다. 어딘가에 묻혀 있는 이야기를 발굴해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집요한 사색의 과정에 대한 진술이 소설이라는 것이다. 취미로 글을 쓴다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문학적 엄숙주의는 찾아볼 수 없다.그래서 그의 문장은 당혹스럽고 생경하며 파격적이다. 전통 문학사적 배경과 이데올로기를 비껴나 있는 다소 몽환적인 이미지, 건조함과 냉소로 가득한 문체로 특징 지워진다. 배수아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불온하고 불순한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다. 한결같이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늦된 아이들이며 주로 스무살 안팎의 주변적 존재이다. 이들은 사회규범에 적응하지 못하고 진화를 거부하는 인물이며 '스스로 선택한' 이상한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신세대적 일상을 파고들며 신세대적 일상에 숨어 있는 존재의 어둠과 불안, 삶의 이중적 풍경에 대한 감각적 묘사로 일관하다. 체험과 사실성이 강조되던 우리 문학사에서 배수아는 은폐된 존재의 어둠을 탐사하며 독특한 개성을 갖춘 신세대 작가로 성장해왔고, 이제는 미적 성숙의 단계를 완성해가고 있다.
초기 경향에 대해서...
1.신세대
배수아의 초기 작품은 어른이 없는 성장의 기억을 가진 신세대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랩소디 인블루>,<부주의한 사랑>등 초기작품은 성장소설의 논의로 모아졌지만, ‘성장’이 없는 성장 소설이라는 특이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바로 80년대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은 우리 사회에 대한 하나의 증상으로 나타난 ‘신세대’가 배수아의 작품의 한 면을 예리하게 표현하는데 적절하게 쓰였다고 볼 수 있다. 배수아는 바로 이 ‘신세대’의 꼬리표를 달고 다녔던 것이다. “켈빈 클라인 청바지 위에 하얀 필라 셔츠를 받쳐 입고 하이네켄을 마시는 아이들, 감수성의 뿌리를 헤이즐넛 커피, 피타, 다이어트 코크, 디즈니 만화 영화와 같은 도시적 문물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신세대들이다. 이들은 비싼 옷, 멋진 포즈, 이성친구등이 중요하고 심각한 세상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따를 어른이 없는 것이다. 어른이 되기를 갈망하지만 될 수 없는 미성숙한 존재들이 바로 신세대들이다. 배수아의 초기 작품에는 바로 이런 신세대들, 소외된 비주류의 사람들을 소설의 중심으로 불러오고 있다.
2.환각(몽유), 죽음
배우아의 세계에서 사랑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환상이고 죽음과 만남으로서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일상에 지친이들을 유혹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것이다. <건전한 부르주아의 도시>에서도 달을 만나기 위해 그는 죽음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프린세스 안나>에서는 현실속의 무기력한 사랑으로 이해되는 노아와 도시적인 죽음의 환상인 핑크가 나온다. “핑크는 밤이고 곧 다가올 전쟁이다. 노아가 꿈꾸고 있는 푸른 얼굴의 쿠바인이고........ 우울에서 해방시켜준다” 핑크는 바로 죽음의 유혹이다. 현실의 깊은 절망 속으로 들어선 배수아는 우리를 죽음과 사랑에 대한 환상으로 이끈다.
3.이미지
배수아의 소설은 서사위주의 글쓰기가 아니라 이미지 중심의 글쓰기이다. 지속적이거나 논리적인 서사의 흐름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미지들이 영화의 쇼트(short)나 만화의(cut)처럼 연결된다.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에 ‘벌어짐’은 있지만 ‘이어짐’은 없다. 이것은 기억을 통해서 과거의 사건을 역사화하지 않고자 한다. 그것의 수단이 바로 서사인데, 이것을 버리고 이미지로서의 역사를 시도하는 것이다.
4.허무주의
허무주의와 무의미성이 낭자하고 몽환적이며 생경한 꿈의 나라를 펼친다. 막연하게 일상성의 지겨움에서 탈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허무적인 제스처를 반복하고 있다.
새로운 전환기 - 이바나
줄거리 : 이바나는 이 작품에서 10년쯤 된 중고 자동차의 이름이기도 하고, '집시의 표정을 닮은' 몰락해가는 어느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고, 주인공인 나와 K가 함께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나와 K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어지고 커피를 몇 리터씩 들이켜야만 일을 할 수 있게 되자 다니던 회사를 휴직하고 이바나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그들이 여행으로 찾아가는 목표, 그것은 '침묵'이다. 레드 제플린의 'Going to California'만을 수도 없이 되풀이 들으며 그들은 한밤의 산악지대, 개발계획이 취소돼 폐허처럼 된 해안가 마을, 황폐한 공장지대 등을 13개월 동안 2만5,000㎞를 여행한다. 더 이상 대도시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들은 우편으로 사직서를 보낸다. 돈이 떨어지자 ‘나’와 ‘K’는 다음 여행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책을 쓰기로 한다. 책 쓰기가 늦어지자 ‘K’는 결국 떠나지 못하게 될까봐 불안해하고, ‘나’는 책을 쓰는 동안 ‘이바나’가 점점 중요하게 다가오자 책을 다 완성하고 나서야 떠나길 원한다. 이 이야기의 한쪽에 또 다른 한 쌍의 주인공인 남자 간호조무사 B와 그의 연인 산나의 이야기가 있다.
▶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여행, 불면, 침묵 그리고 이바나이다. 그들이 여행을 하는 이유는 ‘일하기 싫다’이다. 의미화된 일상, 이름 붙여짐에서 비롯되는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K는 불면증에 시달린다. K의 불면은 노동을 해야만 살 수 있다는 강박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은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남자와 여자, 불리는 이름, 직책 등을 규정짓는다. 따라서 불면은 의미화되고 구조화된 대도시의 체계에 대한 육체적 저항의 산물인 것이다. 직업은 단순한 생계수단이 아닌 안전을 보장받는 유일한 장치이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서는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었고, 강박증에서 벗어나 불면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고, 침묵을 가질 수 있었지만, 혼란과 불안을 얻게 된다. 또, 여행은 화자의 글쓰기가 된다. 화자와 K는 여행을 계속 하기 위해서 ‘이바나’라는 글을 쓰게 된다. 글쓰기는 대도시의 체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의 욕망이다. 그들이 애초부터 여행을 떠난 이유가 ‘일’에서 벗어나기 위함이고 그 여행에는 이바나도 함께였다. 이바나가 없는 여행은 의미없는 일탈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것은 의미화를 거부하는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글쓰기를 편집자는 이해하지 못하고 “여행은 도시를 떠나 자연에서 살고 싶다, 자유롭고 싶다 머 그런게 아닐까요”라고 말한다. 즉, 욕망과 현실의 대화는 이런식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글쓰기에 집착하는 ‘나’로 인해 여행을 떠날 날이 멀어지는 것에 대해 불안을 느낀 K가 이렇게 말한다. “너는 공명심의 덩어리야. 너의 공명심이 나를 죽일 거야. 너도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가만히 있는 거야. 그렇지?”라고 말한다. 이것은 체계에 대한 저항이 결국엔 그것의 일환이 되어가고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다.
▶ ‘이바나’ 안에서는 이름과 성별이 의미를 갖지 못한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이니셜로 등장하는 것과 책의 중반까지 읽어도 인물들의 성별을 잘 파악할 수 없는 이유도 그것이다. 특히, K는 자기라는 존재 자체, 자신의 성별과 이름과 목소리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성적 정체성을 철저하게 거부했다. “K는 또한 자신의 성적인 정체성을 부정했다. K는 그녀, 라고 불리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했다. 그리하여 나는 글 내내 K를 그, 라고 부른다.” 즉, 이 작품은 이름 붙여진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붙여진 이름이 있다. 집에서는 아들, 딸로, 학교에서는 선배, 후배로. 많은 형태의 이름으로 불리운다. 이것은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면서 거부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으며, 여기에는 의무와 책임도 뒤따른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거부하는 순간, 우리는 정신병자나 또는 우울증 환자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될 뿐이다. 만약 그런 것들을 감수하고라도 이바나와 함께 하고자 해도, 노동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바나와 함께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회의‘ 뿐인 것이다.
절대로 끝나지 않을 ‘가난’에 대한 보고서 -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빈곤’을 주제로 부암동 스키야키 식당 주변에 모여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각 편의 사건전개가 뚜렷한 연관성없이 독립적이긴 하지만 ‘부암동’이라는 한 동네의 스키야키 식당 주변에 모여 살고 있는 인물들이 얼마나 ‘빈곤에 짓밟히고 있는지’를 드러낸다.소설에서 가난은 가족관계의 파탄, 힘겹지만 임금은 박한 노동, 엄청난 식탐, 사회적 지위의 급락, 존엄성의 상실, 돈의 절대화, 인간적 가치에 대한 냉소 등 다채로운 양태로 나타난다. 그녀의 초기 경향과 달리 그 어떤 깨달음이나, 몽환적인 분위기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있다면 ‘위악적인’ 인간 군상뿐이다. ‘위악적’이라는 말은 ‘빈곤’과 맞닿아 있다. 경제적인 빈곤에서부터 정신적인 빈곤, 나아가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인한 자기애의 치명적인 상처’(작가의 말)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인간관계에서 오직 ‘빈곤’만을 볼 뿐이다. 작가는 가난뱅이들의 더럽고 슬픈 삶을 파편적으로 그려 나가지만, 그들을 인터뷰하고 그 삶을 취재하는 ‘성도’라는 인물의 관찰자적 시선을 통해 그것들을 한 줄로 꿰고자 한다. 그의 보고서 형식으로 되어 있는 「예비적 서문 - 슬픈 빈곤의 사회」라는 제목의 장에 따르면 “빈곤은 모든 것의 시작점이며 동시에 모든 가능한 것들의 종말”이다. 그는 또 “이 ‘빈곤’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데, 그것은 곧바로 소설 구성의 특성과도 통하는 진술처럼 보인다. 가난의 현실은 줄기차게 진행될 뿐 결코 완미하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도 특별한 시작과 끝이 없다. 그리고 가난은 계속된다.
▶그렇다고 여기에는 ‘가난한 자’만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하지 않은 자인 지식인의 허상(백두연, 음명애, 우균, 김요환)을 꼬집어 내기도 한다. 그 밖의 인물들에 대해 말하자면, 돈이 신앙인 영혼(돈경숙, 표현정)과 소비만이 미덕인 신세대(세원, 털 모델)등이 등장한다. 이렇듯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에는 등장하는 인물들이 굉장히 많은 편이다. 그렇다고 각 인물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으면서, 공통의 주제인 ‘가난’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양하면서도 비슷비슷한 가난뱅이들 속에서도 ‘노용’이라는 인물은 특이하다. 방이 열두 개나 되는 대저택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훌륭한 집에서 살고 있는 그는 그러나 일을 하지 않는 대신 남들이 먹다 버린 최소한의 음식만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독특한 인물이다. 그의 이복 누이가 지적한 대로 그는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극단적인 가난뱅이 역할을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일반적인 타고난 가난뱅이처럼 행동하려 하지 않는” ‘도스토예프스키적’ 인물이다.
▶결론적으로,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이 갖고 있는 장점은 적어도 삶에서는 이 소설이 적실해 보인다는 점이다. 소설의 내용이 위악적일지언정, 또 너무나 적나라해서 읽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지언정 ‘거짓 평화’나 ‘가짜 깨달음’ 따위를 내놓지는 않는다. 이 냉혹한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 편이 나아 보인다.
배수아의 등장은 한국 문학에 있어 낯선 것이었다. 소설뿐 아니라 배수아라는 사람 자체가 그랬다. (한국) 문학에 대한 어떤 존경심도 없어보였고, 직업은 공무원이었으며, 습작 기간도 문학 수업을 받은 적도 없었다. 흔히 사람들이 문학가에게 기대하는 것과 거리가 먼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끔 인터뷰에서 털어놓는 말은 마침 유행하던 신세대 담론과 어울리게 독특하고 파격적이었다.
쓰는 소설도 이런 자신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푸른 사과가 놓인 국도>(고려원 펴냄), <심야통신>(해냄 펴냄), <부주의한 사랑>(문학동네 펴냄) 등의 초창기 소설은 도시적인 삭막한 감수성과 자유 연상기법에 가까운 서술 방식이 결합되어 다른 작가들과 구분되는 배수아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만들어내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어떤 억압도 꾸밈도 없이 자신의 안에 꿈처럼 쌓여 있는 기억들을 불러내어 기록했다는 인상을 주는 특유의 글쓰기 스타일은 초창기부터 형성되어서 에세이적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는 현재까지도 진화/변주되면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초기에는 이런 무의식적이고, 비 억압적인 서술 방식이 강하게 나타나서 평단과 독자로부터 극단적으로 양분된 반응을 이끌어내었다. 문법은 존중되지 않으며, 시간의 순서 또한 고려 대상이 아니고, 심지어 화자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런 초창기 배수아 소설의 매력은 (나는 배수아의 작품 세계를 <이바나>(이마고 펴냄)가 쓰인 시기를 기점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려고 한다)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꿈과 같이 몽환적인 분위기와 도시적인 삭막한 정서가 뒤섞인 특유의 독특한 공기다. 이 공기는 기본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특유의 서술 기법으로 인해 발생된 효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편, 당시 한국의 시대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데 왜냐하면 스스로 전혀 참고하지 않고 있다고 밝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은 사실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쓰인 많은 문학 작품에서 포착되는데, 나는 그것을 정치적인 것의 소멸과 동시에 그 정치적인 것의 공백이 가져다준 빈자리를 자본의 풍요로움이 빠르게 메워가던 시대적인 상황에 있어서 하루키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일본의 1980년대와 한국의 1990년대가 구조적으로 닮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즉, 정치와 자본이 자리바꿈을 하는 바로 그 순간, 정치 투쟁이 상품 소비로 변환되는 시절의 한가운데에 있던 자가 느끼는 무력감과 그 무력감을 이제 사적이고 내밀한 방식으로밖에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된 자가 갖게 되는 또 한 겹의 무력감은 이런 시기에 청춘을 맞이한 예민한 젊은이들이 어쩔 수 없이 공유하게 되는 공통감각이 아닐까.
초창기 배수아 소설의 또 하나의 매력은 예민한 사춘기 소녀적 감수성이다. 이 시기 배수아의 인물들은 대체적으로 조숙한 사춘기 소년소녀들이다. 그들은 세계의 부조리를 모두 간파하고 있을 정도로 충분히 똑똑하다. 그래서 거기에 거리를 두고 바깥으로 빙빙 돌며 주류적인 가치들을 무시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거기엔 언제나 불안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시하고 있는 그 세계가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사춘기적 탈주는 불완전하며,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탈주가 실패하고 사회와 타협을 이룰까봐, 혹은 탈주에 진짜로 성공하여 존재 자체가 잊힐까봐(고속도로에서 사과를 파는 여자가 되면 어쩌나) 불안에 떤다. 성장하느냐(타락하느냐), 도망치느냐(지워지느냐). 수치스러운 것은 둘 다 마찬가지다.
이상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배수아의 초창기 소설들은 낯설고 독특한 스타일이 매력적이지만 그 세계관 자체는 평범함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지는 않다. 내용보다 스타일이 부각된, 중간 계급 젊은이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도 독특한 스타일리스트 정도로 여겨지던 배수아가 지금처럼 한국 문학에서 자신만의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된 것은 이 사춘기적인 방황을 급진화하는 방식을 택하면서부터였다. 이 급진화는 그녀의 삶과 글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는데, 그녀는 직장을 휴직하고 베를린에 잠시 체류했던 것을 계기로 번역가이자 전업 작가의 길을 택하게 된다. 예민한 소년소녀들이 일기장을 상자에 넣고 사회에 편입하는 것을 완료하는 시점에 그녀는 정반대의 길로 뛰어든 것이다.
물론 이 모험은 사춘기 시절의 방황처럼 낭만적일 수 없다. 당장 생활인으로서의 불안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 불안,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과 망설임 사이에의 방황이 이 시절 쓰인 소설 <이바나>에 탁월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이 소설을 경계로 작품 세계를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이바나>는 배수아의 소설 세계에서도 문제적인 작품이다.
물론 이 전에 나온 <그 사람의 첫사랑>(생각의나무 펴냄)에서 이미 배수아의 변화를 느낄 수가 있다. 이 소설집에는 그때까지 나온 배수아의 소설 가운데 가장 배수아답지 않은, 전통적 기준에서 봐도 손색이 없는 잘 쓰인 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비문은 억제되어 있고, 비교적 선명한 플롯 구조를 가지며, 묘사는 사실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특유의 스타일을 전면적으로 포기하고 있지는 않다. 그녀의 변화에 대해서 살펴볼 때는 그것이 단절적이라기보다는 연속적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는 세계관을 바꾼 적이 없다. 그것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을 뿐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특유의 안개 같던 풍경은 초점이 선명한 풍경이 되었으며, 더 이상 그녀의 글은 비문이 매력인 독특한 신세대 글이 아니게 되었다.
이 급진화의 시기 배수아의 삶과 작품 세계를 바꾸어놓은 투쟁은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투쟁이었다. 그랬기에 더 급진적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이 시기에 대해서 말하면서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내적 혁명이 뭐였는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 위에 적었듯이 소설 <이바나>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 자체가 배수아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행하는 시간 속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이 책에 어떤 힘이 혹은 불온함이 있다면 이 책이 한 명의 극단적인 개인주의자가 실제로 이뤄낸 정신적 변혁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수아가 현실에서 안정된 서울의 공무원의 삶을 버리고 낯선 베를린으로 간 것처럼 소설 속의 주인공도 자신이 살아온 도시를 버리고 중고차 이바나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그 여행은 흔한 여행이 아니다. 무료한 삶을 견디는 중간 계급에게 보답으로서 주어지는 여가로서의 여행이 아니다. 지금까지 이어져온 자신의 삶을 끊어버리고 스스로를 추방자의 운명으로 내모는 여행이다. 이렇게 배수아는 <이바나>를 통해서 자신의 토대인 메트로폴리스 서울과 결별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한 때의 치기어린 일탈이 아니다. 그녀는 고향을 잃는 자의 공포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지배하는 정서는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나는 자의 설렘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자의 불안과 공포의 정서이다. 물론 그것은 불면에 시달리는 대도시의 소시민들이 매일 밤 꾸는 달콤한 꿈이기도 하다. 이 지긋지긋한 도시를 영원히 떠나는 것.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배수아의 주요 독자는 불면과 우울에 시달리는 서울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다. 마치 책에서 여행을 가지 않는 자들이 여행기를 읽듯이 그들은 배수아를 읽는다. 자신이 내리지 못한 무모한 결단을 내린 한 고집 센 인간을 부러워하며.)
이 시기를 지나 배수아의 소설은 점차로 에세이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아예 제목에 에세이라는 말을 넣은 <에세이스트의 책상>(문학동네 펴냄), 배수아 본인의 독서 노트에 가까운 <당나귀들>(자음과모음 펴냄)을 거쳐 단편집 <올빼미의 없음>(창비 펴냄)에 오면 심지어 소설 속에 배수아라는 이름이 등장하기도 한다. 에세이에 가까워지는 그녀의 소설은 다시 초창기 소설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스타일, 다시 말해 문장이 전면에 부각된다.
그런데 이렇게 에세이적 소설 쓰기를 시도하게 된 계기로 그녀가 좋아한다는 빈프리트 게오르그 제발트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발트의 글쓰기와 배수아의 글쓰기가 갈라지는 지점은 히스테리의 유무이고, 그것이 제발트보다 배수아의 글이 더 흥미로운 이유이기도 하다. 히스테리가 없는 제발트의 글쓰기는 유려하지만, 균열이 없고 매끈하게 봉합되어 있다. 하지만 배수아의 글쓰기는 균질적이지 않고 과잉되어 있다. 그래서 제발트의 글쓰기가 꿈처럼 독자들을 마비시킨다면, 배수아의 히스테릭한 글쓰기는 독자들을 불편하게 한다.
이런,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과잉은 한국과 독일을 오가면서 이중 언어의 현실에 놓이게 된 작가가 언어에 대해 갖게 되는 히스테리 때문이다. (물론 제발트도 이중 언어 환경에 놓여 있긴 하지만, 독어와 영어는 상대적으로 비슷한 계열의 언어이며, 제발트는 젊어서 영국에 건너가 양쪽 언어 모두에 익숙한 바이링구얼이라고 봐야하기 때문에, 배수아와는 상황이 다르다.)
두 언어의 사이에서, 비로소 언어의 인위성(혹은 물질성)이 선명해지고, 언어 자체의 존재감이 팽창한다. 작가에게 그런 상황은 축복이자 저주이다. 자칫하면 언어 자체에 사로잡혀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제임스 조이스나 사무엘 베케트 같은 20세기 모더니스트 작가들이 생의 후기에 바로 이런 곤경에 빠졌다. 그것은 회화의 물질성에 사로잡힌 현대 회화가 처한 곤경과 같은 것이다. 언어의 물질성에 사로잡힌 모더니스트들은 언어를 언어의 경계로, 다시 말해 침묵으로 밀어붙이게 되는데 물론 언제나 침묵에 닿는 데는 실패하게 된다. 말은 침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뒤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소설집 <올빼미가 없음>의 세부 사항을 살펴보자면 처음부터 이미지를 잘 다루고, 또 이미지에 잘 매료되는 소설가였던 배수아의 이미지를 다루는 능력이 이 소설집에 이르러 절정에 닿은 것으로 보인다. 배수아는 종종 정지된 듯 정적인 하나의 풍경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집요하게 묘사하는데 그것은 사실주의적 재현과는 관련이 없다. 그것은 하이퍼리얼리즘 회화가 증폭된 현실 묘사를 통해서 현실 자체를 초현실적인 꿈으로 만드는 메커니즘과 더 닮아 있다. 한편,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꿈이 중요한 테마로 등장하면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지점을 포착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예를 들어 단편 '무종'의 중간 부분, 꿈에 대해 서술하는 문장이 점차로 자신이 꿈을 서술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장면은 탁월하다.
그리고 책의 끝에 수록된, 배수아 본인이 아낀다는 '밤이 염세적이다'는 위에 적었던 것처럼 20세기의 모더니스트들이 생의 후기에 도달했던, 곤경의 지점을 포착한다. 언어와 언어가 아닌 것의 경계. 말하기와 침묵하기 사이의 경계. 배수아는 바로 거기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곳에서 문장은 해체되고, 단어는 부서지고, 결국 쉼표와 구두점만이 남게 된다. 이 언어와 비언어 사이의 경계, 즉 말과 침묵의 경계에서 부상하게 되는 것은 목소리다. 왜냐하면 목소리야말로 침묵과 대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사라진 뒤에도 목소리는 존재할 수 있다. 아니 순수한 목소리는 언어의 끝과 침묵의 시작, 그 좁은 틈에 존재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침묵의 가장 직전이다.
배수아 소설의 최신 경향은 이렇게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목소리로서의 언어에의 강조, 내용의 측면에서는 에세이적 글쓰기에서 꿈에 대한 글쓰기로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처음 배수아의 소설이 소설과 에세이 사이를 가로지르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사적 현실이 속한 세계(베를린)와 그녀의 독자가 속한 세계(한국) 사이의 거대한 틈을 메우기 위한 시도였다고 한다면, 이제 에세이에서 다시 꿈의 세계로 이동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비타협적인 고립주의가 그녀의 사적인 현실을 포함하여 현실 전체에 등을 돌린 징후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배수아의 꿈의 세계는 배수아의 억압된 현실 세계를 투사하는, 굴절된 거울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제발트가 유럽의 종말적 풍경에 압도되어 보르헤스적인 꿈의 세계를 어슬렁거렸던 것처럼, 카프카가 자신의 현실의 곤경을 재료삼아 관료들로 이루어진 악몽의 세계를 설계했던 것처럼. 배수아는 굳게 닫힌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현실의 압력을 재료 삼아 길을 잃은 목소리들이 떠다니는 꿈의 세계를 짓고 있다.
그 세계는 경계 위에 지어진, 경계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언어 없는 목소리가 침묵과 함께 떠돌며, 현실과 꿈이 서로를 향해 녹아드는. 그곳은 막다른 골목이며, 배수아는 그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대신 그 골목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택했다. 이런 시도는 배수아를, 배수아의 글을 어디에 이르게 할 것인가. 예측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향하는 곳은 우리가 한 번도 닿아본 적이 없는 곳일 것 이라는 사실이다.
20111128
지구별 여행자, 배수아 & 이상은
두 번째 노래손님의 등장이다. 최근 신작 앨범 을 들고 온 이상은. 영화음악가 이병훈, KAYIP(이우준, 콜드 플레이와 U2의 앨범 프로듀서인 브라이언 이노의 공연 세션)과 함께 뉴욕의 문래동(문래예술공단) 같은 동네의 스튜디오에서 이번 음악을 만들었다. 공식적인 소개를 살짝 엿보자면, “NEW YORK의 뮤직 시티 윌리엄스버그의 아파트와 허드슨 강가의 거대 유조 공장 스튜디오에서의 치열한 새로움을 향한 실험.”
참고로, 뉴욕에서의 이번 작업은, 책으로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제목은 『이상은, 뉴욕에서』. 이상은의 등장과 함께 어쿠스틱 버전의 「Something in the air」가 울려 퍼진다. 또 한 사람의 이야기손님의 등장을 예고하는 음악이랄까. 그렇다. 『올빼미의 없음』의 배수아. 또 한 명의 지구별 여행자다. 그래서일까, 사회자는 이런 닭살 멘트도 날려주신다.
“법정스님의 『오두막 편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지금 모실 두 분에게 아마 하늘 냄새가 날 거다. 규정지을 수 없는 필력을 지닌 배수아 작가, 그리고 토탈 아티스트, 이상은. 무시무시한 언니 두 분을 모시고 북콘서트를 계속 진행하겠다.”
하늘 냄새. 문득 궁금해졌다. 지하 공연장에서 맡는 하늘 냄새는 어떤 것일까. 잡내가 끼이지 않은, 온전한 느낌으로 하늘을 만날 수 있을까. ‘소설 쓰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배 작가는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그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내음을 맡을 수 있는 상태다. 만족하지 못한다면, 하늘 따윈 염두에 둘 수 없다. “어디로든지 갈 수 있는 상태를 즐긴다. 그런 가능성이 있으면 삶에 만족할 수 있다.”
이상은이라고 다르지 않다. “난 무척 긍정적이다. 모든 것에 만족하는 건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괜찮다. 삶의 자세나 태도가 좀 더 좋아져야겠다는 생각은 한다. 그냥 막살았구나, 조금 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살 걸,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디든 떠날 수 있고, 어디서든 살 수 있는 그들에게선 여행자의 냄새가 난다. 하늘이 그래서 묻어 있는 것일까. 물론, 그들에게 여행은 특별한 일탈이 아니다. 배 작가가 베를린을 종종 찾는 것은, 그곳이 작업실이기 때문이다. 여행과 결부시킬 이유는 없다는 것이 본인의 설명. 이상은에게도 라디오를 진행하다가 잘리면 여행을 다니는 식으로 계속 그렇게 살아왔단다. 여행은 곧 일상, 그렇게 흘러가듯이.
배 작가는 과거, 이른바 ‘회사원 생활’을 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직장을 그만뒀고 전업 작가로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다. “직장을 다니면서 1년 정도 외국에서 있을 기회가 생겼다. 베를린을 거의 절반 이상 우연으로 선택했고, 11개월을 살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사람은 한 번 누린 자유의 수위를 낮출 수가 없다. 직장을 그만뒀고 굶어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살아있다. (웃음) 8년 직장 생활을 했고, 그 와중에 소설가로 데뷔했지만, 피곤한 상태이기도 했고, 조만간 결론을 내려야 하는 시점이 아니었나 싶다.”
『올빼미의 없음』은 글이 쓰고 싶은 열망이 타올라서 나온 작품이다. 독일문학에 꽂혀, 3~4년 번역에 혼이 들렸던 배 작가가, 어느 순간 자신의 글이 쓰고 싶었단다. 그 열망이 와 닿았기 때문일까. 이상은에게 이 책은, 아름다우면서도 지적 우월감을 느끼게 만든 책이었다. “이런 명품 같은 소설이 있는 줄 몰랐다. 소설을 잘 안 읽는데, 이런 작품은 10~20년 후에도 남을 것 같고, 배 작가님은 오래오래 남을 소설을 쓰는 분이구나 싶었다.”
배수아의 체계, 이상은의 자유
이어진 낭독. 이상은의 목소리. 『올빼미의 없음』에서 주인공인 ‘나’는 아는 사람의 죽음을 접한 뒤 묻는다, 죽음.
“나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가 베르너에게 털어놓았다. 지금에야 비로소,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보이지 않음, 그리고 그 단어, 없음…. 말해달라, 베르너, 죽음이란 어떠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가. 죽음과 함께 우리는 어디에 있게 되는 것인가. 죽은 자는, 우리가 사랑한 죽은 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게 되는 것인가.(pp.137~140)
죽음. 사회자 성기완은 씩씩하고 명쾌하다고 했다. 피할 수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피해가지 않고 답하기. 90년대와 비교할 때, 질문 내용은 바뀌었지만, 질문과 대답을 하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고 했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단상. 배 작가의 우문현답. “21세기잖나. 덧붙인다면 모든 것은 변한다.”
더불어, 자주 질문을 받는다는 ‘왜 독일인가’에 대한 답변. 어쩌면 우연, 혹은 운명. “회사에서 외국으로 1년을 나가면서 어느 나라든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영어를 쓰지 않는 나라에 가고 싶었다. 제2외국어를 프랑스어로 했는데, 프랑스 문학을 생각해보면 프랑스에 가고 싶지 않았다.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베니스)에서의 죽음』을 떠올렸는데, 나도 미스터리한 게 왜 베니스가 아닌 베를린으로 갔을까, 하는 거다.(웃음)”
배 작가의 소설은 이야기 중심이 아니다. 소설집 『올빼미의 없음』을 이루고 있는 소설들도 마찬가지다.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영혼을 여행시켜야 한다. 그다음 이미지와 상징을 만든다.” 배수아의 체계다. 글쓰기의 왕도는 없다. 각자의 글쓰기가 있을 뿐. “여기 온 분들 중에 글 쓰는 분이나 글을 쓰고자 공부하는 분에게 기우에서 하는 얘기인데, 이론은 다 헛소리다. 쓰다 보니 결론으로 낸 방법론이지,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길을 간다.”
『올빼미의 없음』소설집은, 「올빼미」라는 단편에서 비롯됐다. 모든 것의 시초. 처음, 올빼미는 문 같은 존재였다. 문을 통해 나갈 수 있는, 가시적인 출구 같은. 올빼미는 그렇게 다뤄졌다. 더 자세한 분석은 어울리지 않으므로, 각자 올빼미를 흡수할 것.
『올빼미의 없음』을 직접 낭독중인 배수아 작가
그리고 「올빼미」에서 배수아의 직접 낭독이 뽑아져 나왔다. 화자인 나와 노작가 간의 대화다. “내가 일생 동안 두려워한 건 혼자가 되는 것과 글을 쓰지 못하는 것, 이 두 가지였답니다, 하고 화면 속의 남자가 말하는 것이 들렸다. 우리는 극장에 앉아 있었다…. 당신의 말을 들을 수도 없어요. 그때부터는 해가 바뀌어도 날 찾아올 필요가 없어요. 난 마침내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된 것이고, 그리고 정말로 너무나 혼자가 되었을 테니까. 그래서 당신조차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일 테니까.”(pp.66~69)
참, 무서워하는 것이 별로 없음에도, 가스불을 유난히 무서워하여 집에 가스레인지가 없는 배 작가가 『올빼미의 없음』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가장 뒤에 배치된 (배치는 출판사에서 했단다.) 「밤이 염세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소설. 앞으로는, 여행에 대한 글을 많이 써보고 싶다는 것. 앞으로 나오는 책들은 그러한 이동의 상태를 많이 반영하지 않을까.
이상은은 여전히 자유롭다. 특별한 계획은 없음. ‘보헤미안’이라는 공식적인 타이틀이 어색하지 않은, 그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 이상은의 다음 여행지를, 계획을 묻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으리라. 그의 영혼이 머무는 곳에 이상은은 자리할 것이며, 그곳에서 잉태된 음악을 우리는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열심히 살아야지. 음반 홍보도 많이 하면서.” 이상은답다. 그렇게 마무리하기 좋은 노래들이 흘러나온다. 이상은의 노래. 「비밀의 화원」이 그렇고, 「어기어디어라」가 그렇다. 아름답다. 기분이 좋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새들은 걱정 없이/ 아름다운 태양 속으로 음표가 되어 나네 ♪/… 난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아 그대를 만나고부터/ 그대 나의 초라한 마음을 받아준 순간부터 ♩/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질 거야 그대가 지켜보니/ 힘을 내야지 행복해져야지 뒤뜰에 핀 꽃들처럼♬/… 난 다시 꿈을 꾸게 되었어 그대를 만나고부터/ 그대 나의 초라한 마음을 받아준 순간부터 ♪ (「비밀의 화원」 중에서)
20111120
배수아 새 장편 `서울의 낮은 언덕들` 출간
마이너리티 시각으로 본 도시
여기 경희라는 이름의 30대 여성이 있다. 낭송극 전문 배우라는 특이한 직업을 가진 그녀는 성우와 아나운서 등에 밀려 일거리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
어느 날 자신의 독일어 선생이었던 사람이 죽음을 앞뒀다는 소식을 들은 경희는 무작정 그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커다란 여행가방 위에 걸터앉은 중앙역 앞의 경희를 본 건 바로 `우리`. 배수아의 신작 소설 `서울의 낮은 언덕들`(자음과모음 펴냄)은 독자들을 `우리`와 경희의 낯선 만남으로 끌어들인다.
`북쪽 거실` 이후 2년 만에 출간된 배수아의 새 소설은 여전히 뚜렷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는 `비서사적 소설 세계`를 들려준다. `우리`와 경희의 만남 역시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갈 만큼 큰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소설 속 에피소드마다 뚝뚝 끊겨서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는 즈음,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날 뿐이다. 마치 식빵의 네 귀퉁이를 각기 다른 사람들이 야금야금 뜯어먹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느낌.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호불호가 확연히 갈리던 작가답게 이번에도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은 스타일`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경희는 충동적인 방랑을 떠난 이후 도시에서 도시로 옮겨다닌다. `처음에 나는 이 도시와 저 도시가 완전히 다른 곳이라 생각을 했지.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도시를 하나하나 지나쳐서 걸어다가보면 이 모든 다른 얼굴과 자태의 도시들 사이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시공의 혈관이 있어서 (중략) 그것을 통해서 도시들이 동시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116쪽)
낯선 도시, 고단한 여정 속에서 경희는 미스터 노바디, 마리아, 반치, 동양인 남성, 치유사 등 여러 사람과 만난다.
이들은 성과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경희의 목소리를 통해 경희가 느낀 이미지로 소개된다.
작가는 경희가 도시마다 느꼈던 다른 감성을 그 도시에서 살고 있는 등장인물에 전이시키면서 이야기를 붙여나간다. 사실일 수도, 경희의 상상력일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 시종일관 이어진다.
하지만 수다스러운 낭송을 통해 소설을 이끌어가던 경희는 어느 순간 문장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의 흔적과 기억을 더듬으며 그를 찾는 `우리들`의 목소리가 남은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경희와 처음 만났던 순간 잠시 드러났던 `우리`가 `보이지 않는 시공의 혈관`을 통해 경희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나는 나의 문학이 분절된 목소리란 전제에서 출발했다. 스토리를 진행하되, 오직 파열된 단면으로 나타내는 것. 목소리는 음성이며 음색이란 것을 갖고 있다. 그것은 문장의 내용이나 문체의 스킬을 넘어선다고 믿는다"고 밝힌다.
"여정을 문학화하는 작업의 현기증 나는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었다"던 작가가 `낭송`을 통해 작품을 선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경진 기자]
[작가탐험] 소설가 배수아 "내 소설의 인물 사랑안해"
선례 찾기 어려운 이단적 작품 세계… 구상 따로 없이 즉흥에 의존
집안에 세간이 많지 않다. 싱크대와 냉장고는 있으나 식탁은 없다. TV는 공사판에서나 볼 수 있는 시멘트 벽돌 몇개를 두 줄로 쌓아 그 위에 얹혀 있고, 미니 오디오 컴퍼넌트와 CD음반 그리고 한 꾸러미가 될까말까한 책들은 모두 바닥에 놓여 있다.
경기 일산에 위치한 소설가 배수아(35)씨의 18평짜리 소형 아파트에는 장식장은 커녕 책꽂이 하나 없었다. 원래 용도가 식탁이었을 거실의 유리 탁자와 거기에 자리잡은 PC가 그나마 이 집 주인이 작가일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외롭게 증명하고 있었다. 붉디 붉은 소파를 제외하면 의자라곤 단 하나였다.
“책이든 뭐든 잘 버려요. 쓰레기 종량제 없을 땐 옷이나 이불도 엄청 내다 버렸어요.”
청바지에 검은색 민소매 블라우스 차림인 그녀는 “참 단촐한 생활을 하는군요”라는 기자의 반 혼잣말을, ‘정말 그런가?’의 안색으로 새삼 방안을 둘러보며 무덤덤하게 받았다.
◆ 단출한 살림살이
본인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 될지 모르겠지만, 버리지 않은 살림살이의 상태도 그다지 양호해 보이지 않았다. 일단 어지간히 낡았고, 물건들은 정돈되어 있다기보다 방치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 집에서 가장 고가에, 집어갈 만한 유일한 물품일 신디사이저의 건반 색깔 또한 누르께하다.
그녀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공직과 관련된 사건으로 감옥에 갖힌 것이 너무나 억울해서 “자살하고 싶다”고 말하는 친부에게 “아버지 못을 먹어요”라고 편지를 쓰는 딸(중편 「철수」)을 만들어 내는 소설가 배수아.
“평이하고 뻔한 얘기예요. 가족 관계를 다룬…. 특이하게 쓰려고 했으면 더 나아갔을 테지만, 단지 튀기 위해서 튀게 쓰는 걸 안 좋아해요.” 배씨는 말을 길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작가에 따라서는 기자가 받아적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많은 답변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그녀는 달라도 아주 달랐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빤히 쳐다보면 시선을 왼쪽 45도 아래 방향으로 내리깔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침묵에 머쓱해진 이쪽이 다음 질문을 하기 전에는 좀체 입을 열지 않는다.
어쩌면 상대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만하면 족하다고 여기며 더 이상의 생각이 없는 상태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자의 머리 속은 그렇지 못했다. 평이한 얘기라니? 자식이 제 애비에게 못을 삼켜 자살하라고 권고(?)하는 것이 뻔한 얘기다?
배수아를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독자들을 위해 다소 길지만 같은 작품의 뒷부분 한 대목을 인용해 보겠다.
<날 태워봐. 기름을 바르고 내 몸에 불 붙여봐. 마녀처럼 날 화형시켜봐. 쓰레기 봉지로 날 포장해서 소각로 속으로 집어던져봐. 나는 다이옥신이 되어 너의 폐 속으로 들어간다. 내 얼굴을 면도칼로 가볍게 긋고 스며나오는 피를 빨아봐. 고양이처럼 그 맛을 즐겨봐. 그래서 나는 피투성이가 되고 싶어. 내 안에 있는 나는 무엇인지, 어떤 추악한 것인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로 이 세상을 떠나가게 되는 것이 두려워 나는 마지막에 비명을 지르면서 눈물을 흘리리라.>
“93년 첫 소설을 쓴 이후 제 소설이 낯설고 독특하다는 소리를 지겹도록 들어왔는데 솔직히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어요. 이상하다, 왜 그렇게들 볼까 그랬지요.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일종의 ‘상대 평가’였더라구요.”(웃음)
배수아 소설은 누구에게는 <1990년대의 문학이 배태한 이질스럽고 지리멸렬하고 환멸적인 이야기의 한 극점>이고 누구에게는 <어떤 틀에 맞추려하는 느낌을 주지 않는 점, 우리 문단에 팽배해 있는 의식 과잉의 분위기에 젖어 있지 않은 점>으로 다가왔다.
◆ 데뷔 전에 습작 경험 전무
대부분의 평자들은 이 돌연히 등장한 작가에게 뒤통수라도 얻어 맞은 듯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미지에 중독된 자> <세기말적 허무주의의 증좌> <당혹스러움과 낯섦, 역겨움과 거부감, 그리고 그 사이에서 추동되는 은밀한 호기심과 신비스러움>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버겁다. 한마디로 <민족도, 이데올로기도, 문학사적 전통도, 모두 비껴나가는 소설>이다.
데뷔작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을 발표하기 전까지 소설을 써 본 적도, 자신이 작가가 되리라고 한번쯤 꿈 꿔 본 적도 없단다. “고교 시절 국어 과목을 영어나 수학보다 더 힘들어했어요. 저는 현대문학이 특히 어려웠어요. 복문과 단문을 구분 못한다는 이유로 복도에 나가 서있기도 했으니까요. 평균 50점 쯤 받았을 겁니다.”
그러고도, 아니 어쩌면 그러므로 <우리 문학사에서 선례를 찾기 어려운 이단의 글쓰기>라는 평가까지 받은 바 있으니 실제 그녀의 창작 과정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전에 구상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모니터 앞에 앉기 전에는 생각이 잘 나지 않는 타입이예요. 즉흥적이지요. 첫 문장을 포함, 처음 부분을 쓰다보면 내가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 스스로 알게 돼요.” 배씨는 천천히 신중하게 말했는데, 남들에게 신기로 비치거나 쉽게 쓰는 스타일로 여겨지는 것에 신경이 쓰이는 듯 했다. “첫 작품을 그렇게 쓴 이후 굳어진 버릇이고 지금까지는 실패한 적이 없는데, 앞으로 언제까지나 가능할지….”
소설의 첫 부분을 모니터 화면으로 직접 보아야 다음 생각이 이어진다는 얘긴데, 그렇게 듣고 다시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왠지 그런 것도 같다. 먹고 살기만에도 지쳐 소설책을 들쳐볼 힘이 없는 일부 독자들을 위해 그의 장ㆍ단편 중 인상적인 첫 문장 몇개를 인용하겠다.
<문득,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검은 늑대에 대해서 처음 생각이 난 것은 동물원의 입구에 있는 국수를 파는 상점에서였다> <처음 만나 두 마디 정도 얘기를 나누게 되면 남자아이들은 예외없이 담배빵을 자랑했다> 그리고 <나는 1997년 가을에 죽었다>.
-각종 문예지에 지난해 발표한 글을 모은 「그 사람의 첫사랑」은 이전 소설과 많이 달라진 듯 합니다.
“7년째인데 계속 비슷하게 쓰면 우선 저부터 지겹지 않겠어요?(웃음) 초기의 저에게 글쓰기는 사실 완벽하게 개인적인 작업이었어요. 누가 재미있어 하건 말건, 이해를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식이었죠. 그런데 알고 지내는 독자로부터 ‘장편「부주의한 사랑」은 도통 뭔 말인지 2페이지를 못넘기겠더라’는 말을 듣고 직업 의식을 좀 가져야겠다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이야기라도 제대로 전달하겠노라고 말이지요. 가끔은 초기의 그 무아지경이 그립기도 하지만 지금은 돌아갈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되겠지요.”
◆ 이야기 전달 방식의 변화 모색
-소설 쓸 때 제일 경계하는 점이 무엇입니까.
“처음엔 그런 것도 없었는데…. 가능한 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음악으로 치면 발라드는 끔찍스러울 만큼 싫어하거든요. 그걸 피하기 위해서 저는 제 작품의 주인공을 사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의식적으로 애정을 갖지 않으려 하지요. 그게 나한텐 적절한 방법인 것 같아요.”
작가가 제 분신과 다름없는 주요 등장인물에 애착을 갖지 않는다는 일견 놀라운 발설을 되뇌고 있는데 등 뒤로 뭔가 기척이 느껴졌다. 무심히 돌아보다가 기자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개였다. 베란다에 소리도 없이 숨어있다가 거실로 어슬렁거리며 들어온 것이다.
십년 감수했다며 한숨을 내쉬는 기자의 모습에 배씨는 배꼽이 빠져라 웃었고, ‘삼돌이’라는 이름의 그 잡종개는 작중 인물도 어림없는 주인의 애정을 한몸에 받는 대상답게 검은 눈빛으로 기자를 느긋하게 바라 보았다.
출처 : <주간조선 >2000. 6. 15일자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줄의 맨 뒤로 가서 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줄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오는 것을 뜻한다.
줄이란 질서이고 질서는 개인의 욕망 때문에 필요해진 것이다.
사로잡힌 경험의 기억은 자신을 버리는 것과 닮아 있다.
그들은 한때 아는 사람이 없는 방식으로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방으로 들어가 은밀히 문을 닫고 비밀을 가진다.
그들은 그럼으로써 발생되는 속도의 이탈이나 낙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모든 불이익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겠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결코 이타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윤리적인 목적을 가진 행위는 어느 한 개인의 영혼을 붙잡아두지 못한다.
대상을 매혹시키는 것은 비밀 그 자체이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서 비싼 대가를 지불한다.
나는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과 동시에 적의와 경멸과 성가심을 느꼈다.
도시에서 그것은 그다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도
나에 대해서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서로 만나면 악수를 하고
반갑게 미소를 짓고 뜨거운 차나 맥주를 마시러 가까운 상점으로 들어가고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설명하고
다른 사람들의 일에 대해서 칭찬하거나 비판했다.
냉소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고 지성은 상대를 보다 효과적으로
물어뜯기 위한 도구였다. 그곳에서 침묵이란 자신의 목에 스스로
칼을 찔러넣는 일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물론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시궁창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은
도시에서는 또다른 열등이다. 파티에서 쫓겨나는 이방인이다.
불면은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은밀하여 숨길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그 도시에서 계속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모든 사람의 충족되지 않는 오만과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거짓말과 상처받은 자존심과 터질 듯이 부풀어오르는 욕구들이
일생 동안 쌓여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 배수아 <이바나> 중에서
날 태워봐. 기름을 바르고 내 몸에 불 붙여봐.
마녀처럼 날 화형시켜봐. 쓰레기 봉지로 날 포장해서 소각로 속으로 집어던져 봐.
나는 다이옥신이 되어 너의 폐 속으로 들어간다.
내 얼굴을 면도칼로 가볍게 긋고 스며 나오는 피를 빨아봐.
고양이처럼 그 맛을 즐겨봐. 그래서 나는 피투성이가 되고 싶어.
- 배수아 <철수> 중에서
사랑은 쉽게 부정되고 그 정의는 항상 애매모호함 속에 갇혀 있고
천박하고 상스러우며 무책임하고 뻔뻔스러우며 변명을 좋아하고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끈질기게 발언의 기회를 노리면서
모양새를 망가뜨리고 히죽거리고 킬킬거리고
새끼 밴 암컷보다 더 배타적이며
게다가 그 장황한 목소리가 부끄럽게도
한창 때의 장미꽃보다 더 빠르게 잊혀지고 만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고
지나간 다음에는 더더욱 아무것도 아니었다.
- 배수아 <에세이스트의 책상> 중에서
지금 당장 나에게도 꿈이 있다.
탈한국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프라이드도 아니다.
바로 웨이터가 서있는 저 문으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다.
근사하게 옷을 차려입고 있는 척하는 계급의 그런 사람이.
상대편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드름과
자신이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존재라는 오만한 관용으로 뭉친 사람이.
그리고 나를 쳐다본다. 헤게모니의 승자가 된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고.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에게 아주 쿨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한치의 망설임 없이.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하고.
배수아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중에서
지리멸렬하게 하려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자기 혐오에도 덜 빠질 수 있고 말이다.
내가 이 세상을 견뎌내는 것은 힘이 아니었다.
난 낯선 것, 불안한 것, 외로운 것, 나쁜 것이 그립다.
― 배수아 <랩소디 인 블루> 중에서
생경하고 불순한 그녀의 이미지
출처 : Tong - artemicia1님의 배수아통
배수아의 최신작 [당나귀들]에 대한 서평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를 빼면, 배수아의 소설들은 한달음에 읽히지 않는다. 가령 나는 지난 주 출퇴근 길 나흘동안의 지하철에서만 두권의 두툼한 소설--천명관의 [고래]와 김영하의 [검은 꽃]-- 을 술술 재밌게 읽었다. 그런데 이번 주에는 꼬박 나흘동안 출퇴근길과 이틀간에 걸친 새벽녘까지의 독서를 거쳐서야 비로소 [당나귀들]을 끝낼 수 있었다. 휴.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을 읽을 때는 약간의 생경함과 익숙치 않은 문체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고, [동물원 킨트]는 얇팍한 분량을 얕잡았다가 재미있게 읽은 것 치고는 너무나 더딘 나의 독서 진행에 제풀에 지치기도 했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만나서는 그나마 배수아 독자의 티를 내며 제법 가볍게, 그러나 흥미진진하게 읽었더랬다. 이 소설을 두고 벌어진 평단의 논란에 대해서 할말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냥 좀더 지켜보자 쪽이었던 듯싶다. 아무래도, '배수아 논쟁'이란 것이 존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면 소설가 배수아를 독자에게 강하게 각인시킨 [일요일...]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편이 더 정직한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독학자]를 읽으면서는 그녀가 [나는 이제 니가....] 이전의, [내 안에 남자가 숨어있다] 같은 산문에서의 감정적--나아가 감상적이기도 한 --vulnerability로 복귀한 것이 아닌지, 아니 마치 10여년 전에 쓴 소설을 이제서야 다늦게 펴낸 것이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 정도로 좀 답답했다. 작가의 목소리가, 자신이 세워놓은 이야기의 줄기를 거슬러서, 너무 적나나하게 드러나 있을 뿐만 아니라 성별이 불확실한 주인공을 통해 자신이 말한 것의 아이러니나 독설에 가까운 것을 의도했다고 보기에도 좀 민망한 태작이지 싶다. 암튼 [당나귀들]은 [동물원 킨트]의 발칙함과 [에세이스트...]의 음악을 은유로 한 소설(문학)쓰기 대한 깊은 고민이 어울려 엮여있다. 느리게 더디게 읽혔디만, 그게 그녀의 소설이 가진 지겨움이자 매력일 듯싶다.
늘 그렇듯이, [당나귀들]은 독일 얘기와 어우러진 우리의 가족사, 현대사에 대한 진단이고 문화에 대한 보고서이다. 특이한 점은--사실 특이하달 것도 없는 것이 책을 잡는 즉시 알게 되기 때문에--이런 이야기가 주인공 '나'가 읽었던 책들과 들었던 음악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것이고, 그런 날줄 책이야기에 씨줄이 얽히듯이 사람들에 대한 회상과 사색이 엮인다는 사실. [당나귀들]을 읽으며 들었던 느낌은 '아웃사이더'로서의 그녀가 이젠 전혀 낯설지 않다는 것, 아웃사이더이고자, 아웃사이더임을 의식적으로 내보이는(represent) 제스쳐가 사라졌고, 그 자리에 대신 약간은 감상적이고 멜랑콜리의 증상이 엿보이는 '슬픔'과 '분노'에 대한 철학적 명상 내지는 사유가 들어서 있다는 점.
그래서 그녀는 속물적인 T를 완전히 경멸할 처지도 못되고, 기껏해야 '사이비' 채식주의자 흉내를 내고 있으며, 격정적인 음악보다 바흐를 고집하며, 거리의 시인이나 집시들에 대해서도 '타자에 대한 공감' 운운하는 따위의 감정은 보여주지 않는, 어쩌면 그야말로 사이비 아웃사이더임을 자인한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우리에게 돌아서서, 아웃사이더라는게 원래 완전하게 이방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아웃사이더라는 것, 자신들이 안쪽에 지배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억압을 행사하는 인사이더의 존재가, 그 존재가 그렇게 확연하게 구분될 수 없는 것임을 뼈아프게 응시하고 있는 셈이다. [일요일 스키야키....] 서사의 한축을 차지했던 '가난'도 어느덧 더이상 삶의 진정성을 나누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사실 [당나귀들]에서 가장 전면에 부각되는 문제는 음악이다. 그녀가 "음악은 우리를 만진다. 누군가 우리를 만지게 놓아 두는 것. 그것이 음악을 드는 방법이다."라고 되뇌이듯, 나는 바흐의 노래를 틀어놓고서야 [당나귀들]을 음악처럼 만지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정작 배수아를 괴롭히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음악가의 아웃사이더적 삶보다도, "언어의 틈새", 그러니까 그 배우지 못하고 경험이 불가능한 세상으로 가는 유일한 수단이 '배운 언어'라는 사실이 글쓰는 자를 좌절시키는 상황이다. 내 식으로 풀어보자면 배수아는 이 대목에서 더없이 '해체적'이다.
존재하지 않는것을 추구하는 당나귀와 부재하는 사람의 시선을 구애하는 원숭이 사이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자아를 찾아가는 것일까. 언어라는 무거움과 죽음이라는 낯설고도 친숙한 체험 속에서 우리는 몽상가들처럼 꿈속을 꿈을 꾸며, 미장아빔(mise en abyme)에 갇힌 그녀의 '여인'처럼, '너의 존'처럼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남성도 그 꿈의 동반자로 그녀와 방랑벽(wanderlust)을 즐길 수 없고, 오직 슬픔과 분노를 지닌 여성만이 함께할 수 있다.
[당나귀들]의 배수아는 그녀말대로 '냉철한 에세이스트의 자세'를 지닌 소설가로서, 에세이도, 시도, 역사도, 아니고 차라리 소설이 처음 생겨난 때의 '자기이야기'(autobiography)를 쓰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소설을 읽기 위해 현학과 해박한 음악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녹녹치 않은 사유의 무게와 언어가 주는 중압감을 견딜 수 있는 긴 호흡은 필수적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단절'을 우리의 현대의 살림살이가 처한 대세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원숭이보다는 당나귀가 되고픈 것이다.
* 출판사는 <이룸>으로 그녀의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를 내기도 한 곳인데, 곳곳에서 발견되는 오자들과 편집이 좀 눈에 거슬린다. 이 몸은 못참고 출판사 홈피에 몇마디 보탰다. 쩝.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당나귀들이요? 굶주리고 소심하게 살다가 천박한 권리를 얻게 된 사람들을 말하죠."
배수아(40) 씨가 전작 장편소설 '당나귀들'(이룸)을 냈다. 전통적인 서사방식에서 벗어나 주인공인 '나'의 독백에 가까운 이야기를 8개 장으로 나누어 서술한 독특한 소설이다. 작가 스스로 "굳이 장편소설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탈장르적 구조를 가졌다.
소설에는 일관된 줄거리가 없다. 소설은 작중 작가인 '나'의 사색을 일기형식으로 풀어간다.
제1장 '존 쿳시의 <동물의 생>으로 시작되는 리스트'는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문제에 매달리는 작가의 고민을 담았다. '나'는 소설의 절반 이상이 주인공의 강연과 질의응답 등으로 구성된 존 쿳시의 글쓰기에 매력을 느낀다. 이를 통해 작가는 전통적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에서 글쓰기 방식을 택한다.
작가는 "전통 소설의 쫀쫀한 서사방식보다 느슨하거나 허술한 글쓰기를 좋아한다"면서 "그런 종류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 데다, 잡다한 생각을 풀어놓기에 이런 서술형식이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장편 '에세이스트의 책상' '독학자' 등을 통해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선상에 있는 글쓰기를 선보인 바 있다.
책의 제목으로 사용된 '당나귀들'은 작중 독일 작가가 사용한 단어다. 이른바 '이성의 시대'인 르네상스에서 근대에 이르는 유럽의 '계몽 시대'를 거치지 못하고 곧바로 천박한 시대에 들어선 사람들을 지칭한다.
작가는 "그 말에는 나를 포함해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조롱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계몽과 교양을 건너뛰어 천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경멸적 시각을 드러낸 발언이다. 여기에는 우리 현대사에서 결여된 역사적 단계, 즉 계몽의 시대를 거치지 않았다는 작가 나름의 역사관이 담겨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물론 이런 나의 시각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라며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작가로서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지난 몇 년 간 독일에 체류하며 집필활동을 해온 그는 "독일에서 제3세계 언어로 문학을 한다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면서 "나는 이중언어를 가진 제3세계의 다른 작가들과는 또다른 입장이고, 더군다나 한국어는 일본어나 중국어에 비해 매우 빈약한 자리에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한국어에서 100% 자유롭지 못하면서도 글을 쓸 때마다 추상적인 단어들이 대부분 한자어라는 점에서 우리글이 가진 불안정성을 느낍니다. 제가 가진 한계나 부족함 때문이죠. 그렇다고 모국어를 떠나 작가생활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죠."
작가의 이 같은 고뇌를 반영하듯 이번 소설은 작가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성찰, 작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대한 지적 탐구의 과정을 담아낸다. 작가가 쓴 글은 조상과 사회전체가 겪은 것들이 작가의 내부에서 재현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책에 배어 있다.
제국주의 시대의 정신이 깃든 조셉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에 등장하는 콩고에 대한 작가의 서술에는 제3세계 작가의 피해의식이 드러난다.
"가엾은 아프리카여!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표현법일 뿐이다. 유럽에서는 이런 경우 '가엾은 아시아 아프리카여!' 하고 쓸 것이다. 지난 세기의 지체된 근대화, 그로 인한 식민지로서 피지배 경험, 이후의 저개발과 정치 혼란이란 공통점 때문에 비극의 땅 '아시아 아프리카'는 한 단어처럼 붙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작가는 적고 있다.
그러면서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에서 신비로운 식민지 아프리카의 흥미로운 이국 풍경이 더 많이 펼쳐진다면 여행사들이 더욱 즐거워했겠지만, 사실 나는 그 책을 몹시 힘들게 읽었다"며 "어떤 드라마를 연상하기에는 펼쳐진 풍경이 죄의식으로 가득 찬 듯 너무 어둡고 발걸음은 쇠사슬에 매달린 듯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고 서술한다.
결국 작가는 제3세계 작가의 시각으로 본 '암흑의 핵심'을 통해 "문학의 내용이란 어차피 모두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오직 그 이름과 이미지만이 상품화되어 팔리고 있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내가 지나치게 심사숙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이상 75-76쪽)며 문학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간다.
'부코우스키와 알테 뮤직, 쿠프랭과 프랑스령 콩고, 그리고 콘래드가 놓인 저녁 식탁의 쇼팽과 잠들기 전 여유가 있다면 슈바이처의 <예수의 생애 연구>를 마저 읽을 것'이라고 긴 제목을 붙여놓은 소설의 제2장은 독일 체류기간에 고민했던 모국과모국어의 문제, 작가 스스로 "나의 최대 연인"이라고 부른 음악에 관한 것들을 적었다. 평소 작가로서 자주 질문받았던 것들에 답변하는 방식의 글이다.
제3장 '야니네의 교회'는 시각장애인 친구의 내면적 독백을 다룬 점에서 '나'의이야기로 진행되는 이번 소설의 색다른 변주곡이라 할 만하다. 제4장 '내 출처는 어디인가'는 채식주의자에 관한 기록이고, 제5장 '안녕, 내 예쁜이'는 절박한 사랑,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슬픔에 관해 사색한 글들이다.
제6-7장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 책에 대한 작가의 독후감 형식으로 서술된다. 마지막으로 제8장 '내 어깨 위의 검은 개'는 무드장애(우울증)에 걸린 화자가 1960년대를 회고하며 유효시한이 지난 연애감정을 독백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작가는 "작품 속의 '나'는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기보다 문학과 예술 안에서 사는 정신적 에고(Ego)를 가리킨다"며 이번 소설이 작가 자신의 내면 등을 탐구한 예술가 소설임을 밝혔다.
"3-4년 전 전업작가로 돌아섰을 때 굶어죽을 줄 알고 두려워했으나, 지금은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행복하게 쓰고 있다"고 말한 그는 "비행기표 값이 마련되면 언제든 독일로 다시 갈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독일은 제3세계 작가라는 사실을 차갑게 인식하며, 고독하게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정신적 망명지인지도 모른다.
http://blog.yonhapnews.co.kr/chuuki
ckchung@yna.co.kr (끝) 연합뉴스
2004.11.4. [배수아] '해방'에 관한 한 오해
배수아·소설가·독일 체류
오늘날 여자라는 성은 마이너리티에 속하는가? 차별을 금하는 여러가지 법률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맞을 것이다. 마이너리티가 아니라면 굳이 정책적인 보호가 필요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독일에 올 때만 해도 나는 여자를 희생자로 삼는 일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없거나 아주 드물 거라고 생각했다. 상습적인 가정폭력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심리적으로 나약한 여자나, 직장에서의 여자들의 유리 천장이나, 남자들보다 불리하게 대접받는다고 불만을 품고 있는 여자들이나, 소위 해방된 여자들이란 모두 다 정신이 이상하면서 다리 털도 면도하지 않고 게다가 매력까지 없는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나, 정리해고 우선순위에 여자들이 일단 거론되거나 하는 등….
그런데 그 생각은 모두 틀린것 같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알게되었던 사람중의 하나가 프랑스에서 온 애니메이션 작가 마띨다였는데 딸이 하나있었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파리에 살 때 딸의 아버지인 전 남편이 자신에게 폭력을 휘둘러 정부가 운영하는 긴급피난시설로 도망갔던 적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었다.
우리들이 흔히 쓰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도 물론 있지만 이곳에는 비슷한 의미로 ‘에만쩨’라는 말이 더 흔하게 쓰인다. 번역하자면 가부장적 권위나 사회적 관습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으로 원래는 여자에게만 해당하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내 인상에 의하면 에만쩨란 페미니스트보다는 좀더 개인적이고 자주적으로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는 의미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듯하다.
나는 1979년 동독에서 여성들의 인터뷰를 모아 출판한 책을 읽은적이 있는데(그 책의 이름은 안녕 예쁜이 Guten morgen, du Sch ne, 이고 저자는 막시 반더Maxie Wander 이다) 거기서 십대 소녀들이 자연스럽게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해방’되는 것을 자의식의 성장의 필수적인 한 단계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동독이 어쨌든 인간의 개성과 자유가 억압당했던 독재 치하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지만, 내가 만나본 대개의 동독 출신(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이전에 동독에서 교육을 받은) 여자들은 자신이 에만쩨, 해방된 여자라는 점을 더 강하게 자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여자들이 직업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아주 높이 평가하고 적어도 자신들이나 그 어머니들이 ‘원하지 않는 전업주부’가 되지 않았던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이들은 과거 동독의 사회탁아 시스템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양적으로 완벽해서 경제적 에만쩨들을 다량 양산한 것과. 성별의 차이없이 정부가 배치한 대로 그녀들이 수행해야 했던 일자리들 -과거에는 남자들의 전용이라고 여겨졌던-이 그녀들에게 남성과 동등하게 일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해 준 것은 맞지만 그것이 그녀들의 여성성을 박탈한 효과도 있으며 만일 그녀들이 자유롭게 원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상황이 조금 더 달라졌으리라고 보기도 한다.
사람의 심리란 다들 비슷한지라 당연히 이곳 보통 남자들도 ‘해방된 여자’를 썩 좋게 생각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보기에 이미 유럽의 여자들은 원하는 바를 충분히 다 이루었는데도 자꾸만 사소한 일을 가지고 싸우려 든다는 것이 한 이유이고, 다른 이유는 어리석게도 그러느라 자신들의 여성적인 이모션을 잃게되는 것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해방된 여자,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편견은 이곳에도 있어서 “그녀는 무척 사나워. 남자를 때리기도 하거든. 그녀는 에만쩨야” 하고 말하는 멍청한 사람들도 있다. 게다가 에만쩨를 좋아하는 남자들은 모두 어린 아이같이 나약한 남자들일거라는 선입견도 한몫하고 있다.
거기에 비하면 여자들은 좀 달라보인다. 나는 한국에서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여자들을 아직 만난적이 없다. 물론 내 교제범위가 협소한 탓도 있고 여자들 스스로도 편협한 이미지와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 데다가 또한 페미니스트가 정확히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곳에서 만난 여자들은, 남자들에 의해서 종종 폄하되는 단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에만쩨임을 당당히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가 얼마나 거창하게 명명되는냐 하는 문제는, 사실 정말로 그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점보다 더 중요할 리가 없다. 또한 단지 여자 혹은 남자라는 이유로 모두가 같은 입장, 같은 견해를 지지할 수 밖에 없다는 집체적인 생각도 완성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합리적인 이성이 손을 들어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에만쩨라는 단어가 갖는 진짜 힘은 귄위나 관습에서 ‘해방’된다는 문제가 성별을 떠나 많은 자유로운 이성을 가진 인간들이 추구할 수 있는 이상이라는데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에 몰두하는 건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훨씬 더 많다는 점이 (혹은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점이) 좀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2004.8.15
장편 '독학자' 낸 소설가 배수아 고요하고 고독한 상아탑으로의 초대 뚜렷한 서사 등 이전작품과 대조 "완성 향한 도정이란 점에서 내 작품 습작"
소설가 배수아(39)의 작품을 논할 때 대체로 얹히는 수사가 몇 있다. ‘낯섦’도 단골 목록 첫 머리에 놓이는 단어다. 그 낯섦은 당대의 기성문학에 대한 낯섦이고, 소설 문장으로서의 낯섦이다. 더러 그녀의 이력(이학을 전공했고, 3년 전까지 병무청 공무원이었다)의 낯섦도 내포된다. 1993년에 등단했으니 그 범주화의 세월이 10년이 넘었다.
그런 그녀가 ‘독학자’(열림원 발행)라는 소설을 냈는데, 이번에는 이 소설이 낯설다. 기존 작품들과 대비할 때 그렇다는 의미인데, 일단 서사가 뚜렷하고 플롯이 평이하고 등장 인물들의 어법도 상대적으로 상식적이다.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클래식’해서 그렇단다. “고전적 의미에서 작가와 주인공의 가치관적 일체감을 살린 첫 작품”이라고 했다.
주인공 ‘그’는 87년 대학생이 된 19세 청년이다. 그가 선험적으로 아는 대학은 ‘정신만을 위한, 정신 자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지상의 유일한 장소’. 하지만 현실의 대학은 ‘언제나 숨이 막힌’다. 교수들은 유치찬란하고, 강의는 경악할 정도다.
학생들? 설익은 진보정치이념과 근거없는 도덕적 우월의식으로 무장한 채 획일과 이분화를 강요하거나, 그 폭력적 가치관에 부화뇌동하는 속악한 무리에 불과하다.
거기서 그는 꽤 높은 정신세계를 구현한 듯한, 분신같은 친구 S를 만나 정신적 교감을 나눈다. 하지만 S가 한 여학생을 짝사랑하게 되면서, 그는 ‘궁극적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 대학을 떠난다. 대신 자신만의 ‘대학’, ‘마흔 살까지 삶을 유지하기 위한 극히 소박하고 낮은 수준의 단순육체노동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혼자 책을 읽으며 공부할 수 있는’ 그런 대학을 선택한다.
‘모든 대화의 끝에는 불쾌한 후회와 침울이 쌓여간다’고 여기는 그에게 자신의 대학은 ‘구술언어가 없는’ 철저히 고요하고 고독한 정신세계다. 그는 ‘신과의 절대적 교감을 위해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를 향해 홀로 걸어 들어간 최초의 은둔수사 성 안토니우스’의 삶을 지향한다.
‘사막에서 혼자살기’는 작가의 지향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인간 보편의 갈망 아닌가요?” 그 꿈은 하지만, 실현할 수 없는 몽상이기 쉽다. 그녀의 말처럼 ‘계몽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 용서되는 소설이니까’. ‘독학자’는 중독성 있지만 그 위험을 감수해도 좋을 만큼 미미한, 마약 같은 소설이다.
● 인터뷰
그녀는 인터뷰를 극도로 기피한다. “언어를 다스리지 못함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언어의 다스림이란 뒤집어 들으면 ‘대화의 처세’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는 작가로서의 그간의 밑천을 드러낼 만큼 솔직했다. 작품들에 얹혀진 몇몇 ‘혐의’들에 대해서도 오롯이 옮기지 못할 만큼.
_‘낯섦’의 원인이 뭐였을까요.
“독일 가기 1년 전(2000년)에 친구가 ‘문장강화(이태준 저)’라는 책을 선물했어요. ‘문장공부 좀 하라’는 거죠. 그 전까지는 글쓰기에도 훈련이라는 게 있다는 걸 몰랐고, 우리 소설도 거의 안 읽었어요. 데뷔 전까지의 문학독서 편력이라면 80년대 이전에 나온, 세로쓰기로 조악하게 번역된 세계문학전집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죠. 문어체 어투야 제 취향이라 그런 거고, 번역문체라는 지적은 그 영향인가 싶어요.”
_이번 소설은 좀 다른데.
“직장 그만두고 독일로 공부하러 가면서부터 제대로 된 ‘생각’이 가능해졌어요. 그렇게 보면 이전 작품은 작가로서의 확신 없이 쓴 미완성의 습작인 셈이죠. 하지만 뭐 어때요. 작가는 자신의 글을 공부하는 사람이고, 항상 완성을 향한 도정에 있다는 점에서 오십보백보 아닌가요. 이번 소설은 상대적으로 즐겁고 편하게 썼지만, 뒷날 달라진 문장의 기준으로 보면 역시 습작처럼 느껴지겠죠.”
_그러고 보니 ‘이바나(2002년)’부터 변화의 징후가 보였던 것 같습니다.
“독일어 공부가 글쓰기에 영향을 줘요. 독일어는 우리말과 달라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머리 속에서 논리적으로 가공이 돼요. 그런 훈련이 제 소설의 문장과 상호작용을 한다는 걸 느껴요. 이전에는 글 쓰면서 독자의 입장까지 염두에 두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 기술을 어느 정도 터득한 것 같기도 해요.”
_소설에서 ‘그’는 80년대 중ㆍ후반 학생운동에 대해 과도하다 싶을 만치 가혹하게 냉소하고 비판합니다.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소설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는 당시 한 몽상적 청년의 내면적 성숙과정이었어요. ‘그’는 현실감각이 희박한, 지나친 이상주의자잖아요. 어느 사회에 던져 놔도 극단적으로 부딪쳤을 겁니다. 모르긴 해도, 그가 마흔이 돼서 사회에 나오더라도, 달라진 사회에 대해 비판하고 냉소할 걸요.”
웜건 : 사진 기자님은 한시간 후에 도착할거예요. 배수아 : 사진 찍는 거라면 저 안 할래요
웜건 : 네? (아뿔싸!) 사진 싫어하세요? 배수아 : 네, 사진 싫어해요. 사진 찍어야 되는 거면 정말 안 할거예요.
배수아는 차분하게, 그러나 나를 위협하듯 말했다. 휴, 처음부터 꼬이는군.
그녀는 사진 찍히기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부류에 속했다. 그런 그녀를 인터뷰라는 죄목으로, 굳이 사각의 틀 안에 가두어도 좋을까? 나 또한 카메라 렌즈 알레르기를 앓고 있다. 뭔가 불안하면서도 그녀를 설득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요즘 출판사들은 작가의 프로필 사진에 꽤나 정성을 들인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배수아의 얼굴이란 그렇게 만들어진 사진의 하나일 것이다. 그녀에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분명 인상적이다. 그녀의 생김새가 궁금하다면, 역시 그녀의 소설집 표지를 찾아 보라. 거기에 그녀와 닮은 얼굴 하나가 있다.
배수아 : 전 별로 말이 없어요. 듣는 걸 더 좋아하죠. 그래서 사람 만나서 인터뷰하는 거 잘 못해요. 차라리 E-mail로 오고가는 서면 인터뷰가 저한텐 오히려 편하죠.
웜건 : 서면 인터뷰가 편할 때도 있지만, 직접 만나 느끼는 표정이나 인상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배수아 : 그래요.
웜건 : 뭐, 부담 없이 대화를 나누었으면 하는데.
맥주와 두부김치 혹은 소주와 과일안주처럼, 그녀는 어딘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한 두 개의 직종에 종사한다. 그녀는 병무청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면서 동시에 소설가다. 공무원은 8년차고 소설가는 7년차다. 그녀는 그러니까 7년 째 두 가지 직업을 병행해온 셈이다. 공무원으로서는 말단을 벗어날 수 없으며 소설가라는 직함은 어딘지 공식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다.
웜건 : 전에 투잡(two-job)에 관련된 글을 쓰셨죠? 배수아씨는 소설가와 공무원이라는 두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데, 오늘은 소설가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그리고 투잡이라는 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싶은데요
배수아가 다시 고개를 숙인다. 눈을 내리깐 그녀가 입을 다문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답답한 채로 흐른다.
배수아 : 제일 하기 싫어하는 얘긴데... 웜건 : (헉!)
나는 공무원 배수아와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오늘 소설가 배수아에게 또 다른 수식어를 덧붙일려고 나온 건 아니다. 그런 건 이미 있을 만큼 있고, 내가 아니라도 그러고 싶은 이들 또한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마디에 보기 좋게 거부당했다. 인터뷰의 엉큼한 속내쯤이야 이미 알고 있다는 눈치다. 아뿔싸! 진짜 꼬이네.
웜건 : 점심 전이죠?
원래 이 자리는 내 선배가 점심을 사는 자리였다. 낯을 가릴 것 같은 배수아와의 인터뷰를 자연스럽게 하려고 선배의 도움을 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늘 배반하는 법! 선배는 오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점심까지 내게 떠넘겼다.
배수아 : 네, 근데 어쩌죠? 인터뷰 시간이 점심 먹는 시간 정도 밖에 안 날 것 같은데. 웜건 : 인터뷰야 한두 시간 정도 얘기 나누면 되는 걸요. 바쁘신가 보죠?
배수아 : 아니요. 어제 집에서 있으면서 일을 마쳐야 했었는데. 하루종일 잤어요. 그전 날 밤새 놀았거든요. 밤을 샌 다음 날은 꼭 하루종일 자야 되요.
그녀는 잠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만큼 많이 잔다. 그래서 잠을 자지 않거나 자지 못한 다음날은 어김없이 하루종일 잠을 잔다. 잘 수 있는 여건이 안되면 하루종일 비몽사몽 한다. 수면 부족은 아무튼 그녀에게 치명적이다. 잠이 그녀를 원하듯 그녀 또한 잠이 여러 가지로 요긴하다. 그녀 또한 세상사는 모든 사람들처럼, 가끔씩 지독하게 우울하다. 그럴 땐 초점 잃은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앞을 바라보는 대신, 수면제를 먹는다. 그러므로 수면은 그녀에게 마치 구급 약상자와도 같다.
웜건 : 일이 많은가 보죠? 배수아 : 항상 그렇죠, 뭐. 내일까지 제출해야 돼서요. 어제 일을 다 끝내고 오늘은 여유 있게 쉴 작정이었는데. 저녁엔 또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일을 해두려고요. 일이란 게 다 그렇죠. 사람 사정 봐주나요.
물론 그렇다. 일에는 언제나 마감이 따르는 법이고 그와 함께 스트레스도 따라 붙는다. 그것들은 마치 큼지막한 입으로 컹컹대는 사냥개 마냥 저 앞에서 일하는 자를 감시한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더구나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란 더욱 간단치 않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2. 여권 속의 그녀
그 근처에는 아는 곳이 없단다. 스파게티를 좋아하냐고 물어본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에 주차된 자기 차로 근교에 나가자고 제안했다. 싫을 게 없었다. 그녀와 나란히 걷는다.
웜건 : 일산에서 사신 지 꽤 되었나요? 혼자 사시죠? 배수아 : 3년 정도 됐죠. 혼자 산 지는 10년 정도 되었나? 직장이 김포에 있어요. 김포공항이요. 서울에 있을 필요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직장이랑 가까운 이곳으로 이사왔죠.
국제선을 타본 적이 있는 대한민국의 예비역 남자들이라면 혹시 배수아의 싸인과 도장을 받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여권의 '출국확인 제외대상', 그러니까 '군복무필자 확인란'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웜건 : 집은 맘에 드나요? 배수아 : (웃으며) 너무 좁아요. 어차피 전세고 혼자 사니까 언제든지 지도 펴놓고 이사갈 궁리는 할 수 있죠. 그리고 이 곳에 처음 이사와서 좀 황당했어요. 전 공중파는 거의 안보고 케이블 TV를 주로 보는데 안 나오더라고요.
웜건 : 케이블 TV요? 배수아 : 네, 집에 있으면 TV나 음악을 켜놓거든요. 다큐멘터리 전문 채널 있죠? 아니면 음악 채널을 보죠.
웜건 : 배수아씨 소설 중에 "다큐채널, 수요, 자정"이라고 기억나네요. 혼자 사신 지 꽤 오래되었는데, 싫증나진 않나요? 배수아 : 독립하면 자유가 생기죠. 대신 많은 중요한 문제를 혼자 결정해야 되는 어려움이 생기죠. 그래도 그 편이 아직까진 편해요. (웃으며) 그리고 지금은 삼돌이가 있어요.
웜건 : 삼돌이요? 배수아 : 이름이 너무 촌스럽죠. 아주 커다란 똥개예요. 한 달 전에 전주인한테 인계 받은 건데, 개가 전혀 애교가 없어요. 저도 그리 귀여워하는 편도 아니고 해서 서로 멀뚱하게 쳐다보고 지내요.
이제 그녀는 운전을 하고 있다. 다시 찔러 본다.
웜건 : 투잡에 관해 쓰셨던 글은 꽤 재밌게 읽었는데요. 배수아 : 그 글 읽었어요? 글쎄요, (웃으며) 뭐라고 해야되나. 그땐 좀 잘난 척하는 기분으로 썼던 것 같은데요.
웜건 : 요즘 보면 하나의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투잡족이 늘어가고 있는데요. 배수아씨는 자신의 투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죠?
공무원 배수아가 또 다시 침묵한다. 그리고 나도 말없이, 그녀가 말하길 기다린다.
배수아 : 오죽하면 투잡을 하겠어요. 모든 이의 꿈은 노잡, 그러니까 백수 아닌가요. 전 보다시피 (활짝 웃으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녀 가장이라고요. 소설만 써서 살아갈 순 없쟎아요.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다른 일을 해야만 되는 거죠.
너무 싱겁지 않은가?
배수아 : 어떤 사람은 저한테 카프카 흉내내는 것 아니냐고도 하죠. 웜건 : 저희가 인터뷰한 백민석씨는 월수입이 50만원 정도 된다고 하던데, 그리고 전에 하성란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샐러리맨 월급 정도는 간신히 된다고 하더라고요. 배수아씨는 어떠세요?
배수아 : 그래요? 어떻게 계산이 되나보죠. 저는 전혀 계산이 안 나오던데. 모든 작가들이 저랑 같진 않겠죠.
아무튼 그녀는 소설가로서 비평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그녀를 둘러싼 비평적 미사여구와 수식어를 보건대, 그녀는 아마도 현재 한국 문단에서 꽤 괜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나 보다. 여기서 난, 그녀의 소설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녀 또한 자신의 소설과 라이프 스타일은 별개라고 했다.
웜건 : 아까 카프카 얘기도 나왔지만, 배수아씨가 특이한 건 두 가지 직업 중 하나가 공무원이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배수아 : 뭐, 제가 두 몫을 해내는 것이 두드려진다는 건 인정하지만,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가정 주부인 여성작가들도 충분히 어려운 두 몫을 해내고 있잖아요.
문인들에게 양다리는 그리 낯설고 이례적인 게 아니다. 하지만 두 가지 직종에 양다리를 걸친 문인들 중에서도 유독 그녀는 공무원이다. 그건 참으로 색다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위대한 상식에 따르자면, 소설가가 지닐 법한 직업이란 교수나 출판사 직원 또는 번역가, 그 주변이기 때문이다.
이런 걸 묻는 게 그녀는 귀찮다. 별 달리 할 말이 없어서란다. 그녀는 적당한 직업을 갖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봤고, 시험에 붙었으니 공무원이 됐을 뿐이란다. 시험에 붙자, 주위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그게 얼마나 갈까, 하고. 그러나 그녀는 모든 예상을 뒤엎고 지금까지, 그러니까 무려 8년이나 그 생활을 유지했다.
그녀가 소설가란 직업을 갖게 된 것도 그리 대단한 목적의식이 있었던 건 아닌 듯 하다. 그냥 끄적거린 글을 처음 접한 계간지에 보낸 게 그녀가 등단하게 된 내막의 전부다. 그녀는, 자신이 무지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3. 배수아를 닮은 배수아
백마, 예전에 화사랑이 있던 곳. 그녀는 지금은 그럴싸한 음식점들만 가득 들어차 있어 정이 가진 않는다고 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곳에서, 그녀와 나는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는다.
웜건 : 공무원 생활은 어때요? 배수아 : 그리 재미난 일은 아니죠. 틀이 짜여진 일이기 때문에 글을 쓰는데 도움이 안되는 면도 있죠. 지금 제가 일하는 사무실에는 창이 없어요.
웜건 : 건물 한복판에 있나요? 배수아 : 아무튼, 밖에 비가 오는지 눈이 내리는지 친구한테 연락이라도 오지 않으면 알 수가 없죠. 격일제로 일하거든요. 사무실에 있는 날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잘 몰라요.
웜건 : 문단 생활은 어때요? 배수아 : 글쎄요. 처음에 등단하고 낯선 문단 생활에 신기하고 정신 없어 했는데, 지금이야 다 똑같죠. 사람 사는 모습이 다 엇비슷하잖아요. 어떨 때 문단이란 곳이 더 인간적이지 않아 보일 때도 있죠, 뭐.
웜건 : 저는 직장 생활을 꽤나 힘겨워 하는 편이죠. 그래서 몇 년씩 직장을 다닌 사람들을 보면 좀 경이롭기까지 하거든요. 배수아 : 평생 다니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물론 직장을 다니다 보면 포기해야 될 것들이 많죠.
웜건 : 가령 어떤 것들이요? 배수아 : 여행과 잠적. 두가지 일을 하려면 먼 여행은 가급적 피하죠. 훌쩍 떠나는 일은 상상조차 어렵죠. 그리고 제 직장 전화번호가 노출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잠적은 절대 불가능해요. 직장 전화를 안 받을 순 없잖아요.
웜건 : 다른 직업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나요?
공무원 배수아, 다시 정색을 한다.
배수아 : 전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제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지금 직장 일이고, 저의 유일한 취미가 글쓰기이기 때문에 직장을 다니고 글을 쓸 뿐이에요. 물론 지금 직장 다는 것이 힘이 들고 고민스럽긴 하지만요.
직장과 취미. 아까부터 그랬지만, 그녀의 대답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웜건 : 먼 여행이 힘들다면 주로 어디로 놀러 가죠? 배수아 : 온천.
웜건 : 네? 온천이요? 배수아 : 좀 우습죠? 나이 많은 아줌마 같이. 하지만 노천욕은 정말 좋아요. 마침 비가 오거나 눈이라도 내리면 정말 기분이 좋아지죠.
그녀는 호러 무비를 무지 좋아하지만, 남들이 즐기는 결정적인 장면은 겁이 많아 전혀 보지 못한다. 공중파보다 케이블 TV가 더 좋은 그녀는 다큐채널과 음악채널을 주로 즐긴다. 번쩍이는 옷과 목소리 큰 사람은 끔찍이 싫다.
가끔 멀뚱하게 자기를 쳐다보는 삼돌이와 함께 직장 생활에 대해 고민하기도 한다. 혼자 산 지 꽤 오래된 그녀는 앞으로도 결혼 계획이 없다.
30대 중반의 독신녀 그녀는 누구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짊어진 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리고 소설을 쓴다. 내가 본 공무원 배수아는 그렇다. 그것이 진정한 배수아의 모습이라고는 장담할 순 없다. 그녀가 소설가 배수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더 더욱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