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변인의 딜레마
가출한 아들이 안방에 앉아있는 아버지에게 애증의 감정을 표하듯이,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자들은 ‘중심’에 대해 양가감정을 품는다. 그들에게 중심은 냉소의 표적이면서 극복해야할 무엇이고, 증오하는 동시에 욕망을 품으며 그리워하는 대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된 감정으로 인해 주변인(marginal man)의 정체는 불완전한 양상을 보이고, 그들은 안과 바깥이 얽힌 구도에서 어느 한 곳에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그들은 내심 주류에 편입되길 원하는가 하면, 짐짓 그것을 거부하는 몸짓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새 중심의 경계 안에 들어가 있는가 하면, 곧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거나 밀려나기도 한다. 만약 누군가가 중심에 대한 애증과 긴장이 없이 독야청청 한다면 그의 존재는 중심과 주변에 관한 논의에서 제외된다. 독립영화와 같은 개념이 그렇듯이, 주변은 중심에 대해 상대적으로 정의되는 개념이고, 주변은 결코 중심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거대한 자본과 대중들 주변에서 적은 예산으로 지속적인 작업을 해 온 김기덕은 앞서 언급한 주변인으로서의 성격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 굳이 덧붙일 것이 있다면, 그는 자신이 숙명적으로 중심 밖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뚜렷하게 자각하고는 자신의 거처를 유목민들이 머무르는 곳에 ‘고정’시켜, 주변인으로서의 정체를 명확히 표시하는 동시에 주변인의 성격을 부분적으로 배반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더 넓은 화면으로 보면 그는 결국 중심부에서 뻗어 나온 자기장으로부터 의연하지 못한, 영락없는 주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기덕은 그리 길지 않은 기간동안 다섯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이 다섯 편은 관객들의 큰 호응 얻지도, 뚜렷한 비평적 합의를 이끌어내지도 못했다. 가장 최근에 개봉한 <실제상황>은 일주일만에 간판을 내렸고, 그나마 호평을 받은 <섬>도 여러 가지 이유로 비평가들의 공격에 시달리거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영화들처럼 감독의 육체가 프레임 안에 가득히 들어앉은 영화는 흔치 않다. 그의 영화가 유지하는 비교적 일관된 입장은 영화 속 인물들이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부터 좀처럼 자유롭지 못함을 거꾸로 의미한다. 더구나 그가 의도적으로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 굳은 표정을 지어 보일 때보다, 무의식중에 어떤 습성이 저절로 노출될 때 감독의 입장이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것은 더욱 의미있다. 덕분에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는 감독의 지문을 채취할 수 있고, 그의 영화적 제스처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영화 속의 인물들이 맺는 관계가 감독과 관객, 그리고 감독과 주류영화의 구도와 유비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2. 나르시시즘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 또는 밑바닥까지 내려간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자기 자신, 더 정확히는 자신의 살덩어리이다. 그들에게 모든 사회적·정치적 관계는 박탈과 배제를 의미하고, 그것은 자기모멸감을 확대하거나 타인에 대한 혐오를 증폭시킨다. 그들은 발뒤꿈치를 들고 자기장의 중심을 훔쳐보며 그곳과 이곳 사이에 놓인 심연과 경사를 발견하는 것이다. <악어>에서 강변에 세워진 차 속에서 나누는 정사를 훔쳐보며 자위행위를 하는 용패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에게 우선 급한 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불쾌함과 결핍을 해소하는 일이다. 이들은 몸에 뚫린 구멍을 자신만이 메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자기를 기만하거나 외부세계에 폭력을 가하면서 자기 몸의 빈곳을 채우는데 에너지를 집중한다. 김기덕의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자신의 몸뚱아리에 그런 식으로 집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영화적인 제스처에도, 감독의 ‘정치적인’ 입장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프로이트의 비유를 빌면, 이들은 위족(僞足)을 몸 안으로 넣어 공처럼 몸을 둥글게 만든 원형질 생물과 같다. 이러한 모양새로 인해 자연히 다른 이들과의 대화는 차단된다. 그래서 인물들은 자의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화법으로 스스로에게 말을 건넬 뿐이다. 그의 영화는 이렇게 내가 남의 말을 듣지 못한다는 사실, 또 나의 언어가 저쪽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그의 영화에서 들리는 사람의 음성은 전반적으로 <야생동물보호구역>의 프랑스어처럼 주인공의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언어이다. 심지어 주인공을 향한 대사마저도 종종 주인공과 관객의 귓전에서 맴돌다 미약한 잔상을 남기며 사라지곤 한다. 인물들 사이에 말이 오가는 순간에도 그들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악어>에서 자살을 기도했던 여인에게 주인공인 용패가 다그치는 말들은 그녀에게 무게있는 의미로 번역되지 않는다. 용패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말들에 별 다른 반응 없이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일방적으로 행동한다.
<파란대문>의 창녀는 악어에 등장했던 그 여인을 극의 중심에 세워 다시 등장시킨 인물인데, 이번에도 창녀는 침묵한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여러 가지 수모들을, 그녀는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바꾸어 삼켜낸다. 또 <야생동물보호구역>에 등장하는 북한청년 홍산과 <섬>의 몸을 파는 여인은 문자 그대로 직접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거나 대화를 완전히 거부하고 있다. <실제상황>에서도 주인공은 헤드폰을 통해 전화 목소리를 엿들을 뿐 입을 통 열지 않는다.
이들이 입을 닫고 웅크려있는 공간은 소통이 불필요한 공간인 동시에 외부와의 대화가 차단된 공간이다. <악어>의 물 속과 한강 다리 밑, <야생동물보호구역>의 이방인들로 둘러싸인 파리, <파란대문>의 외딴 바다와 그곳에 위치한 새장 여인숙, <섬>의 강물과 낚시터 등은 모두 원형질 생물의 몸 속과도 같은 공간이다. 이곳에서 주변인의 계급은 중화되고 무효화된다. 그리고 그곳들은 동물적인 성향을 억누르지 않고도 ‘야생동물’이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도피처이다. 이러한 공간 설정이 때로는 도식적인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프레임을 채우는 이 고립된 공간에서 본능적인 결이 만져진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공간의 의미가 추상적으로 굳어버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체화되어 숨을 쉬게 된 데에는, 동물적인 본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인물들의 생동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편, 이렇게 몸 속으로 웅크리는 정서에는 타인의 언어가 축축한 욕망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이 숨어있다. <섬>의 낚시터에 찾아 온 낚시꾼들의 언어에서 여인은 미지근한 욕망의 온도를 감지하고는 귀를 막는다. 그리고 단역에 불과한 낚시꾼들의 대화는 비교적 큰 볼륨으로 들리는데, 그것은 주인공들의 침묵 때문에 비워지는 여백을 채우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축축한 욕망의 파동을 빼놓으면 그들의 음성은 관객에게도 별 다른 무게 없이 지나쳐 흘러간다. 입을 열지 않는 인물들은 ‘서울’에서 온 그들이 내뱉는 욕망의 표준어와 자신의 순진한 동물적 신호로는 소통이 불가능함을 진작에 깨닫고 체념한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도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목적으로 자신의 몸에 애증이 얽힌 집착을 보이면서 응축된 욕망을 쏟아낸다.
3. 공격성
이처럼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에 부딪혀 자기 몸 속으로 숨은 인물들은, 본능적으로 타인에 대해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나르시시즘은 공격성을 동반하고 때로는 자기파괴적인 성향으로 이어지는데, 김기덕의 인물들은 이러한 나르시시즘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모델에 고스란히 수렴된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나누는 섹스는 결코 ‘나뉘어지지’는 않는다. 이들의 섹스는 단지 소통의 부재로 인한 자위행위이자, 달려드는 남성(또는 여성)의 공격성에 근거한 교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공격성은 인물들의 욕망이 뿌리깊게 좌절되면서 이루어진 퇴행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 좌절은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나, 파리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파리지엥(Parisien)들과 얼굴을 마주할 때의 박탈감에서 연유한다.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밑바닥’을 확인한 인물들은 박탈감을 안겨준 이들이 자신을 여기까지 밀어 낸 것이라고 의도적으로 오해하며 공격성을 작동시킨다. 그래서 <실제상황>에서 연극 무대 위에 앉아있던 주인공 내면의 자아는 “고통을 준 놈들은 그 일을 잊고 태연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억울함과 분노를 토로한다. 그리고는 한 명씩 그들을 살해하는 한 편, 콘돔이 찢어지도록 자신의 성기와 ‘적들’이 투사된 파트너를 학대하거나, 냉동고에서 꺼낸 생선으로 침대 위에 누워있는 여인을 구타(<야생동물보호구역>)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김기덕의 영화에서 습관처럼 행해지는 공격적인 폭력은, 흔히 사용하는 언어로, 억눌린 자아의 자유와 해방, 조금 과장하면 자기구원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의도와 결과는 아벨 페라라나 마틴 스콜세지 등의 영화에서 행해지는 것과 전혀 다르다. 김기덕의 폭력은 선과 악이 그 안에서 뒤엉켜 고양되지도, 역설적인 화법을 취하지도, 아이러니를 낳지도 않는다. 단지 주변인으로서 저 중심에 대해 품는 욕망이 살덩어리 속에 숨어 있다가 특정한 자극이 가해질 때마다 조건반사로 터져 나올 뿐이다. 이 폭력에는 어떠한 명분도 없다. 굳이 의미를 찾는다면 <실제상황>에서 주인공의 분신이 외치는 고언에 따라 ‘자신에게 솔직해진다’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스스로 약자라고 미리 규정짓고, 세상을 향해 억울하다고 외치는 열패감이 숨어있다. <실제상황>에서는 이러한 공격성의 역설, 즉 약한 자와 콤플렉스를 안고 사는 자만이 오히려 공격성을 품고 달려든다는 본능적인 기제에 대해 자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후반부, 정육점 주인을 죽인 주인공은 갑자기 “그만 찍으라”며 카메라를 들고 쫓아다니던 소녀를 벽돌로 살해한다. 그리고는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따뜻한 색조의 화실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는 여인이 내는 빛을 쬔다.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느꼈는지 다시 공원으로 돌아가 무덤덤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솔직하라던, 그것이 너를 자유케 하리라고 외치던 내면의 악, 그리고 복수심에 찬 그 분신으로 자신을 인도했던 소녀를 죽이고, 빛을 품은 여인에게로 가서 자신의 어두운 몸을 씻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론은 영화의 마지막에 잠깐, 필연적인 계기를 마련하지 않은 채 제시된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결론은 우리에게 단지 차가운 언어로만 이해될 뿐 좀처럼 공감을 얻지는 못한다. 영화를 지배하는 정서는 주인공을 연기하는 주진모의 복수심과 분노에 찬 눈매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4. 주인과 노예
자웅동체도 원형질 동물도 아닌 인물들은 몸을 웅크려 도피하거나 상대를 공격하는 방식으로도 자신이 느끼는 불만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그리고 영화에서처럼 적은 예산으로 몸을 웅크려 영화를 만들며 ‘저들’의 묵시적인 금기를 위반하던 감독은, 끝내 자신의 영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못 견뎌한다). 결국 그들의 원초적인 나르시시즘은 지배를 향한 적극적인 욕망으로 ‘양성화’된다. 이제 누군가가 필요해졌지만 저 자기장의 중심을 차지한 이들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그들은 쥐지 못했다. 이때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누군가를 사슬로 묶어 곁에 두는 일이다. 그래서 <악어>의 용패는 자살하려는 여인을 구해 다리 밑에 가두고, <섬>에서 몸을 파는 여인은 그곳으로 도피해온 남자를 낚시터에 묶어둔다. 이처럼 가두어 지배하려는 욕구는 도피 본능과 공격성의 변증법이다. ‘저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저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실은 저들과 접촉하기 위해 취한 마지막 방도인 것이다.
그런데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한 주인이 되기를 기도하는 이들의 기도는 항상 실패로 돌아간다. 주인-노예의 관계는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역전되는 양상을 보인다. 지배에의 욕망을 품은 인물들은, 철창 밖에서 내내 지켜야 하기 때문에 거꾸로 죄수에게 자유를 빼앗기는 간수처럼, 자신이 노예에게 채운 수갑 때문에 점점 끌려다니게 된다. <악어>의 용패는 자신이 구한 여인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지배하면서도 그녀의 마음을 뺐지 못하여 안달하게 되고, 결국은 그녀가 과거에 사랑했던 남자마저 납치하기에 이른다. <섬>에서는 이러한 지배-종속의 관계가 얽혀 상호적이고 중층적인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그 관계 역시 두 번 역전된다. 낚시터로 도망쳐 온 남자는 낚시터 여인의 몸을 탐하지만 실패한다. 결국은 그녀를 손에 넣게 되나 자신이 그녀의 집착에 의해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로부터 도망치려고 한다. 반면 낚시터에서 몸을 파는 여인은 처음부터 그에게 마음을 품었지만 그가 원하는 방식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질투와 욕망에 못 이겨 결국 그에게로 다가가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며 그를 가두어 둔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를 가둔 철창에 거꾸로 갇혀 그에게 집착하게 된다. 이처럼 모든 경우에 결박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좌절감과 결핍의 정도는 오히려 심해진다. 이유는 처음부터 이 주인-노예의 관계가 ‘주인’의 나르시시즘을 통해 자의적이고 일방적으로 맺어진 계약이었기 때문이다. 노예는 주인에게 복종하려는 의지가 없을 뿐더러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도 없다. 노예는 주인을 의미있는 타자로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맺은 계약은 역전되고, 지배를 꾀했던 이들의 불만은 끝내 해소되지 않는다.
5. 인정과 투정
이처럼 주변인으로서 지배를 꿈꾸던 이들의 시도는 그 자의성 때문에 거꾸로 노예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게 모든 전복의 시도가 불발로 끝나자 감독과 영화 속의 인물들은 투정을 부리기 시작한다. <실제상황>의 주인공인 길거리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무시하며 찢어버리는 여인을 화장실까지 쫓아가 데생 연필로 찍어 살해한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그린 초상화가 실제 인물이랑 별로 안 닮았다는 등의 험담을 늘어놓으며 자신을 착취하는 사진 스튜디오 주인을 재떨이로 내리친다. 이렇게 다시 자신의 몸에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이나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이들을 공격하게 된다. 내 몸의 근육들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니, 대신 화살을 돌려 저들을 눈앞에서 지워내면 부자연스러운 몸으로부터 심리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정투쟁’의 배경에는 자기현시의 욕망이 숨어있다. 나르시시즘의 일부이기도 한 자기현시는, 정확히 말해 어떤 이상적인 이미지를 머리 속에서 미리 고정시키고 그렇게 보이기를 의도하여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김기덕의 영화에는 중요한 의미나 뚜렷한 기능이 없는 사족들이 꽤 달려있는데, 주로 이러한 잉여적인 표현에서 우리는 자기현시의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김기덕의 영화에서 자기현시적인 표현들이 프레임 안팎에 걸쳐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파란대문>에서 창녀의 방에는 걸려있는 에곤 쉴레의 누드화는 종종 카메라에 의해 부각되는데, 그 그림은 화면 밖으로 돌출되어 보이고, 영화 속 세계의 한 구석을 차지해야 할 뚜렷한 명분을 갖지 못한다. 감독의 중요한 미장센을 의도적으로 곡해할 위험을 감수하고 이야기하자면, 그 에곤 쉴레의 그림은 동네 이발소에 걸린 방앗간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창녀가 미술학원에 다닌다는 사실도 그 누드화를 좀처럼 납득시켜주지는 못한다. 그녀의 누드화는 영화 안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관객에게 직접 전시되는 것이다.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홍산이 자르는 조르주 상드 두상 역시 이러한 자기현시적인 키취(kitsch)의 성격을 품고 있다. 이 영화에서 그 두상의 의미는 좀처럼 퍼져나가지 못하고 어떤 ‘취향’ 만을 즉각적으로 노출시킬 뿐이다. 그리고 그 취향 역시 영화의 일부를 이루지는 못하고, 따로 떨어져 ‘전시’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족들은 좀 더 직접적인 표현이나 미학적인 제스처로 제시되기도 한다. <악어>에서 등이 파란 거북이와 종이배, <파란대문>의 눈 내리는 장면, 그리고 <섬>에서의 여러 상징들에서 유사한 표정을 읽어낼 수 있다. 주로 즉각적으로 번역되는 상징이나 그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통해 노출된다. 그리고 김기덕이 미학적 자의식을 품기 시작한 <파란대문> 이후부터 이러한 성향은 더욱 짙어진다.
그런데 여기서의 자기현시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 때문에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합리화하고 사람들에서 이해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외양을 부정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영화 속의 창녀와 영화 밖의 감독은 자신의 정체가 주변부에 고착되는 것을 내심 두려워한다. 자신은 원래 촌구석 여인숙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 서울의 미술대학에 다녔어야 할 인물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여 위안하는 한편, 애써 그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부정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안정된 가치체계 속에 편입되고 싶은 마음, 즉 증오하던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에 다름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주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태연하게 내보이면서도, 한강 다리 밑을 떠나 저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양가감정’이다.
6. 악어에 관한 딜레마
김기덕이 생리적인 딜레마 앞에서 주저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의 영화와 마주치면 고민스러워진다. 우리는 그의 영화가 담고 있는 성적이고 동물적인 에너지를 거절할 수는 없지만, 의미의 폭이 좁은 상징이나 성급하게 극단으로 달려간 표현들, 그리고 거친 내러티브를 대할 때는 조금 의심스러워진다. 또한 그의 전반적인 태도에서 진정성이 엿보이긴 하지만, 투명성에 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머뭇거리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위에게 줄곧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가 주변에 정착했으면서도 저쪽을 계속 훔쳐본다는 것, 그래서 그가 자기 고유의 에너지를 포기하면서까지 완전히 소화되지 않은 몸짓을 내보이거나 그러한 표현을 관객들에게 강요한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그가 자신을 기만하든, 관객에게 진심을 숨기고 폭력을 가하든, 그의 영화가 기본적으로 지금 이 곳에서 유효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력은 그의 자유로운 에너지, 그리고 진정성 있는 표정에서 나온다는 점도 덧붙일 수 있다.
김기덕의 영화들은 습한 야생에서 자랐으면서도 인간이 사는 육지로 뛰어들기를 갈구하는 악어와 같아서 종잡을 수 없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살점과도 같은 인물들을 서툴러 보일 만큼 반복하여 등장시키는 그의 영화에서 우리는 위안 받기도 하고, 결박된 욕망으로부터 일시적으로 풀려나 자유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 시나리오를 쓰는 손가락 근육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영화들을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반가워해야 할지 모른다. 이러한 그의 영화를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섣부르게 단죄하는 일에는 조금 조심스러워질 필요가 있다. 우선 그가 지어 보이는 위악적인 표정들은, 그것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서, 처음에 새겨져 있던 악(惡)의 성격을 지우고 전혀 다른 의미를 낳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극단적이고 공격적인 표현과 유아기로 퇴행된 정서에는 분명히 우리 자신과 세상의 모습이 숨어있고, 그것이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악어의 등껍질과 같은 거친 결을 마모시키지 않으면서도 거부감 없는 화법으로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2001.06.05 / 문일평
공감의 비평을 기대하며
김기덕 감독론 응모작 당선자 발표와 심사평
2001.06.05 / 대표집필: 김영진 편집위원
FILM2.0은 <수취인불명>의 제작사인 LJ필름과 공동으로 김기덕 감독론 공모전을 주최했다. 지난 5월 14일 마감한 이번 공모전에는 모두 49편의 글이 응모작으로 도착했다. 이번 행사의 심사위원을 맡은 FILM2.0의 편집위원 김영진씨와 평론가 이효인씨는 총 응모작 49편에서 각자 5편의 후보작을 고른 다음 신중한 토론을 거쳐 최종 수상작으로 당선작 1편과 가작 3편을 결정했다.
당선작은 문일평씨의 '나르시시즘의 운명'이 정해졌으며, 가작으로는 김유석씨의 '허무적 나르시시즘의 진정성', 심윤씨의 '바다의 악어, 김기덕', 심수진씨의 '푸른 고통을 그려내는 미완의 스타일리스트' 등이 선정됐다. 이번 행사에 당선된 네 수상자는 지난 FILM2.0 주간지에 김기덕 감독과 대담을 나눴으며 따로 시사회 행사에 초대를 받았다. 네 분에게 축하를 보내며 당선작에 대한 간단한 심사평을 게재한다.
당선작 '나르시시즘의 운명' - 문일평
가작 '허무적 나르시시즘의 진정성' - 김유석
'바다의 악어, 김기덕' - 심윤
'푸른 고통을 그려내는 미완의 스타일리스트' - 심수진
심사평
전투적 제작방식으로 특이한 작품세계를 선보이는 김기덕의 영화는 마니아층에게 상당한 관심과 지지를 얻고 있다. 그의 영화는 천편일률적으로 상업화, 상투화돼가는 한국영화의 현 시점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작업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김기덕의 영화에 접근하는 시선의 획일화는 한국영화계 전반의 상투화만큼이나 심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번 김기덕 감독론 공모에 응모한 대다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제점이었다. 물의 이미지, 소통의 불가능, 반페미니즘, 소외된 주변인들의 결핍, 파괴적인 폭력 등 김기덕 영화를 거론할 때면 꼭 나오는 열쇠말은 혈기 넘치는 응모작들에서도 여전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대다수의 글이 김기덕 영화를 무시하는 기존 평단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면서도 접근방식과 분석의 깊이 면에서 기존 평단의 일반화된 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도 아쉬웠다.
이번 심사는 이런 상황에서 비교적 독창적인 시도를 해낸 글에 주목했다. 당선작 문일평씨의 '나르시시즘의 운명'은 '주변인들의 중심에 대한 애증'이라는 김기덕 영화의 보편적 분석틀을 적용하고 있지만 여기에 박탈, 결핍, 자기모멸, 공격 성향 등의 심리적 단위를 끌어들여 매우 깊이 있고 세밀한 추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김기덕의 전 작품을 찬찬히 순회하며 얻어낸 구체적인 사례와 필자의 사유를 결합시키는 방식이 유기적이며 읽기에도 편했다. 문일평씨는 자기현시와 자기부정이 공존하는 '양가 감정'을 김기덕 영화의 근본으로 결론짓고 있는데, 한 작가의 작품세계가 지닌 이중적 사고체계와 그것이 포착하고 있는 인간심리의 본래적 양가성을 탐지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문일평씨는 당장 평론가로 활동해도 좋을 건장한 필력을 지녀 이후의 글쓰기에 기대를 걸고 싶다.
가작 중 김유석씨의 '허무적 나르시시즘의 진정성' 역시 문일평씨의 글과 기본적으로 궤를 같이 한다. 그는 김기덕의 영화를 자의식과 자기애의 결과로 규정지으며 심리학적인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김기덕 영화에 흔히 적용되는 상징적 이미지의 단조로운 해석 이상의 지점까지 다다르고 있어 보기 좋다. 김유석씨가 본 김기덕 영화의 최종 도착지라 할 '궁극적인 화해와 참여의 실패' 역시 기존의 일반화된 시각에서 살짝 빗겨나 나름대로의 논리적 과정을 거쳐 도달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독창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심윤씨의 '바다의 악어, 김기덕'은 아마추어 비평가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올 수 있는 글의 형태를 띠고 있다. 심윤씨는 김기덕의 전 작품을 시간 순으로 따라가며 상당한 분량의 줄거리 요약과 이에 대한 인상평, 그리고 축약된 분석을 시도한다. 그의 태도는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겸손하다. 심윤씨는 청년 영화광으로서의 진중한 자세와 꼼꼼한 시선의 평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옹호와 비판을 비약적으로 반복하고 있으며, 김기덕의 작품세계를 규정할 분석 개념을 창출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다른 가작 '푸른 고통을 그려내는 미완의 스타일리스트'의 심수진씨는 김기덕의 영화를 '주변부의 상승욕망'이라는 화두로 풀어냈다. 자신이 던진 개념의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영화 속 사례들을 수집해가는 과정은 때로 매우 의연하다. 또한 인물들의 욕망을 김기덕의 불교적 인식과 결부시키면서 독특한 해석으로 진입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부터 심수진씨의 논리적 고리는 무너진다. 쉽사리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개념들이 산발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스스로 자기 논리에 자신이 없어 하는 흔적이 보인다. 글의 후반부가 은유와 상징, 반페미니즘 같은 김기덕 영화의 전형적인 시선 속에 파묻히며 필자 자신도 말미에 인정하듯 평이한 글로 매듭지어지고 만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허무적 나르시시즘의 진정성
김기덕 감독론 가작
2001.06.05 / 김유석
<섬>(99)은 위악적인 제스처로 곤혹스런 장면들을 전해준다. 남녀를 옭아매는 미늘의 수사학이나 저수지 여인의 마지막 포즈는 관객의 시선을 공격적으로 부여잡는다. <섬>은 한 남자가 여자에게 성적으로 포획되는 과정을 그리면서 시종일관 자학적인 몸짓을 멈추지 않는다. 성적 무의식의 층위에서 우의적 성격의 밀폐된 공간에 떠 오른 섬을 관객이 선취하더라도, <섬>은 묘한 자학의 풍모를 지우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자학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인가? <섬>이 드러낸 자기파괴적 성격을 인정한다면, 그것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주변의 풍경을 상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섬>에 대해 지독한 자학이라는 혐의가 또다른 신화화를 벗어나는 길은 이렇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자학은 나르시시즘의 병적 사랑의 방식이다. 사도-마조히즘이라는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자기파괴란 지극한 자기애의 표출이다. 그리고 이런 자기애는 김기덕 영화의 저류를 형성하는 심성이다. 김기덕의 <섬>은 이전의 작품들이 공모해서 표층에 끌어올린 사랑의 부산물이며, 침잠하는 절망의 양태들을 나르시시즘에 대한 집착으로 부여잡은 삶의 갈증이다.
우선 섬은 물을 전제한다. 그런데 물은 섬으로 가는 길로써 있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섬이 있고, 또 물이 있을 뿐이다. 물은 섬의 원인으로 늘 배후에 존재하는 무한하고 순환하는 세계의 이미지를 은유하고 있다. 그래서 <악어>(96)의 한강도, <야생동물보호구역>(97)의 세느강도, <파란 대문>(98)의 바다도 흐르는 물이라기보다는 잠자는 물에 가깝다. 이것은 김기덕 영화의 원초적 물질성과 관련하면서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존재론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섬>의 심리극은 남녀의 성적 판타지를 넘어 ‘세계 속의 나’라는 존재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이 된다.
<섬>의 이런 주제의식은 그 이전의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영화가 물을 주변에 두고 시작되고 끝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선 모태회귀 본능이라는 의미를 띤 물의 이미지가 <악어>와 <파란대문>에서 드러난다. <악어>에서 용패는 한강 속에 자기만의 안식처를 갖고 있고, <파란대문>에서 진아는 모래바다 속에 자신을 묻는다. 물 밖의 상처가 물 안에서 아물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들은 물 속으로 들어간다. 이런 인물들의 행위는 물이 향수와 치유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향수를 통해 김기덕 영화의 인물들은 자기치유를 갈구한다. 그렇게 물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벗어날 수 없는 매력을 동반하고 있다.
그런데 <야생동물보호구역>의 물은 또다른 물의 속성을 짐작하게 한다. 홍산과 청해가 로라에게 죽음을 당했을 때, 그들의 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물로 씻겨 내려간다. 이때의 물은 매력을 발산하는 향수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거두어들이는 자의 면모를 보인다. 다시 말해 무한과 순환, 그리고 불가해한 어떤 것이 물로써 치환되어 상징되고 있다. 김기덕 영화의 인물들이 일관되게 어떤 내적 굴레와 외적 환경의 이중적 구조 속에서 탈주를 고민한다는 점이 이러한 물의 상징에 유의미하게 연결된다. 결국 김기덕 영화에서 물의 이미지는 벗어나야 할 당위성을 지닌 채 세계의 안팎을 절망 속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는 자의식의 거울상인 것이다.
이러한 자의식은 무엇보다도 그의 영화적 소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고기, 거북이 등의 어류는 너무나 확연한 증거가 된다. 물 밖에서는 삶 자체가 합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들, 그것들은 그대로 물 밖의 인간을 대신하고 있다. <섬>에서 쓰인 새장 속의 새도 마찬가지이다. <파란 대문>의 새장여인숙은 이런 시각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섬>에서 낚시꾼이 먹다 놓아 준 물고기는 안팎의 이분법에 절망하는 자의식의 지독한 역설로 볼 수 있다. 또한 <섬>에서 저수지여인이 남자 앞에서 새장을 물에 던져 넣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인물들의 행위는 세계 안에서 세계의 안팎을 파악하고자 하는 모든 삶의 양태를 비웃는 극단적인 돌발행위인 것이다. 때론 이러한 층위의 상징이 너무 드러난 것이어서 단순하고 진부한 느낌을 주지만 궁극적으로는 물의 상징 속에서 그것을 강화하는 역할을 나름대로 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영화적 소품이 김기덕 영화의 인간관계에 그대로 전염된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인물들의 소통은 서로에게 절대적 필요성으로 가능한 것이다. 물과 어류의 존재방식의 무게가 그대로 인간관계에 포개어진다. 이런 심증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코린의 남자는 그녀에게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파란 대문>에서 진아를 괴롭히는 건달이 그녀에게 한 말이다. <악어>의 용패와 현정, 그리고 약혼남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김기덕 영화의 인물들은 관계가 시작됨과 동시에 물과 섬으로 나뉘어 서로의 절대적 필요성에 절망하고, 그 소통의 방식이 되는 욕망에 스스로를 맡겨 버린다. <악어>의 한강변 유사가족이나 <파란 대문>의 새장여인숙, 그리고 <야생동물보호구역>의 형제애의 모두는 절대적 필요성으로 묶인 세계와 나 사이의 본원적 불화를 축소한 영화적 공간이 된다.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과도한 성욕의 집착도 물의 이미지를 이루는 같은 운명의 다른 표현방식이다.
김기덕 영화의 성욕은 그저 욕의 하나일 뿐이다. 그 안에는 어떤 인간적 유희도 없다. 그것은 동물적인 생식과 유사하게 일시적 충동의 결과로서 보여진다. 일련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강간의 이미지는 한편 이러한 맥락에 닿아 있는 것이다. <섬>에서 저수지여인은 남자의 입에서 미늘을 빼준 후 섹스로서 위무를 대신한다. 이것은 인간적 유희로서의 섹스가 아니다. <섬>의 마지막 장면이 추인하듯이 이 장면은 물의 이미지를 고통스럽게 내면화한 자의식과 세계와의 허무적 교감이다. 이것이 허무적인 이유는 그 순간 남자의 존재는 육체로서만 세계에 반응하는 수동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충동에 기반한 성욕이나 어두운 원시성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적 설정들은 육체라는 수동적 공간에 기대어 물의 이미지를 배가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육체의 상징은 죽음의 이미지를 배태하고 있다. 잠자는 물은 에드가 포우의 시편에서 끄집어 낸 바슐라르의 몽상만은 아니다. <실제상황>(2000)은 형용모순의 제목 하에 모순에 강조점을 둔다. 그리고 등장하는 죽음의 연쇄는 충동과 그것의 방어기제 사이의 현실적 모순을 상상적 살인으로 마감하겠다는 육체의 유한성을 대신하고자 한 것이다. 물가의 인물들이 끊임없이 물 속으로의 실험대상이 되는 것은 한편 이 맥락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김기덕 영화의 인물들은 반복해서 물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모태회귀 본능과는 다른 의무를 띠고 물의 상징을 저울질한다. 수갑을 찬 채 물 속에 들어간 인물들은 물 속을 대결의 장소로 만들면서 동시에 물의 죽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의 죽음은 가치판단을 허용하지 않는 기계론적 세계의 상상적 틀을 가능하게 한다. 잉마르 베리만의 <처녀의 샘>(60)은 신의 존재 혹은 악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신은 그 자체로 완전한 절대자이고 악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신을 갈구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신은 절대적 의지인가 아니면 로고스인가, 베리만은 결국 처녀가 죽은 자리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장면을 연출한다. 인간적 삶의 부당함으로 신의 의지를 이끌어내는 이 장면은 신의 부당함을 인간의 의지로 치유하려는 고통의 산물이다. 김기덕의 영화 또한 이러한 사유의 고리에 참여하고 있다. 김기덕 영화의 인물들은 나름의 실존적 고통에 머물지 않고 어떤 지향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물의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부채의식 같은 것이다. 바라봄으로써만 존재하는 가치중립적인 세계는 원죄의 부당함을 본원적으로 내재화한 인물들을 낳는다. 그들에게 죄의식은 삶의 전제이자 동력이 된다. <파란 대문>에서 포항들개는 진아에게 “너만 벗고 사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 벗고 산다”고 말한다. 이런 자의식은 진아나 포항들개만의 것이 아니다. 김기덕 영화의 문제적 인물들이 공유하는 실존적 고통은 원죄의 부당함을 끊임없이 닦아세우는 세계의 확고한 질서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결국 그 세계는 무심한 물의 일기 같은 것이다. 그러한 물의 일기는 허무의 주변을 비춘다. 선악이라는 인간적 지평을 넘어서 있는 물의 이미지는 그대로 허무적 인간형을 낳는다. 김기덕 영화의 인물들은 한 사람 속을 나눈 듯 동일하게 살아간다. 강간, 배신, 폭력, 위선은 그들에게 잘 맞는 옷처럼 자연스럽다. 자동기술되는 기계론적 세계가 인간적 삶 속에서 악한의 이미지를 그들에게 부여한다.
결국 김기덕의 영화는 비극적인 현실인식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욕망과 물의 이미지를 덧씌운 인간들의 몸짓이 나타난다. 그들은 세계의 구조적 부당함을 묻기 위한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김기덕 영화에서 인물들이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화해의 제스처가 패배주의의 그늘을 짙게 드리우는 것은 예정된 결론일 것이다.
김기덕 영화에서 화해의 몸짓이란 함께 술을 마시거나 서로의 얼굴을 그리려는 행위로 대별된다.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홍산과 청해는 부둣가에서 함께 술을 마신다. <파란 대문>에서 진아와 보트청년도 함께 술을 마신다. <섬>도 예외는 아니다. 남자는 저수지여인과 노란집에 걸터앉아 함께 술을 마신다. 그러나 화해의 몸짓은 말 그대로 몸짓으로 끝난다. 이어지는 장면은 배신과 강간이다. 계속해서 물이 상징하는 바의 의미가 인간관계를 포섭한다. 그들의 행위는 어떤 벗어날 수 없는 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그 세계는 나를 품고 있고, 그 육체 역시 나를 품고 있고, 그 배신은 나를 살게 만든다. 이것이 물과 어류의 관계만큼이나 확고하다는 생각, 그래서 김기덕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영화적 설정들은 하나같이 물로 상징된 세계와 그 세계의 절대적 필요성을 뼈아프게 확인하는 자의식의 변용들이다.
상대방의 얼굴을 그리려는 예술가적인 몸짓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행위는 거울이미지를 통한 성찰의 외양을 띠지만 결국은 실패할 화해의 방식으로 예정된 듯 동일한 결론으로 치닫는다. <파란대문>에서 혜미의 엄마도 <야생동물보호구역>의 홍산도 자신의 이미지를 보고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확인한다. <실제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실제상황>의 첫 장면에서 남자의 그림은 상대방과의 불화로 시작되지만, 남자는 계속해서 그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그림은 현실 속에서는 부질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파란대문>에서는 아들과의 문제로 구겨지고,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는 배신이라는 사건으로 중단되고, <실제상황>에서는 남자의 내적 충동, 즉 욕망으로 유보된다. 그리고 이런 실패할 화해의 몸짓으로의 그리기는 말과 사물의 관계를 전유하면서 더 큰 영화의 전체상에 닿게 되는 식이다. 내 속의 관념과 밖의 사물의 일치가 불가능하다는 인식론적인 교훈을 세계와 나의 존재론적 불화로 전유시킨 것이다. 김기덕 영화의 그림은 서로의 얼굴을 그려주는 것으로 국한된다. 김기덕 영화의 인물들에게 자아이미지를 넘어서는 세계는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그 세계의 경계를 인식하면서 서로의 실패할 이미지만을 허무하게 드러낼 뿐이다.
동병상련의 측은지심이나 성욕을 통한 화해는 진정한 화해와는 거리가 멀다. 김기덕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보여주는 화해의 제스처는 인간적 지평에서는 그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반면교사로의 역할을 드러낼 뿐이다. <파란 대문>의 화해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파란 대문>에서 여름에 갑자기 내린 눈은 진아와 혜미의 화해를 가능하게 한다. 혜미와 진아의 화해는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파란 대문>의 화해는 궁극적으로 파란 대문을 가진 새장여인숙 속에서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새장여인숙은 창녀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창녀를 받아들이는 거대한 순환기계와 같은 세계의 이미지를 변주한 것이다. 그 둘의 화해는 여성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됨으로써 화해에 이를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물로 상징된 세계의 이미지가 그 둘의 인간적 공감대에 초현실적인 무게를 부과하게 된다. 과도한 비약으로 넘어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초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가능한 것이 된다. 혜미가 진아를 대신해 손님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자아상실의 공허한 융합이라고 할만하다. 그러한 풍경은 새장여인숙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의 진아와 혜미의 융합은 새장여인숙을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그 둘의 화해가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역설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김기덕의 영화적 설정들은 물의 이미지에 수렴되는 일관성을 보인다. 인물들 사이의 모든 소통의 방식들이 물의 이미지를 위해 복종하는 부속품처럼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설정들이 모여 김기덕 영화의 현실인식의 층위를 깊게 설정하고 있다.
이렇듯 물로 상징되는 세계 속의 현실인식은 한없는 절망 속에서 잉태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절망 속의 자아는 비극적인 세계관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 <야생동물보호구역>의 핍쇼장 풍경은 김기덕 영화의 심층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홍산이 살인을 하고 핍쇼장에서 로라를 보며 자위를 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파란 불빛 속에서 홍산의 절망은 자신의 전존재를 육체에 다 맡겨 버리는 것으로 그려진다. 홍산의 현실 속에서의 허위와 로라가 경험한 삶의 부당함이 함께 파란 방 속에서 육체의 욕망에 맡겨지는 도저한 절망을 표현하고 있다. <섬>에서 보이는 질 속에 혹은 입 속에 미늘을 집어넣는 장면보다도 더한 절망이 여기에 있다. 이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 그것의 부당함을 세계가 변주된 육체의 그 수동성 속에 철저히 함몰시키는 것이다. 그 행위에는 정신 혹은 긍정적 화해의 제스처는 완전한 무, 즉 지독한 허무주의 속으로 죽여버리겠다는 선언과 같은 것이다. 이제 그의 인물들은 악을 본성으로 하는 세계라는 거대한 자동기계의 부속품일 뿐이다.
악을 본성으로 한 세계에 대한 인식은 초월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인간형을 낳는다. 이러한 인간형은 현실과는 끊임없는 불화 속에 머물게 된다. 그들에게 현실도피와 자기파괴적 성격은 삶의 방식이 된다. 김기덕 영화의 인물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영화적 삶을 살아간다. 그들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집착은 현실도피나 자기파괴적 성격을 본질로 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나르시시즘은 자아를 탐색하고자 하는 주체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허무적 나르시시즘의 진정성이라는 말은 이때에 가능한 것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주체의 몸부림이 동시대의 보편적 고통에 닿아 있는가일 것이다. 김기덕의 영화가 가치평가의 지평으로 설 자리 역시 이 지점일 것이다.
그의 영화는 분명 도저한 절망을 표현해내고 있다. 그러나 형상화의 지나친 도식성과 단순성으로 그 절망의 영화적 보편성은 얻지 못하고 있다. 김기덕의 영화 속에서 형상화되어 있는 절망은 그저 무규정성의 악에 대한 것으로 비친다. 그러나 악은 인간적인 지평에서 그 가치를 갖는다. 그렇지 않은 악에 대한 자의식이란 공허한 초월적 몸짓이거나 허무적 나르시시즘 그 자체일 뿐이다.
김기덕의 영화가 가리키는 악은 상징의 표피적인 도식성으로 표백되고 있는 느낌을 준다. 물론 그것들은 더 큰 맥락을 위해 반복되고는 있지만, 그것 자체는 영화적으로 미완성의 것들로 남는다. 영화 속에서 인물들과 소품들은 어떤 하나의 울림을 위해 정물처럼 서 있는 답답함을 전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이미지의 맥락없는 그럴듯함이나 여성성에 대한 지적은 이 부분에서 끼어드는 타당한 요구이다. <실제상황>은 김기덕 영화의 도식성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나와 또다른 나, 그리고 충동으로서의 존재는 그리 긴 영화적 생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상황>은 단편영화의 묘미를 살리는 것이 더 나았을 정도의 단순한 상징으로 일관하고 있다. 자궁 내의 모습을 함의하는 주인공 남자의 모습이나 연극적인 설정을 통한 무의식의 풍경 모두 기존의 영화가 보여준 상징의 틀에서 의미의 고리를 맺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상황>은 영화제작상의 의미와 가치를 덧붙여야겠지만 영화의 내용은 울림없는 반복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의식이나 충동은 이미 그의 영화 속에서 나름의 의미로 반복되어 영화적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것들이 비슷한 의미를 띠고 영화 전편을 이룰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시행착오는 김기덕 영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는 또다른 한 축에서 동시대의 보편적 고통에 참여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영화 속에서 구체적인 사유와 만나고 있지 않지만 자학의 냄새만큼이나 어떤 절망을 표현해내고자 한다. 이창동의 <박하사탕>(2000)에서 철길 위에 선 영호의 결단은 지나온 시대의 모순과 부당함을 순수의 이름으로 들추어낸다. 이데올로기의 횡포에 올곧게 버티어내지 못한 우리 삶의 모습을 순수의 저편으로 상정하고 하나씩 그 아픈 기억들을 형상화하고 있다. 김기덕의 영화 역시 그 아픈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그 기억을 다루는 영화적 스타일은 <박하사탕>과 다르지만 그 절망을 현실 속에서 인식하는 태도와 입각점은 같은 것이다.
과거와의 단절은 우리의 현실에서 절실한 것이다. 우리에게 지나온 시간은 자기배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 자기배반의 역사가 현실에 병리적인 심층을 구축한다. 그 심층 위에서의 자기반성은 어쩔 수 없이 나르시시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자기파괴적이고 퇴행적인 몸짓은 진정한 반성으로 가는 길목일 수 있다. 특히 단 한번도 주체로서 서 보지 못한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것은 역사의 필연에 속한다. 나르시시즘은 크리스토퍼 라쉬의 말대로 과거와의 유대감 상실과 미래에 대한 희망의 실종으로 발생하는 주체의 붕괴이다. 이 주체의 붕괴를 김기덕의 영화는 악을 내면화한 세계와 그 부속품인 인간의 본성으로 비추고 있는 것이다. <박하사탕>의 영호가 죽음이라는 시도로 현실을 포착했듯이 김기덕의 영화 역시 도저한 허무적 나르시시즘으로 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비록 김기덕의 영화들은 영화적 미완숙을 보이며 그 악이 인간적 지평에 온전히 닿지 못하고 있지만, 그 심층에서 느낄 수 있는 현실인식의 진정성은 지금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마주 보아야 하는 거울상인 것이다.
자아의 진실과 현실의 허위 사이의 틈새는 어떤 보편적인 절대자를 불러 세우게 한다. 자기배반의 역사를 현실적으로 지탱해 줄 상상적 기표로서의 아버지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보편적 고통은 이러한 해결의 구도 자체가 모호하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박하사탕>은 사랑으로 포장된 순백색의 순수를 추악한 역사의 반대테제로 설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기덕의 영화 역시 그러한 모호성의 산물이다. 김기덕 영화의 자학적인 몸짓과 허무적 나르시시즘은 그러한 틈새를 메우기 위해 등장했지만 그 일그러진 추악성에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기덕이 비추는 우리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은 현실의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려는 삶의 진정성만은 전해주고 있다.
바다의 악어, 김기덕
김기덕 감독론 가작
2001.06.05 / 심윤
한국영화가 폭발하고 있다. 당분간 깨질 것같지 않던 흥행 신기록들이 거듭 갱신되고있다.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영화의 부흥은 이제 최고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가 보다. 물론 모든 한국영화가 축포를 터뜨리는 것은 아니다.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는 영화가 더 많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흥행뿐만 아니라 완성도에서도 한국영화는 양극화되고 있다. 흥미있는 이야기와 완성도를 갖춤으로써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평단으로부터 비교적 호평을 받고있는 영화들이 있는 반면, 다른 한 부류의 영화들은 함량미달의 제작능력과 졸속제작으로 흥행실패는 물론이고 평단의 혹평속에 말없이 사라지고 있다. 손익분기점 안팎의 흥행을 거둔 작품이나 아예 작품성위주로 제작된 작품도 있지만 그 중간층이 점점 엷어지고 있는 경향은 분명하다. 그런데 흥행참패와 혹평의 세례를 받았으나 후자의 경우로 치부해버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일련의 영화들이 있는데 바로 김기덕의 영화들이다. 물론 김기덕 외에도 결코 쉽지 않은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영화작가들이 많지만 김기덕처럼 독특한 색깔의 영화를 해마다 만들어 온 감독은 없다. 김기덕은 현재의 한국영화에서는 다른 모든 감독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영화작가이다.
96년 <악어>로 데뷔한 그는 요즘영화계에선 보기 드물게 해마다 한 작품씩 발표하고 있는 왕성한 에너지의 소유자이다. 그는 초기작품부터 지독한 혹평을 감수해야 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변함없이 영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창의적인 상상력과 막힘없는 추진에너지로 그림이 좋고 시각화가 뛰어난 작품을 많이 만들어 온 그의 개인이력은 작품수에 비하면 많이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1960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났으며 9살부터 현재까지 일산에서 살고 있다. 중학교 진학이 좌절되어 농업전수학교를 마치고 공장, 해병대 하사관, 장애인교회에서의 2년, 프랑스 파리에서의 미술독학을 거친 후 93년 귀국,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94년 당시 영화진흥공사의 하반기 시나리오 공모에 <이중노출>로 장려상을 수상하고 바로 이듬해의 상반기 공모에서 <무단횡단>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한 그는 96년 자신의 각본을 들고 직접 연출자로 나서게 된 것이다.
33살에 영화를 처음 보았다는 그와 그의 작품세계의 관계는 여느 감독들과 구분될 정도로 깊게 연결되어 있다. 각본을 직접 쓴 영화만을 만들고, 상업적 기획영화가 아니며, 작품들이 연작처럼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배경과 사건이 감독의 그것과 비슷하며, 무엇보다 주인공이 감독 자신의 분신임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와 그의 작품의 깊은 관계를 확인해주는 것이다. 한 영화작가의 작품세계를 그의 짧은 사회적 이력과 평단의 성급한 진단만으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평론가들을 향해 “말을 타고 때리라는 것이다. 타지도 않은 채 뺨만 찰싹거리며 때리지 말고”라며 뼈있는 하소연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는 그가 받아온 관객의 외면과 평단의 악평이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지 회의를 갖게 만든다. 일부 평론가들의 악의적 평가는 혹시 그의 비주류적 삶과 그의 거친 데뷔작에서 너무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계속되는 흥행 참패를 감수하며, 평단의 거친 산성 소낙비를 맞아가면서도 쉼없이 자신의 영화를 심어나가고 있는 그의 힘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그는 그렇게 힘겨운 농사를 통해 어떤 결실을 얻을 것인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진정 그의 영화를 이해하려면 그의 작품들을 면면히 살펴보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그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기꺼이 그의 행적을 좇을 용의가 있다.
악어 김기덕, 영화에 상륙하다 - 첫 번째 영화 <악어>
두 번의 시나리오 당선으로 이야기꾼임을 공인받은 김기덕은 자작 시나리오를 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나서야 힘겹게 첫 작품을 만들 수 있었으며 완성후에도 관객과 만나기 위해서는 많은 일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참혹했다.
한강에서 투신한 사람들의 시신을 숨겼다가 돈을 받아내는 것을 주업으로 살아가는 비루한 악어, 용패와 그의 사주밑에서 앵벌이를 하는 소년, 그리고 깡통수집이 생계수단인 우노인이 도시의 또 다른 공간, 집 아닌 한강다리밑에서 동거한다. 한 여자가 투신하고 용패가 건져낸다. 그는 마치 낚아 온 생선을 먹어치우듯이 그녀를 인공호흡으로 살려 내자마자 소년과 노인의 시선에도 상관없이 강간한다. 우노인과 소년은 함께 살게된 그녀, 현정에게 정을 느끼고 환대하지만 용패는 현정을 계속 학대하고 갈취한다. 그녀는 상류층 자녀와 약혼한 상태에서 윤간당하여 자살했던 것인데 용패는 이 사실을 눈치채고 그녀의 약혼자, 준호에게 접근, 사실을 낱낱이 알아낸다.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는 현정에게 보란 듯이 준호가 윤간을 사주한 당사자임을 보여주는 비디오 테이프을 틀어주고, 권총까지 건낸다. 그녀는 차마 쏘지 못하고, 총을 뺏어 든 용패도 준호의 어깨에 총상을 입힐 뿐이다. 그날밤 현정은 힘없이 용패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고개를 뭍고, 둘은 강간이 아닌 어떤 확인으로서의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새벽, 한강으로 걸어들어가는 현정, 쫓아간 용패는 그녀와 함께 죽음을 선택한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극단적인 인물설정, 풍부하고 색다른 사건들, 초유의 수중장면은 데뷔작답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그의 시각화 능력은 단순히 미장센에 기능하는 그림의 아름다움이나 적절한 배치의 수준을 뛰어넘어, 이야기의 전개와 상승을 이미지로 상징하여 보여주는 놀라운 성과였다. 그러나 <악어>에는 이런 신선함과 함께 전형적인 요소도 있었다. 양극의 인물설정이 고전적이었으며, 이야기의 구성은 전형적인 기승전결구조나 할리우드의 3장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남녀를 수갑으로 묶어놓고 남자의 지독한 학대와 여자의 무한한 인내가 결국은 접점을 발견하지만 이 사회에선 지속될 수 없는 교통이므로 다른 세상(죽음)으로 간다는 이야기. 게다가 그런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위하여 색다른 사건들을 논리와 개연성을 희생시켜가면서 구겨넣은 것은 무리스러워 보였다. 영화의 표현양식 즉, 촬영기법, 편집, 음향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시도없이 평이하다는 것도 노출되었다. 그러나 그가 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드는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가는 분명하게 드러나며 이어지는 후속작품들에서도 일관되게 지속된다.
상처받은 악어, 안이하게 보호구역으로 들어가다
-두 번째 영화 <야생동물보호구역>
흥행참패와 평단의 혹평, 두 마리의 토끼를 다 놓친 김기덕이 무엇을 되새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일반적 예상을 깨고 일년만에 들고 귀국한 두 번째 영화에서 전작과 달라진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다.
탈북하여 외인부대에 들어가고자 빠리에 온 홍산과 생계에 치여 그림에 대한 열정은 뒤로 미룬 채, 작은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가는 비루한 남한 청년 청해가 교차, 소개된다. 청해는 홍산을 속이고, 갈취하고, 배반한다. 그런데도 홍산의 무한한 순정 때문에 두 사람사이에는 우정(?)이 생기고, 함께 빠리 폭력조직의 일원이 되고, 각자 사랑하는 여인도 생긴다. 청해는 수상가옥과 애인, 코린 때문에 큰 돈이 필요해 홍산을 배반, 수장하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차마 그러지 못하고 홍산을 다시 건져 올린다.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홍산은 절대 하지 않겠다던 청부살인을 자청해가며 청해의 돈문제를 해결해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직의 부두목에 의해 바다에 던져지고 힘을 합쳐 살아나온 남북의 두 청년은 홍산이 짝사랑하던 로라의 총을 맞고 이국의 뒷골목에 쓰러진다.
<악어>의 용패와 현정처럼 역시 안어울릴 것같은 남북의 청년을 역시 수갑으로 묶어놓고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일방적인 청해의 가학에 무한한 인내와 관용과 순정으로 답하는 홍산, 그들의 소통, 그리고 함께 죽음에 이르는 똑같은 이야기. 남녀가 남남으로, 한강이 세느강으로 바뀐 정도가 차이점이다. 이 영화를 보고 감독이 의도했다던 나름대로의 남북분단문제를 떠올리는 관객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확히 동일한 두 이야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작가이며, 감독인 김기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화해라는 것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세상에 망설이며 내미는 화해의 악수이다”라며 자신의 공격적인 화면의 의도를 밝힌 바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관객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 그가 세상에게 원하는 것이 화해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과 세상을 자신의 작품의 두 주인공처럼 섞이기 힘든, 화해하기 힘든 양극단에 서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화해의 방법도 영화에서처럼 공격적이고 일방적이다. 그의 화해의 방법은 뒤에서 다시 짚어 보기로 하고 여기선 두 영화에서 노출된 문제점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하나는 감독이 관찰하거나 경험했던 색다른 사건이나 상황들을 진부한 서사구조에 별다른 여과없이 끼워 넣고 있으며 그런 과정에서 리얼리티, 개연성, 영화자체의 논리 등이 적지않게 희생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재했던 사건이나 상황도 영화에서 사용되기 위해서는 영화의 논리에 부합되도록 적소에 적절한 형태로 쓰여야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리얼리티와 개연성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또한 많은 사건들이 우연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해와 홍산의 만남, 청해와 코린의 만남, 홍산과 로라의 만남과 재회, 로라의 애인이 청해의 손에 죽는 것, 폭력조직의 일원이 되는 과정과 그 조직내의 사건들이 모두 우연이다. 이는 작의적인 편의주의의 노출이며 그래서 그의 이야기가 복잡하되 미묘하다거나 정교하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우연을 필연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작가의 역할일 것인데 김기덕은 그런 개연성과 논리는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일관성, 논리, 리얼리티, 개연성등이 대중을 향한 영화에서 그 정도로 간과되어도 되는 것인지는 뒤에 다시 거론해 볼만하다.
또 다른 문제점은 그의 표현양식이다. 그가 매체로서 영화를 선택했다면 당연히 영화매체의 언어를 구사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흔히 영화문법이란 애매한 단어로 표현될 수 밖에 없는 서사형식, 촬영, 편집, 음향의 운용문제인데 그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 동료들에게 맞춤법을 감수받은 적이 있다고 밝힌 바 있지만 ‘영화의 맞춤법’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시나리오는 영화라는 완성작품의 제작에 쓰이는 설계도일뿐 그 자체로는 하나의 완성작품으로 선보이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는 ‘한글맞춤법’에 비하여 ‘영화맞춤법’이 강제력이 휠씬 약한 사회적 약속이며 그 실체가 모호하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어느새 '관습적'이란 말이 '할리우드적'이란 말과 동의어가 되어 대다수의 영화평론가들에겐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게된 지금의 상황에서 '관습'의 채택여부는 각자의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관습'은 영화관객의 영화읽기에서 누적된 분명한 경향이라는 점과 김기덕의 영화에서 서사형식은 전형적인 '관습'의 범주에 속해 있음은 분명히 하고 싶다. 관객은 계속되는 학대와 공격을 인내하며 무한한 순정으로 그의 영화를 만나지는 않을 것이다. 화해란 서로가 양보하는 것이다. 김기덕의 세 번째 영화에서는 양보가 보인다. 얼어서 무기가 되었던 고등어가 녹녹히 녹아 캔버스앞으로 나온 것처럼...
악어, 다시 '문'앞에 서다 - 세 번째 영화 <파란 대문>
두 번의 같은 이야기로 같은 평가를 받았던 김기덕은 달라져야 했다. 타인의 말에 귀기울인 흔적이 완연하다. 특히 여성평론가들을 많이 의식했을까? 세 번째 영화는 여자와 여자의 갈등구조를 상당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바닷가의 낡은 ‘새장여인숙’. 동갑내기인 주인집 딸, 혜미와 몸을 파는 여자, 진아는 파란대문에 함께 다가선다. 혜미가 한쪽 문을 밀고 들어서서 살며시 그러나 단호하게 문을 닫는다, 진아를 밖에 세워둔 채... 그림을 좋아하고 바다의 포용력을 닮은 진아는 끝없이 타인을 용서한다. 주인집 남자, 그의 아들, 자신을 갈취하는 기둥서방, 그리고 경멸의 시선과 폭언을 퍼붓는 혜미에게까지... 결코 용해되지 않을 것 같던 혜미의 마음도 진아의 무한한 순정과 인내 앞에 풀리고 화해가 이루어진다. 두 여자가 나란히 바닷가에 앉은 여름밤, 기적같은 눈이 내리고 혜미는 눈의 축복속에, 아니 눈의 희생의 의미속에 하얀 발자국을 남기고 아픈 진아대신 손님방으로 들어간다. 다음날 아침 수돗가에 다정하게 모여앉은 진아와 혜미 그리고 가족들 모두의 모습위로 파란대문이 그들을 포옹하듯이 닫힌다.
파리에서 포항으로 돌아 온 김기덕은 적지않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극중인물의 가학성이 약화되었고, 잡다한 사건이 절제되어 개연성을 확보하였으며, 표현양식에 있어서는 커다란 변화는 없어도 한결 안정된 모습이었다. 자신이 스스로를 묶어 놓았던 수갑에서 풀려난 모습 같았다.
그러나 김기덕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가족이 되지 못했다. 이는 개선되었지만 잔재되어 있는 서사형식의 전형성과 아직 거친 표현양식 때문이라기 보다는 관객과 평론가의 살속 깊이 패어있는 전작들의 상처에 대한 기억 때문인 듯하다.
대학생과 창녀라는 극단적인 설정은 전작들과 동일하지만 그 대립과 화해의 방법은 달라졌다. 육체적이고 가시적이며 자극적이었던 물리적 가학에서 벗어나 보다 개연성있고 현실감있는 정신적 대립으로 대치되어 튼튼한 짜임새를 갖추었으며, 화해의 방법도 일방적인 가학과 순정에서 벗어나 양면을 모두 갖고 있지만 일면만이 도드라져 보이는 현실적인 인물로 변하였다. 특히 진아의 ‘나도 밥주세요’라며 시작했던 반항(?)은 그 하나 만으로 반전과 위기형성과 복선 등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절묘한 포석이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바보’라는 혜미의 한마디는 전후의 이미지와 결합되어 영상과 대사의 관계를 한 차원 높이며, 절제되고 함축된 한마디의 대사가 얼마나 많은 정서와 서사를 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김기덕감독이, ‘우리 모두 벗고 사는 거다’라고 말하는 포항들개처럼 관조적인 시점과 인내를, 갖게 된 결과라고 짐작된다. 이것이 극중 남자주인공이 없어서 김기덕의 분신이 등장하지 않았던 것과 연관이 있다면 지나친 추측일까?
진아와 혜미가 서로 미행을 당하고 미행해보는 시퀸스는 김기덕의 시각화 재능이 백분 발휘된 것으로서 미행이란 단어의 음흉한 선입견을 일소해버리는 아름다운 미행이었다. 마치 롤 플레이(role play)와도 같은 미행을 통해 결코 서로에게 이해되지 못할 것 같던 관계가 화해의 기미를 띠게되는 그 모습은 대단한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또 하나의 큰 양보는 주인공들을 ‘살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로가 소통되고 화합되었을 때 죽음보다는 밝은 미래가 어울리는 것은 당연하다. 혜미의 희생은 밝은 삶의 상징이며 그런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잔인하다. 김기덕은 자신과 세상이 청명하게 화해할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고 세 번째 영화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관객은 마음을 열지 않았다. 민물고기로 변신한 악어의 점액성 피부를 바다라는 관객은 소금끼로 괴롭혔던 것이다. 사실은 마음을 열지 않았다기 보다는 음산하고 공격적이기만 했던 전작에 가려진 채, 화해를 청하기에 충분한 양보로 악수를 청하는 김기덕의 손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두 전작의 강렬한 인상을 지워버리기엔 한 번의 손길이 부족했을 수 있다. 김기덕은 한 번 더 화해를 청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한 번 거절당하자 이내 손을 거두어 돌아섰다. 안개속의 섬으로 모호한 회귀를 감행한 것이다.
안개 낀 섬, 모체의 자궁으로의 모호한 회귀 - 네 번째 영화 <섬>
그 만큼의 양보, 그만큼의 희생(?)을 지불하고도 가족이 되지 못한 김기덕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화가 났을까? 혼란스러웠을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평온한 안식처를 필요로 했을 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이 자궁으로의 회귀이던, 본래의 자기모습, 자기색깔로의 회귀이던 그에게는 돌아갈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낚시터의 여주인, 희진은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지난날은 말하기 싫을 만큼 처참했나보다. 그녀는 낚시터의 좌대만을 대여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욕구를 채우려는 낚시꾼들에게 자신의 몸도 대여하며 살아간다. 현석,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 아내를 죽이고 낚시터로 은신한 그는 권총자살을 하려하지만 미련의 손가락이 망설인다. 여느 낚시꾼과는 다른 그의 모습에 끌린 희진은 그의 자살을 과격하게 만류하고, 현석은 순간의 망각을 위해 그녀를 거칠게 안는다. 두 사람의 삶은 서로를 학대하고 치유하며 세상끝으로 치닫는다. 희진의 베티블루을 닮은 욕망과 집착은 끝내 연적(?), 티켓다방 아가씨를 수장하게 되고, 그 시체가 수면위로 떠오르던 날, 희진은 현석과 좌대를 끌고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다... 현석은 모든 것이 포용되고 용해될 수있는 니히르바나의 섬을 찾는 듯하고... 희진은 생명의 물을 가득 품은, 자궁과도 같은 섬이 된다...
처음으로 소위 ‘메이저’영화사와 일하며 안정된 제작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었던 김기덕은 그 결과로 확신할 수는 없으나 몇가지 모호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선에 위치한 영화의 배경과 결말, 아름다운 롱샷과 공격적인 클로즈업의 혼용, 남녀 두 인물의 구원 여부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주먹으로도 양보로도 관객을 돌파하지 못하자 혼란스러워진 감독은 한순간 더 과격하게 때론 주먹을 날리고 때론 평온하게 하얀 손을 내밀기도 한다. 차분하고 평온해진 듯 하지만 이는 영화의 배경일 뿐이다. 김기덕의 공격성은 오히려 더 과격해져서 두 주인공간의 일방적인 가학은 이제 상호학대로 확대적용되고, <악어>나 <파란대문>에선 방생하기도 했던 물고기, 새, 개, 개구리등 모든 생명체에게 확장적용된다. 사이사이에 평온하고 아름다운 파스텔톤 인서트를 끼워가면서...
男女, 男男, 女女의 이야기에서 다시 男女의 관계로 회귀하여 일방적인 가학과 순정이 아닌 상호 학대와 위안, 치유의 과정을 생략없이 정확히 두 번 보여주는 감독의 의도는 단순히 연작에서의 동화반복을 통한 강조의 차원을 넘어 그 만큼 더 관객에게 ‘학대’를 클로즈업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관객에 대한 이런 변하지 않은 공격심리와 ‘메이저’의 제어시스템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모호한 상태의 결과물을 낳았고 ‘판타지틱’이란 카테고리에 포함되었다. 문제는 국내개봉을 마친 후에 여러 해외영화제에 초청되고, 수상하는 등 인정받았지만 국내에선 역시 외면당했다는 사실이다.
사건과 인물을 단순화하고 대사를 줄이며 이미지에 주력한 감독의 의도는 성공했으며, 그의 주특기인 아름다운 영상도 그 절정에 달했고, 그의 시각화 능력도 충분히 발휘되었는데 4만 명이 안 되는 서울관객수는 안정적인 제작시스템과 배급을 감안하면 전작의 수준을 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왜 그럴까? 왜 관객의 외면과 평단의 혹평은 지속되는 것일까?
수갑의 문제
김기덕 영화에는 신선함, 즉 시각화, 영상미, 색다른 사건과 상황들이 많지만 진부한 전형들 또한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감독은 “이미지는 파편일 수 밖에 없다. 내 영화는 파편적이지 않다. 일관적인 이미지를 통한 삶의 아이러니,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가 아닌 의미를 담아냈다”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그의 이미지나 이야기가 일관적이라는 데에 동의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우선 그의 서사형식을 보면 비현실적일 정도로 색다른 인물과 사건들을 영화전체에 꿰어 넣는 방식이 ‘수갑’과 같은 강제적인 방법을 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갑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영화는 시드니 포이티어가 출연했던 1958년작 <흑과 백>이다. 흑인과 백인 죄수가 수갑에 함께 묶여있던 그 모습이 생각난다. 이 영화처럼 김기덕의 영화에서도 수갑은 같은 기능을 한다. 용패와 현정, 청해와 홍산의 관계에서 한 사람이 떠나지 않고 계속 학대를 감수하는 이유가 ‘수갑’같은 작의적 설정외에는 없다. 현정이, 홍산이 앉은뱅이가 아닌 이상 왜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겠는가? 물론 한 번 정도의 설명은 제시하지만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그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다시말해 그의 인물설정과 사건의 배열은 색다르고 신선한 것이지만 그것을 담는 형식과 전개방식은 고전적인 틀이었으며 이는 파인애플을 죽바구니에 담아 놓은 것처럼 어색하다는 것이다. 초현실적인 것을 현실적인 수갑으로 묶어 놓는 것은 안일한 방법이다. 또 한가지 문제는 현실감, 개연성의 문제이다. 자신의 이미지가 파편적이지 않고 영화전체에서 일관되는 어떤 구조의 구성요소로서 기능하기를 원한다면 개별 이미지와 사건의 현실감, 개연성을 그렇게 간과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최근에는 창의성이 객관적 논리성보다 더 중요시되는 경향이 분명하지만 이런 작은 현실감의 결여가 두세번 반복되면 관객의 시선이 돌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다큐멘터리를 보여달라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말그대로 픽션이다. 현실감, 리얼리티가 필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영화에서이다. 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별도의 현실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화가 픽션이기 때문에 리얼리티가 필요한 것이다. 영화라 할지라도 그 자체내의 영화적 논리는 필수적인 것이다. 이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그림’같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비현실적인, 환상적인 것을 현실감있게 보여주는 것이 영화이다.
상처받은 악어, 복수의 환상을 꿈꾸다. 실재하지 않았던 ‘실제상황’
- 다섯 번째 영화 <실제상황>
관객과 평단은 <섬>마저 외면했다. 이도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기덕은 화나 났던 것일까? 분노가 치밀었던 것일까? 그는 거리로 나선다, 살인행진곡을 변주한다, 자신을 위안하기 위한 이벤트를 마련한다. 어쩌면 <섬>에 대한 해외의 평가가 전해진 다음이었다면 김기덕은 <실제상황>을 만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원래의 시나리오대로 해병탈영병이야기로 만들어졌을 지도 모르겠다.
해병 하사관출신인 사내는 연극무대로 끌려가 또 다른 자아로부터 그 동안 억압되어왔던 분노와 살의를 독려(?)받고 복수의 살인행각에 나선다. 각기 다른 살해방법으로 자신을 모독하고 능멸했던 친구, 애인, 군고참, 깡패, 형사등을 징벌한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상황이기에는 너무 두려웠다 그래서 모든 살인은 환상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용기가 없다고, 인형장사가 그러면 그랬지 나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얼핏보면, 물리적 커트의 단절없는 영화를 시도했던 히치콕의 <로프>나 플롯타임과 상영시간을 일치시킨 <하이눈>, 또는 시공간을 극도로 제한한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연상케하지만 <실제상황>에는 서사형식의 실험도, 표현양식의 실험도 보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감독의 의도와 그 결과는 공히 당혹스럽다. 다양한 살인방법과 소심한 분노, 그리고 빨리찍기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이 작품은 흥행실패라는 것 말고는 김기덕의 모든 작품과도 동떨어져 있다. 감독의 외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살인방법의 문제
“그렇다. 고백하자면 난 관객을 공격하고 싶은 성향이 강하다. 대다수의 관객이 나보다 똑똑하기 때문에. 똑똑하지만 세상의 이면에 있는 걸 놓치고 인정하지 않으려 들기 때문에. 나는 늘 사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과 심정적으로 동일시하면서 사회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포획한 이미지를 던지는 것이다. 그건 내가 세상에 망설이며 내미는 화해의 악수이다”
김기덕 감독의 이 말에는 이미 그의 영화속에서 선명히 보여진 바 있는 그의 생각들이 함축되어 있다.
그의 화두는 세상과의 화해이다.
그렇다. 그는 미술에 대한 재능 즉 미적영상과 시각화능력등을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사실 그 누구못지 않은 스토리텔러이다. 그의 그림과 시각화는 ‘이쁜’ 그림으로서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정신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주효하며 이는 영화적 스토리텔링방식이라고 할 수있다. 그럼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의 화두는 바로 세상과의 화해이다. 자신 또는 자신과 익숙한 사람들 대 ‘사회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의 화해!
그는 자신과 ‘사회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극중의 인물들처럼 양극단에 서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여기엔 이견의 소지가 있다. “극단의 감정, 극단의 삶의 경험, 극단의 애정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 모두를 화해의 대상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상대의 ‘이해’를 인정하고, 자신의 ‘이해’와 교류하고, 접점을 찾아보자는 화해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세상이란 이런 것이다” “이것 좀 봐라”라고 말하는, 세상을 이해한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태도인 것이다. 그는 극단적인 상황을 많이 체험하고 관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한국의 감독으로서는 그 전례가 없는 경력의 소유자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엔 김기덕 감독만큼 극단적인 상황을 통과해 온 사람들도 많고 그 보다 더 많은 사람은 극단의 상황이 아닐지라도 나름대로의 시간과 경험을 통과해온 경력의 소유자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김기덕과 정확히 동일한 경험을 지닐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유사한 경험 즉 김기덕 감독이 말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경험해야만 세상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지독한 경험론에 불과하며 스스로 연대의 대상, 화해의 대상을 줄이는 격이다.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알려고 하고 화해하려고 하는 것이며 개인의 경험은 그 개인에게는 다 특별하고 극단적이다는 것이다. 경험론만이 유일한 이해의 방법이 아닐뿐더러 주효한 방법도 아니며 실재했었다는 것 또는 실제로 경험했다는 것이 진실의 증거이거나, 진리습득의 증거일 수도, 이해했다는 증거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체험과 관찰도 중요하지만 그 소재를 갖고 생각하는 고찰, 즉 이성의 역활도 중요한 것이다. 경험과 이성이 겸비되었을 때만 진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 아닐까?
각 개인의 특수한 경험은 어떤 사연이 되고, 표현욕구의 동기일 수는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통해서 일반적인 진리와 진실을 깨달고 그것을 공감하려는 태도가 보다 세상과 친해지는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의 특수한 경험, 자신의 세상에 대한 이해만을 앞세우는 것은 일방적인 표현, 교육, 강요, 또는 어리광일 수는 있어도 화해의 태도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화해방법은 그의 영화속에 보여진 살인방법처럼 다양하지만 그 본질은 공히 공격적이다.
충격적인 화면을 클로즈업하여 관객에게 들이밀고 또 반복하여 보여주는 태도는 분명히 공격적이다. 그러나 이런 공격성은 “이제는 공격성을 이야기할 때 ‘성이나 폭력의 적나라한 묘사’같은 개념은 초월해야한다"라고 말한 한 영화학자의 말처럼 일차원적인 공격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작가가 지향해야할 공격성은 공격적 형식 또는 공격적 양식이어야 한다. 히치콕는 컬러시대였던 1960년에 <사이코>를 만들면서 그 유명한 샤워시퀸스의 흐르는 피의 붉은 색이 선정적으로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영화전체를 흑백으로 찍기로 결정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앞에서도 약술한 바와 같이 문제는 영화적 표현양식이다. 서사형식과 미장센, 촬영, 편집 등의 신선함과 그것들이 시너지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화학적 결합이 관건인 것이다. 어떤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스틸사진으로도 가능하며 어떤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소설로도 가능하다. 어떤 작가가 영화를 선택했다면 최소한 영화의 표현양식을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김기덕의 영화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히 드러나고 있는 전형적인 또는 고전적인 수준을 지나 진부함에 이른 영화적 표현양식은 분명 문제가 될 수 있다. 서사구조에서 동떨어진 이미지, 설명적 대사, 시간순으로 나열된 사건들, 편의적 시공간의 운용, 소위 ‘복선’의 단순한 전치, 비현실적 선인과 악인이란 인물구도, 평이한 음향의 운용 등이 그의 영화를 아마츄어영화로, 그를 세련된 영화언어를 구사하지 않는 감독으로 보여지게 만든 것들이다. 세련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진부해서는 안 된다. 물론 표현양식은 작가의 고유한 선택의 문제이다. “완성도가 나아지고 있다는 식의 평가는 거부한다”는 그의 말처럼 그것은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일견 무식해 보이는 김기덕은 사실 매우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다. 영화문법이라는 것이 김기덕에게 난제일 수는 없다. 그는 영화문법이라든지, 논리성이라든지, 리얼리티같은 것에는 가치를 두고 있지 않을 뿐이다.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습득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의 선택이다. 또 하나 유념해야할 ‘선택’은 관객의 그것이다. 영화작가 김기덕에게 표현양식의 선택권이 온전히 귀속되듯이 관객에게도 그 ‘감상양식’에 대한 선택권이 온전히 귀속된다는 것이다. 두 선택의 향방이 궁금할 뿐이다.
돌아 온 편지 <수취인불명>
다양성, 다가치의 시대이다. 김기덕은 자신의 말처럼 결코 ‘이단자’가 아니다. ‘엽기’나 ‘튀는 작전’으로 관심을 끌려는 것도 아니다. “내 색깔을 죽이면서까지 우회할 마음은 없다. 나 스스로 편하지 않으니까”라는 그의 말처럼, 김기덕은 상업영화의 관객동원 압력속에서도 묵묵히 이 세상의 이면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우리에게 다양한 인간군상과 굴곡 깊은 삶을 자신만의 색깔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엄청난 상상력과 에너지의 소유자인 그가 아니면 불가능한 행군일 것이다. 관념적인 평단과 무기력에 빠진 일군의 감독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그는 우리 영화계에 있어서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주어졌던 외면과 혹평은 정당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깨끗한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그에게 진 빚을 갚는 시작일 수 있다.
답장없는 편지를 계속 쓰고 있는 외로운 영화작가 김기덕, 그는 다섯 번째 영화 <실제상황>를 끝낸 후 “이 영화를 만들기 전과 만들고 난 후의 내가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저런 극단의(?) 경험들을 영화계에서도 다 해본 그는 변했을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변했을까? 그의 변화가 궁금해진다. 그가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변했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에게 전하고 싶은 작은 바램은 그의 특별한 상황에 대한 체험과 관찰이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는 고찰의 차원까지 이어지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의 여섯 번째 편지의 개봉을 기대한다.
푸른 고통을 그려내는 미완의 스타일리스트
김기덕 감독론 가작
2001.06.05 / 심수진
1. 프롤로그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목이 마르다. 그 갈증은 몇몇 물리적인 수단으로 해소되어 지는 생리적 갈급이 아니라 영혼의 한 켠을 생채기내는 아픔을 닮았다. 그는 일상의 나른한 행복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외딴 다락방으로 끌고 올라가 상처투성이 추억들을 잇따라 꺼내 들이미는 무표정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당황한 그들을 뒤로 하고 혼자 쓸쓸히 다락방 계단을 내려가는 청년의 뒷모습…
빛이 들지 않는 먼지나는 다락방에서 그의 만물상들은 때로는 기괴하고, 때로는 처연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불유쾌한 경험이지만 한편 눈물짓게 하는 슬픈 우화를 닮았다.
장자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장자는 자신의 처가 죽었을 때,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분(盆)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친구 혜자(惠子)가 놀라서 책망하자, 장자는 “기가 변하여 형체가 생긴 것이고,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생겨난 것이다. 그것이 이제 다시 변화하여 죽음으로 간 것일 뿐이다. 이것이 춘하추동 네 계절의 변화와 무엇이 다르겠는가”라는 말로 대신한다.
사람들이 삶의 표면에서 슬퍼하고 기뻐하는 모든 것, 즉 우리가 삶에서 그렇게도 집착하는 차이들이 장자의 입장, 도(道)의 견지에서는 무차이임을 의미하는 이 일화. 그러나 지금, 여기 ‘현실’에 서 있는 우리에게 그것은 너무 멀다…
2. 쓰러진 자들의 꿈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의 중심 세계는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계, 진부한 이야기 거리와 담론이 우세한 획일적 세계, 그러면서도 짐짓 ‘밝은’ 체 하는 빛의 세계이다. 이 일상의 중심부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기만과 부조리로 가득 찬 현실을 마치 아무 동요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 이면에 감추어진 빛바랜 상흔들은, 무참히 깨져, 속으로는 알면서도 그대로 좇아 갈 수 밖에 없는 ‘만성적 패배’, 즉 좌절된 이카로스의 꿈을 보여준다. 하지만 의식하든, 못 하든 우리는 ‘삶’이라는 불빛에 어쩔 수 없이 부딪쳐야만 하는 부나방이며, 그것을 추동시키는 힘은 바로 ‘욕망’이다.
김기덕 영화의 인물들은 흔한 말로 ‘밑바닥’ 인생들이다. <악어>의 용태, 고물장수 노인, 앵벌이 꼬마, <야생동물보호구역>의 청해, 홍산, 로라와 코린, <파란대문>의 진아, <섬>의 희진 등의 인물들은 ‘평균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혹은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쓰레기 더미’ 들이다. 그들은 한강 다리 밑에 투신하는 자살자들의 시체에서 ‘지갑’을 털거나(<악어>의 용태) 마피아의 해결사 노릇을 하거나 (<야생동물보호구역>의 청해와 홍산) 핍쇼장에서의 스트립 쇼(<야생동물보호구역>의 로라), 남루한 바닷가 여인숙에서의 매춘(<파란대문>의 진아) 등으로 살아간다.
김기덕 감독은 하위의 층위에 놓인 그들에게서 주류의 테두리 안, 익숙한 일상의 중심 세계로 편승하고자 하는 ‘상승 욕망’을 포착해 낸다. 그를 키워낸 건 8할이 마치 한강에 유입된 온갖 ‘욕망’의 찌꺼기들인 것처럼, 집단윤간을 당한 충격으로 자살하려던 현정에게 개처럼 달려들어 흘레하듯 엉덩이를 비벼대는 패악한 ‘용패’에게서, 또 동료가 그린 그림들을 훔쳐 팔다 발각되어 마치 ‘사악한 도둑 고양이’ 마냥 원한의 발길질을 흠뻑 당하는 ‘청해’에게서, 아니면 아무 표정도 없이 낚시꾼들의 좌대에서 다리를 쩍 벌린 뒤 지폐 몇 장을 받아쥐고 떠나오는 ‘희진’에게서 우리는 생(生)의 의미가 여지없이 일그러지는 듯한 수치의 감정에 순간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의 불가지성(不可知性)을 더욱 증폭시키는 그들 인물들의 생존의 몸부림, 그 욕망들을 목격한다는 것은 왠지 가슴을 턱 막히게 하는 묘한 우울의 체험이다. 더구나 그들에게 그것은 다가설수록 자꾸 ‘미끄러지는’ 사막의 신기루이기에. 김기덕 감독은 ‘밑바닥’ 인물들을 통해 사회의 부당함 또는 모순에 대해 공격적, 비판적인 성격을 드러내려기 보다 ‘삶’의 모순성, 곤궁할수록 더 치열해지는 역설적인 모습, 그것의 근간을 이루는 인간의 내밀한 ‘욕망’의 모습을 천착한다.
따라서 김기덕 감독의 인물들은 그들이 품고 있는 근원적 욕망의 측면에서, 우리 주변부에 소외되어 있는 열등하고 위악적인, 그래서 가학과 연민을 자아내는 객체라기보다, 무의식속에 잠재되어 있는 우리의 어두움, 바로 우리의 그림자들을 닮았다. 특히 김기덕 감독은 ‘욕망’ 그 자체 못지않게, ‘욕망’이 파생시키는 ‘사건’에 대해서도 강한 집착을 드러낸다. 인물들이 가진 ‘욕망’들이 그들 ‘운명’에 스스로 균열을 심어놓게 되는 구조, 그것은 처음에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혹은 어느 순간에 표면에 솟아오르게 된다. 이때 김기덕 감독은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 ‘욕망’을 반영하고 또 갈기갈기 찢겨진 이 ‘욕망’의 환영적 속성을 드러냄으로써 ‘생’에 대한 특유의 悲感性을 끌어낸다. 그러나 감독 자신은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냉정한 태도로 일관한다.
<악어>의 용태는 결코 동정할 수 없는 온갖 파렴치한 행각들로 점철되었던 인물이지만 현정을 사랑하게 되면서 삶에 대한 소박한 욕망을 끄집어 낸다. 고물장수 노인의 생일에 케잌을 사오는 가 하면 그림을 그리는 현정에게 미술 도구들을 선물한다. 그러나 영화는 끝내 결합되지 않는 용태와 현정의 모습을 비춤으로써 끝이 난다. 용태가 물 속에 꾸며놓은 안락한 ‘가정’의 모사체-액자와 쇼파가 있는-와 이미 시체에 불과한 현정과 자신을 결박하는 ‘수갑’은 진짜 ‘현실’의 아늑함과 결속감을 느끼게 할 수 없는 이마주, 즉 시뮬라르크이다.
<야생동물보호구역>은 이국 땅 파리에서 그토록 처절하게 ‘버텨왔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청해와 홍산의 ‘종생기(終生記)’를 보고 있는 듯 하다. 천신만고끝에 종국엔 바닷가에서의 사활을 건 탈출이 그들의 마지막 고단한 삶의 여정처럼 느끼게 하던 영화는, 그들의 우정과 동물적 생존력을 느끼기도 전에 어이없는 죽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의 파국은 김기덕 감독에겐 정해진 수순과도 같다. 완전한 자기 소유의 ‘공간’에 대한 욕망, 여기에 사랑하는 여자와의 결합, 또 비록 일방향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타인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질적 외로움이 그들의 ‘죽음’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섬>의 희진은 낚시터에서 매춘과 낚시 재료 장사로 살아간다. 그녀는 저속하고 쾌락적인 속물 낚시꾼들 속에서 살인의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는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다른 좌대의 속물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욕정을 드러내자 순간 분노한다. 희진은 내면에 상처를 입고 남자의 좌대에 티켓 다방 여자를 직접 들여보내게 되고, 결국 그녀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서서히 파국을 맞는다. 남자에게 호의를 품은 티켓 다방 여자를 혼만 내주려던 희진은 자신도 모르게 두 가지 살해의 가해자가 되 버리며, 그 뜻밖의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그녀에게서 더 비끄러진다. 따라서 남자가 떠나가는 저수지에 울려퍼지는 그녀의 비명 소리는 더욱 처절하고 고통스럽다. 희진이 남자의 內傷과 고립을 감지하게 되는 사건, 즉 남자가 목에 낚시바늘을 처넣으며 자살하려던 그것은 상처의 치유과정을 통해 남자에 대한 그녀의 심리적 욕망을 상승시키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그 사건은 비극을 예고하는 前兆가 된다. 파멸로 치닫게 하는 ‘욕망’의 예정된 길, 마지막 하이 앵글로 잡힌 희진의 그로테스크한 나신에서도 김기덕 감독의 초월한 듯한 시선은 변함없다.
이러한 인물들이나 사건들을 통하여 김기덕 감독이 단순히 삶에 대한 비관이나 염세의 태도를 조장시키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인물들을 좌절시키는 어떤 것, 즉 ‘어쩔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는’ 모습을 통해 생(生)에 대한 불교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는지 모른다. 즉 ‘개체’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먼저 주어진 공간, 단지 그 객관적 선험의 공간이 일정한 방식으로 마름질될 때 형성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기본적인 불교의 입장과 닿아있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이러한 인식을 드러내는 표현방법에 있어 김기덕 감독은 인도식의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보다 동북아식의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에 가깝다. 동북아식 불교, 즉 선불교는 인도 불교에서 보이는 언어를 통한 깨달음, 형이상학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현장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입장이다. 선불교의 역사는 경전들의 복잡한 논리 체계의 역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들의 생생한 체험의 역사이다. 따라서 자신의 영화속 인물들의 삶을 통해 일종의 ‘깨달음’을 보이고 있는 김기덕 감독은 고독한 선불교도(禪佛敎徒)다.
그러나 이러한 김기덕 감독의 ‘논리의 법칙’이 영화속에서 미학적으로 충분히 녹아들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는 있다. 사실 김기덕 영화는 저예산 영화임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배우들의 편차가 큰 연기와 엉성한 편집 등을 노출하고 있다. 또한 애인의 사주를 받은 불량배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한 ‘현정’이나 자판기 안에 있던 노인을 자신도 모르게 살해하게 되는 ‘앵벌이 꼬마’, 옛애인에게 상습적인 갈취, 폭력, 강간 등에 시달리는 ‘코린’ 등 인물들의 하나같이 처절한 상황은 내레이션의 과잉을 느끼게 하는 측면도 있다. 더구나 주인공들의 욕망이 가닥을 지어 ‘사건들’이 발생하고 그것이 주인공들에게 부메랑이 되는 구조 자체도 엄밀히 말해 김기덕 감독만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기덕 감독은 영화의 공간을 자신의 말처럼 ‘대체적으로 우울하고 음습하고 폐쇄되어 있는’ 공간으로 설정함으로써 다른 영화들과 차별한다.
3. 반복적 모티프들과 ‘우울’의 이미저리(imagery)
영화는 넓은 의미에서, ‘말해진 것’ 만으로 의미하는 것을 유추하도록 장치된 고도의 ‘상징’이다. 그리고 이 ‘상징’은 한 영화안에서는 감독의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다양한 방법으로 실현시키는 일종의 修辭 기법이 된다. ‘은유’의 경우 원칙적으로 ‘말해진 것’과 ‘말하고자 하는 것’ 사이의 유사성이 전제로 되는 데 비해, 상징은 단순히 그렇지 만은 않은 데 특징이 있는, 연상 작용에 기초를 두고 있는 기법이다. 그러나 ‘은유’가 한 사람의 작품세계에서 반복적, 지속적으로 사용될 경우 나중에는 ‘상징’으로 변모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김기덕 영화의 반복적 소재들에서 이런 ‘은유’와 ‘상징’들이 발견된다. 김기덕 감독은 네 편의 영화 <악어> <야생동물보호구역> <파란대문> <섬>을 통하여 고등어를 비롯한 어류, 수갑, 미술 작품과 미술을 하는 사람들, 물을 지속적으로 등장시킨다. 김기덕 감독의 매력은 이러한 소재들을 일상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 돌발적으로 위치시킴으로써 새롭고 역동적인 의미, 혹은 이미지 세계로 끌어들인다. 이것은 토니 레인즈가 “김기덕은 비주얼적인 부분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다. 그 재능이 비록 영화의 전체에 걸쳐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도 그의 영화 속에는 항상 우리에게 기습하듯 다가오는 놀라운 부분이 있다.”라는 말과 무관하지 않다.
김기덕 감독은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코린이 남자에게 얻어맞는 흉기, 나중에는 반전되어 코린이 남자를 살해할 때 사용되는 흉기로 ‘고등어’를 사용한다.-사용이라는 어휘가 좀 부적절하긴 하지만- 남자의 벌건 복부에 찔려진 고등어의 흉상, 멍청한 눈을 커다랗게 치뜬 고등어를 한동안 응시하듯 바라보는 카메라는 남자의 복부에서 쏟아져 나온 새빨간 피와 등푸른 고등어를 대비시킴으로써 강한 보색 대비 효과를 보여준다. 또한 후각적 이미지에서 유사한 ‘선혈’과 ‘고등어’를 병치시킴으로써 독특한 죽음의 이미지를 생성하고 있다. <파란대문>에 오면 이 고등어가 진아의 ‘새장여인숙’ 가족에 대한 우호적인 의미로 잠깐 등장한다. 그러나 담장에 벽화를 그리던 아버지에게 그것을 건내줬던 진아는 ‘가족’이 아니라‘성적 욕구’의 대상이 될 뿐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는 위의 고등어를 비롯, 물과 관련된 대상물들의 등장이 유독 많다. 그리고 그의 영화에서 이 ‘물고기들’은 인물들이 자신들과 심리적으로 동일시하는 등가물, 즉 개인적 상징으로써 기능한다. <파란대문>의 진아는 바다에서 온 여자다. 그러나 푸른 바닷물에서 맘껏 헤엄쳐 보고 싶은 맘과 달리 지금은 비닐봉지 안의 좁은 물에서 숨쉬는 ‘금붕어’이다. 진아는 남자와 섹스를 하면서 끊임없이 비닐봉지를 부여잡는다. 고통이 극대화되면서 힘이 들어간 비닐봉지는 터져버리고, 물이 철철 흘러내리는 방바닥 위에 동그마니 내팽개쳐진 금붕어. 그것은 곧 ‘진아’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섬>에서 이 물고기들은 희진과 남자가 서로 상대방을 등가시키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희진이 물고기에 전기충격을 주며 바닥에 던져버리는 행위는 남자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때 물고기는 남자의 등가물이 된다. 또한 남자에게도 도마에 물고기들을 올려놓고 마구 토막내는 행위는 여자에 대한 증오를 표현함과 동시 여자를 심리적으로 내려치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사실상 물고기가 있다면 물고기의 모태가 되는 물이 나오는 것은 인지상정. 김기덕 감독은 <악어> <야생동물보호구역> <파란대문> <섬> 네 편의 영화에서 ‘물’이라는 공간적 배경의 설정과 ‘물’이 가진 원형적 상징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악어>에서 물은 주인공 ‘악어’의 거주지이다. 악어가 육지와 호수를 넘나들며 살아가 듯 주인공 ‘용태’도 한강 다리 밑과 한강속을 넘나든다. 강의 표면은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들로 더럽혀져 있지만 수면 속으로 침잠한 ‘용태’에게 물은 ‘씻김’, ‘정화’의 공간이 된다. 물속에서 용태의 세상을 향한 ‘가시들’이 씻겨지며 사물들은 세속의 흔적을 벗고 새롭게 탄생된다.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물은 청해와 홍산이 ‘죽음’과 각투를 벌이는 장소가 된다. 허나 <악어>의 ‘죽은’ 용태가 사는 물속이 그들에게는 회생의 장소가 된다. <파란대문>과 <섬>에서 물은 아예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된다. <파란대문>에서 바다는 진아의 심리적 고향이 되며 그녀의 內傷을 보듬어 주는 모성과 같다. <섬>에 오면 물은 이전 영화들의 다소 관습적인 상징에서 보다 개인적인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감독의 “사람들은 내 영화 속의 공간이 너무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게 우리들의 일상에서의 느낌과 비슷하다고 봐요. 사실은 서울에서도 그런 곳이 산재해 있어요. … 여기 나오는 인물들이 서로를 망가뜨려가는 모습이 서울에서 이기적으로 서로 부딪치고 집착하는 보통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물이라는 공간은 더 큰 세상을 표현하는 것이고 보다 심하게 말하자면 지구 전체가 물이라는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겠지요. 그 위에 색색깔의 집들은 우리들의 각양각색의 삶일 수도 있구요.” 라는 말과 잇닿아 있다.
중요한 것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에서 이런 반복적인 ‘물’의 등장은 김기덕 특유의 ‘색채미학’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감독은 미술을 공부했던 자신의 이력을 반영하듯 개개의 영화들에서 개성있는 미장센을 연출하고 있는데, 이때 ‘색채’에 대한 김기덕 감독의 노력은 특별한 것처럼 보인다. 김기덕 감독의 ‘색채’는 현란하다거나 은유적이기 보다,반복적 색채를 통한 하나의 공통의 ‘이미저리(imagery)’를 형성하려는 의도를 가지는 것 같다. 개개 이미지들을 통합하고 조정하는 구성 단위가 ‘이미저리’라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에서 드러나는 공통의 ‘이미저리’를 나는 일종의 슬픔, 때로는 병적이기조차 한 우울함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기덕 감독이 이러한 ‘이미저리’를 구성하는데 금속성 이미지와 미술을 하는 인물들의 등장은 빠질 수 없는 요소로 보인다. <악어>에서 용태가 현정을 ‘결박’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수갑’이 <섬>에서는 ‘낚시 바늘’이 되어 희진이 남자를 속박하는데 사용된다. 한편 미술을 공부한 김기덕 감독의 자전적 페르소나는 <악어>의 현정, <야생동물보호구역>의 청해, <파란대문>의 진아 등으로 전이되며, 때로는 방에 걸린 ‘미술작품’이라는 무생물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요소들의 유사한 반복을 통해 김기덕 감독은 몸보다 컸던 열망들이 풀리면서 내는 가슴패기 시린 쓴맛, 무거운 슬픔의 ‘이미저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모티프들의 상징성과 그것을 통해 형성되는 독특한 ‘이미저리’에도 불구하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이 영상 언어로서의 미학적 기능에 탁월하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사실상 김기덕 감독이 쇼트라든가 앵글, 편집 등과 박자를 맞춰 특유의 색조, 톤을 부각시킬 수 있게 된 것은 데뷔작 <악어>와 <야생동물보호구역>의 무수한 시행착오로부터 <파란대문>을 지나 <섬>에 이르러서인 것 같다. <섬>에서 희진의 비정상적일 만큼의 집착을 한껏 뒷받침하는 저수지의 수상한 ‘분위기’들은 김기덕 감독이 비로소 프레임을 자신만의 완전한 화폭으로 장악하기 시작했다는 징조처럼도 보인다. 따라서 김기덕 감독의 전(全) 작품들이 가지는 기묘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야말로 김기덕 감독의 진정한 시작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4. 반페미니즘의 基低
김기덕 감독의 <악어> <야생동물보호구역> <파란대문> <섬> 네 편의 영화들 속에 등장하고 있는 여성들은 주로 ‘창부’가 주인공이거나 ‘창부’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인물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녀들은 폭력배들에게 집단 윤간을 당한 충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때문에 삶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여성이며 상습적인 구타와 강간을 막아낼 재간이 없을 만큼 가녀리지만 때로 사랑을 위해 위험한 일도 서슴치 않으며 ‘적’에게도 손수건을 꺼내 줄 만큼 착하다. 그녀들의 슬픈 눈동자와 마주치면 가슴이 저릿해지며 ‘적들’에게 향하는 ‘울분’으로 불현듯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만, 왠지 그녀들에겐 아무 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김기덕 감독에게 ‘창녀’나 ‘핍쇼장의 스트립 걸’, 아니면 고작 해야 동전 몇 푼인 광장의 퍼포먼스 여성은 현실의 외피를 벗겨내면 삶이 너무 무거운, 그저 ‘약자들’이다. 따라서 김기덕 감독에게 여성은 젠더라기 보다 모더니즘적으로 말하면 ‘바깥’, 사회 안에서는 ‘약자’라는 말과 동일시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에서 드러나는 ‘여성’을 이런 은유로서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의 영화들은 사악할 수 밖에 없다. 심영섭의 시각이 그러한 사례를 대표한다. 그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에서 주장되는 여성상은 ‘여성 성기론’일 뿐이며, 김기덕 영화들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들은 강간의 표현 미학에 매달리는, 동물적인 것도 짐승적인 것도 아닌, 사랑받지 못하고 보살핌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정신과 환자의 비극적인 복수 충동에 사로잡힌 환자들이라고 주장한다.
사실상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남성 캐릭터들은 성적인 충동을 억제하기 어려워 ‘개’처럼 배설해 내는-마치 동물의 욕동(慾動)을 보고 있는 듯한-쪽에 가까우며, 물리적 힘을 내세워 폭력이나 강간 등으로 여성 캐릭터들을 지배하려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에 대한 묘사를 통해 감독이 지향하는 태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단지 주인공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섹스 후에 지퍼 잠그는 것도 잊어 버려 딸에게 그것을 들통나는 아버지, 총각딱지를 뗀 후 배 위에 서서 만세삼창을 외치는 고등학생, 물고기만 낚는 게 아니라 매춘에 혈안이 된 속물 낚시꾼들과 같은 주변 캐릭터들 속에, 김기덕 감독은 철저한 ‘냉소’의 시선을 심어놓고 있다. 마치 ‘자연주의’ 문예사조의 작가를 지향하는 듯 김기덕 감독의 현미경 안에서, 性을 ‘사든’ 혹은 폭력으로 ‘빼앗든’ 충족시키고야 마는 저급한 장삼이사들을 통해, 우리 사회에 깔린 남성 중심의 성문화는 매섭게 포착된다.
‘여성 캐릭터’에 대한 묘사 측면에서 김기덕 감독은 ‘매춘’ 여성이라는 주된 여성 캐릭터들을 등장시킴으로써 페미니스트들의 분석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처녀/창녀라는 도식에서 김기덕 감독은 오히려 ‘창녀’에게 성녀(聖女)의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다른 반페미니즘 영화들과 거리를 두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심영섭이 서로 매춘을 공유하는 자아 상실의 융합 단계를 삶을 나누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라고 <파란대문>을 악평하고 있듯이 그의 처녀/창녀 도식은 이미지만 기존 영화들과 맞바꾼채 착한여자/나쁜 여자 도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더구나 <섬>의 ‘희진’이라는 캐릭터는 매춘 여성의 이상(異常) 심리를 그려냄으로써, 매매춘의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인식은 후퇴시키고 매춘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상대적으로 부각시킬 위험도 크다. 사실 김기덕 감독에게 ‘창부’의 이미지는 <파란대문>의 ‘진아’에서 목격되듯 1970년대 이전 ‘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매춘을 해야만 했던 가난한 ‘누이’의 모습처럼 단순하다. 여기에 ‘창부’의 역할을 사회의 욕망을 걸러주는 사회의 ‘하수구 노릇’ 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혐의도 상당히 짙다.
또한 김기덕 감독은 여성이냐 남성이냐 하는 구분 없이 그들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약자들’임을 표현하려 하면서도, 한편 그들 속에 또다시 남성 중심이라는 묘한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 모순을 범하기도 한다. 이는 <야생동물보호구역>의 ‘코린’과 ‘로라’처럼 혹은 <파란대문>의 ‘진아’처럼 남성들에게 보살핌을 받아야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연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여성’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 잘 드러낸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있어 김기덕 감독이 드러내는 낡고 비통찰적인 인식만으로 그의 영화가 가지는 다른 가치들마저 사장시켜 버려서는 안될 것 같다. 김기덕 감독은 인터뷰에서 “영화작업을 하는 사람의 시선, 제도권하에서 균형을 잡아 온 기능적인 매끄러움, 아이템의 매끄러움, 지적임이 대표성을 띠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비제도권에 있는 사람들도 이 세상의 반이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이 이 세상을 보는 또 다른 섬세함이 있다는 거죠.그런 다양한 점이 보장되어야 겠죠.” 라고 말한 바 있다. 김기덕 감독은 영화를 통해 깊은 사유를 거친, 어떤 사상의 결정체를 보이거나 하는 지적인 부류의 감독은 아니다. 앞서 3번에서 그의 ‘이미저리(imagery)’에 대한 언급을 했거니와, 그의 특색은 ‘여성의 나체, 체인과 녹슨 탱크, 음습한 사회 이면의 풍경들’과 같이 그가 보았거나, 아니면 내면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닮은 현실 속 대상물-주로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는-을 통해 독특한 정서를 표현해 내는 쪽이라고 볼 수 있다.
5. 에필로그
내가 이 글을 통해 분석한 ‘김기덕 감독’의 특색은 사실 기존 논의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평범한 잣대들일 수도 있다. 더구나 애초에 내가 끌어들이고 싶었던 ‘후기 구조주의'는 다음 기회를 이용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점점 ‘가볍고’ ‘말랑말랑해지는’ 많은 한국영화들 속에서 전투하듯 영화를 찍고 있는 김기덕 감독의 ‘치열성’과 그가 영화들을 통해 드러내는 숨길 수 없는 ‘비판성’-물론 그게 전면으로 대두되는 것은 아니지만-을 좋아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이유를 묻지 않는 불확정성의 시대라고 철학가 이정우는 표현한 바 있다. 이유를 자꾸 따지면 촌스러운 것이 되고, 문화적인 작품들도 이해하기 힘든 불투명성을 일부러 증폭시키곤 한다는 것이다. 마치 지금의 한국영화 관객들에게 영화들이-외화나 방화할 것 없이-‘왜 만들었는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하는 물음들 따위는 던져버리고 ‘보기나 하라’는 무언의 강압을 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의 이 글이 적어도 김기덕 감독을 ‘성실하게’ 읽어내려는 노력의 흔적들을 발견해 낼 수 있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신은 인간에게 너무 비좁다. 생은 우리에게 너무 비좁다. 한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격렬히 비좁다. 나는 더 많은 불가능을 기다리는 기다란 행렬이다. 기다리는 일도 하지 않아야 하는 기다림이다. 차츰차츰 날이 밝아와 내 페이지는 다시 버려지고, 나는 허기진 내 경적 소리를 읽지 못한다. – 이수명 詩 <이력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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