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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는 바이러스다"


"난 서른 세 살에 처음 영화를 봤다. 세상이 너무 치열했고 난 고단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때까지 영화를 구경조차도 못했다. 그러다 문득 영화를 접하고 그 세계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수 십년을 산 시간 안에서 재생한 표현이라면 그것도 소중한 것이다"

김기덕을 인터뷰하던 날, 그는 약속장소인 경인미술관 안마당 구석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날 2시에 출강하는 대학의 강의를 마치고 약속시간인 7시가 될 때까지 그는 서울 시내를 걸어다녔다. 그는 늘 걷는다. 심지어 시간이 나면 집이 있는 일산까지도 걷는다. 걸으면서 김기덕은 주변 사람을 관찰하고 자기 영화의 아이디어를 얻으며 먹이를 노리는 늑대처럼 민감한 안테나를 사방에 뻗쳐놓고 감각의 촉수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김기덕의 겉모습은 거친 건달처럼 보이며 그런데도 자신을 늘 한없이 낮추는 기묘한 부조화를 연출하고 있다. 학력도, 배경도 없이 늘 최저의 개런티를 받으며 왕성하게 영화를 만들어온 그는 자기가 생존하는 법을 알고 있다. 잡초처럼 바닥을 기면서 살아남는 법을 안다. 평단의 홀대도, 관객의 무시도 그를 누르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는 지금 자신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층이 은근히 늘고 있다는 사실에 희열과 자신감을 갖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자신을 낮추는 김기덕의 겸손함은 대단한 야심과 자신감의 표현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기자들이 모여 있는 술자리에 그를 안내했을 때 그는 "모르는 사람과 함께 하는 자리는 내가 즐기는 것"이라며 슬렁슬렁 따라와서는 자기 영화를 모욕하는 한 기자의 입담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다 받아주며 농담으로 맞받아쳤다. 그렇게 웃는 그의 표정의 속내는 사실 편치 않다. 그날 낮 그는 <실제 상황>이 실험영화라며 극장에 걸어주지 않겠다는 시내 모 극장의 실력자를 면담하러 갔다가 퇴짜를 맞고 장문의 편지를 써서 사무실에 전해 놓고 온 길이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영화를 외면하는 세상에 대해 불퇴정신으로 맞서고 있다. 그것이 그의 영화의 기저에 깔려 있는 생명력이며 그의 삶을 지탱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그 에너지가 있는 한 김기덕의 영화는 앞으로도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필름 2.0이 <실제 상황>으로 다섯 번째 영화를 공개한 김기덕을 만났다.

<실제 상황>의 주인공은 주변에 죽이고 싶은 인간들 투성이다. 사방 1킬로미터 안에 죽이고 싶은 사람이 그렇게 많은가.

영화적 비약이다. 주인공의 심리적 이동공간을 축약한 것이지. 서울 부산 대구를 이동하는 거리를 동숭동 1킬로 안 공간에서 모두 처리한 것이다. 주인공처럼 산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내 예술적 양심에 비춰 추호도 부끄러움이 없다. 이래 봬도 난 양심적인 사람이다.(웃음)

상상 속에서나마 미운 사람을 모두 죽여버리겠다는 극단적인 발상은 여전히 김기덕답다.

현실에서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 현실에서는 그런 인간들을 죽일 수 없지만 상상으로는 가능하니까.

오로지 분노의 충동만으로 영화를 끌고 가는데. 인생을 보는 감정의 색깔이 너무 단조로운 것 아닌가.

분노 충동만 있는 게 아니다. 시나리오를 써놓고 이창동 감독과 토론했는데 '충동은 수 십 가지다. 살인충동만 있는 게 아니다. 그리움도 충동'이란 말을 들었다. 물론이다. 주인공이 옛날 애인을 만나러 간 것은 그리움 충동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 후반부에 주인공이 발가벗고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도 그리움의 소산이다. 자궁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자기 안에 침잠된 것을 씻어내는 굿이 아닐까. 자기 혼자 심리적으로 방황하면서 저들을 죽이고 싶다, 그런 충동을 마음속으로 살풀이 한 게 아닐까.

그건 주인공 핑계를 댄 당신 김기덕 감독의 살풀이가 아닐까. (웃음)

영화를 끝내고 컷이라고 외쳤을 때 편안함을 느꼈다. 이 영화를 만들기 전과 만들고 난 후의 내가 다른 것 같다. 다음 영화를 만들 때 내 상태가 어떨지 나도 궁금하다.(웃음)

<실제상황>에는 못 보던 배우 얼굴이 많이 보인다.

원래 주인공 역은 조재현씨에게 맡기고 싶었는데 출연료 때문에 그가 거부했다. (웃음) 돈 때문에 출연 안 한 사람 몇 명 있다.

제작자에게 더 달라고 하지 그랬나.

난 그럴 때 빨리 대안을 찾는 편이다. 시시비비를 따지기 싫고 제작자에게 개런티 얼마의 배우를 원하느냐, 그럼 빨리 그 액수에 맞는 배우를 캐스팅한다.

대부분 연극배우인가.

그렇다. 나 칭찬해줘야 한다. 나만큼 새로운 연기자를 자주 쓰는 한국영화감독도 없다. (웃음)

조재현씨는 당신의 얼터 에고라고 해도 좋을 배우였는데.

참 뛰어난 배우다. 하지만 출신성분은 다르다. 그는 부자이고 나는 가난하고. 난 잡초처럼 뒹굴며 살아왔으니까. 혹시 내가 한동안 무식해 보였지 않나?(웃음)

그랬다. 해병대 출신이라 하고 늘 군복만 입고 다니고.

아하, 밀리터리 룩.(웃음)

당신 데뷔작 <악어>를 봤을 때 강간하는 장면 때문에 질렸다. 가장 끔찍했던 건 여자를 강간하는 것도 모자라 남자가 남자를 포악하게 강간하는 장면이다. 위악적으로 보였다.

내 표현이 직설적이기 때문이다. 위악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현실에 존재하는 체험의 하나다. 이태원에 가봐라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모든 사람이 우회하려고 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이 김기덕은 바로 질러간다. 화면에서 잘라낼 수 있지만 자르는데 따르는 위험을 알기 때문에.

교과서에는 우회하는 것이 미학일 수도, 직설적이지 않게 빙 둘러 표현하는 것이 더 깊이를 얻는 미학적 공력일 수도 있다고 나와 있다.

그건 김기덕적인 것이 아니다. 내 색깔을 죽이면서까지 우회할 마음 없다. 나 스스로 편하지 않으니까. 그럼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텔 미 썸 딩> <자귀모>, <여고괴담>, 이런 영화는 죽어도 못 만든다. 그러나 내 영화는 어느 한 장면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다.

표현태도를 바꾸면 서울 관객이 10만은 더 늘 것이다.

그건 당신보다 내가 더 잘 안다. <악어>, <야생동물>도 안전하게 갈 수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가 영화 속의 조재현 처럼 살고 싶어하겠는가. 그러나 내 영화는 관객의 열등감을 해소해준다. 내 영화에 한 번 익숙해지면 또다시 보고 싶어진다. 내 영화는 바이러스성이 있다. 현실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지닌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보면 감염된다. 얼마 전 칸에 가는 길에 <오! 수정>에 주연배우 이은주씨와 같은 비행기를 탔는데 그녀가 그랬다. "여기 감독님 매니아가 계세요." 이은주씨 어머니가 내 영화의 팬이었다. 50대인 그 분이 나를 직접 보고 어쩔 줄 몰라하며 좋아하셨다. 내 영화가 직설적이어서 오해받는 부분이 있지만 끝까지 가본 관객, 또는 열려 있는 관객에게는 더 절실하게 다가간다.

<섬>에서 남녀 주인공이 자해하는 장면은 순수하게 감독의 관념으로 지어낸 장면이다. 낚시바늘이 목구멍과 자궁에 들어갔다 나오고 게다가 자궁에 걸린 낚싯줄로 낚시하듯이 사람을 꺼내는 장면은 표현의 강도는 셀지 몰라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장면이 아니다. 표현의 충격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한, 감독의 관념을 강제로 설득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김기덕이 아직 100%가 안 되는 감독이다. 100%가 된다면 굳이 계속 영화를 만들고 있을 이유가 없다. 아직 60%밖에 보여주지 않은 감독이니까 그 진화과정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그런데도 직설 화법의 변화를 모색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악어> 나왔을 때 아마추어 영화, 이분법적이라는 비난이 있었다. 내 영화는 다분법적이며 어떤 해석에도 열려 있다. 또는 두 번째 영화, 세 번째 영화를 봐야 알겠다는 그런 말도 계속 나왔다. 이제 네 번째 영화를 만들고 나니 다음 영화를 봐야 알겠다는 말은 쑥 들어갔다. (웃음) 제작자들에게는 미안하다. 지금도. 이거 너무 김기덕적 영화 아닌가라는. 내 영화 전부 합쳐 3만이 안됐다. <섬>이 제일 흥행 잘 된 영화인데 서울에서 5만도 못 들었다. 그렇게 여배우가 신문 방송을 도배하듯이 했는데도 말이다. 다행히 해외에서 40만 달러 이상 팔렸다니까 안심이다. 그것 봐라, 너 김기덕, 잘난 척 하다 그렇게 되지 않느냐란 소리에 다소 가슴을 펼 수 있으니까.(웃음)

당신 영화는 남성적인 것을 동경하면서도 여성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 늘 여성에게 구원받는 설정이 들어 있다.

판타지가 아니라 나한테는 현실이다. 나는 이루고 사는데 남들은 그걸 판타지라고 그런다.(웃음)

정말인가? (웃음) 관계란 것이 의무를 요구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늘 구원을 얻나.

나는 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기 시간을 아끼는 관념, 그걸 순정이라고 부른다. 그게 지나치다. 시간을 너무 짧게 이해한다. 시간은 반복되고 재생되는 것인데 과거의 시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번 시간을 바치면 거기서 빠져 나오지 않으려 하고 자꾸 보상받으려 한다. 나는 빠져 나온다. 다시 만나도 집착하지는 않는다. 마인드 콘트롤이 잘 된다. 이제는. <섬>도 그 얘기다. 집착,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소유의 단계라고 믿었는데 그 단계 다음에 다시 소유의 단계가 온다. 그럼 그 다음에는... 그 얘기다.

당신 영화에서도 드러나지만 그건 참 굉장한 에너지다.

그런 에너지는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창조 에너지로 바뀌는 것이다. 나는 그걸 영화 만들 때 이용한다. 내 체험을. 난 오히려 그 관계의 체험에서 에너지를 얻는 편이다.

당신 영화의 섹스는 보듬고 감싸안는 것이 아니다. 공격적이다.

사람들은 섹스를 고결한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여자들은. 첫 번째 섹스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이기 때문에 공손하지만 인간을 알면 알수록 편집이 생긴다. 일단 상대의 육체를 접수했다 싶으면 그때부터 그의 이면에 있는 것까지 다 갖고 싶은 소유욕에 공격심리가 생긴다. 남자들은.

그건 여자들도 그렇지 않을까.

그렇지. 섹스는 말로 하지 않지만 그렇게 공격의 수많은 뉘앙스의 표현이다. 그래서 난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다. 내 영화는 마무리, 끝을 보고 싶은 욕구의 표현이다. 영화로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 지나친 마음, 이 마음 끝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게 궁금하다. 사실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지. 섹스를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게. 살아가면서 섹스 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거든.

하하하.

그렇지 않나.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식으로든 결핍이다. 해도 결핍이고 안 해도 결핍이다.

그렇다. 또 다른 차원이 있다. 섹스란 것이 도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지상 감독은 그걸 연구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는. 나보다 한 수 높은 것이지. 나이도 나보다 많고. 내가 질문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대답을 하는 형태가 아닐까.


당신 영화의 섹스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내 영화에는 행복한 섹스가 없다. 아프니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아플 때는 자위를 시켜주거나 섹스해 주는 것이 진통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난 섹스 장면을 빨리 찍어버린다. 왜냐하면 내가 질투가 나기 때문에. (웃음)

평론에 대해 불만이 많지 않나.

평론가들은 서구 영화 100년 사를 놓고 정리된 범주에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생성되는 것도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이 김기덕의 영화가 꾸준히 그런 것을 지속한다면 고다르, 베르톨루치가 그런 것을 해낸 것처럼 가능하지 않을까. 솔직히 서구 영화는 100년 동안에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줬다. 그러니 이제부터 김기덕의 영화로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자신 있나.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 <매그놀리아>에서 개구리 비는 되고 <파란 대문>에서 여름눈은 안되고. 그렇지 않은가. 말을 타고 때리라는 것이다. 타지도 않은 채 뺨만 찰싹거리며 때리지 말고.

좋다. 서로 지켜보자.

난 서른 세 살에 처음 영화를 봤다. 그때 파리에서 본 영화가 <양들의 침묵>, <퐁네프의 연인들>, <연인>이었다. 세상이 너무 치열했고 난 고단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때까지 영화를 구경조차도 못했다. 그러다 문득 영화를 접하고 그 세계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수 십년을 산 시간 안에서 재생한 표현이라면 그것도 소중한 것으로 봐달라.

내가 쓴 것도 기분 나빴는가. 평을 열심히 읽는가.

나에 대한 글이니까. 누구보다 먼저 읽는다.

<실제 상황>은 원래 탈영한 해병대원이 벌이는 인질극을 만들려던 계획에서 변경해 만든 영화로 알고 있다. 그 영화도 찍을 것인가.

그렇다. 당장은 말고. 그럼 <실제 상황>과 너무 비슷하니까. 음, 열 개 이상의 기획이 있다. 그 중에는 노인의 사랑, 집착을 다룬 영화도 있다. 노인의 성욕에 대해서 한국영화가 분명히 얘기할 때가 됐다. 안성기씨에게 역을 맡기고 싶다. (웃음)

2000.06.30 / 김영진 편집위원  








"난 내 방식대로 찍는다"

2000.04.13 / 오동진 기자  

저예산독립영화 작가로 독특한 행보를 이어 온 김기덕감독이 최근 자신의 4번째 작품 < 섬>을 완성했다. 22일 개봉을 앞두고 있지만 그는 벌써 5번째 작품 <실제상황>의 작업에 들어 갔다. <섬>은 그의 지금까지의 영화작업 과정에서 처음으로 메이저급 영화사인 '명 필름'의 투자지원을 받은 작품이다.

김기덕감독이 4번째 작품 <섬>을 완성했다. 96년 <악어>로 데뷔, 97년 <야생동물보호구역>과 98년 <파란대문>에 이어 이번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는 한마디로 숨이 가쁘다. 더군다나 그 가쁜 숨을 고르기도 전에 이번에 5번째 영화를 찍겠다고 분주하다. 새영화는 하루만에 촬영을 다 끝낸다는 이상야릇한 작품이다. 마치 히치콕의 <로프>를 연상시키지만 정작 김기덕 본인은 히치콕의 영화들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

그의 영화찍기는 때론 단검 승부를 노리는 무사마냥 날카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다소 미비한 영화 공력탓인지 이합(二合), 삼합(三合)에서는 노림수가 뻔해진다는 것이 문제다. 정통 강호인이 아닌 바에야 자유로운 검법이 최고일 수 있다. 그러나 종종 고수 관객앞에서는 맥을 못출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어쨌든 김기덕은 한번쯤 겨뤄볼 만한 무사이긴 하다.

사람들이 김기덕에게서 느끼고 싶어하는 것은 한마디로 '날것'이다. 원시성과 도발성이야말로 김기덕 작품의 최고 미덕으로 꼽힌다. 그의 이러한 특질은 다분히 그가 지금까지 영화를 찍어 온 방식, 혹은 스타일에서 기인한다. 충분한 제작비나 힘있는 제작자를 잡으려고 동분서주하며 데뷔에 급급한 일부 신인감독과는 달리 그는 여건이 닿는 대로, 또 주어진 조건내에서 영화를 만들어 왔다.

"지금까지 평균 1년에 한편 꼴로 영화를 만들어 왔다. 가능한 한 계속 영화를 찍었으면 좋겠다. 근데 그게 잘 안된다. 1년에 한편도 내게는 적다. 6개월에 한번이든, 3개월에 한번이든, 아니면 한달에 한번이든 영화를 계속 찍을 능력이 내게는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남들이 한편을 찍는 돈으로 여러 편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평균 2년에 한편꼴로 영화를 만든다면 나는 그걸로 한 4편이나 5편을 찍을 수 있다. 근데 그렇게 할 기회가 잘 안온다."

일부 평론가들은 그를 저예산 독립영화작가로 분류한다. 그러나 일부 제작자들은 그를, 말 그대로 '싼' 감독으로 생각한다. 제작비가 싸니까. 연출료도 적게 받으니까. 김기덕의 작품은 바로 그렇게 작가주의와 싸구려 예술가의 묘한 경계선위에 서있다.

이번 <섬> 역시 한마디로 말해 '경계선위의' 작품이다. 제작 스타일은 종전처럼 저예산 독립영화 방식이었지만 기획과 마케팅은 국내 최고의 기획사라는 명필름에서 맡았다. 그 양자간의 합일이 최고선이 될 것인가 아니면 최악이 될 것인가. 다소 기계적인 판단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건, <섬> 개봉 이후의 흥행지표가 판단해 낼 몫일런지도 모른다.

<섬>은 경기도의 한 저수지 낚시터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욕망과 일탈에 대한 얘기다. 이곳에는 밤이 되면 낚시꾼들에게 몸을 파는, 분명 과거가 파란만장했음직한 저수지 여주인이 한명 있고, 어느 날 이 낚시터에 자신의 여자와 그 여자의 정부를 총으로 살해한(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봐서 직업이 경찰이었음직한) 남자가 숨어 든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인생 끝자락에서 만나는 자신의 연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찾는다. 그러나 남자에게 있어 이 여자는 자포자기한 인생의 마지막 유희일 뿐이다. 우연한 살인이 이어지고, 두 남녀는 세상의 끝을 향해 치닫는다.

영화는 온통 비현실적인 상황 구도로 이어진다. 남자가 자살하기 위해 낚시바늘 다발을 삼키면 여자가 그것을 뽑아 내고 고통속에 몸부림치는 남자의 위에서 섹스를 마친다. 도망가는 남자를 붙잡기 위해 여자도 낚시바늘 다발을 자신의 몸속에 집어 넣는다. 낚시바늘에 고기가 꿰이듯 남자는 여자에게 매이지만 몸안에 바늘을 넣고 빼는 장면은 아무래도 뭣하다. 영화는 얼마든지 비정상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 있지만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극한 상황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동물적이 될 수 있는 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동물적이고 원초적인 면이야말로 사람들의 삶을 지탱시켜 주는 가장 순수한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난 내 영화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원핵의 에너지를 느끼게 했으면 한다. 극단의 감정, 극단의 삶의 경험, 극단의 애정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남들이 겪어 보지 못한 삶의 경험이 유달리 많은 편이다. 농부로 키우려는 강압적인 아버지를 피해 군대에 갔고, 제대후에는 도시 노동자로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재능도 있었지만 당연히 정규교육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삶의 전환점이 됐던 건 무작정 떠난 프랑스행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 사회의 아웃사이더라 불리는 아랍인들과 어울려 지냈고 2년후 귀국해서는 이훈이라는 '이상한' 저예산주의자 감독과 어울려, 영향을 받았다. 그의 이 '처절한' 이력은 <악어>로 대변됐고, 프랑스에서의 경험은 <야생동물보호구역>으로 재현됐다.

"어찌 보면 <섬> 이전의 작품은 내 나름대로 지금의 사회에 대해, 그리고 내 가정과 무엇보다 내 삶에 대해 '날이 서 있는' 감정으로 찍은 것들이다. <악어>가 이 사회 아웃사이더들의 진면목을 보여주려 했다면 <야생동물..>은 내가 생각하는 우리 분단문제, <파란 대문>은 아웃사이더들보다 더 '아웃'돼 있는 사람들을 그리려고 했던 작품들이다. 하지만 <섬>은 조금 다르다. 어떻게 보면 많은 문제들의 해법은 사람들 각자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비열함, 저열성, 원시성같은 것들에서...<섬>은 내가 세상을 보는 또 다른 해석을 담고 있다."

한 작가의 삶이 치열한 경험으로 점철돼 있을 때, 작품에 대한 평가는 종종 '큰 범주'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십상이다. 한마디로 조금 모자라도 용서가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는 있다. 그래서 때로는 용기있는 비판이 필요하다. <섬>은 결과적으로 김기덕의 '공식적인' 실패작이 될 확률이 높다. 김기덕감독이, 세상을 이해하는 감성의 폭이 넓은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영화적 어법으로 논리화하는 기술력이 아직은,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환상적인 분위기를 회화적 이미지로 담아내는 감각은 탁월하지만 사람들의 본능적 욕망에 대한 그의 고찰은 다소 설익어 보인다. 김기덕감독은 그가 만들어 낸 제목 '섬'처럼 여전히 스스로가 고립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비판을 그리 뼈아프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 바로 다음 작품 제작에 정신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런 그의 '불타는 투지'만큼은 당연히 높이 평가돼야 한다.

"5번째 영화 <실제상황>은 하루만에 다 찍어야 한다. 35mm와 6mm카메라가 한 열몇대 동원돼야 하고, 사전 준비가 치밀해야 한다. 하루 24시간 내내 연기할 수 있는 배우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을 포함해 배우, 스텝들 모두 영화를 찍는다는 것에 대한 '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최악'(?)이 될지도 모르는 경험을 할 사람으로는 요즘 한창 주가가 오르고 있다는 주진모씨가 뽑혔다.










옹호와 혐오의 극단(極端)에 서다
<섬>

2000.04.20 / 김영진 편집위원  

김기덕의 영화는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태연하게 섞는다. 그것은 좌충우돌하면서 일 년에 한 편씩 영화를 찍고 있는 김기덕 그 자신의 괴력과 통하는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늘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심지어 기자 시사가 끝났을 때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는다. 그것이 김기덕 영화의 미덕이다. 그의 영화에 튀어나오는 미추의 감각은 분별이 없는 것이어서 그는 태연하게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섞는다.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파란 대문>, 그리고 네 번째 영화인 <섬>에 이르기까지 김기덕의 영화는 대낮에 많은 관객이 운집해 보는 것이 낯뜨거울 만큼 생경하고 충격적인 이미지로 보는 사람을 습격했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면서도 김기덕은 꾸준히 영화를 찍었다. 데뷔작인 <악어> 이래 일 년에 한 편 꼴로 영화를 만들었으며 이제는 고정 팬도 몰고 다닌다.

언젠가 영국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김기덕의 두 번째 영화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가리켜 `국제 영화제 심야 상영 프로그램으로 적합하다'는 칭찬인지 비난인지 애매한 평가를 내렸다. 그의 영화에는 상식으로 접수하기 힘든 기이한 감성이 스며 있다. 김기덕은 사회의 주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의 삶에서 성과 폭력과 좌절을 끄집어내지만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 논평이나 미학적 몸짓을 취한 적이 없다. 다만 광포한 원시성을 느끼게 할만큼 본능적인 삶의 에너지를 가감 없이 제시해놓고 있는 꼴이다. 그것은 또한 평단의 냉소적인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단과 관객 반응과 상관없이 일년에 한 편씩 영화를 찍고 있는 김기덕 그 자신의 괴력과 통하는 것이다.

<섬>은 저 예산의 다작 영화감독인 김기덕에게 중요한 이정표가 될 작품이다. 한국영화계의 변방에서 맴돌던 김기덕은 <해피 엔드>의 제작사인 명 필름에서 <섬>을 저 예산으로 만들었다. 그는 주류 영화계의 문턱에 발을 걸쳐놓았으면서도 여전히 비주류의 감성을 지켰다. <섬>은 이때까지의 김기덕 영화 가운데 가장 아름다우며 동시에 가장 추하다. 김기덕 영화의 개성이 극단에 닿아 이른 작품인 것이다. 미추의 분별없는 섞임과 광포한 에너지의 노골적인 돌출이라는 김기덕 영화의 특징은 그대로 관철되고 있으나 벌써 네 편의 영화를 만든 이 괴력의 감독에 대한 본격적인 비평문은 아직 제출되지 않은 상태다. 필름 2.0은 김기덕의 네 번째 영화 <섬>에 대한 논쟁을 부추기려고 한다. 우선 다섯 개의 비평문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