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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타 헤이워드 Rita Hayworth, 얼음 요정

라/ㅣ 2011. 6. 24. 19:42 Posted by 로드365



무사안일을 종교처럼 신봉하던 화려한 백수시절도 지나고. 회사와 마감에 꽁꽁 얽매여 살다보니, 이제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항상 문화백수를 자부해 온 인생이었으나, 요즘 나의 소원은 정말 눈물나도록 소박하다. 그저 늦잠 신나게 자고, 일요일 오후2시에 EBS에서 일요시네마를 마음 편히 보는 일이다. 개불알처럼 축 늘어져 강냉이나 입에 집어넣으며, 고전영화를 보는 것보다 나에게 더 즐거운 일은 없다.

영화를 찾아 하이에나처럼 서울아트시네마를 상습적으로 들락거리다 보면, 국내 시네필들의 취향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곳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럽예술영화의 신봉자들이다. 난해한 프랑스 영화를 틀면 극장이 터져나갈 정도로 모여드는 이들은 할리우드 고전을 상영하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휴식기를 갖는다. 오손 웰즈나 존 포드 회고전을 와본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얼마나 할리우드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알게 되었으리라. 폼내기 좋은 유럽영화에 대한 영화광들의 경도가 할리우드 클래식 영화에 대한 냉대로 이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는 EBS와 시네마테크에서 할리우드영화를 좀처럼 볼 수 없게 되자 난 마감 스트레스를 풀 겸해서, 클래식 DVD를 미친 듯이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지난 호 마감이 끝나고 DVD를 쌓아놓고 지켜보다, 예전에는 멍청한 글래머였다고 생각했던 배우에게 갑자기 시선이 끌렸다. 내 신경을 온통 자극한 그녀는 <커버 걸>의 전설적인 핀업 걸 리타 헤이워드였다. 요즘 세대에게 리타는 <쇼생크 탈출>의 브로마이드에나 등장하는 캘린더 걸이지만, 1940년대에는 전 세계 남성들을 휘어잡은 만인의 연인이었다. 황홀한 금발을 자랑하는 리타는 흔히 뇌쇄적인 몸이나 감미로운 키스를 내세웠던 자극적인 배우로 기억된다. 그러나 리타 헤이워드는 백치미로 무장한 육체파가 아니라, 그 이상의 매력이 존재하는 천부적인 배우였다. 난 DVD자켓 속에서 너무 늦게, 그녀를 재발견하게 된 셈이다.

내가 리타를 처음 본 것은 하워드 혹스의 <오직 천사만이 날개를 가졌다>(1939)였다. 사실 예전에는 조연으로 나온 여배우가 그녀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막연히 이 영화의 주인공 진 아서를 무색하게 만드는 도발녀 정도라 생각했었다. 놀라운 패션감각을 자랑했던 리타는 1940년대에 길고 붉은색을 지닌 네일 패션을 유행시켰는데, 그녀의 고혹적인 자태와 도발적인 손톱(페티시즘?)을 보고 싶다면 <테일 오브 맨하탄>(1942)을 슬쩍 엿볼 필요가 있다. 1930년대에 시적 리얼리즘을 주도했던 줄리앙 뒤비비에 감독이 이 영화를 연출했으며, 리타는 매력적이고 세련된 여인 에델로 나와 남성의 욕망을 자극했다. 특히 리타의 가느다란 손가락(클로즈 업)이 화면을 압도하고 있었다.

물론, 리타 헤이워드의 최고영화는 20대 중반에 찍은 작품들이다. 오손 웰즈와 결혼생활을 할 당시에 찍은 <길다>(1946)와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7)이 최고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필름 누아르를 사랑하는 팬들이라면 찰스 비더의 <길다>에서 얼음요정처럼 싸늘한 매력을 발산한 팜므 파탈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냉정한 자태로 숨 막히는 유혹의 눈길을 남성들에게 던졌다. 당시 <길다>는 리타가 남자배우 글렌 포드의 따귀를 너무 세게 때려 이를 두개나 부러뜨린 것으로도 유명했다. 여기서 그녀는 장갑을 슬쩍 벗어던지며 보너스로 놀라운 춤 솜씨와 노래실력까지 선보였다. 리타의 가장 멋진 키스 신은 <상하이에서 온 여인>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수족관에서 만나 밀애를 즐기는 마이클과 엘사(오손 웰즈와 리타 헤이워드). 이 부부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물고기 떼를 뒤로 두고 은밀한 키스를 나눈다. 흑과 백의 조화가 간결하게 이루어지는 이 미장센은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다.

개인적으로 짝사랑하는 리타의 영화는 후기작 <세퍼레이트 테이블>(1958)이다. 어느새 불혹의 나이가 된 리타의 얼굴에는 주름과 삶의 고뇌가 선명하지만, <선셋 대로>의 글로리아 스완슨처럼 배우로서의 성숙함이 느껴졌다. 당시 그녀는 4번의 이혼을 겪은 후, 이 영화의 제작자 제임스 힐과 살고 있었다. 여전히 영화에서 귀부인의 우아함을 간직한 리타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여신처럼 남자에게 담배를 요구하는 그녀의 도도함도 세월의 흐름을 거슬러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 영화의 엔딩, “우리가 같이 살아도 희망이 있을까?”라고 질문하는 버트 랑카스터에게 “우리가 그렇게 멀리 있었나요?”라고 그녀는 대답한다. 그 순간, 그녀의 슬픈 눈에 담겨있는 아픔이 나에게 너무 절실하게 다가왔다. 만약 리타가 자신을 물신화시켰던 춤과 노래를 버리고 진지한 연기자로서 더글라스 서커의 멜로영화에 출연했다면 어땠을까? 'THE END'가 올라오고 DVD플레이어가 정지하는 순간, 나는 그녀의 뛰어난 재능이 오히려 배우로서의 길을 방해한 것은 아닐까 반문하고 있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