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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 히데오

나/ㅗ 2001. 12. 13. 05:58 Posted by 로드365


야구를 잘하는 선수는 많지만,감동을 주는 선수는 흔치않다. 그를 설명해 주는 것은 강속구와 포크볼 뿐만은 아니다.그의 모습에서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묵묵히 칼을 가는 옛 武士의 정신을 볼 수 있다.  

어느분이 자신의 홈페이지에다 적은 멋있는 말이다. 노모가 그동안 보여준 굴곡 많았던 야구 인생 역정은 '가깝고도 먼 나라'인 한국 사람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나는 어찌된건지  어떤 선수가 잘나갈때보다 최고의 자리에서 물러나 쓸쓸히 내려갈때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 노모가 95년과 96년에 한창 날렸을때는 노모에게 별 흥미가 없었다. 남들이 박찬호와 노모를 비교하며 열을 올려도 나는 '노모는 노모고 박찬호는 박찬호' 라며  시큰둥했다.노모가 잘 한다고해서 배아프거나 하지도 않았다. 정작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된건 그가 다저스에서 쫓겨나 뉴욕으로 트레이드되고 거기서도 마이너로 내려가다  시카고 컵스의 더블A로 가게되고 거기서 마저도 또다시 방출됐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부터였다. 당시 노모는 트라이아웃에도 참가하면서 자신이 뛸 팀을 모색했다고한다. 난 당사자는 아니지만 승부세계의 비정함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고 한때 메이저 리그를 호령했던 노모가 그런 식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갈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난 노모가 끝난줄 알았다.아니 노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그러나 그는 우리들의 예상을 비웃듯이 노히트 노런을 하며 다시 돌아왔다.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면서... ...

한때 일본 야구 최고의 투수였고 메이저 리그를 초토화 시켰다가 정처없는 유랑 생활을 하며 떠돌다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 노모 히데오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어린 시절

노모는 1968년  8월 31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노모는 야구를 무척이나 좋아해 공원이나 빈 주차장에서 날이 저물도록 야구를 했었다. 어릴적 부터 프로선수가 되기를 희망했으며  부모님 또한 열성적인 야구팬이었기 때문에 어린시절 부터 야구를 몸에 익히게 되었다고한다.  
중학교 시절에는 외야수를 맡았고 투수를 시작한건 그 이후였다. 누구도  투구법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고  스스로 투구법을 가르치고 개발해 나갔다. 노모는 자신의 몸을 뒤트는 방식으로서 더 자연스럽게 던질수 있었다고 한다.
어린시절부터 프로선수가 되는 것을 자라면서 바라왔으나 메이져리거가 되는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고 한다. 메이져 리그에서 공을 던져야 되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한참후의 일이 었다고 한다.

독트한 투구폼과 포크볼을 개발한 고교와 아마 시절

세이지요 기술고등학교로 진학한 노모는 본격적으로 투수로서 공을 던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고등학교 야구선수들이 그러하듯 노모도 고시엔에서 경기를 하는 것이나 국내 고교 야구 챔피언쉽 경기에 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선수들 못지 않게 열심히 훈련했으나 그러한 기회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대신 노모는 여기서 자신만의 전매특허인 '꽈배기'투구폼을 스스로 개발한다.여기에는 노모의 코치 덕도 컷다. 일본의 고교 야구 선수들이 교과서에서 나오는 자세로만 훈련받고 강요당하는 현실에서  그는 노모의 특이한 폼이 강속구를 던질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이해했고 뜯어 고치지 않았다.만약 이때 투수 코치가 다른 선수들 처럼 억지로 투구폼을 교정할려고 했다면 오늘날의 노모는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 노모는 국가시합에 나가지 못했음에도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좋은 기록을 나타냈고 퍼펙트 게임을 기록했다.그러나  프로팀의 스카우트들에게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 당시에 노모는 단지 특이한 폼을 지닌 선수쯤으로 인식되었다.고등학교 졸업 후 오사카에 있는 일본 제철이라는 실업팀에 들어갔다. 그러나 주머니 속의 송곳은 뚫고 나오기 마련. 그의 재능은 이 시절부터 유감없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전매특허로 타자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는 포크볼을 바로 이 때에 익혔다. 포크볼을 자유자재로 던지게 되면서 노모는 일약 아마추어 최고의 투수로 떠오르게 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일본대표로 출전, 일본 최고의 현역포수로 인정받고 있는 후루타와 짝을 이뤄 은메달을 획득하는데 공헌했던 노모는 198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고향인 오사카 연고의 긴테스 버팔로스에 1차지명을 받으면서 프로에 입문했다.

일본 최고의 투수로 떠오른 프로 시절


노모가 입단 할 90년 당시는 일본은 물론이고 바다건너 한국에서도 떠들석한 사건이었다.우리 언론들도 신인인 노모의 소식을 발빠르게 전했다.그만큼 노모의 존재는 각별했다.10년뒤 마쓰자카가 입단 초기부터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것과 비교하면 금방 이해가 될것이다.
입단 첫해에 노모는 선풍을 일으키며 18승 8패  287 탈삼진 2.91의 방어율로 신인왕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그때 아마 6관왕이라고 떠들석 했는데 어쨌든 투수에게 주어지는 상이란 상은 다 가져간다. 이때부터 노모는 일본 최고의 투수로 단번에 자리를 잡게되고 우리나라에서는 선동렬과 비교되기 시작했다.
91년 17승 11패 287탈삼진 3.05의 방어율 92년 18승  8패 228 탈삼진 2.66의 방어율  93년에 17승  12패  276 탈삼진 3.70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4년 연속 최다승과 탈삼진 타이틀을 차지하며 일본 최고 투수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503구의 집념  

노모의 이야기 중에 절대 빼놓을수 없는 기적같은 이야기를 소개한다.최동원을 논할때 84년 한국 시리즈의 신화를 빼놓을 수 없듯 이번의 노모를 이야기할때 93년의 503구의 이야기는 절대로 빠질수가 없다.

시즌을 얼마남지 않은 롯데전에서 4회 롯데의 막스의 타구를 오른쪽 머리에 맞은 노모는 두개골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이 시점에서 다승 1위는 세이부의 쿠도와 오릭스의 노다로 15승을 올리고 있었고, 노모는 1승이 모자른 14승을 올리고 있었다.4년연속 다승왕의 기록은 물거품이 된듯했다.
그러나 노모는 머리에 볼을 맞은지 8일째되던 10월 9일 노모는 홈구장 후지이데라에서벌어진 롯데전에 선발등판했다. 이 시합에서 사사구를 9개나 허용하는등 제구력에 문제가 있었지만 7과1/3이닝을 던지면서 3실점만 허용 15승째를 거두었다.그로부터 4일만에 선발등판한 롯데와의 원정게임에서 연장 10회초 미찌야마의 내야안타로 역전 16승째를 거두었다.그로부터 2일후인10월 17일 세이부전 9회동점을 허용했지만,연장 11회초 무라카미의결승 적시 2타점으로 역전 그 후 마무리 전문아카호리에게 마운드를 넘겨 17승째를 올렸다. 마침내 올시즌 마지막 시합에서 승을 거두어, 17승의 노다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4년 연속 최다승의 자리에 올랐다.
두개골 골절이후 등판한 3시합의 투구수는 144개, 182개, 177개.
9일동안 503개의 볼을 던진 것이다.실로 놀라운 스태미너를 과시한 것이다.
내가 듣고도 전혀 믿겨지지않고 등골이 오싹하기까지한 얘기다.이것이 일본 야구에서 지금도 회자되는 노모의 503구의 전설이다.

미국 진출

그러나 그 이후 노모는 어깨 통증에 시달리게 된다. 503구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노모는 무리한 투구로 혹사 당했었다.
한번은 오기 감독에게 어깨가 아프다고 하니까 돌아온 대답은
"지금까지 네 부모가 준 어깨로 던졌으면 이제부터는 네 어깨로 던져라."
라는 기가막힌 대답뿐이었다.이때부터 노모가 메이저 리그 진출을 결심하게 됐다는 후문도 있다.
94년을 저조한 성적으로 끝낸 노모는 구단과 메이저 리그 진출을 놓고 은퇴까지 불사하는 강경 투쟁 끝에 다저스에 입단하게 된다. 당시 스포츠 신문에서 이 기사를 접한 나는 꽤 당황했다.일본 최고의 투수가 자칫하면 명예에 금이 갈지도 모르는 도박을 하는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145km의 직구와 포크볼만 가지고 있는 그가 메이저 리그에서 통할까라는 의구심도 가졌다.일본에서도 노모의 성공 가능성에 부정적인 편이었고 심지어는 5승도 못할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토데이도 선풍!



그러나 노모는 또 한번의 '토데이도' 선풍을 미전역에 강타하며 13승6패에 2.54의 방어율에 236탈삼진으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신인왕을 차지했다.동양에서 온 조그만 선수가 엄청난 낙차의 포크볼을 던지며 메이저 리그의 내놓으라하는 강타자들을 가볍게 삼진으로 잡는 모습은 미국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그 다음해에도 16승11패 3.19방어율 234탈삼진으로 작년의 돌풍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확인 시켜주었고 급기야는 9월에 투수들의 무덤 이라는 쿠어스필드에서 노히트 노런을 하며 또 한번 놀라게 만든다.

내리막길


그러나 노모는 97년을 기점으로 뚜렷한 볼위력의 감소로 하락세에 접어든다. 97년을 4.25의 방어율에 14승을 올린 노모는 팔꿈치 수술을 한 그 다음해에 완전히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전반기 내내 부진을 거듭하며 단 2승만을 거둔 노모는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 됐으나 거기서도 부진 결국 6승12패  4.92방어율 이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남기며 시즌을 마감한다.
99년 시범 경기의 부진으로 마이너 리그로 강등됐고 이에 반발해 커브스로 갔다가 다시 방출되었다. 이때 노모는 시카고 화이트 삭스의 트라이 아웃에도 참가해가며 선수 생활을 연장 시킬려고 안간힘을 썼고 결국 밀워키에서 25만 달러라는 메이저 리그 최저 연봉으로 계약한다. 한때 메이저 리그를 뒤흔들었던 그가 단돈 25만 달러의 퇴물로 전락한 것이다.98년과 99년 초는 노모에게 상당히 정신없고 힘든 최대의 시련이었을것이다. 훗날 노모의 에이전트인 노무라 씨의 회고에 따르면 "이때는 너무 힘들어서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굴뚝같았다."고 한다.
노모는 밀워키에서 후반에 승운이 따르지 않는 어려움 속에서도 12승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한다.
그 다음해에 디트로이트로 이적한 노모는 개막전 선발로 등판해 승리를 거두고 한때 방어율 2위를 하는 등 출발은 좋았지만 잦은 부상과 설상가상으로 팀타선의 도움도 받지 못하며 8승12패 492의 방어율로 시즌을 마무리하고 또 다시 방출 당한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보스턴의 유니폼을 입게된 2001년.노모에게는 야구외적으로도 시련에 부딪힌다. '일본 야구의 영웅' 이치로가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하면서 그에 대한 괸심은 줄어들었다.이치로에게 수백명의 기자가 따라다닐 동안 그에게 배당된 기자는 단 한명뿐이었다. 메인 중계도 그에게서 이치로에게 넘어가 그의 경기는 간간히 하이라이트로나 전해질 운명에 놓였다. 이제 그의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여겼고 나또한 '이제 진짜로 끝났군'생각했다.

또다시 일어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섰다.4월4일.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시즌 개막후 자신의 첫 선발등판. 노모는 잊혀져가는 설움을 실력으로 맞대응 펼치며 자신의 커리어 2번째이자 역대 메이저리그투수 통산 네번째로 양리그 노히트노런을 일궈낸 투수반열에 이름을 올린다. 투수들의 무덤에서 일을 저지르더니 자신을 아무도 봐주지 않을때 또 이런 감동의 노히트노런을 저질러 또한번 세인을 놀라게 했다.

올해 노모는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는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깊이 각인 시켜주었다.그렇지만 올시즌 노모는 쇠락한 기미가 역력한 건 부인할수 없다.직구는 140km이 채 안됐고 주무기인 포크볼도 예전에 비해 많이 무뎌졌다.그러나 그가 세인의 예상을 깨고 다시 부활했듯 내년에도 그의 멋진 활약을 기대해본다.


-장영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