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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홍철, 긍정의 달인, 노긍정 캐릭터

나/ㅗ 2008. 3. 26. 13:36 Posted by 로드365
세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자가 바로 하고싶은 일 하며 재미있게 사는 사람 아닐까? 
누구도 못 말린다.
이런 사람을 적으로 두면 힘에 부친다.


긍정의 달인, 노긍정 캐릭터는 설정이 좋다.
무슨 짓을 해도 미움받지 않고 다 통할 수 있는 캐릭터. 2011.6.30



노랑머리 외계인 노홍철을 해부하다. 2008.03.26

폭행사건 이후 5주…5개 프로그램서 종횡무진
"하고 싶은, 재미있는 일만 하고 살아가고파"



노랑머리 외계인을 생포했다. 생긴 것은 분명 지구인과 닮았지만 언행과 생각을 보면 틀림없이 다른 별에서 왔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게 되는 방송인 노홍철(29). 4년 전 방송계에 혜성을 타고 나타나 심각한 수준의 이질감을 던져주다 어느새 E.T. 이후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외계인이 된 연구대상.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면서 일찍부터 어둠이 깔린 25일 오후 경기 고양시 탄현 SBS 스튜디오에서 노홍철을 만나 직격 인터뷰했다. 2월19일 난데없는 폭행 사건 이후 꼭 5주 만의 일. MC를 맡고 있는 SBS TV ’있다 없다 플러스’의 녹화장을 찾은 노홍철을 녹화(1시간40분)를 포함, 4시간 가까이 관찰했다.

약속 시간보다 40분 정도 늦게 나타나더니 이날 처음 만난 기자를 보고 대뜸 “누나~ 어휴 누나~ 죄송해요. 이를 어째…. 정말 미안해요. 누님 내가 늦으려 했던 게 아니고…”라는 말을 1분여 속사포처럼, 아주 큰소리로 내뱉으며 단번에 혼을 빼놓은 그는 이어진 긴 대화에서도 계속 같은 톤을 유지해 정신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기자는 매분 매초 쉼 없이 다른 빛깔을 뿜어낸 그가 외계인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 이 외계인이 쏟아낸 말의 성찬은 실로 방대했다. 살아온 인생 행로도 특이하기 이를 데 없다. 지구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성심껏 간추린 게 다음과 같다.

    --건강은 회복됐나.
    ▲금이 갔던 갈비뼈 5, 6번이 아직 붙지 않았다.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했는데 방송에 바로 복귀하면서 회복이 느린 것 같다. 지금도 누울 때는 무척 아프다.

    --방송 스케줄이 무척 바쁘다.
    SBS에서는 ’있다 없다 플러스’와 ’일요일이 좋다- 체인지’, MBC에서는 ’무한도전’과 ’놀러와’, KBS에서는 ’위기탈출 넘버원’에 출연 중이다.

    --MC에 대한 욕심이 있나.
    ▲없다. 전혀 없다. 난 그저 방송에 나와서 즐겁게 논다는 생각이다. 내가 지금처럼 방송 일을 하게 될 줄도 몰랐는데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버는 상황에서 이 이상 무슨 욕심을 더 내나. 난 메인 MC를 할 그릇도, 능력도 안된다. 지금 출연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에서도 다른 MC들 옆 변두리에서 웃고 즐길 뿐이지 내가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것은 아니다.

    --’있다 없다 플러스’ 제작진은 생각이 다른 것 같다. 노홍철 씨를 메인 MC로 키울 계획이던데.
    ▲말도 안된다. 안 그래도 배성우 PD님이 첫 녹화 끝나고 그런 얘기를 하시길래 속으로 ’이 프로그램 내가 오래 못하겠구나’ 생각했을 정도다. 며칠 전 PD님 댁에 놀러갔을 때도 다시 그런 얘기가 나왔는데 내가 진지하게 ’전 그릇이 안된다. 그러지 마시라’고 강조했다(웃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밑바닥에서부터 일어선 사람인 줄 알았더니 서울 압구정동 현대고등학교 출신이라 놀랐다.
    ▲사람들이 날 좀 그렇게 본다(웃음). 그렇다고 우리 집이 부잣집은 아니다. 아버지가 대기업 다니셨고 내가 압구정동에서 성장하긴 했지만.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이력’이 있다. 노점상도 해봤고 온갖 장사를 다해봤다.

    두 살 위 형이 있는데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다. 형과 비교했을 때 난 특별히 잘하는 게 없었다. 적성검사를 하면 예능 관련 쪽 수치가 엄청 높게 나왔다.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는데 아버지가 공대를 가라고 해서 공대(그는 2월 홍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로 진학했는데 역시 다녀보니 재미가 없어 군대에 갔다(그는 병장으로 제대했다).
    제대할 무렵 ’뭘 하고 살아야 할까’ 고민하며 친구들에게 내 장기를 물었더니 “없다”고 하더라(웃음). 그러면서 친구들이 “넌 성격은 좋아”라고 하더라. 거기서 착안, 제대하면서 ’닥터 노의 성격 클리닉’을 창업했다.

    --무슨 소린가.
    ▲고민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해주고 돈을 받는 아이템이었다. 물론 그게 잘될지는 몰랐다. 군대 말년 휴가 나오면서 ’닥터 노의 성격 클리닉’ 전단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여기저기 붙이라고 시켰는데 진짜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는 것이었다. 그게 2002년 대학교 3학년 때였는데 “저~ 노 박사님”이라며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이 많아 정말 신기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재미있게 대화를 하고 돈도 벌었다.
    처음 시도한 사업이 잘되니까 내친 김에 과외에도 도전했다. 사실 내 실력에 무슨 과외인가. 하지만 틈새 시장을 노려 ’꼴찌들아 나랑 같이 시작해볼래?’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붙였다. 그게 적중했다. 어차피 난 실력이 안돼 꼴찌들이 아니면 가르칠 수도 없었는데, 꼴찌들의 엄마들이 광고를 보고 움직인 것이다. 그때 경기가 안 좋았을 때였는데 카이스트 다니던 우리 형보다도 내게 더 연락이 많이 왔다. 고3 때도 안 보던 수학 참고서(수학의 정석)를 펼쳐놓고 딱 진도까지만 맞춰서 예습해 가 가르쳤다.
    내가 원래 노는 것을 좋아해 공부도 공부지만 애들하고 잘 놀아줬는데 그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꼴찌들의 성적이 오르는 것이었다. 그때 ’재미있는 과외 선생님’이라고 잡지에도 나왔다(웃음).

    --아까 노점상을 했다는 얘기는 뭔가.
    ▲2002년이 월드컵 때 아닌가. 내가 사는 압구정, 강남 길거리에 젊은이들이 물밀듯 밀려나왔는데 당시 서울시에서 노점상을 싹 철거했다. 그때 내가 차에 파티용품, 분장용품 등을 싣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페이스 페인팅을 해주고 불꽃놀이 폭죽 등 다양한 상품을 팔았다.
    사실 장사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생활이 노는 것이라 평소 차에 그런 용품을 싣고 다녔는데,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을 해줬더니 반응이 엄청나게 좋고 돈도 주길래 내친 김에 장사를 했다. 월드컵 기간 하루 200만~300만 원씩 벌었다. 가방에 만 원짜리가 들어가지 않아 막 쑤셔 넣을 정도였다. 그때 일이 커지니까 친구들을 불러 같이 장사했는데 걔들에게는 월드컵 입장권을 사줬다.
    월드컵이 끝나니까 파티도 끝났다. 하지만 장사에 눈이 트인 난 망한 6장짜리 음악 CD를 4천 원씩 떼어다 지하철 약수역에서 좌판을 깔아놓고 1만 원을 받고 팔았다. 나도 많이 남는 장사였는데도 사람들은 “이렇게 싸게 파느냐”며 사가더라. 그때 역무원들을 피해 도망다니기도 했다(웃음).

    --확실히 장사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내친 김에 옷 장사에까지 손을 뻗쳤다. 사실 압구정동에서 자라 백화점밖에 모르고 살았기 때문데 시장이 뭔지, 도ㆍ소매가 뭔지도 몰랐다. 주변에서 장사를 하려면 시장을 알아야 한다고 해서 시장에 가서 연구했다. 그리고 인터넷 경매 사이트를 통해 옷 장사를 시작했다. 그때도 마케팅이 주효했다.
    경매 사이트라 다들 싸게만 팔 생각을 했지만 난 가격이 아니라 제품으로 승부했다. 제품에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내 상품 소개에 ’내가 홍대 기계공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니 이 제품이 마음에 안 들면 우리 과를 찾아와 내 뺨을 때려라’고 올렸다. 옷은 불티나게 팔렸다.
    그래서 2003년에 ’꿈과 모험의 홍철동산’이라는 사업자 등록을 내고 ’홍철.com’이라는 쇼핑몰을 오픈했다. 그때쯤 되니 학교에 나갈 시간도 없었다(웃음). 부모님 몰래 장사를 하려다 보니 사이트에 올릴 옷 사진을 집 화장실에서 몰래 촬영해 올리곤 했는데 이 역시 ’대박’이 나면서 잡지들에 소개됐고, 그 덕분에 매출이 더 뛰는 식이 됐다.
    그러다 ’파티 매니저’라는 직함을 만들고 또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노는 데 자신 없는 분들은 연락주세요’라는 광고를 내고 파티용품, 각종 게임 등을 준비해 고객을 맞았다. 서울대, 카이스트 학생들이 주 고객이었는데 내가 평소 노는 것을 전수하면서 돈도 버니 정말 좋았다.

    --오늘 녹화 도중 ’제가 여행사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했다. 진짜인가.
    ▲’파티 매니저’로 뛸 때 형광 팔찌가 인기였는데 원가 50원짜리가 시중에서는 1천 원에 팔리더라. 그런데 도매상에게는 50원에 팔아도 남는다는 얘기 아닌가. 알아봤더니 중국산이더라. 그래서 내가 직접 중국에서 물건을 떼어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중국행 배를 탔다(웃음).
    돈 아끼려고 비행기 대신 배를 탔다가 16~18시간 죽도록 고생해서 도착했다. 현지 재래시장, 짝퉁시장 돌아보고 오는 코스였는데 동행했던 여자친구가 하도 고생을 해서 나보고 ’사기꾼’이라고 했을 정도다. 그런데 이것도 여행 상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 비행기 타고 가서 대도시 좋은 데만 구경하고 오는 것과 전혀 다른 중국 여행. 역시 ’대박’이 났다. 당시 내 월급이 대기업 간부보다 많았다. 날 보고 가슴만 치시던 부모님 앞에서 내가 큰소리치게 된 시점이다(웃음).

    --그럼 방송에는 어떻게 데뷔했나.
    ▲여행 상품이 히트하면서 방송에도 여러 차례 소개가 됐다. 그때 m.net에서 VJ 제안이 들어왔다. 난 바빠서 방송 할 시간이 없었지만, 생각해보니까 신문에 작은 광고 한번 하려고 해도 수천만 원이 드는데 방송에 내가 출연하면 그 광고 효과가 엄청나겠다 싶었다. 그래서 ’닥터 노의 즐길 거리’라는 프로그램을 맡아 방송에 데뷔했다. 그게 2004년이었고 지금까지 오게 됐다. 데뷔 때 회당 출연료가 5만 원이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많이 번다.

    --본인보다 특이한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나.
    ▲물론이다. 특히 ’있다 없다 플러스’를 보면 많이 나온다. 이 프로그램은 신기한 것을 보여주고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담긴 사연을 소개한다. 그게 좋다. 다양한 사람들의 특이한 사연들이 정말 재미있다. 주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 프로그램이 딱 그렇다.
    사실 난 내가 특이한지 몰랐다.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었으니까. 어려서부터 내가 가장 중요시한 것은 자기만의 색깔을 갖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떤 색이든 자기만의 색깔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그 색의 주인공이 되는 것 아닌가. 방송을 하면서 내 빛깔을 잊고 절충점을 찾으려고 흔들릴 때마다 ’있다 없다 플러스’가 소개하는 특이한 사람들의 모습이 날 채찍질한다.

    --폭행 사건으로 돌아가자. 한마디로 유명해져서 생긴 일인데 그 사건 이후 달라진 게 있다면.
    ▲난 내가 얼마나 알려졌는지 몰랐다. 매일 방송국에 출근해 일을 하다보니 그런 것을 느낄 새가 없다. 그런데 폭행 사건으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됐다. 맞아서 너무 아팠지만 그 이후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너무 놀랐고 책임감을 느끼게 됐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그렇게 많은 취재진이 몰려올 줄 몰랐고, 그렇게 많은 분들이 찾아올 줄 몰랐다. 또 지금도 모르는 분들이 “괜찮냐”고 안부를 물어봐주시는데 정말 고맙고, 내가 방송을 하는 데 책임을 갖고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도 방송을 계속할 것인가.
    ▲난 무조건 하고 싶은 것, 재미있는 것을 하고 살 거다. 이렇게 말하면 철없다 하겠지만 이렇게도 살아가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방송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그거 할 거다. 난 큰 욕심 없다. 돈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도 과하다.
    지금도 방송에서 말을 많이 하면 목에서 피가 나오고 너무 아프다. 후두염은 달고 산다. 하지만 재미있어서 한다. 방송하는 게 재미있는데 돈도 주고, 해외 나가면 비즈니스석도 태워준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게 어디 있나. 분명 힘들지만 현재는 힘든 줄 모르고 방송에 푹 빠져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