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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세계, 보고 있나? 이게 만화야


이 책은 아마도, 이 책이 속한 장르 내에서만큼은, 그 어떤 작품에도 뒤지지 않을 걸작일 것이다. 대중음악으로 이 책을 설명해본다. [드래곤볼]이 비틀즈(The Beatles)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이고, [슬램 덩크]가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라면, 이 책은 아마도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정도의 지위 쯤은 가볍게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누적 판매 3억부를 넘으면서 [뉴욕 타임스]에 자신만만한 문구로 전면 광고를 내걸었던 바로 그 작품. 오다 에이치로(Eiichiro Oda)가 연재하고 있는 일본 코믹스 [원피스]에 대한 얘기다.



오다 에이치로는 뭐랄까, 그냥 '괴물'이다. 모든 작가에게 마감이라는 숙명은 피하면 지나가는 칼날이 아니라, 피해도 또 다시 돌아오는 회전칼날과도 같은 것일 텐데, 그는 이것을 아무런 부담감도 없이 풀쩍 뛰어넘는(것처럼 보인)다. 우선, 이른바 '빵꾸'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초인기 작가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는 건강 상의 이유를 제외하곤 거의 연재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어디 이뿐인가. 그는 매회마다 상당한 분량을 '심지어 재미있게' 그려내면서 단행본 기준 70권이 훌쩍 넘은 이 와중에도 여전히 마르지 않는 창작력을 보여주고 있다.


단적으로, '프리더'와의 결전 이후 개막장 스토리를 걷다가 흐지부지 끝났던 [드래곤볼]과 [원피스]의 현재를 비교해보라. 산왕전에서 쌈빡하게 막을 내린 타케히코 이노우에는 이런 측면에서 대단히 현명한 결정을 내린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북산이 산왕을 이기고 전국대회에서 우승까지 한다? 헐. 이건 누가 봐도 아니지 않나. 타케히코 이노우에도 인터뷰에서 "산왕과 북산이 붙으면 전력상 열번에 아홉번은 산왕이 이긴다. 그런데 한번 정도는 기적적으로 북산이 이길 수도 있을 것이고, 그걸 그린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나는 보통 2주에 한번 정도 만화방에 가서 구입하지 못한 신간들과 잡지들을 찾아서 본다. 그 주요한 이유 중 으뜸은 [원피스]의 스토리 전개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해서다. 그런데, [원피스]가 뛰어난 점은 스토리만에 있지 않다. 수시로 등장하는 새로운 캐릭터들은 넘치는 상상력으로 독자들을 매혹하고, 전체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주제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어떤 때는, 오다 이에치로의 뇌구조가 궁금할 지경이다.


그런데 잠깐, 주제의식이라. 만화 따위에 무슨 주제의식이 있느냐는 엄숙주의자들의 비웃음과 타매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도 하다. 기성용 선수가 캐피털원컵 결승전을 막 마친 지금, 감히 주장컨대, [원피스]의 주제의식은 묵직하고, 심지어는 '당대적'이기까지 하다. 지금부터 이것을 설명해보려 한다.


[원피스]의 스토리는 대강 다음과 같다. 대해적의 시대에 해적왕을 꿈꾸는 주인공 루피와 그의 일당의 최종 목표는 전설적인 해적 '골 디 로저'가 남긴 '원피스'를 찾아내는 것. 그러나 정의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세계정부는 '원피스'가 발견될 것을 두려워해 필사적으로 그들과 다른 해적들을 저지한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원피스'는 세계정부가 어떻게든 숨기고 싶어하는 거대한 치부이자 진실. 이로서 우리는 [원피스]를 해독할 수 있는 두 가지의 키워드를 모두 손에 넣었다. 바로 '정의'와 '진실'이다 .


내가 죽도록 싫어하는 타입의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정의롭다고 굳건하게 믿는 사람"이다. 누군가가 "나와 우리가 곧 정의"라고 깃발을 올리고, 마침내는 권력까지 잡았던 수많은 순간들을 떠올려보라. 역사가 말해주듯, 그에 속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타자들의 개별성은 대부분이 말살되거나 추방되었다. [원피스]에서 등장하는 '정의의 화신'은 해군대장 '아카이누'다. "해군은 곧 정의"라는 믿음 아래 그와 해군 정부는 한 나라를 지도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버스터콜'도 멍청한 장관을 통해 주저하지 않고 발동한다. 루피 일당만 제거해도 충분할 것인데, 이를 위해 섬 하나를 거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통째로 섬멸하려는 것이다. 다음은 작품 내에서 인류 최대의 비극으로 묘사되는 오하라 버스터콜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로빈'의 외침이다.


"그 공격에 인간의 감정은 없어.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다구. 건물도, 사람도, 섬 자체도... 존재하는 모든 것을 희생해 목적을 달성하는 악몽 같은 집중 포화. 그게 버스트콜이야!"


이를 들은 멍청한 장관의 대답.


"넌 한 시대를 뒤엎을만한 군사력 그 자체야. 그런 널 빼앗아가려는 머저리들을 아주 확실하게 저승으로 보내기 위해서라면 설령 병사 몇천명이 죽는다해도 미래의 번영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할 수 있지."


누군가에게는 그저 애들이 보는 만화일 수 있지만, 위의 대사를 보고 순간 몸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나에게는 이것이 정의를 입에 달고 사는 자기기만적인 도덕주의자들의 정언명령처럼 들렸던 까닭이다. 그렇다면, 정의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 우리가 마침내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원피스]는 그것이 다름아닌 '진실'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나는 정확히 이 지점에서 어떤 텍스트의 일부를 번뜩 떠올렸다. 바로 내가 사랑하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명저 [몰락의 에티카]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정신분석학을 경유한 윤리가 문제가 되는 자리가 과연 어디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윤리가 문제되는 자리는 '선(善)'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이다. 선의 윤리학과 진실의 윤리학이 있다. 선의 윤리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방호벽이다. 그것은 치명적인 진실의 바이러스를 선의 이름으로 퇴치한다. 반면 진실의 윤리는 시스템을 다시 부팅하는 리셋 버튼이다. 그것은 때로 선이라는 이름의 하드디스크가 말소될 것을 각오한 채 감행되는 벼랑 끝에서의 한걸음이다."


신형철씨에게 직접 묻진 못했지만, 내가 짐작하기에 여기에서의 '선'을 '정의'로 대체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위의 문장들을 다음과 같이 조금 바꾸어 말해본다. "여기에 두 가지의 윤리가 있다. 하나는 정의(세계정부)의 윤리이고 다른 하나는 진실(원피스)의 윤리다. 정의의 윤리는 세계 정부가 자신들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구축해놓은 방화벽이다. 반면 진실의 윤리는 이 방화벽에 침투한 강력한 바이러스, 구체적으로는 루피 일당을 포함한 해적들이 찾으려는 원피스를 의미한다. 기존의 세계는 원피스라는 진실을 캐려는 이 해적들로 인해 어쩌면 몰락할 것이지만, 그러한 몰락 이후에야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은 도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내가 애정하는 작품들이 대개 이렇다. 우리가 바라는 그 어떤 진짜 삶은, 지금과 여기가 아니라, 그 어딘가와 언젠가에 분명히 있을 거라고 따스하게 격려해주는 듯한 작품들.


이런 이유로 나는 [원피스]를 읽으면서 항상 대한민국, 더 나아가 세계의 돌아가는 꼴에 대한 데자뷰를 느낀다. '1%의 정의'를 위해 '99%를 위한 진실'이 희생되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원피스]를 복기하는 것은 단지 재미있는 만화책 정도를 다루는 행위 이상임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이 글을 쓴다. 마지막으로 작가에 따르면 100권(120권이었나?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은 훌쩍 넘어야 [원피스]의 대장정이 마무리 될 것 같다고 하니, 잘못 하다간 [파이브 스타 스토리]의 나가노 마모루(Mamoru Nagano)처럼 자식에게라도 연재를 맡겨서 끝낼 것이라고 선포해야 할 기세다. 오다 에이치로는 그야말로 진짜 괴물, '리스펙트'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p.s. 나보다 더 독한 '원피스 덕후'들에 의하면, 고무인간인 주인공 루피가 악마의 열매를 하나 더 먹는다고 한다. 원래 악마의 열매는 2개를 먹으면 죽게 되는데, 이형(異形)의 몸이라는 장점 덕에 어둠어둠(블랙홀 능력) 열매에 흔들흔들(지진 능력) 열매까지 먹으면서 현존 최강이 된 검은 수염 티치를 이기기 위해서다. 심지어 루피가 하나 더 먹는 그 열매가 무엇인지, 루피 일당이 먹은 열매의 이름을 바탕으로 추리해서 결론을 내린 덕후가 있는데, 그 덕후는 레알 대.다.나.다. 예전에 타케히고 이노우에가 한국에 몰래 와서 동대문 닭한마리 먹는 사진을 어느 나라에 있다는 언급도 없이 트윗에 올렸는데, 그 사진 보고 동대문까지 찾아가서 기어코 타케히코 이노우에와 사진 찍은 어떤 덕후와 함께 가히 최고 수준의 덕력 보유자라 하겠다.  출처


배순탁음악평론가, MBC FM4U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