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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온와이, 리처드 부스

하/ㅓ 2013. 7. 15. 15:32 Posted by 로드365





한 계단 한 계단 꿈을 향해 올라서다 


고성의 낡은 성벽에 둘러싸인 넓은 잔디밭, 그 주위를 둘러쌓고 늘어선 책장들, 정겨운 산골 마을 거리 곳곳에 세월이 흔적이 묻어 있는 헌책들이 넘쳐나는 곳. 세계 최초의 헌책방 마을 헤이온 와이(Hay-on-Wye: 영국 웨일즈주 헤러포드 헤이온 와이). 


1,400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연간 50만 명의 관광객, 100만 권의 헌책 판매량을 자랑하는 이 마을은 불과 50년 전에는 서점도 책을 읽을 사람도 없는 쇠락해 가는 곳일 뿐이었다. 평범했던 산골 마을을 책 마을로 만든 것은 한 사람의 헌책에 대한 꿈과 열정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리처드 부스. 1962년, 24살의 그가 고향 헤이온 와이로 돌아와 마을의 소방서를 사들여 헌책방을 열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딱 한 가지였다. 


“미쳤군! 분명 3개월 안에 망하고 말 거야. 헤이온 와이에는 책을 읽는 사람도 없어.” 


아무도 책을 사보지 않는 마을에 떡 하니 들어선 헌책방을 보고 모두는 ‘3개월 안에 망한다.’에 내기를 걸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좋은 책은 반드시 팔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내색은 안 했지만, 그는 마을 전체를 헌책방 명소로 만들고 싶은 꿈이 있었다. 


결국, 그가 맞았고 마을 사람들 모두는 그 내기에서 졌다. 헌책방은 3개월이 아니라 50년 이상 지속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제 마을 사람 대부분은 헌책방을 하거나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바보들이나 서두르는 거라고


리처드 부스


“너는 나중에 헌책방 주인이 될 거야.” 리처드 부스가 14살이 되던 어느 날, 자주 가던 헌책방 주인 피너런은 그런 예언을 한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기특한 꼬마 단골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단순한 이야기였지만 은연중 그의 말은 어린 리처드의 가슴에 작은 꿈을 심어놓았다.


“헌책방은 세계 어디에서나 차릴 수 있지. 서점 주인은 도서 목록으로 승부를 하는 법이야.”


책방 주인은 리처드에게 헌책은 단지 오래된 책이 아니라 책 속의 무한한 상상과 지식 세계 그리고 책장을 넘기던 다른 이들의 꿈까지 머금고 있다는 걸 깨닫게 했다. 단지 3펜스(당시 피너런의 서점에서는 모든 고전 소설을 3펜스에 팔았다.)로 멋진 상상의 세계, 깊은 지식의 세계, 미지의 세계를 살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리처드는 회계사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다. 전공을 살려 회계사가 될 거라고 믿었던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답답한 넥타이를 매고 온종일 꽉 막힌 사무실에서 일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어렸을 때 헌책방을 드나들면서 맡았던 특유의 냄새와 분위기를 잊을 수 없었다. 


그가 가진 돈으로 런던 시내에 헌책방은 꿈도 꿀 수 없었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고향인 헤이온 와이에 서점을 내자는 것이었다. 시골 마을에 헌책방을 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가 사들였던 소방서는 오랫동안 비어 있어 헐값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는 모아둔 돈으로 책을 구매했고 얼마간 버틸 운영비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당장 그곳에 책을 사러 와줄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마을 사람 중 책을 사서 읽을 만한 여유를 가진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세계 사람들을 고객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책을 사 모으면, 온 세계에서 손님이 올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갔다. 팔리든 말든, 가지고 있는 헌책으로 벌어들인 돈은 다시 헌책을 사는 데 100% 투자했다. 


그때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말이 많았다. 

“리처드, 책을 팔지는 않고 쌓아두기만 할 거야?” 

“책도 안 팔리는데 차라리 겨울에 우리에게 땔감으로 파는 게 어때!!” 

하지만 리처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일이 년 내에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바보들이나 서두르는 거라고.” 


소방서에 책이 가득 쌓이자 영화관, 식료품점 등 마을 건물들을 하나 둘 사들이며 책을 수집했다. 급기야는 마을의 상징이었던 헤이성까지 사들이게 됐다. 그리고 헤이온 와이는 점차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학자들의 입을 통해 회자되기 시작했다. 


“헤이온 와이에 가면 희귀한 책을 구할 수 있대.” 


그중에는 007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이언 플레밍’도 있었다. 그는 <데카메론> <신곡> <채털리 부인의 사랑>처럼 한 시대의 획을 그었던 책의 초판본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는데 다윈의 <종의 기원> 초판본이 헤이온 와이의 서가에서 거래되었다. 


이런 일화들이 입소문을 타고 전해지면서 많은 사람이 리처드의 서점을 찾자 지켜보던 주민도 하나 둘 생각이 바뀌었다. 책을 사러 온 사람들이 며칠에 걸쳐 책을 보려면 숙식을 해결할 곳이 필요했기 때문에 식당과 B&B가 생겼고, 마을 사람들 또한 헌책방을 개업하면서, 급기야는 마을 전체가 헌책을 중심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고 1972년부터는 ‘책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주민이라야 고작 1,500명인 작은 마을에 40여 개의 헌책방이 들어서고, 그 마을을 찾기 위해 런던에서 5시간 거리, 직통 교통편도 없는 오지를 찾아가는 경제적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역사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전략 없이 오래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헤이온 와이를 책 마을로 만들기 위해 단순히 그가 책만 모은 것은 아니다. 헤이온 와이가 책 마을로 완성된 후에도 그는 끊임없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특색 있는 책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헤이온 와이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성벽을 따라 만든 4킬로미터나 되는 야외 책장이었다. 그는 점점 늘어나는 책을 정리하기 위해 성벽에 책장을 만들고 정원에 금고를 배치했다. 고객이 원하는 책을 가져가고, 책값은 알아서 내는 형태였다. 그래서 서점의 이름도 ‘정직 서점’이다. 


야외 서점은 재고 처리는 물론이고 대대적인 홍보 효과까지 누린 기발한 발상이었다. 아름다운 고성 앞, 푸른 잔디밭 위로 놓인 책장과 책장에 꽂혀 있는 많은 책. 헤이온 와이의 풍경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이 점점 퍼져 나가면서, 그곳이 과연 어딘지 사람들은 궁금증을 갖게 됐고, 마을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1977년 4월 1일 만우절을 기해 부스는 헤이온 와이의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서적 왕 리처드’에 즉위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그리고 헤이온 와이만의 독자적인 화폐와 우표, 여권까지 발행하였다. 이 일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책 마을은 더욱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80년대에는 무리하게 사업의 규모를 늘렸던 탓에 리처드 부스의 책방이 파산 위기에도 몰렸지만,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 등에 헤이온 와이를 본뜬 책 마을이 잇달아 열리면서 위기를 모면했다. 1988년에는 ’헤이 축제(Hay Festival)’를 시작함으로써 또 한 차례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매년 5월 말~6월까지 열흘간 열리는 축제 기간에는 180개에 이르는 강연, 전시, 낭독, 인터뷰 등 책과 관련된 프로그램들에 파묻혀 열흘 동안을 보낸 후 일 년 뒤를 기약하게 된다. 


벌써 20년의 역사를 갖게 된 헤이 축제는 ’영어권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축제 중 하나(<뉴욕 타임스> 선정)로 자리를 굳혔다. 올해도 어김없이 열린 헤이 축제에서는 3세 어린이부터 80대 노인까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문화 공연, 거리 축제 퍼포먼스 등이 있었고 1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렸다. 


이제 그는 일흔이 넘는 나이가 되었다. 1995년 뇌종양으로 쓰러졌던 후유증으로 아직도 얼굴 근육 절반이 마비된 모습에 거동조차 불편해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지만 그는 여전히 책방을 돌며 일을 한다. 그곳엔 50년간의 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이곳에서 책방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결혼도 했고 아이를 낳아 가족도 꾸려갔다. 


부스의 서점에만 75만 권의 책이 있을 정도로 헤이온 와이는 지구상에서 헌책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이 됐다. 추리 소설만 파는 서점이 있는가 하면, 미술 관련 서점만 파는 곳, 동화책, 오페라 전문서점까지 분야도 다양하다. 운이 좋으면 1900년대에 찍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초판, 쿠텐 베르크의 금속활자로 찍힌 성경책 등 특별한 책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헤이온 와이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소중했던 지난날을 추억하고 현재를 돌아보며 미래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고 리처드 부스가 오랜 세월 이룩해 놓은 꿈과 열정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