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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예수전 단상

가/ㅣ 2012. 9. 30. 15:51 Posted by 로드365




영적인 것들과 예술, 기타 부수적으로 논하자면 철학과 종교와 문학과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은 탓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살아오는 내내 단 한 번도 종교인이었다거나 특정 종교를 신봉한 적이 없다. 여전히 그리스도와 부처에 관심이 많고 언젠가 인도에서 나의 구루를 만나게 되기를 소망하지만 여전히 내게 그리스도와 부처는 신적인 존재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이름자에 그 의미가 가깝다.



내게 그리스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쳐 준 자는 톨스토이와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였는데 나는 언뜻 두 소설가와 한 철학자의 작품을 읽으며 그 안에서 어떤 강렬한 클라이막스의 순간에 내 온 세계가 신으로 가득 들어찼음을 직감한 순간이 있었다. 그러하니 내게 아직까지 그리스도라는 이름자는 톨스토이, 니체,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와 등식을 이룬다. 나는 신으로써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신이 되기 이전 한 젊은이의 삶을 살아낸 청년과 그 청년이 훗날 그리스도가 되어 가는 그 길에 거친 여정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이름자에 부여한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을 만큼 잔혹하고 참혹했던 순간들이 있었고, 나는 실제로 그 순간의 고통이나 상실을 피해보고자 하는 나약한 마음으로 제 발로 종교의 문을 두드린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종교를 믿는 주변 인간들의 맹목적인 행위는 결코 나를 설득시키지도, 이해시키지도, 하물며 이성을 초월한 믿음을 가지게 하지는 더더욱 못했다.



톨스토이는 이성을 초월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내게 가르쳐 준 처음이자 마지막 인생의 구루였고, 니체는 신을 비롯해서 내가 지나간 시간과 지금 현재에 마주치는 무수한 신들을 초월해 내 궁극적으로 ‘나’라는 인물로 거듭나야만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해 준 또 하나의 책 속의 구루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나의 내면 세계의 순간적인 평온함만을 가까스로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주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주변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고, 현실 세계에서 신을 믿고자 한다면 신을 믿는 주변 사람들의 몸가짐과 마음가짐과 행실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도무지 스스로가 종교인이기를 자청하는,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이기를 자청하는 그들의 삶의 자세와 마음가짐과 행실에 좀처럼 설득이 되지도, 마음이 가지도 않았다.



내가 찾는 신은 나의 세계가 만들어 낸 오류이거나, 나는 아직 진짜를 찾지 못했거나. 혹은 진짜를 찾는 방식이 잘못 되었거나, 그들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었거나, 나는 아직 누군가 내게 일러준 답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고 믿을 준비가 되지 못한 아둔한 상태이거나, 여러 가지의 변수 중 하나일 것이다. 결국 나는 스스로 신을 찾아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 이후로부터 어떤 식으로건 남들이 믿는 종교에 내 자신을 위탁시키려 드는 헛된 노력을 더 이상 지속하지 않게 되었다. 당신들이 믿는 신이 교회와 주변 신도들에게 있다면, 내가 믿는 신은 오히려 고전의 사상 속에서, 매 시간 매 분 초 나의 삶의 매 순간 순간 그 속에서 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대다수가 그러하리라고 생각하는 악함과 선함을 나누는 구분 기준에 나는 동의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모든 변수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나는 아직 온전히 신을 알지도 내 안에서 신을 발견하지도 못했으며, 의심하지도 않고 신을 믿지도 그러하기까지 거치고 감수해내며 배우고 깨우쳐내야만 하는 과정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완전히 알지 못하는 어떤 세계에 대해 누군가와 논쟁을 벌이는 일은 결국 어불성설만을 끊임없이 만들어 낼 뿐이다. 당신도 나도 알지 못하는 완전한 영역에 있어 자의식의 오류를 깨우치고자 한다면, 그것의 가장 현명한 방법은 당신과 나 사이의 논쟁이 아닌 스스로의 자각일 것이다. 지금 내가 믿는 신은, 당신이 믿는 신과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나는 지금 내가 가진 의문과 알고자 하는 세계의 핵심을 둔다.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신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은 내게 지금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신은 저기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숨 쉬고 살아가고 행하고 거듭나는 매 순간 순간 나의 세계와 나의 삶 속에서 창조되고 존재한다. 나는 단 한 순간도 살아있었던 적이 없었으며 나는 단 한 순간도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었다. 나는 나의 신을 수없이 기만했고,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으며, 기만했고, 때로는 듣고도 모른 척 했다. 나는 ‘살아있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것이 모든 것과 합일되고 관통하는 질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이 관통하고 합일되는 모든 것들을 외면하고 ‘살아있음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골몰하는 오류에 빠지곤 했다. 현명한 자들의 안에서 부활한 예수에게 우둔한 나는 지금 이 순간 고개를 숙이고 가르침을 묻는다. 현명함과 우둔함을 분간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잊고 말았다.



김규항의 <예수전>은 여러 모로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우선은 이 책의 전제적인 관점에서 신은 무엇이며 우리는 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따라서 우리가 교리라고 부르는 신의 가르침이란 무엇이며 과연 진정한 선행은 어떻게 정의내려야 하는가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는 관점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그의 생각에 마음을 열고 동조하며 읽어내려 갈 수 있었고, 많은 부분 미약하거나 흔들리는 나의 생각의 관점을 그가 명쾌하고 굳건하게 짚어 준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계기와도 관계가 있을 것인데, 요즈음의 나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니체와 나의 내면 세계에 갇혀 있는 나의 신을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나의 주변 세계, 나와 다른 사람들이 서로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나의 주변 세계일 뿐만 아니라 오늘도 폭력과, 섹스와, 뭇 이름들을 달았으나 결국 다 매한가지인 욕망과 옳고 그름을 상실한 채로 다만 전 속력으로 달려나가기만 하는 이 사회를 이해하는 영역으로 어떻게 하면 확대시킬 수 있을 것인지를 늘상 고민하고 있다. 하나의 유기체로써 내가 매 순간 숨을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나의 삶, 그 매 순간 순간 속에서도 나는 나의 신을 발견하는 일을 완전하게 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안다. 여전히 나의 신은 미완성이자 미완전한 상태이거나, 그것은 나의 신이 아니라 나 자신의 완성이 미완전하며 미완성인 상태라는 사실을 안다. 여전히 나는 종교와 철학, 예술과 지적 양식들을 도모하며 내면의 평온함과 새로운 깨달음, 그리하여 거듭남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어찌된 노릇인지 그것만으로는 무엇인가가 빠진 듯한 허전함이 들고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스스로의 자아를 기만하는 듯한 비애감을 남길 뿐이다.



<예수전>의 저자 김규항이 좌파 진보주의자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의 논조가 그러한 배경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며 내가 이 책을 보고서 새롭게 깨닫거나 느끼고, 배우게 된 사실이 또한 그러한 배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누군가가 좌파이거나 우파이거나 하는 식의 배경을 운운하는 일 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 논조가 얼마나 이치에 맞는가 하는 사실이다. 절대적인 가치와 그 가치 판단의 기준 앞에 우파와 좌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시대에 걸맞느니 시대로부터 동떨어졌느니 하는 식의 구분은 그 자체가 이미 관념적인 오류에 불과하다. 나는 나의 삶을 그런 관념적인 오류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 참으로도 오랜 시간을 노력해 왔으며, 지금 이 순간도 애를 쓰고 있다.



어떤 책이 그렇고, 어떤 영화가 그러하며 어떤 사상이 그렇고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내가 받아들이는 방식이 그러하다. 어떤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의 방식이 존재한다고 보는데, 하나는 그것을 샅샅히 면밀히 분석하고 파악하여 그 세계가 돌아가는 매커니즘과 그 세계의 본질을 파악해 결국 장악해내고야 마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성을 초월한 믿음으로 그 세계를 숭배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흔히 인간들은 책과 영화와 같은 인간이 만들어 낸 부산물들에 전자의 잣대를 들이대려들고, 종교와 철학과 같이 역시 인간이 만들어 냈지만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어떤 영역의 것들에 관한 부산물들에 후자의 잣대를 들이대는 데 익숙하다.



오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종교와 철학이 진정으로 인간의 삶을 관장하고 우리의 삶의 질서를 바로잡으며, 인간의 삶과 이 세계를 보다 나은 곳으로 진보시키기 위함이라면 우리는 그 무엇보다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세계의 어떤 것을 논하는 일이라 여겨지는 종교의 교리를, 나와 우리가 믿는 대상을,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와 흐름을 샅샅히 면밀히 분석하고 파악해내야 한다. 오류를 고쳐내야 하고, 현명한 자에게 고개를 숙여 그 가르침을 얻어내야 하며, 질서를 바로잡고, 종내에는 알아 거듭나야만 한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 세계에도, 그 내면 세계와 거의 전부에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이 세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다. 눈에 보이지 않고서야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감상과 자의식, 오류에 불과하다. 어떤 것의 실체가 아름답지 않고서야 그 실체를 모르고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진정한 것일 수가 없다. 결국 우리 살아냄이란 아름다움을 완성하고 실현하며 구해내기 위함일지언데, 아름다움의 발현은 매 순간 존재의 본질과 실체를 파악하는 그 순간의 찰나와 매우 가깝다.



내가 아는 예수의 이름 자가 거짓이 아니라고 나는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아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윤동주, 조지 해리슨, 크리스토퍼 존슨 맥캔들리스의 이름자가 거짓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나는 알지 못한 채로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김규항이 이 책 속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의 이름자를 빌려 예수와 대적하는 선한 제자들, 아니 그것은 결국 사탄이다.>라는 의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불완전한 아름다움은 결국 우둔함이고, 우둔함은 죄악이다. 이 세상에 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죄악이 있는가 하면, 우둔함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죄악은 또 얼마나 많던가. 우리 온전히 깨어있지 못하고, 단 한 순간도 살아있지 못한 채로 다만 존재함으로써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진정한 아름다움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한없이 부족한 깨우침이다. 한없이 부끄러운 삶이고, 나는 수없는 나약함을 행해왔다. 앞으로도 속수무책 그러한 실수를 범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나를 두렵게 만든다. 단 한 순간도 살아있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를 원통하게 만드나 단 한 순간만이라도 살아있고자 하는 바램은 이 도시에서 그토록 쉽사리 길을 잃고 나를 헤매게만 하게 만든다. 가고자 하는 길과 가는 길 사이의 거리는 가깝고도 멀다.



한 권의 책장을 덮으며 나는 내가 그 책 속에서 무엇을 배우고 가르침 받았는지를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살아가는 일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미안해야만 하는 일이라 말했던 어느 시인의 말을 지금껏 수없이 되새겼지만 나는 정작 그 시인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인지 한낱 그 시인이 남긴 한 구절을 읽고 내 세계 안에 가득 들어찬 나의 세게만에 귀를 기울인 것은 아닌지 다시 되짚어 본다. 나의 세계 안에는 나의 말들과 내가 만들어 낸 상념들만이 가득 차 좀처럼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깊이 파악해내지 못한다. 종내도록 미안해만 하기에는 우리가 살아가야만 하는 삶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길기만 하다.



무엇인가는 변해야 하고, 무엇인가를 변화시켜야만 한다. 무엇인가를 더 알아야만 하고, 무엇인가를 더 배워야만 하며 무엇인가를 더 깨달아야만 한다. 그리고 거듭나야만 한다, 지금의 상태로부터, 거듭난 그 상태로부터. 지금부터 책 장을 덮고 굳게 닫힌 방문을 열고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가기로 한다, 거듭나기 위하여.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