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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마이클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1960.12.22~1988.8.12]
 
1960년 12월 22일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버지 제라르 바스키아(Gerard Basquiat)와 어머니 마틸드 안드라데스(Matilde Andrades) 사이에서 태어났다. 1974년 푸에르토리코로 이사하였고, 1978년 독립적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영재들을 위한 시티애즈스쿨(City-as-School)에서 낙서화가 알 디아즈(Al Diaz)를 만나 낙서그룹 SAMO(Same Old Shit의 약자)를 조직하고 스프레이 낙서를 시작하였다. 그 후 뉴욕현대미술관 앞에서 엽서와 티셔츠 위에 그림을 그려 팔면서 자신의 회화세계를 구축하였다.
1980년 첫 그룹전시회 〈타임스 스퀘어쇼(Times Square Show)〉에서 인정받기 시작하여, 1981년 〈뉴욕 뉴웨이브전(展)〉에서 20여 명의 미술가에 포함되었다. 같은해 5월 유럽을 처음으로 여행하고 이탈리아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82년 애니아 노제이(Annia Nosei) 화랑에서 연 최초의 개인전에서 극찬을 받았고, 6월 독일 카셀(Kassel)에서 열린 국제전시 〈도큐멘타 7전(展)〉에 최연소의 나이로 초청받았으며, 11월에는 펀(Fun)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83년에는 휘트니비엔날레에 최연소 미술가로 참가하였고, 1984년에는 뉴욕현대미술관에 작품을 전시했다. 같은 해 앤디 워홀,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와 공동으로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1988년 8월12일 뉴욕에서 코카인 중독으로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낙서, 인종주의, 해부학, 흑인영웅, 만화, 자전적 이야기, 죽음 등의 주제를 다루어 비극적인 삶 속에서 생존의 본능이 번뜩이는 충격적이고도 충동적인 작품을 남겼다. 팝아트 계열의 천재적인 자유구상화가로서 지하철과 거리의 지저분한 낙서를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피렌체》(1983), 《기도하는 사람》(1984), 《천국》(1985), 《흑인》(1986), 《재즈》(1986) 등이 있다.
 
 그래피티(graffiti)
'그래피티(graffiti)'의 어원은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graffito'와 그리스어 'sgraffito'이다. 분무기(스프레이)로 그려진 낙서 같은 문자나 그림을 뜻하는 말로 'spraycan art' 'aerosol art'라고도 한다. 유럽에서는 '거리의 예술(street art)'로서 자리를 잡았다. 

기원은 고대 동굴의 벽화나 이집트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낙서에 가까운 그림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피티가 예술로서 등장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부터이다. 사이 톰블리(Cy Twombly)·잭슨 폴록(Jackson Pollock) 등은 낙서의 표현법에 관심을 보였고 장 뒤뷔페(Jean Dubuffet)는 아웃사이더 아트로서의 낙서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래피티가 본격화된 것은 1960년대 말 뉴욕 브롱크스 거리에 낙서가 범람하면서부터이다. 처음에는 반항적 청소년들과 흑인, 푸에르토리코인(人)들과 같은 소수민족들이 주도했다. 분무 페인트를 이용해 극채색과 격렬한 에너지를 지닌, 속도감 있고 도안화된 문자들을 거리의 벽에 그렸다. 이것들은 즉흥적·충동적이며 장난스럽고 상상력이 넘치는 것들이었다.
랩 음악과 브레이크 댄스를 즐겼던 이들은 거리의 벽, 경기장, 테니스장, 지하철 전동차 등 가리지 않고 그릴 수 있는 곳에 그림을 그렸다.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낙서가 큰 도시문제이기도 하였다. 그래피티가 도시의 골칫거리에서 현대미술로서 자리잡은 것은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와 키스 해링(Keith Harring)의 공이 컸다. 
바스키아는 정식 미술 수업을 받지 않았음에도 단번에 미술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그는 어린이가 그린 것처럼 어설퍼 보이는 그림에 자신의 메시지를 담아 표현하였다. 주로 자전적이야기·흑인영웅·만화·해부학·낙서 기호·상징·죽음과 관련된 주제였다. 
케이트 해링(Keith Harring)은 아이콘화된 사물을 그리는 그래피티로 유명했다. 검은 종이 위에 흰 분필로 그림을 그렸는데 주로 에이즈 퇴치, 인종차별 반대, 핵전쟁에 대한 공포 등의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그림이었다. 
한편 로마의 미술상 클라우디오 브루나는 소규모 비영리화랑인 얼터너티브 스페이스에 그래피티 전시회를 열면서 그래피티는 미술 영역으로서 인정되었다. 그래피티 미술은 1980년 '타임 스퀘어 쇼'에서 공식적으로 소개되었다. 해링·바스키아·리 퀴노니스·알레스 발라우리·앤드루·위튼·제파이어 등이 참여한 최초의 대규모 전시회였다. 또 시드니 자니스의 블루칩 갤러리에서는 '포스트 그래피티(Post Graffiti)'라는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해링의 《전시회》(1984), 《stop AIDS》, 바스키아의 《무제-붉은 남자 untitled-Red Man》(1981), 《호보 기호 Hobo Signs》(1982), 《무제-올랭피아의 하녀 Maid from Olympia》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