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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두나, 해프닝과 모먼트, Vague 2003

바/ㅏ 2003. 5. 26. 15:52 Posted by 로드365

배두나는 연예계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계는
그녀를 많이 생각한다. 그녀가 보통 여자들처럼 몽상적이고 엉뚱하고 밝고 또한 외롭기
때문에, 그녀의 캐릭터에는 뭔가 설득력이 있다. Photographed by Kim Bo Ha

 
배두나의 촬영에 관해 얘기하면서 사진가와 나는 한동안 씨름을 했다. 사진가는 배두나만의 어떤 시추에이션 액션으로 비주얼 임팩트를 주자는 거였고-중국 국수를 먹고, 욕조에 빠지는 등의-, 나로 말하면 고혹적인 여배우로서의 질감, 자연스러운 모먼트를 잡아내고 싶었다. 그리고 사진 촬영은 그렇게 오버 액션과 모먼트 사이를 오락가락 했다. 그녀가 중국 국수를 물고 웃으면, 난 "두나 씨, 그렇게 귀엽게 웃지 말고 국수 그릇은 옆으로 치워요! <화양연화>의 장만옥처럼 해보라구요." 이런 식이었다. 웬 아마추어적인 소동인가 싶지만, 배두나를 앞에 두면 누구라도 그런 혼란에 빠진다. 그녀가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배두나의 나이가 고작 스물 셋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녀의 나이를 의식해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그런 착각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걸까. 내 생각에 그건 배두나가 보여주었던 스크린 안에서의 비현실적인 캐릭터 때문이다. 귀엽고 막무가내인 경상도 아지매 <위풍당당 그녀>의 은희, 아기를 업고 밤거리 유흥가를 쾌속질주하는 전 배구선수 출신 아줌마 금순이(<굳세어라 금순아>), 착한 농아 남자 친구를 앞에 두고 '자본의 공리적 순환'을 주장하는 과격한 무정부주의자 영미(<복수는 나의 것>), 머리에 손전등을 붙이고 담배를 물고 소설책을 읽는 태희(<고양이를 부탁해>), 노란 후드티를 입고 강아지 한 마리를 찾아 아파트 주변을 뛰어다니던 현남(<플란다스의 개>)까지. 배두나는 나이를 초월한 활발한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1백m를 20초에도 못 뛰는 거북인데, 이제까지 너무 많이 뛴 셈이지요"라고 그녀가 강아지처럼 '킁킁'거리며 웃는다. 나는 이것이 모두 배두나가 꾸민 해프닝이라고 생각했다. 폴라로이드를 살펴보던 배두나는 하나의 사진을 골라냈다. "이게 가장 마음에 들어요." 사진 속의 그녀는 지춘희의 빨강 도트 무늬 드레스를 입고,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막 걸려온 친오빠의 전화-'오늘 함께 <투란도트>를 보러 가지 않을래?'-를 받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 인위적인 해프닝과 우연한 모먼트 사이, 그 사이에 진짜 '배두나'라는 캐릭터가 유영하고 있는 것이다.

스크린 밖에서 배두나는 매력적인 광대뼈와 빛나는 갈색의 단발 머리, 그리고 옷에 대한 애정을 지닌 스물 세 살의 여성이다. 버버리 핫팬츠에 니삭스, 롱 부츠를 매치해 입는 타고난 센스가 있고, 같은 일을 하는 과묵한(!) 남자 친구가 있고, 디지털 카메라와 만화에 중독되어 있고, 집엔 진돗개 바람이와 구름이, 고양이 배배, 그리고 치와와인 두두와 나나를 키우고(나르시시스트적인 작명!), 세계 여행이 꿈이고, 외국어는 3개쯤 독파했으면 싶은. 그 누구보다 위풍당당하며, 배두나 스스로 그것은 어머니의 유산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 엄마가 매니저였지만, 이젠 독립했어요. 엄마는 내게 많은 것을 주셨죠. 마더 콤플렉스라구요? 그럴 수 있죠. 엄마와 딸의 관계는 다 그렇지요. 하지만 난 엄마를 존경해요. 난 다섯 살 때 처음으로 엄마가 출연한 연극 <유리동물원>을 봤어요." 그 엄마 연극배우 이화영 씨는 <플란다스의 개> 제작사에 가서 '두나를 캐스팅하면 확실하다, 이 아이는 내 20년 기획상품'이라고 공언했고, <복수는 나의 것>의 그 '역동적인' 섹스 신을 위해서 박찬욱 감독과 딸의 노출 신을 구체적으로 상의했다. 그리고 얼마 전 재정 위기에 빠진 연극 <로베르토 쥬코>의 공연을 위해 딸이 제작비 5천만원을 투자(사실은 희사)하도록 조언하는 그런 여자다. "그러니까 나는 배우로서 엄마를 존경한다구요." 그녀는 자신이 엄마의 열정과 아빠의 냉정을 딱 반반씩 닮았다고 한다. "불과 얼음이 공존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내가 그래요. 난 두 분이 어떻게 결혼했는지 너무 궁금해요. 배우 일만 해도 그래요. 영화 <링>을 할 때 아빠는 내게 그랬어요. '두나야, 보통의 길을 가면 큰 좌절도 큰 성공도 없다. 하지만 지금 네가 가는 길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그래서 뭐라고 했죠?" "네, 알아요. 아빠. 그러고 나선 내 뜻대로 밀고 갔죠. 엄마처럼. 하하!"

배두나 안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불신이 극단적으로 공존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대사를 보자.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나 죽이면 너도 죽어. 백프로 확실해."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니가 도끼로 사람을 찍어 죽인다고 해도 나는 네 편이야."같은 대사를 듣고 무엇을 느끼는가? "나는 내 가족만 믿어요. 누구나 내게 등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내가 실수할까 봐, 그게 두렵고 어느 순간부터 나를 보호해야 한다고 느껴요." 나는 그녀가 마치 덫에 걸려 살갗이 찢긴 후, 더 이상 마을로 내려오지 않는 여린 들짐승처럼 보였다. 그래서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있는가'를 물었다. 배두나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연기를 안 했을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맙소사, 연기를 하는 게 즐겁지 않아요?" "아니요. 너무 만족해요." 여기에 배두나의 모순이 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은 한 통의 전화예요. 길거리에서 '쿨독' 브랜드 사람들이 카탈로그 명함을 줬을 때, 말이지요." 오리를 물로 이끄는 본능 비슷한 것이 그녀를 에이전시로 이끌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인간 배두나로서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죠. 대학교 1학년 때까지인 것 같아요. 지금의 나는 환경에 너무 잘 적응한, 마치 길들여진 여우 같죠. 드라마 <학교>를 할 때까지만 해도 본래의 두나가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