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아이가 좋다.
“나는 몇년째 계속 기대주예요, 우헤헤헤.” 2000년 신년호. 유지태, 이은주, 이재은 등과 함께 ‘올해의 기대주’로 뽑혀 새 천년의 표지를 장식했던 배두나에게, 2002년 신년 표지를 위해 만나자, 고 하니 불쑥 이런 말을 던진다. 하지만 올해 배두나를 다른 누구보다 기대하는 건, 2년 전 그를 기대했던 것과 다른 의미다.
교실 뒷자리에서 비딱하게 앉아 보내던 반항적인 눈빛에 대한 무형의 매혹도, 신세대라 포장되었던 특유의 엉뚱함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도 아니다. <플란다스의 개> <고양이를 부탁해>로 증명되었고 <복수는 나의 것>으로 기대에 찬 소문이 흘러나오고, <튜브>를 차기작으로 선택하면서 궁금증을 더해가는 배두나. 이 배우에 대한 기대는, 새로 나왔다고 막연히 긁어보는 복권이 아니라, 오랜 기간 추이를 살피고 신중하게 투자한 주식처럼, 이제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것이다.
“<고양이…>너무 재밌죠? 관객요? 에이, 상관 안 해요. 어설프게 10만, 20만명 들었는데 못 만들어 욕먹는 영화보다는, 관객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평도 좋은 영화가 좋은 것 같아요.” 길거리에 우두커니 선 태희가 만두를 우걱우걱 씹어 삼킬 때 그 아무렇지도 않은 장면에 왠지 모를 찡한 기운을 느낀 관객이라면 <고양이…>를 통해 배두나가 일깨워준 범인(凡人)의 아름다움을 알 것이다. “음…, 저도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복수는 나의 것>에는 만두 먹는 장면보다 더 명장면이 있죠. 움하하. 기대해도 좋아요.”
얼마 전 촬영을 마친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해 “나만 빼면, 최고의 배우들이, 최고의 스탭들과 만든 최고의 영화”라고 주저없이 말하는 그는 처음 시나리오 봤을 때, 우와, 이런 시나리오가 우리나라에 있구나. 다른 데 안 가고 나한테 와서 정말 다행이다 했다고. 편집본을 미리 봤는데 배두나 출연작 중 베스트라고, 쉬지 않고 칭찬을 늘어놓는다. 애인인 류(신하균)의 누나 수술비를 구하기 위해 동진(송강호)의 딸을 유괴하는 ‘착한 유괴범’ 영미는 과격한 사상의 소유자이자 입에서 담배와 욕이 떨어지지 않는 여자.
“류에게 모든 걸 제시하는 인물이죠. 처음 유괴를 하자고, 착한 유괴는 죄가 아니라고 설득하는 것도 영미예요. 어찌 보면 악역인데 독특하기도 하고, 월북하려다가 어망에 걸려서 실패한 거나, 농아라고 속이고 농아학교에 입학해서 류를 만난 거나, 귀여운 구석도 있고…. 처음에 제가 담배도 못 피고, 욕도 잘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박 감독님이 어찌나∼ 실망을 하시던지….” (웃음) 극의 대부분 영미와 부딪히게 되는 류가 농아이기 때문에 배두나는 촬영 내내 수화연습도 꽤나 열심히 했다. “제가 원래 말끝을 흐리는 버릇이 있는데, 수화의 딱딱 끊어지는 느낌을 살리다보니 실제 말버릇이 많이 고쳐졌어요. <복수는 나의 것>은 여러모로 제겐 정말 큰 영향을 끼친 영화였어요.”
대체식품이란 게 있다. 버터가 없으면 마가린, 소고기가 없으면 돼지고기, 우유가 아니면 두유. 그러나 배두나는 대체할 누군가를 찾을 길 없는 배우다. 노란 모자티 끈을 질끈 동여매고 강아지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던 소녀의 뒷모습에, 머리에 손전등을 붙이고 보호소에서 출감하는 친구를 기다리며 담배를 꼬나물고 소설책을 읽던 친구의 얼굴 위로 도저히, 다른 배우의 이름이 겹쳐지지 않는다. “일부러 희한한 역할만 고르는 건 아니에요. 청순가련, 나도 하고 싶은데요. 늘 특이하고 요상한 역만 들어오는 걸 어떡해.” (웃음)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라곤 하지만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현실적으로 표현해내는 재미”를 알아버린 그에게 어떤 역을 맡긴들 ‘배두나식’으로 풀어내지 않을까.
“<플란다스의 개> 하기 전까진, 그러니까 드라마하고 모델로 한참 바쁠 때는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그냥 재밌어서 했어요. 그런데 점점 바빠지고 스케줄에 쫓기다보니 재밌어서 하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게 되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플란다스의 개>를 만났어요. 촬영도 재미있었고 그냥 망가지자 하니까 마음이 편해졌고요. <청춘>은 여자로서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을 버리고 나니 나를 치열하게 살게 해주었고, <고양이…>는 조금씩 내가 쌓아가고 있다고 생각한 것에 자신감을 줬다고나 할까….”
배두나는 영리한 배우다. 유난히 욕심도 많기도 하지만 그 욕심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방법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쿨과 신파 사이 감정을 측량하는 저울과 근경과 원경을 동시에 보는 밝은 눈과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나침반과 오버로 넘지 않을 만큼의 귀여운 망가짐을 재는 정확한 자 하나를, 계산이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그는 마음에 품고 있다. <복수는 나의 것> 다음 작품으로 <튜브>를 하겠다고 했을 때 송강호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나야, 지금까지 네가 찍은 영화들이 흥행을 안 해서 혹시 블록버스터영화에 출연해야겠다고 맘먹었다면, 그러지 마라. 그러면 안 된다.” 하지만 배두나에겐 그 말이 너무너무 고마웠다고, 정말 걱정하지 않으면 그런 이야기하기란 게 쉽지 않았을 거라고. 선배님 그래서 결정한 게 아니에요. 재미있는 이야기고, 어찌 보면 전형적인 인물들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분명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설명했다.
그에게 ‘최고의 배우’라는 타이틀은 아직 미래를 위해 남겨둬야 마땅한 칭호다. 측량할 수 없는 배두나의 다른 모습들은 아직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점에 오른 ‘올해의 배우’보다는 늘 한 자락 희망과 가능성을 숨겨둔 그를, 올해도 ‘기대주’로 조금만 더 묶어두고 싶은 것도 이런 연유다.
글 백은하 lucie@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배두나, 이제 겨우 스물넷인 이 배우.
배우는 선택으로 말한다.
배우란 ‘왜’와 ‘어떻게’ 사이에서
치열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직업이라고 할 때,
이미 고른 영화에서 연기를 해내는 방식이 ‘어떻게’에 해당한다면
어떤 작품을 할지 선택하는 것은 ‘왜’에 해당할 것이다.
결국 선택은 그 사람의 가치이고, 존재증명이다.
‘플란다스의 개’ ‘고양이를 부탁해’ ‘복수는 나의 것’
으로 이어지는 목록을 가진 배우를 어떻게 볼 것인가.
더구나 그 사람이 이제 영화계 경력 4년 남짓한 스물네살 연기자라면?
“저는 항상 캐릭터보다 감독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출연작을 결정해왔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제가 했던 캐릭터들엔 공통점이 있더라구요.
뭔가에 전력투구하는 순수한 인물들이라고 할까요.
24일 개봉하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현채 역도 그렇구요.
현채는 꼭 ‘사랑에 빠진 현남이(플란다스의 개의 주인공) 같다니까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는 배두나의 첫 로맨틱 코미디이다.
사랑을 꿈꾸는 할인매장의 털털한 여직원 현채 역을 맡은 그는
이 영화에서 ‘내숭 없어 익숙한 배두나’와
‘부드러워 새로운 배두나’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준다.
그는 “난 사실 현채처럼 사랑에 대해 낙관적이진 않다”면서도
“배우로서의 상상을 즐기기에 경험하지 않은 것을 연기하는 게 더 좋다”고 말했다.
“영화계 경력으로 따지만 이 작품 촬영장에서
제가 제일 고참이란 걸 알고 깜짝 놀랐어요.
책임이 막중하다고 느껴서
연기할 때 외에도 현장 분위기를 좋게 이끌려고 노력했지요.
하긴, ‘고양이를 부탁해’에서도 제가 최고참이었죠.”
이십대 중반에 현장에서 제일 고참이라니,
혹시 그는 작품을 선택할 때 ‘젊은 영화’를 선호하는 게 아닐까.
“확실히 새로운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쨌거나 영화는 독창적이어야 한다고 믿어요.”
배두나 연기가 최고 수준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다른 여배우들과 비교할 때
충무로에서 존재감이 유달리 강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충무로 경력은 시작부터 달랐다.
N세대 우상으로 큰 인기를 누리던 그가
첫 영화로 ‘플란다스의 개’를 고른 것은
지금 생각해도 쉽잖은 선택이었다.
“이제껏 배우로서 가장 잘 한 일이었다고 봐요.
패션 아이콘 같은 이미지를 버리고
구질구질한 아파트 관리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자 역을 자청했던 것은
진짜 배우가 되고 싶어서였죠.
봉준호 박찬욱 정재은 감독님처럼 훌륭하신 분들 만나 정말 많이 배웠어요.
전 그간 배우로서의 무게를 온전히 갖추려
치열하게 싸워왔다고 생각해요.
흥행이 썩 잘되는 것도 아닌데,
그게 아니라면 무슨 재미로 영화하겠어요.”
그 말에 뒤이어 “바로 그 얘긴데요”라고 질문을 이어가려 하자
눈치빠른 그가 귀여운 어투로 바로 말을 잘랐다.
“흥행 얘기하려고 그러시죠? 에이, 하지 마세요.”
그래도 질문을 밀고나간다.
“영화계 데뷔 당시의 팬시 상품 같은 이미지를 고수했다면 그대로 한 5년 정도 더 갈 수 있었을 텐데도...”
그러자 다시 그가 미소로,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그가 말을 받았다.
“5년이 아니라 1년이었겠죠.”
“흥행작을 할 수도 있었는데 못하겠더라구요.
어디서 많이 본 뻔한 시나리오에
관객 기호에만 맞춘 듯한 작품을
못 이기는 척 그냥 받아들일 순 없었어요.”
그건 영화인 뿐만 아니라 관객 책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난 1-2년간 흥행했던 코미디 영화들을 보면서
난 하나도 안 웃긴데 관객들이 폭소를 연발하는 걸 보고 놀랐어요.
정확히 말하면 슬펐다고 할까.
저렇게 흥행 스타가 되는 건데,
난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구나 생각하니 슬프더라구요.
스스로 대중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배두나의 고민은 한국영화의 고민이기도 하다.
“4년만에 8편을 했으니 단기간에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도 들긴 해요.
하지만 그냥 열심히 한 것 뿐이거든요.
연기는 오로지 경험을 통해 배울 수 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어요.”
“지금 당장 떠오르는 자신의 가장 만족스런 연기는?”이란 질문에
그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 고문당한 뒤 중얼거리는 장면을 꼽았다.
“그 장면에서는 100% 상황에 몰입할 수 있었거든요.
끝내고난 뒤 정말 짜릿했어요.
연기는 천직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재미있고 성취감이 대단해요.
즐거움을 더이상 느끼지 않는 날이 온다면 연기를 그만둬야겠지요.”
그렇다.
선택도 노력도 행복도 모두 재능이다.
이 밝고 명민한 배우가 새로 열어젖힐 다음 4년은
또 무엇을 우리에게 재확인시켜줄까.
-조선일보 이동진
[ 오지혜가 만난 딴따라 ] 2003년07월23일 한겨레21 제469호
위풍당당, 쿨한 그녀!
맑고 밝은 얼굴에 야물딱진 대답… 속이 꽉찬 20대 배우 배두나와의 즐거운 수다
예상대로 약속시간에 조금도 늦지 않고 카페에 그녀가 나타났다. 화면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본 그녀의 모습은 하얗고 눈이 커다란 암사슴 같았다. 안 그래도 그녀의 왕팬인데 너무 반해버리면 글 쓰는 데 안 좋을 것 같아서 정신을 바짝 차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난 그녀에게 완전히 뿅가버리고 말았다. 예쁘고 매력 있는 건 둘째 치고 어쩜 그리 맑고 밝고 당당한지….
짬밥이 실력? 노!
내가 대학로에서 한참 연극을 할 때였다. 동료들 얘기가 어떤 40대 후반의 선배님께선 서른다섯살이 넘지 않은 배우한테는 아직 ‘배우’라고 할 자격이 안됐으므로 술자리에서 술도 안 따라주신다는 거다. 동년배들끼리의 자리라 “웃긴다” 했지만 사실 속으론 무지하게 기가 죽었드랬다. 안 그래도 고생 안 하고 자란 게 콤플렉스인데, 거기다 나이까지 어리니 내가 생각해도 어디 가서 배우입네 소리를 자신 있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이 먹고 나서 신인배우들에게 연기를 가르칠 때 그 선배의 이론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배우라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인생을 알아야 진짜 연기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간접 경험이라도 많이 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며 ‘꼰대질’을 했었다.
헌데 이날 이십대 배우 배두나를 만나고선 그 촌스런 선입견이 깨지고 말았다. 그녀 자신도 예전의 나처럼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란 것이 콤플렉스였다고 한다. 그러나 데뷔 1년차 때 윤여정 선배를 만나면서 그 콤플렉스에서 해방되었다는 거다. 윤여정 선배 왈, “경험의 많고 적음이 연기 실력의 척도가 된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난 너무 많은 걸 경험해서 생각이 지저분할 때가 있다. 어떤 면에선 백지 상태인 네가 나보다 훌륭한 배우일 수도 있다”라고 얘기해줬다는 거다.
그녀로부터 이 얘길 듣는 순간 난 쪽팔려서 얼굴이 벌개졌다. 그 이유는 윤여정씨의 멋진 충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어렸을 때도 내 곁에, 지금 배두나 옆의 윤여정씨처럼 멋진 선배가 없었던 게 아니었다. 진짜 멋진 말은 아무한테나 먹히지 않는 법이다. 배두나처럼 그 죽이는 철학을 쑤욱 흡수할 수 있는 맑고 당당한 영혼이 그때 내겐 왜 없었을까? 멋진 말, 멋진 철학들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딱 자기 수준에 맞는 충고들만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내 이십대는 ‘짬밥’이 곧 실력이라는 꼴통식 충고를 주워먹고 쭈삣거렸지만, 배두나의 이십대는 편견을 깨는 그 쿨한 철학을 주워먹고 ‘어린’ 배우인 자신을 쭈삣거림이 아닌 자긍심으로 지켜낼 수 있었던 거다. 역시 그녀는 <고양이를 부탁해>의 태희처럼 자유로웠다.
연극을 하려고 꽤 애를 쓰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연극 연출가 박근형씨와 작업을 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헌데 드라마 촬영이라는 게 천천히 느끼고 천천히 찍는 영화판에만 있었던 배우에겐 영혼을 다칠 수 있는 작업인지라, <위풍당당 그녀>를 막 끝낸 그녀는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연극은 몸과 마음이 소진되어 있는 상태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 시기를 조금 뒤로 밀어뒀다 한다. 그러면서 연극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다고 힘주어 말한다.
연기를 잘 뽑아내기로 유명한 아무개 감독과는 한번도 작업한 적이 없기에 그 사람과 작업해보고 싶은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가 참 야물딱진 대답을 들었다. 자기가 듣기로는 그 감독은 배우가 화를 내야 하는 장면이면 그 역할이 왜 화를 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보다 그 배우가 정말 화가 나도록 만든 후에 카메라를 돌린다고 한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무리 작품이 좋더라도 프로배우를 프로대접 하지 않는 감독과는 일하기 싫다는 거다.
사진/ 스태프들이 배두나랑 일했다는 것만으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배우. 배두나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단다.(스카이라이프 정용일)
요구르트 회사로부터 항의당한 사연
내가 영화인들을 만날 때마다 시비를 거는 게 있다. 왜 배우들과 토론을 하지 않느냐 하는 거다. 작품분석은 연출부들과 할 뿐, 배우들 특히 젊은 여배우들과는 그냥 간단한 상황 얘기만 하기 일쑤이다. 그들의 변명은 이랬다. “대화가 되는 젊은 여배우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오히려 테이블 리딩을 꺼리는 배우들 투성인데 무슨 대화를 하겠는가.” 한국 영화에 나오는 수많은 젊은 여배우들의 인형 같은 연기가 영화 전체의 질을 깎아내리고 있는 현실에서 배두나 같은 여배우는 정말 금쪽 같은 배우가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장면은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절대로 찍지 못한다고 한다.
그녀는 또 깜짝 놀랄 말을 했다.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최근 한 영화에서 자신의 장면이 대폭 잘려 나갔다고 감독한테 항의를 한 배우 얘기가 나왔다. 그녀는 영화가 잘 나오는 게 중요하지 자기가 많이 나오는 게 중요하냐며 그런 배우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펄쩍 뛰는 거다. 자신도 한 장면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며 연기하지만, 결국 영화는 감독 예술인데 자기 얼굴 많이 안 나왔다고 섭섭해하는 건 우스운 일이라는 거다(배우가 이런 생각을 하기란 정말 힘들다는 건 배우라면 다 알 거다).
그녀가 스물다섯 나이에 이미 이렇듯 속이 꽉 찬 배우가 된 데에는 대학로 중견배우이자 그녀의 어머니인 김화영씨의 몫이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딸을 배우로 키우기 위해 ‘치마’로 ‘바람’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그 수준은 딸래미 손을 끌고 성형외과부터 가는 다른 여배우 엄마들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이런 야물딱지고 성숙하고 매력 있는 여배우를 20여년간의 장기기획으로 키워낸 그녀의 어머니에게 한국 영화계에서 감사패라도 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녀를 보는 내내 괜히 고마운 느낌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궁금해서 호주제 폐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폐지돼야 하는 거라며 주먹을 불끈 쥐더니 <위풍당당 그녀> 촬영 중에 황당한 일이 있었다며 인터뷰 중 유일하게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내용은 이랬다. 그녀의 극중 역할은 요구르트 배달로 생계를 이어가는 미혼모였다. 요구르트 가방을 메고 가던 중 넘어지면서 요구르트들이 땅에 떨어지는 장면을 찍었는데, 특정 회사에서 나오는 요구르트 이름이 고유명사인 줄 몰랐던 그녀는 땅에 구르는 요구르트 병들을 보며 “악! 내 OOOO~” 하고 절규를 했다는 거다. 그 뒤 그 요구르트 회사에서 방송사를 상대로 항의 전화가 왔는데, 그 이유는 어이없게도 자기네 회사에선 미혼모를 절대 안 뽑는다면서 명예훼손이라는 거였다. 아! 정말 화나는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그 요구르트 회사를 생각하면 정말 화가 났지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 회사를 욕하는 그녀는 정말 예뻐보였다.
고삐리 때 임순례 감독의 <세친구>를 보고 ‘죽인다’ 했다기에 앞으로 상업영화로 뜨긴 글렀다고 놀렸더니 깔깔깔 웃는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니까 스태프들이 배두나랑 일했다는 것만으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단다. 분명히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녀랑 단 두시간 수다를 떨고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니 말이다.
오지혜 | 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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