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일본영화의 신 기타노 다케시
기타노 다케시의 <기쿠지로의 여름>이 조금 늦게 한국을 찾아온다. <기쿠지로의 여름> 개봉에 맞추어 일본에서 만난 기타노 다케시는 이미 두 편의 영화를 더 찍으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영화감독이자 일주일에 여섯 편의 텔레비전 코미디를 진행하는 코미디언으로서도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정해진 규칙 없이 자유분방하게 영화를 찍으며 현대 일본 영화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의 화법을 비튼 이 남자와의 만남은 언제나 좌충우돌하는 예술적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이것은 그 즐거운 만남의 기록이다.
7월 30일 오후 4시, 도쿄 시부야 스튜디오 2층에선 후지 텔레비전으로 방영될 기타노 다케시의 코미디 쇼 녹화가 한창이었다. 반쯤 벗겨진 대머리 분장을 하고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을 붙인 다케시는 두 시간 전, 같은 건물 5층에서 한국 취재진과 집단 인터뷰를 하던 무표정한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가 아니었다. AD가 카메라 옆에 쪼그리고 앉아 들고 있는 가사가 적힌 팻말을 보며 다케시는 음치를 간신히 면한 목소리로 경쾌한 멜로디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기타, 베이스, 드럼으로 구성된 밴드와 두 명의 코러스 걸이 역시 다소 우스꽝스런 동작으로 추임새를 넣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피식 웃음이 나는 이 광경은 한국에선 이미 사라진 추억의 코미디를 떠올리게 했다. 스튜디오 배경에 커다랗게 '다케시 브라더스'라고 적힌 휘장이 붙어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70년대 말 한국 텔레비전 코미디에서 곧잘 얼굴을 비친 코믹 밴드 장고웅과 천지개'벽'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건 대단하다. 70년대에 이미 다케시는 일본 엔터테인먼트계의 신이었다. 어렸을 때 다케시의 코미디를 보며 자란 세대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드는 이 즈음에도 다케시는 일주일 내내 자기 이름을 건 여섯 편의 코미디 쇼를 방송에서 볼 수 있는 현역 최고의 코미디언이다. 서너 차례 노래가 끝나고 다케시가 카메라 앞에서 동료들에게 익살을 부린다. "저 뒤에 구경하고 있는 한국 기자들 보여? 저분들에게 내가 좀 전에 얼마나 멋있는 말을 한 줄 알아? 그런데 지금은 여기서 바보짓을 하고 있다. 이것 참, 위대한 영화감독 다케시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옆의 동료가 되받는다. "아하, 저 사람들 이 스튜디오에 들어설 때 표정 봤어? 바로 얼굴이 구겨지던데? 이거였니? 하는 표정이었어." 스튜디오가 왁자지껄한 웃음으로 덮인다. 다케시의 방송 녹화 현장은 절도 있으면서도 자유분방했다. 스튜디오가 마치 공개 녹화장인 것처럼 떠들썩했다. 다케시의 농담에 모든 스탭들이 아무 때나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카메라 뒤에서는 다음 장면을 녹화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출연진들이 거리낌없이 담배를 피우고 동료들과 스스럼없이 잡담을 나눈다. 그런데도 모든 이의 신경이 당장 녹화되고 있는 쇼에 쏠려 있는 집중력을 느낄 수 있다.
기타노 다케시와 비트 다케시, 두 얼굴의 사나이
노래가 끝나자 빠른 속도로 세트가 철거되고 다음 장면을 위한 세트가 준비된다. 다케시가 옷을 갈아입은 5분여의 시간 동안 이미 다음 장면 촬영 준비가 끝나 있었다. 다른 세 명의 패널과 더불어 다시 다케시의 농담 따먹기가 시작된다. "내 신작이 이번에 베니스 영화제에 나갔잖아. 일본의 내로라하는 영화사들이 모두 신작을 보냈는데 다 떨어졌어. 한심한 일이지. 근데 내 작품이 나갔거든. 일본영화는 늘 그렇게 한심해." 여성 출연자들이 '쓰고이(대단해요)'라고 호응하며 '근데 한국 기자들은 왜 온 거예요?"라고 묻자 다케시의 입담 속도가 빨라진다. "<기쿠지로의 여름>이 한국에서 개봉한대. 한국에선 내 이미지가 참 좋은데 하필 내 프로그램 중에 가장 바보 같은 이 쇼를 구경할 게 뭐야. 안 그래?"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독설이 꼬리를 물었다. "내 프로그램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를 인터뷰하려고 그 사람 작품 전부를 봤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고 이렇게까지 이상해질 수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니까." 농담이라도 이 정도면 가히 메가톤급이다.
영화감독이 아닌 코미디언 다케시는 '비트 다케시'라는 예명을 쓴다. 70년대에 비트 기요시를 만나 '투 비트'라는 만담 콤비를 결성해 큰 인기를 끈 이래 줄곧 쓰고 있는 예명이다. 다케시의 코미디는 '비트'라는 말이 주는 어감 그대로 통렬하고 공격적이어서 톡톡 쏘는 듯한 독설로 가득 차 있다. 빠르게 주고받는 만담의 속도를 이용한 다케시의 입담이 주로 독설로 가득 차 있다면 다케시의 신체를 이용한 코미디는 멍청해 보이는 분장을 한 후 엎어지고 자빠지는 슬랩스틱이며 출연진들을 곧잘 골탕먹이는, 가학과 피학을 오가는 꽤 폭력적인 웃음을 준다. 다케시는 자신의 코미디뿐만 아니라 모든 코미디가 얼마간 폭력적이며 악마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코미디는 객관적이냐, 주관적이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바나나 껍질을 밟고 어떤 사람이 미끄러졌다면 당사자에게는 불행이지만 구경꾼들에게는 코미디가 될 수 있다. 잘난 사람이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지면 재미있지만 불쌍한 사람이 미끄러지면 슬픔을 준다. 웃음은 그렇게 악마처럼 어떤 일에 끼어드는 것이다. 절대 웃어서는 안 되는 장례식장에서 웃음을 참을 수 없는 해프닝이 일어나는 일도 곧잘 있다. 웃음에는 늘 악마적이고 폭력적인 면이 함께 스며들어 있다."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다케시는 텔레비전 코미디에서처럼 익숙한 캐릭터로 나온다. 말이 많은 데다 빠르게 말하며 덤벙대고 안하무인격인 삼류 야쿠자 기쿠지로로 나오는 것이다. 그는 부모 없이 할머니 밑에서 자란 옆집 소년 마사오의 어머니를 찾아주러 여름방학을 이용해 여행을 떠난다. 이 영화에서의 다케시는 <소나티네> <하나비> 등에서 봤던 포커 페이스의 야쿠자 이미지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내가 좀 떠들썩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 관객은 그런 내 모습에 익숙하다. 텔레비전을 통해 늘 보던 모습이니까. 지금까지의 영화에선 의도적으로 텔레비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사실, 내가 감독과 주연을 겸한 영화에서 대사가 없는 무표정한 인물로 곧잘 나온 것은 대사 외우기가 귀찮았기 때문이다." 다케시와의 인터뷰에는 늘 농담이 끼어든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독설을 서슴지 않는다. "나는 일본 텔레비전의 저질화를 주도한 사람이다. 일본 방송계의 암적인 존재다." 일본 영화계에서의 위치에 관해 물어봐도 비슷한 답이 돌아온다. "나는 일본 영화계에 아마도 에이즈나 바이러스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잠시 멈춰 섰다 나아가는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은 다케시의 영화 중에서 처음으로 부정(父情)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그는 평범한 소년 마사오에게 어머니를 찾아주지 못하자 오토바이를 모는 두 건달과 트럭을 타고 전국을 유랑하는 소설가 지망의 청년과 함께 시골 강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다 큰 어른들이 아이와 함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며 낄낄거리는 풍경은 어른과 아이 모두 동심에 젖게 만든다. 이 단순한 이야기는 시시한 농담과 슬랩스틱 코미디, 그리고 엄격한 감상주의로 채색돼 있지만 침묵과 폭발의 연쇄 작용으로 이뤄진 다케시 영화 특유의 스타일은 화면에 묘한 사색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다케시의 영화는 아무 것도 아닌 순간에 아주 미묘하게 집중하고 그렇게 대다수 극영화에서 버려지는 침묵의 순간에 생각의 여백을 마련해준다. 거의 모든 장면의 시작이 배우들의 멈춰 있는 동작에서 시작하는 듯한, '액션'이란 신호와 함께 카메라가 돌아가고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그 순간에 감독 다케시는 이상하게도 카메라가 작동하는 순간이 아니라 2,3초의 시간이 흘러간 다음에 화면을 전개시키는 습관이 있다. 잠시 멈춰 섰다 나아가는 이런 호흡의 스타일에 대해 다케시는 "내 영화는 아무것도 정해두지 않고 순서대로 찍는다. 멈춰 선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내가 다음에 무엇을 찍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리하느라 잠시 화면이 머뭇거린다"고 말했다.
다케시의 대다수 영화와 마찬가지로 <기쿠지로의 여름>도 전부 즉흥 연출과 연기로 만들어졌다. 5년 전 <하나비>를 끝낸 그를 만났을 때 다케시는 "해변에서 축구공을 차며 노는 어린아이의 이미지를 갖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정해두지 않았다"며 차기작 기획을 설명했었다. '해변이 있다. 그리고 두 남녀가 있다'는 설정만으로 <미치광이 피에로>를 찍었던 장 뤽 고다르처럼 기타노 다케시는 현장에서 영화의 생명을 만들어가는 능력의 소유자다. <기쿠지로의 여름> 촬영을 앞두고 그는 신문의 네 컷 만화처럼 기승전결의 뼈대만 갖고 시작했다. '첫째, 엄마 아빠가 없는 아이가 여름방학을 맞았다. 둘째, 그 아이는 엄마가 만나고 싶어졌다. 셋째, 아이는 엄마를 만나러 갔다. 넷째, 가다가 이상한 아저씨를 만나 놀다가 돌아왔다.' 단순한 이 골격을 놓고 다케시는 이야기에 살을 붙여놓는다. 그 살의 구체적인 질감은 등장인물의 무심한 듯 자연스런 연기와 공간에서 나온다. "내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장면이 많은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편영화 상영 분량을 맞출 수 없다고 스크립터가 충고하기 때문이다. 데뷔작 <그 남자 흉폭하다>를 찍을 때 스크립터는 이대로 가면 한 시간 분량도 채 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래서 주인공 형사가 거리를 걷는 모습을 많이 촬영해서 집어넣었는데 나중에 개봉하니 토니 레인즈 같은 서구 평론가들이 절찬했다. 폭력에 물든 주인공의 고독한 내면을 보여주는 사색적인 장면이라고 의미를 부여해서 기분이 좋았다."
<기쿠지로의 여름>은 이런 무위(無爲),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한 등장인물의 모습과 그들이 처한 공간에서 순수한 유희의 쾌감을 끌어낸다. 주인공 마사오가 어머니가 사는 동네에 갈 차편이 마땅치 않자 기쿠지로는 데이트중인 남녀의 차에 윽박지르다시피 해서 억지로 동승하고 네 사람은 출입이 금지된 잔디밭에서 브레이크 댄스와 저글링을 하며 심심한 시간을 때운다. <기쿠지로의 여름>은 일종의 로드 무비지만 고독한 자아에 성찰의 시간을 마련하는 식의 서구 예술영화의 전형과는 저만큼 떨어져 있다. 그들은 그저 노는 것이다. 노는 것을 통해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서로 오가는 애정과 공감을 느낀다. 아이와 어른이 더불어 노는 것이야말로, 생로병사와 노동에의 강박과 사회적 목표에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기를 들여다보고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 가장 밀도 있는 순간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기쿠지로는 마사오의 엄마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양로원을 찾아가 늙은 노모를 멀리서 바라만 보다 돌아온다. 가족의 유대를 마련할 기회를 놓친 기쿠지로에게 마사오는 또다른 대체 가정의 구성원인 아들일 수 있지만 이 영화에서 진정한 가족은 마사오와 기쿠지로의 관계뿐만 아니라 마사오와 함께 놀아주는 사회의 아웃사이더 청년들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면도날로 베어낸 삶
기타노 다케시는 <하나비> 직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가족이란, 남들이 보지 않으면 버리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지만 <기쿠지로의 여름>을 만들고 난 후인 이제는 "내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옛날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가보다"고 능청을 부렸다. 그는 이 영화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공양의 의미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케시는 도쿄 외곽의 가장 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부락에서 자랐으며 페인트 공인 그의 아버지는 툭하면 다케시와 그의 형을 두들겨 팼다. 다케시는 형과 함께 아버지를 죽일 모의를 꾸몄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렇게 잔인한 아버지였는데도 그는 그 부락에서 유일하게 자식들을 고등학교에 보냈다.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강짜가 심하고 주위 사람을 구박하지만 사실은 마음이 여린 영화 속의 기쿠지로는 다케시의 실제 아버지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내가 영화 속의 마사오 나이 때 아버지와 함께 바다에 놀러간 적이 있다. 도쿄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바닷가였는데 아버지는 그곳에서 줄곧 술을 마셨고 나와 형은 신나게 놀았다. 돌아오는 전철에서 앉을 데가 없어 서 있었는데 그때 마침 앉아 있던 미군 병사가 일어나서 나를 앉혀주고는 허쉬 초콜릿을 줬다. 평소 아버지는 미국인들을 혐오했다. '미국놈들 다시 전쟁 나면 다 죽여버린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아버지는 미국인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역시 미국놈들은 대단해. 얘한테 초콜릿을 다 줬다니까'라며 자랑스레 말했다."
인생이란 가장 잔인한 것과 가장 따뜻한 것이 공존하는 것이다. 다케시 영화의 힘은 그 모순을 응축하는 데서 나온다. 그의 영화가 웃기면서도 슬프고 매우 폭력적인 순간에 평온함을 느끼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유명한 즉흥 연출도 정해진 룰을 따르지 않고 좌충우돌하는 양상을 보이는 인생을 모방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영화 속의 마사오가 후반부로 갈수록 기쿠지로와 친해지는 것처럼 실제 촬영장에서도 그랬다. 처음에 아이는 내 곁에 오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너무 친해져서 영화를 찍고 있는지 실제 삶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기쿠지로의 여름> 이후에 다케시는 <브라더>를 찍었고 최근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될 신작을 완성했다. 남녀간의 색기 어린 사랑을 다룬 이 신작은 다케시가 처음으로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찍은 것이다. 침묵과 폭력의 변증법으로 이뤄진 그의 스타일이 이 신작 애정 영화에도 드러나느냐고 물었더니 다케시는 잠시 망설인 후에 심드렁하게 농담을 건넸다. "침묵... 그 다음엔 더한 침묵이다." 한바탕 웃음이 오간 후에 그가 덧붙였다. "영화 속의 사랑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도 폭력이 들어 있다. 어쩌면 압도적인 폭력이 드러날 것이다." 역시 다케시는 다케시다. 따스한 것과 잔인한 것을 공존시키는 그의 힘은 삶의 잔인함을 희극적 유희로 돌파하는 <기쿠지로의 여름>처럼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일본 엔터테인먼트계의 신이지만 면도날로 베듯이 삶의 모순된 정경을 시치미 뚝 떼고 보여주며 눈치채지 않게 우리 마음을 빼앗아가는 현대 일본의 뛰어난 예술가다.
2002.08.14 / 김영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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