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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

가/ㅣ 2001. 10. 28. 20:40 Posted by 로드365

▒ 기타노 다케시 (北野 0武 :キタノ 0タケシ)
- 1947년 1월 18일 도쿄... 이따찌구(東京都 足立區)에서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기타노 다케시라는 이름으로, 남들과 비슷한 유년시절을 보낸다. 당시 그의 아버지(키쿠지로:菊次郞)는 페인트가게를 운영하는 페인트공이였고, 그는 아버지의 일을 잘 도와주는 4남매 중의 막내아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붓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다 걸핏하면 어머니를 두들겨 팼다. 극빈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가 기억하는 당시의 일은 학용품을 구입할 돈이 없어서 눈물을 찔끔거렸던 것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그때도 역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익살스러운 끼를 종종 발산했으며 야구, 소프트볼, 수영 등 스포츠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공부 또한 상위급에 속해 1965년에는 일본의 명문대학 중의 하나인 메이지(明治) 대학 공학부에 입학을 하게 된다. 그러나 대학 2학년 때 학생운동, 전공투에 참가한 것으로 인해 대학을 중퇴하면서 제 2의 인생 전환점을 맞이한다.
대학을 중퇴하고...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다방보이, 백화점 점원, 클럽보이, 택시운전사 등의 갖가지 아르바이트는 마침내 아사쿠사(淺草)의 유명한 스트립 극장 '프랑스 좌'의 엘리베이터 보이로 이어졌다. 그 곳에서 처음으로 연예계와의 인연을 맺기시작했다. 1972년 프랑스 좌의 단장이었던 코메디언 후까미의 제자로 입문해서 연예계 생활의 지도를 받게 된다. 그런던 중 1974년 프랑스 좌에서 만난 키요시와 '투 비트'라는 만담콤비를 결성하게 되고, 그 유명한 비트 다케시라는 예명도 그때 갖게 된다. 일본의 명문대학 중 하나인 메이지대학 공학부 출신(1965년 입학했으나 대학 2년 때 전공투 참가 등의 이유로 퇴학)의 코메디언이 상식과 관습에 대해 신랄한 독설과 음담패설을 퍼붓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는 점점 매스컴의 주목을 받게 된다. 80년 후지 TV의 를 기폭제로 인기몰이를 시작, 각종 매스컴의 주목을 받게 되고, 그는 그렇게 점점 코미디언으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기타노 다케시는 TV,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동료 코미디언을 학대하며 시청자들의 박수를 받는 말썽꾸러기 스타의 이미지를 굳혔다. 특히 그는 프로그램에 앞서서 리허설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데, 그래서 담당 PD들은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조마조마 했다고 한다. 그가 출연한 프로그램중 시청률이 가장 높았던 '다케시 코미디
울트라 퀴즈'에선 출연자를 물에 빠뜨린 뒤 유유자적한 모습을 보이는 이지메형 코미디를 선보이기도 했다.


막강한 인기와 영향력.. 인기있는 코미디언이 되자 자신을 스승으로 모시는 후배 코미디언으로 짜여진 "다케시 군단" 이라는 사조직을 거느리기도 한다. 이들은 기타노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황제처럼 떠받들었고, 같은 모습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 익살을 부렸다. 86년'프라이데이'란 사진잡지가 기타노 다케시와 사귀는 어느 여대생의 사진을 게재하자 다케시 휘하의 조직원들은 잡지 편집실로 쳐들어가 기자들을 집단으로 구타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약 7개월간의 공백기간을 가지게 된다. 그럼에도 그의 인기는 그칠 줄을 몰라, 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황금시간대의 TV프로들이 다시 그를 맞이 하였고, 그는 이제 활동영역을 문단으로 까지 넓혀 소설과 에세이까지 쓰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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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무렵, 그는 돌연 영화배우로 변신하게 된다. 그의 첫 작품은 '마코또 짱'이라는 영화였지만, 본격적인 영화배우로서의 작품은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감독의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 (戰場のメリ-クリスマス)>이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포로 수용소에서 영국군 포로들과 일본군 수용소 감독관 사이에 오가는 고통스런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기타노 다케시는 잔혹한 군인 하라(原)역을 멋지게 연기, 배우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영화에는 다케시 외에도 일본 뉴에이지 음악가로 잘 알려진 '류이치 사카모토'가 출연하여 명연기를 보여줬으며, 주제곡'Merry Christmas Mr. Lawrence'가 사카모토의 여러앨범에 다양한 버젼으로 녹음되어 잘 알려져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사카모토의 베스트앨범인 '1996'에서의 피아노 트리오 연주곡이 가장 잘 알려져있으며, 유럽에는 데이빗 실비앙이 가사를 덧붙이고 직접 노래한 'Forbidden Colours'라는 곡으로 더 잘 알려져있다. ) <악마가 부르는 노래>, <만화책 따위는 필요없어> 같은 트랜디 영화에서 냉혈한 야쿠자 킬러역으로 외유를 즐겼다.또한 95년에는 헐리우드 영화 <코드명 J>에서 키아누 리브스와 대결하기도 했다. (왼쪽 2개의 포스터가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이다. 제복의 젊은 류이치 사카모토와 황비홍 헤어스타일(^^)의 기타노 다케시의 모습이 새롭기만하다. 그리고 오른쪽의 포스터가 그 유명한 키아누 리브스와의 연기대결을 펼친 '코드명 J'...키아누 리브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연기력과 외모를 볼 수 있는 영화..^^ )


 


89년에 처음으로 주연 의뢰를 받게 되는데 그 영화가 바로 <그 남자 흉폭하다 (その男,凶暴につき)>였다. 원래 이 영화의 감독은 깡패영화의 대가로 꼽히던 후쿠사카 긴지가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로 바쁜 감독과 주연배우의 스케줄이 맞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어지던 이 영화는 결국 기타노 다케시의 감독 데뷔작으로 운명이 바뀌게 된다. 이 영화가 완성된 순간, 기타노 다케시는 단숨에 후쿠사카 긴지를 넘어서는 유능한 영화감독으로 부상했다. 특히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다케시가 여동생을 납치한 일당들이 숨어있는 창고에서 벌이는 마지막 시퀀스는<저수지의 개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듯 하다(96년 타란티노는 자신의 배급사를 통해 다케시의 영화를 미국에 수입했다.) 그가 감독 겸 주연을 맡은 그의 처녀작은 제11회 요코하마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게 된다.

세번째 영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あの夏,いちばん靜かな海)>(92)에서 그의 스타일은 획기적으로 변모한다. 자신의 영화사인 '오피스 기타노'를 차리고 직접 각본을 쓰고 편집까지 도맡은 진정한 작가 영화의 출발인 <소나티네>와 함께 기타노 다케시의 최고작으로 평가받은 이 영화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모션으로 가득찬 침묵과 명상의 시편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키네마 준보 독자 선출 감독상, 블루 리본 최우수 감독상과 호치(報知) 영화상, 제 13회 요꼬하마 영화제의 감독상을 받기에 이른다. 그 뒤를 잇는 93년작 <소나티네 (ソナチネ)>를 통해 영화 작가 기타노 다케시라는 이름은 유럽 등에 널리 알려졌고, 그는 이제 자국 내에서도 영화감독으로서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 자신도 가장 만족스럽게 만들어졌다고 평하는 <소나티네>는 폭력을 시적으로 미화시킨 기타노 스타일의 절정이라는 평을 얻으며 국내보다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영화감독으로서의 활동은 그의 다섯 번째 작품인 <모두∼ 하고 있습니까! (みんな∼やってるか!)>의 공개를 앞 둔 94년, 오토바이 사고로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는 불운을 맞기도 한다. 당시 그의 이름을 내건 TV프로가 7개나 있었던 터라 각 방송국은 마비상태에 이르렀고, 뇌수술을 받은 기타노는 오른쪽 얼굴이 마비되는 치명적 상처를 받는다. 죽음을 넘나들 정도의, 배우로서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사고 후, 기타노 다케시에게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까? 하는 세간의 궁금증이 자못 컸으나 그는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오히려 전보다 더 정열적으로 TV활동을 계속한다. 단지 변한 게 있다면 그가 영화 안에서 그려나가는 삶에 대한 시각이 조금은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96년 자신의 사춘기 시절을 거울삼아 (실제로 그는 과거 복싱을 했으며, 강한 펀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린 <키즈 리턴 (キッズ·リタ-ン)>을 사고 후 첫 재기작으로 발표, 작품적 절찬은 물론 흥행 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다. 지금까지 느와르 로맨티시즘에 사로잡혀 모든 주인공들을 무자비한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다케시는 여기서 처음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로 시선을 돌린다. <키즈 리턴>은 14권이나 되는 베스트 셀러 작가이기도 한 기타노 다케시의 첫번째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97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하나-비>로 다케시는 일본 영화의 중심으로 등극함과 동시에 여백이 아름다운 무채색의 동양화라는 극찬을 받는다. 9살 짜리 꼬마와 덜 떨어진 중년 남자의 소꿉장난 같은 이야기 <키쿠지로의 여름>이 98년 여름 일본에서 개봉을 했으며,99년 PIFF에서도 상영되어 극찬을 받은 바 있다. 이 영화에서는 기존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따뜻한 시선의 기타노 다케시가 있다. 또한 미국과 일본 합작으로 제작된 는 일본에서 피신한 야쿠자가 미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곳의 마약조직과 암투를 벌이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오시마 나시마 감독의 <법도 (法道)>에도 출연하여 사무라이의 역할을 했다. 그는 와 <법도(ごはと)>로 올해 PIFF를 다시 한 번 우리 곁을 찾아왔다.

그림 네 컷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어 촬영장에서 그때 그때마다 떠오르는 영감으로 영화를 만들어 나 간다는 기타노 다케시....
늘 유머가 넘치면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는 그의 삶의 자세는 오늘날 기타노 다케시를 세계적인 영화인으로 인정받게 한 원동력이 된 듯하다. 또한 단 두 편의 영화 - '소나티네' '하나-비' - 를 보고 그에 관한 홈페이지를 만들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 것을 보더라도 말이다....처음엔 단순히 그에 대한 관심에서 자료를 모으다가 욕심까지 부려서 조그만 홈을 열게 됐는데, 어느 인터뷰에서의 그의 말대로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게 우리 인생일지도 모르겠다..너무 거창한가??..... 그에 대한 국내자료가 많지 않은 관계로 다른 사이트와 중복되는 자료가 있겠지만 이해해주기 바라며, 앞으로 좀 더 많은 그의 영화가 우리곁을 찾아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http://myhome.netsgo.com/dudemj72/

<주요작품>

1989 그 남자 흉폭하다( 제11회 요코하마 영화제 감독상, 니폰 아카데미 주연상)
1990 3-4x10月 ( 일본영화 감독협의 신인 장려상)
1991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 키네마 준보 독자 선출 감독상, 블루 리본 최우수 감독상, 호치 영화상, 제13회 요코 00000하마영화제 감독상)
1993 소나티네 ( 꼬냑 영화제 비평가상 수상, 타오르미나 영화제 그랑프리 깐느 영화제 ' 주목할 만한 시선', 런던영화 00000제 초청등)
1995 모두~ 하고 있습니까!
1996 키즈 리턴 ( 칸느 영화제 '15인의 감독의 밤' 부분 중 1인으로 선정)
1997 하나-비 (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1998 키쿠지로의 여름
1999.11 프랑스 문화 훈장 수상
2000 브라더






<하나-비>의 일본감독 기타노 다케시 인터뷰◈ 시네21. 1997.10

- 야쿠자와 형사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 그 세계와 친한가.
= 하, 하. 그 바닥에서 친한 사람은 없는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야쿠자들이 나를 좋아한다. 유괴당한 적도 있다. 개인적으로 야쿠자를 좋아한다. 죽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그런 소재를 찍고 싶다.

- 죽음에 친밀감을 느끼나. 당신 영화의 주인공들은 죽어가는 표정이 평화롭다. 심지어 죽음을 향해 돌격하는 듯한 인상도 풍긴다.
= 젊었을 때부터 죽는 게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내 영화에 죽음이 많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만든 < 불꽃놀이>는 전작들과 좀 다르다. 죽음과 친해졌다고 할까, 죽음 속으로 돌진하는 영화다. 정말 위험하다고 느꼈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들 때, 죽음이 막 다가왔을 때는 아픔을 못 느낀다. 그래서 평온해 보이나 보다.

- 영화에 죽음과 더불어 바다 이미지가 자주 나오는데....
= 바다가 좋으니까. 생물이 진화해서 육지로 갔다. 그러니까 바다는 태고의 생물이 있었던 곳이다. 그곳에서 고향과 같은 휴식과 평온함을 느낀다 .

- 폭력묘사가 아주 독특하다. 아주 묘하게 깨어 있는 듯한 느낌을 주며 조용하다.
= 그건 폭풍 속의 고요와 같은 것이다. 터지고 폭파하기 전에는 조용해야지. 관객에게 어떤 위기의 순간이 오고 있다는 압력을 주기 위해 조용한 분위기가 깔리는 것이다. 한-일전 축구하고 똑같다. 조용하다가 그만 한국이 골을 넣으면서 분위기가 비극적으로 폭발하지 않았는가(웃음).

- 또, 영화가 조용한 인상을 주는 것은 당신을 비롯한 등장인물의 무표정한 연기 때문이기도 하다.
= 일본에서는 축제 때 가면을 쓴다. 일본문화에서는 연기하는 사람의 표정 보다는 보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중요시하며 그걸 침해하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 일본의 요리방송을 예로 들어보자. 진행자가 요리를 소개할 때, 맛있다, 그건 사골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양념은 뭘 썼다, 이런 식으로 하면 시청자는 흥미를 잃고 채널을 돌려버린다. 보는 사람에게 상상의 여지를 많이 남겨두는 것이 일 본문화의 특징이다. 그래서 난 배우들에게 연기를 주문할 때도 가능하면 표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얘기한다.

- 그렇게 일본문화의 전통에 기반하고 있는데도 당신 영화는 왜 일본에서 흥행이 안 되나.
= 어, 그건(웃음). 일본에서는 할리우드영화가 압도한다. 내 영화의 경우에는…. 텔레비전에서 매일매일 공짜로 보는데(기타노는 일본에서 TV쇼를 7개나 진행하고 있는 코미디언이기도 하다) 내 영화를 극장에서 돈 주고 보겠나... 일본에선 영화관 입장료가 1천8백엔이다. 내 영화는 5백엔만 받고 입장시켰으면 좋겠다. 내 영화는 5백엔짜리니까(웃음).

-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죽는 얘기로 끝을 맺는데. 어떤가. 그게 당신의 인생관인가.
= 감독이 되고 싶다고 젊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하지만, 나는 되고 싶어 된 게 아니라 어쩌다보니 돼버렸다. 야구선수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야구 선수가 돼 있는 것처럼......... 운명이고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삶이란 표류하다가 도착하는 것이다. 대학다닐 때 학생운동을 하다가 잘렸다. 먹고 살기 위해 아키바의 스트립쇼 무대 막간에서 만담을 했다. 그러니까 어느새 만담가가 됐다. 그리고 영화에 출연하려고 했는데 감독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영화감독이 됐다.

- 일본 코미디의 전통을 혁파한 코미디언으로 알고 있는데.....
= 예전의 일본코미디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 하는 것이었다. 그저 얼굴이 재미있게 생기면 됐다. 그전에는 원숭이 흉내를 낸다던가 하는 것으로 웃겼는데, 70년대부터 교양인들이 즐길 만한 코미디가 나와야 한다는 분위기가 생겼다. 내가 혁파한 것은 별로 없고 그저 처음으로 지식인도 볼 수 있는 코미디를 했다는 것뿐이다. 내가 대학을 나온 덕분이다.

- 당신의 성장환경에 대해 듣고 싶다.
= 나는 도쿄에서 최악인 동네에 살았다. 우리 집 앞에는 야쿠자들이 살았고 뒤에는 마을이 아니라 부랑자들의 집합처 같은 부락이 있었다. 그중에 는 한국인들도 많았다. 어렸을 때 이씨성을 가진 친구와 놀았던 기억이 난다. ‘너는 왜 성이 이씨니?’하고 물으면 그 아이가 ‘나는 실은 한국 인이야’라고 말했던 것이다. 내가 살던 동네는 도쿄에서 가장 가난한 사 람들이 모여 살았다. 고등학교를 나온 자식들이 있는 집은 우리가 유일했다(기타노의 형은 현재 대학교수다). 우리 아버지는 페인트 칠을 하는 분 이었는데 이웃에서는 왜 자식들에게 페인트칠을 안가르치고 공부를 시키느냐고 비웃었다. 그러니 내가 출세한 건 다 아버지 공이다. 실은, 이 아버지는 어머니가 재혼해 두번째로 맞은 남편이었는데 대책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술을 먹고 집에 들어오는 기척이 들리고 개가 짖기 시작하면 온 가족이 다 도망치려고 숨었다. 하도 못 살게 구니까 집안 식구들이 회의를 해서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 적이 있었다. 낫을 들고 죽이려 했으나 집안 기둥에 박혀버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엄청나게 많은 매를 맞았다. 일본 노래 중에 ‘낫을 기둥에 박으면…’이라는 가사의 노래가 있는데 나중에 아버지 앞에서 그 노래를 부르다 또 맞았다(웃음).

-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 내 할아버지는 행불자다. 친척들이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부랑아라고도 하고 거지였다고도 한다. 아무도 정체를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한국계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호적이 없기때문에 확인은 못했다

- 코미디언 활동과 마찬가지로 영화감독으로 어떤 계보로도 묶을 수 없는 독특한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 일본에서 영화를 많이 하는 형태는 조감독 생활 10년, 20년을 하고 나서 감독으로 데뷔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기가 모시는 감독 스타일을 익힐 수는 있겠지만 새로운 걸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나처럼 전혀 다른 분야에 있는 감독이 연출하는 것도 괜찮다.

- 일본영화 전통의 계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한다고 보나...
= 난 영화를 많이 보지 못했다. 그저 보통사람처럼 미국영화만을 봤다. 요즘 들어서야 구로자와 아키라나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보려고 한다. 얼마 전에 잉그마르 베리만의 <처녀의 샘>이 유명하다고 해서 봤는데 난 관능적인 영화인 줄 알았다. 한데 무척 어렵고 하나도 관능적이지 않아서 실망했다(웃음). 일본에서 내가 차지하는 위치? 암적인 존재다. 일본영화계의 에이즈다. 나를 부수고 위에 서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웃음).

- 항상 같은 스탭, 배우들과 작업을 하는데 팀워크가 좋은 것 같다.
= 그렇다. 배우들과 함께 작업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호흡이 잘 맞는다. 내 영화에는 대본이 없다. 영화를 만들고 나서야 시나리오로 정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불꽃놀이>의 처음 장면에서 주인공의 동료형사가 휠체 어에 앉아 있으면서 이제 그림이나 그릴까, 라고 말한다. 그게 원래 대사 였다. 그런데 실제로 찍는 도중에 그가 베레모도 써볼까, 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다음 장면에는 그가 베레모를 사러 가는 장면이 나온다. 내 영화는 이런 식으로 찍는다. 미리 머릿속에 정해두면 상상력이 갇혀버 린다. 진행하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로 찍는 것이다.

- <불꽃놀이>에 나오는, 점묘로 그린 듯한 그림을 직접 그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본전통회화 분위기가 많이 난다. <소나티네>의 해변 장면에서 종이씨름을 하는 것도 그렇고...
= 그림은…. 일본에서 점묘화는 대중화다. 전통적인 흔적이 난다면 그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 그림 수준은 유치원생이 그릴 수 있는 실력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리기 쉬운 뒤통수만 주로 그렸다(웃음). <소나티네>의 종 이씨름 장면은 우연히 찍은 것이다. 난 영화를 대강의 줄거리만 생각하고 찍는데, <소나티네>는 야쿠자가 해변에 가서 뭘 할까, 궁리하다가 마침 종이씨름이 떠올라서 찍은 것이다. 만약 그 영화의 배경이 한국이었다면 아마 주인공이 축구를 했을 것이다.

- 다음 영화도 야쿠자 영화일까...
= 어린이 영화를 찍을 것 같다. 줄거리는 아직 모른다. 어린아이가 혼자서 공을 차는 이미지만 잡아놓고 있다. 거기서부터 영화가 풀리지 않을까 한다.







불꽃놀이를 벌인 기타노 다케시 ◈ 프리미어  1998.11

- 공식기자회견 때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그렇게 재미있는 기자회견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유머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건가요? 보통 유머는 유전적이기도 하잖아요.
=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우리 어머닌 욕만 하는데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지요. ‘프라이데이’ 사건 때도(그는 자신의 여성 스캔들을 기사화한 프라이데이 지 편집부를 찾아가 폭력을 휘둘러 상해죄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어머니가 몸소 나서서 “그놈 사형시켜라!” 하고 다녔을 정도니까요.

- 영화를 배운 적이 없다면서 어떻게 그토록 영화를 잘 찍을 수 있는 거지요?
= 비트 다케시로서 TV에 출연할 땐데, 카메라가 6대 정도 있었어요. 카메라 스위칭을 지시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거 내가 감독하는 거 아니야?” 영화에는 카메라가 한 두 대밖에 없으니까 더 빨리, 편하게 찍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로서는 일본에서 최고의 자리에 서 있지만,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일본에서 형편없는 대접을 받고 있지요. 화나지 않나요?
= 지금까지 내가 만든 영화가 모두 일본에서 실패한 건 사실이에요. 관객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일본의 대다수 감독들이 관객을 불러들이려 노력해요. <쉘 위 댄스?> 같은 게 그런 영화에요. 하지만 난 일부러 더 안그래요. 코미디언으로 벌어들인 돈을 감독으로 몽땅 다 써버리지요. 내가 좋아서 그러는 건데요, 뭘. <하나-비>도 역시 일본에서 영 재미 못볼 것 같아요. 베니스나 이번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대단하게 평가해줬는데, 이 인기를 조금이라도 일본에 가져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전작 <키즈 리턴>은 어느 정도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나-비>도 그런가요?
= 일부는 그래요. 호리베 형사의 이야기는 내 사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지요(그는 3년 전 오토바이 사고를 크게 당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때 TV 출연도, 아무 일도 못하고 있으면서 혼자 생각했어요. ‘그림이나 그려볼까?’ 그래서 호리베 형사가 사고 후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 또 난 아내한테 한번도 잘해준 적이 없어요. 아내에게 잘해주는 남편 얘기를 좀 하면 어떨까도 생각했지요. 그러다보니 얘기가 늘어나서 아예 이걸 영화로 해버리자, 했지요.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아내는 절대로 안죽을 거라는 점입니다. 워낙 튼튼하거든요.

- 제목 ‘하나-비’는 어떤 의미인가요?
= 그 제목은 내가 안붙였어요. 난 ‘기타노 다케시의 일곱 번째 영화’란 제목을 붙이고 싶었는데, 아무도 그런 제목은 영화에서 안쓴다고 반대하더군요. 프로듀서가 ‘하나-비’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나도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어요. ‘하나(花)’는 무상함, 삶이고 ‘비(火)’는 총격, 폭력, 죽음이라나요. 그 얘기 들은 뒤엔 인터뷰할 때마다 그렇게 대답해요.

- <키즈 리턴>만 빼고는 모든 영화가 다 죽음으로 끝납니다. <하나-비>는 아예 ‘死’ 자로 시작하기도 하구요. 죽음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은 어떤 건가요?
= 첫 영화부터 <소나티네>까지는 죽음으로 어디에선가 도피하는 것이었어요. 다음 영화 <키즈 리턴>의 주인공들은 처음으로 죽지 않는데, 마지막에 ‘아직 끝나지 않았어’란 대사가 나오긴 하지만 사실 그 애들 70퍼센트는 끝난거나 마찬가지지요. 30퍼센트 남은 것도 죽음이나 다름없구요. 하지만 <하나-비>는 다릅니다. 도입부 길에 ‘死ね’(죽어버려)라고 써있는 길을 차로 질주하는데, 그건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죽음으로, 같을지 몰라도 <하나-비>의 죽음은 사실 전혀 다른 것일 수 있습니다. 그 죽음은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기도 하지요. 난 죽음과 삶은 시계추 같다고 생각해요. 왼쪽으로 흔들리면 오른쪽으로도 똑같은 만큼 흔들리는 것처럼, 삶과 죽음도 함께 존재하는 겁니다.

- 전작들에서처럼 <하나-비>도 인간의 폭력성에 주목하고 있더군요.
= 지금 일본 애들은 아픔을 몰라요. 그건 폭력을 몰라서 그런 거지요. 난 어렸을 적에 싸움을 하도 많이 해봐서 폭력이 뭔지 압니다. 난 안다치게 때리는 법도 알고 정작 내 영화에서 죽는 사람은 몇 안됩니다. 오히려 일본의 애니메이션들이 더 폭력적이지요.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수백 명씩 죽어나가지 않습니까? 하지만 난 그렇게 안해요. 진짜 폭력이 뭔지 아니까요. 그래도 애니메이션이나 할리우드 영화들보다 내 영화가 더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사실적이기 때문이에요.

- 이런 폭력들 가운데 섞여나오는 유머들은 또 폭력과 상당히 대조적이던데요. 둘의 조합이 참 신기했어요.
= 폭력의 반대편엔 늘 유머가 있게 마련이지요. 둘은 늘 동시에 존재해요. 폭력이 100이면 유머도 100이에요. 그리고 폭력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만한 깊이의 유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꼭 나처럼 말이지요

- 첫 영화 <그 남자 흉폭하다>에서부터 <하나-비>까지 폭력을 얘기할 때면 꼭 야쿠자가 등장하더군요. 야쿠자에 대해 무슨 억한 감정 있는 것 아닙니까? 혹시 당한 경험이라든지.
= 내 문제는 야쿠자가 나한테 너무 잘해준다는 거예요. 야쿠자가 내게 너무 좋은 인상만 줘서 탈이죠(웃음). 형사나 야쿠자는 모두 죽음에 가까운, 폭력을 가장 잘 드러내 줄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되지요. 그래서 많이 사용한 겁니다.

- 장면을 생략하는 기법을 잘쓰는 것으로 유명하죠. 예를 들어 맞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맞아서 뻗어있는 장면만 보여준다든지 하는. 그 이유는 뭔가요?
= 영화 역사가 1백 년 아닙니까. 때리는 장면을 얼마나 많이 봤겠어요. 그래서 난 때리는 장면 같은 건 삭제하고 싶어요. 맞아서 누워있는 걸 보여주면 사람들은 ‘아, 저 놈이 맞았구나’ 하고 알 거 아니에요. 난 필요없는 것들은 다 빼버리지요. 그래도 충분히 설명이 되니까요.

- 영화가 전체적으로 푸른 색이 강하던데요.
= 처음에 난 도시를 찍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도쿄 같은 도시는 너무 많은 색깔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도시를 벗어나 블루를 중심으로 영화를 찍어나갔지요. 난 술 먹고 가끔 농담해요. ‘블루와 핑크의 세계는 지나갔어’라구요. 어떤 색조의 영화를 찍을까는 늘 내 과제입니다.

- 타고난 만담가라고 들었는데, 영화 속 니시 형사는 너무도 무표정하더군요.
= 영화의 기본은 무성영화라고 생각해요. 가장 이상적인 영화가 뭔지 아세요? 그건 10장의 슬라이드를 보여주고 관객으로부터 감동을 얻어내는 것이지요. 대사나 음악 따위가 없이 관객이 감동한다면 그게 바로 완벽한 영화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난 코미디언이기 때문에 주로 대사로 승부해왔어요. 그래서 영화에선 되도록 대사를 사용하고 싶지 않아요.

- 니시 형사뿐만 아니라 아내도 대사가 없긴 마찬가지던데요. 하도 말을 안하길래 실어증 환자인 줄 알았어요. 마지막 장면의 ‘고마워요’ ‘미안해요’ 두 마디가 고작이죠.
= 그건 처음부터 의도했던 거예요. 남자와 여자가 입만 열었다 하면 좀 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데 이번 영화는 그래선 안되기 때문에 대사를 완전히 배제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대사를 강조하기 위해 더 그랬지요. 만약 처음부터 여주인공의 대사가 있었다면 마지막 말인 ‘고마워요’ ‘미안해요’가 가슴에 그렇게 와닿지 않을 테지요.

- 그렇군요. 그런데 니시가 살아가는 방식이 맘에 드나요?
= 니시는 둘 중 하나예요. 대단한 바보거나 욕망을 가진 사람이거나. 후자는 위험하긴 하지만 맘에 들어요. 이건 일본에서 잃어버리고 있는 건데, 유럽에서 깨닫게 해주는 것 같아요.

- 개인적으로는 니시에 대해 참 혼란스러워요. 처음에 등장하는 나쁜 아이들은 막 혼내주면서, 나중에 나오는 나쁜 고물상 남자는 건드리지도 않잖아요(나쁜 아이들은 니시 형사의 차 위에서 도시락을 먹다가 혼줄이 난다. 고물상 남자는 자기 길을 막았다는 이유로 약자의 차를 부수며 지나가는데, 니시가 은행을 털 때 그 고물상의 물건들을 이용하게 된다).
= 니시가 고물상을 찾아갔을 때, 주인이 묻지요. “당신 그걸로 뭐할 거요?” 니시는 말합니다. “은행을 털 겁니다.” 이때 두 사람한테는 공감대, 애정이 형성됩니다. 너 나쁜 놈이냐? 나도 나쁜 놈이다, 라는. 그래서 니시는 그를 건드리지 않는 거예요.

- 전체적으로 시간이 해체된 느낌이 들어 처음엔 혼동스럽기도 했습니다. 동료가 죽은 장면을 처음부터 계속 삽입한다든지, 하는 것 말이에요.
= 처음엔 그게 아니었어요. 회상 씬이 죽 연결되면서 호리베가 총을 맞고 바다로 가는 것이 시간 순서대로 진행됐는데, 그렇게 하다보니 호리베가 니시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거예요. 그래서 8번이나 회상 장면을 재편집했지요. 그러다보니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대요.

- 극중에서 호리베가 그린 그림들을 직접 그린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꽃과 동물을 결합한 독특한 그림들이 많던데, 그 의미는 뭔가요?
= 사실 처음엔 그림이 아니라 도자기를 하려고 했어요. 꽃을 굽는 거지요(일본에 그런 기법이 있다 한다). 그러다가 해바라기를 사자와 합치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어요. 이건 도자기적 발상이지요. 난 그림 실력이 신통치 못하니까 합치면 좀 낫지 않을까도 생각했구요.

- 영화에 나온 그림들은 다 어떻게 했나요?
= 5대 도시를 돌면서 전시회를 가질 생각이에요. 미츠고시 백화점에서 열릴 건데, 뒤에 메이킹 필름 같은 걸 틀면서 영화 홍보로 쓸 생각입니다. 내 그림 실력이 유치원생 수준이라 팔리지도 않을 거지만 사실 팔려도 골치 아파요. 세금 때문에 말이죠.

- 니시가 집으로 들어갈 때 입구에 어린 아이의 자전거, 신발 등이 놓여있지요. 자전거는 옆으로 비껴놓고 아이 신발은 그대로 두지요. 그건 죽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표시한 거겠지요?
= 그래요. 난 니시에게 자식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죽은 아이의 사진이나 향을 피워놓은 장면 등으로 표현하고 싶진 않았어요. 난 이런 건 정말 싫어요. 니시가 자전거를 옆으로 치우는 것은 자식에 대한 애착이 남아있기 때문이에요. 신발을 치우지 않는 건 그래야 예술적으로 보이니까 그랬어요. 두 번 다 치우면 재미없잖아요?

-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얘기는 뭔가요?
= 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말하지요. “도대체 뭔 얘길 하고 싶은 거냐?”고요. 난 영화에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넣지 않으려 해요. 그런 건 써서 남 주지요. 실패할 만한 건 다른 사람한테 시켜서 만들게 해요. 그럼 그 사람은 망하죠. 나도 그런 걸 해서 실패하는 거지만.

- 최근 일본 영화가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는 얘기가 자주 나오더군요. 하지만 며칠 전 사토시 켐모치(이번 영화제 뉴 커런트 부문에 <또 다른 하루>를 출품한 일본의 신인감독) 감독과 인터뷰할 때 그는 ‘ <하나-비> 수상을 끝으로 다시 일본은 내리막길을 걸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 이쪽저쪽에서 붐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마무라 쇼헤이가 <우나기>로 칸느에서 상탄 거하고 내가 <하나비>로 베니스에서 상탄 것 말고 또 뭐가 있나요? 다 밖에서 떠드는 얘기일 뿐, 일본 영화 안에선 그냥 그대로입니다.

- 그렇군요. 그런데 니시가 살아가는 방식이 맘에 드나요?
=이쪽저쪽에서 붐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마무라 쇼헤이가 <우나기>로 칸느에서 상탄 거하고 내가 <하나-비>로 베니스에서 상탄 것 말고 또 뭐가 있나요? 다 밖에서 떠드는 얘기일 뿐, 일본 영화 안에선 그냥 그대로입니다.

- 이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화장실에서 좀 찍어도 될까요?
= 물론이죠. 바지라도 벗어줄 수 있어요.









일본영화의 경쟁력? 전혀없다 - 기타노 다케시 인터뷰◈ 시네21 1998.12

- 한국인들은 비트 다케시로서의 당신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약간 설명을 해달라.
= 18년 전에 일본연예계에는 만담 붐이 일었다. 다섯팀 정도가 지금 아이돌 스타처럼 인기를 끌었다. 3, 4년 정도 지나자 팀이 깨지고 각자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뒤 쇼프로 사회자와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다가 영화를 찍었는데, 코미디언 이미지 때문에 잘 안 됐다. 그런데 요도가와 나가하루라는 아주 유명한 평론가가 있는데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를 보고 엄청난 호평을 하면서, 인정하고 귀여워해줬다. 지금은 비트 다케시 반, 기타노 다케시 반이다.

- 영화를 만들 때 코미디언 이미지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나.
= 기본적으로 5편 이상은 해야 된다. 그전까지는 코미디언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 일본 사람들은 당신을 ‘엔터테인먼트의 신’이라고 부른다던데.
= 죽어서 신이 될 뻔한 적은 있었다.

- 당신이 천재라고 생각하는가.
= 예전에 사람들이 나를 천재라고 부르도록, 몇번이나 작전을 세워봤지만 언제나 실패했다. 예를 들어 밤중에 홀랑 벗고 다니는 것 같은 쓸데없는 짓을 많이 했다.

- 1주일에 무려 9개의 TV 프로그램에 고정출연한다고 하던데,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인가.
= 프로의 열의와 성의가 있는 다른 사람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나같이 아무런 생각없이 하는 사람은 된다. 프로덕션이란 무서운 존재가 뒤에 버티고 있다. 끌려가서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오고, 그러면 된다.

- 당신에게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
= 우리 집은 아주 가난했는데 아버지는 형편없었고 어머니는 교육열이 아주 높은 분이었다. 나는 동네의 골목대장이었는데 어머니가 무서워 항상 어떻게 속이고 놀러다닐까, 하는 궁리를 했다. 어머니의 눈을 피해 돈도 떼어먹고 했는데, 잘하면 놀라운 사기꾼이 될 수도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야구를 좋아했다. 그때만 해도 축구나 다른 운동은 없었고, 오로지 야구뿐이었다. 야구, 권투, 학교가 탈출구였는데 진지하게 야구선수가 되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야구글러브를 사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야구글러브를 은행나무 아래 비닐에 싸서 묻어두었다. 어느 날 땅을 파보니까 글러브는 사라지고, 참고서가 나오는 것이었다. 또한번은 이름도 바꾸고, 권투도장을 다녔다. 그때도 어머니는 머리가 나빠진다고 극구 말렸다. 그래서 포기했다. 지금은 어머니에게 고맙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언제나 어머니의 존재가 컸다.

- 결국 어머니의 교육방식은 실패한 것 아닌가.
= 대학을 중퇴했을 때는 울고불고 하셨다. 지금은 내가 제일 훌륭하다고 하신다. 아마 돈을 드리고 난 다음부터인 것 같다.

- 오토바이 사고는 음주운전 때문이라고 하던데.
= 도덕보다는 여자와 술의 힘이 강하니까.

- 오토바이 사고가 당신에게 어떤 변화를 주었나.
= 전혀 변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큰 사고를 겪고도 변하지 않았으니, 그게 문제 아닌가? 잘 모르겠다.

- 당신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가.
= …으…음.(한참 뜸을 들이고 나서) 남들만 안 보면 버리고 싶다.

- 딸인 요코의 가수 데뷔도 돕는 등 딸에게는 극진하다고 하던데.
= 요즘 일본에서는 유서 쓰기가 대유행이다. 그걸 보면 살아 있는 동안 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 당신에게 여자는 어떤 의미인가.
= 창조하는 사람에게 여자란 행복한 존재다. 때로 트러블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호모가 될 수도 없고.

- 비트 다케시와 기타노 다케시의 차이는 무엇인가.
= 별로 안 좋아한다. 비트 다케시는 아직 어깨에 힘이 덜 빠졌다.

- 한국의 일본 문화개방에는 관심이 있나.
= 일단 개방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의 대중문화에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모두 있다. 한국인들도 거기에 속지 말고 잘 판단하기 바란다.

- 한국의 일본영화 1호의 소감은.
= 아주 기쁘고 명예이다. 코미디언으로서는 그 이야기를 개그 소재로 삼을 수도 있으니까 좋고.

- 일본영화가 한국에서 어느 정도 인기를 끌 것으로 보는가.
= 부산에서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영화제니까 그랬을 것이다. 일본영화의 경쟁력? 전혀 없다.

- 부산영화제에도 왔는데, 어떤 인상을 받았나.
= 반응이 너무 좋았다. 일본보다도. 아주 고맙게 생각한다. 일본 관객은 그렇지 않은데, 한국 관객은 편하게 봐준 것 같다.

- <하나-비>는 한국 관객이 어떤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가.
= <하나-비>는 나의 7번째 영화다. 6번째까지는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일본에서는 아이들이 모두 할리우드영화에 푹 젖어 있어 조용하고, 정적이 흐르는 영화에는 익숙지 않다. 한국을 잘은 모르지만 비슷하지 않을까라고 본다. 미국적인 영화도 있고, 정적인 영화도 있다는 것을 참고 봐주기 원한다.

- <하나-비>는 총소리가 나면, 그림 위에 붉은 물감이 뿌려지는 등 사운드와 장면의 전환 기교가 대단히 뛰어나다
= 영화 역사도 이제 100년이다. 모든 것은 진화한다. 회화도 추상화, 큐비즘 등으로 발전해왔다. 영화도 진화해야 한다. 옛날 수법으로는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그걸 다하면 너무 난해해진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의 모험은 하고 싶다

- <하나-비>는 플래시백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 처음에는 순서대로 찍었다. 그런데 너무 재미가 없어서 한번 시도해봤다. 개인적으로는 플래시백을 대단히 좋아한다. 그런데 플래시백을 넣어서 편집하고 나니 의견이 엇갈렸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용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 심한 경우도 있었는데, 끝장면에서 두방의 총소리를 두 형사에게 쏜 총성이라며 해피엔딩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었다.

- 은행강도 장면을 감시카메라로 리얼리티를 살렸다고 한다. 어떤 의미였나.
=사실 은행강도를 직접 봤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은행강도의 고정관념은 영화나 TV뉴스에 등장하는 감시카메라를 통한 것이다. 감시카메라가 바로 사람들이 접하는 은행강도의 실제상황이다.

- 그런데 모니터 밖은 반대로 코믹하게 상황이 전개된다.
= 슬픔이란 관찰자가 볼 때는 코믹할 수 있다. 코를 풀 때 코가 따라 나오면, 사람들은 웃게 된다. 그렇게 일상에는 잔혹함과 코믹함의 양면성이 있다. 의도적이었다.

-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부인이 마지막에 고맙다, 미안하다고 한마디한다. 반전을 의도한 것인가.
= 해석은 여러가지로 할 수 있다. 나는 원래 메시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말을 들을 때는, 그 사람의 계층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들릴 것이다. 만약 따뜻하다고 느껴진다면 자기 상황이 그런 것이다.


- 모든 인터뷰에서 <하나-비>에 등장하는 그림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주장하는데, 진짜 의미가 없는 것인가.
= 처음부터 의도해서가 아니라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하다가 안 되니까 장난치며 놀았던 그림들이다. 그리고 그렇게 빨리 보여준 것도 찬찬히 보여주면 탄로가 나니까 빠르게 보여준 것이다.

-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사이가 안 좋다는 말도 있던데.
= 영화를 만드는 건 나고 음악을 만드는 것은 히사이시 조다. 그가 음악을 만들어 가져오면 나는 좋다, 싫다라고 말한다. 나와 히사이시 조가 너무 가까워지면 솔직하게 말할 수 없으니까 일부러 거리를 두면서 일한다.

- <하나-비>를 당신이 직접 설명한다면.
= 나는 영화에서 메시지를 담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도 전하려는 것은 있다. 각자 자유롭게 받아들이면 좋겠다. 자신의 생활과 정서에 따라. 3년 뒤에 다시 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인내를 가지고 봐주기를 바란다.

- 당신의 영화는 대부분 야쿠자가 등장하고, 폭력이 주되게 등장한다. 폭력의 의미가 무엇인가.
= 폭력이 주가 아니라 죽음이 가장 큰 테마다. 죽음에 가장 가까운 것이 폭력이고, 거기에 가장 가까운 것이 또 야쿠자와 형사다. 추를 움직이면 한쪽으로 강하게 움직일수록, 다른 쪽으로도 더 강하게 움직인다. 마찬가지다.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욱더 열렬하게 삶을 살아가는 법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다.

- 당신 영화의 주인공은 어딘가 불만에 차 있고, 그것이 폭력으로 표출되고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마치 죽음이 폭력의 필연적인 결말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죽음이 테마다. 죽음에는 도망가려는 죽음과 지향하는 죽음이 있다. 나는 그것을 그렸다. 주인공도 사회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사회에서 고립된 자신에 대한 불만이다.

- 데뷔작부터 당신의 영화는 허무적인 분위기였다. 당신의 세계관 자체가 그렇게 비관적인가.
=아시아 각국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전쟁 이후 모두가 미국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진짜 모습을 잃어버렸다. 전전에는 제작각 교육을 할 때에도 심지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없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그렇다면 지금 일본의 젊은 세대가 비관적이라고 보는가.
= 지금 일본의 젊은 세대를 굉장히 싫어한다. 이유는 품위가 없기 때문이다.

- 많은 평론가들이 당신의 영화는 일본의 전통적인 미학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뭐라고 생각하나.
= 기본적으로 개인이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후에는 누구나 문제가 생기면 사회탓, 나라탓이라며 책임을 전가했다. 그보다 문제가 생기면 부모, 자식들 즉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 당신의 영화에는 늘 바다 앞에서 무언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에서는 바다가 주인공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당신에게 바다란.
=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한다.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바다 주변을 걷거나 바라보는 것을. 지상의 모든 존재는 바다에서 파생했다. 인간도 바다에서 시작하여 육지로 진화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바다로 가면, 원점으로 간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뭔가 모를 묘한 느낌도 있다. 항상 산보다는 바다를 찾는다. 영화에서는 버릇 같기도 하고.

- <소나티네>나 <하나-비>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인형놀이나 카드 등 놀이에 여념이 없다.
= 인간은 어떤 순간에도 무의식적으로 여유를 갖는다. 사형수도 순간적으로 웃음을 띠게 마련이다.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내일 모레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도 장난치며 놀고, 웃어버리는 순간이 있었다. 인간이 그런 것이다.

- <3-4X10월>이나 <소나티네>를 보면 여성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존재로 등장한다. 하지만 <하나-비>에서는 여성의 비중이 훨씬 커졌다. 혹시 오토바이 사고의 여파인가.
= 사고의 영향이 아니라 평론가의 영향이다. 다케시는 여자를 안 그린다는 말이 하도 많아서 이번에는 잘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당신과,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당신은 사뭇 다르다. 그것이 비트와 기타노의 차이인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는 당신이 ‘감독 모드로 들어가면 대단히 진지해진다’고 하던데.
=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영화 취재를 한다고 생각하면 기타노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배우면 비트가 나오는 것 같다.

- 최근 찍은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
= <키쿠지로의 여름>이라는 영화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소녀가 있다. 어느 날 생모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한 아저씨와 함께 찾아간다는 이야기다. 아주 클래식한 이야기다. 마치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에 도전하는 느낌이다.

- 당신의 조감독이었던 히로시 시미즈가 <자살관광버스>를 만들었다. 요즘 젊은 감독들의 영화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나.
= 아직 안심하고 있다. 당분간 추월당할 염려는 없군, 하는...

- 90년대의 대표적인 시네아스트로 동시대 일본영화와 감독을 어떻게 보는가.
= 미국영화의 영향을 받아 예산도 없으면서 스케일이 큰 영화만 생각하고 있다. 요즘에는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데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거다. 주목하는 감독은 별로 없다.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이후 아무도 그들을 추월하지 못했다. 이건 치명적인 사실이다.

- 젊은이들에게 한마디를 해준다면.
= 누구나 되고 싶은 것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열심히 막 살다 보니 어느 날 축구선수가 돼 있더라, 이런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생각한다.







늘 처음처럼 -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과의 대담◈

- 다케시 감독의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마무라) 재미있어요. 특히 <하나-비>에 나오는 그림들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듣자니 다케시 감독이 직접 그렸다고 하기에 감동했죠.
= (기타노) 역시 그 큰 화면에 그림을 빈틈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굉장한 용기를 낸 거였어요. 그냥 그림을 배치해 두는 것도 이상하고, 그림을 보여주는 이유를 붙여야 하니까. 그런데도 정면으로 그대로 찍은 것은 나로서는 모험이었죠.
= (이마무라) 모험이라면, 영화를 만드는 방식도 그런 것 같군요. 나의 겨우에는 시나리오가 먼저에요. 그리고 A에서 B, B에서 C하는 식으로 가능하면 순서대로 찍으려고 하는데, 다케시 감독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돌연 C부터 찍어나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연결 같은 것은 어찌돼도 상관없다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가끔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래도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어떤 인물의 미디엄 쇼트 같은 게 나오곤 하죠. 그런 의외성이 정말 재미있어요. 대단한 거죠. 나도 흉내내고 싶을 정도예요. 굉장한 모험이라 생각되지만요. 다른 것에 별로 신경쓰지 않고 찍는 것 같거든요.
= (기타노) 머리 속에 주인공의 대화보다 그림이 먼저 떠올라요. 사진 슬라이드를 죽 늘어놓은 듯한 느낌이 드는 거죠. 그러면 뻔뻔스럽게도 그림연극(주:그림을 계속 보여주는 연극) 식으로 10장으로 동화 한편이 완결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림연극 같은 영화가 되는 거죠.

- 편집에서 확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나요.
= (기타노) 편집이 가장 재미있죠. 프라모델을 만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부품을 붙이고 있을 때가 제일 재미있으니까. 빨리 찍어버리려고 할 때도 있죠. 프라모델을 만드는 것처럼 편집단계에서 씬들을 붙여나가는데, 완성된 뒤에도 다시 떼어내고 '여기 붙여버리자'하며 바꾸곤 하죠. 강인하게 그런식으로 계속 해나가긴 하는데, 역시 어딘가 좀 이상한 면이 있어요. .

- 품이 모자라거나 하진 않나요.
= (기타노) 모자랄 것이란 사실을 상정한고, 스크립터가 "감독, 산이든 하늘이든 필요없는 장면이라도 찍어두세요"라고 말해요. 어딘가에 끼워넣어도 모를 거라면서(웃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씬이 생기면 거기에 전에 찍어둔 하늘을 끼워넣어 버려요. 아무 상관없는 하늘을 이어붙여서, 다음 씬으로 뛰어넘어 버리죠. 하늘
이나 산이나 길 같은 것을 접착제 대신으로 쓰니, 아주 엉터리죠. .
= (이마무라) 나도 지금 다케시 감독이 말한 것처럼 편집에 적당히 하는 편이에요. 중간 과정을 전부 뛰어넘어 버리곤하죠(웃음). 알 수 없는 것이 돌연 나오면 어떤 상상이 들까 하는 생각을 하죠.

- 다케시 감독은 배우를 야단치기도 하나요.
= (기타노) 전혀 그런 일 없어요. 내가 연출하면서 화를 내면 '당신이 해봐'하는 소릴 들을걸요(웃음). '뭐야, 당신도 못하잖아'하면 곤란하니까. 코믹한 부분이라면 필요한 경에 내가 연기해서 보여줄 때도 있지만 타이밍의 문제예요. .
= (이마무라) 다케시 감독의 영화를 보면, 모르는 배우들만 나와요. 그런 배우들은 세세한 면까지 신경쓰고 있는 것 같아요. 왠지 일반적으로 하는 연기지도에는 따라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런 사람들이 아주 잘해내요. 그건 나로서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난 늘 이러이러한 연기를 할 수 있다고 정해져 있는 사람들을 등용하거든요.

- 마지막으로 기타노 감독에게 조언 한마디.
= (이마무라) 편지에도 쓴 적이 있는데, 항상 처음의 마음을 잊지 말라는 거지요. 자신이 즐기면서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 기타노 다케시 자료집<코마네치>(98년)에서 발췌한 자료임.








"The Harder Way" - 에 대한 Interview ◈

- <키즈 리턴>은 당신 자신의 청소년기와 얼마나 비슷한가, 픽션인가...사실을 바탕으로 한건가..?
= 주인공 마사루와 신지는 학교 때 알던 두 아이들을 모델로 했다. 그들과 한 반인 히로시 (세일즈맨으로 시작했다 택시 기사가 되는 역)도 당시에 알던 친구가 모델이다. 내가 다니던 시절 고등학교에는 두 가지 타입의 학생들이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엘리트 그룹과 툭 하면 수업을 빼먹고 야쿠자나 되었으면 하는 낙제생 그룹이었다. 교사들은 전자의 학생들은 공부하라고 들볶았지만 후자에 속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무시해 버렸다. 영화는 이 낙오자 그룹을 다루고 있다. 청소년 문제 상담가나 교수들은 대개 청소년기가 무한한 가능성의 시기라고 말한다. 한번 실패해도 언제든 다시 시작해 성공할 수 있다고...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 반대가 사실인 경우가 많다. 어떤 식으로 한번 실패한 젊은이는 두 번 다시 실수를 만회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키즈 리턴>의 배경에는 나의 그런 느낌이 들어있다. 두 친구가 몇년 만에 처음 만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마사루는 신지에게 이제 그들의 인생은 끝난 거냐고 묻는다. 94년8월에 모터사이클 사고를 당했을 때 나도 내게 같은 질문을 던졌었다. 내 안의 60~70 퍼센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모든 게 끝이라고....그러나 나머지 나는 아직 시작도 안했다고 대답했다. 신지와 마사루가 계속 살아나가 뭔가를 성취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과거 실수가 그것을 대단히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건 안다. 특히 일본 사회에서는....

- 마사루와 신지는 아무 것도 달성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주인공들과 사뭇 다른데...
= 따지자면 내 전작들은 '어떻게 하면 제대로 죽을 것인가'였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살아야 한다. 이들이 이런 것은 사고 직후라는 내 상태 때문이었다. 신지와 마사루가 실패한 것은 아마도 너무 애썼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은 대부분 별로 애쓰지 않는 사람들... 단지 흐름에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 학업에 재능이 없는 청소년이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는 것은 야쿠자가 되는 것과 유명 권투 선수가 되는 것 뿐인데, 권투 시합이나 갱 묘사는 사실에 바탕한 건가...?
= 도장은 촬영을 위해 만든 세트였다. 이 수준의 실제 도장은 훨씬 열악하다. 권투협회의 트레이너들은 <키즈 리턴>에 경악을 하겠지만, 초심자들이 체중조절 약이나 팔꿈치 공격법 등에 노출되는 과정은 사실 그대로다. 젊었을 때 권투를 한 적 있어 그런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복싱은 더러운 눈속임으로 가득하다. 챔피언전도 마찬가지다. 마사루가 야쿠자에 픽업되는 과정도 실제로 아주 흔한 방식이다. '패밀리'니 명예의식도 신참들 사이에 높고 위로 갈수록 '정치적'인 것 역시 사실이다. 간부급 야쿠자는 성급한 복수심보다 협정을 더 중시한다.

- 하지만 <키즈 리턴>의 갱 묘사에 패러디적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특히 복장이...예를 들어 이시바시 료(지역 조직의 보스)가 처음 등장할 때 야한 청색 셔츠에 타이 차림이라든가, 그의 심복 테라지마 스스무의 충격적인 자주색 상의 차림이라든가 ...
= 그런 의상을 사용한 건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흡족한 로케이션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갱들이 처음 등장하는 씬을 라면 가게로 할 생각도 없었다. 그 둘의 복장 외에도 많은 캐릭터의 의상이 로케이션의 약점을 보완할 목적으로 선정되었다. 일본에서 영화를 만드는 난제 중 하나가 바로 카메라를 십도만 돌려도 원치 않는 사물이 화면에 끼여든다는 것이다. 외국 감독들은 그런 문제가 없는 모양이다. 한 씬 전체를 한 테이크로 멋지게 죽 돌려 찍는데도 이상한 물체가 그림에 들어오지 않는 걸 보면... 사실 <키즈 리턴>은 대부분 겨우 세 군데 장소에서 진행된다. 학교, 권투도장, 라면가게...내가 직면한 과제는 가능한 화면을 넓히는 것이었다. 상징적 의미에서나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 <키즈 리턴>은 지금까지 나온 당신 영화들 중 가장 스토리가 꽉 찬 작품인데, 구성문제는어떻게 해결했는지....
= 내 대학 전공이 엔지니어링이다. 소재를 작품화하는데 그게 도움이 된 것 같다. 보통 씬 구상은 구조에 구애되지 않게 하고, 나중에 그것을 이리저리 배열한다. 편집도 촬영을 하면서 병행하는 편이다. 편집을 하다보면 작품의 방향에 대해 영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별로 그러질 못했다. 어린 주연들의 경험부족 때문이었다. 미숙한 연기를 편집으로 보완해야 했기 때문에 각본에 충실해야 했다. 즉흥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개는 편집이 영화 만드는 과정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주연'은 어떻게 구했는지....
= 오디션, 캐스팅 담당자와 제작자가 250명 정도를 먼저 보고 40명 정도의 최종 리스트를 만들었다. 나는 자신없어 보이는 애들 위주로 뽑았다. 자신감 있게 당당히 들어오는 아이들은 1차 소거 대상이었다. <키즈 리턴>의 캐스팅은 나로선 약간 모험이었다. 전에는 한번도 '예쁜 얼굴'을 써 본 적이 없었다. 신지 역의 안도 마사노부는 자기가 뽑히지 않을 줄 안다는 표정으로 들어왔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그 역에 다른 아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아이들을 괴롭히는 패거리 셋 중 제일 키가 작은 소년을 맡았다) 하지만 그가 러닝 타임 내내 관객의 흥미를 유지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고 결국 막판에 안도를 신지로 결정했다.

- 사춘기 영화인데 성 충동은 별로 그려지지 않은듯 한데....
= 무대를 공학으로 할까도 생각해 보았는데, 그러면 남학생-여학생 관계를 부각시켜야 할 것 같았다. 일본 사회에선 선후배 사이, 상사-부하 관계가 아주 강력하게 작용한다. 호모섹슈얼이란 말은 너무 강한 표현이지만 동성간의 유대인 것은 분명하다. <키즈 리턴>에서 내가 다루고자 한 것도 그런 관계다.

- 처음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때가 기억나는지....
= 우리 부모는 나나 우리 형제에게 영화나 만화, 소설 따위를 보게 하지 않았다. 전후 일본에선 모든 것이 경제 성장에 집중되었다. 영화는 그와 무관했고 따라서 당연히 도외시되었다. 내가 엔지니어링을 다 전공했을 정도니 ! 영화나 만화의 존재를 알게 된 건 대학에 들어간 다음이었다.

- 영화에 나오는 만담 공연을 하는 두 소년은 코미디언으로 쇼비즈니스에 입문한 당신을 뚜렷이 연상시키던데...하지만 당신을 상징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 물론이다. 만일 자전적 인물이라면 그들이 주인공이 되었을 테고, 그러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만담은 사람들을 웃게 하는 전통적 코미디다. 그러나 나는 만담의 규정을 언제나 위반했다. 아사쿠사의 무대에서 처음 코미디언으로 데뷔했을 때 나는 6개월 공연 금지를 당했다. 경영진과 무대, 관객을 모두 모독했기 때무이다. 방송에 데뷔했을 때도, 소설을 쓸 때도 나는 계속 정해진 것을 위반했다. 어쩌면 영화인으로서도 그런지도....?

- 첫 영화 <그 남자 흉폭하다>에서 졸지에 메가폰을 들게 되었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 원래 연출을 맡을 예정이던 후쿠사쿠 긴지는 <인정도 명예도 없는 전투>시리즈로 유명한 감독이었다. 나는 거기 나오는 과장된 액션이나 정서와는 전혀 다른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그래서 먼저 각본을 내가 아는 것, 공감이 가는 것 위주로 다시 썼다. 영화를 만들 때 염두에 두었던 건 두개의 실제 이미지였다. 하나는 우리동네에서 칼에 찔려 죽은 남자의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TV로 본, 총알 한 방으로 베트콩 게릴라를 쓰러뜨리는 미군병사의 모습이었다. 나로선 그때까지 영화에서 본 어떤 폭력 씬보다 쇼킹했던 이미지다.

- 각본을 쓸 때 직접 출연할지 말지는 어떻게 정하는지....
= 내가 생각하는 영화란 언제나 '無聲'이다. 나는 대사나 음악이 없는 영화를 좋아한다. 관객은 화면만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대사로 설명하지 않아도...나는 내가 쓰는 캐릭터를 이해하려 하고, 따라서 그의 표정과 제스처가 무슨 의미를 전달하는지 안다. 내가 그 역을 할지 말지는 각본을 쓸 때의 우선적 고려 사항이 아니다. 내가 할 역할이 있으면 하는 것 뿐이다. 배우로서 감독인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아니까. 그러나 <키즈 리턴>에서처럼 내가 할 역할이 없으면 그냥 카메라 뒤에 남는다. 문제는 관객의 상상력을 어떻게 자극할 것이냐다. 나는 관객에 대한 기대가 높다.

- 해외에서의 성과로 국내에서의 당신 위치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작년엔 텔레비전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하더니 계속 왕성하게 하고 있는 듯....
= 유럽에서의 성과는 여기서도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젊은 영화감독들이 자기 자기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내 이름을 언급한다든가...하지만 영화 일을 늘 진지하게 생각해온 나와 달리 일본 대중은 나를 언제나 코미디언으로 '비트 다케시'로 인식했다. '영화감독 다케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감독으로서 나는 스폰지처럼 가능한 한 많이 흡수하려 한다. 텔레비젼, 빠찡꼬, 야구, 닥치는대로 하고, 그 경험을 스폰지 짜듯 짜낼 때 영화가 나온다. 만일 다른 활동을 줄인다면 지금보다 못한 감독이 될 것이다.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해 본다는 건 좋은 일이다. 권투도 해보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이렇게 영화에 써먹을 수 있었으니...

- 야쿠자를 그리기 위해 야쿠자라 되려 한건 아닐 듯 싶은데....
= 아니다. 그러나 코미디언이나 방송인 중에 나처럼 야쿠자한테 인기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한번은 친구와 오사카를 거닐다가 야쿠자같은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지역 보스가 내가 거기 왔다는 걸 알고 보디가드들을 보내 나를 경호한 것이었다. 그 소릴 듣고 나는 두 번 다시 그 동네엔 가지 않기로 맹세했다 !

- 그림 그리는 취미는 그럼 그 많은 ' 흡수활동'중 어디에 속하는 건지....
= 영화 만드는 작업과 비슷한 것 같다. 영하에서 씬이 그렇듯이 내 그림도이야기를 전달했으면 좋겠다. 그저 방해가 되는 대사를 빼버린것 뿐...

* 1996년 영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Tony Rayns가 쓴 인터뷰기사를 영화전문 잡지 KINO에서의 개봉과 맞추어 2000년 10월호에서 다루었던 기사내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