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직전 <한겨레> 편집국에서는 인사가 있었습니다. 지난 1년반 동안 사회부 기동취재팀장을 맡았던 저도 경제부로 돌아갔습니다. 기동취재팀을 떠나면서 이것저것을 정리하던 중 쓰다가 놔둔 뉴스메일 두 편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나는 지난 2월 이후로 중단됐던 `가수왕 열전 6편’이고, 또 하나는 `김훈 선배’ 관련 뉴스메일입니다. `가수왕 열전’은 저의 개인적 경험이 강한 탓에 다른 란에서 다시 이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지난해 기동팀에 함께 있었던 김훈 선배 관련 메일은 `기동취재팀 25시’란에 소개해야할 것 같습니다.
애초 이 뉴스메일은 지난 3월과 4월 두 차례에 걸쳐 `김훈 기자는 어디로 갔느냐? 왜 한 마디 설명도 없나?’라는 <한겨레> 여론매체면 `한겨레 비평’에 실린, 오창익 간사의 물음에 대한 답신 메일 성격으로 준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그날 일상에 치이다보니 기동취재팀을 떠난 지금에서야 이 글을 띄웁니다.
김 선배(호칭을 무엇으로 해야할 지 난감하네요? 그냥 제가 평소 김 선배를 부르는 호칭을 그대로 쓰겠습니다)는 정확하게는 지난 1월20일자로 <한겨레>를 떠났습니다. 지난해 2월 <한겨레>에 입사했으니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한겨레>를 떠났군요. 먼저 김훈이란 누구인지부터 먼저 설명드려야겠군요.
1. 김훈이란?
김훈은 1948년 5월5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소설가 김광주씨의 2남3녀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김광주(1910~1973)씨는 50년대말~60년대초 국내 무협소설 1세대 작가로 <정협지>, <비호> 등으로 유명합니다. 지난해 김훈 선배는 선친의 작품인 <비호>를 재출간하면서 서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소년 시절에 병석에 누운 아버지의 구술을 받아서 무협지 원고를 대필했다. 그것이 내 문장 공부의 입문이었다.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그 원고료로 밥을 먹고 학교도 다녔고 용돈을 타서 술도 마셨다. 그 아이가, 그 아버지의 나이가 되도록 늙어서 다시 그 책을 펴내니 눈물겹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김훈 선배의 아버지, 김광주씨 이야기부터 할까요? 김광주씨는 수원생으로 경기고보를 졸업한 뒤, 1933년 상하이 남양의과대학에 입학합니다. 이후 그는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서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동인극단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이당시 김광주씨는 상하이 홍구공원에 폭탄을 투척할 사람으로 윤봉길 의사와 함께 거론되다 김구 선생이 막판에 윤봉길 의사를 낙점한 일화도 있습니다. 만일 김광주씨가 낙점받았다면 김훈은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김광주씨는 광복후에도 김구를 보필했으며 1947년 경향신문 문화부장,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김훈 선배는 2대에 걸친 소설가 겸 기자 집안 출신인 셈입니다. 애초 김광주씨는 정통(?) 소설을 쓰다 말년에 접어들면서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래는 지난해 김훈 선배가 <한겨레> 기자로 있을 때, <오마이뉴스>가 김훈 선배에 대해 쓴 글의 일부입니다.
소설가 김광주씨가 그의 아버지다. 김훈의 기억에 따르면 아버지는 매일 억겁의 술을 마셨다. 5년 동안 암을 앓았고 73년 작고했다. 가난했다. 아버지가 누워서 글을 불렀다. “거기서 점 찍어, 줄 바꿔"라고 했다. 김훈은 “그때 받아쓴 것이 문장수업이 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소년인 나는 내 아버지의 쓰라린 위장을 위하여 남비를 들고 시장거리로 가서 해장국을 사 오곤 했다. 어느 겨울 새벽에 나는 해장국집 문지방에 낀 얼음 위에 자빠져서 끓는 국물을 뒤집어쓰고 허벅지에 화상을 입었다. 나는 선지와 콩나물을 바지 위에 뒤집어 쓰고, 빈 남비를 들고 춥고 어두운 새벽거리에서 울었다. 나는 이 세월들과 내 아버지의 생애를 뛰어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이를 갈면서 울었다”(주여, 망자를 당신 품 안에, 문학기행)
김훈 선배는 아버지인 김광주씨가 작고하던 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합니다. 당시 그는 고려대 4학년 중퇴의 학력을 갖고 있었을 뿐입니다. 집이 가난하였던 그는 등록금을 제대로 못내 몇 차례나 휴학을 반복했고, 그러다 결국 졸업을 못했습니다. 굳이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도 딱히 없었던 김훈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라 밥벌이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했고(이전에는 막노동판에도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 와중에 <한국일보>의 입사지원 자격이 `고졸’이라는 점에 착안해 지원했습니다.(당시 다른 언론사는 모두 지원자격이 `대졸’이었습니다) 그러나 면접에서 `대졸’이 아니라는 게 문제가 됐습니다. 실제로 지원자격을 `고졸’로 했을 뿐 대학졸업을 하지 않은 사람이 한국일보 기자가 된 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장기영 한국일보 회장이 당돌했던 김훈을 눈여겨 봐 김훈은 한국일보 기자가 됩니다. 김훈 선배에게는 아직 대학졸업장이 없습니다.
김훈은 <한국일보>에서 처음에는 기자의 초년이 으레 그러하듯 사회부 경찰팀(기동취재팀) 기자로 5년을 지냈습니다.(당시에는 경찰팀에서 지내는 기간이 지금보다 더 길었습니다) 이후 그는 문화부로 옮겨 문학을 담당했는데, 이때부터 그의 문재(文才)가 빛을 발합니다. 특히 저는 비록 보진 못했지만, 80년대 초반 김훈 기자를 아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자면, 한국일보에 연재한 `김훈의 문학기행’은 당시로선 엄청난 파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조직생활에는 전혀 맞지 않는 인물인 김훈은 이후 한국일보에서도 몇 차례나 그만뒀다 다시 들어갔다를 반복하다, 이후 <시사저널> 편집장으로 또한번 이름을 떨칩니다. <시사저널>은 90년대 초반 시사주간지 시장이 만개할 때, 가장 먼저 시장을 열었던 곳입니다. 김훈은 그곳에서 기자로서 뿐 아니라 데스크로서의 능력도 발휘한 것입니다.
그러던 김훈은 엉뚱한 이유로 시사저널을 그만둡니다. <한겨레21>이 지금은 없어진 `쾌도난담’ 코너에 적장이나 다름없는 김훈을 초청했고, 이 초청에 응한 김훈은 “나는 남자들보다 더 뛰어난 여자를 본 적 없다” 등 가부장적이고 다분히 군국주의적인 발언을 마구 쏟아낸 것입니다. 당시 패널로 함께 했던, 역시 또다른 면에서 `보통 아닌’ 최보은 선배조차 반격을 하기보단 `왜 이런 자리에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인지’ 그 진의를 파악하느라 오히려 어리둥절해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 뒤, <시사저널> 기자 일부가 사표를 내고, 여성계를 중심으로 김훈 비난여론이 들끓자 김훈은 사표를 던집니다.
당시 그의 행동과 이후 진행과정이 너무도 황당해 `위악적’이라는 해석이 따라붙기도 했습니다. 나는 당시 김훈을 잘 몰랐지만, 마치 김훈이 칼로 자기 배를 찌르는 듯한, 끈을 매달지 않고 번지점프를 하는 듯한,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듯한 그런 서늘한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김훈은 야인으로 머물면서 전국을 풍륜(風輪)이라고 이름붙인 자전거를 타고 달린 뒤 쓴 수필집 <자전거 여행>(2000), 이어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칼의 노래>(2001) 등을 쓰며 지냈습니다. 김 선배가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 `자전거 여행’을 앞두고 새 자전거를 사 마당에서 바퀴를 굴리고 있으니, 형수가 김 선배에게 한 마디 했답니다. “이 양반이 벌라는 돈은 안 벌고, 다 늙어 무슨 자전거냐”고. 그러자 김 선배가 대꾸했습니다. “모르는 소리 마라. 이 자전거가 우릴 먹여살릴거다”:라고. 김 선배의 말처럼 그 자전거는 지금 김 선배를 먹여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2002년 초 김 선배는 우연히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현장기자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그 터는 <한겨레>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비공식적인 이런 바람은 <한겨레>의 공식라인을 타고 논의됐고, 그리고 그해 2월 김훈은 부국장 대우 사회부 기동팀 취재기자로 입사합니다. 김훈으로서는 7번째 회사입니다. 이때 홍세화 선배도 역시 부국장 겸 편집위원으로 <한겨레>에 나란히 입사합니다. 나이는 비슷하지만 사고방식과 살아온 이력은 전혀 극과 극인 두 사람이 말입니다.
김훈의 <한겨레> 입성은 한 차례 진통을 겪기도 합니다. <한겨레> 일부 기자들은 김훈의 한겨레 입사를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지나온 이력과 보수적인 색채 등이 <한겨레>에 적합하지 않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을 그가 받은 것도 작은 이유 가운데 하나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는 <한겨레>가 똑 같은 생각만을 가진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니라는 반론에 부딪혀 그리 강렬하진 않았고, 무엇보다 그가 데스크가 아닌 현장기자를 원했다는 점에서 이를 <한겨레> 뿐 아니라 한국언론의 한 실험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한겨레> 내부에서 더 강했습니다.
김훈의 이력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는데, 김훈이란 사람은 사물에 대한 깊은 성찰이 돋보이긴 하나 그 내면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이 김훈을 잠시나마 겪은 저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삶을 관조하는 듯한 그가 작은 일(우리가 생각하기에)에도 화를 참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김훈의 더 자세한 가족사와 자녀관계 등은 개인 프라이버시라 생각돼 이쯤에서 더이상의 언급은 피하도록 하겠습니다.
2. 김훈의 <한겨레> 생활
김훈은 입사 이후 그의 바람대로 데스크가 아닌, 사회부 기동취재팀에 배치됐고, 출입처는 종로경찰서였습니다. 종로경찰서에는 기존의 1진 기자가 있었으니, 김훈은 형식상으로는 종로 2진이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50대 중반의 경찰기자가 30대 중반의 캡에게 전화로 보고를 합니다.(김훈은 컴퓨터를 다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기자들처럼 컴퓨터로 보고를 하는 게 아니라 전화로 보고했습니다. 그는 입사 이후 처음 몇 차례 자판연습을 한 적도 있긴 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뒤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나이든 제게 컴퓨터를 배우라고 하는 건 인권침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그래서 김 선배가 원고지에 기사를 쓰면 이를 종로1진 기자가 컴퓨터로 쳐 보내거나, 아니면 김 선배가 직접 팩스로 보내왔습니다. 물론 김 선배는 이메일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부여한 이메일로 김 선배에게 아무리 메일을 보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김 선배는 보지도 않으니까요. 그러다가 몇 달 뒤 종로1진 기자가 김 선배의 이메일을 대신 열어준 적이 있는데 그때 저희 회사 메일서버가 잠시 다운됐습니다. 그 이후로 순전히 메일서버 관리를 위해 종로 1진 기자는 수시로 김 선배의 메일을 대신 열어줬지만, 김 선배는 그렇게 보내오는 메일은 잘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김 선배에게 뜻을 전하려면 편지로 해야 합니다. 제가 기동팀원들 또는 김 선배에게 보내는 메일도 이 종로1진 기자가 대신 열고 프린트로 뽑아 김 선배에게 건네주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김 선배가 회사에 들어온 것은 2002년 2월초였고, 제가 사회부 기동팀장으로 발령받은 것은 그해 3월12일이었습니다. 처음 인사발령을 받았을 때 저는 솔직히 김 선배가 무척 부담스러웠습니다. 저를 제외한 기동팀 1진 8명 가운데 나머지 기자들은 대부분 1~5년차인 후배들이었고, 그 아래로 수습기자 9명이 오글오글하게 배치돼 있는데 김 선배를 제가 어떻게 대해야할 지 난감했기 때문입니다.
김 선배를 난감해한 것은 저뿐 아니라 종로경찰서를 출입하는 타사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뻘의 기자가 오니 기자실에서 마음 편히 드러누울 수도 없고, 행동 하나하나도 조심스러웠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김 선배가 원래 무뚝뚝한 편이라 다른 기자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기자실에도 오래 머물지 않다보니 나중에는 있는 듯 없는 듯 했다고 하더군요. 어느 신문의 한 기자는 김 선배를 처음 보고 사인을 부탁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김 선배는 아침에 전화를 걸어 “캡이세요? 김훈입니다. 지금 종로경찰서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이러저러한 일이 있는데, 이를 기사로 써보겠습니다. 몇 매를 보내면 될까요?”라고 차분하게 그 나름의 보고를 합니다. 김 선배를 가끔 필요한 현장으로 보내 기사를 보낼 것을 `지시’하기도 하는데, 이때 김 선배에게 전화를 걸면 늘 격앙되고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마치 수습기자가 캡의 전화를 받듯 “네, 접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너무 깎듯이 전화응대해 제가 민망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김 선배는 저와 대여섯살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다른 경찰팀 후배기자들은 마치 아들, 딸 대하듯 편하게 대하면서도 캡인 저에게만은 깎듯하게 존대말을 쓰고, 의도적으로(제가 보기에는) 어려워했습니다. <한국일보>에 있을 때 김 선배의 후배였던 기자가 <한겨레>에서 부장을 맡고 있기도 한데 말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처사가 조금 서운하기도 했지만, 조직과 계통을 중히 여기려는 김 선배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됐습니다.
김 선배는 아침에 종로경찰서에 나가 아침보고를 마치고 나면 취재를 나가거나 종로서 앞 참여연대 느티나무 카페 또는 인근 커피숍에서 원고지에 기사를 씁니다. 연필로.(김 선배는 필통을 가지고 다니는데, 직접 칼로 연필을 깎아서 썼습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한 뒤, 왼손으로는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움켜쥐듯 머리를 받칩니다. 왼손 둘째와 셋째 손가락 사이에 끼인 담배에서 담배연기가 피어오르고, 오른 손으로 기사를 씁니다. 끈 달린 뿔테 안경을 쓰고서. 이 모습을 매일 바라보는 중년의 커피숍 아주머니가 그 모습에 반했다던가 어쨌던가 하는 이야기도 전해오긴 합니다.
김 선배는 또 마감시간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거리의 컬럼은 오전에 보내는 게 일반적이었고, 어떤 기사도 오후 3시를 넘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조간신문의 1판 마감시간은 오후 4시~4시30분입니다. 김 선배는 식사자리에서 저희들에게 <시사저널> 편집장 시절, 마감시간을 넘긴 기사는 아예 읽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아 넣어버리고 그 지면은 광고로 메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든 기사를 일필휘지로 쓴 건 아닙니다. 그는 사석에서 “오후에 갑자기 취재지시를 받을 때는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 내린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큰 산처럼 밀려온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한겨레> 기동팀은 매주 월, 목요일 회사에서 회의를 합니다. 김 선배는 이때 회사에 들어옵니다. 봄, 가을에 김 선배는 노란색 파카에 실로 짠 연푸른색 스웨터, 오래된 청바지를 즐겨 입었습니다. 늘 바깥에 머무는 현장기자에게는 별도의 책상이 없습니다. 회의를 앞둔 10~20분의 시간동안 김 선배는 책 등을 쌓아두는 사회부 공용책상 맨끝 귀퉁이에 앉아 원고지에 기획아이디어를 써 제게 제출합니다. 나이든 분에게 제대로 된 자리 하나 마련해 드리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려 회의가 있는 월, 목요일이면 김 선배의 고정석인 그 자리를 미리 치워두기도 했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팀원들은 함께 회식을 하는데 김 선배는 두 번에 한번꼴 정도로만 참석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김 선배에게 세대차를 느끼긴 힘들었습니다. 김 선배가 유행어를 읊거나 신세대 노래를 하는 등과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지만 기본 바탕이 닳고 닳은 `어른’이기보다는 세상살이를 잘 모르는 `아이’의 마음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쩌다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면, 김 선배도 자신의 학창시절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곤 했는데, 보성고등학교 시절 반 친구들에게 자장면을 사주기 위해 학교 공사판에 뒹굴고 있는 철근을 책가방 여러 개를 잇대어 몰래 숨겨 빼돌려 팔아먹었다가 담임선생에게 들켜 몽둥이로 100대를 맞았던 일 등을 전해주며 우리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김 선배가 싫어하는 말이 `나이 들었다’ 또는 `할아버지’ 등의 말입니다. 6월 월드컵 거리응원 당시, 김 선배는 폴리스 라인 바깥에서 취재를 하다가 김 선배를 몰라본 전경들에게 “할아버지, 이런 곳에 계시면 위험해요”라는 말을 듣고 꽤 오랫동안 “괘씸한 놈들”이라고 분개해 했던 적이 있습니다. 또 지난해 3월 부산 중국민항기 추락사고 당시에도 현장취재차 부산에 내려가 병원에서 유족들을 취재하고 있는데, 당시 대통령 후보 당내경선 중이던 노무현 후보가 위로차 왔다가 유족들과 함께 있는 김 선배의 손을 잡고 “얼마나 심려가 크십니까?”라고 해 김 선배가 황당해 했던 적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칼의 노래>를 읽은 것은 아마 그 이후였던 것 같습니다.
3. 김훈의 기사
서울 종로구 인사동 술집골목에는 밤마다 지식인, 예술가, 언론인들이 몰려들어 언어의 해방구를 이룬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논하며 비분강개하는 것은 그들의 오랜 술버릇이다.
그 술집골목 한복판에 '라파엘의 집'이라는 시설이 있었다. 참혹한 운명을 타고난 어린이 20여명이 거기에 수용되어 있었다. 시각.지체.정신의 장애를 한몸으로 모두 감당해야 하는 중복장애 어린이들이다. 술취한 지식인들은 이 '라파엘의 집' 골목을 비틀거리며 지나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동전 한닢을 기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파엘의 집'은 전세금을 못 이겨 2년 전에 종로구 평동 뒷골목으로 이사갔다.
'라파엘의 집' 한달 운영비는 1200만원이다. 착한 마음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 1천원이나 3천원씩 꼬박꼬박 기부금을 내서 이 시설을 16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후원자는 800여명이다. '농부'라는 이름의 2천원도 있다. 바닷가에서 보낸 젓갈도 있고 산골에서 보낸 사골뼈도 있다. 중복장애 어린이들은 교육이나 재활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안아주면 온 얼굴의 표정을 무너뜨리며 웃는다.
인사동 '라파엘의 집'은 술과 밥을 파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밤마다 이 식당에는 인사동 지식인들이 몰려든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 대사관 담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시위 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 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 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 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김훈이 쓴 `거리의 컬럼’ 중 두 편을 골라 봤습니다. 김훈은 사회부 취재기자로서는 특이한 형태인 `거리의 컬럼’이란 자기 영역을 갖고 있었습니다. `거리의 컬럼’은 사회면에 원고지 3매 분량으로 쓰는 짧디 짧은 컬럼입니다. 김 선배는 거리의 컬럼 외에도 르포, 일반 스트레이트 기사 등을 쓰기도 했지만 <한겨레> 사회면에서 김훈은 `거리의 컬럼’으로 기억됩니다. 김훈은 3월부터 11월까지 모두 31편의 `거리의 컬럼’을 썼습니다.
윗 글(기사)에서 보아 알 수 있듯 김훈의 `거리의 컬럼’의 특징은 현장성, 간결성, 함축성, 그리고 간접성 등입니다. 저는 많은 기자들이 이중 많은 부분을 본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라파엘의 집’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 김훈은 기사에서 호소하거나 촉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옮겨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관조적 전달은 백마디 호소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곤 합니다.
김 선배의 기사는 또 하나, 무엇보다 팩트(fact)가 튼실합니다. 그저 책상머리에서 긁적인게 아니라 생동감이 있습니다. 현장에서 쓴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김훈 선배는 `거리의 컬럼’ 보다 르포 기사에서 그 진가를 더 발휘하곤 했는데 그 르포 기사에는 밥상머리의 반찬 하나하나까지 빼곡히 적어놓은 적도 있습니다. 아래 기사를 한 번 보십시오.
탑골공원에서 노인들이 사라졌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은 지난 반세기 동안 노인들의 놀이터, 사교장, 그리고 시국성토장이었다. 탑골공원은 지난 3월 관람시간을 한 시간 이내로 제한했고 음식물을 들여오거나 돗자리·신문지를 깔지 못하도록 했다. 나무벤치도 모두 돌벤치로 바꿨다. 돌벤치는 여름에도 엉덩이가 시려 노인들은 앉을 수가 없다.
탑골공원에서 내몰린 노인들은 걸어서 15분 거리인 노인복지센터(올해 4월 개관)와 종묘광장으로 옮겨갔다. 복지센터에는 하루 3000~3500명, 종묘광장에는 2000~3000명의 노인이 모인다. 복지센터에는 탁구·당구·노래방 시설이 있고, 오래 기다리면 이발이나 목욕도 무료로 할 수 있다.
점심시간이면 이 일대에서 3000여명의 노인들이 무료급식을 기다린다. 이가 성치 않은 이들을 위해 메뉴는 호박나물, 숙주나물, 무국, 두부조림 같은 것들이다. 비가 오면 지하주차장이나 처마 밑에서 밥을 먹는다.
노인들은 80% 이상이 할아버지들이다. 가끔씩 ‘우리 영감’을 찾아나선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 틈을 헤집고 다니며 인상착의를 설명한다.
노인들이 종묘광장과 복지센터 사이를 왕래하면서 낙원동, 종로2가 등 이 주변에 노인용품을 파는 노점상들도 들어섰다. 노점상들도 노인이다. 중고 회중시계, 구두, 지갑을 비롯해 돋보기, 효자손, 관절염약, 트로트 음반, 모시 속옷, 부채, 밀짚모자 등 파는 물건도 대개는 오래된 것들이다.
찢어진 우산을 꿰매거나, 닳은 구두 뒤축에 징을 박거나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노점상들도 있고, 장기판을 빌려주는 노점상도 있다.
그러나 노인들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오후 6시 이후 이 거리는 다시 젊은이의 거리로 돌변한다. 광장도 데이트하는 젊은이들 차지가 되고 노점상들도 떡볶이, 액세서리, 핸드폰 가입권유로 항목이 바뀐다.
노인들이 어디서 자는지, 아침밥과 저녁밥은 어디서 먹는지 알 수 없다. 아침이면 또 이 거리에 노인들은 몰려온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김훈의 기사 중 또 하나는 간결성입니다. 그 간결성은 전체적인 내용의 압축이기도 하고, 또 문장의 간결성이기도 합니다. 그의 문장 하나는 대개 1~3형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또 문장의 물리적 길이 또한 짤막짤막합니다. 저는 김 선배의 이런 문장형태를 그의 선친 김광주의 무협지에서 발견할 수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문장과 기사는 압축될 때, 그 폭발력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김 선배에게 제가 이런 제안을 한 적도 있습니다. ‘김 선배, 굳이 3매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더 말하시고 싶으시면 5~6매, 아니 10매도 좋으니 거리의 컬럼을 얼마든지 더 길게 쓰셔도 괜찮습니다’라고. 그러나 김 선배는 ‘아니, 저는 3매가 좋습니다’라고 대답했고, 그가 <한겨레>를 떠날 때까지 거리의 컬럼이 3매를 넘어선 적은 없었습니다.
김훈 선배는 그러나 스트레이트 기사에는 약했습니다. 아니 약하다기 보다 지금 쓰는 기사형태와 맞지 않다고 하는 편이 올바른 표현이겠군요. 그래서 김 선배의 스트레이트 기사를 받을 때는 난감했습니다. 마치 옛날 신문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죠. 김 선배의 스트레이트 기사는 제가 요즘 형식으로 완전히 바꿔 데스킹했습니다. 그리고 기사를 손질한 뒤 요즘 쓰지 않는 표현이나 한겨레 표기방식 등을 김 선배에게 알려줬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제가 이렇게 `이런 표현은 스트레이트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한겨레에서는 이렇게 쓰지 않는다’는 식으로 전화를 하면 김 선배는 이를 연필로 받아적었다가 다시 꺼내 읽어보고 이를 다음 기사 쓸 때에는 바로잡았다고 합니다. 이를 나중에 전해들었을 때 죄송스럽기도 하고, 또 작은 곳 하나에도 치열함을 잃지 않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김훈은 <한겨레>에 입사하자마자, 철도청 노조원들의 열악한 노동상황을 기사로 쓴 `철도청 달력엔 빨간 날이 없다’는 기사로 첫 테이프를 끊은 뒤, 이후 부산 중국민항기 추락 현장(3월), 월드컵 거리응원 현장(6월), 허일병 의문사 사건(8~10월), 부산아시아경기대회(9월), 미선이 효순이 사망사건(11월), 세습사회(12월), 대선현장(12월) 등을 취재했습니다.
김 선배가 기사량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김 선배가 <한겨레>에 있을 동안 가장 몰두했던 기사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이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너무 길어 생략하겠지만,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시각이 전혀 달라 팽팽하게 맞섰던 것이기도 합니다. 김 선배는 이 사건에 대한 몰두가 아주 깊었습니다. 몇 차례나 지방출장을 갔고, 관련자들을 만나 증언할 것을 직접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김 선배는 자신의 기사에 대해 가타부타 말한 적이 없는데, 딱 한 번 허 일병 사건과 관련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허 일병 기사가 너무 많다고 생각해 기사량을 줄이려고 하자, 김 선배가 전화를 걸어와 “제가 이런 전화 처음 하는데요. 이 기사는 꼭 내보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김 선배는 꿈에서 허 일병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허 일병이 나타나 “진상을 꼭 밝혀달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김 선배를 이야기할 때, 피해갈 수 없는 것이 80년대 신군부 정권 등장 당시의 용비어천가입니다. 김 선배는 이 이야기를 잘 하진 않았습니다. 이는 김 선배에게는 큰 상처이기도 합니다. 당시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용비어천가를 쓸 것을 신문사쪽에 강요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를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부담은 밀려밀려와 당시 7년차 기자였던, 글 잘쓴다고 소문난 김훈에게까지 떠넘겨졌습니다. 그리고 김훈은 이를 그대로 받아 나중에 그의 이력에 큰 오욕으로 남게될 지도 모를 용비어천가를 기꺼이 썼습니다. 나중에 김훈은 이때에 대
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누군가는 써야한다. 그런데 아무도 쓰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쓰고 말겠다”라고. 다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저는 변명으로 듣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훈이 세속적인 출세나 야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기에 저는 김훈의 그 말을 믿습니다.
김 선배는 회사를 떠나면서 의문사규명위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의문사규명위 사무실에 가는 게 너무 싫었다. 왜냐하면 장준하 등 70년대 의문사를 당한 사람들의 당시 사건기사를 내가 썼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이들의 의문사에 대해 제대로 규명조차 않은 채 쓴 것이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중앙정보부 직원, 경찰 등이 조사를 받고 피의자 신분이 되었는데, 그 피의자 중에는 나도 포함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때처럼 역시 그들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의문사규명위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캡은 자꾸 나를 보고 의문사규명위에 가라고 한다. 그러니 꾸역꾸역 갈 수 밖에”라고.
빨리 기동취재팀 일을 매듭짓고 싶었는데 글이 너무 길어져 변죽만 울리고 본론에 들어가진 못한 채 다음 편으로 넘겨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왜 김훈이 한겨레를 떠났는가’라는, 비록 이제는 묵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주제에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김훈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언급한 것은 김훈이라는 개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않고선 그가 한겨레를 떠난 이유를 설명해도 오해하기 십상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김훈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지니고 있기에 그의 행동에 대해 보통 사람의 잣대로 평가할 경우, 우리는 그를 오해할 수 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김훈과 도올 김용옥’, `김훈이 한겨레를 떠난 이유’, `김훈과 <칼의 노래>’, `김훈의 요즘’ 등을 이야기하고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혹 모릅니다. 이 글을 본 김 선배가 역정을 내시고 자신의 이야기를 더 이상 쓰지 말라고 하신다면 2편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권태호 올림 ho@hani.co.kr
김훈이 한겨레를 떠난 이유 2
1편을 띄운 뒤, 김 선배로부터는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김선배에게 이야기해주지 않는 한 김 선배는 자신과 관련된 뉴스메일이 떴다는 것을 알 수 없겠지만, 알았다 하더라도 별도의 연락을 하진 않았을 겁니다.
오늘 이야기는 지난번보다 좀더 내밀한 부분으로 들어가게 돼 부담이 큽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하는 김 선배에 대한 이야기는 다분히 주관적인 김훈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김훈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거나 정의를 내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그런데 1편이 나간 뒤, 엉뚱하게 김훈을 지나치게 칭송하거나 또 그에 대한 반론으로 김 선배를 비판하는 것이 둘다 당황스럽고, 제가 김 선배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듭니다. 오늘 하는 이야기도 김훈 그 자체가 아닌, 제가 겪은 김훈의 일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4. 김훈과 도올 김용옥
지난해 10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김 선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용옥이 곧 문화일보 기자가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기사로 씁시다. 단독인데”
“김용옥이 저보고 문화일보가 발표할 때까진 기다려달라고 하더군요”
김훈과 김용옥은 고려대 동기동창으로 친구 사이입니다. 그리 친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고려대 67학번(66학번인가? 지난번에 김 선배 고등학교를 틀린 이후라 자신이 없네요)에는 당시 3명의 천재가 있었다고 합니다. 김훈, 김용옥, 그리고 또 한 명 있었는데. 그래서 김훈과 김용옥은 대학시절부터 서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10월 어느 날, 김용옥이 김훈에게 전화를 걸어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둘은 만났습니다.
“당신처럼 현장기자가 되려고 한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되는지 좀 가르쳐달라”
“하지 마라. 이 일은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
“이미 문화일보 사장과도 다 이야기가 됐다”
“굳이 하겠다면, ‘보고’를 잘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보고를 잘 하라’는 김훈의 한 마디 말에는 기자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김 선배는 이 이야기를 제게 전하면서 “그런데 김용옥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못알아듣는 것 같더라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정몽헌 회장의 죽음 이후, 기자직을 그만둔 김용옥은 <한겨레>의 김훈과 곧잘 비교되곤 했지만, 김훈과 김용옥은 ‘거리의 컬럼 3매’와 ‘신문 한 면’이라는 둘의 기사 길이가 둘의 차이를 모두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훈은 <한겨레> 조직 안에서 행동하고, 그의 기사도 그 시스템 안에서 작동했습니다. 그러나 김용옥은 제가 보기에는 기존의 시스템을 초월했고(나쁜 말로는 ‘무시’) 특별한 기자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었습니다.
사회부 기동팀(또는 경찰팀)은 보통 수습시절과 그 이후 1~5년차 등 초년 기자들이 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50 넘은 기자가 이 현장으로 돌아온 것은 지금까진 거의 없었습니다. 김훈의 사례는 다른 나이든 기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김용옥도 김훈으로부터 상당한 용기를 받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훈 이후 경향신문, SBS 등에서도 차장급 40대 기자들이 경찰팀 기자를 자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1년이 채 안돼 원대복귀하는 경우가 많아 아직은 실험단계일 뿐 정착단계로 옮아가고 있진 않은 것 같군요. 김 선배가 현장기자로 조금만 더 계셨더라면 상황이 또 어떻게 달라졌을 지 모르는데, 기자로서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5. 김훈이 <한겨레>를 떠난 이유
이제 진짜 본론 중의 본론이군요.
아래 기사는 김 선배가 <한겨레>에서 마지막으로 쓴 기사입니다. 2002년 12월20일 대선 직후였습니다.(날짜상으로는 2003년 1월1일자의 ‘세습사회 르포’ 기사가 더 나중이지만, 이는 대선 이전에 마감을 한 것이어서 기사를 쓴 시점으로는 아래 기사가 가장 마지막입니다)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는 지역보다는 세대별로 갈라섰다.
조직되지 않고 동원되지 않은 젊은이들의 힘이 젊은 정치권력의 시대를 열었다.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18일 밤,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진 젊은 세대들의 민첩하고도 전략적인 대응에 기성세대들은 경악했다. 이회창 후보를 찍었다는 엘지그룹 오정환(59) 전무는 “한마디로 무서웠다. 쇠뭉치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20일 아침, 오 전무가 주재한 회사 간부회의 분위기는 무겁고 침울했다. “나이먹은 간부들은 모두 멍한 표정이었다. 간부들은 리더십의 문제를 심각히 고민했다. 한평생 먹고사는 일과 회사수익 올리는 걱정만 하다가 미래의 가치를 내다보지 못한 죄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소설가 이문열(56)씨는 19일 밤 개표방송을 보다가 술을 마시고 대취했다. “선동성에 노출된 젊은이가 다수가 되었다. 빨간 옷을 입고 다수의 힘으로 광장을 점거하는 젊은이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20일 아침까지 그는 술이 덜 깨어 있었다.
전직 차관인 김시복(59)씨는 “젊은 세대가 대통령을 만들었다고 해서 정치세력화한다면 기성세대와 마찰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익명을 원한 대기업 중역 김아무개(57)씨는 “젊은이들의 힘이 특정정치세력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순수한 변혁의 힘이기를 바란다. 통일 원동력이 된 경제력을 건설해온 세대의 고통을 부정하지 말아달라. 무섭고 두렵다”고 말했다.
월간지 〈바자〉 기자 김경숙(32)씨는 개혁국민정당 당원이다. 19일 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수많은 젊은이와 함께 만세를 불렀다. 카페마다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맥주잔을 쳐들며 환호를 질렀다.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젊은이들도 함께 함성을 질렀다. “우리는 정치적 이익을 바라지 않고서도 우리 후보를 위해 열렬히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청춘이다. 우리는 조직이 아니지만 필요할 때는 조직처럼 움직인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우리의 무기다”라고 김씨는 말했다.
소설가 조정래(61)씨도 개표방송을 보며 술을 마셨다. “이것은 혁명이다. 50대와 60대들은 근대화라는 업적을 민주화, 합리화로까지는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실패로 나타났다. 젊은 세대들은 정치에 대한 환멸을 희망으로 전환시켰다”고 말했다.
얼마 전 문화일보사에 입사한 도올 김용옥(55) 기자는 전국의 유세 현장과 투·개표 현장, 정당 상황실을 며칠째 쫓아다녔다. “미국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세대가 시대의 전면으로 등장했다. 기성세대들은 이 젊은이들의 힘을 그저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이 힘이 현실로 나타나자 기성세대는 충격을 받고 있다. 이회창은 일방적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젊은이들과 쌍방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이것이 노무현의 승인이다”라고 김 기자는 말했다.
19일 밤, 광화문에서 고려대생들이 20~30명씩 모여 건배를 하고 있었다. 고려대 학생기자 윤수현(23·경제학과 3)씨는 “이회창이 이겼다면 어른들은 이런 자리를 만들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배인 임춘택(32·고대신문 간사)씨는 “월드컵, 소파개정 투쟁 열기 속에서 젊은이들은 개인의 판단으로 참가했다. 친구들끼리 가족들끼리 광장으로 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희망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 ‘희망’에 대해 50대는 여전히 의구심을 제기한다. 젊은 대통령의 ‘희망’ 앞에서 50대의 보통 사람들은 주눅들고 불안해하고 있다. 늙음은 다만 낡음인 것인가, 고생하며 살아온 세월은 단지 수구 냉전의 고착화에 기여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 앞에 처한 50대들의 자괴감이었다. 서울대 황상익(50·전국교수노조 위원장) 교수는 “기성세대는 이제 행동이나 판단에 있어서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역할분담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20일 낮, 서울 도심 식당에서 젊은이들의 식탁은 ‘노무현’으로 시끌벅적했고, 50대들은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이 기사는 원래 김 선배가 쓰겠다고 한 기사는 아니었습니다. 대선이 세대간 대결처럼 치러지면서 대선 발표 직후, 50대 이후 장년들의 상실감이 상당했습니다. 이를 기사로 보여줘야할 것 같아 김 선배에게 대선 다음날인 20일(금) 아침 전화를 걸어 이런 내용의 기사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대선결과에 대해 50대 이후 세대들이 충격을 받은 것 같더라구요”
“저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때만 해도 저는 이말에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김 선배가 받은 그 ‘충격’이 바로 김 선배가 <한겨레>를 떠난 이유입니다.
위 기사를 마감한 그날 저녁 김 선배가 제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가 컬럼을 한 번 써도 괜찮겠습니까?”
“예, 좋습니다. 어떤 내용이지요?”
“저는 노무현을 찍지 않았습니다. 이회창을 찍었습니다”
“그러셨나요?”
“제가 왜 노무현을 찍지 않았는지, 왜 이회창을 찍었는지를 <한겨레> 지면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김 선배가 컬럼을 쓰겠다고 한 적은 그때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김 선배가 이회창을 찍었다는 것도 조금 놀랐지만(김 선배는 대선 전 이회창 지지 발언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평소에도 한나라당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 내용을 공적인 자리를 통해 밝히겠다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기도 했고, 우려되기도 했습니다.
“김 선배가 쓰시겠다면 제가 뭐라고 할 말은 없습니다. 또 <한겨레> 지면에 그런 내용의 컬럼이 나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김 선배 개인한테 반론과 비난이 쏟아질 지도 모를텐데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저는 이번 대선과정에서 노무현 후보 유세를 주로 따라다녔습니다.(김 선배는 노무현-정몽준이 서로 갈라서게 된 문제의 명동 유세장에도 그 한복판에서 그 과정을 모두 지켜봤습니다) 제가 그 과정에서 느낀 점 등을 그대로 써볼까 합니다. 후보와 지지자들이 보인 행태 등”
저는 그 컬럼을 쓴 이후 김 선배가 겪을 지도 모를 마음고생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김 선배의 컬럼을 지면에 게재하고 싶다는 냉혹한 욕심이 더 컸습니다.
이후 부장에게 보고해 이 내용은 국장에게까지 보고됐고, 지면확보 등 일단 회사쪽 준비는 모두 끝난 상태였습니다. 김 선배가 컬럼을 보내오면 월요일 12월23일치에 쓰기로 돼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인 12월21일(토) 낮, 김 선배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컬럼을 쓰긴 다 썼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어보니 도저히 못 내보낼 것 같습니다. 아마도 컬럼이 나가면 예전에 제가 겪었던 비난여론이 또 한번 몰아닥칠 것 같습니다. 제가 도저히 그것을 견뎌낼 자신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컬럼은 없었던 일로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얼마 뒤, 그해가 가기 직전 종로1진 기자가 제게 사표 한 장을 쑥 내밀었습니다.
“김 선배가 캡 갔다주라고 해서요”
원고지 한 장에 쓴 사표 내용의 일부입니다.
“저는 <한겨레>의 진보성 속에 저의 보수성을 펴는, 나름대로 제 역할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실패했습니다. 늙음은 낡음인 것 같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기사를 쓸 자신이 없습니다. 이제 조용히 집에서 책이나 읽으며 여생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왜 그만둔다고 하시대?”
“이번 대선결과에 좀 충격을 받으셨나봐요”
그때 저는 순간적으로 ‘차라리 이회창이 됐더라면’ 하는 바람이 불쑥 솟아나기도 했습니다.
“대선결과?”
“단순히 결과가 아니라 이제 자신 세대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하시나봐요. 그런데 (김 선배 특유의) 횡설수설해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몸도 좀 안 좋으신 것 같고”
김 선배 기사가 지면에서 보이지 않으면서 회사에도 소문이 퍼졌습니다. 사회부 바깥에서는 당시 기자생활을 시작해 한 면씩 도배를 하던 도올 김용옥을 거론하며 “혹 대접이 소홀해서 그랬던건가?”
“섭섭한 게 있었나?”
“이제 다른 역할을 맡겨야 하는거 아냐?”
등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김 선배가 <한겨레>를 떠나는 이유를 김 선배가 말하는 이유로는 이해가 잘 안됐기 때문입니다. 김 선배는 애초 그해 가을 자신의 집을 일산에서 회사 근처로 옮기려고도 했습니다. 일산에서 출퇴근하기가 너무 멀어 <한겨레> 바로 옆 삼성아파트로 이사하기 위해 형수가 근처 복덕방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니 그때만해도 김 선배는 <한겨레>에 꽤 오랫동안 머물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겨레>는 김 선배를 붙잡고 싶어했습니다. 사회부장, 전 사회부장(김훈 선배를 데려온), 심지어 사장까지 김 선배를 만나 설득했습니다. 김 선배와 친한 한겨레 인사가 김 선배와 밤새 술을 마시며 김 선배를 붙잡기도 했습니다.
사회부장과 김 선배가 만난 자리에선 저도 함께 있었는데 “지금 그만둔다고 곧바로 결정하시지 마시고, 조금 쉬시면서 머리도 좀 식히시다가 그래도 정 생각이 바뀌지 않으시면 그때 결정해도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구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김 선배는 막무가내였고, 또 횡설수설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마르크스를 읽을 때, 노자를 읽었다”
“조직이 중요하다”
“더 이상 나는 이 세상에서 존재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그냥 조용히 있어야 할 것 같다”
“세상에 나서는 게 무섭다” 등등 서로 연결되지 않는 말들을 마구 내뱉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감기에 걸렸다며 베이지색 바라리 코트 깃을 세우고(전혀 멋있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촌스러운 복장이었습니다) 찾아온 김 선배는 쓰지 않은 컴퓨터를 반납하고 <한겨레>를 떠났습니다.
김 선배가 한겨레를 떠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이 무렵 <한겨레>에서는 홍세화 선배 등 한겨레 기자 중 몇 명의 민주노동당 가입과 관련해 논쟁이 오갔습니다. 언론인의 정당가입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 논란에도 세대차를 보여줬는데, 젊은 기자들은 ‘그건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쪽이었고, 차장급을 기준으로 그 이상의 기자들은 ‘안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김 선배도 역시 ‘안 된다’ 쪽이었습니다.
김 선배는 이런 <한겨레> 내부 논란 진행과정도 본인의 마음에는 좀 안들었던 것 같습니다. 논리적인 설명 없이 그냥 “안된다”는 말만 계속 되풀이하곤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여러분들은 김훈이 왜 한겨레를 떠났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사족) 김훈과 홍세화는 참 사람이 이렇게도 다를 수 있구나 할 수 있을 정도로 극과 극입니다. 김 선배는 겉으론 강하지만 속은 너무도 부드러운 아이 같은 감성을 지닌 사람이고, 홍 선배는 겉으로는 한없이 부드럽고 인자하지만, 속은 강철같아서 이세상 사람들이 다 변할 때까진 전혀 흔들리지 않을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김 선배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귀엽고, 홍 선배는 무섭습니다.
| 작성일: 2003-10-17 17:19:14 [이글에 답변] [수정] [삭제]
--------------------------------------------------------------------------------
| 작성자: eternalrebel 어쩐지 그책 좋더라니...
[칼의노래]가 이분 작품이래믄서요?
문장이 짤막짤막하믄서, '함축적'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글 하나하나에 심어놓은 듯한 압축된 힘과 응집력이 느껴지는 문장...
직장 동료가 책상 위에 널어놓고 간 책을 무심코 집어들었다가 기어이 오늘 사러 가야쥐 맘 먹게 됐습니다.
근데 그 분이 이분이었더군요. 역시나...
꼴통 수구가 아닌 '넓은 시야를 갖고 전체를 직시할 수 있는 냉철한 보수'가, '전투적 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거의 없다시피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땅에서 이런 분의 존재 의의는 정말 크다고 하겠습니다. 모두가 이상만 좆는다면, 실제 현존하는 우리의 삶의 기반은 흔들릴 수 밖에 없다는 게 제가 본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었기 때문에...
저는 요즘 꼴통 수구보다 '수구 좌파' 쪽에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전자야 어느 정도 실체가 규명이 됐고 상당부분 위축됐지만 후자는 아직 실체조차 불명확한 이유에서죠.
좌우간 '냉철한 상황 인식'이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젤 걱정되는 건 미국보단 중국이군요. 바로 옆에 있는 '세계의 공장' 중국 때문에 울나라 중소기업은 이미 절반 이상 거덜났고 앞으로 더 어려워질 거라고, 모 공단에 입주한 회사에 근무중인 선배가 귀띔하더군요. 삶의 기반이 견실하지 못하면 이념 논쟁이야말로 공허함의 극치겠지요.
막판에 이야기가 옆으로 샜지만, 어쨌든 김훈님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만한 분인 것 같습니다.
말 안되는 세상, 음풍농월의 촌철살인이여 - 김훈
쉰네 살의 처사 김훈이 연필 깎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곡식을 탈곡하듯 연필깎기 구멍에 심이 부러진 몽당연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는 모습을. 그러고보니 그 돌아가는 모양새가 자전거와 비슷해 보인다. 손이 도는 만큼, 발이 도는 만큼, 그리고 손에 들이는 노력과 발에 들이는 에너지만큼만 정확하게 힘을 받는 그 기계들은 엄밀히 말해, 기계가 아니다. 김훈이라는 한 생물학적 존재가 의탁하고 있는 세상의 다른 몸들이다. 몸의 외부에서 몸을 지탱시키는, 그리하여 그의 정신과 너무도 닮아있는, 정직한 몸들.
이 글들이 도대체 책이 될 수가 있겠소?
김훈은 말을 잘 아끼는 편이 아닌 듯하다. 말도 안되는 말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그는 말이 되는 말들이 말값(?) 받는 세상을 꿈꾸며 치열하게 말을 갈고, 말의 가면들을 벗겨낸다. 기실, 말의 가면이란 얼마나 허술한 은폐술인가. 그럼에도 김훈이 보고 듣는 말들은 대개 그 허술한 은폐로 엄청난 일들을 저지른다. 거기에 사람들은 속는 줄도 모르고 속거나, 기만인 줄 알면서도 그냥 속아 넘어 간다. 이 엄청난 가면 무도회의 세상에서 김훈은 자신의 말을 가다듬으며 육신이 망가지는 줄도 모른다.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생각의나무)는 그런 그의 자잘한 상처들에서 흘러나온 고름으로 봐도 무방하다.
“출판사 사장이 이 글들을 모아서 책으로 내자고 했을 때, ‘이 글뭉치가 책이 될 수 있겠느냐’고 내가 물었어요. 그랬더니 가능할 거라고 하더군. 난 도통 이게 책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어서 ‘그럼, 어디 한번 책으로 만들어 보라’고 했죠. 이 책은 그래서 나온 거지 내 의도나 기획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아요. 애정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적극적으로 개입 한 건 별로 없어요. 책이 많이 팔리긴 해야 하는데…. ”
이럴수가. 그의 말을 옮기고 보니 실물감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의 말이 아닌 것만 같다. 약간 불명확한 발음과 활을 당기듯 입 안으로 살짝 밀어넣었다가 부드럽게 튕겨내는 김훈 특유의 리듬감이 완전히 죽어있다. 그의 부드러움은 그가 세상을 견디고 그 안에 스며 그만의 목청을 가다듬는 소박한 자구책이자, 신랄한 무기다. 이 말은 그의 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니 그의 육체가 그걸 하지 않는 이상, 완벽한 필사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그의 육성을 옮겨 적어야만 한다. 말인 말을 말 안되는 말로 곡해하고야 말아 버리는 말의 섬세한 속성이라니. 문장가 김훈은 말의 이러한 질감을 제 몸의 고통인 양 같이 앓는다. 그래서 그의 글과 말엔 피가 끓어넘친다. 그것들을 몸 밖으로 빼내는 과정은 또 얼마나 혹독하고 지난한가.
“《칼의 노래》(생각의나무)는 두 달 동안 쓴 겁니다. 근데 그걸 쓰다가 이가 여섯 개나 빠졌어요. 아, 아니다. 세 달 걸렸구나. 뭐, 쓰면서 중간에 좀 놀기도 하고 그랬으니 쓴 기간만 따지면 두 달이죠. 여하간 그걸 쓰는 동안 이가 슬슬 빠지더라구. 그래서 빠진 이빨 쓰레기통에 버리고 또 쓰고 뭐, 그랬어요. 나중에 동인문학상 상금 받아서 이를 다시 해넣었는데, 하나 하는데 삼백만원이야. 여섯 개를 해넣었으니 상금 받은 거 다 거기다 처박은 셈이죠.”
말 없이 말 되게 굴러가는 자전거와 연필
그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소설가란 말 그대로 소설을 써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건 삶의 형식과 내용을 오로지 소설로만 채우는 일이다. 그러나 김훈에겐 그런 관습화된 직함이 어울리지 않는다. 스스로도 그걸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의 형식으로 소설을 차용할 뿐이다. 더구나 그는 한없이 쓰고 싶은 얘기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이토록 몸을 던져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글을 쓰는 건 단지 내가 가진 상식과 내 자신의 몸의 반응일 뿐이지. 사실, 세상에 대해 막 신경질이 나고 짜증나고 그래서 글을 쓰게 되는 건데, 쓰고나면 더 울화가 치밀어요. 말도 안 되는 말들이 넘치는 세상엔 말보다는 뭔가 물리적인 본때를 보여줘야 조금은 말이 되게 굴러가거든.”
그런 그에게 아직도 세상은 말이 되기엔 요원한 듯하다. ‘김훈 세설(世說)’이란 부제가 붙은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는 그가 세상에 퍼붓는 불만과 저주, 그리고 그 아수라도의 틈새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빛을 발하는 몇몇 아름다운 삶의 모습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김훈이 아름답게 여기는 삶들이 넘치는 부조리와 절망의 반대편에서 상대적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건 아니다. 그들은 존재하는 그 자체로 스스로의 질서와 윤리를 그 어떤 허황된 발언 없이 묵묵히 지켜내는 이들이다. 양식된 물고기로는 장사를 하지 않겠다며 가게문을 걸어 잠근 횟집 주인이나 천진무구한 힘과 지순한 사랑으로 평생을 보낸 화가 이중섭, 그리고 영원한 청년 시인 임화 등의 삶에 김훈은 끌린다. 그리고 그 끌림엔 여지가 없다.
여기서 잠깐 그의 말꼬릴 잡아보자. ‘말이 되게 굴러가거든’할 때의 그 ‘구름’을 붙들어 그와 함께 굴러보자. 그가 글을 쓰는 유일한 도구인 연필과 연필깎기, 그리고 그의 유일한 호사랄 수 있는 28단 기어의 오백만원 짜리 자전거 ‘풍륜(風輪)’에 대해서. 공들여 깎아 세상에 대한 그만의 입김을 대필하는 연필이나, 그가 함께 팔도의 오지를 유랑하는 자전거나 모두 그의 장기(臟器)에 속한다. 그것들은 하나 같이 김훈을 태우고 굴러다니면서 김훈의 정신과 육체를 신장시키고, 세월이 가는 만큼 연약해진다. 그러나 원고지 위를 쓰삭대며 바람결에 떠돌던 말들을 착지시키는 흑연 향은 오래된 만큼 진득하고 알짜스럽다. 김훈의 수사는 유려하지만, 의미의 중핵과 닿아 의미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할 뿐, 그 자체의 미감만으로 겉돌지 않는다. 자전거는 또 어떤가. 몸이 시키는 만큼 몸을 받아내고 몸이 움직여주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있는 듯 없는 듯 앙상한 골격만으로 묵묵부답인 그 기계는 교언영색하는 인간들에 비해 얼마나 진솔하고 담백한가.
아날로그의 정신으로 세대를 넘나들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음풍농월이야. 그거 가지고 날 욕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음풍농월이란 게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거 아주 세련된 인문주의가 필요한 거지. 경제적인 기반도 별로 필요없어요. 음풍농월하는 데 돈이 들면 얼마나 들겠어. 술값이야 좀 들겠지. 지 밥벌이만 알아서 한다면 난 내 아들이 그러고 산대도 환영이에요. ”
듣고보니 그의 나이가 새삼 되새겨진다. 그에겐 곧 입대를 앞둔 장성한 아들이 있다. 이번에 발간한 책의 제목 역시 그가 군대엘 가기 싫어하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에서 따온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군살 하나 없이 젊고 힘차다. 군살이란 육체의 엔트로피라기보다는 정신의 이완현상이 육체로 드러난 것일 공산이 크다. 정신이 트이고 마음의 습기와 온기가 여전히 교류할 때, 육체는 늘어지지 않는다. 사파리 잠바에 ‘애들이나’ 들고 다닐 륙색을 한쪽 어깨에 짊어지는 김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문득 내 나이가 민망해진다. 말해놓고 보니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감상에 불과하지만, 여전한 아날로그적 몸의 운용으로 디지털 세대의 벽을 넘나드는 그가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다. 부러운 만큼 무언가가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것도. 인터넷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그이기에 조금은 다행스럽다. 그가 이 글을 읽지 말았으면 좋겠으니까.
강정 기자(igguas@libro.co.kr)
김훈의 제철소 기행, ‘쇠에 깃든 빛과 꿈’
치과의사의 연장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그 연장을 다루기 위해 치과의사가 되고 싶었다. 모든 연장에는 끝이 있고 날이 있고 손잡이가 있다. 연장은 손잡이에서 끝과 날을 통해 전개된다. 손잡이는 인간의 쪽이고 끝과 날은 사물의 쪽이다. 쇠가 인간과 사물을 연결시켜, 사물을 개조할 수 있게 하고 썩은 이를 뽑을 수 있게 해준다. 치과 의자 옆에는 완성된 쇠의 아름다움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나는 쇠의 아름다움을 들여다보면서 이를 뽑아야 한다는 두려움을 잊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 타기를 좋아한다. 자전거가 고장나면 내 손과 내 연장으로 자전거를 분해해서 고칠 수도 있다. 자전거의 동력전달 장치 속에서도 쇠의 아름다움은 찬란하다. 자전거 체인과 뒷바퀴 구동축 속에 들어 있는 베아링도 쇠의 아름다움의 한 절정을 이룬다. 체인은 많은 관절로 구성되어 있다. 베어링은 매우 강도 높은 쇠다. 체인과 베어링은 그 단단함으로 부드러움을 완성한다. 체인은 유연하게 출렁거리면서 굴러가고, 기아를 변속하는 인간의 명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베어링은 그 단단함을 이용해 마찰을 제거한다. 단단한 것이 유연성과 운동성을 완성해 낸다. 내가 아끼는 연장들의 날과 끝도 단단하고 날카롭다. 뾰족한 펜치의 끝은 민감하고 섬세하다. 쇠는 단단함으로써 부드럽고, 쇠의 날은 날카로움으로써 섬세하다. 쇠는 그 양 극단의 모순을 함께 지향한다. 철기시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영일만을 떠나 서울로 오던 날도 바닷가 제철소의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는 동해의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영일만의 새벽은 빛으로 가득찬다. 호미곶에서 925번 지방도로를 타고 포항 쪽으로 내려오면서 바라보는 영일만의 바다는 크고 푸르다. 영일만에서는 물과 뭍이 함께 커 보여서, 영일만의 거대한 만곡(灣曲)에 둘러싸인 바다는 일망무제의 수평선보다 더 넓어 보인다. 원양에서 달려드는 파도가 만의 안쪽 깊숙이 밀려와, 이 거대한 바다는 달려들듯이 육지에 안긴다. 영일만에서는 시간과 바람이 맑다. 새벽에, 먼 바다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빛들은 이 바다와 육지를 가득 채우고, 형산강 물줄기를 타고 내륙으로 퍼져간다.
서기 158년에 신라 임금은 이 바닷가에서 인간세상으로 빛을 맞아들이는 제사를 지냈다. 영일만은 빛이 닿는 포구였고, 그래서 이 바다의 이름은 지금도 영일(迎日)이다. 지금, 영일만의 새벽 빛들은 포항제철소의 굴뚝에 먼저 와 닿는다. 포항제철소의 용광로와 공장들은 영일만 해안선을 따라 숲처럼 울창하게 들어서 있다. 한반도는 빛을 맞아들이는 이 바다로 쇠를 맞아들였다. 영일만의 새벽은 언제나 개벽처럼 찾아온다. 신라임금이 맞아들인 세상의 빛은 어둠을 몰아낸 개벽이었다. 그때, 영일만 바닷가에서 고기 잡아 먹고살던 젊은 부부가 실종되었다. 신라는 해를 잃고, 세상은 캄캄해졌다. 임금은 지금의 일월동 바닷가에 나가 간절히 빌어 빛을 다시 찾았다. 인간이 실종되자, 세상의 빛이 실종되었던 것이다. 인간이 곧 빛이다. 그리고 1800백 년 후에, 이 해안선에는 또 한바탕의 개벽이 있었다. 이 개벽은 포항제철 용광로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개벽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지난 1월 중순 포항제철소를 견학했다. 30년 가까이 신문기자 생활을 했지만 포항제철소는 처음이었다. 포스코 직원은 나의 제철소 방문이 처음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나는 제철소의 규모와 적막에 놀랐다. 작은 도시 만큼이나 거대한 제철소 공장단지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종업원들이 용광로 주변이나 작업 라인에 도열해서 비지땀을 흘리며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작업 공정은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직원들에 의해 원격조종되었고, 쇳물이 흐르는 공장 안에서는 사람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포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내내 신라나 가야 시대의 대장간을 상상하고 있었다. 포항제철소는 가야의 대장간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변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쇠는 대체 인간에게 무엇이었으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비행기 안에서 나는 그런 질문에 스스로 빠져 들고 있었다. 이 짧은 글은 그 질문에 대한 내 자신의 대답이다. 포스코 용광로는 철광석과 코크스를 섞어서 넣고 거기에 고온의 열풍을 불어넣어 쇳물을 뽑아내고 있었다. 열풍에 코크스가 타면서 철광석을 녹여 그 안에 스며들어 있던 쇠가 액체가 되어 흘러나오는 것이다. 쇳물을 녹여내는 과정은 돌과 불과 바람의 작용이었다. 원소와 원소가 부딪칠 때, 인간 앞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모양이다. 쇠가 문명을 바꾸어 놓듯이, 불은 물질을 바꾸어 놓는다. 나는 사실 불의 발생과 불의 작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연소학’이라는 책에 불은 ‘물질이 타면서 빛과 열을 방출시키는 현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말은 아무 말도 안 한 것과 똑같다. “불은 타는 것이고, 타는 것이 불이다”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아마도 물질 안에는 인간이 알지 못하는 힘의 잠재태가 들어 있어서, 그것이 타면서 밖으로 발현되는 모양이다. 돌에 온도를 가하면 돌 속의 쇠는 분리돼 흘러나온다. 그래서 용광로는 여러 원소들을 그 안에 가두고 뒤섞어서 새로운 문명의 소재를 빚어내는 자궁처럼 보인다. 도자기를 굽는 가마는 불의 힘으로 물렁물렁한 흙을 굳게 하는데, 포스코의 용광로는 딱딱한 쇠를 물처럼 흐르게 한다. 도자기 가마 안에서는 흙에 고온을 가하면, 수억 년 동안 흙 속에 숨어 있던 색깔이 인간 앞에 드러난다. 이것이 고려청자나 이조백자, 또는 막사발의 색깔이다. 그러나 포스코 용광로 안에서 돌은 분해되면서 재로 변한다. 그러니 불의 작용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쇳물이 어느 정도 굳어지면 시뻘건 슬라브로 변해 압연공장의 벨트 위를 달리면서 넓게 퍼져 나간다. 이 슬라브는 쇠인 동시에 불이다. 불이 돌을 녹여서 쇳물을 뽑아내고, 여기서 다시 불이 빠져 나가야 쇳물은 쇠가 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쇠는 그 안에 불의 자취를 지니고 있다. 철제 연장은 신석기 연장이나 구석기 연장보다 발전한 문명이지만 그 안에 불과 바람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돌보다 더 시원적(始原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비밀은 용광로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용광로의 안쪽을 이루는 내화벽돌은 흙으로 빚어진다. 흙만이 불을 견디고, 흙만이 자궁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쇠는 인간에게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나 용광로는 원소들의 나라인 것이다. 나는 포스코의 용광로를 들여다보면서, 원소와 원소들이 서로 껴안고 엉켜 놀고 바뀌면서 소멸하고 또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의 온갖 이야기들이 궁금해서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 원소들 나라의 이야기는 인간의 인식 영역이 아닐 것이었다. 나는 이 세계에는 인간의 인식이 헤아릴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야 마땅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철제 마구나 갑옷을 만들던 가야 대장간이나 에밀레종을 만들던 신라 대장간의 작동원리도 포스코 용광로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가야의 대장장이에게 코크스는 없었다. 그러나 가야의 대장장이들도 더 높은 온도를 얻기 위해 성능 좋은 땔감을 찾아서 산속을 헤맸고, 좋은 땔감이 있는 곳으로 대장간을 옮겼다. 가야의 대장장이들도 풍구를 돌려서 화덕에 바람을 넣었으며, 단단하고 매끄러운 쇠를 얻기 위해 아직 덜 굳은 시뻘건 쇳덩어리를 망치로 두들겼다. 가야의 대장장이들도 원소와 원소를 결합해야만 돌이나 모래를 쇠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불과 바람의 상승작용을 알았다. 이 원리는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포스코 용광로도 이 원리에서 이탈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최첨단 철강제품을 만들어내는 일은 아득한 시원의 시대를 미래와 연결시키고, 돌과 불과 바람으로 문명의 물적 토대를 일궈내는 일처럼 보였다. 그러니, 포스코의 첨단 컴퓨터 앞에 앉은 일류기술자들과 가야의 대장장이는, 내가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가장 근원적인 조건들을 끌어 모아서 최첨단의 문명을 지향하는 인간들이었다. 포스코 용광로를 바라보면서, 나는 변하는 것보다 변할 수 없는 것들이 인간에게는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면에서 발원하는 영일만의 빛 변하지 않는 모든 것들 위에서 변화를 추구할 때, 우리는 포스코의 용광로 같은 거대한 문명의 자궁을 건설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영일만의 빛이라고 믿는다. 신라 임금이 맞아 들인 영일만의 빛은 인간의 내면에서 발원하고 있었다. 신라 임금은 변하지 않는 빛 속에서 새로운 빛을 찾아왔다. 고기잡이 어부가 실종되면 세상의 빛은 사라지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와 세오의 설화를 나는 그렇게 읽었다. 국립박물관 가야실에 전시된 옛 철제도구들의 잔해는 참혹하다. 세월의 풍화를 견디지 못한 그 쇠붙이들은 이제 녹슬고 썩고 부서져서 칼인지 창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철제도구 중아직도 쇠의 위엄을 간직한 물건들도 있다. 마구나 갑옷, 화살촉 중에는 모습이 온전한 물건들도 많다. 고대의 쇠붙이들은 그 성분의 순수함이나 단련 정도 또는 매장지의 지질학적 환경에 따라서 썩었거나 혹은 온전하다. 썩지 않고 휘지 않고 무뎌지지 않는, 강도 높은 쇠를 만들어 내는 것은 가야 대장장이들의 꿈이었고, 고대국가의 흥망성쇠가 걸린 사업이었다. 신라가 가야제국을 정벌하고 다시 그 여세를 몰아 삼국을 통일한 시대의 한국사는 가장 많은 피를 흘렸다. 김부식은 그 시대에 “피가 흘러 내를 이루었고, 방패가 피의 내에 떠내려 갔다”고 기록했다. 철제무기의 시대였다.
대장장이들의 꿈과 국가의 흥망 삼국사기에는 통일의 영웅인 김유신이 철제 도끼를 들고 등장한다. 청동기에서 철기로의 이행이 칼로 무를 자르듯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문명의 바탕을 이루는 소재는 서로 겹치고 습합되면서 서서히 이전되었다. 그러나 부족병합과 통일전쟁에 이르는 시대의 사람들은 새로 태어난 쇠의 단단함에 매혹되어 있었던 것 같다. 가야의 가장 중요한 국책산업은 농업과 제철업이었다. 신라의 산업구조도 이와 같았다. 합천의 산골마을에는 지금도 가야시대의 제철소와 대장간들의 유적이 남아 있다. 가야 고분은 온갖 철제도구들의 박물관이다. 마구와 갑옷이 인간에 장착된 상태로 출토되기도 하고, 통 속에 든 화살이 통째로 나오기도 한다. 쇠를 들고 싸웠던 가야 사람들은 죽어서도 쇠에 둘러싸여 있다. 쇠는 그들의 자부심이었고 미래를 건설하는 수단이었으며,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의 도구였다. 박물관에 가 보면 신라는 금의 나라고, 가야는 쇠의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생각이 많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금은 쇠보다 보존성이 뛰어나서 썩지 않고 무덤 속 세월을 버티어 낸 것이고, 또 박물관 신라실이 번쩍이는 금붙이 중심으로 꾸며졌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나 가야나 모두 나라의 기본 토대는 금이 아니라 쇠였을 것이다.
전쟁의 도구와 평화의 도구 쇠가 이룩한 토대 위에서야 비로소 금관과 금귀고리, 금허리띠의 정교함이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으로는 왕관과 장신구를 만들 수 있고 예술품을 만들 수는 있지만, 전쟁을 수행할 수 없고, 황무지를 갈아서 농경지로 바꾸어 놓을 수 없다. 쇠만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고, 쇠만이 땅을 농토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쇠는 고대국가들에게 문명의 신바람을 안겨 주었다. 쇠는 전쟁을 더욱 전쟁답게 만들었고, 농업생산력을 높여 주었다. 청동제 칼로 전쟁을 하던 사내와 철제 칼로 전쟁을 하던 사내가 전쟁과 살육을 몸으로 이해하는 정도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나무 쟁기를땅에 박는 농부와 쇠 쟁기를 땅에 박는 농부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쇠의 꿈은 세계를 개조하는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무기와 농기구는 세계를 개조하려는 인간의 도구다. 인간은 손에 연장을 쥐지 않고서는 이 세계와 맞설 수가 없다. 가야의 대장간에서는 쇠를 녹여 무기도 만들고 농기구도 만들었다. 무기를 만드는 대장장이가 농기구를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쇠를 녹여서 끝을 뾰족하게 벼리면 창이 되고, 폭을 넓히면 호미가 된다. 무기와 농기구는 세계를 개조하려는 인간의 공통된 열망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무기는 전쟁의 도구이고 농기구는 평화의 도구이다. 이 모순된 운명의 도구들은 같은 화덕에서 태어나고, 쇠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를 개조하려는 쇠의 모순된 꿈은 전쟁과 평화 사이에 거대하게 걸처져 있다. 쇠의 이 모순된 꿈은 가야 대장간 화덕에서 빚어지는 것이나 포스코 용광로에서 빚어지는 것이 다르지 않다. 포스코 용광로는 세계를 개조하고 세계를 버티어 내려는 쇠의 꿈을 산업사회의 일상 속으로 끌어들여 실현시켰다. 이것이 영일만의 새로운 빛이다. 쇠는 이제 더이상 전쟁과 농업의 기본 토대만은 아니다. 쇠는 생활의 일부이며 그 질감이고 표현이다. 철기시대는 계속 진행 중이고, 철기시대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다. 옛 신라가 빛을 맞아 들였던 바닷가에서 포스코는 계속되는 철기시대를 진행시키고 있다. 포항제철소 부두에는 기선들이 늘어서서 기다리며 쇠를 받아가고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철기시대 자전거의 동력전달 장치 속에서도 쇠의 아름다움은 찬란하다 체인과 베어링은 그 단단함으로 부드러움을 완성하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쇠로 만든 연장들을 좋아했다. 해외 여행을 할 때마다 그 지방 철물점에 들러서 맘에 드는 연장들을 사가지고 왔다. 쇠붙이를 들고 오는 여행객을 김포공항 보안요원들은 면밀히 조사했다. 내가 모은 연장은 펜치, 망치, 대패, 톱, 니퍼, 스패너, 드라이버, 핀셋, 칼 같은 것들이었다. 펜치에도 수많은 종류와 기능이 있어서, 내 연장은 너무나 많다. 한때는 이 연장들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져서 그림이나 도자기처럼 벽에 꼭 걸어 놓고 쳐다보고 좋아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가 아파서 치과에 갔다가 나는 그 철제 연장들을 보고 경악했다. 치과의사의 연장은 그야말로 쇠의 낙원이며 쇠의 절정이었다. 그것들은 연장이 수행해야 하는 기능과 연장의 생김새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군더더기라고는 없었고, 모양과 기능의 일치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장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과 그 인간이 작용을 가해야 할 대상 사이에서 완벽한 출동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김훈(작가)
'가 > ㅣ'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영하, 스타벅스적 삶 (0) | 2004.07.17 |
---|---|
기타노 다케시의 '길가기' 미학 (0) | 2004.02.21 |
기타노 다케시, 득도한 대가가 만든 오락영화, <자토이치> (0) | 2004.02.21 |
김훈, 한겨레 시절 기사 모음 (0) | 2003.12.08 |
김훈, 거리의 컬럼 모음 (0) | 2003.12.08 |
김규항의 야간비행 글모음 (0) | 2003.11.13 |
김규항, 삐딱이의 미완성 모자이크 (0) | 2003.11.12 |
기타노 다케시 - 나, 한국에선 존경받는 영화감독이야! (0) | 2002.08.21 |
기타노 다케시 : 하나비 Hana-Bi (0) | 2001.10.28 |
기타노 다케시 (0) | 2001.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