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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거리의 컬럼 모음

가/ㅣ 2003. 12. 8. 17:35 Posted by 로드365

[김훈 거리의 칼럼]본질 비켜난 인권위 독립 논쟁  
 
 [한 겨 레] 2002-11-20 (사회) 칼럼.논단 14면 01판 661자    
 
   
국가인권위원회 김창국 위원장 등 직원 4명은 대통령의 사전허가 없이 국외출장을 다녀온 다음날, 청와대로부터 ‘공개경고’를 받았다.
인권위는 즉각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청와대 경고에 반발했다. 국가기관의 수장이 대통령 경고의 부당성을 공개적으로 성토하는 자리는 놀라웠다. 위원회 분노의 핵심은 “독립성을 침해받았다”는 것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독립성’이야말로 인권위의 독립 근거이며 작동 원리다. 위원회 설립준비 과정에서부터 ‘독립성’은 가장 고통스러운 논란 대상이었다. 경고 부당성을 설명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위원회의 ‘독립성’은 다른 어느 국가기관보다 찬란해보였다.
그러나 ‘독립성’이라는 이 존엄하고도 신성한 명제가 국가 공권력의 인권침탈 행위를 밝혀내면서 권리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위원장 일행의 국외출장 사전허가 여부를 둘러싸고 돌출되는 사태는 보기에 민망했다.
인권위는 지금까지 적극적인 ‘옹호자’ 역할을 자임한 것이 아니라, 제3자적인 ‘심판자’ 역할에 자족해왔다. 위원회의 ‘독립성’은 기존 법제와 관행과 판례들, 그리고 공권력의 습관적 남용에 맞서는 시련의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허가없이 국외출장을 갈 수 있는 ‘독립성’은 본질에서 멀리 비켜난 것으로 보인다.
hoonk@hani.co.kr






[김훈 거리의 칼럼]국가와 개인  
 
 [한 겨 레] 2002-10-24 (사회) 칼럼.논단 18면 01판 643자    
 
   
지난 2년 동안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활동으로, 개인의 생명을 압살해 온 국가권력의 잔혹한 실체가 일부 드러났다.
이 잔혹성의 발가벗은 모습은 너무나도 치떨리는 것이어서 보도조차 제대로 되지 못했다. 국가와 개인이 양심의 문제로 대치할 때, 국가가 개인의 생명에 대해 폭력을 행사한다면 개인은 살 자리가 없다.
의문사위원회는 최근 지난 1970년대 형무소에서 벌어진 사상전향공작에 항거하다 고문 끝에 숨진 좌익수 3명의 죽음에 대해 “민주화운동과 관련이 없다”고 결정했다. 위원회의 결정문은 ‘양심’과 ‘체제’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갈팡질팡하고 있다. 위원회는 민주화의 지향점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이 ‘기본질서’쪽으로의 전향을 거부하다가 맞아죽은 사람들의 ‘양심’을 긍정하면서도 이 죽음은 “민주화와 관련이 없다”고 위원회는 판단했다.
위원회의 결정은 불완전해 보인다. 그리고 이 불완전한 결정은 불완전한 체제의 모습을 정직하게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국가와 개인의 대치는 지나간 70년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은 여전히 개인으로서 국가와 대치하고 있다.
개인의 지향성이나 신념에 따라 편을 가르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싶다. 국가는 완전할 수 없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취재파일]분신 노점상의 ‘유서’  
 
 [한 겨 레] 2002-08-26 (오피니언/인물) 칼럼.논단 06면 01판 893자    
 
   
지난 22일 오후 3시께 서울 중구청장실 앞 복도에서 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한 청계천3가 노점상 박봉규(60·중태)씨는 분신을 하기 4시간 전인 오전 11시10분께 이명박 서울시장 앞으로 ‘유서’를 보냈다. 그가 ‘유서’를 발송한 뒤 시너를 준비해 구청장실로 찾아간 과정은 그의 분신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누적된 울분에 따른 의도된 행동임을 보여준다.
그의 유서는 노점좌판에서 가까운 을지로4가 우체국에 등기접수돼 시청으로 배달되었다. 그는 병원에서 가족들에게 “유서에 ‘서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던 공약을 지켜라’라고 썼다”고 말했다.
박봉규씨의 삶은 영세노점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생활보호대상자로 건축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영구임대주택에서 4녀1남을 키웠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일자리가 줄어들자 1997년부터 청계천에서 노점상을 차렸다. 한달에 60만~70만원씩을 벌어 아파트 임대료 20만원을 냈다.
그런데 박씨는 이달에만 단속을 3번 당했다. 단속을 당하면 구청에서 물건을 가져간다. 벌금 5만원을 납부하면 구청은 물건을 다시 내준다. 이 물건을 다시 노점좌판까지 가져가려면 운반비 2만5천원이 든다. 한번 단속당할 때마다 7만5천원을 뺏기는 셈이다. 그렇게 해서 다시 장사를 시작하면 또다시 단속이 벌어진다. 아무런 대책이 없는 단속이다. 그래서 노점상을 단속하는 구청의 행정작용은 한도 끝도 없는 ‘전쟁’처럼 보인다.
노점은 불법이기 때문에 뿌리뽑아야 한다는 것이 그 행정의 원칙이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인간의 생명의지를 행정력으로 분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빼앗고, 돈받고 다시 내주고, 다시 빼앗는 식의 단속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인간의 생명력은 구청의 행정력보다 강하다.
김훈 민권사회2부 기자 hoonk@hani.co.kr






[김훈 거리의 칼럼]여중생 압사시킨 미국인의 ‘신’  
 
 [한 겨 레] 2002-08-09 (사회) 칼럼.논단 14면 05판 643자    
 
   
미군은 기어이 여중생 압사사건의 재판권 양도를 거부했다. 7일 주한 미국 대사관이 가까운 서울 광화문 시민공원에서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미사가 열렸다. 천주교 경기 북부지구 사제단과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소속 신부 15명이 미사를 집전했다.
“장갑차 무한궤도에 깔려 심장과 두개골이 으깨진 딸들의 죽음을 딛고 우리는 강자와 약자가 평등한 세상을 향해 부활할 수 있음을 믿는다”라고 신부들은 기도했다.
미국 달러에는 ‘우리는 신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신부들은 미국 대사관 쪽을 향해 “당신들이 믿는다는 하느님은 대체 누구냐. 이것이 미국의 기독교 정신이냐”라고 물었다. 미군은 사건발생 초기부터 오직 자신의 이익과 위상만을 방어해 왔다. 죄악과 그 죄악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로 이어진 미군의 소행을 신부들은 “창세기의 원죄와 같은 죄악”이라고 규정했다.
신부들은 한국 정부가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주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부를 주님이 도와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비에 젖은 수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주님을 부르며 울먹였다. 주님은 대답이 없었다.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 경찰이 미사가 열리는 공원을 에워싸고 있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탑골공원서 종묘로 ‘둥지’바꾼 노인들  
 
 [한 겨 레] 2002-07-18 (사회) 뉴스 14면 02판 973자    
 
   
탑골공원에서 노인들이 사라졌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은 지난 반세기 동안 노인들의 놀이터, 사교장, 그리고 시국성토장이었다. 탑골공원은 지난 3월 관람시간을 한 시간 이내로 제한했고 음식물을 들여오거나 돗자리·신문지를 깔지 못하도록 했다. 나무벤치도 모두 돌벤치로 바꿨다. 돌벤치는 여름에도 엉덩이가 시려 노인들은 앉을 수가 없다.
탑골공원에서 내몰린 노인들은 걸어서 15분 거리인 노인복지센터(올해 4월 개관)와 종묘광장으로 옮겨갔다. 복지센터에는 하루 3000~3500명, 종묘광장에는 2000~3000명의 노인이 모인다. 복지센터에는 탁구·당구·노래방 시설이 있고, 오래 기다리면 이발이나 목욕도 무료로 할 수 있다.
점심시간이면 이 일대에서 3000여명의 노인들이 무료급식을 기다린다. 이가 성치 않은 이들을 위해 메뉴는 호박나물, 숙주나물, 무국, 두부조림 같은 것들이다. 비가 오면 지하주차장이나 처마 밑에서 밥을 먹는다.
노인들은 80% 이상이 할아버지들이다. 가끔씩 ‘우리 영감’을 찾아나선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 틈을 헤집고 다니며 인상착의를 설명한다.
노인들이 종묘광장과 복지센터 사이를 왕래하면서 낙원동, 종로2가 등 이 주변에 노인용품을 파는 노점상들도 들어섰다. 노점상들도 노인이다. 중고 회중시계, 구두, 지갑을 비롯해 돋보기, 효자손, 관절염약, 트로트 음반, 모시 속옷, 부채, 밀짚모자 등 파는 물건도 대개는 오래된 것들이다.
찢어진 우산을 꿰매거나, 닳은 구두 뒤축에 징을 박거나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노점상들도 있고, 장기판을 빌려주는 노점상도 있다.
그러나 노인들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오후 6시 이후 이 거리는 다시 젊은이의 거리로 돌변한다. 광장도 데이트하는 젊은이들 차지가 되고 노점상들도 떡볶이, 액세서리, 핸드폰 가입권유로 항목이 바뀐다.
노인들이 어디서 자는지, 아침밥과 저녁밥은 어디서 먹는지 알 수 없다. 아침이면 또 이 거리에 노인들은 몰려온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취재파일] 서울에 광장을  
 
 [한 겨 레] 2002-06-18 (오피니언/인물) 칼럼.논단 06면 01판 931자    
 
   
한국 축구팀의 경기가 벌어질 때마다 서울 세종로 네거리와 시청앞 광장에 모여드는 인파는 위태로워 보인다.
세종로 네거리는 광장이 아니라 차도이고, 시청앞은 말이 광장이지 고층건물로 가로막혀서 차도와 분수대를 제외하면 광장이라고 할 만한 공간은 없다.
조선 개국 엘리트들은 서울 북한산~북악산~경복궁~광화문을 잇는 직선을 왕조의 이념적 축선으로 설정했다. 그 축선은 국가의 도덕성과 정통성을 상징하고 있었다. 세종로 네거리와 시청앞 광장은 지금도 이 축선상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 자리는 근대적 광장이 발달하기에 알맞은 이념적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광장은 들어서지 못했고, 광화문 네거리에서도 차도와 바로 인접한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서울은 아직도 왕조시대의 자연 취락이다.
세상을 바꾸기를 염원하는 사람들은 늘 광장에서 모이는 날을 그리워했고 한국 현대사에 등장했던 군사정권들은 광장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전통적 축제는 사람들의 신명을 모으지 못한 채 관변행사로 시들어 갔고 대도시는 공공의 마당을 설정할 수 없었다. 도시뿐 아니라, 문화도 광장을 상실한 채 개인의 밀실로 파고 들거나 아니면 거대한 대중소비 시장 속으로 전개되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북에는 개인의 밀실이 없고 남에는 공동의 광장이 없다”는 겨레의 비극 위에서 출발하고 있다.
행정 당국의 뒤늦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금, 광장 없는 도시에서 광장으로 향하는 축제의 신명은 가히 민족적 규모다. 밀실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함께 노는 일의 신명은 생생하게 살아있었고, 그 신명을 받아줄 광장은 아직은 없다. 지금 사람들이 모이는 거리는 광장이 아니라, 광장을 그리워하는 염원일 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광장’을 새롭게 만들 수 만 있다면 8강이 못되더라도 우리의 월드컵은 성공이다. 김훈/민권사회2부 기자 hoonk@hani.co.kr

 






[김훈 거리의 칼럼]가로막힌 '친일청산 특집'    
 
 [한 겨 레] 2002-03-30 (사회) 칼럼.논단 14면 02판 603자    
 
   
고려대 대학신문인 (고대신문)(주간 임홍빈 교수)의 학생기자들은 최근 이 학교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의 친일행적을 사실적으로 적시하는 내용을 포함한 '친일청산 특집'을 기획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지난 25일치로 기획됐던 이 특집 기사는 지금까지 3주째 표류해왔고, 현재는 '당분간' 연기된 상태다. 학생기자들은 "주간교수님이 기획안에 난색을 보이고 있고 또 취재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학생기자들이 호소하고 있는 '취재의 벽'이란 이 문제에 대한 재단(고려중앙학원.이사장 김병관 전 동아일보회장)쪽의 입장을 받아낼 수 없고 접근이 어렵다는 것이다. 주간 교수는 기획이 지연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판에 고려대 동문회(회장 구두회)는 지난 28일 정기총회에서 발표한 결의문에서 "인촌의 명예를 유린하는 행동은 무책임하고 불순한 의도"라고 규탄하고 "인촌을 친일인사로 매도한 당사자들은 이를 취소하고 사과하라"고 주장했다. 이날 정기총회에는 300여명의 고려대 동문들이 모였다.
철벽과도 같은 현실이 학생기자들 앞에 가로놓여 있다. 그 어린 학생기자들의 모습은 늙은 기자의 지난 시절 모습처럼 보였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김훈 거리의 칼럼]슬픈 아우성    
 
 [한 겨 레] 2002-03-29 (사회) 칼럼.논단 14면 02판 657자    
 
   
요즘 서울 지역에서 벌어지는 거리집회와 시위는 연일 150건이 넘는다. 200건에 이르는 날도 있다. 실체가 없다던 북파공작원들도 도심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며 실체를 드러냈다. 미군이 가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미군 가지마라"는 시위도 있다.
가장 고통스런 시위는 추방당한 사람들의 부르짖음이다. 노점상, 세입자, 철거민, 계약직, 해고자, 해고를 앞둔 파업 노동자들이 연일 거리에서 부르짖고 있다. 경찰 지휘부는 즉각 '경력대비'를 지시한다. '경력대비'란 경찰병력으로 해산시키라는 용어다. 추방당한 사람들의 아우성은 도로교통법 시행령의 차원에서 관리되고 있다. 전경들이 그 아우성을 몸으로 막아내고 있다. 한 곳에서 시위가 끝나면 전경 지휘관들은 부상자들을 점검하고 곧 다른 시위현장으로 이동한다. 봄이 무르익을수록 전경들은 밥 먹을 틈도 없이 바빠진다.
시장의 논리로 추방당한 사람들이 아우성 치는 거리에, 시장이 저들을 구원하리라는 복음이 울려퍼지고 있다. 추방은 이 사회의 오래된 문제정리 방식이었다. 언론인을 추방하고, 교사를 추방하고, 노동자를 추방하고, 늙은이를 추방하고, 장애인을 추방해 왔다.
서울 거리에서, 시장의 힘으로 추방당한 사람은 하늘을 나는 새만치도 시장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 '경력대비'가 있을 뿐이다.
hoonk@hani.co.kr






[김훈 거리의 칼럼]`밥'에 대한 단상    
 
 [한 겨 레] 2002-03-21 (사회) 칼럼.논단 18면 02판 640자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 대사관 담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시위 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 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 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 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hoonk@hani.co.kr







[김훈 거리의 칼럼]라파엘의 집    
 
 [한 겨 레] 2002-03-08 (사회) 칼럼.논단 14면 02판 621자    
 
   
서울 종로구 인사동 술집골목에는 밤마다 지식인, 예술가, 언론인들이 몰려들어 언어의 해방구를 이룬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논하며 비분강개하는 것은 그들의 오랜 술버릇이다.
그 술집골목 한복판에 '라파엘의 집'이라는 시설이 있었다. 참혹한 운명을 타고난 어린이 20여명이 거기에 수용되어 있었다. 시각.지체.정신의 장애를 한몸으로 모두 감당해야 하는 중복장애 어린이들이다. 술취한 지식인들은 이 '라파엘의 집' 골목을 비틀거리며 지나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동전 한닢을 기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파엘의 집'은 전세금을 못 이겨 2년 전에 종로구 평동 뒷골목으로 이사갔다.
'라파엘의 집' 한달 운영비는 1200만원이다. 착한 마음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 1천원이나 3천원씩 꼬박꼬박 기부금을 내서 이 시설을 16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후원자는 800여명이다. '농부'라는 이름의 2천원도 있다. 바닷가에서 보낸 젓갈도 있고 산골에서 보낸 사골뼈도 있다. 중복장애 어린이들은 교육이나 재활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안아주면 온 얼굴의 표정을 무너뜨리며 웃는다.
인사동 '라파엘의 집'은 술과 밥을 파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밤마다 이 식당에는 인사동 지식인들이 몰려든다. hoon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