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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K. 딕 - 할리우드가 사랑한 SF작가

파/ㅣ 2002. 7. 19. 10:12 Posted by 로드365


도매가로 미래세계를 팝니다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이 세편의 공통점은 원작자가 필립 K. 딕이라는 사실이다. 스크린에 옮겨진 편수는 극히 적지만 각 작품의 스케일과 중량감은 가히 위압적이다. 명망있는 할리우드 감독들이 기꺼이 스크린에 구현하고 싶어하는 유혹적인 미래세계를 빚어낸 필립 K. 딕은 세련된 문체로 인간의 정체성을 집요하게 파고든 SF작가였다. 미래의 살인을 방지하는 시스템의 패러독스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 미래사회의 딜레마를 탐구한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스필버그라는 필터를 통과해 7월26일 관객과의 조우를 기다리고 있다. <씨네21>은 ‘<마이너리티 리포트> 시스템’에 접속하기 전, ‘필립 K. 딕 리포트’를 먼저 공개한다.
편집자



report1 ┃딕의 미래세계, 환상 그 이상의 환상  

1. 최초로 필립 K. 딕 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무엇일까? 물론 공식적인 정답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각색한 리들리 스콧의 82년작 <블레이드 러너>다. 하지만 왜 나는 아직도 80년에 나온 텔레비전영화 <천국의 녹로>라고 박박 우기는 것일까? <천국의 녹로>의 원작자는 필립 K. 딕이 아니다. 딕만큼이나 중요한 SF/판타지 작가인 어슐러 르 귄의 작품을 각색한 작품이다. 하지만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꿈을 꾸는 남자에 대한 이 영화(또는 르 귄의 소설)를 보면 정말 필립 K. 딕의 분위기가 풀풀 풍긴다. 주인공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오가고 그 경계가 무너지는 곳에서 두 세계는 기괴한 충돌을 일으킨다…. 물론 어슐러 르 귄은 자기가 무엇을 쓰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필립 K. 딕 소설’을 쓰고 있었다.

재능있는 작가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낼 줄 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작가들은 그 이상의 일을 한다. 그들은 다음 세대를 위한 세계를 창조한다. 그리고 필립 K. 딕의 업적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고, 그 세계는 우리를 삼켜버렸다.

필립 K. 딕은 작가의 영역을 넘어 장르가 되었다. 우린 지금까지 쏟아져나온 수많은 가상 현실물들의 원조를 윌리엄 깁슨과 그의 추종자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깁슨이 만들어낸 사이버스페이스는 차갑고 건조한 매트릭스에 불과했다. 깁슨이 제공한 것은 메커니즘에 불과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역동적인 사이버스페이스의 이미지는 대부분 깁슨보다 필립 K. 딕의 덕을 더 보고 있다.

무엇이 필립 K. 딕의 세계를 그처럼 생명력 넘치는 괴물로 만들었을까? 모든 꿈들은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모든 환상은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필립 K. 딕의 세계를 그처럼 강렬하게 만들었던 건, 그가 단지 공허한 가상세계를 지어낸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현실세계와 환상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았고, 그가 소설을 위해 만들어낸 세계는 그에게 당연한 현실세계의 또 다른 묘사였다. 그가 한 유명한 말처럼 ‘리얼리티란 관점에 불과했다’.

report2 ┃공포증과 약물, 뒤엉킨 사생활  


2. 필립 K. 딕은 1928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란성 쌍둥이 누이인 제인은 태어난 지 6주 뒤에 죽었다.

딕은 시카고에서 태어났지만 거의 일평생을 캘리포니아에서 보냈다. 그는 병약한 아이였다. 빈맥증상이 있었고 천식환자였으며 다양한 공포증에 시달렸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의 공포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약물중독자였고 끝도 없이 잘되지도 않는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으며, 가끔 자살을 기도했고, 공포증 때문에 멀리 가지도 못하면서 캘리포니아 안을 빙빙 도는 짤막한 여행을 반복했다. 그는 환영을 보았고 천사를 만났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종종 그의 경험은 전형적인 캘리포니아식 신비주의와 결합되어 싸구려 사이비 종교풍으로 흐르기도 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남자였고, 존재하지 않는 병을 앓는 남자였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며 평생을 보낸 약물중독자였다. 그가 리얼리티와 아이덴티티라는 대상에 대해 집착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 그 둘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견고한 것이 못 됐다.


   
필립 K. 딕의 작품들 표지. 왼쪽부터 <스캐너 다클리> 높은 성의 사나이><발리스>. <판타스틱 유니버스>는 단편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실렸던 잡지다.

그가 살았던 세계 역시 그를 단단한 현실에 잡아두지 못했다. 그가 작가로서 경력을 시작한 50년대는 미·소 냉전 속에서 다양한 편집증이 전염병처럼 유행하던 때였다. 50년대의 공포증이 넘어가자 60년대의 히피문화와 약물유행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 정신나간 사건들을 체험한 곳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맨 정신으로 있기 힘든 곳인 캘리포니아였다. 1974년 이후 그가 겪었던 종교적 경험과 그런 경험이 투영된 그의 후기작들은 그가 얼마나 혼란한 정신의 소유자였던가를 증명한다. 그가 동료인 론 허버드처럼 본격적으로 사이비 종교 교주로 나서는 대신 소설가 직업에 붙어 있었던 게 모두에게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소설 vs 영화
┃블레이드 러너┃1992년, 감독 리들리 스콧, 출연 해리슨 포드, 숀 영, 룻거 하우어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를 각색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가장 먼저 나온 필립 K. 딕 영화이며,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다. 그러나 딕의 소설을 각색한 많은 영화들처럼, 원작과 소설의 유사점은 비교적 약한 편이다. 심지어 영화는 제목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영화의 제목 ‘Blade Runner’는 원래 앨런 E. 너스의 인구폭발의 장수사회를 다룬 SF소설 제목에서 빌려온 것이다.

데이비드 피블스의 최종 각본은 원작의 필립 K. 딕풍의 주제와 소재들을 대폭 삭제했다. 영화는 소설이 다루는 마사교와 같은 종교적 설정, 핵전쟁 이후 살아 있는 생물체들에 필사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의 군상, 감정의 인위적 조작과 같은 것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원작의 건조한 딕식 미래 묘사가 줄어든 대신 영화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기독교 상징으로 가득한 컴컴한 미래 버전 필름 누아르가 된다.




report3 ┃SF로 간 문학도  

3. 필립 K. 딕은 아서 C. 클라크나 아이작 아시모프처럼 ‘하드’한 작가는 아니었다. 클라크와 같은 작가들에게 SF세계는 과학적 상상력과 연역 과정을 통해 예측한 ‘가능성 있는’ 미래였다. 하지만 딕에게 SF는 이미 그를 둘러싸고 존재하는 현실세계를 기술하는 조금 독특한 도구였다. 그는 미래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과학적 상상력으로 어떻게 미래의 기술을 예측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화성인이나 안드로이드 같은, 이미 존재하는 SF 장르의 클리셰들을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이용했다.

골수 SF팬에서 시작한 엔지니어/과학자 출신의 클라크나 아시모프와는 달리 그는 순문학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가 SF로 시선을 돌린 건, 그것이 그의 미치광이 비전을 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이 점은 그의 VALIS를 보면 분명해진다. 우주의 진리와 기존 종교에 대한 장황한 헛소리를 늘어놓는 이 정신나간 소설은 어설프게나마 SF 모양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연역 과정을 통해 가공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SF의 장르와는 큰 관계가 없다. 이건 그냥 정신나간 사람이 자기 세계에 대해 쓴 보통 소설인 것이다.

그는 이 장르의 어느 누구보다도 정신병 환자들이나 약물중독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글을 많이 썼다(A Scanner Darkly, VALIS…). 그의 비교적 멀쩡한 캐릭터들도, 밖의 현실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이 없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인’은 절대로 아니다. 필립 K. 딕의 성공적인 소설들은 대부분 광기와 중독의 기술이다.

report4 ┃리얼리티를 비웃음, 세상에 완벽은 없다  


4. 필립 K. 딕이 가장 좋아했던 주제는 ‘리얼리티의 허약함’이었다. 그는 버클리식 연역적 추론 과정이 아닌 실제 경험을 통해 주변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이 얼마나 쉽게 기만당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주제를 가장 명백하게 다룬 작품은 그의 비교적 초기 작품인 < Time Out of Joint>다. 이 소설의 무대는 ‘완벽한’ 1950년대식 미국의 교외 주택지다. 이 세계는 너무나도 완벽해서, 주인공은 서서히 그를 둘러싸고 있는 완벽한 안락함을 의심하게 된다. 그는 전형적인 50년대식 편집증에 빠지고 마치 <뷰티풀 마인드>의 수학교수처럼 주변 세계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 연결하려 시도한다. 단지 이 경우, 그의 편집증은 상당히 타당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던 세계는 정말로 <트루먼 쇼>식 가상세계이고 실제 세계는 달을 둘러싼 전쟁이 한창인 1998년의 ‘미래’다.

< Flow My Tears My Policeman Said>의 설정 역시 리얼리티의 허약함을 폭로하면서 시작된다. 가수 겸 텔레비전 스타인 주인공은 어느 날 그의 존재가 완벽하게 말살된 세계에서 깨어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람에서 순식간에 무명의 존재로 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네오 파시스트들이 지배하는 경찰국가가 된 가상의 미국에 대한 이야기가 줄줄 이어지지만, 진짜로 중요한 건 주인공 태버너가 겪는 두 세계의 균열이 아닌가 싶다.

딕이 <높은 성의 사나이>(The Man in the High Castle)에서 사용한 대체 역사소설의 도구도 연역 과정을 통해 역사의 다른 경로를 추측해내는 원래의 목적에서 살짝 어긋난다. 그가 만들어낸,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래는 필립 K. 딕의 환각에 가깝다. 딕의 세계가 대부분 그렇듯, 리얼리티와 환각은 종종 엉뚱한 곳에서 연결된다. 이 소설에서 그 연결도구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긴 ‘가상의 현재’를 다룬 지하소설 < The Grasshopper Lies Heavy>다(재미있는 건 바로 < The Man in the High Castle>이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은 가상의 현재를 다룬 킹즐리 에이미스의 소설 < The Alternation>에서 존재하지 않은 현재를 다룬 SF소설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에이미스 소설에서 리얼리티와 환각은 또 다른 방식으로 해석된다. 에이미스의 소설에 언급되는 평행 우주의 필립 K. 딕은 너무나도 필립 K. 딕다운 존재다).

픽션과 미래의 현실이 연결되는 유쾌한 사례는 단편 <물거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단편에서 그와 그의 SF 작가 동료들이 쓴 모든 소설들은 미래에 실현되고 그들은 예지자로 취급받는다. 그보다 더 소박한 세계의 창조 방식은 역시 단편인 <퍼키 팻의 전성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남아도는 화성인들의 구호품에 의지해 살아가는 생존자들은 50년대 미국을 재현한 인형놀이에서 유일한 위안을 찾는다.

소설 vs 영화
┃토탈 리콜┃1990년, 감독 폴 버호벤 , 출연 아놀드 슈워제네거, 샤론 스톤

<도매가로 추억을 팝니다>를 각색한 <토탈 리콜>은 딕의 원작을 화성을 무대로 한 폴 버호벤/아놀드 슈워제네거식의 폭력액션을 영화에 끌어올 핑계로 사용했다. 원작의 핵심이었던 정신없는 아이덴티티의 교체와 리얼리티의 혼란은 모든 정체가 밝혀지는 영화 중반부터 명명백백한 현실로 대체된다. 그렇다고 새로 추가된 부분에 딕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데, 과거의 사악한 주인공과 나중에 음모를 위해 새로운 주인공의 인격이 시간차를 두고 대립하는 설정은 상당히 그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고대의 화성인 유적을 배경으로 한 화성의 묘사 역시 딕의 세계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아무리 생각해도 딕의 주인공답지 않다. 누군가가 지적했듯이, 주인공 퀘일 역에는 오히려 우디 앨런과 같은 왜소한 배우가 더 어울린다.



report5 ┃도매가로 정체성을 팝니다?  

5. ‘리얼리티의 허약함’은 감각과 기억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아이덴티티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의 가장 유명한 단편인 <사기꾼 로봇>(The Imposter)(최근에 게리 시니즈와 매들린 스토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은 이 주제를 다룬 가장 유명한 예다. 과학자인 주인공은 그가 자신을 살해하고 그를 위장한 알파 센타우리 외계인들의 스파이 로봇이라는 모함을 받고 탈출한다. 하지만 그가 찾아낸 것은 진짜 자신의 시체고 그가 로봇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알파 센타우리에서도 보일 만큼’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그의 거창한 최후는 이 부실한 세계에서 자기 존재의 허망함을 알아차린 남자의 충격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화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와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We Can Remember It for You, Wholesale) 모두 기억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는 이식된 가짜 기억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이 로봇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뒤에도 그 기억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서 주인공은 여행에 대한 가짜 기억을 이식받으려 하다가 사고를 일으키고 그 상흔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가짜 기억과 진짜 기억이 뒤섞이는 요란한 혼란 속에 말려든다. 앞에서 다룬 의 주인공도 이들만큼이나 아이덴티티의 혼선을 겪는다.

종종 딕의 세계에서 아이덴티티 문제는 정신분열과 다중인격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 A Scanner Darkly>에 이중인격의 혼란을 겪는 마약중독자 주인공 밥 아처가 대표적인 예. 그렇게 볼 때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를 각색한 <토탈 리콜>이 사악한 원래 자신과 새로 주입된 임시 인격과의 대결로 흘러갔던 건 꽤 필립 K. 딕식 설정이었다.

여기서부터 아이덴티티의 혼란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좀더 보편적인 질문으로 연결된다. 이미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와 <사기꾼 로봇>에서, 이식된 기억은 인간과 로봇의 경계를 허물었다. 단편 <그래, 블로벨이 되는 거야!>에서는 인간과 외계인의 모습을 오가는 육체의 변형이 아이덴티티의 변화를 가져온다. 암울한 묵시록인 <두 번째 변종>은 전형적인 냉전시대 편집증에 대한 공포물이기도 하지만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무너지고 기계가 인간의 불쾌한 자리까지 물려받는 성급한 진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딕의 세계에서 인간, 로봇, 외계인의 경계는 의미를 잃고 공포에 떨고 혼란스러워하는 정신만이 남는다.

report6 ┃SF작가, 혹은 예언자?  


6. 론 허버드와 마찬가지로, 필립 K. 딕은 사이비 종교 교주의 자질이 다분했다. 고맙게도 그는 그의 비전을 진지하게 생각했고, 진짜 종교를 만들어 교인들의 푼돈을 챙기려는 음모 따위는 품지도 않았다. 하긴 그럴 능력이 없는 남자이기도 했다. 교주의 카리스마는커녕 자기 정신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남자였으니까. 예나 지금이나 조직화된 종교는 예지자들이 아니라 말짱한 정신의 치밀한 장사꾼들과 정치가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소설이 사이비 종교의 복음서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 VALIS> < The Divine Invasion, Radio Free Albemuth>로 이어지는 후기작들은 전 우주적인 신비한 정신과 소통하는 예언자들과 기존 종교들이 북적거리는 스토리를 통해 일종의 종교적 비전을 전파하고 있다. 이 비전이라는 것이 너무 괴상하고 개인적인 경험에 치중하고 있어 결코 어떤 보편성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딕의 비전은 종교적이기는 하지만 그 종교는 미치광이의 종교다.

이런 딕의 예언자적 성격은 예지 능력에 대한 그의 집착과 연결된다. 예지 능력은 그가 아이덴티티의 혼란만큼이나 자주 써먹었던 주제이기도 하다. 마약중독자 미치광이 일인 사이비 종교 교주에게 미래를 본다는 행위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그의 컴컴한 코미디 < Martian Time-Slip>도 그렇고, 스필버그에 의해 영화화된 정신나간 단편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세계에서 미래란 일반적 타임머신물에서 그런 것처럼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옭아매는 계시이며 환영이다.

report7 ┃하루키와 스티븐슨을 거느리고…  


7. 필립 K. 딕의 소설이 영화화되기 시작한 건 1980년대부터였고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이는 SF영화의 유행과 특수효과의 발전뿐만 아니라 퍼스널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전과도 연결되어 있다.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사이버물의 유행도 옛 딕의 유산을 재발굴했다.

그러는 동안 딕의 혼란스러운 미로는 새로운 후계자들을 찾아갔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닐 스티븐슨 같은 신세대 미로세계의 창조자들은 종종 딕의 후예자로 불렸다. 딕의 정신나간 편집증은 <엑스파일>과 같은 시리즈나 코언 형제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와 같은 영화들에 의해 계승된다. 물론 그뒤에 나온 수많은 삼류 사이버펑크영화들 역시 딕의 사생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필립 K. 딕은 결코 과학적 예언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세계는 점점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아서 C. 클라크가 정밀하게 예측한 금속성의 차가운 테크놀로지 유토피아보다 필립 K. 딕이 약먹은 중에 정신없이 써갈겼던 혼란스러운 난장판에 더 가깝다. 새로운 미디어와 테크놀로지를 통해 인격과 현실이 가지를 치며 새로운 존재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안 우리는 서서히 필립 K. 딕의 세계를 모방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딕은 결국 예지자였다.


소설 vs 영화
┃스크리머즈┃감독 크리스천 더과이 출연 피터 웰러, 로이 듀피스, 제니퍼 루빈

<두 번째 변종>을 각색한 <스크리머즈>는 비교적 작은 영화로, <블레이드 러너>나 <토탈 리콜>과 같은 야심은 찾아볼 수 없다. 영화는 세계전쟁 이후 인간과 대립하게 된 로봇과 싸우는 인간들의 전쟁을 다룬 원작의 줄거리를 비교적 충실하게 따라가지만, 후반부의 할리우드식 감상주의와 개심은 원작의 날카로운 공포와 아이러니를 많이 약화시킨다.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년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 출연 톰 크루즈, 캐스린 모리스, 피터 스토메어, 막스 폰 시도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최근 나온 필립 K. 딕 영화들 중 가장 높은 수준을 과시하는 영화지만, 가장 딕의 분위기가 약하게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오히려 딕보다는 히치콕의 느낌을 더 강하게 풍긴다. 앨프리드 히치콕이 존 버캔의 소설 <39계단>을 각색할 때 주인공이 스파이 집단에 쫓긴다는 기본 설정만 남겨놓고 모두 바꾼 것처럼,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원작에서 중요했던 예지의 패러독스는 모두 지워버리고 좀더 정통적인 스릴러로 변형시켰다. 히치콕 영화에서 원작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단서였던 39계단이 의미없는 맥거핀으로 추락했던 것처럼 스필버그 영화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원작과 같은 큰 의미는 없다. 여전히 좋은 영화지만 필립 K. 딕의 독자들은 상당히 실망하지 않았을까 싶다.


듀나/ djuna01@hanmail.net






<마이너리티 리포트> 원작자 필립 K. 딕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에 이어 <마이너리티 리포트>로 필립 K. 딕은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하는 SF 작가가 됐다. 살아 생전 자신의 작품이 영화화되는 것을 꺼려 했던 그는 결코 주류로 인정받지 못한 작가였다. 그가 그려낸 묵직한 미래의 묵시록은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것이다. 고통스런 삶을 살았지만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예언가, 필립 K. 딕을 리포트한다.

1982년 SF 잡지 'The Twilight Zone' 6월호에는 필립 K. 딕의 마지막 인터뷰가 실렸다. <블레이드 러너> 제작 막바지에 응했던 이 인터뷰에서 딕은 영화사와 빚었던 마찰에 대해 비교적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그가 제작사 래드 컴퍼니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부분은 원작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1968)의 재출간에 관한 것이었다. 제작사는 딕이 영화의 시나리오대로 원작을 개작할 것을 원했다. 하지만 딕은 이를 승낙할 수 없었다. 애초 햄턴 팬처가 각색한 시나리오의 초안은 원작의 철학적 함의를 모두 제거한 채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단순한 대결 구도로 이야기를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열두 살짜리 독자들을 위해 작품을 개작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던 딕은 결국 영화사의 제안을 거절했다. 영화의 제작에 맞춰 원작을 다시 출간하긴 했지만 제작사는 딕에게 심한 압력을 가했다. ‘<블레이드 러너>가 기초한 작품’이라는 문구도 못 쓰게 했으며 소설이 안드로이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도 밝히지 말라고 강요했다. 딕이 할리우드에 염증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대신 그는 새 소설 '티모시 아처의 환생 The Transmigration of Timothy Archer'(1983)을 마무리하는 데 몰두했다.

그러나 그는 텔레비전에서 <블레이드 러너>의 촬영현장 뉴스를 본 뒤 생각을 바꿨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리들리 스콧이 보여준 세트는 그가 구상했던 미래 세계의 비전과 거의 유사했던 것이다. 딕은 데이비드 피플스가 각색한 시나리오 수정본을 본 뒤 마음이 누그러졌다. “나는 내러티브에 신경을 썼지만 리들리 스콧은 비주얼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영화와 소설 모두 나름대로 즐길 만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딕은 이렇게 걱정했다. “얼마 후면 <블레이드 러너>의 공식 시사회가 있다고 들었다. 턱시도를 사야 할 텐데 사실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난 티셔츠를 입을 때 더 행복하다.” 하지만 딕은 결국 <블레이드 러너>의 시사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티모시 아처의 환생'이 유작이 되리라는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너무 많이 쓰고 너무 적게 받은 사나이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의 개작료로 영화사가 제안했던 돈은 40만 달러였다. 하지만 이에 퇴짜를 놨던 딕은 원작을 그대로 재출간하는 대가로 고작 7천5백 달러를 손에 쥐었다. 이건 당시 막 데뷔한 신인작가들의 원고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30년 넘게 미국 SF문학을 이끌어왔던 거장에 대한 대우치고는 너무 박했다. 사실 딕은 평생을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았다. 하드커버로 출간된 그의 첫 소설 '뒤죽박죽인 시간 Time Out of Joint'(1959)은 단돈 7백5십 달러에 팔렸다. 딕의 에이전트는 “책이 인쇄되는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해라”고 할 정도였다. 한때 전성기를 구가했던 미국 SF문학은 50년대 말 갑자기 독자를 잃어버림으로써 게토화하고 있었다. 작가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분투해야 했다. 딕은 보석세공을 하는 아내를 도와 부업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SF 소설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보석에 윤을 내는 일을 그만두고 '높은 성의 사나이'(1962)를 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미국내 최고의 SF 소설에 주어지는 휴고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탁월한 SF작가로서의 명성이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건 아니었다. SF는 언제나 변방의 문학이었으며 결코 주류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필립 킨드레드 딕은 열두 살 때부터 SF 소설을 읽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쌍둥이 여동생의 죽음과 부모의 이혼을 목격해야 했던 그에게 세상은 혼돈일 수밖에 없었다. 앨튼 반 보그트의 SF 소설들은 그에게 우주의 혼란과 신비로움을 일깨웠다. 열세 살 때 첫 단편 '소인국으로의 귀환 Return to Liliput'을 썼던 그는 1951년 SF 잡지들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53년 당시 미국에는 모두 13개의 SF 잡지가 있었고, 그해 6월에는 무려 7개의 잡지가 동시에 그의 소설을 게재했다. 한 해에 30편 내외의 단편 SF 소설을 쓴 딕은 1955년 첫 장편소설인 '태양계 추첨 Solar Lottery'을 출판하게 된다. 30만 부나 팔린 이 책은 그가 평생 탐구했던 테마들의 맹아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 책에서 딕이 묘사한 세계는 논리와 수로 엄격하게 지배되는 곳이다. 개인성을 상실한 모든 인간은 추첨에 의해 무작위로 최고의 권력자로 뽑히게 된다. 살해 위협을 피함으로써 존경을 받게 되는 이 권력자를 겨냥해 음모가 계획된다. 그리고 안드로이드가 등장해 그 음모를 이끌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필립 K. 딕은 평화롭고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세계의 허점과 균열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재능을 보였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을 진정한 SF소설로 꼽았던 필립 K. 딕은 오웰의 유산을 물려받되 그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간 작가였다. 과학과 기계문명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전체주의 사회, 인간이 인간성을 상실하는 황폐한 세계, 개인의 자유 의지를 억압하는 정부와 권력은 딕이 초기 작품에서도 즐겨 다뤘던 주제다. 단편 ‘스위블’에서 미래의 인간은 모두 똑같은 사상과 이념을 갖도록 조종하는 기계의 지배를 받는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돌연변이 예지자들의 예언에 의해 모든 범죄가 미리 차단된다. '높은 성의 사나이'는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패한 뒤 미대륙을 각각 일본과 독일이 분할 지배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시뮬라크라 The Simulacra'(1964)에는 꼭두각시 정부 기구로 대다수의 무지한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권력 엘리트가 등장한다. 물론 이 작품들은 2차 대전의 폐해와 냉전시대에 대한 작가의 두려움을 반영한 것이었다. 1950년대 미국은 겉보기에 평화롭고 완벽한 것 같았지만, 딕은 그 아래 감춰진 혼돈과 무질서의 불씨를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뒤죽박죽 세상

리얼리티의 불확실성은 필립 K. 딕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테마다. 그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듯했다. '하늘의 눈 Eye in the Sky'(1957)에 등장하는 여덟 명의 인물은 저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한다. 진리로 여겨졌던 신념 체계는 무너지고 어두운 현실 앞에서 모든 이들은 광기를 드러낼 뿐이다. '뒤죽박죽인 시간'의 주인공인 직업 퍼즐 해결사는 환영을 경험한 뒤 겉보기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들의 배후에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떤 인과법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비논리와 모순으로 가득 찬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이다.

딕이 묘사한 인간들이 종종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영화 <토탈 리콜>의 원작인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는 화성에 가고 싶어하는 한 평범한 사람이 기억을 이식받으려다 오히려 무의식에 잠재해 있던 끔찍한 경험을 되살리게 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무엇이 진짜 기억이고 무엇이 진정한 자아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74년 존 캠벨 상을 수상한 '내 눈물을 흘려라 내 경찰관이 말한다 Flow My Tears My Policeman Said'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텔레비전 스타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더이상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며 관련된 모든 문서가 소멸된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필립 K. 딕은 한걸음 더 나아가 진짜와 가짜가 혼동되는 세계를 그렸다. 그는 환상이 현실을 압도하고 가짜가 진짜를 대신하는 세상을 공포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게리 시니즈가 주연한 영화 <임포스터>의 원작 ‘사기꾼 로봇’도 바로 그런 소설이었다. 외계인의 침투를 방어할 무기 개발자 스펜서 올햄은 어느 날 스파이 로봇이라는 누명을 쓴다. 하지만 그는 사실 진짜 올햄을 살해하고 지구에 침투하기 위해 올햄인 척 가장한 로봇에 불과하다. 단편 ‘우리라구요!’에서는 지구에 귀환한 화성 탐사대원들이 가족과 친구로부터 냉대를 받는다. 그들은 수년 전 우주선 폭발로 사망한 진짜 탐사대원들로부터 복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서는 인간과 같은 생명을 원하는 안드로이드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영화 <스크리머스>의 원작인 ‘두 번째 변종’은 우주에서 대치하는 미국과 러시아의 병사들이 변종 기계인 복제인간에게 몰살당한다는 끔찍한 내용이다. '높은 성의 사나이'에는 일본인 갑부들이 미국 골동품을 수집한다는 설정이 나오지만, 여기서도 진품 대신 모조품이 판을 친다.

이제 세상은 거대한 매트릭스로 전락해 버린다. 사람들은 가상 현실을 현실로 착각한다. <블레이드 러너>의 첫 장면, 거대한 네온사인 광고판의 가공된 이미지가 실재를 대신하게 되는 건 딕이 가장 두려워한 미래의 모습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사이버펑크의 효시인 윌리엄 깁슨을 필립 K. 딕의 적자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게임이 현실을 대체하는 <엑시스텐즈>, 죽은 자가 가짜 기억을 이식받고 생명을 연장하는 <오픈 유어 아이즈>, 철저하게 통제된 방송국 세트를 진짜로 착각하는 사람의 이야기 <트루먼 쇼>는 모두 필립 K. 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영화인 셈이다.

마약의 나락에서 영적 체험까지

필립 K. 딕은 이런 세상을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해결책은 두 가지였다. 미치거나 마약을 하거나. 실제로 딕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마약에 손을 대기도 했다. 60년대 후반부터 그는 마약을 소재로 한 소설들을 써나갔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상흔 The Three Stigmata of Palmer Eldritch'(1965)에는 거대 기업의 통제를 받는 식민지 행성의 사람들이 환각을 경험하거나 영생을 가져다주는 약물을 복용하는 내용이 나온다. '스캐너 다클리 A Scanner Darkly'(1977)는 마약 중독자이면서 마약 단속관인 주인공의 정신분열적 심리 상태를 뒤쫓는 작품이다. 이런 소설은 물론 60년대 말 미국에서 유행했던 히피즘과 LSD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한때 딕은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상흔'이 LSD를 복용한 뒤 쓴 소설이 아니냐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딕은 한 인터뷰에서 “그건 LSD를 해보기도 전에 쓴 소설”이라고 부인했다. “LSD를 한 뒤 라틴어나 산스크리트어로 작품을 쓰긴 했다. 하지만 아무도 읽을 것 같지 않아서 포기했다.”

그가 마약에 의존하게 된 건 몇 번에 걸친 불행한 결혼생활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아내들은 작품을 쓸 때면 편집증과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폭압적인 성격으로 돌변하는 그를 견디지 못했다. 1970년 아내 낸시가 갑작스레 떠났을 때 딕은 “거리의 부랑자가 되어 죽음의 여행을 했다”고 고백했다. 1972년에는 밴쿠버에서 열린 과학소설 대회에 참석했다가 자살을 기도했다. 그리고 마약재활센터에 들어가 생활하면서 우울증을 치료했다. 60년대 매년 한두 편의 장편과 수십 편의 단편을 발표했던 딕은 당시 거의 제대로 된 작품을 쓰지 못했다. 1974년 딕은 신비로운 영적 체험을 했다고 발표했다. 신성한 힘을 가진 수호천사가 나타나 여성의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메시아적 예언을 한다는 것이었다. 딕은 죽을 때까지 위기가 닥쳐올 때면 이 수호천사가 나타나 자신을 인도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의 영성 체험은 미국 SF 문학계에서 두고두고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필립 K. 딕이 말년에 쓴 '발리스' 3부작은 바로 그의 신성한 경험을 소설에 투영한 작품이었다. '발리스 Valis'(1981), '신의 침입 The Divine Invasion'(1981), 그리고 '티모시 아처의 환생'(1983)으로 이루어진 이 3부작에서 딕은 종교의 근원을 탐색했다. '스캐너 다클리' 이후 4년 만에 발표한 '발리스'는 SF라기보다는 일반 문학작품과 같은 소설이었다. 끊임없는 환영에 시달리면서 신학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주인공은 바로 필립 K. 딕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선한 힘과 악의 제국이 전쟁을 벌이는 혼란스런 우주에서 주인공은 신의 존재를 찾으며 방황을 거듭한다. '발리스'의 연장선상에서 쓰인 '신의 침입'은 고통에 휩싸인 주인공들에게 신이 강림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와 그노시즘 등 온갖 종교의 교리를 뒤섞어 쓴 이 소설은 신에 대한 인간의 개념을 총망라한 작품이다. 유작인 '티모시 아처의 여행'은 한 현자가 아들과 아내의 자살로 믿음이 흔들린 뒤 예수의 정체성을 탐구하면서 변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평생을 미치광이처럼 살았던 필립 K. 딕은 결국 종교에 매달림으로써 영혼을 구원받으려 했던 것이다.

세상은 SF에 포획되고 있다

필립 K. 딕은 1974년의 한 인터뷰에서 “외롭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세상에는 나에게 우정을 줄 만한 사람이 충분하지 않다. 나는 글을 쓰고 캐릭터를 창조함으로써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작품을 통해 불멸성을 얻으려는 작가들과는 달랐다. 딕은 자신의 이름보다는 작품 속의 캐릭터가 더 오래 기억되기를 원했다. 과학소설은 그에게 일반적인 문학 작품보다 더 넓은 범위의 친구를 만들 수 있는 무대였다. 딕은 1975년에 발표한 ‘SF의 정의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하나의 우주에 국한해서 캐릭터를 창조하는 보통의 소설과는 달리 SF는 우주 자체를 하나의 캐릭터로 여긴다”고 썼다. 작가가 오직 마음속으로 생각해낸 관념에 기초해 쓰는 SF는 “소설의 최상위 형태”라는 것이다. 하지만 딕은 SF가 현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판타지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판타지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다루지만 SF는 언젠가 존재할 수도 있는 사건과 캐릭터를 구상해낸다는 것이다. 말년의 필립 K. 딕은 50년대 자신이 소설에서 묘사했던 미래 세계의 모습이 점차 현실화되는 것을 보며 놀라워 했다. 그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제 세상은 SF에 포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토로했다.

필립 K. 딕은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관계가 역전되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했다. 1972년 밴쿠버의 과학소설 대회에서 발표한 ‘안드로이드와 인간’이라는 연설문은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고민을 밀도 있게 담아내고 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이지만 비유적으로 안드로이드인 사람들이 있다”면서 “컴퓨터는 점점 인간처럼 되어가고 인간은 점점 비인간화된다”고 염려했다. “인간은 서로의 인간성을 강화함으로써 안드로이드에 대항할 커뮤니티를 만들어야 한다. 잘못된 것을 행하라고 강요받았을 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정의하는 것이다.” 인간성의 회복이란 곧 윤리와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뜻하는 셈이었다. 그는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연설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대로 우리 모두가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무덤이 아니다. 그건 저 너머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미래의 세계다.”


2002.07.27 / 필름2.0  한선희 기자  





필립 K.딕 - 마이너리티 리포트, 스티븐 스필버그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동상이몽의 미래학 / 한정수
 

소설 속의 존 앤더턴은 프리크라임(Pre-Crime) 시스템을 처음 고안한 범죄예방국장이다. 프리크라임(예비범죄) 시스템이란, 예지력을 지닌 세 명의 돌연변이로부터 장차 일어날 범죄에 관한 예언을 수집하여 사전에 처벌하는 최첨단 범죄예방 시스템이다. 어느날, 존 앤더턴은 자신이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리포트에 접한다. 세 종류의 예언이 모두 일치하지 않을 경우 소수의 의견은 폐기된다는 점에 착안, 존 앤더턴은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찾아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 한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고안해낸 시스템의 오류를 찾아나선 존 앤더턴은, 하지만 시스템의 무오류성을 증명하고 범죄예방국을 유지시키기 위해 예정된 살인을 저지른다.

영화 속의 존 앤더턴은 프리크라임 시스템의 기동체포반장이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유괴로 잃고난 후 남은 인생을 범죄예방에 바치고자 경찰에 투신한 사람이다. 범죄예방국에서의 존은 빈틈없고 유능한 파워 엘리트다. 하지만 아내마저 떠나버린 빈 집에 돌아오면 매일 밤 과거의 추억이 담긴 홀로그램과 마약에 의지하여 외로움을 달래다 홀로 잠이 든다. 어느날 존은 자신이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리포트에 접한다. 하루아침에 '잡는 자'에서 '잡히는 자'로 전락해버린 존은, 예지자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소유한 애거사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구하기 위해 위험한 모험을 감행한다. 우여곡절 끝에 권력을 탐하던 한 야심가의 음모가 밝혀지고, 모든 것은 시스템 이전의 평화롭고 정상적인 상황으로 돌아간다.

[A.I.]를 보면서 스탠리 큐브릭의 팬들이 스티븐 스필버그를 저주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보면서 필립 K. 딕의 팬들은 스필버그를 또 저주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큐브릭과 스필버그의 관계처럼, 필립 K. 딕과 스필버그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필립 K. 딕과 큐브릭은 언제나 비관하지만, 스필버그는 늘 낙관한다는 것. 스필버그가 [마이너리티 리포트] 프로젝트를 발표했을 때 필립의 팬들은 버럭 비명을 질렀다. 필립의 잿빛 묵시록을 폐기하고, 스필버그는 보나마나 아이를 등장시켜 모든 것을 화해시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필립 K. 딕의 팬들에게는 영화 제목부터가 불만이다. 영화 전개상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스필버그의 스토리 안에서 '마이너리티 리포트'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자의 문제적 명성에 섣부른 끈을 대려는 스필버그의 태도가 못마땅한 거다. 말장난 같긴 하지만, 게다가 스필버그의 영화는 전적으로 할리우드 주류(majority)의 작법을 따랐다는 점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평생을 피해망상과 광장공포와 약물중독과 자살충동에 시달렸던 불우한 천재에게나 어울리는 제목이지, 할리우드의 고뇌없는 미다스에게 어울리는 제목은 아니라는 거다.

소설과 영화의 불화는, 근본적으로 철학과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철없는 모더니스트들은 "다수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그에 대응하는 소수가 있게 마련"이라는 소설 속의 잠언만 신나게 인용해대지만, 정작 필립 K. 딕은 그 따위 순박한 민주주의론을 가르치고자 이 소설을 썼던 것은 아니다. 상수(常數 혹은 리얼리티)는 어디에도 없고 오로지 변수(變數)가 변수만을 끊임없이 전제하는 무한루프의 세계, 그 속에 던져진 피투적(被投的) 인간들의 덧없는 혼란과 공포가 그가 말하고 싶어했던 진짜 알맹이다. "세 예지자의 예언이 사실은 모두 마이너리티 리포트였던 셈"이고, 범죄예방국장이라는 특별한 위치에 있던 존은 자신에게 예정된 미래를 미리 알고 피하려고 하지만 결국 그 악무한(惡無限)의 고리에 의지적(!)으로 투항하고 만다. 시스템의 오류를 찾으려다 시스템의 무오류성을 증명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허망한 패러독스야말로 필립 K. 딕이 말하는 '인간 의지'의 정체다.

동일한 설정에서 출발한 스필버그의 메시지는, 기대했던대로 필립 K. 딕과는 정반대다. "미래를 알았으니 아직 기회는 있어요!"라고 거듭 반복하는 예지자의 절규는, 가족주의-영웅주의-인본주의를 삽입하라는 할리우드 공식 인서트(insert) 사인이다. 2054년의 테크노 누아르는 서막에 불과할 뿐, 스펙터클을 동반한 전형적인 갈등구조를 지나 마침내 비인간적인 시스템은 파괴되고, 영어되었던 순결한 영혼들은 풀려나며, 해체되었던 가족은 회복된다. 이 세계관 안에서는 '마이너리티 리포트' 뿐만 아니라 '메저리티 리포트'도 의미가 없다. 처음부터 스필버그의 핵심은 예언이나 숙명 따위가 아니라 고결하고 당당한 '인간 의지'였기 때문이다.

엉뚱하게도, 소설과 영화 사이의 절충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있다. 거대한 필연의 흐름 안에서 인간 의지의 몫을 스스로 알고 그에 따라 적극적으로 행동하라는 엥겔스의 '숙명론적 실천주의'는 언뜻 형용모순처럼 들리긴 하지만 스필버그처럼 주제넘지도, 필립처럼 무기력하지도 않다. 엥겔스에게 있어 "자유란 필연의 통찰"이다. 엥겔스의 SF에는 '자유'도 있고 '필연'도 있지만 용케 서로 반목하지 않는다. 하지만 21세기의 미래학 시장에는 엥겔스라는 빛바랜 이름이 설 자리가 없다.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미래형 디스토피아가 소비되는 이유는, 그것이 현재의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인간소외, 자연파괴, 기술과잉, 배금주의, 권력의지, 전쟁과 폭력 등이 종내 인간을 파멸시키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과 성찰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디스토피아형 SF'와 비판적 리얼리즘의 기능은 같다. 필립 K. 딕의 팬들이 열광하는 것은 주도면밀하게 형상화된 디스토피아의 실감(reality)과, 그로 인한 문명적 자학효과다.

반면에 스필버그의 팬들은 안도와 감동을 구매한다. 많은 문제가 있지만 인간의 의지와 도덕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세상은 여전히 살만하고 앞으로도 살만하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필버그가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선택했던 건, 필립 K. 딕의 '세계관'이 아니라 그가 구현해놓은 '세계'만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 낯설고도 탁월한 세계를 눈앞에 완벽하게 구현하여 감탄을 선사하고, 미래에도 여전히 희망이 살아있다는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 스필버그의 달란트다. 필립 K. 딕에게 디스토피아는 극복할 수 없는 결론이지만, 스필버그에게 디스토피아는 극복을 위한 서론일뿐이다.

이렇듯 소설과 영화의 불화는, 근본적으로 철학과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그 차이는 정작 시장 안에서 무의미할 수도 있다. 미래학의 판매곡선은 한 사회의 결핍과도 비례하지만 잉여와도 비례한다. 현실이 너무 힘들거나 반대로 현실이 너무 살만할 때 미래학은 창궐한다. 배고픈 사람들은 별 수 없이 꿈을 꾸고, 배 부른 사람들은 또 별 수 없이 꿈을 꾼다. 혁명과 판타지는 그래서 같은 과(科)다. 그렇게 유통되는 '미래'란 결국 '현재'를 겨냥하여 출시되는 위무상품 아닌가. 필립 K. 딕과 스필버그는 그래서 같은 과(科)가 아닌가.

필립 K. 딕에게 세상은 '결핍'이고 스필버그에게 세상은 '잉여'다. 필립의 팬들에게는 혁명이 필요하고 스필버그의 팬들에게는 판타지가 필요하다. 사실 두 명의 탁월한 예지자는 그동안 각자의 시장 안에서 평화롭지 않았던가. 공교롭게도 이번 영화 속에는 혁명과 판타지의 동상이몽이 있고, 결핍과 잉여의 주권쟁탈이 있다는 게 문제다. 그러나 현상(phenomenon) 앞에서 원조(noumenon)는 별무소용이다. 신당동과 상관없이 떡볶이는 맛있을 수 있다. 불세출의 엔터테인먼트 앞에서 논쟁은 열적다. 영화는 신나게 보고, 영화가 끝나면 부랴부랴 흩어지자. 엥겔스 없는 세상을 위한 분쟁조정안이다.


한정수 js_han@cultizen.co.kr
69년생. Cultizen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