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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의 여덟번째 영화이자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된 <해안선>은 이전과는 다른 형국에 놓여 있다. 내놓는 작품마다 극렬한 찬반 논쟁에 휩싸였던 김기덕이었지만, 지금 <해안선>을 옹호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당초 FILM2.0은 <해안선>에 관한 찬반 리뷰를 생각했었지만 그보다는 <해안선>에 드러난 김기덕의 문제를 직시하는 쪽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불씨를 당겨준 건 영국의 영화평론가이자 밴쿠버 영화제 프로그래머인 토니 레인즈다. 부산영화제에서 <해안선>을 본 그는 FILM2.0에 이 영화에 관한 자신의 ‘분노’를 기사화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더불어 두 명의 필자가 각각 김기덕의 문제를 탐문한다. 이 ‘쓴 소리’는 현재 활동중인 한 명의 한국 영화감독에 대한 직접적인 문제 제기이자 진지한 제안이다.

2002.12.09 / 필름2.0  편집부  






원시주의자의 계산된 매너리즘



김기덕의 문제 1

2002.12.09 / 토니 레인즈(영화평론가)  

어떤 관습적인 기준을 들이댄다 해도, 김기덕의 새 영화 <해안선>은 거의 눈뜨고 볼 수가 없다. 그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엄청나게 상징적인 플롯에 이차원적이고 만화 같은 캐릭터를 끼워 넣고 폭력을 드라마로 오해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원시주의는 전작들에선 때로 흥미로운 결과를 낳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인물의 범위가 너무 작고, 플롯은 너무 반복적이며, 추정할 수 있는 정치적 ‘메시지’도 아주 끝까지 나이브하다. 김기덕 감독이 처음으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나쁜 남자>의 후속작으로 내놓은 <해안선>은 일종의 재앙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나는 김기덕의 2001년 작인 <수취인불명>이 한국에서 고작 12,000장의 입장권을 팔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해안선>은 그보다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스럽다.

2001년 초 <수취인불명>이 개봉되기 직전, FILM2.0의 김영진 편집위원은 제작사 LJ필름 사무실에서 나와 함께 김기덕 감독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이 회사는 언론 보도 자료와 영화의 자막 작업을 도와 달라며 나를 서울로 초청했었다. 도착하고 난 뒤에야 나는 제작사가 영화 속에서 지나치게 우스꽝스럽고 신파적인 장면들을 잘라내도록 김기덕 감독을 설득해주기를 바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물론 이 부탁은 정중히 거절했다). 이 공동 인터뷰는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나는 김기덕의 초기 작품에서 흥미롭고 때로는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해왔던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김기덕은 당시 시각적 상상력 때문에 칭찬받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소연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작품에 담긴 의미와 ‘메시지’에 관객들이 동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대다수 영화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감독에게 강의를 들으러 영화를 보러 가지는 않기 때문에, 그의 영화의 교훈적인 차원에 대한 김기덕 감독의 주장은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다.

부산영화제에서 <해안선>을 보는 동안 나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 김기덕에게 화가 났으며, 그가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우울했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김기덕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 적당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내가 이렇게 멋대로 말하는 것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것이 그의 최근작을 끝까지 봐야만 했던 나쁜 경험을 떨쳐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처음부터 김기덕의 영화들은 범죄자 아웃사이더에 초점을 맞춰왔다.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사람들(그들은 거의 항상 남자들이며, 대부분 조재현이 연기한다), 억압하는 자에 대항해 광포하게 주먹을 휘두르는 모호한 반역자가 바로 그들이다. 김기덕이 처음 두 편의 장편영화 <악어>와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만들었던 1996년~1997년 즈음에는 그 자신도 아웃사이더였다. 충무로나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아무런 연줄도 없으며, 자신의 영화를 보여주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분투하는 외로운 독립영화 감독이었던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김기덕 자신의 내적 분노와 절망을 표현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1998년 이후 김기덕은 기존의 체제에 편입되었다. 그는 세번째 장편 <파란 대문>의 시나리오를 쓰고 홍보하는 데 있어 처음으로 정부의 지원금을 받았으며, 그때 이후 그가 만든 모든 영화는 대규모 국제 영화제에 공식적인 한국 출품작으로서 경쟁 부문에 초청돼왔다. 이러한 성공이 함축하는 바에 대해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그것은 (장선우나 홍상수나 이창동이나 박광수가 아니라) 김기덕이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국제적인 목소리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좀 혼란스럽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지적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김기덕이 그 어떤 의미에서도 더이상 ‘아웃사이더’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는 비교적 아낌없는 제작사의 지원을 즐기고 있으며, 납세자들의 돈 역시 그가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제에 참가하는 데 쏟아지고 있다. 김기덕은 언더그라운드 클럽의 소수 관객에게 고통과 분노에서 우러나오는 고함을 내지르던 펑크 록 뮤지션이 갑자기 주류 레코드 레이블과 계약을 맺는 것과 정확히 같은 지점에 놓여 있다. 과연 그는 이처럼 새롭고 더욱 편안한 환경에서 그의 ‘비전’을 유지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한 김기덕의 해결 방법은 그의 작품에서 어떠한 진보나 발전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의 영화들은 여전히 사회에 대한 분노의 비명이다. 그는 여전히 합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으며 유일한 의사 소통 수단은 폭력뿐인 캐릭터를 다룬다. 그는 여전히 여성을 오로지 성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온전한 처녀든, 오가는 모든 남자들에게 쓸모 있는 정신병을 앓는 매춘부든 마찬가지다. 그는 여전히 눈길을 던지는 모든 곳에서 야만성과 잔인함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유일한 차이점은 김기덕 감독이 이제 디자이너의 옷을 입고 베를린이나 베니스의 최고급 호텔에 머문다는 사실뿐이다.

국제 영화제의 집행위원장들이 왜 계속해서 <섬> <수취인불명> <나쁜 남자> 같은 영화들을 경쟁 부문에 초청했는지를 묻는 것은 온당하다.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고도의 냉소주의를 동반한다. <섬>을 베니스로 초청한 사람은 전직 토리노 영 시네마 페스티벌 집행위원장인 알베르토 바르베라였다. 그는 김기덕이 스크린 위에서 살아 있는 동물들을 고문하고 낚싯바늘 뭉치를 사람의 몸에 뚫려 있는 구멍 속으로 집어넣기 전에는 그의 영화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섬>을 베니스로 초청하는 것은 영화제에서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값싸고 편의적인 방법이었다. 한국영화의 지위나 예술적 성취를 드러내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그가 바라던 대로 됐다. 다수의 관객들이 충격을 받아서 기절하거나 구토를 했던 것이다.

다른 영화제 관계자들(올해 <나쁜 남자>를 베를린으로 초청한 디터 코슬릭 같은 사람)도 부분적으로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의 이벤트에서 같은 종류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자 했기 때문에 김기덕의 영화를 채택했다. 그러나 김기덕 영화들에 대한 열광의 물결-당연히 <해안선>으로 요란하게 끝나버릴-은 또한 오늘날 영화계에서 그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특이함을 반영하기도 한다. 영국의 감독 켄 러셀이 적극적인 영화 연출을 그만둔 뒤, 김기덕은 세계 영화계에서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유일하게 제멋대로인 ‘원시인’이라 할 만하다. 어떤 감독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구식의 신파조 플롯을 사용하고, 어떤 감독들은 캐릭터를 오직 동물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며, 또 어떤 감독들은 관객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절박한 도덕적 정치적 교훈이 있다고 상상하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만드는 매 영화마다 이 모든 특징을 결합해내는 감독은 아무도 없다. 이것은 한국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사람들이 김기덕의 영화를 낯설고 이상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편의적으로 낯설음을 예술적 성취와 혼동하기도 한다.

물론 김기덕의 영화에도 예술적 성취는 있다. 비록 그 성취가 예술적 정체성에 통합되는 부분이라기보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그의 폭력적이고 황폐한 시선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모르겠지만, 김기덕의 뛰어난 솜씨는 시각적인 것에 있다. 좋든 싫든 간에, 그는 이미지를 통해 사고한다. 그의 영화는 독창적이면서 강렬한 이미지로 가득하며, 그가 시각적인 클리셰에 의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때때로 이러한 강렬한 이미지들은 김기덕의 지적인 접근 방법이 평범하고 미숙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히 드러낸다. 그러나 아주 가끔씩 그 이미지들은 그것들의 맥락의 한계를 초월해 헛소리마저 설득력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악어>의 오프닝과 클로징 시퀀스, 그리고 <야생동물 보호구역>의 피갈 광장의 핍 쇼에서 보여준 비범한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이 장면에서 스트리퍼는 거의 무너져 내린 채 고통스럽게 흐느끼고 치명적으로 상처 입은 조재현은 훔친 로댕 조각상에 대고 자위 행위를 하며, 사운드트랙에는 커다란 아라비아 음악 소리가 구슬피 흘러나온다. 그런 장면에서 김기덕은 최소한 잠시나마 김기영의 예술적 후계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어떤 자발성과 솔직함으로 정의되는 그의 초기작들에서 그런 장면들이 나타났던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후의 영화에서, 강렬한 이미지들(자궁 속에 넣은 낚싯바늘, 진흙탕에 머리부터 쑤셔 박힌 시체 등)은 더욱 명백하게 계산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또한 관객에게 충격을 주고자 하는 사춘기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만일 십대 영화감독의 작품이라면 이런 것도 이해할 만하지만, (나이를 공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김기덕은 분명 십대가 아니다.

주목할 만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해안선>을 개막작으로 선택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대만의 ‘새로운 영화’ 회고전 프로그램에는 김기덕 영화의 거의 모든 디테일을 앞서 보여준 한 작품이 포함돼 있다. 거의 10년 전에 만들어진 황 밍추안의 <보도>가 바로 그 영화다. <보도>는 대만의 해안 방위에 대해서, 북쪽 공산주의자 이웃들과의 전쟁이 얼마나 하찮은가에 대해서, 군대 복무의 정신적 기형 측면에 대해서 그리고 태초의 광기와 상속된 죄악을 다루는 영화다. 그러나 김기덕의 영화가 조악하고 반복적이며 눈을 자극할 만큼 정교하지도 못한 반면, 황 밍추안의 영화는 성적 폭력과 군사적 폭력 사이에 존재하는 진정으로 도발적인 평행 관계를 이끌어내며, ‘적’이란 이드로부터 나타나는 유령이라는 매우 시사적인(그리고 신중하게도 일부러 결말을 맺지 않은) 견해를 제시한다. 물론 김기덕이 황 밍추안의 영화를 본 적은 없다. 모든 ‘원시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김기덕은 자신의 작품을 제외한 다른 작품에 지식이나 관심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번 부산영화제 프로그램이 이 두 영화를 나란히 상영하게 된 것은 김기덕 영화의 약점을 매우 가혹하게 밝혀낸 셈이다.
번역 한선희 기자









값싼 화해를 거부하는 값싼 충격



김기덕의 문제 2

2002.12.09 / 김영진 편집위원  

<해안선>이 왜 불쾌감을 줬는지는 삼척동자도 말할 수 있다. 그의 영화가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은 이제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익숙한 것이다. 고립된 공간에서 폭력이 펼쳐지고 누구도 그 폭력의 순환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폭력의 희생자는 주로 여성이고 남자들도 폭력을 가하면서 스스로 망가져간다. 나중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 없이 모두 파멸한다. (이게 페미니스트들의 권력 이론, 김기덕의 영화가 남성의 시선으로 강요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란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이다.) 김기덕의 영화가 갈수록 곤란한 것은 그의 영화는 너무 단순한데 그의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점점 더 복잡해지려 하기 때문이다. 김기덕의 이 파멸의 스펙터클은 그러나 단순하다. 궁지에 몰린 쥐들이 고양이를 무는 것처럼, 김기덕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고양이와 쥐의 위치를 바꿔가며 서로 공격한다. 현실보다 약간 더 센 그 허구를 묘사하며 김기덕은 그 허구를 현실에 대한 가장 정직한 비유라고 주장한다.

<해안선>에선 그 비유가 훨씬 단순해졌으며 나아가 훨씬 자신만만해졌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 나오는 한반도의 분단 상황에 관한 (촌스럽기 그지없는) 화면 자막은 순진한 것이 아니라 자신감의 표현이다. 해안선 초소 경계선에서 벌어진 민간인 사살의 참극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나가는 불행을 담은 <해안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인물들의 대립과 분노와 증오만을 담는다. 장동건이 연기하는 강상병과 그가 쏴 죽인 민간인 남자의 애인 미영은 미친다. 그들을 에워싼 사람들도 서서히 집단적으로 미치기 시작한다. 그 광증을 제공한 것은 제목 그대로 해안선에 그어진 경계 때문이다. 철책을 넘는 순간 사람들은 미치기 시작한다. 이 인위적인 경계가 그어놓은 예정된 비극에선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해안선>은 군인과 민간인, 장교와 사병, 고참과 졸병 사이의 다양한 상호 대립과 공격의 양상을 줄곧 전시하고 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남자 군인(강상병)과 민간인 여성(미영) 사이에 오가는 희미한 동질감이지만, 끝내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시선의 교환조차도 일어나지 않는다.

김기덕의 영화는 영화 속 잔혹한 상황을 미학적으로 꾸며내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영화에 나오는 폭력과 성은 뜻밖에도 아주 짧게 스치듯 지나간다. 폭력을 통해 현실의 표층을 풍부하게 꾸미려는 장식에의 욕구가 그의 영화에는 없다. 김기덕은 이 세계의 잔혹함을 존재론적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상식으로, 또는 휴머니즘의 필터로 걸러내진 세계의 표층 이면에 실제로 이런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변명이나 부연 설명이 없으며 그냥 그대로 제시된다. 김기덕에게 사상이 있다고 하면 그건 이 존재하는 잔혹한 세상을 목격하고 우리의 감각을 흥분시키려는, 발견자인 척하는 자의 사상이다. 보라, 이것이 세상의 참모습이라는 것이다. 김기덕의 영화는 최소한의 상식의 커트라인으로 걸러진 세상의 모습보다는 훨씬 더 넓은 세계의 맥락을 제안한다. 감히 그는 누구의 용서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승인받겠다는 태도도 없이 그의 영화 속 등장인물을 광인과 정상인의 경계에서 굴러 떨어뜨리고 우리에게 그것이 우리 현실 속의 인간의 모습임을 인정하라고 다그친다. 등장인물의 주요 행위가 돌이킬 수 없이 극단적 감정 상태로 치닫는 이런 영화는 결국 애초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건너기 힘든 다른 세계로 넘어가 관객에게 충격을 주면서 끝나든지 택일해야 한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해답은 늘 후자였다. 관객을 향해 적대적인 제스처를 보이는 그의 영화는 애초부터 정상적인 삶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김기덕이 새로운 현대적 영화의 발명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과문한 김기덕은 그의 무뚝뚝한 잔혹 영화의 정신이 어떤 면에서는 현대 영화에선 충분히 실험된 것임을 모르고 있다. 그의 영화는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영화지만, 그래서 대다수 현대 영화와 마찬가지로 인물에 대한 자세한 심리적 묘사는 필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대다수 현대 영화가 잔인한 세계에 던져진 인물을 그때부터 탐구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자신이 정해 놓은 카테고리 안의 인간에게 폭력의 강도만을 더 얹어놓는 악습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건 본말이 전도된 세계관이다. <해안선>의 강상병과 미영은 각자가 서로 다른 총구의 동일한 표적이라는 걸 알지 못한다. 그들은 미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쳐가는 것이 아니라 미쳐 있다. 강상병이 부르는 '과거는 흘러갔다'라는 노래는 실제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그는 본질적으로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김기덕은 미쳐가는 게 아니라 실은 미쳐 있었던 그들에게서 왜 그들이 미쳐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탐구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미쳐 있는 인간의 모습을 더 충격적으로 전시하는 데 골몰한다. 자동기계인형처럼 설정된 이런 인간의 모습을 통해 김기덕은 분단의 역사적 상흔을 잘 건드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친 사람이 휘두르는 칼을 우리는 두려워한다. 우리는 그의 행위에 놀라고 충격을 받고 피한다. 그러나 그건 그냥 두려움일 뿐이다.

김기덕은 그 예정된 비극의 틀 안에서 휴머니즘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시험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가 영화 속에서 그린 인간은 인간의 가장 광포한 본성만 간직하고 있는 야수에 가까운 인간이다. 그의 영화는 수 많은 알리바이를 써가며 캐릭터를 설명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전통적인 플롯 작법을 벗어나 하나의 행동, 제스처로 인간을 묘사한다. 그의 연출은 실제로 있음직한 동기로 인물들을 발견해 가는 것이 영화라는 고정 관념을 거부한다. 그는 심리학을 넘어서는 영화를 만들며 차근차근 복선을 깔고 대사와 심리 묘사를 통해 캐릭터를 설명하는 작법을 무시한다. 그의 영화는 그걸 이미지의 파편들을 통해 제시할 뿐이다. 문제는 <해안선>의 등장인물들이 거의 다 미쳐 있다는 것이다. 그의 대다수 영화가 그렇지만 느닷없이 불쑥 제시되는 김기덕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비정상적 행동은 박진성에 기초한 리얼리즘의 책략을 비웃는 척하면서 곧바로 인물이 뿜어내는 강렬한 감정에 초점을 맞춘 화면 속에 자리를 꿰차고 앉는다.

<해안선>은 광인에 가까운 인간들이 벌이는 폭력과 증오의 세계를 가장 감정이 집약된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 오로지 감정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구성해 놓은 김기덕의 영화에서 등장인물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처절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군인들에게 강제로 낙태를 당한 여주인공 미영이 울부짖으며 집으로 돌아와 횟집 수족관에 들어가 앉을 때 수족관 가득히 퍼지는 핏물의 자국은, 결국 김기덕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이야기를 꾸민 것의 총화이다. 그 이미지를 통해 관객을 자극하는 것이 그의 영화의 목표이다. 강상병의 충혈된 눈빛과 헐떡거리는 개처럼 쏘아보는 표정은 물론이고 영화 내내 실없는 웃음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미친 여인의 흐트러진 자태가 주는 파멸의 상흔을 되풀이하는 것도 그의 영화의 목표이다.

그러나 이 변칙 쇼크 쇼에는 그동안 김기덕의 영화에 희미하게 배어 있었던 가학과 자학을 왔다갔다하는 미묘한 진동이 사라지고 없다. <악어>, <야생동물보호구역>, <파란 대문>, <섬>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는 이 세계에 대해 느끼는 분노의 정서에 기초해 가장 잔혹한 풍경을 뽑아내는 순진하고 낯설고 불쾌한 영화였다. <수취인불명>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김기덕을 너무 무시한 것은 아닌가라는 자책에 빠졌다. <나쁜 남자>의 한기를 연기한 조재현의 표정과 몸짓에서 그의 영화가 표면적으로 내뿜는 가학은 사실은 이 세상을 긍정하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건네는 지독한 부정의 몸짓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영화의 주인공들은 어쨌거나 안전한 상식의 틀 안에서 사물을 보는 우리에게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그의 영화가 낯설었던 것은 그의 영화 속 존재들이 상식의 바깥에서 우리를 거꾸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안선>은 너무 나갔다. 그의 영화의 동어반복 패턴은 너무나 명확하다. 김기덕의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지 않지만 자신의 영화 세계를 더욱더 단순하게 모방하고 있다. 그의 영화 속 세계는 그의 상상력으로 안전하게 구획지어져 있다. 미친 채로 돌아다니며 남자들에게 몸을 대주는 여주인공의 자학과 닥치는 대로 동료를 향해 총질하고 급기야 명동 복판에서 총검술을 하는 강상병의 몸짓은 이 세계의 잔인함을 강제로 전시하려는 구경거리일 뿐이다. 김기덕의 영화에는 과정이 아닌 결과, 제1의 결과, 제2의 결과, 제3의 결과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처음과 끝을 동어반복으로 잇고 있다. 본말이 전도된 도착적인 세계관, 곧 세계가 이미 충분히 잔인한 것이라는 생각은 세계를 설명하고 탐구할 기본적인 예술가의 태도를 망각하고 있다. 값싼 화해와 마찬가지로 값싼 거부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치기일 뿐이다. 예술가의 치기를 존중해야하지 않느냐고? 그러기엔 이제 김기덕은 너무 많은 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빨리 찍기 혹은 대충 찍기



김기덕의 문제 3

2002.12.09 / 이지훈 기자  

1년에 세 편씩이나 소화해내는(올 초 <나쁜 남자>를 개봉시켰고 이제 <해안선>이 개봉할 것이며 이미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찍고 있는) 부지런한 감독 김기덕이지만 그의 영화적 야욕은 찍는 속도만큼 부지런한 것 같지 않다. <해안선>은 그가 얼마나 게을러졌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며, 그동안 일궈온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일반 관객은 물론 그를 싫어하는 비평가들보다도 더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영화다. 굳이 편을 가르자면 그동안 나는 김기덕의 영화를 옹호하는 축에 속했지만 <해안선>으로 그를 못마땅해 하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나와 같은 자들의 변절보다 더 심하게 김기덕은 자기 자신을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어 반복에 의한 김기덕의 빛바랜 야망까지 갈 것도 없이, 단적으로 말해 <해안선>은 “강상병이 민간인을 오인 사살한 뒤 미쳐 부대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덩달아 그가 죽인 남자의 애인도 미쳐 돌아다닌다”는 최초의 아이디어로부터 단 한 줄의 시나리오도 쓰지 않은 영화다. 강상병이 민간인 접근 금지 구역에 들어온 남녀를 향해 총탄을 발사하기 전까지 영화는 거기가 그런 곳이며, 병사들은 잔뜩 긴장해 있고, 그 감정엔 주변 마을 민간인들과의 적대감도 희미하게 포함돼 있다는 설정을 보여주는 데 할애된다. 하지만 강상병이 남자를 쏜 직후 난감해 하는 표정을 본 뒤로 관객은 더이상의 무엇이 나올 거란 기대감으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시간을 재지 않아 정확히 몇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장동건이 그때 지은 바로 그 표정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몇 번이고 리와인드되기 때문이다(김기덕의 영화는 언제나 무자비한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의 짧은 도입부를 다른 감독들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이어 붙이는데, 그동안 김기덕의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지 못했던 그 부분은 <해안선>에선 가장 충실하게 연출된 부분으로 기억된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납득할 만한 드라마를 찾는 건 애초부터 그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것... 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김기덕의 영화는 천박하게 굴곡이 센 이야기에서 동력을 얻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해안선>에서 김기덕은 오인 사살 이후로 더이상 장면들을 이어붙이는 걸 매우 귀찮아한다. 아마도 그는 빨리 찍기라는 자신의 스타일을 대충 찍기로 오해했던 것 같다.

똑같은 장동건의 표정에 똑같은 음악만 틀어대는 김기덕의 이 폭력적인 신작은 존재하지 않은 이야기들의 자리에 본인의 특징이었던 이미지들을 채워 넣는다. 그런데 여기서 심각한 진짜 오해가 시작된다. 김기덕의 전작들은 끔찍한 잔혹 이미지들을 포함해 인상적인 상징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것들은 주로 이야기에 덧살을 대며 훌륭하게 함축적 기능을 수행하거나 종종 이야기와는 별개로 그의 순진한 상상력을 증명하는 데 사용되곤 했다. 덕분에 김기덕의 영화들은 경찰에 쫓기는 사내가 고립된 저수지로 잠입해 낚시터에서 몸 파는 여인의 성기에 낚싯바늘을 찔러 넣는다거나, 여대생이 뜻하지 않게 창녀로 전락하고도 자신을 파멸시킨 남자를 위해 기꺼이 남은 생을 산다는 이야기에서 현실성 유무로 논쟁을 벌여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었다. 그의 영화들은 특별한 장면 구성으로 인해 신화적인 지위를 얻었다. 그것은 김기덕의 이야기들이 다만 역사적 맥락과 세습된 폭력의 닫힌 고리에서 평가될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바탕에서 매우 포괄적인 소통과 동력의 원천으로 읽혀야 한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 신화적이라는 말을 머리에 꽃을 단 여자가 하늘하늘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 몽환적인 공간에서 그보다 더 몽환적인 표정으로 춤추는 것으로 이해할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바로 김기덕이다. <해안선>에서 김기덕은 그동안 상징적 도구로 사용해 왔던 이미지들을 무턱대고 받아들여야 하는 영화의 목적으로 간편하게 바꿔치기 함으로써 자신의 작품 세계를 들어 엎어버린다. 갯벌에 꽂힌 나무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던 여인이 자기를 강간한 군인들을 골라내기 위해 우아한 자태로 그들의 뺨을 쓰다듬는 모습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미친 여인 미영의 캐릭터는 그가 애인의 죽음으로 미쳤다는 사실과 그 죽음이 분단 한반도의 알레고리라는 사실, 한마디로 관객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 그 이상의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김기덕은 서두르고 서투른 솜씨로 자기 영화의 껍데기만 내다 걸고 있다. <해안선>은 관객의 시선을 마취시키는 몇 개의 특별한(척하는) 장면들만으로 영화가 완성될 수 있다는 김기덕의 오해이자 자기 영화에 대한 기억상실이다.
부대원들에 의해 강제로 아이를 낙태시킨 미영이 오빠의 횟집 수조 안에 들어가 핏물 속에 잠기는 장면은 매우 서글프다. <해안선>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이 장면은 이야기를 구성할 의지가 없는 김기덕이, 그렇다면 더이상 이 방향을 선택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이야기의 밑천은 없고 포르노그래피나 고어로 갈 수 없는 이미지는 극한점에 도달한는 진퇴양난의 지경에서 만일 김기덕이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작가적 성취를 보였다면 <해안선>은 유례 없는 걸작으로 남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김기덕 영화는 여성을 가학하는 남성들의 폭력을 통해 뭔가를 보여줘 왔지만 <해안선>이 담고 있는 기괴한 ‘군대주의’는 그의 폭력 상상이 지나친 마초 성향에 근거할 뿐이라는 몇몇 비평가들의 의심을 사실로 만들어버린다. 장동건이 부르는 노랫말 속의 흘러간 과거란 어느 과거를 말하는 것인가. 처음엔 이 과거가 분단이 이루어지기 전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웃통 벗고 즐겁게 뛰노는 순수한 군인들의 세계로 이동한다. 여기서 또 김기덕은 자신을 오해한다. 어쩌면 이것은 오해가 아니라 고백일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해안선>은 동떨어진 공간에서 실컷 총싸움 놀이를 즐기는 어린 소년들의 마초적 환상 그 이상으로 뻗지 못함으로써 폭력에 관한 김기덕의 복합적이고 보람된 담론화 과정들을 깡그리 묵살해 버린다. 이 지점에서 나와 같은 변절자들은 예전의 말 많던 시절에 대해 수치심을 느껴야 마땅하다.

무엇보다 놀랍고 당혹스러운 것은 김기덕이 장르의 법칙들에 호기심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애인을 잃어버린 여인의 슬픔과 변절한 애인으로 인한 강상병의 방황에서 멜로를 실험하고 있다고 보는 건 억측이라고 치자. 하지만 야심한 해변에서 동료들을 교란시키는 강상병의 이러저러한 모습엔 미스터리 스릴러와 공포의 관성을 이용해 모자란 이야기들을 벌충하려는 즉흥적이고 섣부른 욕심이 묻어 있다. 해안 경비 부대에서 벌어진 해프닝들엔 자기 영화가 관객들을 웃길 수도 있다는 김기덕의 미소가 보인다. 이로 인해 김기덕은 두 가지를 잃어버리게 되는데, 하나는 장르의 공식화된 감정 조율법에 기댄 탓에 자기 영화가 관객과 대화하던 창구를 완전히 닫아버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구사하고 있는 장르의 무지하고 무례한 표현술 때문에 실은 이 영화 전체가 하나의 코미디로 보인다는 것이다. 메이저 배우 장동건이 출연한 것이 김기덕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것일까.

김기덕은 과거 그가 세상을 향해 내질렀던 용감무쌍하고 과격하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내버렸지만 그 대신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가 쌓아온 오물 투성이의 성역은 '에곤 실레'와 '플레이보이'가 겹쳐진 책상 서랍 속의 동화를 창조해 왔지만 이제 그 서랍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영화의 다른 영역들에 대한 위험천만하고 앙상한 호기심과 빨리 찍느라 쉽게 지쳐버린 감독의 피곤한 기색뿐이다. <해안선>은 커다란 술병 속에 남은 한 잔 거리도 채 안 되는 술처럼 쓰고 개운치 않다. 술자리에 앉은 사람에겐 새로 한 병을 시키고 밤을 이어갈 용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