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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나쁜 남자> 논쟁 그 마지막..

가/김기덕 2003. 1. 15. 06:26 Posted by 로드365



 어찌됐건 영화감독 김기덕을 만났다. 나는 침묵을 서약한 그에게 마음놓고 시비를 걸었고(<씨네21> 335호), 그런데 갑자기 앞으로 아무와도 인터뷰하지 않겠다는 그가 질문에 대답을 하겠다고 알려왔다. 갑자기 나는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그와의 만남은 좀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내 멋대로 시간을 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의 홈페이지를 뒤지는 일이었고(거기에는 김기덕 감독에 대한 나의 평에 대한 악평도 실려 있다), 그 다음에는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내가 찾아낸 인터뷰는 21개였고, <나쁜 남자>에 대한 평을 37편 읽었다. 그러고 난 다음 영화애호가들 사이에서 쓰인 지지자들과 반대진영의 글 184편을 프린트했다. 그걸 우선 무작정 읽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김기덕(의 영화들)에 관한 글들은 그를 옹호하건 아니면 그 반대로 비난하건 항상 비유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는 동물로 불렸으며, 괴물 취급을 당하고 있었고, 정신병에 걸린 환자처럼 대우받았다. 그러니까 김기덕(의 영화들)을 말하기 위해서 갑자기 의학이 동원되었다. 여기에 성-권력의 담론이 그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를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자꾸만 지지하면서도 무언가 그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의심을 항상 말미에 붙여놓았다.



 (문학 평을 쓰는) 정과리씨가 보기에는 김기덕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소란 속에서 정작 텍스트에 대해 지키는 침묵이 의아하게 보였다(<씨네21> 336호). 그건 이유가 있다. 미안하게도 김기덕(의 영화들)은 형식(-구조)주의 비평으로는 붙들리지 않았다. 그는 거의 본능적일 정도로 우리 시대의 문화적인 담론들을 닥치는 대로 건드렸다. 그러나 놀라울 만큼 아슬아슬한 순간에 도식을 빠져나갔으며, 그는 숭고함과 저속함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는 영화의 약속을 대부분 지키지 않았거나, 아니면 자기 방식대로 지켰다. 이 말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김기덕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기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김기덕이 우리 시대에 소중한 까닭은 그가 누구보다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사드에 대해서 푸코가 한 말. 우리는 괴물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같은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기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권력의 편으로부터 우리를 저항의 입장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것은 사회의 모순이지, 그 모순 속에서 태어난 예술작품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목표를 바꿔쳐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 김기덕을 방어하거나, 또는 그저 그를 이해하자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김기덕을 빌려 무엇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지를 물어보면서 그 안에서 좀더 근본적인 것과 싸워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 대화는 시작이다.



 정성일/ 영화평론가 hermes59@hanmai.net



상투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김기덕 영화는 대중적으로는 힘들었잖아요. 조재현씨가 나온 <피아노> 덕분인지, 아니면 드디어 김기덕 영화가 대중성을 얻은 것인지, 그건 좀더 기다려봐야겠지만, 관객의 호응에 대해서는 축하를 드립니다. 기분이 어떠세요?



 기분은, 별로 변화가 없어요. 지금까지 56만명이래요, 그저께까지. (이 인터뷰는 2002년 1월30일 오후에 진행되었다) 마무리되면 60만명은 될 거예요. 그중에서 40만명은 내 영화에 적응하지 않으려는 관객일 것이고, 그중의 삼분의 일, 20만명 정도는 앞으로도 내 영화에 적응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시장은 커졌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 20만명을 얻기 위한 재료로 조재현이 물론 쓰이긴 했지만, 김기덕이라는 이름만으로 기웃거릴 만한 사람이 20만명은 생긴 거죠. 하지만 삼분의 이, 그러니까 40만명은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김기덕 영화에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돼버린지도 모르죠. 그래서 기분은 별 변화가 없어요.





유곽의 삶, 여느 곳의 일상과 다름 없다



여기 용산 유곽의 거리에서 인터뷰를 하자는 제안은 제가 했습니다. <나쁜 남자>의 무대이기도 했던 유곽이라는 장소에 대해서 당신이 갖는 인상은 어떤 것인가요?



 여긴 어느 곳의 삶이나 다름없어요. 유곽의 삶이라는 것이 낮과 밤을 똑같이 만들고, 저는 그 사람들의 일을 삶이라 보고 있는 것이거든요. 물론 저도 살면서 그곳에 가 있었을 때도 있었을 것이고, 또 앞으로도 이 추운 세상을 살면서 어떤 것을 위로받기 위해 그곳에 놓여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공간에서 캐릭터를 꺼내온 것은, 그들에게야말로 누구보다 큰 삶의 떨림이 있을 것이다라는 것. 저는 내 영화에 그걸 빌리는 거죠. 재료인 거죠. 재료일 뿐이라는 의미에서 재료가 아니라.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매춘하는 것에 대해 일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일이라고 생각하나요?



 저도 예전에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마치 나에게 놓여져 있는 삶이라고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들어가 아무 부끄럼 없이 일했거든요. 그랬던 때하고 지금하고는 사실 다른 거는 있어요. 갈등의 원인을 덮여놓고 그것을 인생이라고 치면 성철 스님 말씀처럼 산은 산이지 않을까. 그냥 놓여 있는 게 아닐까. 그 사람의 노력여부에 상관없이 놓여 있다면 그건 삶이지 않을까. 삶이면 일이지 않을까. 어떤 사람은 자기가 저렇게 사니까 저렇게 살지, 이런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이미 일상이라면 삶이고 일이지 않을까, 라는 것입니다. (정말 정색을 하고) 오늘은 <나쁜 남자> 이야기는 되도록 안 했으면 좋겠는데, 왜냐하면 ‘왜 그렇게 됐느냐, 김기덕의 원래 삶은 이런 것이지 않았느냐’라는 물음으로 자꾸 되돌아오거든요.



<나쁜 남자>의 배경이 유곽이 되니까 당신 영화를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 특히 반대진영에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영화를 돌아보면 70년대에는 유신정권 긴급조치 직후에 김호선 감독이 <영자의 전성시대>를, 80년대에는 광주 이후 이장호 감독이 <어둠의 자식들>을, 90년대에는 3당합당으로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자 임권택 감독이 <창>을, 유곽을 배경으로 찍었습니다. 유곽을 배경으로 한다는 건 한국사회에는 순결이데올로기가 있기 때문에 특별한 알레고리를 만들어냅니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유곽에 간다는 것은 가장 비참한 어떤 삶으로 보죠. 한국사회 안에 유곽이 있다기보다 한국사회가 있고, 그리고 유곽이 있다는 식인데.



 그냥 한마디로 폐차장으로 보는 경향이 있죠.



더 나아가서 한국영화는 이제까지 유곽을 자기 시대의 상징으로 다루었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이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2001년인데) 21세기에 막 들어선 한국사회를, 김기덕 감독이 유곽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대한 감독 자신의 어떤 입장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그냥 자연발생적이다, 김기덕 영화의 이야기나 배경이나 캐릭터는 자연발생적이다, 라고 받아들여지길 바랍니다.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이 사회에 자꾸 주어지는 편견에서 비롯된 분리된 사회제도에 대한 물음이기도 해요. 제가 비제도권 출신인 건 다 아는 사실이고, 그러나 저는 제도권, 비제도권이라는 분리된 생각을 되도록 희석시키고 살려고 하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이 그런 게 기준이 돼요. 사실 김기덕이라는 사람을 보는 시선도 그래요. 제 학력과 살아온 배경과 이런 걸 밝혔는데, 영화가 아니라 그게 거꾸로 저한테 그런 것으로 돌아오기도 해요. 그들은 그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들은 중심에 있기 때문에. 이런 공간이야말로 중심 밖에 있는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이죠. 저는 영화를 통해서, 이들이 어떤 폐차장으로서의 공간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기본 개념 속에서 그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던 거예요. <악어>가 그랬고, 그런데 100% 그런 것을 다루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공간을 다루고 있는 것이지. 유곽이 나온 건 두번인가요, 일곱편의 영화 중에서. 그런 캐릭터는 많이 보였죠. 조짐은. 흘러서 그곳으로 갈 거라든지 시작하기 전에 그곳에서 왔다든지 하는. 근데 그게 꼭 그것 자체를 보여준다기보다는 그쪽에서 전이된 어떤 사회를 보여주려는 것이죠. 한국사회의 알레고리로 볼 수도 있지만, 저는 그걸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는 거죠.





간접적인 영화, 직접적인 반응



<씨네21> 사이트를 보니까 더이상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그걸 깨게 해서 미안합니다. (실제로 이 이야기를 진행하는 도중 영화사에서 전화가 걸려와서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고 하니까 김기덕 감독은 그냥 일언지하에 그런 거 이제 안 한다고 했잖아, 라고 대답했다)



 아니, 이건 인터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남이라고 생각하지. 만남이 근데 번역하면 인터뷰죠?



저는 말을 잘 돌려하지 못합니다.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한 가장 큰 이유는 영화평들이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일 텐데, 그럼에도 지금 <나쁜 남자>를 둘러싸고 온갖 필자들이 말하고 있고. 게다가 당신의 홈페이지에는 많은 글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번 <씨네21>(338호)에 문학평론가 정과리씨하고 정신과 의사 백상빈씨까지 등장을 했는데, 저는 <씨네21>에서 이들의 등장 자체가 흥미진진합니다. 그 무수한 영화평들에도 불구하고 정과리씨를 끌어들인 건 분명히 김기덕의 서사양식이 새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김기덕 영화 속의 이야기구조를 물어본 적이 없다는 의문의 표시일 것이며, 동시에 백상빈씨가 등장한 것은 아마도 이 점에 대해서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데, 당신의 텍스트와 동시에 감독을 병리학적인 관점에서, 또는 정신분석의 관점으로 한번 읽어보겠다는 그런 의도거든요.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느낌이 어떠십니까?



 제가 인터뷰 않겠다고 한 이유는, 저는 그 사람들이 쓰는 비평은 그 스스로는 훌륭하다고 믿어요. 제 평가나 타자들의 객관적 평가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들의 평가도 그렇다고 저는 믿어요. 다만 그 속에 비겁함은 없나 이야기는 해주고 싶어요. 그것뿐이고, 제 말꼬리에 잘못된 말꼬리가 붙는 게 싫어요. 제가 지금까지 해온 수많은 인터뷰가, 내가 했던 말조차 굉장히 다른 꼬리를 물고 있다는 걸 제가 어느 순간 느꼈어요. 언어가 나가서 그게 인격적인 공격을 받을 요소는 충분히 있어요. 근데 영화는 어느 정도 그런 걸 가려줄 수 있거든요. 위장이 되는 거고, 그건 객관적으로 영화일 뿐이라고 얘기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했던 말을 바로 따옴표를 따서 앞에 놓고 주석을 다는 것. 그것이 굉장히 무례한 것들이 많아요. 난 그건 싫어요. 예를 들어서 난 심영섭씨가 그랬나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거나, 그런 말투들. 김기덕의 이런 말을 통해서 보니까 이 사람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라는 식. 그런 어떤 변명이 필요없을 만큼 그 이야기는 굉장히 치욕스런 이야기거든요. 내 가족과 우리 엄마는 글도 읽을 줄 몰라요. 하지만 나에게 어머니는 아주 휼륭한 분이셨습니다. 근데 아주 이상한 공기들이 형성이 된단 말이죠. 그분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자식에 대한 애정과는 상관없이. 그런 걸 보면 사실 슬프더라고요. 근데 그런 거를 몇번을 봤어요.



당신에 관한 평들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는 것 중의 하나는, 영화평론가라는 지식인들이 영화를 보고 매우 직접적으로 반응을 한다는 거예요. 영화를 보고 영화 안을 너무 순진하게 믿는다고 할까? 아도르노가 한 말 중에 좋아하는 구절은, “예술은 항상 간접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비평도 언제나 간접적이어야 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감독 자신이 상당히 간접적인 영화를 만들었는데 보는 사람들은 직접적인 반응을 하고 있다는 거죠.



 그게 저는 영화의 존재 이유라고 봐요.



왜 그런다고 생각하십니까. 훈련받았다는 영화평론가들이.



 저는 그래야만 제 영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 영화든 누구의 영화든, 그렇지 않으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아무런 재미를 못 느끼겠죠. 그런 태도는 영화에 빠져드는 데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근데 결국은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걸러내야 하는 거죠. 인격적인 모욕 같은 것은 걸러내져야 하는데 그걸 못하는 거죠.



제가 이 질문을 드린 이유는, 그것이 김기덕 감독 영화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본인한테 이건 매우 힘든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홍상수 영화를 보고 나서 그가 처녀에 빠져든 사람이다, 라는 말은 안 합니다. 어쩌면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지 않거든요. (웃음) 그런데 김기덕 영화를 보면 사람에게 직접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어떤 힘이 느껴지거든요. 본인이 힘들어하는 바로 그 부분이 저는 김기덕 영화가 갖고 있는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인정은 해요. 인정을 하지만, 뭐 그것을 제가 맞아요, 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왜냐하면 그건 내 속의 은유이기 때문에. 그건 보는 사람들이 끄집어내 구성화시키는 것이지. 저는 최대한 영화감독들은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어디서 봤거든요. 말이란 것은 자꾸 영화하고 연결이 돼버린다, 삶도 들키지 말아야 하고 생각도 들키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이 철학자고 예술가다, 그런 말이요. 물론 제가 예술가라는 건 아니지만.



예술가인 건, 맞죠. (웃음)



 가장 자기 생각을 들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 예술가라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만든 그 직접적인 영화 속에서 내 속의 은유를 보아주었으면 고마울 거 같습니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씨네21>에 실린 정과리씨와 백상빈씨 대담을 오늘 아침에 여기 오면서 읽었습니다. 많이 재밌었어요. 멋진 대목은 정과리씨가 <나쁜 남자>의 거의 대부분의 앞 대목이 한기의 환상이라는 지적이었어요. 대부분의 해석과 반대로 마지막에 트럭타고 돌아다니는 게 실제라는 거죠. 그런데 저는 영화를 보자마자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양쪽이 다 환상인데, 이 환상 속에 한기가 죽어가면서 본 것, 또 거꾸로도. 그러니까 이 영화는 여대생을 창녀로 만드는 추락이 트럭타고 몸팔러 다니는 여자의 기둥서방의 환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여대생을 떠나보내는 한기가 죽어가면서까지도 바라는 희망의 환상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처참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두 가지 환상을 생각했는데. 김기덕 감독께서는 어떤 환상이 더 맞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해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중요한 건 한국영화의 담론은 지금 리얼리즘영화와 모더니즘영화밖에 없거든요. 근데 정과리씨 이야기에서 제일 반가웠던 것은 ‘환상’이라는 말을 쓴 점. 즉,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뿐인 이 시대에 환상이라는 요소를 끌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는 발견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신 영화를 좀더 지켜본 다음 얘기해야 할 것이기도 하지만, 김기덕 영화가 일종의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러한 계보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당신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일상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웃음)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정과리씨 얘기가 어떻든 간에. 말하자면 지금 이 자리가 환상일 수 있냐 하는 얘깁니다. 지금 제가 서로 마주 앉아서 얘기하고 있는 이 자리가. 현실과 환상, 두 가지로 다 볼 수 있겠죠. 그렇다면,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겠죠. 모든 걸 추상으로 본다면. 아까 초반에 말한 것처럼, <나쁜 남자>를 어떻게 해석을 하든 그 사람으로서는 정답이다, 라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웃음)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김기덕 감독께서는 ‘판타지’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신가 하는 점입니다.



 똑같은 얘긴데, 저에게는 살아오면서 고민을 하는 게, ‘이게 꿈이 아닐까’ 반문하는 습관이 있거든요. 꿈이었으면 좋겠다, 라거나.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라거나. 둘 중 하나가 늘 선택이 되고 있어요. 아직까지 저는 솔직히 물리적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구상적 인간. 그런데 사실은 추상적 인간이기를 굉장히 원해요.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내가 태어나고 살아오고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해요. 그건 왜 그러냐면, 물리적으로 사실 살기 힘들거든요. 그건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명예가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종교적이라는 말을 굳이 하자면, 어쩌면 우리는 거대한 그런 것으로부터 시험받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거든요. 제가 미션 스쿨을 다녔고, 교회를 다니면서 여름성경학교 가서 듣는 게 장로교적인 예정론이고. 그런 것에 깊이 세뇌를 당했거든요.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쳐봤고, 결국 빠져나왔어요. 근데 빠져나오고 보니까 또 그것이 사실 중요하더라고요. 그러한 어떤 지점이야말로. 안에 있을 땐 그것이 굉장히 못 견디게 힘든 것이었지만. 그렇다면, 그런 것이 반복되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 두 가지에서 나는 판타지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요.



다시 <나쁜 남자>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논리와 숏의 논리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오히려 영화의 논리와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갖고 숏의 논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점에서 당신 영화는 의아한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영화 논리적으로는 한기가 대학로에 가야만 하겠죠. 그런데 신의 논리를 생각한다면, 한기라는 인물이 대학로 갈 이유가 없거든요.



 대학로가 아니라 명동!



그런가요? 하지만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그건 악어가 꽃밭에 간 것처럽 보입니다.



 왜 가면 안 될까?



거긴 한기에게 불편한 공간이지요. 가서 어울릴 사람도 없고, 정작 본인이 거기서 할 이야기도 없고. 말하자면 역설적으로 선화를 만나기 위해서 갔다고 할까요?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모티브예요. 대립지점이 바로 그거거든요. 가장 큰 대비의 폭이고 모든 사건의 시작의 원인이거든요. 이 사회에서 사실은 저도 그랬어요. 롯데백화점이 지어진 지는 꽤 됐지만, 저는 생긴 지 10년 뒤에 가 봤어요. 왜냐하면 가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거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나 역시 했어요. 우리가 바로 마주하고 있는 공간들이 근데 그런 공간들이에요. 사람들의 공간만 비유되는 게 아니라, 지금 사회는 지리적 공간도 비유가 되고 있거든요. 다시 말하면 사실 크게 다른 것 안에서 둘이 싸우는 거예요. 물리적 가치, 경제적 가치, 이런 걸로 싸운다는 게 말이죠. 그건 마치 내 친척 중에 깡패가 있다는 것과 똑같아요, 다만 모르고 있을 뿐이지. 그런 게 있을 수 있거든요. 지리적 형상들도 사람들 관계와 비슷하다고 봐요. 그래서 저는 한기가 그곳에 못 갈 이유가 없다고 봐요.





왜 키스를 하는 걸까?



그런데 사실은 한기가 선화를 보고 한눈에 빠진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선화만 있었으면 안 그랬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에. 근데 선화가 남자친구한테 기대고,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그 순간, 한기는 선화한테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 같거든요….



 선생님은 안 그러실 것 같으세요? (웃음)



(웃음) 예를 들어 최수임 기자가 저를 경멸의 시선으로 본다고 해서…(최수임 기자는 이날 인터뷰 전체를 녹취하기 위해 옆에 있었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서원씨보다 미인이었다!)



 어느날 나란히 바로크식 벤치에 앉았는데 여자쪽에서 나를 그렇게 봤다. 그러면 저는 그럴 것 같아요. 저는 이 사람하고 나를 동등하게 봤는데 그렇다면… 저는 이 사람을 이해시키고 싶을 것 같아요. 근데 방법이….



…근데 수많은 방법 중에서 왜 키스를 하는 것일까요. 때릴 수도 있을 것이고 안을 수도 있을 것이고. 키스는 특별한 언어의 제스처입니다.



 키스는 오히려 섹스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고 봐요. 그게 그 입장에서는 가장 기초적인 모욕일 거라고 생각을 해요. 예를 들어 젖을 콱 만졌다, 그러면 관객이 한기에 대해서 더 안 좋게 봤을걸요. (웃음)



저는 김기덕 감독이 키스에 부여하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아니요…. (웃음) 그런 건 묻지 마시고요. 키스라는 것은 새로운 것이어야만 재미가 있지, 지속된 것은 사실 재미가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키스는 전화예요. 아니, 차라리 전화기 같은 거예요. 상대는 멀리서 수화기를 들고 있지만 입술을 대고 이야기를 한다는 게 중요한 코드가 되잖아요. 보지 않고 하는 그런 상황에서, 보이지 않지만 더 용감하게 할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할까요. 키스는 남녀간의 통신에서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의 행위예요. 섹스보다도.



그 반대로 물어보겠습니다. 김기덕 감독 자신에게 에곤 실레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전 에곤 실레를 몰라요. 어디서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연구해본 적도 없고 그 사람에 관한 책을 끝까지 다 본 적도 없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단 하나 그 사람의 그림에서 전달되는 느낌. 빈곤하지만 뼈에 붙어 있는 살들의 부대낌들, 그리고 그 앙상함에 고민이 들어 있다는 것, 세상 삶에 대해서 짙은 경멸이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뼈에 붙어 있는 살처럼 질긴, 그런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하는 고민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고민이죠. 에곤 실레가 애들을 불러다가 추행을 하고 삽화를 그린다고 하지만, 그가 그 피사체를 통해서 고민하고 연구했던 것은 삶에 대한 질곡들이 아니었을까. 섹스라는 것을 넘어선 단계에서 피사체들을 보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건 제가 원하는 시선이 아닐까 하는 거죠. 저는 가끔 살과 살이, 남자와 여자의 살과 살이 뒤엉켜서 서로 붙은 것 같은 환상을 보고 그런 느낌을 받는데, 그런 것을 에곤 실레의 그림은 보여주고 있어요. 멀리서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두 사람의 경계선이 잘 안 보이거든요.



선화가 찢었던 그 그림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인가요?



 그냥 느낌으로 그 그림을 골랐어요. 두 사람이 나와 있는 그림이기도 하고. 두 사람이 뒤엉켜 있는, 마치 쇠사슬처럼 서로가 서로에 엉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선화와 한기처럼, 그런 이미지의 그림을 고른 거죠.





정직한 정면



저에게 <나쁜 남자> 전체에서 제일 기괴하게 느껴지는 장면은 둘이 벤치에 같이 앉아 있는 장면이었어요. 화면 구도를 잡아놓은 게 거의 고의라고 느껴질 만큼 사진관에서 사진 찍는 것처럼 해놨어요. 뭐랄까, 마치 시골사진관에 앉아 있는 그 이상한 인위성과 키치적인 느낌. 그 자세를 기괴한 평면성으로 찍었죠.



 예. 저는 정각을 좋아해요.



그 장면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즉시 비현실감을 갖게 하거든요. 두 사람이 만나는 첫 장면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했을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 구도를 본인이 고집했을 것 같아요.



 사진이라는 이미지를 저는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썼어요. 사진 이미지가 없었다면 이 영화에는 추상적 태도가 있다고 말할 수 없거든요. 처음 만났을 때 둘이 앉아 있는 것, 나중에 보냈을 때 둘이 앉아 있는 것, 그리고 바닷가에 둘이 앉아 있는 것. 이것이 저는 가족이라는 분위기, 아주 친숙한 느낌의 연대감을 불러낸다고 봤어요. 그것도 정확하게 발끝 머리끝이 잘리지 않게 그 주변에 아무리 불필요한 공간이 형성되더라도 두 사람의 몸 전체가 다 들어가야 된다, 는 원칙으로 그 장면들을 찍었죠. 옛날에 <파란 대문> 보면 바닷가에서 이렇게 창문으로 내다보는데 사실은 기둥이 있어서 서로 안 보이는데 심리가 서로를 보는 그런 장면이 있거든요. 근데 촬영감독은 정면에서 찍는 걸 싫어해요. 사선각을 좋아하죠. 왜냐하면 그게 깊이감이 나오기 때문에. 창문에서 5m 떨어진 거리에서 찍었는데, 카메라가 창문과 10cm 사선으로 서 있는 거예요. 그걸 자로 재서 정면으로 만들고 놓고 찍었어요. 그만큼 저는 정면을 좋아하는 게 있어요. 정직이라는 거죠. 정확보다는 심리적인 정직하고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처음에 한기가 선화 있는 벤치에 가 앉는 것, 그게 정직한 한기의 태도에요. 정직하게 수평적인 사람관계의 시작을 하는 거예요.



다른 영화에서 보여준 평면적 구도에 대해서도 그렇게 똑같이 이해해도 되나요?



 네. 저는 삐딱한 걸 싫어해요.



그럼 그런 장면에서는 김기덕 감독이 관객에게 메시지를 보낸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예, 지나치게 정각을 썼을 때는 그렇게 보셔도 돼요. 그렇게 봐줬으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사선각이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니에요. 모순이 있을 수도 있는데, 제가 아까는 카메라에 신경 쓰지 않는다, 했잖아요. 근데 어떤 것에는 또 이렇게 지나치리만큼 신경을 쓰기도 해요. 그것은 김기덕 안의 의미이고요, 그걸 발견해주면 고마운 것이죠.





아버지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인물들



개인사를 끌어들여서 영화 해석하는 게 너무너무 싫다고 하셨는데 저도 그것에는 동의를 합니다. 또 그럴 만큼 순진하지 않기도 하고요. (웃음) 근데 <나쁜 남자>를 보고 제가 한 가지 궁금해진 게 있어요.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아버님은, 굉장히 훌륭한 분이셨는데 저한테는 굉장히 훌륭하지 않은 분이셨어요. 6·25때 상이용사시고, 굉장히 엄하셨고, <수취인불명>의 아버지와 비슷해요. 훈장을 <수취인불명>의 아버지처럼 30년 지나서야 받으셨죠. 6·25 때 총알을 많이 맞아서 신경통이 있고 신경이 날카로워서 자식들이 숨도 쉬지 못할 정도였죠. 어렸을 때 저한테 잘하라고 하시면서 많이 꾸중을 주신 분이죠. 근데 그게 지나쳤고 저한테는 그게 오랫동안 지속됐어요. 그게 절 해병대에 가게 만들었고 또 유럽에 가게 만들었고 그랬죠. 20대 초반에 이 땅에 적응하지 못하는 습관을 기르게 된 거죠. 지금은 저한테 자상한 편이시고 고마운 분이죠. 근데 저는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가 뭘 못하게 한다고 하는 걸 이해 못해요.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는 내가 뭘 한다고 했을 때 못하게 한 적이 없어요. 아버지가 가장 바라시던 건 제가 공장장이 되는 거였어요. 저는 정말 많은 공장에 다녀봤고 굉장히 잘 훈련된 숙련공이었어요. 남들의 서너배를 생산해냈고 두뇌가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열다섯살, 열여섯살 그럴 때 기계를 개발할 정도였으니까. 기계원리에 대해 배운 적은 없는데 나도 모르게 알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공장장이 되기를 원했는데, 어느날 제가 거부를 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아버님은 대단한 분인데, 이 사회에는 대단하지만 아무것도 안 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런 분이죠.



제가 그걸 질문한 까닭은, 김기덕 영화를 보면 등장인물들이 아버지가 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보거든요. 그리고 아버지가 나온다고 해도 아주 무서운 사람이죠.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자기 조국에 대한 느낌이기도 하거든요. 두려움, ‘마주치기 싫어함’, 이런 게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수취인불명>, 그 영화 안에 그런 건 다 들어 있어요. 시대에 대한 결핍감이죠. 한국 근대사의 문제예요. 모든 아버지들이 이 사회에 전염시킨 이상한 기운인데, 올바르지 못한 게 많았어요. 그 한이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요. 짧은 시간에 가장 극단적인 상황을 맞이한 게 저는 6·25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빨갱이라는 말을 하고 북한에 쌀 주는 거 보면 경악하고. 총알이 몸을 관통했고 물고문을 받았고 그랬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거죠. 그분의 지난한 고통 속에 제가 잉태가 돼 있는 거예요. 유전적으로 세포학적으로, 나는 겪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그런 것이 있는 거지요. 그리고 그게 내 영화 속에 이미지로 나오는 거죠. 현재의 나와 아버지가 혼재되어서 표현되는 것이죠. 결국 제 숙제로 남는 거예요. 제가 왜 터무니없이 <수취인불명>이라는 영화를 만들었겠어요.



아버지의 한이 한국전쟁이라면 감독 김기덕의 한은 무엇인가요?



 저의 한은 그것이겠죠. 제도권과 비제도권 이후에 놓여질 자리가 이 사회에서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 저는 다행히 열등감을 극복했는지 그 커트라인을 뛰어넘었는데, 프랑스에 갔다 오고 하면서 말이죠, 나와 비슷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사실 문화라는 것, 하이클래스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에게 부채감이 있고, 그래서 자꾸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결국 이상한 주장은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고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보이고, 그래서 자꾸 판타지로 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현실로 보지 않고요. 이 영화로부터 또다른 상상을 하고 있는데, 그건 극장에 오기 전에 사회적으로 획득한 어떤 타이틀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기 때문에 그런 거겠죠. 낯설다, 날것이다…. ‘날것이다’라는 말을 저는 제일 싫어하거든요. ‘날것’이라는 말이 저한테는 마치 ‘덜 익었다’는 걸로 들려서요.



생생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잖아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제가 볼 때 ‘날것’이라는 말은 ‘바이러스가 많은’, ‘세균이 죽지 않은’, 그런 부정적인 느낌으로 와요. 대신 저는 ‘원시적인’, ‘야생적인’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사실 그 시대가 상당히 그리워요. 팔뚝에 힘만 있으면 고기도 잡을 수 있었고, 또 ‘저게’ 있었으면 섹스도 맘대로 할 수 있었고, 인간의 기초적인 뼈의 골격과 의식만 갖고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거든요. 근데 지금은 그렇지 않죠. 모든 것이 지나치게 시스템 안에서 훈련돼 있고 길들여져 있어요. 저는 졸업장 없는 중학교를 나왔는데 요즘은 대학 나온 것도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대학원이 있고 유학이 있고…. 지금의 대학은 옛날의 중학교 수준밖에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들에 나는 호기심이 있고 오해가 있는 거예요. 사회에서 편견들이 어떻게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나, 하는 거죠. 크게 나누면 정치인과 깡패가 같은 계급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이죠.





<나쁜 남자>의 해병대들이 ‘나쁜 남자’일 수 있다



형제관계는 어떻게 되세요?



 2남2녀 중 차남이에요. 위에 형, 누나 있고 밑에 여동생 있고.



저는 장남이거든요. 아버님이 한국전쟁 때 월남하신 분이고 그런 분들은 장남 이데올로기가 있어요. 이를테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저는 집에서 서울말을 쓰면 안 됐어요. 고향에 돌아갈 거니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리고 당신이 제일 싫어하는 말일 수 있지만, 김기덕 영화를 보면 끊임없이 자기 삶에 대한 반추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삶이 주인공의 삶으로 등장한 적은 없어요. 늘 주변부에 등장을 하죠. 예를 들어 <나쁜 남자>에서 한기가 키스를 하고 바로 세명의 군인이 한기를 두들겨패는 장면을 보면서, 아 이 사람은 자신의 지나온 삶이 싫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 쓰고 있는 <해안선>이라는 게 해병대 이야기인데 자학적인 이야기죠. 해병대 출신이라면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라는 말에서, 그 집단을 신뢰해야 하고 앞으로 영원히 그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정신이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아요. <나쁜 남자>의 해병대 세 남자는 ‘나쁜 남자’일 수 있어요. 이 사회에서는 좋은 체제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의 면도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 두 가지를 저는 동시에 이 세명의 해병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거죠. 저 자신이 사실은 두 가지 속에서 아이로니컬하게 살아가고 있는 거죠. 이쪽 모습도 보고 저쪽 모습도 보며. 그런데 결국 패는 놈이나 맞는 놈이나 똑같다는 걸 말하는 거죠. 이 영화를 보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든 ‘김기덕 좆같다’ 하면서 욕을 했든(정성일의 주. 고백하자면 사실 이 인터뷰는 서로 육두문자를 격의없이 섞어가면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정리하면서 나는 내 육두문자만 ‘야비하게도’ 정돈했다. 김기덕 감독님, 용서하세요) 그건 그 사람의 거울이라고 생각해요. 제 영화를 보고 ‘김기덕 이 개 같은 놈’이라고 하면 그 말이 사실은 자기 자신이 제일 먼저 듣는 말이라는 거죠. 미워하든 칭찬하든 그건 자기 거울이라는 거예요. 이 영화가 거대한 스크린이라는 거울이라면 보는 사람마다 거기에 비춰보는 자기 살아온 삶이 다 다를 거 아니에요. 위험한 말일 수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도덕적으로 살아왔다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보면서 ‘개 같은 놈 씨발 놈’이라고 욕을 했다면 그 욕이 그 자신에게 향한다는 거죠. 반대로 이 영화를 보고 ‘아 나는 나쁜 놈이라는 걸 느낀다. 내 자신이 인생을 어떻게 살지 다시 생각을 해야겠다’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착하게 살아왔을 거라는 얘기예요. 사람들은 너무나 다층적이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 관객이든지 간에 그 어느 누구도 비난하지는 못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덕이 폐부를 찌르는 느낌을 줬다고 하는 이들이 있거든요. 그런 게 기쁠 뿐이지 한국의 비평가가 별 네개를 줬다 뭐 이런 것에 감격하지는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저의 많은 것을 부풀리고 있어요. 무엇이 있지는 않을까. 무엇이 없지는 않을까. 그래서 지금은 인터뷰를 안 하겠다고 물러나 있는 거죠. 하지만 오늘 정성일 선생님이 악어처럼 저를 문다고 해도, 어떤 악어에게 물려도 이제는 두렵지 않은 것이, 이미 난 끔찍하게 물려도 그 이빨자국이 남지 않게 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에요. (웃음) 사람들이 각자 차이는 있지만 누가 배로 무겁지는 않은 것과 같은 이치인데, 많은 사람들이 김기덕이 지나치게 커지지 않을까, 대중 앞에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우려하는 건 말 그대로 지나친 일인 것 같아요. 그러면 내가 가장 불편해져요. 그렇지 않겠어요?





<거짓말>과 <나쁜 남자>



이상한 비교를 하겠습니다. 저는 사실 <거짓말>이 시시하고 지루했어요. 그런데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에서 흥미있었던 것은,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던 평론가들이 갑자기 그 영화에 자기의 틀을 버리고 작가주의 관점에서 지지를 보냈다는 사실이었어요. 사드주의적인 섹스와 마조히스틱한 역할이 교대되는 이 영화에는 관대했던 페미니스트 평론가들이 <나쁜 남자>에 대해서 관대하지 못한 까닭에는 ‘계급의 추락’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남자가 여자를 때리고 여자가 남자를 때리고 그런 섹스의 광경은 참아줄 수 있지만 여대생이 창녀가 되는 계급적 추락은 못 참겠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페미니스트들이 남자가 여자를 때리다가 여자가 남자를 때리니까 평등해졌다고 생각할 만큼 유치하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아요. 아까 김기덕 감독이 ‘수평적 사회’ 이야기를 했지만, 선화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추락이거든요. 저는 <나쁜 남자>를 둘러싼 담론은 반드시 다른 영화들의 담론들과 상호 텍스트의 횡단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궁금한 것은 그 논리가 아니라 그 추락의 정서가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어떤 울림을 갖는지예요.



 이거는 답변을 안 하면 안 돼요?



불편하세요?



 아니, 불편한 건 아니고.



그럼 이 이야기는 오프 레코드로 하고.



 아니 그냥 제가 답변을 안 했으면 좋겠어요. 질문으로 충분한 답변이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문현답이었나요?



 사람들이 가장 기다렸던 질문이겠죠. 그걸 알기 때문에 그냥 답변을 안 했으면 좋겠어요. 평론가가 여성이건 남성이건 상관없이 그냥 그 사람 관점 안에서 자기 해석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내가 하는 욕은 내가 먼저 들어요. 귀의 울림을 통해서. 아까 얘기했듯이, 이 영화에 대해서 하는 어떤 말도 그 말을 하는 사람 자신이 가장 먼저 듣는 말이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하고 싶네요. 그들 스스로가 가장 정확한 해답을 갖고 있다고 믿어요, 내 영화를 아무리 공격해도, 그래도 비난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식물이라고 치면 나무와 풀이 동등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가치에 상관없이.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웃음)



저 삐쳤어요.



 하하하.



저는 삐치면 한 10년은 가요.



 제가 허우샤오시엔 싫어한다고 해서 삐치지 않았어요?



저도 김기덕 감독이 좋아하는 안드레이 줄랍스키 영화 싫어하는걸요. (웃음) 말 그대로 머리를 여는 영화 있잖아요.



 <샤만카>요? 저도 그런 직설화법 영화는 이해 못해요. 그 영화는 이 세상에 내밀고 싶은 네 가지 문제를 얘기하거든요. 지식과 전쟁과 섹스와 전통, 그거였는데, 그게 흥미로웠지, 머리 따고 하는 것은 <한니발>처럼이나 유치하다고 생각해요.



같은 질문을 다르게 해볼게요. 사람은 두 가지 증후 중 하나에 이끌린다고 하는데, 사디즘에 이끌리는 편이세요, 마조히즘에 이끌리는 편이세요?



 그건 오해와 이해의 문제예요. 오해는 피학이고 이해는 가학이거든요. 내 주관성을 가질 때는 상대를 설득해야 되고 내가 오해가 있을 때는 나 자신을 질타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성적이든 성적인 것을 떠나서 물리적 행동에서든. 두 가지 다가 제 영화에서는 왔다갔다 해요. 그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 뭐죠?



사도마조히즘.



 예전에 어떤 여성평론가가 저의 개인적인 가족적인 공격을 해가지고 답글을 한번 정직하게 쓴 적이 있어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 영화에서 어떤 것을 보고 당신이 불행해졌다면 용서를 구하고 싶다’ 이렇게 썼더니, 또 마조히스트라고…. (웃음)





사회의 무언가를 아프게 베어내는 영화



이렇게 이야기할게요. 저는 김기덕 영화를 거대 담론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영화가 우리 사회의 무엇인가를 ‘베어내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에요. 그것도 아주 아프게 베어내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꾸만 우리는 불편하죠.



 저는 찾아낼 건 찾아내고 버릴 건 버리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거죠. 저는 정작 그런 심각한 고민들에서 정말 이 영화가 비롯됐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몰라요, 활자화되어서 나오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정말 그런 심각한 상처에서 영화를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스스로 있거든요. 사람들이 “그러면 네가 도덕군자란 말이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난 또 “그렇지 않다”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나도 남자인데, 성인으로서 내가 모든 백과사전이고 인생의 모든 스트레스를 내가 알아서 처리를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절 영화’ (김기덕 감독은 차기작으로 동자승이 노승이 되어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준비중이다)를 만들어서는 안 되겠죠. 모든 걸 섭렵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내가 이 세상을 보는 것은 ‘단(短-單)시각’입니다. 그 짧은 시간과 공간 안에 한국의 정서나 폐단이 없다고 볼 수는 없겠죠. 그런 것처럼 제가 필요없이 우리 사회가 고민했음 좋겠어요. 저는 그게 두려워요. 저도 기승전결이 깔끔한 영화를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제가 그런 영화를 만들면 욕을 먹을 것 같아요. 소위 말하면 희로애락에 기초해서 코미디나 멜로 같은 영화를 애초에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어느날 갑자기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거든요. 제 스스로.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근데 그게 좀 늦게 왔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제가 아직 세상에 대해 의심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오해가 많기를 바라고. 정제되는 것이라거나 위악적인 선택이라거나 이런 것을 떠나서, 저는 그건 참 인정을 해요. 내가 종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을, 저는 남산시각장애인교회에서 오랫동안 있었어요. 그곳에서 한동안 기거를 하며 일을 도왔어요. 종교적 고민을 오랫동안 했고, 이름도 없는 야간학교지만 신학을 1년 정도 공부한 적이 있고, 세상에 필요한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어요. 근데 그걸 멈춘 이유가 내 스스로의 인격이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죄도 아니고 가장 인간의 기본적인 것인데, 저는 그것 때문에 신학을 관뒀어요. <나쁜 남자>의 엔딩 같은 그런 고양된 것을 향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것을 의식하고 공포하는 거였어요. 그런 의식이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멈추게 했어요.





사악함과 죄의식의 충돌



사실 마지막에 트럭을 타고 떠돌면서 매춘을 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사악한 장면이잖아요. 근데 그 순간에 감독 자신이 복음성가를 구태여 들려주고 있습니다. 김기덕 감독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광경은 사악한데 들려주는 노래에는 죄의식이 있어요. 사악함과 죄의식의 충돌 속에서 당신이 바라는 건 구원인지 희생인지가 궁금해지는 거예요. 또는 그 두 가지가 한 가지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저는 이것이 다음 영화에 대한 하나의 출발점이고, 김기덕 감독 영화 전체에 대한 키워드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악어>부터 종교영화라고 생각을 해요. 종교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고, 지금도 힘들 때면 사도신경을 많이 외워요. 제가 갖고 있는 기독교관은 모호해요. 오히려 도올 김용옥 선생이 말했던 것 중에 두 가지가 기억나는데, 일제시대 유관순 누나가 믿었던 기독교와 지금의 기독교는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신이 아니라 그 시대의 철학자, 선각자이고 운동가이지 않을까. 유관순하고 똑같을 수 있다, 하는 얘기였거든요. 요한복음에 나오는 얘기는 어쩌면, 신화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저도 했어요. 그런데 가끔 놀라는 것은 내가 그렇게 어떤 것들을 부정하면서도 때로 사도신경을 읊는다는 거예요. 사도신경에는 분명히 삼위일체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내 영화는 위악과 독선과 자해가 혼재되어서 누구든지 골라먹을 수 있는 것처럼 보여요. 내 안의 불분명한 정체성 중에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저는 모르는 거예요. 저는 그중에 무엇을 고르기 위해 계속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래서 <악어>부터 종교영화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물론 종교영화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죠. 스스로 행해가는 의식적 자연과 물리적 자연을 저는 동일한 것으로 보거든요. 그건 다시 말하면 순수에 대한 회귀거든요. 지금은 너무나 많은 인공적 공법들이 그런 걸 해체했어요. 그래서 어느 시대보다 많이 고민을 하고, 많은 것을 동원하며 살아야 해요. 야생의 원시시대에는 의식보다는 어쩌면 시선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태초라면, 신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거죠. 명확하진 않지만, 이런 이야기가 김기덕이 아닐까, 하는 거예요. 복잡하죠, 들어보니까. 제가 물리적으로 가스펠송을 쓰니까 종교적이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악어>부터 저는 원래 종교적이었어요. <악어>에서 위악적인 인간한테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이었을 것 같아요.





순결이데올로기에는 관심 없다



조금만 앞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 영화의 유일한 섹스장면 얘기를 해보죠. 선화가 첫 손님을 받는 장면이죠. 제가 이 장면에 무언가 낯선 인상을 받은 이유가, 대부분의 한국영화에서는 이런 장면을 그릴 때 처녀인 선화가 순결을 잃는다는 것에 대해서 관심들을 가지고 있을 텐데, 김기덕 감독은 관심이 없어요. 정작 선화가 남자친구가 모텔에 가자고 하자 거절하는 장면을 분명히 보여주고서, 그리고 선화가 매춘을 하게 되자 처음은 애인이었으면 좋겠다, 라는 것까지 그려낸 이 감독이 순결을 잃었다는 것보다는 매춘을 시작했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 저는 한국영화 속에서 어떤 단절의 지점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영화는 분명 순결이데올로기에 관심이 없어요. 순결이 아니라 매춘에 방점을 둔 것이 아까 얘기했던 ‘계급의 추락’과 일맥상통하는 일관성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데요.



 글쎄요, 일단은 저는 영화에서 노출에 의미를 두거나 관객이 성욕을 느끼는 게 불편해요. 저는, 심지어 그 장면 찍을 때 안 봤어요. 밀실에서 돌아서서 액션하고 컷만 불렀어요. 그냥 비명소리만 들었어요. 벽을 보고. 정말 볼 자신이 없었어요. 그 장면을 기어이 보고 저를 비판하는 평론가들은 분명 저보다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처음 시나리오에는 선화가 손님 받고 나서 “잠깐 화장실 좀 갔다올게” 하고 화장실 가서 손가락으로 처녀막을 찢는 게 들어 있었어요. 그것은 하나의 배려라고 생각을 했어요. 근데 그게 너무 슬펐어요.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어요. 아주 얄팍한 동정이더라고요. 그래서 뺐죠. 그 다음에 넣은 게 그 남자친구였어요. 차선책이었죠. 남자친구하고 하는 걸로 돼 있었어요. 근데 또 뺏어요. 굉장히 비겁하게 느껴졌어요. 결국에 뭐냐면, 여자의 순결이라는 것에 나 역시도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 거예요. 여자들이 순결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김기덕이 너무 긴장하고 있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냥 쉽게 가기로 한 거예요. 슬쩍 넘어가 버리자. 그래서 그 장면이 짧지만 김기덕 감독이 고민하는 게 많이 들어 있거든요. 그 장면 찍을 때 선화의 비명소리를 듣고 내가 ‘컷’을 하는데, 조재현이 내 입을 막았어요. 조재현은 그 잔인한 장면을 끝까지 봤어요. 나한테 중요한 것은 여자 팬티 벗기는 것도 아니고 그 처절한 거부감과 자지러지는 듯한 절망감, 계급이 파괴되는 과정의 뉘앙스였어요. 근데 카메라맨과 실제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물리적인 장면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소리만 듣고 컷 하려는데, 조재현이 입을 막더라고요. 그리고 자기가 1분 있다 컷을 했어요. 근데 결국은 소리로 컷할 때까지만 썼어요. 조재현은 자기가 컷한 데까지 썼다고 오해하고 있는데, 아니에요. 그 행위 자체가 어디까지 갔을지는 안 봤지만 다 알아요. 팬티 브래지어 다 벗겼을 것이고. 근데 저는 정말 힘들어요, 슬프고. 그것이 은유되는 수많은 일들이 이 세상 곳곳에 있었을 것 아니에요. 장소가 그런 곳이든 아니든 간에. 여성이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지배받는 그런 순간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게 여기서 똑같이 재현되는 것이죠. 그게 영화더라도. 그래서 두려웠던 장면이었고, 스치듯이 쉽게 가고 싶었어요. 그래야만 내가 나중에 그 여자를 망가뜨리는 데 유리할 것 같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연기자가 굉장히 잘해줘서 짧게 끝났는데, 안 그랬으면 굉장히 지저분하게 갔을 거예요. 제가 편집할 때 옆에 여자 스크립터가 있었는데, “이 장면 슬프지 않냐”고 물었더니, 얘가 파랗게 질려 있어요. 그 장면 볼 때만. 많은 여자들이 사실 그 장면에서 치욕을 느낄 거예요. 순결이란 그 자체도 무시를 해버리니까. 뻘건 피 한 방울 이불에 남겨놓아 좋을 건 없지만, 많은 여성들이 아직까지도 결혼을 하는 데 중요한 것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너무나 어이없이 지나쳐 가니까 그랬겠죠. 영화 만드는 사람이 받는 가장 큰 자괴감이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근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김기덕이 즐기는 가학으로 보기도 할지 모르지만.





정신적이기만 한 것은 없다



반면에 한기라는 인물을 보면 굉장히 금욕주의자 같은 느낌까지 들어요. 한기는 누구하고도 섹스하지 않거든요.



 아니요, 해요.



하긴 하는데, 하지 않는 것처럼 넘어가잖아요.



 맞아요.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죠.



그냥 실패해버리고 마는 것으로 나오죠.



 저쪽 여자에 대한 복수랄까, 간접적인 그런….



누구나 다 하는 질문입니다, 한기가 심각한 언어장애를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다른 인터뷰에 보니까 한기가 온갖 삶을 살면서 목에 칼자국도 있으니 후두에 상처를 입어서 그렇다, 만으로는 제가 보기에 충분하지 않은 거 같아요.



 그건 영화라는 매체가 빌려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말많은 인간으로 했을 때, 그 말들이 얼마나 진실해 보이겠어요. 수많은 수작에 불과했을 거예요. 그걸 감독은 철저하게 배제해야 했을 거예요. 처음에는 대사가 다 있었어요. 대사를 다 넣은 이유는, 배우한테 그 말없음이 그 대사들의 은유라는 걸 말하기 위함이었어요. <섬>에서도 원래 대사가 다 있었어요. 근데 어느 순간 대사 몇번 읽은 다음에 제가 다 빼버렸어요. 다이얼로그에 집착을 하게 되면, 그 감정이 못 쓰게 돼버려요. 깊은 상처가 있기 때문에 가볍게 말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걸 저는 원했어요. 일부 관객에게 그건 주효했다고 봐요.



한기가 후두암에 걸린 것처럼, 김기덕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보이는 것은 신체적 훼손에 대한 관심이거든요. 이를테면 <수취인불명>에서도 기어이 철사를 먹고 다시 배변을 해서 그것을 꺼낸다거나, <섬>에서는 낚싯바늘로 끌어당기고, <악어>에서도 그러합니다. 거꾸로 여기서 신체적 훼손을 통해 자유를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건, 아까 말한 사디즘-마조히즘하고 관련이 있어요. 우리가 자꾸 섹스쪽에서만 얘기를 하는데, 총체적인 육체 속에서 보면 자학과 가학이거든요. 해체시키려고 하는. 저는 영화 속에서 이야기를 하는 중요한 시각이라고 생각해요. 남을 혹은 자신을 때린다는 것하고 다를 게 없죠. 그 골이 깊을 뿐이지. 정신이 앞지르지 못할 때 나오는 것이 육체적인 자학과 가학이죠. 선화가 보는 데서 한기가 다치는 게 두어번 돼요. 한기가 다칠 때 꼭 선화 컷을 집어넣었거든요. 난 이런 놈이야, 난 이렇게 살아왔어, 이런 걸 대변하지 못하는 이를 여자한테 ‘말해’주는 장치가 아닐까. 이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절감되는 것을 설득시키는 것이 아닐까. 이 사회에는 정신적 충격에 비해서 육체적 충격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어요. 난 그렇게 보지 않아요. 정신적이기만 한 것은 없다는 거예요. 항상 물리적인 것과 병행을 하죠. 뇌만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돼요. 저는 관객이 어떤 육체적인 훼손을 보면서 서서히 영화 속 인물을 이해해 가기를 바라는 거예요. 조재현이 한 말인데, 이 영화 찍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되뇌었던 말이 “이놈은 나쁜 놈일지도 모른다”라는 거였어요. 나쁜 놈이 아니라, 일지도 모르는. 그리고 내가 그에게 준 연기에 대한 힌트는, “넌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는 눈빛을 해라. 내가 뭘 잘못했지, 하는 표정을 해라. 잔인한 표정을 하면서”라고 했어요. 그게 바로 그가 감옥에 있을 때 담배 피우면서 짓는 표정이에요. 자꾸 눈알 치켜뜨는 것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랬고 본인도 동의했죠.



<나쁜 남자>는 모두 몇회 촬영하셨어요?



 21회 촬영했고요. 세트에서 25일 정도 찍었고, 구룡포 로케 신을 한 5일 찍고, 모두 한달 정도 걸렸어요.



NG가 가장 많이 난 장면은 어느 것이었나요?



 처음 키스하는 장면. 첫날 찍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실패였어요. 왜냐하면 조재현이가, 악어처럼 팍 하지 않았어요. 여배우를 봐줬어요. 그게 너무 보였어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장면이에요. 거기서 저는 ‘이 여자를 먹어버릴 것 같다’라는 느낌을 주기 원했어요. 입술을 온통 덮어 가지고 빨아들여서 여자의 얼굴 근육이 밀려들어오는 그런 것을 저는 원했는데, 그냥 입만 부비더라구요. 몇번 얘기를 했는데, 처음 찍는 그 여배우를 보호하려는 것 같더라고요. 왜 그렇게 안 했는지 난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웃음) 어차피 여배우는 준비가 돼 있었는데.



일곱편의 영화 중에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가장 당신에게 다가간 영화는 어느 건가요?



 <수취인불명>이죠. 거기 분명히 김기덕이라는 사람이 들어 있거든요, 지흠이라는 역할로. 총 만들어 자기 다치는 나약한 소년. (그는 정말 흉하게 허연 살이 되어 남은 흉터가 선명한 왼손 엄지손가락을 내보였다) 총 만들어서 다친 자리가 이렇게 아직도 있어요. 이게 오래된 상처인데 이렇게 남아 있는 걸 보면 알겠지만, 그 당시는 엄청난 상처였어요. 그리고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은 <실제상황>이에요. 사람들이 인정을 안 하는 걸 억지로 인정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김기덕의 예고편격인 작품이에요. 제가 앞으로 영화로 만들려는 모든 소재가 그 안에 다 들어 있거든요. 근데 많은 사람들이 이벤트에 너무 함몰돼 있는 시선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어요. 언젠가는 다시 끄집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죠.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거의 다 드렸고, 하시고 싶은 말씀이 더 있나요? 오늘은 일종의 오프닝이라고 생각했어요.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기보다는 김기덕 감독을 사람들한테 이해시키는 쪽에 방점을 두었거든요. 악랄하지 못했죠? (웃음)



 저는 정 선생님이 악어 같을까봐 준비한 게 있는데…. (거기서 <씨네21> 337호에 실린 나의 글을 펼쳤는데, 그곳엔 글에 대한 ‘평’들이 가득했다. 정말 그는 단단히 준비하고 나왔다) 각오를 했죠, 오늘은. 그런데 참 ‘착한’ 인터뷰였어요. (웃음)












 우리는 저녁을 맛있게 먹고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충무로역에서 서로 헤어졌다. 우리는 서로 반대방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내가 작별인사를 하자, 그는 구태여 내가 가는 모습을 보고 가겠다고 말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고작 한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나는 경험적으로 안다. 헤어질 때 등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상처받아온 자기의 등에 걸린 슬픔을 보여주기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헤어지고 가다가 불현듯 가방 안에 김기덕 감독이 내게 오늘 선물한 면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면티는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는 (적어도 나에게는) 무시무시한 해병대 면티였다. 그는 내게 선물하면서 수줍은 얼굴로 멋쩍게 “이 면티에 그려진 스쿠버 해병대, 군대 있을 때 제가 그린 거예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걸 받으면서 그가 언제나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갖는 정직함 때문에 상처받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기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건 인터뷰하는 내내 그러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김기덕(의 영화들)을 싫어할 수도 있고,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틀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가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짓다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나 없이도 세상의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는 때가 왔으면 좋겠다, 라고 말할 때 그건 그의 진심이다. 그 진심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영화를 끌어안고 함께 세상의 모순을 물어보아야 한다. 바꾸는 것은 세상이 되어야 할 것이며, 세상을 바꾸기 힘들다고 그걸 껴안은 영화를 매장시키려는 것은 결국 실재의 귀환을 불러올 것이다. 김기덕과의 대화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글 정성일 · 대담정리 최수임 sooeem@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