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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정성일이 말하는 김기덕

가/김기덕 2002. 7. 11. 06:44 Posted by 로드365
결국,   홍상수는 미학을 택했고

         김기덕은 종교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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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악한 것이 항구적인 법칙이 되어가고 있으며, 선한 것이 노력이 되는, 그럼으로써 이미 다른 잔혹함에 추가된 하나의 잔혹함이 되는…(중략)

앙또냉 아르또 <서간집>



나는 구역질이 난다, 고로 존재한다

쥘리아 크리스테바 <사랑의 역사, 또는 이야기(들)>



제 영화를 보면 갈 때까지 가잖아요. 그 다음은 갔던 데까지 갔던 그 끝이 도로 시작점이 아닐까, 그런 순환구조를 생각하죠. 도대체 우리가 이 사회에서 악을 다 몰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라는.

김기덕 인터뷰 중에서





 나는 김기덕(의 영화들)이 싫다. 그러나 이 말이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이 김기덕(의 영화들)은 틀렸다고 읽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틀렸다고 말하는 순간(그런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옳다고 말하는 순간) 대부분 그것을 증명하려 들기 위해서 갑자기 김기덕의 영화들을 정치적, 미학적, 과학적(?), 또는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대상으로 전화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김기덕의 전략이며, 내심 바라는 바이다. 여기서 그것을 대상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를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저 무시무시한 잔혹함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세상의 형상에 놀라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방어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의 영화들은 (도덕도 없고, 윤리도 무너진 채, 법을 어기면서, 폭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부서져가면서 해체돼가는 세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멈춰선 무대이다. (실제로 김기덕이 세상의 질서에 새로 더한 것이 있던가?) 그러니까 우리의 방어는 내가 세상이라고 생각한 것을 방어하고 채우려는 (그래서 대상의 그늘이 자아를 뒤덮는다는 말 그대로의) 나의 나르시시즘으로서의 대상이 된다. 거기에는 김기덕이 아니라 김기덕을 빌려 우리가 이미 만들어놓은 그 무언가가 우리를 붙잡으러 달려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으로 김기덕의 영화들은 그런 식으로 우리의 논쟁을 유도하긴 하지만, 사실상 그것을 그렇게 여기는 나의 질문구조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이야기될 만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는 홍상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갈 만한 자격이 있는 작가이다. 왜냐하면 홍상수가 자기 영화를 보는 동안 죄책감의 유머를 불러일으킨다면, 김기덕은 맹렬한 적개심의 분노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홍상수가 보는 동안 자기 영화 안의 구조의 일부로 우리를 끌어들인다면, 김기덕은 보는 내내 거기서 벌어지는 사건을 대상으로 쳐다보게 만든다. 세르주 다네라면 더 간단히 말했을 것이다. 홍상수가 돌아보게 만드는 동안, 김기덕은 쳐다보게 만든다. 이 말이 중요하다. 김기덕은 결코 영화를 보는 내내 자기 영화 안에 우리로 하여금 어떤 방법으로도 들어오는 길을 차단한다. 그냥 쳐다보게 만든다.





고립된 무대에 도착한 인물들



 무엇보다도 김기덕의 영화들이 갖는 특징은 그 고립성에 있다. 한강 강변을 끝내 떠나지 못하거나(<악어>), 파리의 뒷골목을 떠돌거나(<야생동물보호구역>), 한적한 바닷가의 여인숙이거나(<파란 대문>), 외따른 낚시터이거나(<섬>), 한 남자의 꿈이거나(<실제상황>). 기지촌 마을이거나(<수취인불명>), 결국은 창녀촌(<나쁜 남자>)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의 등장인물들이 돌아볼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광경에서 그들을 제거시키고, 매우 제한된 장소에로 데려가 감금시킨다. 그러나 그 감금은 그들을 배제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세상을 무대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김기덕이 만들어내는 사건은 무대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저예산이라는 가면 아래 숨어서) 그의 화면이 어떻게 그토록 대부분 아무 장식도 없이, 저 스스로 세트임을 드러낼 만큼 단순하며, 거기에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는(또는 설혹 갖더라도 누구라도 즉각적으로 그 인위적인 의도를 알 수 있는) 소도구들과 장식들이 앙상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 채, 세상의 황량함을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 ‘이윽고’ 등장인물들이 도착한다. 그들은 거기서 짐을 내려놓고, 그리고 결국 마주친다. 여기서 시작한다.



 홍상수의 인물들이 항상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마주치고, 그래서 이미 사건이 시작된 것을 수습하려 동분서주하는 동안, 김기덕의 인물들은 인위적으로 우리 눈앞에서 마주친다. 장선우의 주인공들이 우연히 마주치는 동안, 박광수의 인물들이 변증법적으로 마주치는 동안, 허진호의 연인들이 피해가지 못하고 마주치는 동안, 김기덕의 인물들은 뜻밖의 장소에서 인위적으로 마치 주사위가 던져져 내기를 하듯이 마주친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만날 수 없는 만남을 만난다. 이 말의 우스꽝스러움이 김기덕의 폐쇄공포증을 불러일으킬 듯한 감금의 장소를 말 그대로 무대로 만든다. 거기에는 삶을 위장한 연극성이 노골적으로 자기의 윤곽을 드러낸다. 그에게서 만남은 일종의 상연의 시작을 알리는 소란이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삶을 살아가는 대신 자신에게 떠맡겨진 배역을 살아간다.





인간은 짐승을 닮고, 짐승은 여자에게 끌리고



 나는 이 만남의 방식이 김기덕을 자기 세대의 형의 영화들로부터 단절의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한국영화들이 결국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서로 다른 의미의) 패배를 다루기 위해 주인공들의 만남이 다루어지고 있는 동안, 김기덕은 만남에서 비롯되어 이루어지는 그 모든 과정이 결국에는 패배에로 귀결되는 것을 이미 벌어지고 난 다음부터는 어쩔 수 없다는 죄의식으로 무대를 향해 물끄러미 바라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주인공들이 빠져든 사건에 대해서 항상 우유부단하기 때문이다. 사태는 점점 더 나빠지는데도 불구하고 수수방관한다. 그것만이 김기덕이 자기의 고통을 영화로 말할 줄 아는 유일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영화 속의 만남은 김기덕의 증후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고통을 우리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사건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 사건은 항상 결여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우리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낸 함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자리에 불려가 동정하거나 적개심을 갖는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항상’ 김기덕의 영화는 완성된다. 우리의 자리가 비어 있는 저 무시무시한 입법의 권위, 그것을 김기덕은 기꺼이 우리에게 내어준다. 스스로 천박하고, 비열하고, 야비하고, 잔인한 욕설의 비참함을 스스로 안으면서 거기서 자기의 증후를 채우려 드는 그 몸짓은 이중의 죄의식이다. 죄의식의 변증법? 어쩌면! 그래서 김기덕의 영화를 보려면 각오를 해야 한다. 준비론적 패배주의를 보는 것은 비극적이지만, 숙명론자의 패배를 보는 것은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그 어쩔 수 없음은 이미 주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기덕의 주인공들은 자포자기에 이르는 과정을 반복한다. 거기서 그들은 도망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 숙명적인 과정 안에서, 그 황량한 무대 위에서 유일하게 의미를 지니는 것은 신체뿐이다. 그 만남 속에서 벌이는 신체의 연극성은 무의미한 제스처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 이상하게도 정작 섹스는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김기덕이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것은 대부분 섹스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자기의 신체를 다루고 관리하는 기술에서 오는 것이다. 그가 자꾸만 신체에 상처를 내고, 거기에 흔적을 남기려 들고, 숨쉬는 것을 중단하려 들고, 신체 안에 날카로운 이물질을 집어넣고, 심지어 그것을 먹는 식인행위에 이르는 것은 김기덕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구순기(orale Stufe)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로부터 저 미숙한 대상의 주인공들은 남자와 여자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미숙한 인간과 여자로 만나서 만들어내는 사건이다. 김기덕의 영화를 온통 둘러싸고 있는 것은 기괴한 유아성이다. 이를테면 <악어>에서의 차라리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자궁회귀 본능, <야생동물보호구역>의 쌍둥이 형제애, <파란 대문>의 어머니와 아이의 역할을 서로 번갈아 가면서 하기, <섬>의 커다란 자궁과도 같은 낚시터, <실제상황>의 날뛰는 이드, <수취인불명>의 아버지 찾기, <나쁜 남자>의 서로를 찾아가는 거울의 상상적 단계는 예외없이 미숙한 자아의 판타지이다.



 김기덕은 여기서 위험하다. 저 무자비한 초자아의 세상으로 나아갈 바에는 차라리 후퇴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인간과 짐승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은 그 망설임의 표현이다. 인간은 점점 더 짐승을 닮아가고, 짐승은 자꾸만 여자에게 이끌린다. 그 사이에서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신체뿐이다. 그러나 그 신체는 그것이 (우리는 말을 돌려할 필요가 없다) 섹스를 하려는 자지와 보지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 모든 것이 고기와 뼈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역겹게 여겨지는 것이다. 김기덕은 자지나 보지, 젖가슴, 혀나 이빨, 이 모든 것들을 그저 고기와 뼈로 다룬다. 그가 주인공들을 남자와 여자로 대접하는 대신 짐승과 여자로 대하기 때문에 그는 마치 정육점에서 다루듯이 그들의 신체를 고상하게 그릴 필요를 알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역설적인 도망. 그들이 거기서 성공적으로 도망치기 위해서는 신체로부터 벗어나면 된다.





살코기 사이에 끼어드는 제도적인 장식들



 그래서 이제부터 그들은 신체를 둘러싼 겉치장이 갖는 의미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김기덕이 신체를 불결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살코기 사이로 끼어드는 온갖 제도적인 장식들 때문이다. 그 장식들이 들러붙어서 살코기를 자꾸만 그 어떤 다른 것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짐승이라는 은유적 대상과 (항상 그 어떤 사회제도적 자리매김을 당한 채 여기로 불려온) 여자라는 환유적 대상 사이에서 서로 뒤엉켜 붙어버린 신체라는 영토를 사이에 둔 이 기괴한 연극은 보는 우리에게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이 영토를 사이에 둔 둘 사이의 관계가 제도적 투쟁이나 비대칭의 계약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모두들 사랑을 믿는 척하면서 그것을 경멸하는 동안(누구보다도 홍상수, 그리고 자꾸만 그뒤를 뒤쫓으려는 허진호) 이 신기한 시대착오주의자 김기덕은 그걸 정말 믿는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나는 사랑보다 더 허기진 욕망을 알지 못한다. 그건 아무리 채워넣어도 항상 비어 있는 불안이다. 그걸 채워넣기 위하여 김기덕은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꾸만 제도의 장식들이 그들 사이로 끼어들고, 살코기 사이로 파고든다. 남은 방법은 둘 중의 하나이다. 그 하나는 나르시시즘에 빠져들어 세상에 대해, 심지어 상대에 대해 서로 눈멀어버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진정한 사랑에 이르는 것을 계속해서 미루는 것이다. 김기덕은 후자를 선택한다. 여자들이 짐승의 그 끈질긴 구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대답을 미루다가 이제 비로소 그 사랑을 바라게 될 때 정반대로 짐승들은 슬프게도 그 대답을 미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순간 그들은 무대에서 내려와서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불현듯 이제까지 모습을 감추었던 세상이 드러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헛고생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방식이다.





김기덕은 왜 자꾸 숙명을 끌어들이는가?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일관되게 일상 삶의 부재라는 측면이 그의 영화에서의 허구성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김기덕의 영화를 공격하는 사람들은(때로는 옹호하려는 사람들마저) 부재하는 낙원을 생산하고, 거기에 스스로 빠져들면서 히스테리라는 방어를 통하여 나르시시즘을 무한정 지탱시키려고 한다. 그것은 김기덕이 원치 않는 일이다. 우리는 정말로 김기덕이 만들어내는 인공적인 무대 위에서 인위적인 연극성에 몰두하는 주인공들이 그 자신에게 강요된 선택이라는 믿음 때문에 매우 억울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돌아보아야 한다. 이상한 숨바꼭질. 그래서 김기덕은 그 주인공들을 구해내기 위하여 어쩔 줄을 모르면서, 때로는 유치한 방법으로(<야생동물보호구역>과 <실제상황>), 또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반추상의 표현으로(<파란 대문>과 <섬>), 가끔은 상징적 자살의 몸짓으로(<악어>), 하지만 결국은 동어반복으로(<수취인불명>과 <나쁜 남자>) 죄의식에 사로잡혀 막판에 이른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언가 선택을 해야 한다. 선택을 한다는 것은 죄의식으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우리에게 죄의식 안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양자택일. 그러나 그 선택의 대구가 그를 홍상수와 갈라서게 만든다. 대부분 사람들은 윤리적인 것을 선택하기를 종용한다. 그러나 홍상수는 윤리적인 선택 대신 미학적인 선택을 한다.



 내게서 가장 이상하게 보이는 점. 이제까지 김기덕의 선택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나쁜 남자>를 보고 난 다음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또는 사람들이 그를 오해한 것이다. 김기덕은 왜 자꾸 숙명을 끌어들이는가? 그가 숙명에 사로잡히면서 점점 더 인간의 행위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행위는 신의 제스처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기괴한 가정, 그가 마침내 신에게 굴복한다면. 그는 정말로 윤리적인 선택 대신 종교적인 선택을 한다. 이건 과장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쁜 남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기어이 아주 오랜 시간 찬송가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를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한번 들어보라. ‘나쁜 남자’ 한기와 ‘창녀가 된 여대생’ 선화를 떠올려보면서.



…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그는 (어쩌면) 약속을 믿는다. 그래서 언젠가 자기의 주인공들이 무대에서 내려갈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그 고통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어는 세상이 그들을 무너뜨리기 전에 스스로 형벌을 가하는 것이다. 그 형벌이란 항상 사랑이다. 그들의 놀이는 점점 더 연극성을 띠어갈 것이며, 그 안에서 점점 더 히스테리가 심해져갈 것이다. 그래서 그 주인공들이 서로 상대의 몸 안으로 리비도를 흐르게 하려고 미숙하게 몸부림치는 동안, 자신의 낙원을 위협받은 구경꾼들은 점점 더 무대 위의 주인공들에게 자기의 불안 때문에 발작을 일으킬 것이다. 김기덕은 자승자박을 당한 것이다.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 그러니 당신의 죄의식을 즐겨라.



 갑자기 마지막 문장을 쓰고 든 생각; 김기덕이 정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가 이제는 질린 나머지 인터뷰는 더이상 안 하겠다고 선언한 기사를 읽었다. 만일 허심탄회하게 내가 그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한다면 그는 받아들여줄까? 정말 악랄하게, 야비하게, 못된 생각으로, 꼼꼼하게 준비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그의 영화에 대해서 즐겁게 이야기해보고 싶어졌다. 가끔은 그 자신도 악어에게 물리는 경험을 해보아야 한다. 나쁜 영화비평가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