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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그리고 배우 조재현

가/김기덕 2002. 7. 31. 06:42 Posted by 로드365


악어에서 나쁜 남자로, 그의 이름은 조재현

2002.01.29 / 김영진 편집위원  

조재현은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스타의 카리스마와 조금 다른 기운을 뿜어내는 배우다. 그는 무턱대고 겉멋 들린 표정을 잡는 스타의 허례허식을 버리고 인물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고통과 좌절과 슬픔에서 우러나온 독한 눈빛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조재현의 독한 눈빛은 김기덕의 몇 편의 영화에서 밑바닥 인생의 야생 동물 같은 에너지를 표상하는 데 쓰여졌으나 텔레비전 드라마 <피아노>에서 보여준 열연 덕분에 이제 막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눈빛이 감춘 깊은 카리스마의 매력은 변하지 않았다.

<나쁜 남자>에서의 조재현은 말 그대로 나쁜 남자다. 마음에 든 여자를 사창가에 불러다 몸을 팔게 사주하는 깡패 두목 한기는 여자가 몸을 파는 광경을 옆방에 달린 이중 거울을 통해 들여다본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라고 중얼거리고 싶어지는 순간 한기 역의 조재현의 눈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는 마치 수도하듯이 사랑하는 여인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있다. 조용히 그 파멸의 광경을 지켜보며 고통을 견디고 있다. 사랑과 경멸을 동시에 담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싶었으나 사랑할 수 없었던 높은 위치에 있던 여자를 자신과 비슷한 비천한 신분의 인간으로 끌어내린 후, 그녀가 망가지는 모습을 힘들게 지켜본다. 그녀가 충분히 비참해진다면 그녀를 사랑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냥 망가지는 것이다. 깡패가 무슨 사랑이냐고 생각하며 고통을 주고받는 악순환은 운명이라고 여긴다. 고통받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하는 기독교적 구원의 개념도 여기에는 없다. 직접 몸으로 겪는 교접을 거부하면서 그 몸이 불완전하게 망가져 가는 걸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 그 자신도 스스로 망가지며 그렇게 망가지는 그를 마침내 사랑하게 된 여자도 그와 함께 망가진다. 조재현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연기하며 주인공 한기를 속세에서 도를 닦는 인간으로 끌어올렸다. 조재현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지, 도를 닦는 거지. 현실에서 그런 놈이 있겠어요? 나도 그놈을 잘 몰라요. 하지만 시나리오에 씌어진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이렇게 나쁜 놈이라면 한번 믿고 따라가 보겠다고 생각했어요."

조재현의 카리스마는 우주의 어떤 중심적인 특징이 그의 기질과 만나면서 이뤄내는 그런 것이 아니다. 또는 우리 모두 선망하며 따라할 수 없어 좌절하는 그런 것도 아니다. 그가 지금까지 영화에서 맡은 역할 대다수는 주위 세계를 다스리는 그런 기운을 내뿜는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주로 세상으로부터 짓밟히고, 짓밟히는 만큼 공격적인 에너지를 동물적으로 내뿜는 인간의 모습을 주로 김기덕의 영화를 통해 선보였다. 한때 그 스스로가 농담삼아 말했던 것처럼 그는 '김기덕 영화 전문 배우'였으며 결코 사랑할 수 없지만 그 자신도 굳이 사랑을 받으려고 애쓰지 않는 인물을 연기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그가 사랑받는 걸 완강히 거부하면서도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꾸준히 사랑을 베풀고 싶어하는 그런 인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공전의 인기를 끈 TV 드라마 <피아노>는 조재현의 그런 자기 희생적 카리스마를 최대한 멋있게 포장했다. 자식과의 불운한 인연에 대해 내색하지 않으면서 "가슴이 시리가..."라고 읊조리는 그의 모습에서 장렬하게 무너지는 부권의 카리스마를 느끼는 건 어렵지 않다. 그건 조재현의 카리스마가 마침내 음지에서 양지로 옮겨왔다는 것을 뜻하지만 조재현 자신은 아직 완전히 양지로 옮겨갈 마음이 없다.

정말 나쁜 놈이 되고 싶다

"나는 <나쁜 남자>의 주인공을 정말 악한 모습으로 그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촬영을 하면서 그릴 수 없는 인물이구나, 정말 나쁜 남자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정말 나쁜 놈을 연기하고 싶다."

까무잡잡하게 피부가 그을린 배우 조재현의 실제 모습은 그가 영화에서 보여준 거친 이미지의 남자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그의 거친 모습 뒤에는 뜻밖에도 순한 느낌도 숨어 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나 <영원한 제국>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에는 곱게 자란 도련님의 잔영이 남아 있다. 그는 모범생을 연기해도 크게 나무랄 데 없는 외모를 지녔지만 스스로 재미없어 한다. 숱한 TV 드라마에서 그는 그런 평범한 역할을 연기하며 자신의 기력을 소모했다. 조재현 스스로 좋아하는 이미지는 영화에서 그가 선보인 악당의 이미지다.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악한 캐릭터를 많이 해서 그 이미지가 굳어지는 게 아니냐. 그럴 때 나는 다시 말한다. 그 악한 캐릭터 이미지가 굳어질 정도가 됐으면 좋겠다." 조재현은 지금까지 영화에서 자주 악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아직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고 스스로 여긴다. "나는 <나쁜 남자>의 주인공을 정말 악한 모습으로 그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촬영을 하면서 그릴 수 없는 인물이구나, 정말 나쁜 남자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정말 나쁜 놈을 연기하고 싶다."

<나쁜 남자>의 첫 장면에서 조재현은 애인을 기다리는 청초한 여대생 선화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입을 맞춘다. 반항하는 여자의 몸짓을 억지로 누르면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슬쩍 옆 눈초리로 째리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스틸 사진에 담겨져 <나쁜 남자>의 포스터로도 쓰인다. 조재현은 말했다. "나, 그 포스터 너무 마음에 들어. 그냥 여자와 입맞춤하는 것보다 인상을 잔뜩 쓰면서 주위 사람을 힐끗 째리는 게 좋아. 내가 했지만 마음에 든다. 꼭 사람 발에 짓밟힌 바퀴벌레 같잖아. 하하하." 조재현은 그 장면이 죽어가는 바퀴벌레의 표정 같다고 말했다. 만지고 싶지도 않고 보기도 싫지만 보는 순간 지울 수 없는 강렬한 느낌을 전해주는 표정이다. 그게 조재현 연기의 카리스마가 감춘 비밀의 일부다.

"내 마음에는 악한 모습의 높이가 있는 것 같다. 그 수치가 많이 올라가는 것 같다. 그런 모습을 연기로 표현할 때 묘한 즐거움이 있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의 내 연기는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한번도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그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또 그 영화를 본 사람이 너무 없어서"라고 말하며 조재현은 웃었다.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의 창해 역은 조재현의 최고 연기다. 그 영화에서 그는 좀처럼 공감할 수 없는 인물을 연기한다. 실패한 화가 창해는 북한 특수부대 출신 홍산을 파리에서 만나 끝까지 그를 이용하고 착취한다. 약삭빠른 약육강식의 질서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리는 창해의 모습은 정나미가 떨어지지만 문득 그의 행동은 어쩌면 가장 순수한 인간의 모습일 거라는 느낌이 남는다.

김기덕의 페르소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고름으로 발가락이 짓물러 터졌는데도 그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매일 밤 그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파고드는 자신의 발톱을 조금씩 밖으로 빼냈다. 영화 촬영이 끝날 때쯤 그의 발가락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김기덕은 그런 사람이다."

TV 드라마와 영화를 비롯한 대중매체에서 스타 배우들이 멋있는 역을 연기하는 것에 익숙한 세태에 조재현은 거꾸로 대든다. 그는 멋있는 역에 스스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또 이제는 그런 역을 하려 해도 늦었다고 체념한다. 잡지 표지 촬영을 위해 포즈를 잡으면서도 그는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이렇게 멋있는 폼은 장동건이 잡아야 어울리는 건데...." <파이란>에서의 최민식처럼, 또는 곧 개봉할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송강호처럼, 조재현은 악하고 나약한 인간의 이미지를 끝까지 밀고 나가고 싶어한다. 그에게는 <파이란>을 통해 최민식이 이뤄낸 관객과 깊은 정서적 공감을 맺는 그런 관계에 대한 욕심도 없다. 아무런 연민도 구하지 않는 악한 인간의 지독한 모습을 통해 그는 거꾸로 가장 미화되지 않는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려 한다. 그건 부분적으로 감독 김기덕의 세계관과도 통하는 부분이다.

"<악어>는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다. 한강다리 위, 한강다리 밑, 그리고 물 위, 물 속을 담는 공간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걸 잘 살리면 좋은 영화가 나오겠다고 기대했지만 제작 여건이 워낙 열악해 잘 표현해내지는 못했다." 김기덕은 저예산 영화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현장에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감독이다. 그의 조감독의 표현대로 현장에서 생각한 대로 그림이 나오지 않아도 '이것이 영화의 운명이다'라고 선언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흥행이 되지 않을 듯한 영화를 최소한의 제작비로 꾸준히 많이 찍으면서 버텨온 그의 생존비결이지만 그렇게 되는 대로 흐름에 맡기는 데도 그의 영화에는 늘 김기덕적인 것이 있다. 조재현은 김기덕의 그런 뚝심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의 영화의 페르소나를 자임했다. "김기덕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일화가 있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찍을 때 김기덕은 사고를 당해 발톱이 안으로 파고드는 상처를 입었다. 고름으로 발가락이 짓물러 터졌는데도 그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매일 밤 그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파고드는 자신의 발톱을 조금씩 밖으로 빼냈다. 영화 촬영이 끝날 때쯤 그의 발가락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김기덕은 그런 사람이다."

고름이 나오는 상처를 인위적으로 고치려 하지 않는 것은 곧 김기덕 영화의 뚝심과도 통한다. 그의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처지를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김기덕 영화는 위악적이지 않다. 그의 영화의 캐릭터가 뭔가 메시지를 전해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기덕이 살아온 인생에 내가 맡은 캐릭터와 비슷한 인물이 많았을 것이다. 그의 영화 캐릭터가 악의 상징은 아니다. 난 그저 캐릭터의 상황을 불쌍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쁜 남자>에서 선화가 처음 다른 남자에게 몸을 파는 장면을 찍을 때 조재현은 상대역 한기의 자격으로 현장에 입회했다. 사전 리허설 없이 거의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촬영한 그 장면에서 감독 김기덕은 차마 배우들의 연기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아직 충분히 상황이 전개되지 않았는데도 모기만한 목소리로 서둘러 컷을 불렀다. "김기덕은 그런 인간이다. 폭력에의 악취미가 있는 듯이 오해하지만 사실은 마음이 약해빠졌다. 그 장면이 지금처럼 나온 것은 순전히 내 덕분이다. 나는 컷을 부르려는 김기덕을 제지하고 그 장면의 연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조재현은 말했다.

세상과 악수하지 않는 인간의 초상

"배우 초년 시절에 난 감독들이 자주 드나드는 충무로 다방에 죽치고 앉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배우는 눈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선배들이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그만뒀다. 살아 있는 눈빛은 눈을 부릅뜬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건 내가 살아온 삶의 꼴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나쁜 남자>는 김기덕의 영화이면서 동시에 조재현의 영화이다. 조재현의 존재감이 없는 이 영화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말 한마디 않는 한기를 연기했다. 그의 눈빛 연기는 이 영화의 정서와 의미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단서다. "한기는 현실에 있을 것 같지만 없는 인물이다. 배우라고 해서 무조건 그 인물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머리를 깎고 피부를 태워 이 인물의 외모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선 후 최대한 그를 좇아가겠다고 결심했다. ‘네가 어디까지 갈지 모르지만 난 여하튼 널 끝까지 보면서 따라가겠다’는 마음이었다." <나쁜 남자>에서 조재현이 보여준 가장 미묘한 연기는 사실 이중 거울을 통해 여주인공 선화를 쳐다보는 눈빛 연기가 아니라 사창가 주변의 깡패로 하릴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을 살고 있는 한기의 평범한 몸짓이다. 부하들과 맥주잔을 기울이고 화가 나면 유리창을 부수는 따위의 연기는 자칫하면 어깨에 잔뜩 힘을 준 흉내로 비친다. 조재현은 흉내내지 않기 위해 현장에서 한기로 지냈다. 빈둥거리며 놀고 스탭들과 실없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허구 속의 인물로 살았다. "연기라고 생각하지 않고 현장에서 놀면서 찍는 걸 중시한다. 영화라고 해서 감정을 따로 잡아내는 것은 아니다. 현실과 허구의 일치를 향해 가는 것이 연기다." 심지어 조재현은 감정 표현을 위해 실제 성교도 서슴지 않는 에로 비디오 제작 현장의 확인되지 않은 풍문을 들려주면서 그는 그건 배우로서 한번 해볼 만한 도전일 것이라고 말했다. "연기로 어느 순간 진짜에 이르는 거다. 허구가 실제와 겹쳐지는 그런 것은 굉장하다."

<수취인불명>에서 조재현이 연기하는 개장수 개눈은 조수로 일하는 창국에게 말한다. "개가 너를 무서워하도록 만들란 말이다. 네 눈을 보면 꼼짝 못할 만큼." 그리고는 그 자신이 눈을 부릅뜬다. 이 순수한 감정의 집중 상태, 분노와 슬픔과 공격성이 집약된 상태의 모습을 그는 연기자의 지복으로 여긴다.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구별되고 표면상으로 예외적인 자질을 부여받은 사람으로 대접받게 되는 카리스마의 자질은 조재현이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스타가 아닌 배우로 살아오면서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는 법을 배웠다. "배우 초년 시절에 난 감독들이 자주 드나드는 충무로 다방에 죽치고 앉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배우는 눈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선배들이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그만뒀다. 살아 있는 눈빛은 눈을 부릅뜬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건 내가 살아온 삶의 꼴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조재현의 카리스마는 지금까지 인정받지 못했다. TV 드라마 <피아노>가 인기를 끌기 전까지 그는 주목받지 못하는 자리에 있었다. 대중은 그의 내부에 흐르는 긴장을 눈치채지 못했다. 조재현은 자신의 집중력을 비천한 인물에게 투여해 긴장을 고통스럽지만 위풍당당하게 드러내는 법을 안다. 그는 세월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단단한 육체와 빛이 나는 눈동자만으로 대중소비 사회가 스타에게 요구하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젊음에 대한 강박감을 거부하면서도 스타의 지위에 지금 막 올라서고 있다. 그는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자신의 페르소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했으나 그 자신의 격렬한 내적 혼란을 견디고 긴장에 찬 눈빛으로 보는 사람을 나꿔챌 수 있는 힘을 그는 자신의 자그마한 육체를 통해 내뿜고 있다. 조재현은 이 시대의 영원한 반항자 캐릭터이자 세상과 악수하지 않는 인간의 여린 면을 보여줄 배우일 것이다.









도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수취인불명>의 반민정

2001.03.31 / 최상희 기자  

"이 영화를 왜 선택한 줄 아나? 그건 바로 강렬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은옥은 한쪽 눈에 백태가 낀 여고 2년생이고 삶도 파란만장하다. 도전해볼 만한 배역이라고 생각했다."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불명>에서 주인공 은옥 역으로 데뷔한 반민정은 단역 한번 제대로 연기해 본 적 없는 '완전초보'다. 연기를 전공한 덕분에 재학 중 출연한 몇 편의 학생 단편영화 경험이 고작이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생각이나 작품을 고르는 태도는 분명하다. 매력적인 역할이면 망가지는 것도 두렵지 않다는 당찬 신인 배우 반민정을 만났다.

촬영이 12월에 끝났다. 요즘 뭐하고 지내나?
좀 쉬었다. 생각보다 개봉이 많이 밀려 오래 쉬게 됐지만. 지금은 일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일어가 너무 재미있다. 자랑 같지만 꽤 잘한다는 소리도 듣는다. 아는 일본인 친구가 추천해줘 문화교류단원으로 일본에 잠깐 다녀 오기도 했다. 일본어를 잘 해서 일본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

여배우라면 누구나 화면에 예쁘게 비치길 바란다. 하지만 은옥은 예쁜 역이 아니다.
이 영화를 왜 선택한 줄 아나? 그건 바로 강렬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은옥은 한쪽 눈에 백태가 낀 여고 2년생이고 삶도 파란만장하다. 오히려 도전해볼 만한 배역이라고 생각했다.

공개오디션에서 뽑힌 걸로 안다.
맞다. 작년에 8개 영화사가 공동 주최한 '사상 최대의 오디션'에서 1천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뽑혔다. <칼>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수취인불명> 세 작품에 캐스팅됐었다. <칼>은 제작이 미뤄졌고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썩 내키지 않았다. <수취인불명>이 가장 끌렸다.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던데.
원래 시나리오에는 노출 장면과 잔인한 장면이 많았다. 나는 벗는 장면만 좀 조정되면 출연하려고 했는데, 시나리오를 본 부모님이 펄쩍 뛰셨다. 그래서 사실 포기했었다. 다른 기회가 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기덕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수정해 직접 집에 찾아와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허락을 얻어냈다.

시나리오를 고쳤다고는 하지만 노출신을 없앤 건 아니다.
다 벗는 장면은 없다. 노출신을 다 없앤 게 아니라 다 벗고 찍을 장면을 속옷 입고 찍는 걸로 바꿨다. 제일 많이 벗은 장면에서도 속옷은 입는다.

그 장면 찍을 때 기분이 어땠나?
수영복 입고 찍는 거라고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다.

첫 영화인데 촬영이 힘들지 않았나?
김기덕 감독님의 촬영스타일이 단편영화 찍을 때와 비슷해서 적응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촬영장 분위기도 좋았고 재미도 있었다. 거의 평택에서 찍었다. 눈이 많이 왔고, 또 몹시 추웠다. 그것 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단편영화엔 많이 출연했나?
몇 편 찍었다. 내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를 졸업했는데, 재학 중에 영상원 학생들의 단편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

연극할 생각은 없나?
하고 싶다. 동기들 중에 연극하는 친구들을 보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연극과 영화를 병행해서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연극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뭐라고 생각하나?
일단 공연에 들어가면 끝날 때까지 호흡을 끊지 않는 연극과 달리 영화는 호흡이 자주 끊긴다. 연극과 가장 다른 것이 바로 그 점 같다. 연극은 긴 호흡이 필요하고 영화는 순간 집중력과 순발력이 더 요구된다.

촬영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혼혈아인 지흠이 은옥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장면이 있다. 은옥은 한쪽 눈이 불구인데도 지흠은 초상화에 두 눈을 다 멀쩡하게 그려놓는다. 그걸 본 은옥은 지흠이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뺨을 때린다. 그 장면을 찍을 때 감독님이 한번에 끝내자고 하셔서 있는 힘껏 때렸다. 감독님은 오케이 하셨지만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하자고 했더니 지흠역을 맡았던 김영민씨가 "누구 죽일 일 있냐?"며 피했다. 얼굴을 보니 손자국이 찍혀 있더라. 미안했었다.

새 작품 계획은 없나?
아직은. <수취인불명> 끝나고 나서 들어오는 역이 하나같이 창녀역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은옥역은 강렬해서 선택했지만 다음 작품에서 또 그런 역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미지 바꾸는데 1년은 걸린다는데, 음, 사실 좀 걱정이다. 다음 번에는 은옥과는 아주 다른 순수한 이미지의 배역을 맡고 싶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