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rss 아이콘 이미지

“조 회장님·노동장관님, 제발 우리 얘기 들어주세요”

상황 절박…쌍용차해고처럼 죽음 이어질수도
170명에 대한 정리해고 철회되어야 내려갈 것
“공권력 투입되면 선택할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
 

» 김진숙씨는 1평이 채 안 되는 크레인의 조종실에서 농성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김씨는 고독감과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트위터에 몰두할 때가 많다고 한다. “심리적으로 안정이 안 되다 보니 책은 전혀 못 봐요. 트위터를 통해 격려해주는 분들이 많고 여기 찾아오시는 분들도 대부분 트위터를 통해서 오시는 분들이 많죠. 김여진씨도 트위터를 통해서 만났고. 트위터가 현재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소통수단이자 저에겐 무기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김씨가 생활하고 있는 타워크레인. 


18살부터 봉제공·버스안내양·용접공까지 전전
노동운동으로 해고·징역…“선택권 없는 삶이었다”
‘희망버스’ 정말 참신…말할수없이 죄송하고 감사
166일째 한진중 타워크레인 농성 김진숙씨

김진숙(51)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파업중인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안의 35m 높이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노조원 170명에 대한 회사의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20일 현재 166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그가 농성을 하고 있는 85호 크레인은 2003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씨가 해고 조합원 복직을 요구하며 129일 동안 농성을 벌이다 절망감 끝에 목을 매 자살한 곳이다. 김씨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긴 ‘죽음의 크레인’에서 그는 자신을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며 처절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17일 기자가 영도조선소를 찾아갔을 때는 마침 파업 노조원에 대한 출입금지 가처분 집행이 시작돼 경비가 삼엄했다.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가 정문에서 단식농성 기자회견을 여는 틈을 타 조선소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인터뷰는 김씨가 농성중인 크레인 아래에서 잠시 전화로 이뤄졌다. 휴대전화 너머로 들리는 그의 음성은 여전히 단호했다. “170명의 노조원 정리해고 방침이 철회되기 전에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다….” 상하 35m의 거리를 두고 초면의 두 사람이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으로 인터뷰의 형식적 알리바이는 완성되었지만, 인터뷰마저 완성일 수는 없었다. 주요 질문과 대답은 질문지를 크레인 위로 올려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런 인터뷰가 더는 필요 없는 세상이 하루빨리 왔으면 한다.

-이제 그만 내려와도 좋지 않겠나?

“정리해고 철회되면. 안 되면 안 내려갑니다.”

-노조가 파업을 시작한 게 작년 12월이고 당신이 거기 올라간 게 1월6일입니다. 왜 이렇게 장기 대치가 계속되고 있는 겁니까?

“이번 사태는 사용자가 영도조선소를 폐쇄하고 필리핀으로 조선소를 옮기려는 계획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국내 생산기반을 포기하고 국외로 공장을 이전하기 위해서는 정규직을 줄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노조를 무력화해야 할 테니 정리해고를 들고나온 겁니다. 600여명의 노조원 중 주로 젊은 노조원들이 대부분인 170명에 대한 정리해고는 노조를 사실상 해체시키겠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런 부당한 정리해고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이 2003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씨가 자살한 곳입니다.
“그가 죽었을 때 죄책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2주일 내내 울었습니다. 그런데 곽재규 조합원이 뒤따라 죽었습니다. 두 사람 합동장례 치르고 집에 돌아와 무심코 보일러를 켜려다가 흠칫했어요. 동지를 두 사람이나 묻고 와선 그래도 뜨스운 방에서 자겠다고 보일러를 켜는 자신이 그렇게 처량할 수가 없었습니다. 밤새 토해가며 운 뒤로는 한번도 보일러를 켜고 자지 못했습니다. 현재 상황이 그때랑 똑같습니다. 사쪽이 자꾸 저를, 노조원들을 벼랑 끝으로 밀고 있습니다.”

-사용자와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은?

“조남호 회장님, 170명 정리해고한 다음날 경영진들이 주식 배당금 174억원을 챙겨간 건 누가 보더라도 납득할 수 없는 양심의 문제입니다. 더군다나 막대한 흑자가 난 기업에서. 한진중공업 문제의 본질은 영도조선소를 폐쇄하고 필리핀으로 옮겨가려는 목적에 있는 것 아닌가요? 수주를 못 받아서 해고했다는데 수주는 경영진의 책임이 아닌가요? 그리고 우리보다 임금이 훨씬 높은 다른 조선소는 다 받는 수주를 왜 여기만 못 받나요? 수주를 담당했던 조남호 회장님과 아들 조원국 상무님. 우리를 벼랑으로 내모는 두 분은 무슨 책임을 졌습니까? 노동부 장관님에게 말합니다. 쌍용차에서 정리해고 이후 15명이 죽었습니다. 우리도 이 싸움에 지면 그렇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기 전에 제발 누구라도 와서 진심으로 우리 얘기를 들어주세요.”

-지난 12일 전국 각지에서 시민 750여명이 ‘희망버스’를 타고 당신을 만나러 영도조선소를 찾았습니다. 배우 김여진씨 등은 잠시 연행되기도 했지요.

“희망버스는 제가 30년 가까이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겪어보지 못했던 아주 새롭고 신비로운 운동이었습니다. 희망운동. 아무 조직적 연관성이 없는 개인들이 자기 돈 내서, 1박2일의 시간을 내서 낯선 곳, 낯선 경험을 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신선합니까! 그런데 사측에선 희망버스가 오기 전날 용역과 구사대 1000여명을 동원해서 조합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출입문을 완전히 봉쇄했습니다. 김여진씨와 연행된 분들, 그리고 소환장을 받게 된 분들에겐 말할 수 없이 죄송스럽고 감사합니다.”

-그곳 크레인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앞면 유리 빼고는 100% 쇠로 이루어진 공간입니다. 생활은 조종실 안에서 하는데 조종석 빼고 나면 감옥의 독방(0.75평)보다 조금 작아요. 먹을 것은 밑에서 밧줄로 올려줍니다. 작년에 정리해고 반대 단식을 하다 위를 상해 밥은 잘 못 먹습니다. 대신 과일, 군고구마, 죽 등을 먹고 있습니다. 잠은 공권력 투입 얘기가 나온 뒤 신경이 예민해져서 한두시간 정도밖에 못 자는데, 그것도 깊이 못 자고 선잠을 자요. 밤을 견디는 일이 힘듭니다.”

-거기선 무슨 생각을 많이 하나요?

“요즘은 공권력 투입될 때 상황에 대한 상상을 제일 많이 하고 그렇게 됐을 때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그 생각이 제일 커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하나밖에 없어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제 삶이 그랬던 것처럼.”

-결코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크레인에서 내려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목욕. 영화도 보고 싶고. 사람들하고 같이 밥상에서 밥 먹고 싶고. 그리고 아무런 위협이 없는 아늑한 곳에서 잠 속에 푹 빠져보고 싶네요….”

-개인적으로 인간 김진숙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소녀 시절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작가든, 시인이든, 기자든. 맨 처음 읽은 소설이 서커스 단원들의 애환을 그린 한수산의 <부초>인데, 열 번도 넘게 읽었어요. 친구 집에 있는 세계문학전집 40권짜리를 제가 다 읽었지요. 신문배달을 할 때는 신문을 첨부터 끝까지 다 읽고 엄마한테 글을 가르쳐주고….”

-도시로 나와 봉제공, 버스안내양 등도 했더군요.

“부산에 와서 대우실업이라는 옷 만드는 공장엘 갔죠. 만명이 넘는 규모니까 어마어마했죠.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마이크로 욕하고, 불량이 많이 나면 수백명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따귀 때리고 발로 차고. 그런데 이상한 건 그렇게 맞는 사람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런 광경을 워낙 많이 보니까. 저도 따귀 맞고 울며불며 물어물어 노동사무소까지 찾아갔는데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여기까지 왔냐’ 그러더라구요.”

-1981년 대한조선공사에 용접공으로 들어갔는데, 여자가 용접일을 하게 된 건?

“돈 많이 준다기에 했죠. 뭔가 멋져 보이기도 했는데, 막상 현장에 배치되고 보니 너무 위험하고 무섭기만 하지 하나도 안 멋있더라구요. 며칠마다 사고가 터지고. 그러다 저도 넘어지는 철판에 두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니까 그만두고도 싶었는데, 어디 갈 데도 없고 배운 기술이 아깝기도 하고 그래서 계속했지요.”


-해고는 어떻게 당했습니까?

“사고가 참 많았는데 그땐 산재보상이 뭔지도 몰랐죠. 내 돈 내고 사 먹는 도시락 밥에서 쥐똥이 나와도 다들 아무 말도 못 했어요. 그러다가 1986년 노조 대의원에 출마했습니다. 그때는 현장 노동자들이 대의원에 출마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할 때였어요. 출마 포기시키려고 관리자들의 탄압이 심했지만, 1등으로 당선됐어요. 그걸 계기로 억눌려 있던 현장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회사에선 저를 조합원도 없고 노조활동도 할 수 없는 부서로 이동을 시키는 거예요. 안 간다고 버티자 다시 선각공장으로 이동 명령이 떨어지고. 그러더니 대공분실에서 날 끌고 갔어요. 빨갱이 아니냐고. 그 뒤 대기발령 떨어지고, 한번 더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온 뒤에는 바로 해고였습니다. 해고 사유는 상사 명령 불복종. 86년 7월14일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런 걸 어디다 하소연해야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아침마다 습관처럼 회사 앞에 오면 경찰들, 관리자들, 어용노조 간부들한테 패대기쳐지고 발길로 차이고 머리끄덩이 잡혀서 끌려다니는 일을 매일처럼 했습니다.”

-직업 노동운동가로서 삶이 후회될 때는 없었나요?

“저는 18살부터 제 삶을 선택해본 적이 없어요. 먹고살기 위해서는 아무리 무서워도 공장에 가야 했습니다. 대공분실, 해고, 징역… 어느 것도 제 선택에 의한 게 아니었습니다. 블랙리스트라는 게 있어서 취직도 안 됐습니다. 분노는 쌓여만 가고. 운동하는 삶을 후회한다기보다는 10년지기, 20년지기 세 사람을 차례차례 잃으면서, 내가 그때 어떻게 했으면 그들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런 것에 대한 후회는 크지요….”

-결혼할 생각은 안 해 봤나요?

“결혼을 생각하고 꿈을 꿀 수 있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나요? 직업 노동운동가? 혁명가? 어떤 세상을 원하나요?

“운동을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냥 사는 거였죠. 혁명이란 말을 들으면 아직도 가슴이 설레긴 합니다. 어쨌든 지금처럼 인간이 돈에 지배당하고 정의가 불의에 지배당하는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건 혁명밖에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내가 혁명가인가’라는 질문에는 대답이 빈곤합니다. 그저 지금은 정리해고만이라도 없는 현실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래서 정규직이 비정규직이 되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런 비극만이라도 막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입니다.”

-당신의 경력이나 집념, 의지 등을 보면 노동자를 대표해 정치를 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진출할 때 그런 요구들이 많았습니다만, 나는 정치 체질이 아닙니다. 맨날 욕하던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치는 거 자체를 못 견뎌요. 그러나 조남호 회장과는 꼭 만나고 싶습니다. 절박하니까.”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산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요?

“다른 삶에다 데려다 놔도 못 살 것 같습니다. 이 분노를, 이 한들을 품고 어디 가서 어떤 삶을 살란 말인가요? 나를 여기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건 한입니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뿐만 아니라 내가 추모사를 썼던 그 숱한 죽음들, 그리고 해고는 살인이라는 이 소름 끼치는 구호를 아침저녁으로 몇 번씩 외쳐대는 우리 조합원들의 저 불안한 눈빛들, 처진 어깨들을 두고…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가 목숨을 던져 지켜낸 저들을 꼭 살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 삶의 소명입니다.”

김씨의 책 <소금꽃나무>의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다’ 중에서 한 대목을 소개한다.

“제가 해고된, 그 나이 스물여섯. 그날 이후 저는 단 하루도 청춘을 지녀 보질 못했습니다. 차라리 쉰이었다면, 훌쩍 예순이라도 됐다면 그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그냥저냥 삭이며 포기할 수 있었을까요? 마흔일곱에도 해고자로 남아 있는 제가 20년 세월의 무력감과 죄스러움을 눙치기 위해 스물일곱의 신규 해고자에게 어느 날 물었습니다. ‘봄이 오면 뭐가 제일 하고 싶으세요?’ 내게도 저토록 빛나는 청춘이 하루라도 있었다면…. 볼 때마다 꿈꾸게 되는 맑은 영혼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원피스 입고 삼랑진 딸기밭에 가고 싶어요.’ 적개심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닌, 그 순결한 꿈이 이루어지는 봄이길. 부디 저 고운 영혼들이 꽃보다 먼저 환해지는 봄이길. 그런 봄이 부디 저들의 것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김진숙씨가 저 높은 크레인에서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내려올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꽃피는 봄이 오면 희망버스를 나눠타고 원피스를 입은 그와 삼랑진 딸기밭에 갔으면 좋겠다.


20여년 처절한 노동운동…박종철 인권상 받아

김진숙은

1960년생이다. 어린 시절 꿈은 작가였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18살 때 부산에 와 대우실업에 여공으로 취직했다가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말에 그만뒀다. 해운대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했고 신문배달, 우유배달, 버스안내양 등의 직업을 전전했다. 1981년 21살 때 “돈을 많이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의 유일한 여성 용접공이 되었다. 1984년 근로야학 강학이 건네준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밤새 운 뒤 노동현실에 눈을 떴다. 1986년 관리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현장 노동자로서는 처음으로 노조 대의원에 당선되었다가 그해 7월 상사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해고되었다. 1995년 봉생병원 파업과 관련해 구속되기도 했다. 2003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씨와 조합원 곽재규씨의 자살을 계기로 해고노동자들이 모두 복직될 때도 김씨만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의 반대로 복직되지 못했다. 자신이 쓴 삶의 기록들과, 각종 시위 현장에서 한 연설, 추도사 등을 모아 2007년 펴낸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는 지금도 찾는 이가 많은 스테디셀러이다. 현재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며, 지난 8일 제7회 박종철 인권상을 받았다.  -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