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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게 나이가 든다는 건 내면의
시간이 아주 많아지는 것을 뜻한다
정신없이 살다가는 한방에 훅 간다

[김정운의 남자에게]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 김정운 명지대 교수,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가슴 철렁하지 않는가? 휴가철에 읽을 책을 추천해 달라는 원고청탁을 받을 때마다 내가 꼭 추천하는 책의 제목이다. 그대는 도대체 어떤 어른인가? 아침마다 ‘남의 돈 따먹기 정말 힘들다’며 머리카락 휘날리며 달려나가려고 어른이 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평생 이렇게 먹고살기도 바쁘게 살다 가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언젠가 책방의 판매대 구석에 꽂혀 있는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뒤통수를 호되게 맞는 느낌이었다. 독일어로 된 책의 원제목은 좀 생뚱맞다. ‘오늘 존슨은 오지 않는다’(Heute kommt Johnson nicht)는 원제목을 이처럼 기막힌 한글 제목으로 바꿨다. 책 내용은 아주 한가로운 노인의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에 관한 이야기다. 

어릴 적 누구나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에 관해서는 아무 생각 없었다. 그러니 나이가 들어서는 죄다 그 모양으로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거다. 이런 식으로 살다가 성질 고약한 노인이 되는 건 불 보듯 빤한 일이다. 아니 이미 자주 짜증내고, 작은 일에 분노하며, 아주 쉽게 좌절하는 전형적인 ‘한국남자어른’, 즉 ‘아저씨’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차이에 관대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그렇다. 미국 텍사스주립대학 심리학과의 제임스 페너베이커 교수 등은 8살부터 85살까지 3280명의 일기와 같은 기록들과 유명작가 10명의 작품들을 분석했다. 일반인들이 사용한 3800만 단어와 작가들의 900만 단어를 나이에 따라 분류해보니,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긍정적인 정서를 더 많이 표현하고 있었다. 분노, 좌절, 슬픔과 같은 단어들은 젊은이들의 언어였다. 

나이가 들수록 ‘나’, ‘나의’, ‘나에게’와 같은 단어들은 줄어들고, ‘우리’와 같은 공동체 관련 단어들이 늘어났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과 관련된 단어들도 줄어들었다. 시간에 덜 쫓긴다는 이야기다. 동사의 시제에서도 차이가 났다. 동사의 과거형은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중년은 현재형을, 노년으로 갈수록 미래형을 더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미래를 더 많이 이야기하고 노인들이 옛날 이야기를 더 많이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페너베이커 교수는 이러한 변화를 ‘지혜’라고 표현한다. 

지혜롭게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면의 시간이 아주 많아지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정신없이 살다가는 정말 한방에 훅 간다. 태풍에 뿌리째 뽑혀 자빠져 있는 나무는 한결같이 아름드리 나무다. 그 엄청난 두께의 나무들이 아주 간단히 쓰러진다. 폼 나 보이지만 의외로 쉽게 무너진다는 이야기다. 요즘 들어 승승장구하던 이들이 정말 맥없이 자기 목숨을 끊는 경우를 자주 본다. 우리는 큰 충격을 받는다. ‘성공한 어른’이었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내면을 위한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아무리 태풍이 불어도 부러지지 않는다. 채 몇 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가는 줄기가 높게는 수십 미터까지 올라간다. 마디가 있는 까닭이다. 마디가 없는 삶은 쉽게 부러진다. 아무리 바빠도 삶의 마디를 자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주말도 있고, 여름휴가도 있는 거다.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 삶의 마디를 잘 만들어 ‘가늘고 길게’, 아주 잘 사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옛날이야기는 죄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다’고 끝나는 것이다. 

한국 사회 모든 문제의 원인은 ‘굵고 짧게’ 살려는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회적 변비다. 그래서 곳곳이 꽈-악 막혀 있는 것이다. 출처
 

[김정운의 남자에게] 질투는 나의 힘!

20110719 09:42        

        

황상민·최인철·김난도 교수…

이들을 내 비교집단에서 아예

제외하는 것도 행복의 한 방법

  

남자의 질투가 더 무섭다고들 한다. 그렇다. 질투는 유치하고 비겁한 인간의 특징이 아니다. 인간문명의 동력이다. 성서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질투와 문명의 상관관계에 관한 심리학적 알레고리다. 최초의 인간 아담의 맏아들인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다. 신이 동생의 제사만 받자, 카인은 질투한 나머지 동생을 뒤에서 때려 죽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신은 카인을 벌하지 않는다. 오히려 특별한 상징을 부여하여, 다른 사람들이 카인을 죽일 수 없게 만든다. ‘카인의 표지’이다. 카인은 신이 만든 에덴동산을 떠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 인간문명은 질투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질투를 뜻하는 카인의 표지는 인류가 지속되는 한 영원히 떼어낼 수 없는 인간심리의 본질인 것이다. 

현대 심리학은 카인의 표지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1만2000명을 대상으로 돈과 행복의 관계를 연구한 영국의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보이스는 <심리과학>(Psychological Science)에 실린 최근 논문에서 수입이 많다고 무조건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보이스가 밝혀낸 재미난 사실은 사람들이 타인의 수입과 자신의 수입을 비교하면서 행복해한다는 사실이다. 쉽게 설명하면 이런 이야기다. 


숙련된 기술자인 ㄱ은 한달에 200만원을 번다. 자신이 일하는 공장에서 수입이 가장 좋다. 한편 은행에서 일하는 ㄴ은 한달에 300만원을 번다. 그러나 그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수입이 중간 이하에 속한다. 누가 더 행복하다고 느낄까? 보이스의 연구결과는 ㄱ이 훨씬 행복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이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얻어진다는 이야기다. 객관적인 수입이 아무리 많아도 질투를 느끼는 대상이 있는 한 행복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질투는 자신의 불행한 상황을 벗어나려는 심리적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교집단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수입이 모두 늘어나 봐야 별로 행복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의 수입은 그대로 있고 내 수입만 늘어나야 행복해한다는 것이다. 아주 못됐지만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요즘의 내 작은 사회적 성취를 가능케 한 심리적 동기의 대부분도 질투에서 시작되었다. 


독일에서 막 귀국해 한달에 80만원도 못 벌던 보따리강사 시절, 엄청 잘나가던 황상민 연세대 교수에 대한 내 질투는 말도 못했다. 그러나 황 교수는 목소리도 참 특이하고, 짧은 다리에 바지도 짧게 입고 다녀, 나름 위안이 되었다. 머리카락도 내가 훨씬 더 많다. 반면 서울대의 최인철 교수는 키도 크고 생긴 것도 멀쩡하다. 강의도 잘한다. 황 교수와는 달리, 도무지 나와 비교해 위안이 될 만한 것이 전혀 없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김난도 교수는 사람까지 착하고 순수하다. 그가 쓴 책은 나름 베스트셀러인 내 책의 몇배나 팔렸다. 환장한다. 이런 인간들과는 안 만나는 게 최고다. 내 비교집단에서 아예 제외해버리는 것도 행복의 한 방법이라는 이야기다. 


비교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사람들과 노는 것도 괜찮은 대안이 된다. 그래서 하루종일 지하실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며 음악만 듣는 갑수형이나 사진기 걸쳐 메고 천하를 유람하는 광준이형과 자주 어울린다. 삶의 영역이 전혀 다르니 비교할 것도 없어 아주 마음 편하다. 그러나 매력적인 여인들이 있는 곳에는 웬만하면 함께 모이지 않는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는 다 같은 수컷이기 때문이다. 아는가? 세상에 무서운 게 늙은 수컷들의 질투라는 사실을. 명지대 교수,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