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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을 바라보는 6개의 시선

1996년, 그 무엇과도 다른 자기만의 영화전함을 출항시킨 김기덕이 일곱번째 작품 <나쁜 남자>를 내놨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그가 손댄 인물과 이야기들은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평단은 김기덕 영화를 향해 엇갈린 시선을, 김기덕은 평단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날리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뭘 가지고들 그러고 있는가? FILM2.0은 이쯤에서 그의 영화를 해부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잣대 여성, 계급, 폭력을 제시해 그를 재점검해본다. 여기 세 개의 잣대에 엮인 6개의 시선이 있다.


2000년 6월 FILM2.0과 가졌던 인터뷰에서 김기덕 감독은 게릴라적 자신감으로 자신을 옹호했다.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도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가 영화 속의 조재현처럼 살고 싶어하겠는가. 그러나 내 영화는 관객의 열등감을 해소해 준다. 내 영화에 한번 익숙해지면 또다시 보고 싶어진다. 내 영화는 바이러스성이 있다. 현실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지닌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보면 감염된다.” 그보다 앞서 4월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그는 “<섬> 이전의 작품은 내 나름대로 지금의 사회에 대해, 그리고 내 가정과 무엇보다 내 삶에 대해 '날이 서 있는' 감정으로 찍은 것들이다. <악어>가 이 사회 아웃사이더들의 진면목을 보여주려 했다면 <야생동물 보호구역>은 내가 생각하는 우리 분단 문제, <파란 대문>은 아웃사이더들보다 더 '아웃'돼 있는 사람들을 그리려고 했던 작품들이다”라며 키워드를 변별해 자기 영화를 해석했다.

그가 바라보는 자기 영화의 모양새는 극소수일 망정 관객이 인지했던 모습 그대로다. 과연 그들이 김기덕의 말처럼 감염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업 영화의 익숙한 틀에서 벗어난 주인공들과 사건을 전시해 삶의 고통스런 진실에 대면하고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의 시야에 모든 것을 포획해 넣으려는 김기덕의 의도는 거의 정확히 관객들의 심장에 접근해 왔다. 1996년 <악어>라는 이름을 단 김기덕의 첫번째 작품이 선을 보였을 때 그 이야기는 다만 저예산 독립영화의 범주 안에서만 논하기엔 뭣한 극악함과 고름이 막 터져내릴 것처럼 추한 위태로움 안에 있었다. 도대체 악어 같은 인물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이며 그런 그에게 몸을 내주고도 사랑을 느끼는 여자는 또 뭔가.

다음해에 김기덕은 방랑이라 이름 붙여 마땅한 유학 시절의 터전, 파리로 날아가 두번째 작품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내놓는다. 소통하기 힘든 자들의 위험천만한 관계와 파멸로밖에는 종결될 수 없는 극단적인 세계의 모습은 이 즈음 김기덕의 전매특허처럼 인식되기 시작한다. 무서운 스피드와 저돌성으로 바로 다음해 <파란 대문>을 내놓자 <악어> 시절부터 문제시되던 김기덕 영화의 창녀 담론은 주인공 진아와 여대생 혜미의 관계 속에서 본격적으로 불이 지펴지고, 그 자신의 말처럼 “상상 속에서나마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실제상황>은 폭력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섬>은 예술과 광기, 혹은 세련됨과 촌스러움 사이에서 김기덕의 자리를 찾으려는 평단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확실히 그는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자의든 타의든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단의 감독이었다.

그런데 이 즈음 김기덕은 영화 밖으로 튀어나와 세간의 관심을 모으는 또다른 면모를 보인다. <악어>와 <야생동물 보호구역> 시절 그는 제작비도 구할 수 없고 자기 마음대로 영화 만들기가 거지처럼 방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던 환경 속에서 들개처럼 고군분투했다. 평단과 언론은 그의 예사롭지 않은 영화를 옹호하기도 하고 혐오하기도 했으며, 그 와중에 어느 때부터인가 김기덕도 그들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섬>의 기자시사가 있던 날 그는 기자들과 평론가들 앞에 나와 자기 영화를 제대로 볼 줄 아는 기자와 평론가가 한국엔 별로 없다며 자신만만하고 오만해 보이기도 하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여기엔 그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영화를 해석하며 비하한 한 평론가를 향한 불편한 심기도 작용했다. 한국 언론을 향한 일종의 선전포고라 할 이날의 발언은 최근까지 이어져 급기야 그는 “고리타분하고 너절너절한 평론가들은 더이상 내 영화를 보지 말아야한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로 자신의 극단적인 심기를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영화의 안과 밖에서 꾸준히 이어지던 그의 남다른 행보는 일곱번째 작품 <나쁜 남자>에도 건재한다. <수취인불명>과 <나쁜 남자>가 초기 작품들에 비해 대중적이라고는 하나 김기덕의 태도와 그의 영화를 바라보는 엽기, 여성비하, 천박함의 테마들도 여전하다. 부산영화제가 열리고 있던 작년 11월, 김기덕은 PIFF 광장에서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그는 이제 대중적으로도 호감을 주는 감독이 된 것일까? 그의 온화해 보였던 미소는 달라진 그의 심성을 반영하는 걸까? 인기 많아졌다는 기자의 말에 대해 김기덕은 “군중심리죠, 뭐”라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군중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 사건은 이단의 문제적 감독으로 건재해 있는 김기덕의 특별한 자리를 확인시켜 준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를 향한 찬사와 경멸의 시선을 깔끔하게 재검검해볼 필요를 느낀다. 더이상 외곽에서 비아냥거리거나 편견을 들이대는 일은 사양한다. 무작정 침 흘리며 이유 없이 예찬하는 속 빈 근성도 필요 없다. 우리는 구체적이고 치열한 대답을 기대하며 질문을 던진다. 김기덕을 옹호할 것인가, 비판할 것인가?


-이지훈 기자  




CHAPTER 1 김기덕 영화와 '여자'

옹호할 것인가, 비판할 것인가

2002.01.23 / 영화평론가 문일평, 김선아  

데뷔작 <악어>에서부터 여성을 창녀로 전락시키고 그녀들의 육체를 마음껏 ‘사용’하는 남성들의 권력은 김기덕 영화의 최전선에서 총알받이로 기능해 왔다. <파란 대문>의 혜미는 창녀 진아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며 <섬>의 희진은 몸을 팔아 남성들의 일상적 욕망의 허기를 채운다. 급기야 <나쁜 남자>의 한기는 멀쩡한 여대생 선화를 유인해 창녀로 전락시킨 뒤 그녀의 삶이 망가지는 과정을 지켜본다. 여성을 바라보는 김기덕의 이러한 태도는 페미니스트 진영으로부터 맹공을 받아왔다. 과연 당하고도 순응하며 남성적 판타지를 창조해내는 김기덕의 여성들은 이 사악한 마초 감독의 노예로 끌려다니고 있는가, 아니면 여기엔 감독의 진심을 파악하지 못하는 자들의 또다른 함정과 판타지가 도사리고 있는가?





옹호론: 암컷에서 어머니로
2002.01.23 / 영화평론가 문일평  

김기덕 영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모두 창녀다. 여주인공이 몸을 팔지 않는 <악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자기 몸을 위로하기 위해 달려드는 수컷들에 의해 여성들은 모두 창녀가 된다. <나쁜 남자>의 한기를 비롯한 김기덕 영화의 모든 주인공들은 먹이사슬의 끄트머리에서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자신의 뒤틀린 욕망을 여성들에게 쏟아낸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교미 상대는 임의적으로 '임대'가 가능하고 계급적으로 사회 변두리로 밀려난 자라야 한다. <나쁜 남자> 이전에 영화 속의 남성들은 한 번도 길거리를 거니는 새침하고 밝은 여인을 상대한 적이 없다. 그런 여성을 마주하는 것은 자신에게 오히려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계급적인 박탈감을 가중시킨다. <나쁜 남자>에서 한기가 미대생 선화를 창녀로 만들어 사창가의 방구석에 가두는 것도 그녀를 계급적으로 강등시켜 자신이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놓아두기 위해서다. 이는 첫 작품인 <악어>에서 자살을 기도하는 여인을 구해 한강다리 밑에 가두는 것과 대구를 이룬다.

적개심의 먹이가 된 선화가 바닥까지 내려왔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한기는 공격성을 거둔다. 더이상 선화가 자신의 사회적인 박탈감을 자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녀로 전락시키면서 그녀에게서 지워냈던 감정과 그녀의 표정을 들여다보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이제 연민을 작동시키며 상대방의 상처를 안쓰러워한다. 그리고 선화 역시 한기의 본심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폭력 뒤에 숨은 빈자리를 보듬어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는 <악어> <섬> 그리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파란 대문>에서 반복돼 온 관계의 양상이다. 그리고 이는 김기덕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에 대한 남성적인 판타지가 투사되었다고 흔히 비난받는 대목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것은 환상이자 바람이다. 그런데 이러한 파타지는 김기덕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세상에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접촉방식이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은폐된 환상이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자기 본심을 노출시킨 환상이다. 한기를 비롯한 김기덕의 인물들은 여성을 보호하는 한편, 거듭 물 속에, 그녀의 자궁 안에 안기고 싶어한다.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물은 단순히 감독이 취한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계급을 지워내고 그 계급이 얽혀 있던 먹이사슬에 채이지 않기 위한 유일하고 본능적인 방편이다.
한편으로 선화는 조금 다른 종류의 환상이기도 하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선화가 벤치 위에 앉아 있을 때 선화의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책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다. 한기의 눈에 선화는 그 '서양미술사'와 같은 존재다. 그것이 저 길거리에 흔하고, 또 조금은 고상한 것이지만, 그 자신의 손에는 결코 쥐어지지 않는 존재다. 그것은 그가 좀처럼 끼어들지 못하는 세상의 물건이다. 그래서 선화에 대한 환상은 저 길거리의 무심한 발걸음, 자신을 소외시키는 흐름에 접근하고 싶은 욕망이다. <파란 대문>과 <나쁜 남자>에 걸려 있는 에곤 실레의 그림이 영화 속 남녀의 초상이라고 하기에는 그 질감이 서로 너무 다르다. 그 에곤 실레는 조금 더 단순한 사물이다. 그것은 선화의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서양미술사'와 같은 성격을 띤다. 다시 말해 <악어>에서 용패가 물에서 건져낸 여인과 <나쁜 남자>의 선화는 '서양미술사', 에곤 실레 등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파란 대문>의 창녀가 바라보는 여관 주인집 딸도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고, <섬>의 남자 주인공도 성(性)을 바꾸면 같은 자리에 놓인다.

김기덕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생물학적인 암컷과 이상화된 어머니 사이를 오간다. 그런데 매번 암컷에서 어머니로 승화된다. <나쁜 남자>에서 한기는 방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리를 통해, 선화에게서 암컷과 어머니를 동시에 목격한다. 한기는 점점 선화에게 남아 있는 암컷의 흔적을 못 견뎌하게 된다. <수취인불명>에서의 창국이 편지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가슴을 칼로 들어내고, 혼혈아인 자기 자신을 멸시하는 것도 어머니 몸에 남아 있는 암컷의 흔적을 부정하기 위해서다. 연민을 통해 여성들은 성적 공격성의 대상에서 상호 구원을 위한 손길로 전환되는 것이다.






비판론: 여성의 몸을 동원한 동정 없는 세상의 역겨움
2002.01.23 / 영화평론가 김선아  

김기덕 감독이 <나쁜 남자>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 시점에서 나는 오래 전부터 궁금했던 걸 스스로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궁금증은 왜 다수의 남성평론가들이 그의 영화를 마니아 영화, 예술영화 혹은 작가 영화로 부르고 추앙하는가다. 김기덕 감독의 가장 커다란 팬은 일반 영화관객도 아니고 여성들(으악!)도 아닌 바로 남성평론가들이다. 그들이 바로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시선의 권력에 대한 질문을 지워버린 채, 타자의 이미지-특히 여성-를 착취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초월적 작가의 영화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작가의 만신전에 올라서 자기 영화가 싫으면 안 보면 될 거 아니냐고 소리 높여 이야기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일반적으로 남성평론가들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평가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한국 남성감독들은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리얼리즘'이니 '모더니즘' 이니 문제적인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눈감아 준다는 걸 전제로 하고 분류해 보자. 한국의 남성감독들은 박광수, 장선우에서 이창동까지의 리얼리즘 영화감독군, 홍상수, 허진호 등의 모더니즘 영화감독군, 그리고 강제규, 장윤현, 김상진 등 90년대 폭발적으로 출현한 장르 영화 감독군 등으로 나뉜다. 평론가들은 김기덕 감독이 이 지형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적인 작가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김기덕의 영화는 한국영화 지형도에서 별난 개별성을 확보하게 된다. 증오와 폭력을 통한 하층계급의 재현이라는 미명하에 진정성을 획득하고 개연성과 핍진성이 부재해서 상투적이고 말도 안 된다는 소리가 절로 나옴에도 불구하고 색깔과 상징 혹은 압축과 생략이니 하는 미학 용어가 붙게 된다. 이는 남성평론가들 또한 하층계급 남성에 대한 낭만적 시선, 물리적 힘에 대한 선망, 가부장제에서 남성이 여성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타자화와 혐오, 심각한 분위기를 잡는 영화를 옹호하는 데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타자의 타자, 즉 매춘부와 같은 하층계급 여성의 위치는 그들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남성들간의 공모적 계보에서 김기덕의 영화는 점점 더 착취적인 타자 이미지를 공고히 하게 되고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나쁜' 남자라서 그렇다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단계에까지 이른다. 사태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는 전례 없는 작가적 서명을 보여준다며 확실한 입지점을 굳힌 채 작가 영화, 소수의 영화로 계속 소비되고 있는 실정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김기덕의 영화는 대부분 말이 안 된다. 그의 영화는 시선을 자극하는 사건을 억지로 만들기 위해서 현실의 하층계급과 여성 모두를 착취적으로 끌어들이는 영화이며 그 억지와 상투성을 봉합하기 위해 시각 이미지를 동원한다. 특히 여성은 남성의 욕망을 반사시키는 자동 거울이기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법한 여성이 등장하게 된다. 사건은 항상 '남성의 충동'이 야기되고 해소되는 과정으로 전개되고 이는 반드시 말하지 못하는, 말할 수 없는 성기만을 지닌 동물인 여성이 동원되어야 완성되기에 여성의 이미지는 도구적으로 착취되는 것이다. 배운 게 깡패질밖에 없는 남성보다 더 낮은 계급이 바로 여성이며 그래서 하위 주체인 여성은 다시 한번 타자의 타자가 되어 말하지 못한다. <수취인불명>에서 창국 엄마가 쓴 편지가 무엇인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나쁜 남자>에서 깡패 한기는 '깡패가 무슨 사랑이야'라는 한마디를 씩씩거리며 한다. 이는 <섬>에서의 여자가 말을 봉쇄당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나쁜 남자>에서 한기가 뱉은 그 한마디는 여자에 대한 자신의 복수는 바로 사랑이 뭔지 몰라서 그런 거라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혐오-복수 서사를 정당화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쁜 남자>는 작가라는 이름으로 타자의 이미지를 착취하는 극점에 와 있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성적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남성에 대한 동정을 요구하고 더 나아가서 피해 여성이 그 남성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영화다. 여성의 몸을 동원해 동정 없는 세상을 재현해서 작가 영화로 추앙받았던 그의 영화가 이제는 여성 스스로의 승인과 동화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파란 대문>의 새장 여인숙 앞 해변이 <나쁜 남자>에서 재등장하듯이 여성에 대한 상투적인 은유와 물화를 지겹게 찍어내는 복사기 앞에서, 영화의 허구성을 빌미로 타자의 이미지를 밑도 끝도 없이 착취하고 있는 영화 앞에서 작가 영화의 신전을 걷어치우고 처음부터 다시 그의 영화는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수취인불명>에서 보여준 역사적 맥락 위에 놓인 등장인물의 재현과 그의 다른 영화를 구별짓기 위해서라도, 초월적 '작가'라는 미명하에 영화를 남성의 헤게모니를 관철시키는 장으로 만드는 이 공모된 담론을 중지시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CHAPTER 2 김기덕 영화와 '계급'

2002.01.23 / 영화평론가 이상용, 오동진 편집위원  

김기덕 영화의 주인공들은 예외 없이 밑바닥 인생들이다. 사창가 건달 두목인 <나쁜 남자>의 한기나 자살한 시체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악어>의 악어, <수취인불명>의 희망 없는 젊은이들과 <섬>과 <파란 대문>의 창녀. 세상의 암초에 걸리고 만 그들의 삶은 김기덕 영화의 가장 커다란 정체성이다. 그런데, 대체 그 분노란 세상을 뒤바꿀 혁명의 의지와 대안의 순기능을 담보로 하고 있는 걸까? 혹시 그것은 공허하고 무책임한 흥분의 부산물만은 아닐까? 아니면 감정의 폭발만으로도 그들 인생의 심성과 연대하는 미덕이 있는 걸까?





옹호론: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2002.01.23 / 영화평론가 이상용  

<나쁜 남자>의 소재로 쓰인 '에곤 실레'의 그림은 모더니즘의 경향을 대표한다. 그런데 김기덕은 이러한 역사적, 비평적 맥락을 온전히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창가 풍경과의 대비를 통해 의미를 일그러뜨린다. 마치 이발소에 걸린 모나리자의 그림처럼 실레의 인물화는 통속적인 한 장의 '키치화'로 바뀌는 것이다.

흔히 저속함이나 통속적이라는 뜻으로 풀이되는 키치(kitsch)는 대중들이나 하층계급의 취향을 뜻한다. 김기덕 영화가 주로 설정하는 창녀로 대변되는 여성, 무자비한 폭력, 운명적인 연애관은 키치의 밑그림이다. <나쁜 남자>의 여대생 선화를 통해 대변되었듯이 고급 문화의식의 허위를 꼬집는 키치의 감수성은 위반과 모반으로 하위 문화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주요한 수단이다. 이러한 감수성을 통해 김기덕의 영화는 자연스럽게 하위계급의 심성(망탈리테)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이 '대의명분', '이념' 등과 같이 의식적으로 삶의 목표로 삼아 추구하려는 것을 일컫는다면, '망탈리테'는 집단적으로 확립되기는 했지만 반드시 의식적이라 할 수 없는 태도, 규범, 특정 집단의 가치관 등을 지칭하는 말이다.

김기덕은 데뷔작 <악어>에서부터 아웃사이더의 수호자라 불릴 만큼 하층계급의 남성들을 주로 다뤄왔다. 파리로 공간을 옮긴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도, 미군 기지의 주변 마을을 다룬 <수취인불명>에서도 이 점은 바뀌지 않았다. <섬>에서 쫓겨다니는 남자나 <실제상황>의 거리 화가에게서도 하층계급의 형상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김기덕의 집요한 일관이었다. 물론 그런 일관성이 하층계급의 심성을 적확하게 보여준다거나 심도 깊게 그려낼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언뜻 감독의 자화상을 엿보게는 하지만 김기덕은 그들의 정체성이나 문제의 본질을 탐구하는데는 관심이 없다.

김기덕이 주요하게 다루는 것은 그들의 분노이다. 아웃사이더들의 분노가 정당한가는 중요하지 않다. <실제 상황>에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는 화가의 분노는 추상적으로 이해가 가지만 구체적인 행동의 실마리를 찾기는 어렵다. 더구나 그것이 꿈이었다는 식의 결말에 이르면 이야기가 해프닝으로 전락하는 어설픔까지 보여준다. 그러나 김기덕은 이러한 해프닝 자체를 즐기고, 그것을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 생각한다. <섬>의 주인공들이 낚싯바늘에 신체를 옭아매는 행위 역시 극단적인 충격을 주기는 하지만 추상화된 분노이며, <악어>의 밑바닥 삶에서도 구체적인 생존 본능은 제공되지 않는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것이 김기덕 영화의 힘을 보여주는 말이다. 분노를 통해 자멸할지언정 그의 영화는 개인들의 독백을 영화언어로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그것은 한국 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시선의 위치이자 김기덕 영화가 지닌 야생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문제는 이러한 분노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확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남과 여로 대별되는 인물의 관계 설정은 가학과 피학의 일차 함수에 머문다. 약간의 변주는 있다. 등장인물들이 서로 폭력을 가하는 <섬>이나 상호이해를 얻는 <파란 대문>과 같이 두 인물 사이의 변화를 의식한 장면이 최근작으로 올수록 자주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시도조차 도식이나 비약으로 이루어져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영화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등장인물들의 의식보다 감독 자신의 세계관이 강조되는 탓이다. 드물게 절제의 미를 보여준 <나쁜 남자>에서조차 선화가 사내를 위해 기꺼이 포구에서 몸을 파는 마지막 장면처럼 감정의 극한으로 드라마를 한순간에 떠밀어버리는 것이다. 그에게 절제는 턱없는 예술가의 오만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하위계급의 정체성이 사회나 구조의 힘을 입지 못하고 문제 제기에 그치는 것은 아쉽다. 운명의 모습이라는 것 역시 넓게 보면 '망탈리테'의 일종으로 사회나 집단이 형성해온 습속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망탈리테를 폭로하려고만 하지 묶어서 보여주려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김기덕의 최근작들은 조금씩 가능성을 열고 있다. 집단의 심성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수취인불명>은 마을 주민들의 집단의식(혼혈의식)을 통해 인간사의 한 단면을 잘 취한 예였다.





비판론: 김기덕의 분노, 그러나 이상한 아쉬움
2002.01.23 / 오동진 편집위원  

<나쁜 남자>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깡패 한기(조재현)가 부하 조직원을 두들겨 패다가 던지는 말이다. 한바탕 광란을 벌인 끝에 그는 이런 얘기를 한다. "이... 깡패 새끼가... 무슨 사랑이야." 한기의 이 말에는 여자를 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에 결국 그녀를 사창가에 데려다 놓긴 했지만 그녀를 결코 가질 수 없는, 자신의 계급적 한계에 대한 회한이 잘 담겨 있다. 그같은 후회와 안타까움, 동경의 의식은 이 영화의 주된 흐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중 거울로의 엿보기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한기는 선화(서원)가 손님에게 학대당하고 유린당하는 장면을 훔쳐보면서 곤혹스러워한다.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듯이 김기덕 영화의 미덕은 밑바닥 인생에 대한 체화된 감성을 작품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아마도 그것은 감독 스스로 그같은 경험을 직접 겪었던 것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영화가 다른 작품에 비해 보다 직접적이고, 보다 파격적일 수 있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김기덕 영화의 엽기성? 그의 영화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현실은 때로 상상속에서 그려나가는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며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삶의 진실이란 사랑과 증오, 구원과 타락, 아름다움과 추함이 혼재하는 비논리적인 상황 속에 있음을 그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양 극단의 삶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지금 얼마나 순진하고 한가한 삶을 살고 있느냐라고 김기덕은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분노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영화를 보고 나면 그 감정이 한순간에 휘발돼버리고마는 1회성에 그친다는 점에 있다. 그가 무려 7편이나 되는 작품들을 통해 뱉어낸 사회적 분노가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이돼, 보다 공적인 담론의 장으로 확산되는 것은 안타깝게도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소 위험을 무릅쓰고 단정적으로 얘기하건대 그건, 김기덕 감독 본인이 존재론을 인식론으로 확장시키려는 공부와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혹은 계급성을 계급적 연대의식으로 확대시키려는 태도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늘 고독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의 공격성이 개인적인 차원의 욕구불만으로 비춰지고 있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그의 작품이 늘 우리 영화계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는, 호의인지 반감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평가를 듣는 이유는 그가 작품 속에서 그려내는 주인공들이 늘 사회역사적인 파경이 빚어낸 '논쟁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수취인불명>의 혼혈아든, 그가 작품마다 애정을 피력해오고 있는 창녀의 존재든 대체로 그의 주인공들은 우리의 굴절된 시대와 역사, 사회구조가 양산해 온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에 대한 구원은 어느 한순간의 깨달음 같은, 우연성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그는 이 우연한 각성의 순간을 종종 극중 인물들의 엽기적인 자기 학대나 죽음과 같은 자기 파괴의 모습으로 그린다). 그는 이상하게도 이 '거지 같은' 세상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화를 내면서도 그런 세상을 바꾸는 데는 쉽게 동참하려 하지 않는다. 때론 종교적 감성으로 숨어들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판타지의 세계로 사라져버린다.

그의 작품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몰역사성에서 찾아진다. 지금 우리가 왜 여기에 서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아예 거두절미하고 나간다. '왜?'라고 물으면 영화적인 생략어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이나 <수취인불명>이 전쟁과 분단, 미국이라는 사회역사적 이슈를 이리저리 피해간 기묘한 영화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역사성이 무시될 때 계급적 돌파력은 현저히 약화된다. 사회에 대한 전망이나 믿음 역시 더이상 나의 일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상실된다. 김기덕 영화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신체 학대의 장면들은 세상과 사람에 대한 냉소에서 비롯된다. 물론 세상의 잔인성은 외면만 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보다 더 잔인해져야 살아남는다는 야생동물의 생존 본능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걸 승화시켜야 할 무엇인가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김기덕 영화의 문제는 정치적으로나 계급적으로 올바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계급과 역사의 문제를 아예 무시하고 간다는 데 있다.






CHAPTER 3 김기덕 영화와 '폭력'
2002.01.23 / 이지훈 기자, 영화평론가 김성욱  

인간의 식도를 유린한 <섬>의 낚싯바늘 이미지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다. 김기덕 감독은 극단적인 신체 훼손과 폭력적인 삶의 이미지들을 보여주며 그것을 자신의 메시지와 연동시키려 한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태반의 평가는 엽기적이라는 투의 호기심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비난이었고, 옹호의 시선은 소수에 그쳤다. 그의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이라 평가받는 <나쁜 남자>에서도 여전히 발견되는 폭력. 과연 육체와 삶과 이야기를 넘나드는 그 기괴하고 섬뜩한 김기덕의 폭력은 선정주의와 삐뚤어진 창의력의 혐의를 넘어 작가적 진심 속에 있는가?




옹호론: 폭력은 그들의 도덕이자 순결이다
2002.01.23 / 이지훈 기자  

쉽게 상상하기 힘든 도구를 사용한 신체의 훼손은 김기덕 영화가 보여주는 폭력 아우라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나쁜 남자>에서 한기는 달수파 건달의 거대한 유리 조각에 복부를 찔리는데, 이것은 흔한 폭력 장면들과 바탕이 다르다. 신체 훼손의 폭력과 관련, 김기덕에게 있어 세상은 폭력이 상존하고 있는 곳이 아니라 어느 순간 잔혹한 행위가 섬광처럼 솟아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곳이다. 김기덕의 폭력은 일상적이거나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이고 미학적이며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시점과의 기묘한 대비를 이루는 추상적 오브제다. 도리어 세상의 폭력과 맞서 버티거나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는 남다른 방편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한기를 향해 날아오는 유리 조각은 달수파의 분노가 담긴 세상의 폭력이지만, 그것이 한기의 복부를 관통한 바로 그 순간의 섬뜩한 내파 속에서 한기는 주저하며 패퇴해온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삶의 주변과 숙명을 스스로 매듭지어야 한다는 전의를 떠올린다. 사창가에서의 지리멸렬한 평화는 부도덕하고 폭력적인 세계의 질서에 안주한 한기를 보여주지만, 그 자신의 (피)폭력은 세상의 폭력 질서를 흐트러트리고 엇나가며 자기 삶의 자족적인 도덕성을 확보한다. 그것은 진심이나 순정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김기덕의 주인공들이 누군가를 해치거나 해침을 당했을 때 그것은 세상에 대한 무거운 절망과 패배감을 가져오는 대신 주인공의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며 적어도 자기 의지 안에서는 순결에 대한 자신감을 환기시킨다. 서로의 신체를 향한 훼손의 손길은 삶이 절망의 끝에서 부서지려는 순간 서로의 순결을 시험하고 확인하려는 소통의 의지와 같아지는 것이다. <나쁜 남자>에서 선화를 창녀로 만들어 뭇 남성들이 그녀의 몸을 유린케 하는 한기나 이와 대구를 이루는 김기덕 감독의 데뷔작 <악어>에서 집단 강간을 당하고 자살하려는 현정을 살려내 폭력적 육체관계를 지속하는 악어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그녀들과 소통한다. 희진의 성기와 현식의 목구멍을 파괴시킨 <섬>의 낚싯바늘 역시 일반적인 세상의 정상적인 대화로는 서로를 알아볼 수 없는 극단의 위태 속 두 남녀가 서로의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로 등장한다.

관습적인 시선으로 볼 때 김기덕의 영화가 담고 있는 폭력은 개연성이 없고 지나치게 극단적이며 선정적으로까지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폭력이 다만 저예산 독립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나름대로의 스펙터클만은 아니기에 신체를 도려내고 헤집는 김기덕의 이미지들은 나태해진 정신에 자극을 가하며 삶의 근원을 향해 날아간다. 그 근원 속엔 야생적이며 동물적인 원초성이 있고, 몸에 집중하먼서 솔직해지고 싶은 열망이 담겨 있다. 김기덕의 영화엔 세상을 재단하고 사유하는 머리의 철학이 없다. 그의 주인공들은 무조건 부딪치고 상처내고 깨지고 숨을 고른 뒤에 서로를 바라보며 악수를 청하는 육체의 신민들일 뿐이다. 김기덕의 영화는 관념의 먼지들 대신 1차원적인 육체와 육체의 완전한 합일 아니면 완전한 무를 지향하는데 이때 훼손된 신체란 폭력의 대상이기 전에 서로의 삶을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된다. 김기덕의 폭력은 많은 경우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의 반복이다. <섬>의 낚싯바늘은 희진과 현식의 비어 있는 육체를 연결시키는 장치다. <수취인불명>의 창국은 어머니의 육체에서 가슴을 비우는데, 여기엔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무 혹은 순결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고픈 소망이 담겨 있다. 육체를 비우거나 채우는 김기덕의 폭력은 때로 촌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삶의 원초적 의지와 어우러진다.

육체에 대한 남다른 폭력의 이미지들은 <실제상황>에서와 같은 삶의 폭력성, <수취인불명>의 역사적 폭력성과도 일맥상통한다. <실제상황>의 화가는 주위를 에워싼 위협들에 불안해 하다가 자기 삶의 근간에 도사린 폭력을 한순간에 폭파시킨다. 이것은 몸과 몸이 부딪침으로써 완전히 채우거나 완전히 비우는 육체의 폭력처럼 세상의 폭력에 그만큼의 에너지로 대꾸하는 방식이다. <수취인불명>에서 역사가 남긴 폭력은 지흠 아버지의 총으로 상징화되거나 은옥의 눈을 통해 가시화되고 창국의 분노로 추상화되지만 논바닥에 처박힌 그의 기괴한 파멸에서 완전히 거부된다. 이 영화는 어린아이의 순박한 심정과도 같이 역사를 향해 이제 완전히 가라앉아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데, 이 절대적인 파멸과 새로운 시작의 마련은 육체의 폭력과 동일하다. 그리고 흔히들 말도 안 된다고 비난하는 김기덕 영화 특유의 헝클어진 내러티브가 폭력적으로 관객과 만날 때, 그것은 어리둥절하고 극악스럽지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소통하는 그의 주인공들처럼 생채기 속에서 발화하는 진심에 맞닿게 된다.





비판론: 신체의 훼손에 관한 남자의 '나쁜' 상상
2002.01.23 / 영화평론가 김성욱  

김기덕은 파괴의 강렬한 힘을 구성의 긍정적인 힘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한다. 전자가 삶이라면 후자는 어떤 운명적인 이미지에 가깝다. 하지만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은 그의 '나쁜 상상'이다. <나쁜 남자>는 그것을 수긍하는 영화다. 하지만 "그래 좋다. 나도 남자가 나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그 남자가 나쁜 남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라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김기덕은 나쁜 남자를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을 문제삼으며 "좋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렇게 바라보는 당신들의 거울을 파괴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야생적인 삶을 파괴하면서 김기덕의 영화는 신체를 파괴하고 삶의 잔혹함에 도달한다. 김기덕은 무너지는 신체를 표상하고 비추기 위해 그림, 사진, 그리고 유리 거울을 들이민다.

그의 영화에서 몸은 삶의 전일성을 표상하지만 그것은 또한 파편화된 신체의 일부, 이를테면 눈과 만난다. <수취인불명>에서 세 명의 젊은이는 무언가의 파편으로 인해 눈에 손상을 입는다. 또다른 장면에서 미군 병사는 한쪽 눈에 손상을 입은 은옥에게 서양잡지에 실린 여자의 눈을 오려 붙인다. 역사의 굴레에 사로잡힌 몸과 이미지의 파편인 눈이 만나면서 이중적인 교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쁜 남자>에서의 눈은 곧바로 주인공 한기가 여주인공 선화가 몸을 파는 방을 들여다보는 이중 거울로 연결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한기가 선화에게 퍼붓는 갑작스런 키스는 눈과 대상과의 만남을 몸과 몸의 만남으로, 즉 현실에 개입한 난폭한 욕망을 통해 넘어서는 안될 거리를 넘어서는 위반이다. 그것은 남자의 '나쁜' 상상을 곧바로 퍼포먼스로 현실화한다. 한기의 그런 행동은 해병대 군인들과의 격투 끝에 입은 신체적 훼손과 자신에게 침을 뱉는 여자의 도덕적인 경멸로 이어진다. 한기는 계략을 꾸며 여자를 사창가로 데려온 후에 이제 자신의 몸을 숨기면서 자신의 눈으로 몸을 파는 여자를 바라보고, 행동을 주저하면서도, 무언가를 기대하고 상상한다. 그 모든 것은 이제 '눈-거울'을 통해 매개된다. 영화 곳곳에서 우리는 한기가 훔쳐보는 유리 거울과 만날 수 있다. 이 거울은 자신의 육체를 반사하는 표면이자, 누군가를 훔쳐보고 접촉하고(면회실의 유리창처럼), 남을 찌르고, 신체를 훼손하는 데 사용된다. 그는 자신의 삶의 이면이자 판타지의 일부인 선화를 자신의 공간으로 데려가고 거대한 유리 거울을 통해 접촉할 수 없었던 저편의 세계를 자기화하며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다. 유리 거울은 그래서 일종의 영화 스크린이다. <나쁜 남자>는 영화 전체가 유리 거울 저편의 세계, 한 남자의 욕망과 상상의 세계를 그린 감독 자신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선화는 모래밭에서 발견한 얼굴 없는 사진을 유리 거울에 붙인다. 그 빈 얼굴 안에 채워지는 것은 거울을 보는 여자와 여자를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이다. 그것을 운명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차라리 부동하며 고집스러운 하나의 견고한 이미지(이를테면 에곤 실레의 견고한 회화 이미지)에 근접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닌가? 혹은 그 견고한 자리를 가볍고 유동적이고 분열되고 흩어지는 불안정한 몸으로 채우고자 하는 시도(감독 자신이 삶이라 부르는 것)가 아니던가? <수취인불명>에서 창국의 돌연한 죽음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발생하고 마치 그의 몸은 빗나간 포탄의 궤적을 그린다. 하지만 정확하게 그의 몸은 어떤 목표에 꽂히고 그 자신도 완벽한 이미지로 변모한다. <파란 대문>에서 진아는 에곤 실레의 누드화를 바닷가 모래밭에 비스듬히 꽂아놓고 자신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쓰러진다. 회화의 견고한 이미지와 달리 김기덕 영화에서 인물들의 몸은 무너지고 쓰러지고 훼손된다. 하지만 그 고집스럽고 견고한 이미지에 파고드는 것은 빗나간 삶, 아니 변화된 신체다.

이 모든 것은 그럼에도 남자의 꿈, 상상, 판타지에서 출발한다. 여자는 그 거울을 깨뜨리고 그 깨진 거울의 파편들로 거울 저편의 세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와 만난다. 그 만남의 순간에 현실은 상상에 개입되고 변화된 신체는 견고한 이미지로 돌변한다. <나쁜 남자>에서 김기덕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파편화된 거울을 들이밀고 거기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며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그래서 <나쁜 남자>는 남자의 나쁜 상상을 다룬 영화이자 김기덕 자신의 나쁜 세계를 그리고 있는 한 편의 초상화 혹은 자신의 영화에 관한 영화처럼 보인다. 나쁜 '상상'에는 동의한다. 누구나 정신의 무대 위에 완전한 자유를 상영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김기덕의 그것이 '나쁜' 상상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