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요즘세상에 편지라니.
이거 너무 낭만적이잖아.
반짝반짝 빛나는 젊은 날.
조용하고. 아름답고. 설렌다.
2011.6.3
<타임머신> 나는 네가 잡아먹히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안녕 안녕 동쪽별!
로저 애버트 아저씨 이야기 진짜 충격이다. 나도 그의 영화 평론집 <위대한 영화>를 읽었어. 그가 카사블랑카와 잉그리드 버그먼에 대해 쓴 글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그새 그런 일을 겪었구나. 인간이 목소리를 잃는다는 건 어떤 걸까? 사실 말은 너무나 중요해. 갑자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글이 생각나.
로저 애버트 아저씨가 현대 과학이 가능하게 만든 최첨단 장비의 도움으로 자신의 의견들을 전달할 수 있게 되어서 천만다행이야. 하지만 다른 생각도 해볼 수 있어. 우리 시대엔 아무도 첨단 장비라고 생각하지 않는 라디오에 관한 이야기야. 남미에서 어떤 라디오는 목소리 없는 자들의 말을 전달하는 일을 했었어. 입이 있어서 말을 해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의 상처받은 목소리를 전달하는 일을 라디오가 했단 말이야. 결국,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의견이라도 나눌 방법이 있다는 것은 한 인간이 존엄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일 일거야.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알아들으면 나도 어쩜 누군가에겐 최첨단 인간이 될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런데 나에게 암만해도 병이 하나 생긴 것 같아. 네가 책 이야길 하면 나도 꼭 그 이야기를 따라 하고 싶거든. 꼭 너만 졸졸 따라다니는 장난꾸러기 메아리가 된 것 같아. 벌써 지난주만 해도 진 리스 이야긴 꺼내지도 못했는데 오늘은 또 타임머신 이야기가 하고 싶다. 이를테면 그렇다면 ‘너는 미래가 뭐라고 생각하니?’ 같은 질문들부터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표지 사진을 보면 무슨 생각이 나니?' 같은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터져 나와. 게다가 신기한 머피의 법칙도 있어. 네가 읽은 책은 분명히 나도 가지고 있는데 읽으려고 찾으면 사라져버린다는 것. 그로부터 대략 일주일 뒤에 나타난다는 것. 지난번엔 유토피아가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이번에는 타임머신이 사라졌어. 지난주엔 떡볶이 먹고 기운 내서 썼는데 오늘은 먹을 거라곤 시든 양배추뿐이구나. 눈물이 난다.
그래도 오늘은 기필코 진 리스 이야길 하고 넘어갈래. 진 리스는 어느 날 제인 에어를 읽고 심기가 불편했어. 그리고 로체스터의 부인 앙투아네트가 어떻게 미쳐 갔는지를 쓰기로 맘먹어. 그러니까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제인 에어의 전편에 해당해. 로체스터는 그녀가 미친 것이 집안의 유전이라고 하지만 진 리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대영 제국 식민지 주변부, 불행한 자들의 손실이 영리한 자들의 이익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같은 백인끼리도 서로를 이해관계로만 보는 탐욕과 시기심으로 가득한 땅에서, 백인일지라도 몰락한 백인의 딸이면 흰 바퀴벌레라고 불리는 세상에서 앙투아네트란 소녀는 오로지 단 한 가지만을 원해. 그것은 안정감이었어. 고립과 불안 속에 살던 앙투아네트의 아름다운 어머니는 앙투아네트의 동생을 화재로 잃고 나서 흑인들에게 몇 번이고 겁탈당하고 미쳐서 죽어가지. 앙투아네트는 로체스터와 결혼할 때 이렇게 물어봐.
로체스터는 평화와 행복과 안전을 약속하며 결혼을 했지만, 그의 속마음은 이런 것이었어.
로체스터가 앙투아네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대영 제국이 식민지를 바라보는 시선 그대로였어. 아무 근거 없이 권위적이었고 미신에 가까운 의심에 가득 차 있었던 거야. 로체스터가 제발 나를 사랑해 달라고 말하는 앙투아네트에게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니?
한 치의 동정심도 연민도 없는 잔인한 마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겠지. 그리곤 앙투아네트를 다락방으로 끌고 오는 거지. 앙투아네트에게도 유토피아는 있었어. 어린 시절 그녀가 살던 그곳. 다락방을 탈출해 가고 싶어 하던 곳이었어. 그렇지만, 그녀의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에 둘러싸여 있었어. 그 디스토피아를 뚫고 나가지 못하는 한 결코 이를 수 없는 곳. 그것이 유토피아였어. 그녀는 미치기도 전에 미친 사람 취급당하다가 결국 죽고 말았어. 그녀가 정말로 미쳤는지는 소설 끝 부분까지도 확실치는 않아.
이 글을 읽다가 모비딕의 이런 구절이 자꾸 생각났어.
웰즈의 타임머신에 대해선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싶어. 80만 년 후의 미래에 인류는 꽃같이 예쁘고 인형같이 가냘픈 엘로이 족으로 진화했어. 그런데 그 엘로이 족들은 밤만 되면 벌벌 떨며 두려움에 휩싸여. 이유가 뭘까? 시간 여행자는 곧 무시무시한 비밀 하나를 알게 돼. 밤이 되면 도시 곳곳에 있는 우물에서 또 다른 종족, 흉측하게 생긴 종족인 몰록이 튀어나와 엘로이 족을 공격하고 먹어치우는 거야. 이 몰록은 노동을 하는 종족이고 엘로이 족처럼 인류의 후손이었어. 지상의 아름다운 종족인 엘로이, 지하의 흉측한 종족인 몰록. 낮의 종족인 엘로이, 밤의 종족인 몰록. 노동을 하지 않는 엘로이, 노동을 하는 몰록. 시간 여행자는 이 두 종족을 지켜보며 이렇게 결론을 내려. 엘로이 족이 몰록에게 잡아먹히는 이유는 인간 이기심에 대한 엄벌이다. 인간들이 수고롭게 일하는 다른 인간의 등 위에 올라타 있길 멈추지 않는다면 미래엔 필연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 꽃을 던지고 노는 아름다운 엘로이 족에게 몰록은 행복한 날의 치명적인 한 떨기 불안이었어. 이런 생각을 해봐. 악덕 기업가들에게 티없이 행복한 날은 노동자들이 잠자코 가만히 일이나 하고 있을 때 아닐까? 웰즈가 미래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바로 이런 것이었겠지? 당신들, 미래에 밤잠 못 자고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뭐 바꿔야 할 것 없소? 그 질문은 당시 빅토리아 시대 독자들을 심란하게 했을 테고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에 읽어도 그 심란함은 가시질 않는구나.
너는 나의 미래. 나는 너의 미래가 되기로 다짐하고
너와 함께 미래로 타임머신 타고 갔다가 네가 잡아먹히는 걸 보고 싶진 않아.
2011.5.30
<타임머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너의 편지를 받고 내가 달콤한 몽상가에서 우울한 현실주의자로 진화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 정답을 찾아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봐.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보여. 네 말대로 유토피아는 완벽한 시스템의 도래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을 품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걸지 모른다는 사실. 그렇게 작은 마음들이 모이고 흩어지고 쌓이고 퇴적되다 보면, 그 지층 속에서 서서히 잉태된 거대한 꿈의 세포가 언젠가 지상 위로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나도 얼마 전 하나의 유토피아를 엿본 거 같아. 그 얘기를 해 줄게. 세계적인 영화 평론가로 유명한 로저 이버트라는 미국인이 오랜만에 공개 특강을 했어. 내가 그 사람 특강에 귀 기울일 이유는 없었어. 왜냐면 난 그 사람이 쓴 <위대한 영화>라는 두 권짜리 평론 책을 가지고 있는 게 전부이고, 평소에도 못난 영화 한 편이 잘난 평론 백 편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으니까. 다만,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완전 컴퓨터에 붙어사는지, 쉴 새 없이 영화 관련 글을 올리는 게, 참 신기하구나, 정말 열심히 사는 수다쟁이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정도였어. 막상 그의 특강을 열어 봤을 땐, 깜짝 놀랐어. 그는 먹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어. 대신 과장되게 웃고 있는 도널드덕의 캐리커처처럼 브이 자로 늘어진 턱을 지녔는데, 마치 하회탈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았어. 뭘까, 하고 자세히 보다가 깜짝 놀랐어. 왜냐면, 놀랍게도 그건 가면이 아니고 그냥 진짜 얼굴이었던 거야. 잠시 후 난, 왜 그 사람이 24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블로그나 트위터에다 쉴 새 없는 수다를 털어놓는지 알게 됐어. 로저는 컴퓨터의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더니, 부인과 친구 2명에게 준비한 원고를 읽게 했어. 들어 보니, 그는 갑상선 암에 걸려 심한 병치레를 했고, 그 과정에 경동맥이 3번이나 터져서 몇 번의 죽을 위기를 넘겼대. 그 얘길 하더니 너털웃음을 지으며, 한 가수에게 생명의 은혜를 빚졌다고 감사했어. 왜냐면 큰 병 아닌 줄 알고 퇴원 준비를 하는데, 그 가수 노래만 듣고 가야지 하다가, 노래 끝부분에 동맥이 터져서 바로 수술실로 실려 가는 바람에 기적적으로 살아났기 때문이야. 노래가 짧기라도 했다면 가는 길 차 안에서 죽었을 거라는 거지. 그 후로도 많은 수술 끝에 턱 뼈가 없어졌고, 어깨뼈를 추출해서 이식하는 바람에 제대로 못 걷게 됐어. 긴 투병 시간 후에 남은 건, 다물 수 없게 아래로 처진 입. 즉, 현실적으로는, 말을 할 수 없는 평론가가 되어 버린 거야. 장애인이 되자 사람들이 그를 피했어. 지나치게 배려하기 시작했어. 불쌍한 삶, 끝난 인생이라는 시선이 그를 옭아맸어. 그의 인생이 어떻게 됐을 거 같아? 수없이 많은 인생 역전의 영화를 봐 왔기 때문인지, 그 사람은 쉬이 좌절하지 않았어. 대신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내기 시작했어. 새로운 시대의 소통 수단인 사이버 세계와 소셜 네트워크가 생겨나기 시작했거든. 어느 날, 애플 사에서 그 사람의 글이 바로 컴퓨터의 목소리로 변환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줘. 느낌표와 물음표로 끝나는 말투의 뉘앙스 차이까지 반영된 최고의 프로그램을. 문제는 일상의 대화가 요구하는 적절한 스피드, 리액션의 타이밍, 이런 것들은 아무리 빠른 타이핑으로도 해결이 안 됐어. 게다가 그 목소리는 로저 이버트라는 사람의 감정을 담고 있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사람들은 그와의 대화에 곧 지루해 했어. 그러자,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부활시키기로 마음을 바꾸었어. 스코틀랜드의 한 회사가 그가 타이핑하는 글을 그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사운드)로 바꿔 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그가 젊은 시절 출연했던 방송물에서 그 목소리의 파형을 찾아 복원을 시도한 거지. 잡음이 섞인 목소리의 한계에 부딪치자, 나중엔 「시민 케인」과 「카사블랑카」의 DVD에 남겼던 깨끗한 코멘터리 목소리의 원형으로 끝내 로저의 목소리를 재창조해 내. 그 참혹했던 좌절의 순간 그 사람은 자신에게 물어 봤었대. 말을 잃은 삶은 어떤 것일까. 이제 남은 미래는 어떤 것일까. 그의 턱없는 미소는 이제 새로운 언어로 대답해 줘. 자신은 말은 못하지만, 기술의 혁명으로 컴퓨터가 한 몸이 되어, 여전히 세상을 해석하고, 영화를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펼쳐 사람들과 공유하는 데는 아무런 장애를 갖고 있지 않다고. 자신의 꿈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그의 생이 다할 때까지 얘기하고 또 얘기할 것이라고.
어쩌면 우리가 얼리 어댑터가 되면서까지 그토록 멋진 기계에 집착하는 건, 그 결과 디스토피아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유토피아의 마음먹기를 그만둘 수 없는 그 이유 때문일 거야. 사실 문명의 폐해와 매혹이 늘 동시에 대등하게 맞서고 있어서 그것을 지지해야 할지 아닐지 혼돈스러워. 그래서 자칫 거시적인 세계의 흐름을 바라보면 절망에 젖을 수밖에 없지만, 이버트 아저씨의 경우 같은 미시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면 이미 펼쳐진 낙원의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되기도 해. 이렇게 내 사소한 유토피아가 평상적인 절망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거라면, 즉, 나의 희망이나 의지를 온전하게 품은 내 인생의 유려한 흐름이 지나치게 막강한 장애물에 부딪친다면, 그래도 난 끝까지 버티어 봐야지, 그러다 보면 상상도 못했던 어떤 기계가 내게 새 삶을 선물해 줄지도 몰라, 라고 그 혼돈의 매력에 기댄 채 아슬아슬한 꿈을 꿔 보게 돼. 그래서 난, 공상 속에서 예비 자세를 취하고 있는 막연한 미래의 이미지를 현실로 성큼 앞당겨 선보여 주는 스티브 잡스 같은 창의적인 선구자들을 늘 찬양해. 난 그가 사라지면 울 거야. 그의 헐거운 티셔츠와 늘어진 청바지를 나의 신전에 모시고 그를 기억할 거야. 이렇게 내 신전에 모신 사람들이 적지 않아. 그들 대부분은 아름다운 상상력의 소유자들인데, 실은 그들은 미래를 과감히 꿈꿔 왔던 선조들의 전통을 그저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예를 들면, 잠수함이 바다 속을 탐사하고, 인공위성이 지구 주위를 돌고, 사람들이 화면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유전자를 복제하는 것, 이런 게 다 재미를 표방한 소설 속 공상의 일부들이었고,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신뢰를 얻게 된 엉뚱한 예언들이었으니까. 허버트 조지 웰스도 일찍이 세인들 사이에 굴러다니던 욕구들을 모아 타임머신이나 투명 인간 같은 신개념을 만들었어. 그래서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구원이 우리의 세계를 한계를 어디까지 확장시켜 줄 수 있는지, 그것으로 어떤 정화가 가능할지를 열심히 탐구했었어.
아마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비현실적 열망의 순위를 정하자면, 단연 타임머신이 그 꼭대기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확신해. 그렇다면 우리에게 당장 타임머신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두 종류의 욕구가 부딪칠 거야. 하나는 미래를 보고 싶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과거를 고치고 싶다는 것. 진화를 비밀을 엿보고 싶은 마음과 역사를 뒤바꾸고 싶은 마음일 텐데, 너는 어때? 어디로 먼저 떠날 거 같아? 웰스가 소개한 우리의 주인공은 기계에 시동을 걸고 당장 미래로 달려가 봤어. 그것도 80만년 너머로. 그곳은 의외로 디스토피아였어.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어도 과학과 철학은 유토피아 건설에 실패했고, 오히려 패망한 인류는 밝은 세상의 유약한 종족과 어두운 세상의 포악한 종족으로 분화돼서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원시적인 삶을 살고 있어. 그는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어찌 세상이 이렇게 됐을까 하고 부지런히 그 신세계를 해석해. 그곳 악몽에서 겨우 탈출해서 현재로 돌아온 웰스가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미래는 잿빛 세상이야. 안타깝게도 그가 예언자로서 던진 신탁은 어두운 묵시록이란 말이지. 하지만 영원한 시간대의 어느 순간에는 밝고 아름다운 순간이 있지 않을까? 아마 이런 생각으로 그는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떠나 버렸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 어쩌면, 정착하고 싶은 어떤 미래를 찾았는지도 모르지. 다행히도 말이야.
순간 이동에서 타임 트랩까지, 웰스가 발명한 '시간 여행자'라는 이 매혹적인 콘셉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부지런한 예술적 진화를 거쳤어. 「백 투 더 퓨처」를 넘어 「메트릭스」 최근 「소스코드」까지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고 있어. 나도 한때는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와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펼쳐 놓고 진지하게 이 가능성을 염탐해 본 적이 있어. 왜냐면, 거의 백 년 전 이미, 아인슈타인 아저씨가 엄청난 질량을 가진 물체가 공간을 휘게 하고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도록 한다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고, 곧바로 영국 천문학자 에딩턴이 별빛이 태양의 중력에 의해 진짜로 휘는 것을 관측했었으니까. 상상의 가능태가 100여 년에 걸쳐 과학적 증명을 거듭하고 있고, 공상으로만 치부하기엔 어느새 성큼 다가온 잠재적 근 미래의 의사 체험만큼 짜릿한 게임이 없었거든. 또 어떤 면에선, 감당 못할 정도의 방대한 의미 덩어리인 인간의 일상사도, 죄다 기술할 수도 없는 무한대의 사연이 담긴 인류의 역사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기껏해야 우주 찌꺼기 먼지가 찰나에 흩날리는 순간만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때론 훌륭한 진통제로 날 달래 줬거든. 말하자면, 마음으로 타임머신에 올라타기만 해도 이 혹독한 하루하루의 삶이 다채로운 몽상의 편린으로 흐트러지는 마법을 경험했었어. 물론 언젠가부터 그런 마약도 효력이 다 해버렸지만…….
내가 끝내 풀지 못한 건 평행 이론의 역학이야. 간단히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어. 현재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 그럼 나의 실종으로 인해 난리가 나겠지. 그 현실은 예정된 미래와 달리 나의 부재에 바탕을 둔 새로운 미래가 펼쳐 질 거야. 한편, 미래로 날아간 난 부족한 미래 지식으로 인해 온갖 모험을 다 치르겠지. 또한 과거의 비밀들을 들춰냄으로써 많은 파장을 일으키며 그 미래의 현실을 마구 바꿔 놓을 거야. 그렇다면, 내가 사라진 후의 그 미래와 내가 넘어온 이 미래, 이 두 시간대가 과연 같은 모양으로 만나게 될까? 그게 아니라, 현재도 존재하고, 따로 미래도 존재한다면, 시간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걸까? 현재의 난 나대로 살고 있고, 미래의 난 또 나대로 살고 있다니. 그건, 분해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시간 단위의 결들이 무한대로 존재한다는 얘기잖아! 그럼, 나도 무한대가 되는 거고.
어쨌든, 타임머신은 존재 불가능하거나, 혹은 미래 어느 시점에서도 아직 발명되지 못한 게 분명해. 만약 그게 탄생했다면, 누군가는 지금 현재로 돌아와서 마음에 안 드는 미래를 조정하기 위해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을 게 뻔하니까. 로봇의 지배에 대항하는 혁명 전사의 탄생 자체를 막기 위해 과거로 터미네이터를 보냈던 그 미래의 못된 시도처럼 말이야. 그래도 난 타임머신은 존재한다고 믿어. 좀 다른 종류이긴 하지만. 왜냐면, 아인슈타인이든 잡스든, 어쩌면 인간 뇌가 허용해 주는 개인용 타임머신으로 비밀리에 휘어진 시공간을 오가며 미지에의 여행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니까. 그 타임머신은 장애물을 뛰어넘으려는 욕구와 인류의 공리 추구가 다수의 행복으로 이어질 거라는 희망의 입자로 구성된 특수 장비일테고. 동양적 표현으로는 점쟁이의 촉수 같은 걸지도 모르고.
혹시 너도 점을 보니? 여자들은 점보기를 많이 즐기는 거 같던데, 난 한 번도 본 적 없어. 왠지 영화의 엔딩을 알고 극장에 들어서는 기분이 될 거 같아서. 혹은 오이디푸스나 숲 속의 잠자는 공주처럼 불행한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미리 피하려고 무진장 애쓰지만, 결국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무서운 예언의 역설을 마주하기 싫은 것도 있고. 영화 「마터스」에서는 해탈한 순교자의 눈에서 미래를 엿본 자가 취하는 선택이 자살 밖에 없음을 보여줘. 뭘 봤는지는 알려 주지도 않으면서, 애초에 알려고 하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였는데, 무척 섬뜩했어. 얼마 전 한 아나운서가 죽고 싶다고 뇌까렸어. 며칠 지나 그녀가 정말 죽을 지 아무도 몰랐어. 알았다면 누군가 그녀의 운명에 어떻게든 끼어들었을까. 타임머신이 있었더라도 결국 아무리 위로할 수 없었고, 죽음도 막지 못할 운명이었을까. 이렇게 생각해. 미래를 아는 것과 미래를 꿈꾸는 것, 둘은 다른 이야기라고.
자기가 품었던 꿈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자기가 불렀던 노래가 다른 사람의 입술로
자기가 걸었던 길이 다른 사람의 길로
자기의 사랑마저 다른 사람의 팔로 성취되고
자기가 뿌렸던 씨를 다른 사람들이
따게 하도록 사람들은 죽음까지도 불사한다.
인간만이 내일을 위해 사는 것이다.
한 때 초현실주의자였다가 아내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루이 아라공은 <미래의 노래>라는 시에서 ‘살고 살리는 것 중에서 인간만이 미래를 생각해 낸다’라고 이야기했어. ‘인간만이 자기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멀리 전방을 내다보는 한 그루의 나무’라고 예찬했어. 그의 말처럼 미래를 생각하면 나는 금세 취해. 미래는 내 술잔이고 내 애인이니까.
내가 책을 읽고 환상에 젖어 온갖 과학적 시뮬레이션으로 미래가 무슨 뜻인지 헤집어 보다가도 결국 도달하는 결론은 이거야. 네가 바로 나의 미래야. 인류가 꿈꾸는 미래는 너한테서부터 시작해. 새로운 세계는 너에게 담겨 있어. 그래, 난 너를 더 자세히 마주하고 싶어.
여자는 남자를 활기 있게 해주는 떠들썩하고 우렁찬 소리이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는 거칠어 질 뿐
나무 열매나 열매 없는 핵에 불과하다
그 입에서는 거친 들바람이 나오고
그 인생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황폐해 져
그것마저 자기의 손을 때려 부셔 버린다.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태어나고 사랑을 위해 태어나는 것이라고
낡은 세계의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처음에는 생이 다음에는 죽음이 바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분배될 것이다
하얀 방도 피투성이의 입맞춤도
그리하여 부부들과 우리들 세상의 봄이
오렌지 꽃처럼 지상에 흩어져 깔릴 것이다
……아, 실은 나도 너의 미래이고 싶어.
2011.5.23
<유토피아> 우린 모든 것을 갖지 못했다고 슬퍼하면 안 돼
안녕 동쪽별, 오늘 덥지 않았니? 머리 아픈 건 좀 어떤지 궁금해. 넌 유토피아 이야기도 아주 슬프게 썼더구나. 혁명에도 꿈에도 변신에도 상처받은 사람 같아 보여. 어쨌든 난 머리카락을 아주 짧게 잘랐어. 머리통이 알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병아리 같다고나 할까? 어쨌든 난 이번엔 기쁘게 써보고 싶어. 내가 기쁘면 너도 기뻐할 수 있다는 걸 아이 같은 믿음 하나로.
네 글을 읽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다시 읽으려고 집안을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했어. 그리곤 피곤하고 허기가 져서 포기하고 떡볶이만 한 냄비 먹었어. 배가 불러서 공벌레처럼 굴러다녀도 기분 좋다. 나는 토머스 모어 하면 헨리 8세가 생각나. 토머스 모어가 천일의 앤으로 유명한 헨리 8세 시절의 사람이니까. 나는 토머스 모어와 헨리 8세가 아직 사이가 좋았을 때 그 둘이 지붕 꼭대기로 올라가 템스강을 바라보았다던 런던의 햄프턴 코트에 갔던 게 기억나. 햄프턴 코트의 정원엔 미로가 있어. 그 정원의 미로에선 누구도 길을 잃지 않고 누구든 금방 출구를 찾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만나지. 그러나 현실의 미로에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에 대해 (현실에선 한 번 길을 잃은 자는 계속 잃을 수도 있음에 대해) 토머스 모어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유토피아를 썼을 거라고 생각하면 역시 오늘 밤 배가 불러서 하는 헛소리에 불과할까? 그래도 좋아. 오늘은 누구든 자신을 위로하는 글을 썼으면 좋겠어. 오늘은 누구든 자신의 유토피아, 이상향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며 글을 써봤으면 좋겠어. 내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언제고 즐겁게 회상하는 말은 일하고 일 외의 시간에 각자 흩어져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거야. 그런데 나에겐 이 말은 낮엔 일하고 밤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낸다는 걸로 변형되었어. 내겐 그게 유토피아란다. 나는 밤의 시간을 사랑해.
언젠가 밤에 시를 쓰는 할머니들을 인터뷰하고 글을 써본 적이 있어. 할머니들은 낮엔 밭일하고 설거지를 마치고 밤엔 안경을 코에 걸치고 시를 쓰고 그 시를 큰 소리로 읽고 있었어. 여든 살 할머니들이 말이야. 그 밤의 시간은 낮의 시간을 바꿔 놓았어. 할머니들의 표현을 빌자면 시를 쓰기 전에는 그저 ‘그것이 그것이지 뭐’였는데 이젠 ‘왜 그것은 그것인가?’로 바뀐 거지. 무관심이 관심으로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탄복할 대상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지. 우리의 관심과 시선은, 우리의 눈과 마음은 그토록 놀라운 거야.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축복이야. 그 할머니들이 인생이 기쁘다고 할 때 그 기쁨은 밤의 시간에서 출발해. 랑시에르란 철학자는 낮에는 빵을 위해 혹독한 노동을 하고 밤에는 사유와 시에 자신의 또 다른 노동을 바치는 노동자를 침입자라고 불러. 그는 어떤 침입자일까?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고 글을 쓰는 일은 많이 배운 자들의 몫이란 상식. 다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한낱 치기와 몽상, 철없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란 상식, 당장 눈앞에 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할 필요가 없다는 지루한 상식을 침입한 것 아니었을까? 플라톤은 국가에서 자신들의 작업 이외에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는 철의 종족인 장인들의 질서와 공동체에 전념할 수 있는 금의 종족들, 통치하는 사람들의 질서를 구분해. 우리 정도 평등의 열매를 맛본 사람들은 플라톤의 이 말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지 금방 알 거야. 침입자들은 이런 분할을 거부해 버리지. 우리는 오로지 화폐로만 교환되는 존재가 아님을 자기 자리에서 증명해내는 것, 그것이 침입이고 내겐 밤의 기쁨이야. 아무도 내게 요구하지 않지만 내가 내게 요구하는 것을 하는 시간이 내겐 밤의 시간이야. 그리고 이렇게 자기 자리에 서서 자기를 증명하는 문제는 슬프게도 관객이 한 명도 없을지라도 엄청나게 중요해. 우리 시대엔 너무나 저속한 구분과 편견에서 비롯되는 숨 막힌 일들이 많기 때문이야. 자갈치 시장 아줌마가 카뮈의 이방인을 읽는다고 하면 동물원의 펭귄이 적도 지방의 앵무새와 노는 걸 보는 것처럼 보지 않을까? 타인이 나에 대해 상상하지 않음이, 뻔한 상식적인 상상만 함이 조금이라도 달리 살아 보려는 순간의 우리를 얼마나 힘 빠지게 하는지 우린 이제 알고 있지 않니? 우리가 타인을 내 편견대로만 본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괴롭고 답답할 거야. 진정한 상상력이란 기발함이나 엉뚱함이 아니야 타인을 깊게 헤아리는 것이야.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끝없이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란 요구를 받지. 하지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상상력은 나올 수 없다고 나는 믿어.
그런데 맘속에 이상향, (혹은 이상적인 자기 모습)을 갖는다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지만, 한가지 조심해야 해. 마치 현실은 아무것도 아니고 내 마음은 저기 어디 딴 데, 다른 별에 있다는 듯, 현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절망적이란 듯, 이런 마음으로만 현실을 대하다 보면 결국은 피로와 냉소와 무관심, 원통함과 피해 의식, 질투와 과대망상에 빠질 수 있어.
우린 종종 뭔가 대단히 중요하고 위대한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완벽하게 행복해지고 싶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어하기도 하지. 그러나 꿈의 사소한 한 조각이라도 시작해 볼 수 있는 곳은 내 마음속이 아니라면 단 한 곳, 지금 여기밖에 없어. 지금 여기서 누군가와 함께. 단 한 명이라 할지라도. 설사 우리가 지구 밖으로 이사 간다고 해도 변함없는 출발점은 여기야.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모습을 어떻게 현실과 만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대화가 가능한 곳이 작지만 소중한 유토피아 아닐까? 그러니 유토피아의 조각들은 곳곳에 숨어 있는 것 아닐까? 모든 사람은 어떤 별의 조각, 어떤 꿈의 조각이야. 이건 문학적인 비유가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별을 만든 그 먼지가 우리도 만들었거든. 우린 전부를 갖지 못한다고 해서 슬퍼하면 안 돼. 유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적인 것이 더 좋아. 이상적인 것이 이상주의자보다 좋은 것처럼 말이야. 낙관적인 것이 낙관주의자보다 좋은 것처럼 말이야.
진짜 몽상가는 오로지 신비로움만 바라보는 사람이야. 그런데 너는 내가 알기로 현실을 보지. 현실을 겪어내지. 현실에 순응하지 않지. 맘껏 괴로워해도 변명하지 않지. 부끄러워해도 오로지 남의 눈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기만적인 핑계를 대지 않지. 핑계를 대느니 좌절을 받아들이지. 네 실패 때문에 남에게 김빠지는 충고를 늘어놓지 않지. 진짜로 자주 앓지. 편두통, 허리 통증, 몸살 또 뭐였지? 골다공증이었던가? 하여간 그러니 너는 가련한 몽상가가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너는 정직한 현실주의자가 아닐까?
추신 - 그런데 지난주에 말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실은 네게 편질 썼지만, 다시 지웠어. 다음 주에 보낼게. 이유는 간단해. 디스토피아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해. 엄밀히 말하면 디스토피아에 둘러싸인 유토피아. 하지만, 그 이야긴 다음에.
2011.5.13
<유토피아> 낭만파 몽상가들의 꿈
안녕, 커피진주.
그토록 바라던 봄이 찾아왔건만, 암울한 현실에 빼앗긴 마음의 들판에는 봄이 안 오는 법인지, 우울함이 가시질 않네. 지구촌의 풍경은 진화의 여러 국면 중 여전히 겨울로 느껴지거든.
요즘, 영국의 그래피티 작가인 뱅크시의 팬 사이트에서는 한국 사회의 기이한 어느 현상에 대해 마구 질문들이 쏟아지고 있어. 얼마 전, 애국이라는 자신의 신념에 일치의 흔들림도 없는 한 검사가 G20 홍보 포스터에 쥐를 그렸다가 잡힌 사람에게 ‘우리 국민과 아이들로부터 청사초롱과 번영의 꿈을 빼앗고 강탈한 죄’로 징역 10개월을 구형했거든. 낙서의 죄에 그 정도 형벌이 합당하다면, 나머지 무수한 파렴치한 죄들에겐 대체 어느 정도의 형벌을 줘야 하는 걸까. 그런 글로벌한 개그콘서트를 연출함으로써 국제적 망신과 함께 국격에 큰 허물을 입힌 그 검사에게는 어떤 형벌이 적당한 걸까. 그런데 검사에게 꾸지람을 들은 이 예술가의 최후진술이 뭔지 알아? “…전 이제 아무것도 안 하겠습니다.” 이 냉소와 두려움과 저항과 전향이 동시에 느껴지는 묘한 말 속에는 공포를 통해 전체주의의 천국을 꿈꾸는 한 국가와 당신들의 천국과는 다른 신세계를 꿈꾼다고 대항하는 한 예술가의 집요한 전투가 엿보였어. 이 꿈의 차이는 인류가 사회를 형성한 이후 벌여온 끝없는 이데올로기 전쟁의 전형적인 양상이야. 그 예술가가 변함없이 건재하길 기원하지만, 그 마지막 씁쓸한 탄식 속엔, 올곧게 품은 개인의 이상 따윈 안중에 없는 무서운 현실의 패악이 뼈저리게 느껴져. 맞아.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니! 허무의 극치로 우리를 몰아대는 정치인들의 배신과 비열한 폭력의 퍼포먼스들. 수십억, 수백억, 끝없는 돈의 비리들. 어버이날 목매 자살하는 부모들. 두 아이와 함께 베란다 너머로, 다리 너머로, 지하철 철로로 뛰어드는 가난한 엄마들. 부모를 패고, 불사르고, 파묻는 자식들. 입시에 짓눌린 학생들의 자살. 암 발생률, 자살률, 교통사고율, 성폭행률, …율,…율, 불행지수의 세계 정상을 달리는 이 암울한 통계의 나라. 이 잿빛 세상을 뭐라 부를 수 있을까, 이렇듯 영화를 압도하는 현실, 그야말로 천국의 대극점에 존재하는 세계, 지옥이 아닐까?
너도 알겠지만, 최근에 묘한 대비가 되는 판결이 있었어.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죽여 물탱크에 숨겨놨던 잔혹한 범죄자에게 무기징역이라는 합법적 판단이 내려졌고, 저 멀리 파키스탄에선 테러리스트의 수장이라고 불리던 은둔자가 실시간 동영상 감상의 전쟁 게임 속에 초법적으로 처형됐어. 어떤 게 맞는 판결일까. 왜 뻔한 선과 악의 대립, 그리고 오답일 수도 있는 주관적인 징벌이 변함없이 반복되는 걸까. 인간에게 법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최선의 행복이고, 어떤 게 다수를 위한 공리일까. 과연 인간을 위한 절대적인 시스템이란 게 존재하는 걸까, 오랜만에 명상에 잠겨 질문해 봤어. 아예 이런 고민 자체가 불필요한 세상은 없을까? 아, 그런 세상 있다면, 그날이 오면… 그렇게 혁명을 꿈꾸며 낭만파 몽상가로 살았던 20대 시절의 꿈을 되짚어 봤어. 그래, 그땐 우리, 정말 아름다운 꿈을 꾸었었는데.
플라톤이 2500년 전에 <국가론>를 통해 훌륭한 철학자가 지배하는 새 세상의 비전을 꿈꿨듯이, 16세기 영국인 토머스 모어도 어느 날 명상에 잠겨 나처럼 질문했을 거야. 이 지옥 같은 현실의 저 반대 대극점에 있는 세계는 어떤 곳일까, 하고 말이야.
모어는 당시 매일 좀도둑들을 수십 명씩 처형하는 상황을 비판했어. 부자들은 도둑질을 없애려면 도둑들을 죄다 잡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모어는 굶어 죽으나 도둑질하다 잡혀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더더욱 도둑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되묻고, 왜 보통 사람들이 도둑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따졌어. 인구의 상위 1%가 전 국토의 99%를 소유하는 빈부격차의 현황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어. 모어는 소수가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는 현실이 있는 한, 도둑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어. 그러면서 사유재산이 없는 세계를 상상한 거지. 누구나 똑같이 일하고, 필요한 물건은 언제나 공동창고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는 곳. 도둑질도 사기도 살인도 일어날 턱이 없는 곳 말이야.
그렇게 모어는 불멸의 아이콘을 만들어냈어. 이른바 “유토피아”를 찾아낸 거야. 그가 꿈꿔본 세상은 이런 곳이야.
평일 하루에 총 6시간을 일해. 오전에 3시간, 점심 먹고 2시간 휴식, 오후에 3시간 더 일하고 저녁 먹고, 8시에 잠들고 8시간 잠자. 나머지 시간은 자유로운 여가 활동 시간이야. 하지만, 전국민이 일하기 때문에 생필품은 늘 넘쳐 부족한 게 없어. 그래서 재산을 축적하려 애쓰지 않아. 살아있는 어떤 생명체든 결핍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결코 탐욕을 부리지 않는 법이니까. 병원은 늘 열려 있고 탁아소가 완벽해. 빈손으로도 어디든 여행할 수 있어. 모든 게 평등하게 분배돼서 부자와 거지가 없어. 인생을 즐기는 일, 즉, 쾌락이 최고의 목표이고, 거꾸로 건강한 것 자체가 최고의 쾌락인 곳이야. 안락사도 허용되고 평생교육도 보장돼. 부당하게 취한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려고, 또 값싸게 노동력을 착취하려고 온갖 속임수와 편법을 생각해내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아. 원하는 건 뭐든 사람들과 교환할 수 있으니까, 열등감과 박탈감이 없고, 결국 가난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호화로운 옷차림도 없고, 다들 똑같은 옷을 입는 것에 불만이 없어. 보석으로 화려하게 꾸민 장식들은 노예나 범죄자들에게 채워지는 수치스러운 상징이니까. 재산이나 지위에 매달리지 않고 욕망의 수레바퀴에 깔려 허덕이지 않아. 이름하여 돈이 없는 곳이야. 명랑함, 마음의 평화, 근심 걱정으로부터의 자유보다 더 큰 재산은 없다는 확신에 찬 곳. 돈이 사라졌기 때문에, 일상적인 징벌로는 막을 수 없는 온갖 유형의 범죄가 사라진 곳. 두려움, 긴장감, 과도한 업무, 불면의 밤에 대해서도 작별 인사를 한 곳.
그래, 이곳이 바로 유토피아야. 그리스어의 ‘없는(ou-)’이랑 ‘장소(toppos)’를 결합해서 만든 말. 곧, ‘그 어디에도 없는 곳’이니까 비현실적이고 실현 불가능하다는 뜻이고, 어떻게 보면, 인간의 가장 고귀한 꿈이 실현돼서 행복을 방해하는 모든 게 제거되고, 욕망과 그 성취 사이에 그 어떤 긴장과 대립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곳이란 뜻이야.
사실 인류는 늘 현실 너머의 피안을 꿈꿔왔어. 꿀과 포도주가 흐르고 성과 노동에서 해방된 무한 쾌락의 환락 향인 코카인부터, 거기에 도덕적 절제가 첨가된 아르카디아, 중국의 3황5제 시대 같은 목가적인 자연 상태의 황금시대, 에덴동산 같은 지상낙원, 요한계시록에서 언급한 예수 재림 후 지상에서 펼쳐지는 천년왕국 밀레니엄, 도교의 무릉도원, 불교의 극락정토, 네버랜드, 환타지아, 신세계, 파라다이스, 율도국, 과학기술로 세운 기독교 나라인 베이컨의 <새 아틀란티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서 소로우의 <월든>의 모험까지. 모어는 우리가 끊임없이 욕망해온 바람직한 사회상을 ‘유토피아’라는 멋진 단어 하나로 통합해버리는 솜씨를 발휘했는데, 베이컨의 주장처럼 어떻게 하면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는 얘기하지 못했어. 사실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을’보다 ‘어떻게’이잖아?
진보에 대한 모어의 이 낙관주의는 ‘공산주의’라는 인류 최고의 영감을 후대에 진하게 남겼고, ‘어떻게’를 깊이 사유하던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을 실천에 옮겨봤어. ‘코뮌’이라는 공동체 건설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었지만,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아저씨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고, 레닌이나 모택동, 카스트로는 목숨을 걸고 인류 최초의 유토피아를 향한 집단 모험극에 도전했었어. 이상 실현을 향한 그 프로메테우스적 모험의 결과가 유토피아에 가까우냐면, 거기엔 누구도 동의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나라 곳곳이 어떤 체제를 취했든, 우리가 앞으로 진전 중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어. 왜냐면, 현실 속에 남아 있는 부조리와 불평등은 언제든 새로운 메시아적 열망을 부활시킬 거니까.
마르크스의 생각처럼 공평한 조건에 인간을 놓아두면 사리분별에 맞게 살아갈 거라는 순박한 전제는 실패했어. 그렇다면, 인간의 자율성이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될까? 유토피아가 정녕 몽상에 불과하단 것일까. 그래서, 혹시 인간을 완벽하게 통제 해버리면 유토피아가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더 큰 꿈을 꾼 사람들도 있어.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제5막에서 미란다가 외쳐.
이 말에 영감을 받은 영국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는 25세기를 그려냈어. 완벽하게 자발적인 디스토피아, <멋진 신세계>에선 실험실에서 배양되고, 개성을 말살하는 ‘소마’라는 반인격 약을 먹고 사회에 효율적으로 봉사하는 인간을 그려. 호화사치품이 넘쳐나고 부족한 물질이 없는데다가, 각종 오락과 무제한적 섹스를 누릴 수 있고, 조금이라도 슬퍼 보이면 바로 다양한 기쁨이 제공돼. 하지만, 누군가 또 질문해. 아픔과 고독뿐이라 할지라도, 정신적 고통 역시 나의 일부니까, 거기서 벗어나는 건 행복을 위한 거지만, 동시에 나를 버리는 것 아닐까, 하고 말이야. 빅 브라더의 대답은 무서워.
그는 오랜 침묵 후에 이렇게 대답해.
전체의 완벽한 행복과 안정을 위해 개별성을 포기하는 삶. 그것은 또 다른 불행의 결말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교훈이야. 오웰도 <1984>에서 유토피아로부터 한 치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바로 도달하게 되는 디스토피아의 단면들을 예언했었잖아. 나치, 일제, 파시스트들 등, 개인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그 사회 자체를 최고의 지위로 끌어올리겠다는 빅 브라더들의 지나친 의지의 결과들. 그것은 현대인이 더 잘살게 되었는데, 왜 더 불행해졌는지. 그 진보의 역설에 대한 대답일 수도 있을 거 같아.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느냐고?
-헬렌 켈러-
난 이렇게 단순하게 대답하지 못하겠어. 역사를 들여다보면, 계급의 모순은 영원할 것이고, 인간의 자율성은 신뢰할만하지 못하고, 완벽한 시스템은 비인간적이다는 건데, 그렇다면, 인류에게 유토피아의 가능성이 없다는 말인지도 모르잖아. 물론 너도 알듯이 나의 20대는 이렇게 비관적이진 않았어. 그러니, 커피진주, 나의 오랜 유토피아여, 제발 날 달래줘. 무정부의자이며 무종교주의자로서 평화와 이상향을 꿈꿨던 존 레넌의 노래가 허망한 게 아니라고. 진정…….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천국도 없고
우리 아래 지옥도 없고
오직 위에 하늘만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노력해보면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오늘 하루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해 봐요.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국가라는 구분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렵지 않아요
죽이지도 않고, 죽을 일도 없고,
종교도 없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을 상상해 보세요.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날 몽상가라고 부를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소유물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봐요
당신이 상상할 수 있을까요
탐욕을 부릴 필요도 없고
굶주릴 필요도 없고, 인류애가 넘쳐나요
세상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을 상상해 봐요.
2011.5.6
<제인에어> 다락방의 미친 여잔 누구지?
안녕, 동쪽별.
안녕이라고 하기엔 힘이 좀 부친 한 주였어. 아이고, 겨우 살아났다야. 라고 말하면서 네 등을 치고 싶어. 왜 우리 삶엔 크고 작은 일들이 끝없이 일어나는 걸까? 나에게도 4월은 잔인한 달이었어. 하루하루가 눈물 나게 아까운데도 어서 빨리 5월이 와라 5월 어서 와라 하면서 지냈던 것 같아.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사람이 왜 잠을 잔다고 생각하니? 왜 우리에게 밤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보르헤스가 말하길 모든 일이 하루 동안에 닥쳐온다면 제아무리 대단한 의지와 체력의 소유자라도 감당치 못하니 하룻밤 자고 내일 겪으라고 밤이 있단 거지. 자고 나서 내일 또 무슨 일인가를 겪으라고. 동의해? 난 동의해. 그래도 좀 쓸쓸해. 잠자기도 아까 와서 뛰어다니던 때도 있고 자다가도 깨서 웃을 만한 좋은 일이 있을 때도 있었으니까 말이야.
한밤에 글을 쓸 때 가끔 베란다에 서서 잠든 아파트를 바라보기도 해.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졸리니까. 그때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 』의 한 구절이 매번 생각나. 이런 내용이야. 들어볼래? 어떤 도시는 반쪽짜리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어. 하나는 롤러코스터와 회전목마가 있는 곳이야. 또 다른 하나는 돌과 대리석, 학교와 병원 공공건물이 있는 곳이야. 하나는 영속하는 곳이고 하나는 일시적인 곳이야. 그런데 영속하는 곳이 어느 쪽인 것 같니? 정신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롤러코스터가 있는 쪽이야. 돌과 대리석과 학교와 병원들은 늘 옮겨 다니고. 그래서 그 도시의 사람들은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언제나 되어야 완전한 삶을 살게 될까 자꾸만 날짜를 헤아려 본대. 나는 우리 도시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추락과 상승을 반복하면서 자꾸만 다른 쪽을 보게 돼. 저기엔 돌과 대리석의 안전한 곳이 있겠지, 나도 언젠간 그곳으로 가겠지 하면서. 하지만 우리가 안전하고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그곳은 슬프게도 늘 옮겨 다닌단다.
그래도 너에게 편지를 쓰는 이 밤은 정겹구나. 그러고 보니 4월에 좋은 일이 딱 하나 있었다면 그건 너의 영화 개봉 아니었을까? 나도 곧 볼 예정이야. 지난번 편지에서 어떤 유형의 영화감독으로 규정되고 범주화되는 게 싫다고 했지? 그래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전형적인 사람이란 표현이 있지. 전형적인 엘리트니 전형적인 속물이니 전형적인 화가 나, 전형적인 에로 감독이니. 그런데 난 살면서 전형적인 것은 없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어. 우리가 누군가를 전형적인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려 깊음과 상상력이 없어서일 거야. 나는 전형적인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보이는 균열. 어긋남에 언제나 마음이 가. 전형성을 깨는 것, 낯설게 하는 것,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 거기서 매혹이 탄생하는 것 아니겠니? 그런 점에서 나는 네가 어떤 감독인지 모른단다. 오직 네 입으로만 듣겠어. 네가 말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언어로 듣겠어. 그게 인어의 언어라도 좋고 바람 소리라도 좋고 개구리 소리라도 좋단다.
내가 오늘 이야기할 제인 에어는 전형적으로 착한 애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할 거야. 하지만 난 반대야. 제인 에어에 대해선 내가 지난주에 한겨레 칼럼을 써버렸기 때문에 잠깐 인용할게.
제인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 사람은 기숙학교에서 만난 친구 헬렌이다. 헬렌의 고통에 대한 태도는 이런 것들이다. 나만 느끼면 되는 고통이라면 참고 견디는 편이 훨씬 낫다. 견디도록 운명 지워진 것을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건 나약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죄지은 사람과 죄는 명확히 구별 지어야 한다. 죄지은 사람은 용서할 수 있지만 죄는 질색이므로 불의 때문에 자신이 완전히 짓밟히는 법은 없어야 한다.
제인은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고 외로움과 부당하게 미움받는 것 또한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도 많은 비슷한 경우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로할 줄 알아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타인에게서 오는 격려와 신뢰, 다정한 마음이 한 사람이 무사히 뒤틀어지지 않고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제인 에어의 진정한 관심사는 자기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세계를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기숙학교를 나온 다음에 가정교사로 들어간 손필드의 주인, 자신과 신분을 뛰어넘어 결혼할 예정이었던 로체스터가 다락방에 미친 아내가 있었음을 고백하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해,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오점이 없으면 없을수록 친구가 없으면 없을수록 나 자신을 사랑해’라고 말하고 떠난다. 자신에겐 오점이 없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나로선, 힘 없는 자의 내면에서 튀어나오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과 용기를 숭배하는 나로선 이 장면부턴 제인 에어에게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라고 썼어. 그래, 제인 에어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사랑 장면이 아니야. 로우드에서 제인 에어가 비참하게 벌을 받아. 아무도 제인 에어에게 말을 걸지 말라는 명령을 학생들이 받았을 때 그녀들은 어떻게 했지?
한 인간의 작은 우정의 몸짓이 한 인간에게 용기를 주고 수치와 불명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이 장면이 나는 참 좋단다.
그리고 반대로 제인 에어에서 가장 싫어하는 부분은 로체스터가 자신에게 미친 아내가 있음을 고백할 때 제인 에어가 한 말들이야.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해,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오점이 없으면 없을수록 친구가 없으면 없을수록 나 자신을 사랑해.’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칼럼에서 쓴 그대로야. 제인 에어에겐 원칙과 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었어. 그런데 책의 뒷부분에서 또 다른 원칙과 법을 지키려는 세인트 존을 만났을 때 그녀는 결국 그것이 자기의 길이 아님을 알게 되는데다가 어린 시절 자신이 한 인간의 미소 하나로 살아났다는 진실에 대한 배신이나 다름없어. 홀로 강해지려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게 있다고 생각해. 자기가 강해지는 것은 혼자 힘으론 그 누구도 어림없다는 걸. 언제나 사람만이 희망이야.
제인 에어에겐 이 시절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과제가 적어도 두 가지 정도 있었어. 하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영혼을 지키고 당신이 편견으로 보는 것보단 더 나은 내가 있음을 자기부터 믿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 길을 찾아야 하는 것. 그리고 사랑의 동등성 문제, 그리고 가정교사와 부유한 주인의 사랑이 어떻게 동등성을 확보해나갈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건 로체스터의 실명 그리고 제인 에어가 뜻밖에 거액의 유산 상속자(서인도 제도에서 흘러들어온 돈임을 밝혀)가 되는 방식으로 해결되어 버리고 말았어.
가장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바로 이거야. 로체스터는 제인에게 자신에겐 비밀이 있다고 말하지. 그 비밀은 소설이 끝나도록 그에게 서인도 제도 출신의 미친 부인이 있단 것 말곤 밝혀진 게 없어. 로체스터는 대체 서인도 제도에서 어떻게 살았단 말인가? 그가 진심으로 후회하고 새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 그 일은 대체 무엇인가? 손필드 저택 3층에 묶여 있는 그 미친 여인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왜 서인도 제도에서 영국 중부의 손필드까지 와서 결국은 황야를 향해 크게 울부짖고 투신자살하고 마는가? 그녀가 무슨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위험인물이기에 로체스터는 사적으로 그녀를 감금하고 짐승 취급을 하는가? 로체스터는 그녀에게 받은 결혼 지참금 3만 파운드로 세계각지를 유랑하며 여유 있게 살았던 것은 아닌가? 로체스터의 그녀에 대한 잔인함은 어디서 나오는가? 소설에선 그녀는 단지 정신 병력이 있는 가문의 내력대로 미쳐버린 알코올 중독의 탐욕스럽고 음탕한 여자로만 설명되고 말아.
그런데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 대해 궁금해하는 또 다른 소설가가 한 세기가 지나고 나서 등장해. 미친 다락방의 여자와도 닮은, 자주 술에 취해 으르렁댔던 서인도제도 출신 소설가 진 리스. 도미니카 출신이었던 그녀는 영국령 서인도 제도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란 제목을 달았어. 사르가소 바다가 어디 있는 줄 아니? 바하마 제도 동쪽, 유럽과 서인도 제도를 가르는 바다. 그 바다를 로체스터는 건넜고 그의 첫 번째 아내는 건너지 못한 것인가?
뒷이야기는 다음 주에 할게.
곧 여름이 왔으면 좋겠어.
2011.5.1
<주홍 글자> 부르카를 벗겨줘
안녕, 커피진주.
얼마 전 누군가 나에게 너랑 어떤 사이냐고 묻기에, 그게 왜 궁금할까, 잠시 갸우뚱하다가 대답했어. 우린 떼려야 뗄 게 없는 사이라고. 최근 10년간 10번도 못 만났고, 같은 하늘 아래에서 이 시대의 뜨거운 공기를 함께 나누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함께 나누는 것은 전혀 없으니까. 그녀에게서 내 영화의 감상을 들어본 적 없고, 난 그녀가 쓴 책에 대한 감상을 전한 적도 없으니까. 다만, 그녀의 세계관에 매혹되어 그녀가 지닌 에너지 중 일부라도 염사 받기를 희망하는 수많은 신도 중의 하나라서, 그저 그녀를 모모처럼 여기고 내 말을 털어놓고 있을 뿐이니까. 그 사람이 ‘생선자전거’나 ‘돌사과’여도 상관없고, 내 추억담은 상상에 불과한 허구일 수도 있고, 내가 표하는 애정은 문학적 수사로 옮겨진 외로움의 표현일 수도 있으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우릴 바라보느냐와 실제 우리의 세계는 많이 다를 거라고 대답했어. 때마침 한 여배우와 유명 가수의 숨겨졌던 이야기가 사람들의 술안주가 되고 있어서 그런지, 그 질문과 대답 모두 그 뒷맛이 씁쓸했어. 왜냐면, 어떤 이름이든 갖다 붙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이에 허울 좋은 표식을 세워버린다면, 영혼의 대화를 꿈꾸는 우리의 시도가 흔한 흥밋거리로 박제화되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스캔들 기사가 그들 삶의 얕은 표피를 뚫고 어느 깊이까지 훑어내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관심은 그 중심에 선 여자에게로만 향해졌어. 15살에 지나치게 멋진 사람과 사랑에 빠져버린 소녀가, 그 후 긴 세월 그림자처럼 살아왔을 여정이 안타깝기도 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데 과거의 흔적이 쇠사슬처럼 자신을 휘감고 있는 게, 보기에도 힘겨워 보였으니까. 유명인을 생활의 파트너로 욕심낸 순간, 결국 이런 눈총의 시간들은 예견됐던 것이겠지만, 비밀을 지킬 것을 서약했든, 빼앗긴 시간에 대한 억울함을 상징적인 법정 싸움의 승리로 돌려받길 원했든, 둘만의 사연은 세인들의 혀끝에서 제맛 따라 어떻게 요리되더라도 끝내 알 수 없을 테니,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그들만의 이야기로 남아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하지만, 시간이 결국 모든 걸 잊게 하더라도, 그녀가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는 낙인 하나는 벗기 어려울 정황이기에, 난 괜한 노파심으로, 아무도 오해하지 않고 그녀의 삶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길 바라는 편파적인 연민을 품게 돼. 그녀가 진정 테스나 카추샤 혹은 헤스터처럼 진심을 품은 여인이라면 말이야.
'남의 죄를 가지고 먹고 사는 목사, 남의 질병을 가지고 먹고 사는 의사, 남의 시빗거리를 가지고 먹고 사는 법관이 되는 건 싫다. 그런 내가 작가 말고 어떤 무엇이 될 수 있겠냐’고 한 작가가 물었었어. 꽤 멋진 말이지? 중학교 시절 ‘큰 바위 얼굴’이 그려진 표지에 너대니엘 호손이라는 작가의 이름이 적힌 영어 소설책이 기억나. 이 너대니얼 호손은 <주홍 글자>를 통해 ‘아무리 행복한 여자라 할지라도, 여자의 인생이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라는 모든 여성의 운명에 관한 암담한 질문을 던지고 있어. 이런 글이 나올만한 게, 그때가 어떤 시대였느냐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도 쓰레기라고 비난받으며 화형식까지 당했던 시대였거든. 이 책은 '창녀의 도서관'이니 '음란한 거간행위'로 욕먹으면서 금서목록에 올랐고, 작가도 비난을 못 이겨 고향을 떠나야 했어. 겨우 이런 금욕적인 얘기로 말이야. 생각해 보면, 합리적 이성을 앞세워 새로운 윤리적 잣대를 가늠 짓던 근현대의 시대상이 이토록 낙후했었다는 게 정말 믿기지 않아. 지금으로선 원시시대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 당시를 놓고 혀를 찰 수밖에 없는데, 실은 작금이 그때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고, 실은 굉장히 가깝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정말 당황스러울 뿐이야.
아직 인류의 삶 곳곳에 남아 있는 비이성적 억압의 형벌을 생각해 보면, 10여 년 전, 폴란드인이 운영하던 파리의 기숙사에서 가끔 봤던 요르단 출신의 한 아랍 여자가 떠올라. 걸핏하면 칼을 들이대고 돈을 강탈하려 협박하던 동네 아랍 남자들 때문에 이 여자에게도 같은 소수 이방인으로서의 연대감을 쉬 갖기 어려웠었어. 하지만, 한 가지 이유가 자꾸만 내 시선을 빼앗아 갔어. 그녀는 부르카를 쓰고 있었거든. 처음에 난 단순하게, 사계절 관계없이 그 검댕 천을 뒤집어쓴 모습이 참 불편해 보였고, 밥 먹을 때 천을 들어 그 밑으로 수저를 집어넣어 음식을 삼키는 걸 보고, 인류가 원숭이로부터 진화해서 어쩌다 옷감을 발견하고 여성에게 이런 두건을 뒤집어씌울 아이디어까지 내게 됐는지 참으로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어. 게다가, 다양성에 대한 인간 DNA의 본능은 부르카, 히잡, 니캅 등 가리는 부위에 따라 여러 디자인까지 갖추었어. 말하자면, 그것이 억압일지라도 예쁜 게 좋다면 취향에 따라 화려하게 장식할 자유는 주어진 거지. 코란에서는 이렇게 쓰여 있어. 무릇 남편 이외의 다른 남성이 성욕을 품지 않게 하기 위해선 여자는 자신의 신체를 가려야 한다고. 그 당시 여자는 남자가 품은 성욕의 대상이었을 뿐인 시대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외양을 숨긴 것이 진정 나쁜 성욕을 막아냈었는지는 모르겠어. 대신 난 아라비안나이트 풍의 비사가 있었을 걸로 의심돼. 수없이 많은 연인을 거느리던 절대 군주가 어느 날 다른 신하와 사랑에 빠져 도망친 궁녀를 붙잡고는, 질투에 눈이 멀어 그 나라의 모든 여성들에게 ‘옷의 감옥’이라는 형벌을 내린 거 같은 뒷얘기 말이야. 어쨌든 난, 여성을 남자가 소유하고 독점해야 할 재산의 일부로 취급해온 여성 비하의 역사가 풍기는 이 옷이 지극히 싫었어. 왠지 아프가니스탄에서 간통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돌멩이로 쳐서 죽을 때까지 때리는 풍경이나, 파키스탄에서 여동생의 혼전 연애에 분노한 오빠가 얼굴에 염산을 퍼붓는 풍경이 떠오르거든. 즉, 이것은 이민자, 이교도, 테러리스트라는 불편한 이슬람의 이미지로 오해되는 하이퍼링크인 거야. 하지만, 그녀와 얘기해 봤을 땐, 이게 단지 여성 억압이라는 이유로 그걸 벗겨 내는 것 또한 쉽지 않은 문제란 걸 알게 됐어. 왜냐면, 예상과는 달리 그 여자는 본인 스스로 부르카를 억압의 산물로 생각하지 있지 않았거든. 취직도 어렵고 공동생활도 어려우며 시야를 가려 물리적으로도 너무나 불편한 이 옷은, 일본인들이 무릎 꿇고 앉아 밥 먹는 거나, 제사 때 엎드려 절하는 우리의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듯, 각자 문명의 독특한 속성처럼, 그들도 이미 생활의 일부로 삼아 자연스럽게 지니고 산다는 거야. 그것을 취하냐 마냐는 개인의 자유이고, 그것에 손가락질하는 것은 종교적 차별이자 또 하나의 억압이라고 주장하는 거지. 이 문화적 자긍심은 여성의 차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촉수를 갖고 있지 않다고 보이지만, 어쨌든 그 종교가 약자의 자존감이고 동시에 정체성이라는 중요한 삶의 무기가 되어 있는 현실 앞에서는 복잡한 문제임이 틀림 없어 보였어. 얼마 전 프랑스에선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걸 법으로 금지했어. 그렇게 부르카를 거부하는 세계적인 몸짓이 여기저기서 시작되고 있어. 그 기숙사에 살던 그 여자도 이젠 부르카를 벗고다니는지, 혹은 여전히 버티고 있는지, 아니면 그 자유를 거세당한 부당함에 저항하며 프랑스를 뛰쳐나갔는지 알 수 없어. 내가 잊지 못하는 건, 분명히 하등한 존재라고 여자를 구분해주는 낙인의 표식, 즉, 객관적으로 형벌처럼 보이는 그 감옥이 그녀에겐 고통을 견디면 구원이 온다는, 일종의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받쳐주는 흔들리지 않는 지조의 봉인이었다는 거야. 주홍 글자의 헤스터의 경우처럼 말이야.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에서 이어진 근대 아메리카의 이 주홍 글자 형벌은 청교도의 강박을 실현하고 싶어했던 종교적 야심인데, 그것은 어쩌면 조선시대의 열녀문 같은 것과 맞닿아 있어. 열녀문은 실은 여성이 자신의 욕구를 절제하고 남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며 삶의 당위라는 이데올로기의 아이콘이었으니까. 외간 남자의 아이를 낳았거나 혹은 심지어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된 여자들에게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자살할 것을 종용하고 그 대가로 열녀문을 세워서 절개라는 거짓 신화의 주역 자리를 제공해 주는 맞교환을 자행했던 거니까. 무릇 도망노비의 얼굴에 노비라고 글자를 새겨 넣는 전통처럼, 두려움을 양산하기 위한 기성 윤리체계의 으름장, 이것은 현대 사회로도 유전되어서, 변혁을 꿈꾸는 특정 사람들에게 빨갱이라는 표식을 붙여 그들을 경계하면서도 그렇게 낙인 찍히는 삶을 두려워하게 하고 있지.
사실 옷의 감옥보다 더 무서운 게 이 마음의 감옥인데, 청교도가 발명한 그 이미지의 형벌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후자라고 생각해. 물론 주눅이 들지 않고 버티어 낸 헤스터는 예외적인 여성이긴 해. 왜냐면, 그 손가락질을 끌어내는 주홍 글자의 형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화려한 자수 솜씨를 발휘해 더 두드러지게 가공해서 자신의 일부임을 명백히 밝혔고, 그러면서도 마음은 일체 그곳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더 자유롭게 살아갔으니까.
반은 진실, 반은 자기기만일 수도 있는 이 이상한 종류의 낙관적인 최면이 어떻게 가능했을지 궁금하긴 한데, 어쨌든 다소 천진해 보이는 그녀의 생각이 나은 결과가 어땠는 줄 알아? 시간이 지나면서 잘못을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그 죄의 표식이 천사의 선행이라는 표식으로 의미가 바뀌어버렸어. 이건 그녀의 의지가 이렇게 예언한 대로야.
난 낙인 자체라기보다는 그 낙인을 안고 살아가는 방식에 관심이 더 가. 헤스터가 우리에게 긴 세월이 지나도 기억되는 건 바로 그 특별한 삶의 방식 때문인 거 같아. 그게 아니라면 이 심심한 이야기가 미국 근대문학의 특별한 부분을 차지하진 못했을 거야.
신발을 못 신게 하는 형벌을 받은 사람이 발바닥으로 대지를 느끼며 살아가듯, 그녀는 당대 윤리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바람에, 관습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넓고 깊은 생의 순간들을 맞이하는 혜택을 누렸어.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땠을까? 아마 지탄받는 도덕성의 무게에 짓눌려 어둠의 세계로 도망쳤을 거 같아. 고통을 대놓고 받아들이는 헤스터의 삶은 낙인을 피해 진실을 숨기고 살던 그녀의 연인 딤즈데일 목사에게 도피 대신 적극적 자유를 꿈꾸게 만들어. 또한, 비난에 깔려 말라 비틀어 죽기보단 전통적 도덕의 굴레가 없는 자유로운 땅에 가서 새로운 삶을 창조하자고 제안해.
이런 미국 특유의 실용적 이상주의는 낙인이 그 자체로 우리를 절망시킬 절대불행의 표식은 아니라고 얘기해줘. 결국, 어떤 낙인을 이마에 찍고 살아가든, 그 삶을 영위하는 태도와 그 고통을 소화해내는 용기 그리고 고통만이 줄 수 있는 삶의 다른 이면들을 흡수해내는 내성에 따라 인생은 달라질 수 있다는 낙관을 심어주는 거야.
맞아. 자세히 보면, 헤스터가 주홍 글자의 고뇌를 인내로 수용했다고 해서, 그 연인과 나눈 불륜의 사랑을 후회하는 거 같진 않아. 그러니까, 자신이 저지른 새로운 사랑을 참회했기 때문에 그 낙인을 수용한 게 아니라, 그 사랑을 철회하지 않고 끝까지 안고 살려고 그 고문을 떠안았다고 봐야 할 거 같아. 즉, 고통을 대가로 자신의 진실을 당당히 인정받는 거지. 다시 스캔들의 그 여배우로 돌아가서, 그녀가 헤스터의 지혜로 나머지 삶을 살아가면 어떨까, 조용히 희망해 봐. 그 옷을 벗든, 입든 말이야.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 ‘검은 바탕에 주홍색 글자 A’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 소설에선 간음(Adultery)의 의미에서 유능함(able)과 천사(anger)의 의미까지 확장되고 있지만, 더 넓게 저자(Author), 경탄스러운(Admirable), 아모르(Amor, 로마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애정(Affection), 예술(Art), 미국(America), 심지어 아마조네스(Amazone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성 무사족)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어. 당시엔, ‘I’라는 근친상간(Incest) 죄도 있었고, ‘D’라는 술주정뱅이(Drunkard)의 형벌도 있었대. 이렇게 저렇게 죄마다 글자를 달고 살자면, 알파벳으로는 다 묘사 못 할 만큼 죄가 많이 있겠지. 우리 일상의 패션도 꽤 달라져야 할 테고.
나는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 나면 이런저런 부류의 감독이라고 단번에 분류가 돼. 그 분류는 금세 바뀌지만, 어쨌든, 특정 부류의 카테고리에 확 묶이고 말지. 그런 획일적인 틀이 싫지만, 그건 세상이 나의 일부분으로 본질적인 나를 유추해내는 방식이니 어쩔 수 없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나의 이마엔 어떤 문자가 새겨져 있어. 난 그걸 안고 살아가고 있고. 어쩌면 우리 모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남들의 삶에 끊임없이 낙인을 새겨 넣고 있는지도 모르지. 지난주, 네가 쓴 편지를 보고 감동을 했어.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또 하나의 그림자 삶, 그 외면 받은 채 잊힌 원폭피해자와 그 후손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봤어. 마음이 아파. 왜냐하면, 그들은 ‘원폭 희생 환우’라는 주홍 글자의 낙인을 깊이 새기고 사는 건지도 모르니까. 알 수 없는 검은 질병 위에 A(Atom Bomb)라고 빨갛게 써진.
2011.4.22
방사능비 내리는 날, 카프카
안녕! 동쪽별. 영화 개봉했겠네. 영화 개봉을 앞둔 감독의 기분은 어떤 거니? 판결을 앞둔 심정이니? 아니면 개운하니? 오랜만에 편하게 잘 수도 있니? 댓글도 읽고 별점 같은 거에도 신경 쓰니?
나도 지난 수요일에 다큐멘터리를 하나 만들어 방송했어. 다른 어떤 때보다도 두려움을 갖고 방송을 만들었어. 모든 것은 방사능비에서 출발해. 방사능비가 내리던 날, 너는 어떤 생각을 했니? 어디서 비를 보고 있었니? 나는 이미 예전에 내가 방사능비를 맞아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어. 방사능비가 내리던 거리를 걸어봤던 것 같은 느낌 말이야. 방사능비의 이 기시감은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 난 기억을 더듬었고 마침내 떠올렸어. 난 히로시마에 관한 글들을 읽었었던 거야. 그러니까 내 기억 속의 방사능비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내렸던 비야. 미국의 맨해튼 계획에 따라 개발된 우라늄 핵폭탄 리틀 보이는 8시 15분에 터졌어. 그리고 바람이 불고 불길이 치솟고 검은 비가 내렸어. 그것이 방사능비야. 그 해의 원폭으로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대략 70만 명이 피해를 당했어. 그 중 10%인 7만 명이 한국인이야. 히로시마에 군수 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 가족들이 많았던 거지. 한국인 7만 명 중 4만 명이 죽었어. 살아남은 3만 명 중 2만 5천 명 내지 6천 명이 태풍을 뚫고 한국으로 돌아왔어. 시모노세키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말이야. 2천 명은 북한으로 갔어. 나머진 남한 어딘가에 정착했어. 그들은 대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아니 무사히 살아 있기나 한 것일까? 이 궁금증에서 이야긴 시작해.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찾아갔어. 그렇게 길을 나설 때 내게 있던 궁금증은 무엇이었을까? 방사능비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일까? 그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취재하면서 점점 알게 되었어. 전혀 개인적이지 않은 낯설고 잔인한 운명이 자신에게 닥쳤을 때 그것이 어떤 삶과 죽음을 불러오는지 나로선 알 수 없었던 거야. 그날 히로시마에서 방사능비를 맞았던 사람들은 그날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결코 알지 못했어. 그리고 그 일이 평생을 따라다니리란 것은 더구나 절대로 상상할 수 없었어.
그들 중 60%는 합천에 살고 있었어. 우리가 해인사나 전직 대통령의 고향으로 아는 그 합천 말이야. 그래서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합천의 또 다른 별명은 한국의 히로시마야. 그렇다면 왜 합천일까? 일본강점기 어느 날 합천에 신작로가 깔렸겠지. 그 신작로는 부산까지 뻗었어. 부산엔 시모노세키까지는 가는 배가 있었어. 그런데 합천은 농지가 20%밖에 되질 않아. 그나마 있던 농산물을 수탈로 뺏기고 나면 정말로 굶을 수밖에 없는 땅이었어. 그래서 누구는 징용으로 누구는 먹고살 돈을 벌려고 어느 날 아침 신작로를 따라 히로시마로 떠난 거야. 나는 합천에서 많은 걸 봤어.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피폭자란 걸 비밀로 하고 가난, 차별, 냉대를 견뎌 냈어. 이런 할머니를 만났어. 1945년 그 할머니는 다섯 살이었어. 8월 6일 그 할머니의 엄마는 장사하러 나가고 언니와 오빠는 학교에 갔어. 집엔 그녀와 외할아버지만이 있었어. 그런데 가족들이 나가자마자 폭탄이 떨어졌어. 그 뒤로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돌아오질 않았어. 그래서 어린 소녀는 외할아버지랑 둘이서 손잡고 배타고 한국으로 돌아오지만, 외할아버지는 이내 돌아가시고 말아. 혼자 남은 소녀가 어떻게 자라서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을까?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만 말해. 남의 집 살이도 하고 나물도 뜯어 먹고 살았다고만 하지. 한 할머닌 다섯 살 때 피폭되었는데 입술은 있어도 말은 못해. 그녀가 말 한 마디를 하려면 온몸을 뒤틀어야 해. 너- 무- 힘- 들-어.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지. 역사가 저지른 일은 개인의 몸 위에 그렇게 떨어졌어. 지금 돌아온 사람 중 90%가량은 사망한 것으로 추정돼. 대부분 먹고사느라 자신이 왜 아픈 건지 고통의 원인도 모르는 채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어 갔어.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일 때문에 평생 조롱거리가 되는 거야. 난 피폭자들이 어떻게 죽어갔을까? 상상만으로도 비통해. 말테의 수기에서 아이들은 조그만 죽음을, 어른들은 커다란 죽음을 지니고 있었다는 문장이 나와. ‘여인들은 그녀들의 젖가슴에 남자들은 그들의 가슴에 죽음을 안고 있었다. 사람들은 진정 자신의 죽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 문장은 이런 상황에선 슬픔만 불러 일으켜. 이 사람들은 진정 자신의 죽음을 지니지 못한 채 죽었어. 죽으면서도 피폭자들은 모든 것이 낯설었을 거야. 삶조차도 죽음조차도. 우리는 우리 고유의 죽음, 마치 내 젖가슴처럼 내 가슴 안에 있는, 내 삶의 정직한 반영인 나만의 죽음을 죽을 수 있을까? 그저 우리도 어느 날 통계 수치의 한 명으로 사라지고 말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들에겐 가난과 질병과 냉대와 차별 수치 이 모든 것 위에 하나의 고통이 더 있었어. 그들이 결사적으로 피폭자임을 숨긴 것은 자녀 또한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서였어.
피폭자 2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누구는 건강하고 누구는 아파. 이런 2세 중에 마치 전태일 같은 한 사람이 등장해. 1970년생 김형률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사람은 처절한 삶을 살았어. 그는 2005년에 죽었어. 나는 죽은 남자의 방, 그가 살아 있었을 때는 결코 알지 못했던 죽은 남자의 방에 들어가 그의 일기장을 봤어. 어쩌면 그가 쓴 뒤로 이 세상에서 내가 처음으로 그 일기장을 읽은 사람일지도 몰라. 거긴 아직 십 대인 그가 나와. 그는 아파. 그런데 왜 아픈지 몰라. 그런데 사랑하는 여자가 생겨. 병약한 그로선 도저히 사랑을 고백할 엄두를 내지 못해. 그녀 눈에 내가, 이렇게 아픈 내가 어떻게 보일까? 그는 불안해해. 그러나 사랑은 간절해. 그녀의 모든 걸 눈여겨봐.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귀를 기울여. 그녀가 자신이 따라주는 한 잔의 술을 마신 것도 일기장에 적어. 그 사랑 때문이었을 수도 있을까? 그는 끝없이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물어. 나는 평범하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가족을 이루고 직업을 갖고 살 수 있을까? 너무나 평범하지만, 인간적인 그 꿈을 내가 이룰 수 있을까? 아마 그는 수도 없이 물었을 거야. 그는 2001년에 되어서야 자신의 병이 뭔지 알아. 면역 글로블린 결핍증이란 희귀병이었어. 의사들은 김형률 몰래 그 병에 대한 논문을 써. 그건 그의 병이 모친의 피폭 때문에 생긴 유전적 질환일 확률이 높다는 논문이었어. 그는 그 뒤로 원폭에 대한 모든 자료를 찾아 읽어. 그러면서 고민을 해. 이렇게 병든 몸으로 내가 세상에 태어난 깊은 뜻은 무엇인가? 이렇게 병든 몸으로 내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제 그의 정체성은 원폭 2세 환우였어. 그는 거기에 아직도 뛰는 심장 전부를 걸어.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그가 지난달의 나처럼 합천을 찾아가. 나와 같은 곳을 걸었어. 그리고 피폭자 집을 집집이 방문해. 그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각종 질병을 앓고 그것을 개인의 불행으로 안고 변변한 직업도 없이 간신히 살아가는 것을 보았어. 그는 정부와 시민 단체를 끝없이 찾아다녀. 방사능으로 아픈 사람들이 우선 생존할 수 있게는 도와주자고. 최소한으로나마 인간답게 살아가게는 도와주자고. 그리고 그때마다 정부의 관료들에게 들었던 말은 "방사능 유전 여부는 의학적으로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였어. 그렇지만, 어떤 개인이 자기가 아픈 원인을 자기 혼자 힘으로 증명해 낼 수 있겠니? 이것이 지금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어나는 일 아니니? 수많은 산재 환자에게 벌어지는 일 아니니? 그는 원폭 2세 환우회를 조직하고 실태조사와 의료 지원, 생계 지원 등의 내용을 포함하는 특별법 초안을 만들어서 의원들을 찾아다니지. 이 특별법은 17대 국회 때 발의되어 낮잠만 자다가 폐기되고 말아. 아마 그 사이 또 누군가는 죽었겠지. 그리고 지금 18대 국회 때 다시 발의되었지만, 여전히 2년 넘게 잠들어 있어. 그는 결국 죽고 말아. 그의 좌우명이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였는데 말이야. 그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라고 말할 때 그건 누구의 삶이었을까? 결코, 자기 자신만의 삶은 아니었어. 그에겐 자신처럼 앓는 사람에 대한 강한 연민이 있었어. 지금 방사능이 무엇인지 평범한 시민도 시금치와 우유와 생선을 걱정하고 있어. 반찬을 걱정하는 우리 곁을 원인도 모르고 피폭된 사람들이 지치고 보잘것없는 몸을 이끌고 울면서 지나가고 있을지도 몰라.
난 김형률의 아버지와 이야기하다가 카프카의 성을 생각했어. 카프카의 성은 측량사 k가 성에 들어가고자 하나 결코 들어가지 못하고 마는 이야기야. 다른 많은 것은 젖혀두고 관료주의의 하수인과 옹호자들 때문에 성이 생각났던 거야. (카프카의 성에도 그런 사람은 넘쳐나) 김형률과 아버지는 보건복지가족부 공무원, 의원들을 비롯해 많은 관료를 만났어. 그들은 마치 카프카의 성에 있는 사람들처럼 김형률이 성에 들어가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어. 그 과정에 기만적인 약속, 무시, 태만, 속임수, 핑계, 모욕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는지, 그것이 김형률과 피해자들을 얼마나 애타고 초조하게 안달 나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질문이 남아. 성이 안갯속에, 헛된 희망 속에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이 세상의 끝으로 추방된 원폭 피해자들을 받아주는 성은 있을까? 김형률은 성문 앞에서 지금도 문지기와 씨름하는 것은 아닌가? 그 뒤에 이어지는 끔찍한 상상은 쓰고 싶지도 않아. 다만, 성문이 성난 군중의 고함과 함성 속에 열리는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라도 제대로 떠올리고 싶은 밤이야. 성과 하나의 제국을 건설하는 꿈을 꾸고 싶어.
p.s 그런데 너의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어느 중년 부인에게 닥쳐온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들었어. 오늘 여주인공인 배종옥 씨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어. 나도 곧 볼 참이긴 하지만 그때의 죽음은 고유한 죽음이니? 그녀는 어떻게 죽음을 맞게 했니? 그녀에게 어떤 죽음을 줬단 말인가? 너는. 궁금해. 그리고 <제인 에어>에 대해선 할 말이 좀 있으니까 다음 주에 편지 쓸게. 다만, <제인 에어>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 로체스터의 부인, 다락방의 미친 여인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봤으면 좋겠어. 나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어. 그리고 또 한 명의 작가가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지. 그녀의 이름은 진 리스야. 아마 그녀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선가 늙고 미친 이방인 여인이란 말을 들어봤을 거야.
2011.4.18
<제인 에어> 나는 고아다
안녕, 커피진주.
방사능 빗속에서 길을 잃을 뻔한 나의 상냥한 당신. 고독하고 가련한 그대의 동쪽별이 시름시름 앓으며 그 빛을 잃어가고 있을 때 변함없이 내 어깨에 손을 살짝 얹어주는 달콤한 당신. 그대가 편지를 보내줬기 때문에 난 겨우 버틸 수 있었어. 이번 주엔 허리에 이어 미칠듯한 두통까지 날 덮쳤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들어 가장 복잡한 순간들을 뚫고 나가야 했어. 시사회를 하고, 또 어지럼을 무릅쓰고 겨우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사이, 널 그리워하던 시간들이 우수수 부서지고 있었어. 문득 고개를 드니 어느새 목련이 피어 있더구나. 요즘은 기후가 변해서 시간이 지나도 꽃잎들이 다 떨어지지 못하고 몇몇 꽃들은 가지에 매달린 채 겨울까지 난다고 해. 저 나무에 피기 시작한 하얀 꽃들은 다들 어떤 운명을 맞이할까, 궁금해져. 어쨌든, 봄이 왔단다. 믿기니? 매번 찾아오는 계절인데도, 매번 새로운 느낌이 드는 거, 게다가 매번 다른 추억을 불러 일으켜주고, 매번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가버리는 거, 신기하지 않니? 마치 우리의 사랑처럼, 인생처럼 말이야. 창 밖 목련을 넋 놓고 보고 있자니, 어떤 기억이 떠올랐어. 나랑 참 안 어울리는 군대에 끌려가서, 도무지 알 수 없는 낯선 곳에 물건처럼 던져진 채, ‘이곳의 운명이 너의 운명이다.’라고 선언 받던 그 시절 말이야. 신영복 선생님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자그마한 창틀 사이로 새로 돋은 풀꽃을 찬미했듯, 시선조차 맘대로 허용되지 않는 억압 속에 놓였었지만, 틈만 나면 눈을 돌려 내게 찾아온 봄을 느끼려고 애썼던 기억. 조금이라도 내 운명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던 기억 말이야.
이렇게 제인 에어처럼 스스로를 달래면서 말이야. 제인이 그 악몽 같았던 숙모집을 탈출해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은 로우드 자선원이야. 이곳은 일종의 고행의 미덕을 가르치는 곳인데, 거기엔 가끔 꿀꿀이죽을 먹는 것조차, 사치와 탐닉에 익숙해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인내의 코스라고 우기는 교장이 있어. 마치 ‘옛날엔 나도 소방호스를 입에 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힘들게 공부했었다.’라고 우기는 어떤 대학총장 같은 사람이야. 어딜 가나 이런 파쇼들을 만날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거지. 고아가 되어 삼촌집에 맡겨졌다가 숙모에게 신데렐라처럼 핍박받았었던 (물론 맞고 조용히 풀죽어 지내지만은 않았지만) 제인은 다행히도 이미 지옥 같은 더부살이의 경험 덕에 자선원의 물리적인 고행 정도는 거뜬히 견디어내. 하지만, 그런 강인한 제인과는 달리, 흐드러지게 핀 목련을 채 보지 못하고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4명의 카이스트 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우리가 결코 이해해주지 못할 고통의 끝에서, 그리고 그 외로움의 끝에 섰을 그들 대신이라도, 저 목련을 더 뚫어지도록 바라보게 돼. 사실 난 그들을 연약하다 비난할 수도, 동정할 수도 없어.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결코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없다’’라는 낙담에 대한 마지막 저항으로 자신의 운명을 거두는 주체적 흔적을 남긴 것이니까. 제인에겐 묘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그 힘겨운 여정에서도 어떻게 버티어나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줬던 헬렌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얼마 전 세상을 등진 그 젊은 영재들 곁에도 그런 친구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쩌면 좀 더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떨어지는 목련을 보며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돼.
“어차피 피할 길이 없다면 참는 게 네 의무일 거야. 어쩔 수 없이 참는 게 네 운명인 일을 ‘난 못 참아.’라고 말한다면 그건 나약하고 어리석은 짓이야.” 헬렌은 힘겨워하는 제인에게 이런 말을 해줬어. “증오심을 가장 잘 이겨내는 건 폭력이 아니야. 그리고 상처를 가장 확실히 치유해 주는 건 복수가 아니야.” 또래의 10대 아이가 어쩜 이렇게 조숙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내 생각엔 우리 인생은 원한을 키우거나 그릇된 학대 행위를 마음에 새기고 살기엔 너무 짧아.” 이렇게 인생의 깨달음 몇 단계 중 거의 꼭대기에 올라선, 거의 소크라테스의 현현처럼 보이는 헬렌의 메시지들. 특히, ‘고통을 참을 것, 그러면 행복이 따를 것이다.’라는 그 달콤한 종교적 메시지는 제인을 크게 감화시키지만, 실은 제인은 그녀의 온화한 격려를 온전히 받아들이진 않아. 왜냐면, 그녀는 타고난 반골기질의 고아였고, 운명에게 지고는 못 견디는 저항아였단 말이지.
이렇게 헬렌의 잠언을 재해석하며 운명을 헤쳐나가는 올리버 트위스트 캔디 제인의 매력적인 세계관은 어디서 탄생했을까. 밀란 쿤데라는 <불멸>에서 이렇게 말해. .
제인은 그 홀로 남은 자신의 학교에서 삶이 누려야 할 것이 아니라 견뎌야 할 것이란 걸 배워. 그녀는 총명한 지성을 갖게 되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키웠어. 그녀는 정직함, 다정함, 겸손함을 갖췄고, 동시에 옹고집에 외골수가 돼. 그녀는 자신을 절대 속이지 않고, 내키지 않는 일을 절대 하지 않아. 그리고 다른 누구의 욕구에도 흔들리지 않아. 악전고투에는 강한 의지력으로 맞서고, 감정 억제엔 타고난 자제력을 발휘해. 정신이 물질보다 우월하고, 이성이 감정보다 앞선다고 믿어. 비굴하게 길들여진 순종을 거부하고, 대신 가난과 고난을 용기 있게 받아들여. 유혹 앞에 쉬 체념치 않는 건전한 분별력을 가졌고, 물질에 대한 욕망 때문에 남자의 종속물이 될 만큼 어리석지 않아. 가진 것도 없으면서 동등한 반려자가 아니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우기고, 결국 결혼은 필요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자발적인 포용이라고 주장해.
나는 이토록 스스로 배워 훌륭히 익힌 제인을 보며, 매 순간의 갈등에 극도로 눌려, ‘죽어버린다면 이 고통이 지나가 버릴 텐데…’라고 속삭이게 될 때, 그 유혹을 이겨내는 힘은 결국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깨닫게 돼. 어떤 궤적으로 스쳐왔든, 지금 이 순간, 땅에 딛고 선이 우스꽝스러운 모양조차 내가 올바른 신념으로 선택한 인내심의 결과라고 믿음 말이야.
비극의 영원한 조건이란 게, ‘인간의 삶보다 가치가 월등히 높은 이상이 존재한다’는 거라고 보면, 제인의 이데올로기는 끝없는 비극의 꼬리표를 달고 다닐 수밖에 없는 세계관이기도 해. 채털리 부인의 극단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지. 제인에겐 관능의 체험 같은 건 제 신념의 저 발톱 끝에 묻은 먼지 정도의 위안거리니까.
붉은 방에 갇혀 ‘Let me out’이라고 외쳐대며 행복한 삶을 향해 ‘Let me in’이라고 아우성을 치던 어린 제인 에어한테서 결국 그렇게 멋진 여자로 성장할 거라는 암시를 받지는 못했어. 하지만,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에서처럼, 그녀는 성장할수록, 고난을 겪을수록, 아름다워져.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바로 이 시에 이 소설이 시대가 흘러도 끊임없이 영화로 재탄생 되는 이유가 담겨 있어. 예쁘지도 않고, 사랑스럽지도 않지만, 한 번 반해버린 이상, 이 특별한 소녀를 다시, 또 다시 목격하고 싶어 안달하게 되어 있거든. 생애 첫 사랑을 버리게 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따르고, 또한 생명의 은인과 함께 한 두 번째 강렬한 사랑을 맞이한 순간에도 자신을 굽히지 않아. 보통 얘기하는 밀고 당기기 수준의 값싼 심리 싸움이 아니라, 남자를 송두리째 흔들어놓고는 결정적인 순간에 설복할 수 없는 정당 명료하고 단호한 이유로 돌아서 버리는 그녀의 팜므 파탈적 행동에 반해버리지 않을 수 없어. 이 예상을 뒤엎는 딜레마 속 선택 때문에 결국 우린 그녀의 지독한 홀로서기에 연민을 느끼고, 그 정직함에 감동하게 돼.
빅토리아 시대를 넘어 지금에서도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넘치는 개성에도, 결국 망가진 첫 남자를 행복하게 맞이하는 이 소설의 예상치 못한 해피엔딩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도 꽤 될 거야. (결국은 로맨스가 삶의 궁극적인 위안이 된다는 역설이지만,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그다지 할 얘기가 없어. 내게 더 맞는 스타일은 여동생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의 언해피엔딩이니까.)
나 또한 로체스터, 이 남자가 그토록 사랑할만한 남자인가, 라고 질투심 실어 물어보고 싶어. 그는 다시 돌아온 제인을 두고 ‘안 돼, 돌아가. 더 멋진 제대로 된 남자를 찾아 떠나.’라고 강력히 밀어내지 않아. 대신 파렴치하게도 “아아, 내 인생도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아름다움으로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처녀가 내 곁에 있지 않느냐.”라고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밀어. 그러니까… 왜? 이 처녀는 거만하고 냉정한데다 망가져 버린 그의 곁에 머물게 될까. 인간성에 실망하고 인생을 조롱하며 낭비했던 허무주의자 곁에 말이야. 혹시 지저스 콤플렉스를 건드린 게 아닐까. 그토록 망가진 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고 스스로의 최면에 넘어간 게 아닐까?
이 소설에서 가장 재밌는 장면을 꼽으라면 두 개가 있어. 로체스터가 떠나려는 제인을 설득하는 장면이야. 또 하나는 신 존이 역시 떠나려는 제인을 설득하는 장면이야. 내가 왜 당신과 결혼해야 하는지, 당신은 왜 나랑 결혼해야 하는지를 웅변하는 장광설 프러포즈 장면 말이야. 킥킥대면서도 멈칫, 이런 생각을 했어. 그 해, 그때, 그곳에서, 네가 나에게 그 기회를 줬더라면, 나의 웅변이 너에게 닿을 수 있도록 조용히 귀를 열어 주기만이라도 했더라면, 지금은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고 있겠지, 하는 위험한 생각을 말이야. 우리 인생에서 그런 우스꽝스러운 웅변이라도 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그때 미리 알았더라면, 예언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이렇게라도 다그쳤을 텐데…
4월 21일은 샬럿 브론테의 생일이고, 19번째로 리메이크된 <제인 에어>의 개봉일이고, 내 영화도 개봉하고, 네가 꼭 본다던 <상실의 시대>도 개봉하고, 여러모로 풍성한 날이네.
2011.4.8
인상과 풍경
동쪽별. 너의 마지막 질문은 네가 나를 베아트리체와 이브의 혼합물로 여긴다는 것으로 받아들일게. 베아트리체 대 이브가 어느 정도 비율로 섞여야 황금 비율이 나오는진 알 수 없지만 어떻게 섞든 꽤 맘에 들 것 같아. 온갖 비율로 실험을 해보고 싶은걸. 솟구치는 실험정신을 억누르기 어려워.
그래, 우리에겐 베아트리체가 있지. 어느 어두운 숲 속을 하염없이 걷던 단테에게 지옥과 연옥 천국을 보여주던, 진실한 사랑의 눈물을 흘리며 언제고 순수함을 일깨워 주던 베아트리체가 있지. 나는 언젠가 단테의 신곡에 대해 꽤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어. 아마 천안함 사건 때였을 거야. 자식의 죽음을 앞두고 한 어미만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을 보았어. 나는 그녀가 왜 울지 않을까 아니면 울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했었어. 나는 그 이유를 곧 알게 되었어. 울지 않는 어미는 "내가 자꾸 울면 우리 아들이 좋은데 갈 수가 없다고 사람들이 하기에 나는 더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로 했어요."라고 말했어. 장례식이 시작되자 많은 사람들이 죽어버린 사람들에게 축원했어. 천국에 가서 이 세상일은 모두 잊으라고. 그곳에서 아무 시름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라고. 부디 건강히 지내라고. 나도 그 장례식을 보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어. 하지만, 천국이 어떤 곳일까, 죽어버린 사람은 천국에서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미소를 지을까도 궁금했어.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보여준 천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알려고 난 몇 날 며칠 신곡을 읽었어. 그런데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어. 천국에 올라간 사람들은 결코 우릴 잊지 않아. 우릴 늘 지켜보고 우릴 늘 생각해.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품는 소망은 단 하나야. 우리가 뱃머리를 잘못 돌리면, 올바르지 못한 쪽으로 가면 뱃머리를 돌리길 원하는 거야. 이제까지와는 다른 움직임을 갖길 원하는 거야. 그것이 천국의 소망이었어. 그러니 천국에 누군가를 올려 보낸 우리에겐 지상을 천국의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 이 지상의 유일한 소망이어야만 해. 그것이 아직 지상에 있는 우리가 이제 지상에 없는 사람들의 소망을 이뤄주는 길일 거야.
동쪽별, 나는 오늘은 방사능비가 내리는 거리에 서 있었어. 그 옛날 단테가 길을 잃었던 그 중세의 숲보다 결코 덜 위험하다고 할 수는 없는 곳이 오늘날의 대도시일 거야. 하늘은 무채색이었어. 온 사물들에서 조심스러움이 뿜어져 나왔어. 인적이 드문 거리와 공원은 황량한 느낌마저 들었어. 빗속을 뚫고 알몸으로 뛰어다니며 자유와 솟구치는 희열을 맛봤던 채털리 부인도 오늘은 조심할 것이고 세상 만물에 도전적인 시선을 던질 줄 아는 이 지상의 고혹적인 이브들도 그 방종한 시선을 잠시 거둘 거야. 나는 퇴근하다가 한 아이가 우는 것을 보았어. 방사능 빗속 벤치에 앉지도 못한 채 아파트 사이 가장 어두운 코너에서 우는 아이를 보자 나는 말을 걸고 싶었어. "아이야 왜 울고 있니?"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하는 듯했어.
지금 내가 울고 싶은 것은 울고 싶기 때문이다.
마지막 벤치에 앉은 아이들이 울듯이
왜냐하면 나는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한 시인이, 한 이파리가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다른 쪽 사물들을 헤매고 맴도는 상처받은 하나의 맥박이니까.
(로르카 -에덴 호수의 2중주 시)
그래, 익숙한 도시의 불빛, 집으로 돌아가는 자가용들의 헤드라이트,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와 젖은 운동화. 오뎅바의 연기. 우는 아이. 오늘 내겐 이것들이 모두 한 몸 안에 연결된 상처받는 맥박들 같아 보였어. 나는 오늘 어쩐지 한 사람으로서 슬픈 것 같지 않고 뛰는 맥박의 하나로 아프고 슬픈 것 같았어. 정혜윤이기 때문에 슬픈 게 아니고 그냥 인간이기 때문에 슬픈 것 같았어. 이건 어쩌면 내가 최근에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척된 원자탄에 피폭된 채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어. 방사능비는 뻣뻣한 강철 눈물 같이 느껴졌어. 그 강철 눈물은 이미 오래전 누군가의 심장을 찔렀고 이제 또 찌르러 길을 나서는 것 같았어. 그러니 이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우리는 빗물을 닦으며 샤워를 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우리가 오늘 두려워했던 만큼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는 밤이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방사능 눈물에 대해선 다음번에 더 자세히 이야기할게.
혹시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 읽어봤니? <인상과 풍경>은 서른여덟에 소련 스파이란 누명을 쓰고 총살당한 비운의 스페인 시인 로르카가 그라나다 알바이신 일대를 여행하며 쓴 책이야. 난 그라나다에 갈 때 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책을 들고 갔어. 그리고 알함브라 궁전에서, 알바이신 거리에서 줄곧 그 책을 읽었어.
알함브라 궁전, 결코 그 뜻을 해독할 수 없는 신비로운 문자들과 관능적인 나무 넝쿨을 닮은 시들과 별빛을 닮은 눈동자를 가진 춤추는 소녀들의 발 같은 한숨들과 온갖 전설적이고 슬픈 사랑 이야기로 둘러싸인 그 곳,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서 천상의 소리 같은 분수 소릴 들으며 인상과 풍경을 읽을 때 멀리 알바이신 거리엔 뚱뚱한 여인이 빨래를 널고 소녀들은 손을 잡고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어. 지붕들 위로 한 번쯤은 울릴 것 같았던 종들은 결코 울리지 않았고 아직 익지 않은 오렌지 나무들 사이로 그리 시원하지 않은 한 줄기 바람이 불었을 때 나는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이 그리는 세계를 본 듯했어. 그것은 도시의 숨겨진 영혼 같은 거였어.
일단 우리 마음속에서 열정이 분출되기 시작하면 환상은 이 세상에 영혼의 불을 지펴 작은 것들을 크게, 추한 것들을 고결하게 한다. 마치 보름달의 빛이 들판으로 번져나갈 때처럼 말이다. 이처럼 우리 영혼 속에는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다.
대부분은,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들이 다시금 떠올라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그것은 긴 잠에서 깨어나 마음속에 떠돌던 수많은 풍경을 한데 모으고 우리 삶의 일부로 만든다.
나는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을 통해 한 번 본 것을 삶의 일부로 만드는 방법을 배운 것도 같아. <인상과 풍경>에서 로르카가 포착한 것은 도시의 풍경에 맴도는 불안한 기운, 가엾은 사람들의 고뇌가 배여 있는 풍경.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뇌와 좌절감이지만 로르카가 진정으로 두렵게 느낀 것은 죽음도 삶도 아니었어. 죽어가는 예수 옆에 무관심하게 서 있는 사도들의 표정에서 우리가 잔인함을 느끼듯 로르카 역시 고통과 슬픔을 무심히 봄, 그 뼛속 깊은 무관심에서 잔인함을 맛보고 두려움을 느꼈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매일매일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온갖 걸 무심히 보아 넘기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난 로르카의 이 말을 잊고 싶지 않아.
오늘 내가 방사능비를 보면서 강철 눈물 같다고 느낄 때 나는 어떤 영혼의 눈물을 봤던 것일까? 이 비를 두려워하는 어떤 사람의 영혼을 본 것인가? 내가 인터뷰한 한 할머니는 히로시마에서 피폭되어 합천으로 돌아가 한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지금은 일흔 살인데 심장병, 파킨슨씨병 같은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어. 나는 자식들이 건강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거야.
우리는 우리 자신인 동시에 얼마나 수많은 인간이 되어야만 할까? 얼마나 많은 인간이 되어야 이 세상의 모든 슬픔과 불안과 고뇌에 대해 부끄러움 없이 입을 열 수 있을 것 같니? 그런데 다행히 로르카는 이렇게 말했어. 우리 인간에게 없는 능력은 아무런 고뇌와 걱정이 없는 고요한 호수로 이끌리는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 인간에겐 다른 능력은 있을지 몰라. 고뇌와 걱정에 사로잡힌 영혼의 눈물을 닦아주는 능력 같은 것 말이야.
우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 주고 돌아와서 나는 다시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을 읽어.
빗소리가 아픈 이 밤. 너도 내 영혼이 되어 줘. 언제나 불 밝히고 있는 별. 고철 허리.
2011.4.10
<채털리 부인의 연인> 처녀 털에 꽃을 꽂고
저번 주엔 허리가 아파서 몸져 누웠었어. 사실 지금도 거의 누워 있단다. 너의 생명력 예찬에 잠시 고무되었었지만, 실은 고백하는데, 젊을 땐 ‘황금허리’였지만, 지금은 ‘ 고철허리’거든. 녹슬고 무거워져 삐걱거리다가 가끔씩 주저앉는 허리. 이 십자가를 안고 골고다를 오르는 하루하루의 힘겨움에 덜커덩 좌절하고 보니, 다시 제자리로 굴러떨어진 바윗돌에 깔린 시시포스가 된 거 같구나. 이렇게 갑자기 육체적으로 불능 상태가 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그 사람이 떠올랐어. 미스터 클리퍼드 채털리. 그리고 그의 부인, 미시즈 채털리도 말이야.
30여 년 전, 하얀 살결의 쓰나미로 한반도를 역습한 영화 「엠마뉴엘」로 전설적인 이미지가 되어버린 실비아 크리스텔이 「차타레 부인의 사랑」이라는 영화에도 나온다고 알려지자, 이 영화는 제대로 된 감상을 하기도 전에 이미 본격 ‘에로’ 영화로 인증을 받았었어. 덕분에 짐짓 고상한 품위를 이고 사는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이 차타레의 도발에 대해 언급할 수가 없었고, 야한 영화를 강아지처럼 쫓아다니는 일군의 사람들에게 살색 향연의 그저 그런 영화로 기억된 채 지나가 버렸지. 훗날 내가 영화를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다만, 실비아 크리스텔의 헤어스타일만 기억이 나. 비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 위로 번지던 물방울. 그런 거. 그건 엠마뉴엘 시리즈를 모두 보고 난 후에도 스토리도, 이미지도, 하나도 기억 못하고, 오로지 여배우의 머리 모양만 기억하고 있는 반응과 비슷해.
내가 소설을 읽게 된 건 그 시절이 한참 지난 후야. 그땐 포르노 잡지를 지니는 게 퇴학을 무릅써야 할 남학생들의 불법적인 행위라면, 삽화 하나도 없이 야한 이야기가 가득하다는 하이틴 로맨스물은 조숙한 여학생들이 들고 다니는 합법적인 유행의 물결을 타는 것이었고, 로렌스 하면 로맨스라는 엉뚱한 통념의 시대였어. 난 ‘여자애 같다’는 말을 듣는 게 너무 큰 스트레스였으므로, 어떻게든 멀리하려고 애썼던 거 같아.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 로렌스의 장이 있는데, 그 부분을 보고서야 소설을 읽게 됐었어.
소설의 이 첫 문장이 아직 혀끝에서 맴돌아. 그래, 하물며 시대의 비극에도 무감해지는데, 내 개인의 비극 따위를 읊어봐야 누가 공감할 수 있겠느냐만, 한껏 우울해진 탓에 평소와 달리 클리퍼드의 입장으로 급선회해서 이 이야기를 다시 노려봤어. 그는 평상시에 이런 생각을 가진 남자야. ‘섹스는 단지 우연하고 부차적인 일’에 불과하고, ‘볼품없는 자세로 고집스레 지속되고 있는, 이상하고 낡아빠진 신체 기관의 여러 과정 중 하나로,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이런 사소한 행위와 관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아. 이런 것들은 지나가 버리고 말아. 그것들이 지금 어디에 있지? 작년에 내린 눈이 어디에 있느냐고? 평생에 걸쳐서 지속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지. 익숙해지는 것이 어떤 흥분보다 더 중요한 거 같아.’ 다시 말해서, ‘긴 인생의 필수적인 여러 가지 일에 비하면 성적인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인 것’이다. 어때? 너무나 맞는 말 같지 않니? 내가 앞으로 영영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기 때문에 미리 나의 처지를 옹호하려는 옹색한 주장이 아냐. 조금 헷갈리지만, 어쩌면 난 평생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어. 누워 뒹굴뒹굴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확실히 육체적 사랑은 품위가 없어 보여. ‘이 어이없는 엉덩이의 율동, 초라하기 짝이 없는 축축하게 젖은 조그마한 페니스가 시들어가는 바로 이 신성한 사랑…… 결국 여기에 경멸감을 느낀 현대인은 옳은 것이다.’라는 웅변에 즉각적으로 감정이입 돼. ‘섹스 그리고 한 잔의 칵테일, 이 둘은 거의 비슷한 시간 동안 지속되고 똑같은 효과를 내며 거의 똑같은 결과에 이를 뿐이다.’라는 냉소에 마구 박수를 날리게 돼.
하지만, 육체의 욕구를 경멸해 보는 것, 이것이 왜 아무 위로가 되지 않는 걸까? 실은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도 불구가 되어 있던 게 아닐까, 덜컥 겁이 나.
“하지만 나는 그런 삶이 지성만 발달하고 몸뚱이는 죽은 시체의 삶보다 좋아요.”
채털리 부인은 전쟁터에서 하반신 불구가 돼서 돌아와서도 부르주아의 자부심을 가득 안고 기계 문명을 예찬하며 살아가고 있는 남편에게 조금씩 저항하기 시작해. 휠체어에 의존한 채 관념으로 압도해 온 남편이랑 진정으로 ‘접촉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 그러니까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생기가 넘치는 실재하는 세상과 접촉을 상실했다’고 느껴.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한 남자의 몸을 살짝 훔쳐보게 돼.
이게 채털리 부인에겐 환상적인 충격이 돼. 그걸 자궁 깊숙이 받아들이고는 ‘피를 뜨겁게 끓어오르게 하고, 인간이라는 존재 전체를 새롭게 해주는 건강한 인간의 관능’ 을 깨닫게 돼.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그런 화학적 전이가 가능했을까. 거대한 짐을 지고도 잘 버티던 낙타가 지푸라기 한 올에 무너질 수도 있듯, 억압의 정점과 무의미한 삶의 극단에 서 있던 탓에, 그 작은 몸짓에도 새 세계로의 접촉이 가능했던 거야. 남자의 몸을 발견하고 돌아온 날,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춰봐. 인생에는 이런 순간이 한 번은 존재해. 타인의 시선으로 투영된 내 육체가 아니라 내 시선으로 내가 느끼는 나의 몸. 이제 막 눈을 뜬 여자의 설렘에 나도 두근거렸어. 욕망이 소통되자 그들에겐 계급이 사라지고 평등이 찾아와. 이건 영화 「오감도」에서 내가 그렸던 에로스의 관계랑 맞닿아. 이 관능의 세계는 ‘이 세상에 남은 가장 좋은 것’이고, ‘당신 속에 들어갈 수 있으니 당신을 사랑한다’는 건 진리가 돼. 번잡한 그 성행위로부터 ‘우아하고 힘찬 육체의 고요함’을 찾아낼 수 있다면 말이야.
멜로즈의 말처럼, 몽테뉴도 여자도 방귀를 뀌고 똥을 싼다고 힘주어 역설했어. 이것은 아주 뻔해 보이지만, 보기보다 쉽게 깨달을 수 없는 영역이야. 여자의 생리적 욕구를 공공연히 언급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 모두 엄연하게 터부시됐으니까. 남자가 여자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하지만, 실은 여자도 스스로에 대해 무지하잖아. 여자도 남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교육받으니까. 아주 긴 세월, 우리 몸의 ‘더러운’ 부분을 가리키면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감추고 부끄러워할 것으로 교육받아 왔으니까. 거울 속의 자기 몸을 돌아보며, 자신에게도 스스로 누릴 수 있는 욕망이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할 때, 그 별것 아닌 순간에 감동이 시작돼. 몽테뉴는 자연스러운 것들을 자꾸 배제하려는 인간들을 꼬집으면서 이렇게 질문했어.
이렇게 로렌스는 불륜 치정극을 표방한 문명비판서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우주적 낙천주의를 표방했어. 전쟁과 문명의 추잡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다정다감한 섹스다!’라고 말야. 핵무기를 몰래 품고 있던 일본의 원전 사고가 세계의 민폐로 퍼지고 있는 이 시점, 하루하루 번지는 이 세상 모든 부조리를 해체시키기 위해 우린 다시 자연인으로 돌아가 따뜻한 섹스의 소통을 추구해야 할 때야. 거기서부터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인간성의 회복이 시작될 거야. 그렇게 믿자. 이렇게 생각해 보니, 도무지 아무런 출구를 찾아볼 수 없는 암흑 같은 현실에 한 줄기 빛이 보이지 않니?
‘말테는 나의 정신적 위기에서 태어난 인물이다.’라는 릴케의 말에서 말테가 릴케의 자화상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듯, 이 소설도 ‘로렌스의 수기’라고 볼 수 있어. 로렌스는 애가 셋이나 있는 연상의 유부녀 프리다에게 반했고, 둘은 사랑에 빠져 도피 행각 끝에 2년 만에 결혼에 골인해. 채털리 부인을 뒤흔드는 멜로즈라는 남자는 직업적 배경이나 생김새의 묘사를 볼 때 작가 자신이 지나치게 투영돼 있어. 또, ‘가학 피학성 음란증 놀이, 즉 일반적인 싸움을 초월하는 깊은 무언가를 공유’했다던 로렌스와 부인의 이야기도 이 소설에 노골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그런데, 실제의 삶은 정반대였어. 실제 둘의 성생활은 나이, 민족, 계급, 성격 차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엄청난 불화에 시달렸거든. 그의 소망과는 달리, 프리다는 죽어가는 로렌스 옆에 있지도 않았어. 그가 죽자마자 바로 다른 남자랑 결혼해 버리기까지 해. 우습지? 생명의 찬가, 성의 묵시록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 얘기도 실은 작가의 패배적 콤플렉스를 반영한 거야. 아마 그가 만족스럽게 살았다면 이런 명작이 탄생하지 못했을 거야. 그렇다면, 내가 겪는 이 육체적 고통도 결국 내 영화로 승화될까? 아, 이것도 위로가 못 돼.
그가 죽고 30년 후, 1960년, 런던의 법정에서 외설 시비의 재판이 열렸어. 피고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 원고 측 증인들은 귀부인과 하인의 사랑이 타락한 거라고 맹공했어. 피고 측은 외설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참다운 성찰이 배어 있다고 맞섰어. 어쨌든 배심원은 무죄 평결을 내려. 19세기의 법이 20세기의 내면 세계를 구속할 수 없다는 게 증명된 거지. 전쟁 영화 속에서 폭격에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가는 풍경보다, 음모에 꽃을 꽂고 킥킥거리는 모습이 훨씬 사회에 위협적이라는 생각들. 그것은 어디서 유래하는 걸까.
이건 섹스의 솔직함과 자연스러움 대 얌전 빼는 태도와 성적 무지의 대결사인데, 비슷한 구도를 떠올릴 수 있는 『테레즈 라켕』도 너무 비난을 많이 받아서 에밀 졸라가 서문에다가 작품 해명까지 달아야 했어. 또 『쥐스틴』, 『쥘리에트』의 사드도 감옥 생활을 했고,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조이스의 『율리시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도 오랫동안 판금됐어. 뭐, 예를 들자면 끝도 없겠지. 영화도 다를 바 없었어. 「감각의 제국」도 정작 일본에선 개봉 못했어. 여배우는 비난을 너무 받아 다음 해 자살했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도 개봉되자마자 시비가 들끓었고, 감독은 감옥에 잡혀 갔지. 지금 보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난리였을까. 그런데,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로댕의 조각상 「애무」는 왜 애초에 외설이 아니었을까. 100여 년 전엔 동학혁명을 일으킨 농민들이 죽창을 든 채 ‘과부의 재가를 허하라’고 외쳤었어. 한 시대의 혁명적 강령이 지금엔 당연한 진리야. 간통죄라는 구닥다리 법이 아직 한국에선 유효해. 얼마나 갈까. 곧 각종 섹스 경연 프로그램과 섹스 스포츠 산업이 미래의 유망주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어. 「섹스 앤 더 시티」나 「위기의 주부들」이 번듯이 오락 영화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걸맞은 음란함의 기준이 뭘까. 왜 음란한 것은 불온한 것일까. 시대는 변하고 옛 도덕에 맞서는 새로운 도덕이 태어나겠지. 결국 우리가 받들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윤리들 대부분이 결국 상대적이고 불안정한 미완성의 기준들 아닐까. 그런 것들에 얽매여 움츠려 사는 건 바보 같은 거 아닐까. 변하지 않을 도덕이 있다면 무얼까. 그것을 움켜쥔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훗날 「애마 부인」과 「개인교사」류의 시리즈 등에서 끝없이 구현된 성적 불만족에 빠진 안주인과 건장한 하인의 포르노그래피적 클리셰와는 달리 이 이야기는 숲이라는 살아 있는 공간으로 남다른 의미를 획득해. 채털리 부인의 쾌감은 숲과 인간의 교감에서 얻은 자연인으로서의 자각이거든. 그 시절 우리를 휘어 감았던 「블루 라군」이나 「파라다이스」에서처럼, 촉촉한 풀밭을 더듬고 내리쬐는 햇살을 만지며, 물컹물컹한 진흙 위를 뒹굴고, 강물 소리에 신음 소리를 섞고, 빗물에 젖은 숲을 휘감듯 상대의 몸에 접촉할 때, 이 공감각적 심상들 속에서 채털리 부인은 몸을 발견하고, 자연을 발견하고, 삶을 발견해. 로렌스는 그 모든 것에 필수적인 촉각을 설파해. 접촉이 없다면 친밀감도 없고, 친밀감이 없다면 육체적 삶도 없고, 육체적 삶이 없다면 순수한 관능도 없다는 로렌스 교주님의 말씀. 아멘.
그 숲엔 이런 꽃들이 있어. 물망초, 참매발톱꽃, 패랭이꽃, 선갈퀴, 인동덩굴, 블루벨, 패랭이꽃, 좀가지풀, 선갈퀴아재비꽃, 히아신스…… 다들 뭔지 아니? 그래, 이 소설의 백미는 광산보다 꽃을 택했던 두 사람의 놀이에 있어. 이 꽃들을 몸에 난 여기저기의 털에다 꿰고, 성기에 감고, 배꼽에 붙이고, 몸의 모든 구멍에 꽂아놓고 놀아. 궁극적인 적나라함을 나누며, 은밀한 곳 중에서도 제일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가장 오래된 수치심, 죄 의식, 마지막 불안감까지 모두 불태워 버리는 관능을 체험함으로써, 사생활에서 영원한 미성년자일 뻔했던 채털리는 드디어 어른이 돼.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에로스를 다루고 있지만, 이토록 특별한 이미지는 어디에도 없었어. 커피진주, 너와 다음 생애에 다시 만난다면, 우리도 한번 꽃놀이를 해보자꾸나.
아, 너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봤어. 멜로즈가 자신의 부인에 대해 얘기할 때, 미쳐 날뛰는 욕망처럼 그녀의 부리로 찢어발기고 물어뜯고 쪼아대는 바람에 자신의 성기가 너무 아프다고 했던 거, 여자가 아프면 아팠지 어떻게 남자가 아플 수 있느냐고 물었었지. 남자도 마찬가지야. 마음 없는 행위에 의미 없는 사력을 다할 경우, 남는 건 통증과 허탈감뿐이라는 거. 성행위가 의사소통 행위라는 로렌스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진 않겠지만 난) 동의해. 정서와 호감이 전제된다면 날씨나 잡다한 것에 대한 수다를 나누듯 그저 육체적 대화를 하는 것. 만약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당연히 고통뿐이라고 봐.
참, 너에게 육체를 가르쳐준 그 남자는 누구니? 성모 마리아와 베아트리체 같은 너에게서 이브와 키르케의 모습을 찾아낸 그 남자 말이야. 궁금해.
2011.3.25.
<말테의 수기> 씨앗을 기억할 때
동쪽별. 춥구나. 퇴근할 때 눈비 맞고 뛰어오는데 총각네 야채 가게 총각들이 우산을 빌려줘서 다행히 덜 젖었어. 봄은 언제 올까? 따뜻했으면 좋겠어.
신림동 황금 허리. 그거라면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어. 너는 모르고 나만 아는 일이야. 그날 우리는 엠티를 갔어. 방에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 2층 방에 모여 있는데 누군가 소리쳤어. 규동이가 춤춘다! 그래서 다들 우르르 뛰어나갔어. 나도 덩달아 뛰어나가다가 2층 계단 코너를 막 돌려는 찰나, 그만 보고만 거야. 일층 강당 앞 무대에서 춤을 추는 너 말이야. 너는 움직이고 있는데 시간은 정지되더구나. 군무인데도 유독 너만 보였어. 네 허리 놀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누군가 하늘과 땅에서 널 잡고 돌리는 것 같았어. 누군가 하늘과 땅에서 널 잡고 물기를 짜내는 것 같았어. 너는 춤추는 빨래, 춤추는 파란 샤먼이자 애송이. 춤추는 수줍음, 춤추는 눈물방울이었어. 그 춤을 보는 순간 설명할 수는 없는 이유로 아주 부끄러워졌어.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에스메랄다의 춤을 보던 파리 사람들의 기분이 그날의 내 기분과 비슷했을지도 몰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 여인은 위험하다.’ 같은 감정을 나도 느낀 거야. 뛰어 내려가던 나는 2층 계단에서 우뚝 멈춰 섰어. 그리고는 잠시 후 휙 돌아서 문을 열고 나가 버렸어. 그때 내가 평소에 알던 너와 달라서 당황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틀렸어. 난 당황한 게 아니야. 평소에 알던 네가 그렇게 춤을 춰서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거야. 나는 창백하고 침착하고 조심스러운 남자의 현란한 춤. 그 모순과 긴장과 생명력에서 아름다움과 슬픔을 느꼈어. 넌 그날 우리 모두를 오르페우스로 만들었어. 모두들 경고를 무시하고 뒤돌아 봐야만 했어. 오로지 나만이 거기 휩쓸리지 않고 앙상한 나무 사이를 걸어 다녔던 거야. 나만이 너의 매혹에 저항했던 거야. 그날의 너, 네가 살았던 수많은 나날 중 하필이면 그날의 네가 화석으로 남는다면 미래 사람들은 거기서 춤추는 남자의 무엇을 볼 수 있을까? 한 남자의 춤 추는 하루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그건 생명력일 거야. 살아있고 움직이고 있음의 희열일 거야. 수만 년이 흘러도 누구라도 읽어낼 수 있을 거야. 어쨌든 너의 지킬과 하이드 잘 읽었어. 그 글을 읽으니 네가 무척 고독하고 순수한 상태에서 썼다는 게 느껴지고 그게 어쩐 일인지 가슴이 아파. 뭔가 좋고 아까운 걸 두고 길을 나서며 뒤돌아보는 사람이 가슴을 치며 쓴 것 같아. ‘너 요새 무슨 일 있어?’ 이렇게 물어놓고 금세 후회되네. 너라면 ‘무슨 일이 있지 않은 적이 있니?’라고 대답하겠지.
그렇다면 전략을 바꿔서 이번엔 나 장난쳐도 되니? 윤동주의 서시 말이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그 시가 어디에 제일 많이 걸려 있을 것 같아? 바로 감옥이야. 어때? 지금 당장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있어지고 싶지? 난 그랬는데. 웃기지 않았다면 정말 미안해. 누군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길 소망하지 않았겠니.
그럼 이 이야긴 어때? 내가 어려서 솜사탕 막대기 수집가였단 이야기 너에게 했었니? 다들 뭔가 수집하잖아. 우표도 있고 구슬도 있고 흔들면 여자 옷이 벗겨지는 볼펜도 있고 미니 자동차도 있고 공깃돌도 있고 딱지도 있고 초콜릿 통도 있고. 내 동생은 죽은 새 깃털 수집가였는데 그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랬던 것처럼 날고 싶은 꿈을 가졌기 때문이야. 내 동생이 지붕에서 그 날개들을 다 날고 뛰어내리는데 그 날개가 사방팔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내 동생은 벌거숭이가 되는 상상을 하면서 악몽에 시달렸던 걸 보면 내가 내 동생보단 여러모로 현실 타협적인 인간이었던 것 같긴 해. 나중에 그 털들은 어떻게 되었느냐면 내 동생이 닭털까지 모으니 냄새가 나서 나의 사주로 엄마가 동생 몰래 버렸어. 그리곤 날고 싶은 소원을 가진 도둑이 들었다고 했던 것 같아. 같은 소원을 가진 사람끼리 이해하고 살아야 한다고 악어의 눈물을 흘리며 동생을 위로했지. 어쨌든 나는 오로지 솜사탕 막대기만 모았어. 하나의 중심축이 있고 거기에 뭔가 구름 같은 것, 불분명한 것, 축이 없다면 흩어져 버리고 말 것들이 모여드는 그 이미지에 사로잡혔던 것 같아. 나는 그래서 막대기로 방안에 먼지를 모으는 실험까지 감행하기도 했었어. 내 이론에 의하면 그 솜사탕은 무지개색으로 나왔어야 했어.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눈앞에 먼지는 언제나 형형색색이었거든. 그리고 또 이런 생각도 했어. 그렇다면 우리 영혼에도 척추가 있어서 그 뼈 중심으로 온갖 것들이 모여드는 게 아닐까. 거기엔 좋은 것 좋지 않은 것 순수한 것 불순한 것 선한 것 악한 것. 인정받고 싶은 것, 자유롭고 싶은 것. 때리고 싶은 것, 차라리 얻어맞고 싶은 것. 사랑받고 싶은 것, 그런 것들이 다 모여서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형태를 유지하는 것 아닌가 하고. 그래서 난 나중에 솜사탕 막대기를 내 손으로 버릴 때 내 영혼의 축에 대해 생각해 봤어. 영혼에도 등뼈란 게 있다면 언젠간 그런 것을 갖고 싶다고 빌고 싶었었어.
난 언제부턴가 선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된 것 같아. 선의 가면을 쓴 악, 착한 척하는 사람들의 악. 그런 것이라면 관심을 멈출 수가 없어. 그리고 결국엔 선을 부르고야 말 악이 존재함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사람이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은 어떤 한 극단에 닿아서가 아니라 동시에 두 극단에 닿을 때란 파스칼의 이 말은 나에겐 언제나 이런 식으로 다가와. 깊은 사랑 때문에 깊게 미워하고 깊은 사랑 때문에 깊게 경멸한다고, 큰 악 때문에 큰 선을 꿈꾼다고.
난 성악설이나 성선설보다 성악설이란 걸 생각해. 그런 학설이 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약하다는 것. 그 약한 인간이 선과 악의 아슬아슬한 균형추를 잡아가며 사는 게 삶이라고 생각해.
내가 진짜로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니? 세상은 원래 그렇다는 핑계를 대고 선한 면을 팽개치고 악해지는 사람이야. 내가 진짜로 용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아니? 타락하고 악해질 수많은 이유가 있는데도 악해지지 않은 사람들이야. 내가 진짜로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니?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인간은 어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다른 인간에게 악이 선으로 될 가능성을 보려는 사람들이야. 내가 진짜로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니? 자기는 착하다고 믿고 자기의 모습에 만족하며 남에게 훈계하고 별것 아닌 일에도 깜짝 놀라는 척하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너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릴케의 『말테의 수기』가 생각나. 말테의 수기는 낯선 곳에 도착한 사람의 시선으로 쓰인 책이야. 그래 집 떠난 젊은이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낯섦. 그것이 말테의 수기일 거야. 그리고 이런 시선은 너무나 소중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옆으로 치워버렸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거나 아니면 삶이 바쁘다거나
그것들을 우리 곁에 두면 안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는 가운데 시간은 흘렀고 우리는 사소한 것들에 길이 들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가 가진 것의 어마어마함에 놀랐다.
그래서 그렇게 되길 원치 않는 사람들은 탕자가 되어서 길을 떠나는 거야. 그런 길을 떠난 말테는 보는 법을 새로 배울 수밖에 없어. 보는 법을 새로 배우면서 말테에게는 전에 없던 내면이 생겨나. 내면이 생겨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너무 중요할 거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외부에만 의존하고 말겠지. 말테의 수기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웃에 대한 이야기, 연극배우의 무대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지만, 언젠가 그 이야기도 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오늘은 다른 이야길 들려줄게. 오늘 말테의 수기가 생각난 이유는 따로 있거든. 덴마크 귀족의 후손이지만 이젠 파리의 가난하고 고독한 이방인일 뿐인 말테는 어느 날 이렇게 해.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사과의 씨앗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어(그리고 내 어린 날의 솜사탕 막대를 생각했어). 열매가 씨앗을 기억한다고 할 때 내 선과 악이, 내 슬픔과 기쁨이 씨앗을 기억한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씨앗일까? 어떤 씨앗에서 내 과일은 자라났을까? 오늘 네 슬픔의 과일은 어떤 씨앗에서 자랐을까? 나는 지금은 오로지 강함만을 생각해. 악해질 많은 기회가 있어도 난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아. 진리에 관심 있는 자라면 어디서라도 진리를 찾아내고 선에 관심 있는 자라면 어디서라도 선을 찾아내고 악에 관심 있는 자라면 어디서라도 악을 찾아내고 말 거야. 나는 어디서든 강함을 찾아내고 싶어. 지상의 선과 악을 다 받아들이되 그것을 도덕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싶진 않아. 중요한 것은 생명력이야. 그날 네가 춤추는 너한테서 한 번 본 것. 그리고 끝까지 새겨두기 위해, 영원히 타오르게 하기 위해 눈을 감아버린 그것.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문밖으로 걸어나가게 한 그것. 그것은 바로 너의 생명력이었어. 꺼트리지 마.
2011.3.18
<지킬 박사와 하이드> 넌 지킬, 난 하이드
안녕, 커피진주.
일본의 지진 소식 때문에 어떤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는 시간이야. 이 현실이 잘 믿기지 않는데, 그건 내가 세상을 그저 그럴듯하게 예측대로 잘 굴러가고 있다고 온정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조금씩 예외가 있지만 그래도 늘 나아지고 있다고 최면을 걸며 살아왔지만, 이젠 도무지 자신이 없어지는구나. 크게 보면 어쩔 수 없이 재난 영화에 출연한 단역들로서 이 불확정성의 시대에 걸맞은 우리의 눈높이는 어떤 걸까 고민하게 돼. 이런 와중에, 트위터에는 이웃에 덮친 재앙을 애도하는 수많은 사람들 뒤로 놀라운 멘션들이 넘쳐나고 있어.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이다.’ ‘한반도를 안전하게 해준 하느님께 감사한다.’ ‘한류 열풍에 타격이다.’ ‘한국 기업에 반사 이익이다.’ 어처구니가 없지? 인류 공영과 사랑의 전도를 외치는 예의 바른 한민족의 얼굴 뒤로 이런 배타적이고 매몰찬 이기심이 숨어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지만, 그걸 드러내놓고 표출해내는 지독한 뻔뻔함이 더 놀라워. 오랫동안 우릴 괴롭혀온 우월한 경쟁자로 일본을 보고 있기에, 틈만 나면 위치의 전복을 꿈꾸는 극우주의자들, 또 상대적으로 선교사의 희생이 심했고 그 때문에 서구 종교가 차지한 자리가 비좁은 일본에 대해 개신교도들이 가진 열등감, 질투심이 발현된 거야. 마오쩌둥이 ‘역사는 증상이고 인간이 질병’이라고 했었지, 아마. 이들이 보여주는 집단적 이중성이 실제 재앙보다 더 몸서리치게 무섭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오늘 아침에는 최승자 시인의 <어떤 아침에는>이라는 시를 펼쳐봤어. 병든 나와 병든 세계와의 이 미묘한 관계는 결국 둘 사이에 어떤 새로운 윤활유의 존재를 필요하게 돼. 많은 영화들이 이 중간 존재를 다뤄왔어. <헐크>, <사이코>, <드레스 투 킬>, <엔젤 하트>, <프라이멀 피어>, <카인의 두 얼굴>, <마스크>, <아이덴티티>, <파이트클럽> <솔라리스> 등등, 이 익숙한 영화들의 공통점이 뭐게? 바로 도플갱어나 야누스 또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인 다중 인격을 다룬 영화들이야. 이 영화들의 주요 테마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탄생한 것이라면 믿을 수 있겠니?
내가 얘기하려는 작품은 ‘괴혈병’이나 ‘럼주’라는 단어를 가르쳐줬던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야. 낮에는 자선사업가 지킬, 밤엔 살인범 하이드. 말하자면,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 성추행범 목사, 밀수꾼 경찰, 아동학대범 유치원교사등등. 그래 이런 간단한 이미지로 정리할 수 있지만, 나 또한 어려서부터 많은 버전의 영화를 봤고, 패러디를 보았기에 문득 진짜 줄거리는 헷갈리기도 해. 그래서 저번 주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다시 한 번 찾아봤어. 동성애자처럼 그려진 소설과는 달리, 지킬은 성녀를, 하이드는 창녀를 사랑하고 있는 뮤지컬의 설정이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였어. 이 얘기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의 틀에 갇힌 좁은 상징이 아니라, 욕망의 억압과 폭력적 분출이라는 당대 관습과 제도에 대한 냉소적 비판으로 확장돼 보였거든. 이 소설이 이렇게 영화로, 뮤지컬로 끝없이 각색되는 이유가 뭘까. 메리 셜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처럼 그가 찾아낸 ‘이중인격’이라는 개념이 순식간에 집단 무의식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은 이유가 뭘까. 사람은 행동보다는 의식의 영역이 훨씬 넓고 깊고, 또 거기엔 정상보단 비정상적인 요소가 훨씬 더 많이 내포돼 있어. 결국, 거시적으로 인간의 심리를 투시할 때 보이는 그 복잡한 비극적 양상, 즉, 인류가 받은 저주인 ‘선과 악’이라는 쌍둥이의 극과 극의 갈등을 최초로 그려냈기 때문 아닐까.
이런 갈등에 눌린 채 어떻게 탈출할까, 질문을 던지고 또 던졌던 지킬은 어느 날 ‘두 본성을 분리하는 기적’에 도전해.
이 무서운 획책은 자신의 악이 완벽한 명분을 얻고 양심의 가책 없이 마음껏 펼쳐지기를 원하는 마음이야. 약물 한 병이면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 이토록 편리한 면죄부가 있을까?
넌 내가 죽도록 사랑하며 살라고 했지. 그래 어쩌면 너라도 마음껏 욕망하고 싶구나. 하지만 밤새지킬의 어린 시절 고백처럼 마음껏 쾌락을 탐닉하고, 다음날 아침 카다피에게 학살당한 리비아의 시민을 애도하는 점프컷을 그린다면, 이 비약에서 오는 균열감 때문에 나는 온전히 스스로 쾌락을 추구할 수도, 당연한 인류애를 맘껏 펼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질 거야. 네 말대로 겉으로는 쑥맥이고 속으로는 쾌락주의자인 내가 약품 하나로 또 다른 아바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하이드로 태어난 난 거침없이 달려가 불길처럼 널 휘감을텐데. 지킬 그대로 고귀하게 남은 난 사심 없이 지구의 평화를 목놓아 기원할텐데. 이런 뻔뻔한 면책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자가 있을까?
하덕규의 노랫말처럼, 대부분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다들 어떤 게 나인지 모른 채 번민에 휩싸여 살고 있을 거라 믿어. `권태'와 `광기'의 충돌 가운데 끝없이 절망하고 허무의 나락에 빠졌던 전혜린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이런 편지를 남겼어.
이렇게 질문해 볼까? 마음속에 또 다른 내가 있고 그 마음이 몸을 갖고 태어난다면 누가 진짜 나일까? 둘 중 나의 본질적인 모습은 어떤 걸까? 루 메리노프는 <철학으로 마음의 병을 치료한다>에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고쳐 말해. 결국, 어떻게 보여지고 평가받느냐가 존재의 본질일 수도 있다는 얘기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느끼고 인식하는 내 본질은 겉모습과 속 모습 중 어느 것일까?
내 대학시절 별명이 ‘신림동 황금 허리’였다는 걸 알 거야. 내가 허리를 튕기면 근방 200미터 내의 여인들이 모두 쓰러졌던 전설도 알 거야. 항상 맨 뒤 창가를 선호하고, 나서는 걸 싫어하며, 구석과 그림자에 집착하며 말이 없던 내가 어느 날 수백, 수천의 대중들을 휘어잡는 춤꾼으로 거듭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니? 내 안에 그런 광대로서의 유전자가 있는지는 나도 몰랐던 일이니까. 사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내 인생의 궤적들과 현재의 지표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 그렇다면, 결국 진짜 나는 누구일까.
오늘 외신을 보면서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어. 저 카다피가 그 카다피인가. 미국의 야욕이 아랍을 비극에 빠뜨렸기에 외세에 결탁해 부패한 자본가들을 내몰고 정의를 위해 자신들은 광신도가 됐다고 일갈한 그 카다피가 지금 저 학살자인가. 지금과 과거 중 누가 지킬이고 누가 하이드인가.
지킬은 자기 몸에 실험을 감행하며, 이렇게 대답해. 인간은 결국 어느 한 쪽으로의 구분이 의미 없을 정도로 이중적이다고 말이야.
어리석음, 잘못, 죄악, 탐욕이
우리 정신을 차지하고 육신을 괴롭히며,
또한 거지들이 몸에 이와 벼룩을 기르듯이,
우리의 알뜰한 회한을 키우도다.
보들레르도 <악의 꽃>에서 선이 없으면 악도 존재할 수 없다고 얘기해. 흙탕물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언어학에서 유사성과 차이를 동일 개념으로 보는 것처럼. 이렇게 그 대립을 두 인격 혹은 선악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선 여러 분할된 욕망의 대립이라고 보자면, 도스토옙스키의 <이중인격>, 스탕달의 <적과 흑>, 헤세의 <지와 사랑>에서부터 <플래툰>의 번즈 중사와 일리어드 상사까지 이 주제는 우리의 역사와 일상 속에서 무한히 반복 재현되고 있어.
스티븐슨이 연구했던 이 ‘도덕적 정신이상’이 어느새 보편적 삶이 되어버린 세상. 이 기이한 이야기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이것이 전혀 기이하지 않다는 거야. 현대 사회는 말 그대로 하이드가 지킬을 구원하고 있는 세상이니까. 이번 주 故 장자연 리스트의 인물들은 한숨을 놓았어. 편지가 친필인지 조작인지의 소동이 결국 재수사를 하지 않는 결론에 도착했으니까. 하지만 자필 유서에서 호소했던 진실은 여전히 유효하잖아? 돈과 권력으로 젊은 사람의 꿈을 짓밟았던 그 위선자들은 자신의 부조리를 감내하기 위해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놓고 편하게 악행을 저지르기를 꿈꿀 거야.
이렇게 위로하면서 말이야. 한편 그들은 가족에겐 소중한 가장, 친구들에겐 명망 있는 지인일 테지.
사실 영화나 소설 속 하이드는 대부분 폭력적인 악당으로 그려져. 정신질환 탓에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른다는 이 고정관념은 그들을 격리의 대상으로 몰아세우는 왜곡된 시선을 은연중에 퍼뜨리지. 하지만 우리 안의 하이드, 그것은 꼭 흉악한 범죄자의 욕망을 일컫는 것만은 아냐. 언젠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기다려주지 않고 올라가 버린 엘리베이터를 향해 돌진해서 결국 떨어져 죽은 사건에서처럼, 긴 세월 쌓아온 차별에의 울분.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끼어드는 새치기가 불러오는 살의. 소녀를 성폭행하고도 멀쩡하게 살아가는 가해자를 보고 그 부모가 시스템에 느끼는 울분과 복수심. 이렇듯, 평범하고 선량한 마음 뒤편에 법과 질서가 구원해주지 못하는 욕구와 본능들 또한 또 다른 하이드의 세포라고 생각해.
그가 약품으로 또 다른 인격의 출아를 상상한 지 200년이 지나기 전에 사실상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가 와버렸어. 본성의 분리는 불가능하더라도, 육체의 재현은 가능한 시대 말이야. 게다가 언제든 생성 가능한 복수의 디지털 자아는 다중적인 아이디와 아이콘을 지닌 채 인터넷을 떠돌 수 있는 지위를 얻었고, 우리는 그 익명의 틈에 숨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네티즌이라는 하이드의 초상을 얻었지. 즉, 이중인격을 넘어선 다중인격의 개념이 자연스러운 세상이 됐어. 우리는 컴퓨터 앞에만 앉아 아바타를 실행시키기만 하면 언제든 지킬과 하이드로 살아나갈 수 있게 된 거야. 물론 여기엔 중독과 혼동이라는 부작용이 따르고 있지.
어린 시절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24개의 인격체를 갖게 되는 바람에 자신을 스스로 치료하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인 캐머론 웨스턴이라는 한 남자의 기록, <다중인격>이라는 책엔 이런 글이 있어.
니체의 말처럼, 내 안에 존재하는 외부 세계의 대변자인 초자아가 양심의 가책 탓에 자기 학대에 찌든 모습으로 허덕이며 스스로를 쭈그러뜨리고 초라하게 만드는 사이에, 우리의 하이드가 하나둘씩 잉태되고 있는 거지. 그래도, 윤리와 양심의 굴레에 벗어날 수 없지만, 그 너머의 세계에서 '나쁘긴 하지만' 욕망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려는 이 두 번째 자아 역시, 심약한 인간의 일부라고 이해해주는 게 '인간적인' 인간으로 사는 걸까? 아무튼 그는 인격체의 수와 인격체 간의 나이 차를 줄여가고 있대. 지금은 24개에서 어디까지 줄였을까?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개의 육체와 영혼이 분열하여 탄소, 수소, 질소, 산소, 염, 기타의 각 원소로 환원하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이 사랑이다.” 어느 자살자의 수기에 나온 글이야. 한 인간이 여러 개의 인격체로 분열되며 각각의 욕망으로 환원하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은 무엇일까. 법? 도덕? 관습? 이성? 사랑? 대답해 줘.
2011.3.10
<이반 일리치의 죽음> _ 진짜 삶
안녕 동쪽별.
지난주에는 너무도 깨끗하고 진지해서 마치 어린 아이의 것만 같은 천상의 사랑 이야길 나누다가 이번 주엔 죽음 이야길 나누려니 정신이 없네.
너의 글을 보니 넌 나 몰래 언젠가 죽음의 문턱에 갔다가 돌아온 것 같은데. 음. 도대체 언제였을까? 네 글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할지라도 사랑의 끝, 꿈의 끝 앞에 서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의 글 같아. 죽음에 대한 네 생각은 덜 떨어진 숙맥인 처지에 속마음 깊은 곳에서만은 남부럽지 않은 과감한 쾌락주의자인 네가 썼다기에는 좀 의심스러울 정도로 지나치게 성숙하단 말이지. 아무리 손가락을 빨며 기억을 더듬어 봐도 네가 죽음에 대해 한 말 중 기억나는 것은 이거 하나뿐인데. 오르가슴이야말로 두렵고 유혹적이라고. 오르가슴은 죽음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고. 에로스야말로 죽음의 충동이라고. 너도 미인의 긴 다리에 칭칭 감겨서 그 다리로 목 졸려 죽임을 당하고 싶다고. 그래서 난 속으로 생각했지. 음 너야말로 에로틱한 순교자구나!
하지만, 이번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두고 네가 쓴 글은 오르가슴이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봐서 넌 최근에 사랑과 죽음을 분리시킨 게 아닐까 궁금하지만 그래도 그럴 리는 없을 거란 생각으로 다시 읽었어. 그리고 네가 사랑과 죽음을 분리시킨다면 나는 난 반대야! 라고 외쳤을 거야.
나도 이반 일리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몇 가지 있으니 그거부터 말해볼게. 이반 일리치 삶의 소신은 인생이란 즐겁고 고상해야 한다는 거야. 다시 읽어봐도 그에게 인생관이라고 할 만한 것은 인생이란 원래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편안하고 기분 좋고 늘 즐겁고 고상한 것이란 말만 나오는데 이반 일리치의 고상함은 이런 거야. 그는 검사야. 그래서 그의 고상함의 범주엔 이런 항목들이 들어가. 자신이 파멸시키기로 마음만 먹으면 누가 되었든 그대로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갈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권력 의식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 그런데도 자기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법원에 온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친구처럼 편하게 대한다는 인상을 주도록 신경을 쓰고 그런 평판을 듣는 걸 즐기는 것. 법정에 들어설 때나 부하 직원들을 만날 때면 분명하게 전해져 오는 자신에 대한 예우를 즐기는 것, 상관이나 부하 직원들을 상대로 성공을 거두는 것. 자신과 격이 맞는 사람들과의 저녁 식사나 파티, 동료들과 나누는 담소, 식사, 카드놀이. 이반 일리치는 결혼도 이런 식으로 해. 아내가 될 여자를 너무도 사랑해서 그녀 안에서 자신의 인생관을 함께 나눌 무엇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고 그런 여자를 아내로 얻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고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한다는 느낌 때문에.
내가 살면서 만난 품위 있는 사람들은 이반 일리치와 달라. 그들에게 있어 인간의 품위는 어떤 자격, 조건, 혹은 그가 속한 집단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것들과 아무런 관계없이 자기 삶의 운명을 결정하려 하는 의지와 끝없는 실천에서만 나왔었어. 그래서 이반 일리치의 삶을 보고 있자면 난 좀 신경질이 나서 고상함과 품위가 뭔가 따져보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톨스토이의 또 다른 작품 <부활>의 한 등장인물이 생각나기도 해.
<부활>에는 자신의 인생을 ‘그것이 아님’으로 설명하는 셀레닌이라는 법무부 관료가 나와. 그는 젊은 시절 너그럽고 총명한 모범생이었어. 그의 젊은 시절의 목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관직에 들어가. 그런데 관직은 그가 생각한 것과 달랐어. 그는 현실이 평소 자기가 바라던 것과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즉 ‘그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싶지 않아서 그냥 그 생활을 이어나가. 그는 거절하면 상대방 여자가 상처받을까 봐 결혼했고 그러다 보니 서로를 이해하려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럴싸하게 보이는데 치중하게 돼. 그는 가정생활도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어. 그런데 더 큰 ‘그것이 아님’은 다른 곳에 있었어. 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는 점차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던 거야. 진실이란 인간 개개인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고 집단에 의해서만 인식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바로 이것이 가장 큰 ‘그것이 아님’이었어. 그렇다면 이것이 왜 가장 큰 ‘그것이 아님’이었을까? 바로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허위를 행하고 있다는 자각 없이,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세상은 원래 그런 거라면서 평온하게 아무런 기쁨과 위안을 주지 않는 직장 생활과 가정생활에 안착할 수 있었던 거지. 이반 일리치는 셀레닌과 닮았어. 내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란 소설도 죽음을 앞에 두지 않고선 도저히 눈치챌 수도 없이 깊게 젖어 있는 ‘그것이 아님’을 발견해 가는 글로 읽혀.
이반 일리치는 죽기 전에 아내와 자식, 의사, 법무부 동료들을 보면서 자신이 못 견뎌 하는 그들의 행동이 바로 자신의 삶의 모습, 한 치의 의견 차이도 없었던 자기의 모습이었던 걸 알게 돼. 그들 안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삶의 수단으로 삼았던 모든 것들을 보는 거지. 그는 가족과 동료들이 자신을 가엾게 여겨주기를, 그와 함께 울어주기를 간절히 바랬어.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동료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지. 그래서 그의 생애 마지막 독, 마지막 거짓은 울고 싶은데 울지 않는 것이었어. 그건 무슨 숭고한 이유 때문이 아니고 남들이 어찌 생각할까 두려워서였던 거지.
소설의 마지막에 고통에 시달리던 이반 일리치가 영혼의 소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와. 그 장면을 축약해서 옮겨보면 이래.
-네가 바라는 게 뭐지?
-바라는 것?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는 것, 그리고 사는 것
-사는 것이라고?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데
-그래, 사는 것, 예전에 살던 것처럼 행복하고 기쁘게.
-예전에 어떻게 살았는데? 네가 행복하고 기쁘게 살았다고?
이반 일리치는 행복했던 지난날의 삶에서 최고로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마음속에 그려보기 시작해.
-혹시 내가 잘못 산 것은 아닐까? 하지만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살았을 뿐인데 어떻게 잘못 살 수가 있었지?
-그럼 지금 네가 바라는 것은 뭔데? 사는 것? 어떻게 사는 것?
그의 고민은 계속 돼. 그리고 또 결론을 내려. 암만 생각해도 올바르고 품위 있는 삶이었다고. 그렇게 두 주일이 지나자 그는 자기 삶에서 지키고 변호해야 할 것들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달아.
죽음을 바로 앞에 둔 이반 일리치처럼 우리에게도 이 삶 속에서 무엇을 수단으로 삼고 있으며 무엇을 추구했었던가 피를 토하듯이 묻게 되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에피쿠로스 학파의 명제 중엔 멜레네 타나토(melete thanatou)란 게 있어. 이 수련은 삶 속에서 죽음을 현재화해 보라는 거야. 그건 죽음을 매일매일 생각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매일매일을 마지막 날로 간주하는 그런 삶을 상상해보란 거야. 이건 뭐 영성에 가득 찬 교훈적인 격언이 아니야. 처절하게 사유해보란 말이야. 내가 지금 막 죽으려고 할 때처럼 내 행동을 사유해보란 말이야. 동쪽별! 우리는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걸까? 더 알아야 하겠지? 우리에게는 어떤 ‘그것이 아님’이 있을까? 이 질문은 너무나 중요해. 감히 남의 눈에 내가 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부러움을 사는 것 따위가 내 삶의 의미, 내가 태어난 이유가 될 수 있겠니?
그러므로 사랑이 죽음인 너의 태도를 나는 항상 존중할 수밖에 없어. 다른 덫에 걸려 죽는 것보단 미인의 다리에 목이 감겨 죽는 게 훨씬 좋지. 난 우리가, 인간들이 모두 죽는다는 걸 생각하면 안쓰러우면서도 슬프면서도 경이로워. 그렇게 죽을 것인데도 너무너무 애를 쓰고 아침에 눈을 뜨고 어린아이 머릴 쓰다듬고 수영을 하고 용기와 사랑을 보이고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내잖아. 넌 꼭 사랑하다가 죽었으면 좋겠어. 아니면 죽을 듯이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어. ‘진짜 삶’에서 멀어지지 말자. 진짜인 척 사는 건 하지 말자.
2011.3.3
<이반일리치의 죽음> 메멘토 모리
안녕, 커피진주.
너의 감기 소식만으로도 덜컹하는 한 주야. 이반 일리치는 옆구리의 작은 타박상 때문에 3개월 시한부의 삶을 살게 됐으니까. 걱정돼. 빨리 나았다는 소식 전해주길 바라. 시한부 하니까 슬픈 이야기 하나가 생각나. 작년 여름, 췌장암을 앓던 한 대학 때 친구가 세상을 떴어. 6개월 시한부 투병 소식을 뒤늦게 듣고 놀라 전화를 했을 때, 이렇게 담담히 얘기하더라. “바쁘잖아. 신경 쓰지 마.” 그 말을 듣고서야 눈물이 뚝 떨어졌어. 죽음이 임박한 사람이 살아남을 자를 우선 감싸주다니. 순간 돋보인 내 무심함에 스스로 치를 떨었었어. 병문안을 가끔 갔을 때마다, 각종 연예인 가십을 풀어놓으며 농담을 구사하는 게, 곧 죽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 프로 야구와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 덕에 버틴다고 명랑하게 웃었지만, 실은 병이 그 낙천적인 성격까지도 갉아먹고 있었을 거야. 점점 자신의 모습이 혐오스러워졌는지, 방문객도 더 이상 반기지 않게 됐어. 모든 걸 놓아버린 친구의 참혹한 얼굴을 떠올리다 못해, 난 하이킥에 나오는 한 여배우에게 부탁했어. 그냥 개인 팬 미팅이라고 생각하고 병문안을 함께 가자고. 죽어가는 낯선 친구에게 선물해달라고. 천사 같은 그 배우는 기쁘게 동행을 허락했어. 내 얼굴도 잘 못 알아보던 친구가 그 배우는 단번에 알아보더라. 방문 인증이라며 배우의 손수건과 거울도 빼앗고 장난치며 놀더니, 끝내는 (10년 뒤에 있을지 모를) “결혼식장에 갈게요. 그때 봐요”라며 갑자기 마지막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거야. 깜짝 놀랐었어. 어떤 위로가 그를 방긋 웃게 한 걸까. 죽음을 며칠 앞두고 풀죽은 그에게 무엇이 그토록 희망이었을까.
그때 난, 중학교 때 백혈병에 걸려 돌아가신 외삼촌과의 마지막 조우를 떠올렸어. 그날, 어른들은 잘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직감으로 마지막 인사라고 느끼고 있었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우물쭈물하다가 그때 내가 건넨 말은, 처참하게도, “곧 나으실 거예요. 걱정 마세요”였어. 이반 일리치가 증오해 마지않던 그 가짜 위로였던 거야! 자신이 죽는다는 걸 인정하고, 죽어가는 사람으로 대우해 주길 바라던 일리치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이 사람들한테 공공연히 부인되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해. 돌멩이가 하늘에 떠 있다면 뉴스거리가 되지. 하지만, 달이 떠 있는 건 뉴스가 안 되잖아? 죽음도 마찬가지로 너무나 뻔하고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탓에, 직접 죽음을 맞이하는 개인은 아무것도 아닌 일상적 이벤트의 주인공이 되고 말아. 내 말은 전혀 위로가 안 됐을 거야. 결국 타인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건네는 헛된 위로는 실은 “난 이런 일을 겪을 리도 없고, 또 나한테 일어날 리도 없어”라는 추한 안도감일 뿐일 테니까.
그렇게 ‘다행히도 난 죽음을 연기하는 주연 배우가 아니라 관객이야’라고 자신을 다독여도, 우리 대부분도 결국 일리치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돼. 잘 봐봐. 그 과정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말한 '죽음의 5단계'를 거쳐. 첫째, 부정의 단계야.
누구라도, 처음엔 자신이 곧 죽게 된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리고는 바로 둘째, 분노의 단계로 접어들어. 왜 하필이면 자신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가족, 의사, 신에게까지 뻗치면서 주위를 힘들게 해.
“죽음! 오, 죽음! 그러나 남들은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나를 동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유 있게 삶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결국 죽음을 향해 열심히 달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순간, 사람들이 자신이 바라는 만큼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모욕을 느끼는 거지.
그리고는 셋째, 협상의 단계로 들어서. 자, 이젠 어떻게든 죽음을 미루려고 해. 착하게 돌변하거나, 특별한 헌신을 맹세하거나, 등등 처절하게 발악하는 거지.
이렇게 파고들면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나 스스로 망쳐 놓았다는 생각을 하며, 또 그것을 바로잡을 기회도 없이 눈을 감아야 하는 거라면 그땐 정말 어떻게 되는 걸까?”라고 돌아오지 않을 대답을 향해 절박하게 매달리게 돼.
하지만, 결국 넷째, 우울의 단계로 접어들고, 더는 자신의 죽음을 부인하지 못하게 돼.
무서운 깨달음이야. 그토록 절박했던 인생의 자취들이, “죽음의 정반대 편에 서서 죽음을 향해 점점 거리를 좁혀왔던 거”에 불과하다니, 극도의 상실감과 우울증은 당연한 도착점이겠지.
마지막으로, 수용의 단계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런 깨달음의 순간에는, 주변 사람의 동정 어린 시선마저도 이렇게 진실을 들려줘.
『생각의 탄생』에 이런 말이 있어. “가장 완벽한 이해는 우리가 ‘자신’이 아니고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것’이 될 때”이다. 그래, 맞아. 죽음의 롤러코스터를 탄 일리치도 자신을 포기하면서 스스로 죽음 자체를 이해하게 됐을 때야 비로소, ‘헛되게 살아온 삶을 유의미했다고 애써 정당화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삶을 옥죄는 것이었다’라는 통렬한 깨달음을 얻게 돼. 그걸 본 우리는 죽음만이 줄 수 있는 이 선물에 응당 고개를 끄덕이게 돼. 그런데 여기서 하나, 묻게 되는 게 있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죽음’이라는 통과 제의의 심경에 우리가 유독 쉽게 본능적인 직관을 발휘하며 감정이입 되는 비결이 뭘까? 친구의 모습, 외삼촌의 모습, 일리치의 모습 모두가, 그저 잠시 유예된 우리 미래의 한 단면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 아닐까? 그 누구도 받아들이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 사실. ‘나는 죽는다’라는 냉정한 비밀 말이야.
『좁은 문』도 『첫사랑』과 마찬가지로 결국 이 죽음의 문턱에서야 깨닫는 사랑의 진리를 헤집고 있잖아. 그래서인지 난 『좁은 문』을 읽으면서는 다른 뭣보다 죽음을 놓고 나누는 두 남녀의 사랑 맹세가 인상 깊게 남아. 제롬이 알리사에게 ‘우릴 갈라놓을 수 있는 건 죽음뿐’이라고 하자, 알리사는 반대로 ‘오히려 죽음이 살아 있는 동안 떨어져 있던 둘을 더 가깝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해.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시선이 보이지? 너는 어느 쪽이니? 궁금해. 넌 알리사 같은 금욕주의자는 딱 질색일 거 같아. 왜냐면, 알리사가 빠진 사랑의 환상은 기독교의 신이 배타적으로 요구하는 형이상학적 목적을 완성하려는 데 있으니까. 죽음마저도 ‘사랑보다 더 소중한 무엇’인가를 향한 자기희생의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다니. 이런 자학형 행복추구자에게 말론 브랜도는 삐딱하게 한 마디 던지겠지.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고독한 존재야. 낭만적이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굉장히 바보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알리사의 일기 마지막 문장은 가슴을 사무치게 해.
똑같은 고독 속에 죽어갔지만, 일리치는 정반대의 영역에 있었어. 관습의 규율에 크게 어긋남 없이 세속의 모든 욕구를 지당하게 쫓아오다가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렇게 소리쳤거든.
톨스토이가 인생의 절반밖에 살지 않았던 40대 초에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었던 거 알지? 그때 쇼펜하우어에 경도됐었다고 해.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대작에도 쇼펜하우어가 끊임없이 인용되는 이유를 유추할 수 있어. 어찌나 염세적인지, 행복한 사람도 슬프게, 또 슬픈 사람이라면 자살 충동을 느끼게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독설 가득한 행복론은 생의 유한성을 막 깨닫고 그 앞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에겐 치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을 거야. 쇼펜하우어는 겁에 질린 사람에게 태연히 이렇게 묻거든.
인간이 태어나기 전의 상태는 죽음이라고 부르지 않아. 태어난 후에야 죽음이 존재할 수 있지. 즉, 죽음은 삶의 꽁무니에 태어난 이면일 뿐이고, 결국 원래 아무것도 없던 상태로 돌아가는 회귀일 뿐이라는 거야. 삶이 어차피 고통밖에 없고, 또한 불가능한 만족을 위한 무의미한 노력의 연장일 뿐이라면, 죽음은 환영해야 할 해방으로 반겨야 한다는 거지. 그의 말에 수긍한다면, 생명과 죽음이 맞닿은 형상은 빛과 그림자의 원리와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 우리 몸에 빛을 비추면 그림자가 생겨. 빛을 거두면 그림자도 상실돼. 하지만, 정말 그림자가 생겼다, 사라진 걸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빛이 닿는 순간, 몸이 빛을 막고 그림자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이 보이는 것일 뿐. 그림자는 애초에 없고, 빛이 사라지면 주변에 생성됐던 존재들이 사라지면서, 모두 애초의 ‘무’에 해당하는 그림자가 되어버리는 것이잖아.
그래, 이렇듯, 죽음은 모든 철학과 예술을 전통적인 소재면서도, 실은 우리가 마주치는 가벼운 일상적인 주제고, 동시에 먹이사슬이라는 생태계의 균형요건이고, 보험 업계부터 화환업체까지 수많은 기업의 생명줄이고, 각종 영화의 오락거리이기도 해. 나도 최근 ‘김인희의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파 영화를 찍었어. 이런 죽음을 다룬 많고 많은 작품 중에 하필이면 이 작품을 놓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명쾌히 해답을 건넬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한 보르헤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읽었던 걸까. 내가 보기엔 톨스토이는 ‘잘못 산 인생이 편안한 죽음에 장애가 된다’라는 묘한 교훈을 깊게 던져주고 있는데, 그렇다고 이 소설이 삶의 노선을 재정비하자는 단순한 계몽극이라고 볼 수는 없어. 그건 어차피 비현실적인 계도일 테니까. 음, 이런 거 아니었을까? ‘메멘토 모리’ (프랑스 수도원의 수도사들 사이에서 한 때 인사로 쓰였던 말인데, 내 데뷔작의 영문 제목이기도 해.)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인 이 라틴어를 암송하다 보면, 즉,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떠올리다 보면, 우린 모두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이 소설은 이 ‘생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것’, 그 거창하고도 소박한 철학적 소망을 전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일로 삶을 유예하는 것, 그것은, ‘인생이 무한하다고 믿는 오만함’이거나 혹은 ‘지금 조건으로 다시 한 번 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착각’이라고 속삭여주는 게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난 이 소설에서 다뤄진 죽음의 정의를 ‘마지막 성장=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오는 길’로 내리고 싶어. 영화 「버킷리스트」의 이 대사처럼 말이야.
그런데, 커피진주, 너도 언젠가 결국 죽는 거니? 상상할 수가 없구나. 100년 전 시골 기차역에서 맞이한 톨스토이의 허망한 죽음은 그가 평생 상상하지 못한 이미지였을 거야. 내가 죽을 땐,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져. 그게 무엇이든, 그 상상하는 방식만 아닌 그 어떤 것일 거라는 불온한 본능 때문일까? 죽은 후 내 자취가 결국 모두에게서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허망함, 그 총체적 망각이라는 두 번째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무서워. 불안해져. 피가 혼탁해져. 내털리 포트먼 주연의 「블랙 스완」을 보면 알게 돼. 불안이 어떻게 영혼을 잠식하는지. 잠식당한 영혼이 예술혼으로 피어나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겐 가속화된 육체의 파괴까지 남겨주지. 지난주 자살로 삶을 마감한 배우 故 이은주의 6주기 추모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오늘의 사망자수’를 가르쳐주는 전광판을 봤어. 0명이라는 통계에 한숨이 놓여. 하지만, 통계의 엄격함이 무서워. 하루에 몇 명이 죽는다는 통계상 평균을 맞추려면, 오늘의 0명 탓에 내일은 평균 두 배의 사망자수가 필요하다는 걸 뜻하니까.
20112.25
<좁은 문> 사랑 고백, 그 후
안녕! 동쪽별. 난 그만 감기에 걸렸어. 봄을 너무 기다렸나 봐. 좀 따뜻해지자마자 최대한 간단하게 입고 즐겁게 뛰어나갔다가 병들어서 돌아왔네. 그래도 후회하지 않아. 그런데 흥분해서 뛰어나갔다가 병들어 돌아온 게 꼭 첫사랑의 운명이랑 닮지 않았니? 첫눈에 반한다는 걸 믿느냐고? 물론 믿어. 절대적으로. 그리고 넌 내가 믿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 왜냐하면 난 늘 좋은 소식을 기다려왔으니까.
사실 난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읽으면서 지나이다와 그 아버지가 에로틱한 관계까지 갔을까? 너무나 궁금했었고 그 장면을 초조하게 찾았던 기억이 나. 지나이다 앞에 있을 때 아버지의 이미지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모습으로 있을 땐 결코 보인 적 없는 ‘우뚝 서 있는 동물’ 같았거든. 강력하고 매혹적인 미혼의 소녀, 그리고 완숙기에 접어든 기혼 남성의 사랑. 그 둘의 사랑에는 어딘지 위험하고 절박한 데가 있을 게 틀림없지. 너는 혹시 그 옛날에 밤의 하숙집을 몰래 빠져나가 스무 살쯤 연상의 여인을 사랑해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해. 그렇다면 지나이다와 아버지의 고뇌를 단숨에 이해할거야. 이런 사랑에서는 사랑의 자격, 조건, 이해관계, 뻔한 계산 이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 없는 것들이 되어버리고 마니 난 너무 통쾌해. 그리고 고뇌 없는 행복한 사랑이 차라리 가장 불행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야. ‘이 사랑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나?’ 혹은 ‘무엇을 위해 사랑을 대가로 바쳤나?’ 난 이런 질문들이 좋아. 사랑이 자기 판단의 준거인 경우가 좋아.
첫사랑에 관한 모든 소설들이 그렇게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사랑 이후가 나와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그렇게 뜨거웠던 사랑이 끝난 뒤에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나 원하는 것이 있어. 그것도 바로 눈앞에. 그런데 그걸 얻지는 못해. 그런 일이 일어난 뒤에 우리들은 어떻게 살게 될까? 그 얻지 못한 사랑에 끝까지 충실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아! 모든 위대했던 감정들, 감각들은 얼마나 사소해졌던가? 그런데 그렇게 사소해져 있는 우리 뒤에 있는 첫사랑의 광채는 또 얼마나 찬란하던가? 생활이 비참할수록 첫사랑의 광채는 기억 속에서 마치 환각인 것처럼, 꿈인 것처럼 나날이 찬란하게 빛나지.
첫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첫사랑이 아니라 첫사랑의 시간들일지도 몰라. 첫사랑을 경험하는 자는 반드시 뭐든 귀한 것을 잃게 돼. 사랑의 경험은 상실의 경험이고 그 상실에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까지 포함돼.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잃더라도 타인을 받아들이려 또 타인 속으로 들어가려 했던 그 경험만큼 내가 용기 있었던 적이 또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난 첫사랑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덕목들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 배운 것도 같아. 『좁은 문』의 주인공 제롬과 알리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야. 그 둘의 사랑이 어떤가 하면 각자 편지로 이렇게 말하고 있어. 나중엔 둘 중에 누가 한 말인지도 구별하기 힘들 지경이야. ‘너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나는 무엇일까? 어떻게 될까?’ ‘네가 내 곁에 있어야만 나는 진정한 나일 수 있고 그 이상일 수 있어.’ ‘그는 나 자신에게 나를 드러내준다.’ ‘그 없이 내가 존재할 것인가?’ ‘그와 함께 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있다.’ ‘그 없이 겪어야하는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내게 기쁨이 되지 못한다.’
제롬과 알리사의 이런 고백은 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두고 하는 말 “ 나는 너야”와 함께 내 머리 속에 깊이 박혀 있어. 나는 이런 고백들을 숭배하며 맘속에 내 뜨거운 사랑의 원형 같은 것을 만들어 왔다고도 할 수 있어. 그런데 알리사가 제롬에게 한 말 중 내가 가장 잊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진전(발전)이 없는 상태를 소망할 수는 없다”야.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선 이런 말을 해.
내게 사랑의 맹세는 앙드레 지드의 이 말과도 비슷할 거야. 내게 사랑의 맹세는 순간의 황홀한 경험이 아니야.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겠다는 의지적 선언 같은 거야. 그래서 난 사랑은 형용사의 나열이 아니라 사랑의 고백 이후, 사랑의 약속 이후, 두 사람이 어떤 진리를 함께 생산해 내느냐의 문제라고 봐. 모든 끈질기고 진실한 사랑은 고뇌와 함께 분명히 희망을 담고 있어.
그런데 『좁은 문』의 알리사는 왜 그 사랑의 길을 제롬과 함께 걷지 않고 홀로 좁은 문으로 들어 가려했을까? 우선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알리사의 행복관인 것 같아. 알리사는 여동생 쥘리에트(사실 제롬을 사랑했으나 언니를 위해서인지 재빨리 맘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해. 난 이런 행동이 짜증나. 이거야말로 선량함을 가장한 복수 아니니? 악이 되어버리는 선 아니니?)의 결혼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해.
넌 이런 행복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이런 행복관에는 숭고한 면이 있어. 그러나 난 아무리 생각해도 알리사가 미덕과 행복을 착각한 것이라고 밖엔 보이지 않는데다가 그리고 솔직히 이런 행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사랑하는 남자를 떼어 놓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 사랑이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녀는 쉽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야.(사실 행복은 각자가 외롭게 추구해야할 어떤 목적이 아니야. 그녀는 자기 입으로도 행복은 과정, 도정이라고 해놓고선 사실상 그걸 부정해. 우린 어떻게 좁은 문을 함께 통과할 수 있을까? 알리사는 왜 그 고민을 지상에선 풀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쉽게 얻은 행복을 마뜩찮아 하는 그녀의 시선은 존중해. 그녀는 좀처럼 타협이라곤 하지 않았으니까. 언젠가 행복에 대해서도 우리 이야기해보지 않을래? 나는 지금 알리사의 눈빛이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변해가는 것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어. 그리고 그 때문인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던 너의 눈빛이 겹쳐서 떠올라. ‘우는 자는 행복하다’는 말을 이해하는 데는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한 걸까?
그런데 「만추」에서 탕 웨이의 연기가 그렇게 빛났니? 궁금하다. 난 어제 네루다의 시낭송을 들었는데 너무 너무 좋았어. 큰 바위에 큰 파도가 부딪히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안녕.
2011.2.18
<첫 사랑> 맨 처음 사랑만이 첫사랑은 아니다
안녕, 나의 커피진주.
조용히 네게 속삭이기 시작한 지 벌써 2주가 지났구나. 그 사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여주인공 마리아 슈나이더가 지병으로 죽었고, 또 병약하고 가난했던 한 영화인이 세상을 떴고, 또 압제에 맞선 수백 명의 죽음을 승화시킨 이집트의 혁명 소식이 전해졌어. 하루하루가 한 개인의 역사가 정점을 맞이하고 있고, 세계사도 못지않게 클라이맥스 챕터를 기록하고 있어. 신의 프리즘으로 지금 이 지구 상 인생들의 빛들을 분해해 본다면, 어떤 인간에겐 맑은 피 한 방울이 시급하고, 어떤 이는 밥 한 숟갈과 김치 한 점에 만족하고, 또 어떤 이는 마지막 자유의 공기 한 모금 가쁘게 들이마시며 뜨거운 불꽃 속에 산화하고 있겠지. 미시와 거시를 오가는 이 숨 막히는 싸움 속에서 어쩌면 또 많은 이들이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을 거야. 그것이야말로 당장 목숨을 내놓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확신한 채 말이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절박하지 않은 순간이 있을까. 스스로 목숨을 놓는 순간조차도 살아야 할 이유를 절박하게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
오늘 얘기하려는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속에도 그런 사적으로 빛나는 역사적 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한 남자가 등장해. 인생의 황혼기에 이른 남자,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가 젊은 날의 특별한 기억을 털어놓는데, 그 기억 속엔 압도적으로 매력적인 여인 지나이다가 등장하고, 그 주변엔 절대복종하는 여러 남자들이 있어. 카리스마 넘치는 지나이다는 그 남자들을 맘껏 조롱하지만, 의문의 한 남자에겐 헌신과 희생의 모습을 보이는데, 그 의문의 사내가 실은 그토록 냉정하고 엄격했던 자기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에 빠져 ‘사랑'과 '열정'의 의미를 되묻게 돼.
갈라를 처음 본 순간,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맨 운명의 여인, 필생의 여인임을 확신했다. _달리.
여느 아티스트들의 기본적인 포트폴리오처럼 투르게네프도 강렬한 첫 경험의 인상으로 이 이야기를 시작해. 깨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첫사랑은 꼭 ‘첫눈에 반한다’는 우연과의 한판 전쟁을 치른 후에 시작된다고 믿는 사람처럼. 어때, 넌? 너도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니?
문득 너에게 반했던 그 순간이 떠올라. 벚꽃이 마구 흩날리던 봄날, 산기슭 오솔길 사이로 한 여인을 봤는데, 소설 『태백산맥』 한 권을 옆에 끼고, 긴 머리 바람결에 흐트러뜨리며, 사뿐한 발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하고 있더라. 오징어 다리 한 가닥 질근거리며, ‘몸에 열이 많아서 옷을 얇게 입어야만 해…….’라고 투덜대는 듯한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블라디미르처럼 이런 한 문장이 떠올랐었어.
“뭐든지 줄 수 있다…….”
그리곤 속으로 이런 결심을 했어. 저 난데없는 여인을 앞으로 두 번 더 보게 된다면, 그땐 말을 건네리라. 우연이 운명으로 화학적 변이를 거치려면 ‘최소한 세 번의 반복은 있어야 한다’고 믿어왔으니까. 그렇게 운명을 확인해 왔었으니까. 기다리기로 했어.
몇 달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나쁜 사상을 몰래 공부하는 지하 동아리 연합 합숙에서 믿기 어렵게도 너랑 세 번째 조우를 하게 됐어. 그런 시공간에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너의 등장에 깜짝 놀란 난, 초점이며 후각, 청각, 주파수, 초능력까지 모든 감각을 밤새 너에게 집중했었어. 뭘까, 도대체 저 여인은. 왜 나의 영역에서 자꾸 맞닿을까……. 어찌어찌하여 그날 새벽, 우린 북한산 중턱 어느 바위에 둘만 나란히 앉아 있게 됐어. 새벽까지 깨어 있던 몇몇 친구들과 함께 북한산 정상을 올랐다가 길이 엇갈리고 우리만 남은 거지. 그래, 너는 내 운명!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사이에 “내게 정말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고, 그녀가 나타나기 전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으며,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꼈어. “이렇게 나는 그녀 앞에 앉아 있다. 나는 그녀와 알게 되었다……. 행복하다, 세상에, 이런!” 정말 블라디미르처럼 “내 안의 피는 늘 방황했고, 심장은 달콤하면서도 간지럽게” 죄어들었으니까. 물 한 방울만 떨어져도 넘칠 듯 꽉 찬 우물처럼, 순식간에 사랑에 빠질 거라는 예감이 “내 마지막 피 한 방울에까지 스며 혈관을 따라 흘러들었다”라고 기억해. 넌 결국 “그 아름다운 손가락이 내 이마도 건드려주기만 한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라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소년을 송두리째 함락해 버렸어. 지나이다가 블라디미르에게 그랬듯.
이런 현상을 두고 어떤 학자는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같은 화학 물질이 신경 중추인 편도핵을 자극해서이다, 혹은 DNA에 잠재적인 감정 지수가 예민하게 내장된 본능적인 유전인자의 속성 때문에 이성을 압도한 ‘감정의 이성 납치 현상’에 걸려든 것이라고 우기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마법을 그저 생물학적인 반응으로 폄하해서, 우린 어떤 위로를 받게 될까? 신화를 현실로 끌어내리려는 속마음이 뭘까. 실제로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부족하고 또 경험이 부재한 자들의 질투 아닐까?
너도 예상할 수 있듯, 이 소설에서 내 이목을 끈 사람은 단연, 지나이다야. 아킬레스건을 가진 팜므 파탈이지. 지고한 여성, 부서질 듯 파멸로 이끌려가며, 현명하면서도 생기 있는, 우스우면서도 비극적인, 자유로우면서도 고고한 충동적 욕망을 끝까지 좇는 여성상이야. 문득 누가 생각나네……. 너, 커피진주.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여자야.
이런 무서운 여자에게 반한다면 누구든 이런 비통한 심정에 사로잡히게 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으려 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걸요.” 이렇듯 야심만만한 지나이다는 뭇 남성 숭배자들 사이에서 끝까지 여왕의 자세를 지키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소년의 아버지 앞에선 한낱 여자로 전락해. “그래요. 나는 꼭 가겠어요. 내가 그분에게로 가려고 하면 어떠한 힘도 나를 막을 수는 없지요. 나는 그분의 품속으로 뛰어들어 그분과 함께 정원의 어둠 속으로, 살랑거리는 나뭇잎 소리와 분수의 물소리 그늘 아래로 자취를 감추고 말 거에요…….” 멋지지? 원한다면 진정으로 욕망의 포로가 되는데 주저함이 없는 여자야. 내 스타일! 그래 그런 틈바구니조차 없는 여자라면 여행하는 새들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이름 없는 돌부처만 못한 존재일 테니까.
“나는 한 작품만을 만족스럽게 되풀이해 읽곤 한다. 그것은 『첫사랑』이다. 『첫사랑』에는 어떤 가식도 없으며 오직 사실만 그려져 있어서, 다시 읽을 때마다 여러 인물이 마치 살아 있는 인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투르게네프는 이렇게 강조했어. 실제로 투르게네프의 아버지는 기병 장교였는데도, 도박에 방탕한 생활로 파산하는 바람에, 못생기고 포악한 여섯 살 연상의 부유한 지주와 결혼해. 돈을 노리고 한 결혼이니 당연히 부부 싸움이 끝없이 이어졌지. 어쩌면 불행한 결혼 생활이 투르게네프의 어머니를 더욱 추하고 모난 여자로 만들었을 거 같아. 그런 과거사 탓인지, 작가의 주장대로라면 자신은 ‘여성성이 가득한’ 남성이고, 사랑에 의한 ‘존재의 채움’을 경험하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었다고 해. 또 ‘매 번의 사랑이 사람들을 휩쓸고 지나가는 폭풍우나 회오리바람 같고, 그 회오리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믿었어. 음…… 이쯤이면 귀엽다고까지 할 만한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건 투르게네프가 결혼은커녕, 평생 짝사랑의 고통만 겪다가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야. 그렇다면, 더욱 궁금해져. 반추해 보면 감추고 싶은 과거일 수도 있는데, 투르게네프가 굳이 이 소설을 그렇게까지 아껴 자전이라고 널리 알린 이유가 뭘까.
지금 떠오르는 소설이 있는데, 너도 봤을 거야.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라고. 그 작가는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작품 세계를 정의하면서, 자기 작품도 ‘소설’이라고 안 부르고 ‘진실한 이야기’라고 불렀어. 그래서인지 그 소설을 읽을 땐,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읽게 돼. 상상력과 리얼리티의 경계는 읽는 자의 경험치에 따라 삼투되는 방식이 달라지는 거잖아. 투르게네프도 어린 시절부터의 오랜 상실과 그로 인한 평생의 결핍에 너무 힘드니까,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허물고 자신을 제발 껴안아 달라고 독자에게 위안을 구했던 게 아닐까. 여자에 대한 불신과 배신을 통해 「흡혈귀」 같은 작품을 그렸던 뭉크처럼 말이야. 이쯤 되면 그토록 소심한 투르게네프에겐 “사람들은 내가 여자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생각해봐야 할 것 중 그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죠?”라고 되묻던 로댕의 뻔뻔함을 선물하고 싶어져.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를 보면, 도스토옙스키가 어린 시절 지독한 자린고비였던 아버지 덕에 돈에 대한 제대로 생각을 갖추지 못한 채 성장하고, 훗날 어떻게 평생 돈과 얽혀 헉헉대며 살았는지를 알게 돼. 어린 시절 기이한 첫사랑을 경험했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평생 안고 살아간 투르게네프도 그에 빗대어 『투르게네프, 사랑을 위해 펜을 들다』라고 그의 일생을 정리해 볼 수 있을 거야. 그리고는 서문에 이렇게 쓸 수 있겠지. “나는 그런 심정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내 생애에 한 번도 그런 감정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나는 자신을 불행하게 여겼을 것이다.”
물론 주인공의 사랑이 베르테르만큼 원숙하고 헌신적이지는 않지만, 나도 이 소설을 읽고 나면, 한동안 추억에 빠져들게 돼. 그리고는 노곤해진 마음 위로 같은 제목의 괴테의 시가 떠올라.
첫사랑
아아, 누가 다시 가져다줄 것이냐, 그 아름다운 나날
첫사랑의 그때를.
아아, 누가 다시 가져다줄 것이냐,
그 아름다운 시절의
다만 한 토막이라도.
쓸쓸히 나는 이 상처를 키우며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슬픔에
잃어버린 행복을 슬퍼하고 있으니,
아아, 누가 다시 가져다줄 것이냐,
그 아름다운 나날
첫사랑의 그 즐거운 때를.
어때? 첫사랑, 그 즐거운 때를 너도 기억하고 있니? 아직 네 얘길 들어보질 못했어. 언젠가 꼭 들려주길 바라. 네가 나의 첫사랑을 묻는다면, 잠시 주저하겠지만, 일단 떠오르는 순간이 있어. 일곱 살 때, 빨간 내복을 입고 강가에서 잡은 새끼 가물치의 화형식을 지켜보며 울먹이던 은심이. 그리고 다음 초등학교 시절, 여름이면 속옷 없이 흰 블라우스만 입고 단추 하나를 풀어놓고 다니던 노처녀 담임선생님. 또 텅 빈 복도에 외나무 학다리처럼 서서 불쌍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순식간에 날 매혹시켰지만, 결국 털북숭이 야구부 친구를 좋아했던 말라깽이 소녀. 그리고 끊임없이 집 앞을 헤매며 뭐라도 훔쳐보려 애썼던 F단지 147호의 새침데기 반 친구. 고교 시절 내내 사제를 꿈꾸며 신학대학으로 가더니 목사 오빠랑 순식간에 결혼해 버린 소울 메이트 꺽다리. 반에서 밥을 가장 오랫동안 먹던 재수학원의 식탐녀. 전경들에게 쫓기고 있다고 구해달라고 전화를 해 밤새 을지로역을 헤매게 했던 신입생 후배. 불타는 탱고를 함께 소화해낼 수 있었던 유연한 허리 소유자였던 내 공연팀 멤버. 종아리가 열무 같았던 탓에 열무김치에 몰입하게 만들었던 작가 지망생 등등.
난 내 이십 대 초까지 펼쳐진 첫사랑의 프롤로그만으로도 몇 날 며칠을 얘기할 수 있어. 왜냐고? 어떤 영화엔 이런 낙서가 나와. ‘맨 처음 사랑만이 첫사랑은 아니다.’ 맞아. 사랑도 진화를 한다고 믿는 난, 내 생애 최초의 사랑이 첫사랑이 아니라, 내가 그 상대에게 열정을 품는 순간, 헌신의 각오를 하는 순간, 그리고 자기희생조차도 감미로워지는 순간, 그 대상과 겪는 첫 번째 사랑이 첫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 처음 시작된 사랑이 시간이 지나도 퇴화하지 않고 끝없이 성장을 거듭할 때, 그리고 매 번의 도약 때마다 돌이켜보는 그 사랑의 실체가 오로지 진심이었음을 의심하지 않아도 될 때, 그제야 첫사랑은 하나의 신화가 되고, 영원한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되는 거니까.
하지만, 아버지가 죽음 직전에 블라디미르에게 남긴 이 잠언처럼, 그래 어쩌면 이 소설은 결국 성인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기. 그것을 달콤하게만 상상하는 것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겠어.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라는 영화가 떠올라. 그 영화는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 위로 화염병이 서서히 떨어지는 장면으로 시작돼. 그리고는 이런 내레이션이 흐른단다.
맞아. 어른이 된다는 것은, 순수했던 시절을 가르며 성인의 사랑을 한다는 것은, 추락하는 게 아니라 착륙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발을 딛느냐가 중요한 거야. ‘뇌우에 맞긴 했지만 아주 멀리서 일어난 것이어서 천둥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겪는 사랑이 무엇인지 느낄 새도 없었지만, 첫사랑, 그것이 끝나는 순간에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제대로 깨물어볼 수 있다면, 그래서 정상적인 삶으로의 귀환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다음도 버티어 낸다면, 두 번째 사랑, 세 번째 사랑의 가능성이 열린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결국, 삶은 강렬한 순간들 속에 드러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지속되는 시간 속에 있는 거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할게. 블라디미르의 첫사랑은 지나이다고, 지나이다의 첫사랑은 블라디미르의 아버지이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아버지에게도 첫사랑이었을까? 책을 덮으면서 나는 그게 문득 궁금해졌어. 단언컨대, 이 소설을 두 번 읽는다면 재미가 남다를 수 있어. 하지만, 그땐 이렇게 약속을 해야 해. 블라디미르가 쓴 첫사랑을 읽는 게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쓴 첫사랑을 읽는 거야.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을 남다르게 즐길 수 있고 투르게네프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버전이라고 봐.
2011.2.10
처연한 구원의 동작을 함께 나눈다는 것
안녕, 동쪽별. 드디어 네 글을 보고 말았어. 한 마리 새가 날아가면서 그 청아한 목소리로 온 산을 흔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 네 글을 읽으니까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어떤 날들이 떠오르는구나. 학교를 졸업하고 한번도 기억해 보지 않았던 대화 같은 거 말이야.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린 언젠가 데미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어. 우리는 부화되는 새가 알을 깨뜨리는 것과도 같이 뭔가를 깨뜨려 나가는 것이 삶의 과정이란 건 아무래도 맞는 말인 것 같다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어. 그날도 눈부신 봄날이었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앞에 뭐가 기다릴까 갑자기 숙연해졌고 둘 다 마치 빛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는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딴청을 부렸었으니까. 그때 그렇게 눈부신 빛이 없었더라면 또 어디에 우리의 떨리는 마음을 투영할 수 있었을까? 난 그때 벌써 다가올 일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을 느꼈어. 이상하지 않니? 어떻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을까? 깨뜨려야 하는 이 세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우리의 짝이란 걸 느꼈던 걸까? 사랑하는 많은 것들까지도 깨뜨리고 나가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을까? 난 수많은 상처와 생채기들이 벚꽃 잎과 함께 쏟아져 내리는 걸 본 기분이었어.
네 글은 수많은 것들을 상기시키면서 이상하게도 내 앞에 수많은 풀과 나무와 구름을 끌고 오는 것 같아. 너는 그 사이로 풀피리를 불고 춤추며 씨 뿌리면서 오는 거니? 헨젤과 그레텔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돌멩이를 뿌렸지만 넌 어디로 돌아가기 위해 씨를 뿌리는 거니? 아, 그래! 넌 순수한 영원 회귀의 공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피리를 불고 씨를 뿌리는구나. 그 순수한 공간에도 달 뜨고 꽃 피고 이파리 달리고 한 줄기 빛이 떨어지겠지. 그 그늘 아래 쉬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발을 뻗고 기대고 어디선가 한 줄기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 주는 걸 느끼며 고개를 들어 저 먼 아득한 곳을 봤으면 좋겠다. 나는 작은 새가 이슬을 쪼아 먹는 걸 본 적이 있어. 배가 파란 새였어. 지금 내 가슴은 이슬을 쪼는 작은 새, 아니 이슬 속에 잠긴 작은 새의 부리 같아. 심장 소리가 퐁당퐁당 소리로 들려 .
그리고 쉼보르스카의 시를 상기시켜 줘서 고마워. 그 시는 실은 내가 나의 런던 여행기에 한 번 인용했었어. 트라팔가 광장에서 사람들을 볼 때 그 시가 생각났던 건, 아이스크림을 먹고 전화를 걸고 풍선을 쫓아가는 무심한 동작 속에서도 어떤 간절함을 봤기 때문일 거야. 누군가의 인생에 뛰어들어 가고 싶다는 간절함이겠지. 그렇게 보니 광장의 평범한 계단도 누군가에게는 운명의 제단 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어. 네가 말했던 것처럼, 혹은 그 옛날 보르헤스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혹은 사람들은 서로서로의 파편, 서로서로의 분신이겠지.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선을 그어본다면 수많은 삼각형, 수많은 마름모꼴, 수많은 다이아몬드, 수많은 별자리가 그려질 거야. 그 선들이 저마다의 운명의 선일까? 우리는 수많은 중력과 수많은 만유인력을 볼 거야. 수많은 반쪽짜리 사과와 달을 볼 거야. 우리는 또 그 봄의 눈부신 햇살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눈을 뜨고 짐짓 의연한 척 왼팔 오른팔을 흔들며 그 형형색색의 도형들 속을 걸어 나가겠지.
그렇지만 이십여 년의 세월을 뚫고 네가 쓴 글 중 다른 날이 아닌 오늘, 무엇보다도 내 맘을 사로잡는 건, 너의 이런 표현이야.
네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라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뻐. 네가 너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하지만 오늘은 슬프게도 거기서 하나의 질문이 나와. 너도 뉴스 들었지? 영화 시나리오를 쓰다가 굶어 죽음에 이른 최고은이란 사람 말이야. 난 방송사에서 우리 쌀로 만든 정성 가득한 도시락을 피디들과 나눠 먹다가 그 이야길 들었어. 그녀는 누구였을까? 나는 그녀가 잠들듯이 스르르 죽어버린 순간을 생각해 봐. 그녀는 눈을 감으면서 내일 아침에 눈뜨면 편의점 알바라도 하면서 시나리오를 써야지, 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다신 눈을 뜨고 싶지 않아, 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언젠가 세상이 내 노력과 ‘작은 기쁨, 고통, 희망, 절망, 분노, 용서’를 알게 될 날이 있겠지, 라고 생각했을까? 난 지금 많은 질문을 던져보지만 이 이야긴 미스터리가 아니야. 명백한 현실이야. 영화계와 우리 사회의 모순이 한 연약한 육체에 쏟아져 내렸어. 그녀는 왜 그렇게 약해졌던 걸까? 그녀의 여윈 마지막 모습에도 꿈이란 게 남아 있었을까?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 “난 산 채로 죽었어요!” 너에게도 묻고 싶어. 이 모든 이야기들이 우리를 어떤 인간으로 만들까? ‘처연한 구원의 동작’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아마도 무척 슬픈 일이겠지.
난 슬프고 답답한 와중에도 인어 공주 이야기가 잠시 생각났어. 알다시피 인어 공주는 소중한 것을 바치고 인간 세계로 들어오긴 했지만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해. 그래서 그녀는 인간 세계에 남 지 못해. 아침이 되자 그녀는 두둥실 떠올라. 그렇게 인간 세계와 왕자를 돌아본 인어 공주의 마지막 소원은 뭐였을까?
“공기의 딸들에게로…….” 천상의 존재들이 대답했다.
“인어 공주에게는 영혼이 없고 인간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한 영혼을 얻을 수도 없지요. 공주의 영원한 존재는 또 다른 힘에 달려 있어요. 공기의 딸들도 마찬가지로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선행을 통해서 영혼으로 얻을 수 있답니다. 가여운 인어 공주, 그대도 온 마음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세요. 선행을 통해 영혼의 세계로 당신을 끌어올리면 300년 후에는 불멸의 영혼을 얻을 수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인어 공주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찼는데 그 눈에 왕자와 그의 신부가 인어 공주를 찾는 모습이 들어와. 그들은 애절한 시선으로 망망대해 진줏빛 물거품을 바라보았지. 그래서 인어공주는 이렇게 행동했어.
아! 자신의 두 다리로 굳게 서 있던 인간들은 영혼에 대해 이제 잊어버린 걸까? 인간이 선행을 베풀면 인어 공주는 영혼을 갖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인어 공주는 300년에서 더 오래오래 기다려야 해. 불쌍한 인어 공주들은 영원한 영혼을 갖길 꿈꾸며 우리 곁에 있겠지. 그래도 공주의 영원한 존재는 또 다른 힘에 달려 있다는 말이 나에게 용기를 줘. 나는 그녀의 탄생과 육체와 꿈과 육체와 존재의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그 인간 세계에 사는 한 인간으로 다시 네 글을 읽을 수밖에 없어. 네 글은 타인의 영혼에 대한 글이기 때문이야.
‘난 슬픔 가득한 이 생애의 어떤 순간, 포착해 주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 버리는 모든 것들, 아무도 껴안아주지 않아 부서지고 흩어져 버린 잔해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어. 그 인생의 비밀을 알고 난 후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더 뚜렷해졌어. 누려야 할 만큼 누리지 못한 채, 그저 의무적으로 소모되며 잊히는 삶, 그 속에 숨어 있는 작은 기쁨, 고통, 희망, 절망, 분노, 용서를 부여잡고, 움켜쥐고 싶어. 그 처연한 구원의 동작을 함께 나누고 싶은 절박한 꿈이 있어.’
나의 오랜 친구는 이런 생각을 품고 내게 제안을 하는구나. 우리 순수하자고. 우리 그렇게 하자. 꼭 그렇게 하자. 구원의 동작을 함께 나누자. 영혼을 걸고 그렇게 하자. 난 이제 다시 앙드레 지드 의 『좁은 문』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 『좁은 문』의 주인공 알리샤와 제롬의 사랑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니? 오늘 내 맘을 사로잡은 알리샤의 기도는 이런 거야.
동쪽별. 좁은 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좁은 거라고 너도 생각하는 건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알리샤는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아. 자신을 향한 제롬의 사랑을 더 필요한 곳, 더 긴요한 곳으로 돌릴 수 있도록 그녀는 이제 자신의 사랑을 희생하면서 이런 기도를 올려. 하지만 난 아무리 좁은 길이어도 형제가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을 만큼은, 딱 그만큼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싶은데 어떡하지? 난 오늘 최고은 씨의 좁은 문을 생각해. 이제라도 그녀의 좁았던 문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넓힐 수는 없나 생각해. 그렇게 하면 그녀의 영혼이 천상의 나라에서 함께 기뻐하지 않을까?
이제 나도 너의 편지에 답을 하느라 『좁은 문』 이야기는 다음 주로 넘길 수밖에 없어. 그런데 『좁은 문』의 제롬도 너랑 좀 닮았어. 좀 어리숙하단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은 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인단다. 수십 년째 반가워. 동쪽별.
아! 그리고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어. 그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말이야. 난 그날 너랑 헤어지고 하숙집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끝까지 다 들었어. 사파리와 대지와 하나가 되는 영혼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아직도 봄밤이면 창문을 열고 해마다 빼놓지 않고 클라리넷 협주곡을 듣는단다. 그런 밤에 하늘은 어찌나 독한 풀냄새를 풍기는지 난 구름들이 다 하늘의 땀구멍으로 느껴지고 그 향기에 취하지 않을 수 없어. 『좁은 문』에 이런 구절이 나와. ‘올바르게 태어난 영혼은 곧잘 감탄과 감사를 혼동한다.’ 우린 올바른 영혼을 보면서도 감탄과 감사를 혼동하게 되곤 하지. 오늘 너에게 무한정 감탄하면서 네가 존재하는 것 그 자체에 감사해.
2011.2.7
커피진주와 동쪽별의 책읽기 서문에 대한 답문
민규동(영화감독)
안녕, 나의 커피진주.
답장이 늦었지? 미안해. 지적인 데라고는 요만큼도 없이 온통 몸을 써대는 촬영 행군이 두 달 넘게 이어졌었거든. 새벽부터, 다시 새벽까지. 눈이 와도, 바람이 불어도, 연평도에 불이 나도, 구제역으로 300만의 서러운 눈물이 넘쳐도, 나는 카메라 앞에서 달려야 했어. 영화를 만드는 데는, 아마 글을 쓴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영혼이 불안에 잠식되는 걸 가위 눌린 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힘겨움이 있단다. 잠에 빠져들 땐 다가올 새벽이 두려워 꿈속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길 바라기도 해. 그래도 어김없이 일어나, 그렇듯 밧줄 없이 맞닥뜨린 번지점프대 위에서 떨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너의 편지가 날아왔어. 그건 어느 노래 가사처럼, 홀로 걷는 밤길이 까만 어둠으로 외로울 때 들려온 어떤 이의 부드러운 음성이었고, 짙은 안개에 둘러싸여 슬프게 살아갈 때 어깨에 닿은 어떤 이의 따뜻한 손길이었어.
백만 명이 운집한 이집트의 타흐리르에서 날라오는 매콤쌉싸름한 모래 내음이 찬바람에 실려오는 설날 새벽. 별도, 달도, 바람도, 모두가 한 해의 여행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와 새출발을 하는 오늘. 이렇게 너를 떠올리며 글을 쓰고 있다니, 왠지 흥분이 돼. 올해는 마고소양(麻姑搔痒)이라는 점궤를 선물받았는데, 아무리 떠올려봐도 내 가려운 데를 긁어줄 마고선녀로는 너밖에 떠올릴 수가 없거든. 어때, 설날 아침은? 보통날의 아침과 많이 다르니? 제사는 지내니? 오늘 넌 조부모님들 말고도 또 어떤 영혼에게 절을 하고, 불평을 하고, 기원을 하니? 궁금해. 난 절을 하면서, 얼마 전 돌아가신 박완서 작가가 떠올릴 거 같아. 그날은 나도 모르게, 그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라고 탄식을 내뱉었어. 동시대에 존재하는 게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 실감 못 하다가, 그들이 사라지는 그 반짝-마지막 명멸의 순간에서야 우주의 한 조각이 소멸되는 상실감에 시달리기 시작해. 정말 아름답게 존재했었구나…… 라는 뒤늦은 절감 말이야. 그들이 정말 소멸되기만 한다면, 그 상실감은 회복할 길 없는 절대적인 결핍감일 텐데, 꼭 그렇지만은 않아. 그가 내 곁에 머무르는 방식이 화학적 전이를 이뤘을 뿐이니까. 예전엔 물리적으로 꽂혀 있던 책들이었지만, 지금은 그 속으로 스며든 영혼 덕에 훨씬 두터워져 있으니까. 그렇게 서서히 나의 고전으로 변모하고 있으니까. 궁금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일기며, 편지며, 쉴 새 없이 써대고, 또 남의 일기와 편지에도 실시간 답을 다는 시대에도, 어째서 그 작가는 나의 고전으로 자리 잡게 되는 걸까. 글솜씨 때문일까? 많이 썼기 때문일까?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쾌락』에서 이렇게 썼어. “책은 독자에게 ‘당신을 찾듯이 나를 찾아주시오’라고 말을 걸어준다.” 아마도 잃어버린 나를 찾아 헤매다 무심코 그 책에 닿게 되는 순간, 내게 말을 걸어주기 때문 아닐까? 그렇게 고전이 걸어주는 무의식의 마술에 몸을 맡기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그 책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그 순간, 그 책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은밀한 대화가 되고, 몸짓이 되고, 나의 앞길을 비추는 빛이 되기 때문 아닐까?
왜 고전일까 묻는다면, 난 이렇게 생각해. 시대가 강요하는 판에 박힌 평범한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무언가에 매달려 탈출해야만 해. 그것이 무엇일까. 또, 그것에 매달렸다가 한번 빠져들면 다시는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이런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에 어찌할지 주저하며 눈치 보기 십상인데, 그 해답을 찾으려면 우린 과거 위대한 인간들의 발자취를 살펴보아야 해. 과감히 그 길을 함께 걸어봐야 해. 결국 안개에 싸인 미약한 대답이 돌아올지라도, 뚫어지게 바라보고 필사적으로 스며들어야 돼. 그래야, 어느 순간 자기 인생과의 접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제서야 남다른 삶의 궤도로 다시 튀어 오를 수 있을 테니까. 그 ‘지적 잠입’과 ‘감성적 도약’의 매개는 각자에게 그 해답이 다를 거야. 어떤 예술가들에겐 고전 작품이 될 것이고, 순진하고 고독한 청년에겐 첫사랑이 될 수 있어. 지금 나에겐 이 새벽의 속삭임을 들어줄 너, 커피진주가 되겠지.
누군가 왜 고전이냐고 자꾸 캐묻는다면, 이렇게 쉽게 투덜댈 수도 있어. 고전은 그만큼 생존력이 강하다는 증거잖아? 뭘 봐야 할지 모를 땐, 여태껏 이미 많은 검증을 거쳐서 살아남은 글들을 읽는 게 낫지! 야심 찬 시도를 했지만 결국 후회를 부를 멍청한 글들을 읽고는, 자신의 부족한 안목을 자책하며 오랜만에 호기 부려본 독서 의욕마저 몽땅 잃고 괜한 자괴감에 시달릴 필요 없잖아. 무엇보다, 과거만큼 미래를 선명히 보여 주는 부적은 없으니까, 앞날이 불안하게 느껴질수록 우린 뒤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첫 편지에서 ‘도저히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날’, ‘깨달음의 파도가 덮친 날이 내게도 있느냐’고 물었지? ‘새로 태어난 것 같다는 사람들을 만난 적도 있는지, 그런 식으로 내게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제2의 생일 아침, 그런 빛이 있느냐’고 물었지? 그럼, 있어! 그런 날이. 너를 처음 만난 날! 바로 그날이야.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그 시절 얘긴 다음에 들려줄 기회가 있을 거야. 잠시 그날의 느낌을 떠올리면, 키예슬롭스키의 영화 삼색 연작 중 하나인 「레드」에 영감을 준 쉼보르스카의 「첫눈에 반한 사랑」이라는 이 시가 생각나. 한번 들어볼래?
두 남녀는 확신한다.
그런 확신은 분명 아름답지만
불신은 더욱 아름다운 법이다.
예전에 서로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전에 스쳐 지날 수도 있었던
그때 그 거리나 계단, 복도는 어쩌란 말인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느냐고.
언젠가 회전문에서
마주쳤던 순간을?
인파 속에서 주고받던 “죄송합니다”란 인사를?
수화기 속에서 들려오던 “잘못 거셨어요”란 목소리를?
-그러나 난 이미 그들의 대답을 알고 있다.
아니요, 기억나지 않아요.
이미 오래 전부터
‘우연’이 그들과 유희를 벌였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운명이 될 만큼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그렇기에 운명은 다가왔다가 멀어지곤 했다.
길에서 예고 없이 맞닥뜨리기도 하면서,
낄낄거리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누르며,
옆으로 슬며시 그들을 비껴갔다.
신호도 있었고, 표지판도 있었지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대로 읽지 못했음에야.
어쩌면 삼 년 전,
아니면 지난 화요일,
누군가의 어깨에서 다른 누군가의 어깨로
나뭇잎 하나가 펄럭이며 날아와 앉았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것을 다른 누군가가 주웠다.
어린 시절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바로 그 공인지 누가 알겠는가.
누군가가 손대기 전에
이미 누군가가 만졌던
문고리와 손잡이가 있었다.
수화물 보관소엔 여행 가방들이 서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느 날 밤, 깨자마자 희미해져 버리는
똑같은 꿈을 꾸다가 눈을 뜬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시작은
단지 ‘계속’의 연장일 뿐.
사건이 기록된 책은
언제나 중간부터 펼쳐져 있다.
그래. 내 생각엔 우리가 만난 사건은 이미 결정된 운명적인 관계였어. 놀라운 운명적 만남을 숭배하고 싶어 하는 속내와는 달리, 쉼보르스카가 생각한 것처럼, 우린 사실 어느 회전문이나 잘못 걸린 전화 속에서 미리 만났었던 거야. 내가 널 발견하고, 우리의 역사라는 책이 열렸을 땐, 그토록 오래 우릴 외면했던 우연은 순식간에 증발하고 이미 운명의 중간 부분이 펼쳐졌던 거야.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파리에서 잠시 귀국해 혹시나 닿을까 하고 너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기억 속에 까맣게 사라졌던 한 사람을 슬로모션으로 떠올리는 너의 동작을 전화기 너머로 읽었었어. 하긴, 휴대폰도 이메일도 없던 시대에 서로의 갈 길로 헤어졌었으니 그 재회도 의외이긴 했을 거야. 그때 넌, 며칠 전에 헤어진 사람처럼 널 대하는 나에게 놀라는 눈치였어. 난 20여 년 전 널 처음 봤을 때부터, 하나도 변한 게 없으니까…… 라고 속으로 속삭였어. 그리고 잠시 후 또 다른 재회를 기약하며 전화를 끊을 때 네가 남긴 마지막 끈, 그 아리아드네의 실은 바로 커피진주라는 암호였어. 그래, 참 잘 어울려, 라고 생각했었어. 길 한가운데에서 널 마주쳤을 때, 방금 쿠바에서 날아온 생기발랄한 커피빛 보석의 현현으로 느꼈었으니까. 그 신비로운 첫 만남 이후로 마음의 영토를 조금씩 빼앗겨 너를 섬기지 않고는 어떤 경작물도 얻어낼 수 없는 조건부 불모지로 변해온 세월이었고, 너에 한해서는,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시구를 정언명령처럼 섬기고 살며 널 향한 실타래를 놓지 않았었어. 그렇게 다시 펼쳐진 우리의 책 위로 이런 날도 기록되어 있어. 언제가 내가 죽고 싶어 힘겨워할 때 너에게 전화를 했고, 넌 ‘걱정 마. 내가 너의 무덤 속 옆자리에 같이 누워줄게’라고 답해 준 날, 그날도 새로운 세계로 다시 태어난 날의 아침 빛을 보았어.
자, 또 어떤 얘길 물었더라? 내가 카메라를 사랑하게 된 이유도 물었지? 삶은 본원적으로 슬픈 거라고 생각해. 왜냐면, 삶은 유한하잖아. 결국 우린 모든 걸 잃게 되어 있어. 아, 그 생각에 또 슬퍼지네…… 난 슬픔 가득한 이 생애의 어떤 순간, 포착해 주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 버리는 모든 것들, 아무도 껴안아주지 않아 부서지고 흩어져 버린 잔해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어. 그 인생의 비밀을 알고 난 후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더 뚜렷해졌어. 누려야 할 만큼 누리지 못한 채, 그저 의무적으로 소모되며 잊히는 삶, 그 속에 숨어 있는 작은 기쁨, 고통, 희망, 절망, 분노, 용서들을 부여잡고, 움켜쥐고 싶어. 그 처연한 구원의 동작을 함께 나누고 싶은 절박한 꿈이 있어. 그렇게 생각해 보니, 어쩌면 이 순간 너는 내가 꾸는 꿈인지도 모르겠다. 난 늘 널 납치해서 꿈의 10단계로 인셉션하고, 둘만의 림보에 정착한 후, 그 세계에서 영원히 늙지 않고 동지로 사는 꿈을 꿔. 동시에 난, 그 꿈이 염사되는 렌즈 한 켠의 미궁 속에서, 커피진주라는 내 아리아드네의 끈을 놓치지 않고, 긴 세월 꿈과 현실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 ‘사이’의 비밀을 찾고 있는지 몰라.
자, 이제 너에게 제안할 게 있어. 들어봐. 며칠 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고 관객들과 대화를 나눴어. 그 영화엔, 서로 이름도 모른 채 우연히 마주쳐 격한 정사를 나눈 두 남녀가 낯선 사랑을 향유하는 텅 빈 아파트가 나와. 누군가 그 공간이 무슨 의미냐고 묻더라. 난 억압으로부터의 일탈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단 역행을 꿈꾸는 회귀의 공간이라고 대답했어. 격식을 벗은 사랑과 소통의 격랑이 펼쳐지는 둘만의 공간. 그래, 그런 곳을 얼마나 오랫동안 꿈꾸어 왔단 말이니. 이제 그들처럼 우리도 이 시공간을 둘만의 아지트로 삼자. 그곳처럼 성별, 나이, 어떤 차이도 상관없고, 가족이나 학교, 교회에서 가르치는 어떤 질서도 비웃으며, 영화 도입에 나온 프랜시스 베이컨의 초상화처럼 서로의 겉모습과 형태의 의미가 사라진, 인간에게 부여된 원초적인 순수만으로 서로를 마주하자. 거리낄 것도, 부끄러움도 없이, 변덕스런 가학과 수치스런 피학마저도, 『인간의 대지』에서 베두인 족이 생텍쥐베리를 향해 돌리는 고갯짓의 의미가 되어버리는 이 공간. 여기서 우리는 언제나 풀샷으로만 만나왔던 과거를 뛰어넘어, 드디어 클로즈업 상태로 현재를 만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의 파편들이 아닐까. 항상 그런 식이었지 않았을까.” 「홀로그램 장미의 파편들」, 윌리엄 깁슨.
넌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20년 전 언젠가 한가로운 봄 햇살 아래, 잔디밭에 누워 뒹굴며 한 약속을 지킬 때가 된 거 같아. 그날은 무료함을 달래려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 상대가 맘에 드는 사람이 찍으면 뛰어가서 데려오자고 낄낄대며 실없는 장난을 치고 있었어. 그러다 대뜸 ‘우리 고전을 읽고 얘기하는 거 어때?’ 라는 얘기가 튀어나왔어. ‘그래?’ ‘좋아! 그럼, 우선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부터 읽자’라며 순식간에 의기투합했어. 뭔가 굉장한 보물지도를 발견해 낸 것처럼 흥분한 우리 둘은, 그 약속을 기념하는 의미로 음악감상실을 찾아 구석에 함께 기대 누웠어. 그때,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주제곡인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만 절정 부분에서 뛰쳐나오고 말았어. 왜냐면, 갑자기 내가 부정맥과 현기증을 호소했거든. 너랑 함께 떠날 미지의 여행에 대한 상상이 그 아름다운 클라리넷 소리와 뒤섞이며 내 모든 혈관들을 터뜨릴 듯 부풀려 버렸던 거야. 정신이 혼미해져 강렬한 햇빛에 넋을 잃은 날 보고 깔깔댔던 네 얼굴이 기억나. 어찌된 일인지 우린 그 바람에 약속 날을 제대로 잡지 못했어. 그러고는 20년이 흘렀고, 오늘 이렇게 그동안 얼어붙어 있던 약속이 되살아난 거야. 그래, 우린 이미 20년 전에 서로 고매성의 협약을 맺었던 거야. 그래, 난, 한번도 그 약속을 잊은 적이 없어. 나는 너의 파편이었니까. 항상 그런 식이었으니까.
자, 내가 처음으로 들려주고 싶은 책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이야. 그 단어만으로도 너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짐작이 되지? 투르게네프가 42세 되던 해. 그러니까, 나와 같은 나이네? 하하하. 이 소설엔 청년 시절 얌전하고 유약한 몽상가면서 시를 좋아했던 자기 모습을 주인공 '블라디미르'로 분장해 쓴 나름 귀여운 작품이야. 뭔가 나랑 많이 겹치지 않니? 그 소설 속엔 너랑 겹치는 인물도 있단다. 후후후.
얘기가 길어졌지만 첨이니까 용서해 줘. 마지막으로, 파리의 오래된 소극장에서 봤던 영화인데, 장 뤽 고다르의 SF 영화 「알파빌」의 매혹적인 여배우 안나 카리나의 대화를 들려줄게.
불 있어요?
Yes, I travelled 9000kms to give it to you.
그럼요. 이걸 주려고 9천 킬로를 날아온걸요.
그 무엇보다도 우아한 너의 질문에 그 대사를 이렇게 바꿔볼래. 이 순간, 우리의 대화는 고전이 될지도 몰라.
책 있니?
Yes, I travelled 9000days to give it to you.
그럼, 이걸 주려고 20년을 날아온걸.
2011.1.28
박완서, 리영희, 헨리 데이비드 소로
동쪽별. 영화 촬영 막바지겠구나. 그렇다면 이제 다음 주면 너의 글을 읽겠구나! 얼씨구절씨구. 그런데 지금은 웃고 있지만 실은 난 이번주 좀 심각했었어. 지난 토요일에 박완서 선생이 돌아가셨지. 나에겐 이런 기억이 있어. 그때가 언제였을까? 내가 아침 9시 프로그램을 할 때였는데 하루는 박완서 선생의 아차산 밑 댁으로 생방송 연결을 하러 가게 되었어. 중계차를 타고 가면서 좀 졸았었던 게 기억나. 새벽에 일어났기 때문이겠지. 퍼뜩 정신을 차렸더니 아차산이야. 난 그때 아차산을 처음 봤었어. 선생님의 소설 제목처럼 나목이 서 있었어. 나목이 서 있는 그 길가는 무척 정갈하고 고요했었어. 누군가 새벽에 일어나서 빗질을 한 게 틀림없었어.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나목 뒤로 날아오르는데 그때 새의 얼굴이 보였어. 웃는 낯빛이었어. 우리 눈으론 볼 수 없는 벌레 한 마리를 본 것 같았어. 선생님 집에 도착해서 엔지니어는 방송 중계 라인을 깔고 난 선생님과 새 이야기 를 나눴어. 선생님은 산 밑에 사는 즐거움을 이야기하셨었지. 그때가 대략 아침 여덟 시경이야. 갑자기 선생님이 내게 이렇게 말하셨어.
“술은 좀 하시나?”
물론 난 뜨끔했지. 혹시 지난밤에 내가 한 일을 알고 있다는 말일까? 난 나도 모르게 동화 속 입 큰 개구리처럼 입을 최대한 쪼그맣게 축소시키고 있더라고. 그런데 뜻밖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야.
“술을 좀 하면 지금 한잔할까?”
물론, 내가 좀 방탕한 피디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까진 방송 직전에 출연자와 술을 마시는 경지에까진 오르지 못했었어. 그래서 나는 “아니요. 방송 전이라서요.”라고 대답했다, 라기보다는 “네, 어떤 술로 할까요?”라고 말해 버렸지. 오토매틱하게 움직이는 내 입을 틀어막고 싶었어. 그때 선생님의 큰따님이 옆에 계셨는데 흘깃 봤더니 날 아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시는 것 같지는 않았어. 선생님은 손수 일어나서 잔 두 개랑 소주를 가져오셨어.(어쩌면 소주가 아닐지도 몰라. 하여간 투명하고 독했어.) 선생님은 먼저 한잔 들이켜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어.
“난 아침 공복에 술을 한잔할 때 술이 내 혈관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좋아. 술이 이렇게 내 몸을 흐를 때 모세혈관의 지도가, 손가락 끝에 있는 혈관까지 구석구석 마치 생물 시간에 본 것처럼 쫙 그려지거든.”
그러면서 선생님이 가슴이랑 팔을 이렇게 펼쳐보이던 동작을 난 잊을 수가 없어. 천진난만했고 장난스러웠고 살아 있음이 생생했어. 어쨌든 그때도 선생님은 할머니였으니까 난 그 표정과 몸짓이 젊은 것에 놀랐어. 내 손등의 정맥도 같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어. 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아! 저것이 바로 나무구나!’라고 생각했었어. 그리고 얼굴은 아까 나무 뒤로 올라간 새의 얼굴과도 같구나! 란 생각도 했고. 아침 술 한잔에도 온몸 구석구석 생생함을 포착해 내던 선생님에게 죽음은 어쩌면 또 다른 초월일지 모르겠어. 난 선생님의 부음을 듣고 무심코 열 손가락 끝을 내려다봤어. 그 손가락 끝에 그날 아침의 독주처럼 뭔가 뜨겁고 애타는 것이 혈관들을 타고 내려가는 것만같이 느껴졌어. 그런데 선생님이 돌아가시던 날은 리영희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49일 되는 날이었어. 난 그날 오후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리영희 산문집 『희망』을 읽었어. 『희망』에는 이런 구절이 나와.
바로 이 맥락에서 박완서, 리영희,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한 몸 안의 핏줄들처럼 서로 연결돼.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 진리의 추구, 그리고 그것을 나누기 위한 끝없는 자기 실험.
『월든』은 많은 부분 시적으로 아름답지만 그렇다고 낭만적이거나 목가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 소로가 자연을 유달리 찬양하는 이유는 공기가 맑아서이거나 보기에 아름다워서가 아니야. 그가 족제비, 도요새, 부엉이, 올빼미, 개미, 기러기, 청새치, 개구리, 다람쥐, 토끼, 월든 호수, 나무, 모래, 얼음을 관찰하는 이유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소로는 “나는 이제 월든 호수를 떠난다!”라고 말한 뒤 우리에게 우리도 탐험가가 될 것을, 자기 내면의 탐험가가 될 것을, 자기 자신의 가장 높은 고지대를 탐험하는 탐험가가 될 것을, 새로운 상품이 아니라 새로운 사상이 흘러갈 수로를 여는 콜럼버스가 될 것을 끝없이 촉구해.
그러면 너의 마음속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천 개의 지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그 지역들을 여행하고 자신의 세계에 통달한
전문가가 되어라.
이 시는 윌리엄 해빙턴이란 사람의 시에서 소로가 인용한 거야. 난 이 시를 보자 저 위대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한 말이 생각났어.
절대로 새로운 땅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새로운 땅이란 우선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서 탄생하고
그런 다음에야 바다에서 솟아오릅니다.
……밤과 낮의 꿈을 그대로 간직하고
꿈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투쟁하는 자로 하여금
존재하게 해주십시오, 나의 여왕이시여.
이것이 젊음이 의미하는 바요, 신념의 의미입니다.
오직 이것만이 세계가 성장하는 길입니다.
『카잔차키스의 편지』 중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여기서 우리를 가끔 현혹시키는 자기 계발이란 말의 의미가 완전히 뒤집히겠지. 그러니 그는 자기 계발을 하겠다고 온갖 것에 솔깃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어. 우리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가끔 자괴감에 젖어 용기를 내지 못하기도 하지. 그는 이렇게 말해. “자기가 피그미족이라고 해서 가장 몸집이 큰 피그미가 되지 못한다고 해서 목을 매달아야 하는가? 우리 모두 각자 자기 일에나 관여하고 자기가 가진 재능이나 발휘하려고 애쓰도록 하자.”
난 철이 자석에 끌려 자기도 모르는 춤을 추듯 나도 그와 함께 질문 대답의 춤을 춰.
그에게 인간의 결함, 그것은 무엇일까?
- 결함은 어떤 상황을 설정하고 그 상황에 자신을 놓아두는 것이다.
그에게 진실, 그것은 무엇일까?
-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줘. 땜장이 톰 하이드는 교수대에 서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는 요청에 “바느질을 할 때는 첫 땀을 뜨기 전에 잊지 말고 실의 매듭을 지으라고 재단사들에게 전해 주세요.”라고 죽어. 그것이 진실이다 .
그에게 자기도취와 오만,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우리 대신 사람을 고용해 감자밭을 일구게 한다. 그리고 오후에는 미리 계획한 대로 기독교적인 온순함과 자선을 실천하러 간다.”
그는 상황을 가정하지 말고 상황에 직면하라고 말해. 그는 삶을 탓하지 말라고 해. 삶을 탓하기만 할 때 삶보다 형편없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일 거야. 그는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야말로 편의적인 발상이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해. 난 이것이 용기일 거라고 생각해.
『월든』 중에서 내가 언제나 잊지 않고 손가락 끝에 붙이고 다니는 신비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려줄게. 난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손가락 끝에 반딧불이 하나 앉은 기분이 들어. 소로 시절에 떠돌던 이야기야. 어느 농부의 집 부엌에 사과나무 탁자가 60년 동안 놓여 있었어. 오래전에 탁자가 탁자가 아니고 나무였을 때 어떤 벌레가 싱싱한 잎사귀를 골라 알을 낳았어. 그런데 나무가 탁자가 되는 바람에 그 알은 부화하지 못하고 메마른 나이테 속에 묻혀 버렸어. 그런데 어느 날 그 탁자에 누군가 (아마도 그 농부의 아내겠지.) 따뜻한 단지를 올려놓았어. 그 바람에 알이 부화되었어. 농부의 가족들은 탁자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 뭔가가 나무를 갉아대는 소리였어. 소로는 이렇게 말해.
『월든』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가 또 많지만 이 말만은 하고 싶어. 소로는 인간조차도 자연이 임무를 행할 때 따르는 보편적인 기본 원칙이 발현된 것으로 생각해. 난 지난 토요일에 살아 있기 때문에 도톰하고 혈색 도는 내 손가락들을 보면서 소로가 말한 것처럼 손은 정맥을 갖춘, 펼쳐진 종려나무 잎사귀, 귀는 머리 옆에 달린 이끼, 턱은 얼굴 위로 흘러내린 물방울이 모여 만들어진 것, 뺨은 눈썹에서 시작해 광대뼈라는 장애물을 만나고 얼굴의 계곡으로 흘러내린 비탈길이란 걸 느꼈어. 난 더 뻗어나갈 나무들, 더 멀리 흐를 강물들을 생각해. 자연이 그 임무를 행하는 이 하루에, 나 살아 있는 동안에, 나의 임무, 나의 의무는 무엇인가? 내가 추구할 진리는 무엇인 가? 이 동쪽별 빛나는 지구에서 눈 뜨고 동트는 걸 지켜보는 아침마다!
2011.1.20
고독 속의 끝없는 대화
동쪽별! 안녕. 난 오늘 늦게 퇴근했어. 퇴근하면서 보니까 가로등 위로 보름달이 떠 있고 바로 그 사이로 눈이 조금 날리더라. 가로등 위에 보름달 그 사이로 날리는 눈. 내일 아침에 눈 뜨면 누군가 싱그러운 얼굴로 내게 달려올 것 같은 이 미신적인 기분은 다 뭐람!
너는 올해 들어 들었던 제일 좋은 소리가 뭐였니? 한번 눈을 감고 떠올려봐. 누군가의 심장 소리였을까? 나무에서 쿵 눈 떨어지는 소리였을까? 혹시 눈 밟는 소리? 나는 겨울 산에 간 적이 있어. 오대산이었는데 월정사 앞 계곡이 다 얼어 붙었어. 꽁꽁 얼어서, 걸어서 개울을 건널 수도 있었어. 물론 언제나 부주의한 나는 얼음 위로 돌진했지. 얼음은 그렇게나 두꺼워 보였어. 그런데 멀리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거야. 점점 더 또렷하게, 또렷하게,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무슨 소리였을 것 같니? 바로 얼음 밑 저 깊은 곳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 거야. 얼음 밑의 물소리. 마치 물속에 수없이 많은 고드름이 파이프 오르간처럼 서 있고 물살이 그것을 더듬어 은은하고 성스러운 소리를 내는 것 같았어. 그 맑고 깨끗한 느낌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나로선 너무나 그리운 희망이 웃음소리를 내는 것이라고밖엔 달리 말을 못 하겠어. 이 글을 쓰기 전에 나는 잠깐 또 그 소리를 생각해 봤어. 왜냐면 오늘 소개할 책은 바로 그 소리랑 너무나 어울리거든. 바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야. 난 소로를 만나면 “저 선생님, 얼음 밑에 물 흐르는 소리 들어봤어요?”라고 다짜고짜 물을 것 같아. 소로라면 예전부터 맘속에 품었던 생각이 얼음 속의 물 흐르듯 그렇게 흐르며 내는 소리라고 대답할 것 같아. 왜냐하면 소로는 호수를 스치는 한줄기 바람을 느낄 때 바람도 바람이지만 바람보다도 포착하기 어려운 영혼이 지나간 게 아닐까 상상하는 사람이니까.
소로는 1845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 날 펄럭펄럭 휘날리는 성조기를 뒤로하고 간단히 짐을 싸서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월든 호숫가로 이사가. 그리고 그곳에서 2년 2개월을 보내. 그렇다면 그는 왜 그랬을까? 귀농이었을까? 은둔이 었을까? 둘 다 아니야. 그가 호숫가에 들어간 이유는 ‘진리를 실험해 보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너는 네가 믿는 어떤 진리를 실험해 본 적 있니? (내가 알기론 용감한 자가 미인을 차지한다는 진리를 실험해 볼까 말까 망설인 적은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어떤 진리를 실험해 봤을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를 실험해 보려다가 손가락이 잘릴 뻔한 적이 있고 내 장례식 때 누가 제일 슬퍼하나 보려고 가짜로 죽은 척한 적이 있고(죽을 때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자는 잘못 산 것이라는 엄청난 진리를 듣고는 수도 없이 내 장례식을 상상하다가 드디어 결행. 그 실험 결과는? 언제 눈을 떠야 할지 몰라 허클베리 핀과 가출한 톰 소여보다 더 진땀을 뺀 것도 문제였지만 누워서 내 죽음을 상상해 보니 그동안의 불효가 사무치고 부모의 고통이 너무나 크게 와 닿아 눈물을 흘렸던 게 더 큰 문제였어. 상상 해 봐.무슨 시체가 눈물을 흘리겠니? 그래서 간지럽힘당한 뒤에 눈을 떴을 땐 극적인 부활의 기쁨과 포옹이 아니라 화살처럼 쏟아지는 비난만이 나를 맞이했어. 차갑게.) 최근엔 고전 읽기 진리 실험 중이야. 고전을 쭉 읽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가 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2년 2개월을 넘어선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고전 읽기를 통한 진리 실험 결과는 소로의 월든 진리 실험 결과와 거의 일치해. 특히 고독에 대한 부분, 영원과 현재에 대한 부분, 자기 객관 화에 대한 부분, 탐험에 대한 부분은 나도 소로와 생각이 같아.(그리고 또 하나의 진리 실험이 있긴 해. 기쁨에 관한 건데, 그러니까 기쁨은 어떻게 오는 건가? 하는 건데 그 이야긴 나중에 다시 할게.) 그렇다면 소로는 호숫가에 외따로 사는 형식의 진리 실험을 왜 했을까?
소로는 이런저런 번잡스러운 교제를 싹둑 잘라버리고(그는 심지어 도움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해. ‘나에게 베푸는 호의를 조금이라도 받는 것이 부담스럽다.’ 이건 그가 유달리 까다로운 결 벽증의 소유자라서 한 말이 아니겠지? 도움이란 말은 우리 시대엔 더 세속화되었어. 이제 도움이란 말에는 도와주는 사람의 자기 과시와 자기기만뿐만 아니라 훗날의 이해관계가 섞여 들어가.) 숲 속으로 들어가.
누군가 소로에게 물어.
“그곳에 살면 외롭지 않소?”
소로는 이런 식으로 대답해. 사교는 쓸데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고독을 즐긴다. 당신 주위에 가장 가까이 두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모든 사물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우리 바 로 곁에 있는 존재는 우리가 고용하고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일꾼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창조하는 명공이다.
소로는 외롭지 않냐는 질문에 고독을 즐긴다고 대답했어. 그리고 이어서 가까이 있는 것이 나를 창조한다고 말해. 그렇다면 고독할 때조차 그의 옆에 뭔가 있긴 있다는 말인 걸까? 애교 떠는 거미줄이나 말하는 개똥지빠귀 새 같은 것?
그런데 실은 나도 고전 읽기를 통해서 외로움과 고독을 구별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외로움은 이 거대한 소비 사회의 다수 대중의 한사람으로서의 우리가 겪고 있는 일종의 편집증 같은 것이야.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소비자로서 도시의 뒷골목을 걸을 때 느끼는 감정이야. 이를테면 도스토옙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나는 혼자인데 너희들은 모두 한통속이구나.”라고 절규하며 방에서 괴로워할 때, 혹은 우리들이 ‘나 빼고 너희들 모두 행복하고 시름이 없구나, 내가 죽어 사라져도 지구는 아무 일 없겠구나?’라고 생각할 때, 그게 바로 외로움이야. 외로움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만 대화를 나누는 거야. 외로움은 넓은 길, 서로 닮은 거대한 길 속에서 갈 곳을 잃는 것과도 같아. 하지만 고독이라면 어렴풋한 빛 속에 일부러 홀로 떨어져 길을 걷는 것과도 같아. 소로는 이런 표현을 써.
가끔 그럴 때 없니? 마음속에 두 줄기 물줄기가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없니? 혹은 내가 행동을 하는데 그 행동을 지켜보고 질문을 던지고 의심하는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있는 기분 들 때 없니 ? 그때 행동하는 나와 질문하는 나 사이의 대화는 내 몸에서 이뤄져도 엄밀히 말하면 나 홀로 하는 대화가 아니야.
모든 사유는 엄격히 말해서 고독 속에서 행해지며 나와 나 자신 사이의 대화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 속의 둘의 대화는 나의 동료 인간들의 세계와의 접점을 상실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그들과 함께 사고의 대화를 이끄는 나 자신 속에 재현되기 때문이다. 고독의 문제는 이러한 하나 속의 둘의 대화가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서 타자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 나는 나의 정체를 확정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 에게 의존한다.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바로 이런 것이 ‘자아 성찰’이 아닐까? 이런 것이 바로 ‘자기 객관화’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돼. 그리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 봐. 이 불안한 사회에서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휩쓸리지 않고 두려움 없이 삶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에 고독 속의 끝없는 대화는 너무나 중요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자신을 신뢰하는 과정이랑 같이 갈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야. 그때 꼭 필요 한 것이 고독 속의 대화일 거야. 자기 연민, 자기 비하 혹은 나르시시즘에 가까운 자기애는 자기 자신도 세상도 신뢰하지 못하게 해. 우리는 대면하는 대신 피하거나 화부터 내려 들 거야. 고독한 소로는 윌든 호숫가의 모든 것과 대화를 나눠. 그에겐 연민도 비하도 피해 의식도 없어. 대신 사색과 신념이 있지. 어쩌면 소로가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 나는 고전과 그런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질문하고 또 질문하고. 그의 진리 실험 결과는 어땠을까? 고독 속에서 그는 뭘 발견했을까? 하지만 우린 다음 주에 만나야 해. 궁금해? 그래도 참아.
2011.1.13
하늘에서 바라본 시선과 대지의 책임감
동쪽별. 난 어쩐지 머리가 좀 아파. 나 감기 걸릴 것 같니? 그런데 너 눈 구경은 했니? 난 취재 다녀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서 이정표도 가로등도 없는 공사 중인 구간에서 눈을 만났어. 길이 어디서 뚝 끊어질지 알 수가 없었어. 평소라면 눈이다! 좋아했을 텐데 무서우니까 눈이 꼭 변기통의 화장지 빨려 들어가듯 내리는구나! 이렇게 생각될 정도로 심통이 났지. 어둠과 펄펄 날리며 덤벼드는 눈 속의 파헤쳐진 길을 최대한 느리게 가다 보니까 마침내 환한 불빛이 나타났어. 너무 반가워서 간판을 봤어. 글씨가 아주 선명하게 써 있었어. 장. 례. 식. 장!
생텍쥐페리와 동료 프레보는 사하라 추막에서 추락해. 시속 200킬로미터의 속도로 땅을 들이받지. 살아났다는 게 불가사의할 정도의 추락이었어. 아!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프레보가 울어. 생텍쥐페리는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해. “끝장난 거면 별수 없지, 뭐.” 그러자 프레보가 대답해. “내가 우는 게 나 때문인 줄 아나…….” 생텍쥐페리는 그 말을 이해해. 그는 아내의 눈을, 동료의 눈을 생각해. “나를 기다리는 눈들이 보일 때마다 나는 불에 덴 듯 고통스럽다.”
마실 물 한 방울 없이 이슬만이 희망인 사막 한가운데 생텍쥐페리는 자신이 조난자가 아니라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조난자라고 생각해. 이 관점은 생텍쥐페리가 구조되는 그 순간까지 일관되게 유지돼. 조난자는 내가 아니다. 조난자는 우리의 실수로, 우리의 부재로, 우리의 침묵으로 위협받으며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외쳐. “침묵의 순간에 일 초씩 흐를 때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간다. 조금만 참아다오! 우리가 간다! 우리가 구해 주겠다!” 그리고 생텍쥐페리는 지난주에 말한 것처럼 다시 책임감에 대해 생각해. “애수는 사회적인 관계 안에서만 발생한다. 우리가 책임져야 할 이들을 안심시켜 주지 못하는 우리의 무력함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책임을 지기 위해, 돌아가기 위해 생텍쥐페리는 피로와 갈증 속에서도 길을 나서. 그리고 인간의 발자국은 발견하지 못하지만 사막여우의 굴을 발견해. “내 작은 여우야. 나는 지금 절망적이란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절망적인데도 네가 어떤 성격일지 관심이 생기니 말이야.” 이 장면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부분이지만 지금은 건너뛸게. 생텍쥐페리는 추락 후 사흘이 지나자 신기루를 보고 탈수 증세로 온몸을 벌벌 떨기 시작해. 곧 죽을 거라고 느껴지는 순간 다시 이런 생각을 해. “그대들의 고통을 제외하면 나는 아무것도 후회스럽지 않아……. 만일 내가 돌아갈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려고 무진 애를 써.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돌아가려 한 것은 아니야. 그럼 누구에게일까?
“나와 동류인 모든 인간들에게.”
그리고 마침내 발자국 하나를 발견해. 모래 위에 찍힌 기적과도 같은 인간의 발자국 하나를. 또 환영일까? 이번엔 아니었어. 정말로 저기 언덕 위에 베두인족 한명이 낙타를 가고 있었어. 하지만 생텍쥐페리와 프레보의 성대는 말 라버렸어.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어. 베두인족은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어. 잔인한 악마가 그들에게 베두인족이자 인간인 그를 보여 주고는 소리 없이 다시 데려가려고 하고 있었어. 베두인족은 아주 천천히 멀어져 가지만 생텍쥐페리는 달릴 수도 없었어. 또 다른 아랍인의 실루엣이 보였어. 둘은 팔을 마구 휘저어. 그 팔짓은 세계 전체를, 허공 전부를 휘저을 수 있어야 했어.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그래서 그 베두인족은 여전히 오른쪽만 바라보고 있어. 그러다가……
이것이 내가 지난주에 말한 상반신과 고개를 돌리는 세계 문학사상 최고의 명장면이야. 난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한숨을 쉴 수밖에 없어. 안도감 때문일까? 뭐라고 표현하든 누군가 나를 본다는 것의 의미의 거대함에 대해서 일단은 한숨을 쉬고 볼 수밖에 없어. 누군가 나를 본다는 것은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기적 아닐까? 보는 사람과 보길 원하는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시선의 왕복 운동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뭐 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생각해.
이 부분, 바로 이 부분 말이야. 나라면 이렇게 인사했을지도 몰라.
“(돈이 있을 경우) 베두인족이여. 감사합니다. 언젠가 당신의 댁을 방문해 낙타를 몇 마리 선물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비행기 내 옆자리에 특별히 태워드리겠습니다.”
“(돈이 없을 경우) 베두인족이여. 감사합니다. 당신의 마룻바닥을 일주일 동안 닦아드리고 낙타를 일주일 동안 목욕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생텍쥐페리는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았어. 대신 그는 “세상 모든 인간의 얼굴을 통해 당신의 얼굴이 나타납니다.”라고 했어. 이젠 생텍쥐페리가 이 글을 쓴 이유가 명백해졌어. 그러니까 생텍쥐페리는 이 글을 몇몇 사람의 빼어난 용기와 고귀함을 칭찬하려고, 혹은 비행사로서의 특이한 경험을 감동적으로 전해 주려고 쓴 것이 아닌 거야.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거였어.
같은 상황이 되면 너도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란 이 말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봐. 나도 누군가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될 것이다,라는 말이잖아. 나도 미처 파악 못 하고 지금은 그저 잠만 자고 있지만 때만 만나면 훨씬 더 고결하고 위대하고 인간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 이 부분은 내겐 예수가 메마르고 지친, 가난한 군중을 앞에 두고 한 산상수훈만큼의 충격을 내게 줘. 그래서 스피노자가 예수를 두고 한 말이 지금 이 순간 생각나.
“그는 법에 예속된 제자들을 법으로부터 해방한 대신 그들이 마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영원히 예속토록 만들었다.”
난 이것이 생텍쥐페리가 말한 책임감이라고 생각해. 끝없는 선택의 순간마다, 책임을 져야하는 순간마다 다른 무엇이 아닌 마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예속되어 선택하는 것 말이야. 이런 예속이라면 예속이 아니라 인간 해방이고 사랑일 거야. 이것이 내가 생텍쥐페리에게 배운 하늘에서 본 시선이야.
지구 밖 어딘가에는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는 방으로 가득 찬 별이 있다고 들었어. 생텍쥐페리도 그 소문을 혹시 들었을까? 그렇다면 그는 이 지구를 바로 그런 방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 같아. 그의 용기, 그의 책임감, 그의 인간과 지구에 대한 신뢰, 그의 행동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인간의 대지』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프랑스에서 해고되어 폴란드로 돌아가는 노동자 무리를 만나. 그들 중에는 완전히 지쳐빠져 잠든 부부 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 끼어 잠들어 있는 것은 황금 사과처럼 예쁜 어린아이였어. 생텍쥐페리는 그것을 절대 놓치지 않아.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비참과 나태함과 무관심에 절대로 안주하지 않기를, 저 황금 사과 같은 아기를 구해 내기를 , 그래서 우리 모두 저마다 새로운 인간을 창조해 내길 바라. 그는 지구가 황량한 곳이고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그러니 동쪽별, 나도 너를 상반신을 돌려 고개를 돌려 본다. 본다. 그리고 그날 밤의 장례식장 불빛 말이야. 그 불빛이 한번 나타나자 그다음부터는 많은 빛들이 차례로 나타났단다. 난 무사히 돌아와서 이렇게 글을 쓴단다.
2011.1.6
인간의 대지 _ 나의 변하지 않는 출발점
동쪽별. 12월 31일 밤에 너는 이대 목동 병원에서 영화를 찍었고 나는 목동의 방송국에서 송년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송하고 있었구나. 제야의 종이 열두 번 치기 직전 쌩쌩 집으로 뛰어갈 때 목동 병원 쪽을 한 번은 봤다고 장담할 수 있단다. 그것도 상반신이 젖혀질 정도로 크게 고개를 휙 돌려서 말이야.
뛰어가면서 나는 2010년 한 해 내가 붙잡고 싶은 시간이 무엇이 있었을까, 생각을 해보았단다. 호텔 야외 수영장에서 검은 구름이 빗방울을 막 떨어뜨리고 그것이 내가 읽던 네루다 시집에 툭 떨어지던 때, 남들은 모두 수영장에 뛰어들 때, 검은 구름을 보며 시민 여러분! 저기 구름이 있어요! 이렇게 속으로 외칠 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느끼면서도 모두가 함께하길 원할 때, 그리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읽고 충격을 받아서 한밤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을 때, 뜻대로 되지 않는 원고 때문에 밤의 불명예 속에 던져져 있던 때, 그런 것들이 생각났어. 그 밤에 난 붙잡고 싶은 시간의 속성들을 알게 되었던 것도 같아. 그런 시간의 가치란 계산될 수가 없는 것이었어. 그 시간들은 적어도 나에 게 아무런 경제적 이득도 가져다주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 속에 강렬하고 뜨거운 긍정들과 배움이 있었어. ‘아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이런 느낌 말이야. ‘이럴 때 웃고 이럴 때 슬퍼하고 이럴 때 저항 하면서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이런 느낌 말이야.
만약 붙잡고 싶은 어떤 시간이 있었다면 올 한 해는 그걸 위해 힘들게, 지쳐도 허망하게 느껴져도 무기력하게 느껴져도 힘들게 노력하자, 우리.
나는 가끔 글 쓰다가 슬퍼질 때가 있어. 오늘 쓴 글이 어제 쓴 글보다도 못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있을 때가 있어.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 그대로이면 어쩌지 하는 슬픔이 있을 때가 있어.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때마다 내가 하는 것은 나를 돌아보는 건 아니야.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발 딛고 있는 대지를 보는 거야. ‘인간의 대지’ 말이야. 그 이야기가 바로 오늘 소개할 책에 신비롭고 위대하게 나와 있어.
바로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야. 하늘에서 바라본 인간의 대지에 대한 시선. 그것이 『인간의 대지』가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어. 나는 『인간의 대지』를 읽고 시선을 하늘로 돌릴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 어떤 책들은 아주 한참 살아본 다음에야 그 가치를 알게 되는데 『인간의 대지』는 나에게 시작점, 언제나 변하지 않는 출발점인 책이야. 『인간의 대지』 때문에 나는 고귀함, 용기, 별, 동료, 직업의 의미, 돌아옴의 의미, 살아나려 함의 의미,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 불빛의 의미를 아주 크게 받아들이게 되었어. 아! 그 모든 이야기를 너에게 제대로 들려줄 수만 있다면.
인간의 대지란 무엇일까? 어느 날 생텍쥐페리는 야간 비행 중 길을 잃어. 생텍쥐페리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그런데 그 인간의 대지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곳이기만 할까? 하늘에서 바라본다면 지상의 불빛은 아직도 식지 않는 용암 위에 위태롭게 서 있고 후일 덮쳐 올 눈바람과 모래에 위협을 받고 있고 결국 어떤 인간도 충분히 깊게 안정된 땅에 발 딛고 있지 않아. 하늘에서 지구를 바라본다면 바위와 모래가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도 어마어마해서 나무 그늘, 평범한 집의 현관도 행복과 우연의 결합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이야.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묻는 거야. 왜 우리는 타인을 미워하는가? 같은 별에 사는 이웃인데, 이 별 아래서는 단지 양 몇 마리만을 길러내는 순박한 양치기도 하인 이상의 가치를 갖는데, 그는 파수꾼인데, 제국 전체를 책임지는.
어느 날 생텍쥐페리의 동료 비행사인 기요메는 겨울에 안데스 산맥을 횡단하다가 50시간이나 실종되었어. 생텍쥐페리 일행은 닷새 동안이나 산더미를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 그런데 이레째 되는 날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말했어.
“ 기요메가…… 살아 있어!”
그렇게 해서 기요메는 자신이 어떻게 4500미터의 산을 기어 올라서, 40도의 추위 속에서, 손, 발, 무릎이 피투성이로 변해 가면서, 수없이 넘어지면서, 절대로 잠들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고 살아 돌아왔는지 말하기 시작했어.
동쪽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어. 나 혼자라면! 나 혼자라면! 많은 것들이 상관없을 거란 걸. 죽음조차도, 최고의 비참함과 고통조차도, 나를 위해 울고 있을 사람, 나 때문에 고통받을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상관없을 수 있다는 걸! 울고 있는 어미나 아이나 연인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래도 좋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걸.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것은 이 세계 속에 나에게 희망을 품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란 걸. 내가 때로는 나의 기쁨이 아니라 너의 기쁨을 더 크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란 걸.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기요메의 참된 미덕은 그의 불굴의 용기가 아니라 책임감에 있다고 말해.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 말의 울림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니?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와는 아주 다른 말이겠지? 책임이 우리가 공유 하는 윤리나 인간성과 자발적으로 관련된 부분이라면 의무는 어쩌면 더 사회제도적이고 외부에서 오는 것이고 강제적인 것일 수도 있겠지. 이를테면 우리 아빠가 노벨평화상을 타서 내가 뛸 듯이 기뻐한다면 그건 의무감 때문은 아니겠지?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책임을 진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을 거야.
우편 비행사였던 생텍쥐페리는 한 직업의 위대함은 사람을 다른 사람과 이어주는 것이라고 말했어. 그 이어짐이 우편물을 한 집 우체통에서 다른 집 우체통으로 배달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것이 내가 생텍쥐페리에게 배운 직업윤리고 인간 되기의 중요한 원칙이었던 것 같아. 그런데 기요메 이야기의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해. 그 이야기는 다음 주에 할게. 그런데 너, 아까 내가 네 쪽으로 상반신을 움직여서 고개를 돌렸다고 말했잖아. 고개를 돌리는 동작에 대해 가장 아름답고 숭고하게 묘사된 책이 뭔지 아니? 작별할 때 크게 손을 흔드는 동작의 최고봉이 보르헤스라면 고개 돌리는 동작은 단연 생텍쥐페리야, 내가 알기론. 네가 알면 알려 줘도 돼.
안녕. 동쪽별. 이제 곧 한 해가 가네. 올해는 어땠니? 이런 생각할 겨를 없이 바쁜 거니? 언제나처럼 조금 슬프게 조금 썰렁하게 조금 유머러스하게 자학 유머를 구사할 거니? 쓸쓸한 미소와 함께.
난 며칠 전에 엄마랑 통화했던 걸 자꾸자꾸 생각하게 돼. 우리 엄마가 계신 농장엔 펑펑 함박눈이 내렸다고 해. 우리 엄마는 소를 많이 기르기 때문에 구제역이 염려되어서 농장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절대로 밖에 나가지 않는대. 펑펑 쏟아지는 눈 한 번 보고 소 눈망울 한 번 보고 특히 임신해서 배가 볼록한 소 한 번 보고 일주일 전에 태어난 송아지 한 번 보고 나면 이 세상에 아직도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야. 그리고 소들은 엄청난 덕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침착할 수 있다는 거지. 나는 엄마가 눈을 실어 나르는 공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게 상상이 되었어.
‘뱃속에 아기가 들어있단 걸 잊지 마세요.’
소들이 엄청난 덕성의 소유자일 수는 있지만 그래도 죽어야 할 이유까지는 모르겠지? 나는 농장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우리 엄마와 아빠가 소들의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한 쌍의 슬픈 천하대장군같이 느껴졌어. 눈은 어디서 떨어 지는 걸까? 하늘에 올라간 소의 눈망울에서? 지상의 우리는 그 눈을 맞으며 삶을 계속하겠지. 앙드레 지드 자서전의 제목이 갑자기 생각나네. ‘과일이 죽지 않으면 홀로 남는다’ 이 눈은 오늘 밤 내게 어떤 말을 걸고 있는 걸까?
그러나 우선 우리는 이제 『크리스마스 캐럴』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구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지 영감은 유령의 옷자락인줄 알고 붙잡고 늘어진 것이 침대 기둥이었단 걸 알자 크게 기뻐하지. ‘오! 악몽이었어!’라거나 ‘오! 개꿈이었어!’라고 하지 않았어. 그는 지금껏 살면서 저질러온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가장 기뻐해. (지난주에 말한 것처럼) 여태까지 살아온 모든 날은 꿈이었고 꿈에서 깨어난 바로 이 순간부터 꿈속의 엄중 경고를 잊지 않고 살기로 맘먹은 사람처럼 말이야. 스크루지의 기쁨은 나에게 도 고스란히 전해져. 내가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지. ‘내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이 있어!’ 이런 외침이 귀에서 쟁쟁 울리는 것 같아서 나도 덩달아 마음이 바빠져. 스크루지는 살아 있는 동안 남에게 많은 선물을 베푸는 사람이었고 두 번 다시 유령을 만나진 못했어. 누구든 스크루지로 불리기를! 그것이 찰스 디킨스가 우리에게 주는 크리스마스의 축복이었어. 그런데 너 혹시 스크루지의 유령들이 너무 교훈적이고 유머 감각이 떨어져 서 좀 심심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니? 하지만 스크루지의 유령은 우주가 계속되는 한 결코 변함없는 진리를 우직하게 말하고 있어. 살아 있는 한 우린 다른 사람의 영혼에 선하게 개입해서 같이 모험을 떠나야 한다는 것 말이야.
그런데 이 지점에서 나는 자꾸 한 가지 고민을 하긴 해. 강철 같은 의지의 소유자라고 해도 자신의 다짐이 현실과 만나는 수많은 날 내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려 한 마음속 최초의 환희를 그대로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점 말이야. 이를테면 스크루지가 사기꾼이나 끝없이 다른 사람의 선의를 이용이나 하려 드는 정치인들을 만났다고 상상해 봐. 그는 기껏해야 속여 먹기 쉬운 사람 정도로 취급되어 오히려 누군가의 탐욕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 서 몹시 상심한 다음에 다시 예전의 스크루지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난 이 고민에 관한 한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에 감정이입해. 레빈은 난 도대체 이 세상에 무엇을 하러 태어났나 끝없이 고민하는 사람이야. 소설의 마지막에서 레빈은 한 농부와 이야기 하다가 영혼을 가진 농부에 대해 듣게 돼. 그때 그는 문득 큰 깨달음을 얻어. 그리고 그는 선(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해. 만약 선이 원인을 갖는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다. 만약 선이 결과를, 보수를 바란다면 그것 역시 선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선은 원인과 결과의 밖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생각해.
(레빈을 세계에 대해 좀 더 고민하는 참여적이자 철학적인 스크루지라고 상상하고 들어봐.)
그러나 깨달음이 있었다고 해도 그 깨달음이 갈등 없이 현실과 만나진 못해. 그것을 레빈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문장을 너에게 들려주고 싶어.
나는 그 감정을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에필로그에 썼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에필로그를 쓸 때의 감정이 떠오르기 때문에 부끄러워도 인용할게.
동쪽별! 스크루지 영감은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은총을 받았을까? 나는 그가 무척 부럽고 그의 이야기를 잊고 싶지 않아. 우리 모두가 함께 믿고 기뻐할 만한 이야기로 영원히 기억할 거야. 만약 이런 이야기들을 믿는 마음이 우리에게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슬픈 이야기에 따라서만 살려고 들 거야. 그리고 동시에 레빈의 이야기도 잊고 싶지 않아. 떨면서 가장 멀리 날아가려고 한밤중에 세상 위를 나는 새들의 이야기로 말이야.
그런데 너 이런 비유 들어봤니? ‘가능성의 밤에서 현실성의 낮으로 옮겨가는 존재.’ 이 표현이야말로 새로운 인간이 세상 속에 탄생되어 가는 과정을 너무나 아름답게 보여 주지 않니?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책상 뒤편 하늘에도 눈이 내려. 난 이 눈을 올 한 해 우리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한 경고이자 새로운 지혜의 눈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지금은 깊고 고요한 가능성의 밤이구나! 혹시 은총은 아니더라도 은총의 예감이 밀려들고 있지 않니? 해피 뉴이어!
2010.12.23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캐럴> 이야기
안녕, 동쪽별. 바야흐로 너의 계절이 왔구나. 넌 지금 혹시 어느 집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것 아니니? 혹시 연평도 떨고 있는 교회 위에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벌거벗은 천사처럼 올라가 있는 것은 아니니? 아니면 이 도시의 어느 곳에 네 영혼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 거기서 지상의 낮은 별 하나 솟아나려나? 그렇다면 나는 높은 산 위에 올라 네가 있는 쪽을 내려다볼게. 깜빡여 줘.
나는 어제 오늘 크리스마스 캐럴 생각을 좀 해봤어. 이 크리스마스에 궁극적으론 그 아무것도 너를 어둡게 하지 않길 바라서이고 너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고 싶어서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크리스마스 캐럴의 내용을 짠돌이 냉혈한 스크루지가 안개 낀 크리스마스 이브에 세 유령을 만나 개과천선한다는 것 정도로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의 크리스마스 캐럴 이야길 네게 들려줄게. 우선 스크루지가 세 유령을 만나는 것은 사실이야. 그런데 런던판 샤일록인 스크루지는 유령을 만나기 전에 죽어버린 동업자 말리를 자신의 음산한 집에서 만나게 돼. 스크루지는 죽은 말리의 얼굴을 보자 벌벌 떨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해. 그러자 쇠사슬을 칭칭 감은 말리는 슬픔에 젖어서 이렇게 말해.
나는 벌써 이 부분부터 죽은 말리가 가깝게 느껴져. 말리는 스크루지에게 이제 그만 인정을 베풀고 살라든가, 돈에 집착하지 말라든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말리가 말한 것은 오로지 영혼이었어. 말리는 자신의 영혼이 쉴 수도 머물 수도 오래 지체할 수도 없이 지루한 고행을 계속하게 된 것은 평생 한 번도 경리 사무실, 환전소 소굴의 좁은 울타리 밖을 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해. 그리고 자신이 차고 있는 족쇄 역시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살아생전에 만든 거라고 말하고. 말리는 하루에도 열몇 번씩 스크루지 옆에 앉아 그를 지켜보다가 스크루지에게 단 한 번의 기회와 희망을 주고 싶어졌기 때문에 종이 울릴 때 세 유령을 차례차례 보내겠다고 말하지. 그런데 죽은 유령이 산 인간의 삶에 기회와 희망을 주기 위해 개입하고 싶어 한다면 그때의 유령의 정체는 뭐니? 말리의 말이 너무나 인간적으로 느껴지지 않니? 사실 스크루지를 묘사하는 구절 중에 바깥이 춥든 덥든 스크루지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말이 나와. 그는 아무리 더워도 더위를 타지 않고 아무리 추워도 떨지 않는 자이며 눈보라도 장대비도 그를 이길 순 없어. 어떤 것도 스크루지의 마음을 움직이진 못해. 스크루지는 빈틈없는 자. 떨림과 망설임이 없는 자. 균열 없는 자. 그렇다면 스크루지는 살아 있으되 살아 있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살아 있는 스크루지가 더욱 비인간적이고 죽은 자 같고 죽은 유령 말리가 더 인간적이고 살아 있는 것같이 느껴지지 않니? 말리가 사라져간 크리스마스 이브의 하늘엔 유령들이 한가득 떠다니고 있어. 그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비탄과 후회, 자책과 한탄의 소리를 구슬프고 음산하게 내면서 하나같이 자신이 살아생전 만든 쇠사슬을 차고 있어. 이제 유령들은 인간적 유대감, 우정, 사랑으로 연대되지 못하고 오로지 쇠사슬로만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지. 그리고 그 형체 없는 유령들의 진정한 슬픔은 다름 아닌 이제라도 선의로 인간의 일에 개입하고 싶어도 영영 그럴 수 없다는 데 있었어.
이 부분까지 읽으면서 나는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의 하늘을 올려다봐.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것처럼 오늘 밤도 안개가 자욱해. 나는 유령과 유령의 개입에 대해서 생각해 봐. 나는 죽었다 깨어났다, 죽을 뻔했다, 죽은 셈치고, 다시 태어난 셈치고 등등의 말을 생각해 봐. (왜냐하면 이 유령들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 원하겠지?) 이런 순간의 죽음이란 건 뭘까? 생물학적 죽음뿐 아니라 이렇게 상징적인 죽음도 진정한 죽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위해서 우리는 죽음 너머를 생각해 봐야 할지 몰라. 삶과 죽음에 지배당하는 게 아니라 그 너머를 보는 거야.
나는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나온 그 문장(쿤데라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듣는 것과도 같은 충격적인 울림을 받았다고 한 그 문장)을 떠올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나는 이 문장을 알기 전에는 유령들을 공동묘지와 기괴한 집과 풀어헤친 머리와 복수와 광기, 피와 죽음과 죄의식과 범죄와 한의 불길하고 공포스러운 밤의 카니발의 느낌과 더 연결시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러나 이 문장을 읽고 나선 유령에 대한 생각이 좀 바뀌었어. 유령은 사회적으로 억눌린 자, 그러나 더 이상 억눌리기를 원치 않는 자, 낙오된 자, 희생양, 혁명을 원하는 자, 금지되었던 것을 감히 원하게 된 자, 집 없는 자이되 왜 집이 없느냐고 묻는 자, 사회적으로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자, 이기적이고 반성하지 않는 우리에게 꼭 할 말이 있는 자, 이런 이미지들과 더 연결되었어.즉 유령에겐 할 말이 있고 할 일이 있고 보여 주고 싶고 깨뜨리고 바꾸고 싶은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그리고 그런 유령이라면 호감이 가는 걸 숨길 수가 없어. 유령을 위한 휴머니즘(혹은 어리석은 인간을 위한 유령들의 휴머니즘)이 필요할 거란 생각까지 들어. 그렇다면 크리스마스 캐럴의 유령은 어느 계열일까?
스크루지는 이제 말리의 개입으로 세 유령들을 만나게 돼.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에서 말이야. 과거, 현재, 미래를 본 그가 점점 어떻게 변하는지 이미 우리는 결론은 알고 있어.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할아버지 모델 같은 후덕한 인상, 누구나 존경하는 자선 사업가로 변했잖아. 말리의 선택은 옳았어. 스크루지는 기회와 희망을 갖게 돼. 그런데 스크루지에게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사람이 그렇게 극적으로 변하는 데는 우선은 두 가지 정도 동기를 들 수 있을 것 같아. 하나는 자기 자신이 원래는 더 괜찮은 사람일 수 있었다는 생각에서, 이 경우 자신이 뭘 잃어버리고 살았는지 깨닫고 그걸 회복하고 싶어 해. 두 번째는 반대로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란 인식에서, 이 경우 철저한 부정에서, 오히려 그 부정 때문에만 긍정으로 나가는 거야. 스크루지는 첫 번째 쪽에 더 가까워. 중요한 건 유령이 스크루지 죄의식의 이면, 균열 없음의 이면을 보고 균열을 내주었단 거야. 유령은 스크루지를 죽었다 깨어난 것같이 만들어. 나는 이제 스크루지의 변신을 지켜보는 말리에게도 평온이 있을까 궁금하지만 디킨스는 그걸 나의 상상의 영역으로만 남겨 두네. 나는 유령에 불과한 자,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죽은 거나 다름없는 인간에게 ‘개입’함으로써 준 선물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어.
그런데 스크루지처럼 많은 재산을 갖고 있지 못한 우리는 어떻게 회심을 표현한다지? 그것에 대해서는 재산 없는 자의 대표로 내가 좀 고민해 봤어. 다음 주에 그 이야기 좀 더 해볼까?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 글을 읽을 너를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
“지금 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우리가 벽난로에서 꺼져 가는 불 옆에 무리지어 앉자
한 장로가 말했다.
우리는 밀짚 깔린 우리에서 살고 있는
온순한 동물들을 그렸다.
그 동물들이 그때 무릎을 꿇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 시대에 극소수의 사람들이 만들어낼
환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누군가가
우리가 어린 시절에 잘 알고 있었던
저기 험한 골짜기 옆 쓸쓸한 농가 마당에서
황소들이 무릎 꿇는 것을 와서 보라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며
그와 함께 어둠 속으로 들어가리라
(토마스 하디, 「황소들」)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며 눈 꼭 감고 기도하고 싶은 게 있니? 그렇다면 너의 유령이 되어서 길을 안내하고 싶어. ‘그와 함께 어둠 속으로 들어가리라.’ 이것이 나의 선물. 그런데 너 말이지? 크리스마스 이브에 우리 어디 조그만 묘지에서 만나는 건 어때? 우리도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이 한 해를 보내자! 이것이 너에게 보내는 나의 메리 크리스마스.
2010.12.16
<거울 나라의 앨리스> 마지막 이야기
안녕, 동쪽별. 넌 늦잠 자는 걸 좋아하니? 하루 종일 잠만 자는 날도 있니? 얼마 전에 청순한 미인을 쫓아서 (그런데 그녀가 물안경 벗은 모습을 보긴 봤니? 네가 완벽한 미인을 만나긴 만났는데 아직 물안경을 벗은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고 해서 나는 너의 상상력의 무한함에 놀라야 할지 반대로 너의 상상력의 절박함에 애틋함을 느껴야 할지 잠시 망설였어. 결국 감탄 반, 위로 반의 심정이 되었다고나 할까. 너는 어쨌든 강한 사람이야.) 거대한 목욕탕 같은 수영장으로 수영을 하러 다니기 전에는 네가 그랬던 걸 알고 있는데 요샌 어떠니? 오늘은 우리 회사 창사 기념일이라서 난 하루 종일 침대 밖으로 나오질 않고 자다 깨다 했어. 마치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같았다고나 할까? 그런데 새벽녘에 꿈을 꿨어. 무척 기분 좋은 꿈이었고 나는 꿈속에서 깔깔깔 웃었는데 꿈을 깨고 나서도 계속 소리 내서 웃고 있는 거야. 웃음은 남았어도 꿈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았어. 에드거 앨런 포 식으로 말하자면 꿈의 거미줄을 뚫고 나오긴 했는데 그만 그 거미줄이 너무나 섬약해서인지 심연 너머의 그 무엇을 놓치고 만 거지. 어쨌든 아직까지도 내 이마에도 어젯밤 꿈의 흔적이 물결치며 남아 있을지 몰라. 그런데 우리의 앨리스는 모든 걸 기억하는 소녀 같아. 『거울 나라의 앨리스』 마지막 편에서 앨리스는 권장할 것은 못 되는 성격을 가진 붉은 여왕을 식탁에서 들어 올려서는 온 힘을 다해 흔들고 흔드는데, 그런데 여왕은 더 이상 여왕이 아니고 짧아지고 통통해지고 부드러워지고 동그래지더니 마침내 새끼 고양이가 돼버린 거야. 그래서 앨리스는 고양이 키티에게 이렇게 말해
자, 키티야,
이제 누가 이 모든 걸 다 꿈꾼 건지 생각해 보자.
이건 정말 진지한 질문이야.
그렇게 계속 발을 핥으면 안 돼.
키티야, 꿈을 꾼 건 분명 나이거나 붉은 왕이거나 둘 중 하나야.
붉은 왕은 내가 꾼 꿈속에 나왔지. ……그럼 나도 그가 꾼 꿈속에 나왔던 거란 말이야.
붉은 왕이었을까, 키티야?
여러분은 누가 꾼 꿈이라고 생각하나요?
이렇게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대단원의 막을 내려.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앨리스의 꿈이었을까? 고양이 키티의 꿈이었을까? 아니면 둘이 동시에 꾼 꿈이었을까? 누가 꾼 꿈인지 따지는 것이 과연 중요한 의미가 있기나 한 걸까? 그런데 너는 인생이 한바탕 ‘꿈’이라고 생각하니, 아니면 언젠가는 ‘이뤄야 할 꿈’이라고 생각하니? 혹시 누군가는 이런 질문이 부질없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해. 이런 질문들 안에서 타인은 나의 일방적인 욕망, 이해관계의 대상이길 멈추게 되고 그런 순간에 나는 타인의 영혼과 꿈을 진심으로 궁금해하게 되고 타인도 나의 삶에 참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분별력을 갖게 되니까. 나는 언젠가 이런 질문들을 무수히 테이블에 늘어놔 본 적이 있어. 하트나 클로버를 그리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그려가면서 말이야. 타로 점을 보는 친구를 따라가서 카드들이 순식간에 예언처럼 섞이는 것을 지켜볼 때였어. 그때 나는 타로 카드가 아니라 카드를 섞는 손가락을 눈이 빠지게 바라보는 내 친구의 절박한 시선에만 사로잡혔어. 인생은 혼란 속에서나마 꼭 듣고 싶어 하고 알고 싶어 하는 어떤 절실한 것들이 있을 때에만 한껏 신비로워질 수 있단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 반지를 향하는 욕망보다도 더 강렬하게 나의 절대 질문들을 여섯 장의 타로 카드처럼 뽑아 들었어.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이야.
‘인생은 매 순간 한 권의 책일까? 아니면 언젠가는 결말을 맺어야 할 한 권의 아름다운 책에 이르는 과정일까?’
‘내 인생은 나만의 고유한 것일까? 아니면 타인의 삶에 끼어든 낯설고 우연적인 것일까?’
‘인생을 무대로 생각한다면 난 단 한 번의 리허설 기회조차 갖지 못한 불운한 주연배우일까? 아니면 조연도 못 되고 오로지 신이 차려놓은 무대 밖에서 헛되이 소리만 지를 수 있는 관객에 불과할까?’
‘내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은 우연 혹은 운명이란 이름의 필연이었을까? 선택이었을까?’
‘이루어진 꿈,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이 중요할까? 아니면 마음속으로만 꿈꾸다 사라져버린 계획들, 결코 말로 표현되지 못한 것, 비밀들이 훨씬 더 중요할까?’
나는 이런 질문들을 절대 잊고 싶지가 않아. 대답을 누가 할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야. 세계가 그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이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울고 싶게 만드는 무수한 이야기들만이 대답 대신 남았다가 결국 사라져가게 될까? 그런데 묘하게도 도시의 허공에 떠도는 이런 이야기들은 비슷한 얼굴들처럼 서로서로 닮은 채로 어떤 특수한 영혼을 나눠 갖고 있을 것 같아.
나는 언젠가 노란 개나리 나무에 일렁이는 햇살 아래서 눈이 부셔 눈을 찌푸릴 때 네가 이제 그만 공기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싶어 한다고 진심으로 느꼈고 그래서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너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사라지지 마라, 사라지지 마라!’ 주문을 걸었던 것을 기억해. 이런 기억들, 그리고 오로지 은유로만 외설적이었던 너의 기질들, 달의 뒷면에 홀로 있으려 하는 너의 고독을 생각해 보면 너는 인생은 ‘이뤄야 할 꿈’이 아니라 ‘밤의 꿈’, ‘잠의 꿈’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 그럼 나의 인생은 내가 꾼 꿈일까? 아니면 네가 나를 꿈꾸는 것일까? (허락도 없이) 만약 우리 둘이 동시에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면 슬픔조차도 달콤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도 꿈에서 깨어나면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깨어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까? 그런데 내가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나를 꿈꾸고 있다면? 그때 나는 꿈꾸지 말아주세요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깨어나야 할까?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인생을 한바탕 꿈이라고 생각해도 그 꿈은 홀로 꾸는 꿈인지, 사랑하는 연인 둘이서만 꾸는 꿈인지, 원수 같은 둘이서 꾸는 꿈인지, 우리 모두가 같이 꾸는 꿈인지, 신이 꾸는 꿈인지에 따라서 세계와 내가 맺는 관계가 달라지는 것 같아. 이 고민은 셰익스피어와 보르헤스와 우나모노와 토마스 만을 사로잡았던 게 틀림없어. 우나모노는 홀로 잠든다는 것은 단 하나의 꿈을 꾼다는 것이고 단 한 사람의 꿈은 환상이고 외양일 뿐이라고 말해. 그러나 두 사람의 꿈은 진실이고 현실이고 그런 식으로 현실 세계는 우리 모두가 꾸는 공통의 꿈이라고 말하면서 홀로 잠들지. 물론 같이 꿈꿀 사람을 찾으면서. 같이 꿈꾸기가 너무나 중요하니까. 우나모노의 결론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일 것 같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꿈 이론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 나와.
자, 말해 봐, 너는 나를 통해 무슨 꿈을 꾸고 있지? 세계는 나를 통해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좀 더 궁극적으로 세계가 나를 꿈꾸지 않는다면 나도 없는 걸까? 만약 네가 내가 꾸는 꿈이라면, 그리고 만약 내가 네가 꾸는 꿈이라면 이런 자리바꿈은 뭘 의미하는 걸까?
언젠가 나의 훌륭한 친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이처럼 자리바꿈한 적이 있어. ‘네 몸을 네 이웃과 같이 사랑하라.’ 그 순간 그 말은 너무나 인간적으로 타당하게 들렸어. 그 말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거리는 숨 막힐 정도로 가까웠어. 우리는 다른 사람 때문에만, 다른 누군가가 나에 대한 꿈을 계속 꿀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러니 부탁해. 누구도 똑같은 꿈을 두 번 꿀 수는 없는 거라면 나를 꿈꾸기를 멈추지 말아 줘! 나는 또 나의 꿈속에서 너의 꿈에 도달하려고 꿈속에 머물려고 계속계속 움직일 거야.
그런데 이런 꿈 이야기를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와 섞는 게 불가능한 건 아냐. 우리 모두는 꿈을 꾸고 있는데 이제 막 깨어났어. 그러고는 깜짝 놀라서 눈을 비비며 꿈속의 실수와 엄중 경고들을 잊지 않으려고 굳게 결심해. 꿈에서 깨어났으니 꿈의 조각들을 붙잡고 이제부터라도 잘해 보려고 하는 거지. 그게 누군지 아니? 『천일야화』의 왕자들이 그러했고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 영감이 그랬을 거야. 실은 나도 거의 매일 아침 그런 생각으로 우당탕 뛰어 나오긴 하지만. 그러니 우리 다음엔 스크루지 영감 이야기를 해볼까? 그런데 그래도 한 가지 의문은 남아. 오늘 아침 일어났는데 나는 어제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느끼는 거야. 그럼 나는 누구지? 나의 고요한 키티, 대답해 봐.
2010.12.10
<거울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 세 번째
안녕. 동쪽별. 지난주 아주 추운 밤에 촬영 중이었다고 들었어. 네가 영화를 준비하고 찍는 동안 네 자신이 영화 만드는 기계가 아니란 걸 잊지 않기 위해 하는 일이 있을까,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상상해 봤어. 어쩌면 너는 영화를 찍는 동안에는 네가 인간임을 숨기려고 애쓰는 쪽일 수도 있을까? 난 요새 편집실에 많이 앉아 있어. 그런데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 가끔 모니터에게 말을 걸고 있는 나를 발견해. 엄밀히 말하면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한 인간의 음성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게 맞겠지만 더 따지고 들면 그것도 틀린 것 같아. 어쩌면 말로 표현되지 못한 것. 들리지 않는 것에 말을 걸고 있다는 쪽이 더 맞는 것 같아.나는 사람들이 잃어버리려고 말하는 건지 되찾으려고 말하는 건지 가끔 궁금해.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빠른 톤의 말, 높은 톤의 말. 느린 톤의 말, 낮은 톤의 말, 그것들이 병원 환자용 모니터의 심장 박동처럼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져. 뭔가 움직인다는 건 날 늘 안심시켜. 주파수, 신호들. 이런 것들이 날 안심시켜. 모니터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헛된 움직임은 없는 것만 같이 느껴지고, 또 모든 움직임은 단 하나의 욕망, 즉 살아 있으려는, 존재하려는 공통된 욕망을 표현하는 것같이도 느껴져. 가끔 편집실에서 모니터의 파동들을 지그시 눌러봐. 내 손가락 끝에서 파동들은 명멸하면서 파르르 약하게 떨려. 그러면 누군가에게 손가락 하나 대는 일도 엄청난 무게로 다가와.
그런데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내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둘이나 남았으니까 서둘러야겠지. 우리 뚱뚱보 험프티 덤프티는 허리인지 목덜미인지에 벨트인지 넥타이인지를 매고 있지. 당연히 앨리스는 그게 넥타이인지 벨트인지 나처럼 아리송해하지. 그래서 자상하고 친절하고 다소 뻐기기 좋아하는 험프티 덤프티는 이렇게 설명하지.
“넥타이란다. 얘야. 하얀 왕과 하얀 여왕이 선물한 건데
안생일 선물로 주신 거란다.”
앨리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뭐라고요?”
“난 화 안 났는데..”
“제 말은요. 안생일 선물이 뭔가요?”
“당연히 생일이 아닌 날에 주는 선물이지.”
“전 생일 선물을 제일 좋아해요.”
“넌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구나. 1년에 며칠이 있지?”
“물론 365일이 있죠.”
“그리고 생일이 며칠이나 있지?”
“하루요.”
“365일 중에 하나를 고르고 나면 며칠이 남지?”
“364일이 남죠.”
험프티 덤프티가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종이에 써서 보는 게 낫겠다”
앨리스는 공책을 꺼내면서 슬그머니 미소가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계산을 했다
365
1
-------
364
험프티 덤프티는 공책을 받아들더니 자세히 살펴보았다
“제대로 한 것 같은데.”
그가 입을 열었다
“거꾸로 들고 계시잖아요.”
앨리스가 말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아 그렇군……. 그러니까 계산할 걸 보면 안생일 선물을 받을 날은 364일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엉뚱한 것으로 치자면 험프티 덤프티가 그 옛날의 너에게 결코 뒤떨어지지 않지. 나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 어린 시절의 이데아 같은 것이 엿보여서일까? 그렇다기 보다는 이 장면은 나에겐 생일과 선물 각각의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 같아. 오늘은 생일에 대해서만 말할게. 우리는 생일이라 하면 일 년 중 단 하루만을 생각해. 그렇지만 우린 다른 생일도 상상해 볼 수 있어. 『이웃』이란 책에 나오는 이런 문장을 너에게 말해 주고 싶어
“자연적인 출생일은 개별성의 운명에 커다란 의미를 갖는 날이다. 왜냐하면 보편성 안에서 공유하는 것이 그것을 바탕으로 특수한 것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이날은 어둠속에 감춰져 있다. 자기의 출생일은 인격의 출생일과 동일하지 않다. 자기뿐 아니라 성격 또한 그 자신의 출생일이 있다. 어느 날 그것은 무장한 인간처럼 인간을 급습하여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성취한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인간은 세계의 한 파편. 심지어 그의 고유한 의식 이전의 존재이다.”(『이웃』 중에서)
우리의 인격, 성격에도 출생일이 있다는 생각 혹시 해본 적 있니? 도저히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날이 너에겐 있니? 깨달음의 파도가 널 덮친 날이 있니? 새로 태어난 것 같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도 있니? 그런 식으로 너에게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제2의 생일 아침, 그런 빛이 있니? 괴테는 여행자로서 로마에 처음 들어가던 날을 제2의 생일이라고 명명했어. 제2의 생일이란 제2의 탄생, 즉 재탄생을 의미하는 거겠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은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이고 절박한 이야기 같아. 나는 인간과 책의 공통점을 궁금해하듯이 인간과 기계,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어쩌면 기계에게는 ‘안생일’이 없을지도 몰라. 한번 태어난 기계에게 남은 운명은 재탄생이 아니라 마모됨와 수리됨, 처리됨뿐일지도 몰라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몇 개의 제2의 생일이 있다고 생각해. 나는 가끔 눈을 꼭 감고 제2의 생일들을 과거의 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해 보곤 해. 제2의 생일들과 그날의 이야기들은 해가 갈수록 선명해져. 그리고 그때마다 “음! 시작은 나쁘지 않았군.”이란 기쁨과 함께 내 인생(내가 편의상 운명 내지 운명적이라고 표현하는 것까지 포함해서)은 나에게도 많은 것이 달려 있다는 꽤 대단한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돼, 그리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희열과 맘속 깊은 곳의 자유 같은 걸 느껴.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한 바퀴 같이 도는 것같이 느껴진다고도 할 수 있어. 그러고 나서 눈을 뜨고 나면 뭔가 시작해 볼 결심 같은 것도 하게 되곤 했어. 일 년 364일 안생일 선물을 받으려는 험프티 덤프티의 이 황당함은 ‘의지’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어느 날 아침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지 않으려는 의지 말이야. 해산을 마친 어머니의 고통과 기쁨과 함께 다른 고통과 기쁨도 느끼려는 의지 말이야.
그런데 생일날 자기 자신에게 최고의 선물을 준 사람을 하나 알고 있는데 짧게라도 소개해도 되지? 까뮈의 스승이기도 했던 장 그르니에야. 그 사람은 자신의 생일날 자신에게 바캉스를 줘. 그때의 바캉스는 휴가의 바캉스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러니까 일체의 행동이나 생각, 의사의 교환, 오락, 유흥 들을 하지 않는 완전한 무, 중단된 시간을 말하는 거야. 장 그르니에는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몽롱한 몽상의 시간이라고도 하고 공백의 시간이라고도 말해. 그런데 그는 왜 생일을 그렇게 보내고 싶어 했던 걸까? 그에겐 이런 일이 있었어. 그는 생일날 알제의 바다를 보려고 아랍인들 동네 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었어. 날씨가 나쁜데도 그는 엄청난 정적을 느꼈어. 마치 우리가 오늘 같은 함박눈 속에서 정적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건지도 몰라. 그는 그냥 걸어갔어. 그런데 그건 무를 향한 발걸음이 아닌걸 알게 되었어. 왜냐하면 눈앞에 보이는 장밋빛과 흰빛의 바둑판무늬 같은 아랍인들 마을, 중학교의 직사각형 교사들, 군데군데 쪽빛으로 짙어지는 푸른 바다가 장 그르니에를 저희들의 존재에 참여시켜 준다고 느꼈던 거야. 의지가지 없는 존재들끼리 서로서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처럼. 그래서 장그르니에는 그때의 감정을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절대적 통일을 실감했다’고 말해. 장그르니에의 이 문장을 읽어보렴.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공백의 페이지다. 완전히 공백 상태는 오늘만이 아니다. 내 일생 속에는 거의 공백인 수많은 페이지들이 있다. 최고의 사치란 무상으로 주어진 삶을 얻어서 나에게 그것을 준 이 못지않게 흐드러지게 사용하는 일이며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을 국부적인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만들어놓지 않는 일이다.” (『섬』 중에서)
그런 생일을 보내고 장 그르니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자신’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게 돼. 나는 장 그르니에야말로 매해 자신의 생일을 재탄생의 날, 제2의 생일로 만들었을 거라고 믿어. 아침 꽃을 저녁 꽃과 만나게 하는 것 같은 신비로운 기분이었겠지?
내가 널 실망시킬 때마다 ‘무상으로 얻은 내 삶을 내 사소한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만들어놓지 않기 위해’ 란 말을 나에게 또박또박 들려줘. 나는 다시 삶과 가까워질 거야. 다시 인간과 가까워질 거야.
2010.12.3
<거울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 두 번째
안녕 동쪽별! 첫눈은 봤니? 난 일요일 밤에 인천의 영안실에 가는 길에 첫눈을 봤어. 영안실 가는 길에 보는 첫눈의 느낌은 어떤 절실함의 감각을 불러일으켰어. 가로수 나뭇가지들은 모두 창백했고 눈은 내 쪽으로 사정없이 쉴 새 없이 날아왔어. 가로등의 노란색은 접시같이 큰 눈으로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어. 저 깃털같이 날아가는 눈이 어쩐지 우리 삶을 말해 주는 것 같지 않니? 사라지는 삶, 사라지면서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삶. 그런데 눈들은 마치 꼭 있어야 할 곳을 찾아가는 사람같이 급히 날아가지 않니? 아직 사라지기 전의 모습을 꼭 기억해야만 한다고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더 황급히 가버리는 것 같지 않니? 그러니 저 눈은 사람의 속마음을 꼭 닮지 않았니?
나와 동행한 후배는 숲 해설사 자격증을 갖고 있었어. 나는 그에게 물어봤어.
“저렇게 나뭇잎을 다 떨어뜨린 나무를 보고도 그 이름을 알 수 있어?”
“네, 선배 알 수 있지요. 나무껍질과 그리고 순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나는 눈 속에서 마치 자작나무처럼 희끄무레하게만 보이는 나무들을 유심히 바라봤어. 찬미할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한 나무들은 일순간 하얀 노인들처럼 보였어. 나는 나무순과 나무껍질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고 속으로 생각했어. 입에 성에가 끼는 기분이 들었던 건 내 가슴에 뭔가 뜨거운 것이 뭉클하게 올라와서였을까?
그날 돌아와서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마저 쓰려고 끙끙댔어. 어쩐지 하얀 기사의 시가 계속 생각이 났어.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해. 잠시 무릎에 너의 따뜻한 손을 올려놓고 들어볼래?
그대에게 모든 걸 다 말하겠어요.
말할 게 거의 없지만요.
문 위에 앉아 있던,
늙다리 남자를 만났지요.
“누구신가요, 어르신?” 내가 물었지요.
“어떻게 사시나요?”
그러자 그의 대답이 내 머릿속을 졸졸 흘렀네.
체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듯이.
그는 말했네. “나는 나비를 찾고 있었지.
밀밭에서 잠자는 나비를.
나는 나비를 양고기 파이로 만들어
거리에서 판다네,
거친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나는 밥을 벌어먹는다네.
조금 들어보겠나.”
하지만 나는 수염을 녹색으로
물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그리고 항상 커다란 부채를 쓰면
사람들이 보지 못하겠지.
그래서 노인이 한 말에
대답할 거리가 없어서
나는 외쳤지. “여보세요, 어떻게 사시는지 말씀해 달라니까요!”
그리고 노인의 머리를 탁 쳤네.
그러니까 이 시 속의 어떤 사람은 한 노인을 만나서는 누구냐고 물어보고는 속으로는 딴생각에 사로잡혀 있어. 노인의 말이 머릿속에 남아 있을 턱이 없으니까 그는 도리어 버럭 소리 지르는 거지. “여보세요, 어떻게 사시는지 말씀해 달라니까요!” 그럼 노인은 또 자기 이야기를 계속해. 길을 가다가 시냇물을 만나면 나무껍질에 하얀 표적을 새긴다고도 하고 대구의 눈을 사냥해서 조끼 단추로 만든다고도 하지. 하지만 노인의 말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은 그가 딴생각을 마친 후의 일이야. 그런데 이 시는 그렇게 무심하게 끝나지만은 않아. 먼 훗날 갑자기 노인이 생각이 나는 거야. 그게 언제일까? 바로 이럴 때.
내 손가락에 풀이 묻거나,
오른쪽 발을 미친 듯이
왼쪽 신발에 구겨 넣는다면,
혹은 발등에 아주 무거운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한다면
나는 울어버릴 거야. 그러면 꼭
예전에 알았던 그 노인이 생각나거든.
겉모습은 상냥하고 목소리는 느릿느릿하고
머리카락은 눈보다 더 희고,
얼굴은 까마귀를 닮은,
(……)
오래전 여름날 저녁,
문 위에 앉아 있던 그 노인
어떤 느낌이 들어? 후회와 좀 늦게 찾아온 양심의 회복을 말하는 걸까? 그래서 구슬픈 느낌이 드는 걸까? 여름날 저녁에 문 위에 앉아 있던 노인은 아마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엔 없겠지? 사실은 우린 이미 다 알고 있어. 지금 흰머리의 노인들을 우리가 최고로 사랑하고 있진 않지만 그러나 먼 훗날은 사랑하게 되리라는 걸. 그것은 어린 시절 마당에 심겨 있던 느티나무를 그리워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언젠가 엉뚱한 실수를 한 뒤 무안함 속에 고개를 들 때, 뭔가를 애도하고 있을 때, 잘못 신은 신발을 갈아 신듯 엉킨 실타래를 풀고 바로잡고 싶을 때, 이미 죽고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우리 귀에 흘러들어 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몰라. 약간의 회한, 약간의 우수, 약간의 그리움이 뒤섞인 감정 속에 어렵사리 우리는 뭔가 배우게 되겠지. 상실 속에서 뭔가 배우게 되듯이. 물론 이 모든 일들은 웬만큼 인생의 맛을 본 다음에야 일어날 일일 거야. 왜냐하면 삶이 매끄럽지 않다는 걸 알아야 맘 속 깊은 곳에서 비밀스러운 화해를 원하니까.
모험을 하느라 온갖 기이한 일을 겪은 우리의 앨리스는 이 시를 듣던 날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해. 마치 어제 일처럼, 그 기억 속에서 하얀 기사의 두 눈은 부드럽고 푸르고, 저물녘 햇빛은 기사의 머리카락 사이로 내비치고. 기사의 말은 목에 고삐를 건 채 조용히 이리저리 걷고. 그들 뒤로 앨리스는 숲 그늘을 바라보고 있었어. 우리의 순수한 어린아이는 아직은 삶이 이유 없다는 걸 모르니까 이 장면에서 어떤 결핍도 못 느껴. 그래서 앨리스는 “노래를 불러줘서 정말 감사해요!” 하고 씩씩하게 외친 다음 기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수건을 흔들고 시냇물을 폴짝 뛰어넘어 여덟 번째 칸으로 달려가. 여왕이 되러!
2010.11.26
<거울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 첫 번째
동쪽별! 추워! 그래도 난 내일 새벽에 일어나야 해. 취재를 가야 하기 때문이지. 차갑지만 쨍하니 청명한 하늘이기만 바라.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갈 때 갑자기 별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분을 맛보고 싶어. 갑자기 황혼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시구처럼 말이야.
지난번 『거울 나라의 앨리스』 시로 시작했으니 『거울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를 마저 할게.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앨리스가 털실을 마구 흩뜨려놓고 있는 검은 고양이 키티를 “너에게 예절 교육을 시켰어야 해!”라고 꾸짖는 데서 시작해. 물론 꾸짖는 척하기는 하지만 앨리스는 키티에게 다정한 맘이야. 그래서 키티에게 계속계속 말을 걸어. 창유리에 눈이 부딪히는 소리 들리니, 키티야? 소리가 너무 예쁘고 부드럽지 않니! 누군가가 바깥에서 창문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키티야, 너 체스 둘 줄 아니? 키티야, 우리 흉내 내기 놀이 하자. 네가 붉은 여왕을 하렴! 네가 팔짱을 끼면 붉은 여왕과 똑같이 보인다는 사실을 아니? 한번 해봐, 키티야!
그렇지만 앨리스가 아무리 권유해도 키티는 전혀 말을 듣지 않아. 그래서 이번에 앨리스는 거울 앞에 키티를 안고 서서는 “당장 말을 듣지 않으면, 거울 집으로 넣어버릴 거야.”라고 협박해. 물론 이번에도 키티에겐 전혀 통하지 않지. 그래서 이번에 앨리스는 슬쩍 딴청을 부려. “내가 거울 집에 대해 이야기해 줄게. 꼭 우리 집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물건들만 반대로 되어 있지. 벽난로 바로 뒤만 빼고. 아, 정말 벽난로 뒤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이렇게 어느 눈 내리는 날 따뜻한 방 안에서 거울 앞에 선 소녀가 ‘아, 정말 벽난로 뒤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기발랄한 숨을 내뿜으면서 시작돼. 왜냐하면 잠시 후 앨리스는 거울 집으로 가볍게 폴짝 뛰어들어 갈 수 있게 되거든.
그런데 너도 혹시 거울 보면서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니? 혹은 카메라 렌즈를 보면서 뛰어들고 싶다고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니? 사진이 정지된 포즈를 찍는 거라면 영화는 지나가는 것을 찍는 것이란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그러니 비밀을 들려줘. 지나가는 걸 찍는 사람은 결국은 지나가는 것을 사랑하게 되니? 그런 식으로 점점 사라지는 것도 사랑하게 되니? 그렇게 해서 언젠가 존재했음과, 그 존재했던 것들이 결국은 사라져버림과 나름대로 화해하게 되니? 아니면 지금 여기에 존재함 자체의 소중함에 감사하게 되니? 나는 거울에 몸을 던져 모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못 해봤지만 거울에 대한 아름다운 이미지 하나를 갖고 있긴 해.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나오는 이미지인데 그 소설에서 사랑에 빠진 남자는 레스토랑에 갔다가 우연히 너무나 사랑하는 그 여인을 만나.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 같이 있었어. 그는 벽의 거울을 통해 그녀의 모든 동작과 웃음과 옷차림과 목덜미와 아름다움을 끝없이 보지. 마치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을 향해 말을 걸고 웃고 포도주를 권하는 것처럼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봐.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을 때 레스토랑의 주인에게 부탁해. 그 거울을 팔라고. 그렇게 해서 그는 그 거울을 자기 집에 걸어놓게 되지. 그때 거울은 뭐였을까? 그 심정을 나는 이렇게 헤아려봤어. 니체의 말을 패러디하자면 ‘세상의 모든 거울들은 하나의 미궁을 이루고 있다. 미궁의 인간은 결코 진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아리아드네만을 찾는다’. 사실은 나도 거울을 볼 때 가끔은 그런 심정이야. 표면의 매끄러움 말고 뽀얗게 김 서린 두께를 볼 때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나와 한 줄기 끈으로 연결된 그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것도 같아.
하지만 모든 거울 이야기의 핵심적인 매력은 거울 같은 작은 물건을 통해 엄청나게 커다란 세상의 암호를 해독한다는 것일 거야. 이제 우리 앨리스가 뭘 찾아내는지 따라가 보자.
그렇게 거울 속으로 뛰어든 앨리스는 거울 속 세상이 반듯반듯 체스 판 같다는 걸 알게 돼. 그러고는 탄성을 질러.
“만약 이게 세상이라면 온 세상은 누군가가 두고 있는 체스 게임인 거네요. 아, 얼마나 재미있을까! 졸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경기에 참여할 수만 있다면요! 물론 할 수 있다면야 여왕이 되면 좋겠지만요.”
이 용감한 소녀의 상상력은 거의 아인슈타인과 비슷하지? 그렇게 마구마구 뛰면서 그녀는 그 유명한 트위들덤과 트위들디(체스의 네 번째 칸에 있음)과 험프티 덤프티(여섯 번째 칸에 있음)를 만나. 그 사이사이에 닭만 한 모기(하지만 자기 한숨에 날아가 버린 듯한 덩치만 큰 모기야.), 사자와 유니콘, 하얀 기사도 만나. 그리고 마지막 칸에서는 하얀 여왕과 붉은 여왕을 만나게 돼. 물론 우리 꼬마 숙녀의 첫 출발은 졸이었어.
너도 세상살이를 한판 게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아마 이 생각을 오늘날에 와서는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받아들이기보다는 냉소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이 세상이 게임이라고 해도 지는 사람은 지게 되어 있고 이기는 사람은 이기게 되어 있는 게임에 불과하다는 회의적인 입장을 누가 탓할 수 있겠어? 그런데 세상살이를 한판 게임으로 보는 생각에는 무시 못 할 건강함도 있어.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일단 받아들이고 뛰어들고 본다는. 바로 이런 관점으로부터 앨리스의 어린이다운 활기와 명랑함이 솟구쳐 나오고.
그런데 세상살이만 한판 게임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또 아냐. 자기 자신이란 정체성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해볼 수 있어. 예를 들어볼게.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에서 황야의 이리인 하리 씨는 어느 날 가장무도회에 가.(그 가장무도회장의 비밀스런 방에도 거대한 벽거울이 나오지.) 그 가장 무도회장에는 수많은 문이 있는데 어떤 문에는 ‘개성 형성 입문, 성공 보장’이라고 써 있어. 그 방에는 한 노인이 앉아 있었고 노인 앞에는 장기 판이 놓여 있어. 그런데 장기알들은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수많은 자아야. 그날 밤의 장기알들은 하리의 자아들이였어. 노인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하리들을 집어 들어. 노인, 청년, 아이. 명랑한 것, 슬픈 것, 강한 것 ,부드러운 것, 모조리 다. 그리고 그것들을 장기 판 위에 배열해. 그것들을 서로 엮어서 무리를 만들고 각각 유희와 전쟁, 우정과 대결을 이루게 해. 매 게임마다 새로운 작은 세계가 생겨나. 이 작은 세계들이 놀고 다투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아기를 낳고. 모든 판이 완전히 새로웠어. 노인은 이렇게 말하지.
“이것이 삶의 기술이오. 당신 자신이 인생이라는 판을 마음대로 짜고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소. 헝클어뜨릴 수도 풍요롭게 할 수도 있소. 그건 당신 손에 달렸소. 오늘 끔찍한 도깨비로 커져버려 놀이를 망쳐놓은 말은 내일은 대단치 않은 졸로 강등시킬 수도 있고 잠시 곤경과 불행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불쌍하고 사랑스러운 말은 다음 판에서는 공주로 만들 수도 있소.”
이런 유희 속에서 선택이 너무 많아 혹시 혼란스럽니? 하지만 난 이런 장기알 유희가 너무나 맘에 들어. 내 안의 아무것도 억압받지 않아서 나는 나 자신에게 어떤 나를 기대하는가? 란 질문을 끝없이 던지게 하니까.
『거울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는 아무래도 좀 더 해야만 할 것 같아.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험프티 덤프티 씨 이야기를 해야만 하거든. 험프티 덤프티의 몸매가 벨트와 넥타이를 구별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돼. 그리고 키티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니 않니? 얼떨결에 앨리스랑 같이 거울에 들어갔을까? 다음 주에 봐! 그리고 혹시라도 그새 렌즈 속에 뛰어갔다 오면 알려 줘!
2010.11.16
안녕! 나의 친구 동쪽별! 우리가 언제 마지막으로 만났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 너는 기억하니? 그래도 ‘동쪽별’! 이렇게 너를 부르고 나니 가슴 한끝이 아릴 정도로 애틋해. 마치 내가 동쪽별이 떠 있는 새벽하늘에 어슴푸레 떠 있는 초승달 같아. 잘 지내고 있지? 잘 지내길 진심으로 바라. 너와 함께, 너와 같이 책을 읽어 나갈 기회가 생겨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이 글을 쓰기 전에 너와 책에 대해 나눈 대화가 뭐가 있었는지 생각해 봤어. 대학 때 가장 좋았던 것은 변증법을 알게 되었던 것 같아. 나는 그전엔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어. 효도 대 불효, 성공 대 실패, 행복 대 불행, 주체성과 보편성, 친구 대 적, 선과 악. 그런데 이런 이분법의 세계에는 진정한 관찰과 이해, 복잡한 심연에의 탐구, 인간적인 선택과 화해의 가능성, 겉보기와 무관한 진리의 선택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궁색한 자기변명과 합리화, 감상주의와 회한, 세계에 대한 적대적이고 경쟁적인 감정, 신선하지 않은 계산들만이 남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변증법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충격은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에서 ‘어떻게 신은 인간이 되는가?’란 질문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정도였어. 나는 그전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관계에 대해 완전히 몰이해했고 마찬가지로 세계와 인간,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정신’이란 걸 작동시킬 줄 몰랐어. 그런데 그 시절의 너는 내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마치 다 알아버린 것처럼 흥분해서 떠들면 소크라테스처럼 굴곤 했지. 괴로운 듯 슬픈 듯 찡그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런데 혜윤아’로 시작하는 말을 하던 네 얼굴이 지금도 떠올라. 그 시절의 우리에게 뭐가 있었을까? ‘사이’가 있었어. 나는 ‘차이’라기 보다는 ‘사이’라고 말하고 싶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뭔가 말하고 나누고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취하고 그러면서 또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는 부지런한 화학 작용을 했던 그 공간이 바로 사이였던 거야. 그 사이에서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동쪽별이 지지 않고 매일 새벽 떠 있는 것도 보고, 이상야릇한 꿈도 꾸고 인생의 비밀과 진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지.
책에 대해 두 가지 기억나는 게 더 있는데 언젠가 너는 불쑥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말했어. 나는 그때까지 평생 단 한 명의 영화감독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 내 친구가 드디어 패가망신하는 길로 완전히 맘을 굳혔구나!’ 하는 슬픈 마음과 ‘그래도 나는 끝까지 지지해야지!’ 하는 굳센 각오를 하며 그 이유를 물었지. 그때 너는 군부대의 영화 감상실에서 히치콕 영화를 처음 본 이야기와 그때의 충격을 내게 들려주었어. 나중에 서점에서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두툼한 히치콕 책을 발견하곤 그 책을 사서 품에 안고 거의 뛰듯이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 나.(내친김에 트뤼포 전기도 한 권 더 샀고.) ‘내가 이 책을 다 읽으면 너의 세계를 좀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그 희망이 히치콕을 읽는 동안 한 번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어. 마치 머리 꼭대기에 노란 램프가 하나 더 달려 있는 것 같았지. 그리고 마지막은 지난핸가 하루키의 『일큐팔사』가 처음 나왔을 때, 그때 너는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지는 ‘큐’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었지. 모든 것을 다시 의심해 보아야 하는 ‘큐’의 세계에 너는 왜 그렇게 끌렸던 것일까? 너는 그때 달의 뒷모습, 달의 이면에 대해서도 이야길 했지. 나는 그게 너의 정신이라고 생각해. 너에게도 실패와 어려움이 있지만 내가 아는 너는 단 한 번도 회한에 이끌려본 적이 없어. 그 대신 너는 매번 불확실성 속으로 몸을 던지면서 그때마다 네 내면의 진정한 욕구를 들여다보려고 했어. 상처받으면서도 사랑하고 상처받으면서도 환멸에 젖지 않고 상처받으면서도 무릎을 펴 일어서고 상처받으면서도 자신을 스스로의 힘으로 구하려고 애쓰는 네게 불확실성은 이미 삶의 조건이었어. 그래서 나는 너를 만나면 한없이 이야기해주고 싶어. 어떤 이야기일까? 내 마음을 대신 표현해 준 루이스 캐럴의 시가 있어서 읽어줄게 들어봐.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바로 이 시로 시작해. 좀 길지만 조금 참고 계속 눈을 감고 상상하면서 들어봐!
경이 앞에 꿈꾸는 눈을 한 아이야!
시간이 흘러 나와 그대가
따로 떨어진 두 인생을 산다 해도
그대는 사랑스러운 미소로
사랑의 성물로 건네는 이 이야기를 반갑게 맞을 테지
그대의 햇살처럼 빛나는 얼굴을 보지 못했네
그대의 은빛 웃음소리도 듣지 못했네
앞으로 펼져질 그대의 젊은 삶속에서
나에 대한 생각은 찾아볼 수 없겠지……
그대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이제 충분하다네
이야기는 어느 여름날
햇빛이 반짝이던 날 시작되었지
우리가 노를 젓는 박자에 맞춰 수수한 종소리가
시간을 알려주었지……
종소리 메아리가 아직도 기억에 살아 숨 쉰다네
세월이 샘내듯 잊으라 말하겠지만
어서 와 귀를 기울여 주오
쓰라린 세파로 물든 무서운 목소리가
반갑지 않은 잠자리로 불러들이기 전에!
어느 우울한 소녀여!
우리는 나이 많은 아이들일 뿐이라네
잠자리에 들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알고 초조해하는
밖은 서리와 눈앞을 가로막는 눈이 몰아치고
침울한 광기의 폭풍이 불지만
안은 난로 불빛이 발갛게 빛나는
기쁨으로 가득 찬 유년의 보금자리라네
마법 같은 말들이 그대를 단단히 사로잡으니
그대 날뛰는 바람 소리 듣지 못하리
비록 한숨의 그림자가
이야기 속에 내내 떨릴지라도
행복한 여름날도 갔고
여름날의 영광도 사라졌기에
한숨의 그림자가 고통의 숨결로
우리 이야기의 즐거움을 해하진 않으리라
내 마음을 알겠니? 마음에 어두움과 슬픔과 상실이 있지만, 삶은 불확실하게 이어져 있지만 그래도 또 요정의 장난질과 온갖 모험 이야기에 귀를 열어놓는 난로 앞의 아이처럼 우리 인생의 많은 것들에 대해 궁금해하며 계속계속 이야기하자. 그리고 서로에게 이야기하듯 모두에게 이야기하자.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우정을 담아서.
이제 고전 읽기에 관한 태도 두 가지만 말하고 이만 줄일게. 너 혹시 『무지한 스승』이란 책 혹시 아니? (모를 거라고 생각해.) 거기에 이런 말이 나와.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참 고마운 말이지? 그런데 그다음엔 이런 문장이 나와 ‘구하라. 그런데 못 찾을 수도 있다.’ ‘구하라, 그러면 반드시 찾는다! 확실하다. 손가락 걸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면 누구라도 당장 분연히 떨쳐 일어날 텐데, 구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찾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뭐가 남는단 말이지? 인생 전체를 걸고 너무나 궁금해. 그다음 문장은 이렇게 요약해 볼 수가 있어.
‘구하라 그러나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연결될 수는 있다.’
나는 이것이 책을 읽는 이유라고도 생각해. 더도 덜도 아닌 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보편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 서로 포개지고 겹쳐지면서, 설명할 수 없지만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이 서로의 삶의 형태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음을 느끼는 것. 밤하늘의 영원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 마치 동쪽별을 보며 소박한 마음으로 길을 걷듯이 진정성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
그리고 나는 사르트르가 말한 고매성의 협약을 기억해. 고매성의 협약은 상대방에게 최고의 신뢰를 보내고 최고의 기대를 하는 거야.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만큼 상대방에게도 요구해. 독자와 작가들 사이의 협약이 바로 고매성의 협약이야. 독자는 그 작품 속에서 최고의 어떤 것을 찾아내려 하고 작가도 독자에게 최고로 잘 읽을 것을 기대하고 요구해. 그런 식으로 서로의 최고도가 점점 높아지는 거야. 그런데 요구 수준이 점점 높아지면 어떤 좋은 일이 생기는지 아니? 자기애를 버리게 되고 그리고 가슴 저 밑바닥에서 깊고도 깊은 어떤 갈망이 솟구쳐 올라와. 더 알고 싶다는 갈망, 알아낸 대로 행하고 살고 싶다는 욕망. 그건 다름 아닌 ‘자유’의 냄새를 풍겨. 깊고 푸른색이야. 내가 한 방울의 물에 불과할지라도 대양이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그 냄새를 전해 주는 것 같아. 희망에 색깔이 있다면 출렁이는 푸른색일거란 생각이 들어. 동쪽별! 우리도 고전과 고매성의 협약을 맺자.
다음 주에 만나! 네가 촬영이 끝나는 12월까지는 계속 나만 편지를 보내야 하지만 참을 수 있어. 참을 수 없는 건 존재의 없음뿐이야!
(동쪽별과 커피진주는 각각의 이메일 주소임. 동쪽별은 민규동 감독의 이름 한자에서 따온 것)
-출처 : http://story.aladin.co.kr/penguin
'자 > 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도 맛집, 귀차니즘에 빠진 서울 촌놈들을 위한 토박이들의 가이드 (0) | 2011.06.17 |
---|---|
제시카 고메즈. 한 단계 우월한 기럭지 (0) | 2011.06.16 |
전지현 최근 모습 (0) | 2011.06.06 |
정윤희 트로이카 시대 (0) | 2011.06.06 |
제이래빗 J Rabbit (0) | 2011.06.04 |
전투경찰기동대 이야기 (0) | 2011.05.25 |
정조의 여자 (0) | 2011.05.21 |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강연 영상및 번역 (0) | 2011.05.20 |
전설의 고향, 내 다리 내놔라 (0) | 2011.05.20 |
전태일 (0) | 2007.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