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아홉시 뉴스를 보다가 굵은 꼭지 상당 부분을 서태지-이지아 관련 보도로 채우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가십은 잘 팔리는 뉴스거리다. 그러나 뉴스가 ‘뉴스’이기 위해선 얼마나 흥행할 것이냐, 가 아니라 얼마나 중요한 것이냐를 먼저 셈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는 필터가 해당 매체의 색깔과 능력을 결정한다. 그 필터로서 데스크가 존재하는 것이다. 가십에 휩쓸린 대한민국의 언론은 데스크 대신 실시간 검색 순위로 아이템의 경중을 판단하고 나섰고, 매체이기를 스스로 포기했다.
스타의 가십이 이토록 공공연하게 보도되고 소비되는 데는 스타가 곧 공인이라는 공식이 전제된다. 물론 검증되지 않은 마법의 공식이다. 이를 검증하려면 우선 스타라는 단어가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것인지부터 공적 동의를 얻어야 한다. 스타란 셀레브리티인가. 스타란 연예인인가. TV에 나오는 사람인가. 굳이 가장 공감할만한 범위를 정하자면 결국 ‘유명인’이겠지만, 이건 어차피 공적인 동의를 얻을 수 없는 이야기다. ‘스타’는 모두에게 다양한 각자의 의미로 기능할만큼 자의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 술집에선 나도 스타다.
스타의 범위를 유명한 사람으로 흐릿하게 규정해볼 때, 스타가 곧 공인이라는 공식의 정체는 쉽게 드러난다. 공인은 다수의 합의를 거쳐 선출돼, 공공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평균 수준 이상의 사회적 책임과 투명성을 요구받을 수 밖에 없다. 이를 어길 시에는 가중 처벌을 받아야 하고, 우리는 그것을 정의라고 부른다.
스타는 공인이 아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종사하는 자연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스타를 공인이라 생각할까. 말의 쓰임이 그렇다고 말의 실체 또한 그런 건 아니다. 스타가 공인이라는 말의 쓰임은 대중과 스타 사이의 공생관계로 인한 착시현상으로부터 발생한다. ‘우리’가 사랑해주기 때문에 밥을 벌어먹을 수 있는 ‘당신’ 사이에 발생하는 공생관계 말이다. 스타를 공인이라 부르며 사생활을 헤집는 대담함과, 그것을 감수하며 눈물을 떨구거나 거짓말을 하는 스타의 처연함 사이에는 일종의 부채의식과 상환에의 의지가 양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스타에 대한 사이버 테러를 일종의 권리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현상도 이렇게 보면 이해할만한 사고의 흐름이다. 사채꾼도 돈 받으러 갈 때는 정의롭다.
그렇다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스타에 대한 비판은 부당한 것인가. 모든 자연인은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진다. 알려져 있는 스타에게 더 많은 책임이 강요되는 상황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공인의 이름으로 실제 더 많은 물리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미는 될 수 없다. 사람들은 공인으로서의 스타를 질타할 때 ‘마녀사냥’이라는 지적을 듣는 걸 매우 싫어한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것 처럼 공인이 아닌 사람에게 공인의 이름으로 더 많은 물리적 책임을 물으려 한다면 그건 ‘본보기’가 되길 주문한다는 점에서 마녀사냥이 맞다. 마녀사냥이라는 말이 듣기 싫으면 마녀사냥 안 하면 된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다. 스타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스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여기 몇가지 정석이 있다. 먼저, 은둔하는 것이다. 이는 신비주의 전략을 택할 때 매우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친 신비주의 전략은 사람 자체를 망각의 늪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음으로 유의해야 한다.
두번째는 거짓말 하는 것이다. 사귀는 거 안 사귄다고 하고, 결혼한 거 결혼 안 했으니 누가 소개좀 시켜달라 하고, 군대 안 갈 거면서 군대 갈 거라고 말하고, 도박한 거 도박 안 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전략인데 적발될 경우 ‘거짓말’에 대한 괘씸죄까지 더해져 순식간에 장작 위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만에 하나 법을 어긴 경우라면 영원히 고국땅을 밟지 못할 수도 있다.
세번째는 나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것이다. 나는 원래 속물이라 트렁크에 여자 교복 넣고 다닌다, 나는 원래 정치적이라 정치적 발언을 하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나는 원래 독설가니까 내 말을 들을 때는 절반은 농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다 식이다. 그러나 대중은 자신과 닮지 않은 누군가를 심정적으로 꺼리기 때문에, 그냥 두면 무관심할 사람들에게조차 매우 강력한 반감을 살 수 있다.
마지막은 호통을 치는 것이다. 이쪽에서 먼저 기자들을 불러 아예 판을 키운다. 거기서 네가 봤냐, 네가 봤냐고, 하며 단상 위에 올라간다. 그리고 바지를 깐다. 보여주면 믿겠씹니꺼! 그렇게 인증을 자처한다. 잔기술을 구사하는 상대에게 묵묵히 얻어 맞다가 카운터 한 방으로 타이틀을 얻어내는 사우스포 복서의 박력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아 우리가 좀 심했구나, 싶어 금방 수그러든다. 물론 나훈아 급이 아니라면 바지를 끝까지 내릴 때까지 아무도 말리지 않을 수 있으니 타이밍에 신경을 써야 한다.
스타의 생존법은 어떤 의미에서 그 스타가 속한 사회의 수준을 드러낸다. 침묵과 거짓말과 호통은 우리와 ‘우리’로 어울려 살아가기 위한 그들의 선택지다. 모두들 어디까지 갈까. 허지웅 (뮤인)